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 성찬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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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8. 1. 15. 22:57

예배와 성례전

  


Ⅰ. 예배 -이해를 위한 서론적 고찰

 

1. 들어가는 말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백한다. 즉 교회는 예배로 말미암아 그리고 예배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배는 교회의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터는 말하기를, “만일 그대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그대는 마땅히 그에게 예배하여야 한다.”(Habere Deum est colere Deum).1)

 

즉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신조, 내지는 신앙고백이 교회의 신앙을 가장 깊게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교회의 예배야말로 교회의 신앙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신조라는 것은 예배를 통해서 교회가 증거하고 믿는 바를 고백하고 형성한 것이다. 예배에 대한 루터의 이해는 한 마디로, ‘형식과 의식’에 구애되지 않는 ‘신령과 진리’의 예배(요 4:24)이어야 한다고 믿었다.2)

 

우리가 기독교 예배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세 가지의 중요한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첫째는 예배의 기본 성격과 그 의미를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요,3) 둘째는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예배가 어떻게 발전되었고, 변천되어 왔는가를 찾아보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예배에 임하는 개인이 갖추어야 할 신앙의 문제이다.4)

 

이상과 같은 내용을 종합하면,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며, 예배는 이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그러므로 예배신학의 근거로서 우리는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메이쳔(J.G. Machen)은 말하기를,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존하며 따라서 이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나님에 대하여, 둘째로 인간에 대하여 어떠한 예비지식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인간에 대한 교리는 복음의 위대한 두 전제가 된다”라고 하였다.5) 이 말에 동의한다면 예배의 신학적 정립에 우선하는 것은 역시 성경적인 바른 신관과 바른 인간관이 선행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2. 예배의 개념

 

“예배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배는 인간의 최대의 목표이며, 또 그것을 달성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예배를 바로 알지 못하면 참다운 예배를 드릴 수가 없기에 예배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이 예배의 의미를 알기 위하여서 그 용어들을 먼저 찾아 본 후에 그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6)


1) 사전(事典)적인 의미

 

(1) Worship

 

예배라는 말의 영어단어인 Worship은 원래 앵글로색슨(Anglosaxon)어의 weorthscipe(최상의 가치를 돌리다), wyrthscipe (worth, weorth, wurth: 가치, 존경 + scipe: 어떤 상황 등을 유발시키다, 만들다)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것이 Worthship으로 되었다가 다시 Worship이란 단어로 변화되었다.7) 이 말의 단어적 의미는 "가치를 돌린다, 어떤 사람에게 가치 혹은 존경을 주다"라는 의미에서 출발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그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린다는 것이다.8)

 

(2) Gottesdienst

 

예배라는 말의 독일에 단어는 Gottesdienst인데 이 단어는 Gott와 Dienst의 합성어이다.9) 이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면, “God's service and our service to God”(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은혜적 봉사와,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봉사)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우리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봉사한다, 드린다, 헌신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즉 이 단어는 예배의 다른 면인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응답, 곧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답변을 나타내고 있다. 곧 예배란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대한 인간의 헌신적인 대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 구약에서의 의미

 

(1) hj;v;(샤하; bow down.) 몸을 구부리다, 절하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이상 나오며 굴복하는 것, 자신을 엎드리는 것, 엎드린다, 따른다"는 뜻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복종해야할 존재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단어는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마음과 몸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은 "머리를 숙여 경배했다" 라든가 "엎드려 경배했다"라고 번역되어져 있다.10)


(2) db'[(아바드; 일하다 work, 봉사하다, 섬기다, 시중들다 serve)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90회 나온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기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영어의 Service가 여기서 유래되었다.11)

 

 

이상의 2가지 어휘에서 나타나는 뜻은 다음과 같다: 모든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 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이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3) 신약에서의 의미

 

(1) "γονυπετἐω"(고뉘페테오; knee down). 무릎을 꿇을 때나 완전히 부복하여 엎드렸을 때에 사용하는 말인데 겸손과 자기의 부족감과 존경과 복종과 숭배의 표현이다.12) 무릎을 꿇는 것은 윗사람 앞에서의 경외심 혹은 왕 앞에서의 신하의 예(禮), 말하자면 그의 힘과 주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2) "προσκυνἐω"(프로스퀴네오; worship of the idol, worship of polytheism; 예배하다. 경의를 표하다, 경배하다). 이 말의 어원적인 의미는 우상의 형상에 절하는 것이다.13)

 

(3) "λατρεὐω"(라트류오; serve; 섬기다, 봉사하다). 이 단어는 종교적으로 사용되어서 주로 신에 대한 예배숭배, 제사예배에 사용되었다. 원어적인 의미는 "삶, 일이나 보상, 일반적인 봉사"의 뜻인데 그 일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개념은 전혀 없고 노예의 일에 비하여 보다 포괄적인 뜻을 띠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만 그분만을 섬기라"(마 4:10)고 유혹하는 사탄에게 최종적으로 선언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확신시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에서 성직자들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하는 표현의 언어적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4) "leitourgov""(레이투르고스): 이 단어의 기원은 “일”(e[rgon, 에르곤)과 “사람”(laov", 라오스)의 합성어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예식은 도시와 국가의 유익을 위한 공적인 행사였다. 그 원리는 세금을 지불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즉 국민은 세금을 내고 이에 대한 것으로서 국가는 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로마위정자들을 "하나님의 일군(롬 13:6)"으로 말하고 그 스스로도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일군(롬 15:16)"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단어는 크게 두 가지로 그 의미가 나뉘고 있다. 첫째, 제의적이고 제사적인 봉사, 경배를 의미(Of ritual and cultic services)를 하는 종교상의 의미이다.14) 누가복음 1장 23절에서는 제사장의 직무와 관련되고 있다. 다음으로 대제사장적인 직무수행(Of the high priest's service)에 관련되고 있다.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백성이나 국가에 대한 봉사와 관련하고 있다. 정치적 공동체에서의 봉사를 의미하는데 예배는 전체 회중의 일이요, 회중의 참여와 모인 회중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뜻이다.

 

이상 성서에서 다루어진 예배에 관한 단어들의 공통점은 예배의 대상 앞에서 한 인간 자신이 자신의 인간적인 요소를 다 버리고 그 대상의 뜻을 따른다는 것과 그를 경외하고 신 앞에서 섬기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전적인 정의나 성서적 정의는 다음에서 살펴보려는 신학적 정의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4) 예배의 정의(定義)


예배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여러 가지로 내려져 왔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와 폰 알멘(J.J. von Allmen)이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만남”이라고 정의하였으며,15) 존 헉스터블(John Huxtable)은, “예배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대화이다”라고 정의하였다.16) 그러나 그리스도교 예배의 정의로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 것들을 다음에 소개하는 것으로 정의에 가름한다.17)

 

첫째, 존 맥아더(J. MachArthur)는 “최상의 존재에게 표하는 경의”18) 즉, 예배란 최고의 존재인 하나님께 존경, 경의, 찬양, 영광을 드리는 것이라는 정의가 있고, 다음으로 프랭클린 지글러(F. Segler)의 정의로는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사람의 인격적인 믿음 안에서의 사랑어린 응답”이라고 정의하였다. 일찍이 칸트는 말하기를 “정의(definition)란 아무리 내려도 끝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 간결하고 명백한 답을 내려야 한다. “예배란, 언약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재 하는 삶”이라고...19)

 

 

3. 예배의 역사

 

예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참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종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예배의 개념은 신을 숭상하는 모든 형태와 관련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자가 있기 이전부터 분명히 예배라 불릴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배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진정한 예배의 양상을 깨닫게 하며 나아가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예배의 역사와 발달과정을 연구함으로 진정한 예배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20)

 

먼저, 기독교예배에 관해서 우리는 그 근원을 성서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우선 성서시대에서 시작하여 종교개혁시대까지의 예배의 역사적 측면을 간략히 다루어 보고자한다.

 

1) 구약시대


구약에 나타나는 예배의 역사를 여러 시대로 구분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크게 족장시대와 율법시대 그리고 포로기 이후 시대로 나누어 약술하고자 한다.

 

(1) 족장시대의 예배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족장과 그의 가족과 계약을 맺으셨음을 구약을 통해서 볼 수 있다.21) 이스라엘은 이방신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만을 믿고 예배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변하였던 것이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느냐는 신앙고백이다.22)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 가족과 더불어 삶의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였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음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이 족장시대의 예배에 있어서의 특징을 간략히 보면 먼저는 인간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었고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예배의 제단에는 희생의 제물이 그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23)이 시대의 예배는 언제나 가족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다.

 

(2) 율법시대의 예배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통해 예배가 지속되게 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의(cultus)와 도덕법(moral law)을 계시함으로써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볼 수 있다. 율법시대의 예배는 예배의식을 통하여 예배 공동체로서 현재의 경험으로 재현되었다. 특히 스데반의 설교 중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있었다는 표현을 “광야교회”(τή ἐκκλησἰα ἐν τή ἐρἠμω)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을 예배 공동체로 해석하는 좋은 예이다. 다윗 왕의 뒤를 이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예배가 성전중심으로 그 모습을 자리잡게 되었으며, 가족 중심적 예배 공동체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공적 예배 공동체로 변화되었다.

 

(3) 포로기 이후시대의 예배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여지던 예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후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의 예배를 대신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회당에 모여서 성전 예배를 대체한 '회당예배'를 갖게 되었다. 이 예배의 중심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었다.

 


2) 신약시대

 

(1) 예수의 사역과 예배

 

예수 당시의 시대에는 회당예배와 동시에 성전예배가 공존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또한 회당에도 들르셔서 예배에 참예하셨다. 그리고 예배와 관련하여 제자들과 마지막에 함께 하셨던 식탁에서 시작되는 성찬예전과 세례가 이루어졌다. 이 두 가지의 성례전은 구약의 성전예배나 회당예배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지닌 예배 의식이다. 이 예전은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 변함없는 예전이 되었고 예배의 구심점으로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2) 사도시대와 그 이후의 예배

 

사도시대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예배의 기원은 결국 초대교회의 기원과 출발을 같이 한다.24) 사도들은 예수가 부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을 중심 하여서 예배 속에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지속하였으며,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성전을 중심 하여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미와 기도를 하면서 성전을 교회와 예배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서 “가르침”(διδαχἠ; 디다케), “교제”(κοινοἰα; 코이노니아), “떡을 떼는 것”(κλωντἐς-ἄρτον; 크론테스 아르톤), 그리고 “기도”(προσευχἠ; 프로슈케) 등 네 가지 특징을 들고 이것은 “세례”(βἀπτισμα; 벱티스마)를 받은 사람을 전제로 하였다.25) 이것은 초대교회의 예배가 지니는 매우 중요한 의미로서 설교와 성만찬 등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균형을 이룬다. 그리고 기도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송영, 고백, 기원, 감사, 탄원과 중재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26)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성전예배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회당예배 역시 로마의 박해로 인해 지하의 교회로 숨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의 예배내용을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유전되는 몇몇의 자료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초대교회의 예배 내용을 우리들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첫째로, 이 당시의 예배에서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찬양으로 먼저 예배 자들의 마음을 주님께 드렸다.

 

둘째로, 구약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한 강해가 있었다.

 

셋째로, 기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기도를 비롯하여 감사, 간구, 타인을 위한 기도, 축도 등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원하는 기도를 드렸고 아멘으로 응답하였다.

 

넷째로, 예물의 봉헌으로 감사와 헌신의 표현을 하였고, 이것은 주님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성도들의 지극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섯째로, 이들은 죄인임을 표현하는 고백과 신앙고백을 개인적 또는 공동적으로 행하였고 용서를 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찬예전과 세례를 행함으로 예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재다짐과 은총의 경험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당시에서부터 서서히 교회의 조직과 예배의 형태가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고, 이런 가운데 예배를 인도하는 집례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3) 중세교회의 예배

 

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바로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일이다. 그것은 각 개인 가정이나 지하교회(Catacombs)에 숨어 분산되어 모이던 기독교인들을 공개적으로 한곳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급전하게 됨으로서 모여드는 성도들을 수용하기 위한 교회의 건물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대제가 당시의 중요도시인 예루살렘, 베들레헴,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대성전을 건축하였다. 이와 더불어 많은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의 집전을 위해서 예전이 점점 더 체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성직자의 수와 그 위치와 권위가 점점 더 커졌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있어서 예배의 변화는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희생 제사적 개념이 부활하였다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하게 되었다"는 초대교회의 신념이 점차 퇴색하면서 인간은 또 다시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었다.

 


4) 종교개혁시대의 예배

 

종교개혁은 단순히 “예전”(Liturgy)에 대한 불만과 그 시정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인간적인 교황이 자리하여서 믿음보다는 만들어진 제도 속에서 인간의 공적(功績)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비성서적인 사항에 대해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들은 공통적으로 중세교회의 예배예전에 대한 시정의 필요성을 함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예배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보여왔다. 특히 미사는 하나의 극적인 구경거리로 변모하였고, 그 절정을 영성체 시간 자체에 두기보다는 화체(化体)의 신비적인 사건에 두었다. 더구나 일반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 라틴어로 의식이 진행이 되었고,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엄하게 장식된 예전, 그리고 수준 높은 음악 등은 일반 성도들이 예배에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극히 제한하였다. 따라서 예배예전에 있어서의 개혁 또한 이 시기에는 당연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중세 교회의 예배 형태에 새로운 변혁을 가져왔으며, 만인제사장 제도의 주장에 따라 예배제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개혁시대의 예배의 전형은, 말씀 중심의 설교가 중심이 되는 예배로 자리하였고, 금속활자의 보급은 라틴어 중심에서 자국어 예배로 전향하였다. 또한 화체설에 의한 성만찬은 이제 성경적 성찬으로 변화되었으며 예배에서의 찬송은 성가대 전유물에서 회중을 위한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다.

 

 

5) 현대의 예배와 그 양태


종교개혁이후 예배의 순서들이 비교적 많이 일반 신자들에게 위임되고 있지만 여전히 오늘의 우리의 예배는 회중이 참여자로서 관여하는 예배 양태이기보다는 설교자와 사회자 및 성가대 등에게 대체적으로 집례가 국한되어 있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야말로 수동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초대교회 예배에서의 신자들의 역할은 예배의 유효성을 결정하는 파트너였다. 집례자가 재량껏 성만찬기도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의 아멘으로 답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은 회중이 아멘이라는 응답을 통해서 기도를 승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회중은 개인적인 관심에만 묶여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니라 서로 서로에 대해서 책임적인 연대감을 나누어야 하는 무리인 것이다. 예배는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닌 회중의 참여에 의해서 드려지는 공동의 행사인 것이다. 이에 참여하는 각 개인들은 결코 수동적인 관망자가 아닌 예배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참여자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Ⅱ. 성례전 -세례와 성찬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예배에서 지켜져야 할 그 내용들에 관해서는 예배를 전공하는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다. 그 이유는 속해있는 교단과 이와 아울러 신학적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예배 속에 가지고 있는 요소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오르간 혹은 피아노 전주, 예배의 부름, 기원, 성가대의 찬양과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 기도, 성경말씀 봉독, 설교, 봉헌, 성례전, 축복기도 등을 들 수 있다. 이하에서는 교회의 성례전으로서의 성찬과 세례에 관하여 살펴본다.27)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14장 제1-6절에서는 성례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희랍어로 “신비”(μυστηριον; 뮈스테리온)라는 말이 라틴어로는 “성례”(Sacramentum; 사크라멘툼)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7성례와는 달리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을 주장하며, 그 중심은 말씀에 있는데 바로 이 성례전이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일”일라고 하였다(강요 4권 14장 2절).28) 칼빈에 의하면, “성례전이란 우리들의 신앙의 연약함을 떠받치지 위하여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의의 약속을 우리들의 양심에 ”보증“(Seals; 保證)하여 주는 주의 외적인 "표지"(Signs; 標識)이다.” 또 다른 정의로는 “외적 표시를 통해 우리에게 선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라고 한다.29)

 

루터에 있어서 성례전 교리는 물적인 표적 그 자체가 아니고 그 표적에 동반하여 그것의 의의를 부여하는 말씀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30) 성례전은 각각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특별한 선언으로 된 것이다. 즉, 세례란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명령과 세례를 받고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리라는 그의 약속으로 되어있다.31) 또한 성찬식은 그의 말씀으로 세워진 것으로 사죄의 약속과 자기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는 명령을 가지고 있다.32) 여기서 사죄 선언 의식은 “땅에서 푸는 것과 매는 데 대한 그의 말씀”으로 된 것이다.33)

 

다시 말하여 성례전이란, 치유의 수단으로서 신에 의해 제정된 가시적, 감각적 표시인데 그 안에서 신의 불가시적 은총이 가시적 사물의 덮개에 싸여서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례전이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자료를 가지며, 형상, 곧 그 집행에 따르는 언어를 가지며, 성직자가 교회가 시행하려는 의도를 가진 경우이다.34)

 


1. 세례

 

1) 세례의 의미

 

세례란 중생(거듭남)의 성례로서 교회와 세상과의 구별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에게 가는 여정의 끝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의 시작을 말한다.35)

 

세례는 무엇이며, 여기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무엇인가? 비록 세례의 의식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36) 신약성서는 세례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기독교 세례의 직접적인 기원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과 명령이다. 그 이유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와 다른 점은 요한의 세례가 단순히 회개와 종말론적 준비를 위한 세례이었지만, 예수의 세례는 성령의 임재가 있었다는 점이다. 예수가 받으신 세례는 그가 메시야임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와 달리 기독교인들이 받는 세례는 예수의 독특한 세례로 말미암아 시작된 구원의 충만함으로 들어가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례의 내용은 요한의 세례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 신약의 기록들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2) 성서에 나타난 세례의 증언

 

(1) 바울서신

 

바울에 의하면 세례는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롬 6:3; 갈 3:27)이면서,37) 동시에 성령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고전 12:13). 그리스도의 삶이란 세례를 통하여 들어가게 된 성령 안에서의 삶이며(cf. 고후 1:22), 이러한 세례는 수세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편입시킨다. 세례는 성령의 선물이며 새로운 언약에의 참여를 의미한다(고후3:6).

 

에베소서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구속의 날을 위해 약속된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로 묘사된다(엡 1:13; 4:30). 물론 이 '인침'은 세례를 통하여 입교할 때에, 즉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 들어올 때 발생한다. 에베소서 5:25-27,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the washing of water with the word)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에서 보듯이, 세례는 깨끗케 하고 거룩하게 하는 행위인데, 이 말은 디도서 3:5 이하에서 중생과 갱신으로서의 입교를 설명하기 위해 또 다시 사용되었다.

 

(2) 사도행전

 

사도행전 역시 세례에 관한 많은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당시 교회의 세례에 관해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은 사도행전 2:38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명령이다: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말을 토대로 하여 당시의 세례에는 세 가지의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회개요, 둘째는 물세례이며, 셋째는 성령을 받는 것이었다.

 

(3) 맺음

 

이상과 같은 성서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에,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물세례는 성령의 선물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결정적 표시는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이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에로 들어가는 표징이다.

 

일반적으로 세례의 의미는 다음의 다섯 가지 범주로 요약된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롬 6:3-11; 골 2:13; 3:1; 엡 2:5-6). 둘째, 회심과 용서함 받음과 깨끗케 됨(막 1:4; 히10:22; 벧전 3:21; 행 22:16; 고전 6:11). 셋째, 성령의 선물(행 고후 1:21-22; 엡 1:13-14). 넷째,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됨(엡 4:4-6). 다섯째, 하나님 나라의 표징: 세례는 세상의 삶의 한복판에서 주어진 새로운 생명의 실재를 시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세례는 수세자를 성령의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다가올 세상의 표징이다.

 

 

2. 성만찬

 

1) 성만찬의 의의와 제정 시기


(1) 성만찬의 의의

 

성만찬은 초대교회 교인의 삶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마지막 만찬에 대한 기억으로의 떡과 잔의 먹고 마심은 영적인 그리스도의 현존의 실재의 상황적인 재(再)임재인 것이었다. 바로 이것을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성만찬은 세례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서 영속되도록 교회에 주신 성례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성만찬은 초대 교회로부터 예배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말씀의 예전은 다락방 예전이라고 부르는 성만찬 예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직접 참여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성만찬의 제정 시기

 

성만찬에 대한 성서적 고찰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시되고 연구되어 오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이 성례전(Sakrament)이 '유월절 식사이었느냐 아니었느냐'이다.38) 마가를 비롯하여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식사는 바로 유월절 식사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성서기술과 함께 지속되어 온 성만찬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유월절식사를 성만찬의 근원으로 이의 없이 받아들여 왔었다.

 


2) 성만찬에 대한 바울의 이해

 

성만찬에 관한 모든 기록들 중에 가장 초기의 집필은 고린도 전서 11장인 바, 예수의 죽음의 약 20년 뒤에 기록되었다.39) 이에 따르면 주의 만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전 11:23-26에 나타나는 바울의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3절에서 바울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문구를 해석하는 데에 논쟁이 있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한 것과 같은 신비한 계시인지, 아니면 바울이 하나의 전통 -제자들 사이에서 구두로 전해 오는- 을 알고 있었는지. 이러한 논쟁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바울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짧은 바울의 표현은 그 상황의 실존적 성격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 식사는 보통 식사와는 다른 것이며 예수는 이 식사 후 잡히셔서 십자가로 향하게 되며 이것은 죄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곧 진정한 양이신 예수께서 모두를 위해서 단 한 번 희생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미 고전 5:7에서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 희생의 양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울은 신령한 음식과 음료가 얼마나 속된 음식 및 음료와 혼동 될 수 있는 가를 지적하기 위해서 "주님의 떡과 잔 (27절)"이라는 두드러진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잔은 아버지에 의해서 예수에게 계획되어진 신의 뜻이었으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희생의 잔"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의 만찬은 희생적인 식사, 주님의 희생적인 삶을 부어 주는 데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의 희생적 제공, 즉 세상에서 그의 몸이었던 것에 직접적으로 향하는 제공 안으로의 참여를 포함하고 있다.

 

 

3) 루터의 성만찬 이해

 

루터는 1520년에 저술한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 제도와 신학을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성만찬에 관해서 로마 교회가 세 가지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신자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를 주지 않는 것이다. 루터는 고전 11장 25절의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것은 일반 신도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으로 포도주를 일반 신도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성례전을 변질시키는 것이고 다 함께 참여함으로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되므로 잔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죄에 속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둘째는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40)의 과오를 지적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은 마술적인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은 신조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설(說; Meinung)일 뿐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셋째로 카톨릭 교회가 성만찬을 희생 제사로 해석함을 지적한다. 루터는 성만찬이 희생 제사(Opfer)도 인간이 행하는 선업(gutes Werk)도 아니고 만찬이며, 그리스도가 이 만찬을 제정한 것은 믿는 자를 위로하는 신앙을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기 위하여서라도 역설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성찬에 현존(Realpr senz)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을 카톨릭과 같이 문자대로 믿었으나 카톨릭과는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루터는 성만찬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관시키고 있다. 그는 대 요리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단순한 빵과 포도주에서 구별시켜 주는 것은 말씀이고, 말씀이 외적인 요소(Elemente)와 결합할 때 그것은 성례전이 된다. 말씀으로 인하여 그 요소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하실 수도 없고 속이실 수도 없다".

 

루터는 성찬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이것을 통하여 죄 사함을 얻고, 새 사람을 강화시키고 영양을 주며, 우리들의 신앙이 새로워지고 강화시켜 주는 양식과 자양물"이라고 하였고, 죽음에 대항하는 힘을 얻고 영생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능력과 유익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이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4) 칼빈의 성만찬 이해와 실제

 

칼빈의 성찬론은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의 비성서적인 성찬론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면서 소위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성찬의 중요한 기능은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한 6: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한 6: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약속에 대한 '인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은 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그는 또한 성서 주석에서 "성찬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려고 준비된 기념물"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1542년의 제네바 신앙 문답서 제362문에서 성찬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이며 표시이다. 즉 이러한 예전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3. 맺음

 

세례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시작을 뜻하는 것처럼, 성찬은 생활의 계속을 의미한다. 성찬은 은혜의 최고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며,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성례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대로 그것을 하나님에게 다시 바치는 것이다. 여기서 예배란 하나님께로 온 것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보내는 당연한 이상적인 참 모습이 될 것이다.

 

세례는 신학적인 면에서 교인으로 하여금 교회생활과 교회 연합의 성장을 위하여 활기를 불러일으킴에 틀림이 없다. 무엇보다도 세례의 의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속을 온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참한다는 것은 새 생활을 향한 인간 생활의 확장을 말하며, 그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성찬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찬은 기독교 예배의 요소로서 가장 중요한 행위가 되며, 이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성찬은 기독교 예배의 최고봉으로서 말씀의 성례전이며, 성경 가운데 포함되어 있고, 설교에 의하여 선포되고, 찬송가와 신조로서 고백된 복음의 표지이며 보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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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신, 『예배학』(서울: 총신대학출판부), p. 2.

 

2) 지원용 편, 『루터사상의 진수』(서울: 컨콜디아사, 1989), p. 288.

 

3) 기독교 예배는 신학적 기반 위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여진다. Everett Ferguson, 기준서 역, 『현대인을 위한 성서적인 교회』(서울: 그리스도신학대학출판부, 1997), p. 296.

 

4) 정장복, “실천신학의 실상과 그 이해.” 김중은(외 11인 공저), 『신학 어떻게 할 것인가?』(서울: 아멘서적, 1992), p. 120. 정성구, 『실천신학개론』(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80, 1996), p. 145.

 

5)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teralism(Grand Rapids, Eerd. Co. 1974). p. 54. 정성구, ibid., p. 154에서 재인용.

 

6) 장성영, 『그리스도교 예배의 원리』(서울: 홍익제, 1995), pp. 35-36.

 

7) Cf. 장성영, 『예배와 성례전』(서울: 태광출판사, 1994), p. 9.

 

8) E. Ferguson, op. cit., p. 292.

 

9) Cf. ibid,. p. 10.

 

10) Cf. 창 24:26; 출 4:31, 34:8; 역대하 29:30.

 

11) Cf. 사 19:21.

 

12) 동사 ‘고뉘페테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마 17:14에서 간질병자 소년을 위한 아버지의 간구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b) 막 1:40에서 문둥병 치유를 위한 문둥병자의 간구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 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c) 막 10:17에서 한 사람의 영생에 대한 질문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d) 마 27:29에서는 경배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Cf. Walter Bauer; J. H. Thayer; H. Schlier; H. Schonweiss. 이병철편저, 원어성경 해석대전(CD 판), (서울: 브니엘성경연구소, 1999).

 

13) Cf. 행 7:43; 마 4:10; 계 5:14. 이 단어는 신약 안에서 24회 정도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서 가장 보편적으로 헬라인들이 사용하였던 말이었다.

 

14) 헬라어 신약성경, 김한수 편저(서울: 세풍성경연구소, 1995), p. 620.

 

15) Robert E. Webber, Worship -Old and New(Miami: The Zondervan Co, 1982), p. 8; J.J. von Allmen(정용섭 외 3인), 『예배학원론』(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p. 11. 장성영, 『그리스도교 예배의 원리』, op. cit., p. 39에서 재인용.

 

16) John Huxtable, The Bible Says(Richmond: John Knox Press, 1962), p. 109. 장성영, ibid.

 

17) 장성영, ibid., p. 40.

 

18) J. MachArthur, Jt., True Worship(California: World of Grace Communication, 1982), pp. 6f. 장성영, ibid.

 

19) 장성열, op. cit., p. 41.

 

20) 총신, 『예배학』, op. cit., p. 14.

 

21) 그 예를 창세기 18장 19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2) 정성구, op. cit., p. 160.

 

23) Cf. 창 15:9-10.

 

24) 정성구, op. cit., p. 161.

 

25) Ibid.

 

26) Cf. 행 2:41-42.

 

27) 로마교회에는 7성례전(세례, 성찬, 고해, 사제의 서품, 결혼, 견신례, 종부성사)이 있고, 개신교회에는 두 가지(성찬과 세례)가 있다. Ingeberg C. Henel, 송기득 역,『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사상사』(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p. 204-205.

 

28) John Calvin, 이형기 역,『기독교강요요약』(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p. 404.

 

29) John Calvin, Institutes, Ⅳ,ⅹⅳ, 1. Ford L. Battles, 양낙홍 역, 『존 칼빈 기독교강요』(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p. 186.

 

30) W.A.Ⅺ.432. 19; 433. 18f. Philip S. Watson. 이장식 역,『프로테스탄트 신앙원리』(서울: 1990), p. 290.

 

31) Cf. 마 28:18ff; 막 16:15ff.

 

32) Cf. 마 26:26ff; 막 14:22ff; 눅 22:19ff 및 고전 11:23ff.

 

33) Cf. 마 18:18.

 

34) I.C. Henel, op. cit., p. 204.

 

35) 총신, 『예배학』, op. cit. p. 84.

 

36) 베스터만은 세례의 기원이 완전히 어두움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Claus Westermann, 이정배 역, 『신학입문Ⅰ』(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p. 164.

 

37) Cf. ibid., p. 165.

 

38) Ibid., p. 166.

 

39) Ibid., p. 167.

 

40) 화체설은 1551넌 10월 11일 트렌트 공의회 13회기의 제4장에서 다시 한번 명확히 공포되었다: "제4장 실체 변화에 대하여; 우리의 속죄주 그리스도는 빵의 형태 아래 봉헌된 것을 참으로 그의 몸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언제나 확신되어 온 것을 이제 이 성스런 공의회는 새로이 선언한다. 즉 빵과 포도주의 축성에 의하여 빵의 실체 전부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화하고 또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그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고 거룩한 카톨릭 교회는 이 변화를 실체 변화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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