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목회 * 출 처| 목회연구소 Ⅰ. 들어가는 글 목회에 있어서 「영성」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고찰을 오성춘교수가 지은 「영성과 목회」책을 읽고 개론적인 면, 신학적인 면, 그리고 실천적인 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현대 목회에서 신학적 인식의 부족으로 오는 여러가지 부족한 점을 검증하고 오늘날의 목회현장에 적용해 보았다. 특히 Donald G. Bloesch교수가 쓴 「목회와 신학」을 읽고서 그 안에서 논하고 있는 14개의 주제 가운데서 「성경적 설교의 필요성, 예전의 갱신, 세례의 위기, 교회의 권징, 성령의 은사」등 다섯가지의 주제를 선정하여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주제들을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하는 명제를 가지고 이해하고 생각해 보았다. Ⅱ. 본 론 1. 기독교 영성 1. 기독교 영성의 필요성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개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성경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 : 7 ~ 8)"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영적인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 한국교회는 개인의 구원을 중시하는 교회와 사회의 구조악을 개혁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교회와의 사이에 복음이해가 서로 다르고 그리스도인의 사명 해석도 서로 다른 '분리주의적 복음이해'로 시련을 겪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더욱 영적인 훈련이 필요함을 실감하게 된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지금 진실로 예수님이 명하는 제자들을 시급하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시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이 성장을 방해하는 세 가지의 요소들 -죄와 세상 그리고 사탄- 이 있기 때문에, 또한 이 3자는 우리가 성장하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서 온갖 권세를 다 사용하기에 우리는 유독 자기훈련 뿐만 아니라 영성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에 바울 사도는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의롭다함을 받았다' 라고 선언한다. 그럼,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되는가 ? 하는 의문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놀랍게도 갈라디아서 6장 8절은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으려면 영성훈련이라는 통로를 거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영성의 필요성에 대한 요약이자 핵심이다. 2. 기독교 영성의 의미. 「영성」이라는 용어는 유독 우리 기독교뿐만 아니라 스토아 주의, 불교, 도교, 해방신학 등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한자로의 영성(靈性)은 단지 글자 그대로 신령한 성품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된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훈련의 이론과 실제들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영성(Spirituality)이란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인 과정이다. 1. 일반적인 이해 영성은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든지, 또는 누구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영성이라는 말은 자기가 판단할 때 가장 이상적이요 최고의 덕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분명한 인생의 목표를 제시해 주는 하나의 정신을 받아들여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살고 죽는 것을 의미한다. 2. 기독교적 이해 일반적인 영성과 기독교 영성은 비교해서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인 예수의 삶과 인격과 정신을 본받아 살며 그의 성품을 그리스도인 속에 형성하려고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작은 예수가 되어 살고자 힘쓴다. 그러기에 훈련을 강조한다. 또한 기독교 영성은 일반 영성을 뛰어넘는 독특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대체로 일반 영성이 역사적 인격의 정신과 사상과 삶을 본받으려는 인본적인 영성인데 반하여,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과 삶을 계승하려는 인본적인 요소를 가질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우리와 직접적으로 교제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추구하는 수직적이요 하나님 중심의 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의 의미는 다음 네 가지의 정의로 결론지어지게 한다. ?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삶의 구현이다. ?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다. ? 기독교 영성은 주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의 삶이다. ?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3. 기독교 영성의 요소. 많은 학자들이 각기 기독교 영성의 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포괄적으로 기독교 영성의 요소들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어반 T. 홈즈 (Urban T. Holmes)는 5개의 영성의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관계형성 능력이며, 그 관계의 대상은 감각현상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이 관계는 우리의 노력과 별개의 것으로, 감각세계를 초월하는 확장된 의식을 우리에게 부여하며, 그 관계의 경험은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본질을 받으며, 세계 속에서 창조적인 행위를 결단하여, 초월과의 관계의 경험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실제로 세 가지로 압축해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요소는 기독교 영성은 본질이 아니라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동양적인 영성의 주류가 인간의 성품의 수양과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기독교 영성은 인격적인 초월적 존재와 관계를 맺고 사는 삶을 강조한다. 두번째 요소는 그 관계가 감각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간은 초월자와의 관계에서 체험되고 확장된 우리의 인식은 구체적인 역사현장에서 그 본질을 받으며, 그 현장에서 행동을 통하여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4. 성령과 기독교 영성 그리고 교역. 1. 성령 그리스도인은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적,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사탄과 정욕과 세상이라는 세가지의 커다란 적으로부터 늘 시험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적들을 물리치고 여전히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계는 그것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든 노력으로도 진정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친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성령」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령 안에서만 진정한 인격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요, 인격적인 삶이라고 이야기할 때에도 예수님과 갊은 인격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고칠 때에라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리스도인 속에 성령의 열매로 열리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과 성령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 하는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듯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영성, 그러니까 기독교 영성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이 되는 핵심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성령과 영성은 성령의 은사와 영성의 관계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은사는 오늘날 성령운동가들이 말하는 초 자연적인 몇 가지의 은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칭의의 은사,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은사, 말씀과 섬김의 은사들을 말한다. 2. 교역 헨리 나우엔 (Henri J.M. Nouwen)은 영성과 교역의 관계를 "교역은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교역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갇힌 자에게 자유를, 소경에게 다시 보게 함을, …… 영성은 우리를 광야 사막과 산 위로 보내어 기도하게 하는 것이요.……" 라고 정의를 내리면서 교역과 영성이 본래부터 분리된 두개의 영역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 양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의 삶의 양면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교역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고 싶어하는가'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에 지나치게 소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었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가페를 가지고 교역현장에서 하나님의 교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영성훈련의 실제 1. 영성훈련의 요소. 영성훈련의 요소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성경말씀은 누가복음 19장 1 ~ 10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의 사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성의 4단계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준비단계' 이다. 진정한 의미의 영성은 예수님과 인간이 만나는 순간에서부터 이야기할 수 있으나, 인간을 사랑하고 그를 구하고자 하는 열망을 마음에 품고 인간을 찾아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이니시아티브와 하나님을 갈망하여 그분을 찾으려고 자기 집을 나서는 인간의 준비가 없이는 만남의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에는 '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배우고 구체적으로 훈련하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야 한다. 두번째는 '만남의 단계' 이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한 개인 개인을 인격적으로 부르시며,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함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신다. 세번째는 '교제와 사귐의 단계' 이다. 기독교 영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의 삶에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와 영광이 바로 이 교제의 삶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쳐 들어오기 때문이다. 즉 주 예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회개와 변화의 단계' 이다. 영성훈련의 끝이 바로 우리의 회개의 삶이다 여기에까지 이르지 않는 기독교 영성훈련은 사실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영성훈련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는 '사랑으로 기도 드리는 것과 자기의 삶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 자기의 경험의 의미를 명료화시키는 것과 자기의 삶 속에 현존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분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자기만의 시간을 지속하는 고독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을 파악하여 지도하여야 할 것이다. 2. 영성훈련의 기본구조. 영성훈련의 기본구조는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갖는 「골방훈련」,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인 「Q.T훈련」, 하나님이 나의 삶의 변두리로 취급되지 않고 세상도 외면되고 도외시되지 않는 「Q.T와 하나님과 나와 세상」이 있고, 말씀, 삶, 기도, 찬양, 음식, 물질, 죄의 고백과 용서, 인도 사역의 나눔 훈련인 「성도의 교제」, 「예배·찬미·성찬」, 「참여와 봉사」가 있다. 3. 말씀훈련·기도훈련·기도훈련의 실제. 1. 말씀훈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는 대체로 세가지 의미를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신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설교를 가리키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이러한 성경에 우리는 지식훈련과 생명훈련의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 지식훈련은 양적인 훈련에 치중하나 인격변화에 중점을 두는 생명훈련의 방법은 양적 판단을 삼가고 질적인 훈련에 초점을 맞춘다. 이 양자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다 필요한 접근 방법이다. 성경공부의 유형들로는 강의식 성경공부 방법, 모자이크식 성경공부 방법, 조감도식 성경공부, 귀납법적 성경연구 방법이 있다. 말씀훈련의 네가지 유형들로는 신 구약 통독훈련, 성경공부 훈련, 말씀묵상 훈련, 성구암송 훈련이 있다. 2. 기도훈련과 실제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며,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을 함께 바라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보게 하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 기도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세상의 운명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고,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중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기도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예수님이 경계하신 잘못된 기도이다. 기도의 유형은 부르짖음의 기도, 음성기도, 침묵기도, 묵상기도, 영상기도 등이 있다. 기도훈련의 실제에 있어서는 대표적으로 말씀기도와 찬송기도가 있는데 말씀기도는 옛 수도원에서 했던 것처럼 말씀을 한 절씩 읽어 나가면서 그 뜻을 생각해 기도하는 것이고 찬송기도 역시 찬송가의 가사를 생각하며 기도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3.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이상에서 우리는 기독교 영성의 필요성과 의미, 요소를 간략하게 알아 보았고, 교역에서 의 위치를 살펴 보았다. 또한 영성훈련의 요소와 기본구조, 그리고 훈련의 실제를 간략하나마 알아보았다. 이러한 영성의 개념을 오늘의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실현하고 적용해야 하는가 ? 하는 문제는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영성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성령에 의해 도움받기도 하며 교역의 현장에서 절대적으로 교역을 도와주는 주부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같이 거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끊임 없는 연습과 훈련을 쌓아 경건에 이르기를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형식적이었던 말씀과 기도, 찬송의 모습이 이러한 규칙적이고 끊임없는 훈련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참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영성훈련의 목적이다. 4. 목회의 제요소에 대한 신학적 검증 1. 성경적 설교의 필요성 [검증] 아모스의 시대처럼 하나님 말씀의 기갈이라는 말을 우리는 점점 더 흔하게 듣고 있는 때에 우리는 성경적 복음적 설교의 퇴보를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설교는 교인을 가득 메운 교회들에서 여전히 전달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은 풍성히 갖고 있지만, 꼭 필요한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은 부족한 영적 기갈시대에 살고 있다. 포사이드 (Forsyth) 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복음이다. 설교가 이 복음을 죽이고 있다." 라고 주장했으며, 신부 머피 오커너는 오늘날 사회가 점진적으로 비기독교화 되는 것은 설교실패의 탓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부분적으로 설교자들의 기술적 무능성과 영적 평범성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 덧붙였다. 오늘날 성경적 설교의 부재의 이유는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되기 위해 연구를 하고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개신교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중산층을 목회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목회자는 귀족층의 가치와 편견을 초월하기 어렵다. [적용]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어지고 있는 설교내용이 성경적 설교가 되기 위해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첫째,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료나 내용이 아니고, 설교자의 자질 문제이기에 설교자는 바른 신학으로 기반을 갖춘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설교의 위기는 복음적 메시지의 변질에 있다. 이것은 한국교화가 당면한 거대한 위기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설교가 물량주의와 기복주의에 많이 편승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교인들의 교육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말씀은 말씀이기를 원한다. 셋째, 설교는 예언자적 선포가 수반되어야 한다. 설교는 크게 네가지 즉 순수한 전도 설교, 교훈적인 설교, 위로의 설교 혹은 목양설교, 마지막으로 예언적인 설교이다. 특히 예언적 설교는 회개를 촉구하고 이 사회의 부도덕을 지적하고 정치의 부조리를 지적한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법도 즉 명령을 청중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목회자들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열심히 선포하나 간음에 대한 명령이나 신성모독에 대한 명령은 설교하지 않는다. 네째, 성경적 설교의 대표적인 강해설교와 케리그마적 설교가 되어야 한다. 이상으로 한국교회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잘 전달하기 위해서 이러한 명제들을 거듭 인식하고 더 나은 선포와 성경적인 설교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서 21C의 한국교회가 성경과 말씀위에 굳건히 서도록 모든 신학도와 설교자들을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예전의 갱신 [검증] 교회의 머리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요, 교회의 역사는 영적으로 임재하신 성령 하나님의 일이시다. 이러하신 하나님께서 예배를 요구하시기에 예배는 교회의 심장부에 위치하며, 교회의 생명은 예배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예배의 갱신이야 말로 교회 갱신의 최우선적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주일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그리스도 인의 삶 자체가 예배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현장에서 교역하는 목회자들은 수 많은 예배의 문제점들 중 "예배의 신학의 빈곤"을 제 1순위로 지적한다. 예배가 순수하게 하나님께 대한 구속과 감사와 은혜에 대한 경배라기 보다는 복받기 위한 형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예배 신학이 바로 정립되지 않은데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붸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를 너무 중히 여긴다. 그래서 다른 순서는 상대적으로 무가치 내지는 부수적 순서로 지나쳐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몸소 제정하신 성만찬에 있어서는 그러한 경항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독교의 예배는 말씀 예배와 성례전 예배가 올바른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완전해 진다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감정에 호소하는 부흥회 성격의 예배는 질서가 혼란케 되고 무절제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내용없는 감정"으로 일관되어 그 예배를 드린 사람의 생활은 절제와 균형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이같은 현상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것이요, 교회 성장의 지나친 욕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적용] 위에서 논한 문제점들을 갱신할 수 있는 방법과 원리는 무엇인가 ? 여기에서는 이 문제점들을 토대로 한국교회의 예배의 새로운 갱신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예배에 대한 본질적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교제 또는 만남이다." 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공적인, 혹은 사적인 예배에 있어서 예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인식을 철저히 가져야 한다. 그리고 예배 중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이런 윤리적 측면으로부터 예배의 갱신은 이루어져야 한다. 예배는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항상 예배의 처음과 나중이다. 어디까지나 기독교는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강복하심에 대하여 예배자가 믿음 으로 감사에 응답하는 행동이 있을 뿐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측면에서 갱신되어야 한다. 교회 예배가 꼭 이교도들이 드리는 예배와 같은 행위와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기복적인 자세를 극복할 때 교회의 갱신은 이루어질 수 있다. 의식은 하나님의 백성이 연합하여 하나님께 접근하고 나아가는데 있어서 질서있게 하는데 한 가지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은 "하나님의 식탁에서의 예의"라는 말이 있다. 예배 의식의 주의할 사항을 알아보면 첫째, 의식이 예배자의 자발성을 억제해서는 안된다. 둘째, 의식을 외관적, 외부적으로만 지키고 마음의 진정한 느낌을 표현하지 않는 의식은 위식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셋째, 의식이 인간의 명의로나 또는 인간에 의해 행하여지는 가증스런 행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의 의식화, 형식화 현상은 이제 갱신되어야 한다. 3. 세례의 위기 [검증] 성례로서 세례는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여진다. 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현시대의 세례는 예수를 믿는 생명의 신앙과 분리되곤 한다고 한다. 폴 틸리히는 '자연과 성례전' 이라는 논문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성례전이 죽어간다" 고 경고했다. 물론 근래에 이르러 성례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여러 신학자와 교회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빈곤성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이 세례의 위기는 성례전의 신학에 대한 빈곤과 성례전에 대한 교역적, 실천적 중요성의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세례에 대한 성서적이고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이해가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관습적인 세례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고 또 정확한 이해에 서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목회현장에서 강력하게 실천되지 못 한다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할 것이다. [적용]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물로 머리에 흘리는, 삶에서 그저 흘러가는 형식으로서의 세례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서,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묻고 있다. 목회사역에 있어서 세례는 과연 무엇인가 ? 세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하나님의 예식이다. 성 어거스틴은 성례를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징표라고 정의 했다. 분명 세례는 그런 징표이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하나의 수단이다. 단순한 구원의 확신의 의식이 아니라 구원을 주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현대의 세례의 위기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정체성에서 위기가 왔고 목회적 측면에서 그 실천적 의미를 상실했다는 데 있다. 세례가 처음 성례로 주어졌을 때의 감격과 신앙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교인들의 삶과 신앙에 어떤 매개도 촉매도 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른 것이다. 교회와 교역자는 나름대로의 세례준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피상적이고 관계적인 절차로 나아간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당사자만의 의식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축제와 정결한 의식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그리고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개인적인 신앙확립과 더불어 기독자로서의 자의식을 갖추고 선교적 책임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세례이후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때 까지 교회공동체가 제도적으로 공식적으로 교육적 배려를 해야 한다고 본다. 교육의 대상에 있어서도 유아세례인 경우 그 부모에 대한 신앙적 교육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특히 유아를 신앙속에서 양육함에 대한 의미와 방법등에 대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유아세례를 주고 방치한다면 그 아이의 입교는 무의미해 진다고 볼 수 있다. 세례를 현시대에 맞게 의미를 주고 살리려면 성령의 임재가 느껴질 수 있는 목회적인 실천이 있어야 할 것이다. 4. 교회의 권징 [검증] 선교 2세기를 맞는 한국교회는 '참교회' '참교인'의 자성의 소리가 커져가고 있고, 그러한 교회의 질서가 혼탁해져 가는 상황속에서 더욱 더 필요로 느끼며 인식하는 것이 '교회의 치리와 권징의 필요와 목적'이다. 한 가정이나 사회가 살아가는데도 치리가 반드시 필요한데 교회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한 치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가 교회의 영혼이라면 교회의 치리는 인대와 같아서 몸의 각 지체들을 연결시킨다" 고 하였다. 이 치리제도란 '말의 굴레'와 같아서 그리스도의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어거하고 길들이며, '아버지의 회초리' 같아서 마음을 일깨우고 타락한 사람들을 부드러운 그리스도의 영으로 벌을 준다. 따라서 이 치리의 필요성을 거부하고 설교 이외에 "개인적인 충고와 교정" 등을 배격하는 사람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칼빈과 개혁교회의 전통은 이 치리를 강조한다. 그 이유는 루터가 이신칭의에 머무르는 경향에 반하여 개혁교회는 성화, 그리스도인의 생활, 율법의 제3사용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터의 경우는 이 치리의 측면이 너무 약하고 죄가 카톨릭의 경우는 너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치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어지렵혀지지 않기 위함인데, "합당치 않은 사람"에게 떡과 즙을 주는 것은 주님의 몸을 개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과 같아서, 이들에게 수찬정지를 해야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몸이 더렵혀짐으로 이 치리가 필요하다. 세째로 결국 최종의 목표는 악한 자들을 회개시키는데 있다. 현재의 치리의 의도와 목적은 일반법 이해나 사회유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경과 칼빈의 신학 사상을 기초한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자의 올바른 행위를 위한 계명을 등한시, 무시, 불순종,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주권적인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그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명령을 그대로 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교회로서,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 또는 무시하면서 참 교회가 될 수 있을 까? 죄와 타협하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된 사명은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권징의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제자화 교육이 잘 되었다는 서울의 '사랑의 교회'에서도 물의를 일으키는 순장이 있을 경우 다음해에 임명하지 않는 정도의 치리아닌 치리를 행하며 대부분의 교회들도 권징에 대한 사례가 거의 없다. 참된 교회의 보기로서 권징은 시행되어야 한다. 장로교회, 개혁교회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 말씀대로의 성례전 집행과 말씀대로의 권징의 시행을 말하고 있다. [적용] 교회는 성도가 성장해가는 일에 가르침과 권면과 시정하기 위한 징계로 양육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게" 해야 하고, 주님의 모든 분부하신대로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하는 사명이 있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는 지도의 책임이 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구원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행해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생활로 계명과 율례를 지켜야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생활로 계명과 유례를 지켜야하고, 성도다운 의와 거룩한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규율대로 지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땅의 삶에 있어서 우리 각자는 진실로 약한자이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자들을 통하여 믿음에 강화를 위하여 독려하게 하셨다. 아직도 신앙이 어리고 성장과정에 있는자를 말씀으로 교육시키고 알고도 행하지 않는자를 권면하여 행하도록 격려해주고 짐짓 악을 범하는 자를 충고, 경계, 처벌해서 고쳐가도록 회개시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가 되어서 교회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서 교회법 질서가 확실히 세워지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한국교회는 권징의 효율적인 모습을 갖기 위해 권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인으로의 양육이 우선이며 교인들에 따르는 교적부의 활용을 증대시키고 권징을 시행하는 교회의 책임있는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앞에 공정하게 행하여 사적감정이나 이해문제를 완전히 떠나서 사랑과 영적인 권위로써 교인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새워주어야 할 것이다. 이런 지도와 권면과 징계는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는 신자가 거듭난 사람,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런 믿음과 순종은 신자로 하여금 성숙한 자가 되게 하여 나아가서 사회에서 빛된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 봉사를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우선과제는 헌법에 있는 권징이 아니라 교육으로서의 권징이 시급하다 하겠다. 5. 성령의 은사 [검증]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우리가 권능을 받아 온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주의 증인이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인 성령의 힘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일어난 A.D 30년,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기도에 힘써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은사를 체험함으로서 교회가 이 땅위에 시작되었다. 사도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할 때, 이 모습을 술취한 것으로 보았던 성령의 충만한 상태는 분명 이성적인 모습과 육의 눈으로 볼때는 해괴한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재 인식이 필요한 지금은 어쩌면 그 당시의 강력한 성령의 은사의 재창조가 필요하다고 보고 특히, 은사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장로교는 제 교회가 물질과 양적으로만 팽배해져 상당히 존립의 위기라고 하는 현 시대에 다시 한번 성령의 은사와 그 능력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하며 그 어마 어마한 능력을 사모해야 할 때라고 본다. [적용]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교회안에서 역사해야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는 적절한 성령의 은사를 발휘할 장을 교회 안에서 발견해야 된다. 우선 교회 안에 성도들이 보일때 서로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갖도록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먼저 그들이 마음 속에 안도감을 갖게 하고 두려움이 없도록 분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교회에 모일때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느낌과 기대를 가지고 나온다. 교회에 나올때 하나님이 무언가를 말씀해 주시고 행해줄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믿음과 기대감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나온 사람에게 이 앞에 있는 강단에서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역사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교회 안에서 회중들이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임할때 그 안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 다음은 성령의 은사가 교회안에서 진행되기 위해서 바른 조직을 두어야 한다. 모든 조직속에서 하나님의 그 깊으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분위기와 여유가 만들어져야한다. 둘째, 성령의 은사가 교회안에서 바르게 역사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 마음이 불편해지고 거북스러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님앞에서 낮은 물이되기 보다는 깊이 흐르는 강이 되어야 한다. 셋째, 성령의 은사가 교회안에서 올바로 역사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교회안에 함께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의 분위기 가운데 관계를 맺어야한다. 넷째, 성경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하나님앞에서 경건하고 성경적인 지도자가 예배를 인도해 줄때 예배에 참여한 모든 회중이 마음에 참된 안도감과 평안을 느낄 것이다. 다섯째, 우리가 기대치 않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은사가 개발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섯째, 교재권 속에 있거나 그들에게 알려진 사람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끝으로 일곱째, 성령의 은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따라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방법을 통하여 우리가 골고루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그 확신에 근거해서 이러한 성령의 은사를 우리의 삶의 부분 부분마다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Ⅲ. 나오는 글 이상의 고찰에서 두 가지의 큰 맥을 생각할 수 있었다. 하나는 목회에 있어서의 영성의 위치와 의미, 중요성, 그러하므로 영성훈련의 필요성과 실제이고, 다른 하나는 목회에 있어서 신학적 기초와 배경의 중요성, 그리고 바른 신학적 적용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았다. 21세기를 맞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명실공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축복을 풍성히 받은 자들로서, 그리고 복음의 빚을 진 자들로서 그 사랑과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깨어 노력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을 돌이켜 제반 부정적 증상들을 찾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야 한다. 앞으로도 우리는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한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 지금가지 제시한 여러가지 훈련과 적용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올바른 교회가 되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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