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영성목회 * 출 처| 윤여권 목사(양동제일교회) 21세기 새천년의 목회는 영성목회여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가 다 일치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기계, 기술, 정보의 시대가 될 것이고 물질과 쾌락과 여가를 구가하는 생활방식은 필연적으로 영적, 정신적 고갈을 가져오고야 말기 때문에 우리가 새 천년에 추구해야 할 관심과 분야는 영성쪽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성령님의 물붓듯한 역사와 기름 부으심이 마지막 때일수록 강력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목회가 여기에 맞춰져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먼저 영성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어느 정신적 삶을 의미합니다. 어느 이상적인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내면화시켜서 그 정신을 본 받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Socrates의 정신으로 살면 Stoa주의 영성이고, 부처의 정신으로 살면 불교의 영성입니다. 그 외 도교의 영성, 실존주의의 영성, 해방신학의 영성도 말하고 있습니다. 영성이란 자기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정신을 자기 정신으로 받아들여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겁니다. 그런 것을 위해 훈련 수양하는 것이 영성훈련입니다. 그 어떤 정신을 이상적 정신으로 설정한 그 정신을 나의 정신으로 삼아 살아가려는 의지, 그래서 내 속에서 두 정신의 oneing 즉 하나되는 엄격한 자기 훈련입니다. 기독교 영성과 일반 다른 종류의 영성은 구별됩니다. 일반 영성이 시대나 주의의 정신을 본받아 살아가려는 것이라면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품성을 내 속에 이루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려는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과 훈련보다 성령의 역사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외부세계만큼 큰 소리로 외치지 않기 때문에 도외시되고 무시됩니다. 이 내적세계는 함몰 웅덩이가 무너져 내릴 때까지 쉽게 무시되는 경향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격렬한 전쟁터 중의 하나는 각 사람의 내면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쳐 있습니다. 무거운 책임을 지고 수고하고 억압받고 있습니다. 내면 세계를 너무 무시하고 외면세계에만 치중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함몰직전에 와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되어온 내면세계가 더 이상 과중한 무게를 지탱할 수 없게 됩니다. 외면세계의 활동과 노력 때문에 영적열정이 식어져 갑니다. 그것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의 피곤은 곧 회복되지만, 영적황폐는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골짜기의 샘물 (Springs in the Valley)의 저자 Charles Littie Cowman 여사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Africa의 깊은 정글에서 한 여행자가 길고 힘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짐을 옮기기 위해 그는 한 굴속에서 노동자들을 고용했습니다. 첫날 그들은 빨리 움직여서 멀리까지 갔습니다. 그 여행자는 이제 빠른 여행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째날 아침 그 원주민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어떠했든 그들은 그저 앉아서 쉬었습니다. 이 이상한 행동에 대해 질문을 해 본 결과 그 여행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첫날 너무도 빨리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신이 육체를 따라 잡을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혼란스럽고 성급한 인생을 그 정글의 원주민들은 첫날의 행군에서 겪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그들은 생활의 균형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활동이 통계에 나타나기 때문에 활동을 위한 시간과 정력을 기울이는 동안 내적으로 유지할 힘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시간은 증가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감소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행하고 비극입니다. 옛 예언자의 소리가 우리에게 실감있게 들려옵니다. 산이 진동하고 요동합니다. 이 혼돈 공허하고, 하늘은 제 빛을 잃었고, 공중의 새들도 다 날아갔고,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러본즉 거기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리라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도다"(렘 4:23-26) 이제 "대지의 기초가 흔들린다"는 소리는 우리 다수가 경험하고 멀지 않은 장래 인류가 경험할 끔직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땅이 깨어지고..."는 단순한 하나의 시적 형용이 아닙니다. 엄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층이 견디지 못하고 환경오염으로 새는 떠나가고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진동의 사실을 잊어왔습니다. 우상숭배, 과학, 지식, 학문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 지상천국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했습니다. "진보!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다. 평화! 온 세계의 평화가 올 수 있다. 행복! 만인의 행복이 여기 있다"고 부르짖는 거짓된 선지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참 예언자 예레미야는 "산은 옮겨가고 언덕도 움직인다. 대지는 꺼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니"라고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요동하고 끊어지고 무너져 내리는 오늘의 물리적 현상은 우리시대 내면의 무질서, 내면의 부실에서 오는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내면의 함몰이 이 세상의 진동의 원인입니다. 붕괴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영성의 회복이 시급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외적현상과 외적변화는 인간내면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세계가 무섭게 외부의 세상을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면의 안정, 충만, 유지,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상적인 교회, 교회원형을 제시하는 교회, 표준적인 교회, 정상적인 교회는 초대 Jerusalem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정상적으로 성장했습니다. Jerusalem교회는 모든 교회의 이상적 모델입니다. 세계 모든 교회가 표본을 삼을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그 교회의 교회사역을 알아보는 일이야말로 우선적인 일이요, 기본적 과제입니다. 아마 그대로 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자랄 것이고 성공적 사역이 될 것입니다. 어떤 대장장이가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장장이는 조수를 불러 자기가 하던 일을 맡겼습니다. 말굽모형을 하나 주고서 똑같은 모양으로 100개로 만들어 놓으라고 명령을 하고 떠났습니다. 주인이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조수는 주인의 명령대로 100개의 말굽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만들라는 크기보다 엉뚱하게 크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고간 말굽과 똑같이 만들라고 했는데 어찌된 것이냐는 주인의 추궁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수는 주인이 남겨 놓고 간 말굽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내용이 이렇습니다. 조수는 주인이 남겨 놓고 간 모형을 보고서 처음엔 그대로 말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것을 만들 때는 주인이 남겨 놓고 간 원모형을 보고서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전에 만든 말굽으로 모형을 삼아 만들었습니다. 다음에는 또 그전에 만든 말굽을 모형삼아 만들고... 이런 일이 반복되고 100개째의 말굽은 엄청나게 큰 것이 되었습니다. 100개 만들 때까지 계속 주인이 준 원형을 표본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만든 것이 내 본이 아닙니다. 주인이 준 것이 원본입니다. 우리는 큰 교회, 도시교회, 100년 전의 교회, 세계 우수한 교회를 나의 본으로 삼습니다. 사역의 본은 초대 Jerusalem교회입니다. 항상 우리의 표준은 초대 Jerusalem교회입니다. 그때 그 교회의 목회사역이 오늘 우리 사역의 이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세월이 2000년은 지나고 새로운 천년을 맞는 시점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성장하는 이상적 Jeruaslem교회사역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오늘의 교회에 적용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는 영성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평신도와 집사들도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의 사역은 영성목회 결과였습니다. 사도행전 6:1-7의 초대교회는 영성목회의 좋은 실례입니다. 1. 평신도사역의 강화입니다. Jeruaslem교회에는 사도들과 평신도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들이 평신도의 일까지 다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명치 못하다는 것이 곧 발견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로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그래서 분담했습니다. 공궤, 구제, 사회선교 같은 일은 평신도의 몫으로 넘겨주었습니다. 초대교회는 평신도를 잘 활용해했습니다. 일곱명의 집사를 임명해 그들로 구제, 공궤 등 대외구제 선교사역에 힘쓰게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 열두 사도의 일과 택함 받은 일곱 사람의 일이 꼭 같이 diakonia(사목, 섬김)으로 되어 있습니다. 1절과 4절은 같은 사역입니다. 목회사역과 사회사역은 다 같은 교회의 사역입니다. 어떤 사역도 다른 것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둘 다 기독교사역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을 섬기는 이 두 사역은 다 꼭 같은 목회사역입니다. 목회사역만 귀하고 평신도사역은 천한 것이다 그게 아닙니다. 목사 하는 일만 가치있고 평신도의 봉사는 낮은 것이다 그게 아닙니다. 똑같은 사역입니다. 그러기에 평신도의 많은 사역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사장된 재원입니다. 그들의 헌신, 믿음, 재능과 은사가 묻혀 활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큰 손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자원들이 방치되어 이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의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사역자의 죄입니다. 게으름입니다. 평신도는 목회자와는 달리 적절한 훈련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목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교회의 잠재적 자원입니다. 지금까지의 성직자 중심의 편중된 교회구조는 평신도 중심의 분산된 교회구조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Carl George는 미래형 교회인 메타교회(Meta church)는 소그룹을 통한 교회행동을 강조하고 목회자는 평신도 훈련을 위한 사역에 나서도록 해야 합니다. Jerusalem교회의 목회사역의 구조는 교역자인 사도와 평신도를 훈련시키고 평신도 사역에 나서도록 해야합니다. Jeruaslem교회의 목회사역의 구조는 교역자인 사도와 평신도인 일곱 집사의 분담과 조화의 사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평신도 사역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시도는 21세기를 위해 우리의 교회들은 이제 평신도 사역자들을 깨우고 키워내고 성장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미래사역, 평신도에게 달려있습니다. 출애굽기 4:12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라". 렘 1:7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로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로 말할지어다". 평신도들이 내가 어떻게 사역을 할 수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사역자로서 나는 너무나 부족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건 평신도를 영성훈련, 제자 삼는 교육을 통해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으로 파송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라하지 말고 가라"고 하십니다. 성숙한 사역자를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 Jerusalem교회처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사람을 교육하여 사역자로 세워야 합니다. 그 평신도들의 사역이 무엇입니까? 평신도는 구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오늘날 소위 사회봉사, 사회선교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보았겠지만 이번 달 기독교사상지에 황석환이란 사람의 "나는 왜 개신교를 떠났는가"한 요지의 글이 실렸습니다.(99. 11호 기독교사상) 한마디로 사회선교와 봉사가 없고 말만 있는 교회에 환멸을 느꼈다는 요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는 많은 교인을 빼앗기고 잃고 있습니다. 2. 기도사역의 강화입니다. 교회는 전임 사역자와 평신도 사역자가 조화를 이루워야 건전하게 발전해 갑니다. 평신도를 훈련시켜 대외사역, 사회선교에 투입하고 교역자의 좋은 협력자로 삼아 동역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나 사회 속에서 목회자의 사역과 책임이 너무나 많습니다. 초대 Jerusalem교회 12사도들은 구제, 공궤, 전도, 사회선교에 힘과 시간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게 그들의 최상의 사역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야의 일들을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다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도들이 힘쓴 일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기도하기를 전무했습니다. 기도가 사역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사도들이 해야 할 주임무가 되었습니다. 교역자의 사역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정년이 되어 은퇴하신 목사님이 내가 다시 목회를 할 수 있다면 자기는 이런 일에 힘쓰겠다는 작은 책을 한 권 써 놓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항목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더 많은 시간을 내어 기도하겠다". "기도는 목회의 힘쓸 한 분야다. 목회의 방편이요 수단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 보면 기도하는 일 자체가 사도들의 사역이었습니다. 목회의 한 분야가 아닙니다. 목회의 수단도 아닙니다. 목회 그 자체였습니다. 기도하는 일이 목회입니다. 기도는 불멸입니다. 기도하는 입술은 죽어 닫혀질지 모르며 기도를 토로하던 가슴의 맥박은 끊겨질지 모르나 기도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 역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마음 설레이시고 계시며 기도는 기도하는 자보다 오래 살아 남아 있습니다. 가장 귀한 좋은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가장 오래도록 붙어 계시며 기도는 기도하는 자보다 오래 살아 남아 있습니다. 가장 귀한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가장 오래도록 불면할 것입니다. 기도가 더 많이 드려지고 효과있게 되어지면 세상은 변화되고 혁명되어지고 천사들은 더욱 능력있게 움직이고 더욱 신속히 날며 하나님의 계획은 더욱 구체화되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교회에 하나님은 영화로운 능력으로 나타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언제나 가능합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특별한 은총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하늘의 능력과 부와 지혜를 땅으로 끌어내려 유한한 인간을 도와줍니다. Alexander Hytte 교장은 "세상의 어떤 남자나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크고 좋은 재능을 주었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의 재능이다"고 말했습니다. 목회자가 모든 면에서 부족한 약점이 많아도 기도하는 최상의 무기와 재능이 있습니다. 요는 그것을 얼마나 활용하느냐에 있습니다. Martin Luther의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에게 내일 계획이 무엇이냐의 물음을 받고 "일찍부터 늦게까지 일하고 일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사실 나는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첫 세시간을 기도에 사용한다"라고 했습니다. 더 많은, 더 좋은 기도가 목회성공의 비결입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아들은 항상 구하고 아버지는 항상 주십니다. 오늘 목회사역에서 기도를 대신할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위대한 일이며 그 지체는 위대한 사역입니다. Henry Martin의 고백적 기도가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불타게 하옵소서. 결국,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일 중에 기도는 최상의 일이다. 아! 나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으면!" 뿐만 아니라 기도의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목회자의 기도의 전무도 필요하지만, 교역의 극대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기도 동역자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보기도의 강화입니다. Maxwell의 '기도 동역자'이란 책에 보면 기도 동역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John Maxwell이 사무하던 샌디에고의 Skyline 교회에서 맥스 루카도가 한주간 설교했을때 기도로 목욕했다고 증언합니다. "내가 예배실 입구로 걸어갈 때도 날 위해 기도하는 기도 동역자들을 볼 수 있었고 내가 강대상에서 내려 올 때도 그러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내가 강연을 하는 동안에도, 내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기도 동역자들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내가 이 기도 동역자의 중요성에 관해 너무나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된 나머지 내게도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할 것을 다짐하고 또한 나와 함께 열정적으로 기도할 120명의 성도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본교회로 돌아온 루카도는 성도들에게 그의 꿈을 알렸고 정확하게 한 달 후 자원하는 120명의 성도로 기도팀이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4그룹으로 나누어 각 그들은 한 달에 한번 정해진 주일 날 아침 예배시작 훨씬 전에 교회와 교인을 위해 기도하게 했습니다. 6개월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지난 6개월 동안 예배 출석 최대인원 기록을 두 번이나 갱신했다. · 최고의 주일 출석율을 유지하면서 지난해를 보았다. · 지난해에 세운 예산을 훨씬 넘는 지출이 있었다. · 세명의 새로운 스탭과 6명의 장로를 세웠다. · 중한 병들이 치유되는 것은 여러 번 목격했다. · 나는 은혜가운데 새로운 책의 집필을 마칠수 있었다. · 교회 안의 적대감이 사라지고 단결력이 증대되었다. 3. 말씀사역의 강화입니다.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말씀사역은 초대 사역자의 목회전반이었습니다. 그것만 전무했습니다. 역점을 거기에 두었고 그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Jerusalem교회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에 복종하니라" 교회가 크게 부흥 했을때 말씀이 왕성했습니다. 설교 잘한다고 다 큰 교회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큰 교회 목사님치고 설교 잘 못하는 목사님은 한 분도 없습니다. 말씀 사역을 최우선으로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결과입니다. 말씀사역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나의 모든 에너지 창조성을 총 동원해서 투자 해야합니다. 말씀사역의 강화를 위해 우선 설교가의 말씀이 좋아야 합니다. 저는 올 여름 휴가 중 어느 시골교회에 가서 주일 낮 예배를 드렸습니다. 몇 명의 나이든 교인들 앞에서도 그 목사님의 설교가 훌륭한 내용과 짜임새였습니다. 저런 설교를 늘 들을 수 있는 교인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교에 우리는 사활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설교를 대치 할만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교회는 설교 아래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설교하는 소감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 중 최상의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설교자 나를 통해서 회중에게 좋은 설교를 하도록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때 그 설교자는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왕성해지는 교회 바로 그것이 교회다운 교회의 요소입니다. 교인의 숫자가 불어나고 시설이 좋아지고 헌금이 많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본질 그 자체인 말씀이 왕성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끝에가서 보면 바울이 로마에서 셋집에 두해를 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흔히 사도행전의 마지막에 바울의 장엄한 순교장면을 그리거나 복음이 로마를 점령하는 것을 기록했을 법한데 아주 시시하게 끝난 것 같이 여겨집니다. 왜 그렇게 끝났을까요? 무언가 세계로 향해 뻗어나가는 것을 그려보지 못하고... 여기서 사도행전의 기자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나 목회사역의 실상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셋집에 유하며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말씀을 가르쳤다는 구절을 통해 우리의 교회 환경이 어떠하든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목회사역이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 그래서 제자 삼는 사역이 영원한 과제로 주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노사도가 만년의 초라한 모습으로 자기에게 방문해온 사람들에게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예수님에 관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초라하고 별 볼일 없으나 우리의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새 사도행전을 전개해 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국제연합의 사무총장이었던 다크함마슐드가 세계의 도시 뉴욕의 가장 변화한 거리에 위치한 UN건물 안에, 그리고 각 나라의 복잡한 문제와 세계적 이슈를 다루는 UN건물 안에 1957년 「정적의 방」(A Room of Quiet)이라는 명상실을 마련한 것을 보면 그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활동적인 UN 건물, 그 안에 가장 UN하고는 성격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정적의 방」을 설정하고 그 방에서의 고요한 시간이 필요했다면, 명상과 기도의 시간은 활동의 결실과 정비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마슐드는 정말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보기 드문 기도와 명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침대 곁에는 언제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 유명한 명상록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가 놓여 있었고, 비행기 추락사고로 끝장낸 그의 마지막 여행의 가방속에 있던 유일한 책도 바로 이 책이었다고 합니다. 1956년 4월 24일 중동문제로 안보이사회에서 파견되어 베이루트에 체류하면서 아랍제국과 이스라엘의 긴장 사이를 여기 저기 정신없이 뛰어 다닌 중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해한다 - 마음의 고요함을 통해서 행동한다 - 마음의 고요함으로부터 성취한다 - 마음의 고요함 중에서 그의 행동, 그의 전진, 그의 성취는 바로 마음의 고요에서 얻어진다는 고백입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후에 유명해진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현대에 있어서 거룩에의 길은 필연적으로 세계를 통과해 간다」 그는 천박한 행동가는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행동의 생활(vita activa)과 명상의 생활(vita contemplativa)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결합되어 일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분주하고 활동적인 생활일수록 고요한 시간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료받고 행동의 기준을 정하고 하나님과 만나 능력을 부여받는 계기가 절실히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가장 기독교적인 사회정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했던 유명한 성직자 한 분을 압니다. 본회퍼는 그의 명저「공동생활」(Gemein sames Leben)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루 중에 홀로 있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명상의 시간은 혼자서 성서를 읽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남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영적인 실험 같은 것은 일고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세가지를 위해서 시간을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까닭인즉 하나님이 친히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명상이란 오랫동안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한 봉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보람있는 것일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가 고백교회의 목사 연수소에서 경건을 중요시하면서 연수생들에게 아침식사 후 30분간의 명상의 시간을 엄수케 했고 지나치게 수도적이었는데 그것은 생명력으로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경건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가장 행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함마슐드와 마찬가지로 본회퍼의 경우도 경건과 명상과 영성생활이 바로 그의 다채로운 여러 활동과 행위를 가능케 했고 그 활동에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습니다. 과제가 중대합니다. 나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많은 기도와 하나님 앞에 앉아 말씀을 대하는 깊은 영적 침잠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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