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예정론과 숙명론
김성주 목사(서울 언약교회)
기독교 예정론이 숙명론인가?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 예정론이 이방 종교의 숙명론과 유사한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기독교 예정론과 숙명론은 그 성격이나 의미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이것을 밝혀가기 위해서 먼저 숙명론의 발생적 기원과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숙명론의 발생적 기원과 성격
숙명론이란 인간의 생사화복이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냉혹한 필연적인 법칙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숙명론적이다. 또한 뚜렷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숙명론적 사고 방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널리 펴져 있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
자유를 그렇게도 희구하는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자유와는 정면 충돌하는 숙명론적 사고 방식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명이야말로 타락한 인간의 모순되고 적나라한 모습을 해부해 가는 흥미진진한 탐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숙명론의 발생적 기원을 살펴보기로 한다.
숙명론의 발생적 기원--인간의 심리적 도피
인간은 출생사건부터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으며,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의지와는 반해서, 혹은 불가항력적 사건에 의하여 심각한 불행과 참담한 정황을 겪기도 한다. 또한 어김없이 죽음이 찾아옴을 감지하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에겐 더욱 죽음에의 공포가 닥치고 만다. 이러한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예측 불허의 불안한 삶의 정황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심리적 안전장치를 강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숙명론이라는 것이다.
삶의 본질적 속성인 고통, 불행, 죽음 등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조건 지워져 있기에 그것에 대한 항거나 저항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다만 숙명을 자신에게 주어진 몫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큰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왜 그 불행이 생겼는지 생각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든가, 그 불행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 본다든가, 또한 그 불행으로 말미암아 예견되는 참담한 미래,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이미 현존하는 불행한 현실을 더욱 괴로움으로 몰아가는 무의미한 시도라는 것이다.
이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은 닥쳐진 불행이 숙명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체념적으로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왜 그러한 일이 일어 났는 가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인 질문도 원천적으로 봉쇄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심리적 도피 장치인가!
이러한 심리적 이유에 의해 대부분의 이방 종교는 숙명론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 마호멧교의 숙명론, 유교의 천명사상 등이 모두 이를 증언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인간의 역사 변혁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철학사상 가운데서도 숙명론적 경향의 사고방식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동양철학의 최고의 고전인 주역이 바로 운명론적인 점을 치는 책이었고, 서양 희랍사상의 대전제인 모이라(moira)라고 하는 운명관은 모든 희랍 비극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스피노자, 니체의 운명에의 사랑(amor fati), 야스퍼스의 한계 상황, 하이데거의 던져진 존재, 칼 막스로 대변되는 역사결정주의(historicism) 등은 모두 그 뉘앙스나 의미에 있어서 약간씩의 차이를 갖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숙명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숙명론과 자유의지론의 모순
그러나 그야말로 숙명적으로 자유를 희구하고 자기 실현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는 체념적 숙명론을 일관되게 그리고 철저하게 유지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냉혹한 숙명론 옆에 선택적 인간의지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주역 점에서 보여지는 운명론처럼 자신의 운명이 마음먹기에 따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고, 서양에서는 니체의 용어대로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라고 함으로 주어진 운명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선택적 자유의지를 주장하였다.
이처럼 사실상 모든 인간의 철학체계는 양립 불가능한 모순인 숙명론과 자유의지론, 이 양자의 기묘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유의지와 숙명론간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논문, 손봉호,“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손봉호,1978)을 참조 할 것.
이것은 이방 종교와 철학의 자기 모순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되며, 또한 숙명론이 안고 있는 위험을 밝혀 볼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숙명론은 그 이론의 출발에서부터 인간의지의 무력성과 무의미성을 전제하는데 그것을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어 붙이면 결국 허무주의에 이르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차마 이 숙명론을 삶의 모든 부분에 철저하고도 일관성 있게 적용시키고 살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인간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자유, 책임, 존엄과 같은 것들이 환상적이고 공허한 것이 되며 궁극적으로 허무주의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들어 낸 이론이 전술했던 자유의지론(doctrine of free will)이다.
살아가면서 성취하는 일들, 인간적으로 행복한 일들이 생겨나면 그것을 숙명에 귀착시키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 자기 영화본능이자 죄성이다. 문화적 업적과 성취, 인간적 행복, 훌륭한 예술작품, 과학적 발명, 역사적 유산 등은 모두 인간 자신의 의지의 산물과 자랑물로 간주한다. 이처럼 인간은 양립 불가능한 숙명론과 자유의지론을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각각 적용시켜 믿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잘되면 제 탓이고 못되면 운명(조상)탓이다’. 이 얼마나 간교한 철학의 자기 기만적 이론인가! 이처럼 모든 철학은 숙명론과 자유의지론의 모순된 역학관계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고대에 갈수록 숙명론이 강하고 현대에 올수록 자유의지론이 득세한다.
숙명론은 문화적 허무주의를, 자유의지론은 문화적 제국주의 위험성을 각각 내포한다. 인간 이성과 의지의 선함을 믿었던 18세기 서양 계몽주의와 진보사관은 자신의 문화를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야만스러운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서양의 세련된 문화를 퍼트려야 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그 곳으로 쳐들어가 경제의 수탈, 정치의 억압, 사회의 차별을 오만스럽게 저지런 문화적 제국주의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20세기초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지의 선함을 믿는 낙관적 자유의지론은 그것이 자기 기만임을 깨닫고 다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다시 동양 고대의 운명론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 운명론이 가지는 위험성을 왜 모르는가? 운명론은 반드시 음성적인 허무주의와 퇴폐, 그리고 방종을 갖고 오게 되어있다.
이 양극단이 가져오는 딜레마를 벗어날 길이 없는가?
철학적으로는 없다. 왜냐하면 철학은 숙명론으로 이 양자의 모순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 숙명론의 발생적 기원과 성격을 요약해 보면, 숙명론이란 인간이 자신의 고통, 불행, 죽음 등과 같은 실존적이며 심각한 문제를 대처해 나가는 심리적 안전장치일 뿐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는 형이상학적 맹목적 신념일 뿐이다. 숙명론이 인간에게 일시적으로 가상적인 심리적 위로를 주는 듯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허무주의와 도덕적 타락의 원천이 되고 만다.
2. 예정론과 숙명론의 근본적 차이점
앞 절의 논의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자기 보호 장치인 이방 종교의 숙명론은 기독교 예정론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와 설교가들은 기독교 예정을 숙명론과 동일시하여 숙명론이 가진 위험성을 예정론에 귀속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절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기독교 예정론과 이방 종교적 숙명론을 첨예하게 대비시키고 그 차이를 밝혀 보고자 한다.
1) 주관자의 문제
첫째, 기독교 예정론은 예정의 주체이신 절대 주권자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반면, 숙명론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을 차단시키는 냉혹한 법칙내지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영원 자존하셔서 그의 계획과 뜻 또한 영원하다. 따라서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는 모든 언약성취사적 사건과 아울러 전 포괄적 역사 진행까지 그의 뜻대로 즉 창세 전 그의 작정과 예정대로 진행된다.
그것은 불변하며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영원부터 계획되었으며 역사 과정에서 어김없이 진행된다. 결국 인간구원과 멸망에 관한 예정론이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절대 주권적 속성의 논리적 귀결로서 너무도 자명한 성경적 진리이다.
그러나 숙명론이란 역사의 절대적 주관자를 인정치 않는 인간 철학의 가상적 논리이며 그 정당성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혹은 근거 자체에 대한 물음을 원천봉쇄하는 허구적인 이론일 뿐이다.
2) 삶의 과정의 의미
둘째, 기독교 예정론은 역사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예정대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사건과 그 사건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제반 섭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시적 의미를 갖고 있는 반면에 숙명론은 어떤 사건의 발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허무주의적 성격을 띤다.
예정론을 믿는 성도는 구원이 이미 창세 전에 계획되었고 그 구원이 나에게 적용되기까지의 나의 삶의 모든 주변 상황이 총체적으로 그리고 합목적적으로 경영되어 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성도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믿고 나중에 천국에 가기까지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전폭 의지하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연단의 과정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적 섭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의미있는 섭리적 사건을 깨닫는 성도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의 어떠한 역경과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변의 상황을 감사와 평강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이기적인 나태와 방종에서 깨어나 보다 값있고 진지한 역사적 삶을 형성해 갈 수 있는 신앙적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숙명론은 인간의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대처하는 소극적인 심리적 안전장치로써 위로를 주는 듯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에게 발생되는 사건에 대한 의미있는 해석의 길을 차단시킴으로써 삶의 과정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하여 결국 역사의식을 박탈함으로 나태와 방종을 가져 오게 하는 허무주의적 경향과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3) 삶의 목적
셋째, 기독교 예정론은 예정의 분명한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과 그 결과로 말미암은 성도의 찬미가 있는 반면에 숙명론은 주관자와 과정적 의미가 없기에 그 목적 또한 부재한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성도를 구원시키기로 예정한신 것은 오직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며, 결국은 그의 영광을 성도에게 드러냄으로 은혜의 영광을 성도로 하여금 찬미케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자신의 선행과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과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선물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복음이며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 예정의 목적이시다.
반면에 숙명론은 주관자가 없기에 숙명의 과정적 의미도 궁극적 목적도 없다. 숙명론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불안한 인간이 자신의 심리적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그 목적도 허구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나 본질적으로 달성될 수 없다.
4) 인간 성장의 문제
넷째, 기독교 예정론은 인간의 타락과 죄까지도 하나님의 깊은 경륜 안에 있으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랑치 못하게 함이며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게 되는 교육적 의도가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정론을 믿는 성도는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거나 핑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자신을 정직하게 발견하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기도의 삶, 즉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만을 날이 갈수록 의지하게 되는 신앙의 성숙을 맛보게 된다.
요컨대 기독교 예정론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합리화시키거나 은폐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예정의 본질이란 사랑이 배제된 이방 종교의 냉혹한 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은혜의 예정을 신실되게 지키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예정의 본질을 깨달으면 결코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지 않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 허물의 인정이란 용서와 사랑 앞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신 사랑 앞에서의 자기 인정은 진정한 신앙 성숙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 종교의 숙명론은 이와 같은 인간의 성숙을 함축하는 기독교 예정론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세상 만사가 인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난, 그리고 그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인격적 법칙일 따름이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불가항력적인 불행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도피 장치 혹은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자기 합리화의 논리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런 비인격적 합리화의 논리 속에는 인간의 죄와 허물에 대한 자기 반성과 성찰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간구하는 기도가 자리 잡을 수 없다. 따라서 숙명론의 논리에 의해서는 참된 인간의 성숙을 보장할 수 없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에서 기독교 예정론은 발생론적 기원이나 그 성격에 있어서 허무주의적이며 인간의 자기 합리화의 논리인 숙명론과 본질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 성경적 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결코 기독교 예정론은 숙명론과 동일시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숙명론이 가진 위험성 - 즉 역사의식의 박탈로 인한 나태와 방종 - 을 기독교 예정론에 귀속시키는 오류는 반드시 타개되어야 한다.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론 (0) | 2022.10.13 |
---|---|
기독론 정리 (0) | 2022.10.12 |
언약신학과 조직신학 (0) | 2022.09.21 |
신(神)에 대한 여러 관점들 (0) | 2022.06.17 |
종교 다원주의란 무엇인가? (0) | 2022.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