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의 기독교강요 읽기 016
제 1권 13장 16-20절 삼위(三位)의 구별과 일체성
16절 하나님의 일체성(一體性)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자신을 한 층 더 명백하게 계시하셨던 것처럼 삼위(三位)에서도 보다 친밀하게 자신을 알려 주셨다. 그러나 많은 증거들 중에서 우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았다.(엡4:5) 그는 믿음이 하나이기 때문에, 주도 하나이며, 또한 그는 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만일 세례를 통하여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경건으로 인도 되었다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셨던 그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실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라고 하셨던 이 엄숙한 지상명령에서 주님께서는 “신앙의 완전한 빛”이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에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아주 명백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주 명백해지는 사실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三位)가 존재하신다는 사실이다.
실로 믿음은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해야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과 연합하고 또한 그분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만일 신앙의 종류가 여럿이라면 신(神) 또한 마찬가지로 여럿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쉽게 성립된다. 그런데 세례는 신앙의 성례전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을 우리에게 확증해 준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시는,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분을 떠나서는 세례가 허락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명령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 해 주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그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고한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라고 결론짓는다. 아리우스파가 성자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실체”를 성자에게서 배제시킨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위였다. 마케도니우스파도 역시 이와 같은 광란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영”(靈)을 단지 인간에게 부어진 은혜의 은사로만 이해한다고 어리석게 역설했다. 지혜, 총명, 진리, 용기, 주님께 대한 경외,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이 지혜, 신중, 용기, 그리고 “경건의 영”이시다.(사11:2) 그리고 은사가 여럿으로 분배 된다고 해서 성령이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도가 주장 한 대로 아무리 은사의 종류가 여럿으로 나누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같은 한 성령”(고전12:11)으로 존재하신다.
17절 삼위성(三位性)
한편, 성경은 성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규명함에 있어서 그 신비의 중대성이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신중히 다루어야 하는지를 경고한다. 그리고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내게 대단한 기쁨을 주는 구절이다. “나는 즉시 삼위(三位)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유일성(唯一性)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곧바로 유일성(唯一性)을 상기하지 않고는 삼위(三位)를 분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각을 혼란하게 만들어 하나로 즉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식의 위(位)의 삼일성(三一性)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실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지시되는 이 하나님의 명칭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구별이지 분할이 아니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말씀들은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슥13:7) 왜냐하면,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요5:32, 8:16)라고 성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성부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같은 말씀을 하려는 데 있다.(요1:3, 히11:3) 말씀과 구별되지 않고서는 성부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지상에 오신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바로 성자 그분이시다. 성부는 죽지도 아니하시고, 부활도 아니 하셨고, 다만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자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구별도 성육신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성자께서는 이에 앞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1:18)이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자께서 인성(人性)을 취하기 위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기 전에는 아버지의 품속에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분은 벌써 그 이전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자신의 영광을 아버지와 더불어 누리셨던 것이다.(요17: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이 성부와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요15:26, 14:26)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요14:16) 또 다른 곳에서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다른 분”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성령이 자기와 구별된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던 것이다.
18절 성부, 성자, 성령의 차이
이 차이점을 보다 분병하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적인 사건으로부터 비유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서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교부들은 가끔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類推)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誹謗)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妄想)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도 또한 온당치 못하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곧 성부는 활동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령님께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한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또한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三位)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먼저는 하나님을, 다음으로는 그로부터 나온 “지혜”를, 그 다음으로는 그 계획의 작정을 수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부터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생된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지만, 로마서 8장보다 더 분명하게 진술된 곳은 없다. 여기서는 동일한 영이 아무 차별 없이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9절), 때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11절)으로 불리고 있으나, 그것은 조금도 부당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역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다고 증거 하였으며,(벧후1:21, 벧전1:11) 또한 성경은 자주 성령을 “성부 하나님의 영”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9절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더욱이 이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일체성(一體性)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함께 똑같은 영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재(實在 hyhostasis) 안에서 이해되며,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가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가 전적으로 성부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하셨다.(요14:10) 우리는 이 증언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저술가들 역시 본질의 차이로 말미암아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분할된다고 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구별을 제시하는 이 명칭들은 각자의 상호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단 하나이신 실체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른 방법으로 생각 할 때는 다소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고대 교부들의 견해가 조화를 이룬다. 저들은 어떤 때는 성부가 성자의 기원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느 때는 성자가 신성과 본질을 스스로 소유한다고 함으로써 성부와 함께 한 근원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곳에서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에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분을 유일하신 근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삼위일체론”(On the Triniay) 제 5권 전(全)권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였다. 숭고한 신비 속을 교묘하게 파고들어가 많은 공허한 사색의 주위를 배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술한 삼위(三位)간의 관계에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욱 안전하다.
20절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
그러므로 진심으로 절제를 사랑하며, 믿음의 분량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면 유익할 것이다. 즉,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本質)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人格) 또는 세 실재(實在)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 또한 지칭한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位)들의 사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위(位)들의 독자적인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언제나 성부에게 특별히 적용된다. 이와 같이 하여 본질(本質)의 단일성(單一性)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 했던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하였다. 이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本質)의 단일성(單一性)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리켜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떠한 상관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라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이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12: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그런데 여기서의 “주”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보자의 위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라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이 “큐리오스”(주)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실례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바울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1, 욜2: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의미에서 주님께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첨가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영(靈)”(요4: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체적인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전체적 본질의 한 실재(實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알고 있다.
[출처]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1.13.16-29)|작성자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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