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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 신학적 이해

하나님아들 2023. 8. 11. 22:54

하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 신학적 이해

Ⅰ. 서 론
성경은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하여 언급한다

(창 18:14; 렘 32:17; 32:27; 욥 42:2; 마 19:26; 막 10:27; 눅 1:37; 계 19:6 등).


'전능함'이란
어떠한 것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데
그렇다면 삼위일체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모순되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한편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는
'전능성'의 개념만으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이해하려한다면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에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의 신적 본성과 성격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에서 시작되어야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에 연루되었는가?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그리스도로 하여금 고난받도록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받는가?


이때 몰트만은
최고의 존재로서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루터의 신학을 수용하고 있다.


본고를 준비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은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능성을 드러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십자가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방법인가?"하는 것이다.


이에 본 연구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과
 십자가 사건의 관계'의 복잡한 끈들을 하나씩 풀어보고자 한다.


Ⅱ.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피조물의 죄악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인자하게도 자기 자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하셨다.
그리고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창 17:1; 35:11; 출 6:3 등)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전능하심이 '하나님의 속성'(The Attributes of God)이다.


왜냐하면 전능이야말로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는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 계시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성(God can do anything)을 언급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행하실 수 없는 몇 가지 사실도 나타난다
(There are some things that God cannot do).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타내는 사역 가운데
창조사역은 대표적인 사역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1.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사역
창세기 1장 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선포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대 역사는
'태초' (히, 베레쉬트; 영, beginning of the universe)에 시작되었다.


창 1:1의 '태초'는
영원 전부터의 '태초' (요 1:1)가 아닌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시작하심으로 개시된 시간의 출발점을 의미한다.


영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존재보다도 미리 존재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천지창조를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분은 '하나님'(히, 엘로힘)이시다.


한편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있으며
그분 안에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선언)하는 것이다.


창 1:1에서 '창조'는
히브리어 '바라'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부터
어떤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한다
(시 51:10; 사 65:17, 18; 암 4:13).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기존의 물질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우주의 기원에 관한 교리는 유일신 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 세상의 문화 속에는 오직 한가지 유일신적 전통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히브리적 기원을 가진 유일신교들이다.
따라서 무(無)에서 창조되었다는 교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히브리어 '바라'라는 단어는
언제나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은 언제나 계속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범죄
창세기 1장 2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남자와 여자)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성경에 나타난 계시에서 비롯되는 주제이다.


이 '형상'은 창조에 있어서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로 (창 1:26),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기는 했으나 파괴된 것은 아니다.


창조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유일하게 나타내는 자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단순히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창 1:3, 6, 9),
인격적인 말씀 (요 1:3)인 창조의 말씀으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 존재인 인간과 언약하셨는데
그것은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이 세상에 출현할 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선이며
그의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 악임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금지 규정을 두신 것은
인간을 괴롭게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만족과 감사의 생활과 더불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는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행위언약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체결한 행위 언약으로서
부정적인 측면만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원히 살리라는 약속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규정은
결코 인간을 협박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엄을 의식하고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임을 가르치기 위해 마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어길 때
죽음에 이르는 한가지 계명만을 아담에게 주신 까닭은
아직 구체적인 계명이 주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가지 계명을 어기면
모든 계명을 어긴 것과 똑 같은 원리가 적용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천지 창조의 장엄함과
무죄상태의 인간의 성스럽고 행복한 모습을 묘사한
창세기 1, 2장과는 대조적으로
3장은 만물이 영장의 타락이라는 슬픈 이야기를 전해준다.


한 천사장의 교만에 기원을 둔
사단 (사 14:12-14)의 가시적 출현에 인간은 너무도 나약했다.


여호와의 명령의 진정성과 확실성을 문제삼아
달콤한 유혹의 밀어를 던진
뱀의 간교한 접근과, 탐욕과 호기심에 눈이 어두워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만 하와의 경솔한 처신은
오직 여호와의 계명을 근실히 지키며 모든 악한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만이 참 경건의 길임을 강하게 주지시킨다 (시 32:6).


Ⅲ. 화목키 위하여 사람이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

1.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육신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인간의 삶을 취하신 성육신의 역사이다 (갈 4:4; 요 1:14-18).


사도 바울은 성육신을 두가지 면에서 인식했는데
하나는 성부 편에서의 성육신 인식이며
다른 하나는 성자편에서의 성육신 인식이다.


성부편에서의 성육신 인식은
바울에게 있어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한 행동이었다.
한편 성자 편에서의 성육신 인식은
바울만이 볼 수 있는 독특한 면에서의 성육신 이해이다.


초대교회 이후 고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과
참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논쟁을 벌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논쟁을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대 교부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가를 잘 알고 있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선언함으로써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세에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리에 추가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 중 기독론에 있어서
가현설적 그리스도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의 집대성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고스의 위격은 성육신에서 합성되었으며,
인성과의 연합은
인성이 독립적인 인격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고
주장함으로서 새로운 논점을 부각시켰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 대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 교회는
모두 칼케돈 회의에서 공식화된 기독론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루터의 교리는
속성간의 교류를 도출해 내었는데,
"그리스도의 양성은 제각기 상대편으로 침투하며,
그의 인성은 신성의 속성들에 참여한다"고 주장하였다.


개혁파 신학에서도 속성간의 교류를 가르치고 있지만,
성육신 후에 양성의 제 특성이
그리스도의 한 위격으로 귀속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위격은 전지하지만
동시에 단지 제한된 지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고,
편재하지만 또한 일정한 시공간에 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이전의 기독론의 출발점은
주로 신학적이었고, 그러므로 당연히 신중심적이었다.
그러나 18세기말이 되면서
좀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에서 출발하면서,
복음서 기자들이 묘사한 예수와,
신학 사상가들의 풍성한 상상력의 소산이며
오늘날 교회의 신조 속에 그 상이 반영되어 있는
신학적 그리스도 사이에 광범하고 유해한 구별이 생겨났다.


이후 19세기의 기독론은
역사적 예수에서 출발하여
철두철미하게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신인간의 범신론적 동일시가 자리잡았다.


자유주의 시대의 도래 및 전성기기를 맞으면서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드뢸취, 헤르만, 하르낙에 의해
정통주의 신학은 약화되었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대학 강의점식으로
정통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에서 활동, 학계(학문적 영역)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칼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으로 20세기의 포문을 열었다.
칼 바르트에 의한
200년 가까이 무너졌던 정통주의가
'신(新)정통주의'라는 이름으로 회복되었다.
칼 바르트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매우 확고하게 옹호하는 학자이다.



초기 바르트(변증법적)의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도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그리스도는 아래로부터 온 분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분이다.
교회 교의학을 쓴 후기의 바르트는 이러한 경향이 약화된다.


이제 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한다"이다.
그래도 바르트는 여전히 위로부터 아래로,
예수의 신성으로부터 그의 인간성으로,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인간인 우리에게로 가는 기독론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행위"와 "주권적 행위"로서
당연히 위로부터 아래로 가는 것이지 그 반대 방향이 아니다.


불트만의 기독론도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들림받은 예수에게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다.
그러나 바르트와 차이점이 있다.


바르트는 예수가 하나님이므로
그는 내게 의미가 있다고 한 반면에,
불트만은 예수는 내게 의미가 있으니까
그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예수는 참 하나님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본다.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한 특정한 하나님 개념을 이미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질문이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경험과
불멸성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출발하였음에 그 원인이 있다.


즉 신적인 본질은 무상하지 않고
죽을 수 없으며, 변화될 수 없고 고난을 받을 수 없으며,
변화될 수 없고 고난을 받을 수 없다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규정들은
예수의 비밀과
십자가에서의 그의 최후에 대하여 적용할 경우,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해결하고자 하였던
바로 다음의 문제들이 제기된다.


영원한 하나님이 어떻게 허무한 인간 속에 있을 수 있는가?
세계적인 하나님이 어떻게 한 개인 속에 존재할 수 있는가?
변화될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육이 될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고난을 받고 죽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보편적인 질문과
또 이 질문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구원에 대한 기대는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하나님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예수의 비밀에 이를 수 있는 이 길은
동시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을 방해하는 거침돌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그리고 이를 위하여
위에서 말한 하나님의 개념을 견지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하나님에 관한,
그리고 구원에 관한 질문이 지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위'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할 때,
'아래'에 있는 나사렛 예수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이 당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를 이해하는 일이다.


한편 전형적인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틸리히와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이다.


틸리히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인간의 상황과 접촉하는 그의 상관관계 신학의 귀결이다.


틸리히의 "비하적 기독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라고 하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역설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실존의 제약 아래서 출현했다고 하는 역설"로부터 출발했다.


틸리히가 제시한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인간 내재적 역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인간 속에 구현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대변했으나",
그와 동시에
그분은 타락한 인간의 "제약" 아래서도 살았다는 역설이고,
그분은 당위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현실적 인간이기도 하였다는 역설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역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참 인간'이다란 역설 대신에
'그리스도는 본질적 인간-실존적 인간이다'가 등장했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지만
참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은 참 인간이지만 현실적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 자체"인 하나님처럼
"본질과 실존의 대립의 너머에" 있지 않았다.
그 대립은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다.


판넨베르크는
그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틸리히와 다르게 구상했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이미 예수의 신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기독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의 근거를 해명하는 데 있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잘못된 점은
그것이 하나님의 입각점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판넨베르크의 구상인
'역사로서의 계시'에서 볼 때,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은 오직 역사 속에서만 계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아래로부터,
곧 역사적 인간 예수로부터
그의 신성의 인식으로 상승하는 기독론'만이 가능할 뿐이다.
예수의 신성 혹은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는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킨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 입증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모든 지상생애는
그의 '행동'과 '운명'에서
철두철미하게 그의 하나님됨과 하나님의 계시였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개방성을
그 본질로 가지는 인간 존재의 계시이기도 하다.
예수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교를 중재하고
그의 운명을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모범적으로 미리 실천함으로써
그 계시는 예수에 의해 능동적으로 성취되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개명(開明)에 있다.


불트만에 의하면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즉 인간의 자기 실존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출발하여
예수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은 위로부터의 기독론,
즉 하나님에 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 속에서 답변을 방해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왜 하필이면 나사렛 예수가 윤리적 모범이요,
혹은 참된 인간 존재의 구원하는 원상이어야 하는가?
인간성, 세계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양심의 평화에 관한 갈망은
왜 모세,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의 애기를 듣지 아니하고
하필이면 예수의 애기를 들어야 하는가?


인간성에 관한 보편적 질문은
예수에게 답변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에 관하여 단지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애기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 존재의 여러 가지 구상들이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관심에서 오는 것은
계몽주의 시대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독교의 '절대성의 요구'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흔히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즉 우리는 정신의 역사 전체에서
더 나은 절대성의 요구를 발견하지 못하였든지
혹은 우리는 우연히 그리고 숙명적으로
기독교적 전통의 역사에 속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에게서 유일한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를 발견하였고,
이리하여 세계를 기독교화하여 오늘날에도 존속케 한
초기 기독교적 신앙의 확실성을 담보로 잡고 주연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결정적 불신앙을 야기하거나
예수를 일련의 영웅이나
인간성의 조력자 중의 한 사람으로 격하할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근거에서
예수의 삶으로부터 출발하는 최근의 모든 기독론은
예수의 이중의 사람의 결말 (즉 십자가와 부활)에서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와 비슷하다.


오히려 자기의 방법에 따라 역사와 이 사회와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의 인간성에 관한 질문을 초월하여 있는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입장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2. 참 사람이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
전장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은
칼케돈회의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주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성육신 교리에서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이 선포하는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하는' 속죄의 사역을 대신한다.


그러면 왜 예수를
그저 뛰어난 인간, 헌신적인 인간이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예수는 틀림없이 인간이었다.
고대 교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기만 하다면
예수도 역시 인간의 곤경을 함께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예수가 참으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있는가?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그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다는 주장은
고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성경의 주장에 합당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Ⅳ. 십자가에 달리신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함'이란

어떠한 것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데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모순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는 '전능성'의 개념만으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이해하려한다면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에 신의 전능성은
하나님의 신적 본성과 성격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화목 신학'과
'십자가 신학'의 이해에서 시작되어야한다.

1. 전능하신 하나님의 화목법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 가운데

'화목'(reconciliation, 화해) 사건은
그리스도 사건의 극적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여섯 가지의 귀중한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법정에서 따온 의인의 은유, 우의로부터 따온 화목의 은유,
노예제도에서 딴 구속, 제사제도에서 따온 화목제물의 은유 등이다.


'속죄'(atonement)란 재물을 대고 죄를 면하는 일이다.
'화목'이라는 용어는 속죄라는 용어의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속죄'(atonement)는
앵글로 색슨어의 기원을 지닌 몇 안되는 신학용어 가운데 하나로
그 뜻은 '한가지 결과에'(at-one-ment)라는 뜻이며,
사람의 죄라는 비극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사 59:2),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놓은 뒤(골 1:21) 그 둘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실제로 헬라어의 속죄에 대한 해석은
화해(the reconciliation)의 뜻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화해는 상호간에 조건을 보고
그 조건에 따라서 화해를 결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속죄의 정의는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된 것을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사역을 통해서 화해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화해시키는 사역을 '속죄'라 부른다.
'속죄'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일이다.
지은 죄를 전에 세운 공로로써 비기어서 없애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부도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며
계속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실천하고,
사람의 힘으로 못할 때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민족 전체의 죄를 속량하는 길이 허락되었다.


죄는 개인이 짓는 것이지만
전공동체가 연대책임을 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공동체로서 계약을 맺은 백성이며
전체로서 그의 뜻을 실현할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수 7:1).


이러한 형태는
예언자 시대에 분명한 형태로 발전되는데
백성의 대표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속죄하게 된다.


죄를 속죄하는데 있어서
중보자의 인격을 바쳐서
백성에게 미칠 징벌을 제한다는 예증이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달랜다든지
신의 호의를 산다는 관념이 없이
죄가 사해지기 위해서 인격자가 대신 징벌을 받고
몸을 바침으로서 이루어지는 이치를 증거한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써
성취하신 위업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된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 관계가
의인의 개념과 함께 화목의 개념으로도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은
화목(헬, ilasthrivon)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


이 말은 원래 제물을 드림으로써
진노를 돌이킨다는 것을 의미한다(롬 3:24, 25; 히 2:17; 요일 2:2; 4:10).


'힐라스테리온'(ilasthrivon)이
전통적으로 "화목"으로 번역되어
바울의 문맥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왔다.


죄인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고,
그의 은혜로운 사랑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원시적인 정령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이나 정령들
혹은 조상의 분노를 달래는 일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동일하게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바울도 자기의 엄격한 의를 증명하기 위해
일종의 인신제사를 요구한
복수심에 불타는 하나님을 선포하였겠는가 하는 의문으로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노와 화목교리에 관한 불쾌함 때문에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의 어휘를 다시 조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흠정역에서
'화목'이라는 말로 번역된
일단의 어군들에 특별히 주의를 집중했다.


여기서 핵심적 문제가 되는 것은
속죄행동의 대상이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G. C. Berkouwer에 의하면
"우리는 화목의 신학이 거의 변함없이
이러한 딜레마로부터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알고 있다.


또한 '인간'이 배타적으로 화목의 대상이며,
성경은 어느 곳에도
하나님 자신이 화목되어 진다는 말을 하는 곳이 없다는
생각이 거의 일치된 생각이란 것을 알고 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화목이 효력을 나타낼 수 있도록 바꾼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아버지께서 근본적이며 본질적으로
사랑과 화목을 수여하시지 않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그의 정결케 함, 그의 희생,
그의 행동의 기초위에 그렇게 하도록 움직여졌다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
드(C.H. Dodd)는 강력하게 주장하기를
이 어군이 칠십인역과 신약성경에 나타날 때에는
속상(贖償, 죄를 도말함)을 가리키고
화목(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킴)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란
죄에 대해서는 재앙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라는
인과 관계 과정 이상의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니코올(Nicole)과 모리스(Morris)는 부인한다.


여기서는 이상에서 다드(Dodd)와
기타 사람들의 주장이
성경적 가르침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만족하고자 한다.


바울은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힐라스테리온' (화목제물, 롬 3:25)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구약성경의 역설이
신약성경에도 반복되고 있는데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진노를 제거할 수단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일 4:10)는 데서 보여진다.


그리스도께서
"자비롭고 충성된 대 제사장"이 되신 목적은
"백성의 죄를 화목시키려"(구속하려)는 것이었다(히 2:17).
그의 화목은 모든 사람을 위해 적절한 것이다(요일 2:2).
일관성 있는 성경적 견해는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유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로써만이 돌이켜진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화목'으로 일컬어짐이 마땅하다.


2. 십자가상의 전능하신 하나님
십자가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속죄의 방법으로
구약시대는 제사장 제도를 두고 동물을 통해서 속죄제를 드렸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림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죄로 인하여 원수가 되었던 것을 화해하게 된 것이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본질적인 중심성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 이하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율법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신칭의는 구원의 원리요 해방의 원리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원리에서
자기 정당화와 자기 업적 과시주의로부터 해방된다.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계승한 루터는
피조물과 역사 내에 있는 업적을 토대로 한 신 인식을 거부한다.
중세의 교회 중심적 사회가 지녔던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에 반대한 루터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해방시키는
복음에 대한 인식을 십자가 신학으로 표현하였다.
중세 후기에
십자가 신학은 수난의 신비를 의미하였던 반면,
루터는 이것을 엄밀하게 사용하여
새로운 신학적 인식의 원리로 만들었다.




시편 22편 주석에 연이어 서술된 '십자가 신학'은
보름스 국회로 가기 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루터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518년 4월 26일에 있었던 어거스틴 수도사들과의
정기적인 신학적 수도회 회의(혹은 하이델베르크 논박)에서였다.


중세 로마 카톨릭이 비인간화되고
공적사상의 구원론을 주장하며
자기 우상화하는 죄를 범할 때
루터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인식이야말로 바른 신앙의 길임을 천명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 능력, 창조를 통해서 보다는
고통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식된다.


따라서 십자가는 모든 것에 대한 기준이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루터는
인간의 자기 의를 부인한다.


하나님 인식과 구원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 인식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인간 사이에 갈등을 초래한다."
이러한 하나님 인식은
마침내 인간의 파괴를 파괴하고, 소외된 자를 소외시킨다.


이리하여 그는 비인간을 인간성에로,
자기의 업적을 통한 자기확증으로부터
하나님의 업적을 통한 신앙적 인식의 길로 인도한다.
이러한 인도의 지팡이요 나침반은 십자가 신학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어떤 한계점이 없는가?
현대 신학에
십자가 신학의 부활을 일으킨
주인공인 몰트만에 의하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한계점은
십자가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의
철학(Werkphilosophie)과 효과적으로 대결시켜서
이 대결로부터
하나의 "십자가 철학"(philosophia crucis)을
형성시키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사실 십자가 신학은
신학 역사상 그리 환영받은 주제는 아니었다.
신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었다고 할지라도
쉽게 무시되거나 잊혀지기 일쑤였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십자가 신학은
교회의 신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여러 교회 전통에서 부활하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칼 라너(K. Rahner)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U von Balthasar)에 의해,
문학에서는
니콜라스 베르자에프(N. Berdyaev)로부터,
정교회에서는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개신교에서는
디이트리히 본훼퍼(D. Bonhoeffer),
칼 바르트(K. Barth), 카조 키타모리(K. Kitamori),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에버하르트 융엘(E. Juengel)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십자가 신학은
몰트만이 신학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지속되어온 신학적 사고의 중심점이었다고 고백한다.


청년 몰트만은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의 해석학적 열쇠를 십자가 신학에서 찾았다.
몰트만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 이해의 한계성을 역사적 한계와
정치적 한계로 구분하여 지적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할 것을 제안한다.


몰트만의 과제는
십자가 신학의 지평을 넓히는 것으로서,
종교이해를 넘어서 세계이해와
역사해방에 이르기까지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다.


몰트만의 저서중 잘 알려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란 책에서
몰트만은
십자가 신학이란 관점에서
기독론, 신론, 인간론, 교회론, 사회비판론 등을 전개한다.
그의 신학 체계의 핵심 개념은 삼위일체론적 십자가 신학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 이해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인 진술을 거부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되어지는 모든 물음들을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이러한 출발점에서 전제는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라는 신학적인 질문이다.
그는 이러한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인 물음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은
이 그리스도의 사건의 핵심 위에 근거되어 있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이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진술을 연결시켜 진술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이 곧 하나님의 고난이다'라고 하는
단순한 등식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등식이 성립할 경우
성부수난설로 빠져 버리는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관계는 피할 수 없는 문제로 귀결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를 벗어나서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시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건을
단순한 그리스도의 단독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사건의 핵심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존재의 한 복판에 서 있으며,
그 인격들을 서로 서로에 대한
그들의 관계 내에서 분리시키는 동시에 결합시키고
또한 그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의 신학적 차원은
우리가 말했듯이
버림받으심과 헌신의 영 가운데 있는 예수와
그 아버지 사이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몰트만의 진술은
성부수난설적인 의미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고난에 대해 진술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의도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진술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죽음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한다.


3. 고난당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가운데

하나의 질문이 발생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고난 받을 수 있고, 또한 죽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하나님의 고난 혹은 죽음에 관한 문제가
제기될 수 밖에 없는 근거를
전통적인 유신론에서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중세 시대 때부터 시작된
유신론적 신 존재 증명에서
정의되고 있는 하나님은 고난과 거리가 먼 존재이다.
반대로 그가 진술하고자 하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함께 하는 하나님이다.


몰트만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주론적 하나님 증명에서 밝혀진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도출된 결론의 전제는
인간의 이성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가진 이성으로 더 이상 질문이 될 수 없는 것,
최종적인 것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하나님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은
"최초의 원인(causa prima), 최초의 원동(primum movens)
스스로 필연적인 존재(ens per se necessarium),
최고의 존재(maxime ens)"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우주론적 증명은
인간이 가진 이성의 가능성과 그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인간이 신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인간 자신의 신격화를 위한
릇된 남용으로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비판한다.


몰트만은 이러한 최고의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부정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수용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수용을 통해,
낮아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인식될 수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순과 저항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즉 하나님은 여기 현실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은
현실 속에 있는 그의 업적을 통하여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죽임으로써 살리기 위하여,
비판적으로 말하면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으로 하여금
활동하시도록 하는 믿음의 고통 속에서 그의 고난을 통하여 인식된다.

수난(고난)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체포당하고

로마 군인들에게서 고문받는 사건으로부터 비로소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훨씬 더 일찍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갈리리 지역,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권력과 불의
그리고 로마의 폭압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려고 결심한 순간에 이미 시작된다.


Ⅴ. 결 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에서

십자가야말로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하나님 이해를 비판하는 중심점임을 천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