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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하나님아들 2019. 12. 8. 20:43

불교


힌두교와 달리 불교는 한 개인이 창시했고 창시 일자도 찾아볼 수 있다. 불교 창시자는 고타마(Siddhartha Gautama)란 사람인데 기원전 560년 경 인도 국경 「네팔」의 Lum-bini에서 힌두교인으로 출생했다. Gautama가 출생했을 때 예언자가 예언하기를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고 전해내려오고 있다. 만일 Gautama가 네 가지 일 즉, 질병, 노년, 죽음 그리고 세상일을 단념한 승려를 보게만 된다면 그는 이 세상의 주권을 버리고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Gautama의 아버지는 그 아들이 지상에서 위대한 통치자가 되기를 원했으므로 그에게 궁전을 건립해 주었다. 그 아버지는 병자, 노인, 시체, 그리고 승려의 어느 것도 궁전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다. Gautama는 세상 일을 잘 보지 못하며 이렇게 성장하게 되었고 후에 Yasodhara라고 부르는 미인과 결혼하여 득남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들은 Gautama에게 다른 여러 가지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의 궁전을 둘러싼 공원속을 수레를 타고 돌고 있었는데 그는 무시무시한 상처를 가진 한 사람과 노인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모습과, 묘지를 향해 가고 있는 한 시체와,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한 승려가 구걸하고 다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날 밤부터 Gautama는 그 승려의 행복해 보였던 얼굴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자기가 살고 있는 궁전의 화려한 사치 이상의 그 무엇이 있는가 하고 묵상하게 된 것이다. 그 날 밤 늦게 잠들고 있던 자기 처자를 마지막으로 쳐다보고 그 궁전을 영구히 떠났던 것이다. 29세 된 Gautama는 생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노란색의 옷을 입고, 거지 승려 행세로 시골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최초에 그는 몇몇 훌륭한 선생들로부터 upanishad를 연구했으나 그 책에서 그는 만족을 얻지 못했다. 다음에 그는 자기를 부인해서 구원을 얻고자 시도했다. 그는 거의 뼈만 남을 정도까지 금식도 해보았으나 역시 행복을 얻지 못했다.


Gautama는 "깨달은 사람(覺人)이" 되다

그는 한 나무 밑에서 40주야를 앉아 있었다. 그가 구하고자 원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Mara라고 하는 악마가 이런 뜻을 단념하도록 유혹했던 것이다. 40일 후에 그는 결국 열반(涅槃)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고 자신의 구원을 발견했다고 느꼈다. 이때부터 그를 "부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은 후 부처(Buddha)는 인간 세계로 나가게 되었다. 그는 설교를 시작했으며, 생의 뜻과 구원에 관하여 가르치게 되었다. 그 후 얼마후에 그는 승려들의 규범인 Sangha를 만들어 내었다. 45년 후 부처가 사망할 때까지 수천명이 그 종교를 받아들였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의 발생과정이 힌두교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서로 아주 판이하게 다른 점이 많이 있다. Vedas와 Upanishads가 신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고 부처는 주장했다. 그것은 구원을 얻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또 인간이 Paramatman(세상 혼)의 일부인 atman(혼)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했으며, 또한 현세는 maya(비실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다만 생의 단계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의무인 Karma와 함께 힌두교의 환생의 가르침을 받아 들였던 것이다.


중도와 네 가지 고상한 진리들(사체: 四諦)

부처의 이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도"이다. "중도"란 힌두교의 복잡한 종교와 부처가 알게 된 세상의 육욕에 빠지기 쉬운 것 사이를 해결짓는 구원에 이르는 영적 길을 말한다. 부처는 힌두교의 사회 계급 제도를 강력히 반대했다. 힌두교에서는 인간이 열반에 이르기 전에 여러번 환생해서 Brahman 계급에 도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는 사회 계급에 관계없이 열반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불교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게 했으며 특히 빈곤층의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했다.

힌두교의 막연하며 어려운 교리대신 불교는 명백하며 건실한 교리를 신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부처가 인도의 베나레스(Benares)에서 설교했을 때 그는 불교의 네가지 주요 원칙을 제시했다. 이 네가지 원칙을 "사체"(Four Noble Truths)라고 한다. 이제 이 사체에 관하여 알아보자.

1. 고체(苦諦):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 부처가 이것을 의미하기를 산다는 바로 그 행위는 고통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탄생하게 되면 누구나 다 고통을 면할 수가 없다. 구원(열반)이란 이렇게 계속되는 고통으로부터 면함을 받게 됨을 말한다.

2. 집체(集諦): 「고통의 원인은 자아 욕망에 있다.」 인간이 부단히 계속되는 고통속에 있게 됨은 세상 일에 너무 집착되어 있는 까닭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tanha(번뇌)라고 부른다.

3. 멸체(滅諦):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다.」산다는 것은 고통이며 고통은 번뇌에서 기인되므로 번뇌만 제거하게 되면 고통은 자연이 없게 된다. 사람이 자아욕망을 그친다면 고통도 없어진다는 것이 부처의 위대한 발견인 것이다.

4.도체(道諦): 「중도를 따름으로 욕망을 제거하는 길」

이렇게 하여 부처는 힌두교인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했던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환생될 수도 없음을 명백히 알고 그는 tanha라고 하는 이름을 만들게 된 것이다. 다음에 부처는 사람이 스스로 그 욕망을 없앨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제도를 "팔정도"(Eightfold Path)이라 부른다.

이 팔정도는 다음과 같은 옳은 생활의 방법 여덟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1)정견(正見) (2)정사(正思) (3)정어(正語) (4)정업(正業) (5)정명(正命) (6)정정진(正精進) (7)정념(正念) (8)정정(正定) 등이다.

부처는 이 팔정도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며 죽음과 환생의 부단한 순환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열반의 상태가 어떠한 것이냐는 질문에 부처는 대답하기를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다고 항상 대답했다. 그가 할 일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피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며 한 때 그가 자유롭게 된 것을 발견한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힌두교는 이 세상에서의 생은 아무 뜻이 없다고 하고 있고, 불교는 이 세상에서의 생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라고 하고 있다. 참된 고통이 있음으로 세상을 도피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동양인들에게는 불교란 항상 마음을 끌게하는 종교였다. 막연하고 모순된 생각이 가득차 있는 힌두교에 비하면 정확한 인간들의 문제점과 "구원의 계획"이 똑바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개혁된" 힌두교와 새로운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불교가 수세기 동안 인기를 끌던 종교였다. 그리스도 탄생후 약 천년간 복음이 유럽 전역에 소개되었을 때 불교의 승려들은 상업길을 이용하여 중국, 일본, 티벳 등지로 그들 종교를 전파했다. 오늘날 세일론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약 5억의 불교 신자가 있다.


20세기의 불교 형태

20세기의 불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티벳에서는 귀신을 숭배하는 불교가 성행하며 일본에서는 새로운 군대저, 국민적인 Soka Gokkai가 숭배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두가지 중요 형태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이다. 소승불교는 "소수의 신자가 갈 수 있는 교리"의 불교인데 다행스러운 소수만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불교이며 부처의 도를 정확히 따르는 사람만이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소승불교란 명칭은 비평가들에 의해 주어진 파생된 명칭인 까닭에 후에 Theravada 불교라고 변경되었다. Theravada(연장자의 도)는 승원의 생활을 특히 강조하는데 승원들을 위한 토지와 금전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매우 부하게 됐다. Theravada 불교는 현제 세일론,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그리고 라오스에서 성행하고 있다. "대도"(大道)의 가르침인 대승 불교는 구원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부처가 믿었던 것을 가르치고 있다. 부처는 각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소승불교는 구원의 신에 대한 관념을 진전시켰다. 그들의 이론은 부처가 45년간 지상에 생존했었다는 데에 있다. 그는 열반에 이를 수 있었으나 그대신 인류를 구하기만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는 인류의 한 구세주였으며, 아직까지도 신실한 신자들로부터 구세주로 불리우고 있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Theravada와 대승 불교는 부처에 관한 서로의 의견이 전적으로 다름을 볼 수 있다. Theravada 교도들에게는 부처는 한 선생에 불과했고 대승 불교 신도들에게는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신이란 지위로 이끌어 올린 것이다. 이런 까닭에 대승 불교가 훨씬 더 인기가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 티벳, 일본, 월남, 한국에서 성행하고 있다. 오늘날 불교는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굉장히 성장되고 있다. 그러면 "불교가 어떻게 인류의 필요에 대한 답을 잘 주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다. 불교가 전파된 곳마다 사람들의 도의심을 앙양시키고 정직성을 갖게 하며 성도덕을 함양시키고 절제성있는 사람을 만들게 됐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불교인은 서양의 그리스도교인을 전쟁과 원자 폭탄을 이유로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마치 기독교 때문에 나치스주의가 생겨났다고 말하는 유대인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근년에 와서 동남 아시아의 많은 불상사가 불교도로 인하여 야기되고 있음을 그들은 잊고 있는 것이다. 불교도는 고통을 제거키 위하여 자기들의 종교가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불교도들이 만일 사회 사업에 적극적이라면 그래도 수궁이 좀 가겠는데 그러나 그들은 거의 이 분야에 대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통에서 도피하는 것만을 그들의 임무로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간섭할 생각은 조금오 없는 것이다. 불교도는 생명에 대한 인과관계를 주장하며 고통을 생의 일부분으로 알고 있다. 고통자체는 없어질 수 없으며, 각자 도피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는 염려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견해를 기독교와 비교해 보자. 부처가 죽은지 520년 후에 예수님은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충만하고 풍부한 생을 인류가 가질 수 있도록 지상에 오셨다. 부처는 하나의 길(도)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데에 반하여 예수는 그 스스로가 길이라고 주장하셨다. 이 두가지 주장이 어떻게 다른가? 부처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비교해 보자.


부처의 가르침과 성경의 비교

1. "사는 것은 고통하는 것이다"라고 부처는 말했으나 그는 고통의 이유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고통이 있는 것을 도처에 시인하고 있으며, 또한 고통에 대한 설명도 가하고 있다. 로마서 8:18-23에서 온 세계가 "탄식하며 고통하며" 모든 사람들이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로마서 5장에는 아담(Adam)이 죄를 범했을 때 온 인류에게 병과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전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인간은 선택에 의해서 죄인이 되었다고 성경에 말하고 있다. 성경의 견지에서 볼 때 죄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 반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 고통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기인한다는 부처의 관점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욕망을 유혹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마음 속으로부터 나오는 "욕망", "탐심", "열망", "식욕" 등으로 인하여 유혹을 받게 된다고 야고보서 1:13-15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이러한 유혹에 골복할 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결과는 영적 고통과 죽음이다(로마서6;23). 고통의 원인은 욕망에 있다는 원리에 기독교인들은 동의하나 욕망을 없애고자 하는 불교의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3. 욕망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노력에 의해서라고 부처는 가르치고 있다. 그를 믿는 신자들은 수세기 동안 팔정도를 지켜 왔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레미야17:9)는 것과 인간의 최상의 의도가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발견해왔다.

사람이 자기를 이기고자 할 때 그는 보다 더 높은 힘의 근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부처는 불가지론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의 가능성이 있음을 무시하고 있다. 디도서3:3-8에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마다 한 때는 욕망에 매인 노예였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동시에 인간으로서 이 욕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시고자 오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도움없이 욕망을 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길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안에서 욕망도 함께 죽고 또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요한복음 3:5, 고린도후서5:17, 갈라디아서2:20 참조)

4. 욕망을 끊어버리기 위해 팔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부처는 말했다. 즉 정견, 정사, 정어,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의 팔정도를 지켜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상한 관념은 마치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산상 설교와 비슷한 것이다.


기독교가 불교를 초월하는 점


불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이 인간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도 비슷한 표준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힘도 또한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신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전날 밤 예수는 그 제자들에게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온전한 방법에 대하여 설명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포도나무라고 말했고 신자들을 그 가지라고 했다. 왜냐하면 포도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 방방 곡곡에 자라고 있어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장미, 관목, 과일나무 등의 예를 드는 것이 더 쉬운 일이겠으나 그 비유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다음과 같이 예수는 말씀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14;4-7). 계속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9,10절)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효과적인 삶을 위한 두 가지 긴요한 성분을 주시는데 그것은 힘과 권능이다. 그리스도인이 그의 생에서 주님과 같이 하며 복종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그만큼의 힘과 권능을 증가시키며 제한하신다.


모든 사람들이 해야만 될 선택


그리스도께서는 복종해야 될 계명과 명령만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마치 포도나무나 관목이나 나무가 적절한 관리만 하게 되면 잘 성장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성장하고 변화하며 발전하도록 돕겠다고 약속을 하고 계신다. 이와 반대로 불교도들은 올바로 살고자 하는 팔정도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부처가 신자들고 하여금 그 길 가운데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지는 않는다. 이 여덟가지 도는 고귀한 생각처럼 들리기는 하나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내가 곧 길이요…"(요한복음14:6)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에서 살아나심으로 그의 능력과 권능이 주어질 수 있음에도 그리스도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이해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그 안에서 참된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는 "너 스스로가 노력해야만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반면, 그리스도는 "너 자신을 나에게 맡기면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권능을 주겠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거나 아니거나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즉, 자기 노력, 아니면 구세주이시며 주님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일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써 구세주로 받아 들이고 그에게 복종치 아니한다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같으며 어느 면에서 본다면 욕망의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코자 노력하는 불교도와 같다. 아마 그리스도인이 불교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하더라도 그의 생활에서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욕망은 생활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하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

불교인: 개인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기독교인: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욥기42:2, 시편115:3,마태19:26)


예수 그리스도

불교인: 훌륭한 선생이며, 부처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기독교인: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마태14:33, 16:16, 요한1:34, 9:35-37, 고전15:3, 로마서5:6-8).




불교인:인간의 진전을 방해하는 것이 죄다. 우리 각 개인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기독교인: 하나님의 뜻에 모순되는 생각이나 행위이다. 인간은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다.(롬3:10, 23, 5:12, 엡2:1)


구원

불교인: 자기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기독교인: 그리스도의 노력으로만 가능하다(행4:12, 디도서3:5, 엡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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