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신론 강의안(신학 서론과 신론) |
조직신학(신학 서론과 신론) 趙 德 英 敎授 (創造神學硏究所 所長, 組織神學, Th. D., 김천대선교신대원 및 평택대신학과 겸임교수) 第 1講. 神學 序論(神學의 重要性) 神學은 왜 必要한가?(Who needs theology?) (참조: S. Grenz, A. McGrath, 박해경 박사, 서철원 박사) 1. 신학이란 무엇인가 1) theology= "theos"(神)+ "logos"(理性, 知慧, 思考) 2) 文字的으로 神學= 모든 인간이 알고 싶어 하는 하나님에 관한 학문 3) 모든 사람은 신학자다(Everyone is a theologian) 사람은 누구나 전제(前提) 가운데 살아간다. “무신론자는 무신론을 전제한 신학자” 2. 신학은 왜 중요한가 1) 신학과 신학자들에 대한 편견 "Happy is the Christian who has never met a theologian!" 2) 기독교역사는 이단(마귀의 종)과 신학자(하나님의 종)들의 싸움 3) 신학 부재(不在)의 결과 “기준이 사라지고 대혼란에 빠진 한국교회” “신학(조직신학)의 부재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목회자와 신자들” “겉으로는 부흥하였으나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한 근본적 이유!” 4) 위대한 기독 사상가들(바울, 베드로,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칼빈, 칼 바르트 등)과의 성경공부 5) 신학은 하나님과 바르게 이야기하기 신학보다 보람 있고 귀한 학문은 없다. 3. 신학은 다 같은 신학이 아니다(Not all theologies are equal) 1) 모든 신학이 다 같은 신학은 아니다. 2) 정맥과 속맥(바둑) “좋은 세계관(진, 선, 미, 지속성)과 나쁜 세계관” “좋은 신학과 나쁜 신학” 3) 신학의 스펙트럼 -> 民俗神學folk theology -> 平信徒神學lay theology -> 牧會神學ministerial // -> 專門神學professional // -> 學術神學academic // 4) 바르게 믿어야 하는 이유(하나님을 기쁘시게- 평생 젖만 먹을 것인가)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신앙과 지나치게 유아적이고 유치한 신앙을 구별할 것" 4. 신학자들의 도구 1) 啓示(revelatio) “두 가지 책(冊)”(一般啓示와 特別啓示) (1) 계시는 하나님이 창조, 역사, 인간의 양심과 성경 등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자신의 뜻을 현현(顯現)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자기 작정을 바르게 인간에게 전달하고 알리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히브리어 “깔라” 관찰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함(창 35:7) (3) 헬라어 *아포카룹시스=감추인 것을 드러내 보이다, 베일을 벗다. *파네로시스=뚜껑을 열다 (4) 누구에게?(시 103:6-7) (5)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 하나님 자신의 영광, 능력, 속성, 성품, 의지, 뜻, 목적 등 (6)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욥 11:7-8절), 롬 11:33-34) (7) 계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오나 성자 하나님 곧 하나님의 로고스(Verbum Dei)를 통해서 옵니다. 하지만 바르트라는 신학자처럼 아들이 곧 계시와 일치한다고 보면 안 됩니다. 이건 좀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나 계시가 곧 아들이 아니라 칼빈이 말한대로 성령께서 우리가 계시를 수납할 수 있게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계시를 이해케 하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8) 계시 종류 첫째 자연(일반계시): 하나님은 만드신 세상과 역사와 사람의 양심을 통해 자신을 증거하신다(시 19:1, 롬 1:20). 그러나 일반계시에는 한계가 있다(인류 범죄로 인한 두 가지 결과=롬 1:21-24). 자연 안에서 구속에 이르는 참 된 진리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연도 계시이기는 하나 불완전 한 것입니다. 신학이 뒷받침 되지 않는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 같은 과학적 변증이 기독교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둘째 특별계시: (a) 현현의 방법으로: 불, 연기, 구름 속(출 33:9, 시 99:7,), 구룹 사이(시 80:1), 폭풍우 가운데(욥 33:9, 시 99:7), 세미한 음성,성육신(요 1:1-12,1:14,골 1:19,2:9 (b) 예언으로: 꿈, 환상, 제비뽑기,우림과 둠밈(민 12:5-7), 예언의 정의(암 3:7-8, 벧후 1:20-21) (c) 이적으로: 예언의 말씀 확증(막 16:20, 행 14:3), 성육신 사건(사 7:14, 마 1:23). 특별계시에는 자연계시에서 불충분한 구원의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범죄한 인류를 죄의 세력에서 구출하여 신체와 영혼의 전인격적(지,정,의)인 새로운 피조물로의 재창조하시려는데 있습니다. *계시와 영감(Inspiration)과 조명(Illumination)의 차이와 관계의 중요성(What과 How와 Why의 관계):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전하시는 행위 자체와 내용을 말하고, 영감은 그 계시를 권위있게 전하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사람의 인격을 초자연적으로 주장하시는 사실을 가리킵니다(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심). 아무리 계시가 있고 영감의 말씀이 있어도 조명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고전 2:6-16). 조명은 성경을 읽는 인간의 마음을 성령께서 밝히 비추시는 사역을 말합니다. 아이에게 미적분 책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면 영감된 성경 책도 단순히 역사책, 아포리즘을 담은 책, 아름다운 시편 정도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2) 聖經(Scriptura) 3) 敎理(dogma) 4) 믿음(fides) 5) 理性(ratio)=“重生(renata)한 理性이 必要” “人格(知-情-意)의 未熟性” 客觀主義= “共通 中心” 主觀主義= “나 中心” 5. 신학에 대한 오해 1) 신학이 기쁨을 빼앗아간다? 역사적으로 참된 신학자 가운데 신학 때문에 기쁨을 상실했다는 사람이 전혀 없음을 기억하라! 오히려 나쁜 신학이야말로 사람을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간다. 2) 신학은 신자를 분열시킨다? 참된 분리라면 분리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오신 예수님(마 10:34). 반대로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다(고후 11:14) 즉 성령은 성령의 신학 안에서 성도를 하나 되게 하고 오히려 나쁜 신학, 거짓 신학이 신자를 분열시킨다. “가능한 화평을, 그러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리를!”(마르틴 루터) 3) 신학은 지나치게 사변적(思辨的)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즐거워하고 오히려 즐긴다. 불신자들에게도 있는 책 읽는 기쁨! 그리스도인들도 신학과 경건 서적에서 불신자와 차원이 다른 사변(思辨)의 따분하고 지루함이 아닌 기쁨을 느낄 수 있다(보기: 칼빈이나 마르틴 루터의 책을 제대로 읽어볼 것). 4) 신학은 멈추어진 따분한 학문이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하지만 신학의 해석과 적용은 무궁무진 하다. 6. 역사에서 찾는 신학의 중요성(이슈)의 보기 1) 정통(바른 신학)과 이단(가짜 신학, 나쁜 신학)의 갈림길 (1) 靈知主義 논쟁 -> 최초 조직신학자 Irenaeus가 저지 (2) 삼위일체 논쟁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세 위격이면서 한 실체인 문제) 첫째 본질(일체)에 대한 Arius(類似本質)-Athanasius(同一本質) 논쟁: 둘째 위격(삼위)에 대한 갑바도기아 교부들(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가이사랴의 바실)의 역할 <페리코레시스>(co-inherence, 공동내재, 상호상통, 상호관통) <專有, appropriation> <Per Fillium>(성자를 통하여)-> Filioque(그리고 성자로부터) Ⅱ. 신론 제1과.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창1:1,출3:14,요17:3,히11:3) 1.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알게되는 지식 1)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本有的 혹은 生得的 지식) 사람은 스스로 감각적, 이성적, 도덕적인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위급할 때나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을 때 혹은 사망의 위험에 직면할 때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본질적으로 종교심이 있기 때문이다.(행 17:22) 2)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獲得的 혹은 後天的 지식)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자연)와 특별계시(성경)로부터 나오는 지식이다. 즉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연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그것은 지식의 축적과 감각과 반성, 숙고와 토의 등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제한된 것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참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은 영이신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고 불변하신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4) 1)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인격성) (1)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에 인격을 부여하신 인격적인 분이다(엘/여호와/멜렉=왕=영원한 통치=출 15:18) (2)이름을 안다는 것은 이름의 소유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3)하나님은 자의식과 자결정의 재량을 가진 ‘나’ ‘너’ ‘그’라는 대명사들이 의미있게 적용될 수 있는 존재이시다(지, 정, 의의 소유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4)하나님의 이름은 망령되이 불리워져서는 안 된다(출 20:7) 2) 하나님은 한분이시다(유일성, 사 45:18, 사 44:10, 렘 2:5, 사 44-46장). (1)하나님이 한분이심을 알리는 모세(신 4:35, 39) (2)하나님은 그 능력과 지혜에 있어 다른 모든 신들을 능가한다(시 66:6-7) (3)다른 모든 우상은 변덕스럽고 어지러운 만신전(萬神殿, pantheon)으로 어리석고(렘 10:8) 무능하다(렘 14:22). 3)하나님은 영(spirit)이시다(영성)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며 물질에 의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 4)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불가견성) 하나님은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시다(딤전 6:16)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일 4:12) 5)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다(생명성)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렘 10:10) 자기 속에 생명이 있고(요 5:26) 살으시고(살전 1:9)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딤전 6:16).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 42:2) 3. 하나님의 명칭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 성품 그리고 사역 등을 나타내주고 있다. 1)구약 (1)하나님(엘로힘=영어의 God) 구약에 2000번 이상. 가장 일반적인 복수형 단어. 위엄의 복수형. 엘로힘은 하나님께서 강하시고 권능있는 분이기 때문에 경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2)주(아도나이=영어의 Lord) 주 또는 주인 이란 뜻. 우리말의 ‘주’ 또는 ‘주님’이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소유자이시며 절대적인 만유의 통치자이심을 드러내는 이름이다. (3)여호와(야웨=Yahweh) 특별히 하나님은 ‘여호와(야웨)’라는 이름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명칭은 가장 신성하고 탁월한 이름으로 출 3:14를 근거로 하여 히브리어의 ‘자존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하나님의 불변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모음이 없어서 유대인학자들은 아도나이의 발음으로 읽음. (4)복합 명칭 ①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축복과 위안의 근원이 되심을 나타내주는 이름이다. ②엘 엘욘(지고하신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 민 24:16, 시 18:13) ③엘 올람(영원하신 하나님, 창 21:33, 사 40:28) ④엘 로에(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3) ⑤엘로힘 체바욧(안식의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삼상 4:4, 삼하6:2) ⑥여호와 닛시(여호와는 우리의 기;Banner, 승리, 출 17:15) ⑦여호와 샬롬(여호와는 평강, 삿 6:23) ⑧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회복의 하나님, 겔 48:35) 2)신약 신약성경에서는 구약 히브리어 명칭과 뜻이 같은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다. (1)하나님(데오스=Theos=God)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가장 공통적인 이름이다. 이 용어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나 하나님 또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나 혹은 너의, 우리의 하나님 등으로 번역되었다. (2)주(큐리오스=Kurios=Lord)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사용된 이름이다. 그것은 아도나이와 여호와를 대신한 이름이다 이 명칭은 만물 특히 하나님의 백성의 소유자요, 지배자로서의 하나님, 왕의 권세와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3)아버지(파테르=Pater)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신 32:6, 사 63:16), 창조주, 삼위일체의 제 일위이신 성부 하나님, 하나님의 영적 자녀인 산자들의 아버지(윤리적 관계)이시다. 4. 정리 (묵상과 적용) 1.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압니까(두 가지 지식)? 2.하나님의 5가지 본질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을 나타내는 1)하나님 2)주님 3)여호와는 각각 어떤 의미입니까? 제 2과 하나님의 성품(절대적 성품=非共有的 屬性,출3:14)(The Character of God: Incommunicable Attributes) How is God different from us?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셨는지를 배워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성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오늘은 그 중 한가지로 하나님만이 가지신 고유한 성품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 또는 절대적 성품이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런 절대적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1.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독립성 또는 자존성;Indefendence, The Aseity) 1)하나님은 무엇에 의존해서 계신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십니다 2)하나님은 그 마음(롬 11:33,34)과 의지(단4:35, 롬 9:19,엡1:5,계4:11)와 권능(시 115:3)과 계획과 목적(시 33:11)에 있어 독립적이십니다. 3)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2.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입니다(하나님의 불변성;Unchangableness, The Immutability) 1)하나님은 존재, 완전성, 목적 그리고 약속에 있어 변치 않으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말 3:6, 히 11:3). 2)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시 102:26-27). 3)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불변하십니다(민 23:19, 히6:17-18). 3.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하나님의 무한성;Eternity, The Infinity) 하나님은 사람처럼 제한이 없으신 자유하신 분이십니다. 1)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욥 11:7-11, 시 145:3, 마 5:48): 하나님은 그 존재와 본질에 있어 무한하십니다. 2)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시 90:2, 엡 3:21): 하나님은 시간에 제한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제한이 없으십니다. 3)하나님의 공간적 무한성(렘 23:23,24, 행 17:27-28): 하나님은 모든 공간을 초월하시며 공간에 의지하지 않으시나(초월성) 동시에 모든 공간에 임재하십니다(내재성). 4.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하나님의 통일성,단순성,유일성(The Unity) 1)하나님이 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과 구별되는 오직 한분이십니다(신 4:35, 6:4, ). 2)하나님은 분할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3위 1체). 3위 1체 하나님은 서로 혼합되거나 덧붙여진 합성된 분이 아닙니다. 3위 1체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은 동일합니다(고전 8:6). 5.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의 편재성; Omnipresence) 1) 하나님은 공간의 주인이시며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 편재하십니다. 2) 하나님은 공간적 차원을 가지신 분이 아니십니다(왕상 8:27). 3) 하나님의 임재는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6. 정리(묵상과 적용) 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았으니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절대적 성품을 닮은 곳이 있습니까? 2) 하나님의 절대적 성품 5 가지를 외워봅시다. 3) 하나님의 절대적 성품이 우리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각자 깊히 묵상해봅시다. 이런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께 깊이 다가가시기를 바랍니다 제 3과 하나님의 성품(보편적 성품=共有的 屬性, 민 23:19) 하나님의 성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 중 한가지로 사람의 성품과 유사한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봅시다. 이것을 하나님의 보편적 성품 또는 공유적 속성이라 합니다. 1.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 4:24, 하나님의 영성;spirituality) 1)그러므로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2)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는 영성(희미하게-반틸)이 있습니다. 3)하나님은 영이시나 사람은 영․육적 존재입니다. 2.하나님은 지성을 가지신 분입니다(하나님의 지성) 1)하나님의 지식(삼상 2:3, 욥 12:13, 시 94:9, 147:4, 사 29:15, 사 40:27,28) 2)하나님의 지혜(창조=시 19, 섭리=시33:10-11, 구속하심=롬 11:33, 고전 2:7, 엡 3:10) 3)하나님의 진실하심(veracity, 윤리,논리적 진리,진실,신실하심):헛되고 거짓된 신과 구별(시 96:5, 시 115:48 사 44:9) 3.하나님은 도덕적인 분입니다(하나님의 도덕성) 1)선하신 하나님(막 10:18) 2)사랑의 하나님(요 3:16, 마 5:44) 3)은혜의 하나님(창 33:8, 삼상 1:18):은혜란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보이는 은총 4)긍휼하신 하나님(신 5:10, 시 57:10, 86:5):부드럽고 온화하고 불쌍히 여기는 자비 5)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시 86:15, 롬2:4, 벧전 3:20)≒관용 6)거룩하신 하나님(카다쉬=자르다에서 유래) 7)의로우신 하나님(차디크,디카이오스=표준에 대한 순응 의미, 스9:15, 느9:8, 시119:137, 요 17:25, 계 16:5) 4.하나님은 주권을 가지신 분입니다(하나님의 주권적 속성) 1)의지의 하나님:창조와 보존(시 135:6, 계4:11), 통치(잠 21:1), 선택과 유기(롬 9:15-16, 엡 1:11), 그리스도의 고난(눅 22:42), 거듭남(약 1:18),성화(빌 2:13), 신자의 고난(벧전 3:17), 삶, 운명(행 18:21, 약 4:15), 작은 것들(마 10:29)에 까지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 2)능력(전능)의 하나님:하나님은 절대적(원치않으나 하실 수 있는 것), 질서적(작정된 것) 능력(창 18:14, 민 23:19)을 가지신 분입니다. 즉 하나님은 결정하신 것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며 그가 원하시면 그 이상으로도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슥 8:6, 마 26:53). 5.정리(묵상과 적용) 1)하나님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하나님의 보편적 성품 4 가지는 무엇입니까? 3)하나님의 보편적 성품이 우리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각자 깊이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께 더욱더 다가가시기를 바랍니다! 제 4과 하나님의 작정(作定)과 예정(豫定) Ⅰ.엡 1:11절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쉽지 않은 교리입니다. 사람마다 교단마다 교파마다 생각과 주장이 다릅니다. 1.하나님의 작정(the Divine Decrees)이란 무엇인가 1)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하신 영원한 목적이 있습니다(엡 1:11, 시 33:11). 2)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셨습니다(롬 9:22, 행 2:23). 이것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합니다. 3)그러나 이 문제는 교파마다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매우 난해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작정의 문제는 주로 칼빈주의 교단에서 배우게 됩니다., 2.성경은 하나님의 작정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1)하나님의 작정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의지가 담겨있습니다(욥 38:2, 행 2:23, 히 6:17). 2)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의지와 경륜과 계획과 기뻐하심 가운데 일들을 작정 하셨습니다(사 53:10, 시 51:19, 사 49:8). 3.하나님의 작정의 성질 1)하나님의 작정은 하나입니다. 2)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이 지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알려줍니다., 4.하나님의 작정의 특징 1)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됩니다(엡 3:10, 11) 2)인간의 작정은 그 효능에 있어 유한하나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합니다. 3)인간은 계획을 포기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은 분명히 일어납니다. 4)인간은 계획을 변경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작정은 불변하십니다. 5)하나님의 작정은 물리적 영역, 도덕적 영역, 선하든지 악하든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엡 1:11) ①사람의 선한 행동(엡 2:10) ②인간의 사악한 행동(잠 16:4) ③우발적 사건들(창 45:8, 잠 16:33) ④목적과 방편(시 119: 89,91 엡 1:4) ⑤인간의 생명의 연한(욥 14:5, 시 39:4)과 사람이 사는 곳(행 17:26) 6)죄에 관해 하나님의 작정은 허용적이십니다. 그러나 자기 결정의 결과를 규제하고 통제할 것을 결정하십니다(시 78:29. 106:15, 행 14:16, 17:30). ※ 따라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5.정리(묵상과 적용) 1)세상에 우연이란 있을 수 있습니까?(마 10:29) 2)욥의 일을 누가 작정했습니까?(욥 23:13-14) 3)하나님의 작정을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깊어지시기를 바랍니다. 2. 엡 1:4-5절 1.하나님의 예정(the Divine Predestination)이란 무엇인가 1)하나님의 예정이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구원과 관련되어 미리 정하신 섭리를 말합니다. 2)여기에는 사람과 천사와 같은 도덕적 피조물이 모두 포함됩니다.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도 물론 포함됩니다. 3)예정의 용어: *야다(히;창 18:19, 암 3:2, 호 13:5)= 어떤 이를 사랑의 관심의 대상 혹은 선택적 사랑의 대상으로 삼다. *프로그노시스, 프로기노스케인(헬;행 2:23, 롬 8:29, 벧 1:2)= ‘야다’와 관련된 언어로 봄! 즉 ,‘미리 알다’가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선택하다’. 2.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어떤 주장들이 있는가 1)하나님은 무조건(절대)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는 행동을 미리 알고 계신데 기초한다(알미니안, 절대 예정이 아닌 조건적 예정, 예지 예정). 2)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인간은 전적 타락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복음적 협동이 필요하다(웨슬리안-알미니안). 3)사람은 믿고 회개해서 선택된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믿고 회개케 하려고 선택하셨다(칼빈주의). 3.하나님의 예정의 부분 1)선택:하나님은 사람의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2)선택되지 못한 자들은 벌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두려운 작정’:칼빈, 유기:어거스틴). 4.그럼 복음을 이해 못하는 유아들은 어찌될까요 1)“택함받은 유아”는 어려서 죽어도 모두 구원받는다(칼빈주의). 2)유아도 영세를 받아야 구원받는다(카톨릭). 3)복음을 듣지못하면 멸망받는다(루터파). 4)모든 유아는 구원받는다(침례교, 웨슬리안알미니안). 5.정리(묵상과 적용) 1)야다는 무슨 뜻입니까? 2)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될까요?(행 13:48) 3)택함 받지 못하면 어찌 될까요?(요 17:12, 마 22:13-14) 제 5과. 칼빈의 신론 1. 칼빈 신론의 특징 1) 하나님 중심 2) 구원 중심 3) 믿음 중심 4) 적응(accommodation)의 원리 2. 칼빈의 신학 구조 요약(이양호 교수 저, 요약:조덕영) Ⅰ. 1.20세기 초까지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 신학의 통일적 원리들을 하나님의 예정으로 보았다. 그 중심에는 트뢸치(Ernst Troeltsch) 가 있다. 트뢸치는 칼빈을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한 하나님 중심 신학자로 보았다. 2.니젤(W. Niesel)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였다. 3.벤자민 위필드(B. B. Warfield)는 칼빈을 무엇보다 성령 신학자로 보았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교리는 칼빈이 교회에 준 선물이라고 보았다. 4.그러나 칼빈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이 주제로 보여진다 5.지금까지 신학자들은 칼빈의 한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으로 보여진다. 6.밀러(Benjamin Charles Kilner, Jr.)는 성령과 말씀을 강조한다. 7.파티(Charles Partee)는 칼빈의 중심 교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주장한다. Ⅱ. 1)칼빈 연구가들은 기독교 강요를 분석함으로써 칼빈 신학의 구조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2)1868년 쾨스틀린(J. Kostlin)은 기독교 강요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했으며, 금세기와서 다우위(Edward A. Dowey)는 그의 저작 <칼빈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지식>에서 쾨스틀리의 주장을 더욱 발전 시켰다. 3)1559년 <기독교 강요> 라틴어 최종판은 duplex cognitio domini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4)파커(T. L. Parker)는 다우위의 주장을 반박한다. 5)방델(F. Wendel)도 기독교 강요 최종판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 6)갬블은 칼빈 연구가 duplex cognitio domini이 그의 신학의 하나의 지배적 원리이거나 유일한 지배적 원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데 점진적 일치를 보아왔다고 본다. 7)반면에 파커는 기독교 강요가 사도신조의 네 부분에 따라 네 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고있다. 8)그러나 파커도 그의 칼빈의 하나님 지식론에서 제 1부 창조주에 대한 지식 제2부 구속주에 대한 지식 등 두 부분으로 나누어 논술하고 있다. 9)밀러는 교회는 칼빈 신학의 중심이라고 본다. 10)윌리스는 duplex cognitio domini가 “창조주와 그리스도”가 아니라 “창조주와 구속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1)칼빈에게서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포함된다. 12)파티는 칼빈의 중심 교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근거하여 기독교 강요를 분석한다. Ⅲ. 1)칼빈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에 보존이 포함된다. 즉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활동을 하는 동시에 구원 활동을 하신다. 2)바우케(H. Bauke)는 1922년 칼빈 신학의 문제들에서 칼빈 사상의 특징이 변증법적 합리주의로서 그의 성서주의에 입각하여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칼빈을 체계론자라기보다 변증론자 기껏해야 변증법적 체계론자라고 주장했다. 3)엔더슨은 칼빈 사상을 “다양한 원리들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 보는 견해를 주장하는 반면 가녹지는 칼빈 신학의 내용과 방법론을 변증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4)칼빈의 사고 구조가 타원형인가 아니면 하나의 중심점을 가지는 정원형인가 변증법적인가 아니면 연역법적인가 이 논쟁은 바우케 지적한대로 독일적인 칼빈 연구가와 프랑스나 다른 민족 사이의 사고 구조상 차이일지 모른다. 독일적 사고 구조에서는 통일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칼빈을 통일적인 사상가로 보려한 반면 비독일적 사고 구조에서는 역설적인 삶의 현실을 인정하고 변증법적 관점에서 대상을 보려하기 때문이다. 5)이 문제의 해답을 위해서는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extra Calvinisticum)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자는-화육 후에도-인간 본성과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루었으나 육체에 제한 되지 않았다는 교리이다. 6)니젤은 칼빈 신학에 있어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과소평가하지만 오베르만은 이것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고 본다. 7)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이 반영된 칼빈의 사고 구조는 일종의 동심원적이다. 8)한편 암스트롱은 칼빈의 신학 구조가 가설적이라고 주장한다. 암스트롱은 칼빈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두 세계 속에서 친근하게 살았다고 주장한다. 9)엥겔은 전망주의적 관점에서 칼빈의 인간론을 다루었다. 10)부스마는 그의 저서 <칼빈>에서 칼빈 안에는 두개의 칼빈이 있다고 주장했다. Ⅳ. 1)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며 이 둘은 주변적인 것과 중심적인 것의 관계에 있다. 2)칼빈은 늘 주변적인 것과 중심적인 것을 구별한다. 3)예를 들면 칼빈은 자연 계시를 인정하나 이것은 중심적인 것이 아니요 주변적인 것이다. 4)성서와 칼빈 칼빈은 성서의 교리에는 오류가 없으나 문자적 오류는 있다고 보았다. 즉 칼빈은 중요하지 않은 오류는 있다고 보았다(보기=마 27:9 주석=예레미야는 스가랴의 오류). 5)믿음에 대한 칼빈의 입장 칼빈은 신앙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의 일도 부정하지 않았다. 6)칼빈의 교회론 칼빈의 교회론에서 예정된 신자는 중심부에 있으며 그렇지 않은 자는 주변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7)칼빈의 성례론 칼빈은 성례의 실체와 표시를 동일시한 카톨릭도 비판하고 성례의 실체와 표시를 분리시킨 급진주의자들도 비판하면서 성례의 실체와 표시를 중심과 주변, 내용과 그릇의 관계로 이해하였다. 8)칼빈의 정치 사상 칼빈의 동심원적 사고 구조는 그의 정치 사상에 영향을 미쳐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정이라는 사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대의민주주의이다. 민중들이 민중들 가운데 최선의 사람을 선택하여 그들이 상호 견제하면서 정치를 하게 하는 이 혼합정은 제네바의 정치 제도였다. 동시에 이것은 칼빈주의자들을 통해 전유럽으로 파급되었다. 하지만 칼빈의 동심원적 구조를 파악하지 못해서 칼빈이 근대 민주주의에 적이라는 주장(세네비에르)과 근대 민주주의의 주창자라는 주장(맥니일, 허드슨)이 맞서게 되었다. 9)칼빈의 경제 사상 칼빈의 동심원적 구조는 경제사상에도 나타나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복지사회를 지향하게 되었다. 칼빈의 사고 구조를 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스 베버의 논쟁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논쟁되어 왔다. 칼빈을 자본주의의 창시자로 보거나 기독교 사회주의의 주창자로보는 양극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복음적 사랑의 행위를 중심에 두었으나 인간에 타락 때문에 사유재산 제도를 두었다고 봄으로써 자본주의적 요소를 주변적인 것으로 인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6과 삼위일체(고후 13:13) 하나님 안에는 세 인격(人格;three persons in one God)이 계십니다. 삼위일체(the Trinity)의 신비에 대해서 배웁니다. 1.삼위일체는 무엇을 말할까요? 1)하나님은 그 신격에 있어 삼위로 계시는데 바로 성부성자성령입니다. 2)삼위는 한 하나님이요 본체는 하나이고 영원하시며 권능과 영광이 하나입니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 2장 3항). 3)성부는 스스로 계신분이며 어디로부터도 나오거나 유출된 분이 아닙니다. 성자는 영원토록 성부에서 탄생하시고 성령은 영원토록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십니다. 4)삼위일체란 말은 트리아(헬), 트리니타스(라)에서 온 말로 하나인 셋, 셋인 하나, 하나에 셋을 의미합니다. 5) 역사적으로 이 교리는 아타나시우스(삼위일체의 일체교리)와 갑바도기아 교부들(삼위일체의 삼위 교리)이 공헌하였다고 봅니다. 2.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의 증거 1)구약:창 1:26/창 3:22/사 48:16, 시 51:11,139:7, 느 9:20/ 사 63:10. 2)신약:고전 8:6/롬 9:5/고후 13:13/요 10:30/마28:19/눅1:35/요 15:26/고전 12:4-6 3.삼위의 하나님 1)성부:신 32:6/렘 3:4/롬 8:15/고전 8:6/약 1:17/요일 3:1 2)성자:요 1:14/11:27/요 3:16/시 2:7/행 13:33/사 9:6/계1:8/마18:20/히 1:6 3)성령:요 15:26(지성)/사 63:10, 엡 4:30(감정), 행 16:7(의지), 행 5:3-4 4.삼위일체에 대해 성도들이 알아야 될 사항 1)오직 기독교종교에만 있는 신비한 신개념입니다. 2)단일신종교인 유대교와 이슬람교에는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3)그래서 여기서 이단이 많이 나옵니다. 4)칼빈=3위와 일체의 어느 한쪽에 치우쳐도 안되고 사변(思辨)이나 유추로 설명하려 들지도 말고 오직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만 믿어야 되며, 동일한 위엄과 영광과 경배가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기독교강요 1권 13장). 5)삼신(三神)론과 양태(樣態;모양,mode)론이라는 이단설이 있습니다. 삼신론은 하나님이 세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양태론은 한분이신 하나님이 세가지 모양으로 나타난다(계승-성부고난)는 주장입니다. 6)칼 바르트=성부는 계시자, 성자는 계시, 성령은 계시되어진 것. 5.정리(묵상과 적용) 1)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존재에 있어 한분이십니까 세분이십니까? 2)성부성자성령은 권능과 영광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3)유대교나 이슬람교도 삼위일체종교입니까? 4)삼신론과 양태론은 왜 이단설입니까? <참고> 교회사에 나타난 주요 이단설 1. 단일신론(Monarchianism) 1)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요 그리스도는 인간인데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있다는 주장으로 단일 군주론, 군주신론, 동력적 단일신론이라고도 합니다.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 200-75)은 대표적 단일신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단일신론은 유대교적 유일신론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접근하려 합니다. 따라서 정통 기독교의 입장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단일신(유일신)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3) 말씀에 의해 수태 되어 마리아의 아들의 인성을 지닌 그리스도를 본질상 신격인 그리스도와 구별하여 본질상 하나님의 양자(養子)로서의 아들에 불과하다는 양자론(Adoptionism)이나,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라는 전제 아래 삼위일체를 한분 하나님이 다른 양식으로 나타났다는 양태(modus)로 설명하려한 양태론도 범(汎)단일신론의 범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 1)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이 아닌 오직 하나(monos)의 본성(phisis)만을 가졌다고 보는 주장입니다. 2) 제 4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칼케돈 공의회, 451)는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을 강조하여 단성론을 부정하였습니다. 3) 칼케돈 공의회 이후 단성론은 유티케스(Euthyches, 378경-454), 줄리안(Julian of Halicarnassus)을 따라 그리스도의 인간적 몸은 신성과 완전히 결합, 변화하여 부패하지 않게 되었다고 본 가현론자와 안디옥의 세베루스(Severus, 460경-538)를 따라 두 본성은 단지 관념에 불과하고 그 본성은 우리의 본성처럼 타락할 있다고 본 세베루스주의자로 나누어졌습니다. 4) 이들 견해는 아직도 시리아의 야코부스파(Jacobite)와 이집트의 콥트(Coptic) 교회(콥트 교회도 단성론파, 칼케돈 공의회 지지파, 동방 카톨릭 콥트파, 이디오피아 정교회 등의 네 분파가 있는 데 여기서는 단성론을 지지하는 콥트 교회를 말함), 이디오피아 교회들의 해석으로 남아있습니다. 3.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ism) 1) 단의론은 단의지론(單意志論), 단일의지론, 일의론(一意論)이라고도 합니다. 2) 단의론은 그리스도가 하나의 본질만 가졌으므로(단성론) 의지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에게 인간적 의지는 없고 하나의 신적 의지만 가졌다고 봅니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610-638)였던 세르기우스(Sergius)는 대표적 단일 의지론자였습니다. 3) 칼케돈 공의회(A.D. 451)는 그리스도가 의지에 있어 두 본질을 갖는다고 선포하여 단의론을 부정하였습니다. 즉 칼케돈 공의회는 단성론, 단의지론 모두를 부정하였습니다. 또한 제 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680)는 그리스도가 두 개의 의지를 따르며 인간으로서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에 종속된다고 정리하였습니다. 4. 양태론(樣態論, Modalism) 1)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은 양식론이라고도 불리는 데, 전통적 유일신 신앙(단일신론)은 고수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이단 이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을 가졌으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입장입니다. 한분 하나님께서 모양만 성부, 성자, 성령의 다른 형식(forms)으로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은 사라지고 단일한 신격만 남게 됩니다. 2) 본래 이 단어는 독일의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이 삼위일체에 대해 이단적 교리를 가지고 있던 노에투스와 프락세아스, 3세기 사벨리우스의 공통적 요소를 말하려고 도입한 단어였습니다. 3) 전형적인 양태론은 같은 하나님이 창조 시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구속에는 성자 하나님으로, 성화 때는 성령 하나님으로 활동한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즉 양태론은 교회의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부정합니다. 4) 때로, 말로는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삼위일체와 양태론을 잘 구분하지 못해 양태론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양태론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있어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와 설명이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설명은 쉽지 않더라도 성경은 분명 하나님이 삼위일체임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양태론적으로 하나님을 해석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2. 대표적인 양태론자 세 사람 1) 프락세아스(Praxeas): 최초의 양태론자로 창조주 하나님은 성부 한분으로 아버지 자신이 동정녀에게 들어가 그 자신이 동정녀에게 나시고 그 자신이 수난 받으셨다 주장하여 삼위의 위격 구별을 부정. 터툴리안이 비판. 2) 서머나의 노에투스(Noëtus of Smyrna): 성부가 친히 성육신하시어 그리스도가 되어 고난 받고 죽었다가 스스로 부활했다는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 Patripassianism) 주장. 히폴리투스는 노에투스를 최초 양태론자로 봄. 3) 사벨리우스(Sabellius): 하나님은 한분으로 신격의 엄중한 단일성을 가르침. 따라서 한분 하나님이 창조와 율법 수여 시에는 성부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나타난다고 주장하여 양태론의 절정을 이룬 인물. 3. 양태론의 주요 역사 1) 처음에는 교황 칼리스투스(Callistus, 217-222)가 사벨리우스에 동조했으나 결국 파문 2) 263년 로마 회의에서 정죄, 파문 당함 3) 종교개혁 시대 세르베투스(M. Servetus)와 18세기 신비주의자 임마누엘 스웨덴 보르그(I. Swedenborg) 등에게서 다시 등장함. 4) 오늘날에도 일부 기독교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양태론에 빠져서 방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교회는 늘 바른 교리를 잘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제 7과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 말의 본 뜻을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의 섭리 1)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통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하시고 인도하시는 사역을 말합니다. 즉 모든 피조 세계와 피조물들을 돌보시고 다스리시는 일을 하나님의 섭리라 합니다. 그러므로 창조론과 섭리론은 반드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2) 영어의 섭리에 해당하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성경적입니다(성 어거스틴이 발전=헬, 프로노이아;관심,주목,전망-라, 프로비덴티아). 3) 철학의 우연론(에비규로)과 운명론(스도이고)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4) 범신론(하나님과 세계 동일시)과 이신론(理神論,Deism;자연신론)과 불교 사상(범신론적)은 모두 섭리론이 아닙니다. 2.섭리의 요소 1) 보존(Preservation) 보존이란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만물들과 거기에 부여하신 특성과 능력들을 유지시키는 계속적인 사역을 말합니다(신 33:12, 25-28, 삼상 2:9, 느 9:6, 시 107:9, 마 10:29, 행 17:28). 2) 협력(Concurrence) 하나님은 피조물을 단순히 만드신게 아니라 피조물의 동작과 활동에도 관여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창조물과 합력하여 하나님의 일을 정확하게 실행하게 하십니다(창 45:7-8, 신 8:18, 수 11:6, 잠 21:1, 왕상 22:20-23). 3) 통치(Government)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만물을 그 존재의 목적에 맞도록 다스리십니다. 가장 하찮은 일들(마 10:29-31)과 우연하게 보이는 일들(잠 16:33), 그리고 사람의 악한 행실들(행 14:16)과 선한 행실들(빌 2:13) 까지 모두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습니다. 3. 특별 섭리(이적) 하나님은 때로 특별한 섭리를 베푸십니다. 시급한 기도 응답, 비상시의 구출, 긴급한 위험에서의 보호 등이 모두 특별 섭리입니다(시 11:1, 욘 2:1, 10, 요 11:41-44). 4. 정리(묵상과 적용) 1)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 2) 섭리의 세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3) 깊은 묵상: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섭리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묵상해봅시다. 제 8과 창조주 하나님(창세기 1장 1절, 롬 1:20)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즉 성경의 하나님은 태초에 모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배워봅시다. 1.하나님의 창조 1)하나님은 시간과 물질과 공간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1, 성 어거스틴). 2)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셨습니다(히 11:3, 성 어거스틴). 3)하나님은 보이는 세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도 만드셨습니다(골 1:16). 4)창조의 궁극적인 목적: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것을 나타내십니다(시 19:1-5, 어거스틴). 2.물질 세계의 창조 1)창조 주간(6일) 창조. 첫째날=빛 둘째날=궁창, 물 셋째날=풀,채소,각종 나무(종류대로 창조) 넷째날=큰 광명, 작은 광명(징조와 일자와 사시와 연한), 별들 다섯째날=물고기, 새(종류대로 창조) 여섯째날=육축, 땅에 기는 것, 짐승(종류대로 창조), 사람 일곱째날=안식(복을 주심) 2) 생물진화론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3)창조는 지속적임(Creatio continua). 3.보이지 않는 것들의 창조 1)영적 세계 2)천사 (1)그룹=낙원의 입구를 지키고(창 3:24), 속죄소 응시(출 25:18, 사 37:16,히 9:5), 다양한 형태의 생물(겔 1장, 계4장) (2)스랍=하늘 임금 보좌 수종(사 6:2, 6) (3)가브리엘(단 8:16, 눅 1:19)과 미가엘(단 10:13, 유9, 계12:7) (4)정사와 능력(엡 3:10, 골 2:10),보좌(골 1:16),하늘의 주관자(엡 1:21, 골 1:16), 능력(엡 1:21, 벧전 3:22) 4.잘못된 기원론 1)이원론:하나님과 물질은 함께 영원하다. 2)유출설:세상과 하나님은 하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새상이 유출되었다. 3)(유신)진화론: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으로 세상을 만드셨다. * 여기서 말하는 진화는 생물 진화론으로 이것은 수용하기 어려운 이론입니다. 다만 우주나 지질이나 문화 등에 대해서는 진화라는 말보다 우주 기원론이나 문화의 진보, 지질의 변이 등으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4)유물론:신도 없고 영적 존재도 없다. 오직 물질만이 존재할 뿐이다. 공산주의. 5. 창세기 1, 2장이 보여 주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과 특성들 (1)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2)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심(creatio per verbum dei)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Trinitarian work of creation) (4) 질서 있는 창조(orderly creation) 형태(Form)내용(Fullness) 첫째 날 빛과 어두움 넷째 날 낮과 밤의 광명들 둘째 날 바다와 하늘 다섯째 날 바다와 하늘의 피조물들 셋째 날 빈 땅 여섯째 날 땅의 피조물들 (5) 그 종류대로(after its kind)의 창조 (6) 선하신 창조(good creation) @창조 신앙,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목회와 신학 부록 <그말씀> "창조론 특집" 원고) 창조 신앙의 확신을 잃어가는 그리스도인 최근 <한국 갤럽>의 통계 조사(2014년 4. 17-5. 2)에 따르면 창조에 확신이 없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비율이 41%나 되며 불교식 해탈을 믿는 개신교인의 비율(43%)도 오히려 불교인들(42%)보다 높다는 통계가 나와 많은 기독교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심지어 불교의 핵심교리인 윤회설을 믿는 개신교인들의 비율(34%)도 불교인들의 비율(38%)과 별 차이가 없었다. 도대체 그동안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설교해 왔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목회자요 신학자로서 필자도 참담한 심정가운데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사형통 신앙도 좋으나 이제 한국교회는 본질과 기본으로 돌아가서 성경적 바른 신앙과 교리를 전하는 데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 중에서도 바른 창조 신앙이 뒷받침 되지 않는 신앙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심각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창조에 대해 무엇을 설교해야 할까? 창조 신앙의 중요성 창조 교리는 성경에서 독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중요한 신학적 진술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창조 세상 속에서 인류 구속 사역을 성취, 완성하였다. 따라서 창조와 구속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구속주 하나님이심으로 이 둘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교회는 중요한 공동 선언인 니케아 신경과 사도 신경에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창조 교리는 발전하지 않고 구속 교리만 발전해 온 감이 있다. 그것은 20 세기 들어 구약신학과 교의신학 양편에서 영향력 있는 두 신학자인 구약신학자 폰 라드(Gerhard von Rad, 1901-1971)와 교의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주도한 구속 신학의 번영이 그 원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볼 때 창조 세상(자연)은 늘 구속 은총 앞에 무기력하거나 구속에 종속될 뿐이었다. 이들이 우려했던 것은 창조신학이 구속신학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을까하는 불필요한 노파심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창조와 생명이 전제되지 않고 중심이 되지 않는 구속 신학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새하늘과 새땅이 없는 하나님 나라는 무슨 존재 의미가 있는가. 창조교리를 구속교리에 종속 시키려한 폰 라드에 반대한 구약학자 슈미트(Hans Heinrich Schmid)가 말하듯 “창조교리는 주변적인 것이 아니고 명백하게 근본적인 문제이며 모든 신학은 특별히 창조를 말하지 않아도 창조신학”이다. 사실 창조를 무시하고 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주의 시작이 창조요 인간의 시작도 창조요 천국도 새 하늘과 새 땅, 곧 재창조의 장소이다. 창조를 떠나서는 구속을 논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 같은 신학적 전제를 <복음을 위한 창조신학>이라고 표현하려 한다. 설교자들은 창조 신앙과 구속 신앙의 이 같은 관계를 바르게 지속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를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려고 한다. 창조 신앙, 무엇을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첫째 성경적, 복음적 창조 신앙을 설교해야 한다. 창조를 믿는 종교는 많다. 설교자는 이신론(理神論), 만유내재신론(萬有內在神論), 유출설(流出說), 범신론(汎神論), 영지주의 창조론 등이 왜 바르지 못한 기원론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바른 복음적, 성경적 창조 신앙(기독교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성경 창세기 전반부(1-12장)에 계시되어 있는 최소한 다음의 21가지 기원에 대해 명료하게 설교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은 먼저 우주와 생명의 근본(기독교 세계관의 창조)와 관련하여 (1) 우주의 근본(물질과 공간과 시간의 기원), (2) 빛의 기원, (3) 물의 기원, (4) 천체(해, 달, 별)의 기원, (5) 식물의 기원, (6) 동물(새, 물고기, 육상동물)의 기원을 설명한다. 둘째, 인류(기독교 세계관의 타락)과 관련하여 (7) 안식의 기원, (8) 인류의 기원, (9) 죄의 기원, (10) 노동의 기원, (11) 죽음의 기원, (12) 남녀의 기원, (13) 결혼의 기원, (14) 가정의 기원, (15) 살인의 기원, (16) 문명의 기원, (17) 각 종족의 기원, (18) 국가 제도의 기원, (19) 언어의 기원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구원(기독교 세계관의 구속)과 관련하여 (20) 히브리 민족의 기원과 (21) 예수를 통한 구속에 대한 약속의 시작을 보여 주고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차별되는 초월 종교요 진리로서의 21가지 기원 계시(창조 신앙)에 대해 설교자는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더불어 성경은 이를 통해 다음의 사실들을 우리 인류에게 계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설교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시며 영원하시며 인간과 달리 어느 것에도 의존하는 분이 아니다. (2) 창조주 하나님도 인격을 가지셨고 인간과 인격적 교제를 원하신다(1:26-2:25). (3)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 창조를 기뻐하셨고 인간 창조를 무척 기뻐하셨다. (4) 창조주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범죄한 인간을 반드시 심판하신다(3:8-24), 6:5-8= 대홍수 심판 경고, 11:1-9= 바벨탑 사건, 18: 16-19:29= 소돔과 고모라 심판). (5) 창조주 하나님은 자비 하시다(3:21=가죽 옷 입히신 사건, 4:15= 살인자 가인 보호, 6:8= 노아에게 베푸신 은혜, 18:32= 10인의 의인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심판 치 않으시겠다는 아브라함과의 약속 대화). (6) 창조주 하나님은 권능이 무한하시다(18:14= 경수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 이삭의 약속, 26:12-16= 이삭에게 백배의 농사 소출의 은혜를 베푸심, 50:20= 요셉을 구하시고 은혜 베푸시는 권능의 하나님 등). 둘째 창조 신앙을 설명함에 있어 설교자는 창조와 구속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분리되지 않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잘 구분해서 설교해야 한다. 창조 신앙에 담긴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여 비본질적인 것을 구원의 본질처럼 설명하려들거나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부분을 외삽(外揷)하여 단정 짓는 성급함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를 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창조 신앙과 구속 신앙은 기독교의 근본(본질)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외계인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가, 창조의 연대는 언제였는가,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인가 사람인가 등등의 경우에는 아직 성경과 신학과 과학이 모두 동원이 되어도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종말의 때와 시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바 아니요”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때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일부 증거들에 대해 여전히 여백을 남겨놓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호기심이 참 많은 존재이다. 궁금하기는 하나 이런 것들을 신앙의 궁극적 문제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성경에도 없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섣부른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성경이 범상치 않은 계시의 문서임을 인지하고 회중들이 더욱 기도와 성경과 신앙의 신비에 대해 도전하고 분발하는 계기로 유도하는 것이 옳다. 셋째 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자연주의의 문제점을 설교해야 한다. 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자연주의는 반드시 그 종착역이 무신론적 유물론과 우연주의, 자연주의 진화론 등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설교자로 알려진 고(故)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복음주의는 과학에 있어 자연주의 진화론을 수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가끔 성경의 진술이 몇 가지 과학적 발견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 과학보다 성경의 진술이 참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겸손할 필요가 있다. 성경과 달리 과학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과학은 늘 가변적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 1902-1994)가 말한 대로 과학은 반증(反證) 가능해야 과학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창조”와 관련하여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 가운데 겸손하게 설교해야 한다(벧전 3:15-16). 부족한 인간, 하나님의 위엄! 피조물인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세상에 대해 아주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기계공학자도 식품영양화학은 잘 모른다. 식품학자들은 천문학을 잘 알지 못한다. 철학자는 생화학을 잘 모르고 생화학자는 문학을 잘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고 창조 신앙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공격적으로나 논쟁하듯 설교하지 말아야 하고 성도들도 진리를 아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우리 인간은 특별 은총(구속)과 자연 은총(창조 은총) 앞에서 여전히 허물투성이의 지극히 작은 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것들도 언젠가 거울을 마주 보듯 깨달을 수 있는 그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위엄’(Magnalia Dei)을 담대히 선포하라! 6.정리(묵상과 적용) 1)하나님은 ( )과 ( )과 ( )을 창조하셨다. 2)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입니까? 3)진화론은 성경적입니까? 4)깊은 묵상:영원하신 하나님과 창조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묵상해봅시다.[출처] 조직신학 신론(신학 서론과 신론) |작성자 창조의 작은 언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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