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속성
서춘웅 목사
하나님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속성은 신성의 구별되는 성품으로 하나님의 개념에서 구별될 수 없는 것이며 그의 피조물들에게 그의 다양한 명시를 위한 기초와 근거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그의 사역에서 구별된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께 어떤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속성들은 그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일반적으로 두개의 범주로 분류한다. 예를 들면 절대와 상대, 비공유적인 것과 공유적인 속성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본성과 인격의 이해를 돕는다.
I. 절대적 속성(비공유적 속성)
영성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체를 가지지 않으셨다(요 4:24). 몸은 장소에 제한적이나 하나님은 영으로 어디에나 계신다. 그는 제한되실 수 없으시다. 비록 하나님은 몸을 갖지 않으셨으나 그럼에도 실체이시나 물질이 아니시다. 영성은 단지 하나님이 몸을 갖지 않으셨다는 사실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심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20:4에 어떤 형성도 만들지 말라는 금제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이 육체를 갖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같은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은 잘못이다. 많은 성경의 언급이 하나님의 육체적 모습을 언급한다(참고, 창 3:8; 왕상 8:29; 시 34:15; 사 65:2). 그러나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의인화일 뿐이다(이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특성을 비유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자존
하나님의 자존(God Self-Exiisten)은 그의 존재의 근거가 그 자신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서 독립적이시다. 역시 그는 당신밖에 무엇에서도 독립적이시다. 예를 들면 그의 정체성에서 도덕성, 작정, 역사 그리고 자존하심이 모두 독자적이시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다. 요한복음 5:26 하나님은 그 자신안에 생명이 있으시다고 한다. 낳지 않은 아이는 ‘생명을 위해 어머니에게 의존되어 있다. 동물들은 생명을 위해 그들의 주변 환경에 의존되어 있다. 나무나 식물은 생명을 위해 태양과 비를 의존한다. 만물은 누구에게가 아니면 어떤 것에 의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립적이시며 자신안에 존재하신다(단 5:23; 행 17:28).
불변성
불변성은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서만 아니라 역시 그의 완전하심과 그의 목적과 약속에서 모두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이다. 그의 존재나 완전하심에서 더해지거나 줄어들거나 성장하거나 부패함에서 모두 자유하시다. 변화는 항상 더 좋게나 나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하시기 때문에 진보나 퇴보가 그에게는 불가능하다.
말라기 3:6절은 불변하심의 교리를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또 야고보서 1:17은 ‘그는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고 하였다. 세상은 해마다 변하나 하나님은 그의 목적에서나 그의 피조물에 대한 반응에서 변함이 없으시다.
이 교리는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 하나님이 안 변하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약속은 영원히 확실히 현존한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16의 약속을 결코 변경하지 않으신다.
단일성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사상
1.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하나이시다. 이스라엘은 주변국가의 다신론에 비해 유일신을 믿었다. 신명기 6:4이 그 대표적인 구절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라’. 이 언급은 유일신론에 대한 선언이다. 즉 하나님은 그의 본질에서 하나이시며 나누어지실 수가 없으심을 단언한다. 역시 그 말씀은 절대적으로 유일하시며 그와 비교할 자가 아무도 없음을 확언한다(참고, 출 15:11). 하나님이 수적으로 한 분이심을 언급하는 구절로는 디모데전서 2:5과 고린도전서 8:6이 있다.
2. 하나님의 단일성 합성체가 아니시며 부분으로 나누어지실 수 없으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내적이며 성질상의 단일성을 강조한다.
여호와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영광을 누구와도 나누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우상에게서 너희 자신을 지키라고 금하신다(요일 5:21).
진리
진리는 사실들이 실제라고 확인한다. 진리는 사물들이 그 것들이라고 인정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리는
1) 그가 다른 모든 것에서 구별되심으로 참 하나님이시오 그와 같은 분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사 44:8-10; 45:5).
2) 그는 그의 말씀에서 진리이시며 그의 계시는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민 23:19; 롬 3:3-4; 요 14:1, 2, 6; 히 6:18; 딛 1:2). 그는 믿을 수 있다.
3) 그는 사물들을 그 자체로 아신다. 그는 모든 지식의 시작이시며 인간이 그와 교제할 수 있도록 그 지식을 사람에게 이용할 수 있게 하신다. 그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진리이시다: 그는 모든 진리의 원천이시다.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서만 아니라 과학적인 시도의 모든 분야에서도 진리의 근원이시다.
사랑
요한일서 4:8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사랑을 10절에서 드러내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그로 인해 하나님이 영원하게 자신을 전달하시는 신성의 완전하심이다. 이는 단지 감정적인 충동이 아니라 이성적이며 자원하는 사랑으로 진리와 거룩에 근거가 있으며 자유로운 선택으로 역사하신다.
헬라어의 아가페(agape, 사랑)란 말이 자주 인간에 대한 하나님과 그의 반응을 묘사하는데 쓰였다(참고, 요 3:16; 5:42; 롬 5:5, 8; 8:35, 39; 요일 4:10, 11, 19; 계 1:5). 아가페 사랑은 감정에 근거한 사랑(배제하지 않지만)이 아니다. 이성에서 나온 사랑이다. 그 대상의 가치에 무관한 사랑이며 비록 답례가 없을지라도 하는 사랑이다.
선하심
히브리어 톱(Tob)은 하나님의 절대적 선하심을 표현한다. 랍비들은 그의 선하심으로 구성되신 하나님의 완전하게 선하신 존재를 고백한다. 헬라어에 아가소스(agathos)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절대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선하신 것을 가리킨다(참고, 마 19:17; 막 10:18; 눅 18:19).
하나님의 선하심은 광범위하며 몇 개의 양상을 포함한다. 그 하나는 자비심으로 이는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애정을 묘사한다. 자비는 생명이 없는 창조물에 보여진 것이 아니라 특별히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를 위한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보여진다(참고, 마 5:45; 행 14:17).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 대해 선하심이 풍성하시며(출 34:6) 그의 선하심은 동물을 향해서까지 증거가 있다(시 36:6; 104:21; 145:16; 마 6:26)
하나님의 선하심은 역시 사랑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사랑을 초월한 증거가 있다(시 27:10).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국가와 개인구원 모두에게 나타났다(렘 8:15; 14:11, 19; 17:6). 궁극적으로 사랑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가 그의 독생자를 받을 가치가 없는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을 때 명시되었다(요 3:16; 엡 3:18-19; 요일 4:10).
거룩함
거룩의 기본 의미는 따로 떼어놓다 혹은 분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그의 모든 피조물에서 구별되시며 무한하신 엄위로 그들을 초월해 계신다. 출애굽기 15:11은 여호와의 거룩하심에서와 기이한 일을 행하심에서 그와 비교할 자가 없다고 하였다. 이사야 57:15에서 그의 초월하심을 ‘그는 높고 거룩한 곳에 사시는 높고 높아지신 분으로 언급한다. 이 구절은 윤리적인 강조로 ’그는 도덕적 악이나 혹 죄에서 구별되심을 가리켰다. 이 강조의 기초는 레위기 11:44, 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순수하시기 때문에 그는 악을 행하실수 없으시며 악과 어떤 관계도 없다(시 11:4-6). 그의 거룩에서 하나님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표준이시다. 그는 율법이시다. 그는 기준을 세우신다.
II. 상대적인 속성
여기서 상대적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계 때문에 쓰이는 말이다.
영원성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과 관계로 이해된다. 그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시간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시간은 사건의 연속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일시적인 제한을 초월해 계신다. 그에게는 현재, 과거 그리고 장래 사이에 구분이 없다. 모든 일들이 그에게는 동등하며 항상 현재이다. 그의 영원성은 시편 90:2에 표현되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뒤로 영원에 미치며 앞으로도 영원에 미친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역시 그의 우주적 왕국에서 그의 영원한 통치와의 관계이다(시 102:12). 역시 하나님의 영원성은 그의 이름과 연관이 있다.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알려 주셨다.
무한성
하나님의 무한성은 모든 공간적 제한을 초월하시는 신적존재의 완전하심이다. 그러나 그의 전존재로서 공간의 모든 곳에 현존하신다. 열왕기상 8:27이 이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솔로몬은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에라도 수용할 수 없으신 분이시라고 하였다(참고, 사 66:1; 렘 23:23, 24; 행 7:48, 49).
인간의 몸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지만 하나님은 아니시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그의 영성과 연관이 있다고 볼수 있다. 하나님의 전존재는 모든 장소를 채운다.
편재하심
하나님의 편재성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만신론과는 다르다. 만신론은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곳에 편재해 계신다. 시편 139:7-12이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설명해 준다. 가장 높은 하늘에서 땅과 바다의 가장 깊은 곳 그 어느 곳에나 하나님은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를 피할 곳은 없다. 하나님은 그의 인격의 전체로 어디에나 현존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편재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그의 능력만 지상에 있다는 사상을 반대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은 무한성과 구별된다. 무한성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는 공간에 쌓이지 않으신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편재성은 그의 내재성, 지구를 포함해서 모든 공간을 채우시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편재하심은 신자에게 어떤 재난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한 두렵지 않으며 반대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피할수 없음을 깨닫게 해 준다.
전지하심
하나님의 전지는 하나님은 모든 지식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제있는 일, 가능성이 있는 일, 과거, 현재 그리고 장래의 모든 일을 하나의 영원한 행위안에서 다 아신다.
1. 하나님은 실제로 있는 모든 일들을 아신다(시 139:1-6; 147:4; 마 6:8; 10:28-30).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행동, 그의 사상, 그리고 그가 말하기 전에도 그의 말과 그의 전 생활을 아신다고 하였다(시 139:1-4).
2. 하나님은 발생하지 않은 일들에 관하여 변하기 쉬운 것 모두를 아신다.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이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면 어찌할 것까지도 아셨다(마 11:21).
3. 하나님은 장래의 모든 사건을 아신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의 영원한 행위에서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을 장래의 사건은 하나님께는 하나의 영원한 현재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배할 사람들을 아셨으며(단 2:36-43; 7:4-8), 지상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건들을 아시었다(마 24:25; 계 6-19장).
4. 하나님의 지식은 직관적이다. 그것은 직접적이지 감각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지 관찰이나 이성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하며 사실에 따른 것이다.
전능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무엇이나 하실수 있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무엇이나 하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뜻은 그의 본성과 인격으로 제한되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수 있으시지만 그의 완전하심에 조화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일이 가능하시다(마 19:26). 낳지 않은 아이를 지으시고(시 139:13-16) 하늘을 창조하신(렘 32:17)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수 있으시다. 그에게 어려운 일은 없다.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시 115:3). 그리고 그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작정하신다(엡 1:11).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그의 본성에 조화되지 않는 일은 하실 수 없으시다. 그는 자기를 부인할수 없으시며(딤후 2:13) 그는 거짓말을 하실수 없으시다(히 6:18). 그는 죄에 관여되실수 없으시다(창 1:13; 약 1:13).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하실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전능의 교리는 신자를 위해 큰 위로의 원천이 된다(참고, 창 18:14; 벧전 1:5).
진리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그의 인격과 말씀과 계시는 완전히 믿을수 있다.
1. 하나님은 그의 인격에서 진리이시다. 그는 완전하게 하나님으로서 완전하시다. 그는 비교할 자가 없으시다(사 45:5).
2. 하나님은 그의 계시에서 진리이시다(시 110:5; 벧전 1:25: 마 5:18). 이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간에 대한 계시에서 완전히 진리이심을 의미한다. 그는 믿을 수 있으시다. 죽을 인간같지 않으시어 거짓말을 하실수 없으시다(딛 1:2; 히 6:18). 그는 진리를 말씀하시며 그가 약속하신 것 진리라고 하셨다(요 14:6). 그의 말씀은 믿을 수 있나 그의 제자들은 그를 신뢰할 수 있었다.
자비
자비는 비참함이나 이 고난중에 있는 자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사랑을 말한다. 구약에서 히브리어에 케세드(chesed)는 우월한 자의 은혜로 도움이나 친절을 강조한다. 인간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자비, 동정 그리고 사랑을 강조한다. 신약성경의 헬라어 에레오스 역시 자비와 동동의 사상을 포함하는데 일반적으로 인내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의 자비는 사람의 영원한 구원처럼(롬 9:23; 엡 2:4; 딛 3:5; 벧전 1:3; 사 55:7) 일시적인 필요를 추구한다(룻 1:8; 히 4:16). 그러나 신약에서는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의 자비는 이스라엘에게처럼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롬 11:30-32; 15:9). 그의 자비는 의무에서 자유하며 그의 주권적 선택에 따라 주어진다(롬 9:15-16, 18). 구약성경 특별히 시편에서 반영된 바 진리는 하나님은 자비가 풍성하시다는 것이다(참고, 5:7; 6:4; 13:5; 17:7; 18:50; 21:7; 23:6인데 자비란 말은 자주 인애로 번역되었다).
은혜
은혜는 정죄 아래 있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호의를 가리킨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중요한 말은 케세드(Chesed)이다. 이 말은 원수나 고통 혹은 역경에서 구원되는 것을 가리켰다(시 6:4; 31:7, 16; 47:3; 69:13-16). 또 능력을 주시며(시 85:7) 매일의 인도(시 143:8), 용서(미 14:19; 시 51:1), 보존(시 23:6; 33:18; 42:8; 94:8; 119:75, 76)을 가리켰다.
신약에서 카리스(Charis)는 특별히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에 대한 예비하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예비하심에서 반영되었다(롬 3:24; 엡 1:7; 2:8).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를 가져 오시며(요 1:4; 롬 1:5) 그리스도의 은혜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앞에서는 지위를 얻게 한다(롬 5:17). 그 은혜는 아담의 죄를 능가하며(롬 5:15-20) 모든 신자에게 영적 은사를 분배해 주며(롬 12:6; 엡 4:7)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똑같이 은혜를 통해 용납된다(엡 2:2).
진리
하나님의 공의는 온전히 옳으며 그의 인간을 취급하시는 모든 경우에서 공정하시다. 더구나 이 공의로운 행위는 그의 율법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죄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기준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의 계시된 율법에서 그를 모독한 사람을 재판하실 때 의로우시고 공정하시다.
하나님의 공의는 종종 몇 개의 범주들로 나뉜다. 하나님의 교사적 정의는 하나님을 세상에서 그의 도덕법을 부과하심에서 도덕적 지배자로서 순종하는 자에게는 상급을 주시며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심판하시는 분으로 인식한다(시 99:4; 롬 1:32).
하나님의 분배적 공의는 상급과 심판의 용어에서 율법의 집행과 관계가 있다(사 3:10, 11; 롬 2:6; 벧전 1:17) 분배적 공의는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이다. 긍정적인 면에서 그것은 순종하는 자에게 상급을 주시는(신 7:9; 시 38:11; 롬 2:7) 보상적 공의에 대한 용어다(하나님의 사랑의 반영). 부정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분배적 공의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벌하시는 신적 진노의 표현인 형벌의 공의에 대한 용어이다(창 2:17; 신 27:26; 갈 3:10; 롬 6:23). 하나님은 옳으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악을 행한 자의 심판은 사람은 죄 때문에 그에게 합당한 형벌만 받는 것이므로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Elohim)
엘로힘은 구약성경에서 2,000회 이상 복수형으로 쓰였으며 평상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일반적인 이름의 장엄 복수로 불렸다. 엘로힘은 아마도 강하게 된다는 의미의 어원을 가졌을 것이다(참고, 창 17:1; 28:3; 35:11; 수 3:10). 혹은 뛰어나게 된다는 의미의 어원이었을 것이다. 그 말은 일반적으로 영어의 번역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엘로힘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자 위에 계신다. 어떤 이들은 엘로힘에서 엘(EL)과 엘로힘 사이에 관계는 단지 EL의 복수형으로 이해한다. 그 말은 서로 교체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참고, 출 34:14; 시 18:31; 신 32:17, 21). 어떤 구절들 즉 이사야 31:3에서 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구별됨을 묘사하였다. 따라서 엘은 하나님의 능력과 강함 그리고 인간 원수가 방어할 수 없음을 묘사하고 있다(참고, 호 11:9).
아도나이(Adonai)
아도나이의 어근은 주 혹은 주님이란 의미인데 일반적으로 영어 성경에서 주(Lord)로 번역하였다. 아도나이는 구약성경에서 449회 나오며 그 중에 315회는 야웨와 함께 나온다. 아돈(Adhon)은 종과 주인의 관계를 강조한다(참고, 창 24:9) 따라서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암시한다. 하나님은 그의 통치에서 주권적이시며 절대적 권위를 가지셨다(참고, 시 8:1; 호 12:14). 아도나이는 아마도 모두의 주 혹은 아주 뛰어나신 주란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참고, 신 10:17; 수 3:11) 역시 아도니아는 개인적 이름으로 나의 주님이란 의미를 지닐 것이다.
야웨(Yahweh)
야웨란 일름은 히브리어 네자로 표현된 YHWH의 번역이다. 그 이름은 원래 자음이 없이 기록되었으므로 그것이 어떻게 발음이 되어야 하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미국 표준번역 성경은 그것을 ‘여호와’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가장 현대 번역은 그 말을 주(LORD)로 번역하였다(그것을 아도나이의 ‘주 Lord'에서 구별하여). 유대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 말을 언약적 이름의 거룩을 존중하여 실제로 야웨로 발음하는 대신에 ’아도나이‘로 발음한다.
이 공통된 명칭은(구약에서 6,828회 나옴) 동사 존재한다(to be)와 관계가 있다. 출애굽기 3:14-15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이것이 나의 영원한 이름이라’ 하셨다. 이는 나는 이다 라는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주장으로 특별히 중요했다(참고, 요 6:35; 8:12; 10:9, 11; 11:25; 14:6; 15:1). 예수님의 언급은 야웨와 동등하심을 주장한 것이다. 야웨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그의 백성과 그의 개인적 관계에서 동일시하셨으며 그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인식함으로 아브라함이 반응했던 이름이다. 이 이름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예속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셨으며 그들을 구속하셨다(출 6:6; 20:2). 그런데 엘로힘과 아도나이는 다른 문화에 알려진 명칭이었다. 야웨의 계시는 이스라엘에게 유일했다.
복합적인 이름들
엘이나 야웨의 이름을 포함한 하나님의 이름의 복합형태들이 있다.
엘샤다이(El Shaddai)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산이란 말과 연관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나 강함을 암시하였다. 이 이름의 하나님은 역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나온다(창 17:1; 참고, 1-8절, 거기서 언약이 재개되었음).
엘 엘룐(El Elyon)
이 이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번역되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대권을 강조하였다. 그는 소위 신으로 불리는 모든 신들 위에 계신다(참고, 창 14:18-22). 멜기세덱은 그를 하늘과 땅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인식하였다(창 14:19). 엘오람(El Olam)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특성을 강조한다(창 21:33; 사 40:28). 그밖에 다른 이름들이 있는데 이런 이름들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여호와이레는 ‘하나님이 예비하시리라’는 뜻이며(창 22:14) 여호와닛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깃발’이란 뜻이며(출 17:15) 야웨 샬롬은 ‘하나님은 평화’시라는 뜻이고(삿 6:24) 야웨 사바옷은 ‘만군의 하나님’ 이란 뜻이며(삼상 1:3) 야웨 마카데쉬켐(Yahweh-maccaddeshcem)은 ‘하나님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란 뜻이며(출 31:13), 야웨 시디케누(Yahweh-Tsidkenu)는 ‘하나님은 우리의 공의’란 뜻이다(렘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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