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아들 2021. 3. 5. 23:20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의 속성들에 의해 그를 묘사할 수는 있다. 하나님의 속성들(attributes)이란, 하나님께나 그의 하시는 일들에 돌려지는 성질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본체와 그 속성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는 각 속성에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그의 본체에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본체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을지라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통해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답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열 가지 속성으로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영(靈)이심

첫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증거하셨다(요 4:24).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말은 그가 물질적 존재가 아니시며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증거하셨다(눅 24:39).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사람이 그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엄히 금하신 것은 그의 영성(靈性)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어떤 형상으로 상상하거나 그런 형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가장 큰 죄로 간주된다.

성경에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표현이 나오지만(출 3:20; 6:6; 사 37:17),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활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적 표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은 그런 표현을 오해하는 것이요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잘못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골 1:15), “보이지 아니하는 자”(딤전 1:17),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자”(딤전 6:16)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증거했다(요 1:18).

성경은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였다고 기록한다(창 18장, 창 32장). 출애굽기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한다(출 24:9, 10). 그러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낮추어 계시하신 모습 곧 그의 영광의 한 면모를 보았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표현(마 5:8)도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밝아진 영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뜻은 아니다. 유한(有限)한 인간은 무한하신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살아계신 자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생명 없는 어떤 개념이나 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영이시다. 그는 인간이 만든 생명 없는 우상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참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라고 증거했고(렘 10:10) 사도 바울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다(딤전 6:16).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상징적 표현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활동하심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인격적 존재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우주의 완전자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그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을 ‘인격적(人格的)’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가 사람과 같이 지정의(知情意) 즉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자이심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감정을 가지시며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시고 행동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셨고 사람이 그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그를 내어쫓으셨다. 하나님은 역사상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손과 팔, 귀와 눈 등의 표현들도 그의 인격성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다(엡 1: 11). 하나님의 분노와 보응도 그의 인격성의 당연한 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영적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외적인 의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바른 지식과 믿음의 마음, 죄를 미워하고 통회하는 마음, 거룩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무한(無限)하심

둘째로,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시다. 하나님은 본체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체가 무한하심을 증거한다. 시편 145:3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크시니] 그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재어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시편 139:7-10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殿)이오리이까?”고 고백한(왕상 8:27) 솔로몬의 고백은 옳은 말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라고 했고(사 66:1),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증거했다(렘 23:2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공간적 의미를 가진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합친 것이라는 뜻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다 품으실 수 있다는, 그러나 그것들을 초월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물질적 몸을 가진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으므로 한 장소에 있으면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공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 충만히 존재하신다. 그는 어디에나 계시고(遍在)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無所不在).

물론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下鑑)하신다’고 말했다(신 26:15).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그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신다’고 말했다(왕상 8:30). 역대하 30:27은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므로, 성경은 때때로 그가 땅에 내려오셨다고 표현한다(창 11:5). 또 에녹과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증거되었다(히 11:5; 왕하 2:11). 또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올리워가셨다(행 1:9). 이러한 말씀들은 분명히 그들이 하늘 위로 장소적 이동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의 영광의 한 처소를 두셨다는 것을 증거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다(히 11:16).

하나님은 또한 그의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완전하심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시고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무한하시고 선하심이 무한하시다. 즉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점에 부족이 없는 완전충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완전하심은 그의 영광으로 나타난다. 그는 영광 중에 거하시며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가장 사모할 만한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영감 중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73:25). 욥기 35:6-8,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행복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홀로 그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신을 향해 완전충족하셔서,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그것들로부터 아무런 영광도 끌어내지 않으시며, 오직 그 자신의 영광을 그것들 안에,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향해, 그리고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모든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모든 것들은 그로부터,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위해 존재하며; 그는 그것들 위에 지극히 주권적 통치권을 가지고 계셔서 그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위해, 또는 그것들 위에 행하신다.

 

영원하심

셋째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것은 그가 시간적으로도 무한하심을 의미한다. 그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신다.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음을 보이는 동시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존재하셨던 그는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신다. 천지창조 이전에 존재하신 그는 영원하시다. 욥기 36:26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모세는 시편 90:2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시간은 피조세계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사실상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시며 시간에 매이시거나 제약을 받으시지 않고 시간 자체를 초월하는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실 수 있는 초시간적이며 비시간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90:4은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신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에게는 전(前)도 없고 후(後)도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그에게 동등으로 또는 항상 현재이다. 그에게 ‘기간’(duration, 시간 흐름의 과정)은 영원한 현재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그가 시작이 없이 영원히 스스로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제1 원인 혹은 궁극적 원인이시다. 그 자신의 존재의 근거는 자신 이외에 없으시다. 사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다. ‘여호와’(예호와 혹은 야웨)라는 그의 이름도 그의 영원자존하심을 나타낸다. 이 말은 ‘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왔고 그 의미는 출애굽기 3:13, 14의 말씀대로 ‘그가 스스로 계신다’는 뜻일 것이다

 

불변하심

넷째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시편 102:27은 ‘주는 여상(如常)하시다’라고 말했는데, ‘여상(如常)하시다’는 말은 ‘동일하시다’(the same)는 뜻이다. 말라기 3:6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했다. 또 야고보서 1:17은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비(非)활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17).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 즉 그가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그의 본체와 속성들의 불변하심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뜻과 계획과 작정의 불변하심을 의미한다. 시편 33:11은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증거한다. 또,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증거했다(사 14:24). 하나님은 그가 뜻하신 바를 변경함 없이 다 성취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께서 뉘우치신다, 후회하신다’는 표현이 간혹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예들 들어, 출애굽기 32:14은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했고, 사무엘하 24:16은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했다. 또 요나 3:10은 “하나님이 그들[니느웨 사람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인간편에서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 즉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표현이며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하심에 대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손상시킬 것이다.

무한하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은 피조물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독특하신 점들이다. 실상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시다. 그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이시다. 인간은 영원자존하시는 그 분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를 항상 인정하며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지혜로우심

다섯째로,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크심은 그의 창조하신 만물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경도 그의 크신 지혜와 지식을 증거한다. 욥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면서(욥 12:13), 하나님을 ‘지혜(다임, 지식)가 온전하신 자’라고 표현하였다(욥 37:16).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말했다(삼상 2:3). 시편 139:1, 2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표현하셨다(마 10:30). 히브리서 4:13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하였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해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의 대상은 현실적인 것뿐 아니라 가상적인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은 직각적이며(욥 34:23) 독립적이고 총괄적이며 동시적이며 개별적이고 명확하고 완전하며 불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지식은 그 범위가 전(全)포괄적이므로 전지(全知)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며 원형(原形)이다.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본받은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한 요소이다. 사람의 지식의 성격은,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과 달리, 점진적이며 의존적이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이고 불명확하고 불완전하며 가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식과 구별되는 지혜는 지식을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을 응용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최선의 목적을 이루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그를 속이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인간은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완전하심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능력이 있으심

여섯째로,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말(엘 혹은 엘로힘)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이 있으시고 그의 능력은 전능(全能)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능자’(솻다이)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솻다이 , 창 17: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며”라고 고백했고(욥 42:2), 예레미야는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라고 했다(렘 32:17).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이니라]”고 말했다(눅 1:37).

하나님의 전능은 측량할 수 없는 무제한적 능력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 안에서 스스로 능력의 사용을 제한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성질에 모순된 일들을 행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죽으실 수 없고 변하실 수 없고 범죄하실 수 없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고(딤전 6:16) 또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으며(딤후 2:13)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라고 말했다(삼상 15: 29).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주권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말(아도나이 )이다(창 15:2). 모세는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라고 고백했다(신 10:17). 다윗은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主權)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 . .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고 말했고(대상 29:11), 여호사밧은,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고 말했다(대하 20:6).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의 구원에 관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 26).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크신 능력을 믿으며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그에게 기도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잠잠히 그를 바라볼 수 있다. 그에게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거룩하심

일곱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모세는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라고 했다(출 15:11). ‘거룩하다’는 히브리어(카도쉬)는 ‘구별됨, 분리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가 모든 피조세계와 구별되며 분리되어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이 엄위하심은 모든 피조물이 그를 찬송하고 경배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시 22:3), 이사야의 환상 가운데 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쳤다(사 6: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또한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모든 죄와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을 의미한다. 도덕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의(義)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이 도덕적 성결은 인간의 도덕적 모범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레 11:45).

 

의로우심

여덟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라고 증거했고(스 9:15), 시편 145:17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라고 말했다. ‘의로운’(찻디크) 혹은 ‘의’(체다카 )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어떤 기준에 맞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의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며,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에 항상 일치하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의 의의 속성은 그가 제정하신 법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할 때 의로운 자가 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했다(신 6:25).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지극히 의로우시다. 그는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그들의 행위들을 판단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이것을 ‘통치적 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의로운 통치자시며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고 고백했고(시 9:8),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불렀다(딤후 4:8).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것을 ‘보응적 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 .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했다(롬 2:5-8).

특히,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은 복음 진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 요소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공의의 속성이 없었다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구주 예수께서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벌적 의’ 때문에, 구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증거했다(갈 3:13).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를 부정하지만, 성경은 매우 분명히 이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인류 역사의 초기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땅은 그들로 인해 저주를 받았고 그들은 죽음과 온갖 불행을 맛보게 되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그 후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성의 유황불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이었다. 그 외에도,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형벌을 가르치고 있다. 그 대표적 몇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예레미야 30:23, 24,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末日)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나훔 1:2,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선하심

아홉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시편 106:1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말씀했다. ‘선(善)하다’는 개념은 ‘이상(理想)에 맞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철학자들이 표현했던 대로, ‘최고선’(最高善)이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랑, 은혜, 인자(仁慈)와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선하시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마 5:45).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로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데서 나타났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속적(救贖的)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했고(롬 3:24)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엡 2:8).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긍휼은 하나님께서 죄의 형벌과 고통 중에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헤세드, 자비, 인자)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또 그는 모세에게 자신을 ‘자비롭고(라훔)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헤세드)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셨다(출 34:6).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악인들과 불순종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다. 그는 자신을 ‘노하기를 더디하는’ 하나님으로 증거하셨다(출 34: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썼다(롬 2: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물들에 대해서도 선하시다. 그러므로 시편 145편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만유[모든 생물들]를 선대(善待)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 . 중생(衆生, 모든 것들, 모든 피조물들)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라고 했다(시 145:9, 15).

 

진실하심

열째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진실이란, 이름과 실질, 속과 겉, 말과 행위가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참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중심과 외적인 표현, 그의 말과 행위가 항상 동일하시다. 그는 문자 그대로 참되시다. 그에게는 어떤 거짓도 없으시다. 또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성실하시며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 약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신실함은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의 근거요 기쁨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호와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말했다(신 7:9).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라고 말했다(시 36:5). 시편 89:14은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라고 말했고, 시편 92:2은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했고(롬 3:4) 또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항상 신실하시니]”라고 말했다(딤후 2:13). 히브리서 10:23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였다. 심지어 이방인 선지자 발람도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거짓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민 23:19).

이와 같이, 영(靈)이심,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돌려진 속성들이다. 이 열 가지 중,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 즉 하나님의 ‘비공유적(非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일곱 가지의 속성들, 즉 영이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피조물들에게도 어느 정도 나누어 주신 속성들, 즉 하나님의 ‘공유적(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인 우리가 본받을 수 없지만, 공유적 속성은 우리가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진 것들이며 또 본받아야 할 것들이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 등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을 본받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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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영감 (The Inspiration of the Scriptures)

성경의 영감 (The Inspiration of the Scriptures) | 신론

항공모함 2010. 10. 9. 07:00

http://blog.daum.net/esjk8030/7379843?category=560367

 

성경의 영감 (The Inspiration of the Scriptures)

" 사도 바울이 이 구절 (딤후 3:16) 속에서 정의한 바와 같이 영감은 사람들

속에 불어넣은 하나님의 강하고 의식적인 숨결로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구약은 하나

님의 말씀으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인간의 입을 통하여 발언되는 것과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의 결과

로서 생긴 것이다"라고 윌리암 이반즈 (William Evans) 박사는 말하였다.

베드로의 선언은,

" 성령께서 성경 기자들의 마음 속에 특별히 기적적으로 임재하여 계시면서

성경 기자들이 전에는 알지 못하던 진리를 계시하여 주었으며 또 이 진리를 기

록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들을 인도하여 주었다. 또 그들로 하여금 진리의 목격

자와 증인이 되게 하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진리를 본질적으로 정확하게

전하여 주게 하였다."

말씀 속에 나타나 있는 영감된 교리는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차차 그릇되고

결함이 있는 견해가 생기게 됨으로써 상세하고 완전한 정의로서 교리를 "방어"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였다. 어떤 이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성경의 영감성을 강

력히 주장할 필요성이 있다.

 

1. 신성한 것으로 단순히 인간적이 아니다.

근대주의자들은 성경 기자들의 영감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나, 부라우닝이

나, 섹스피어나, 기타 문학이나, 철학이나, 종교계의 천재들이 소유하고 있던

지혜나, 정신적 통찰력과 동일시한다. 이와 같이 영감은 순전히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것이로 생각되여 왔다. 이와 같은 이론을 영감이라는 말의 모든 의미를 박

탈하며 성경의 독특하고 초자연적 특성과 완전히 모순된다.

2. 독특한 것으로 평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영감과 계몽을 혼돈하고 있다. 계몽은 모든 기독 교인에게 공통적

이며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성경의 영향력을 가르킨다.

(고전 2:4,마16:17).이와 같은 계몽이 성경의 기원에 관한 적당한 설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 속에는 정신 능력이 있는데 이 정신 능력

즉 일종의 영안 (a Kind of eye of the Soul).에 의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옛날에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명상할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이 정신

능력을 깨우쳐 줌으로써 하나님의 신비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계몽은 신자들에게 약속되여 있으며 또한 신자들이 체험하여 왔다. 그

러나 계몽은 계시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언자들은 계시에 의하여 진리를 받아드렸고 또한 동일한 진리의 이해를 위하

여 계몽은 그들에게 거부되었다는 말을 우리들은 종종 듣는다. 성령께서는 예언

자들의 말씀에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그들의 말씀의 의미에 관한

지식을 부여하기에 적당한지 어쩐지를 몰랐던 것이다. 가야바는 영감된 말씀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기록되여 있다.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영감을 받은 순간에 또한 계몽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요11:49,52

계몽과 계시와의 명확한 차이를 살펴보라. (1) 지속 기간에 관해서는 계몽은

영구한 것이며 또한 영구한 것을 일 수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신자

가 그의 안에 거하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에 대하여 요1서 2:20-27

속에 언급되여 있다. 그 반면에 계시는 단속적이다. 예언자는 자기의 뜻대로 예

언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을 따라 했던 것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

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베드로는 말하였다. 예언적 영감의 돌연성은 다음과 같은

평범한 표현에 의하여 암시되었다. "주의 말씀이 임하였다."주의 말씀이 임하는

대로만 말하는 참다운 예언자들과 자기 멋대로 꾸며서 말하는 거짓 예언자를 분

명히 구별해야 한다. (렘 14:14,23:11,16 겔13:2,3). (2) 계몽은 정도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영감은 정도의 여지가 없다. 사람에 따라 계몽의 정도가 각각 다

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정도가 높은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영감의 경우에는 어떤 사람이 영감을 받았든

지 또는 받지 못하였든지 양단 간에 하나이다.

3. 살아 있는 것으로 기계적이 아니다.

영감은 받아 쓰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성경 기자는 수동적이며 그들의 기

능은 다만 성경을 기록하는데 있어서 아무 관계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비록 성

경의 어떤 부분은 받아쓰여진 것이지만... 가령 예를 들면 십계명과 주기도문은

받아쓰여진 것이다. 영감이라는 말은 단순한 기계적 행동을 불허하며 또 기계적

행동도 영감을 불허한다. 가령 예를 들면 사업가가 속기사에게 그의 편지를 받

아쓰게 할 때에 그 사업가는 그의 속기사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메카폰을 통하여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말씀

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은 성경 기자들의 기능을 사용하셨다. 이렇게

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기자들의 개성의 특정을 띠우게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어떤 의미에 있어서 모세의 말이나, 이사야의

말이나, 바울의 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 인간이 한 것

도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또 하나님은 인간에 의

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을 위하여 말씀하신다."

영감된 말씀은 산출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 협조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명백하다. 그러나 "어떻게 협조하였는지 그 방법은 우리들의 관찰의 범위

를 벗어나는 문제이다. 정신과 육체의 상호 작용은 현인들에게까지도 하나의 신

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과 인간 정신의 상호 작용은 더욱 신비

롭지 않으랴!

4. 완전한 것으로 단순히 부분적인 것이 아니다.

일부분 계시의 학설에 의할 것 같으면 성경 기자들은 구원에 필요한 사항에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보호를 받았으나 역사와 과학과 연대 기타에 있어서는 그

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학설에 의할 것 같으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는 표현이 보다 정확한 것이라 한다.

이 학설은 우리들을 불확실의 곤경 속에 빠뜨려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왜 그러

느냐 하면 누구나 감히 어느 것이 구원에 가장 필요한 부분이고 또 어느 부분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어느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어

느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결정할 절대적으로 확실한 권위가 어

디에 있는가? 그리고 만일 성경의 역사가 거짓된다면 교리도 참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 교리는 성경의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성경 자체는 절대적 영감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구약 성경 전체에 적용

하였다.

5. 문자대로의 것이지 개념적인 것이 아니다.

또 다른 하나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사상 (thoughts)에 영감

을 준 것이지 성경 기자들의 말들 (words)에 영감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men)에게 영감을 주어 어휘와 표현의 선

택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판단력에 내맡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에

게 영감을 준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영감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옛적

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1:1).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

니라" (벧후 1:21). 더구나 말씀과 사상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상은 본

질적 말씀이요 말씀은 표현된 사상이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상은 자연히

하나님의 영감되 말씀으로 표현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경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3). 끝으로 몇개의 단어를 중요한 교리의

기초로서 인용키로 한다(요10:35, 마22:42-45,갈 3:16,히 12:26.27).

계시와 영감을 구별하라. 계시는 인간 스스로 발견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서 들어내신 그의 행위를 의미한다. 영감은 성경 기자로 하여금 그 계시를 기록

하는데 있어서 과오를 범치 않도록 그를 지켜준 것을 의미한다. 가령 예를 들면

십계명을 계시되었고 모세는 그의 오경 (the Pentateuch)속에 십계명을 기록하

도록 영감을 받았다..

영감은 반드시 계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령 예를 들면 모세는 그가 친히

목격한 사건들과 그의 지식 범위 내에 있는 것들을 기록하도록 영감을 받았다.

또한 영감되지 않은 말과 영감된 기록을 구별하라. 가령 예를 들면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사탄의 말은 하나님의 영감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탄의

말에 관한 기록은 영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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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 신론

항공모함 2010. 10. 7. 17:07

http://blog.daum.net/esjk8030/7379812?category=560367

II. 하나님의 본질 (The Nature of God)

 

1. 성서적 견해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또 어떤 분이신가? 지금까지의 하나님에 대한 최선의 정의를 웨스터민스터 교리 문답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 무궁토록 불변하는 무한한 영이요 그의 존재 속에 지혜와 능력과 성격과 의와 선과 진리가 거한다." 하나님의 명칭에 관하여 연구하여 보면 성서적 정의를 명확히 계통을 세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명칭은 다만 문자의 결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인격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선포하여 나타냄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신다(출6:3,33:19,34:5,6).


하나님을 예배함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요 (창12:8) 그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요(신28:58).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요(삼하22:50). 그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는 것이다(시68:9).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나 (출20:7) 욕되게 하는 것은(레18:21, 24:16) 악한 것이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은 곧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마6:9).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백성을 높이 드시며(시20:1) 그의 이름을 인하여 그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삼상12:22).


다음은 가장 평범한 하나님에 대한 성서상의 명칭들이다.

 

(a) 엘로힘 (Elohim)
이 명칭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전능 성이 기술되거나 암시되어질 곳에 사용되었다. 엘로힘은 창조의 신 (the Creator-God)이다 복수형은 능력의 충만과 삼위 일체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b) 여호와 (Jehovah)
창조의 신이신 엘로힘은 그의 피조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피조물의 필요를 아시고 내려오셔서 그들을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신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그는 그 자신을 언약의 신 (the Covenant God) 이신 여호와로 계시하신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존재 (To be) 를 나타내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제(the three tenese)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명칭은 존재하였던 분, 존재하고 계신 분, 존재할 분 곧 다시 말하면 영원하신 분을 의미한다. 여호와는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신이므로 그 명칭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나는 나 자신을 나타내었고 또 나타내고 있으며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바 그 일은 그의 명칭에 의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그의 은혜를 체험할 때에 "그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는 여호와언약의 명칭들 속에 요약 되여 있다. 병들어 누워 있는 자들에게는 "병을 치료해주시는 신" 이신 여호와 _ 라파 (Jehovah-rapha) 로 알려져 있다.(출 15:26). 원수들에게 압제를 당하였을 때에 그의 백성들은, 우리들의 깃발이신" 여호와 -닛시 (Jehovah-nissi)라고 그를 불렀다.(출17:8-15). 근심에 싸여있을 때에 그들은 그가 "우리들의 평화"

이신 여호와 살롬(Jehovah-shalom)임을 깨달았다. (삿6:24). 이 세상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그들은 "목자"이신 여호와-라하 (Jehovah-ra'ah)의 필요성을 느꼈다.(시23:1).
정죄를 지각하고 의의 필요성을 의식하였을 때에 그들은 "우리들의 의의신 여호와 -지드 (Jehovah-Tsidkenu)에 게 소망을 걸고 부르짖었다.(렘23:6). 궁핍할 때에 그들은 그가 "궁핍을 채워 주시는 신"이신 여호와-이레(Jehovah-Jireh) 인줄을 깨달았다 (창22:14).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할 때에 그는 여호와 - 샤마(Jehovah-Shammah)로서 알려질 것이다(겔44:35).

 

(c) 엘 (EL)(하나님) 은 복합어로서 사용되어 진다. 엘엘이 하나님은 신들이라고 불리워지는 다른 존재들보다는 훨씬 우월한 분이시다. 엘샤-다이(EL- Shaddai)는 "그의 백성의 궁핍을 채워주는 신"이다(출6:3),엘-올암(EL-Olam)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다(창21:33).

 

(d) 아도나이 (Adonai)는 글자 그대로 "주" (Locd)또는 "선생" (Master)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명칭은 통치권과 주권의 개념을 갖고 있다. (출 23:17,사10:16,13). 그는 그의 인격과 행위 때문에 그의 백성의 봉사와 충성을 요구한다. 신약에서 이 명칭은 영화럽게 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e) 아버지(Father) 라는 명칭은 구약과 신약에 모두 사용되었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아버지라는 명칭은 만믈의 생산자와 인간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적 의미에 있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행17:28). 그러나 이와 같은 관계가 인간의 구원을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요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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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잘못된 신관(神觀)


성경을 도외시한 그릇된 다른 신관들이 있다. 이 신관들 중에 어떤 것은 진리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 어떤 신관은 부적당하고 또 다른 신관들은 악용되어졌거나 타락된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신관을 살펴 볼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완전히 설명하는 일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그릇된 신관을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신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a) 불가지론 (Agnosticism)
불가지론 (헬라어로 "알지 못한다"를 의미한다.) 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부인한다. 불가지론 자들은 "유한한 인간 정신을 무한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불가지론 자들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하나님에 관하여 약간의 것을 인식하는 것과는 구별하지 못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곧 다시 말하면 그를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를 이해 할 수 있다. 즉 그에 관해서 알 수 있다.
" 우리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온갖 것을 알지는 못해도 그가 계시다는 것을 알 수는 있다. 비록 우리들이 우리들의 팔로 온 지구 덩어리를 얼싸안을 수는 없을지라도 지구를 만져 볼 수는 있다. 철학자가 전능 자를 완전히 찾아낼 수는 없을지라도 어린아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클라크(D.S.Clarke)씨는 말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편 성경은 우리들에게 "부분적으로 그를 알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해 주고 있다.(출33:20,욥11:7,롬11:33,34,고전13:9-12).

 

(b) 다신론 (Polytheism)
다신론은 (많은 신들을 섬기는 것) 고대 종교의 특징으로서 오늘날도 아직 이교도의 나라 안에는 존속하고 있다. 이 다신론은 우주가 단 하나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는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수신과 화신과 산신과 전쟁의 신 등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신론은 이교 신앙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유한한 대상물을 신들로 만들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롬1:25).
아브라함은 이교 신앙을 떠나 참다운 유일신의 증거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아브라함소명이스라엘 선교의 시작으로 주위에 있는 여러 나라들의 다신론을 반박하여 유일신교를 전하는 것이 되었다.

 

(c) 범신론 (Pantheism)
범신론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뜻을 나타내 주는 헬라어에서 왔다.) 은 하나님과 우주를 동일시하는 사상 체계이다. 나무와 돌과 새와 동물과 땅과 물, 파충류와 인간, 이 모든 것은 신의 일부분이며 마치 영혼이 육체를 통하여 표현되듯 이 신은 이 모든 물질과 힘을 통하여 살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사상 체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롬1:20-23 은 여기에 대하여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아득히 먼 과거에 이방인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들 속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방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만큼 큰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 두고 멀리 떠났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이와 같이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산과 나무와 사람들과 짐승과 그밖에 모든 자연의 힘을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볼 대 자연 숭배는 매우 아름다운 듯이 보이나 불합리한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만일 나무와 꽃과 별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면 버러지와 세균과 범과 비열한 죄인들도 하나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 불합리하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자연을 혼동하고 잇다. 그러나 시가 시인이 아닌 것처럼 예술이 예술가가 아닌 것처럼 음악이 음악가가 아닌 것처럼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유대 민족의 아름다운 전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피조물과 하나님을 구별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전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는 아름다운 광채 때문에 별들을 하나님을 잘못 보았었다.
그러나 별들의 빛 보다 달빛이 더 뛰어나게 밝은 것을 보고 달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양 빛에 비할 때 달빛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태양을 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양도 밤에는 사라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모든 성좌들보다 훨씬 위대한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연숭배로부터 자연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성경은 범신론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 성경은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면서 하나님과 자연을 구별하고 있다. 범신론자들은 하나님이 곧 우주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범신론은 오늘날 어디에서 신앙되고 있는가? 첫째로 자연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시인들 사이에 신앙되고 있다. 둘째로 범신론은 대부분의 인도의 종교 속에 침투하여 우상 숭배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셋째로 크리스챤 사이언스 (Christian - Science)는 범신론의 한 형태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의 근본 교리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 (God is all and all is God). 크리스챤 사이언스는 관념론적 범신론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교파는 모든 것은 마음 또는 "아이디어"(idea)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은 비 실재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d) 물질주의 (Materialism)
물질주의는 물질과 정신의 구별을 부인하고 생명과 정신과 그리고 모든 힘의 현상은 다만 물질의 특성이라고 단언한다. " 간장이 담즙은 분비하듯이 두뇌는 생각을 산출한다." "인간은 기계이다." 물질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인간의 고상한 생각과 신성을 말살해 버리기 위하여 "인간은 단순히 동물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

이 물질주의는 너무도 조잡하고 불합리하기 때문에 논박할 가치도 거의 없다. 그러나 수많은 대학 안에서 또 수많은 소설 안에서와 기타 여러모로 물질주의가 논의되어지고 있으며 또 신봉되고 있다. 즉 사람이한 짐승이 아니면 기계이다. 또 사람이란 자기에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으면 선도 악도 없다고 믿고 있다. 물질주의의 오류를 논박함으로서 다음과 같이 관찰해 보라.

 

(1) 우리들의 의식은 물결 이상이며 또 돌과 나무와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적은 상식이 많은 철학보다 더 가치가 있다. 아일랜드의 웅변가 다니엘 오코넬 (Daniel O' Connel)이 어떤 날 아일랜드의 어떤 부인의 날카로운 혀와 신랄한 말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부인을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퍼부어 이 부인을 압도시켰다.
" 이 비참하고 뻔뻔스러운 사람 같으니!" 부인이 당황해질 때까지 그는 이런 지독한 욕을 계속해서 퍼부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철학자들도 으리으리한 말들로 우리들을 무섭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고 오류가 진리로 될 수는 도저히 없다.

(2) 경험과 관찰에 의할 것 같으면 생명이란 오직 존재하고 있는 생명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생명은 살아 있는 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나올 수 있다는 증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수년 전에 어떤 과학자는 생명이 없는 물질에서 생명이 생겨 나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공중에 미생물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자 학설은 수포로 돌아갔다.

(3) 우주 속에 있는 섭리와 계획과 지성의 증거는 맹목적 물질주의를 부인한다.

(4) 가령 인간이 기계라고 가정해도 기계 자체는 기계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기계는 그 발명가를 산출해 내지 못한다. 그러나 발명가는 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물질주의의 악은 그것이 도덕의 기초를 파괴해 버린다는 사실 속에 있다. 만일 사람이 다만 기계에 불과하다면 그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들은 영웅을 고상하다고 부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악한을 악하다고 부를 필요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다만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마치 둥근 톱이 단두대를 보고 "너는 왜 그다지도 잔인하냐?" 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질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무엇인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이 나타나며 그 표적이 따른다.

 

(e) 자연신교 (Deism)
자연신교는 이 세상을 창조한 인격적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나 창조 후에 그는 이 세상을 자연 법칙의 지배 아래 두고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버리고 말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마치 시계의 태엽을 감아 놓았듯이 이 세상이란 시계의 태엽을 감아놓고 다 풀릴 때까지 아무 간섭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 하든가 혹은 기적 같은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상 체계를 종종 이성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이성을 종교에 있어서 최고의 길잡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계시 종교의 반대로서 자연 종교라고도 한다.


이 사상 체계는 성경의 영감의 증거와 역사 중의 하나님의 역사의 증거와 모순된다. 자연 신교를 믿는 사람들의 신관은 편역 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 사실은 그의 초월성이다. 곧 세계와 인간을 초월하여 따로 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사6:1).
둘째 사실은 그의 내재성이다. 곧 세계와 인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행17:28,엡4:6) 자연 신교가 첫째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데 반하여 범신론은 둘째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데 반하여 범신론은 둘째 사실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성경이야말로 균형이 잡힌 참다운 신관을 보여주고 있다. 곧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초월하여 계시면서 또 다른 한 편에서 그는 이 세계 속에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같이 계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아들은 또한 우리들 속에 성령을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삼위 일체의 교리는 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 밖에 계신가 또는 세계 안에 계신가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두 가지가 다 옳다는 긍정적 답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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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하나님의 속성 (The Attributes of God)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인자하게도 자기 자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하셨다. 그리고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다. 가령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르켜 "나는 거룩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속성이다. 왜 그러냐 하면 거룩이야말로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 계시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칭과 그의 속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칭은 그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데 반하여 그의 속성은 그의 인격의 여러 가지 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 같이 위대한 존재에 대하여 기술할 바가 있다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해보고 나면 하나님에 관한 설명도 훨씬 용이해 질 것이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일을 마치 컵으로 태평양의 물 전체를 담아보려는 것과 같은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이 그를 알 수 있는데 족할 만치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다음과 같은 분류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1. 절대적 속성.
피조물을 더나 하나님 차체로서 절대적인 것. 이와 같은 절대적 속성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 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2. 활동적 속성.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

3. 도덕적 속성. 하나님과 그의 도덕적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


1. 하나님의 내적 성격 (절대적 속성)

 

(a) 하나님은 영이시다(요4:24).

 

하나님은 인격을 갖고 계신 영이시다. 그는 생각하며 느끼며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과 직접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육체의 지체와 감정과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연적 존재의 조건들에 굴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안과 육체적 감각에 의하여 그를 인식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공허하고 비현실적 존재로서 살아 계시다는 말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모습"에 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5:37,빌2:6 참조) 하나님의 참다운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러나 본질상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써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서 그를 적절히 설명할 도리가 없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고 요한은 선언하였다. (요1:18,출33:20).
그러나 출24:9-10 속에는 모세와 장로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등의 모순된 점을 찾아 볼 수 없다. 요한은 아무도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경이 볼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마3: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의 무한한 인격을 유한한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하여 기술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과 발과 눈과 귀를 갖고 계신 존재로서 볼 수 있고 감촉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후회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찾아 낼 수 없고 알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권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11:7)
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도리 밖에 없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요4:11).


(b)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인간의 제한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한성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다.

 

(1) 공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광대 무변 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왕상8:27)
곧 하나님의 본질은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는 무소 부재의 원리 속에 있다. 그의 임재와 능력과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한 곳도 없다. "그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그의 주변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 특정된 곳 곧 하늘에 영광스러운 모양으로 그가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시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영원하시다(출15:18,신33:27,느9:5,시90:2,렘10:10, 계4:8-10).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그에게 있어서는 현재이다.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는 불변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이 진리가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위안이 된다.
신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에 네 아래 있도다."라는 말씀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신33:27).

 

(c)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출20:3,신4:35,39,6:4,삼상2:2,삼하7:22,왕상8:60,왕하19:15,느9:6,사44:6-8,딤전 1:17)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은 구약 시대의 종교의 근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거짓 신들을 섬기는 이방인의 세계를 향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메시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삼위 일체의 교리를 가르치는 신약과 모순되는가? 우리들은 두 가지 단일성 즉 절대적 단일성과 복합적 단일성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한 인격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 단일성의 사상을 전달해 주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찌로다"(창2:24). 라는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이는 복합적 단일성을 의미한다. 왜 그러냐 하면 두 사람이 한 몸으로 결합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3:1겔37:17도 참조하라. 이 성경 구절들 속에도 "하나"를 뜻하는 동일한 말(에카드)이 사용 되었다.(창22:2,12,암8:10,렘6:26,슥12:10,잠4:3,삿11:34).


신 6:4에는 어떤 종류의 단일성이 언급되어 있는가?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이 복수형(엘로힘)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아 복합적 단일성을 가르키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삼위 일체의 교리는 영원하고 본질적인 단일체 속에 결합되어 있는 성삼위를 포함한 복합적 단일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단일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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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주와 관련을 맺고 계신 하나님 (능동적 속성들)

 

(a)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창1:1,17:1,18:14,출15:7,신3:24,32:39,대상16:25,욥40:2,사40:12-15,렘32:17,겔10:5,단3:17,4:35,암4:13,5:8,슥12:1,마19:26,계 15:3,19:6). 하나님의 전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되지 않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자유 "하나님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물론 이 말은 그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한다든가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실 수 없는 것이다. 곧 자가 당착의 모순 가령 삼각형의 원이라든가 마른 물을 만들어 낼 수는 도저히 없다.

 

(2)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지배하시는 그의 주권과 지배력.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악이 작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욥1장과 2장을 참조하라)하나님에 의하여 모든 생명을 유지되고 있다. (히1:3,행17:25,28,단5:23).
인간의 존재는 마치 올간의 소리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머물러 있는 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3)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지배하시는 그의 주권과 지배력.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악이 작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욥1장과 2장을 참조하라). 하나님에 의하여 모든 생명은 유지되고 있다(히1:3,행17:25,28,단5:23).
인간의 존재는 마치 올간의 소리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머물러 있는 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b) 하나님은 무소 부재이시다. 즉 다시 말하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창28:15,16,신4:39,수2:11,시139:7-10,잠15:3,11,사66:1,렘23:23,24,암9:2-4, 6, 행7:48,49,엡1:23). 광대 무변과 무소 부재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광대 무변 은 공간과의 관련해서 하나님의 실재인데 반하여 무소 부재는 피조물과의 관련하에서 본 하나님의 실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나타나신다.

 

(1) 영광 가운데서 만군의 여호와가 나타나심(사6:1-3).
(2) 효과적으로 자연의 질서 가운데 나타나셨다. (나1:3).
(3) 섭리에 의하여 인간의 여러 가지일 가운데 나타나셨다.(시68:7-8).
(4) 주위 깊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심.(마18:19,20,행17:27).
(5) 심판하시려고 악한 사람들의 양심에 나타나심 (창3:8 시68:1,2). 인간은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나 그의 창조주의 법을 피할 도리가 없다. 어느 한 중국인은 중국인 신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서나 계시다면 그는 지옥에도 틀림없이 계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중국인 신자는 재빨리 "그의 노여움은 지옥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느 무신론자가 "하나님은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다."(God is no where)고 기록하여 놓았더니 그의 어린 딸은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시다."God is now here)라고 읽은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6) 육체로 그의 아들 속에 거하신다 (골2;9)."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거하신다.."
(7) 신비하게도 교회 속에 거하신다(엡 2:12-22).
(8) 공식으로 그의 일꾼들과 함께 계신다 (마28:19,20).
하나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계신 한 편 어디에나 거주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와 인격적 관계를 맺을 때에 그들과 더불어 함께 거하신다고 일컬어진다.

 

(c)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곧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다.(창18:18,19,왕하8:10,13,대상28:9,시94:9,139:1-16,147:4,5,잠15:3,사29:15,16,40:28,렘1:4,5,겔11:5,단2:22,28,암4:13,눅16:15,행15:8,19,롬8:27,9,고전3:20,딤후2:19,히4:13,벧전1:2,요1서3:20).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하다. 그는 추리하거나 점차적으로 학습할 필요가 없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의 지식은 동시적인 것이다. 이 속성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들은 크게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온갖 시련 가운데에서도 신자들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이 대두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느 누군가 타락할 것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타락함으로부터 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이 자기의 자유 의지를 상용하는 것을 강제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지 하시나 미리 고정시키지 않는다.

 

(d) 하나님의 현명하시다(시104:24,잠3:19,렘10:12,단2:20,21,롬11:33,고전1:24,25,30,2:6,7,엡3:10,골2:2,3,).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전지와 전능의 결합에서 온 것이다. 그는 그의 지식을 최선의 수단에 의하여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은 항상 올바른 일을 적당한 때에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또 모든 사건의 과정을 자기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하여 지배하실 때에 이 행위를 섭리하고 부른다. 하나님의 일반적의 특수한 섭리는 인간 생활의 사소한 일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e)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피조물을 다스리고 처리할 절대적 권리를 갖고 계시다.(단4:35,마20:15,롬9:21).


그는 그의 무한한 우월성과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절대적 소유권과 모든 만물이 지속하기 위하여 그에게 의존하는 절대적 의존성에 의하여 이와 같은 권리를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길을 비판하는 것을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이다. 클라크씨 (D.S.Clarke)의 다음과 같은 글을 살펴보자.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는 가장 유용하고 격려의 힘이 되는 교리이다. 만일 우리들이 다음과 같은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즉 좀더 자세히 말하면 맹목적인 운명이나 변덕스러운 유언이나 변경할 수 없는 자연 법칙이나 근시안적이고 왜곡된 자아나 무한히 현명하시고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며 능력이 있는 하나님 중에 어느 하나에 의하여 지배되기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우리들은 어느 것에 의하여 지배되기를 선택해야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 이외에 다른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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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덕적 피조물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님 (도덕적 속성)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a)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출15:11,레11:44,45,20:26,수24:19,삼상2:2,시5:4,111:9,145:17,사6:3,43:14,15,렘23:9,눅1:49,약1:13,벧전1:15,16,계4:8,15:3,4). 하나님의 성결은 그의 절대적 도덕상의 순결을 의미한다. 그는 죄를 범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죄를 허용치도 않으신다. "거룩"의 근본적 의미는 "격리"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격리되어 있는가? 공간적으로 그는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들은 지상에 있다. 본질과 인격에 있어서 그는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신성을 지니고 계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성을 갖고 있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죄악되다. 그러면 우리들은 성결이야 말로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짓는 속성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결은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신성으로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겔36:22,38:23).

 

곧 그는 자기 자신을 거룩한 자로 계시하신다. 스랍들이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로 부터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부르짖었다.(사6:3)
인간들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서 경외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거룩케 하는 것이다 (민20:12,레10:3,사8:13).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함으로써 그를 모욕할 때에 그들은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에 반대는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마6:9). 하나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다. 거룩한 백성이라든가 거룩한 건물이라든가 거룩한 목적이라고 할 때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은 거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룩"이라는 말을 사람이나 물건에 적용하였을 때 이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곧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을 말한다. 이렇게 따로 구별된 물건들은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구별된 사람들은 거룩한 법을 쫓아 살려고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사실들 로써 성결의 교리에 기초를 이루고 있다.

 

(b)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의와 거룩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는 행위로 나타난 거룩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으리라. 의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18:25). 의는 옳은 표준과 일치하는 것이다. 곧 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옳은 행위를 말한다. 언제 하나님께서는 이 속성을 나타내시는가?

 

(1)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결백함을 증명하고 악한 자를 벌하실 때에 정의가 실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재판관들이 다른 사람들이 그들 앞에 제시한 증거에 의거하여 재판하듯이 판단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증거를 발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메시야는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고"정으로써 판단하신다.(사11:3)

(2)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는 용서할 때 그의 정의가 나타난다 (시51:14,요1서1:9,히6:10).

(3)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징계하고 심판하실 때에 그의 정의가 나타난다(사8:17,암3:2).

(4)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그의 정의는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간섭하시는 것을 그의 의하고 칭한다(사46:12,45:24,25). 구원이 소극적인 면이라고 하면 의는 적극적인 면이다. 그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와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음의 의가 되는 것이다(사60:21,54:13,61:10,51:6).

(5) 하나님께서 그의 진실한 종들에게 승리를 주었을 때에 그의 정의는 나타난다.(사50:4-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 후에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의를 쫓아 살게 될 것이다. (벧후3:13).

하나님께서는 올바르게 처리하실 뿐만 아니라 의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범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그는 회개하는 자를 은혜 스럽게도 의로 여겨주신다. (롬4:5). 이것이 칭의의 교리의 근본이 된다.
하나님 본질은 인간과 그의 관계의 기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행동하신다. 거룩하신 분은 신성하게 하며 의로우신 분은 의롭게 하신다.

 

(c) 하나님은 성실하다.
그는 절대적으로 믿을 만하며 그의 말씀은 틀림 없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은 그의 약속을 굳건히 믿을 수 있다(출34:6,민23:19,신4:31,수21:43,-45, 23:14,삼상15:29,렘4:28,사25:1,겔12:25,단9:4,미7:20,눅18:7,롬3:4,15:8,고전1:9,10:13,고후1:20,살전5:24,살후3:3,딤후2:13,히6:18,10:23,벧전4:19,계15:3).

 

(d) 하나님은 자비스럽다.
"하나님은 자비심은 그의 피조물의 비참에 대하여 표명된 하나님의 선과 그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만일 그들이 개과 천선의 가망이 있는 죄인들이라면 그들을 구제하려고 오래 참으신다. (Hodges)(딛3:5,애3:22,단9:9,렘3:12,시32:5,사49:13,54:7).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 중에 하나를 시 103:8-18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지식이 소망의 근거와(시130:7)신뢰의 근거 (시52:8)가 된다. 하나님의 자비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일 가운데 현저하게 나타났다. (눅1:78).

 

(e).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그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특별히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창조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라(신7:8,엡2:4,습3:17,사49:15,16,롬8:39,호11:4,렘31:3).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살펴 보라 (요3:16,요1서4:9,10,롬9:11-13,요1서 3:1,사43:3,4, 사63:9,딛3:4-7,사38:17,엡2:4,5,호11:4,신7:13,롬5:5).

 

(f) 하나님은 선이시다.
하나님은 선이시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그의 피조물들에게 생명과 그밖에 다른 축복들을 주신다. (시25:8,나1:7,시145:9,롬2:4,마5:45,시31:19,행14:17,시68:10,85:5). 죤슨 박사 (Dr,Howard Abnew Johnson)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수년전에 나는 어느 가정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그 집 주인은 나에게 식기도를 드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청에 있은 다음에 나는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선물들에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더니 그는 다소 무뚝뚝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나는 기도의 진의를 알 수 없는데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식사는 내가 친해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만일 파종이나 추수가 실패되어 온 지구에 흉년이 들어 인구의 반이 다음 추수기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만일 이와 같은 흉년이 이년 동안 계속된다면 전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죽고 말게 되리라는 것도 생각해 보신 적이 계십니까?
곧 그는 정색을 하면서 이와 같은 흉년이 들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못한 점을 시인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앞에 차려놓은 음식을 그가 장만하였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과 또한 능력을 주어 이와 같은 음식을 장만케 하여 주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음식물로 사용하는 곡식과 동물 속에 생명을 넣어 주셨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장만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에게 암시하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것을 선물로 줄 것 같으면 당신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하루에도 이와 같은 선물을 두세 번 받게 되면 받을 적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는 곧 나의 말이 옳다고 동의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이유를 알게 됐을 겁니다.'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흥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이제야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과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고통으로 가득찬 세계를 창조하셨는가"라고 그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 이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만일 조심성 없는 직공이 부주의하여 아주 섬세한 기계 속에 모래를 집어넣었다면 그 기계를 제작한 사람이 책임을 짊어져야 하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망쳐놓았다. 이 세계 가운데서 인간들이 고의로 범한 죄악에 기인된 모든 고통을 제거해 버리고 나면 별로 남는 고통이 많지 않을 것이다.

 

(2)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악은 그의 허락을 받아 존재하다. 왜 하나님께서 악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를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사색적인 사람에게는 "네 사색이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의 길의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과오를 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명한 작가인 스트븐슨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비록 내가 한 눈을 감고 다른 한눈으로 들여다보는 적은 구멍으로 우주의 적은 단편을 살펴보아도 나는 나의 자신의 운명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신호의 단편적 증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아 볼 수 없다고 미칠 듯이 불평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와 같은 광대한 계획 가운데서 믿음을 격려해 줄 수 있는 적은 것이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을 무한한 경의 가운데서 감사함이 마땅치 않을까?"

 

(3) 하나님은 대단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선을 위하여 악을 억압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제들과 바로와 헤롯과 그리스도를 못박은 사람들의 죄악을 어떻게 억압 하셨는가를 기억하라. 어떤 고대 학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지당한 말을 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업에 악이 조금이라도 개입하도록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악도 선으로 만들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통과 시련의 불길 가운데서 인격을 정화시켰으며 믿음을 공고히 하였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의 품속 깊이 안길 수 있게 되었다. 고통이란 불로 연단 된 인격을 사는데 필요한 대가이다.

 

(4) 하나님은 이 우주를 자연 법칙에 의하여 조정하셨다.
그런데 이 자연 법칙 속에는 우발적 사고의 가능성이 개재되어 있다. 가령 예를들면 만일 어떤 사람이 부주의로 인해서 또는 고의로 낭떨러지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는 중력의 법칙을 범한 결과로 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와 같은 법칙이 있음을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 왜 그러냐하면 만일 이와 같은 법칙이 없다면 이 세상은 온통 혼란한 상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5) 우리들은 항상 이 세상이 완전한 질서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주관하신다. 하나님께는 "하늘 나라의 표준시 (Heavenly Standard Time)에 의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가 지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주실 것이다(눅18:7,8).


이 세대라는 극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막이 나릴 때까지는 결코 하나님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때에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루어주실 것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