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기독교강요에서 정리한 칼빈의 삼위일체 제시

하나님아들 2022. 4. 23. 23:01

기독교강요에서 정리한 칼빈의 삼위일체 제시

 

 

 

조창훈 목사. 우수영 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조직신학 박사 Ph.D. Cand.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들에게 말하라 동일본질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동일본질(consubstantialem, consubstantial)이라고 말하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셋이다고 말하라(Dic tres esse, Say they are three) 그러면 그는 그것이 곧 세 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인격들의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하라(Dic in una Dei essentia personarum Trinitatem, Say that in the one essence of God there is a trinity of persons)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多辩)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 잡혀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실체의 통일성(substantiae unitatem, unity of substance)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una essentia, one essence)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일체(Trinitate, trinity) 안에 인격들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런 관계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Inst. 1.13.5.

 

조창훈

 

칼빈은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데 존재방식같은 표현을 반대한다.

가이사랴의 바실과 니사의 그레고리는 성령의 위격은 단지 성부 하나님의 다른 존재 방식(mode of being)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설명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칼빈은 바르트도 반대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칼빈은 실재라는 말로 정의한다.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지만, 실재하는 구별이라는 뜻이다. 동방교부 중에서 바실리우스와 니사의 그레고리가 존재방식으로 정의하는 전통을 따르지 않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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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수, 교회의 신학자(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참고

유해무, “삼위일체론”, 한국칼빈학회, 칼빈 신학 해설(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참고.

 

 

삼위일체 용어는 부득이 사용하게 되었다

어거스틴도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히포스타시스(hypostasis)’라는 용어를 부득이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떻게 셋인가(how Father, Son and Spirit are three)에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 강요된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Inst. 1.13.5.

 

동일실체(consubstantialis)라는 말을 동일본질로 사용한 이유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말을 번역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substantia, substance)는 하나라는 것을 가리키는 동일본질’(consubstantialis, 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하였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tia, substance)라는 말을 본질’(essentia, 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였다.” Inst. 1.13.5.

 

이단들의 공격에 동일본질이란 말은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방어였다.

칼빈은 말한다.

아리우스파의 교활함을 그 도피처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며 성부와 동일본질(consubstantialem, consubstantial)이시다고 선언하였다. 아리우스파가 동일본질(homoousiou, homo-ousios)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저주하기 시작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본질(consubstantialem, consubstantial)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바로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와의 사이를 구별 지은 것이었다.

또한 교부들은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세 특성들이 한 하나님 안에서 참되게 인식되어야 한다“(three properties must truly be recognized in the one God)고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한 교활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simple truth)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그들은 인격들의 삼위일체가 한 분 하나님 안에 존재하거나, 동일한, 하나님의 통일성 안에 존재한다(in uno Deo subsistere, seu (quod idem erat) in Dei unitate subsistere personarum Trinitatem, a trinity of persons subsists in the one God, or, what was the same thing, subsists in the unity of God)고 확언하였다.” Inst. 1.13.4.

 

이단자들은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용어들을 비판하지만 이 용어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칼빈은 말한다.

이단자들은 인격(person)’라는 말에 대하여 악담을 토하고 또한 어떤 까다로운 사람들은 그 말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그러나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한 분 이상은 아니시다라’(three are spoken of, each of which is entirely God, yet that there is not more than one God)는 우리의 확신을 결코 허물어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 그 용어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 분쟁과 논쟁의 온상이 될지도 모르는 외래어를 유포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경의 테두리 안에 우리의 사상과 용어를 제한시키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외래어가 유포되면 우리는 말의 논쟁으로 극도로 지치게 되고 언쟁으로 진리를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는 추악한 말다툼으로 사랑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 외래어라고 한다면, 그들은 실로 부당한 법칙을 부과하여 성경의 구조에 맞추지 않은 성경 해석을 전적으로 정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말하는 소위 "외래어"라는 것이, 신기하게 고안되어 미신적으로 변호되고 건덕(edification)보다는 논쟁을 일으키며 불순하고 무익하게 사용되고 또 거친 말투가 경건한 자들의 귀를 거스리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의 단순함(the simplicity of God's Word)에서 떠나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진심으로 저들의 건전한 의견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어리석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어떤 표준(some measure)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a sure rule)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그 설명은 성경 자체의 진리를 성실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적당한 때에 사용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실례가 충분히 있다. 더욱이 교회가 삼위일체(Trinity)’(Persons)’라는 말을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들 용어가 새로운 것이라 하여 비난한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진리의 빛을 무가치하게 만든 자로 정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진리를 쉽고 명백하게(plain and clear) 하는 그 용어를 그는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Inst. 1.13.3.

 

삼위의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들- 경륜, 세대, 특성들, 관계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내적 관계를 영원한 관계로서 말한다. 그는 삼위 사이에는 경륜’(economy), ‘세대’ (dispensation), ‘성질’ (disposition)이라는 용어를 자주 채택하였다. 창조와 구원의 사역에서 각각의 위격들은 독특한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용어들은 모두 다 위격들의 영원한 신비적 교류와 공유를 표현하려는 단어였다.

칼빈은 삼위의 구별된 특성들에 대하여 구별들”(distinctiones), “특성들”(proprietes), “상호 관계들”(relationes)의 개념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였다.

칼빈은 말한다. ”만일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일 뿐 아무런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1:1)라고 한 요한의 말은 잘못된 말이 될 것이다. 그 즉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첨가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우리에게 통일성으로서 본질(the essence as a unity)을 상기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성부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실재(subsistentia, subsistence)의 관념이 명백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분리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tribus subsistentiis, three subsistences)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특별한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Now, of the three subsistences I say that each one, while related to the others, is distinguished by a special quality)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관계(relation)는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단순하게 또는 막연하게(indefinita, indefinate) 언급할 때에는 이 말은 성부 못지 않게 성자와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대조될 때에는, 언제나 각자의 성격(character of each)에 의해 상호 구별되는 것이다. 셋째로, 개별적으로 각자에게 고유한 것(whatever is proper to each individually)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는 것(incommunicabile, incommunicable)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지(as a distinguishing mark)는 성자에게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통일성(essentiae unitate, the unity of essence)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distribution or economy)이 있다고 하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정의를 올바르게만 이해한다면 나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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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 “칼빈의 삼위일체론, 그 형성과 독특성과 중요성”, 한국칼빈학회, 칼빈연구창간호(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4), 참고.

Are Barrs, “삼위일체”, The Calvin Handbook, 칼빈 핸드북, 김귀탁 역(서울: 부흥과개혁사, 2013), 참고.

Inst. 1.13.참고.

 

기독교강요. 칼빈삼위일체론 요약

1. 하나님은 한 본질(essentia)안에 세 위격들(hypostases)로 존재한다. Inst. 1.13.2.

라틴교부들은 위격들이란 표현을 인격들(persons)으로 사용한다. Inst. 1.13.2.

2. substistence(실재)란 표현은 위격(hypostasis)과 같다. Inst. 1.13.6.

3. 하나님의 한 본질(essentia)안에 세 인격들(persons). Inst. 1.13.16.

4. 하나님의 한 본질(essentia)안에, 세 인격들(persons) 또는 세 위격들(hypostases) Inst. 1.13.20.

결론

1. 하나님의 한 본질(essentia)안에 세 위격들(인격들, 실재들, hypostases = person = substistences)이 존재한다. Inst. 1.13.2.

2. 성부는 순서상(in order) 1위이며, 모든 신성과 신격(the whole of divinty and deity)의 시작이다.

 

(조창훈)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주석과 논문에 나타난 삼위일체와 기독론, 인간론에 관한 라틴어와 영어 용어들을 아래와 같이 통일성 있게 번역하고 정리하고자 합니다. 이전에 한번 올렸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자주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 인간론을 다룰때 동일한 용어가 반복되므로 정리하였습니다.

essentia, essence는 본질로, hypostasis(hypostasis의 복수형은 hypostases)는 위격으로, persona, person은 인격으로, subsistentia, substistence는 실재로, substantia, substance는 실체로, deitas, deity는 신격으로, divinitas, divinty는 신성으로, unitas, unity는 통일성으로, trinitas, trinity는 삼위일체로 번역할 것입니다. 또한 separated는 분리로, distinguisheddistinction는 구별로, divided, division은 분할로 번역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유언언약과 같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가 필연적이었다.

히브리서는 헬라어로 쓰였다. 여기서 사도는 언약( ברית , 브리트)을 언약(a covenant)과 유언(a testament)의 의미가 다 들어있는 διαθκη(디아데케)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사도는 여기서 유언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하나님과 그 백성들은 언약을 맺었다. 하나님은 율법의 언약을 세우는 데(in establishing the covenant of the law) 피를 사용하셨다. 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언약(covenant of God which was made with blood)은 유언(a testament)과 같은 종류와 성격(the same kind and character)을 가진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인쳐지지 않는다면, 그 밖의 것으로는 비준되고 유효하게 되지 않는다”(the promises should not have been otherwise ratified and valid, had they not been sealed by the death of Christ).

유언은 피가 없이 비준되지 않았다. 또한 유언이 없이 피가 속죄를 위해 유용할 수 없었다”(neither the testament was without blood ratified, nor the blood without the testament available for expiation). “그래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It is hence necessary that both should be united). 그러므로 언약의 참된 확립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유언자의 죽음이 필연적이었다”(the death of the testator was necessary).

인간 사회에서 유언의 확정(遺言)은 유언자의 죽음에 달려 있는 것같이, 우리 주께서도 그의 죽음에 의하여 그가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유언을 확증하셨다(9:15-17). 이 유언을 감히 변경하거나 새로운 무엇을 첨가하는 자들은 주의 죽으심을 부정하며 무시하는 자들이다”(For as among men the confirmation of a testament depends upon the death of the testator, so also our Lord has confirmed by his death the testament by which he has given us forgiveness of sins and everlasting righteousness [Heb. 9:15-17]. Those who dare alter, or add anything new to, this testament deny his death and hold it of no importance).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권리나 우리 자신이 매입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는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 나라가 그의 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하여 값 주고 사신 바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다시 회복된다. 바울은 이것을 잘 표현하기 위하여 유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것은 그 분이 우리를 위해 그 나라를 사셨고, 우리를 자신의 형제와 동료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댓가도 없이 우리를 양자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직 값없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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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 Hebrews. 참고.

Inst. 참고.

Sermon. Ephesians. 참고.

조창훈

 

폴 오웬과 박해경의 로버르 레이몬드 삼위일체 비판

폴 오웬은 로버트 레이몬드의 1998년도 조직신학에 나타난 칼빈 해석을 비판하면서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니케아 신조와 정통 교부들의 신학과 다른 것이 아니라 그대로 계승된 것으로 주장한다.

레이몬드는 실체(substance) 혹은 존재(being)와 본질(essence) 또는 본성(nature)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그는 삼위 하나님의 하나이심(일체성, oneness)을 삼위의 실체(substance)의 비슷함(sameness)으로 처리한다. 그는 삼위가 동일한 실체라고 하지 않고, 비슷함(sameness)이란 표현으로 각 위의 본성을 설명함으로써 교묘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의 숫자적 동일성(numerical identity of substance)을 부인한다는 것이 오웬의 지적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아타나시우스를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숫자적으로(numerically) 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숫자적 동일성(numerical identity)를 부정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는 벌콥이나 찰스 하지를 반대한다. 그는 고든 클락을 따라서 숫자적 하나(numerical one)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종 또는 속의 통일성(the unity of a species or a genus)를 주장한다. 세 사람이나 삼십 명은 하나다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한 분이라는 것이다. 박해경, 칼빈의 신론(서울: 이컴비즈넷, 2005), 196.

또한 레이몬드는 갑바도기안 신학자들의 유명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도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니케아 신조는 아들의 자존성과 신성의 속성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오리겐의 종속설에 기울어졌으며, 칼빈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관계론적인 질서에서만 종속이지 본질에서가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레이몬드는 삼위일체의 본질에 대해 속의 동일성(generic identity) 의 관점에서만 일체성을 보았다. 실체의 숫자적인 동일성(numerical identity of substance)를 주장하는 정통 교부들의 신학과 칼빈의 견해는 같은데, 그는 다른 것으로 해석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레이몬드의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숫자적 일체성, 즉 유일성(Monotheism) 신앙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 필자는 박해경의 글을 위와 같이 요약하였다. 필자가 박해경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로버트 레이몬드의 글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독자들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스스로 판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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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경, 칼빈의 신론(서울: 이컴비즈넷, 2005), 참고

 

 

 

상호내주(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삼위일체는 영원 속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유출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의 본질(우시아)은 하나이며, 삼위는 휘포스타시스에서 발견된다고 보았다. 서로 다른 위격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원인관계에서 그 발생과 기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성부는 무출생이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했으며,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본질은 위격들이 상호점유, 혹은 상호교류, 상호순환으로 번역되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라틴어로는 써큐민쎄시오(circuminsessio)이다.

동방의 교부들은 상호내주(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칼빈은 이 개념을 사용하여 내적인 통일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삼위는 각각 구별된 하나님이시지만, 서로가 상호 내주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하나의 나누어질 수 없는 신성 안에서 상호 내주하는 인격적인 관계들 혹은 실재들이라는 칼빈의 사상은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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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 성령의 신학자 존 칼빈(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참고.

박경수, 교회의 신학자(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참고.

 

조창훈

 

왕과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멜기세덱

세상 원리에서 낮은 자는 높은 자에게서 복 빎을 받는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서 축복을 받았다. 그는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아들였다. 또한 멜기세덱을 하나님의 대표자로 여기고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더 높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인들보다 우월하다. Comm. Hebrews. 7:4,6,8.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시편에서 다윗은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은 두 가지 닮은 점이 있다. 첫 번째는 의의 왕이다. 그리스도는 화목의 자유로운 행위로 우리를 의롭다 여기셨다.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의를 나우어 주신 의의 왕이다. 두 번째는 평강의 왕국이다.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는 나라는 평화가 있다. 평강은 의의 열매이다. 평강은 조용하고 편안한 양심을 주는 내적인 평강이다. Comm. Hebrews. 7: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다윗의 합법적인 계승자였던 웃시야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하다가 문둥병으로 채찍을 맞았다(대하26:21). 그러나 멜기세덱이 이 두 가지 직분을 함께 갖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입히심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 실증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이 직분이 더욱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멜기세덱이 왕과 제사장 직분을 가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왕과 제사장 직분을 가질 것에 대한 예표였다. 이 새로운 왕 안에서 제사장의 거룩한 직분이 면류관 및 보좌와 함께 결합될 것이라고 한다. 또 사실상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은 우리 구원의 성취 여부가 달려 있는 지극히 중요한 전환점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보자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Comm. Psalms. 110:4.

멜기세덱을 통하여 예표된 것은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나타났다. 멜기세덱은 그의 사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징이었다. Comm. Hebrews. 7:3.

멜기세덱은 단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의 위엄은 영원하다. 그러나 레위 사람들의 직분은 일시적이다. 이들은 죽을 운명의 사람들로서 그들의 생명에 끝이 있는 것처럼 직분도 언젠가 취소됨을 말한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죽음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함을 입증한다. 그렇다고 멜기세덱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Comm. Hebrews. 7:8.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의 참 사람 되심을 부정했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심을 강력하게 부인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지성(nous)은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신적 로고스라 주장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은 오직 로고스 그 자체라고 했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 간의 구별을 용납하지 않았다. 훗날 칼빈과 개혁신학은 인간의 육체와 그리스도의 혼이 태어났고 고통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벌써 아폴리나리스는 거부하였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가 전적인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멸해야만 하고 또 인간의 영을 소유하지 말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폴리나리스는 각 개인은 육체(sars), (psyche), 그리고 지성(nous)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3분설이라 불리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성경적 뒷받침을 받지 못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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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old O. J. Brown, Heresies, 교회사 안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 라은성 역(서울: 그리심, 2006), 참고.

 

복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Comm. Ephesians. 3:4.

복음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비밀이다.” Comm. Colossians. 1:26.

복음은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Comm. Colossians. 4:1-3.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비밀(the mystery of Christ)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 복음이라고 이해한다.” Inst. 2.9.2.

[출처] 조창훈 목사가 기독교강요에서 정리한 칼빈의 삼위일체 제시|작성자 고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