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에서 식사가 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 지를 살펴보았다. 식사가 이렇게 중요하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어디에서 그와 같은 복된 체험을 할 수 있을까?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찬보다 더 확실히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성찬을 통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오늘날에도 하늘의 만나로 먹이시기 때문이다.
1. 주님께서 베푸신 식사 The Lord’s Supper
우선 성찬이라는 말부터 살펴보자. 우리말로 성찬은 ‘거룩한 식사’를 의미한다. 성찬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렇다! 성찬의 본질은 식사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이기도 하다. 영어로 보면 식사로서의 성찬이 더욱 분명해진다. 성찬을 지칭하는 문구는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다. 즉 왕이신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식사가 바로 성찬이다. 만약 성찬의 본질을 식사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무엇인가를 먹었다는 생각을 하여야 하고 배부름을 느껴야 한다.
신자라면 누구나 애송하는 시편23편은 왕이 베푸신 식사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 시편의 전반부는 하나님을 목자로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목자처럼 자기 양들을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그들을 지키신다. 그러나 시편 후반부에 가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은 일반적인 목자가 하지 않는 일을 하심을 노래한다. 이 점을 주목해보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원수들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어서 자신의 백성을 영화롭게 하신다. 보통의 목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편23편은 단순한 목자가 아니라 왕이신 목자를 노래하고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한 자ㅣ 신하들에게 상을 베푸시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신다. 성찬이 주님께서 베푸신 식사라고 했을 때 시편 23편 마지막 부분이야말로 주의 만찬으로서의 성찬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성찬의 본질을 식사로 이해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이 가져다 준 큰 선물이다. 종교개혁 이전, 거짓교회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찬을 미사라고 부르면서 성찬의 본질을 희생제사로 이해하였다. 미사에서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님의 살로 피로 이해되었다. 떡이 떼어질 때 예수님이 살이 찢어지고 포도주가 부어질 때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다고 믿었다. 결국 십자가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오늘날 똑같이 재현된다고 이해하였다. 주 제사의 차이는 단지 양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사를 ‘피 있는 제사’(bloody sacrifice)라고 하고, 미사를 ‘피 없는 제사’(un-bloody sacrifice)라고 부른다.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 번에 유일한 제사를 드렸지만 그 제사를 오늘날에도 드려야만 죄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비록 말은 그럴듯하지만 그들은 성찬의 본질을 희생제사로 이해함으로 에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현저히 욕보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성찬의 본질을 식사로 보았기 때문에 그 본질을 희생제사로 본 로마 가톨릭 교회와 우리는 근본적으로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희생제사는 주님께 우리가 무엇인가를 드리는 것이다. 반대로 식사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죄사함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뭔가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 감사의 찬송을 부를 뿐이다. 성찬도 어떤 의미에서 제사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제사는 희상 제사가 아니라 감사제이다.
성찬의 본질을 식사로 본다면 성찬식의 분위기는 지금과 현저히 달라져야 한다. 식사는 근본적으로 기쁘고 복된 시간이다. 따라서 흐느껴 우는 것은 성찬식과 어울릴지 않는다. 물론 진정한 감사의 마음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겠지만 그 눈물 역시 기쁨의 눈물이어야 한다. 성찬식은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다. 성찬식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적인 음식을 나누어 주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러야 할 찬송은 “얼마나 아프실까?”가 아니라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찬은 하늘에서 내리는 새 양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2. 성도의 교제 Communio sanctorum
우리는 매 주 사도신경을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한다. 찬송가에 실린 대부분의 사도신경이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각각의 고백으로 제대로 삼등분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빈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결과 사도신경은 신자들에게 하나의 주문처럼 뵈어 버렸다. 사도신경의 각 항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고 고백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하여 사도신경에서 주목하고 싶은 항목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일반 사람들에게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한글의 사도신경은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하나로 이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문구는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같이 쉼표로 구분해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래야 “성도의 교통”은 거룩한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임을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교통’이라는 말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교통’보다 더 쉬운 표현은 ‘교제’라고 할 수 있는 데, 문제는 교제라는 말이 너무 빈약하다는데 있다. 보통 교제라고 하면 친목, 혹은 친교의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성도들끼리 교제를 좀 잘 합시다”라는 말은 서로 만나서 이야기도 잘 하고, 친근하게 지내고 서로 잘 어울리자는 의미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좀 더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자주 만나서 서로 기도제목을 나누고 신앙적인 권면을 하면, 이를 교제라고 한다. 물론 이것들이 성도의 교제에 필요 없지는 않다 해도 성도의 교제의 본질적인 측면은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교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약간의 전문적인 용어를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사도신경은 원래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성도의 교제에 해당되는 원래의 문구는 ‘코뮤니오 상크토룸’Communio sanctorum 이라는 두 단어로 되어 있다. 전자는 ‘서로가 하나 되어 나누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거룩한 것’ 혹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전자를 ‘거룩한 자들의 하나됨’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거룩한 것들에 참여함’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물론 이 둘은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거룩한 자들이 거룩한 것을 통하여 하나됨을 누리는 것이 성도의 교제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것이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성례이다 로마교회와는 달리 우리는 주님께서 정하신 서례와 성만찬을 성례로 인정한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그리고 하나가 된 성도들은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하나됨을 누린다. 이 하나됨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친밀한 교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성경의 예를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베드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은 자가 무려 3000명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 누가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행2:42) 여기서 교제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잘 알려진 ‘코이노니아’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떡을 떼는 것과 교제하는 것이 밀접하게 병행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는 성찬을 제외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교제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지만 제대로 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지 않고 어떻게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겠는가?
식사는 교제를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언제 같이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밥만 한 번 먹자는 뜻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그들과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도 바리새인에게 종종 ‘죄인과 세리와 같이 먹는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 말은 예수님이 죄인과 같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교회는 주님이 차려주신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한 식구이다. 이 점에서 교회는 ‘식사 공동체’ 혹은 ‘밥상 공동체’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강조하고 싶다. 이 성도의 교제는 사도신경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영으로 존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바람’혹은 ‘숨’을 뜻하는 영으로서 성령은 신자들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역할을 한다. 거룩한 분으로서 성령은 거룩한 공교회를 세워 가시고 거룩한 무리들인 성도들을 그 교회에서 교제하게 하시고 거룩한 무리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내리신다. 이와 같은 틀에서 성찬을 이해한다면 주님께서 베푸시는 성찬 속에서 성령께서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하시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사역에 대한 언급없이 성령을 논하면 모두 피상적이고 주변적인 논의가 되고 만다.
3. 언약적 식사
성찬은 기본적으로 언약적 식사이다. 예수님이 포도주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바로 “언야긔 피”라고 말씀하심으로 성찬이 언약적 식사임을 분명히 하셨다. 성찬이 언약적 식사라는 말은 이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제한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 즉 언약 안에 있는 사람만이 이 식사에 참여할 수가 있다. 예수님이 성찬을 제정하셨다는 것은 이 점에서 의미가 있다. 비록 예수님은 죄인들과 식사를 하기도 하였지만 최후의 만찬은 사도들에게 한정되었다.
우리도 아무나 같이 식사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들을 자기 집으로 들어오게 해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 설사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로 구제의 차원에서 하지, 참된 교제의 차원에서 하지는 않는다. 성찬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들어와서 예배에 참석했다고 해서 아무나 성찬에 참석할 수는 없다. 이것이 설교와 성찬의 중요한 차이 중의 하나이다. 설교는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면 성찬은 자신의 신앙을 공동체에서 고백을 하고 그 고백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고 그 교회의 회원이 된 사람에게 한정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세례와 성찬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별도의 좌석에서 예배를 드렸고 이들에게는 떡과 포도주가 배분되지 않았다. 초대교회부터 세례교육은 기본적으로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교육이었다. 세례를 통해서 불신자와 구분되는 언약 백성이 되는데 이 언약 백성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바로 성찬이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세례 교육은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기초적인 교육(제자훈련이라는 이름 하에)은 이루어지지만 가장 중요한 성찬에 대한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배 시간 때문에 세례와 성찬이 따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세례를 받아도 성찬을 통해서 그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체험 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세례와 성찬 모두가 부실해지고 교회의 진정한 교제가 부실해진다. 비록 교회 안에 교제가 있다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 교제가 아니라 인간적 교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비록 성찬이 언약적 식사이긴 하지만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이 식사의 영적 유익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다르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성찬에서 축성된 떡과 포도주 자체가 예수님의 실제 살과 피가 되기 때문에 떡을 먹고 마시는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 가톨릭 신학자들 중에는 성찬에서 사용된 떡 부스러기를 쥐가 받아먹었을 때 어떤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떡과 포도주는 은혜의 수단이지 은혜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자동적으로 은혜를 받지는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 떡과 포도주를 받는 사람만이 그 유익을 받을 수 있다.
식사는 기본적으로 주린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복이라고 할 수 있다. 배가 잔뜩 부른 사람에게 식사는 복이 아니라 고문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가난한 자, 주리고 목마른 자, 핍박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우리가 진정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고 배가 고픈 자이고 목마른 자임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양식을 바라보며 주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이 복을 받을 수 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아무런 유익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돌아보아 자신의 가난과 비참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4. 잔치로서의 성찬
성찬이 식사라고 하지만 식사에도 여러 종류의 식사가 있다. 가볍게 먹는 식사가 있고 간식도 있고, 푸짐하게 먹는 만찬도 있다. 만찬 중에서도 가장 근사한 식사는 잔치에서 제공되는 식사이다. 어떻게 보면 성찬은 아침식사와 같이 간단한 식사처럼 보인다. 식탁에는 빵과 포도주만 있을 뿐이다. 굉장히 빈약한 식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성찬은 아침 식사와 같이 간단한 식사가 아님을 유추할 수 있다. 바로 포도주 때문이다. 빵은 매일 먹는 일용할 양식이지만 포도주는 일상적으로 먹는 음료수가 아니다. 따라서 성찬은 특별한 식사, 즉 잔치이다.
성찬이 하나의 잔치라면 성찬은 기쁨의 식사이다. 성찬식 때 우리는 서로가 함께 기쁨을 나눈다. 잔치에서 나누는 기쁨은 잔치에 참여한 사람의 기쁨의 아니다. 그 기쁨은 근본적으로 잔치를 베푼 사람의 기쁨이다. 왜 사람들이 잔치를 베푸는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기 위해서이다. 잔치로서의 성찬도 마찬가지이다. 이 잔치는 주님께서 베푸신 잔치이기 때문에 그 잔치 속에서 주님이 나누고 싶은 기쁨을 다 같이 누려야 한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가 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모두 누가복음 15장에 나온다. 여기에는 목자, 여인, 아버지가 등장한다. 목자는 백 마리의 양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는다. 여인은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는다. 여인은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하나를 찾는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두 아들 중에 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는다. 교회를 좀 다닌 사람이라면 다들 잘 알고 잇는 내용이다. 그런데 잘 주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 세 주인공은 모두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나서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베풀고 다른 사람들이 그 기쁨에 참여하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성찬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자들을 보혈 값으로 지불하고 되찾았는데, 그 기쁨이 너무 커서 자신만이 간직할 수 없어 잔치를 베풀고 그 기쁨을 우리와 나누기를 원하신다. 성찬은 바로 주님 자신의 기쁨을 나누는 기쁨의 잔치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잔치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돌잔치도 있고, 회갑잔치도 있다. 그러나 가장 기쁜 잔치는 혼인 잔치일 것이다. 성찬식이 바로 혼인 잔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신부로 삼으셨다. 성찬은 바로 신랑인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함께 기쁨을 나누는 잔치이다. 이 잔치를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외친다. 성찬은 바로 마지막 날에 있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현재 미리 맛보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은 가장 생생한 종말론적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결혼식 잔치 중에서도 가장 성대한 잔치는 왕의 아들의 결혼식이다. 2011년 4월 영국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했는지를 우리는 보았다. ...
우리는 성찬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베푸신 결혼 잔치가 바로 성찬이다. 이 결혼식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이 왕자의 혼인 잔치를 거절하고 무시하는 자들은 왕을 반역하는 자들이다. 왕이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진노를 쏟으시고 그들을 멸하실 것이다. 반대로 이 혼인식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 나라의 영광을 기원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된다.
요 즘 예배 갱신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전통적인 예배 순서가 경직되고 딱딱하다고 공격하면서 축제로서의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간단히 말해서 예배는 기쁘고 즐거워야만 한다는 말이다. 아주 지당한 말이다. 문제는 그 기쁨이 과연 어떤 기쁨, 더 나아가 누구의 기쁨이냐에 있다. 예배에서 누리는 기쁨은 주님의 기쁨이어야 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어야 한다.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음악뿐만이 아니라 음식(떡)과 술(포도주)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성찬을 고려하지 않는 예배 갱신에 대한 논의는 변죽만 울릴 뿐이다. 정말로 기쁨의 축제로서 예배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모든 논의는 왕의 아들인 혼인 잔치인 성찬에서 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5. 화목으로서의 식사
성경에서 식사는 화목의 상징으로서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성찬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상에 참여할 자격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성찬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과분한 은혜임을 쉽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
주께서 베푸신 식사인 성찬이야말로 죄로 인하여 그분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어떻게 화목하 게 되었으며 그분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를 가시적으로 증거 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이 되어 자녀가 갖는 모든 특권을 모두 누리게 되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여 그분이 베푼 식사를 함께 즐김으로 그분의 약속이 단지 빈말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다.
성찬이 그리스도께서 원수였던 자들을 향한 화목의 선물이라면, 이 선물은 점차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먼저 신자들은 자신들의 형제들에 대한 미움, 시기, 질투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서로 한 상에서 함께 음식을 즐길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서 우리의 식사는 세상을 지향해야 한다. 이 잔치는 우리끼리만 즐기라고 허락하시지는 않았다. 주님은 세상에서 자신의 택하신 백성들이 이 자리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이 기쁜 잔치의 복된 소식을 세상에 전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이 자리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 일은 이미 성찬에 참여하여 화목의 기쁨을 누린 이들만이 할 수 있다.
'성찬', 이성호, 그라티아, 2012.02.01, p.38-5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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