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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하나님아들 2019. 12. 8. 20:44

힌두교


서양 사람들이 생각할 때 힌두교가 보고 있는 생명의 길은 이상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서양세계(유럽, 남북 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시아의 사람들과 전혀 상이한 전통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서양식 사고방식은 옛날의 희랍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람들이 이 우주는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온 것이다. 이러한 고대 희랍 사람들의 생각 위에, 유태교와 기독교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질이 계시되고, 완전한 계획과 목적이 설명되어 있는, 성서의 가르침을 추가했던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이러한 설명을 믿었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양 사람들이 자연에서 이런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과학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법칙을 만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미세한 물체, 초목, 혹은 별을 볼 때 그들이 존재하는 계획과 목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사물이 각각 아주 적절하게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은 서양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시작될 수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기억하기 바란다.


동양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 다른다


동양에서는 발전과정이 아주 다른다. 전형적인 동양인(중국사람, 인도사람, 동남아시아사람들)은 우주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다.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우주에 있는 만물이 임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그들이 믿는 종교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 밖에 존재하는 영역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양인은 이 영역에 도달하기를 원하며 세상을 완전히 무시함으로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에서 참된 과학이 나오기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이겠는가? 일본 또는 중국이 오늘날 과학적으로 발전되고 있음은 사실이나 이것은 그들이 서양식 사고방식을 택한 범위내에서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생활에 관한 견해가 전혀 상반되므로 상호 이해하기 곤난한 점도 많이 있는 것이다. 상호 자기 견해를 설명함이 거의 불가능한 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의 종교에 관하여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힌두교로부터 시작해보자. 여러 분파에 대한 것은 제외하고 힌두교의 주요파에 대한 것만을 생각해 보자.

힌두교의 성장과정을 최초에 인더스강 유역에서 시작된 때부터, 허리우드의 지성인으로부터 히피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Vedanta라고 하는 현대판 힌두교의 형태로 명망이 있게된 데에 이르기까지의 자취를 더듬어 보자.


힌두교의 기원과 배경


기원전 2,000년 경 당시 발전했던 아리안 족들이 인더스강 유역의 사람들을 정복했을 때 힌두교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리안족들은 그들의 종교를 갖고 들어왔다. 그것은 지금 Vedic 문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찬송과 기도, 성가 등으로 구성된 종교였다. "베다(Veda)를 그들은 "계시받은 지혜"라고 믿고 기독교인이 성경을 대하듯 힌두교인들은 "베다"가 성스럽게 생각되었다. 베다에는 여러 신들로 가득히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은 마치 희랍과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러 남자 신과 여자 신을 상상케 하는 것이다. 다른 여러 고대 사람들과 똑같이 아리안족들도 이 여러 신들이 죽음과 재난을 초래하게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의 목적은 이 여러 신들을 행복하게 해드려야 된다는 것이었다. 힌두교중에서 브라만이라고 하는 일당이 생겼는데 이들은 점차 강화되어 마침내 상류 사회를 차지했다. 이들은 "베다"에 기록을 가하여 그 경전을 브라마나(Bramana)라고 불렀다. 여기에 그들은 산 제물을 제공하는 의식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기원전 500년 경에 또 다시 '베다'에 다른 기록을 추가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 목적은 엄격히 구별된 사회계급 제도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한 찬송가에서 볼 수 있듯이 브라마 신의 머리, 팔, 다리, 그리고 발로부터 유래된 네 가지 사회계급제도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네가지 계급이란 브라만(Brahman: 승려),크샤트리야(Kshatriya: 무사), 바이샤(Vaishya: 농부) 및 슈드라(Shudra: 노예)이다. 처음의 세 가지 계급은 힌두교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이요할 수 있으나 마지막 계급인 노예는 "베다"를 읽을 수도 없고 구원을 얻을 권한도 부여되어 있는 않고 있다.


힌두교인 생활의 4단계와 네 가지 목표


세 가지 상류급에 속하는 힌두교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상세한 방법에 대하여 "베다"는 잘 설명하고 있다. 힌두교인 소년들에게 그 우선권이 주어져 있다. (여자들에 관하여는 설명조차 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러면 소년들은 중생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후에 그들은 4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1)학생, (2)처자를 둔 가장, (3)속세를 떠나 계시를 추구하는 묵상인, (4)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정없이 방랑하는 자의 네가지 단계이다. 그들에게는 일생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목표가 부여되는 길이다: 의롭고 덕행이 있으며, 물질적 재물을 소유하며, 사람과 기쁨 그리고 미의 감상을 통한 생을 즐기며, 생활을 초월한 영적 승리를 얻는 것 등이다.

기원전 800-300년간에 기록한 "우파니샤드" 에도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방법을 추가해 놓았다. 힌두교에서는 이것도 성서로 간주되어 있으나 서양인들에게는 전혀 알 수 없는 견해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파니샤드'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이 세상 밖에 brahmanatman(하나님과 같은 어떤 존재)란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며 또 의미를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신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가 보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마야(maya)라고 하는데 마야는 임시적인 존재며 아무런 뜻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존하며 숨쉬고 있는 모든 생물은 아아트만(자아,atman) 또는 혼(soul)이 있는데 그것은 paramantman, 혹은 세상 혼의 한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다. 각 개인의 혼은 마야에 존재하는 동안 paramatman에 돌아가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가 있다고 한다.


환생은 결국 열반에 이른다. (Reincarnation)은 결국 열반(Nirvans)에 이른다.


자아(atman)가 그 본 위치로 돌아가는 단 한 가지 방법은 punar-janman, 또는 환생뿐이라고 우파니샤드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혼이 벌레로 시작하여 죽으면 고등생물에 차차 재생되어 마침내는 인체에 이른다고 하고 있다. 자아가 인체에 이르게 되면 높은 사회지위를 얻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높은 사회지위는 덕행을 행하며 달마를 지킴으로써 얻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도덕, 사회, 종교적인 의무가 포함되는데 이것은 힌두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혼을 놓아주는 다른 한 가지 법은 요가에 의한 법으로 이것은 사람들의 육체적 욕망을 저지시킴으로 죽음과 재생의 순환을 피하여 (세상 혼)parmatman과 합치게 되는 것이다. 한번 자아를 스스로 잃고 (세상 혼)에서 본질을 잃게 되면 열반을 통과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 때에먈로 비로소 힌두교인으로서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무한 세계로 내딛게 되는 것이다.


힌두교인은 세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힌두교인은 세상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닌 까닭에서이며, 진실된 것은 다만 자기를 자제함과 묵상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신자는 그의 혼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살아나는 그런 순환과정을 열반(무한 세계)에서 자유를 발견할 때까지 계속한다고 믿는다. 힌두교인들은 「우파니샤드」가 그의 혼이 움직이고 있는 곳을 향하여 영원한 세상 혼(paramatman)을 위해 세상을 거부하는 지혜를 얻게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야말로 힌두교 학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부여하고 있고 특히 Vedanta 철학을 가지고 이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의 교훈은 오랜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힌두교 신자들간에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네 계급 중 가장 높은 승려 계급인 브라만 계급에 이른 후에만 혼은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점과 같은 것 때문이다. 이것은 인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빈곤한 자들과 「우파니샤드」를 읽지 못하는 문맹자들에게는 죽음과 재생의 끊임없는 윤회(samsara)과정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견해는 기원전 500년경에 구원의 중도(middle way)를 설교하기 시작했던 석가(Gautama Buddha)에 의해 도전받게 되었다. 인도에서 불교는 기원후 1000년경 새로운 형태의 힌두교가 일어났을 때 사라졌다.

이 "인기있는 힌두교"는 곧 사람들에 의해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긴 서사시인 Ramayana 와 Mahbharata 와 같은 새로운 문학이 나타났다. 또 크리슈나신을 숭배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방법을 기록한 Bhagavad-Gita, 또는 "신들의 노래"라는 것도 나타났다. 또한 신에 관한 애정적인 이야기를 싣고있는 Puranas 도 출현하여 힌두교인들간에 매우 인기가 높았었다.

새로운 힌두교는 3억 3천만의 신이 있다고 수긍하고 있다. 즉, 이것은 매 힌두교인마다 한 신이 있다는 것과 같은 수이다. 약 2억 정도의 신자는 비쉬누(Vishnu)신을 숭배하는데 비쉬누신은 최소 10회나 인간들에게 출현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비쉬누신은 거대한 거북이로서도 나타났고, 부처로서도 나타났고, 서사시의 중요한 영웅인 라마와 크리슈나로서도 나타났다고 믿고 있다. 또 기타 수백만 신자들은 비옥의 신, 시바(Shiva)를 숭배했는데 그들의 의식제도는 가나안인들의 그것만큼 악의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여금 가나안인의 우상을 파괴하도록 명했었던 것이다.

"국민의 힌두교"는 다음 세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한 가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달마(dharma) 즉 의무를 다함으로, 「우파니샤드」의 지식을 지키는 법으로, 그리고 비쉬누나 시바 같은 신을 숭배함으로써 되는 일이다. 그 마지막 방법이 인도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적응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혼이 높은 계급에 이르기 쉬운 방법이며 최종적으로 열반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에게는… 희망없는 뒤범벅에 불과하다


서양인들이 볼 때 힌두교는 아무 희망도 없는 잡탕에 불과한 것이다. 힌두교는 수정, 추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힌두교를 이론적으로 배열 또는 설명하기는 마치 눈감고 장갑끼고 컴퓨터의 기계를 수리하고자 하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힌두교의 복잡성을 무시하는데 이는 그들 역사의 시초부터 그렇게 성장해 왔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 문명에 힌두교는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므로 의문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가 인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별로 미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중에는 그리스도를 받아 들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복음을 거절했고, 이는 그들의 생각에 복음은 너무 성질이 다른 서양 문명인 것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중 어떤 형태에 있어서는 약간의 기독교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Vedanta 는 그 좋은 예이다. Vedanta 에 의하면 창조의 신인 브라만은 스스로 인간의 형태로 여러 번 오셨다고 되어 있다. 그는 여러번 그와 같이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석가, 크리슈나(Krishna),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브라만의 육체화라고 믿고 있는데 이것을 그들은 초인적인 구세주들(super-saviors)이라고 부르고 있다. Vedanta의 추종자들은 브라만의 최근의 육체화는 Sri Ramakrishna라고 믿고 있는데 그는 19세기 말까지 벤갈에서 살았었다. 그를 따르는 신도들은 말하기를 그는 힌두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영적인 단련을 실천하였으므로 각각 하나님의 환상을 얻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는 하나인데, 성인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른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신앙의 종류가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실제인 하나님으로 이르는 여러 가지 다른 길에 불과하다"라고 Ramakrishna는 가끔 말했던 것이다. Vedanta는 모든 종교와 친근하다. "용감한 새 세계"(Brave New World)의 저자 Aldous Huxley는 Vedanta의 열열한 신봉자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힌두교인으로, 불교신자로, 또 이슬람교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확실히 가망성 있는 일이며 그리고 동시에 영구한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의 근본 교리에 완전히 일치할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Vedanta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Swami Prabhavwnnanda는 힌두교인은 "그리스도를 신의 육체화로 받아 들이기 쉬우며, 크리슈나 혹은 그가 선택하는 다른 선생들을 숭배하는 것과 꼭 같이 그리스도를 숭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단 하나의 아들로서는 받아 들일 수 없다…"고 했다.


간디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온 관점


한 비슷한 서술이 위대한 인도의 지도자인 간디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행하여졌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하며 그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는 것은 내가 믿기 힘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가질 수 있었다면, 우리 모두도 그의 아들이 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과 같았다면…… 그 때엔 모든 인간들도 하나님과 같았을 것이며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간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에 있어서 어떠한 "신비스럽거나 기적적인 점"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다른 힌두교인들과 같이 간디는 기독교에서의 죄 문제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로부터의 참된 구원의 필요성을 깊이 느꼈던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내 생명을 주관하시며 그의 자손인 내가 그에게서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고 있다. 나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이 내 안의 악한 여러 가지 감정 때문이며,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떠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라고 간디는 말했던 것이다. 만일 간디가 사도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이었을까! 즉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중대한 논제인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힌두교와 그리스도교와의 구분을 명백히 하는 중대한 갈림길이다. 힌두교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여러번 재생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 육신으로 오셨으며 그는 인간들에게 선생으로 가르치고자 온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오셨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히9:28). 또 그가 다시 재림하실 때엔 죽은 자를 심판하는 강력한 심판자로 오신다고 기록되어 있다(계20:11-15). 힌두교의 여러 구세주와 달리 그리스도는 스스로 주장하신 대로 증거를 보이셨던 것이다. 요한복음 제 5장에서 그는 세례 요한의 증거(33절)를, 그 자신의 역사하심을(36절), 하나님 아버지를 (37), 그리고 성경(39절)등을 인용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힌두교인들에게는 이해 못하는 난점이 되고 있다. 부활하신 사실이 힌두교의 계속적인 재생설을 논박하는 것이 되며 그리스도가 한 최상의 구세주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신론자나, 일원론자나 다신론자, 불가지론자, 혹은 유신론자의 그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라고 Vedanta의 신조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어떤 특수한 도덕을 지키도록 주장하지도 아니하며……각자 자기의 특수성에 비추어 받아 들일 수 있으며 다만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비판할 권한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대조되는 성경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지상에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왜 하나님은 인간들의 역사 속에 들어오셨는가? 그는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죽기 위해 오셨다. 그는 또 다시 부활하셨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그리스도가 많은 위대한 선생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며, 그들은 구원받아야 될 죄 같은 것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힌두교의 신이 너무도 미소한 이유


사실상 힌두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철학에 불과하다. 힌두교인들은 개인에게 아무 관계가 없는 브라만신을 사실 이상으로 확대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 브라만신을 힌두교인들은 어디서 찾고 있겠는가? 자기 안에서 찾고 있다. 힌두교인에게는 사람이 바로 신이다. 힌두교의 신은 너무도 미소하다. 요한일서 5:11-12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고 이 영생은 그 아들 안에 있으며, 만일 우리가 그 아들을 소유하고 있으면 영생을 소유한 것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아들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면 간디가 가지고 있는 종류의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직 멀리 떨어져 있어…게속되는 고통을…"하는 그런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말한 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8-10)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

기독교인: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영원하신 영적 존재(마3:13-17,28:19,고후13:14)

힌두교인: 브라만신은 무형이며 추상적 영원한 존재이나 아무 특성도 없다. 수백만의 사소한 신들을 가지고 있으며 삼위일체 형태를 취한다.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인: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다. 그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며, 죄없이 오셨고, 우리 인간의 속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요1:13-14,10:30, 8:46, 히4:15, 막10:45, 벧전2:24)

힌두교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많은 아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며 다른 사람보다 신성함이 없고, 인간의 죄를 위해 죽은 것도 아니다.




기독교인: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는 교만하고 독자적인 반항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안에 기록해 놓은 표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한다. 죄는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하며 그 결과는 죽음이며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를 말한다(롬3;23,6:23)

힌두교인: 선과 악은 상대적인 어휘이며 무엇이든지 돕는 것은 선이며, 무엇이든 방해하는 것은 악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알기 위해 이 장애물을 거치지 아니할 수 없다. 사람이 현생에서 성공치 못하면 환생시 또 다시 노력할 수도 있다.


구원

기독교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인간은 그를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롬3:24, 고전15:3)

힌두교인: 인간은 헌신, 묵상, 선행 및 자기 자제를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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