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신앙 삶의 전략과 전술(3)/신앙 삶도 detail에 있다(67)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절)
만물(萬物)은 하나님의 창조 결과이다. 당연히 만물은 주(主: Lord)로부터(from)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through) 마침내 주에게로(unto) 돌아간다. 주(主)가 출발(from), 과정(through)과 도착(unto)을 모두 주도한다. 출발에서 계시된 목적(目的: purpose, aim)은 과정(過程: process, development)을 거쳐 도착(到着: arrival)에서 달성된다.
주(主: Lord)에 의한 출발(from)은 무엇인가? 출발은 사전 계획에 따른다. 마찬 가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역은 주(主)에 의해 사전 정해진 목적과 계획에 따른 과정과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 계획은 무엇(what to do)을 할 것인가에 집중된다. 계획은 추상적 전략에 속한다. 그러나 사역은 어떻게 (how to do) 할 것인가라 구체적 전술의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성삼위 사역을 기록하며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즉 예정과 선택을 소개한다. 이 작정은 하나님의 기쁜 뜻에서 나왔다. 영원한 작정에 따라 하나님의 보편 인류를 상대한 원역사(遠歷史: primeval history)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기록된다.[1] 아래의 도표는 이들 사이 관계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한다.
원역사는 이야기 요소 – 계획, 창조와 타락 – 로 구성된 하나의 narrative이다. 이 내러티브는 내용상 상반되는 창조기사(창1-2 장)와 타락기사(창3-11장)라는 사건들로 구성된다. 타락기사(창3-11장)라는 내러티브는 또 다시 4가지 불순종 사건들 - 아담의 불순종(창3장), 가인의 살인(창4장), 셋 후손의 연혼(창5-6장), 바벨탑 사건(창11장) - 으로 구성된다.
원역사는 상반된 내용 - 하나님의 은혜와 인류의 배반 - 으로 구성된다.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창세 전 작정(엡1:4-6절)에 따라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했다(창1-2장). 이를 통해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인류에게 베풀고자 사랑과 은총을 표현했다.[2] 그러나 인류는 아들 그리스도에게 불순종함으로 아버지의 작정을 거부했다(창3-11장).
인류의 타락 사건은 내용상 둘로 나누어진다. 개인적 불순종과 인류 사회의 불순종. 개인 불순종은 아담의 타락과 가인의 개인적 살인 사건을 뜻한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라면 가인은 그의 후손이다. 반면 인류 사회의 불순종은 셋 후손의 연혼과 노아 후손의 바벨탑 사건이라는 사회적 타락을 뜻한다. 이들은 결국 보편 인류의 타락을 뜻한다.
창세기 12장부터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다. 그러나 이도 역시 불순종의 역사이다. 구약 성경은 창조기사(창1- 2장)에 반하는 보편 인류(창3-11장)와 선민 이스라엘의 불순종 역사(창12-말라기)를 기록한다. 신약 시대 비로소 아들 그리스도와 새로운 이스라엘의 순종 역사가 기록된다. 하나님의 전략적 그리고 전술적 관점에서 분석한 성경의 구원 역사이다.
창세기 1-2장 즉 창조기사는 아버지의 작정 – 예정과 선택 – 에 따른 하나님의 전략을 계시한다. 그러나 창세기 3-11장은 불순종하는 인류를 상대로 하나님이 어떻게 전술적으로 싸우는가를 기록한다. 아버지의 작정과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전략을 그러나 창세기 3장- 11장은 하나님의 전략에서 나온 시대적 전술들을 각각 계시한다.
제일 먼저 아버지의 작정에서 하나님의 전략을 알아야 한다.
가. 창세 전 작정
창조(창1-2장)는 하나님의 첫 사역이다. 창조 행위 이전 즉 창세 이전 하나님은 창조에 대한 목적과 계획을 이미 세웠다. 이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作定: eternal decrees)이라 한다. 창세 전과 후라는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정과 창조 사이 내용은 동일하다.[3]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기록한다(엡1:3-14절). 성부의 예정(豫定: predestination)과 선택(選擇: election), 성자의 구속(救贖: redemption)과 주됨(主: lordship) 그리고 성령의 인침(sealing)과 보증(保證: guarantee). 원문에서 성삼위의 사역은 모두 한 문장에 속한다.[4]
아들과 성령의 사역은 창세 전 이미 세워진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역사적으로 실현시킨다. 이들의 사역 방법은 시대별로 다 다르다. 그러나 사역의 목표들은 모두 영원한 작정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성삼위의 서로 다른 사역들은 내용 면에서 동일하다.[5]
성부의 사역은 아들과 성령이 각각 수행한 사역을 위한 전략이다. 반면 성자와 성령의 사역은 아버지의 전략에 따른 하나님의 전술들이다. 창세 전 세워진 아버지의 추상적 전략은 창세 후 펼쳐진 아들과 성령의 구체적 전술들에 의해 그 목적을 달성한다.
아버지의 사역에 대한 연구는 아들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신학적 배경, 근본적 지식과 전술들을 알도록 돕는다. 즉 아버지의 사역 – 예정과 선택 - 에 대한 연구는 하나님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제공한다. 창조기사(창1-2장)에 앞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먼저 살펴야 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절)
아래와 같이 원문에 가깝게 재 번역할 수 있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4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먼저 우리를 예정한 후……(5절) 이의 목적은 그의 사랑 하는 자 안에서 우 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6절).”
아래의 도표는 예정과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작정을 구체적으로 잘 설명한다.
영원한 작정에도 하나님의 전략과 전술이 보인다. 예정은 전략적이라면 선택은 전술적이다. 작정은 창세전 세워진 계획이다. 그러나 선택에 의해 예정이 실현되도록 하나님은 이미 창세 전부터 정했다. 영원한 작정은 하나님이 창세 후 실천할 전략과 전술의 원천(源泉)이다.
나. 아버지의 작정과 그리스도
아버지의 작정은 아들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제한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이 뜻을 위해 태초에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다(요1:1, 요일1:1절 참조).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 합의가 있어야 했다. 이 합의에 따라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또는 아버지를 위해 항상 일한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0-24절)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영광 받기 원한다. 아버지의 작정은 오로지 아들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내지 완성될 것이다.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특정한 무리는 하나님 앞에 흠과 점 없는 거룩한 아들들로 세워질 것이다.[6] 이 제한된 무리는 그리스도 안에 택함을 받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특별한 대상이다.
다. 이중 예정론
예정과 선택이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특정한 무리가 창세 전 이미 정해졌다.[7] 이 은총은 인간의 공로와 전혀 무관하다. 사도 바울은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과 전택설 (supralapsarianism )을 주장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전택설이 하나님을 인간이 지은 죄의 장본인으로 만든다고 반대한다. 타락 후 선택이라는 후택설(infralapsarianism)을 더 선호한다.
바울은 전택설을 분명히 주장한다. 예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고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이처럼 예정과 선택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제한다. 아들의 사역은 타락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는다. 타락과 무관하게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예정과 선택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타락 이전 아담 안에 피택자와 유기자가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이들은 모두 죄와 사망 아래 놓였다. 구속의 은총은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당연히 베풀어진다. 창세 전 세워진 예정과 선택을 지지하는 전택설은 타락 후 후택설에 의해 또한 역사적으로 실현된다. 사도 바울에게 이 둘 사이 논리적 충돌은 전혀 없다.
원문의 시제(時制: tense)에 따르면 예정이 선택보다 앞선다. 예정은 무엇인가(what)를 하겠다는 추상적 목적이다. 이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특정 대상을 하나님 앞에 아들들로 서게 함에 있다. 하나님은 이들의 아버지가 된다.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의 가정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은 예정을 어떻게(how) 실현시킬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다. 선택의 목적은 특정한 무리를 흠 없고 거룩한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다. 두 방법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제한적 조건과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무조건적 은총.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선택 받은 무리만 받을 것이다. 선택의 목적이 달성되기까지 아버지의 사랑이 특정한 무리를 끝까지 붙잡을 것이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saints)이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절)
구속의 은총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세움 받은 존재이다.[8] 동시에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시민 노릇을 잘 하도록 계속 견인한다. 그러나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다. 선택의 목적은 또한 예정의 목적을 달성시킨다.
라. 영원한 작정의 목적
예정의 목적은 아버지의 기쁜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달성된다. 그리고 선택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무리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가 됨으로 달성된다. 예정이 추상적(what to do)이라면 선택은 구체적(how to do)이다. 당연히 전자는 후자로 실현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아름다운 협업(協業: cooperation, coordination)이 보인다.
선택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예정의 목적인 하나님 가정의 형성도 가능케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 노릇을 잘 한 성도만이 하나님의 가정에 속하는 영광스런 가족이 될 것이다. 선택의 목적이 1차적(예비적)이라면 예정의 목적은 2차적(최종적)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목적과 계획이 무엇인가가 잘 설명된다.
최종적 목적인 하나님의 가정이 주목을 끈다. 왜 가정일까?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는 최고 방법이다. 가정은 인간 존재의 출발점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인간 행복의 근본이다. 출생한 형제 사이 아낌없는 또는 거침없는 사랑은 인격과 삶을 성숙하게 한다. 그리고 가정은 외부 활동으로 지친 마음과 몸을 쉬게 해준다. 사랑으로 재충전된 후 다시 밖으로 나가 일한다. 가정은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행복의 기초이다. 가정은 인간의 행복을 가장 잘 설명한다.
하나님도 아버지로서 아들들이 자신의 가정에서 행복하길 바란다. 이런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전 아들들은 먼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구속과 구원은 이런 거룩한 삶으로의 부름이다. 이런 신앙 삶에 성공한 성도만이 아버지의 아들들로서 하나님 가정에 속할 것이다.[9]
아버지의 가정에서 행복을 느낀 아들들의 마음에는 감사, 영광과 찬양이 넘친다. 예정과 선택의 종국적 목적은 이렇게 기록된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의 사랑하는 자는 바로 아버지의 아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 성도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끝까지 견인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아버지의 은혜를 성도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만이 아버지의 거룩한 아들로서 아버지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지상에서 수행하는 신앙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기뻐하며 그에게 합당한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43:21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1-14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절)
[1] 원역사는 인류 역사가 아닌 신화(神話: myth )로 취급된다. (사상, 논리학)
[2] 하나님은 자신의 무조건적이며 일방적 은총으로 사역을 항상 시작한다. (전략, 사상)
[3] 일하기 전 계획을 세운다. 창조 사역은 사전 하나님이 세운 계획에 따른 결과물이다. (전략, 사상)
[4] 성삼위 사역이 한 문장에 기술됨은 논리적으로 이들 사역을 한 단위로 해석하란 뜻이다. (전략과 전술, 신론)
[5] 바울은 창조 사역을 소개하지 않았다. 구속이 더 강조된다. 창조 사역은 구속 사역을 예언해 주는 모형과 상징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림자가 아닌 참 메시아로 온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설명해야 했다. (전략과 전술, 기독론)
[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절)
[7]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2절)
[8] 하나님 관점에서 본 구원론이다. 인간 관점에서 누가 이런 구원을 받는지를 알 수 없다. 선택 여부에 대한 논쟁이 불필요한 이유이다. 이보다 사랑 실천에 힘씀이 성경적이다.
[9] 칭의와 성화 논쟁은 무용하다. 칭의란 출생은 당연히 성화란 성장을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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