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선교사! 목회자란!

목사의 사생활론

하나님아들 2021. 12. 25. 14:46
목사의 사생활론


오늘의 조선을 살펴보고 우리 교계를 볼 때마다 우리 목사의 직(職)이 얼마나 중한 직분임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고 그 육신을 붙들어 지도해 줄 사람은 오직 목사밖에 없고, 그 가엾은 사정을 보고 탄식하며 뜨거운 눈물 흘릴 사람 또한 목사밖에 없는 줄 압니다.
목사 외에 그 누가 참 생명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예전에 없던 위인이 나와야 되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천지를 뒤흔들어 놓는 혁명가가 나와야 하겠습니까.
우국지사(憂國之士)입니까.
혹은 흔히들 말하는 사상이나 이념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시대의 변태적 산물인 맑스주의나 독재주의로 가능할 것입니까.
사상이니 도덕이니 문화니 하지만 다 근대의 저열한 유물사상을 좋아하는 자들이 말하는 일종의 관념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하등의 믿을만한 데가 조금도 보이지를 않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혼란과 부패와 퇴폐, 그리고 연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들 밖에 없지를 않습니까.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 사람들을 과연 누구의 손에 맡기고 평안을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조선에 대해 심각한 자각이 생길 때마다, 교단에 나서는 사람들의 직책이 무겁고 그 사명이 더욱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몇 가지 자성과 희망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생활
종교생활, 종교생활 하지만 참된 종교생활이란 어떠한 것이며, 교역, 교역하지만 참 교역자, 능력 있고 충성스러운 교역자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기도생활이 곧 참된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기도 없는 종교를 누가 참 종교라 하겠으며 기도의 은혜를 받지 못한 교역자를 누가 믿음직한 지도자라 부르겠습니까? 참 목사의 참된 생활 전부가 기도의 유산이요 기도의 대답이어야 할 줄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목사의 생활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나, 귀하여 가치 있든지 천하여 보잘 것 없든지 하는 것은 모두 다 기도생활에 달려 있다고 절실히 느낍니다. 이제 나는 교회를 섬기는 데에 있어 나의 가장 큰 결함이요 약점이 기도의 부족임을 깨닫고 언제나 탄식하며, 특별한 은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의 설교가 기도의 대답이 되고, 우리의 교훈이 기도의 대답이 되고, 우리의 실생활이 기도의 반응이어야 할 터인데, 기도를 잊은 설교와 교훈, 더군다나 우리 생활이야말로 비참한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기도 없는 우리의 말과 행위는 곧 교회와 세상에 위선의 도를 전하여 주는 좋은 본보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네 따위가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주님은 왜 적막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셨으며(눅 5:16) 왜 대중을 떠나 기도하셨으며(눅 9:18) 요단강 가에서 왜 기도 하셨으며(눅 3:21) 왜 고요한 산으로 가서 기도를 하셨으며, 왜 겟세마네에서 피와 땀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셨습니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문제의 대답을 물어보신 때도 기도하신 때였고(눅 8:18) 산상에서 변화하실 때도 기도하신 그 다음이 아니었습니까(눅 9:28). 기도는 주님 생활의 영적 호흡이었고, 큰 생명과 큰 생명의 응답이었습니다. 시련을 겪으실 때에도 기도요, 슬프고 외로우실 때에도 기도요, 뜻이 이루어졌을 때나 상심하였을 때나 기도로써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셨습니다.

기도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주님의 생활이었습니다. 최후에 십자가 위에서도 죄인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숨을 거두셨으니(눅 23:33 이하) 주님께서 시종일관하신 것이 바로 기도 아니었습니까. 주님의 생활도 그러하셨거늘 하물며 우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목사의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예수보다 높습니까? 만물의 때만도 못하고 한나절 동안의 그림자만도 못한 인생이거늘 어찌 기도가 없을 수 있사오리까. 우리가 우리 개인의 구원을 옳게 성취하고, 우리가 받드는 주의 몸된 교회를 주님 뜻대로 지도하려고 한다면 주님이 가르치신 그 명령을 듣지 않고 과연 어디서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만이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유일한 거룩한 처소(聖處)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기도 없는 목사는 참 목사가 아니요, 기도 없는 장로와 제직은 교회의 훼방꾼이요, 기도가 없는 교사는 큰 길 가에서 선량한 백성의 눈을 속이는 요술쟁이입니다.
형이여, 형과 나는 기도하는 목사입니까? 하루에 몇 시간을 기도하고 새벽이나 밤중의 어느 때가 우리의 기도하는 시간입니까? 우리 기도하기로 약속합시다. 그리고 조선 교회의 전도인, 설교자, 교사가 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라 합시다.

둘째, 성서애독(聖書愛讀)
성서는 고귀한 책이요, 만인의 책이란 것은 구태여 토마스 카알라일이 일러준 말이 없더라도 우리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성서는 참으로 고귀한 책이요, 만인의 책입니다. 경서(經書)는 A Book이 아니요, The Book입니다. 성서는 우주의 책이요, 하나님의 책이요, 성서 앞에 글이 없고 책이 없습니다. 성서를 떠나서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혹 자연에서 인간의 이성에서 양심에서 인간 역사에서 종교적 감정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을 수 있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계몽주의적 계시요, 인본주의적 계시요, 하나님의 참 계시가 아니요, 초자연적인 특수한 계시가 아니요, 타계에서부터 온 직접적 계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의 책은 곧 성서 이외에는 없습니다. 성서는 역사책이 아니요, 과학적 철학적 진리나 지식을 주는 책이 아니요, 종교적 진리를 가르쳐 주는 책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책이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고귀한 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서를 믿고, 가르치는 직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서에 대한 이론을 다 잘 알고, 모든 사람에게 성서에 대한 교리를 잘 가르치고, 성서에 대한 주장이 철저하다 할지라도 성서를 참으로 높이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성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성서에 대한 충분한 교리를 배우고 가르칠 지라도 성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몇 시간이나 성서를 읽습니까? 우리는 하루에 몇 장씩이나 성서 본문을 애독합니까? 따로 암송하는 장은 몇 장이나 됩니까? 성서를 높이고 아끼고 중요시하는 사람은 성서를 애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조선 교회의 목사들이 일반적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성서를 잘 읽지 않는 줄로 압니다. 목사가 교회 정치에 밝고, 교회 규칙과 교리에 밝으나 성서에 무식하다면 이 어찌 이상한 일이라 아니 하겠습니까? 기도가 없고 성서를 애독하지 않는 사람들은 은혜나 서로 위로하는 뜨거운 마음을 잊어버리고 생명을 등한시하고 그 진의를 망각한 채, 형사피고인에게 적용하는 일종의 경찰법규식으로 성서를 적용하는 폐단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를 보면 따뜻한 인정을 느끼기보다는 경찰서 사법주임을 보는 느낌이 있다고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일과 그 시간이 중요한 만큼 성서본문을 애독하는 일 또한 큰 일인 줄로 압니다.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제 아무리 큰 일을 하고 목회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모래 위에 세운 건물과 다를 것 없으니 비가 오고 장마가 질 때에는 다 쓰러지거나 크게 무너질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 많고 성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밥 먹지 않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목사가 성서를 읽지 않고 어디서 능력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한 주일이 다 가도록 성서 한 장 읽지 않는 목사의 말을 어찌 신용하며 그 생활을 어찌 신임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성서 본문 읽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치려 합니다.

셋째, 복음전도
기도에 힘쓰고 성서를 애독하고, 그리고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사회개량 운동을 하오리까, 민족운동을 하오리까, 정치운동을 하오리까? 두말 할 것 없이 복음전도가 우리의 유일한 사명입니다. 전도가 없는 교회가 어찌 교회 구실을 하며, 전도하지 않는 목사가 어찌 교회 안에 존재할 권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교회의 타락은 한마디로 말하면 재력이 부족하다거나, 교회의 부속사업이 부진하다거나, 매년 배출되는 목사의 수가 적은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도 크게 짓고 교인도 많이 모이고 헌금도 넉넉하게 거두어지는데 교회가 생기를 얻지 못함은 전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는 목사의 사명이요, 교회의 중심 생명입니다. 전도는 목사가 악한 권세와 싸워 이기는 생활이니 즉 이 싸움을 잘하면 멸망 중에 있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요, 이것 못하면 패배의 슬픈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존재하는 근본 목적이 전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전도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양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전도의 내용을 들여다 볼 때 십 년이나 이십 년 전에 비하여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조선 교회 목사의 설교도 이십 년 전에 들은 그 본문, 그 주제, 그 비유, 그 결론이 아닙니까? 무슨 다른 것이 있습니까? 조선 교회가 안 밖으로 보아서 이만하면 됐다고 하려면 어느 정도의 영적 진보가 있고 향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날이 그 날이니 조선 교회는 말 그대로 앉아 자라는 교회요, 앞을 향하여 달음박질 칠 줄 모르는 교회라 하겠습니다. 그 죄 책이 누구에게 있을까 생각해 보면 열에 여덟 아홉은 목사된 우리의 허물이 아닙니까. 우리는 한 주일 설교를 위하여 기도는 얼마나 오래하고 성서는 몇 시간이나 읽고 참고 서적은 얼마나 많이 독파합니까? 내 기도의 응답이요, 내 인격 생활에 관계된 책임적 전도를 합니까? 기도가 없고 성서애독 없이 어찌 예수와 그 십자가의 도를 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웅변가요, 말 잘하는 목사, 학사, 박사는 될지언정 감히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못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영혼의 생사를 좌우하는 책임 있는 설교를 못하니 어떻게 거리에 나가 외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조선 교회의 목사인 형이나 내가 어찌하여 거리에 나가지 못합니까? 누가 부끄럽고 누가 무섭습니까? 목사로서 전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남들이 우리를 보고 사회 인사인지, 토지 가옥 중개인인지, 정치가인지 목사인지 모르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남들이 왜 우리 목사들을 업신여기고, 교회 안에서 왜 같은 교인들이 목사를 천대하고, 목사는 목사끼리 서로 믿지를 못합니까? 그 까닭이 모두 목사가 목사로서의 직무에 불충하고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려서, 지조 없는 여자들처럼 정부(貞婦)로서의 정조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여 스스로 슬퍼하는 바입니다. 형이여,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나무라기 전에 우리는 이 전도의 사명을 위하여 내 전부를 바치기를 약속합시다.

넷째, 헌신생활
옛날 이태리 중흥의 영웅인 가리발디가 싸움터에서 천군만마를 호령할 때, "내가 가는 앞길에는 환난과 궁핍과 병고와 부상과 죽음이 따르나니 그것이 곧 나를 따르는 자에게 돌아올 상이니 그래도 나를 따를 자 있거든 따라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탄탄대로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이 주님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남기신 주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따른다 하고 그의 참된 교회를 섬기려 하는 우리의 생활은 어떠합니까? 참된 신앙이 있는 곳에 고통이 반드시 따르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철저한 사람에게 반드시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에 말할 수 없고 짐작할 수 없는 곤란이 앞을 막는 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주의 뒤를 따르는 길에 환난과 고통과 시련과 치욕과 죽음이 손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과연 얼마나 주를 위하여 박해를 당하고 주의 택한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피와 땀을 노력의 자산으로 삼았던가를 성찰하며 마음 속을 살펴볼수록 엄청나게 거짓되고 충성스럽지 못하고 빈약하다는 사실에 탄식을 토하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하려 합니다. 나의 신앙과 신학과 나의 교역은 거의가 나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고 주님을 방편(方便)으로 하였습니다. 나만 그러한가 하여 주위를 살펴보면 오늘의 기독교는 한마디로 자기만 위할 줄 아는 자기만족의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인격수양을 위하여, 한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사회개혁을 위하여, 민족전도(民族前道)의 대업을 위하여 신앙을 운운하고 교역을 논하고 있습니다. 수양의 수단을 위하여 윤리적 종교를 말하는 분들이 많고, 사회개량의 수단을 위하여 사회적 기독교를 절규하는 사람들이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얼마나 많은지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무리 곱게 보려고 애를 써도 눈에 들지 않는 것은 사회나 민족에는 입을 다물고 자기 혼자만의 구원을 주창하며 스스로 독선주의에 사로잡혀 자기 만족과 영과 육의 지극한 향락을 일삼는 것이 가장 선한 신앙이고 완전한 교리인줄로 착각하여 자기교만과 신앙 혹은 교리와의 분별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수단이 아니요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그 나라와 의를 위한 수단이 아니겠습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우리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수단으로서 존재하기에 가치가 있고, 교회는 우리의 절대적인 목적으로 있어야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육으로 영으로 절대적인 희생이 있습니까? 부끄럽습니다.

오늘 교역자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찌 구차하게 그 실례를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적인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은 교역자의 입에서 제 아무리 많은 신앙 미담이나 교리변증이 나오더라도 나는 그것을 한갓 위선자의 자기 기만과 진리에 대한 모욕으로 돌리고 더 속지 않으렵니다. 누가 그 사람입니까? 바로 당신이 아니며 내가 아닙니까. 스스로 눈을 감고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댓글0추천해요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