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c! 선교단체!!

[스크랩] ccc 10단계 열두번째

하나님아들 2019. 1. 31. 14:17

 

 

(메시지 12)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성장의 원리

(1) 몸이 자라지 않으면 개인도 자라지 않는다.

조 경 호 목사(미국 산호세중앙교회)

 

수치로 보는 인체는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0.2밀리미터 크기의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한 후 2개월이 지나면 뇌와 신경세포의 80%가 만들어지고, 키가 2센티미터 정도로 자라며 몸무게는 8그램 정도가 됩니다. 심장, 간장, 위 등 장기가 분화되기 시작하고 손과 발 모양도 구별이 됩니다.

4개월이 되면 초음파로 성별 구별이 가능하고, 5개월이면 머리카락과 손톱이 자라서 사람의 모습을 갖춥니다. 6개월이 되면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눈도 깜박입니다. 7개월이 되면 뇌가 발달하고 몸을 돌릴 힘도 생기고 손가락을 빨기 시작합니다. 10개월째가 되면 아기는 완벽한 몸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아기의 성장은 온 몸이 자라면서 모든 지체가 같은 비율로 균형 있게 성장합니다.

교회도 몸이 성장하면서 몸의 각 지체가 다른 지체와 더불어 균형 있게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열심 있는 일부 지체들만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노력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태어난 지 1년 정도 된 아기를 생각해 봅시다. 아기의 오른 팔만 매일 운동시킨다고 해서 그 팔만 20세 청년의 수준으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각 사람이 자신의 노력과 수고에 따라 성장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괴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른 손은 20세, 간은 4개월, 왼발은 12세…. 지체는 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몸이 자라는 만큼 지체가 균형 있고 조화롭게 자라야 건강한 성정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성공 방식인 개인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다른 지체들과 연합하고 사랑으로 하나 되지 않는다면 잘려나간 포도나무 가지처럼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거해야 합니다. 몸 안에 거하는 사람들만이 몸의 성장에 맞추어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1977년 미국의 부호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20억 달러의 재산가 하워드 휴즈와 석유 제왕 폴 게티였습니다. 하워드 휴즈는 죽기 전에 고독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던 그의 사망 원인은 놀랍게도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는 정신적 고독과 공허감으로 인해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홀로 유폐된 생활을 하다가 결국 영양실조로 죽었던 것입니다. 폴 게티도 3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이 있었지만, 다섯 번이나 이혼했고 두 아들이 사고로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재산만큼이나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동일합니다. 고독한 그리스도인은 영양실조에 걸릴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홀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제자는 플라스틱 씨앗일 뿐입니다. 고독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은헤에 대해 구경꾼일 뿐입니다. 여기에 교회에 숨겨진 생명의 비밀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3:13, 15)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몸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할 때 우리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할 수 있으며, 주님의 장상한 분량에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다른 지체들과 연합하고 섬기는 삶을 살기 전에는 교회의 풍성한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성장을 경험하고 싶다면 몸에 연결되어야 합니다. 몸에 연결될 때 몸이 자라는 만큼 모든 지체들이 함께 자랄 수 있습니다. 다른 지체들과 연결되고 몸에 연결되기 위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 신문에서 보디빌딩 대회에 참가한 한 육체미 트레이너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볼 수 잇는 남자들의 근육은 생계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을 유지하는 데 그들의 삶 전부가 투자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당장’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석달 후 또는 수영복을 입을 때가 되면 근육질의 단단한 몸매가 되겠거니 기대하고 저를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생각입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려면 오랜 시간 근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근육을 꾸준히 키워야 간강하고 멋진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적 성장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열두 제자와 함께하는 공동체 중심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실이 아니라 인간관계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랑하는 관계를 통해서 한 사람의 생애를 변화시키고 주님께 굴복하게 하며 헌신하게 만듭니다.

 

인도의 캘거터의 ‘죽음을 기다리는 집’에 한 무신론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온 몸에 상처와 구더기가 들끓는 노숙자와 병자들의 몸을 닦아 주고 치료하는 수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무신론자였습니다. 제 마음은 증오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눈으로 직접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이제 저도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될 때 생명의 성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 35)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임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사랑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 10).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모든 율법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에서 경멸(輕蔑)당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유기적 공동체가 되려면 모든 지체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냅니다. 지체와 지체를 연결시킵니다. 생물학적으로 한 몸의 관계를 가져옵니다. 보이지 않는 신경과 힘줄과 핏줄과 생명으로 연결되려면 모든 지체가 사랑 모드에 들어서야 합니다.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6).

사랑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유일한 성잘 호르몬입니다. 사랑은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성장시킵니다. 미국 국가장애위원회 전책차관보 강영우 박사가 연세대 강당에서 “사랑과 봉사로 리더십을 길러라”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습니다. 그는 리더십을 키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불행으로 인해 낙담하고 낙오한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는 것이라고 정의한 후에, 남을 돕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살고자했다면 오늘의 자신은 언ㅅ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몸에서 분리된 지체는 이미 시체입니다. 성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머리의 명령에 따를 수도 없습니다. 다른 지체들과 협력할 수도 없습니다. 죽은 시체로 남을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을 잃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잃는 것입니다.

 

함께 행하라

최근 셀 교회, G-12, 목장 교회, 가정교회 등 작은 교회 운동이 크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의 기본 원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론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열두 제자와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행동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 사역을 나누셨습니다. 왜 열두 명이었을까요? 사회학자들은 열두 명이 인간관계의 가장 완벽한 수라고 말합니다. 피드백을 나눌 때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절대적인 숫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계속 대형화되고 있습니다. 2005년 ‘한국 교회 미래 리포트’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 인구는 1천 50만 명이며, 그 중 도시 대형 교회에 참석하는 비율이 전체의 30-40%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대형 교회의 구조 상 교인 관리가 어렵고 교인들도 심방과 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대형화의 약점이자 악영향으로 분석되었습니다. 대형 교회에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미국 내 기업형 이윤 추구 전략을 중시하는 초대형 교회의 급격한 증가를 소개했습니다. 예배 출석 인원이 2천 명이 넘는 교회가 1980년대에는 50개였으나 오늘날은 880개로 증가했으며, 미국 250개 탑브랜드 중 상위 20위 안에 4개의 교회가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경우경영대학원 출신 전문가를 고용해 교회를 운영하고 있고, 연간 총수입이 5천만 달러를 넘는다고 보도하며, 종교 자본주의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고 교회의 상업화가 가속화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시대에 맞춰 새로운 형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교회든 근본은 유기적 공동체여야 합니다. ‘나’와 ‘너’의 수평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나’와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관계도 맺어질 수 없습니다. 교인수가 몇 명이든지 모든 그리스도인은 작은 교회 곧 소그룹 공동체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소그룹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고 서로 종노릇하며 서로가 서로를 목양하는 공동체가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소그룹의 모든 지체들을 변화시키는 영적 성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미국 버클리 대학교 연구팀이 관계와 수명의 관계를 실험했습니다. 우선 한 마리 쥐만 따로 먹이를 주고, 다섯 마리 쥐는 함께 먹이를 먹게 했으며, 다른 한 마리 쥐는 연구원이 쓰다듬고 노래를 불러 주면서 직접 먹이를 먹였습니다. 실험 결과, 혼자 외롭게 먹이를 먹은 쥐는 600일을 살았고, 다석마리 그룹은 700일, 사람이 직접먹인 쥐는 950일을 생존했습니다.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소그룹 참여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소그룹에 대한 절대 헌신이 필요합니다. 소그룹이 곧 ‘교회 속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목회를 할 당시 교회는 계속 성장했으나 자신은 공허감을 떨칠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회는 활발하게 움직였고 새신자도 증가하고 있었지만 무엇인가 허전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허럭을 얻어 홀로 한적한 곳에 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 중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후안, 너의 모든 사역 가운데 나의 손가락은 어디 있느냐? 너는 내 일을 마치 코카콜라를 팔듯이 했을 뿐이다.”

“주님, 저희 교회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살찌고 있다. 사랑의 감동이 없다. 네가 말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고아원일 뿐이다. 부모가 없다. 넌 고아원 관리자일 뿐이다. 주일마다 커다란 젖병을 들고 교인들에게 입을 벌리라고 말할 뿐이다. 그것을 목양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후안 목사는 엎드려 하나님의 두우심을 구했습니다. 진정한 교회와 목회가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구했습니다. 그에게 주님이 보여주신 해결책은 ‘카리스마 소그룹’이었습니다.

 

칼 조지는 『성정하는 미래 교회, 메타 교회』(요단출판사)에서 메타 교회가 미래 교회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메타’(μετά)는 변화를 의미하는 말로 메타 교회는 소그룹(cell group)과 축제(celebration)를 미래 교회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메타 교회는 소그룹 모임이 사람 몸의 혈관처럼 교회 전체에 고루 퍼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 결과 목회의 사각지대(死角地帶)가 없는 살아있는 구조를 갖게 됩니다. 회중예배와 소그룹이 메타 교회의 기본 조직을 이루고, 교인들의 요구가 소그룹을 통해 충족되며, 교회의 모든 지체가 함께 일하는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서로 세우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느니라……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0, 4:16)

소그룹은 성경공부 모임이 아닙니다. 제자훈련반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도가 함께 삶을 나누는 ‘코이노니아’의 공동체입니다. 셀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성경공부와 예배가 아닙니다. 오직 설교와 삶을 나누는 초대교회 형태의 예배공동체입니다. 함께 찬양하고 한 주간의 삶을 나누고 지난 주 설교에서 깨달은 것과 결심한 것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중보한 후 다른 지체들을 심방하거나 교회 사역에 함께 봉사합니다. 이러한 소그룹이 곧 작은 교회입니다. 작은 교회는 계속 재생산해야 합니다. 작은 교회가 또 다른 작은 교회를 개척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합니다.

소그룹 모임을 통해 신자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섬김의 삶을 경험하게 되고, 새신자들은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며,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게 됩니다.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소그룹 중심으로 세워진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는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한 사람이 소그룹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몇 주 동안 모임에 참석한 그는 어느 날 모임 리더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리더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리더가 “누가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무도 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들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나도 어떻게 하면 당신들처럼 살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내게는 당신들에게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날 그 형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그룹 공동체가 가진 복음의 능력입니다.

영적 성장은 주님과 나의 일대일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지체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동안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공동 성장을 경험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ㄹ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막 4:26-29)

 

농부가 곡식과 열매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씨의 생명력이 성장을 가져옵니다. 씨 안에 생명력이 숨어 있습니다. 자고 깨는 중에 씨는 스스로 자라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그룹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말씀의 교제를 나누고 중보하고 불신자들을 소그룹에 초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동안 영적 성장이 나타나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로 성장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소그룹을 통해서 진정한 삶의 변화와 영적 성장을 경험하는 일에 일생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시고 본을 보여주신 대로 소그룹 안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생존의 길은 하나뿐입니다. 소그룹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된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1893년 엘리너 체스넛 박사는 사재를 털어 중국에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병원 문을 열기도 전에 급한 수술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체스넛 박사는 수술 장소가 없어서 자신의 욕실을 정리해서 수술을 했습니다. 중국인 최하층 노동자의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이었습니다. 다리를 절단한 후 복잡한 피부이식 수술이 이어졌습니다. 이식할 피부가 부족하자 체스넛 박사는 자신의 다리 피부 일부를 떼어 수술을 마무리 했습니다. 함께 왔던 중국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최하층 노동자에게 자신의 신체 일부를 나눠준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사는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인 들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후일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 많은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살해되었지만, 체스넛 박사는 그때도 남아서 중국인들을 위해서 계속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의 문을 여는 것도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영적 성장을 경험하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능력도 소그룹 안에서 나누고 실천하는 사랑이 가져온 생명력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소그룹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주는 생명력은 소그룹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소그룹이 교회입니다. 대형교회의 뒷좌석에서는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교회의 생명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소그룹으로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가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고 목양하고 돌보고 양육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갈 때 그리스도의 충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지 13)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성장의 원리

(2) 몸이 가지 않으면 머리가 갈 수 없다.

 

어느 유명한 화가가 ‘죽어가는 교회’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화가가 무너져 가는 초라한 예배당을 그릴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화가는 비싼 설교단에 장언한 모자이크 창문이 어우러진 웅장한 예배당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당 문 앞에 거미줄이 쳐진 헌금함을 그려 넣었습니다. 헌금함에는 ‘선교’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선교에 있습니다. 선교가 멈춘 교회는 죽은 교회일 뿐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와 신자들에게는 세계를 향한 주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커다란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은 땅 끝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헨리 마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선교의 영이시다. 그분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선교사가 될 수밖에 없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하나님의 외아들은 선교사요 의사였다. 나는 참으로 보잘것없지만 그분을 닮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헤럴드 러셀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선교사의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선교사이시다.”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교회에 맡겨진 사명은 선교입니다. 온 세상이 복음을 듣게 될 때, 그때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마 24:14). 주님의 최후 명령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라는 것이었습니다(마 28:19). 사업을 하던 공부를 하던 취업을 준비하던,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신자들의 ‘제자 삼는 사역’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선교의 과업이 완성될 때 주님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 영원한 나라를 시작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주님은 선교가 끝날 때 있을 영광스럽고 장엄한 광경을 우리 눈앞에 그려 주셨습니다. 모든 방언과 족속과 나라가 민족을 초월한 위대한 연합과 조화 가운데 하나님께 드려지는 하늘의 찬양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헌신된 복음 전도자들이 기꺼이 고통의 대가를 치르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줌으로써 복음은 계속 증거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힘든 헌신을 요구하셨지만 그들은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에이미 카마이클은 쉬지 않고 53년이나 사역했습니다. 다리가 부러지고 척추기 휘는 어려움을 겪었고, 1931년부터 1939년 사이에는 심한 부상을 입어 진통제 없이 잠들 수 있는 날이 겨우 8일밖에 없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캐리 역시 단 한 번도 안식년을 갖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들이 다섯 살에 죽고 아내가 정신 이상으로 죽었습니다. 재혼했지만 두 번째 부인도 잃고 말았습니다. 어렵게 인도어로 번역한 성경을 비롯한 다른 책들과 인쇄소가 불타버렸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나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해외에 나가 있는 최고의 미국인은 선교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해외 선교의 가치와 선교사들의 고귀함에 대해 이 나이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국 같은 곳에서의 선교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하다. 그들의 용기는 장렬하며 그들의 꿋꿋함은 영웅적이다.”

 

선교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계 인구의 절반이 아직까지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채 버려져 있습니다. 전 세계 1만2천 종족 가운데 절반이 미전도 종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복음화가 가장 안 된 5천여 종족이 10/40창에 밀집해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선교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몸된 교회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완전해지실 수 있습니다. 머리는 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습니다. 몸의 지체들이 머리의 명령에 따라야 머리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몸은 다른 지체 일부가 없어도 존재할 수는 있지만 머리가 없으면 죽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그분의 몸 된 교회가 없이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주셨는데, 교회가 땅 끝까지 가지 않는다면 주님은 땅 끝의 영혼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몸 된 교회의 제한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야합니다. 몸이 갈 때 머리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지 않으면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올라온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면서까지 조선 땅에 성경을 전하지 않았다면, 주께서 한국 땅에 부흥의 문을 여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열두 살이었던 최치량의 증언에 의하면,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당할 때까지 “예수!”라고 외치며 많은 성경을 뿌렸다고 합니다. 최치량은 토마스 선교사에게 받은 성경 세 권을 평양감영 경비였던 박영식에게 주었고, 박영식은 성경으로 자기 집 도배를 했습니다. 그 집이 나중에 평양 최초의 교회가 되었고, 널다리 교회, 장대재 교회, 장대현 교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마침내 평양 대부흥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토마스 목사를 통해 조선 땅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주님은 한국 교회를 위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가 가야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새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은 선교적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성도가 선교사이다

아시아 경영 문제 전문가인 유럽경영연구소의 헬무트 쉬테 교수는 아시아의 소비행태를 분석했습니다.

“서구 기업들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소비 행태를 갖고 있다는 가정 하에 아시아 시장에 접근한다. 그러나 서구와 다른 문화를 가진 아시아인들은 전혀 다른 소비 패턴을 보인다. 예를 들어, 루이비통 가방을 산다고 할 때 서구인들은 개인적으로 그 물건이 좋아서 사지만, 아시아인들은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을 목적으로 산다. 아시아인들이 값비싼 프랑스 코냑을 많이 마시는 것은 진짜 좋아서가 아니라 남의 눈을 의식해서다. 아시아인들의 소비 동기가 서구인들과 다르기 때문에 아시아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서구 시장과는 전혀 다른 전략을 세워야 한다. 유행과 과소비를 부추기는 것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아시아인들의 소비 동기는 영적 생활의 동기로도 작용합니다. 교회 성장도, 선교에 대한 참여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는 목적일 경우가 많다. 과시적, 과소비적 선교 행태는 한국 교회에 선교에 대한 숫자 숭배를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 6: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을 축복하는 복의 근원이자 축복의 통로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우상숭배의 더러운 피로 막혀 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민족 곧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교회는 모든 민족을 위한 축복의 통로여야 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도구여야 합니다(창 12:3-4).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교회의 재정도 그에 걸맞는 구조 조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되돌려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다시 돌려드리는 헌신이 참된 예배입니다. 선교와 사회봉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되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선교에 인색한 시대에는 부흥이 멈췄습니다.

 

선교학자 토렛 박사는 “선교의 문이 다시 열리려면 다시 부흥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한 시대에는 선교도 잠들어 있습니다. 다시 부흥의 불꽃이 타오를 때 선교에 대한 헌신과 갈망도 일어날 것입니다.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세계 인구의 2.5%가 되기까지 초대교회에서부터 1900년이 걸렸습니다. 그 숫자가 다시 두 배가 되기까지 70년이 더 걸렸습니다. 1970년부터 다시 두 배가 되는데 22년이 걸렸습니다. 1992년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세계인구의 10%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매일 26만 274명이 구원받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만 매일 1만5천 명이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1950년 대박해 이후 네팔의 그리스도인은 15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아시아 전문가들은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부흥은 “추수가 아니라 대수확”이라고 부릅니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엄청난 복음의 진보가 아시아 대륙을 휩쓸고 있습니다. 최근 CCC 영화팀과 CBN의 협력으로 중앙아메리카 전역에서 200만 명이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지구상에 남은 미전도 종족은 1만여 개입니다. 전 세계 교회는 약 560만 개입니다. 숫자로만 본다면 560개 교회가 1개의 미전도 종족에 선교사를 보내 교회를 개척한다면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우리 시대에 끝마칠 수도 있습니다. 560개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의 미전도 종족을 위해 집중적으로 중보하고 선교사를 보낸다면 주님의 재림은 빠르게 준비될 것입니다.

교회가 땅 끝까지 가지 않으면 주님이 땅 끝의 영혼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머리 되신 주님은 몸 된 교회의 제한을 받으십니다. 몸이 주님의 수단입니다. 그분의 사역과 활동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몸의 두 가지 원리에 따라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몸이 성장하지 않으면 개인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몸이 가지 않으면 머리가 갈 수 없습니다. 교회는 소그룹 공동체여야 하며, 선교 공동체여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선교사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두 계명에 순종하라

2002년 한국 사회의 화두(話頭)는 ‘느림의 미학’이었습니다. 2003년에는 ‘단순한의 철학’이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동문선)에서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투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또한 인생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때나 ‘공동체 미학’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과장과 위선을 버리고 솔직한 가슴으로 공동체에 들어가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지체의 삶’,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방식입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상은 지체의 삶입니다. 몸의 공동체는 주님께서 남겨 주신 두 가지 큰 명령을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첫째, 대계령(Great Command)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둘째, 대위임령(지상명령)(Great Commission)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주님의 이 두 가지 명령은 몸의 원리를 따른 것입니다. 몸의 두 원리와 주님의 두 명령이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교회는 두 가지 명령, 즉 두 가지 몸의 원리를 따라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원리에 따라 조직과 프로그램을 대폭 수정하고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몸 숭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건강이 주요 관심사로,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한 운동 중독증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사탄은 복음의 핵심 진리인 그리스도의 몸의 비밀을 빼내고 대신 거짓된 몸 숭배주의를 세상에 전파했습니다. 몸무게를 줄이는 것이 전 세계적 관심사가 되었고 거대한 산업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비즈니스화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세상으로 하여금 몸을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 사상을 자기 몸 숭배라는 이기적 탐욕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참된 몸의 진리를 망각하고 있는 동안 사탄이 그 진리를 강탈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복음의 진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징리를 세상에 증거해야 합니다. 세상이 몸을 숭배하고 몸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거대한 바벨탑을 쌓아가는 것보다 더 강한 열정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하나님이 만드신 신인류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포도나무인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려면 그분의 몸 된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몸 된 교회 공동체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멈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이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메시지 15)

 

빛의 자녀들처럼(답게) 행하라(5:8-20)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이 부도덕한 사람들의 악한 행위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에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8절이 γάρ로 시작됨). 그것은 우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요,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1. 너희가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다(8-9절)

이 문단에서 바울은 ‘어두움’(σκότος 스코토스)과 ‘빛’(φως 포오스)이라는 상징적인 용어를 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무지(無知), 거짓, 잘못, 죄, 악함 등을 상징하고 ‘빛’은 지식, 진실함(진리), 의로움, 선함 등을 상징합니다.

바울은 4:17-18에서 이방인의 삶에 대하여 ‘총명이 어두워졌다’는 말을 했었는데, 사실 그의 독자들도 이전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어두움’이었습니다(과거의 신분). 그러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즉 그들의 삶 자체가 빛으로 바뀌었습니다(현재의 신분과 위치). 이런 근본적인 변화는 ‘세상의 빛’(요 8:12) 되신 주님과 연합하게 됨으로써 ‘주 안에서’ 일어났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새로운 신분에 일치하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live as children of light). 빛 된 신분으로서 빛을 발해야하며, ‘낮에 거하는 자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빛이 된 사람에게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이지(理智), 지성, 이해의 차원입니다. 그가 전에는 가지고 있지 못하던 새로운 지식,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집니다. 영적인 진리를 통찰(洞察)하는 통찰력과 영적인 진리들을 이해하고 수용(受容)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고전 2:12-16). 그리고 자기가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영혼에 대하여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 안에 빛이 들어간 사람입니다. 또 죄의 진상에 대해 이해합니다. 또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며, 구원의 방식을 알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 안에서 빛이 된 사람은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마음으로 진정 거룩하게 되는 것을 소원하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습니다. 죄에서 온전하게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 안에서 빛이 된 사람은 새로운 의지를 가지게 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는 자연스런 존재가 됩니다. 그는 그가 마땅히 행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발동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열매 맺는 나무가 자라나서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는 모습에 흡사합니다. 열매는 갑자기 억지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임의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열매를 맺는 데는 언제나 성장과 발전의 시간이 필요하며, 그리하여 끝내 성숙하게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또 모든 열매는 그 성질은 동일하지만 언제나 개별적인 차이가 있습니다(다양성). 틀에다 찍어낸 대량생산품 같이 똑같지 아닙니다.

열매는 나무의 생명의 표현이므로 언제나 속에서 밖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영혼을 진정으로 가꾸고 경영한다면 열매는 자연히 나타나게 될 것이며, 바른 행실과, 행동, 소명 그 밖의 모든 것들이 그것에서 나올 것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선함”(all goodness)에 있습니다. “선하심”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이 오직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한 그는 선하고 그의 하는 일들도 선합니다. 선한 사람은 사랑과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하여 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합니다.

또 빛의 열매는 “의로움”에 있습니다. 의는 선함(착함)보다는 더 좁은 법적인 개념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자기 이웃의 소유나 권리를 탐하는 잘못을 범하지 아니합니다.

또 빛의 열매는 “진실함”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특징은 그 안에 속임이 없으며, 감추인 것이나 숨긴 것이나 정직하지 못한 것이나, 위선적이고 외식적(外飾的)인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열려 있고, 투명하며, 명료합니다.

2. 빛의 자녀들로서 합당하게 살기 위한 자세(10-14절)

먼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Find out what pleases the Lord). ‘시험한다’는 말 δοκιμαζω(도키마조)는 ‘시험한다’(test, examine), ‘분별한다’, ‘입증한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NIV는 find out으로 번역됨)

 

둘째로, 아직도 어두움 속에서 그릇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소극적으로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않는 것”(have nothing to do with the fruitless deeds of darkness)입니다. 빛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만, 어두움의 일은 열매가 없는 비생산적인 일 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일에 참예하지(끼어들지,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적극적으로는 책망하는 것입니다. ‘책망한다’(έλέγχω, 엘렝코)는 말은 ‘밝히 드러낸다(expose)’, ‘폭로한다’, ‘유죄를 입증한다’, ‘책망한다(reprove)’, ‘바로 잡는다(correct)’ 등의 뜻이 있지만, “증거를 방편으로 납득시킨다”는 의미가 적절합니다.

악한 행위는 밝히 드러내어져야 하며, 복음의 빛에 비취어야 합니다

이러한 악이 폭로되고 고발되고 드러내져야 할 이유(당위성)는 첫째로, 그들이 어두움 속에 숨어서 은밀하게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짓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그 실상과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곧 빛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그 빛을 받는 대상의 실체를 드러내서 심판하고, 정죄하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의 악하고 추한 모습을 보게 하여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예수를 믿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그리고 그 사람이 처하고 있는 전체상황에 복음의 빛을 던져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바른 방식으로 책망해야 합니다. 설교하기보다는 복음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더욱 아름답고 더욱 선하고, 더욱 즐거운 인생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넷째로, 잠자는 자를 깨워 일으키는 것입니다(14절). 14절은 사 60:1, 5:17, 52:1; 말4:2 등의 가르침을 요약한 구약 인용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롬 13:11/ 참조).

아담 안에 있는 우리의 이전 상태가 잠, 죽음, 어두움이라면,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 모든 것에서 구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회심(回心, conversion)이란 바로 잠에서 깨어나며,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며, 어두움에서 빛의 나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에 도구가 되어야하며 등불이 되어야 한다.

 

3. 지혜 있는 자 같이 세월을 아끼라(엡 5:15-17)

1)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

지혜(σοφία,소피아)란 인생과 우주에 관한 기본원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일상생활 가운데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상황에 적용하고 이용하는 능력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을 살펴봅시다.

어리석은 사람의 제일 되는 특징은, 일반적으로 그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언제나 욕망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또 어리석은 사람은 언제나 충동과 본능에 의하여 지배를 받아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열심에 의해 지배당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것만 생각하고 돌진하여 나갑니다. 또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의 문제를 놓고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지 아니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숙고하지 아니합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으며, 그가 행하는 일마다 다 하나의 조각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참을성이 없으며, 그는 기다리지 못하고 미친 듯이 돌진합니다. 언제나 균형을 잃고 있으며,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2)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은 잘 들어주는 사람이며, 자기가 모을 수 있는 여러 사실들을 다 모아보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급하게 돌진하지 아니하고 무던하게 인내하며, 모든 상황을 다 유념하여 보지 아니하고는 행동하지 아니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일에 철저하게, 전체성과 균형을 가지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근본적인 원리들에 연관시켜 객관적으로 시험하여 본 다음 결정을 내립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결정이 이루어졌으면, 그것을 열심히 실행에 옮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힘을 다하여 그 일을 추진해 나갑니다.

 

3)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에 대하여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는 전 우주와 역사 전체와 인생 전체에 대한 위대하고 영원하고 근본적인 원리들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새 생명이 있으며,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4) 이러한 지혜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가?

첫째, 신중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주의하여’(βλέπετε ἀκριβώς 블레페테 아크리보스)는 ‘주의 깊게 살펴보라’, ‘정확하게 식별하라’, ‘신중하게 시험하라’는 뜻입니다. 신중하게 행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본능이나 충동(衝動)이나 욕구나 광적열심(狂的熱心)으로 지배를 받는 사람과는 정반대가 되는 사람입니다. 신중하게 행한다는 것은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 새대(世代)의 날들이 악(惡)하다는 것을 알고 행합니다.

 

셋째로,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남아 있는 내 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주님의 뜻은 곧 “주님께 기쁘시게 할 것”(5:10, 롬 12:2)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가장 중요한 주님 의 뜻은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엡 1:4, 살전 4:3, 벧전 1:15-16).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따라(눅 19:10),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에 온 몸을 드리며, 주님의 지상명령(마 28:19-20)의 성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가 행해야 할,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의 우선 순위(優先順位)를 정해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 경건의 시간을 갖고 하루의 삶을 계획할 때, 이런 물음을 갖고 계획하십시오.

“오늘, 내가 해야 할,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생각한 그것을 먼저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바쁘게 살았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쁘게 살면서 무엇을 했는가를 보십니다.

 

4. 성령충만을 받으라(5:18)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life in the Spirit)"라는 근본 원리를 상기시키는 것으로부터 다루어 나갑니다. 그는 이제까지 역설(力說)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관(生活觀)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주로 옛 생명과 새 생명 사이의 차이(差異)를 소극적인 방식으로 지적해 왔으나 그는 이제 더욱 더 적극적인 말투로써 ”성령 안에서의 새 삶(new life in the Spirit)"을 묘사해 가고 있습니다.

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18절상)

“술 취한다”(μεθύσκεσθε οίνῳ, 메뒤스케스데 오이노오)는 말은 “술에 흠뻑 취한"(filled with wine) 것을 말합니다. 술은 우리 뇌(腦)의 고등중추기관(高等中樞器官)의 기능(이해력, 분석력, 판별력, 종합력, 조정력, 자율, 균형 등)을 억제(抑制)하고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요소를 풀어놓는 억제제(抑制劑)입니다.

“이는 방탕(放蕩)한 것이니”의 원문은 “그 속(술 취함)에서 방탕함이 나온다”는 말로서 “술 취하는 것이 곧 방탕으로 이끌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상의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사도가 제시(提示)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습은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제(自制)하는 생활이요, 질서(秩序)있는 생활이요, 규모(規模)있는 생활이란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낭비(浪費)하는 생활이 아니요, 생산적(生産的)인 생활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단순히 소극적(消極的)인 금지(禁止)의 삶이 아니라 고무적(鼓舞的)인 것이며, 힘을 북돋우어 주는 가슴 벅찬 것입니다.

넷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복(幸福)한 삶이요, 기쁨으로 충만(充滿)한 삶입니다(빌 4:4, 롬 5:2-3).

다섯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침울(沈鬱)한 삶이 아니고, 명랑(明朗)하고 자신감(自信感)에 넘치는 삶입니다.

 

2) 오직(오히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8절하)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나 “성령의 인침”과는 다른 것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경우에 쓰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로 하여금 특수한 임무(任務)를 수행하기 위해서 권능(權能)을 받는 것입니다(행 2:4, 4:8, 4:31, 13:9). 이것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체험(體驗)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영적 상태(狀態)와 조건(條件)에 대한 묘사(描寫)로 쓰인 것입니다(눅 4:1, 행 6:5, 11:24, 13:52).

엡 5:18의 성령 충만은 둘째 경우에 해당됩니다.

본문의 “충만을 받으라”의 원어 πληρούσθε(플레루우스데)의 시상(時狀, tense)은 현재형인데, 이것은 계속적(繼續的)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진정하게 번역하면 “계속 성령의 충만한 상태로 있으라”, 혹은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있으라”입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테이어(Thayer)의 헬라어 사전(Greek-English Lexicon)에는 “어떤 것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때 ‘충만하다’고 말한다”라고 정의(定義)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성삼위(聖三位) 하나님의 제 삼위이신 인격이시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전체 인격(人格)-지(知), 정(情), 의(意)가 성령의 감화(感化)와 영향(影響)과 인도(引導)와 지배(支配)를 받는 것, 즉 성령께서 우리를 조종(操縱)하고 통제(統制)하게 되는 것(be controlled by the Sprit)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다음 세 가지의 특징(特徵)이 현저(顯著)하게 나타난다.

첫째는, 성령의 열매(the fruit of Spirit)를 맺게 됩니다(갈 5:22-23).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한층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요 16:13-14. 골 3:15상).

셋째는,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고,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행 1:8, 4:31, 5:32).

 

3)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계속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 있으라”, “계속 성령의 통제를 받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命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에 계속 충만한 상태에 있으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 일들을 부정적(否定的)으로 묘사(描寫)한다면

첫째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엡 4:30, 갈 5:17). 성령은 비둘기와 같이 온유하시고 민감(敏感)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 극히 유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을 소멸(消滅)해서도 안 됩니다(살전 5:19). 내 속에서 나를 깨우치시고, 생각을 유발(誘發)하시고, 암시(暗示)해 주시는 성령의 인도를 거절하거나 성령이 시키지 않는 일을 고의적(故意的)으로 할 때마다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적극적(積極的)인 면으로 시선(視線)을 돌린다면,

첫째로, 영광스러운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늘 인식(認識)해야 합니다(요 14:16,17). 이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사모(思慕)하고, 그와 함께 교제하며 교통하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셋째로, 성령의 모든 지시하심에 극히 유의(留意)해야 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예민(銳敏)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의 모든 행동과 행위를 늘 말씀의 통제(統制) 아래 있게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성령에 대해서 무지(無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信賴)하지 못하는 불신앙(不信仰) 때문입니다.

셋째,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이고, 자기 노력적(努力的)인 교만(驕慢)한 마음 때문입니다.

넷째, 고백(告白)하지 않고 숨겨놓은 죄(罪)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성령 충만 받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엡 5:18)과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약속(요일 5:14-15)의 말씀을 믿고 성령 충만을 당당히 요청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심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4) 성령 충만의 결과 (5:19-20)

사도 바울은 술 취함의 결과가 방탕(ἀσωτία, 아소티아)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경우에 나타나는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경우에 나타나는 네 가지의 이로운 결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제 -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19절상)

여기서 ‘시’(ψαλμός, 팔모스)는 보통 구약의 시편을 가리키나, 성도들이 은혜 받은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 시, 송시(訟詩, psalm) 등을 말합니다. ‘찬미’(ὓμνος, 휨노스)는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서 지은 노래’(hymn, or song of praise)를 말합니다. ‘신령한 노래’(πνευματικός ῲδή, 프뉴마티코스 오-데-)는 ‘성령의 영감을 받은 노래’(spiritual song)를 말합니다.

‘서로 화답한다’(λαλούντες ἑαυτοίς, 라루운테스 헤아우토이스)는 말은 ‘서로에게 말한다’, ‘서로 이야기한다’, ‘서로 화답한다’(speak to one another)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모일 때면 언제나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 간에 노래를 교창(交唱) 했었습니다(참고/ Bithynia 지방의 총독 Pliny 가 Trajan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 AD 112년).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노래하는 시가 실제로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경배를 위해서 서로 간에 교제하며, 찬양을 위해서 서로 간에 권면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시편 95편입니다.

들째, 경배 -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며’(19절하)

‘노래한다’(ᾄδω, 아도)는 말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sing)을 말하며, ‘찬양한다’(ψάλλω, 팔로)는 말은 ‘악기(harp)를 곁들여 찬양하는 것(sing to the accompaniment of a harp, sing praise)을 말합니다.

“너희의 마음으로”는 찬양의 성실성을 뜻하는 “마음을 다하여”의 의미도 있지만, 찬양의 내면성(內面性) 즉 노래와 찬양을 입으로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in your heart),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미를 부르라는 뜻입니다(참고/ 고전 14:15하).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오며, 성령이 충만한 공중예배(公衆禮拜)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기쁨으로 찬양하기 마련입니다.

Armitage Robinson 감독은 ‘바울은 술로 인한 떠들썩함과, 신령한 노래로 인한 온전한 기쁨을 대조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기뻐하십니다(시 69:30-31).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속하신 목적인 것입니다(엡 1:6).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림이 마땅합니다(히 13:15).

셋째, 감사-‘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5:20)

‘감사하라’는 권고는 바울 서신에서 자주 나타닙니다(골 3:15-17, 살전 5:18). 불평하는 마음은 성령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신자는 불평이 아닌 감사로 충만케 됩니다. 본문에는 우리가 “범사에”, 즉 “항상”(πάντοτε 판토테, at all times)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ὑπέρ πάντων 휘페르 판톤, for all things)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절대적 의미에서의 범사에는 분명한 죄악까지도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일에서까지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악한 일 때문에 감사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의 고통에 우리가 제대로 처신하지 못하게 되며, 아울러 악을 소홀하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악을 조장(助長)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의 부성과 그가 우리에게 주신 자기 계시와 일치하는 한에서의 범사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넷째, 복종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21)

성령은 온유하고 겸손한 영으로서, 정말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언제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나타내는 법입니다. 피차에 복종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결론과 적용 : 이 네 가지는 자연인이나 육적인 그리스도인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찬송하는 그리스도인,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감사와 찬양은 사단을 이기는 확실한 승리의 방법인 것입니다. 찬송하면 기쁨이 솟아나고, 평안이 넘치고, 힘이 나며, 능력이 오고, 축복이 옵니다. 찬송하는 자의 마음은 강건해지며, 찬송하는 자는 일이 잘 되고, 찬송하는 자의 마음에는 유혹이 물러가고, 찬송하는 자의 가정에는 시험이 물러갑니다. 찬송하는 자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어지고, 하늘의 소망이 생기고, 갈 길이 환하게 열립니다.

 

 

(강의 18)

 

강의 18. 토의를 창조적으로 인도하는 요령

 

1. 토의 중 순장은 인도자로서의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도록 노력하라.

1) 토의 활동이 지속되도록 격려하고 인도하는 것.

2) 목표에 도달하게 유도하는 것.

3) 토의가 옆길로 빗나가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

4) 문제 상황을 처리하는 것.

5) 교안에 준비된 공과 내용을 마칠 수 있도록 하는 것.

6) 순의 의견을 요약 하는 것.

 

2. 순장은 모든 순원들이 자발적으로 토의에 참여하며, 공평하게 견해를 내놓을 수 있도록 각 순원들에게 기회를 주며, 각 순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노력하게 하라.

 

3. 순장은 성경 공부 각 단락의 토의를 시작하고, 유도하고, 요약한다.

1) 시작 단계 : 한 단락의 토의를 시작하게 함.

배를 진수(進水)할 때는 닻을 끌어올리고 바다 위로 미끄러져 들어가야 한다. 각 단락에 대한 토의의 시작 단계에서 순장이 하는 일이 바로 이와 같다.

주어진 단락의 토의를 시작하기 위하여 교안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관찰 질문을 던짐으로 순원들로 하여금 그들이 발견한 것들을 나누게 해야 한다.

예 : “여러분이 이 단락에서 ……에 대하여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그들이 자기 생각과 발견한 내용들을 나눌 때는 그것을 진정으로 존중하면서 인정해 주어야 한다.

2) 유도 단계 : 모든 순원들이 토의에 참여하도록 안내하고 유도하는 것.

유도 단계의 질문은 확대개방형 질문으로써 미리 작성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은 단순히 다른 순원들을 토의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예 : “다른 분들은 또 무엇을 찾아내셨습니까?‘

“또 덧붙이고 싶은 분은 안계십니까?”

“다른 분들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삽니까?”

이런 유도 질문은 토의를 더욱 활발하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교안에 미리 준비된 관찰(발견) 질문, 해석(이해) 질문, 상관(관련) 질문, 적용 질문들에 덧붙여서 사용해야 한다. 특별히 자기 의견을 나누기를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개별적으로 지적해서 유도 질문을 던져 보는 것도 좋다.

예 : “문호 형제, 이것에 몇 말씀 덧붙여 주시죠.”(다소 강제성을 띠는 식으로)

토의를 할 때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누가 발표를 하고 싶어 하는가를 알 수 있다.

 

3) 요약 단계 : 순에서 토의된 요점들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것.

(1) 순장은 한 단락의 토의 시간을 얼마로 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이 결정에 따라서 어떤 단락들은 빨리 진행시키는 반면 또 다른 단락(요점이 되는 중심 주제)은 좀 더 철저히 다루기도 한다.

(2) 다음 단락으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으면 방금 토의를 마친 단락의 요점만 언급하면서 빨리 요약하라. 요약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3) 순장은 자신의 관점보다는 토의 된 것을 가지고 요약을 해야 한다. 순장은 역시 참석자의 한 사람으로서 토의 중에 얼마든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요약을 할 때에는 설교 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것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

(4) 또 요약은 중요한 결론들을 강조해 줄 뿐만 아니라 전체적 복습이 되도록 해야 한다. 혹 의견의 일치를 잘 볼 수 없을 때는 관점만 요약해주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5) 한 단락의 요약이 끝나면 토의 교안으로 돌아와서 다음 단락의 토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때 “가교”(架橋)가 필요할 것이다.

(6) 한 문제를 가지고 토의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면 순장은 지혜롭게 “후에 더 연구해 봅시다”고 말한 후 일단 그 문제를 요약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

(7) 시간이 속히 지나가 버려서 교안에 있는 내용을 다 다루지 못한 채 끝내야만 한다면 나머지 문제는 전체윤곽만을 정리하고 끝내도록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장이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혹은 요약한 후에 각자 집에서 정리할 수 있도록 나마지 문제를 숙제로 제시할 수도 있다.

 

4. 성경 공부가 틀에 박혀서 지루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달라스 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의 제언)

토의(discussion) 이외에 버즈 그룹(buzz groups),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돌아가며 응답하기(circle response), 토론(debate), 역할 연기(role playing), 청취팀(listen teams), 배심 토의(panel), 공개 토론(forum), 심포지움(symposium) 등의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5. 성경의 사실이나 진리들을 생생하게 전해 주기 위하여 시청각적인 보조 자료들을 창의적으로 사용하라.

예를 들면, 성서지도, 실물, 모형, 그림, 사진, 신문, 만화, 삽화, 슬라이드, 녹음 테이프, 비디오테이프(CD, LCD), 파워포인트 등을 쓸 수 있다.

 

 

(강의 19)

 

강의 19. 순성경 공부반의 난점을 극복하는 방법

 

1. 난점을 극복하는 방법

1) 입이 무거운 순원들이 많을 때

문제점 : 입이 무거운 순원들이 많으면 토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걱정스럽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아주 잘 다룰 줄 아는 순장조차도 말이 적은 순원들 앞에서는 난감해지고 기가 죽는 때가 종종 있다.

해결책 :

(1) 만약 당신이 어떤 질문을 하고서 순원들의 반응이 없을 것 같으면 그 질문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한 번 더 질문을 하도록 하라.

(2)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답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중에 한 사람에게 지명 질문을 할 수 있다.

(3) 만약 문제가 단순히 딱딱한 분위기라면 한 두 순원에게 자기가 갖고 있는 성경 번역판은 어떻게 번역되어 있는지, 혹은 영어 등 외국어 성경은 어떻게 번역해 놓았는지 읽어보라고 할 수 있다.

(4) 설사 신경질이 나더라도 당황한 표정은 짓지 말아야 한다. 만약 순장이 당황해 하는 것을 순원들이 눈치 챈다면 순원들이 자연스럽게 토의할 여유가 더욱 없어지기 때문이다.

 

2) 말이 많은 순원이 있을 때

문제점 : 한 순원이 주제를 파악 못하고 혼자서만 떠들어 대면 다른 순원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들므로 토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성경 공부는 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룹 토의의 위험한 적이 된다.

해결책 :

(1) 만약 그 순원이 센스가 빠르다면, “연주 자매, 감사합니다. 아직 이야기 하지 않은 분들의 의견도 좀 들어 봅시다.”라고 말하면 눈치를 챌 것이다.

(2) 만약 좀 둔감하고 신경이 굵은 순원이라면 명확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해 주는 게 좋을 것이다.

“승호씨, 감사합니다. 승호씨가 생각하는 바는 이제 모두들 거의 확실히 이해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생각도 한 번 들어볼 기회를 가집시다.”

“승호씨, 얘기를 그만하시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를 줍시다. 한 마디도 못하신 분이 많은데……”

(3) 만약 이렇게 해도 먹혀들지 않는다면 모든 시간이 다 끝난 다음 개인적으로 “당신이 너무 많이 이야기하니까 다름 사람들은 아예 모든 문제를 당신이 해결하리라고 맡겨버리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든가, “당신이 너무 많이 이야기 하니까 다른 형제들이 별로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되어 불편해 보이더라” 고 말해주는 것이 좋다.

(4) 토의에 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그의 협조심을 불러일으키거나, 그로 하여금 당신을 도와 다른 사람들을 참여시키도록 하는 일을 하도록 이용해도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가 토의를 장악하려는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민감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5) 이 모두가 실패한다면, 그때는 얼마간 침묵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

 

3) 모든 것을 아는 척하는 박사님이 있을 때

문제점 : 말 많은 순원의 경우와 같이 이들도 문제꺼리이다. 다른 순원들에게 불쾌감을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순원들로 하여금 침묵을 지키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그룹 토의의 최대의 적이다.

해결책 :

(1) 만약 그가 하는 이야기가 도움이 된다면 때때로 들어 볼 필요가 있겠지만, 주제와 무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말해 줄 수 있다.

“호영씨, 그것은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니까, 다음 기회에 다뤄 봅시다.”라고 하든가 혹은 유우머를 섞어가면서 “호영씨, 그것은 박식한 이들에겐 멋진 말이겠지만, 우리 같은 단순한 대중들에겐 좀 더 쉽게 설명하는 게 좋습니다. 다른 분이 누가 이 구절을 설명해 주실까요?” 라고 말한다.

(2) 그래도 그가 자기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공부가 끝난 뒤 그것에 대해 직접 이야기해 줄 수밖에 없다. 문제를 엄격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사랑으로 다루어야 한다.

 

4) 토의가 주제에서 벗어날 때

문제점 : 토의가 일단 원 주제에서 벗어나면 들이키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토의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힘쓰라. 대개의 경우 곁가지를 치기를 좋아하는 순원이 있거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해서 곁길로 빠지거나 하지만, 진짜 곤혹스러운 경우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짜증이 날 정도의 자기 신상 문제나 개인적 관심문제에 집착하는 경우이다.

 

해결책 :

(1) 이런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각도에서 검토하여 결정을 내리고 즉시 처리해야 한다.

① 그 문제를 잠간 동안 다루고 원래의 게획대로 순서를 이끌어갈까?

② 원래의 프로그램을 취소하고 그 문제에 집중할까?

③ 계획대로 순서를 진행시키고 끝난 뒤 그 문제를 다룰까?

④ 무조건 계획된 프로그램만 진행시킬까?

(2) 이 결정은

① 문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 즉 그 문제가 제의한 사람과 특별히 가까운 몇 사람들만의 토의에 적합할까, 혹은 개인적으로 다뤄야 할까를 잘 결정해야 한다.

② 또 원래의 프로그램과 비교해 보아서 상대적으로 개인이나 그릅 전체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3) 잘 결정한 후에는 지체 말고 실행하라. 그래서 당신이 결정한 방법이 아닌 딴 방향으로 빠져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4) 단순히 말을 바꾸려고 곁가지를 치면, 즉시 바로잡아야 한다. 만약 주제에 대한 흥미가 조금 보이는 내용이라도 그것이 주어진 주제에 속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아, 영호시, 좋은 말씀인데 우리의 주제에서 좀 벗어났군요. 이 과 공부를 일단 끝내고 나서 다시 이야기 해 봅시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부드럽게 원 주제를 상기시켜 주고 계속 토의를 진행한다.

(5) 한창 재미있는 다른 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는 순원들을 설득하여 원 주제로 돌이키게 되면 당신은 재미없는 사람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므로 그 일을 할 때에는 부드럽고 정중하게 해야 한다.

(6) 때로는 원하는 사람들만 그것을 다 깊게 토의할 수 있도록 토의가 끝난 후로 연기시킬 것을 제안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5) 순원들이 성경 공부에 불성실 할 때

문제점 : 순모임에 가끔 불참하거나, 준비를 해오지 않거나, 과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는 순원이 있을 때.

해결책 :

(1) 이따금씩 공부에 불참하거나 준비와 과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원인이 있다.

① 성경 공부에 대한 의욕과 비전을 잃었을 때

② 개인적으로 큰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특별한 필요나 갈등이 있을 때

(2) 성경 공부에 대한 의욕이 식고 비전이 희미해졌을 때는, 처음 시작할 때 설정했던 목표와 수준을 상기시켜주면 비전이 새로워지고 공부에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동기를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 개인적인 특별한 필요나 갈등 때문에 성경 공부에 열의를 보이지 않을 때는 그와 일대일로 만나 대화를 나누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민감해야 한다.

 

6) 순모임이 무기력해졌을 때

(1) 일반적으로 순모임은 순장의 태도와 열성에 따라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열심히 하기를 바란다면 당신 자신이 두드러지게 열성적이어야 한다.

(2) 열성의 근원은 주님 자신과 그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헌신이다. 순장은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 확신을 실행해 보여야 한다. 당신 자신이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면 순원들에게 흥미를 기대할 수 없다.

(3) 순장 자신과 순원들에게 열성을 주시도록 기도하라.

 

7)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을 때

(1)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을 때 순장 혼자서 해결해 볼까 하고 고집부리지 말아야 한다.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해답을 모른다면 아는 체 하지를 말고 정직하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혹시 다른 분 중에서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갖고 게신지요?” 하고 물어 본다.

(2) 만약 그런 사람이 없으면 “다음 시간에 제가 잘 알아보아서 말씀드리기로 하죠” 라고 하든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조사해 보도록 하든가, 다음 기회에 전문가를 모시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3) 때로 그와 비슷한 유의 문제가 여럿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특별한 모임을 마련하는 것도 멋있는 방법이다.

(4) 당신이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 알려진다는 것은 유익될 점이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이 항상 해답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순모임은 토의 대신에 강의가 되어 버릴 것이다.

 

8) 언쟁이 일어나거나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때

(1) 솔직한 질문과 확신을 묻어두고 문제의 주변만 겉돌면서 피상적인 대답만 하는 것은 성경 공부를 비생산적인 것으로 만들기 쉽다. 그러므로 만약 논쟁이 일어나면, 한편 모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게 한 후, 주제에 접근 시키도록 하라.

(2)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를 다루는 최상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무어라 하는가를 알아보고 그 상황에 적용되는 성경의 원리와 명령들에 판단을 의존해야 한다.

(3) 만약 다른 순원들이 다음 기회로 미루기를 원한다면 논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을 권유해서 뒤로 미루도록 하라. 논쟁 때문에 모임 자체의 분위기가 깨어지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9) 말썽꾸러기가 있을 때

(1) 때때로 단순히 골칫거리를 만들기 위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젊은이들의 모임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때 순장은 단호하게 처리해야 한다.

(2) 만약, 순장이 같은 또래의 사람이라면 좀 더 어려운 일이 된다. 이런 말썽꾸러기는 여러 사람 앞에서 보다는 개인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

(3) 때로는 그에게 무슨 일을 맡김으로써 해결될 수도 있다. 가령, 녹음기를 조작하게 한다든지, 시각 교재를 다루도록 한다. 말썽꾸러기들은 다른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고 느끼면 즐거워서 골치 꺼리를 만들지 않는다.

(4) 이 모든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순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사랑의 대상으로만 대하고 순모임에서는 제외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최후의 방법이다.

(5) 특히 비성경적인 교리나 체험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다른 순원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순모임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도 제외시켜야 한다.

 

 

(강의 20)

 

강의 20. 순 성경공부 모임의 평가

 

1. 평가의 중요성

1) 성경 공부를 처음으로 인도해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소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결국 그는 모든 일이 자기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이런 일은 모든 사람, 심지어는 경험이 풍부한 순장(인도자)에게도 이따금씩 발생되는 일이다.

 

2)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매번 공부를 인도할 때마다 순장은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가는 성장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3) 이 일은 매 모임이 끝났을 때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객관적인 평가를 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4) 순장은 자신과 모임을 평가함으로써 목표의 성취여부를 분별하며, 순모임 안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성경 공부 토의의 기술을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의 모든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중요한다.

 

5) 이 일은 순장 자신이 혼자서 할 수도 있지만, 순원 중 참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순원(아마도 예비 순장)과 함께 할 수도 있으며, 토의 인도에 경험이 많은 친구나 지도자를 알고 있으면 가끔씩 당신이 인도하는 순 성경 공보 모임에 참관해 달라고 부탁해도 좋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해지는 당신의 지도력에 대한 그들의 관찰과 논평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평가의 절차

1) 하나님께서 개선되어야 할 점이나 변화되어야 할 점을 명백히 보여 주시도록 기도하라.

2) 평가의 일환으로 순 성경 공부 인도에 관한 이 지침을 자주 훑어보는 시간을 가지라.

3) 객관적인 목록을 이용해서 평가해 보라.

4) 제3자의 평가와 조언을 들어 보라.

 

3. 평가 목록표

평가의 주안점은 먼저 모임의 효율성에 대해서, 그 다음은 순장 자신의 효율성에 대해서, 그리고 순원들의 효율성에 대해서 , 마지막으로 모임의 영적 유익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1) 모임의 효율성에 대한 평가 목록표

① 모임은 정시에 시작하고 마쳤는가?

② 교재(자료)를 모두 충분히 다루었는가? 다 다루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③ 본문은 주의 깊게 관찰되고, 해석되고, 서로 연관지어졌고, 적용되었는가?

④ 공부는 기본적으로 건설적인 것이었는가? 그 이유는?

⑤ 토론은 절차에 따라 논리적으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무질서하게 방황하는 것처럼 보였는가?

⑥ 모든 순원들은 이제 본문의 중심 교훈을 파악했는가?

⑦ 적용은 공부한 내용과 일치했는가?

⑧ 서로 나누었던 적용은 구체적이며 실제적이었는가?

 

2) 순장 자신의 효율성에 대한 평가 목록표

가. 계획과 준비

① 스스로 적절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이 더 필요했는가?

② 교안을 충실히 따랐는가?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③ 앞으로의 계획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고 배운 것은 무엇인가?

 

나. 지도 요령

① 당신은 유쾌하며 다른 사람을 잘 격려했는가?

② 당신은 그룹을 이끌었는가, 이끌려갔는가?

③ 친절하며 재치가 있었는가?

④ 순원들의 말을 경청했는가?

⑤ 순원들의 필요에 민감했는가?

⑥ 공부 진행은 토의였는가, 대화였는가, 아니면 강의였는가?

⑦ 당신이 너무 말을 많이 하였는가, 혹은 너무 적게 하였는가?

⑧ 당신의 질문들은 토의를 활발하게 유도하였는가?

⑨ 당신은 주제의 각 영역에서 토의를 시작하고, 안내하고, 요약하였는가?

⑩ 순원들이 최선의 노력을 하도록 격려하였는가?

⑪ 순원들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도록 고취시켰는가?

⑫ 지엽적인 문제나 빗나간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했는가?

⑬ 당신의 생각을 순원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는가?

⑭ 토의는 발견된 진리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가?

⑮ 당신의 인도 방식 때문에 순원들이 성경 공부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⑯ 순원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자유로이 당신에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3) 순원들의 효율성에 대한 평가 목록표

가. 참여도

① 당신이 예상했던 사람은 모두 모임에 나왔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② 그들은 시간을 잘 지켰는가?

③ 성경 및 교재를 모두 가지고 왔는가?

④ 교재에 대해 개인적인 공부를 잘 해 왔는가?

⑤ 도든 순원들은 토의에 열심이었는가?

 

나. 모임 안에서의 대인 관계

① 순원들은 서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혹은 서로를 잘 알려고 하는가?

② 순원들은 서로의 말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있는가?

 

4) 모임의 영적 유익(결과)에 대한 평가 목록표

① 순원들은 어떤 새로운 사실을 배웠는가?

② 그들은 이전에 알고 있던 지식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얻었는가?

③ 그들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맡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가?

④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하기로 새로이 결심한 사람이 있는가?

⑤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복종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아는가?

⑥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뜻)에 맞도록 그들의 생각 중 어떤 것을 바꾸었는가?

⑦ 그들은 성경을 더 공부하려는 열망이 커졌는가?

⑧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는가?

 

 

 

출처 : 하얀세상의 블로그
글쓴이 : 하얀세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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