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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지도력의 영성적 차원

하나님아들 2022. 1. 12. 15:39

목회지도력의 영성적 차원

*출   처|  백상열 교수(한성신학대학교)
            

1. 변화하는 세계와 목회지도력

현대세계의 특징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변화"라는 말일 것이다. 이 변화는 삶의 모든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변화의 폭이 다양하고도 신속하다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에 있어서의 다양하고도 신속한 변화는 심지어 그 분야의 전문영역에 속한 사람조차도 그러한 변화의 추이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교회를 포함하여 사회의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이러한 변화는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변화를 잘 나타내는 예를 우리는 연세대 한총련 사건을 다룬 신문의 한 만화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대자보를 떼려는 교수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학생. "당신 뭐야?" ". . . . ." 그리고 놀라서 허겁지겁 달려온 아버지를 향해, "당신은 뭐야?" "네 애비다." "애비면 다야?!" 변하는 미래사회는 영적 도덕적 차원에서 특별히 기존의 권위 이상의 새로운 지도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불과 몇 년 후면 인류 역사상 또 한번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바야흐로 21세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뜻 깊은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1999년 12월 31일을 전후해서 세계의 중요한 관광지와 명승지에 이미 예약을 다 해 놓았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각자가 처한 자신의 물리적 영적 도덕적 환경 속에서 다가오는 21세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신학도들과 목회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의미 있는 21세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미리 준비한 사람에게는 미래사회나 미래교회나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환영할만한 복된 미래가 될 수 있다. 오늘 이 모임이 그런 준비를 위한 작은 모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변화하는 세계가 새로운 지도력을 요구하는 것처럼, 변화하는 교회 역시 새로운 목회지도력을 요청하고 있다. 이성희 교수는 {미래사회와 미래교회}란 책에서 미래교회는 더 이상 대형교회를 뜻하는 메가(mega)교회가 아니라 변화를 뜻하는 메타(meta)교회, 즉 스스로 변화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변화를 주도하는 그와 같은 변화하는 교회가 요청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변화는 교회의 구조적 차원에서의 변화와 목회지도력에 있어서의 변화 즉 목회자의 마음, 사고, 의식에 있어서의 변화, 그리고 무엇보다 목회지도력에 있어서의 영성적 차원의 변화가 요청된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종교사회학자인 이원규 교수는 "21세기와 선교"라는 논문에서 21세기 새로운 사회를 맞이하는 한국의 교회는 그 동안 힘써온 제도적 구조적 모순으로부터의 과격하고 급진적인 해방 즉 인간화 운동보다는 다른 차원의 인간화 즉 내면적이고, 신비적이며, 영적인 측면의 인간화에 대한 요구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미래의 종교는 보다 영적이고 신비적이며 구속적일 것으로 종교 사회학자들은 보고 있다. 복잡하고 거대한 구조와 조직, 지나치리만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활방식,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미래사회에서는 오히려 반작용으로 신비성이나 영성을 추구할 가능성이 많다." 그런가 하면 종교사회학을 전공한 이철 박사 역시 사회학자 피터 버그를 소개하는 글, "현대사회와 신앙"({기장 회보} 9월호)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신앙인은 적절한 칼과 방패없이 합리주의와 세속화라는 도전에 노출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위기가 있고 동시에 신학의 과제가 있다. 이에 대해 피터 버그는 기독교신앙이 종교적 경험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터 버그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은 지식도 아니며 윤리적 행위도 아니다. 종교의 본질은 특수한 종류의 경험, 즉 초월적이며 영적인 차원에 대한 경험이다. 이것을 회복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체험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또 어떻게 가능한지 피터 버그는 시원한 대답을 못해주고 있다. 따라서 피터 버그에 의하면 이 일은 결국 신학자나 목회자의 몫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목회와 신학분야에 있어서 특별한 공헌을 한 박근원 박사는 일찍부터 목회와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신학형성, 전문직형성, 영성형성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의 목회지도력을 강조한다("세계 신학교육의 새 지평," {기독교사상} 1993). 목회자와 신학도는 무엇보다 먼저 성서적 사고, 신학적 사고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신학도와 목회자는 전문직을 형성하는 사람으로서, 설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 교회를 치리 하는 것과 목회적인 차원에서 교인들을 심방하고 상담하는 이런 모든 일에 있어 전문인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구비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신학도와 목회자는 영성형성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박근원 박사는 일찍이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영성생활 지도론"이라는 과목을 개설하여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그는 그의 글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앞으로의 신학교육은 신학지식의 함양이나 목회실기연습보다는 교역자의 영성적 지도력을 더욱 강조할 것이다."


시워드 힐트너(S. Hiltner)는 미국에서 목회신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특별히 신학을 이론신학과 기능신학으로 구분한 사람이다. 그의 책 {목회신학원론}에 의하면 이론신학은 성서신학, 교리신학 등을 포함하며 기능신학은 예배와 설교, 교육과 행정과 같은 목회적 제반 실천분야를 모두 포함한다. 그렇다면 영성형성은 어디에 속하는가? 필자의 주장은 그것은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이론적이고도 실천적인 목회지도력의 기초요 기반이 된다는 사실이다. 본인은 신학을 한다는 것 또는 신학함(doing theology)이라는 차원과 목회사역으로서의 실천적 차원 모두에 있어서 기초가 되고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목회와 신학에 있어서의 영성적 차원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변화하는 미래의 교회를 위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목회지도력 역시 그 기초와 근본은 영성적 차원이라고 믿는다.


요즘은 신문마다 "기업은 우수한 인재를 필요로 한다"고 한다. 어느 신문에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우수한 인재란 변화에 대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직업에 대한 투철한 사명의식과 전문성 및 도덕성을 갖춘 사람, 그리고 숲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나무도 동시에 볼 줄 아는 통찰력과 창의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렇다면 미래사회를 위해 요구되는 교회의 지도력, 목회지도력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변하는 미래사회를 예측할 뿐 아니라 변화하는 교회를 주도해 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분명한 사명 내지는 소명의식, 그리고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 또는 복음화와 인간화를 모두 가능하게 하는 목회지도력이 바로 그것이라고.


그러나 여기서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래사회의 목회지도자는 숲과 나무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미래사회 또는 21세기를 이끌어갈 목회지도력은 숲과 나무 그리고 그 以上을 볼 수 있는 통찰력과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목회지도력이라고 본인은 믿는다. 본인은 오늘 이 강연을 통해 이점을 강조하려고 하며, 그리고 바로 이점에 있어서 참석자 여러분의 비판적 참여와 대화를 기대하는 바이다. 목회지도력의 영성적 차원을 본인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찬양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하나님에 관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것이 바로 목회지도력의 능력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삶으로부터 숨겨져 있는 엄청난 보화를 발견하고, 그 때문에 너무나 기뻐서 자신의 모든 가진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변화의 능력, 이것이 바로 목회지도력의 영성적 차원이라는 말이다. 또는 몇 자만 파면 얻을 수 있는 얕은 물이 아니라, 150M 이상을 뚫고 들어갔을 때 그 깊은 암반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를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 그리고 그 생수를 마심으로 우리의 삶이 새롭게 소생되는 변화의 능력이 바로 목회지도력의 영성적 차원이라는 말이다. 혈육과 전통의 야곱의 우물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기쁨과 변화의 능력이 교회목회의 추진력이 되고 목회지도력의 원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는 가르치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 치유하고 돌보는 일, 그리고 교회를 관리하고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일 등 여러 가지 차원의 일들을 한다. 그렇다면 목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 우리가 하는 목회의 목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의 사역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다. 그 나라가 여기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든 또는 죽어서 가는 나라든 그 나라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의가 지배하는 나라다. 그리고 그 나라는 무엇보다 "변화 받고 새로워진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다. 변화를 받아 치유와 성장, 해방과 구원을 체험한 사람, 곧 깨달음을 통해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 이러한 깨달음과 진리체험을 통해 그의 삶 속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뿐 아니라,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책임적인 삶을 살도록 돕는 것, 요컨대 목회는 사람을 변화시키도록 돕는 것이라는 말이다. 목회의 궁극적 목적과 목표는 바로 사람이 변하고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돕는 것이 바로 목회다. 성경은 바로 이렇게 변화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다. 요컨대 사람 바뀐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인 것이다. 목회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의 변화에 있다. 교회지도력 또는 목회지도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목회지도력인 것이다. 10년을 설교했는데도 (머리로 아는 것은 많은데)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설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10년을 가르쳤는데도 (머리에 든 것은 많은데)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고전 2:4)고 했다. 우리가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말이나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이것이 사도 바울이 설교하고 증언해 온 것이다. 목회지도력의 영성적 차원이란 바로 우리의 목회적 언어가 변화와 치유와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되도록 하는데 있다. 우리의 목회지도력에 있어서 영성적 차원의 빈약과 결핍은 크게 두 가지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우리의 목회와 삶에 "기쁨"이 없다는 것과 우리의 목회가 추구하는 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미 말했듯이 목회지도력의 영성적 기초요 근원이 되는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기쁨의 근원이 되는 숨겨진 보화와 샘솟는 생수의 근원 대신 터진 웅덩이 또는 "진리 비슷한 것"이 우리의 목회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확신과 체험없이, 부차적인 것, 또는 추상적인 것, 진리 비슷한 것으로도, 권위주의를 통해, 한평생 목회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론적, 추상적 지식은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한 지식은 구원을 위한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지식은 그때그때 문제를 때우는 "반창고식 목회"는 가능하나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아니다. 그것은 "빵" 대신 "돌"을 주는 목회요, 교육이며, 영혼을 시들게 하고 짐만 지우는 목회가 될 수 있다. 머리는 변화시킬 수 있으나 참된 변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얼마간의 사람들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 "소명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있는 척 하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 우리 모두에게 목회지도력에 있어서의 <전환점>이 있어야 한다. 변화하는 사회와 교회의 목회지도자로서 우리의 목회지도력에 새로운 영성이 요청된다.

2. 목회지도력의 영성적 기초

세계 교회 협의회(WCC)가 발간한 작은 책자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영성형성"에 의하면, 기독교 영성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1)화해적이며 통합적이다. (2)성육신적이다. (3)성서적이며 기도로부터 영양을 공급받는다. (4)희생적이다. (5)해방적이다. (6)공동체적이며 성만찬 중심이다. (7)봉사와 증거 안에서 표현된다. (8)하나님의 주도하심이다. (9)하나님의 사랑을 땅위에 전개하는 영성이다. (10)세계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다양한 차원에 관해 그밖에도 많은 설명들이 있을 수 있으나 영성에 관한 대부분의 차원들이 위에 열거한 내용들에 거의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영성에 관한 이런 다양한 차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영성의 뿌리와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 하나란 바로 하나님 체험이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이며, 진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험이다! 죠지 아쉔브레너(George Aschenbrenner)는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언제나 예수에 대한 체험에 그 뿌리를 가진다." 신학의 출발점은 본래가 놀라움이요 경이로움이다. 우주의 신비, 인간의 이성으로는 풀 길이 없는 역사의 신비,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은혜가 우리를 놀라게 한다"고 했다.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를 신학으로, 목회로, 선교적 사명으로 강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내가 누구를 믿었는지 '안다'"고 했다. 진리이신 그분을 체험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그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바울은 말했다. 성서 신학자인 버렛(K. Barret)에 의하면 이 "확증" (dokimazein)은 (1)신뢰(trust), (2)순종(obedience)을 의미할 뿐 아니라, (3)진리 체험 또는 성령 체험(experience of the Spirit)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리 체험에서 오는 신뢰와 복종의 믿음이 곧 확증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론만의 신앙은 실제로는 무신론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은혜와 진리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거, 확증이 있어야 한다.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경험적 차원들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1)놀라움 또는 경이의 체험, (2)소명의 체험, (3)회개의 체험, (4)신과의 합일에 관한 기도의 체험, (5)환난 때에 도우시는 하나님체험, (6)영감을 받았을 때의 특별한 체험, (7)영감을 주는 인격에 대한 체험({젊은 지성인들에게} 대한기독교출판사). 이상의 체험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모두가 나 밖에서 오는 실재(Reality)와의 만남으로서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 체험 또는 계시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2)무엇보다 이러한 체험은 "인격적인 체험"이라는 점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인격적인 관계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이러한 체험을 통해 "내가 믿는다"는 신앙에서 "믿어지는 신앙"으로 바뀐다. 이처럼 "믿어지는 신앙"이 "기적"인 것이다! 이 믿어지는 신앙에서 "할렐루야" 찬양이 가능하며 예배의 축제화가 가능한 것이다. (4)이런 일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7). (5)증거(testimony)가 생기고 이로써 우리는 증거자(witness)가 될 수 있다. 올드함(H. Oldham)은 "증거(testimony)에 기초해 있지 않은 신학은 의심해도 좋다"고 했다. 증거에 기초해 있지 않은 신앙, 증거가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6)이 증거는 너무나 구체적이다. 추상적인 진리, 말만의 진리는 무력하다. 진리는 구체적일 때 변화의 능력이 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얼마나 구체적인가? 이것이 목회와 목회지도력에 있어서 영성적 차원의 기초요 뿌리다. C. H. Dodd는 그의 고전적 저서 {설교의 원형과 그 발전}에서 "우리는 모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부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질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잊기 쉬운 한 가지는 다음과 같다. 즉 설교란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 전달된다고 하는 이 진리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사역이 능력 있는 사역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복음이 나의 인격에 있어 복음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나의 복음"이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발견해 낸 그의 복음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중심되는 요점은 그가 이어받은 복음이라는 것이며, 그리고 참된 의미에서 그것은 그 자신의 복음이었다. 복음은 그것을 받은 자의 마음의 정화 곧 그의 인격을 통한 것이어야 하고 그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참된 증거를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종성 박사 역시 {신앙과 신학}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기독교 신앙의 체험적 차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이 체험을 과장하기 때문에 오는 위험이 있으나, 그러나 체험이 없는 신앙은 공허하고 사변적이요 추상적이며 생동력이 없는 지식의 신기루일 뿐이다. 성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리에 관한 체험과 그 체험에 의해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신학자들의 대담을 기록해 놓은 책, {세계문명의 전환과 종교의 의미}에서 前이화여자대학의 한 신학교수는 이렇게 고백한다: "지금까지 우리 신학자들이 신학을 할 때는 무엇 무엇에 대하여 신학을 한 것 같아요. 하나님에 관하여, 민중에 관하여, 또는 무엇 무엇에 관하여서만 신학을 이야기했지 자기가 그렇게 사는 것, 자기가 체험한 것은 많이 안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빠진 신학을 하려면 하지 마라. 남에게도 도움이 안되고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안된다'고 비판을 하는 거지요. 신학을 하려면 자기가 들어가 있는 신학, 자기가 체험한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만 자기도 고치고 남도 고칠 수 있다는 거지요. 그야말로 자기를 고친 이야기를 하면서 또 남도 고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나고 할 때 비로소 자기도 성숙하고 신학도 성숙하는 것 아니냐는 거지요."


체험을 통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마음속에서 이미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다. 놀라움과 기쁨과 말할 수 없는 평화가 그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쁨과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특징이다(요 14:27). 그리고 그 기쁨은 빼앗을 자가 없다(요 16:22).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를 충만하게 한다(요 17:13). 이것이 문제 해결의 능력의 원천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확신 체험이다. 그리고 진리이신 하나님 체험에서 오는 기쁨, 하늘의 보화를 발견하는 그 기쁨이 오늘 우리의 목회 추진력이 되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 설교와 목회대화의 능력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체험, 진리 체험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마음속에서 이미 기적을 체험하고 문제를 근본에서 해결한 사람이다: 이 하늘의 보화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1)큰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울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성령께서 울게 하는 울음과 눈물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2)진리이신 하나님을 발견함으로서 나를 발견하고, 나를 발견함으로써 삶을 발견하며, 세상을 비로소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은 삶에 대한 긍정이다. 이것이 믿음이 하는 일이다! (3)의무로서 하던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4)의무적으로 관계를 맺던 인간관계가 사랑과 기쁨의 관계로 변화될 수 있다. (5)선을 행하되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고도 겸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6)비록 우리의 삶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삶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해하고, 삶을 진정으로 즐거워 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7)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있으며 축제의 예배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8)성경의 모든 약속의 말씀이 믿어진다. 죄의 용서, 구원의 확신, 영생과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다. "내가 믿는다"는 신앙으로부터 "믿어지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약속, 죄의 용서, 구원의 확신, 영생과 부활이 믿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 변화, 화해, 치유, 해방이 믿어져야 하는 것이다. (9)주인이 바뀐다. 근본이 바뀌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이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 신앙요리문답 제일 첫 번째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자신의 말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즉 사람의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기뻐하며, 영원토록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신앙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예컨대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는 액자 속의 말이 단순한 장식이 아닌 현실이 되는 것이다. (10)근본이 바뀜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이상 "두려움"에 근거한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의 관계가 확립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 ."(롬 8:6). 성서적인 의미의 진정한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의 본래 자리가 확립되는 것이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는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상속자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며 목회에 필요한 하늘의 지혜와 보화와 목회지도력의 참된 능력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영성훈련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관계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로의 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다. (11)이로써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그리하면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3-24). 기도의 근거는 더 이상 종이나 이방인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구하는 것이다. (12)십계명을 포함하여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것은 율법주의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기쁨으로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된다. (13)하나님의 일(요 6:39)에 대한 소명의식과 능력이 생긴다(요 6:39). 왜냐하면 목회는 "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목회가 힘든 이유는 목회를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 대신 세상을 지배하고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려는 자신의 숨은 욕구"가 그 바닥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14)목회에 관한 이해가 달라지면 우리의 목회는 힘든 것이 아니라 쉬운 것으로 바뀐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목회가 하나님의 일인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맡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짐을 "성령께 맡길 줄 안다." 맡길 줄 아는 이것이 또한 믿음이다. (15)하나님 체험을 통해 하늘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최대의 기적은 "참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누구나 죄의 종이된다"(요 8:34). 인간에게 있어서 죄의 가장 큰 특징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로하든 말로 나타내지 않든,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 지배아래서 거짓말하던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거짓말하는 마음, 죄의 노예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주의 영을 통해 비로소 참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기적이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장이다. 남녀노소, 어른, 노인, 어린아이(특히 어린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거짓말 선수들이다) 등 모두가 다 거짓말을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단 한가지 이유 곧 모든 인간은 근본에 있어 "아담 안에"(In Adam)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우리는 참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기적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목회는 "참 말"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목회적 능력이 가능하다. 목회는 말로써 한다(말로써만 목회한다가 아니다). 그런데 말이 그 능력을 상실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말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목회지도력의 일차적 과제인 것이다. 말은 곧 그 사람이요,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다. 거짓말하던 우리의 말이 참말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말로 바뀔 때 변화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 14:8). 어느 때 감독이 설교를 했다. 그때 함께 있던 신학생들을 향해 시골 목회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그 감독은 설교의 가능성은 있는 분입니다." 젊었을 때는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평생 "가능성"만 가지고 목회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다 죽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3. 영성적 차원에서의 목회지도력의 회복

목회지도력의 영성적 차원은 바로 목회사역의 기초요 근본이 된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며,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돕기 위해 본인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대안들을 제시하는 바이다:
1) 스스로 체험해야 한다. 그로써 "증거"가 생기며 참된 기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우선 순위 즉 먼저 구해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마태 6:33).
3)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기도와 말씀연구에 우선적인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4) 비젼(vision). 목회자의 비젼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젼(약속)을 받아야 한다.
5) 경건의 삶. 경건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 만남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기도는 계시의 통로이며 말씀충만에서 성령충만이 가능하다. 또한 삶에 있어서 도덕적 원칙을 지켜야한다. 죄를 범하면 죄의 종노릇을 한다(롬 6:12-14, 8:34). 죄가 나를 지배하면 기도와 말씀이 설 곳이 없다.
6) 창의력(creativity). 기도, 말씀연구, 사색, 그리고 신학연구를 더 많이 함으로써 더 많은 깨달음이 가능하다.
7) 은혜의 진정한 비결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이 길만이 은혜를 입는 길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입는 길이다. 목회자는 전문가다. 무엇에 전문가인가? 목회자는 사람을 움직이고 하나님을 움직이는 데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목회자는 자신이 치유자가되기 이전에 하나님을 만남으로 스스로 치유함을 받고 체험함으로서 그분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을 움직이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E. M. 바운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위한 강력한 결과를 가져오는 설교자는 사람을 설득하기 전에 하나님께 간구하는데 승리하는 사람이다. 골방에서 하나님과 사귀는데 있어서 가장 우수한 설교자는 강단에서 사람과 사귀는데 가장 우수한 사람이다."
8) 목회자는 구하는 자다.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7장 7-8절과 9-11절에서 예수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했다. 그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가난한 자의 복음이요 사회적인 복음으로 알려진 누가복음은 이 구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눅 11:9-13). 목회자는 하나님께 구할 때 '성령'을 구해야 한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참된 능력은 오직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목회자는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 할 필요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거지(spiritual begger)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찾아와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들의 경우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9)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오직 한가지 비결만 있다. 그것은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를 만나 고침 받은 사람들을 자세히 조사해 보라! "간절함"이 그 모든 사람들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금식도 해야 한다.
10) 노력이 있어야 한다. "노력없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1) 하늘나라와 그 보화 그리고 목회지도력의 능력의 출발점은 회심으로부터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교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회개의 종교다. 죄로부터의 회개와 그리스도를 영접함(막 1:15)--이것이 예수의 첫 번째 설교의 취지요 그리스도교 영성의 출발점이다! 회개가 빠진 그리스도교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죄가 무엇인가? Emil Brunner에 의하면 우리의 과거가 곧 죄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의 돌이킴 즉 자신의 과거의 삶을 향해 한번도 울어보거나 통곡해보지 않은 사람은 목회자의 자격이 없다. 과거를 향해 이별을 고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진정으로 영접하는데서 비로소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목회 또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지도력의 영성의 핵심은 바로 회심에 있다! 이것은 신학도나 이미 목사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철저하게 개별적이면서도 은밀하게 주어진 과제요 하나님의 도전이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합격해야 한다.

4. 결론: 미래사회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21세기를 포함하여 시간과 역사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장차 올 모든 날의 주인은 창조주이시며 영원토록 홀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하나님 그분이시다.
미래사회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오늘과 내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지진은 언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지진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진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또한 토마스 오덴(T. Oden)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그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21세기의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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