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 성찬 세례

성만찬 예배회복의 필요성

하나님아들 2018. 10. 16. 18:29

성만찬 예배회복의 필요성

조 동호목사


들어가는 말

성만찬이 없는 예배는 불구의 예배요, 불완전한 예배이다.(2 기독교 예배에서 성만찬을 제외시키고 나면 유대교의 회당예배로 전락되면서 기독교 예배의 특성은 상실되고 만다.(3 기독교 예배가 마치 설교 중심의 예배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된다. 말씀의 선포가 은혜를 체험하는 유일한 길처럼 생각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설교 중심의 예배에는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목사의 풍성한 말만으로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인 육화(肉化)의 길을 체험할 수 없다.

예배에서의 설교와 성만찬은 상호 보완의 관계이다. 설교는 영적이고, 성만찬은 육적이다. 따라서 설교와 성만찬의 관계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신비의 조화이다. 설교와 성만찬의 관계는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는 관계, 곧 약속과 성취의 관계이다. 설교가 말로써 이루어진다면, 성만찬은 행동으로써 이루어진다. 설교가 청각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면, 성만찬은 미각과 시각과 후각과 촉각을 통해서 인간의 심성에 호소한다. 설교가 세상을 준비시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면, 성만찬은 교회를 준비시켜 세상에 봉사하게 한다.

기독교 예배는 이스라엘 민중이 가졌던 두 가지 형태의 예배, 곧 회당의 말씀의 예배와 성전의 제사예배가 통합된 형태가 기독교의 예배였다. 또한 기독교 예배는 예수의 전 생애, 즉 가장 위대한 예배의 삶이었던 갈릴리 사역과 예루살렘 사역에 대한 재현이다.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사역이 말씀의 예전으로 표현되고, 예수의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이 성만찬 예전으로 표현된다. 마르틴 캘러(Martin Kähler)가 복음서를 "긴 서론을 가진 수난사"(4라고 지적한 것처럼 예수의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다.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은 갈릴리 사역이 선행될 때에 비로소 의미가 살아나며, 갈릴리 사역은 예루살렘 사역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의미가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어떻게 연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기독교 예배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5

그러므로, 설교나 성만찬이 없는 예배는 불구의 예배요, 불완전한 예배이다. 성만찬은 설교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고, 설교는 성만찬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 이 둘이 합하여 신앙인의 지성과 정서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6 그렇다면, 설교 없는 카톨릭 미사도 절름발이 예배요, 성만찬 없는 개신교 예배도 미완성의 예배이다. 설교 없는 미사는 말씀의 예전에서 단지 설교만 빠지는 미미한 것이지만, 성만찬 없는 예배는 성만찬 예전, 곧 절반의 예배가 빠지는 불구의 예배인 것이다. 중세기 미사 예배는 본래 연출 미사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만큼, 그 과오가 미사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미신적인 요소들의 첨가에 있었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예배는 절반의 예배가 생략된 예배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만찬 예배 회복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함께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 논문은 이러한 필요성을 피력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성만찬 예배 회복의 필요성을 성서적, 역사적, 신학적, 그리고 한국 개신교 예배의 실제적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이 글은 한신 대학교 목회학 박사원 학위논문, {성만찬 기도와 명상 자료 개발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의 [제 6 장 성만찬 예배 회복의 필요성]을 일부 수정한 내용이다.
2) 정용섭,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학: 말씀과 성례전의 신학적 균형을 위하여," {기독교사상} 제 22권 12호(1978년 12월호), pp. 137-138.
3) 이장식, "예배와 성찬의식," {기독교사상} 제 23권 제 2호(1979년 2월호), pp. 63-65.
4) 김득중, {복음서 신학}(컨콜디아사, 1985), p. 97.
5) 장자끄 폰 알멘, {구원의 축제: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학과 실천} 박근원 역(도서출판 진흥, 1993), pp. 17-20, 185-186; 장자끄 폰 알멘, 
Worship Its Theology and Practice, 정용섭, 박근원, 김소영, 허경삼 공역, {예배학원론}(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pp. 22, 157.
6) 이장식, op. cit., pp. 66-68.

성서적인 측면

성만찬 예배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출발된다.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하신 말씀에서 성만찬 예배는 출발된다.

주후 30년 예루살렘교회는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 모여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렸고, 가정에 모여 성만찬을 행하였다(행 2:42,46; 3:11; 5:12,42; 20:7; 눅 24: 53).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누가는 초대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전하고 있고, 46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적고 있다.

성만찬 예배는 기독교 예배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떡을 떼기 위해서"(행 20:7) 또는 "먹기 위해서"(고전 11:33) 교회에 갔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의 행각과 각 가정에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회당예배와 성전예배에 익숙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회당의 말씀 중심의 예배와 성전의 제사 중심의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추방당한 후 독자적으로 예배 예전을 뿌리 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회당예배에서 말씀의 예전이 뿌리를 내렸고, 성전예배와 최후의 만찬에서 다락방 예전이 발전되었다. 그리고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 예전이 통합되기 전까지는 초대 교인들이 주로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 모여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렸고, 가정에 모여서 성만찬을 행하였다. 물론 이 때의 성만찬은 아직 공동식사와 성만찬 예배가 확실하게 분리되기 이전의 애찬 형태의 것이었다(행 20:6-12; 고전 11:17-2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가 언제나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를 함께 드렸다는 점이다.

주후 56년경 고린도교회는 자주 성만찬을 먹기 위해 모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주의 만찬을 질서 있고 성별 되게 행할 것에 대해서 33절에서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 말씀은 주의 만찬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 데, 이 모임은 언제나 "안식 후 첫 날"(행 20:7) 혹은 "주의 날"(계 1:10)에 있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연보에 관해 충고할 때에 "매주일 첫날에"(고전 16:1-4)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연보 할 때가 매주일 첫날이라면, 먹으러 모일 때도 매주일 첫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후 57년에 드로아교회는 바울 일행과 함께 "안식후 첫날에" 떡을 떼는 모임을 가졌다(행 20:6-12). 주님 부활하신 날을 주님의 날로 믿었던 이방인 교회가 '안식후 첫날' 즉 일요일에 모여 성만찬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 예배에는 반드시 성만찬 예배가 필요하다. 예배가 예수의 전 생애를 재현하는 행위라면, 기독교 예배는 성만찬 예배에서 그 절정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난 기독교 예배의 전통이었다. 이것이 없는 예배는 절름발이 예배요, 미완성의 예배이다.

역사적인 측면

매주일 성만찬은 교부들의 증언에 의해서 더욱 분명해진다. 1세기 말엽 로마교회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 40장과 44장에서 감독의 임무를 성만찬을 집례(ministration)하는 자로 언급하면서 이것이 그의 고유한 임무라고 말하고 있다.(7 이그나시우스도 서머나교회에 보낸 107년경의 편지 8장에서 클레멘트와 동일한 입장을 피력하면서 감독의 고유한 임무가 성만찬의 집례라고 주장하고 있다.(8 여기서 성만찬의 집례를 감독의 고유한 임무로 정한 것은 성만찬이 주일 예배 그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주후 100년경에 기록된 {디다케} 14장 1절은 "먼저 여러분의 과실을 회개함으로써 여러분의 봉헌물을 정결케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자신의 날에는 함께 모여서 떡을 떼며 감사하십시오"라고 권면하고 있다.(9 주후 112년경에 소아시아 비두니아의 로마 지방장관이였던 플리니(Pliny the Younger)는 트라잔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지역의 교회가 정한 날 새벽 미명에 모여 연도형식(alternate verses)의 찬양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며, 십계명과 같은 엄숙한 맹세를 했으며, 흩어졌다가 저녁에 다시 모여 "보통의 흠없는 음식에 참여했다"고 보도하고 있다.(10 여기서도 "떡을 떼며"라든지 혹은 "흠없는 음식"이 성만찬과 애찬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가 애찬 형식의 성만찬을 모일 때마다 거행했다는 점이다.

매주일 예배 때마다 성만찬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순교자 저스틴(Justin)의 글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저스틴은 그가 쓴 {첫 번째 변증서} 65-67장에서 2세기 중반의 교회들이 주일날 모여서, 성서를 봉독하고, 집례자로부터 설교를 듣고, 모두 일어서서 기도한 후에, 집례자에 의해서 빵과 물로 희석된 포도주의 봉헌과 성별의 기도와 분병례와 헌금과 구제가 이루어졌다고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11

교회는 처음 4세기까지 신자들이 참여하는 매주일 성만찬을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3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의 논문 "기도에 관해서"(On Prayer) 19장에서 말하기를, 금식 중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만찬을 금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2 또한 동방교회의 교회법(Canon) 28조에 의하면, 성만찬을 "삼 주간을 거른 자는 파문 당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341년에 열린 안디옥 공의회에서는 "교회에 출석해서 봉독된 성경말씀을 듣고, 기도와 성만찬에 참여치 않는 자들은 그들의 회개가 공개적으로 입증될 때까지 교회로부터 파문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13  400년에 열린 제 1차 토로우제 공의회(Council of Tholouse)에서도 "설교를 들은 후에 성만찬에 참여하지 않는 자가 발견되면 경고해 줄 것이요, 만일 경고를 받고도 그래도 받지 않으면 그들은 출교되어질 것이다"라고 선포하고 있다.(14

성만찬을 자주 받지 않는 관습은 5세기경에 시작되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 미사의 계속, 개인 경건생활의 유행, 그리고 미사의 미신적인 요소의 도입 등으로 인해서 미사는 매주일 또는 매일 거행이 되었지만 신자들은 점차적으로 성찬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뿐만 아니라, 교회가 자진해서 신자들이 자주 성체를 받지 못하도록 막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신자들의 무관심, 엄격한 참회의 관습, 그리고 아리안니즘을 막기 위한 그리스도의 신성의 강조가 성만찬을 자주 못하게 된 이유들이다.

동방교회의 몹수에스트의 주교이며 신학자였던 데오도루스(Theodorus, 428년 사망)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신성의 강조는 제단과 신자석 사이의 벽을 높게 만들었고, 신자는 성만찬을 자주 떼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5

서방교회는 4세기경 다마소 감독 때 예배 언어를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바꾼 이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 때까지 이단으로부터 예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세계 모든 나라에서 미사가 모국어로 집례되거나 예전집이 번역되는 것을 금하여 왔다. 이런 이유로 라틴어를 모르는 신자들은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16

이러한 풍토 속에서 구경꾼으로 전락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와 결합하거나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려는 대신 실체 변화의 기적이 일어난 떡을 보고 경배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물질의 성체화' 신학으로 인해서 11세기에는 떡에 대한 독특한 공경의 풍습이 도입 되었는데, 사제는 축성의 때에 종을 사용하거나 떡 앞에서 절을 하였으며, 떡을 만진 손가락을 경의의 표시로 계속 맞붙이는 관습도 이 시기에 시작되어 13세기에 그 절정에 도달하였다.(17

중세교회에서 성찬을 받지 않던 풍습은 교리적인 원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첫째, 성만찬의 기념적인 특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성만찬을 희생적인 면으로 치우치게 만들었고, 이 희생적인 개념에서 성만찬은 예배자를 위해서 바쳐지는 희생제이므로 예배자는 성찬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18 둘째, 중세교회의 성찬을 받지 않던 풍습은 고해성사의 발달 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9세기경까지는 일생에 오직 한번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죄의 고백을 임종의 순간에나 하고자 하였다. 또 죄를 짓고나서 고해성사없이 성찬을 받는 것은 또 다른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신자들은 자연히 성만찬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만찬을 받지 못하는 대신 미사 중에 축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떡과 포도주를 바라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로마 성찬 기도문이 "당신께 봉헌하러 모인 모든 이들을 생각하소서"에서 "모인 모든 이들을 생각하소서.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이 미사를 드리오며, 그들이 당신께 봉헌하나이다"로 바뀌기도 하였다.(19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서방교회는 중세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신자들이 매주일 성만찬을 떼던 습관을 버리고 주일 미사에 참석하면서도 성만찬을 하지 아니하고 일년에 한 두 차례만 하게 되었다. 랑구에도크(Languedoc)에서 506년에 열린 아가타(Agatha)공의회는 "어느 누구도 적어도 일년에 세 차례 즉 크리스마스,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 날에 성찬에 참여치 아니한 자들을 훌륭한 신자로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선포하면서 일년에 세 번의 성만찬을 기정 사실화시켰고, 1215년에 열린 라테란(Lateran)공의회는 "일년에 한번 부활절 때에 성만찬을 배령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20

이러한 굴절된 상황 속에서도 일부 사제들에 의해서 성만찬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 보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찰스 대제(Charlemagne/768-814)는 적어도 사순절 주일만이라도 성찬을 떼는 습관을 부활시키려 하였다. 12세기 초에 나온 Ordo Officiorum Eccl. Later 문서는 "신도들은 비록 사순 시기에 매일 교회에 모이지만 그러나 매일 성찬배수 하지 않는다"(100항 37쪽) 또한 "우리 교부들은 매일 성찬배수를 권고하지만 모든 사제나 평신도들은 이것을 사순절에도 지키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다. 한편, 주일 성찬배수의 습관은 클뤼니 수도원(Cluniacs)(21이나 이후의 시또회(Cistercians)(22에서 충실히 지켜졌고, 성직 수도자들은 주간 중에도 성찬에 참여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평수사들도 일년에 일곱 번 정도는 성찬을 배수하였다.(23 15세기 초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도 '자주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의 유익함에 대해서'와 '경건하게 성찬식에 참례하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수많은 은혜에 대해서' 언급하였고, 또 '경솔하게 성찬식을 빠뜨리지 말 것'에 대해서도 충고하였다.(24 구체적인 노력으로는 1643년 얀센파(Jansenist)(25였던 안토이네 아놀드(Antoine Arnauld)에 의해서 매주일 성만찬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잘못된 습관이 시정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 교황 비오 10세 때부터다.(26

교회의 잘못된 성만찬의 관습은 종교개혁가들의 손에 의해서 많은 부분이 시정되었으나 성만찬을 자주하지 못했던 관습만큼은 고치지를 못했다. 여기에 대한 책임은 아마 쯔빙글리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그가 바로 주일 예배에서 성만찬을 분리시킨 최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만찬을 은총의 채널로 생각지도 않았고, 기독교 예배에 필수적인 부분으로 생각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는 한 달에 한 번 이상의 성만찬을 주장한 루터나 칼뱅과는 달리 한 해에 네 번 정도로 고정시켜 버렸다.(27

여기에 반해서 요한 칼뱅(John Calvin)은 매주일 성만찬의 집례와 신자들의 참여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칼뱅은 그가 쓴 {기독교 강요}에서 성만찬은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씩 자주 기념되어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고,(28 1537년 제네바 의회에 낸 {교회와 조직에 관한 안내}에서도 매주일 성만찬 거행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쯔빙글리에 강한 영향을 받은 행정관들에 의해서 받아 드려지지 않았다. 시의회는 칼뱅의 건의를 무시하고 성만찬 예배를 연 4회로 제한하고 말았다.(29 이런 칼뱅의 노력은 1555년에 베른 시의 행정관들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서도 계속되지만 이도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만다.

비록 새로운 문제는 아니나 (여러분의 주의를 상기하고 싶은)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는 성찬을 일년에 네 번, 여러분들은 일년에 세 번밖에 거행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나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여러분과 우리 모두가 성찬을 더 자주 거행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성 누가가 쓴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에서는 성찬이 매우 자주 거행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이 같은 풍습은 사탄에 의해 미사라는 가증한 것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대로 지속되어 왔었습니다. 사탄의 궤계에 의해 일반 회중은 겨우 일년에 한 두 번밖에는 성찬을 들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의 본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잘못으로 솔직히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30

그러나 루터교회와 헝가리의 개혁교회는 주일 성만찬 예배를 계속하였다. 바젤에서는 교회들이 번갈아 가면서 매주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이 원하기만 하면 매주일 성찬을 받을 수 있었다. 1563년의 법령에 따르면, 라인강 서부지역에서는 부활절과 성령강림절 그리고 성탄절에 하는 성만찬 말고도 매월 한 번씩 성만찬을 거행하였고, 시골에서는 격월에 한 번씩 거행하였다.(31

영국의 종교개혁가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1489-1556)는 카톨릭교회의 예배와 개혁교회의 예배의 두 모형을 절충하여 1549년 영국교회를 위한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집성한 사람으로서 예배 의식을 간소화시키는 한편, 평신도는 받드시 성만찬 때에 떡과 잔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2 이후 영국교회(성공회) 예배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주교좌 성당에서는 주일 성만찬을 지속시켰고,(33 일부 교회가 일년에 네 차례 성만찬을 행하였으며, 다른 교회에서는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성만찬을 행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중반에 발생한 '옥스퍼드 운동'(34의 영향으로 인해서 19세기 말엽에는 대부분의 교회가 기도서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매주일과 축일마다 성만찬을 행하였으며, 일부 지역 교회에서는 주간 중에 한 번 혹은 그 이상의 성만찬을 행하기도 하였다.(35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회들은 크게 보면, (1)반예전적인 경향, (2)말씀의 이해에 치중하는 경향, (3)체험에 치중하는 경향의 3대 조류를 따라 흘러 왔다.(36

첫째, 반 예전적인 부류는 예배의 영적인 측면 즉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여 형식과 틀을 부정한 부류로서 청교도, 초기 침례교, 회중교회, 퀘이커교가 여기에 속한다. 둘째, 말씀의 이해에 치중한 부류는 말씀의 연구를 통해서 인간의 지성에 호소하는 부류로서 초기 회중교회와 장로교회가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신앙 체험을 강조하는 부류는 경건주의, 모라비안주의, 그리고 부흥운동과 관련된 웨슬리안이 여기에 속한다.(37

개신교회들의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서 결국 성만찬은 주일 예배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주변부 몇 사람들의 외침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런 외침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아일랜드 듀블린의 대주교였던 윌리암 킹(William King/ 1650-1729)과 뉴욕 시티의 장로교 목사 요한 미쉘 메이슨(John Mitchell Mason/ 1770-1829), 그리고 감리교회를 세운 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있다.

윌리암 킹은 1695년에 쓴 논문, "하나님의 예배에 인간들이 첨가한 내용에 관한 논의"(A Discourse Concerning the Inventions of Men in the Worship of God)에서 매주일 성만찬 거행을 주장하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자주 성만찬 거행을 요구하고 계시는지를 알려면,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자주 우리가 모이기를 원하고 계시는가를 묻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적어도 매주일마다 거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한 미쉘 메이슨 목사도 1798년에 북아메리카 준 개혁교회의 성도에게 쓴 그의 논문, "잦은 성만찬에 관한 서신들"(Letters on Frequent Communion)에서 매주일 성만찬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지속적인 성만찬의 의무"라는 제목의 짧은 설교를 통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마다 성만찬을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784년 미국에 있는 교회들의 장로들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나는 또한 매주일마다 주의 만찬을 거행할 것을 장로님들에게 충고합니다"라고 적고 있다.(38

이들의 외로운 외침이 교단적인 운동으로 번진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였다. 19세기 초에 미국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을 펼치면서 침례와 성만찬의 성서적 회복에 힘썼다.

이 운동은 장로교 목회자들이었던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과 발톤 스톤(Barton W. Stone)에 의해서 전개되고, 토마스 캠벨의 아들이었던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에 의해서 꽃피운 성서의 권위회복과 교회연합운동으로서 예배에서의 말씀의 선포와 성만찬의 거행이 초대교회 예배의 핵심이었다고 믿고 지난 200여년 동안 간소화된 예식을 통해서 매주일마다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이 범기독교적으로 일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먼저 카톨릭교회가 예배갱신운동을 펼쳤다. 카톨릭교회는 1962-65년에 열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예배 중에 설교와 신자의 영성체를 회복하였고, {미사경본}의 모국어 번역이 허락되었으며, 비로소 미사가 모국어로 집례 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카톨릭교회도 196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어 {미사경본}을 준비하여 사용할 수 있었고, 이 때부터 전격적으로 예전에 관한 각종 문헌들이 한국어로 쏟아지기 시작하였다.(39

한편 개신교 측에서도 이 때에 리츠만(H. Lietzmann), 쿨만(O. Cullmann), 그리고 폰 알멘(J. J. von Allmen)과 같은 성서 신학자들이 초대교회 예배 연구에 대한 업적들을 쏟아 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들의 업적이 도화선이 되어 말씀과 주의 만찬이 함께 있는 균형 있는 예배의 복원에 대해서 세계교회들이 깊은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 열매가 1982년 1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천주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개신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교파간에 이해를 달리하는 침례, 성만찬, 그리고 교역에 대해서 조정된 합의를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들 침례, 성만찬, 그리고 교역에 대해서 교파간에 상호이해와 일치를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바로 {리마문서}이다. 이 문서가  채택된 이후 침례 성만찬에 대한 성례전의 인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새로와 지고 있고, 그 의미도 선명해지고 있으며, {리마 예식서}에 따른 성만찬 예배가 실험적으로 여기저기서 시행되고 있다.(40

성만찬 예식의 빈번도에 대해서 {리마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주님의 만찬을 거행함으로써 깊어진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자주 거행되어야 한다. 신학과 예전과 실천에 많은 차이점이 나타나는 것은 성만찬이 거행되는 여러 형태의 빈번도와 관련되어 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기 때문에, 적어도 매주일마다 거행해 마땅하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백성의 새롭고도 성례전적인 식사이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주 성만찬을 받도록 권장되어야 한다.(41

이와 같이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성만찬 예배는 예배의 중심이었고 절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개신교회가 예배와 성례전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성만찬 예배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늘날 일부 교단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성만찬을 거행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고, 또 그렇게 하자고 독려하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성만찬 예배의 회복은 교회의 일치와 질적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명령과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교회전통에로 환원하는 일이다.

7) J. B. Lightfoot, The Apostolic Fathers(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6), pp. 30-32; 네메세기, {주의 만찬}(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6), pp. 86.
8) J. B. Lightfoot, 
op. cit., p. 84.
9) Ibid., p. 128.
10) Everett Ferguson,
 Early Christians Speak(Abilene, Texas: Biblical Research Press, 1981), p. 81.
11)
 Ibid., pp. 81-117; 네메세기, op. cit., pp. 90-91.
12) Henry Bettenson, trans. and ed., 
The Early Christian Fathers: A Selection from the Writings of the Fathers from St. Clement of Rome to St. Athanasius(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9), pp. 148-149; Andrew Paris,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Lord's Supper(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1986), p. 286.
13) 
Ibid., p. 287; Alexander Campbell, The Christian System(Nashville: Gospel Advocate Publishing Company, 1964 reprint), p. 287.
14) John Calvin, {기독교 강요} 김문제 역(혜문사, 1982), 4.17.44.
15) Burkhard Neunheuser, {문화사에 따른 전례의 역사} 김인영 옮김(분도출판사, 1992), pp. 110-111.
16)
 Ibid., p. 92-93.
17)
 Ibid., p. 112.
18) 장자끄 폰 알멘, {구원의 축제: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학과 실천} 박근원 역(도서출판 진흥, 1993), pp. 179-80.
19) Burkhard Neunheuser, 
op. cit., p. 92-93.
20) Andrew Paris, 
op. cit., p. 288; Alexander Campbell, op. cit., p. 288.
21) 베네딕트(Benedictine) 규율에 따라 시작된 개혁운동의 하나로서 909년에 클리니(Cluny)에서 시작되었다. 성서연구, 예전갱신, 검소를 신조로 삼았다. J. D. Douglas,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8), s.v. "Cluniacs."
22) 로버트(Robert of Molesme)에 의해서 1098년에 시또(Citeaux)에서 출발된 베네딕트(Benedictine) 수도회의 일종이다. 가난, 검소, 은둔적 독거(獨居)를 강조하였다.
 Ibid., s.v. "Cistercians."
23) Burkhard Neunheuser, op. cit., p. 111.
24) Thomas à  Kempis, {그리스도를 본받아}(
The Imitation of Christ), 조항래 역(예찬사, 1984), pp. 243-287.
25) 얀센(Cornelius Otto Jansen/1585-1638)과 세인트-사이랜(Saint-Cyran)의 주도하에 시작된 카톨릭의 급진적인 어거스틴 학파로서 자유의지, 예정론, 엄중한 도덕적 금욕주의, 교권, 그리고 선교 문제에 관한 견해의 차이로 예수회(Jesuits)와 크게 충돌하였다. 얀센과 사이랜이 죽자, 안토이네 아놀드(Antoine Arnauld)가 1643년에 이 운동의 주도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J. D. Douglas, 
op. cit., s.v. "Jansenism."
26) 네메세기, 
op. cit., pp. 118-119.
27) 박근원, {오늘의 예배론}(대한기독교서회, 1992), p. 33.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이전에 신자들이 일년에 한 번 정도 받던 성찬을 일년에 네 번 받도록 배려를 했고, 성만찬을 거행하기 전 주일에 미리 신자들을 교리문답 등을 통해서 준비시켰다. 이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구원의 축제, p. 181.
28) John Calvin, {기독교 강요} 김문제 역(혜문사, 1982), 4.17.43-46.
29) J. K. S. Reid, ed., 
Calvin: Theological Treatises(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54), p. 49.
30) Robert E. Webber, {예배학}(
Worship Old and New), 김지찬 역(생명의 말씀사, 1988), pp. 99.
31) {구원의 축제} pp. 182-183.
32)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대한기독교출판사, 1990, 개정판), pp. 111- 112.
33) {구원의 축제} p. 180.
34) 19세기 영국의 급진적 합리주의, 회의론, 무감각, 자유주의, 그리고 비도덕성에 반발하여 발생한 영국교회내의 중요한 종교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교회전통에로의 복귀와 사제와 신자들의 경건과 헌신 그리고 수준 높은 예배를 희망하였다. 이 운동의 지도자였던 요한 케블(John Keble)은 침례와 성만찬만으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 운동은 친 카톨릭교회 성향의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요한 헨리 뉴만(John Henry Newman)을 위시하여 약 일천여명의 학자와 사제들 그리고 신자들이 카톨릭교회로 개종하였으며, 영국교회의 성만찬 예배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Walter A. 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5), s.v. "Oxford Movement."
35) Massey H. Shepherd, Jr., {교회의 예배: 예전학} 정철범 옮김(대한기독교서회, 1991), p. 148.
36) Robert Webber, 
op. cit., p. 99.
37)
 Ibid., pp. 99-107.
38) Andrew Paris,
 op. cit., pp. 291-94.
39) 쯔지야 요시마사, {미사: 그 의미와 역사} 최석우 옮김(성바오로출판사, 1991), s.v. "부록."
40) 박 근원,
 op. cit., pp. 10-17.
41) Faith and Order(WCC),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Faith and Order Paper No. 111(Geneva: World Council of Churches, 1982), s.v. "Eucharist(30, 31)."

신학적인 측면

감사, 기념, 성령의 임재, 교제, 종말론적 식사, 이상의 다섯 단어가 {리마문서}가 설명하는 성만찬의 신학적 특징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만찬의 뿌리를 유월절 식사에 두어도 좋을 것이다. 유월절 식사의 특징도 기념, 찬양, 교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월절 식사와 성만찬을 근본적으로 차이 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마지막 시대를 앞당겨 오는 성령의 임재이다. 성령의 임재는 교회시대를 메시아 시대로 만드는 기독교만의 특징이다. 성만찬 예배 회복의 필요성을 먼저 이들 다섯 단어의 신학적인 측면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첫째, 성만찬은 인류의 구속을 이루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예배이다(Eucharistia). {리마 문서}는 제 4 항에서 성만찬을 찬양의 제사(sacrifice of praise)로 정의한다. 성만찬 예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응답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배 공동체였으며, 예배를 통하여 조상들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관계를 새롭게 다짐하고 갱신하였던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통해서 드러난 참예배를 거듭 재현하는 예배 공동체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배의 신학적 기조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에 두었던 것처럼, 교회도 예배의 신학적 근거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둔다. 또한 구약시대의 예배는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응답이었던 것처럼, 기독교의 예배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응답이다. 성만찬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회고하여, 사죄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42

둘째,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과 십자가의 정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이다(Anamnesis).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성만찬은 하나님과 인간사이 또 인간과 인간사이에 가로놓인 불편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구원의 계약 성립의 매개물로서 희생된 어린양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예전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바다에서 자기 민족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념하고 찬양한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념하고 찬양한다. 성만찬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의 몸에 동참하는 기념행위이다. 기념행위를 통해서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오늘의 나의 삶속에 현재화하며, 미래의 하나님의 구원을 나의 삶속에 앞당겨 온다.

셋째, 성만찬은 성령의 임재를 비는 제사이다(Epiklesis). {리마 문서}는 교회 전통과 칼뱅의 정신을 따라 다음과 같이 성령의 중요성을 말한다. "성령은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며, 교회는 새 창조의 생명을 얻고,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기 때문이다"(18항). 우리는 성만찬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임마누엘을 체험한다.

넷째, 성만찬은 수직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수평적으로 이웃과 연대하며,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고 돌보는 교제의 시간이다(Koinonia). 성만찬은 대신(對神), 대인(對人), 대물(對物)관계에서 예배와 친교와 관리를 통해서 서로 연대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신뢰를 쌓기 위해 마련된 화해와 나눔의 시간이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와의 친교에 참여한다. 식음의 행위는 친교의 행위이다. 신의(神意)가 깃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심으로써 신앙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만찬은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과 은총을 미리 맛보고 누리는 종말론적 식사이다(Anticipation). 성만찬은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이다. {리마문서}는 제 22 항에서 "성만찬은 창조물의 궁극적인 갱신으로서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앞당김은 막연히 앉아서 기다려 얻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에 참석할 때 버림받은 이들과 연대하는 소명,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표징이 되는 소명을 받아"(24항)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에 동참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25항).

이와 같이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를 감사제, 기념제, 기원제, 화목제, 종말론적인 축제로 만든다. 성만찬이 없이는 이와 같은 의미를 예배에 담기가 어렵다. 피상적이고 말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성만찬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과하지 아니하며, 성만찬 예배의 회복은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한다.

이 밖에도 성만찬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에 관한 이야기는 많다.

첫째, 성만찬 예배를 통해서 말씀이 육신이 됨을 체험한다.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삶의 방식, 곧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의 방식을 터득한다. 성만찬을 통해서 십자가의 정신을 배우게 되고, 이 십자가의 정신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된 삶과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과 참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된다. 또 인간 구원의 문제는 관계성의 회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인간끼리의 관계회복, 자연과의 관계회복은 오직 십자가의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침례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단회(單回)적으로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거듭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둘째, 성만찬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필수조건인 공동체 의식과 연대의식의 중요성을 터득하게 된다. 이 연대의식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사는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성육신 하심으로서 자기를 포기(renunciation)하셨고, 인간들과 동일화(identification)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다. 그는 또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 시대에 소외당하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과 세리 또는 창녀들과도 함께 밥상공동체를 이루시며, 가난한 사람,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셨고 나눔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분은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에 친히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본을 보여 성만찬을 제정하셨고, 그 정신을 본받도록 성만찬을 행하여 지킬 것을 부탁하셨다. 그러므로 침례를 수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연대하는 결속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43 또는 하나님과 화목(연대)하는 일회적 의식으로 본다면, 성만찬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 즉 화해와 나눔과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수평적으로 인간끼리의 공동체의식을 넓혀 가며, 자연과도 연대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셋째, 성만찬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 신앙이 없이는 성찬을 받지 못한다. 성만찬은 침례를 받고 구원에 동참한 자가 복음의 진수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을 믿고 있는지를 저울질할 수 있는 시험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성만찬은 신앙의 신비를 선포한다. 성찬 때에 그리스도의 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와 성찬을 받는 자의 신앙의 힘이 함께 작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룬다.

넷째, 성만찬은 신앙의 한계를 넘어선 일종의 신비이다. 이 신비는 구원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구별하고, 성(聖)과 속(俗) 곧 교회와 세상을 구별한다. 이 엄격한 구별이 교회를 구성하게 하는 것이며,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이 세상을 준비시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성만찬은 교회를 준비시켜 세상에 봉사하게 한다.(44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것을 결단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려 화목제물이 되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부여받았음을 상기한다.

다섯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요 6: 51)를 빼앗을 권리가 없다. 만일에 교회가 이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은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부탁하신 성례를 멸시하는 것이다.(45 또한 그것은 침례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46 성만찬은 침례를 받음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신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응하여 살아가도록 권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침례와 성만찬의 관계를 칭의와 성화에 대비해 볼 수 있다.

여섯째, 설교와 성만찬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예배는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는 선취적인 기능을 갖는다. 설교의 현재성과 성만찬의 미래성은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현재종말과 미래종말의 긴장관계와 같다. 이 때문에 설교가 없는 성만찬 중심의 예배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 어느 것도 거기서 끌어내릴 수 없는 영광의 보좌 속에 앉아있다는 생각을 쉽게 하도록 하고," 설교만 있고, "성만찬 없는 예배는 교회로 하여금 아직 주님의 기도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교회는 아직도 어둠 속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생각을 쉽게 하도록 한다."(47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고 체험하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출범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는 것이다.

42) 박준서, "구약에 있어서 예배의 의미," {은곡 김소영박사 회갑기념논문집: 교회의 예배와 선교의 일치}(대한기독교서회, 1990), pp. 23-32.
43) 김용복, "민중과 연대하는 교회-새로운 교회론에 관한 연구," {신학사상} 68집(1990년 봄호), 183-210쪽.
44) {구원의 축제} pp. 187-189.
45) {구원의 축제} p. 189.
46) {예배학 원론} p. 159.
47) {구원의 축제} pp. 186-187.

한국 개신교의 성만찬 예배 이해와 실제

역사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파하여 세례를 베푼 후에도 10년이 넘도록 성만찬을 거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48 초기 한국 개신교 예배는 청교도들의 후예였던 선교사들의 예배에 대한 이해 수준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청교도들의 특징은 예전이 없는 말씀 중심의 예배와 은혜의 체험과 경건을 중시하는 주정주의였던 것이다. 본래 청교도들은 영국이 종교개혁을 단행할 당시에 국교인 성공회에 반발한 분리주의자들로서 영국교회가 카톨릭의 미사예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을 개탄하였다. 이에 청교도들은 전통적인 예배 예전을 버리고 예배를 간소화시켰으며, 교회력을 사용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형식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성서를 유일무이한 규범으로 삼았고, 은혜의 체험과 경건을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드린 주일예배는 성례전이 빠진 전도집회요, 부흥집회였다. 이러한 신앙노선을 전수 받은 한국의 개신교회는 일제의 탄압과 민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하면서 말세론과 기복신앙에 편승하여 예배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49

한국교회는 말씀 중심의 뜨거운 열정으로 기적적인 수적 성장을 이룩하긴 했지만,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온 무리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위를 부여하지 못하는" 큰 과오를 범하고 말았고, 인간 공동체에 전혀 변화와 개혁을 가져오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에 강단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말씀은 언제나 차고 넘쳤지만, 예전의 내용과 형태가 빈약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은 단지 '교회를 가는 자'(church-goer) 또는 '설교를 듣는 자'(sermon-hearer)로 전락되고 말았다. 설교 중심의 개신교 예배의 병폐는 목회자로 하여금 설교에다 목회의 성패를 걸게 만들었고, 신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전의 의미와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은혜와 은사 체험에다 교회 출입의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50

한국 개신교의 설교 중심의 예배와 성례전의 결여는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겨 주었다.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연중 3, 4회의 성만찬 예배가 모든 개신교들의 오랜 전통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또 이런 잘못된 신앙의 전통이 말씀과 나만을 연결시켜 나가는 개인주의 신자들을 양산하였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확인하면서 살 수 있는 행동적 신앙의 결여를 초래하였다. 성만찬이 배제된 오늘날 한국 개신교 예배는 듣는 예배뿐이며, 보는 예배가 없고, 예수의 갈릴리 사역뿐이며,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의 사역이 없고, 뜨거움만 있지, 신령과 진정한 예배의 표현인 적당한 예전이 없는 매우 불균형적인 예배로 상실된 것이다. 하루속히 한국 개신교는 기도회나 은혜 집회의 형태에서 벗어나 바른 예배, 온전한 형태의 예배로 환원되어야 한다.(51

대전직할시와 인근지방에서 목회 하시는 80명의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성만찬에 관한 수용여부를 조사한 일이 있다.(52 설문조사에 응한 목회자들의 94%가 신학교육이나 세미나 혹은 책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예배갱신운동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84%의 목회자들이 신학교육이나 세미나 혹은 책을 통해서 성만찬에 대해서 공부한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예배에서의 성만찬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초대교회가 매주일 성만찬 예배를 드렸다는 것과 초대교회 예배의 원형은 말씀의 선포와 성만찬이 함께 진행되는 균형 잡힌 예배였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매주일 성만찬 예배를 진행하는 교단은 그리스도의 교회밖에 없었다. 한 달에 한번 성만찬 예배를 거행하는 소수의 목회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여전히 연 2회에서 4회에 걸쳐 성만찬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실제로 그들은 연 4회 또는 한 달에 한번의 성만찬 예배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예배갱신에 관심을 갖는 목회자들은 최소한 한 달에 한번씩이라도 성만찬 예배를 거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단적으로는 순복음교회가 한 달에 한번씩 성만찬을 거행하고 있었다.

목회자들은 성만찬을 자주 행하지 못하면서도 현재의 성만찬 예배에 대해서 상당한 불만족을 표시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회자들은 성만찬 명상문의 개발을, 그리고 타교단의 목회자들은 기도문의 개발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성만찬을 자주 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보면, 자주 하지 않는 것이 개신교의 전통이기 때문이며, 자주 행하였을 때에 예배 시간이 길어지는 문제와 습관화되어 형식에 치우치게 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었다.

목회자들은 개신교 예배의 특징을 성령의 감화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경건성에 두고 있었다. 목회자들은 개신교 예배에서 예식의 간소함과 성만찬을 자주 거행하지 않은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면서도 말씀 중심의 예배를 개신교의 가장 큰 장점으로 대답하였다.

목회자들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예식서에 대체적으로 불만족을 표시하였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를 부족한 예문의 수와 빈약한 내용에서 찾았다. 그리고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새로운 예식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만족할만한 예식서가 있다면, 교단에 관계없이 사용하겠다고 답변하였다.

종합적으로 볼 때, 목회자들은 여전히 잦은 성만찬 예식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성만찬 예배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개신교 예배를 설교 중심의 예배로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목회자들의 이런 인식의 결과는 성만찬을 자주 행하지 않던 오랜 개신교 예배 전통과 예배신학의 부재와 성장위주의 물량주의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예배신학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목회자들의 예배갱신에 대한 의지와 노력만이 오늘의 개신교 예배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48) 한국신학연구소, "심포지엄: 리마문서와 오늘의 성만찬," {신학사상} 68집(1990년 봄호), pp. 212-213.
49) 정용섭. op. cit., pp. 128-131.
50) 정장복,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형태 백년," {기독교 사상} 제 29권 제 12호(1984년 12월호), 65-66.
51) 
Ibid., pp. 71-73.
52) 대상자는 분파에 구분없이 장로교 20명, 감리교 20명, 성결교 20명, 그리스도의 교회 20명으로 하였다. 이 글에서는 설문내용과 실태분석표를 실지 못했다.

끝 맺는 말

이상으로 성만찬 예배 회복의 필요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말씀과 성만찬은 바늘과 실의 관계요, 출발점과 골인점의 관계이다. 어느 것도 예배에서 삭제되거나 생략될 수 없다. 성만찬이 없는 예배는 실없는 바늘과 같고, 골인하지 아니한 달리기 선수와 같다. 성만찬이 없는 예배는 그리스도의 죽음만 있고 부활이 없는 예배와 같다. 주일의 의미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요,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요, 교회가 출범한 날이요, 첫 예배가 드려진 날이다. 이 모든 것이 주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과 부활하심에 대한 축제와 성령의 오심에 대한 감사와 재림에 대한 기원과 성도의 친교와 관련된 것이다.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것은 진정 성만찬이 있는 예배이다. 성만찬은 예배에서 반드시 회복되고 환원되어야 한다.

말씀의 선포와 주의 만찬이 매 주일 드리는 기독교 예배의 전통이었다는 사실이 성서적인 증언과 교회 전통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교회 창립 이후, 이 전통이 4세기 말까지 큰 변화없이 계속 되였음을 이 시대의 교부들이 증언하고 있다.

예배에 문화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들이 첨가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합법 종교로 인정되면서부터 였다. 그레고리 대제 때만 해도 신자들의 기도와 설교가 예배 의식에 남아 있었으나, 중세 이후 예배는 화체설의 영향으로 점차 미신화되었고, 성도의 진정한 참여가 없는 연출미사로 전락되면서 말씀 선포, 성경봉독, 신자들의 기도와 같은 듣는 예배의 성격이 사라지고 말았다. 또 예배자들의 일상 언어와 지역에 관계없이 집전되는 라틴어 미사, 개인 경건생활의 유행, 엄격한 참회의 관습, 떡과 잔에 대한 공경, 마리아와 성인들에 대한 공경, 그리고 지나친 그리스도의 신성의 강조로 인해서 미사는 매주일 또는 매일 거행이 되었지만 신자들은 점차적으로 성찬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가 결코 성서적인 예배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중세 초기의 예배가 지나치게 예전적으로 흘러간 것은 이단을 막고, 정통신학을 보수하고, 라틴어 미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연출미사로 이해시키려 한 때문이었지, 결코 본래의 예전 형태는 아니었다. 성체신학이 일찍부터 발전하게된 원인도 영지주의 때문이었고, 봉헌신학의 발전의 원인도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제사문화 때문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성만찬을 무용하게 보았고, 희생제사를 바치고 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성전도 없고 희생물도 없는 기독교 예배를 무신론자로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잘못된 중세 교회의 예배 전통을 고쳐서 사도들의 예배 전통에로 환원하려 했던 종교개혁가들은 예배에서 미신적인 요소들을 삭제시키는 한편, 모국어 예배와 회중찬송을 도입하였고, 화체설, 봉헌설, 병존설에 반대하였다. 그 대신에 공존설, 영적 임재설, 기념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혁가들은 사도들의 전통인 설교와 성만찬의 이중 구조의 예배를 완전히 환원시키지 못하고 중세교회의 보는 예배를 말씀 중심의 듣는 예배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개혁교회의 신자들이 카톨릭신자들 보다는 실제로 더 자주 성찬을 받기는 했지만, 일년에 네 차례로 고정시켜버린 쯔빙글리의 예배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잘못된 예배 전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 전통이 결코 본래의 예배 전통은 아니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예배 전통은 분명히 말씀과 성만찬이 늘 함께 있어 왔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는 예배나 성만찬이 빠진 예배는 온전치 못한 예배이다.

예배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체험이 있을 때에 산 제사가 된다. 설교만으로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인 성육화의 길을 체험할 수 없다. 설교는 영적이고, 성만찬은 육적이다. 설교와 성만찬의 관계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신비의 조화이다. 설교와 성만찬의 관계는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는 관계, 곧 약속과 성취의 관계이다. 설교가 말로써 이루어진다면, 성만찬은 행동으로써 이루어진다. 설교가 청각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면, 성만찬은 미각과 시각과 후각과 촉각을 통해서 인간의 심성에 호소한다. 설교가 세상을 준비시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면, 성만찬은 교회를 준비시켜 세상에 봉사하게 한다. 그러므로, 설교나 성만찬이 빠진 예배는 불구의 예배요, 불완전한 예배이다.

반 예전적인 청교도의 영향을 받았던 한국 개신교는 말세론과 기복신앙에 편승하여 예배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연중 3, 4회의 성만찬 예배가 개신교의 예배 전통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예배갱신운동의 영향으로 많은 목회자들이 성만찬 예배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설문조사에 응한 많은 목회자들이 매주일 성만찬 예배를 성서적으로 보았고, 설교와 성만찬이 함께 있는 예배를 원형적인 예배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매주일 성만찬 예배를 진행하는 교단은 그리스도의 교회밖에는 없었고, 순복음 교단이 한 달에 한번씩 성만찬을 거행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많은 목회자들이 연 2회에서 4회에 걸쳐 드리는 성만찬 예배를 관행으로 삼고 있지만, 연 4회 또는 한 달에 한번의 성만찬 예배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한 달에 한번씩 성만찬 예배를 시행하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고, 저녁 집회 때에 성만찬을 거행하는 교회도 다수 있다. 이런 경향은 교단적인 영향이 크다고 생각된다. 새로 나온 예식서에서는 한 달에 한번 정도의 성만찬 예배를 권장하고 있는 데, 각 교단이 좀 더 적극적으로 매주 성만찬 예배를 권장하고 나서야 하며, 예식서 개발에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예배는 결코 지나치게 예전적이지도 그렇다고 반예전적이지도 않았다. 교회를 처음 시작한 사도들이 회당예배와 성전예배에 익숙한 유대인들이었고, 예배 자체가 이 두 전통의 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교회는 처음부터 예전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만찬은 역사적 사건으로써 성전예배와 관련하여 예배 때마다 반복되었고, 설교는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의 말씀으로써 회당예배와 관련하여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 예배를 단순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 듣는 기도회 모임 정도로 생각해서도 안되겠고, 사건에 대한 해설이 없고, 신자의 진정한 참여가 없는 제사 모임으로 생각해서도 안되겠다.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것은 진정 성만찬이 있는 예배이다. 성만찬은 예배에서 반드시 회복되고 환원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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