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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등상급론 연구

하나님아들 2023. 9. 27. 18:19

차등상급론 연구

 

정홍열(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학연구소 조직신학)

 

1.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상급론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 서로 상충하는 두 개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는 상급론을 주장하는 것이 종교 개혁적 신학 전통에 위배되는 잘못된 주장이라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은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되 각자의 행위에 따라 차등적으로 상급을 받게 된다는 주장이다. 소위 차등 상급론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런 차등 상급론의 주장은 종교 개혁적 신학 전통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상반된 주장의 이면에는 단지 상급론만이 아니라 구원론 및 종말론의 중심주제들이 함께 얽혀서 서로 다른 신학적 판단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현재 상급론 논쟁에는 저마다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이 서로 달라 이 논의를 해결하는데 더 복잡한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상급론을 부정하는 대부분의 입장은 구원이 곧 상급이며, 은혜로 받는 구원 이외의 상급은 공로 사상의 결과로 간주하려 한다. 여기에서는 상급을 구원에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상으로 이해하여 상급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상이며 구원 자체를 바로 심판의 결과로 본다. 넓게 보아서 이런 입장에 속하는 학자들로는 칼빈을 위시하여 루터교 신학을 계승하는 독일 현대신학자들로 불트만, 보른캄 등과 현대 미국의 대표적인 신약학자인 조지 래드 그리고 같은 풀러 신학대학교의 김세윤 박사, 국내 학자로는 정훈택 박사 등이 이런 입장을 지지한다.

 

이와 달리 구원이라는 보상 혹은 상급 이외에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차등 상급론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입장이 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받되 이와 별도로 행위에 따른 심판의 결과로 인해 구원에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상급을 인정하는 견해이다. 여기에서 추가적 상급을 의미하는 차등 상급은 단지 상급의 구분이나 차이가 아니라 등급의 차이, 상대적 차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입장에는 종교 개혁적 신학 전통을 대변하는 루터교와 개혁교회의 신학자 중 다수도 포함되어서 우선 루터 자신을 비롯하여 필립 멜랑히톤, 요한 게르하르트 그리고 개혁교회에서는 하인리히 헤페와 헤르만 바빙크, 안토니 후크마 등이 있고 또 복음주의 신학계에 널리 알려진 마틴 로이드 존스 및 국내 학자로는 전 총신대 교수 권성수 박사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미리 언급하지만 차등 상급론을 지지한다고 해서 여기에 속하는 모든 신학자가 현재 국내 목회현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과 같은 조건적 공로 사상, 즉 이 땅에서 충성스럽게 헌신해야만 천국에서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된다고 강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몇몇 경우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차등 상급론이 그러한 조건적 공로 사상으로 오용되고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논문은 한국교회 내에서 강조되고 있는 상급론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 주제를 다시금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신학계에는 차등 상급론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많고 반대로 이를 부정하는 학자들 역시 만만치 않게 다수를 점하고 있기에 과연 어떤 입장이 주도적 견해인지 밝혀내는 일도 쉽지 않다. 물론, 교리적 판단이 수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하는 일은 아니기에 별 의미 없는 일로 보이나 이 논의는 교리사를 통해 보더라도 양측의 주장이 늘 팽팽히 맞서왔던 논쟁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가 본 논문에서 이 주제를 다시 다루려 하는 이유는 한국교회의 목회적 상황 속에서 차등 상급론이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 헌신의 동기유발에 가장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여기에는 개인의 공로 사상과 배타적 경쟁주의로 인해 천국을 또다시 번영신학의 천국 버전(version) 정도로 이해하려는 위험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급론에 대한 위험성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몇 차례 다루어져 왔다. 「목회와 신학」은 총신대 정훈택 교수의 “상급론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2004년 5월부터 2004년 11월까지 5회에 걸쳐서 특집 기획의 형식으로 다룬 바가 있고 2011년에는 한국 복음주의 신학회 신약학회가 훌러신학대학원의 김세윤 박사를 초청하여 상급론을 주제로 국제 심포지움을 개최한 바가 있다. 이때도 주제는 “행위 그리고 구원과 상급”으로 결국 자기중심적인 공로 주의에 기반한 상급론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논지의 글들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상급론, 더 자세히 말하면 차등 상급론은 구원론과 종말론 안에서 여전히 일정부분의 확고한 목소리를 가지고 대변되는 부분이 있고 이를 좀 더 성경 신학과 조직신학적 측면에서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필자는 다시 이 주제를 연구해 보고자 한다. 그렇게 볼 때 상급론 논쟁의 이면에는 몇 가지 신학적 주제들이 함께 동원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 주제들에 대한 심층적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상급론과 관련하여 면밀히 다시 살펴볼 주제들은 심판의 내용과 구원 및 믿음 그리고 상급의 동기 및 천국의 내용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의 문제였다. 따라서 본 논문은 상급론(차등 상급론)의 가능성을 연구하되 심판 및 구원, 믿음, 상급의 동기 그리고 천국의 내용의 관점으로 접근하여 이 주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이 논문에서 지금까지 팽팽하게 맞서 온 종교 개혁적 입장에서 차등 상급론을 부정하려는 입장과 반면에 어떤 형태로든 차등 상급론의 가능성을 인정하려는 견해 사이에 접촉점 및 대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시도한다.

 

2. 차등 상급론의 주장들

 

상급론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보아서 이를 부정하려는 입장과 인정하는 입장으로 나뉘고 다시 인정하는 입장 안에서도 조화적 절충형과 선행과 상급 사이를 인과적 관계로까지 강조하려는 입장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상급론을 부정하려는 입장은 종교 개혁적 신학 전통에 근거하여서 철저한 자기 부정을 강조하면서 결국 인간의 공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한 결과 상급론을 주장할 수 없다는 확고한 은혜 사상에 근거한 반면, 상급론을 인정하려는 입장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과 별도로 인간 선행의 결과는 결코 무시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게 되므로 이를 상급론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종교 개혁적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피력한다. 놀랍게도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루터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기 부정을 강조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게 될 인간의 수고를 인정함으로 차등 상급론을 제안하기까지 이르게 되며 그 외에도 종교개혁 신학 사상을 표방하는 많은 신학자 가운데서도 동일한 견해를 지지하고 나선 이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는 분명 종교개혁의 기본사상을 침해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므로 신중한 절충적 입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상급론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더 적극적으로 심지어 조건적 내지 인과적으로 상급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기에 이들의 입장을 인과적(기계적) 상급론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이제 본 장에서는 차등 상급론에 관련된 각각의 주장들을 더 상세하게 살펴보면서 평가하고자 한다.

 

2.1 차등 상급론을 부정하는 입장

 

공로 사상을 강조하던 로마 가톨릭교회와 구원론 논쟁을 벌였던 종교개혁 신학자들에게 자칫 공로 사상으로 비칠 수도 있는 상급론은 자연스레 경계의 대상이었다. 먼저 대표적으로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면, 칼빈은 적어도 『기독교강요』의 두 부분에서 공로와 상급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여기에서 칼빈의 주장의 근거는 인간의 철저한 자기(인간) 부정이고 동시에 전적인 하나님 인정이다. 선행의 가치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선한 행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하나님 자신의 의를 보시는 동시에 사람의 불명예와 치욕을 발견하실 것이다. 따라서 선행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행하는 사람에게 무익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일종의 보상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가치를 붙여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행위에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태도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순전히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행위의 공로인 것같이 보이려고 애쓴다. 이 얼마나 모독적인 야심이며 사악한 생각인가!” 이어서 칼빈은 보상에 관해서 고후 5:10과 롬 2:9-10을 인용하지만, 여기에서 보상이란 말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천국은 종이 받는 삯이 아니라 자녀들이 받는 기업이라고 주장한다. (엡 1:18) 그런데도 행위에 대한 보상을 고집한다면 믿음에 대한 보상은 영생이라고 하는(벧전 1:9) 베드로의 말을 그들에게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소개한 칼빈의 견해가 명시적으로 구원과 구분되는 상급을 말하기보다는 주로 구원 자체에 집중된 면이 있지만 그런데도 인간의 선행에 대한 공로의 주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게 될 영생 이외에는 하나님 앞에서 정당성이 없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일반적으로 개신교 신학자들은 종말론에서 상급론을 다루지 않거나, 혹시 다룰 경우에는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례로, 조지 래드는 『개혁주의 종말론 강의』(The Last Things)에서 상급을 궁금해하는 것은 무익한 사변이라 경계했고 이종성도 『종말론』에서 상급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경계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다른 한쪽에서는 상급에 관한 확고한 관심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유래는 매우 오랜 시간 거슬러 올라가서 개신교 신학의 출발지인 종교개혁 신학으로까지 소급된다.

 

2.2 차등 상급론에 대한 절충형적 입장

 

20세기 초 루터교 신학의 대표적 학자로 인정받는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는 그의 종말론 역작 『마지막 일들』(Die Letzten Dinge)에서 상급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은혜의 선물로서 영생이 동일하게 주어질 것이다. (롬 6:23) 이는 영생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받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질 놀라운 동등함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먼저 된 자나 나중 된 자나 모두 동일하게(마 19:30, 20:16) 믿음의 순종에 대해서 하나의 동일한 상급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등함 가운데 위치의 독특함과 단계별 차이가 생겨날 것이다. 신약성경은 각 사람에 대한 상급이 자신의 행한 바에 따라 특별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각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수고에 따른 각자의 특별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 희생적인 사랑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에 따라 상응하는 영광도 커진다. 교회의 교리 전통은 이런 사상을 일관되게 견지해왔다. 알트하우스가 언급한 교회의 교리 전통이란 곧 루터의 사상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미 루터는 “영생에 관해 말할 때 믿음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나 영광에 있어서는 동등하지 않다”라고 했다. 사실 상급에 관한 루터의 언급이 흔치 않아서 그의 전집 통틀어서 거의 유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언급이지만 어쨌든 루터의 상급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루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멜랑히톤의 상급에 대한 언급은 훨씬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멜랑히톤은 고전 3:8을 근거로 상급의 등급(gradus praemiorum)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요한 게르하르트(Johann Gerhard)도 영광과 축복이 본질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만, 추가적 은사의 관점에서는 차이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처럼 들리지만 차등적 상급의 가능성을 주장하려는 게르하르트의 의도를 분명히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개혁교회 신학 전통 안에도 역시 상급을 구원에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은혜로 인정하는 견해가 있다. 하인리히 헤페(Heinrich Heppe)는 『개혁파 정통 교의학』에서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최고선인 하나님은 자신을 모두 향유 하도록 인간에게 자신을 분여 한다. 그러므로 현세와 내세의 행복은 동일하지만, 완전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무엇이든지 불완전한 것은 현세에 속하고, 무엇이든지 완전한 것은 내세에 속한다. 따라서 영원에서 영화의 정도 차이(gradus gloriae)가 있다는 점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가 현세에서 산출한 의의 열매에 상응한다.” 이들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는 현대신학자들의 견해도 참고해보면,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비교적 적극적으로 상급에 대해 자신 있게 주장한다. “모든 성도가 동일한 축복과 동일한 영생과 동일한 하나님과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그 찬란함과 영광에서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그들의 신실함과 열심에 따라서 교회가 그들의 주와 왕으로부터 다른 면류관과 상급을 받는 것이다. (계 2-3장) 성도들의 교제는 이런 서열과 위치와 임무의 차이로 인해서 풍성해진다.” 벌콥(Louis Berkhof)은 바빙크 보다는 간략하게 언급하지만, 역시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의인의 상급은 영생, 즉 무궁한 삶뿐만 아니라 현세에 존재하는 아무런 불완전함이나 혼란스러움이 없는 가장 충만한 삶으로 묘사되고 있다. (마 25:46; 롬 2:7) 이러한 삶의 충만함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누리게 되는데, 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바로 영생의 핵심이다. (계 21:3) … 천국의 기쁨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을 통해 볼 때 분명하다. (단 12:3; 고후 9:6) 우리의 선한 행위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받는 은혜의 상급의 척도가 되기는 한다. 그런데도 각 개인의 즐거움은 완전하고 충만할 것이다.” 벌콥의 조직신학적 견해를 전체적으로 충실하게 따르는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의 경우도 그의 교리강좌 시리즈 3권인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람의 공적은 완전히 타 버릴지라도 자기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의 행위, 우리의 공력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엡 2:8) 우리는 주님과 그분의 완전한 사역을 신뢰함으로써 구속과 구원을 얻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력은 실제로 계수되어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지만, 모두 똑같이 되거나 같은 지위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1절)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영광 가운데 있을 것이며,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구원 이후 우리의 공력이 고려될 것이라는 이런 분명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칭의가 아니라 상급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최상의 행복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며,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교리강좌에서 발췌한 글이기에 차등 상급론을 주장하는 그의 신학적 입장이 비교적 상세히 소개되었다. 차등 상급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가 대부분 로이드 존스와 같은 입장이기에 이 인용은 차등 상급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절충형 차등 상급론의 지지자로서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를 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후크마는 상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원은 분명히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게 될 상급들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점에 관해 특별히 신약의 두 구절이 잘 표현하고 있다. 누가복음 19:12-19과 고린도전서 3:10-15”이다. 이어서 이 두 구절을 소개한 후 후크마는 이렇게 각각 평가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주어진 상급의 변수는 종들이 원래 받았던 므나와 이익으로 남긴 므나의 숫자에 맞게끔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중요한 교훈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충실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섯 고을, 열 고을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최소한 어느 정도의 중요성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상급이란 증가하는 기쁨이라는 측면보다는 증가하는 책임의 문제라는 것인 듯하다.” 이어서 고린도전서 3:10-15의 본문에 대한 평가에서 후크마는 “이 구절에서 어떤 사람은 상급을 얻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급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진다. 상급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터 위에 사람이 어떤 재료들로 집을 지어 나가느냐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과 상급은 비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차 신자들에게는 그러한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상급에 관한 말씀을 인용한 후, 후크마는 “그러한 상급들은 인간의 행위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63번을 인용하면서 “이 상급은 공로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미래의 상급 사이의 관계는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인용한 후크마의 사상을 요약하면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공로에 따라 상급이 차등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공로 사상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놓지 않으려는 의도가 돋보인다. 그러면서 인간의 행위와 상급 사이의 인과율적 관계보다는 유기적 관계로 설명함으로 상호관계를 인정하되 단순한 조건적 인과율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회피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어쩌면 후크마의 이러한 설명은 상급론을 주장하면서 당면하게 되는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공로 사상의 위험성을 극복하려는 절충적 시도로 보인다.

 

2.3 차등 상급론 강조형 지지자

 

끝으로 차등 상급론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권성수 박사의 견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권 박사는 상급론의 강조에 자신의 신학적 사명감을 느끼는 학자로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 자체가 차등 상급론이다. 권 박사는 의와 상급 사이의 상호 작용의 관계를 인정하되 그 관계를 인과율로까지 설명한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으로 따온 마 5:12에 대한 분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의 신실한 순종과 하나님의 상급 간의 상호성 원리도 역시 차등 상급을 지원한다. 마태복음 5:12에서 상호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차등 상급은 그 자연적인 귀결이다. 왜냐하면, 상호성 원리는 본래 각기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공의의 속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권 박사는 상급의 차등성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따라서 상급을 이해할 때 그리스도의 율법성취로 인한 의의 선물성을 제외한 상태에서 인간의 순종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보상으로만 이해한다든지, 인간 순종(제자도)의 요구성을 배제한 상태에서 상급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은혜 상급(Gnadenlohn)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균형 상실임을 다시금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편중 이해를 제거하고 상급의 선물성과 요구성을 전제한 입장에서 마태복음 5:12의 상급(미스도스)은 문맥상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 면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박해에 직면해서 신의 수행의 순종과 이에 상응하는 천국의 차등 상급(gradus gloriae)의 상호성 맥락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몇몇 경우에 권 박사는 차등 상급을 상급의 차이로 즉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성격의 차이를, 즉 단지 구분되는 상급의 차이를 차등 상급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마 10:40-42의 선교 훈화의 결어로 등장하는 주님의 말씀 중,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을 차등 상급으로 간주한다. 권 박사의 차등 상급론 주장은 매우 적극적이어서 일반적으로 차등 상급론을 반박하기 위해 가장 널리 인용되는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도 권 박사는 차등 상급적으로 해석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한편으로 예수께서 특별한 희생에 대해 특별한 상급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시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신실한 제자도에 걸맞는 차등 상급을 주저 없이 선언하셨다. 이 점은 차등 상급을 무시 내지 부인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별히 이 비유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의 공관복음적인 예증이라는 입장은 결코 설 수 없다.” 아마도 권 박사의 차등 상급론에 대한 강한 주장이 이 부분만큼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침에 일찍 온 일꾼이나 나중에 참여하게 된 일꾼에게 모두 동일한 품삯을 지급함으로 차등 상급론의 가장 반대자료로 인용되는 분문 속에서도 차등 상급의 근거를 찾으려는 권 박사의 주장은 실로 그가 얼마나 차등 상급론을 확고하게 지지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 이어지는 후반부의 주제별 평가에서 다시금 살펴볼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차등 상급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신학적 특징은 서로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경우에 따라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과 은혜 외의 상급을 결정하는 행위의 심판이 별도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 그 결과 구원 이외에 추가적으로 각 사람은 자신의 공로에 따라 그 행한 대로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받게 되고 그 상급의 크기는 그의 공로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에서 제기되는 각 주제에 대해 차등 상급론을 부정하는 학자들의 견해와 논쟁하면서 과연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정당한 상급(보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신학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한다.

 

3. 차등 상급론의 주제에 대한 신학적 평가

 

3.1 심판: 믿음에 따른 은혜의 심판인가 아니면 행위에 따른 공로의 심판인가?

 

차등 상급론을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받게 되는 인상은 구원론에서의 이신칭의의 심판과 종말론에서의 최후의 심판이 다른 것처럼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믿음에 따른 이신칭의의 심판 후 행위에 따른 최후의 심판이 있으며, 그 결과 이신칭의의 심판으로 구원받고 행위의 심판으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렇다면 당장 구원과 상급은 시간상 내용상 구분되고 상급은 구원 이후에 주어지는 추가적 보상으로 이해된다. 과연 우리는 죽음 이후 두 번의 심판을 경험하게 되는가? 아니면 한 번의 심판이 지닌 두 측면을 설명하는 것인가?

 

이러한 갈등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이신칭의의 심판을 가르쳐 준 바울이 또한 행위의 심판도 준엄하게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심판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으로 언급되는 장면에서 바울은 철저히 행위를 부정하면서 오직 은혜와 믿음을 강조한 반면, 심판을 언급하는 장면에서는 주로 행위를 언급하고 있다는 대조적인 특징이 발견된다. 이로 인해 많은 신학자가 이 갈등을 단순히 구원은 믿음과 은혜로 받는 반면, 심판(최후의 심판)은 행위로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고, 어느 정도 이신칭의 신앙을 견지하려 할 때, 최후의 심판은 공로에 따라 상급 심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경우 행위심판을 상급으로 해석해 나가기 위한 좋은 근거자료로 주로 고전 3:12-15와 고후 5:10의 두 본문이 제시된다. 그리하여 신학자들은 은혜로 인한 칭의의 심판과 행위에 따른 심판을 주제로 삼아 논쟁을 벌이게 된다. 2011년 복음주의 신약학회에서 개최한 국제 심포지움에서 주강사로 논문을 발표했던 김세윤 박사 역시 상급론을 다루는 논문에서 “은혜로 인한 칭의와 행위에 따른 심판”이라는 부분에서 이 주제를 필연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김 박사는 이 논문에서 “명백하게 바울에 있어서 구원이 믿는 자들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교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으로 얻는 구원으로 설명하는 그의 복음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모두 10개의 주제로 양자의 통합 가능성을 제시한 김 박사는 마지막 결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신성한 은혜와 인간 행위의 통합 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의롭게 됨과 인간 행위들에 따른 심판의 교리는 바울이 말한 다음의 구절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열심히 일을 했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늘 입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것입니다.’” (고전 15:10) 종교개혁의 중심주제에 따른 이해로부터 믿음과 행위를 은혜의 빛 안에서 통합한 김 박사의 시도는 상급론 논쟁을 다시금 종교 개혁적 전통으로 회귀시킨 매우 건강한 결론이라 판단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심판 장면은 결코 다수의 심판행위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심판이 지닌 여러 측면을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비록 심판이 단 한 번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심판을 언급할 때, 그 주체를 성부 하나님이 성자에게 맡기신 종말론적 사건(요 5:22)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 사건은 우리의 죽음 이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하나님의 유일한 완성행위로 소개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심판에 직면하여 결코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즉 자신의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은혜에 의지하여 그 공로를 믿음으로 심판의 자리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된다. 이것이 소위 대표적인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이며, 개신교는 이런 신앙을 변함없이 고백해 오고 있다. 그렇게 볼 때, 믿음에 따른 은혜의 심판이 심판에 대한 총론이라면 행위에 따른 심판은 심판의 각론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는 구원의 유효 원인(causa efficiens)이라면 믿음은 도구 원인(causa instrumentalis)이 되고 행위는 내용 원인(causa materialis)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각 요소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통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단지 각각을 개별적 주체로 보아 심판을 언급하는 일은 심판론의 혼돈을 초래할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되는 구원은 그 은혜의 크기와 양과 질이 너무나 충만하여서 모자람이 없는 것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에 해당하므로 구원에 더하여 추가적 상급을 말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구원의 크기를 상대화시킬 위험성이 있다.

 

3.2 상급 동기의 순수성문제

 

차등 상급론을 반대하는 입장은 상을 바라고 헌신하는 것이 인간의 자기중심적 행위의 연장이라고 비판하는 반면, 차등 상급론을 지지하는 입장은 하나님의 인정을 기대하므로 이는 자기중심적 동기와 무관하다고 정당성을 주장한다. 심지어는 이신칭의 신앙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쟁은 다음의 권성수 박사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권 박사는 마 6:1 이하의 천국 비유를 통해 차등 상급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불트만과 본캄(보른캄)이 정당한 상급 동기를 부정한다고 비판하면서 이들이 그 결과 부당하게 차등 상급론을 거부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권 박사의 비판 가운데 인용된 두 학자의 견해들을 살펴보면 불트만과 보른캄은 권 박사도 부정하려는 부당한 상급 동기를 부인하고 오히려 정당한 상급 동기를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불트만은 “하나님은 신실한 복종을 진정으로 갚아주신다”라고 하면서 상급을 인정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 배후에 있는 약속의 문제라고 봄으로써 상급 동기를 부인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은 동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주의를 그들의 행위의 결과로 환기시키는 것이라는 점이다. 불트만은 이렇게 상급을 인정하나 상급 동기는 부인한다. 그러면서 불트만은 하나님께서 역설적으로 상급을 바라지 않고 복종하는 바로 그들에게 상급을 약속하신다고 설파한다. 여기서 불트만이 부정한 것은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려는 자기중심적 상급 동기였고, 그가 인정한 것은 인간의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고 그것을 더 엄격하게 표현코자 그는 약속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물론, 여기서 불트만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적용했던 실존주의적 입장은 사실 상급론의 평가에서 중심주제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불트만은 이 부분에서 상급론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확실하게 표명하고 있기에 그의 입장을 판단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보른캄도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하는 것을 행위의 동기로 삼는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금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 된다고 설명한다. 예수님은 상급을 정당한 동기로 삼지 말라는 의미에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고 하셨다는 것이다. 더욱이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에 근거해서 본캄(보른캄)은 진정한 복종에 있어서 상급 동기가 설 자리가 없다고 한다. 권 박사의 비판은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은 거부하는 것이 당연한 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칭찬은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인데, 보른캄은 사람들의 칭찬과 하나님의 칭찬을 구분하지 못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칭찬마저도 부정해 버림으로 상급 자체를 부정해 버렸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마 25:31-46에 등장하는 의인들이나 눅 17:7-10의 무익한 종의 비유는 모두 주인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이기에 과연 사람들 앞에서의 부인만이 부정되고 하나님 앞에서의 기대는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근본적으로 상급 동기에 대한 비판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기 공로의 주장으로 해석되어 상급 동기가 자기 의로 변질될 가능성을 조심하자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상급 동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상급을 은혜로 받게 되는 뜻밖의 선물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불트만과 보른캄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두 학자의 입장에 대해 권 박사는 불트만과 보른캄이 부당하게 정당한 상급 동기를 부정하면서 그 결과 차등 상급론을 부정하게 되었다고 비판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부정한 것은 부당한 상급 동기였고 인정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정당한 상급이었으며, 그 결과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기 위해 상급을 요구하는 차등 상급론을 반대한 것이다. 마 6:1 이하의 예수님의 말씀에 차등 상급론이 들어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보물을 쌓는 것과 하늘에 쌓는 것의 차등을 말씀하신 것이지 천국에 보물을 쌓은 결과 천국에서 누리게 될 차등은 아니다. 그렇다면 마치 천국에 보물을 쌓는 것이 경쟁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천국에 재산을 투자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차등 상급론에 대한 강한 비판은 정훈택 교수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정 교수는 “상의 신학/상급론은 인간의 노력을 구원의 공로로는 제시하지 않지만, 천국에서의 더 큰 영광, 더 큰 상급과 연결하여 인간의 삶을 자극하려 하는 것으로 천주교 신학의 공로 주의와 개신교 신학의 은혜 주의를 절묘하게 절충한 것이다. 인간의 구원과 그 영광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는 개신교 신학처럼 “상의 신학/상급론”은 구원에 있어서만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인정한다. 이 점에서는 분명 개신교 신학의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상이나 상의 차등과 결합함으로써 인간의 노력을 - 개신교가 전적으로 은혜의 영역으로 돌리던 것과는 달리 - 신적 무엇의 조건으로 내세움에 있어서는 천주교 신학에 동조하고 있다.” 이어서 “상급 동기가 없다면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 속에 거룩한 삶의 동기를 유발하려는 공로 주의가 이미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비판한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의 충성스러운 헌신을 강조하지 않는 신학자는 없다. 이는 성도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며 참된 신앙의 당연한 열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었고, 오히려 구원에 대한 감사로 출발한 행위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 선행에 관하여”에서는 선행의 의의와 그 가치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친다.

 

2.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행하는 이 선행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요, 증거이다. 신자는 선행을 통해서 자신의 감사를 표하고, 자신의 확신을 분명하게 하고 자기의 형제들에게 감화를 주고 복음에 대한 고백을 장식하고 대적들의 입을 봉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신자는 하나님의 지으신 바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행을 위하여 창조된 자이므로 거룩함에 이르는 자신의 열매로 인하여 마침내 영생에 얻기에 이른다.

 

3. 선을 행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에서 나온다. (중략) 그러나 성령의 특별하신 역사가 없으면 아무런 의무도 행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여 선행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

 

5. 우리는 최상의 선행으로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사죄나 영생을 위한 공로를 세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과 장차 임할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어서, 선행으로는 우리가 전에 범한 죄들에 대한 빚을 대신하고 만족케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의무를 실천한 것뿐이요, 우리는 무익한 종일 따름이다. 우리가 행한 선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우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들은 지엄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어 낼 수 없는 연약함과 불완전함으로 더렵혀지고, 뒤섞여져 있기 때문이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납되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선행도 역시 열납되어진다. 이는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선행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전적으로 비난이나 책망을 받을 만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그들을 보시고, 비록 많은 약점과 불완전함이 뒤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신실한 것들을 열납하여 보상해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개혁교회의 신학의 길잡이로 인정받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르면,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는 철저한 인간의 자기 부정과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행을 열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게 되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성도의 마땅한 자세는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헌신의 대가를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상급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등장한다.

 

3.3 천국의 실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죽음 이후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천국에서의 삶을 소개해주는 성경의 장면들은 이 세상의 삶과 유비적 관계로 등장한다. 그런데 천국을 이 세상과 비교해서 묘사할 때 결국 세 가지의 방법론이 자연스레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우선은 상승의 방법(via eminentiae) 이다. 현재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더 극대화시켜서 천국을 묘사한다. 이 세상에서보다 더 많은 부와 행복, 더 높은 지위와 명예, 더 강한 힘과 권력, 더 긴 생명으로서의 영생 등으로 천국의 삶을 묘사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천국에서의 더 많은 땅과 부를 차지하는 것으로, 천국의 삶 자체를 잔치로 이해하고 면류관을 받는 것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열두 사도와 함께 통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끝없는 영원 시간을 누리는 삶으로 이해한다. 그 결과 천국에서 받아 누리게 되는 우리의 상급을 지상에서 경험했던 것을 더 확대하여 설명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한 것에 비례하여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상이 차등적으로 크며(마 5:12), 더 많은 달란트를 받고(마 25:21, 22, 28), 더 많은 고을을 다스리게 되며(눅 19:17),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며(계 20:4), 심지어 천국에서 더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을 구분하기까지 한다. (마 5:19, 18:4) 그리고 이는 차등 상급론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된다. 차등 상급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는 대부분 천국을 현세의 연장으로 이해한 상승의 방법으로 묘사한 본문들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차등 상급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에게는 마 5장의 큰 자, 마 25장의 달란트 비유, 고전 3:12-15의 공적의 비유 등은 천국의 상급을 설명케 해주는 중요한 본문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은 천국의 완전성과 충만함을 설명하기 위해 이 세상과의 비교를 하는 과정 중 사용되는 방법으로 이러한 천국의 묘사는 단지 그 자체로만이 아니라 그다음에 이어지는 이 세상과의 반대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부정적 방법과 나아가서 이 세상이 모든 부족함의 완성형으로 이해되는 충만함과 온전함의 관점에서 해석될 때, 비로소 천국의 실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승의 방법을 통해 묘사되는 천국은 어쩌면 이 세상과의 연장선상에서 묘사되는 천국 상으로 인해 천국 본연의 실재를 상실하고 말게 될 염려가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반한 토마스의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법이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존재론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던 종교개혁자들의 비판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천국을 소개하는 또 다른 장면은 천국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과 반대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내용들이 있다. 소위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을 통한 천국의 묘사다. 천국은 이 세상의 불완전함, 상대적인 성격, 제한적인 모습, 어두운 성격 등이 모두 사라지고 부정되는 곳으로 좀이나 동록이나 도둑이 없으며(마 6:20), 눈물과 사망과 애통해하는 것과 곡하는 슬픔이 사라지는 곳으로(계 21:4), 밤도 사라지고(계 21:25, 22:5) 그리하여 더 이상 옛 하늘과 옛 땅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으로 천국이 묘사된다. 이런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성도의 복은 이 세상의 복과 달리, 산상수훈에서 약속된 바와 같은 죽음을 초월하는 복이며(마 5:3-10),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며(요 14:27)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놀라운 영광이다. (롬 8:18) 차등 상급론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부정성을 통해 묘사되는 천국의 상을 선호한다. 이 세상에서의 상대적인 비교와 계급으로 인한 지배와 피지배의 경험을 지닌 인간이 천국에 가서도 마찬가지로 계급의 지속과 상대적 비교의 차별성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러한 천국은 이 세상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현세의 연장선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차별성과 차등성이 현세에서와 달리 더 이상 차별성과 차등성으로 기능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이 역시 그러한 차이와 차등성의 존재에 근거한 차등 상급론이 더 이상 지지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천국을 소개해 줄 때, 마지막으로 상승과 부정의 방법을 넘어 완성과 충만함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변증법적 완성의 방법을 제시해 준다. 천국을 소개하는 성경의 마지막 설명은 완성형으로서의 천국이다. 결국 완성된 형태의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 상승과 부정의 길을 밟아왔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천국의 모습은 충만함과 온전함 그리고 모든 것의 전부가 되는 천국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마지막 모습을 하늘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때에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고(합 2:14), 아버지의 나라가 옴으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며(마 6:10),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되며(고전 15:28),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우리를 충만케 해 주시며(엡 3:19),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계 21:7) 여기서 천국은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만남(봄) 속에서 온전함과 완성 그리고 충만함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완전한 천국의 상을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확인하게 된다. “그때에는 어떤 악도 없으며, 어떤 선도 부족하지 않으며, 만유의 주로 만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시간이 있을 것이므로 그 행복이 얼마나 커다랄 것일까! 나태함으로 게을러지거나 결핍으로 피곤한 일이 없을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다른 일에 종사할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거룩한 노래를 읽거나 들을 때에 생각하게 된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84:4) 썩지 않을 몸의 모든 지체와 기관은 지금은 여러 가지 필요한 기능을 배당받았지만, 그때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내세에는 결핍이 없고, 있는 것은 확실하고 안전하고 영속하는 행복뿐이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누리게 될 상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고(마 5:8, 고전 13:12, 계 22:4),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며(살전 4:17),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영화롭게 될 것이며(요일 3:2),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계 21:7) 나아가서 천국에서 성도가 얻게 될 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이 이외에 어떤 다른 추가적인 상도 무의미하며 존재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받을 상급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덕성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 덕성에 대한 상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거나 더 선한 상이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상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언자를 통해서 내가 저희 하나님이 되며 저희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하신 말씀은 “내가 저희를 만족하게 하며, 사람들의 올바른 소원은 내가 모두 그대로 되어 주리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생명과 건강과 영양과 풍족한 영광과 평화와 명예와 모든 선한 것이 되어 주시리라는 뜻이 아닌가? 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라”(고전 15:28)라고 한 사도의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이다. 하나님은 우리 소원의 목표가 되실 것이니, 우리는 그를 끝없이 보며, 실증 없이 사랑하며, 피로함 없이 찬양할 것이다. 이 넘치는 애정과 이와 같은 활동은 영생 자체와 같이, 확실히 모든 사람에게 공동이다. 각 사람 공로의 차등에 따라 명예와 영광에 어떤 차등이 있을는지를 누가 설명은 고사하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차등이 있을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또 저 복된 도성에서는 지금 천사들이 천사장들을 시기하지 않는 것과 같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시기하는 일도 없다는 이 위대한 축복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자기가 받지 않은 것이 되고자 하지 않는 동시에 받은 자들과 지극히 다정하게 합심하며 단결하겠기 때문이다. 한 몸에서 손가락이 눈이 되고자 하지 않으면서 이 두 지체가 온몸의 구조 속에 포함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비교적 작은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 자족의 선물까지 받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일단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얻게 될 상 자체라고 주장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천국에서의 차등 상급을 인정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차등이 단지 구분과 다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의 차별이지, 등급의 차이로 인식되지는 않는다고 볼 때, 차등 상급론자들의 주장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오히려 칼빈이 언급했던 바와 같이 천국의 상급은 종이 얻게 될 삯으로서의 상급이 아니라 아들이 누리게 될 기업(엡 1:18)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에 더 근접한 설명이라고 판단된다. 여기서 기업이라는 표현은 공로에 대한 대가라기보다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은혜로 얻게 되는 상속을 말하며, 이경우에 많고 적음과 높고 낮음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전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천국에서의 상급을 말할 때, 천국의 실재를 완전함, 충만함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 자신으로 이해한다면 그 안에서 상급의 차등성을 고려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나아가서 천국에서의 상급을 이 세상의 연장선상과 같이 차등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이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상급의 기능이란 이 세상에서와 같이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즉, 시간과 공간과 재화와 기회와 그 사용 등의 제한성 속에서 그 한계를 상대적으로 극복해 줄 수 있는 혜택이 곧 상급이다. 상급이란 말 안에는 당연히 차등성이 전제되고, 상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과 상을 누리는 사람 사이에는 기회와 사용의 차별성이 전제된다. 기회와 사용 및 혜택의 차별성이 없는 상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일 환경의 제한성이 존재하지 않은 채, 그 안에서 모든 구성원이 완전하고 충만함을 누리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더 누리고 덜 누리는 기회의 사용과 혜택의 차별성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과연 그런 상황 속에서 상급의 차등성이 무슨 의의를 지닐 수 있는지 다시금 질문해 봐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충만한 환경 속에서는 그 환경의 기회와 사용과 혜택에는 차별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가운데 차등 상급론은 말 그대로 차등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3.4 차등 상급의 가능성?

 

그렇다면 천국에서의 차등 상급의 가능성은 전혀 불가능하단 말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주제에 따르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는 그 영광이나 영화에 있어서 어떤 차이도 가능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보려는 하나의 관점에서 우리는 차등 상급의 마지막 가능성을 보게 된다. 천국에서의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인 모습과 상태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단지 예견할 수 있는 사실은 천국에 있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도 의식과 인격의 활동이 유지될 것은 물론 그 이상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예상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만약 천국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아무런 의식이나 생각 없이 살게 된다면 그런 존재는 인격적인 존재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은 천국에서 찬양도 하고(계 14:3, 19장) 왕 노릇도 하고(계 22:5) 하나님께 경배도 하는 삶(계 11:16-17)을 살게 된다. 천국에서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의식이 기능한다는 점은 어떤 주제와 연결될까? 필자는 이점을 아우구스티누스의 향유개념으로 풀어나가려 한다. 이미 그런 시도가 앞서 천국에서의 차등 상급론의 가능성을 엿보았던 학자들 가운데 제기된 바가 있었다. 헤페는 차등 상급의 가능성을 논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가 있었다. “인간의 최고선인 하나님은 자신을 모두 향유 하도록 인간에게 자신을 분여 한다. 그러므로 현세와 내세의 행복은 동일하지만, 완전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무엇이든지 불완전한 것은 현세에 속하고, 무엇이든지 완전한 것은 내세에 속한다. 따라서 영원에서 영화의 정도 차이(gradus gloriae)가 있다는 점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가 현세에서 산출한 의의 열매에 상응한다.” 여기에서 헤페는 분명 하나님의 향유개념을 상급론에 적용하고 있다. 향유란 주어진 것을 각자가 어떻게 주관적으로 누리는가이지 객관적으로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주어진다는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완전하고 충만한 천국에서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이미 그 완전함 안에서 각자가 얼마나 주관적으로 각자의 믿음의 공력에 따라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누리는가? 라는 새로운 차원의 논의가 가능하게 등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신칭의의 동기를 전혀 훼손치 않으면서도 믿음 안에서 살아온 삶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천국에서의 영광을 향유 하는 정도에 따라 구별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비단 헤페 뿐만 아니라 바빙크도 천국에서의 축복받은 자들의 상태를 설명할 때 하나님을 봄(visio), 앎(comprehensio), 향유(fruitio)로 설명하면서 이들이 천국 축복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도 천국의 축복된 상태를 묘사함에 있어서 향유가 중요하게 취급됨을 확인할 수 있다.

 

차등 상급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이유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헌신의 동기와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가운데 무시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실성의 차이 그리고 하나님 심판의 확실성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분명한 주장이다. 반면에 차등 상급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충족성, 은혜로 주어지는 상급, 천국의 완전성과 충족성 등을 들어서 차등 상급론을 비판한다. 성경은 분명 상급론을 다룰 때 여러 가지 의도를 가지고 언급되었다. 그중 무엇보다도 교육적 의도가 가장 두드러지고, 그러면서도 또한 상급론이 우리의 공로에 비례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따른 결과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를 조화롭게 이해하는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다. 양측의 입장을 조화롭게 해석하려는 주장이 있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복음주의 신학의 대표적 학자인 스탠리 그렌즈(Stanley Grenz)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는 고전 3:10-15의 면류관 개념을 마 25:14-30의 상급 개념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으나 동시에 마 20:1-16의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통한 가르침도 유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신약성서에 나오는 평등사상에 의해서 상급이라는 개념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상급이라는 개념 속에서 몇 가지 신학적인 문제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상급에 대한 기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섬김의 삶에 불순한 동기를 도입할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 성경의 참된 영성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욕망에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게다가 상급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나라도 인간 사회들처럼 소수의 특권계층 - “상을 받을 자들”- 에 의해서 다스려질 것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이 세상 속에서 통용되고 있는 계층 체제를 영속화 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평가한다. 결국 상급론에는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에서 부정되었던 인간의 자기 긍정 및 공로 사상이 다시 등장하는 위험성을 보게 된다는 우려가 소개된다.

 

그런 점에서 그렌즈의 제안을 다시 한번 소개해 보면, “(상급이 주는 불순한 동기의)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원한 상급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수고가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그의 신실한 제자들에게 상 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업적 주의 및 승리주의의 상급론을 비판하면서 그러나 교육적인 의미(장려)에서의 상급론의 효용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에 필자도 공감한다. 이런 입장을 필자는 이렇게 표현하고자 한다. 우리는 마치 행위로 심판받는 것처럼 살고, 은혜로 상급을 받는 것처럼 믿자! 이렇게 살고 믿는다면 우리는 은혜로 받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 우리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게 되지 않을까!

 

차등 상급론을 반박하는 학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본문은 마 20:1-15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눅 17:7-10의 무익한 종의 고백이다. 이를 통해 상급은 결코 인간의 수고에 상응하는 동의어가 아니며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공로로 얻을 수도 없는 분에 넘치는 은혜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상급이란 결코 인간이 요구할 수 없는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뜻과 자비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근거는 오직 주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행위도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각자 구원받는 이유는 주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바울이 고전 3:15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은혜를 받는 사람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받게 될 구원의 은혜에는 부족함이나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김세윤 박사도 우리의 상급, 면류관이 구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한 우리는 상급으로 표현되는 구원 이후의 미묘한 차이점에 대해 고려해야 할 여지가 있다. 그것은 구원의 은혜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그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차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고전 3:15의 말씀처럼 겨우 구원을 받게 된 사람과 상대적으로 당당하게(?)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사람의 차이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더 부끄럽고 덜 부끄러움의 차이로 표현될 수도 있다. 후크마도 우리의 행위와 미래에 얻게 될 상급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어떤 사람이 음악을 공부하여 어떤 음악 기구(악기)를 잘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의 음악을 즐기는 능력 역시 크게 증가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한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커질수록 지금과 미래의 그리스도 왕국의 축복들을 향유 할 수 있는 우리의 용량 역시 커질 것이다.” 후크마도 그리스도 왕국의 축복 자체는 일정하게 완전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자의 향유의 크기로 상급의 차등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이를 최소한 인정하려는 부분이며 절충형 차등 상급론자들이 궁극적으로 의도하였던 은혜의 등등성 안에서의 상급의 차등성에 담겨 있던 주장이라고 판단된다. 만일 우리가 천국의 상급을 이와 같이 이해해 본다면, 구원 이외의 추가적으로 주어지게 되는 차등 상급의 부정과 함께 구원의 완전성을 고수하면서 그와 동시에 구원 이후의 차이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제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4. 나가는 말

 

상반된 주장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려는 본 논문의 특성상 논지를 분명히 하고자 필자는 다음과 같이 논문의 결론을 정리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4.1 구원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상이며 구원 자체는 곧 우리가 받은 심판의 결과로 주어지는 천국 영생의 선물을 의미한다.

 

4.2 이 구원의 영생의 선물은 지극히 완전하고 충만하여 부족함이나 차등이 있을 수 없다. 이점에 대해서는 차등 상급을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동의하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구원의 선물을 하나님 자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으며 하나님 자신 외에 추가적 상급을 논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4.3 성경은 이처럼 우리가 받게 될 구원의 완전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가 받게 될 이 구원이 곧 우리가 받게 될 상급과 다르지 않다.

 

4.4 그러나 성경은 또한 우리가 장차 받게 될 상급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가르친다. 이 상급은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한 바에 따라 인과적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상호관계는 인정할 수 있다. 상급 역시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면서 그러나 구원 이외에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은 아니다.

 

4.5 상급에서의 차등이 있다면 이는 구원에 더해지는 선물이기보다는 완전함 가운데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향유) 정도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더 감사하게 어떤 이는 더 부끄럽게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4.6 우리는 절충형으로 차등 상급을 주장하던 자들의 진술 안에 바로 이러한 사상, 즉 종교 개혁적 이신칭의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성도가 평생 헌신한 수고의 가치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바람이 바로 이러한 천국의 향유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자 한다.

 

4.7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자들이 의식을 지닌 인격체인 한, 완전하고 충만한 천국의 영광스러운 은혜 안에서 그 축복을 향유 하는 정도의 개별적 차이를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이점이 바로 차등 상급론의 주장이 종교 개혁적 신학 사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능한 부분이다.

 

4.8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서의 상급을 현세의 수고에 따른 조건적 심지어 기계적 인과율로 주장하려는 모든 시도는 종교 개혁적 기본사상에 위배되는 인간의 자기 공로를 주장하려는 잘못된 시도로 경계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라는 이 말 가운데서 칼빈은 이중 칭의를 보았고 인간의 자기 선행에 대한 자기 공로의 주장은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진리이고 종교개혁자들의 근본정신이다. 그러나 평생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은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향유 하는 정도에 있어서 더 친밀함을 지닐 수 있다는 최소한의 차등의 가능성을 기대해 본다. 이것이 영광의 충만함 안에서의 향유 하는 자들의 최소한의 주관적 차이의 가능성이라고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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