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신약학전공 박 세 식
Ⅰ 서론
1.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서구사회의 정신사는 크게 두 가지 본류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적인 것과 히브리적인 것이다. 이 두 사유방식은 서구의 역사를 이끌어 온 두 축이었고, 그것들은 서로 충돌과 조화를 이루면서 오늘날 서구사회의 사상과 문화를 이끌어왔다. 두 사유 방식의 복합물로서 서구사상을 대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이며 그리스도교의 근간은 성경이다. 성경에서 이 두 사유 방식은 서로의 이질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복합체로서 형성되었다. 또한, 성경이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될 때마다 그 나라 고유의 사유 방식이 첨가되는 것도 어쩔 수 없이 겪는 일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틀 안에서 태어났고 예수와 제자들은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 표상 세계에 살았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레니즘 세계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이 이동하였고, 신약성경 기자들은 이스라엘인으로서 헬레니즘의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사유를 헬레니즘의 표상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록 당시부터 성경은 히브리적 사유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철학에 근거한 서구적 사상과 신앙의 전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의 본래적 의미로부터 이탈되는 결과를 낳지는 않았는가? 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도 신약성경의 선포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애매함과 혼란을 겪는 이유가 이러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본 연구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사유 방식를 살펴보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히브리적 사유)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유효하고 적절한 방법이라는 말일 수 있다. 그것은 그것을 알기 위하여 그 안에 들어간다는 일종의 성육신적 방법이다. ‘히브리적’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불트만은 비평에서 “구약성경과 철학시대의 그리스인들의 사상 세계의 비교에서 바른 상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질문으로부터 연구는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하이데거의 통찰과 “언어가 그 민족의 독특한 사유의 표현이며 언어에는 응결된 철학이 들어 있다”라고 불트만이 지적하듯이 두 사유 방식을 함축하고 있는 언어를 비교하는 것은 바른 상을 얻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욥기와 고린도전서에 표현된 두 언어의 비교를 통하여 언어에 포함된 두 민족(이스라엘과 그리스)의 사상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2천 년 전 신약성경 기자들의 신앙고백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생생하게 전해 받기 위하여 언어와 사유 방식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적 사유로 돌아가 성경을 바라볼 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 말씀이 더욱 선명해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성서표현과 욥기에서의 히브리적 사유를 비교함으로 성서의 올바른 이해를 넓히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히브리적 사유가 무엇인가? 히브리적 사유는 그리스적 사유와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본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민족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욥기’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인의 사유 방식을 살펴본다.
세 번째로 그리스적 사유의 표현양식을 빌어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중의 하나인 고린도전서를 히브리적 사유에 비추어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욥기와 고린도전서의 성경 간의 대화’를 통하여 두 사유의 통합적 이해가 성경해석의 지평을 넓힐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서술어들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음을 살펴본다.
어떠한 사유를 가지고 성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사유형식에 따른 신학적 고찰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효 적절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 적절성은 성경을 읽을 때 읽는 자가 자기 의도대로 읽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기본에 충실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두 민족(이스라엘과 그리스)이 각기 그들의 전 정신사에 독자적으로 변치 않고 남아 있는 그것이 그 두 민족 사이에 끼어든 변화나 개조들보다 더 본질적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두민족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인류 역사의 큰 줄기를 각기 발전시켰으며 이 두 줄기는 면면히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약성경은 유대적 바탕 위에 헬레니즘적 요소가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서구의 신학과 교리는 그리스 유산을 함께 이용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필수적인 문화적 과제를 수행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히브리적인 뿌리로부터 이탈하게 되지는 않았는가? 라는 의문을 가능하게 한다.
“히브리적 사유가 그리스적 사유와 어떻게 궁극적으로 구별되는가?”라는 문제는 그리스적 사유 속에서 자라온 사람에게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그리스적 사유와는 이질적인 히브리적 사유의 특수성 때문이다.
히브리적 사유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첫째, 심리적 사유 유형이 논리적 사유 유형보다 훨씬 우리의 사유 구조와 거리가 멀다는 것과 둘째, 히브리적인 사유의 특수성이 논리 이전의 것으로 오해되어 원시적인 사유와 혼동된다는 것 때문이다. 히브리적 사유가 고도로 학문적인 그리스적 사유의 궤변적이고, 생명과 구상성이 없으며, 거의 화석화된 추상성들보다 훨씬 자연적인 삶에 가깝다는것과 그리스인의 정신생활이 이스라엘인의 정신생활보다 더욱 발전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숙고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인의 정신생활이 그리스인의 정신생활보다 훨씬 옛것이면서도 원시적이라고 불리워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감수성과 사유 방식에 의하면 극히 특유하게 느껴지는 히브리적 사유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특수성을 나타낸다.
계시로 대표되는 히브리적 사유와 이성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적 사유에 있어서 성서의 가르침과 철학적 이성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또한, 성서의 가르침을 이성이 전혀 알 수 없는 부분도 있고, 이성이 주장하는 것을 성서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 이성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모순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많은 부분 근접한다고 보아야 한다. 흔히 성서와 이성이 모순된다고 하는 현상들은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이성을 잘못 사용해서 생긴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특수성을 살펴보고 두 사유의 독특함과 유사함을 비교하는 것으로 두 사유의 복합체로서의 성경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Ⅱ. 본론
1) 히브리적 사유
(1) 동사의 동적(動的)성격
히브리적 사유는 동적인, 힘찬, 절열적인, 때로는 거의 폭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의 이러한 동적 사유 방식은 특히 히브리어의 동사들에서 나타난다. 물론, 히브리어의 동사들도 기본 의미는 움직임 혹은 작용을 표현한다. 그러나 ‘서 있다’ 또는 ‘앉아 있다’와 같은 정지(靜止)상태를 표현해야 할 때도, 그것은 움직임을 표시할 수 있는 동일한 하나의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우리의 사유 방식에 의하면 하나의 동일한 말이 상반(相反)적인 의미들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이 어떻게 논리적, 심리적으로 가능한가? 보만(Thorlief Boman)에 의하면 “말은 하나의 기본 의미가 있고, 이로부터 상이한 의미가 뉘앙스로 나타난다고 보면서 그렇게 볼 때 상반되는 두 의미가 유사한 개념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한다. 상반되는 두 의미가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① 히브리어의 정지동사(靜止動詞)의 동적(動的) 성격
히브리인의 동적 사유 방식은 동사들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정지동사까지도 움직임, 작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동사가 정지상태를 표현할 때, 그것은 움직임도 함께 표현하고 있다. 정지와 동작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동시에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쿰”이라는 단어는 ‘일어서다’, ‘서 있다’, ‘지탱하다’, ‘유지하다’라는 뜻으로 ‘일어선다’는 동작과 ‘서 있다’는 정지의 개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야솨브”는 ‘앉다’, ‘앉아 있다’, ‘거주하다’라는 의미
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쿰 = 일어서다 + 일어서서 서 있다)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 37:7).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야솨브) = 앉다 + 앉아 있다)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창 19:1)
“쿰”은 ‘일어서다’와 ‘일어서서 서 있다’와 일체를 이루며, “야솨브”는 ‘앉다’와 ‘앉아 있다’가 일체를 이루고 있다. 즉, 동작의 개념과 정지의 개념이 동시에 표현되고 있다. 이 예들은 동작(일어서다, 앉다)과 정지(서 있음, 앉아 있음)가 우리의 경우처럼 대립이 아니라 서로 유사하여 그것들이 합하여 일체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히브리적 사유에서는 정지(靜止)동사가 동작도 함께 표시한다. 이는 1) 동작의 결과로서 정지(동작의 완료), 2) 동작의 진행과정(다음 동작까지 이어지는 과정)의 의미이다. ‘서 있음’은 정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거나(동작의 진행 과정) 일어선 결과(동작의 결과)를 뜻한다.
‘서 있음’, ‘앉아 있음’ 등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동사들을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어떤 활동적인 것, 움직이는 것과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어떤 존재만이 실재이다. 동작만이 실재성을 갖고 있다. 정적 존재는 히브리적 사유에서는 정지로 넘어간 동작이다. 히브리어에는 정지개념만을 나타내는 정지동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고정된 존재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는 무(無)이다. 무(無)에 해당하는 것은 히브리적 사유에 의하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
② 히브리어 상태동사(狀態動詞)들의 동적성격
상태동사들이 해당 상태로 ‘됨’을 나타내는 것도 히브리어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이다(be)’, ‘....가 되다(become)’가 아니라 제3의 동적인 것, 즉 ‘작용함’이다. “자켄”은 ‘늙다’‘늙게 되다’는 의미이고, “타헤르”는 ‘깨끗하다’, ‘깨끗하게 되다’는 의미이다.
“나이 늙고(자켄: = 늙다 + 늙게 되다)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욥 42:17)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타헤르; = 깨끗하다 + 깨끗하게 되다)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욥 17:9)
이처럼 상태를 나타낼지라도 그 상태는 활동적이다. 정적동사들은 정적(靜的)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이 상태를 표시하기 때문에 정적이라고 불린다.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에 정적이라고 불리지만, 동적인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상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이러한 의미의 많은 정적동사가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의 정신은 동적인 것, 행동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히브리적 사유에 의하면 그들의 삶의 방식, 생활 방식이 동적이며 행동 지향적이다.
③ “하야” 동사와 존재의 역동성
히브리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하야”동사는 영어의 be 동사의 개념에 동작의 의미까지 포함하여 생성, 존재, 작용, 계속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 말씀에 “하야”동사가 들어가면, 그 말씀은 말씀의 내용대로 생성, 존재, 작용, 계속되며, 그 말씀이 말씀의 목적을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작용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하야)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4)
이는 하나님께서 한 번 빛이 있어라 하니 ‘빛이 생성되어 빛이 존재하고 그 빛이 작용하며 그 빛은 계속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 빛이 없어지라고 명하기 전까지는 그 빛은 계속 존재하고 작용하며 계속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네가 먹는 날에는 “죽음이 ‘하야’하리라”는 말은 “네가 먹는 날에는 죽음이 생성되고 죽음이 존재하고 죽음이 작용하고 죽음이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아담이 먹은 후에 인간에게는 죽음의 “하야”가 계속되고 있다. 죽음의 “하야”는 육체를 입은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였다. 그 이후부터 하나님에 의해 생명의 “하야”가 시작된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하야”가 계속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죽음의 “하야”가 끝났고 생명의 “하야”가 생성, 존재, 작용,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
“하야”에 들어 있는 생성, 존재, 작용, 계속의 통일성이 기이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사유의 방향이 가시(可視)적 사물에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히브리적 사유는 그 방향이 심리(心理)적으로 정해진다.
(2) 존재와 인격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존재는 당연히 불변하는 본질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인이 말하는 완전한 의미의 존재는 무엇보다도 인격 존재이다. 인격은 존재, 생성, 작용을 모두 포괄하는 내적 운동과 활동성에 있다. 인격은 살아있다. 인격은 의식(意識)의 행동성이다. 인격적 존재는 물적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인격적 객관적 사유에서 형성된 용어들로는 표현될 수 없다. 이스라엘인들은 야웨가 무엇보다도 먼저 “있다”(하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모든 동적 존재의 총체이며 그 원천이다. 출애굽기 3장 14절의 하나님의 이름에 나타나는 “하야”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임을 드러낸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야”에 대하여 개역성경과 헬라어성경 그리고 영어성경 모두 be 동사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명칭에는 야웨에 대한 정의(定義), 가령 그의 절대성이나 신성 등에 대한 지시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히브리적 사유에서의 그것의 의미는 ‘그가 어떠한 자(者)인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이스라엘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 존재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작용을 일으키는 존재의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여기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며 또 그럼으로써 그 백성의 행복과 구원을 촉진시킨다”라는 것으로서 인격적 존재인 야웨는 그에게 순종하는 백성에게 영원히 작용하는 창조자임을 드러낸다.
(3) 시간과 사건
이스라엘인들에게 시차(時差)는 거의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특별히 신적인 의식에서는 모든 시간 측정이 사라진다. 야웨는 언제나 스스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야웨의 동일성은 존재의 불변성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과 약속의 불변성이다. 불변하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인격의 신실성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삼상 15:29)
의식(意識)은 전생(全生)을 통일체처럼 포괄하며 공간처럼 나누어질 수 없다. 사건도 연관성있는 전체이다. 공간적 사유 방식에 따른다면 우리가 노래를 부를 때 처음은 이미 과거에 속하고 끝은 아직 미래에 속한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그 노래는 그것이 끝까지 불리어지고 논리상 과거에 속한 후에도 현재적인 것이고 아주 실제적인 살아있는 통일체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의미심장한 역사적 사건들은 지울 수 없는 사실들로 한 민족의 삶 속에 계속 남아 있다. 그것들은 민족의 생을 구성하는 확고한 성분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사건들의 질적인 차이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옛날의 결정적인 행위가 현재의 의미에서 많은 일상적인 행동과 같은 비중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지나간 사건들을 현재적인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과거는 현재 이 순간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과거는 잊고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현재 이 순간에 나에게 주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 매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 순간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고 나아가라!”는 것이다.
히브리어의 특징 중 하나는 완료와 미완료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는 분사형태로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완료는 사건은 이미 끝나 있지만 어느날 들려오는 순간에 현재 일어나는 것, 즉 내가 그 말씀을 읽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현재에 그 말씀의 내용대로 이루어진다. 미완료는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써 미래 일정 시점에서의 완료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이 미래의 사건들도 그것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는 분명한 의식 속에서도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경험할 수 있는 이 특수한 능력이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시간의 내용’은 그리스인들에게서 ‘공간의 내용’이 갖는 것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그 내용과 동일하다. 시간은 사건의 개념이다. 즉 시간은 사건들의 흐름이다. 구약성경의 연대기적인 시대들은 그것들의 내용에 따라 지칭되고 성격지어졌다. 낯은 빛의 때이고 밤은 어두움이다. (창 1:5) 그러므로 낮이 어두워진다면 그것은 무시무시한 일(의미)이다. 시간은 사건들의 의미이고 내용이다.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데 그날이 어두움이 되기를 기원한다. (욥 3:4-6)
(4) 형식과 내용
이스라엘인들에게 특유한 것 중의 하나는 그들이 형식이나 그에 상응하는 것을 나타내는 가령 개요, 윤곽, 형태 같은 말을 만들어내지 않을 만큼, 형식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현현(顯現)으로서의 형태에만, 더 정확히 말하면 ‘형태의 내용’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인간의 외모의 아름다움은 육체와 지체의 형식에 있지 않고, 그 외모를 여러 방식으로 드러내는 탁월한 성품들에 있다. 예를 들면, 우물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때,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물이 없는 추상적인 우물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물이라 하면 물(내용)이 있는 완전한 우물을 의미할 뿐이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했고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우리가 만들고
여기서 “쩨렘”(형상)과 “데무트”(닮은)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쩨렘”은 어떤 초상 혹은 어떤 입상이 원형과 완전히 동일한 것을 표시하는 반면, “데무트”는 다만 근사한 동일성, 즉 유사성을 표시한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인간이 실체적으로 하나님과 같다는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하나님에 비슷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적’ 모양을 갖고 있다는 것인가? 어쨌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숭고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 인간의 품위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적절한 표현들을 선택해야 했던 어떤 신학자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짐승들과 같은 피조물로서 창조자와는 다른 범주에 속하지만, 또한 인간은 특별한 하나님의 결의에 따라 창조되었기에 다른 피조물들과도 또 다른 범주에 속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도, 다른 피조물(짐승)도 아니다’라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창조자와 같다는 사실은 태초이래 풀 수 없는 인간의 신비이다.
몸의 지체들은 성품들에 관한 표현들이다. 전체로서의 모습은 전인격성과 그 본질의 집약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일종의 공표이고, 신성의 생생한 성육과 같은 것이며, 이 성품에서 위대한 행위들을 완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 자신의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가 사람들 앞에 어떻게 나타나고 인식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육체성은 사람들을 향한 계시의 양식으로만 언급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려고 하면 그것은 인간적인 현현 양식 중에서 일어나야 하며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아주 분명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그는 어떤 “의인론”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특수성을 제공하고, 그것으로써 그의 창조를 확증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히브리적 사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특징들을 갖고 있다. 이러한 히브리적 사유와 비교되는 그리스적 사유는 어떠한 사유체계를 갖고 있는지 아래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 그리스적 사유
그리스적 사유는 호머의 시를 그 시작으로 근원(아르케)을 추구하는 자연철학에서 출발한다. 자연에서 인간으로 눈을 돌린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를 거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스토아에 이르러 그리스 철학은 완성된다. 그리스 철학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이다. 본질적으로 수학과 자연과학에 근거하며 인과법칙과 자연법칙에 입증되고 확인되어야만 인정을 받는다.
히브리적 사유는 동적인, 힘찬, 절열적인, 때로는 거의 폭발적인 성격을 지닌 반면에 그리스적 사유는 정적인, 평온한, 중용적, 조화적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리스 철학은 이스라엘의 종교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일어난 헬레니즘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새로운 사유방식을 접하게 하였다. 이 새로운 사유 방식은 필로(Philo) 등 유대인 사상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특히, 플라톤 철학은 그 안에 들어있는 종교적 정신이 성경적인 것과 대단히 유사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초기 5세기 동안 플라톤 철학의 영향 하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플라톤 철학의 이러한 권위는 어거스틴에까지 이른다. 심지어 어거스틴은 “성경과 플라톤 철학이 비록 말은 서로 다르게 표현하지만 동일한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스적 사유의 이러한 영향은 성서를 해석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시사한다. 사유 방식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차이는 전혀 다른 성경해석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적 사유 방식을 연구하는 것은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어떠한 사유를 가지고 성서를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 고찰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
(1) 존재
플라톤은 각기 두 하부조직으로 분할되는 존재의 두 주요 단계를 알고 있었다. 그 첫 단계는 직접 주어져 있는 것으로 감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 가시(可視)적인 것들, 즉 인간, 동물, 식물들로서 사물들이다. 이 감각적인 사물들은 어떤 아주 미미한 실재성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림자 혹은 영상(影像)이다. 가시적인 사물들과 그의 영상들이 합쳐서 존재의 첫 주단계, 즉 생성의 영역을 형성한다. 이 영역의 특성은 생성과 소멸이다. 이 영역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나 변화무쌍하여 영원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정신적 예지(叡智)적 세계는 본질적으로 더 높은 실재성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변화, 생성, 소멸하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이것은 참 존재이며 본질의 영역이다. 존재의 이 최고단계는 두 하부조직을 갖고 있다. 그 하위층을 형성하는 것은 수학적인 실재성들, 특히 기하학적 도형들과 내적 법칙을 지닌 수(數)들이고, 최상의, 최고의 층을 형성하는 것은 이념(理念)들, 즉 참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가시적인 세계는 이 정신계의 부속물이다. 여기의 실재성을 부여하는 최상위원리는 선(善)의 이념, 곧 신(神)이다. 신 또는 선의 이념은 모든 참 존재자의 원천이다.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근원(아르케)임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는 정적이고 조화적이며, 보다 높은 존재는 변화가 없고 불멸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하는 것은 일정한 등급이 있다. 한 사물이 보다 근원적이고 정신적일수록 그것은 존재를 그만큼 더 소유하며, 품격도 그만큼 더 높아진다. 최고의 존재는 ‘진(眞) 자체’, ‘미(美) 자체’, ‘선(善) 자체’를 소유한다. 그러나 선은 아름답고 참되며 그렇기 때문에 진과 미를 그 자체 안에 내포하고 있고, 그러므로 선, 즉 하나님의 존재는 최고의 존재이다.
(2) 비존재(非存在)
비존재자는 존재자의 부정일 뿐만 아니라 실재성을 갖지 않거나 가질 수 없는 표상들을 포괄한다. 비존재자는 가상(假象), 망상(妄想), 기만(欺瞞), 오류(誤謬)의 영역이다. 비존재자라는 것은 그것이 실존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참 존재자의 실존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존재자와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비존재자는 존재자의 상반자(相反者)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즉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3) 말(로고스)
“로고스”는 “레고”에서 온 것이다. 어간의 기본 의미는 ‘모으다’로 ‘질서있게 모아 놓다’ 즉, ‘정돈하다’를 뜻한다. 로고스는 그리스적 이해에서 가장 높은 정신적 기능을 표현한다. 그리스인들에게는 그들의 ‘말이 있다’로 성격지어 진다. 로고스는 인간에게 세계 안에 있는 법칙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로고스는 우주의 생동력과 법칙이다. 이 로고스는 우주와 인간의 본질과 존재를 구성한다.
(4) 외관
그리스인들은 현실을 객관적인 주어져 있는 것으로 관찰한다. 이것은 감각기관들, 특히 시각(視覺)을 통해 수행한다. 그들은 그들이 보는 것을 이야기하고 서술한다. 그리스 철학의 원리들과 상징들은 시각적으로 강조되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말하는 원소(元素)들과 플라톤적 이념들이 그러한 것이었다. 철학자의 삶은 이론(理論)적인 삶이고, 관조(觀照)적인 삶이다.
스넬이 그리스인들을 “눈(眼)의 사람들”이라 불렀을 정도로 그들의 사유는 가시(可視)적인 존재에서 출발하는 눈(眼)의 사유이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시각(視覺)의 의미는 좀 더 깊다.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감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도 보아야 했다. 이것이 직관(直觀), 관조(觀照)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참된 것은 숨겨지지 않은 것[(알레데이아):진리(眞理) = a(否, 不) + lhqo(숨겨진)]이다. 즉, 공공연한 것, 명백한 것,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 진리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적 사유는 가시적인 눈(眼)의 사유이다. 반면에 히브리적 사유는 들음을 통한 이해의 사유이다. 이러한 기본적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두 사유 간의 차이를 아래에서 살펴보자.
3) 두 사유의 비교
두 민족이 각기 그들의 전 정신사에 독자적으로 변치 않고 남아 있는 것이 그 두 민족 사이에 끼어든 변화나 개조들보다 더 본질적이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고수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 자기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한다. (롬 1:20) 동일한 관계를 그리스적 방식으로는 신의 투명성(透明性)이란 개념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었고, 그를 통해 자기의 ‘본질을 계시’했다는 것은 그리스적 사유이며,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보내서 그를 ‘통해’ 자신의 ‘뜻을 실현’시켰다는 것은 히브리적 사유이다. 그리스도의 거리낌은 두 사유 방식이 서로 혼합되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투명성(透明性)을 하나님의 행위로 선포했다. 이 투명성이 그리스인들에게는 이질적이고 그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형식으로 서술되는 결과를 빚어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은 외적으로는 보잘것이 없었고, 그의 지상의 운명은 처절했다. 이 사람이 신의 투명성의 최고의 표현으로 지목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순수한 그리스 사람들은 그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전 1:17-18, 2:13)
구약성경에는 그리스적인 “아르케” ,즉 세계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 없다. 물론,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옛부터 영원히 모든 산 것과 모든 생명의 기원이다. 세계의 창조자로서 그렇다. 이것은 세계의 성립을 설명하려는 우주론적 명제가 아니라 세계가 그의 것이고, 그의 힘이 세계를 지탱하고, 그의 섭리가 인간을 보존하고, 인간은 그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을 자기의 주(主)로 고백하는 인간의 고백이다.
그리스적 사유를 움직인 형식과 재료의 관계 문제는 구약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세계와 자연 및 자연법칙의 개념은 없다. 세계는 인간이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원한 법칙의 자연 세계로 객체화되지 않았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은 그 사유가 파악한 세계법칙에서 신적인 잠재력을 봄으로써 신성을 세계 전체 안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유에서는 하나님은 세계의 피안에 있다. 하나님 피안 사상은 그리스적 사유에서는 불가능한 무(無)에서의 세계 창조로 표현된다.
히브리적 사유에서는 그리스적인 목적론의 입장에서의 목적에 대한 물음이 없다. 세계의 통일성, 즉 합리적이며 이해할 수 있는 통일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세계는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작품으로서의 경탄의 대상이다. 자연을 볼 때 하나님과 겨루려던 인간은 잠잠(겸손한 침묵)하게 된다. (욥 42:2-6)
구약성경의 신앙은 결국 포착될 수 없는, 사유에 의해 좌우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인간의 현존이 규정당함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옛날에 생명의 호흡을 주었던 것처럼 계속 그 일을 행하고 있다. (욥 33:4)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자기를 전부 내 맡기는 것을 뜻한다. 창조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자신의 피조성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는 그리스의 스토아에서와 같은 문제, 즉 ‘인간은 어떻게 자연 운행의 규칙적 과정에서 그의 독자성을 얻을 수 있는가?’가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세계는 인간에게 그의 체험의 장소로서 그리고 그의 일과 운명의 영역으로서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신은 육체적인 감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신은 사유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것이고, 신의 현존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일도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에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불가시성은 곧 그의 신성이며 접근 불가능성이며 지존성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유지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이 그에게 말을 걸어오실 때만 그에 대해 알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들음”이다. 이것은 단순히 청각적 인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들음”은 거리를 제거하면서 해후되는 앎이며 말하는 자의 요구에 대한 승인이다.
이스라엘인에게 있어서 죄는 인간이 그때 그때의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순종치 않는 것이다. 이 불순종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려는 의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의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또한, 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배에 대한 의혹이며, 언약의 확실성과 그의 요구의 타당성에 대한 의혹이며, 그의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의혹이다. 결국, 죄란 관계가 깨어진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고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깨어졌다. 이로써 세상은 모든 관계가 제대로 된 관계가 아니며 이러한 세상은 죽음의 세계와 다름없다.
그리스인들은 태양과 태양 빛을 자주 찬양한다. 그 이유는 태양은 아름다우며 그것의 화려한 광채는 사람들과 자연의 미(美)를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색깔도 청(靑)이다. 하늘이 푸르고 넓은 바다와 먼 산들이 푸르며, 지혜와 용기의 신 아테네의 눈도 푸르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태양을 빛과 열의 원천으로 본다. 가장 아름다운 색깔도 청이 아닌 빛나는 색들인 백(白)과 적(赤)이다. 관조와 행동의 차이이다. 이렇듯이 그리스인들에게는 객관적이며 폐쇄적이고 수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상을 지향한 결과 그들의 최고의 감성 기능은 시각(視覺)인데 반해,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청각(聽覺)이다. 청각과 발설되고 있는 말의 의미가 현저하게 부각된다. 결국, 하나님 인식은 결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뜻에 관한 것이며, 그의 뜻을 아는 것은 그를 승인하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의 표현 중에는 “라아”(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보다’라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는 경우 그리스인들과는 다른 표상에 결부시킨다. 가시적(可視)적인 사물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의 소유자 혹은 제작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표지가 된다. 이 표지를 발견한 사람은 그 사물을 똑바로 본 것이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었을 뿐 아니라 ‘보기도’했다(왕상 10:4)는 것은 옳은 표현이다. 그녀가 와서 자신의 눈으로 보기 전(前)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왕상 10:7) 그 깊이를 꿰뚫고 사물들의 내면성과 그것들의 참 내용 및 핵심을 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그 사실을 ‘이해’했다.
다른 사람에게 숨겨져 있는 것,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눅 11:23-24) 본다는 것에 대한 그리스적 사유는 명쾌하고 논리적인 인식이고, 히브리적 사유는 깊은 심리적인 이해이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몸과 영으로 되어 있다. 이원론적 의미에서 영육이 대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은 몸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이며 하나님의 입김으로도 소급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인 ‘나’는 영이라고도 몸이라고도 지칭될 수 있다. 몸과 마찬가지로 생명도 무상한 것이다. 생명은 자연현상이 아니다. 생명은 활기이며 또한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다. 영혼불멸 사상은 구약성경에 없다. 구약성서에서의 삶은 생물학적 삶이 아니라 오직 생명으로
서만 정신적 현상이 아니라 오직 생동적인 것으로서만 알고 있다.
구약성경은 역사이다. 이 역사서술은 연대기적 기록으로 만족하지 않고 연관성 있는, 즉 세대를 통해 지속되는 사건을 서술한다. 미래의 방향을 정하여 역사를 목표들을 향한 움직임으로써,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한 목표를 향한 움직임으로써 특징지어진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땅이 아니라 ‘민족’과 결부되어 있다. 민족은 각 개인의 공동으로 형성하는 공동체로 이해되지 않고, 각 개인을 지탱하는 역사의 창조물로 이해된다. 조상들은 단순히 과거의 인물만이 아니다. 말하자면 민족의 역사는 항상 나의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다. 축제의 제의(祭儀) 전설이 전하는 것은 민족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구속사를 현재화하는 것이며 구속사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이상에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를 살펴보았다. 이제 전형적인 히브리적 사유를 담고 있는 구약성서의 욥기와 히브리적 사유의 바탕 속에서 그리스적 사유의 형식을 빌어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의 고린도전서를 살펴봄으로써 이들 안에 어떠한 사유체계가 숨어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욥기와 고린도전서 사유
1) 욥기의 사유
욥기의 저자는 자의식이 강하고 창의적인 사상가의 표본이다. 극도로 심한 정신적 투쟁이나 시련들을 극복하고 승리한 경험이 없이 이런 작품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욥기는 저자 자기 삶의 문제들의 서술이다. 하나님 모독(?)의 한계까지 다가가면서 그는 과감하게 유대교적 교리, 즉 지속적인 심한 불행은 언제나 하나님의 형벌로 보아야 한다는 세 친구의 자명한 논리인 응보 교리와 싸운다.
욥의 행복은 극에 달해있었다. 그는 많은 소유물과 자녀가 있었다. 그러나 욥은 그가 책임질만한 죄를 범한 일도 없이 그 자신이나 친구들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난을 받는다. 욥은 그의 행동이 의롭기 때문에 행복이 극에 달하지만, 그가 여전히 의로운데도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의 행동은 그가 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 한결같이 의롭다. (1:21) 그것은 의로움이 행복 또는 불행(고난)과 무관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고난의 문제는 욥기를 이끌어가는 주 동인(動因)이다. 그러나 욥기의 전체적인 주제는 고난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인간의 태도’이다. 고난의 근원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문제한다. 그것은 생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궁극적인 질문으로서 인간 실존의 문제이다.
또한, 사단에게 시험할 것을 허락한 하나님은 과연 의로운가? 라는 물음을 통하여 욥의 행위와 그의 사정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신정론(神正論)에 이르게 된다. 경건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욥의 상황(1:8-12)은 ‘신은 과연 정의로운가?’ 라는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세 친구는 일곱 밤을 함께 슬퍼하지만 위로의 말을 발견하지 못한다. 일곱 째 날에 욥의 인내는 한계에 이르고 드디어 인내는 분노로 폭발한다. 세 친구와의 논쟁과 엘리후의 연설 후에 욥은 하나님이 직접 당사자로 나서도록 촉구한다. 하나님과의 직접적 대면에 의하여 종교적 본능에 의한 욥의 체념적 침묵(1:21)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고난이 더 이상 욥을 지배하지 못한다. 겸손한 침묵(40:4-5)은 고난을 주변화시킨다.
욥기의 전체적 구조을 살펴보면, 욥기는 전언(1:1-2:13), 대화(3:1-42:6), 그 대화 중 욥과 세친구의 첫 번째 논쟁(3:1-11:20), 두 번째 논쟁(12:1-20:29), 세 번째 논쟁(21:1-31:40)으로 되어 있으며, 엘리후의 연설(32:1-37:24), 야훼의 등장과 욥(38:1-42:6), 종언(42:7-17)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점점 고조되는 갈등 속에서 하나님을 당사자로 불러들임으로써 결말에 이르게 된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불합리한 것들을 하나님의 현현으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구조이다.
(1) 욥기의 이야기 전개
서문에서 등장하는 욥이라는 인물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다. (욥 1:1) 그런데도 그의 소유와 자녀 그리고 자신의 건강까지도 파괴하는 파멸이 그를 엄습한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1:21)
이 고백을 통하여 욥은 의혹 없이 자신의 처해진 상황을 아주 단순하게 자명한 신앙의 논리로 확언하고 있다. 욥의 아내조차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을 것을 말하지만 그는 오히려 아내의 미련함을 책망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재확증한다. (2:7-10) 그러나 세친구와의 대화에 들어가면서 입장이 돌변한다. 욥은 이 돌발적인 파멸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욥과 그의 친구들은 공통적으로 욥에게 엄습한 이 고난이 야웨로부터 온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갖고 있을 뿐이다. 7일 동안의 침묵 후에 욥의 분노는 폭발한다.
욥과 세친구와의 대화는 먼저 고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억울한, 이유 없는 재앙에 대한 욥의 항변과 전통적이며 일반적인 신학을 대표하는 세친구의 이해의 차이는 논쟁이 깊어질수록 더욱 거리가 멀어진다.
엘리바스는 전통적 응보 교리로 설명될 수 없다는 욥의 절규에 대하여 그가 아직 경건하다고 해서 반드시 잘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당해야 할 운명이 그를 엄습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를 엄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바스는 교훈을 유용하게 이용하라고 권유한다. (5:1-16) 겸손하게 하나님에게 도움을 기대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욥이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제공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만 하나님을 찾으리라는 사탄의 주장과 상통한다. (1:9-11)
세 친구의 견해에는 차이가 없다. 그들이 욥에게 말하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타당하며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들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벌준다는 이러한 ‘자명성’으로부터 욥이 결론을 얻기를 기대한다. 친구들은 행동과 결과의 일치(응보 교리)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본다. 욥의 고난이 하나님의 어떤 판결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세 친구의 확신이다. 하나님의 훈계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정당함을 승인하라고 욥에게 권고한다. (5:8)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이 명백한 신념은 세 친구와 욥의 대화를 결론 없이 끝낸다. 오히려 갈등이 시작보다 더 커진다. 욥과 세 친구의 이러한 갈등의 근저에는 욥은 탄식하고 그들은 가르친다는 상황이 깔려 있다. 위로하는 자는 언제나 일반적으로 경험된 것에 의존하면서 권유한다. 결말 없는 논쟁은 결국 욥을 그와 하나님 사이의 대화로 인도한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에 대한 서로 다른 파악에 근거를 둔다. 친구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는 없으며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2:1) 즉,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친구들의 주장은 특수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공통적인 것, 고대 일반의 공통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으며 그들의 죄를 고백한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질서를 되찾는다. 이 의는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돌아오고 받아들여질 때 성립된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이 특별한 고난이 이유 없음을 탄식한다. 친구들의 위안과 대답은 위선이라는 것이다. (21:24-30) 욥은 하나님의 현실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경험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이웃의 소리가 도달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의 체험영역이다. 욥이 보고 있는 하나님은 오로지 개인적으로 그의 모든 폭력 수단을 동원하여 고난을 격화시키며 고통을 주는 하나님이다. 욥의 주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한 것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납득할 수 있는 그렇게 심한 과오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주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욥은 보고 있다. 이는 과거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하나님 인식’이다. 이 새로운 하나님 인식을 욥은 고발한다. 그리고 그는 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다. 욥이 처한 상황은 극히 개인적이다. 그는 “야웨는 나를 위하는가?”라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하나님 관계에서 출발한다. 고난의 심연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다. 그에게 철저히 문제된 것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이다.
반면에 친구들은 그 출발상황이 전적으로 다르다. 방관자로서의 친구들은 질서들에 대한 태고적인 그러나 언제나 새로이 제기되는 문제, 즉 ‘인간이 하나님과의 공동생활에서 특정한 규율들을 인식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행동과 결과의 관련성에 대한 응보 교리이다. 친구들의 부당성은 그들이 전개한 경험들에 있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것들의 합당한 자리에서 합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부당성은 욥의 경험들과의 대결에서 즉 듣고 이해하지도 따라가지도 못한 그들의 ‘우매함’(42:8)에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세친구가 욥처럼 진리를 말하지 못한 데 대해서 그들을 꾸짖는다. (욥 42:7)
세 번에 걸친 친구들과의 논쟁은 고난에서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를 문제시한다. 욥이 변함없이 의로움을 주장하는 데 대해서 세 친구는 그들 자신의 확신을 욥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고난 속에 있는 삶과 가르침 사이 그리고 당사자와 방관자 사이의 차이가 이 논쟁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처절한 절망 속의 항거와 냉랭한 지식과 규범적인 평가들 속에서 논쟁은 전개된다.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은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한다. 그 대결은 원을 그릴 뿐이다. 친구들은 고난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권유할 능력이 없으며 욥은 그것에 응할 수 없다. 세 친구는 단지 욥이 잘못되었다는 것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들의 응보 교리는 공허하다. 또한, 욥도 자신의 정당성을 고집하려는 것으로 하나님을 고발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과오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제 욥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해후로 고난에 대한 올바른 태도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지금까지 대화자들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세 친구의 신학에 따른다면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듯이 욥을 심판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욥을 책망할 뿐이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38:2)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40:8)
하나님의 책망은 욥은 알지도 못하고 또 듣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욥은 세계의 창조와 지배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행위를 분별없이 모호하게 했다. 욥은 문제를 제기하고 방종되게 해석함으로써 세계질서와 인간에게 숨겨진 하나님 행위의 탐지 불가능성을 혼란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욥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8:3)
하나님은 질문을 통하여 욥이 알지 못하는 자연 질서를 보여 준다. 인간의 모든 통찰력과 인간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는 수많은 실례를 그에게 제시한다. 동시에 고난에서의 그의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는 옳지 않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욥 자신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질서와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통찰 불가능성 사이의 역설을 보여줌으로써 욥이 무질서하고 방종적인 것으로 느꼈던 세계질서가 하나님에게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들도 하나님에게서 해결되는데도 욥은 자기 자신에게서 해결점을 찾고자 하였다고 욥을 책망한다. ‘통찰 불가능한 세계질서 때문에 하나님을 훈계하려는 자는 그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야 하며, 그 스스로 세계통치를 수행해야 하고, 자신에 알맞은 세계질서를 세우라’는 요구에 직면해야 한다. 하나님은 욥이 그런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이제 하나님에게 도전한 욥은 결단해야 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태도에서와 같이 하나님과 같으려고 하는 인간의 원죄를 스스로 담당하려는가? 아니면 지금까지의 자신의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에게 합당한 태도를 찾을 것인가? 하나님에게 반대함으로써 하나님과 같으려는 욕구와 그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질문에서 욥이 일반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세계질서를 관철시키려면 그는 당연히 하나님과 같으려고 하는 자로서 자신 스스로 심판해야 한다. ‘옛사람을 고수하려는가?’ 아니면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려는가?’의 결단의 순간에 놓인 것이다.
욥은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에 승복한다. 그 고백은 인간이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본래성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공동성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실존을 고유의 무상성을 통하여 인식한다. 동시에 전통적인 응보 교리라는 장애물이 사라지면서 이기적인 노력과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제거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통로가 열린다. 종교적 본능에 의한 체념적 침묵(1:21)에서 겸손한 침묵(40:4-5)으로 변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직접적 해후에서 욥은 자신의 실존을 발견한 것이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40:4-5)
욥은 자신의 무상성과 함께 하나님의 전능을 인식하고 경험한다. 하나님의 행위의 역설성 때문에 절망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뜻과 행위에 대한 통찰 불가능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의 첫 번째 담론에 잠잠하게 되었고, 두 번째 담론에는 굴복하고 회개하기에 이른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2-3)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5-6)
인간은 신학적 전통을 매개로 하여 듣고 말하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현실적인 직접적 해후에서만이 비로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에게 전적인 신뢰로써 내맡기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의 지배에 복종한다는 것을 뜻한다.
외형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하여 욥은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함께 피조물인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인내한다. 그의 삶은 고난과 수수께끼로 가득차 있으나 이미 그를 괴롭게 하지는 못한다. 하나님과 함께함이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는 바울의 고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욥기의 저자는 사람들이 경건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바른 기준은 그들의 삶의 정신적 질(태도)이지 우연한 물질적 생활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확고히 한다. 동시에 진정한 종교적 태도는 삶에서의 수동적 체념(종교적 본능)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하는 적극적 용기와 성숙한 자기 실존의 확인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2) 욥기에서의 몇 가지 문제들
먼저 고난의 문제이다. 고난의 기원과 원인은 무엇인가? 왜 이같은 고난이 내게 일어났는가? 무고한 고난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라는 중요한 질문들에 대하여 욥기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전혀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욥은 그의 행동이 의롭기 때문에 행복과 복이 극에 달하지만, 그가 여전히 의로운데도 고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그가 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 한결같이 의롭다. 그것은 의로움이 행복 또는 불행과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질인가? 고난의 본질적인 문제는 실존적인 것이다. ‘내가 고난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내가 고난 당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즉, 고난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다. 욥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다가온 재앙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1:21) 그러나 욥은 이 체념적 수용(침묵)의 자세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하나님을 향해 저항한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므로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의 정당성에 대한 욥의 질문에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갈등은 해소된다. 욥 자신의 피조물로서의 실존을 발견한 것이다. 더 이상 고난이 욥을 괴롭히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해후는 겸손한 침묵으로 인도하고 고난을 주변화시킨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응보 교리이다. 선함이 상을 받고 악함이 벌을 받는다는 어떤 규칙, 즉 그 사람의 행동과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 사이에는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신념을 응보 교리라 한다. 세상의 일관성을 요구하는 이 원리는 현실적인 불일치와 충돌을 일으킨다. 이 불일치와 충돌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세 친구에게서 보인다.
세 친구는 공통적으로 고난이 죄의 결과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기존 질서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는 전혀 의심이 없기 때문에 욥의 불행은 법칙에 따른 것이다.
욥의 경험은 친구들의 경험과 다르다. 욥은 혼란스럽고 또한 자유로우며, 실험적이다. 욥은 과거에 믿었던 응보 교리에 대항하여 이제는 자신이 당한 불행을 받을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음을 확신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서를 향해 탐구한다. 응보 교리가 욥의 현실에 의해 실패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대화 참여를 강요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연설(38-41장)에는 응보 교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이는 그 원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다른 친구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근본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원리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응보 교리를 주변화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의문에 대한 대답보다는 그들의 문제들과는 거의 무관해 보이는 것들에 대한 담론으로 일관한다. 하나님의 담론은 우주사와 자연사가 그 내용이다. 하나님이 자연계의 알 수 없는 특징들을 나열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눈이 부시도록 전시함으로써 욥을 위압하려는 것이 아니다. 욥은 이미 하나님이 지혜롭고 강하다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신비함과 심오함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권하는 것이다.
먼저 욥에게 창조과정에 참여하지 않았(38:8)으므로 욥이 개인적 의견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 두 번째로 세상을 다스리심에 대하여 욥이 한 번도 새로운 날의 출현을 조직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우주의 통치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로 인간으로서는 그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는 야생동물들, 즉 태고적 혼돈의 상징인 베헤못(하마)와 리워야단(악어)이 아무리 놀랍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창조물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세상의 창조원리인 자연 질서를 통하여 세상이 다스려지는 정신 질서를 깨닫기를 기대한다. 세상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인간을 위협하는 것도 많지만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것이 인간의 합리성에 맞지 않더라도 그렇다. 욥에게는 악어의 목적을 설명해 달라고 할 권리가 없듯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도 설명을 요청할 권리가 없다. 자신이 범한 잘못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무고한 고난인지를 들을 자격도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들을 설명을 해야 하는 책임도 없다.
욥이 하나님의 담론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고난에 대한 응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운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신뢰할 수 있느냐?’의 하나님 신앙의 문제이다. 문제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욥은 겸손히 침묵한다. (40:4-5) 처음에 그의 불행을 받아들이도록 했던 그의 종교적 본능으로서의 체념적 침묵(1:21)이 의미를 향한 그의 보다 지적인 신학적 탐구에 의해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도덕적 투쟁과 영적인 고민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42:5-6)
본문은 “내가 당신을 알았지만 당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응보 교리를 통해 당신의 일에 대해서 안 것은 실제 지식이었으나, 그것은 당신에 관한 온전한 진리는 아니었습니다. 또한, 당신을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내가 이해 가능한 하나님으로 붙잡으려 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을 봅니다. 온전한 진리는 당신은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며 그리고 당신의 행위들은 결국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겸손히 침묵함으로 당신을 신뢰합니다”라는 고백이다.
이 고백 속에 있는 욥은 서문의 욥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처음의 체념적 침묵(1:21)이 이제 신학적으로 재정비됨으로 떠받쳐지고 있다. 이제 욥은 ‘하나님이 인간 이성에 전적으로 부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느끼고 신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이다. 결국, 욥이 취해야만 하는 태도는 “그가 나를 죽여도 나는 그를 신뢰할 것입니다”라는 것이다.
욥기의 결말 부분(42:7-10)은 하나님의 담론을 어느 정도 축소시키고 있다. 정의와 응보의 문제들이 핵심적인 것들이 아님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의 경험으로 인해서도 응보 교리는 거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 원리가 부분적으로는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욥기는 욥의 역사가 이 원리의 타당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원리가 비록 모든 경우에 인간의 운명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도덕적 진리임을 욥기는 긍정하고 있다.
(3)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욥기
먼저 욥을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라고 묘사(1:1, 8)하는 서술을 글자 그대로 말한다면 그것은 부적절하다. 어떤 사람도 완전하지 않으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적 인간관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는 바울의 확신에 의한다. (롬 3:10, 23) 예수 자신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눅 18:19)고 하였다. 역으로 본다면 욥이 자신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면에서 오히려 죄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욥의 의를 완전함이 아니라 욥이 당한 것보다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만한 결백으로 수정해야 할 것인가? 욥기에서 제기된 조건들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상대화시킬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미래적 인간상으로서의 하나님의 요구라고 볼 것인가? 신약성경 속에서의 철저하고 빠져나갈 틈이 없는 미래적 요구들에 비추어 볼 때 독자들에게 그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써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롭지 않은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
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과 같다.
두 번째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인이며, 따라서 구원이 필요하다는 기독교적 구원 사상과 하나님의 우주 통치 질서에 대한 욥기의 신학적 관심의 연결문제이다. 전통적 응보교리라는 장애물을 건너 통찰 불가능한 세계질서에 대한 욥의 도전은 에덴의 아담을 연상시킨다. 욥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우주 질서가 무너졌음을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불복종이며 월권행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같이 되려는 자(피조물)에게 통찰 불가능한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전권에 겸손히 침묵하게 만든다. 이로써 욥은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본다. 근본적인 변화가 욥에게 일어난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확인한다. 하나님의 지배에 복종한다. 욥은 새 피조물이다. 구원받은 피조물이다. 욥은 하나님 지배안 에 있음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에 대하여 세상의 외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대한 예수의 확신(막 4:26-29)과 부분적으로 이해 불가능하고 또 부분적으로 스스로 의사소통하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그분의 요구가 욥기와 상통한다.
욥기에서는 인간의 운명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전통적이며 일반적인 상이 붕괴되면서 욥의 하나님 사상은 더욱 철저해진다. 하나님의 능력은 한계가 없고 ,하나님의 외견상의 횡포로 나타나는 것은 이해 불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오직 침묵만이 남는다. 사람이 자기 뜻과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구원의 미래를 일으킨다는 신뢰와도 결합할 수 있는 자기 포기의 주제가 발견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사실로 여기는(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겸손한 침묵에서 그를 신뢰하며 그의 지배에 복종하는 것이다.
(4) 욥기의 히브리적 사유
구약성경의 사유는 원시적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플라톤이나 베르그송의 사유와 같은 고등 사유와는 비교될 수 없고, 다만 다른 원시 민족들의 사유와 비교될 수 있을 뿐이라는 페더슨(Pedersen)의 언급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욥기가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인생관과 이스라엘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는 말은 의미 있게 받을 수 있다. 그것은 히브리적 사유 방식을 욥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관점의 정당성이 전혀 다른 관점의 타당성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고 본다면 원시적이라는 개념은 불분명하고 애매하다. 또한, 기원전 5세기의 이스라엘의 정신생활도 욥기의 순수한 유일신론과 함께 그 절정에 달했고, 그 후에는 이 유일신론이 더 발전하지 않았다는 보만(Thorlief Boman)의 견해에 의한다면 원시적 또는 고등적 사유라는 것이 신구(新舊)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의 전형적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욥기에서의 히브리적 사유을 보면, 먼저 ‘시간’은 그 내용과 유사하다. 시간은 사건의 개념이다. 즉, 시간은 사건들의 흐름이다. 낮은 빛의 때이고 밤은 어두움이다. (창 1:5) 만일 낮이 어두워진다면 그것은 무시무시한 일이다. 한 인간의 생은 흙에서 생겨나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이 주기는 욥기 1장 21절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욥 1:21a)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데, 그날이 어두움이 되기를 기원한다. 무시무시한 현실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다.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날을 덮었더라면”(욥 3:4-5)
어두움은 물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선하고 생명을 제공하는 빛이 비자연적인 암흑으로 변한다는 무시무시한 사실과 의미에 있다. 욥의 탄식은 저 무시무시한 의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삶을 향한 역설적 표현이다.
또한, 히브리 언어에서는 어떤 대상의 개요 혹은 윤곽을 표시하기 위하여 고유한 표현을 만들지 않았으며, 또 그것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리스적 사유는 공간과 시간의 ‘내용’과 공간과 시간 ‘자체’ 사이를 구별한다. 즉, 빈 공간과 빈 시간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유에서는 그러한 개념이 없다. 형식과 내용은 일치하는 것이다. 공간은 내용을 포함하는 공간이다. 내용없는 공간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물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때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물이 없는 추상적 우물은 생각할 수 없다. 우물이라하면 물이 있는 완전한 우물을 의미할 뿐이다.
욥기는 히브리인의 우주론적 표상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다채로운 신화적 표현들과 함께 냉철한, 자연적인 자연의 설명을 볼 수 있다. 자연적인 현상들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이다.
히브리인들은 자연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부름말을 알고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이 선포는 인간으로 하여금 경탄하게 하며, 놀라게 하며, 경외하게 함으로 자연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세력에 직면하여 자신의 작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이 선포는 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자연에서의 하나님의 부름말을, 창조자의 지혜를 자연 사건의 법칙성과 목적성으로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자연은 실제로 이미 아무것도 선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파악된 지혜는 창조자의 지혜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 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연계의 알 수 없는 특징들을 나열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눈이 부시도록 전시함으로써 욥을 위압하려는 것이 아니다. 욥은 이미 하나님이 지혜롭고 강하다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신비함과 심오함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권하는 것이다.
“그는 물을 그의 구름들로 싸지만그 물로 인해 구름들이 찢어지지 않는도다”(26:8)
“너는 네 목소리를 구름에 이르게 하여 많은 물로 네게 대답하게 하겠는가?”(38:34)
“누가 지혜로 그름들을 헤아리겠는가 누가 하늘의 물병들을 쏟겠는가?”(38:37)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욥기는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사유체계를 보여준다. 욥기의 이러한 히브리적 사유의 특징적 요소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이해 방식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이제 아래에서는 히브리적 사유체계 속에서 그리스적 사유의 형식을 빌어 그리스어로 기록된 고린도전서를 살펴보겠다. 고린도전서 안에 함께 들어있는 히브리적 요소와 그리스적 요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전서의 사유
바울 서신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특징을 고린도전서도 갖고 있다. 그것은 편지의 내용이 그때의 구체적 상황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 서신은 하나의 총체적인 신학적 교리를 정리한 신학 총서가 아니다. 서신으로서의 고린도전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그들이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를 읽음에 있어서 신학적 교리로서 읽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적 요건을 상기하면서 읽을 때 비로소 온전한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1) 고린도 교회의 상황
BC 900년경 고고학적 흔적이 있는 고린도는 호머의 일리아드에서 언급할 정도로 풍요로운 도시였다. BC 146년 물미우스에 의해 파괴된 이후 황폐화 된 도시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저에 의해 재건되었다. 유리한 주변 환경 때문에 동서교역의 장소가 된 항구도시 고린도는 ‘그리스의 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창하였다. 교역의 중심지답게 인종도 다양했고 종교도 다양했다. 사도행전 18장 1-17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1년 반을 거주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인종과 종교가 다양했던 고린도의 당시의 시대상은 공동체 내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음행의 문제(5장), 금욕에 관한 것(7장), 분쟁으로 이방 법정에 가는 것(6장), 우상 제물의 문제(10장), 예배 만찬에서의 가난한 자와 부자들의 행동(11장), 예배의 무질서(14장), 죽은 자의 부활(15장) 등이 그것이다.
바울은 편지를 통하여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접하고 문제들의 해결점을 제시하고 권면한다.
(2) 고린도전서의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
서두의 “엔 크리스토스 이에수스”(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1:3)는 그리스적 표현양식에 따른 것이다. 이는 그리스적 사유(정적, 공간적)에 따르면 신비적이고 공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유(동적, 역사적)에 의하면 “엔”(안에서)이란 오히려 ‘통하여’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었고, 그를 통해 자기의 ‘본질을 계시’했다는 것은 그리스적 사유이며,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보내서 그를 ‘통해’ 자신의 ‘뜻을 실현’ 시켰다는 것은 히브리적 사유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지배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1:21).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그리스인)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23)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이 사람보다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들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1:25) 이것들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간의 능력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차원의 것임을 말한다. 약함과 강함 또는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라는 세상 기준은 더 이상 하나님에게 적용될 수 없음이다. 복음의 본질이 곧 세상의 어리석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사건은 세상의 척도에서 볼 때 “믿을 수 있는, 그럴듯한 혹은 유혹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저주받은 실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고, 알 수 있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러한 앎의 척도도 인간 자신이다. 인간 스스로 기준이 되어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에 대해 서술하며 규정하지만, 그 규정은 무한성이 유한성에로 변질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인간은 늘 절대적 존재(무한)를 유한한 존재로 환원시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한은 인간의 인식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에 유한으로 한정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한 절대적 존재가 유한성 안에 들어오는 순간 이 절대적 존재는 이미 절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파악한 절대적 존재는 허구가 된다. 내가 고백하는 고백, 내가 그리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상은 비록 고백하는 그 순간은 절대적일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곧 절대적 가치를 상실한다. 하나님은 내 사고 속에 들어온 하나님으로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능력)이 처음부터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적 사유 양식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세상은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표적에서 보려 하고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지혜에서 인식하려 한다. (1:22)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 십자가의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고, 이방인(그리스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된다. (1:23) 결국,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지혜를 의지하여 그 잣대로 하나님을 규정하려 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바울은 1장 2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를 전혀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세상의 지혜는 본질적으로 속성상 어리석고 절대적으로 무가치한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판단하고 재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을 판단할 만큼 지혜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세상에 구체화 된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그리스도이다. (1:30) 그리스도는 인간의 척도에 의해서는 어리석음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다.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어질 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사실은 인간의 사고 속에 제한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이다. 약함과 강함으로 규정되는 세상적인 기준이 하나님께는 적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는 인간들의 척도에 의한 모든 구분이 없어진다.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 42:3)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어떠한 귀중한 것보다 가치있으며 오직 경건한 신앙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욥 28장) 지혜를 인간 스스로 소유할 수 없듯이 자유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바울에 의하면 외형상 인간의 자랑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모든 것을 소유한다. 즉, 부정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 3:21)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다”는 이 선언은 자유를 향해가는 길에서의 불안을 극복한다. 모든 것이 나의 것이므로 그것에 연연해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만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세상에 지배당하지 않고, 세상에 매여있지 않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배권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너희 것이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요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고전 4:7-8)
“구별하다”는 ‘우선권이 있다’, ‘별다르게 보다’, ‘우월하게 보다’ 등의 의미가 있다. 특권을 갖는다는 것은 책임과 결부되어 있다. 구별되는 자는 구별해 주는 자의 전권에 의지해 있다. 받는 자는 주는 자의 전권에 의지한다. 그런데도 언제나 주는 자는 배후로 들어가고 받는 자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인간적인 자랑은 바로 이러한 주는 것과 받는 것의 근원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받는 자는 주는 자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요하여 왕 노릇 하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심판을 그들의 정신적 자기 인식에서 이미 극복된 것으로 믿었다. 배부름과 풍요함과 다스림은 마지막 때의 구원 상태를 의미한다. ‘왕처럼 다스리다’는 스토아 철학의 현자들이 세상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그들이 영을 소유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몫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미래도 없다. 바울은 이 상황을 구원의 종말적 의미로 이해하면서 고린도교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현세의 삶을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누리는 자가 아니며 오히려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라는 것이다. 아직은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와 세상의 관계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6:1-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세상의 법이 그 절대적 가치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믿는 자들 간의 문제를 세상의 법에 의지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법질서를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절대적 가치 앞에서 세상 질서는 가치를 상실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심판하고 천사도 심판한다는 것은 묵시문학적 표상이다. 이는 그리스 철학에서 신이 세계를 지배할 때 현자가 그 몫을 가진다는 사상과 유사하다. 목숨을 걸고 양보할 수 없는 일들도 종말의 빛에서 볼 때는 사소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일수록 집착하고 포기하지 못한다. 성숙해 간다는 것은 포기할 줄 안다는 것과 병행한다. 어린아이들이 과자 하나에 천지가 진동할 정도로 우는 것처럼 인간의 유치함은 소유하려 하고 집착하려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롭게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소유가 아닌 존재로서 자유하다. “일류체리바”(자유)는 어원으로 볼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그리스에서의 자유는 언제나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폴리스’라는 정치적 공동사회의 완전한 시민으로 소속된 자가 누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를 폴리스의 선이라고 서술한다. 그리스의 국가이해에서 볼 때 “자유”는 국가를 구성하는 필요불가결한 구성 요소이다. 그러나 폴리스가 파괴되고 공동사회가 무너짐에 따라 스토아 철학에서는 자유의 개념을 청치적인 제한에서 벗어나 철학적, 종교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은 현자(賢者)의 자유라는 의미에서 스토아적이다. 그들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영혼을 지배함으로써 그를 위협해 오는 모든 낯선 존재와 사물을 극복하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자유롭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의 자유는 그리스에서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었다. 구약성경에서의 자유라는 관념은 노예 밎 전쟁의 반대 개념으로만 사용되었다. 히브리적 사유 속에서의 자유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 은혜로서 경험될 뿐이며 야웨의 구원 행위와 결부되어 있다. 야웨를 통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야웨를 떠나는 것은 자유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적 자유와는 오히려 상반된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본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고 본다. 자유는 그것을 주는 자와 결부되어 있다는 구약성경의 이해와 전적으로 연관된다. “자유롭게 하다”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다. 자유로운 자는 자신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그를 자유롭게 하는 자에 속해 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 근원에 소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바울은 야웨를 떠남으로써 죄와 법 그리고 죽음 안에 있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 곧 ‘옛사람’으로부터의 해방이 자유라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폐쇄성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자유는 복음을 위해서 자유의 사용을 포기하는 데서 드러난다’고 고백한다. (9:19)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 바로 이것을 그는 그가 받은 상이라고까지 한다. (9:18) 자유는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유의 근원이 되는 분에 의해 그때 은사로 주어질 뿐이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고전 9:18)
바울은 자신의 사명은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것이며,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한다. 따라서 복음 안에서 그는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데서 복음의 본질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선언하고 있다. 그가 모든 것을 거저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받은 상이며, 그것이 바로 복음 안에 있는 자유자의 삶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존재로 선포한 인간이 그 선포에 합당하게 사는 것, 그것이 자유로운 자의 삶이다. 그러나 자유롭다고 선포된 자는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처럼 모든 인간적 규범들의 제재로부터 벗어나 무엇이나 허락된 것처럼 현실적 도덕과 규칙을 초월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 교회는 자유를 스토아 철학적인 내면화 내지 종교적 신비주의로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자가 아니라 방종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명제를 자신들의 도덕적 방탕과 이방 제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했다. 바울은 이 선포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추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고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자유는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장, 즉 교회에서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 관계는 올바른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스에서는 인간을 자유를 의식하는 독립된 인물로서 파악하면서 동시에 개인이 하나의 질서에 예속되어있다고 한다. 일면 모순되어 보이는 이 그리스적 인간상은 개체가 그의 유기적 자리를 차지하는 그러한 질서로서 존재한다고 보면 질서의 법칙은 개인의 본질과 일치한다. 인간 본래적 본질은 정신, 곧 폴리스와 우주의 질서의 근원인 이성이다.
반면에 히브리적 인간 이해는 그리스적 전통의 그것과 철저히 대립되어 있다. 인간 본래의 본질은 로고스, 이성,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의지(意志)라고 대답될 뿐이다. 인간 됨, 인간적 삶으로서의 삶은 언제나 지향적 존재로, 지향적 노력인 의지로 이해되었다. 인간이 자연적이며 물질적인 현상으로 이해되지 않고 인격으로 의지적 존재로 이해되었다. 의지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현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 속의 인간을 의미한다. 이 전통은 예수와 바울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그렇게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과 연결된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성 속에서만 이해되었다. 피조물로서의 나의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 아니다. 오히려 날마다 새로운 세상이며 그래서 ‘종말적’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종말적 삶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7:29-31)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종말을 선취해서 사는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세계의 시간은 끝났지만, 아직 존속하고 있는 세계로부터 벗어난 자들이다. 그래서 ‘새 피조물’이다. 따라서 세상에는 그들에게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들이 없다. 아내가 있는 자들은 없는 자들처럼,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들처럼,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들처럼,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쓰지 않는 자들처럼 할 것을 바울은 권고하고 있다. 이것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내면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불행에 대한 세상적 인식은 세상의 질서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 가치에 따라 좌우된다. 이러한 인간의 삶을 짓누르는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현재의 삶이 미래의 빛에서 재조명되고 현재의 삶의 조건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내(內)세계적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이(異) 세계성을 완전히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서 창조 사상에서 드러난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창조 사상의 의미는 후에 그리스의 코스모스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변질되었다. 하나님의 피안성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그의 정신성으로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형의 질료를 건축학적으로 골조된 코스모스로 빚어 만드는 법칙의 합리적 정신적 힘이기 때문이다. 창조자가 예술가 혹은 도공(陶工)으로 변한 것이다. (롬 9:21) 스토아 철학은 창조 신앙을 학문적으로 표현하는 데 적합한 것으로 보인 것은 분명하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우월성과 초월성을 서술하는 데 적합한 개념들을 제공하였다.
반면에 이스라엘인들은 그리스인들과는 다르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자연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운영권을 인간에게 “보살피고 돌보라”는 의미로 위임한다. 자연은 그들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것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인들은 세상을 대립적으로 인간들이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늘 인격적으로 이해하여 그것들을 의인화시키고 그것들과 대화했다.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들어있는 더불어 살아야 할 공동체로 이해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자연은 쟁취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실천에 옮겨야 하는 그런 장소이다. (롬 8:19-22) 고린도전서 15장 28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이 우주의 전부이고 모든 것의 전부일 때, 우리의 일상의 삶이 이러한 창조주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할 때,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합당하게 사는 삶, 더불어 사는 삶, 공동체를 위한 삶, 즉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물건을 쓰는 사람은 쓰지 않는 사람처럼 써야 한다. 들에 핀 한 포기의 풀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깊은 뜻을 보고, 돌부리 하나에서도 하나님의 배려하심을 느끼며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만물이 그로부터 나오고 우리도 그를 향해 있다. (고전 8:6) 이는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동시에 하나의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시작과 끝을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창조자 칭호의 내용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그것을 아버지 칭호로 교체한 신약성경의 언어 용법을 볼 수 있다. 아버지인 하나님이 구약성경의 창조자의 기능들을 넘겨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전 8:6) 내용이 풍부한 구약성경의 창조 사상은 신약성경에서 퇴색되지 않았다.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평화를 주신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 곧 평화(샬롬)가 있게 된다. 구약성경에서의 샬롬은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사이며 곧 구원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에이레네”(평화)는 구약성경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며(고전 14:33) 인간과 세상의 구원으로서의 평화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 새 질서를 정립하는 것이다. 평화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 즉 복음의 내용이며 목표이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평화와 다른 것이다. (요 14:27) 이 평화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빌 4:7)
모든 구원의 은사는 하나님의 평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영적인 의미에서의 마음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적을 만들지 않으므로 평화를 이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넘어 원수(적)를 적극적으로 사랑함으로 평화를 이룬다. 개인의 만족이나 도취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는 개인적 영혼의 안식을 넘어 세계내의 모든 불의와 폭력에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다. 평화는 적극적 사랑으로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복음은 사랑으로 평화에 이른다.
이러한 평화는 먼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에도 고린도교회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에 바울은 한 몸과 여러 지체에 대한(고전 12:12-31)구체적 서술을 한다.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에서는 우주는 하나의 몸이며 유기체라고 본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유에서 몸의 지체들은 성품들에 관한 표현들이다. 전체로서의 모습은 전 인격성과 그 본질의 집약적 표현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나의 몸으로서 다양한 지체가 있으며 그 지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원동력은 그리스도이다. 이 공동체에 유익을 위하여 교회 안에는 개인마다 부여된 다양한 은사가 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롬 12:3-6)
그것은 사도일 수도 있고, 교사일 수도 있고, 도움을 주는 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이 있음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다. 은사의 목적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고통이 있는 한 그것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자세, 그것이 곧 사랑(아가페)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말씀은 각 개인의 개성의 획일화가 아니라 각 개인의 개성의 전체적 조화를 의미한다. 가장 볼품없이 모자란 것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고전 12:22-24) 그런 세상이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욥기에서의 히브리적 사유에 이어 고린도전서의 사유를 살펴보았다. 고린도전서에서의 그리스 사유와 히브리 사유의 혼합은 욥기의 히브리 사유와 유사하며 또한 차이가 있다. 다음에서는 두 사유의 비교를 통하여 그 독특성과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3) 두 사유의 비교
(1) 욥기의 사유와 신학
욥기의 신앙의 핵심은 인간의 사유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의 피조성에 근거하여 인간은 전적으로 세계의 지배자에게 던져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욥기의 저자는 역사를 인간에게 운명을 제공하며 과제들을 위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로서 이해한다. 따라서 그때의 구체적인 역사로부터 미래의 물음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대답을 인간에게 제공한다는 의식으로서의 특수한 역사의식이 수행된다. 구체적인 역사를 가상으로 만드는 무시간성으로의 도피에서가 아니라 바로 시간 안에서 구체적인 순간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래성을 얻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시간성과 역사성에서 보이며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자신의 구체적인 역사에서 이 역사의 과거와 미래에서, ‘이웃들’의 구체적인 상호 관계에 의해 그 순간의 요구를 자신에게 제시하는 역사의 현재에서 찾는다.
하나님은 초월적이며 영원하다. 그러나 그는 역사 속에서 행위한다. 그는 전능한 세계의 창조자로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어떤 정신의 법칙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식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세계경영도 인간이 예측할 수 없다. 경건한 죄 없는 욥이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욥기의 저자는 이 수수께끼를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합목적성으로 변호하려는 신정론에 의해 해결하지 않는다. 죄없이 고통을 당하는 자의 수수께끼를 풀어준 해법은 하나님과의 직접적 해후였다. 그 해후로 인간의 탄식은 겸손한 침묵으로 변한다. 욥은 자신의 실존을 본 것이다.
(2) 고린도전서의 사유와 신학
고린도전서는 당시 고린도 교회가 처해 있던 여러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신 전체가 시대와 상황에 결부된 한 공통체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를 주(主)로 받아들인 자들 안에서 한 공동체가 어떻게 고민하며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그리고 그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서신의 내용이 그때의 구체적 상황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총체적인 신학적 교리를 정리한 신학 총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각 상황에 대처하는 바울의 모습 속에서 바울신학이 드러나고 있다.
바울은 서두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이 풍족함”(고전 1:5)을 감사한다. 그런데 이 감사의 내용이 본문에서는 공동체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다. 말과 지식의 풍족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종교적 열광주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파당의 원인도 부족해서가 아니라 넘쳐서 생긴 것이고,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많기 때문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을 세상의 지혜와 대비하여 십자가의 어리석음의 지혜를 선포하고 있다. 약한 것들이 약한 그대로 그것이 강하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고린도 교인들은 듣는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고전 4:8)에서 보듯이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배부르며 왕 노릇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경쟁하며 파당을 만들고 영적 은사를 자랑하며 그것에 심취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이 볼 때 미련하고 어리석어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삶임을 선언하고 있다. (고전 4:13)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6:12)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10:23)
당시 만연하던 음행의 문제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모든 것은 가하다”(6:12, 10:23)는 말씀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자유에 대한 관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내 것 가지고 마음대로 하는데’, ‘내 몸 가지고 마음대로 하는데’라는 것이 그들이 받은 구원의 자유라고 여긴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교인들의 방종에 대하여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인의 척도는 이웃의 유익에 있다는 선언이다. 이웃이 나로 인해 실족한다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또한, 고난을 당하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 그럴 수 있는 것 자체가 바울 자신이 받을 상이라고 말하면서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 우월한 자인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는 것을 선언한다.
고린도전서는 13장에서 사랑을 말하면서 모든 것의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의 사랑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즉, “아가페” 그것은 신적 존재 양식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만 가능한 은사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가페에 붙들린 자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 즉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철저한 자기희생의 존재 양식으로 사는 자의 삶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웃을 받아들임은 나를 포기함이다. 사랑은 나를 비우고 너를 채우는 것, 즉 너를 위한 나의 죽음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너도 살고 나도 살고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죽을테니 네가 살아라”라는 선언인 사랑 안에 사는 자이다. 내가 죽을 때 나는 하나님 안에 산다. 그것이 곧 나의 실존의 회복이다.
(3) 종합
구약성경은 하나님과 함께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택함받은 민족으로서 인류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된 역사이다. 택함받은 한 민족의 역사는 예수가 이 땅에 옴으로서 온 세상으로 확대된다. 예수의 오심은 역사와 시간 속의 사건으로 나타난다. 이 역사적인 시간 내적인 사건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다. 옛 세계에 종지부를 찍은 하나님의 행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부름이며 종말론적 실존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세계 내에서 탈(脫)세계화된다. 탈세계화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인데, 곧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보장할 수 있다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이다. 세계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으며 자신을 고수하지 않고 미래에 자신을 위임하는 것을 뜻한다. 미래를 위한 개방성은 수동성, 무위성이 아니라 지금 그때의 과제들로서 기쁨 및 고난으로 나에게 제공하는 것을 위한 책임적인 준비성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실존의 역설적 세계관계이다.
욥의 겸손한 침묵은 여기서 신약성서와 맥을 같이 한다.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실제로 드러난 자로서 본다는 것, 다시 말하면 그를 창조자로서 ‘승인하고 그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게 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로 자기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그것이 죄의 본질이다. 자기의 삶과 자신을 스스로 안전하게 하며 그것을 순수하게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이 죄는 하나님이 그 민족의 역사에서 행한 것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이 미래에 행할 일에 대해 자신을 열지 않으며, 미래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미래를 마음대로 하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의 욥에 대한 책망은 바로 이것이다.
욥이 하나님과의 직접적 해후를 통하여 자신의 실존을 볼 수 있었다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종말적 사건으로 선포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실존의 자기 이해에 이른다. 그것은 항상 도래하는 자로서 언제나 현재에 이미 앞서 있다. 과거를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미래를 향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실한 순종으로서의 현재이다. 하나님(그리스도)과의 해후로부터 우리는 결단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과거에 속하는 나 자신을 고수하려는가?, 아니면 나를 포기함으로써 드러나는 미래를 위해 나를 개방하려는가? 과거로부터 살려는가?, 아니면 미래로부터 살려는가? 자유는 미래(하나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미래적인 것으로부터 실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실존으로 본다면 이는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치 아닌 것처럼”(고전 7:29-31) 세상을 사는 태도이다. 내(內)세계적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이(異) 세계성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다. 그것이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를 통합하는 그리스도교의 종말적 공동체의 실존이다.
Ⅲ.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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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의 저자인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그리스적 표현양식을 빌어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것은 팔레스틴적인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행함과는 이질감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서신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기본사상은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이며 그것은 히브리 사유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역동성과 그리스 철학의 존재의 정적인 성격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인들과 그리스인
들 사유의 중심이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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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차이와 동시에 유사한 사유를 공유하는 것이 성경이다. 이 두 사유의 복합체로서의 성서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 해석의 과제를 던져준다. 그 해석의 과제는 하나의 방향으로 귀결되는데, 곧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지배 아래 복종한다는 그것으로만 향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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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죽을테니 너는 살아라’는 살림의 영성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너도 살고 나도 살고는 불가능하다.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이기고 죽이는 영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한 것처럼 “내가 죽을테니 네가 살아라”는 선언이다. 그것은 ‘참으로 사람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이다. 그 참으로 사람이고자 하는 그것을 찾는 작업이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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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신학의 과제는 십자가에 대한 선포의 의미를 현대인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성경의 진리들을 단순히 재현하거나 연결시켜 놓는 데 있지 않고 참으로 사람이고자 하는 인간 실존으로의 어떤 이해가 성서에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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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성서와 공동체를 이어준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부름말을 선포하는 공동체이다. 구약성경이 자연에서 울려 나오는 하나님의 부름말을 알고 있듯이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선포함으로 부름말을 전한다. 그리스도교의 선포는 세계관의 전달이 아니며 그 근거에 관하여 반성할 수 있거나 토론의 대상을 삼을 수 있는 일반적인 진리를 전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을 통하여 전달되는 신앙을 요구하는 ‘권위적인’ 부름말이다. 모든 것은 교회의 선포가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가? 그것이 현실적 부름말로서 듣는 자의 구체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에게 해후되고, 그러므로 자신이 추구되고 요구되며 위로되고 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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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포는 세계관의 가르침과 바꿀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을 물리치기 어렵다. 그 유혹은 바로 세속화이다. 선포가 윤리적 교훈일 때 세속화된다. 선포에서 도덕적인 요구들의 내용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사랑의 계명은 이웃을 위하여 순수하게 희생할 수 있도록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의 성품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시로 일어나는 사건이며 인간이 용서의 말을 통하여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고 동시에 가장 가까운 데에서 그가 만나게 되는 대답을 요구하는 물음을 위하여 자신을 개방하는 곳에서 사건이 된다. 선포는 그것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 선포는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용서로서 인간에게 약속하는 해방을 심리요법의 대상으로 만들 때도 세속화된다. 심리요법은 자체의 수단으로 인간의 해방을 꾀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필요하게 된다. 또한, 선포는 교의학적 가르침이 아니다. 물론, 선포의 내용을 교의학적 명제들로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포의 신앙적인 승인은 오로지 “신이여, 죄인인 나에게 은혜로우소서!”라는 고백으로만 표현되는 것이지 교리에 관한 찬성함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자신에 관한 고상한 가르침을 참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는 그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세속화는 그렇게 우리를 권위적 부름말에 다가갈 기회를 박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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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선포는 어떤 말들과 개념들로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선포하는 것이다. 선포된 말 자체에서 주로서 현재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말을 듣는 자를 결단 앞에, 즉 “옛 세계에 속하려는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속하려는가? 옛사람으로 남으려는가? 아니면 새로운 사람이 되려는가?”에 대한 결단 앞에 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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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순수한 선포 안에 있는 한 다양한 사유 방식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고백으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것이며, 또한 그 사유 방식들의 다름으로 인하여 오히려 신학의 지평이 더욱 확장될 것이다. 그 어떤 말로도 그 어떤 사유로도 무한의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는 인간의 유한적인 한계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오시고 있는 그분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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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와 신학자는 같은 내용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자들이며 교회와 신학교는 똑같이 말을 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같은 진리를 서로 다른 언어적 수단으로 표현하는 곳이다.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교회에서 그대로 전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소화해서 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서술어를 풍부하게 함으로써 더욱 깊이 있는 신앙고백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히브리어든지 그리스어든지 영어든지
한국어든지 각 언어적 특징에 따라,각 언어적 감성에 따라서 자유롭게 표현될 때 그 신앙고백은 그 폭과 깊이를 더해갈 것이기 때문이며 통찰 불가능성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은 그럼으로써 더욱 풍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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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그리스도교(가톨릭)의 안전성에 저항했던 루터조차도 그 안전성이 사라지면서 나타난 정치, 경제, 사회적 급변에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중세 가톨릭의 지배구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이데롤로기로서 나타난 계몽주의의 이성과 과학은 20세기 들어 거듭된 실패를 경험하였다. 결국, 1, 2차 세계대전의 대량 살상무기에 의해 녹다운되었다. 이제 어느 것도 분명한 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한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그 이성이 이제는 통제 불능의 이성이 되고 말았으며, 이성의 도덕적 윤리적 통제를 벗어난 과학은 이제 그 자체의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과학을 위한 과학은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우리의 경험들은 루터의 그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것들이다. 이 경험들 속에서 이미 경험한 것들에 대한 적응적 과제와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들에 대한 불안으로 인하여 우리는 혼란과 좌절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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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 받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이다. 히브리인들이 그랬듯이 언제나 하나님을 나의 역사안에 활동하시는 창조주로 인식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지배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하여 나를 개방할 때, 그럼으로써 나의 실존을 회복할 때 그 모든 혼란은 하나님의 미래 안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며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리는 초월적 경험이 현재화될 것이다. 세상 안에 있는 자는 세상을 알 수도, 지배할 수도 없다. 종말적 희망에서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때, 하나님의 부름말에 응하여 결단할 때 비로소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것이다. 그것만이 욥과 바울을 인도하시던 그분에게 온전한 이끌림을 받는 길이며 곧 구원의 길이다. 그리스도인은 물질적 세계 안에 숨겨져 있는 본질의 세계를 찾아 자신의 삶과 화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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