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지서 소선지서 사사

[스크랩] 소선지서 총론

하나님아들 2018. 3. 14. 10:59

소선지서 연구(이창배 교수 강의)에 제출한 소선지서 총론입니다. 롱맨.딜러드의 "최신구약개론"을 중심으로 편집한 자료입니다.

 

소선지서 총론

트럼퍼 롱맨 외

호세아서


  호세아서는, 히브리 성경에서 소위 “12서”(The Twelve)라고 명칭이 붙은, 다소 짧은 책들의 모음집 중 처음 나오는 책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모스서가 호세아보다는 약간 앞서 있다. 오늘날 이 열두 권의 책은 ‘소 선지서’(The Minor Prophers)라고 불린다. 이 책들은 대략 연대 순서로 배열되었다. 호세아, 아모스, 요나, 미가는 신 앗시리아 시대 초기에 속하는 것들이요(700년대 중반기와 후반기), 나훔, 하박국, 스바냐, 오바댜는 신 바벨론 시대의 것이다(500년대 후반), 나머지 책, 즉 요엘,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페르시아 제국 시대의 선지서로 분류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저작 연대 및 저작권

  이 책의 표제는 저자가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라고 말하고 있으며, 선지서들의 표제들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라서 그의 사역 시기에 통치했던 왕들의 이름을 통해서 그의 사역의 연대를 언급해주고 있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시대”(1:1). 이 구절은 연대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 책의 표제가 호세아의 활동시기를 주전 8세기로 말하고 있으나, 여로보암 2세의 통치가 언제 끝났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여로보암 2세의 말년의 연대는 주전 753년부터 746년 사이이다.

  남왕국 유다의 왕들의 통치연대는 보다 확실하다. 웃시야의 통치는 791년이며, 히스기야는 687년에 죽었다. 따라서 그가 여로보암 시대 말엽에 사역을 시작해서 히스기야 시대(715년 시작) 초엽에 자신의 사역을 마쳤다는 추정이 제시된다. 그러므로 이 책의 표제는 호세아가 주전 750년부터 715년 사이에 활동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는 소선지자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들 중의 하나였다(아모스 및 미가와 더불어).

 

  논제 및 다른 시각들

  이 책의 표제나 1절에서, 이 책을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의 것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호세아가 예언의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이 책이 복수의 저자를 갖고 있다는 근거가 표제 자체에 드러나 있다고 한다. 호세아는 북왕국의 선지자이며, 그의 예언은 주로 북왕국에 대한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편집된 형태의 호세아서에 때때로 유다에 대한 언급들이 삽입되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많은 비평학자들은 호세아서가 나중에 유다에서 편집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책 속의 두 종류의 텍스트에 대하여 그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기는 하다. 즉 ‘유다’를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1:1,7; 2:2; 4:15; 5:5,10,12,13,14; 6:4,11; 8:14; 10:11; 11:12; 12:2) 과 ‘구원’에 대해 다루고 있는 부분(11:8-12; 14:2-9)이다.

  먼저, 유다 부분은 호세아의 메시지에 ‘끼여 넣어진’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왜냐하면, 그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모스나 이사야 같은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도 이스라엘과 유다를 모두 언급했다(암 2:4-8; 사 5:7; 48:1). 만일 ‘유다’에 관한 구절들은 빼버린다면,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호세아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를 줄뿐이다. 이것은 또한 유다-에브라임, 또는 유다-이스라엘의 시적 대구에 의한 대구법의 묘미를 파괴하는 위험성이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인용된 구절이 유다를 비우호적인 자세로 묘사한다. 이 사실을 볼 때, 이 구절들이,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유다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는 ‘친유다적’인 편집자가 훨씬 후대에 삽입한 것이라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

  또한, 호세아의 ‘구원’에 관한 부분도,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신비성이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왜냐하면 그 부분은 이 선지자의 암울하고 운명적인 메시지의 내용과는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세아서의 전반적인 메시지의 색깔과 그 구원 선포의 부분이 서로 상반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구원의 주제는 이미 1-3장의 예언에 소개되었다.(1:10-11; 2:14-23; 3-5). 일반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속에서 의로운 자에 대한 구원의 약속은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핵심이었다(사 10:20-27; 합 9:11-15; 미 4:1-7).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과,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결혼’ 언약의 불이행은, 앗수르 침략의 위협과 함께 맞물려 호세아로 하여금 예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가 죽기 직전부터(B.C. 753년)사역을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아마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2만 7천여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메소포타미아로 잡아갈 즈음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B.C. 722년, 왕하 17:1-34). 호세아의 메시지는 대략 므나헴 왕이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기 시작하던 해부터(대략 B.C. 739년, 5:13; 8;9; 12:1에 암시되어 있음) 722년 사마리아가 멸망할 때까지의 사이에 기록된 것 같다. 만일 호세아가 B.C. 735년-734년(5:8-6:6?)의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을 알고 있었다면, 이 사실은 호세아서의 연대 문제를 보다 구체화하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지자의 전승을 성실하게 따르는 후대의 추종자들이 이 선지자의 사후 수십 년 후에 그의 전승의 내용들과 남왕국의 상황 사이에 유사한 점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 책의 본문 속에 유다의 상황들에 대한 내용들을 삽입해 줌으로써 양자간에 연결점들을 제공해 주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삽입구들은 성경의 형성 과정의 일부이며, 이 본문들의 정경적인 권위에 손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배경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는 보통 북 왕국 이스라엘의 ‘황금기’라고 불린다. 국가적 정치 경제의 재 부흥의 근거는 여로보암의 아버지 요아스에 있었다. 그는 이미 세 번의 연속적인 원정 전투에서 시리아나 아람에 대하여 승리했으며,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을 외국 세력의 굴욕과 압박에서 해방시켰다.

  여로보암 2세는 선친의 군사 팽창 정책을 이어받아, 이스라엘이 다윗과 솔로몬 치하에 확보했던 동북쪽 경계선까지 재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왕하 14:25, 28). 이처럼 여로보암의 강력한 지도 아래 이룩한 군사적 위업과 정치적 안정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부유한 상인 계층이 형성되었다. 여로보암 치세의 풍성함은, 건축 양식에 있어서의 화려함이나 물질적인 사치, 그리고 농작물의 풍요로움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황금기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평가하셨다. 몇 해 전에,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도록 하셨다(B.C. 760-750). 호세아보다 연장자였던 아모스는 그 ‘국제적’인 국가에 대하여 담대히 경고하고, 여로보암 체계하의 포악하고 억압적이고 불의하고 항략적인 정책들을 저주했다(암 2:6-16). 그러나 아무도 아모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아모스는 고향을 떠나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암 7:10-17).

  그러나 때가 되자, 여호와 하나님은 적절하고 ‘합법적’ 은유를 사용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셨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고발 내용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확실한 판결 내용을 선포했다(4:1-6). 부유함과 번영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속화된 그들의 이기주의와 자만, 그리고 욕심 등은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타락으로 몰고 갔다(9:9). 철저한 사회적, 도덕적 부패가 뒤따른 것이다(4:2, 18; 6:8-9; 7:1)

  한층 심각한 부패상은 이스라엘의 배교였다. 그들은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낸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동쪽 바람’-이것은 그들의 얼빠진 외교 정책을 비꼬는 말이다-을 따랐다. 또한 바알신을 따르고 음행과 ‘큰 악’을 몇 갑절이나 더 행했다(10:15 7:16; 12:2; 13:1-2).

  여로보암 2세 사후의 북 왕국의 급격한 쇠퇴는, 호세아의 말씀을 더욱 시급한 경고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왕위를 찬탈하고 계속 궁중 살해 사건이 일어남으로 정치는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30년 동안의 자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6명의 왕 중 4명이 살해되었다.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앗수르에 생포되어 갔다(왕하 17:6).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사마리아의 왕들은 “물위의 거품”처럼 멸망했다(10:7).

  앗수르나 이집트, 그리고 유다에 의해 가해진 외부적인 압력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리석은 동시에 필사적인 외교 정책을 취하게 했다(7:11). 다음과 같은 일련의 치명적인 정치적 실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결국 자멸을 초래하게 되었다:

  (1) 므나헴이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조공 국가가 되도록 하여 디글랏 벨레셀에게 매년 조공을 바침으로써 임박한 침공을 피해 보려고 한 것(740년 B.C: 왕하 15:19).

  (2) 유다가 앗수르에 대항하여 형성된 이스라엘-아람 동맹군에 가담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베가가 계속 유다를 침공한 사실(B.C. 735년: 왕하 16:5-9). 유다 왕 아하스는 많은 조공을 바침으로써 디글랏빌레셀의 도움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베가는 유다를 앗수르의 조공 국가로 만든 것이다. 이스라엘-아람 동맹군을 대적한 앗수르의 원정 - Syro -Ephraimate 전쟁이라 불림-은 그들을 단숨에 무찔렀다(왕하 15:20; 16:9). 앗수르인들은 갈릴리와 요단강 건너편 지역의 모든 이스라엘 영토를 빼앗고, 여러 성읍들을 포위했으며, 상당수의 인구를 메소포타미아로 생포하여 갔다.

  (3) 호세아왕이 이집트와 손을 잡고 앗수르에 대항하려 했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가의 운명은 결정적이었다. 앗수르 군주에게 바칠 조공을 바치지 않음으로써, 왕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직접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앗수르는 이 조공 국가의 배반에 대해 이스라엘의 정치적 역사가 끝나도록 대응했다. 사마리아는 약탈되었고 수천 명의 이스라엘인은 북 메소포타미아에 포로로 끌려갔으며,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철저한 속국이 되었다(B.C. 724-722. 왕하 17:1-6)

  호세아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은 여로보암 2세 말엽 및 남왕국의 웃시야의 시대에 시작되어서 남왕국의 히스기야 시대 초엽에 종결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의 사역은 북왕국과 남왕국이 공히 팽창과 번영을 누리던 시기에 시작되었다. 앗시리아는 자신의 북쪽 및 동쪽 경계선에 발목이 붙잡혀 있었으며, 아람인들 역시 약화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보통 북쪽 경계선에서 항상 존재하고 있던 압박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왕하 14:25).

  호세아는 북왕국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 북왕국에서는 여로보암 2세 이후에 정치적인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여로보암 2세 이후의 시대는 또한 앗시리아가 다시 강력하고 공격적이 되는 시대였다.  이 앗시리아는 먼저는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서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살만에셀 5세에 의해서 영도되었는데, 이 후자는 사실상 주전 722년의 북왕국의 완전한 패배와 병합으로 이어지는 갈등을 야기시킨 인물이다.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여로보암 2세가 사망한지 얼마 안되서 서쪽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첫 번째 침공은 주전 738년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하맛을 차지했다.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므나헴은 조공을 바침으로써 이 침략 의욕을 누그러뜨리고자 하였다(왕하 14:19-20).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서쪽으로 돌아온 것은 사년 후였는데, 그동안에 반아시리아적인 성향을 가진 왕위 찬탈자 베가가 므니헴의 아들 브가하야를 살해했다(왕하 15:23-25).

  그와 시리아의 르신은 앗시리아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 당시 아하스에 의해 통치되고 있던 유다의 도움을 원했다. 아하스가 반 앗시리아 연합에 가입하기를 거부하자 베가와 르신은 그가 가입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그와 전쟁을 벌였다(주전 735년경). 아하스는 다글랏 빌레셀에게 북쪽으로부터의 공격에서 구해줄 것을 간청했고, 앗시리아왕이 북왕국을 공격함(주전 733년경)으로써 북왕국의 일부 거민들이 유배를 당하였다.

  호세아의 많은 신탁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시작부분에 하나님께서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 집에”(호 1:4) 갚을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다. 이 신탁은 여로보암 2세의 시대, 여로보암 2세의 아들이자 이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가랴가 살룸에게 암살을 당함으로써 예후 가문의 종말을 고하기 직전에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왕하 15:8-12).


  호세아란 인물

  이 책의 표제에서 그는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1:1)라고 소개한다. 호세아 선지자는 브에리의 아들이요. 여로보암 2세 치하의 소위 ‘황금기’에 이스라엘에 거주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 ‘호세아’(Hosea, 혹은 Hoshea)는 구약시대에 흔한 이름이었으며, ‘돕다’ 또는 ‘구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민 13:16의 여호수아: 신 32:44) 이 이름은 ‘구원’을 의미하는 히브리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수(Jesus)나 ‘예수아’가 이름의 형태이다(마1:21) 호세아는 8세기(B.C)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요나를 제외하고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기록으로 책을 남긴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블라임의 딸이요 창녀였던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하셨다. 호세아는 고멜의 불륜을 통해 얻은 세 자녀 - 즉, 이스르엘, 로루하마, 그리고 로암미 - 의 아버지였다. 호세아의 결혼을 둘러싸고 일어난 상황들은 그의 선지 사역의 핵심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고멜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파기를 유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탁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고 있는 관계와 인간의 결혼관계 사이의 유비에 대한 용례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것은 호세아의 아내의 정숙하지 못한 행동 속에 반영되어 있다. 이 문제가 많은 결혼 생활을 통해 태어난 자녀들은 야웨와 이스라엘간의 언약관계가 파기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름들을 갖고 있다(1:5,6,9).

  본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호세아로 하여금 창녀와 결혼하게 명령하셨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 때문에 어려움이 생긴다(1:2). 어떤 이들은 이 본문을 하나의 역사기록으로 해석하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나 이상으로 읽어야한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을 때의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은 호세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정숙치 못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창녀와 결혼하는 것을 금하신 적이 없다(레 21:7, 14).


문학적인 분석


장르 및 연설의 양식들

  호세아서는 선지서이며, 따라서 신탁들의 모음집이다. “여호와의 말씀”(1:1)이라는 이 책의 표제는 이러한 장르상의 표시를 해주고 있다. 이 책은 산문으로 되어있는 두 개의 신탁(1:2-2:1과 3:1-5)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운문으로 되어 있다.

  호세아서 1-3장의 신탁들을 개관하는 일은 호세아서 4-14장의 신탁들을 개관하는 일보다 더 쉽다. 예를 들어, 호세아서 1:2-9는 심판의 연설이며, 1:10-2:1은 구원의 연설이다.

  호세아서 4-14장에서는 구원에 관한 내용을 심판에 관한 내용으로부터 그 어조에 따라 구원해 내는 일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각 신탁들을 구분해내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호세아서는 다른 선지서들에서 발견되어지는 전형적인 서론구들(“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등과 같은 문구들)과 결론구들을 생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하나님의 일인칭 연설(하나님의 연설)과 하나님에 대한 삼인칭 연설(선지자의 연설)을 구분해 줄 필요가 있다.


  문학 형식

  하나님의 대사로서 호세아는 백성들과 맞서(소송 혹은 법적 논쟁, 2:2;4:1;12:2) 하나님 편에서(12:9;13:4) 말하였다. 그는 예언 전통과 지혜 전통에 매우 친숙함을 보여주었다(14:9). 몇몇 신탁은 특징적인 “신의 말”(즉, “여호와가 일인칭으로 말하는 곳”)로 되어 있고, 몇몇 신탁은 “예언 말”의 상투적 언어(삼인칭)로 되어 있다. 호세아서의 독특한 예언 말 형식은 탄식과 위협과 고소가(4:6, 7;5:11;7:8, 9;8:1-14) 담긴 립(rib, “법적 논쟁”)과, 권고와(2:2, 3; 4:15; 8:5; 14:1, 2), 교훈과(2:21, 22; 5:1; 8:7), 격언과(6:6), 구원 신탁들(14:5-9)이다. 그의 문체는 생생하고, 북 왕국의 생활 실태에 매우 익숙한 필치다. 볼프는 그것을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호세아의 말을 듣는 청중은 그가 사용한 엄청난 숫자의 은유에 분명히 놀랐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는 삶의 어떤 영역도 빠뜨리지 않았으나, 식물과 동물 세계와 가족생활에서 유추한 상징을 확실히 두드러지게 사용하였다.” 그는 잠언, 대구, 강조 어구(catchwords),  반어, 직유, 은유, 반복, 유음, 재담(wordplays)을 자유로이 구사하였다.

  북왕국에 대한 호세아의 예언은 후에 기록되고 수집되었다. 사마리아가 멸망한 후 유다의 경건한 자들은 그 선지자의 메시지를 자신들에게 적용하고 그 예언을 기록하여 보존하였다. 물론 정경적 기능과 역사적 배경의 차이로, 이스라엘이 풍산 제의와 이방문화를 수용하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영합하여 현실정책의 길을 택한 것에 대한 호세아의 비난 같은 것은 해석과 적용에 있어 면모를 달리하였다. 그러나 예언의 보존은 호세아의 결혼 유비가 주는 예표적 의의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됨을 의미한다. 호세아의 결론적인 요청은 각각의 새 세대가 하나님의 계시에 비추어 그 길을 평가하라는 것이다(14:9).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글을 통해 유다에서도 말하였고(1:7, 11; 4:15; 5:5, 10, 13; 6:4, 11; 11:12; 12:2), 현재에도 여전히 은혜 언약에 접목된 모든 사람을 향하여 말한다. 호세아서의 정경적 기능은 사마리아의 멸망을(722 B. C.) 넘어 남 왕국과, 포로 후기와,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까지 확장된다.


  구조 및 조직

  호세아서의 구조는 난해하다. 처음 세장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대로 문단 구분을 활 수 있지만 나머지 열한장은 대략적으로 개관 할 수 있다.  모든 학자들은 호세아서 1-3장과 4-14장 사이에 카다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처음 부분에는 결혼에 대한 유비가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비유적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다.

  1-3장에 기록된바, 음탕한 고벨과 호세아의 결혼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전기요 자서적인 글이 포함되어있다. 이 부분은 4-14장까지의 예언에 대한 서문 구실을 한다. 결혼 관계 이야기는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 ‘팰리스트로피’(Pailstrophe)라는 문학적 패턴으로 배열되었다. 이 교차배열법(chiastic) 구조는 한 가지의 중요한 가르침이나 사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신학적 주제에 상대적인 균형을 제공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지식의 결핍은 이 문학적 구조의 “요점”이 된다.

  또한 11장과 12장 사이에 또 하나의 구분선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가능한데, 그 결과 나누어지는 각각의 부분은 각기 심판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을 담고 있다. 

  포로기 전기의 ‘기록 선지자’의 특징인 네 개의 표준적 개요가 본문의 선포된 말씀 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호세아서의 메시지의 기본 구조를 형성한다.

  (1) 고발(비난적인 것): 언약의 범죄에 대한 특정적인 비난(4:1-11)

  (2) 심판: 파멸과 포로됨(5:1-8, 14)

  (3) 교훈: 회개를 촉구함(6:1-3),

  (4) 희망: 의인의 회복에 대한 약속(14:1-8)

  이스라엘에 대한 호세아 메시지의 언어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행한 ‘고발’에 반영되어 있듯이, “언약 불이행 모티프”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적인 용어가 선지자들의 글에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을 고발할 때, 예를 들면, ‘쟁변’(4:1), ‘다투다’ 또는 ‘책망하다’(4:4), ‘범죄’ 또는 ‘맹세’(4:15) ‘심판’(5:1), ‘증거’(5:5), ‘어기다’(5:7) 등이다. 호세아서의 또 다른 문학적 특징은, 북 왕국을 지칭하는 말로서,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을 동의어적 시적 대구로서 또는 한 쌍의 말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4:16-17: 5:3), 그리고 이 선지자가 특히 ‘언약’에 대한 언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돌아가다’(6:1), ‘알다’(6:3), ‘구속하다’(7:13), ‘언약을 어기다’와 ‘율법을 범하다’(8:1), 그리고 ‘사랑’(11:1), ‘쟁변’(12:2)등이다.


  * 표제(1:1)

  I. 1:2-3:5 호세아의 결혼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반영함

    A. 1:2- 2:1 호세아, 고멜, 자녀들

      1. 1:2-9 심판에 대한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

      2. 1:10-2:1 관계의 회복

    B. 2:2-23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1. 2:2-13 관계의 파기

      2. 2:14-23 관계의 회복

    C. 3:1-5 호세아의 결혼 관계의 회복

  II. 4:1-11:11 첫 번째 부분의 예언들

    A. 4:1-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신실치 못함을 책망하심

    B. 5:1-15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벌하심

    C. 6:1-7:16 호세아의 회개에 대한 촉구가 무시당함.

    D. 8:1-10: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그를 배척한 것에 대해 벌하심

    E. 11:1-11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진노를 뛰어넘음

  III. 11:12-14:8 두 번째 부분의 예언들

    A. 11:12-12:14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함

    B. 13:1-16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심

    C. 14:1-8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축복받음

  * 지혜 문학적인 성격을 가진 후기(14:9)


  문체

  이 책은 비록 두 개의 중요한 산문부분(1:1-2:1과 3:1-5)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시적이다. 이 책의 시적 문학적 특징들 중 두드러진 것은 이 책에 사용된 직유나 은유들이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그 대상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것과 이스라엘에 대한 것의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질투하는 남편(2:2-13), 좌절한 영치기(4:16), 파괴적인 좀 원치 않는 부패물(5:12), 성난 사자(5:14), 그물(7:12) 등이다. 그러나 반면에 그는 또한 용서하는 남편(3:1-5), 치료하는 의사(6:1-2), 소성케 하는 비(6:3), 사랑이 많은 부모(11:3-4), 보호하는 사자(11:10-11), 생기를 주는 이슬(14:5), 푸른 잣나무(14:8) 등이다.

  이 책은 북왕국을 불신실한 아내로 아주 빈번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대로는 남왕국도 가끔씩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1:2-9, 3:1-5, 9:1).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은 폭풍을 거두는 것과 같고(8:7), 물거품이 사라지는 것과 같으며(10:7), 말을 듣지 않는 송아지를 길들이는 것과 같다(10:11).

  다른 문학적인 기교들도 이러한 비유적인 표현들에 도움을 주는데,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 유희의 활용일 것이다. 호세아의 자식들은 “이스르엘”(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저질러진 죄악으로 하나님이 예후의 집을 벌할 것임), “로-루하마”(긍휼이 없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 등이다.


신학적인 메시지


  간부인 아내 고멜과 호세아의 관계는, 여호와 하나님이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적 관계를 상징한다(1;2). 그의 결혼 생활 속에 나타난 거절된 사랑과 회복된 사랑의 드라마는 계속 불륜의 삶을 사는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메시지의 기초가 된다. 여호와의 길로 걸으라는 권면은 호세아 자신의 뼈아픈 체험에서 우러난 연민의 정에 바탕을 둔 것이다.


  언약

  다른 모든 선지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약, 그 중에서도 모세 언약이 호세아의 메시지 배후에 갈려 있으며, 또한 그 동기의 역할을 한다. 스튜어트는 호세아서의 심판의 연설들과 언약의 저주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연결점들을 지적했다. 그는 호세아서 4:10-11a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심판의 연설이 “기근과 불임”에 대한 언약의 저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보았으며, 신명기 28:17-18과 32:24-28을 증거구절로 인용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깨뜨린 것 때문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6:7, 8:1).

  이스라엘의 과거는 에브라임에 대한 호세아의 에언 속에 현저하게 모습이 그려진다. 히브리 족장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12:2-6)과 출애굽 당시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사랑의 묘사 부분(11:1-4:12:9: 13:4)은 하나님의 한결같으심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하나님이 회복의 언약을 반드시 지키실 것을 보증해 준다.

  언약 갱신을 통해 언약들-은혜와 약속의 경영들로서-이 변화된다. 하나님은 언약의 혜택들을 제한하는 대신, 그의 약속들을 은혜롭게 확대하고, 아골(환난 2:15)이 뜻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불운을 ‘소망’과 회복과 언약 갱신의 새 시대로 변화시킨다(1:10,11; 2:15, 22, 23)

  언약 갱신은 이름을 바꾸는데서 암시된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가 “너는 내 백성이라(2:23)가 되고, 이스르엘(피흘림)이 풍요와 번영과(vv. 22-23) 한 지도자 아래서의 지파들의 통일을 (1:11) 상징하게 된다.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역시 언약 갱신 의식에서 대체된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2:19) 장가들 것을 자유롭게 약속한다. 이렇게 하여 불운이 축복으로 바뀐다.

  언약 갱신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창조와 구속이 하나로 합쳐져 있음을 확신시킨다. 피조물의 새롭게 함은, 하나님의 다중적인 약속들이 성취되면서 하늘과 땅이 구속받은 자들의 필요에 응할 구속의 완성을 여는 일이다. 피조물이 조화를 누릴 때에만 (롬8:22-23),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호 2:18). 이것은 낙원과 같은 샬롬 상태의 회복을 포함한다(vv.18, 21-23).

  언약은 하나님의 것이다. 약속들을 이행하고 성취함에 있어 그 무엇도 그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 백성을 그 땅으로 돌이키고, 그들의 죄와 고통에서 그들을 ‘치료하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움으로 그들의 행복을 새롭게 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1:10-11; 14:4-8). 그가 언약들-창조, 아브라함, 모세, 다윗 언약-속에서 약속한 것은 모두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이 더 누리면 더 누리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호세아의 결혼

  호세아는 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 여인의 정숙치 못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정숙치 못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전적으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관계로는 결혼이라는 관계와 언약이라는 관계의 두 가지가 있다. 이 관계 속에서 경쟁자란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럼으로 고멜의 성적인 방탕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방탕과 상응한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음녀 고멜과 결혼한 사실은, 성경학자들 사이에 해석적 이견을 갖도록 했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은 이 선지자의 결혼에 관한 견해들을 요약해 본 것이다:

  (1) 상징적인 결혼

  이러한 이해는, 그 결혼을 히브리 역사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풍유, 또는 선지자의 환상으로 가상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2) 한번의 실질적인 결혼, 그 이후 이야기는 창작물

  이 해석 방법은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한 역사적 사실성을 인정하며, 1장과 3장의 사건을 선지자의 생애에 있었던 별개의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약간 수정된 다른 견해에 의하면, 고멜이 결혼으로 호세아와 결합되는 순간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가지의 독특한 가능성이 논쟁을 통하여 제시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할 당시 창녀였으며 매우 불결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도덕적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명령을 했을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할 당시 정숙한 여인이었으나, 다만 결혼 이후에 호세아에 대한 정절을 버리고 창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일부에서는, 고멜은 영적으로 이방신을 섬긴다는 점에서 ‘창녀’였다고 한다.

  (3) 한번의 실질적인 결혼, 그 이유의 이야기는 평행 반복되는 것

  이 해석은 호세아의 개인적 경험을 축소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의 결혼의 사실성은 인정된다. 이 해석은, 1장과 3장을 한 사건에 대한 평행 구조적 설명, 또는 같은 사건을 그 선지자의 일생 중 각각 다른 시기에 묘사한 두 개의 기록이라고 이해한다.

  (4) 두 번의 실질적인 결혼

  이 관점에 의하면, 1장은 호세아가 정숙한 여인 고멜과 결혼한 첫 번째 것이요, 3장은 다른 신원 미상의 창녀와 두 번째 결혼한 것을 묘사했다고 한다.

  우리의 판단으로 가장 합당한 해석은, 호세아가 창녀인 고멜과 실제로 한번 결혼을 했다는 견해다(따라서 1장과 3장은 이 선지자의 생애 중 두 개의 별도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녀는 단지 부정한 신부였을 뿐 아니라, 부인으로서 더러운 사람이었다. 뒤에 호세아는 그녀의 빚을 갚아주고 노예 시장에서 해방하여, 일정 기간 격리 기간을 거친 뒤에 아내로서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었다. 비록 위에 제시된 어떤 견해도 완벽하지 못하지만, 방금 언급한 내용이 1장과 3장에서 묘사한 호세아의 결혼을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견해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방법은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순례의 역사에 가장 완벽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겔 16, 23)

  비록 히브리 제사장들에게는 창녀와의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레 21:7, 14), 선지자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사실, 호세아는 이 책의 표제부인 첫 절에서 선지자라는 호칭으로 불리지 않는다.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지만, 분명히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사 20:1-6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벗은 몸과 벗은 발”의 여인에 대한 예언 부분을 참고하라). 위의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 대변인인 호세아에게 매우 중요한 명령을 주신 것이다. 매우 시급을 다투는 시기에는 보다 과격한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스라엘은 곧 망각의 변두리에 와 있었으며, 단순히 말로써 전하는 메시지는 그들에게 더 이상 충분한 효과를 발할 수 없었다.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평가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결국 잘못이라고 했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으며, 우리의 생각이 미치는 그 너머에 있다(욥 9:10-12; 사 55:8-9).


  이스라엘은 음녀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백성이 그들의 창조주와 구속주를 배신하였다.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13:6 ; 참고, 5:5 ; 7:10).  이 주제는 결혼 유비에서 극적으로 묘사된다.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고멜이 이미 알려진(신전) 창기였는지 단순히 간음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던 여인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고멜의 상징적 의의는 그녀의 역할이 풍산 제의에 의존해 문화적 동질성을 찾고 있는 이스라엘을 풍자한 데 있다. 호세아와 고멜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 - 이스르엘(“피 흘림”),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은 왕과(이스르엘) 백성에 (로루하마, 로암미) 대한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였다.

  이스라엘의 자아 도취적인 생활 방식에 의해 은혜, 언약, 여호와와 그들과의 독특한 언약적 관계는 값싼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스라엘은 열방으로부터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배우고, 여호와에 대한 충성을 번영과 권력과 성(性)의 신들과 바꾸었다. 이스라엘은 이전과는 달리 탐욕과 정욕과 부와 빠른 보조의 삶과 인간성 무시와 하나님과의 자기 만족적인 관계를 조장하는 생활 양식을 선택하였다. 더 이상 이스라엘은 신의 계시에 의해 형성된 반문화의 독특성을 지니지 못하였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 생명(“선,” 8 : 3 ; 참고, v.1)을 주었으나, 그들의 계시를 그들과 관계없는 것으로 경홀히 여겼다(v.12)(도표 22 참고).

  하나님의 백성이 열국의 길(현실정책)을 걸었다. 그들은 열국의 물질적 성취에 유혹되어, 생산 과잉과 수출, 수입, 정치적 동맹, 문화 교류로 위세를 떨치기를 소원하였다.  “저희가 홀로 처한 들 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연애하는 자들을 얻었도다” (8:9)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국가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에 대한 음란한 열정으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여호와에 대한 헌신을 버린 것을 되풀이하여 정죄하였다(4:1,2; 12:8; 13:2). 그들의 음식과 음료는 그들의 사회 조직에 달려 있었고, 그 사회 조직은 주변 열방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그들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제사장, 선지자, 왕, 방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으로부터 혼합주의, 문화 변용, 현실정책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백성들은 종교적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장소들을 수없이 만들었고, 신들을 달래기 위해 즉시즉시 제사를 지냈다: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저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도다”(8:11). 그들은 희생을 통해 하나님도 그들의 양심도 회유하지 못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9:4,5). 그들은 그들의 광적 신앙에 도취되었다. 종교가 그들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4:1-19).

도표 22.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반응들

                   하나님의 계시

            ┌───────┴───────┐

    하나님께의 복종                        조작

            │                              │

    하나님께의 헌신                        거부

            │                              │

           축복                            저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사랑과 헌신과 의를 기대한 “무성한 포도나무” 같았으나, 그것들 대신 이스라엘은 배신과 압제와 불의의 긴 역사만 낳았고, 결국은 이방 종교에 물들어 버렸다(10:1). 비록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하였을 지라도 그들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8:2).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진실과 인자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daʽaṯ)을 찾았으나 헛된 일일뿐이었다(4:1). 그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호와는 그들의 희생을 거부하고(8:13), 오히려 경건한 자들을 자극하여 지혜의 영을 분별하고 연마하게 했다: “나는 인애(hesed)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daʽaṯ, 문자적으로 ‘지식’)을 원하노라”(6:6 JPS). 하나님을 아는 것(daʽaṯ)과 인애(hesed)는 생동적인 언약관계, 즉 부부간의 신의의 기본 요소들이다.

   문화적, 물질적, 정치적, 성취에 도취된 채, 그들은 열방의 물질주의가 주는 함정에 빠졌다. 이스라엘의 백성은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종교적 재난이 그들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를 알지 못하였다(8:1-11).


  바알 숭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벌이신 논쟁은, 가나안 바알 숭배와 히브리 야훼숭배 사이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투쟁에 뿌리를 둔다(호 4:4).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 조문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예배하도록 구속되어 있다(출 20:1-6; 신 4:15-31).

  이렇게 엄격한 유일신주의는 히브리인들의 타협과, 여호수아가 팔레스틴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나안 백성들과의 공존정책으로 인하여 야기된 종교적 혼합주의에 의해 크게 위협을 받았다(수 13:1-7; 삿 1:22-35).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백성들과 공존하게 되므로, 그들은 불가피하게 통혼을 하게 되었고, 결국 가나안 신들을 숭배하게 되었다(삿 2:11-15 참고, 신 7:1-5)

  바알신은 가나안인들이 예배한 다신 중의 하나였다. 바알은 엘(EL)과 아세라(Asherah)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비와 폭풍의 신이었고, 그의 주된 관심은 농업적 풍요와 사람과 동물의 재생산이었다. 불모와 죽음의 신인 모트(Mot)는 바알의 숙적이었다. 가나안 신화에 의하면, 비와 풍요, 한밭과 기근의 시기는 바알과 모트신이 계속 싸우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모트신과 싸우는 바알신을 돕기 위한 가나안 사람들의 폭풍의 신 예배에는 인간 희생과 의식적인 매춘 행위가 이루어진다.(시 106:34-41; 신 23:17) 이러한 남녀 매춘부들은 각 지방 성소에 고용되며, 그들은 바알의 제사장이라고 불리웠다. 가나안의 백성들은 바알 숭배의 일환으로서 예배의식을 집전하는 매춘부(제사장)와 성스런 성교를 했는데, 이것은 그 신이 그 땅의 바알(또는 “주” “남편”이라고도 불림)자격으로서 그 땅과의 결혼을 성스럽게 재활성함으로써 농사의 풍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호세아가 부정한 고멜을 통하여 체험한 내용들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관계와 일치한다. 즉, 이 백성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매춘행위를 했던 것이다(4:10,12,15,17; 5:3-4). 이처럼 매춘행위라는 용어를 종교적 변질행위를 의미하여 비유적으로 사용한 경우는 오경과 선지서에 많이 등장한다(출 34:14-16; 민 25:1; 렘 3:2; 겔 16).

  호세아서에 등장하는 바알숭배 역시 다른 고대 문헌들과 일치한다. 술 취함(4:11,18), 종교 의식적인 매춘(4:13-14), 간음(4:17-11:2), 그리고 산당(10:8)등 모든 것들에게 동일하게 저주가 선포되었다.

  호세아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매춘행위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그 백성들은 바알신에게 돌아감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영적 간음을 범했을 뿐 아니라, 또한 문자 그대로 가나안 사람들의 풍요를 비는 제전의 성적 활동에 관련하여 이들도 실질적인 매춘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4:13-15). 팔레스틴에서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비를 구하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부족했기에, 그들은 여호와 숭배와 바알 숭배를 섞어 혼합 종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효력이 없었다. 아이니컬하게도 부정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고는, 바알 숭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그 표적이 맞추어져 있었다. 즉 농업적인 풍요(8:7-10), 물질적인 번영(9:1-4), 성적인 번식력과 원기(9:10-17), 신전, 제단, 그리고 온갖 우상들(10:1-6), 그리고 군사적인 힘 등에 대한 것이었다(10:9-15).


  심판과 구원

  결국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및 하나님의 미래의 구원에 대한 소망 등은 이 결혼으로 상징된 언약이라는 기초로부터 흘러나온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그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항상 그들의 배교 행위가 갈려 있다. 그들은 참 하나님을 떠나는 것에서 떠나서 우상들로 그를 대신했다(2:1-8, 4:1-13, 5:11, 8:6, 13:2). 특히 이스라엘이 길을 잃게 만든 것은 제사장들(4:6, 5:1, 6:9, 10:5), 선지자들(4:5), 정치지도자들(5:1, 10, 7:3-7, 9:15) 등의 이스라엘 지도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4:6).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을 엄하게 벌하시겠다고 경고하신다. 호세아는 임박한 심판들을 비유적 표현을 통해 묘사하는데, 임박한 심판을 광야로의 회귀와 동일시한다. 그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방황할 것이다(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의 심판의 메시지는 미래의 소망에 대한 내용에 자리를 내어준다. 호세아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내적 갈등을 11:8-9에서 묘사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심판과 포로 생활 속에 영원히 남아 있도록 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두 번째 출애굽을 경험하도록 하셨다(2:14-15. 그러나 결국 그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생긴 상처들을 치료하시고 그들을 본토로 복귀시킬 것이다(14:1-9).


  회개와 남은 자

  회개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청되었으나, 소망과 보호 혜택은 남은 자들에게로 제한되었다. 여호와는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부지런히 그를 찾으며(5:15), 여호와만이 생명의 근원임을 고백하는 (14:2, 3), 남은 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너무나 영악하게 작사, 작곡한 회개 의식문을 포함한(6:1-3)그들의 유화 형식을 거부하였다. 이 의식문에서 이스라엘은 즉각적인 화해와 기쁨을 기대하며 그들의 완고함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6:3)

  호세아의 예언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길을 공개한다. 이 길은 -또 이 길만이-참된 회개로 이끈다. 참된 회개는 (1) 인간적인 안전 체계를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2) 그들이 이전에 풍요 신들과 사회, 경제적 이점들과 정치적 생존을 위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열정으로 하나님께 헌신함을 과시하는 것을 포함한다.

  새 공동체는 하나님의 계시로 돌아와야 했고(4:6)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에 철저히 충성함으로써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도를 확립해야 했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12:6).  그의 자녀들은 그들의 유일한 행복의 추구로서 그의 왕국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를 그들의 아버지로 주장할 수 없었다.  “너희가 자기를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의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내리시리라”(10:12).

  이와 비슷하게 바울도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선을 행하고, 곤궁한자와 나누고, 성령 안에 거하고, 기회있는대로 하나님의 의로운 왕국을 삶의 전 영역에 확립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의를 심도록 독려한다(고전 9:9-11; 갈 5:21; 6:7-10)

  참된 회개는 언약의 주(시내산 계시)와 하나님의 기름부은 왕(시온산 계시)에게의 복종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만을 따라 살고 다른 부분을 거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그의 계기를 주었고(12:13), 다윗계 왕을 통하여 이 땅에 그의 통치를 실행하였다(삼하 7:5-16). 다윗의 독특한 위치와 다윗을 통해 이 땅에 그의 왕국을 확립하고자 하는 여호와의 뜻에 관한 계시는(시온 신학, 참고, 시2; 72; 132) 북방으로부터 나온 남은 자들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931 B.C.). 그러나 누구든지 이전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청산하고 여호와께 복종하며 여호와의 메시아에게 충성을 표하지 않는다면, 회복의 시대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 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3:5)


  여호와의 사랑의 깊이와 신비

  그의 언약 백성에게 인내함에 있어 여호와의 부드러운 사랑과 자비가 책 전체에 뒤엮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의 고전적인 메시지이다. 많은 구절들이 어머니와 같이 그의 백성을 위해 우는 하나님의 슬픔을 담고 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11:8; 참고, 6:4-6; 11:1-4,7,8)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는 하나님의 긍휼과 돌보심과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족장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라반을 섬길 때 그를 돌보았다(12:12). 그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였으며, 거기서 그들을 양자로 삼고 그의 권능의 팔로 그들을 사랑스럽게 옮겼다(11:1, 3; 출 19:4). 그는 모세(“선지자” 12:13)를 통해 그들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고, 광야에서 그들의 필요를 채웠으며(9:10; 13:5, 6), 그들에게 그의 계시를 주고(8:12; 12:13),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였다(2:8)

  호세아는 출애굽의 광야 주제를 네 가지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신실하심을 확증하였다. 이스라엘은 은혜에 대해 그들이 고유한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이는 여호와가 그들을 광야에서 “발견하였고”, 그가 그들을 “포도”와 같이, 무화과나무의 처음 맺힌 첫 열매같이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9:10). 그들은 그에게 선택된 민족으로 그가 그들에게 그의 은혜를 자유로이 베풀었을 뿐이다. 그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고, 그들이 광야에서 장막에 거하였을 때 그들과 함께 하였다(12:9). 그는 스스로 낮추어 이스라엘과 함께하며, 그들의 불행을 함께 겪은, 비길 데가 없는 하나님이었다. “내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12:9; 13:4)

  둘째,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부는 그들이 그들을 사랑한 하나님을 배반하였다는 점에서 더욱더 심각하였다. 그는 그들을 택하여,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을 그의 왕 같은 민족으로 세웠다. 그는 그들을 그의 은혜로 부양하고 그의 계시를 통해 반 문화를 형성하도록 훈련시킴으로써(10:11) 그들이 열국 가운데 모범적인 민족이 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반 문화의 특성들(의, 정의, 사랑(을 발전시키는 대신, 이스라엘은 불의와 불신과 사랑의 결핍이 특징을 이룬 왕국을 이루었다(2:2, 5; 4:1-2; 5:3; 6:4; 9:1; 10:13).그들의 반역성은 그들의 역사와 제도와 교만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그들의 배교는 광야에서부터 비록 되었고(9:10; 11:2; 13:6). 그 왕권이 열방의 왕권과 같았던 기브아의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선택한데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었다(9:9; 10:9; 13:10-12).

  셋째, 그의 사랑과 긍휼과 신실하심을 새롭게 하리란 여호와의 약속은 제2의 출애굽과 같을 것이다. 그는 그들의 심판 후에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 그들을 열방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다. 호세아는 구속을 위한 새로운 행위가 언약 갱신, 즉 여호와와 그의 백성간에 새로운 유대가 이루어지는 새 시대를 표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구속사를 회고한다.

  넷째, 하나님은 자신을 거룩한 자로 계시하셨고,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그들을 성별하였다(출 31:13; 레 11:45; 19:2).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분리는 포로생활의 분리 상황를 초래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비루한 유기 상황에서조차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성별하고, 그들을 사랑할 것을 약속하였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서 우리는 은혜와 선택의 신비 앞에 서게 된다. 여호와의 사랑은 구원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의 사랑의 재개는 “나는 네 하나님이라”(12:9; 13:4)는 구절에서 표현된 그의 존재에 근거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에게서만 생명을 찾을 수 있음을 알게 할 것을 스스로 약속하였다. 여호와는 자유롭게 언약 갱신의 새 시대를 열어, 그 자신을 더 많이 내어 주고, 그의 열심을 더욱 굳히며, 그 약속들을 더욱 매력적이게 하였다. 사랑을 실로 하나님의 거룩함- 추방하고 분리하기 보다 사랑하고 결합하는 거룩함-에서 흘러나온다. 나는 이에 관한 벌코프의 말에 동의한다. “호세아에서 거룩과 사랑의 일치가 가장 심오하게 표현되었다”(11:9).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사랑의 깊이와 비교할 때, 일순간에 불과했다. 광야로의 회귀에 비유된(2:3) 심판 경험은 그들을 일깨워 여호와가 하나님임을 인식시키고자 의도되었다(v. 16: 12:9). 그는 즉각 화해하고 용서하고 모든 언약적 혜택들을 회복시킬 준비를 갖춘 채,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11:1-4)이자 의사(7:1; 11:3; 14:4)인 그는 화해하고 치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연인으로서 그는 또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의 노래를 들려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답하기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2:15; 참고, 눅 15:11-32의 탕자 비유)

  호세아서는 여호와의 사랑의 노래로 끝난다. ‘이슬’과 ‘백향목’은유를 통해, 그는 그들에게 그의 사랑의 언약의 갱신과 축복과 약속들의 성취가 아직도 여전히 출애굽 때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신선함을 확신시켰다. 그는 그의 백성에게 번영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가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14:5-7; 참고 아 2:3; 4:8-5:1).

  이스라엘은 숲 속과 잣나무와 백향목 아래서 제사를 지내고 나무를 사용해 우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그와 같은 풍산 제의를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하나님이 그들의 “푸른 잣나무”, 즉 그들의 유일한 “우상”이 될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14:8).

  호세아의 심판과 구원 언어는 듣는 자에게 심판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하나님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신비가 그의 모든 행위를 감싸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자신의 삶의 안전책이 여호와의 심판을 견디어 낼 방도를 제공하지 못함을 깨닫지 못한 채 그것에만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발할 때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의로운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시랑을 인지하고, 경외함으로 그의 자유와 사랑과 거룩과 지혜를 깨닫는다(14:9). 그리고 의로운 생활로 그를 닮기를 힘쓴다(마 11:15; 13:9, 43). 산 믿음의 길을 걷는 그들의 기쁨은 크고도 크다!


  하나님의 새 백성

  하나님의 새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갱신에 배우자적인 신실성을 가지고 반응한다(2:20; 3:5). 결혼 은유는 (2:16-23) 언약 갱신 혹은 더 정확히 “언약들의 갱신”에 적용된다. 하나님은 신랑이고 언약 백성은 신부이다. 그는 그들에게 창조 언약과, 아브라함, 모세, 다윗 언약들이 주는 혜택을 은혜롭게 베푼다. 이 점에 비추어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한 신약성경의 상징을 이해할 수 있다(엡 5:26,27; 계 21:2, 9:22:17). 그의 창조 언약을 갱신하는데서 생기는 하사품은 그들이 꿈꾼 어떤 것보다도 더 클 것이다(호2:21, 22; 14:5-8).

  아이히로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에 대해 그와 같은 내적인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여호와 또한 아낌없이 베푸는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다.”


  새 지도권

  남은 자들의 번영을 돕는 그들의 우두머리는 바로 다름 아닌 다윗계 왕이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 축복과 평화의 수단이다(시72). 호세아는 북 왕국의 정치적 미래는 다윗 왕가 치하의 유다에 있으며, 다윗계 군주가 열두 지파 전체를 다스릴 것을 넌지시 비춘다(1:11; 3:5).

  다윗계 군주에 관한 예언 말씀은 일찍이 사마리아가 멸망한 후 십 년이 지난 즈음에 성취되고 있었다. 북 왕국의 남은 자들은 히스기야(729-686 B. C.)와 요시아의 카리스마적이고 메시아적인 통치권 아래서 피난처를 찾았다. 이 왕들은 남은 자들을 유월절 의식에 참여하도록 초청하고, 그들을 도와 여호와와 그의 왕에게 충성을 공언하게 했다(대하30:1,5,9-14,18,19,25,; 35:17,18).

  그 예언의 약속들은 또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에게로 확대된다(롬 9:25,26; 벧전 2:10). 하나님은 그의 공약을 갱신하여 그의 메시아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의 언약주가 될 것이다(호 6:6; 마 9:13; 12:7). 이 약속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에게도 여전히 개방되어 있다(롬 10:1; 11:26). 복음 선포는 메시아를 찾고, 아버지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그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약속과 축복과 언약적 특권들을 제시한다(행2:36-38; 4:10-12; 롬 10:9).


신약으로의 접근


우선 신약에는 호세아로부터 나온 매우 중요한 구절들이 인용되어 잇다. 바울(롬 9:25)과 베드로(벧전 2:10)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일부가 될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호세아 선지자의 자녀들의 이름들을 각각 부정적인 용도와 긍정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호세아서 11:1의 인용문은 에수께서 애굽에서의 짧은 체류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에 대한 예언으로서 마태복음 2:15에 언급되어 있다.

  호세아서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선지서들(특히 에레미야서, 에스겔서)을 거쳐 신약으로 흘러들어가는 마지막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이 인간의 결혼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다루어지고 있다. 에베소서 5:22-33은 이 주제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발전시킨 것임이 분명하다.




요엘서


  요엘서는 달리 알려진 바 없는 브두엘의 아들 요엘의 것이라고 표제에 언급되어 있다(1:1). 구약에 요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열두명이나 더 있지만 이 선지자를 다른 인물과 확실하게 연결할 수 없다. 이 선지자는 예루살렘 주변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그의 책의 배경을 제공해준다. 그가 성전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또한 거기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를 제의 선지자 혹은 성전 선지자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역사적 배경


  저작연대 

  요엘서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이 책의 저작 연대 문제이다. 이론들이 분분하여 9세기(B.C)로부터 2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이 선지서의 전반적인 메시지는 그 저작 연대를 모르더라도 별 지장을 받지 않으나, 그 역사적 상황은 본문 메시지의 세밀한 부분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책의 해석자는 증거가 허락하는 한, 가급적 정확한 저작 연대를 산출해 내야 한다. 표제부(1:1)에 아무런 연대기적 자료를 보이지 않고, 우리가 선지자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의 연대나 저작목적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 책의 내적인 정보를 검토해 볼 수밖에 없다. 

  1.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책이 메뚜기 재앙이 발생한 이후에 쓰여졌다는 것에 동의한다(1장).

  2. 이 책은 성전이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1:9, 13-16, 2:15-17). 주전 586년에서 516년 사이의 연대는 확실히 배제될 수 있다.

  3. 많은 나라들의 이름이 주로 하나님께서 대신 복수를 해줄 원수로 언급되어 있다(피니키아, 블레셋, 이집트, 에돔, 그리스, 스바 - 3장). 그러나 이 나라들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원수들이다.

  4. 이 책은 공동체에 대한 지도력이 장로들과 제사장들 손에 들어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으며(1:2, 13, 2:16), 왕들이나 궁정 관리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예언서가 왕보다는 “장로들”(elders)에게 선포된 메시지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왕정체제가 제한적인 시기(9세기말 요아스가 힘이 없던 시절과 같은 경우)를 시사해주고 있다. 비록 일부 학자들은 이 점에 대하여 별 고려를 하지는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요엘서가 이스라엘에 왕이 존재하기 이전에 예언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그럴듯한 대안이라면, 예루살렘 멸망 이후가 된다. 또 오랫동안 전통적인 지지를 받아온 의견이 있는데, 요아스의 유년 시절(B.C 835-830)인데, 그는 7세기에 등극했다. 포로기는 배제되었는데, 그 이유는 율법의 희생제도가 요엘이 선포할 당시까지도 계속 진행되었기 때문이다(1:9). 이 사실은 9세기 학설과 포로기 이후설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만든다.

  5. 이 책에는  북왕국에 대한 언급이 없다. 유다를 “이스라엘”이라고 지칭하는 것(2:27, 3:2,16)은 북왕국의 지파들이 포로로 잡혀간 시절(주전 722년)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6. 요엘서와 다른 선지서들 사이에는 표현이나 개념에 있어서 수많은 일치점들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엘이 기존의 문헌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7. 이 책의 신학적 개념들 또한 이 책의 저작연대에 대한 증거를 제공해 줄 수 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일시적으로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자신과 이스라엘간의 관계의 성격을 점차적으로 밝히셨다.

  8. 이전의 학계는 성벽에 대한 언급들(2:7,9)은 이 책이 느헤미야에 의해서 성벽이 완성되고 난 이후의 시대에 나온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주장은 이제는 거의 기각되었다. 비록 예루살렘 성벽이 상당히 파손되었으나(렘 52:14, 왕하 25:10, 대하 36:19),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보수 공사에 관한 구절(느 2:13, 3:8, 4:1)은 주전 586년에 성벽이 전부 파손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9. 유대인들이 열방으로 흩어진 것에 대한 언급(3:1-2) 역시 포로기 이후 시대를 반영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흩어짐이 꼭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사로잡힌 것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슥 1:18-21).

  10. 요엘서의 언어학적인 특징들은 성경의 후대의 책들과 공통성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이러한 특징들이 히브리어 발전 단계상의 후대에 생겨난 요소들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를 결정할만한 자료를 충분하게 갖고 있지는 않다.

  11. 많은 학자들은 요엘서가 히브리 정경상에서 호세아 및 아모스 등의 8세기 선지서들 사이에 배열되어 있다는 점이 연대에 대한 하나의 단서라고 생각해왔다. 포로기 이전 저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증거로서 요엘서가 ‘12서’의 정경 목록 순서 중 초기서인 호세아와 아모스의 사이에 있는 두 번째 책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 여호와의 날 에 대한 강조는 포로기 이전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것은 아모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이미 잘 알려진 신학적 개념이다(암 5:18). 그러나 앗수르나 바벨론의 이름이 이스라엘의 적국 명단에서 빠져 있음은, 요엘이 그 제국들의 앞서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12. 종교 혼합주의나 이방신들의 숭배 등 포로기 이전시대 선지서들의 특징적인 지적사항들이 이 책에는 결여되어 있다는 점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다. 비록 요아스의 시대에 우상숭배가 잠깐 억압되어지기는 했지만 우리는 요엘의 설교 속에 그것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볼 수 있다.

  요엘서의 연대를 확정하기 위해서 중요한 논거들에 대한 개관은 확실한 결론을 제공해 주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이 책이 포로기 이후 시대의 연대로 기울고 있다고 보는 것이 공정하다.


  배경   

  요엘서의 문학적 배경은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예언 문학과 비슷하다. 요엘은 포로기 이전 예언에 정통한 선지자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가 그러한 저술들에서 인용한 단어, 구절, 모티프 등을 풍성하게 사용한데서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아모스, 이사야, 에스겔서를 사용함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요 엘     다른 선지서 이용

  1:15       이사야 13:6

  2:3        이사야 51:3; 겔 36:35

  2:10       이사야 13:10

  3:10       이사야 2:4; 미가 4:3

  3:16       아모스 1:2; 이사야 13:13

  3:17       에스겔 36:11; 이사야 52:1

  3:18       아모스 9:13

  이 책의 저작 연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 책의 역사적 배경을 확실하게 단정짓기가 어렵다. 만일 포로기 이후설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무대는 페르시아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스룹바벨 통치 기간의 학개나 스가랴와 관련지어 생각할 것인지, 또는 말라기나, 에스라 느헤미아시대와 연관시킬 것인지 등의 문제는 여전히 많은 논쟁을 야기 시키고 있다. 아마도 이들 두 시기 사이의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한데, 이 기간은 스룹바벨에 의해 시작된 성전 건축이 한 세대 또는 두 세대의 기간동안 진행 중이었으며, 아직 에돔이 멸망되지 않았을 때이다. 이 시기는 아하수에로 치하의 에스더 시대와 가깝거나, 아미년 다리우스 대왕의 말년보다는 조금 앞선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기에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것이 없다. 다만, 페르시아인들의 활동- 특히 헬라인들과의 초기 충돌-이 헤로도투스의 역사 기록에 나타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문학적인 분석


  문학 형식

  요엘서는 전체적으로 국가적인 애사(哀事)에 사용되어지기 위한 예전적인 문헌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어떤 그러한 슬픈 일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인 본보기임을 보여준다.     요엘의 첫 두 장은 의식문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개인적으로 (1:19, 20) 또 공동체적으로 (2:17) 탄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금식하며(1:14; 2: 12). 그들의 헌신을 새롭게 다질 것을(2:12) 촉구하였다. 이 의식문을 이어 구원에 관한 신탁이 나온다( vv.17-32). 3장에서 선지자는 열방에 대한 심판과 (3:1-15)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vv. 16-21) 말하면서 여호와의 날의 성격을 설명한다.

  인용과 이전 예언 말씀들에 대한 독창적인 사용과 예언 주제들의 재활용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요엘은 다른 선지자들의 글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엘이 예언 전통에 깊이 젖어 있을지라도, 그의 언어는 새롭고, 독창적이며, 적절하다. 요엘은 대구, 은유, 강조 어구, 수사적 기교, 반복, 대칭 등 다양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요엘서가 성전에서의 예배의 한 부분으로 사용되어지도록 의도되었다면 이 책의 연대를 설정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이 더욱 쉽게 이해되어진다. 만약 어떤 책이 예배에 계속해서 사용되어지려면 그 책은 자연재해가 됐든 군사적인 위협이 됐든지 간에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서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작성되어야한다. 예배에 사용되어지는 문헌은 덜 구체적이면 덜 구체적일수록 그 용도의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이 책의 이러한 특징은 왜 이 책이 연대를 파악하기가 힘든지를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또한 왜 이처럼 이 책의 비시간성이 이 책을 우리 시대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책으로 만들어주는지를 설명해준다.

  20세기초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요엘서의 통일성은 근본적으로 공격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초에 두움(B. Duhm)은 이 책이 최소한 두 명의 다른 사람의 작품들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개진했다. 두움은 2:28-3:21, 1:15, 2:1-2, 10-11이  이 후대의 인물의 것이라고 본다. 보다 최근의 학계는 이 책이 편집작업에 의한 약간의 증보부분을 갖고 잇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저자의 작품이라고 본다.

  1장의 메뚜기 재앙에 대한 기술과 2:1-11의 관계는 요엘서의 해석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논쟁거리들 중의 하나였다.

  1. 어떤 주석가들은 2장이 (1) 동일한 메뚜기 재앙이나 (2) 1장에 뒤이은 계절의 역사상의 실제의 메뚜기 재앙을 단순히 다시 서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2. 어떤 학자들은 2장의 묘사가 (1)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적들 중의 하나인 외국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묘사적으로 표현하고 잇는 것이나 (2) 이스라엘의 모든 적들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접근방법에 따르면, 최근의 메뚜기 재앙(1장)은 역사상의 실제의 적에 의한 심각한 침략의 전조가 된다. 요엘서가 출애굽기 10장과 어느 정도 접촉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다. 출애굽기의 메뚜기 재앙은 그 당시의 가장 강력한 나라로부터 얻은 승리와 관련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요엘서와 관련해서도 다른 어떤 강력한 나라와 관련한 승리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2:2)이나 산꼭대기에서 뛰는 것(2:5)과 같은 본문상의 다른 요소들은 실제적인 군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만약 실제로 어떤 군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원래의 의도라고 한다면, 메뚜기 떼를 군대처럼 묘사한 것이 다소 기이하다.

  3. 대부분의 현대적인 주석들이 지지하는 접근방법은 메뚜기의 침공에 대한 두 번째의 묘사가 1장에 묘사된 메뚜기 재앙에 바탕을 두고 확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지자는 최근의 재앙을 다가올 여호와의 날, 즉 악에 대한 성전(聖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천군의 장수로서 오실  심판의 날에 대한 전조로 사용한다. 이 경우 이스라엘이 직면하게 되는 위험은 역사상의 어떤 특정한 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군대로부터 온다(2:11).


  구조와 조직

  학개의 경우처럼, 요엘의 첫 메시지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선언한 그 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그는 당면한 상황을, 미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즉각적인 심판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포로기 이전 선지자들이 지닌 경향이었다. 그는 사태가 호전되기 전에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지적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행동’을 촉구했다. 이처럼 악화되는 심판을 소개함으로써, 그는 백성들에 대한 교훈을 시작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교훈은 성격상 영적이며, 그에 적합한 종교 의식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이 백성들의 남용 가능성이 가장 큰 종교 의식에 대한 접근보다는 백성들의 행동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호소해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나님의 호의적인 반응은, 요엘 당시의 상황에 바탕을 둔 이 책 부분에 정점을 이룬다. 전체적인 개요에서 보았듯이, 현재 재앙에 대한 부분은 심판과 교훈, 그리고 하나님의 역할 확인 묘사라는 두 개의 반복 패턴을 담고 있다. 첫 번째 주기(cycle)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며, 두 번째 주기에서는 반대로 그들을 풍요하게 하신다.

  당대에 대한 경고(2:2-2:27)와 종말론적인 경고(2:28-3:20)사이에 존제하는 공통적인 분모는 ‘여호와의 날’이다. 종말론적인 경고 부분에서는 이 말이 특정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충만의 날로 묘사한 후에, 요엘은 심판과 번영의 주제를 다시 전개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 심판의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열국이다.

  요엘서의 개관은 다음과 같다.

  - 표제(1:1)

  I. 메뚜기 재앙: 임박한 재난(1:2-20)

    A. 재앙의 결과와 범위(1:2-12)

      1. 노인들과 모든 거민들(1:2-4)

      2. 술취한 자들(1:5-7)

      3. 제사장들과 농부들(1:8-12)

    B. 금식에 대한 촉구 및 성전에서의 기도(1:13-14)

    C. 탄식과 기도(1:15-20)

  II. 여호와의 날: 임박한 재난(2:1-17)

    A. 경고의 외침, 공격에 대한 경고(2:1-2)

    B. 하나님의 군사로서의 메뚜기들(23-11)

    C. 회개의 촉구(2:12-14)

    D. 금식에 대한 촉구 및 성전에서의 기도(2:15-17)

  III. 여호와의 대답(2:18-3:21)

    A. 임박한 재난: 메뚜기들(2:18-27)

      1. 경고의 철회(2:18-20)

      2. 땅의 회복(2:21-24)

      3. 번영의 회복(2:25-27)

    B. 임박한 재난: 여호와의 날(2:28-3:21)

      1. 이스라엘의 구원(2:28-32)

        a. 모든 사람이 다 선지자가 될 것임(2:28-29)

        b. 남은 자들의 구원(2:30-32)

      2. 열방들에 대한 심판(3:1-17)

        a. 노예들의 노예(3:1-8)

        b. 악에 대한 거룩한 전쟁(3:9-17)

          (1) 전쟁을 위한 소집(3:9-11)

          (2) 여호사밧 골짜기에서의 사건들(3:12-17)

      3.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축복(3:18-21)


신학적인 메시지


  요엘의 메시지

  요엘은 언약적 삶과 고난의 의미를 상술하기 위해 메뚜기 재앙 사건을 이용하였다. 요엘에게 있어, 고난은 그의 모든 적들을 최후이자 최고조로 심판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3:1-15). 재앙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그들의 언약적 지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심판의 날(2:1, 2)을 준비할 것을 상기시킨다.

  요엘은 하나님의 주권, 거룩하심, 자비에 대해서 설파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자기 선민의 죄를 간과하실 수가 없으셨다. 이 선지자는 메뚜기 재앙이 발발한 것 속에서 이스라엘을 꾸짖으시고 회개하도록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이 메뚜기 재앙은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훨씬 더 파괴적인 군대가 이 나라를 침공할 것에 대한 경고를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자신들의 원수들을 치실 것을 고대하고 소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주관하시며, 천사들의 군대가 열방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수호하기 위해 올 것이다(3장). 요엘은 다른 선지서들의 이방 나라들에 대한 통상적인 신탁들과는 달리 단지 이스라엘이 어떤 특정한 적들에게서 승리를 거둘 것만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의 악에 대한 보편적이고 종말론적이며 결정적인 우주적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여호와의 날      

  책 전체에서 요엘의 관심사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메뚜기 재앙을,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는데, 그는 그 날의 심판이 더욱 악화될 것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그는 백성들에게 계속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고발문은 나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범죄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의 선포에 대해 백성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되었고(2:18-19는 과거 시제를 쓰고 있다), 곧 다가올 번영이 선포되었다. 미래의 여호와의 날을 다루는데 있어서, 열방 국가들이 하나님 심판의 초점이 된다.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본질적으로 심판과 회복이 사회 경제적인 특성을 가진다(예를 들면 번영)

  ‘여호와의 날’은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의 모든 일을 살피며, 주권적으로 심판과 복수를 행하는 때이다(2:11, 12).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1)항상 가깝고, (2)큰 고난을 동반하며, (3)피할 수 없고, (4)우주적인 것임을(Vvv. 1 - 11) 선포하였다. 그 파괴력은 무시무시하여 메뚜기 재앙이나 혹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포로기 때 입은 외상(外傷)을 무색케 한다(vv.2 -3). 요엘은 언약 공동체를 압도하였던 그 충격에 대해 계시자적인 시각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새 공동체에 대한 그의 열정을 보게 하였다. 그는 또 경건한 자들이 축복의 새 시대를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기다리도록 격려하기도 했다.


  주요 주제

  구약시대 전체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대개 농업 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재앙이든지 농작물을 파괴하는 것은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치명적이었다. 메뚜기 또는 황충이 광대하게 넓은 지역에서 푸른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울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많은 증거가 있으며, 고대 근동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그 경제적 손실은 최소한 2년간에 걸치며,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부수적인 어려움들이 생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재앙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식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자연적 재앙을 불러옴으로써 신들이 진노를 나타낸다는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항상 그 재앙을 보낸 신들은 다시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즉 왜 그 신이 진노를 발했는지, 또 어떻게 해야 그 진노를 풀 수 있는지 등이다. 이스라엘에 있어, 그 첫 번째 질문은 매우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가지 경우는 그렇게 충분히 드러나 있지 않다. 요엘서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특정한 범죄에 대하여 심판을 부가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선지자는 그 재앙을 ‘여호와의 날’의 전령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때에 일반적으로 의인은 보상을 받을 것이며 악인은 형벌을 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의 손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전적으로 자신들을 맡길 것이 요구되었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요엘은 하나님께 대한 더 큰 헌신의 반응을 유발하기 위해, 책임과 심판의 이 무시무시한 날을 예고하였다. 근본적인 제자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은 종말의 시대를 저주와 심판 대신 축복과 구원의 시대로 열어 준다(2:12).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다”(2:13).

  요엘은 더 나아가 언약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항구적임을 선포하였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2:18). 놀라운 일은 하늘과 땅을 그 앞에서 심판으로 떨게 하는 하나님이 그의 약속의 성취로 그의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성취를 지연할 수는 있어도, 그는 그의 백성에 대한 관심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선한 통치자와 같이, 그는 그의 백성에게 번영과 기쁨을 가져다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가 적들의 반대를 물리치는 동안, 그의 백성은 영원한 언약의 혜택을 누리기까지 잠시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 약속들은 언약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열정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언약적 삶의 완전한 향유를 보장한다: 영적으로(“내 신,” 2:28), 물질적으로(“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2:19, 23-26), 모든 역경의 제거로(“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v.19;참고, v.26 ; 3 : 17). 이런 축복들은 개선한 왕 여호와가 베푸는 선물들로(2:23, 26), 이를 통해 그의 백성은 그가 그들과 함께함을 확신하고(v.27 ; 3 : 17) 안식을 누리며, 그의 이름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2:20 - 23).

  하나님은 믿음을 지키는 그의 백성을 보호한다. 그가 땅을 황무하게 할 수도 있다(3:1-15). 그러나 그의 백성은 그의 주권적인 심판 행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과 함께할 것을 약속하였기 때문이다(vv.16-17). 그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보증의 말을 주었다. 바로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을 강조하는 “내가…하리라”(I will)는 말이다 : “내가 북편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내가…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내가…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할…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2:20, 25, 28;3:1-2). 그의 주권적이고 자비로운 행위들은 그가 신실한 언약의 하나님인 것을 증명해 준다(2:27).


  회복의 영

  그러나 그가 역경 가운데 그들과 함께 하심을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령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그와의 교제와, 약속된 회복을 보증한다. 그가 바로 회복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에 대한 예언은 회복과, 그의 왕국의 확립과, 그의 백성에게 약속된 안식에 대한 여호와의 보증이다(3:17-18, 20-21). 영역본을 비롯한 성경의 역본들이 “그 후에”(“and afterward")란 구(句)로 축복 약속과 성령의 사역을 분리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2:28, 29).

  이 번역은 하나님이 성취를 (1)요엘 시대의 메뚜기 재앙으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물질적 회복과(vv. 17-27) (2)성령의 오심 (vv.28-32) 두 단계로 이루는 듯한 잘못된 인상을 준다(참고, 도표 26의 해석 A). 이것은 17-27절의 종말론적 언어를 예민하게 파악하지 못한 해석이다. 이 절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이며 자유한 사실을 지지하는 보증 신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의 모든 대적과(vv.19-20) 수치와(vv.19,26-27) 슬픔을(v.23) 제거할 때, 그들의 기쁨을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기쁨은 그만이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의 언약적 임재를 충만하게 향유하는 것이다(v.27). 이것이 종말론적 언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실현된 종말론의 언어이다. 요엘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vv.23-25), 기뻐할 기회 역시 가졌다(vv.23,26) (참고, 도표 26의 해석B).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후에”란 구를 이해해야 하는가? 이 어구는 “그때에”와 더불어 하나의 윤곽을 형성하고, “-때”(when)와 같은 일반적 시간 접속사로 번역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령의 오심은 여기서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연결된다 : “그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2:18). 성령의 부으심은 언약 갱신과(v.27;참고, 겔 39:29),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2:18-27), 그의 신원을 (3:1-6)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성령은 여호와의 날에 앞서 하나님이 새 공동체에게 준 종말론적 선물이다(2:28-32). 그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은 영원적인 동시에 시적이라는 물질적인 혜택들처럼, 그것들은 새 시대를 증거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이다. 이것은 고난 가운데 성령이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악이 그칠 것과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이 그의 은혜를 받고 새 언약의 후사된 자들에게 거침없이 부어질 것을 증거 함을 의미한다(롬 8:18-30).


  성령의 민주화

  성령은 왕국의 자녀들을 포함한 피조물 안에서 역사하고, 만물의 회복을 진척시키며, 그것을 위해 피조물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영이다. 요엘이 말한 바 “모든 육체”(kol basar, NIV “만민”) 안에 행해질 성령의 역사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구원 신탁을 보완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법의 내면화에 대해 말하였다(렘 31:33, 34; 참고, 시 37:31 ; 40:8). 그 법의 내면화는 회복의 새 질서를 따라 조화롭게 사는 데 있어 하나님의 자녀들과 성령의 완전한 협력을 의미한다. 신자의 중생한 새 마음은 오직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만을 바란다. 에스겔은 마음의 할례와 성령의 부으심 사이를 보다 분명하게 연결하였다(겔 36:27 ; 참고, 욜 2:13). 에스겔에 있어서도 역시 성령은 하나님이 이 땅에 그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 속에 더 크게 역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은 연약한 인간의 지도자나 제도나 프로그램에 달려 있지 않고, 인간 속에서 혹은 그를 통하여 강력하게 역사하는 성령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요엘은 계속하여 새 시대의 주제들-언약 갱신과 성령의 축복-에 관해 설명한다(도표 27 참고).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2:28, kolbasar, 문자적으로 “모든 육체”, 한역 “만민”). 요엘은 “모든”이 한정된 “모든”, 즉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와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v.32) 모두로 제한되는 것을 명확히 밝힌다. 히브리어 본문은 28절과 32절에서 wehaya(문자적으로 “그리고 …일 것이다,” NIV "and")를 반복함으로써, 32절의 자세한 설명과 “모든 사람”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28, 29절과 32절을 네 포장 구조로 둘러싸인 것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도표 28 참고).

  구약성경에서 성령은, 예를 들면 모세와 칠십인 장로들(민 11:25), 여호수아(신 34:9), 왕들(삼하 23:2 ; 시 51:11), 선지자들(왕하 2:9 ; 벧후 1:21) 등, 지도권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요엘은 성령의 민주화, 즉 하나님의 모든 백성 각인에게 성령의 특별한 권능이 부여될 것을 선포한다(도표 27 참고). 성령의 보증은 성(性)과 사회적 지위와 연령에 관계없이 하나님에게서만 피난처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 “여호와의 이름…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욜 2:32).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그가 축복과 보호에, 심지어 여호와의 날의 완전한 개시를 전후로 그가 열방을 가차없이 심판하는 그때에도 그들과 함께 할 것을 보장하고 있다. 그가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될”(3:16)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거룩한 전사 여호와의 목적은 이 땅에 그의 왕국을 완전히 확립하는 것이다. 이집트와 에돔의 황무화에서 상징된 바와 같이(3:19), 그는 그의 대적들에게 복수할 것이다(3:1-15). 그는 그의 승리를 인내하며 기다린 그의 백성들을 신원할 것이다. 그들은 그가 만물을 새롭게 함으로 그의 승리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vv.18,20-21). 그 예언은 새 예루살렘 한 중앙에서 강이 흐르는(참고, 시 46:4 ; 사 33:20-21 ; 슥 14:8), 하나님이 사함 받은 그의 백성 가운데 함께하는 그 변형된 세계에 대한 환상으로 끝난다(욜 3:18-21). 이것은 바로 샬롬의 환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요엘의 예언은 보다 큰 실재를 향해 중대한 진보를 이루었다(오표 29 참고). 예수는 미래의 대격변적인 변형과 구원하고 정죄하는 그의 권위에 대해 말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임재에 대한 보증으로 그의 교회에 성령을 주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종말론적 선물이다(행 2:16-39). 그는 다가올 회복에 대해 증거하고, 새 공동체의 모든 일원들이-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나, 젊은이나 늙은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피조물의 구속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고대하도록 가르친다(참고, 롬 8:18-27 ; 갈 5:5).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여호와의 날(“다가올 진노,” [참고, 롬 10:11-13 ; 데전 1:10])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들은 구속과 보호와 회복의 표징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가지고 있다.

  요엘의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에게 더 큰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긍휼과 은혜에서 그의 자유를 보며, 그들의 일상을 더욱 종말론적인 초점에 맞추어 살도록 권고하는 정경적인 기능을 계속하여 수행한다. 요엘은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행하고, 가장자리가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며, 유대인을 포함하여 아직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동정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요엘의 시대를 넘어 또 현 시대(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선물)를 넘어 새 예루살렘의 회복의 시대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이것을 볼프는 이렇게 말한다 :

   “성취는 약속을 훨씬 능가한다. 한편, 약속의 빛은 이미 이루어진 성취 너머로 그 광채를 던진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현재 교제 속에서도 안전과 축복은 아직 대부분 유혹과 결핍 아래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관한 한, … 신약성경의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백성      과 함께 옛 기대의 범위를 뛰어 넘을 미래 사건들을 기다리고 있다.”(참고, 계 22:1-5).


신약으로의 접근


교회 역시 요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를 필요로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견책하시고(잠 3:11-12, 히 12:5-11), 자신의 이름을 열방 중에서 수호하실 것이라는 것은 여전히 진실로 남아있다.

  2:28-32이 신약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요엘서는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친숙하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신은 주로 힘을 주고, 예언을 가능케 하는 영이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도 말했다(민 11:29). 요엘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언의 영이 그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날을 내다보았다(2:28-29).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들 속에서 불을 통한 신현과 동반해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행 2:14-21).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적인 서열에 있어서는 나이 많은 유대인 남자 자유민이 초고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이 집단에 속했다. 동 틀 무렵 유대인 남자들의 기도는 “노예나 이방인이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요엘의 기도는 하나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요엘이 내다보는 이스라엘 가운데서는 예언의 능력이 남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에게도 주어지며, 나이 든 사람에게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주어지며, 자유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예들에게도 주어지기 때문이다.

  로마서 10:12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고 주장하면서 요엘서 2:28을 인용했다. “모든 사람”은 이 양자를 다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록 이 구절에서 요엘은 이스라엘만을 말하고 있지만 바울은 이것은 육신의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이스라엘 적용된다고 해석했다(롬 9:6-15).

  옛 선지자들에게 권능을 주었던 바로 그 신은 또한 교회에게도 그 권능을 부여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 역시 성령이 임한 후에 하나님에 대한 증거할 권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신약은 하나님을 부르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행 4:9-12, 9:14,21, 22:16, 고전 1:2, 딤후 2:22). 이 점에 있어서 이 구절들은 오순절 베드로가 설교할 때 요엘서 2:32에 호소한 것을 생각나게 한다(행 2:21).



아모스서


    아모스서는 ‘12서’, 또는 ‘소 선지서’중 세 번째 책이다. 그러나 연대순으로 보자면, 아모스는 글을 남긴 선지(writing prophets)들 중에 첫 번째이다.  아모스서는 큰 책이 아니다. 단지 146절과 2,042 단어로 이루어진 9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집중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아모스서의 이해”라는 책에서 하젤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삼십년 동안 아모스서에 대한 주석이 육십개가 등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저작권의 문제 및 역사적 배경


    아모스와 그의 시대

    이 책은 우리에게 아모스란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선지자 아모스는 호세아와 동시대인으로 그보다 약간 연장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존재를 위협할 정도의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곧 주전 760년에 수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 전하였다: “유다 왕 웃시야(792-40 B.C.)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2세, 793-753 B.C.)의 시대의 지진 전 2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1:1).

    이 선지자의 사회적 지위: 언뜻 보기에 아모스는 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양치기였으며, 계절의 다른 과수원 일꾼이었다. 그는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사회계층 출신으로서 이들을 대변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아모스에게 사용된 “목자”란 칭호(1:1)로는 이 직업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단어(האר)가 아닌 다른 용어(דקנ)가 사용되었다. 우가릿어에서의 이 단어의 동족어를 고려해볼 때 아모스는 대규모 목축업자였거나 가축 중개인이었던 것 같다. 또 어떤 학자들은 아카드어에서의 이 단어의 동족어를 통해 아모스가 성전의 가축들을 감독하거나 관리하는 자였다고 주장한다. 부유한 개인이었든지 성전에 고용되어 있는 관리였든지 아모스는 단순한 농부나 소작인이 아니라 보다 부유한 사회계층의 사람으로서 그들의 죄악상을 고발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해볼 때 아모스가 이스라엘 사회의 부유층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하지가 않다. 아모스 스스로가 자신을 “양떼를 따르는 자”(7:15), 즉 부유한 가축 상인이 아니라 목자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드고아? 비록 그가 북 왕국에서 설교를 하기는 했지만 아모스 자신은 유다의 베들레헴 남쪽 오 마일 지점에 있는 드고아란 마을 출신이다. 그는 양떼를 치는 목자였다.(1:1).  성경에서 드고아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유일한 마을은 유다의 베들레헴 남쪽의 마을이며, 바로 이 마을이 전통적으로 아모스의 고향이라고 생각되어져 왔다.

    아모스와 기타 선지자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7:14)라는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잘 인용되는 구절들 중의 하나이며, 또한 선지서에서 가장 논쟁이 심한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이 구절을 과거시제로 번역할 경우, 그 뜻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었으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었다”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양떼를 치는 것으로부터 부르기 전까지는 그가 선지자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았고,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은 적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일 이 구절을 현재시제(“나는 선지자도 아니고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로 번역하면 아모스는 자신을 선지자로 간주될 수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하고 있는 것이나, 자신이 선지자(איבנ)임을 주장한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패터슨은 הזח(선견자)란 용어가 남왕국 유다에서 사용된 반면에 איבנ는 북왕국에서 사용되었다고 함으로써 두 용어를 구분했다. 이를 근거로 아모스가 “선견자”(유다 출신 선지자)는 받아들인 반면에 이스라엘 출신을 의미하는 “선지자”라는 용어는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두 용어가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리고 7:12,15에서 הזח와 איבנ가 사용된 것은 선지자 자신이 이 두 용어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본 것임을 시사해주고 있을 가능성 역시 동일하게 존재한다. 어쨌든 현재의 문맥은 이 구절을 과거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모스가 한 일들은 선지자가 하는 일들이었다. 그는 이상들을 보고, 설교를 했다. 그가 이 용어를 피할 이유는 거의 없다.

    선지자의 활동 배경: 아모스가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선지자로서 활동했느냐 하는 것에 대한 견해는 그가 그저 “이십 동안의 열변”을 토했을 뿐이라는 것이나 그가 하루 혹은 몇일의 기간동안만 활동했다는 것부터 그보다 훨씬 긴 기간동안 활동했다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의 설교는 여로보암과 웃시야 시대에 커다란 성공과 더불어 어두운 측면을 갖고 있는 북 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는 분열왕국 시대 중 이전에 없던 번영을 누리던 시기였다.  이 두 왕의 치세 중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토는 요나가 에언한 대로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 시절의 영토를 거의 포함할 정도로 팽창했다(왕하 14:25). 아모스의 설교의 초점이 된 것은 사마리아의 이러한 부유한 자들이 부와 권력과 특권을 남용한 점이다. 그러나 부와 군사적인 성공의 시기는 이스라엘 왕국의 짧고도 찬란한 일몰의 시기였다. 아모스의 설교는 앗시리아인들의 침략의 위험이 음울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하에서 주어진 것이다(3:11, 5:3,27, 6:7-14, 7:9,17, 9:4).

    아모스는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 그 당시의 사회, 사법, 국제 문제들에 정통하였다. 그는 주요 제의 장소인 벧엘과(7:10-17)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와(3:9; 4:1; 6:1) 아마 길갈에서 에돔, 암몬, 모압)의 지리, 역사, 사회 정치적 생활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1:3-2:3).

    아모스는 하나님께 굴복하였고, 그의 언약적 책임에 대해 염려하였다. 그는 지혜 전승에 정통한 유대의 현인이었다. 지혜자가 자기 보존을 위해 침묵을 지키는 것을 현명한 것으로 생각하였다면(5:13), 아모스는 잠잠하게 있을 수가 없었고 그렇게 있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가슴속에서 타는 불이었다(3:8). 그는 자신을 “직업적인” 선지자들과 분리하였다(7:10-13). 그는 부도덕과 압제와 부정한 행위들로 얼룩진(2:6, 7; 4:1; 5:10, 12; 8:4-6) 부자들의 부유한 생활을 질책하였다(3:10, 12, 15; 5:11; 6:4, 8).

    아모스의 비평은 그가 사업가였기 때문에 더욱더 유효하다(1:1 ; 7:14, 15). 그는 유대 광야 변경의 자신의 처소로부터 불러내신 하나님을 위해 모든 소유를 두고 떠났다(7:15). 그는 냉혹한 귀족 계층이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를 거부할 것을 익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북쪽의 이스라엘로 갔다. 아모스는 벧엘 성소의 제의 제사장 아마샤의 명령을 거부하고(vv.12-13), 현실정책을 반대하며, 우주적인 심판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과감하게 선포하였다.

    계시를 통해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환상을 받았다(7:1-9:10). 그는 이 메시지에 깊이 감동하여 북왕국에 여호와의 날의 임박성을 선포하였다. 심판의 긴박성이 그의 예언 말의 특징을 이룬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에 얼마나 임박하였는지를 조금도 알지 못했다. 여로보암 2세(793-753 B.C.) 재위 초기에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지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으나(6:13), 기원전 760년 아람이 요단 동편지역을 침략함으로(1:3, 13) 차츰 영토를 잃고 있었다. 앗시리아는 우랄투(Urartu) 왕국에(810-743 B.C.) 점령된 채, 기원전 743년 디글랏-빌레셀 3세가 첫 전쟁을 일으킬 때까지는 계속하여 아람을 자유롭게 지배할 수 없었다. 기원전 760년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재개된 군력 증강은 대지진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기원전 760년 무렵 이스라엘의 세계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의 종말이 그토록 가까웠는지를 깨닫지 못하였으나, 아모스는 이스라엘과 아람과(1:5 ; 732 B.C.) 다른 민족들의 멸망을 예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줄을 깨닫지 못한 채, 지도자들은 그들의 타락한 부(좋은 예로 “상아가 박힌 침상”을 들 수 있다)를 탐닉하였고 최고급의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4:1; 5:11; 6:4, 6).


    저작권 문제 

    이 선지자와 이 책간의 관계: 비평적인 사고가 등장하기 이전의 이 책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은 일인칭으로 된 신탁들이 선지자 자신의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삼인칭으로 된 7:10-17마저도 이 선지자 자신과 관계가 있거나, 아니면 동시대의 한 목격자가 쓴 것이라고 보았다.

    오경의 문서비평 방법론이 등장해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시기와 일치하는 첫번째 단계는 아모스 자신의 말들을 후대의 중수부분들로부터 구분하는 것을 그 목표로 했다. 학자들은 이 책의 원래의 것이 아닌 부분들로부터 이 선지자 자신의 입시시마 베르바(“바로 그 말들”)를 찾아내고자 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사상에서의 새로운 단계, 그리고 이스라엘의 고전적인 선지자들의 설교의 근간이 되는 진정한 윤리적 유일신 신앙의 발명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양식비평 및 전승사 비평의 발전은 아모스서의 비평학적 연구에 있어서 두 번째의 단계를 열었다. (1) 그의 원래의 구전 설교들의 구조 및 사회적인 배경이 조사되어졌다. (2) 성문화된 문헌이 어떠한 일련의 편집단계들을 거쳐서 성장해나갔는지 그 단계들에 대해서 관심이 기울어졌다. 아모스가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이 기울어짐으로써 기존의 비평학계에 대해 좋은 방향으로의 교정이 이루어졌다. 즉,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종교에 있어서 새로운 단계를 고안해낸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통들에 깊이 젖어있던 자였다는 것이다.

    아모스서의 수많은 구절들은 보통 중수된 부분들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7:10-17의 네러티브는 이 부분이 이 책의 유일한 삼인칭 네러티브라는 점과 이 부분이 일련의 이상들(7:1-8:3) 사이에 끼어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때문에 후대의 중수부분들인 것으로 보통 간주되고 있다. 왜 편집자가 이 네러티브를 바로 이 곳에 삽입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열방의 신탁들에 대한 신탁들(1-2장) 중에서 두로에 대한 신탁(1:9-10), 에돔에 대한 신탁(1:11-12), 유다에 대한 신탁(2:4-5) 등은 보통 후대에 중수되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신탁들이 기타 다른 나라들에 대한 신탁들과 양식상으로 사소한 차이들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세 신탁들은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는 결구가 없으며, 보다 축약된 형태의 심판의 선언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는 또한 수많은 “찬양시 단편들”(1:2, 4:13, 5:8-9, 8:8, 9:5-6)이 발견되는데, 이것들은 보통 예루살렘 제의에 속한 어떤 편집자에 의해서 후대에 삽입되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9:11-15의 구원의 약속 역시 보통 포로기 이후 시대의 산물로서, 어떤 후대의 편집자의 친유다적 혹은 친예루살렘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지고 있다. 다른 짧은 구절들 역시 보통 후대에 삽입되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예를 들어, 3:7의 예언에 대한 언급은 주전 6세기의 신명기사학파의 문헌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지고 있으며, 5:13의 경구 역시 후대의 어떤 편집자의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모스서에 대한 연구의 세 번째 단계에서는 학자들은 문학적인 구조와 수사학적인 발전과정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책에 접근하고 있다. 보다 최근의 접근방법들은 통시적인 문제들보다는 공시적인 문제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접근 방법을 택한 학자들은 이 책이 아모스 자신의 작품이거나 이 선지자의 동료로서 이 책의 문헌들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통일시켜 묶은 어떤 편집자의 작품이거나 간에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저작연대 및 저작방법 : 아모스가 벧엘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예언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가 자기의 계시들을 서기에게 받아쓰게 했는지 아니면 그것들을 스스로 기록했는지를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보다, 가능한 것은 아모스가 이스라엘에서의 짧은 ‘설교 여행’을 마치고 드고아에 돌아온 직후에 그의 계시 내용을 기록했으리라는 점이다. 그의 예언과 환상에 나타나는 1인칭 사용은 이 점을 지지해 준다(5:1; 7:1-9; 8:1; 9:1).

    이 책의 표제부에 언급된 ‘지진’은 지진 이전의 2년 동안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이 구절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면, 아모스는 벧엘에서의 짧은 선지 사역을 마친 이후 2년 동안 그 메시지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 지진은 아모스로 하여금 그의 경험을 속히 출판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예언서의 첫 절에 그 지진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은, 이 선지자가 그 자연적 재난을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예언이 일부 성취된 것으로 보고 있음을 가리키며, 하나님이 자신을 보낸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으로 보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2:13; 9:1)

    아모스서는 전통적으로 여로보암 2세 치하의 중반 혹은 말기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B.C 760년경). 최근의 역사적 추적 및 연대 계산에 의하면 예언의 기록 연대는 B.C 750-748년으로 미루어졌다. 그것은 여로보암 왕이 죽기 직전이었다. 이러한 이해는, 이 책에 암시된 역사적 사건들이, 이스라엘 백성 중 친 앗수르 세력이 반 앗수르 세력인 시리아-팔레스틴 동맹 세력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던 시대를 반영해 주고 있다는 점에 기초한 것이다.


문학적인 구조


    문학 형식

    아모스는 당대의 문학적 거장이었다. 그의 문학 작품으로 보건대 우리는 그가 수사학의 대가임을 알 수 있다(2:12; 4:1; 5:14; 6:13; 7:10, 11, 16; 8:5, 6; 9:10). 그의 가르침의 특징은 간결성과 솔직성과 생생한 비유와 충격 기법들이다.

    그 책은 자서전적 기사(7:10-17), 열국에 대한 심판 신탁(1:3-2:16), 진노에 대한 탄식 신탁(5:18-20; 6:1, 3-6), 환상을 본 이야기(7:1-3, 4-6, 7-8; 8:1-2; 9:1-4), 숫자에 관한 언급(1:3, 6, 13;2:1, 6) 재담(5:5; 6:1, 6-7; 8:2), 지혜 속담(3:3-6, 8), 풍자(4:4-5; 6:12) 수사학 질문 형태(3:3-6, 8; 5:18-20; 9:7), 은유(2:13; 3:4-5; 4:12; 5:19, 24), 직유(2:9; 5:7; 6:12), 두운법, 대구, 찬송(1:2; 4:13; 5:8, 9; 9:5, 6), 메신저 공식(“여호와께서 가라사대,” 1:6, 13; 2:1, 6; 3:11, 12; 53, 4, 16; 7: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 8, 15; 2:3; 5:17) 등을 포함한다. 교훈적 질문과 진노에 대한 부르짖음과 숫자적 언급과 권면들은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에 친숙했음을 보여준다.

    아모스에 있어서는 대개 그 진정성과 완전성에 대한 문제가 논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해리슨은 약간의 삽입이 있었을 기능성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유용한 증거를 근거로 보건대, 서기관의 도움을 받았던지 그렇지 않았던지 간에 아모스에게 자신이 신탁과 환상을 기록하는 책임이 있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는 것 같다”고 주장한다. 크레이기는 그 책이 유다에서 “선지자 목소리 본연의 진정한 기록으로” 보존되었다고 결론 짓는다.

    이 선지서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우주적 심판이다(1:2). 그 예언은 결코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에만 국한된 것으로 의도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표제는 수신인의 범위를 북 왕국에서 유다까지로 확장시키는 정경적 기능을 수행한다. 게다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는 여호와에 대한 짧은 찬송은 그 찬송과 신탁과 환상을 이 따의 모든 민족에게 적용하는 틀을 이룬다. 메시지의 범위를 이스라엘과 유다를 넘어 열국으로 확장하는 열방에 대한 심판 신탁은 (1:3-2:16) 이것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를 선포하는 네 편의 찬송도(1:2; 4:13; 5:8, 9; 9:5, 6)보다 넓은 정경적 상황에서 그 예언의 적용을 가능케 한다.

    그 예언을 북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포 이상으로 읽게 되면, 저작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아모스가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을 배경으로 그의 심판을 말하였다. 소망을 말하는 부분은(9:11-15) 아모스서의 정경적 기능을 하나의 종말론적 틀로 -심판에서 최후 회복에의 소망으로-확장시킨다.


    구조와 조직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모스 예언의 전반적인 통일성에 대하여 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점차 그의 문학적 재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대담하고 청중을 사로잡는 듯한 스타일은 그가 전직하며 확신에 넘친 사람임을 말해준다. 특히 환상 부분에서는 그가 사용한 언어의 생생함을 최대한 나타내고 있는데, 그는 하나님이 계시하여주신 ‘그 말씀들을 실제적으로 보았음’을 말해준다. 예화, 비유, 수사학적 질문에서 목가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 선지자의 농촌 배경을 말해준다(3:3-8, 12; 6:11-14)마지막으로 이 책 중의 노래 부분(5:1-2)은 세 군데의 송영(4:13; 5:8-9; 9:5-6)과 더불어, 아모스가 시적인 능력 또는 기존의 잘 알려진 노래들로부터 빌려왔을 음악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잘 드러내 준다.

    이 책의 대체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이 4개의 기본적인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열방에 대한 8개의 경고(1:3-2:16)

      2. 5개의 예언(3-6)

      3. 5개의 예언적 환상에 대응하는 내용(7:1-9:10)

      4. 축복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는 마무리(9:11-15)

    열국에 대한 경고는, 모두가 파멸과 포로됨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예언서의 특징을 결정짓는다. 특별히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일련의 예언과 환상은 심판이라는 주제를 단순한 위협에서 현실로 구체화시켜 주며, 국가의 임박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확실성을 다시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마지막 말씀의 신빙성은 현대 학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에돔에 대한 관심(9:12)은 포로기 이후의 것이며, 구원을 선포하는 말씀은 전반부의 ‘파멸’을 선포하는 말씀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모스가 회개를 촉구하는 사실에서 희망과 축복에 관한 말씀을 짐작할 수 있다(5:8, 14-15), 이스라엘 중에 신실한 남은 자들에게 있어서, 그 선포된 말씀은 포로됨과 파멸의 메시지를 논리적으로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철저히 파괴하실 것이요, 또한 그가 파괴한 것들을 다시 건축하실 것이었다(7:1-6: 9:11-15).

    이 책의 특별한 구조는,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선지적 언어 형태, 반복적인 말과 구절, 그리고 표준적인 문학적 구조 등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 책은 선포(“들으라…” 4:1), 계시(“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7:1), 그리고 맹세 양식(“주 여호와께서 맹세하시되…” 4:2)등을 담고 있다. 또한 여러 형태의 예언적 경고 말씀이 들어 있는데, 예를 들면, 심판(2:6-8), 교훈과 관계(“하라” 또는 “하지 말라” 5:4-5), 회개(“돌아오라” 5:4-10), 그리고 “화” 또는 고발적인 선포(5:18)등이다. 그 외에, 모든 예언 부분에 공통적으로 수사학적 질문법이 사용된다(3:3-8; 6:11-14).

    아모스는 그의 메시지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하여 반복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구하라…그러면 살리라”(5:4, 6, 14),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4:6, 8, 9, 10, 11), 그는 문학 단위 속에서 더 작은 단위를 세분화하고 있다-“하나님/사자가 시온에서부터 부르짖는다”(1:2; 3:8), “벧엘과 길갈”(4:4; 5:5), “상아궁들이 파멸되며/큰 궁들이 결딴나리라/큰 집이 가랄지며”(3:15; 6:11).그리고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인진/공법을 쓸개로 변하며”(5:7; 6:12).

    열국에 대한 8개의 경고(1:3-2:16)는 이 책 전체의 성격-즉 하나님의 심판과 외국의 포로됨-을 규정한다, 지혜롭게 배열된 메시지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하여 개진되고 있는데, 결국 이 선지자의 궁극 목표인 이스라엘에 이르러 정점을 이룬다. 이 경고는 표준적인 형태를 띡 있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즉 고발, 교훈, 또는 훈계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신실한 남은 백성들에 대한 미래적 회복의 약속 등으로 이루어진다, 아모스의 경우에 다섯 가지의 심판에 대한 환상은 단순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을 강화해 준다.

    구조:

    표제와 주제(1:1, 2)

    A. 열방에 대한 심판 신탁(1:3-2:16)

      1. 아람(다메섹)(1:3-5)

      2. 블레셋(1:6-8)

      3. 두로(1:9-10)

      4. 에돔(1:11-12)

      5. 암몬(1:13-15)

      6. 모압(2:1-3)

      7. 유다(2:4-5)

      8. 이스라엘(2:6-16)

    B. 다섯 편의 신탁 : 이스라엘에 대한 계속적인 경고(3:1-6:14)

      1. 첫째 신탁 : 이스라엘 백성들아, 이 말씀을 들으라(3장)

      2. 둘째 신탁 :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씀을 들으라(4장)

      3. 셋째 신탁 : 이스라엘 집아 이 말씀을 들으라(5:1-17)

      4. 넷째 신탁 : ‘여호와의 날’을 염려하는 자들이 받을 화(5:18-27)

      5. 다섯째 신탁 : 시온에 안연히 거하는 자들이 받을 화(6:1-14)

    C. 다섯 편의 심판 환상, 7:1-9:10

      1. 첫 번째 환상 : 메뚜기 재앙(7:1-3)

      2. 두 번째 환상: 소멸하는 불(7:4-6)

      3. 세 번째 환상: 하나님의 다림줄(7:7-9)

      3a. 역사적 삽입 부분: 아마샤가 아모스에 도전함(7:10-17)

      4. 예언적 투시: 심판의 경고-여름 실과(8:4-14)

      5. 다섯째 환상: 제단 옆에 서 있는 여호와-황폐한 성소(9:1-10)

    D. 결어-신학적 해설: 하나님의 주권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9:11-15)


    열방들에 대한 신탁(1-2장)

    아모스는 일곱 나라에 대한 예언적인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데,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가장 마지막에 가서야 언급한다. 이러한 심판의 신탁들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일종의 “지리적인 교차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즉 시리아는 동북쪽이고, 블레셋은 서남쪽이며, 두로는 서북쪽, 에돔과 암몬과 모압은 동남쪽, 유다는 남쪽이며,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이방나라들은 주로 전쟁에서의 죄악들 때문에 질책을 받는다.

    가이어는 열방들에 대한 아모스의 신탁들이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의 열방들에 대한 대규모의 신탁모음집들의 특징인 신화적인 모티브들을 결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다른 모음집들의 경우와 달리 아모스의 신탁들은 주로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 수사학적 기법들이다.

    학자들은 아모스가 어떤 도덕적인 권위에 근거해서 이러한 심판의 말씀들을 선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그는 어떤 보편적인 국제법에 호소하고 있는가? 히타이트 고대 조약 문헌들은 전쟁행위와 죄수들의 취급에 대해서 구체적인 조항들을 담고 있는데, 이 점은 아모스의 말들 배후에 깔려있는 도덕적인 전제들이 폭 넓게 받아들여진 것임을 증명해준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들(3-6장)

    3-6장에서 아모스는 아주 다양한 문학 양식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선지자적인 소송의 연설 양식이다. 이 양식에 따르면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고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법정 대리인의 역할을 한다. 성경의 선지자적인 소송 양식들은 조약관계하의 종주가 대리인을 보내 순종적이지 못한 속주나 신복에게 언약의 의무사항을 일깨우고, 의무사항을 지키지 않을 것을 지적했다. 이것의 배경은 재판정이다.

    이러한 요소들 중에 많은 것들이 아모스서 3:1-15와 같은 예에서 발견된다. 검사와 피고인이 소개되고(3:1a), 과거의 관계에 대한 간략한 역사 및 그 관계의 파기가 선언된다(3:1b-2). 대질심문은 수사의문문들에 통해서 이루어지며(3:3-6), 선지자-법정대리인의 권한이 확증된다(3:7-8). 심판의 선언들을 방청하도록(3:10-15) 주변 열방으로부터 증인들이 호명된다(3:9). 선지자적인 소송의 양식 이외에도 아모스는 또한 심판의 연설들(4:1-13, 5:1-7)과 저주의 신탁들(5:18-27, 6:1-14)을 사용한다.


    이상들에 대한 기록들(7-9장)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다섯 개의 이상들에 대한 자서전적인 시록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이상들 중의 처음 네 개(7:1-3, 4-6, 7-9; 8:1-3)는 서로간에 비슷하지만 다섯 번째 것과는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9:1-10). 처음 네 개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어떤 대상이나 사건 등을 “보이셨다”(7:1,4,7; 8:1). 그러나 마지막 이상에서 보여진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과 선지자간에는 아무런 대화가 없다. 선지자는 조용히 하나님 말씀을 경청한다.

    처음 네 개의 이상들은 분명히 서로간에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집단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처음 두 개의 이상은 사건들(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묘사하고 있으며, 다음의 두 개의 이상은 물건들(다림줄과 광주리)을 묘사하고 있다. 처음 두 개는 농경사회에서 일어날 수 잇는 가장 큰 재앙들(메뚜기와 가뭄)이다.  다림줄은 하나님의 기준, 즉 율법을 상징하며, 어떤 물체의 수직성을 측정하는 이 물건은 이 백성의 불순종과 대조가 된다. 다림줄로 측정해볼 때 벽이 어긋나 있는 성은 계속해서 유지될 수가 없다. 마지막 이상에서 여름과일 광주리를 통해 아모스는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이상들(1:11-14)과 비슷한 언어유희를 한다. 여름(ץיק) 과일은 이스라엘의 종말(ץק)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이 나라가 심판을 받을 때가 무르익었다.

    이 책은 구원의 신탁이 갑자기 주어지는 것으로 긑이 난다. 다림줄로 재어볼 때 바르지 못해서 멸망당한 이 나라(7:7-9)는 다시 세워지며(9:11-12), 지나치게 익어버린 이 백성(8:1-3)은 열매가 풍성한 땅에서 다시 한번 회복을 즐길 것이다. 이스라엘은 회복된 에덴동산이 될 것이다(9:13-15). 소산물의 풍성함은 종말론적인 미래의 축복들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선지자들에 흔히 등장하는 모티브이다(예를 들어 겔 47장, 욜 3:17-21, 슥 3:10).

    아모스는 자신의 신탁들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직유, 은유, 별칭, 잠언들, 짧은 네러티브들, 조롱, 직설적인 저주, 이상, 대화, 아이러니, 풍자, 패러디 등의 상당히 다양한 문학적인 기교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들이 사용한 양식들의 모음이나 다름없다”. 이 선지자는 또한 구조상의 반복(열방들에 대한 신탁들이나 이상 기사들의 경우처럼)이나 수사의문문들의 사용(3:3-6)이나 어구의 반복(3:4,8)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인 주제들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

    역사의 흐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배하고 있다는 믿음을 아모스가 정경상의 다른 선지자들과 공유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북왕국의 종교적, 사회적 관행들을 거부하시고.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그들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하버드는 이러한 주권적인 통치와 심판을 네 가지 상이한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다. 첫째, 개인적, 신적 차원에서 보면 심판에 있어서 주도권을 취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둘째, 창조의 차원이다. 세상 자체가 악을 심판하기 위해서 일어난다. 셋째, 도덕적인 인과관계의 차원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저질러진 악은 본인에게 악으로 되돌아온다(3:11, 5:11). 넷째, 정치적인 역사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는 세상의 열방들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역 속에서 자신의 주권적인 힘을 과시하신다. 바다 속이나 산 속, 음부나 하늘 속으로 숨더라도 그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9:2-4).


    우상숭배와 사회적인 불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아모스의 메시지는 우상숭배와 사회적인 불의라는 두 가지 영역에 대한 것이다.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에는 우상숭배가 흔한 일이었다(2:8, 5:5,,26, 7:9-13, 8:14). 야웨 숭배 그 자체가 부패하게 되었으며, 외형적이고 허식적으로 치러지는 희생제사의 의무(4:4-5, 5:21-26)와 안식일 명령(8:5) 등의 종교적인 사항들은 모두 “율법의 보다 중요한 요소들”을 상실했다. 또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공개적으로 무시했다(2:7-8).

    여로보암 2세 하에서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성공에 따른 물질적인 번영은 이스라엘에 강력하고 부유한 상류층을 창출해 내었다(3:12,15, 6:4-6). 새로운 차원의 여유시간과 잉여재산 때문에 노골적인 악들이 저질러졌다. 술의 남용으로 여성들에게도 문제거리가  되었다(4:1). 부자는 공의를 돈으로 살 수가 있었지만(5:12), 가난한 자들은 돈에 팔릴 수밖에 없었다(2:6-7, 8:6).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은 힘있는 자들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였다(2:7, 4:1, 5:11, 8:4).

    아버지와 아들이 한 창녀와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내들이 창녀가 되고, 자식들이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되어 있었다(7:17). 가난한 자들을 괴롭힌 자들(2:7, 4:1)은 자신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었다(2:13).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 백성들 가운데 공의를 명하셨으며(5:15), 희생제사보다는 순종을 요구하셨다(5:18-24).



    남은 자

    아모스는 초기의 성경 비평학이 묘사한 것 같은 급진적인 종교개혁가가 아니었다. 언약에 근거한 법정 소송의 대리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언약의 존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오경의 내용을 많이 언급하고 있으며, 언약적인 이념을 잘 파악하고 있다. 아모스는 자신이 모세의 뒤를 잇는 일련의 선지자들의 한 구성원이라고 보고있다(3:7, 신 18:14-22).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들은 신명기 28장과 레위기 26장의 저주 목록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선민, 즉 야웨와의 언약관계 속에서 구속을 받은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지위는 이 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3:1-2).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그는 도한 그들이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을 요구했다.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자기 백성에게 헌신을 했다는 사실과 이 백성이 그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긴장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은 선지서들 속에서 주로 남은 자 모티브를 통하여 선포되어졌다. 아모스가 볼 때에는 계획된 하나님의 심판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존속을 위협하는 것이었다(5:15, 6:9). 이스라엘은 체 속의 곡식과 같았다.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나 이 백성들 속의 모든 죄인들을 죽게 될 것이었다(9:9-10).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다시 심으시고 그들을 축복하실 것이다(9:11-15).

    아모스는 그의 사역이 단지 소수의 심금을 울릴 뿐인 것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지자의 심판 신탁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빈정거리며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9:10)고 말한다. 그는 남은 자를 목자가 구출할 수 있는 작은 조각에 비유했다(3:12)..

    사로잡힘의 위협이(4:2-3; 5:5, 27; 7:11, 17) 임박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약속의 땅으로의 회복을 약속함으로 남은 자들을 격려하였다(9:13-15; 참고, 렘 24:6; 31:28; 42:10). 남은 자 공동체는 그를 찾고, 오직 그만을 그들의 구세주로 인정하며, 선을 행하는 데 지혜롭게 인내하는 자들로 구성된다.

    여호와는 그의 뜻 (“의를 행하는 것”)에 순응하기를 기대한다. 참된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 사랑은 빈궁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으로 증명된다(5:14-15 ; 참고, 레 19:15 ; 시 41:1). 그래서 선지자는 남은 자들에게 “공법(sedaqa)을 물같이, 정의(mispat)를 하수같이” 홀림으로써(v.24) 그 시대의 악습과(2:1,2,6-8 ; 5:12), 위선적인 행위와 종교적 허례들(5:21-26)을 멀리하도록 권고하였다. 오직 정의와 공법의 하나님의 왕국을 찾음으로써만 그들은 스스로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마 6:33,34).


    언약 갱신

   남은 자들은 언약 갱신의 혜택을 향유할 것이다. 예언의 끝맺음 말로 소망이 비록 간결하게 진술되었을지라도, 소망이 있음은 분명하다(9:11-15). 붕괴하는 다윗 왕조(“다윗의 무너진 천막,” v.11)는 새로운 힘으로 일어서서 축복의 새 시대를 열 것이다. 메시아 시대의 혜택들은 이스라엘과 열방에 베풀어질 것이다. 이 시대는 그의 백성의 완전하고 영원한 기쁨으로 창조 세계를 흠뻑 축복하기 위하여 피조물의 변형을 계획한 하나님의 웅대한 계획에 통합되어 있다(vv.13-15)

    아모스의 보편 구원론적 암시의 적용을 통해 이방인들이 초대 교회의 언약적 특권들을 충분히 공유할 수 있는 문이 넓게 열렸다. 야고보는 아모스 9:11, 12를 인용하여 이방인 선교를 옹호하였다(참고, 행 15:16, 17). 아모스의 메시지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인(암 3:7; 참고, 계 10:7; 11:18) 우리 주님의 오심에까지 관계된다. 다윗의 구세주이자 메시아인 예수 역시 거룩한 전사로서 인간 왕국의 진멸을 통해 그의 왕국을 건설할 것이다(계 6:15-17 ; 참고, 암 9:1).


    여호와의 현현

    네 개의 찬송시 단편들은 여호와의 자유와 권능에 대한 메시지를 더 자세히 설명한다. 각각의 찬송에서 아모스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말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독자들을 깊이 감동시킨다. 첫 찬송은(1:2) 책의 주제를 요약한다. 창조 질서 안으로 여호와가 오심에 대한 공포, 그의 오심(현현)과 관련된 현상들은(여기서는 가뭄으로 대표됨) 모든 피조물에게 영향을 미친다. 아모스는 두려움에 찬 여호와의 오심을 예고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므로 그의 선포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다. 다시 말하면 아모스는 여호와의 음성을 발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가뭄과 황폐를 가져온다

    세 개의 다른 찬송 구절들은 여호와가 창조 세계로 오심으로 주어지는 영향을 밝힌다. 하나님에 대해 아모스가 즐겨 사용한 호칭은 여호와(5:8; 9:6), 만군의 여호와(4:13; 9:5), 주(아도나이, 9:5)등이다. 그는 여호와가 누구인가 하는 신학을 덧붙이지 않고, 경외롭고 권능에 찬 그의 오심을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두 번째 찬송에서 아모스는 전능자의 오심과 관련된 황폐화를 말한다. 여호와는 그의 창조 능력으로 인류를 다스리는 창조자-통치자이다. 그는 창조주, 곧 산과 바람의 주권자이나 인간과 교통하기 위해 내려오신 분이다(4:13).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과거 결단을 상기시킨다. 여호와는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고,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에게 땅과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었다(2:9-11).

    그는 법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여 그들이 스스로 열방과 분리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히려 열방의 생활 방식으로 스스로 더럽혔다(2:6-8). 더욱이 사람들은 물질적 소득을 선호하여 그들의 성별의 유일한 표식인 안식일을(출 31:12-17)업신여겼다(암 8:5).

    하나님은 그들이 참된 예배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깊은 신심을 표현하여 행하였던 모든 종교적 행위들을 경멸하였다(4:4-5). 그는 이방 종교와 관련된 풍산 제의와 부도덕을 몹시 싫어하였다(2:8). 그들이 이방 종교의 잘못된 것을 따르고 그들이 종교적 상징들을 통하여 다산과 번영과 권력을 소망하는 한 그들은 생명과  건강과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 창조자-계시자를 찾지 않을 것이다. 오직 여호와만이 비(4:7, 8), 작물(4:6, 9), 건강과 평화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완고하게 그들이 생각한 민족적 성공의 길에서 돌아서기를 거부하였다.

    세 번째 찬송에서 아모스는 여호와 왕국의 광대함과 권능을 설명한다. 그의 통치 영역은 하늘(묘성, 삼성)과 땅(어둠, 아침 바다, 마른 땅)을 망라하고(5:8), 그만이 하늘과 땅의 반대되는 것들-어둠과 아침, 낮과 밤, 바다와 땅-가운데 질서를 유지시킨다. 이스라엘은 “정의”와 “공법”의 하나님 왕국을 거부하였다. 공법은 하나님의 행위(축복, 풍부한 선물, 관용)을 통해 피조물을 다스리는 여호와 통치의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조화와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는 질서이다. 정의는 하나님과 관련된 때, 하나님의 현명하고 정당한 심판과 관계된 공법의 일면이다. 아모스는 지도자들이 정의와 공법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왕국의 이상을 버린 것을 질책하였다. 도시의 “성문들”은 변호와 무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기쁨의 소리로 충만하였다(6:12). 하나님이 질서를 회복시킬 때, 인간의 조직들은 더 이상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네 번째 찬송은 가장 극적이다. 신의 현현이 우주적 대 변동을 동반하고 결국 인간문화의 훼손을 야기한다. 여호와는 하늘과 땅, 피조물과 열방의 주이다. 모든 피조물이 그의 움직임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한 그가 이스라엘의 사로잡힘을 확정하였다(9:3, 8, 9).


    심판은 확정되다

    다섯 개의 환상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굳은 결심과 중보자로서 선지자의 역할을 통찰해 볼 수 있다. 모세와 같이, 아모스도 이스라엘이 자연 현상(황충-메뚜기, 7:1-3으로 파멸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기를 간구하였다. 그에 대해 하나님이 참으심을 보일 때 아모스는 다소 안심하였으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불 환상도 아모스의 기도 때문에 실행되지 않았다(7:5-6).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는 처리되지 않았고, 단지 하나님의 선고가 유예되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 판결은 확정되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오랫동안 참았을 뿐이다. 세 번째 환상에서 하나님은 아모스가 구원을 기도할 수 있기도 전에, 먼저 더 이상 그들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다(“내가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라,” 7:8) 이스라엘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모사였고, 하나님의 왕국에 무질서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다림줄은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떠나나를 보여준다.

    벧엘의 왕실 대제사장 아마샤와 아모스 사이의 논란이(7:10-17)첫 세 환상과 마지막 두 환상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표면상으로 이런 단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필요성을 부여한다. 아마샤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응하는 체제를 대표한다. 이스라엘은 교정에 한계를 넘어섰고, 하나님이 백성들을 포로로 보이시려는 판결에는 변함이 없었다(V.17).

    여름 실과 한 광주리의 셋째 환상(8:1-3)은 세 번째 환상(7:9)과 포로로 끌려갈 예고(v.17)를 발전시킨다; 심판의 “때가 무르익었다”(8:2). 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해 성소의 노래는 애곡으로 변할 것이다(v.3). 이스라엘의 사회-종교, 경제, 정치, 조직들은 붕괴될 것이다(vv.9-14). 볼프가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현재의 안전한 삶 대신에 끝도 없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삶도 죽음도 없고, 오직 끝도 없고, 절망적인 무익한 탐색만 있을 뿐이다.”

    마지막 환상은(9:1-3)대단원의 결정이다. 여호와는 그의 백성을 버릴 것이다. 그가 백성들로부터 숨게 되자 그들은 소외의 어두움 속을 더듬고 다녀야 할 것이다. 땅의 깊은 곳이라, 하늘의 높은 곳도 폭풍과 같은 여호와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그들에게 주지 못할 것이다(vv.3-4). 여호와가 그들을 붙어 따라다니며 괴롭히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v4: 참고,8:7)


    하나님의 자유

   은혜와 약속이 조건적이기 때문에, 언약관계를 파기하는 것은 여호와에게 자유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황폐케 하는 권능은 부자연적인 권능이다. 그는 그의 백성에게 긍휼을 보이는 데 자유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남은 자를 보존하는 데도 자유하다. 심판을 통해 그는 바람직하지 못한 재료(“돌멩이”)를 구분하여 겨와 함께 던져 버리고 알곡만 보존할 것이다(9:8,9). 그는 남은 자를 깨끗게 하여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체질할 것이다.


    여호와의 날

    이스라엘은 보통 “여호와의 날”이 이 나라가 변호를 받는 날, 용사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심판을 행하시는 날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 개념을 뒤집었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의미했으며, 용사이신 하나님은 이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원수의 군대들을 자기 백성에게로 보내실 것이다(5:18-20). 우리가 종말론을 보편적이고, 말세적이고, 재난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때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아모스의 용법은 아마 종말론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개념을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장차 반드시 개입하실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아모스의 용법은 확실히 종말론적인 것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앞에 구속사의 다음 단계-여호와의 날(yomYahweh, 암 5:18-20)-를 매우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이미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하였으나 소용이 없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버림받는 충격을 체험하고서야 구원이 허락지 않았음을 배울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운명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들에게 있어 여호와의 날은 언약으로 약속되었던 “황금 시대”를 뜻하였다. 교만한 가운데 그들은 안일함과 우월감을 느꼈고, 스스로를 “최고 민족”으로 불렀을 것이다(6:1). 그들이 그들의 교만죄를 보지 못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가 고집불통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날을 향유할 자격이 있는 축복과 번영의 시대로 사모하였다는 사실은 놀랍다(5:18). 아모스는 이날의 두려움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말하고, 그 괴로움을 어둠에 비유하였다.

    이같이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의 일시적인 표현으로 사마리아의 멸망을 예고하였다. 이때에 이스라엘은 크게 파괴당하고 오직 남은 자만 남을 것이다(5:2).  여호와는 심판의 집행자이다(1:3-5, 7-8, 9-14; 2:1-3, 4-5, 6; 3:2, 14; 4:12;  5:27; 6:8; 7:8; 8:2, 9; 9:1-4). 사로잡힘은 분명히 임할 것이며(4:2-3; 5:5, 27; 7:11, 17), 죄인들은 응분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9:10). 그 종말은 기원전 722년에 임했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은 사회정의 및 가난한 자들의 학대에 대한 아모스의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교회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서는 안된다(고전 11:22, 약 2:1-10). 진정한 종교는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을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요구한다(약 1:27, 5:1-6).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약 2:5).

  아모스서는 특히 신약의 몇몇 구절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인용되어 잇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어쩌면 아모스서에 기초한 것일 수가 있다(5:15, 롬 12:9). 스데반은 광야 방랑시절 동안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을 회상하는 가운데 이 선지서를 인용했다(5:25, 행 7:42). 아마 가장 흥미로운 인용구는 사도행전 15:16-17에 인용된 아모스서 9:11-12일 것이다. 비록 사도행전에 인용된 실제구절의 원자료를 확정짓는 것은 어렵지만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는 이방인들을 교회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이스라엘의 재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오바댜서


   “좋은 것은 작은 ”꾸러미에서 나온다“라는 옛 속담은 구약의 이 가장 짧은 책의 경우에 아주 적절한 말이다. 반대로 많은 학자들은 이 책에 대한 제롬(Jerome)의 말에 동의해 왔다: “quanto brevius est, tauto difficilius” (“이 책은 짧은 만큼 어렵다”).


역사적 배경


   저작권의 문제 및 역사적인 배경

   선지서들에 대한 표제들은 보통 해당 선지자가 살았던 시기, 그의 출신 지역,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이름 등에 대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오바댜에 대해서는 위의 아무런 정보도 제공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의 정확한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까지 논란이 있을 정도다. 오바댜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모음부호에 따르면 이 이름은 “야웨를 예배하는 자[הꖷꕎꔨ꘢ worshipper of Yahweh]”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70인경(Abidiou)과 불가타역(Abdias)에서는 그의 이름은 다른 모음으로 읽혀지고 있으며, 이 경우 그의 이름은 “야웨의 종[הꖿꕉꔮꘞ servant of Yahweh]”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스튜어트(Stuart 1987, 406)는 이 이름들이 같은 이름의 변이형(bi-forms)이라고 주장했다[13 Obadiahs; 6 Obeds]. 예를 들어 영어 이름에서 Bert나 Burt 혹은 Beth나 Betty가 서로 같은 이름인 것과 같은 경우라는 것이다. 최소한 구약에서는 열 두 명의 사람이 오바댜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다른 흔한 이름중의 하나인 오베드(Obed)는 오바댜라는 이름의 애칭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 선지자는 이들 중의 그 어느 누구도 아니다.1) 이 선지자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사실은 그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들이 성소들에서 주어졌다고 주장하며, 그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오바댜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 직원들 중에 속한 제의적인 선지자(a cultic prophet)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책이 어느 특정한 절기나 제의적인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들은 매우 추상적이다. 알렌(Allen 1976, 136)은 이 책이 역사적 구체성을 띠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제의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상치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제의를 위한 글들은 그 어조가 보다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나훔서, 하박국서, 요엘서 - 책의 표제에 나오는 선지자에 대해서 정보를 거의 제공해 주지 않는 책들 - 등과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이 책의 연대 및 역사적인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자료들을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연구사를 보면 이러한 자료들이 꼭 결론들을 도출해 온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바댜서가 주전 6세기의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데 거의 동의를 하고 있다. 즉 유다 왕국의 바벨론 유수 초기 혹은 이 세기의 후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연대를 지지해 주는 가장 명백한 자료는 유다의 멸망 때 에돔이 유다를 침공한 것에 대해서 오바댜가 책망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11-16절). 이 사건은 다른 성경 구절들에도 기록되어 있다(시 137:7; 애 4:21-22). 외경인 에스드라 1서(4:45)는 에돔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태운 것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한 역사적인 토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일부학자들은 보다 늦은 시기의 연대를 주장했다. 버워(Bewer 1911)등의 학자들은 에돔의 멸망에 대한 예언들이 바티키니움 엑스 에벤투(vaticinium ex eventu, 사건이 있고 난 이후으 예언)라고 보았다. 이들은 이러한 예언들은 5세기 말엽에 나바테아인들(the Nabateans)에 의해서 에돔이 멸망한 이후에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9절은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예언적인 경고이다.

   카일(Keil), 영(E. J. Young) 등의 소수의 학자들은 반대로 주전 9세기 중엽이라는 이른 시기의 연대를 채택했는데, 그들은 이 책을 여호람 시대의 사건들과 연결시켰다(왕하 8:20-22; 대하 21:8-10). 이러한 이른 시기의 연대는 만약 현재의 12소선지서들의 정경상의 순서가 연대기적인 순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경우는 아주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2소선지서의 책들은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에는 연대순으로 되어있지만 연대기적으로 확실성이 덜한 책들의 경우는 주제상의 연결이나 동일한 어휘의 사용 등의 이유 때문에 그런 순서로 배열된 듯하다. 또한 70인경상의 배열순서는 히브리어 사본상의 배열순서와 차이가 난다.

   오바댜서는 에돔에 대한 신탁이다. 이 땅은 또한 세일로도 알려져 있었다(창 32:3; 36:20-21,30; 민 24:18). 이 지역은 사해의 남쪽과 동쪽에 놓여 있으며, 와디 제레드(the Wadi Zered)로부터 아카바 만(the Gulf of Aqabah)까지의 지역에 걸쳐 있다. 이 땅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의 변경에 놓인 아주 좁다란 띠 모양의 땅이다. 다음의 두 개의 중요한 남북 교통로가 이 지역을 통과했다: (1) 소위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 물을 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농경지를 따라 뻗어 있으나 동서간의 깊은 계곡들을 건너기고 해야 함. (2) 농경지의 동쪽 바깥 경계를 따라 뻗어 있는 길인데, 이 길을 따라 갈 경우 그러한 깊은 계곡을 건널 필요는 없음. 이 두 무역로는 요단강 동쪽 편의 중요한 간선도로들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물품들이나 물건들이 이 길들을 따라 운반되었으며, 대상들에게서 거둔 세금이 에돔의 수입의 토대였다.

   성경은 이스라엘과 에돔간의 길고 빈번한 접촉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부분은 군사적인 갈등에 대한 것들이다. 에돔인들은 야곱/이스라엘의 형인 에서(창 36:1,9)의 후손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 이후에 에돔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땅을 통해 가는 것에 반대했다(민 20:14-21; 삿 11:17-18). 발람은 에돔이 정복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민 24:18). 통일왕국 시대의 왕들 - 사울, 다윗, 솔로몬 - 은 에돔인들과 싸웠으며, 사실상 잠시동안 그들의 땅을 지배했다(삼상 14:47; 삼하 8:13-14; 왕상 9:26-28; 11:14-22). 9세기중 여호사밧의 시대에 에돔은 모압 및 암몬과 동맹을 해서 유다를 침공했다(대하 20장). 몇 년 후에 에돔은 여호람에 대항한 반역을 일으켜서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약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누렸다(왕하 8:20-22; 대하 21:8-10). 8세기초에 유다의 왕 아마샤는 다시 한 번 에돔을 정복했으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다시 많은 사람을 처형하였다(왕하 14:7; 대하 25:11-12). 8세기 중엽 아하스의 치세 중에 다시 한 번 에돔은 유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포로들을 사로잡게 되었다(대하 28:17). 바로 이 때 에돔은 이스라엘의 멍에를 벗어나서 다시는 복속되지 않았다.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지배하던 시기에 에돔은 이 강대국들의 속국의 지위로 전략했다. 한 때 에돔은 바벨론에 대항한 음모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렘 27장).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에돔은 그 시기의 이점을 이용하였으며, 바빌로니아인들과 힘을 합쳤거나 아니면 단독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으며, 바로 이 사건이 오바댜서의 동기가 되었다.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볼 때 페르시아 시대(6세기말부터 4세기까지) 중에 아랍의 영향 혹은 침투가 점증하고 있다. 주전 4세기 말에는 나바테아의 아랍 왕국이 페트라를 중심으로 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바테아인들로부터의 압박에 따라 많은 에돔인들은 유다의 네게브 지역으로 옮겨갔으며, 이 지역은 이두메아(Idumea)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이름은 에돔이라는 옛 이름을 보존하고 있다.


                    문학적인 분석


  문학 형식

   예언은 짧으나 논쟁점을 많이 안고 있다. 제롬(A.D. 345-419)은 그 책의 문제점들이 책의 크기에 역비례한다고 말하였다. 오바댜서 연구에서는 예레미야서와의 문학적 유사와 책의 구조 이 두 주요 문제가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두 문제 다 복잡하고 광범위하게 다루어져 왔으나, 아직 일치된 의견을 보지 못하고 있다. 만약 오바댜가 “그의 예언을 전개함에 있어 제의적, 전승적 주제를 빌렸다”는 알렌의 결론이 옳다 할지라도 누가 누구에게서 빌렸는지에 관한 논쟁은 해결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나는 역사적 자료와 문학적 재구성은 오바댜서 해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차일드의 말에 동의한다.


   구조와 조직

   오바댜는 에돔에게 경고하는 구약 예언 중의하나이다(사 21:11-12:34:5-17; 렘 49:7-22; 35:1-15; 암 1:11-12). 오바댜의 문학적 형태는 앗수르에 대한 나훔의 경고와 같이, 일반적으로 “국가적 경고”로 이해된다(국가적 경고를 다루고 있는 본문으로는, 사 13-23; 렘 46:51; 겔 25:32; 암1:3-2:16 그리고 습 2:4-15를보라). 이러한 반 에돔적 주제는 이삭이 에서에게 선포한 혼합된 축복으로부터 예루살렘 멸망 시 그 잘못된 역할로 인하여 에돔에게 내려진 저주에 이르기까지, 구약시대 전체를 통하여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창 27:39-40; 시 137:7) 그리고 마침내 에돔이 완전히 지상에서 없어질 것에 대한 최종 확언이 말라기에 의해 이루어졌다(말 1:2-4)

   오바댜의 예언은, 이사야(1:1)나 다니엘(8:1), 그리고 나훔(1:1)의 예언처럼 ‘환상’ 또는 계시 였다. 넓은 의미에서 “환상”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선지자 또는 대변인에게 신적인 의사를 전달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는 예언적 메시지의 권위와 신빙성(그 예언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을 함축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환상”이란 단어는 하나의 전문 용어로서 대개 포로기 이전 선지자들에게 국한되는 시각적 계시 전달을 의미한다. 그것은 종종 임박한 심판을 담고 있다. 오바댜의 예언이 “환상”이라는 사실은 곧 그 예언의 간결한 언어, 생생한 표현 그리고 미리 보여진 대로 그 사건이 반드시 성취될 것 등을 뒷받침 해준다.

   오바댜 1-4절까지와 5-6절은 예레미야 49:14-16과 49:9-10을 거의 똑같이 옮겨 놓은 것이다. 이 사실은 어느 텍스트가 우선 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 한다. 그것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오바댜 우선설

   (2) 예레미야가 원전이며, 오바댜는 거기에서 베껴 썼다는 것

   (3) 현재 없는 제 3의 자료가 두 선지자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설

   반-에돔적인 이러한 공통의 자료는, 두 예언서 사이의 유사성을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하는데, 예레미야는 그 공통 사본과의 관계가 다소 희박하며, 오바댜는 그 받아들여진 전통에 보다 세심하게 밀착되었을 것이다.

   비록 오바댜의 문학적 통일성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으나, 전체적인 구조를 의심할 수 없는 독특한 단락 구분과 행 구분이 이 예언 속에 들어있다. 처음 부분(1-4절)과 끝 부분(15-21절)에 “여호와”를 계속 반복하고 있음은 분명한 문학적 통일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다소 뚜렷하지는 않지만 8-19절과 11-14절에는 “그날에”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나며, “고난의 날”이라는 말이 후렴으로 등장한다(12, 14절). 마지막으로,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4, 8절)는 공식과(4, 8절)“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는 표현(18절) 또한 오바댜의 의도적인 구조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오바댜의 신학적인 구조와 주제는 전체적인 문학적 통일성을 보강해 준다. 히브리 선지 문학의 특징인 “네 개의 요점 구조”가 이 짧은 예언서에 스며들어 있다. 특정한 죄악에 대해 선포된 책망 부분(경고)과, 하나님의 심판 선포, 그리고 회복에 대한 약속(최후의 희망)등이 쉽게 구분된다. 회개의 촉구는 생략되어 있으며 이것은 반-에돔적 예언의 특징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신학적 연속성은, 반복되는 주제인 “여호와의 날” 에서/에돔, 유다와 관련된 에돔의 죄악, 그리고 이 예언의 주요 단락에서 하나님이 각 국가에 부과한 역할이 궁극적으로 전도될 것 등의 주제로 뒷받침되고 있다.

   에돔의 범죄 행위를 나열한 부분은 (10-14절) “법적” 경고 또는 재판에서의 기소를 생각나게 한다(호 4:1-3; 미 6:1-2). 보통 이러한 예언적 담화는 3 부분으로 구성된다-소환, 재판(고발과 변호의 연설이 있다), 그리고 최종 선고이다. 이 경우에, 유다에 대한 에돔의 냉담하고 무자비한 행동이 너무 사악하고 신실치 못하고 잔인하여 소환 직후에 바로 최종 선고-에돔의 굴욕과 와해로 선고됨(2-9, 10, 15)-가 이어진다. 재판 부분에는 기소이 내용만 들어 있으며(즉, 비난적인 글), 이것은 단지 에돔의 죄악과 그 판결의 정당성-에돔은 죽음이 마땅했다-을 뒷받침해 주는 역할 뿐 이었다.

   선지자 집단이 시작될 때부터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들에 대해서도 메시지를 선포했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에게 말씀을 전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출 3:10). 예레미야는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으며(렘 1:5), “열방 만국 위에” 세움을 입었다(렘 1:10). 호세아서와 학개서를 제외한 모든 선지서들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그러한 말씀들을 폭넓게 수집해 놓은 것들은 이사야서 13-23장; 예레미야서 46-51장; 에스겔서 25-32,35장; 아모스서 1-2장을 들 수 있다.

   다른 선지서들에서는 한 이방 나라에 대한 신탁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 오바댜에서는 한 개의 독립된 책이 되었다. 이사야서 34:5-15; 예레미야서 49:7-22; 에스겔서 25;12-14; 35장; 아모스 1:11-12; 말라기서 1:2-5에는 에돔에 대한 다른 신탁들이 들어있다. 에돔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들 중에서 다소 구분되어지는 신탁들의 주제이며, 선지서들에서 다른 어떤 나라에 대해서보다 간결하거나 혹은 일시적이면서 적대적인 신탁들의 주제이다(Stuart 1987, 404; cf. 욜 3:19[MT 4:19]; 사 11:14; 렘 25:21; 애 4:21). 특히 오바댜서 1-9절은 예레미야서 49:7-16과 어휘적인 면이나 주제적인 면에서 밀접한 연결점들을 갖고 있는데, 그 유사성으로 볼 때 문헌상의 의존관계가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어느 쪽이 다른 쪽에 의존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오바댜서는 예레미야서보다 이를 수도 있고, 뒤에 올 수도 있다. 이 두 신탁은 동일한 서론부(옵 1절; 렘 49:7)를 갖고 있으며, 양 신탁이 모두 에돔의 지혜없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옵 8절; 렘 49:7). 오바댜서 1b-4절은 예레미야서 49:14-16과 비슷하며, 오바댜서 5절은 예레미야서 49:9과 닮았고, 오바댜서 6절은 예레미야서 49:10a과 유사하다. 옥덴(Ogden 1982)은 이 두 문헌이 성전에서의 애탄의 제의(a lament liturgy)에 대한 응답들의 본보기라고 간주하고 있다.

   다른 대부분의 선지서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비평학자들은 이 오바야서처럼 짧은 책에서도 그 통일성과 문헌상의 응집성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들을 찾아내었다. 스튜어트(Stuart 1987, 403)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상의 어떤 문헌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은 그 의문점에 대한 답을 줄 만한 자료의 양에 역비례해서 증가한다. 이 책의 형상단계를 파악하려는 시도들은 대체로 두 가지 중요한 접근방법을 따르고 있으며, 여기에는 수많은 변이형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의 접근방법(Bewer, Keller 등)은 1-14,15b절을 오바댜 자신의 것으로 보고, 그 나머지 부분들(15a, 16-21절)은 후대의 인물들이나 몇몇 개인들의 것으로 본다. 이러한 구분을 하는 중요한 근거는 이 책의 첫 번째 부분이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나머지 부분은 보다 묵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첫 번째 부분은 예루살렘의 멸망 및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반영하고 있는 반면에 나머지 부분은 야웨의 날에 대해서 선언하고 있으며, 또한 에돔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보다 폭넓게 열방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변호를 말해주고 있다.

   두 번째 접근방법(Weiser, Rudolph 등)은 19-21절만이 오바댜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고, 15a,16-18절은 1-14,15a절과 같은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첫 부분에서는 열방들이 에돔을 벌하는 반면에 두 번째 부분에서는 열방들이 에돔과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이 되고 있다. 또한 첫 부분에서는 에돔이 청중이며, 두 번째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이 청중이다.

   이 짧은 책에서 형성과정의 역사를 찾으려고 하는 이러한 접근방법들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학자들은 이 책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옹호했다(Thompson, Allen, Stuart). 이방나라들에 대한 모든 신탁들은 특정한 이방나라를 가상적인 청중으로 언급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사실상의 청중은 이스라엘이나 유다이다. 따라서 에돔에 대한 말씀으로부터 유다에 대한 말씀으로의 이동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브로킹튼(Brockington), 톰슨(thompson), 알렌(Allen)은 요엘서와의 비슷한 점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요엘은 임박한 사건들(메뚜기 재앙)을 통해서 열방들에 대한 보다 크고 묵시적인 모습의 야웨의 날이 다가올 음울한 전조를 보았다. 이와 동일한 신학적인 전개가 오바댜에서도 발견된다. 에돔이 유다의 영토를 병합했지만 이 일은 반전될 것이다. 에돔이 이스라엘에 붙인 불에 탈 대상은 바로 에돔 자신이며, 에돔의 산들은 점령될 것이다(18-19절). 여호와가 나라들을 부추겨 에돔에 싸움을 거실 것이다(1절 후반절). 그리고 시온산은 “에서의 산들을 다스릴”자들을 낼 것이다(21절). 따라서 임박한 역사적 순간으로부터 보다 묵시적인 전망으로의 이동은 상이한 편집층들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적절하지가 못하다. 비록 이 책의 후반부가 이스라엘과 열방들에 보다 폭넓게 관계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에돔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19,21절).

   이 작은 책의 구조에 대한 분석 또한 상당히 다양한 결과들을 낳았다. 학자들은 이 책을 두 부분, 세 부분, 네 부분, 다섯 부분, 혹은 여섯 부분으로 쪼개었으며, 서로 다른 식으로 이 책을 개관했다. 이에 대한 논의의 역사는 알렌(Allen 1976, 140-42)이나 스나이만(Snyman 1989, 59-71)을 보라. 선지자는 자신이 하늘 궁정으로부터 온 사신으로서 에돔에 대한 전쟁을 위해 열방들을 소집하려고 보내진 자라고 그리고 있다(1절). 하나님은 에돔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시며(2-9절),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내리는 심판의 근거를 밝히고 있다(10-14절). 그러나 에돔이 경험하는 야웨의 날은 야웨가 자신의 적들에게 분노를 내리고 자기 백성들을 옹호하는 보다 위대한 날의 전조에 불과하다(15-21절).


신학적인 메시지


   주요주제

   이 작은 오바댜서는 이방나라들에 대한 다른 신탁들과 동일한 신학적 토대를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신탁들은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 점을 함께 갖고 있다:

   1. 이 신탁들은 야웨의 보편적인 통치를 말해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느 한 나라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모든 나라들과 지역들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말씀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경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의 말씀은 선포된 모든 시간과 공간속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그는 열방들의 역사를 정하시며,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계시한다.

   2. 이 신탁은 아브라함 언약(“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12:3])이 이스라엘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야곱과 에서, 이스라엘과 에돔간의 오랜 전쟁의 역사는 에돔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옵 15b절).

   3. 이 신탁들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용사이신 하나님(the Divine Warrior)의 사신들로 거룩한 전쟁(the Holy War)에 참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전적인 정경적 선지자들이 등장하기 이전의 역사서들에서 빈번하게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국가적으로 치르는 전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했으며, 전쟁을 하러 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심지어는 전투 방식에 대해서까지 지침을 전달하고는 했다.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은 선지자들이 전쟁에 참여했던 경우를 확장시킨 것이다. 특정한 역사상의 전투들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선지자들은 원근의 열국들에 대한 용사이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다. 전투 전에 보통 주어지는 말씀은 실제로 전열에 서 있지 않은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신탁의 말씀이 되었다.

   격분의 느낌, 즉 에돔을 향한 격분의 느낌이 이 작은 책에 가득 차 있다. 이 책에 정확한 배경은 파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본문들 간에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보다 폭넓은 맥락 속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인 독자들에게 있어서 오바댜서는 이 책의 문맥을 넘어서서 여러 가지 맥락 속에서 이 책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에서라는 이름이 자주 사용된 점(6.8.9.18.21절), 야곱을 그의 형제로 말하고 있는 점(10.12절)은 우리로 하여금 국가간의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가족 관계의 영역으로 옮아가게 만들어 준다. 이 두 나라 - 이스라엘과 에돔 - 는 이삭과 리브가의 천막에서 태어날 때부터 서로간에 뗄래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오바댜는 에돔이 열방 중에서 멸시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 동일한 단어가 에서가 어떻게 자신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는가 하는 점을 기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2절; 창 25:34). 에서가 받은 “축복”은 그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상속받은 후사인 자기 형제 야곱/이스라엘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창 25:23; 27:27-40).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에서의 역할은 바로 그 순간부터 영원히 고정된 것이었다(Robinson 1988, 92). 역사를 통해서 에돔은 자기 동생의 멍에를 떨쳐 버리려고 시도해 왔다(창 27:40). 그러나 에서 자신부터가 자기 동생 야곱을 공격하지 않았다(창 33장).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역동성과 더불어 야곱과 에서간의 형제관계가 오바댜서의 문학적인 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에서의 배반에 대한 격분의 감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단순히 국제 정치 및 기회주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형제에 대한 배반이며, 두 형제가 리브가의 자궁에 들어섰던 때인 수 세기 전부터 에돔을 향해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반역인 것이다. 먼 과거에 수립된 이 계획은 종말론적인 미래에 실현되게 될 것이다. 에돔은 하나님이 목적하신 대로 자기 형제를 섬기게 될 것이다(Robinson 1988, 94-95).

   하나님의 주권 및 자기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조 이외에도 오바댜서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두드러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커다란 비극을 겪은 자기의 동시대인들에게 오바댜는 하나님의 정의 및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들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의 재판법. 즉 동해형 복수법(同害形 復讐法, iex talionis)이 선언되어 있다: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15b절). 에돔이 유다의 생존자들을 쓰러뜨렸지만 에돔은 생존자도 남지 않을 것이다(14,18절). 에돔이 유다의 영토를 점령하기는 했지만(13,16절) 결국 에서는 시온산으로부터 통치를 받을 것이다(21절).


   교만

   오바댜는 에돔이 자신의 지혜자들을 의지함에 대해 정죄를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약탈하고 정복하려는 거짓 친구들의 음모를 탐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7-8절). 교만은 사실을 왜곡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에돔의 교만(3절)은 자신의 파멸의 씨앗을 가져 왔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교만한 자들을 끌어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잔 11:2; 16:16-18; 사 16:6; 25:11). 고대 세계에서 에돔이 ‘지혜의 보고’라는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렘 49:7). 바벨론 또한 그 지혜로 우쭐했었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앞에는 무능하고 속수무책인 것으로 입증되었다(사 47:8-15). 그것은 이제 에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인간 지혜를 믿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장래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도 그러할 것이다(고전 1:18-31)         


   죄의 응징

   범죄는 그 자체를 심판한다-“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15절)”-는 관념이 성경 교훈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제4부, “인과 응보” 원리에 대한 토론을 참고). 율법의 제정은 죄의 응징 사상, 혹은 “눈은 눈으로”(출 21:23; 레 24:19; 신19:21)라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범죄행위에 대한 형벌은, 그 잘못된 행동과 똑같은 수준의 차원에서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서 이러한 신학을 말하고 있다(잠 26:27; 시 7:15-16). 사도 바울 또한 씨를 뿌린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천명했다(갈6:7-10_. 유다는 이 교훈을 일찍부터 익히 들어왔다. 특히 주권자 하나님이 앗수르의 손으로 사마리아를 제거 하셨을 때나(왕하 17:21-23),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사 14:24-27), 그리고 유다가 죄로 말미암아 역시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했을 때(렘 25:8-14) 등이다.


   보편적 심판

   오바댜의 예언 중 두 번째 원리가 시작되는 부분은(15-19절) 에돔에 대한 특정적인 경고로부터 여호와의 날을 특징짓는 보편적 심판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주제로 크게 전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국의 심판 및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주제에 관심을 주는 것은 드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예루살렘 멸망 때에 에돔의 역할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즉각적인 관심표명이며, 둘째로는, 보편적 심판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세계 질서 속의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를 확인하면서 야곱의 남은 자들에게 장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사 24:27; 32; 렘 29-33; 겔 33-35; 호 13-14; 암 9).


   회복

   다른 선지 문학처럼, 오바댜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위한 회복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욜 3:17-21; 암 9:11-15; 미 7:8_20). 분명히,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약속된 가나안의 영원한 상속을 골자로 하는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다. 오바댜가 과거 역사를 다시 상기시키는 목적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강화함으로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있는 백성들에게(또한 느부갓네살의 공신으로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도)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시 115:5-8; 미7:20).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은, 인간 역사의 최종적 결과가 그러하겠듯이, 이 피조된 세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주권적 통치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성취될 것이다(21절). 여호와께서 자기의 홀인 이스라엘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주제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메시아적 기대의 한 부분으로 구약 성경에 빈번히 등장한다(겔 37:24-28; 단 2:44-45; 슥 12:3-13:6).  


신약으로의 접근


   야곱과 에서. 이스라엘과 에돔간의 오랜 경쟁관계와 계속적인 갈등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그 메아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두매인이자 에돔의 후손인 헤롯 대제가 예수를 그 탄생시에 죽이려고 한 점에서 그것을 보게 된다(마 2:16). 이 이두매인은 이스라엘이 갖추어야 할 모든 본 모습을 구현할 이 아기를 죽이려고 했었다.

   바울도 이 고대의 이야기를 회고하고 있다. 그는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변호하고 있다. 리브가의 두 아이는 한 동일한 아버지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은 쌍둥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결정하셨다(창 25:23; 롬 9:13). 이것은 마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2-3)라는 말라서기의 말씀과 같다.




요나서


   요나서는 성경 중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이야기들 중의 하나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큰 물고기에서 삼키워진 이 선지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이를 불러 일으켰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로부터는 조롱을 샀다. 불행하게도 이 이야기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은 이 책의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신학적인 중요성을 가려왔다.

   요나서가 정경상의 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른 책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선지서들은 해당 선지자의 말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반면에 요나서는 산문체의 네러티브이다. 이 선지자가 전한 말씀은 겨우 한 절에 들어 있으며(3:4),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독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운 요나서는 오늘날과 관련성이 깊은 신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역사적 배경


   저작연대 및 저작배경

   이 책은 저자나 저작 연대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도 갖고 있지 않다(Young, IOT, 261과 대조됨). 이 책의 주인공인 요나는 여로보암 2세(786-746년)의 치세 때에 살았던 실제 선지자이다. 그는 나사렛 북동쪽의 가드 헤벨(Gath-Hepher; 엘[el-Meshded]) 출신이었다. 열왕기하에 따르면 그는 북왕국의 영토가 확장될 것을 예언하였는데, 이 일은 여로보암의 치세 때에 이루어졌다.

   이 선지자는 8세기에 살았지만, 이 책의 연대에 관해서는 학자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저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3인칭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 어느 곳에서도 저자가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우리는 요나 혹은 요나로부터 정보를 얻은 누군가에 의해 이 책이 기록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예를 들면, “선지자의 생도” 중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왕하2:3).

   이 책의 성격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란이 있다. 그 책 속에 일어난 몇 가지 사건 (예를 들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남은 것, 박넝쿨이 신기할 정도로 빨리 자란 것 등)에 대한 불신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 책을 하나의 ‘풍자 이야기로’ 보며, 인물이나 사건들도 상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아니면 그 스토리 뒤에 도덕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비유’나 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발생한 사건을 보다 정교하고 풍부하게 다듬어서 종교적 진리를 전달하는 ‘미드라쉬’(midrash) 같은 것으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이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며,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해 창작된 것이라고 했다. 종종 기적적인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논쟁의 씨앗이 된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단지 문학적 장르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또 다른 해석자들은 이 책의 성격상 놀라운 면이 있으나 그 사실성을 믿는다. 몇 가지 역사적 해석에 대한 반대가 제기되는데, 예를 들면 니느웨 성의 과장된 규격(3:3), 앗수르 왕이라고 하지 않고 니느웨의 왕이라고 언급한 부분(3:6),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모두 합당한 설명이 제공되었다. 또한 마태복음 12:40-41에서 예수께서 이 책의 사건을 언급한 사실은 이것의 사실성을 그가 믿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더욱이, 비록 앗수르 왕이 그 이름으로 확인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스토리가 교회사적으로 ‘비역사적 장르’ 에 속한 것으로 설득력 있게 주장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장르에 관한 다른 주장들은 옹호할 수 없으며, 현재의 자료의 자료에 의하여, 이 이야기의 사실성과 신빙성을 인정하는 것이 최선이다.

   많은 보수적 해석자들이 생각하듯이, 이 책의 사실적 성격을 믿는다는 것이 반드시, 그 물고기의 아가미 크기에 근거하여 어떤 종류였으며(반드시 고래일 필요는 없지만)지중해를 서식처로 삼는 물고기였음을 확인하는 등의 작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물고기의 행동은 하나님에 의해 사용된 것이며, 그 이적의 발생 가능성이 철학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할지라도, 보다 더 자세한 확인은 관계없는 일일 뿐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부 보수주의 학자들은 이 책이 일종의 역사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확실히 우리는 요나가 실제 선지자였다는 것을 열왕기를 통해서 알고 있다. 또한 이 책은 구약의 소위 역사서들과 그 양식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더욱이 이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요나와 니느웨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9마 12:39-40; 눅 11:29-30)은 그가 이 책이 역사적인 기록임을 믿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이처럼 직설적인 역사서로 읽는 것에 대해서 반대들이 제기되었다. 그 중 가장 흔한 것은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삼일간 있었던 것에 대한 악명 높은 논쟁이다. 회의주의자들은 이 이야기가 당혹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것은 이 책이 그저 단순한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단서라고 주장한다. 변증적인 태도의 보수주의 학자들은 뱃사람들이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살아남은(비록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지만) 현대의 경우들을 언급함으로써 이에 대응한다(Aalders, 5-6). 그러나 이러한 식의 주장은 주의깊은 독자들에게 만족감을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 기록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나서는 저자가 독자들이 이 책을 역사기록으로 이해할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 속에는 어느 정도 모호성이 내포되어 있다. 요나는 이 책에서 이름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다. “니느웨 왕”조차도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니느웨는 제국의 이름이 아니라 수도의 이름이기 때문에 이 칭호는 비정상적인 것이다.

   이 책은 문학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가진 책이다. 이 책은 그 구조, 아이러니, 수사법적인 기교들에 있어서 아주 뛰어나다(다음 항목을 보라). 이러한 명백한 문학성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허구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고기 사건 이외에도 허구적인 과정인 것으로 이해되어지는 요소들이 더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 두 가지는 “짐승들의 회개”(3:7-8)와 니느웨 성의 크기에 대한 묘사이다(3:3-5).  이러한 논거들 때문에 많은 학자들(가장 대표적인 경우로는 알렌[Allen])은 역사적인 해석을 버리고 그것을 대안적인 해석으로 대체시켰다. 과거에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유행했지만 요즘에는 비유적인 해석이 가장 중요한 대안이다. 우리는 비유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전부 다 기적을 거부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단손화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확실히 어떤 학자들은 물고기 사건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 책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알렌 등과 같은 학자들은 영감을 받은 저자가 자기 책을 역사적인 기록이 아닌 비유로 읽혀지도록 의도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모든 주장들을 살펴볼 때 두 가지 점이 시야에 들어온다. 첫 번째 사항은 우리가 어느 쪽으로도 독단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해석에 반대하는 주장들에 반박하는 것은 증명가능하기는 하지만 개연성을 갖고있다(역사적인 해석을 가장 잘 변호하고 있는 것을 보려면 알렉산더[Alexander]를 보라). 예를 들어, 요나서의 장르를 역사 기록으로 보는 자들은 동물들이 곡을 하는데 참여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헤로도투스(Herodotus)의 한 부분을 지적할 수 있고, 유딧서(Judith) 4:10에 호소할 수도 있다. 그들은 내레이터가 니느웨의 크기에 대해서 말을 할 때 그는 이 도성 자체의 크기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행정 구역의 크기에 대해서 말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반면에 역사적인 해석을 지지해 주는 논거들에 대해서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답변들이 있다. 역사적인 해석을 지지해주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요나 및 니느웨 성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가 이 책이 역사적인 기록이라고 믿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을 아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것이 비유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설교 소에서 이 사건을 언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비록 오늘날 선한 사마리아인이 실제의 역사적 인물이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설교자는 회중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라고 설교할 수 있다.

   두 번째 사항은 이 문제가 이 책의 해석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책이 역사기록으로 의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 실수를 범하고 있다면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 책의 역사성의 문제는 이 책의 신학적인 메시지를 해석하거나 개별적인 본문들을 주석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문학적인 분석


   문학 형식

   요나의 예언은 다른 선지서와 다르다. 그것은 예언적인 신탁을 전혀 포함하지 않고, 저자에 대해서도 전혀 암시하는 바가 없다. 비록 요나가 8세기 선지자라 하더라도, 몇 가지 점들은 책의 저작이 보다 후기에 이루어졌음을 지지한다. 엘리슨은 어떤 유대 선지자가 막 사로잡혀 가려던 유다를 격려하기 위해 그것을 썼다고 주장한다. 크레이기는 그 책이 포로 당시나 혹은 포로기 후에 기록되었을 법하다고 말한다. 예언과 원래 청중의 연대 추정에 관계없이 요나는 니느웨에 파송된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책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의 문학적 장르를 규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 문제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었고, 그중 몇몇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 장르는 역사, 교훈, 우화, 풍자, 미드라쉬, 비유? 나는 그것을 비유 효과를 지닌 역사로 본다. 비유의 목적은 현명한 삶을 위해 그것이 제시하는 시각에 있기 때문에 비유가 반드시 비역사적일 필요는 없다. 첫째,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둘째, 하나님은 자유롭게 피조물을 통치하며 이방인들을 그들의 환난에서 구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위대함과 자유를 보지 못할 구 있다. 요나는 하나님이 열방에게도 동일하게 참으실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위대한 왕 여호와는 열방을 축복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에 대해 참으시는 것에 자유한다. 그것 이상으로 그는 또 이교도들에게 긍휼을 베풀수 있고, 심지어 동물들에게도 관심을 가진다 :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

   셋째, 요나는 엘리야를 부정적으로 모방했다. 엘리야처럼 그도 사명을 띠고 파송되었고, 그의 사명이 실패한 것으로 보이자 그도 역시 스스로 죽기를 구하였다(4:8 ; 왕상 19:4). 그러나 엘리야와 달리 요나는 낙담할 이유가 없었다. 알렌처럼, 그 책은 요나를 어리석어 보이게 한다 : “요나는 아무도 그 역할을 변호하고자 하지 않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등장한다.” 그 책은 요나의 어리석음에 주의를 돌리게 하고,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에게 현명한 반응를 촉구하는 예언적 잠언(masal)이다.


  문체

   비록 요나서가 하나의 역사 기록으로 읽혀지도록 의도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문체가 상당히 고도화되어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문체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강화시켰다.

   이러한 문체에 대한 관심은 몇 가지 핵심 어휘들(Leitwörter)이 계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어휘들은 이 책 전체 혹은 이 책이 어떤 특정 부분에 연결점을 제공해 준다(Magonet). 이러한 핵심 어휘들 중 하나는 “일어나다”(쿰, םוק)이라는 동상이다. 1:2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RSV)고 명령하신다. 그 다음 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명령-성취의 전형적인 패턴을 예상케 만드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요나가 일어나서...”. 그러나 이 문장을 “니느웨로 갔다”라는 말로 종결짓는 대신에 저자-내레이터는 “다시스로 도망하려”(KJV)라는 말을 집어넣는다(한글판 개역 성경은 어순을 뒤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이러한 효과가 본문상에 나타나 있지 않다 - 역자 주). 이 단어에 대한 또 하나의 아이러니컬한 언어유희는 1:6에 나온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폭풍을 일으켜서 배의 안전을 위협하심으로써 그를 추격한다. 배를 위기에서 구출해내려고 온 힘을 다하던 이교도 선원들은 요나가 배 밑층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워한다. 요나에게 주어진 “일어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직 우리 귀에 맴돌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배의 선장이 요나에게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된다. 이 이야기의 첫 번째 대단원은 요나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며칠 밤을 지내고 난 후인 3:2-3에서 찾아온다. 하나님은 이 선지자에게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다시 주심으로써 그에게 다시 한 번 임무를 부여하신다. 그리고 이번에는 요나는 순종을 한다. “요나가 일어나서....가니라”.

   위의 간략한 분석은 요나서의 문체의 흔한 특징들 중 하나를 다룬 것에 지나지 않다. “크다”(가돌, לודג: 1:2,4,10,13; 3:2; 4:6), “임명하다”(마마, הנמ: 1:17; 4:6,7,8); “내려가다”(아라드, דרי: 1:3[두번], 6; 2:6)등의 단어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연구를 제공할 수 있다.


   조직과 구조

   요나는 정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각각 두 개의 장을 가진 두 개의 막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것은 2개의 평행구조로 되었는데, 대략 1-2장은 3-4장과 평행 구조화되어 있다. 이 두막은 1:1-2과 3:1-2에 반복되어지는 이 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나뉘어진다. 각 부분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나의 반응으로 시작된다(1:1-3/3:1-3). 제 1막에서는 대부분의 동작이 주로 바다에서 이루어진다. 이 막의 두 개의 장은 각각 (1) 배의 갑판 위와 (2) 물고기의 뱃속이다. 그 다음의 두 장(3장과 4장)은 제 2막을 구성하고 있는데, 각 장은 각각 하나님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제 2막의 첫 번째 장에서 요나는 설교를 하고, 니느웨는 회개를 한다. 마지막 장의 배경은 니느웨의 동쪽 편으로 옮겨지는데, 여기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방법에 대해 씨름을 한다.  

   이 책의 첫 부분에서(1-2장)하나님은 선원들과 요나 모두에게 자비하심을 나타내시사 그들을 모두 구원하여 주셨다. 2장에 기록된 요나의 기도는 이 책의 정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 넘치는 은총을 이야기하기 위한 배경을 설정해 준다.

   구조

   Ⅰ. 요나의 임무와 도주, 1:1 ~ 2:10

      A. 요나의 임무, 1:1,2

       B. 다시스로 가는 배 위의 요나, 1:3

        C. 사공들의 궁지와 그들의 기도, 1:4-8

         D. 요나의 선포, 1:9

        C'. 응답과 구원, 1:10-16

      B'. 물고기 뱃속의 요나, 1:17 ~ 2:1

              요나의 기도, 2:2-9

      B″. 육지 위의 요나, 2:10

   Ⅱ. 니느웨에서 요나, 3:1 ~ 4:11

      A. 요나의 임무, 3:1,2

        B. 니느웨에서 요나, 3:3

          C. 니느웨의 궁지, 반응, 구원, 3:5, 10

             D. 요나의 선포, 3:4

                 요나의 탄식, 4:1-4

         B'. 그늘 아래 앉은 요나, 4:5-7

           C'. 요나의 궁지와 반응, 4:8,9

              D'. 하나님의 선포, 4:10,11


   요나의 시

   요나서의 문학적인 통일성과 관련되어 제기된 단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2장의 시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가 문맥과 잘 어울리지 않으며, 이 책의 나머지 부분과는 다른 성격의 요나를 보여주고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읽을 때 우리는 다른 형태의 시가 나올 것을 기대하게 된다. 요나는 이제 막 물고기에게 삼키움을 당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고난 중에서 부르짓는 애가를 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본문의 시는 감사의 시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특히 2:1,6,9에서 그는 자신이 마치 구원을 얻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은 요나가 처한 상황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 물고기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아니라 그의 구원의 도구이다. 왜냐하면 이 물고기는 요나가 익사하는 것으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욱 어려운 문제는 요나가 이 시 속에서 아주 심오하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약속했지만 그 다음 장에서는 다시 거리끼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마지막 자에서는 그는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단지 요나가 단일한 성격의 인물(a flat character)이 아니라 다층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a complex character)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a flat character”와 “a complex character”는 문학비평적인 용어임에 유의를 하고, 이에 대한 정의는 문학비평 사전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 역자 주). 이처럼 주인공의 성격이 다양성이 갖고 있다는 점(Berlin, 23-24)이 바로 이 요나서가 매혹적이고 풍성한 내용을 가진 근거이다.

   요나의 시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애가가 아니라 감사의 찬양이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재난에 대하여 불평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음에서 구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 노래는 평범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그것을 여러 다른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공동 시문으로 사용되어 왔을 수도 있고, 여러 개의 다른 노래들로부터 이끌어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기도문은 요나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 합당치 못한 자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이것은 4장에 묘사된 요나의 태도에 대하여 납득할 수 없는 의구심을 갖도록 하며, 이 책이 가르치는 진리를 바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신학적인 메시지


   주요 주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요나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평범하지 않은 책이다. 구약의 맥락에서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언약 공동체 밖에 잇는 사람들에 대한 이 책의  태도이다. 하나님께서 이방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상이 여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아니다(창 21:8-21; 왕하 5장), 그러나 이것이 구약에서 흔한 주제인 것도 아니다.

   요나서는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째, 이 책은 영적으로 민감한 이교도들과 잘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선지자를 대비시키고 있다. 1장에서 이교도 선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 앞에서 무서워 떨지만 요나는 배의 밑창에서 잠을 잔다. 그들은 요나를 갑판 밖으로 던지면서 하나님께서 이 요나의 죽음에 대해서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도록 간구한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설교를 한다(3:4).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회개의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회개를 하며(3:5), 이들의 왕은 요나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만 듣고도 온 성에 회개를 명령한다(3:7-9). 둘째, 이 책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가운데 끝을 맺는다. 그는 요나에게 “이 큰 성읍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아니하냐”는 수사의문문을 던진다.

   이 책은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을 표현함과 아울러 이스라엘에 대한 엄중한 비난을 가하고 있다. 요나는 이 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징한다. 실제로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유일한 이스라엘인이다. 선지자로서 그는 영성의 정수를 보여주어야 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러나 이 종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기 위해 별별 시도를 다한다. 결국 그가 니느웨에 가서 되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계속 내키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지 않자 요나는 깊은 절망과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다. 요나는 하나님과 단절한다. 이스라엘도 얼마나 이와 마찬가지인가!

   여기에서 어느 정도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는 요나가 절망에 빠진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요나가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인식될까 두려워서 니느웨에서 설교하는 것을 꺼려했다고 생각한다(Rendtorff OT, 226).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가 니느웨로 가서 그 곳의 사람들에게 다가올 운명에 대해서 경고할 것을 원하셨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4:2)이시기 때문에 심판을 내리기를 꺼려하실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결국 예언이 실현되어지지 않게 되리라고 요나가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견해에 대해 차일즈(Chils OTI, 420-21)가 반박한 바와 같이 이 선지자의 임무는 악한 민족으로 하여금 회개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선지자의 메시지는 이 백성들의 반응에 따라 달려 있는 것이었다.

   요나의 꺼려하는 태도 및 결과적으로 그가 가지게 된 실망감은 단순한 이방민족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에 끊임없이 악하고 잔인한 제국에 대해 하나님께서 연민을 갖고 계시다는 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요나는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원수들을 용서하시게 만들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는 나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 원수들을 멸하시기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 원수들을 용서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신 것을 배우게 된다. 이 메시지는 우리가 “임명하다”라는 단어나 “임명하다” 혹은 “공급하다”라는 뜻을 가진 다른 중요 어휘(마나, הנמ)를 검토해 보아도 부각되어진다.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요나는 하나님에게서 도망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을 사용하셔서 그가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하나님은 요나가 자신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큰 물고기(1:17), 넝쿨(4:6), 벌레(4:7), 후덥지근한 동풍(4:8)을 보내신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니느웨의 하나님이시며, 전 피조물들의 하나님이시다.


   긍휼   

   하나님의 긍휼과, 그러한 긍휼을 베풀 주권적 권리는 요나의 핵심 주제가 되어 있다. 열왕기에서의 요나에 대한 소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토론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 왜냐하면 거기서 하나님은 사악한 왕(여로보암 2세)을 풍요케 하심으로써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말할 수 없는 긍휼을 보여 주셨다. 마치 요나 1-2장이 한 개인으로서의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는 긍휼을 베풀 주권적인 권리가 있음을 이해하고 인정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실례를 보여준 것처럼, 열왕기하 14:25-27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을 이해할 수 있음을 국가적인 상황 속에서 보여준 것이다.


   진노

   하나님의 진노는 요나에게 전반적인 일련의 사건을 생기게 한 원인이다. 니느웨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내어 마침내 하나님으로 하여금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4:2)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러니 요나는 그렇지 못했다. 요나의 성냄은 의로운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화를 내시지 않는 하나님을 책망하는 듯하다. 요나의 계산 속에서 하나님은 옳은 일들에 대하여 그렇게 심하게 화내시지 않았다. 언제나 의로운 화(의분)는 ‘긍휼’에 의하여 균형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에게는 물론 그 어느 것이든 이행하실 자유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은 그의 긍휼과 관련하여 생각되어야 한다.


   호신론

    이 말은 하나님이 취하신 방법이 옳다고 변호하는 것이란 뜻인데,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요나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형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형적으로 ‘호신론’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물으신 것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4, 9).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의인들의 고통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나의 이야기에서는 그 질문이 뒤바뀌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아주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 책은 하나님에게는 화를 내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확인한다. 더 좋은 표현으로 한다면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성품을 나타내 보인다. 그러나 그의 공의는 그의 연장된 은총에 의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박국에 나타난 대답이요, 로마서 3:25과 마태복음 20:15과 같은 신약 신학에 반영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의 공의로운 심판은 궁극적으로 실현된다(렘 13:14; 겔 7:1-9). 하나님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행동하실 권리가 있다.   


                    신약으로의 접근


   물론 신약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그들 역시 언약백성의 일부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을 위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세상에 보내지셨다(요 1:6-14).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사역을 요나의 사역과 비교하시고, 또한 대비시키셨다(마 12:38-45; 눅 11:24-32). 그는 기적적인 표적을 보여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이 땅 속에 삼일 밤낮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것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머물렀던 것과 비교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내용은 원래는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부활하실 것에 대한 것이었다(눅 24:46). 그러나 그는 “요나보다 큰 분”이셨다. 왜냐하면 요나는 자신의 뜻에 반하여 한 성을 구하기 위해 말씀을 선포했지만 예수님은 많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드렸기 때문이다.  


미가서


   루터에 따르면 “선지자들은 회한한 방식으로 말을 한 사람들로서, 마치 질서정연하게 말하는 대신에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왔다갔다함으로써 도대체 종잡을 수 없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들 같아 보인다”. 그의 이러한 말의 예를 미가처럼 잘 보여주는 선지자는 없다. 그의 심판의 연설들과 구원의 연설들 사이에서 우리는 길을 잃기가 쉽다. 그 구조는 파악하기가 난감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여섯 번째 소선지서2)는 그 수사학적인 웅변성과 힘에 있어서 이사야서에 비견될 만하다. 또한 미가서에는 구약에서 가장 유명한 본문들이 몇 개 들어 있다.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산이 우뚝 솟을 것이고(4:1-5), 베들레헴에서 한 통치자가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으며(5:2), 공의와 자비와 겸손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서 찾으시는 특질들이라고 말하고 있다(6:6-8).


                      역사적 배경


   저작권 및 저작 연대

   첫 번째 구절(1:1)은 여러 가지 점들 중에서도 특히 선지자의 이름을 그의 고향과 연결시켜서 언급하고(모레셋 사람 미가), 그의 사역 연대를 동시대의 왕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을 통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선지서들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표제들과 마찬가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미가란 이름은 구약에서 흔한 이름이며(이 이름의 보다 긴 형태는 미가야이다). “야웨와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뜻을 갖고 있다.

   모레셋은 예루살렘 서남쪽으로 약 2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해안 평지 가까운 곳의 세벨라(Shephelah)의 느린 경사면을 가진 구릉지역 변경에 위치해 있다. 학자들은 왜 미가의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그의 가문이 대단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의 사역이 다른 도시(아마 예루살렘)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그의 신원은 그의 고향의 이름을 통해서 밝혀져 있다.

   미가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 단 한 번 언급되어 있다(렘 26:17-19). 여호야김이 유다에서 왕이 되었을 때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몇몇 장로들이 그를 위해서 말을 했으며, 예레미야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미가의 사역을 언급했다. 심판에 대한 예언 때문에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여호야김과 달리 히스기야는 회개를 했었다.3)

   언제나 그렇듯이 비평학자들은 진정성의 문제를 제지했다. 과연 미가가 자신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는 이 신탁들을 전한 사람인가? 비평학자들간의 공통적인 입장은 미가 자신의 신탁이 처음 세 장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면 미가가 이 책의 모든 부분의 저자라는 것을 거부할만한 설득력있는 이유가 없다.

   첫 구절은 미가의 사역 연대에 대한 우리의 정보 자료이다. 미가가 이 백성들 가운데서 심판과 구원에 대해 설교한 시기를 표시해 주기 위해 요담(주전 750-732년), 아하스(732-716년), 히스기야(715-686년) 등 세 명의 유다의 왕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미가의 사역은 요담의 말년경에 시작해서 히스기야의 시대 초에 종결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의 사역의 정확한 기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어느 경우가 됐든 그의 사역기간은 이사야의 사역기간과 겹친다.

   사마리아에 임할 심판에 대한 언급(1:6)은 미가의 사역이 사마리아가 아시리아의 세력에게 무너진 해인 주전 722년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 연대를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신탁은 1;8-16에 들어있다. 이 문단에 언급되어 있는 도시들은 산헤립이 701년에 예루살렘에 다가갈 때 취한 경로일 가능성이 높다. 예레미야 26:18은 히스기야 시대 동안 전해진 신탁이 미가서 3:12라고 말하고 있다.


   시대

   미가의 예언과 관련된 이스라엘 및 유다의 역사는 사마리아가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Ⅴ)가 지휘하는 앗시리아 군대의 손에 멸망을 당한 때(주전 722년)로부터 시작해서 간단하게 개관해 볼 수 있다. 사르곤 2세(Sargon Ⅱ)의 치세 중에 이스라엘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강력한 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산헤립이 등극하자 히스기야는 바빌로니아의 반란자 므로닥-발라단(Merodach-baladan)이 이끄는 동맹에 가입을 했다(왕하 18장 이하). 그에 대한 반응으로 산헤립은 예루살렘의 독립을 위협했다(701). 하지만 아사야와 미가의 사역을 통해서 히스기야는 자신의 죄를 회개했으며,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남겨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가 사망한지 얼마 안 되어 유다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에게 등을 돌렸다. 예를 들어, 그의 아들 므낫세는 유다에 많은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미가는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유다가 멸망할 것을 예언했는데, 이 일은 주전 586년에 이루어졌으며 미가는 더 나아가서 포로들의 귀환을 예언했다(539년).


   연구사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평학계의 가장 흔한 견해는 미가의 신탁들이 처음 세 장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연구문헌들을 개관한 젭센(Jeppesen, 1978)은 이 결론에 의문을 표시했다.

   미가서 해석사에 있어서 전환점은 1881년의 슈타데(Stade)의 소논문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 대해서 기술하기 전에 젭센은 초자연적인 예언을 부인하는 등의 계몽주의적인 전제들이 선지서 연구를 점점 침식하고 있는 것 등 이 슈타데의 연구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 먼저 다루었다. 18세기 말에 그 통일성에 대해서 의심을 받은 선지서는 이사야서였다.

   19세기 초기의 처음 몇 십년동안 미가서의 저작 연대 및 진정성의 문제는 변화와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의견의 일치를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논쟁점들 중의 한 가지는 이 선지서의 표제(1:1)가 예레미야서 26장에 언급되어 있는 이 선지자 및 히스기야의 관계와 무슨 연결점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선지자의 모든 사역이 이 왕의 시대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되어져야 하며, 그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원래의 미가 선지자의 것으로 간주된 부분들에만 한정된 것이며, 당연히 이 책에는 후대에 가필된 부분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6-7장이 1-5장과는 상이한 후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에발트(Ewald)의 주장이 학자들에게 확고하게 받아들여진 때가 바로 이 때라고 젭센(1978, 114-15)은 지적했다.

   이 분야의 일치된 의견으로 급속히 받아들여진 이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베른하르트 슈타데(Bernhard Stade, 1881)였는데, 그는 미가의 신탁들이 처음 세 장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이 책의 최종적인 형태는 포로기 이후 시대에 가서야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6-7장에 대해서 에발트의 의견에 동의했으며, 이 두 장이 제2 이사야의 시대에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슈타데의 시대 이후로 미가서는 그 최종 저작연대가 포로기 시대인 복합적인 문헌이라는 생각이 비평학계의 보편적인 의견이 되었다.

   최근의 연구는 이 책의 발전과정에 있어서의 편집과정의 역사를 밝혀내는 쪽으로 확대되었다. 학자들은 이 책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만들어졌으며, 포로기 이후 시대에 가서야 겨우 완성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학자들은 원칙적인 면에서는 동의를 하지만 이 책의 구성에 대해서는 다소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특히 Jeremias, Mays, Renaud등을 보고, 그에 대한 비평으로 Childs[431-34], IOTS를 보라).


                      문학적인 분석


   구조와 조직

   세 부분은 각기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는 부름으로 시작된다.  각 부분은 백성들의 죄악과 그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시작 부분’을 별도로 가지고 있다. 그런 후에 희망에 단계로 넘어간다.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법적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처음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증인’(1:2)으로 묘사했고, 그런 후에 그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한다고 했다(6:1-2). 중간 단락은 처음과 마지막 부분과는 다른데, 여기서는 사법적인 용어를 사용한다거나 다른 부분들을 추가하지 않았다. 그 경고가 “그날에”(4:1, 6)라는 표현으로 희망의 선포를 이끌면서 소개된 후에, 그 중간 부분은 현재의 위기를 말하는 지금이라는 단어로 시작된 세 개의 부분(4:9, 11, 5:1)과 함께 계속된다. 그 위기로부터의 구원이 예언되었는데(5:2-9), 그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모든 요소들을 깨끗하게 하실 것을 말하는 최종적인 “그날에…”부분으로 인도한다(5:10-15)

   미가서의 구조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이에 대한 견해들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책이 전혀 전체적인 구조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저 이 선지자의 신탁들을 느슨하게 엮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 책에 대해서 극히 복잡다단한 구조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점만은 확실하다:

   1. 미가는 이 신탁들은 한 시기에 다 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그의 사역 기간 전체에 걸친 선지자적 메시지들의 모음집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2. 비록 책의 서두에서 미가가 사마리아의 멸망과 산헤립의 침략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으며, 결론 부분에 가서는 바벨론 유수와 회복에 대해서 예견하고 있기는 하지만 연대기적 순서는 이 책의 구조를 파악하는 열쇠는 아니다.

   3. 예언은 대략적으로 경고와 소망의 메시지를 교차적으로 배열하는 것에 근거한 구조를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선지서를 통해서 자기 백성과 두 번에 걸친 언쟁을 한다. 첫 번째 언쟁은 1-5장에 나온다. 여기에는 엄한 심판의 메시지(1:2-3:9[2:12-13은 예외일 수 있음])가 나오지만 구원에 대한 언급(4-5장[5:10-15는 예외일 수 있음])도 들어 있다. 두 번째 언쟁(6-7장) 역시 심판(6:1-7:7)으로 시작하지만 소망에 대한 심오한 언급(7:8-20)으로 종결되어진다.


   문학 형식

   미가는 대부분 시로 되어 있고, 약간의 산문이 있다. 그 시적 특징으로는 대구법, 재담, 강조 어구 사용, 예언 형식의 말(심판, 화, 구원 신탁들과 예언적 의식문) 등이 있다.

   미가의 신탁은 웅변가의 어조를 반영한다. 그는 광범위한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극적으로 호소하였다. 그의 신탁들은 심판과 소망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 요소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듯이 보이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예언의 진정성을 상세히 분석하였다. 그러나 청중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그 반복들은 오히려 효과적이다. 미가의 신탁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지도자들(행정, 왕실 관리들)을 반박하는 논증 혹은 논쟁으로 이해되는 것이 가장 좋다.


   구조

   표제, 1:1

   Ⅰ. 심판 신탁, 1:2 , 3:12

     A.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고소, 1:2-7

     A'. 유다 도시들의 멸망에 대한 탄식, 1:8-16

       B. 백성들에 대한 심판 2:1-11

         C. 위로의 말씀, 2:12, 13

       B'.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3:1-12

   Ⅱ. 위로 신탁, 4:1 ~ 5:15

      A. 시온의 승귀, 4:1 법5

       B. 하나님 왕국의 회복, 4:6 ~ 5:1

     A'. 베들레헴의 승귀, 5:2 - 5a

       B'. 다윗 왕국의 승귀, 5:5b - 15

   Ⅲ. 심판과 위로 신탁, 6:1 ~ 7:20

     A. 이스라엘에 대한 선지자의 고소, 6:1-5

       B. 질문과 대답, 6:6-8

     A'. 이스라엘에 대한 고소, 6:6-8

       B'. 선지자의 탄식과 소망, 7:1-7

        C'. 예언적 의식문, 7:8-13

          1. 시온의 영광, 7:8-13

          2. 왕국 기도, 7:14-17

          3. 사죄 기도, 7:18-20


   문체

   미가서의 힘찬 문체는 두 가지 이유에서 간과되어 왔다. 첫째, 이 책의 히브리어가 난해하며, 그 구조가 현대의 독자들에게 명료하지가 않다. 둘째, 미가는 동시대의 보다 잘 알려진 인물인 이사야의 그림자에 가려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미가는 언어와 수사법에 있어서 탁월한 인물이었다. 미가서 1:10-16보다 이 점을 더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은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문단은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 취할 경로에 대한 예언적인 서술이다. 이 문단 속에는 구체적인 성읍과 도성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미가는 재미있는 언어유희들을 사용하여 장차 일어날 일들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 언어유희들은 각 도성의 이름과 그 도성이 처할 운명을 연결시켜주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영어 번역본들은 이러한 양자간의 연결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모팻(Moffatt)의 의역은 독자들에게 본문이 어떻게 되어있는가를 어느 정도 보여준다( Smith 213에 인용되어 있음):


       텔링튼(Tellington)에서 말(tell)하지 말라!

       웨일링(Wailing)에서 곡(wail)하지 말라!

       더스트 매너(연ㅅ Manor)가 티끌(dust)을 먹을 것이고,

       드레시 타운이 벗은 채로 도망을 하고, (Dressy Town - 이 지명의 문자적인 의미는

       ‘옷 잘 입은 고을’이라는 뜻 - 역자 주)

       세이프폴드(Safefold)가 구원을 얻지 못하고(not saved),

       월체스터(Wallcester)의 담들(walls)이 무너지고,

       비터튼(Bitterton)이 쓴(bitter)잔을 마실 것이다.

       (평화의 성 예루살렘에 하나님께서 전쟁을 보내신다.)

       군마(軍馬, steed)에 병거를 매어라,

       바스테드(Barstead) 사람들아!

       (시온은 이스라엘의 죄에 버금가는 죄악의 근본이다.)

       웰페어(Welfare)에게 마지막 작별(farewell)을!

       왜냐하면 트래핑(Trapping)이

       이스라엘의 왕들을 속였기 때문이다(trapped).



                   신학적인 메시지


   목적과 메시지

   미가서는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힌 책 중의 하나이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3:8). 이 목적은 고발과 심판을 선포하는 메시지 속에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그의 메시지는 백성들, 특히 상류 계층에 부정의 죄악이 있으며(2:1-2; 3:1-3, 9-11; 6:10-11), 그 결과는 그들이 파멸의 고통을 당하면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심판 선언은 다섯 가지의 독특한 방향을 취하고 있다.

   1. 우주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예배장소와 그 대상물을 파괴하심(1:3-7; 3:12)

   2. 정치적 황폐화-도시들을 전복하며 그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가도록 할 것임(1:10-16)

   3. 특정한 범죄인에 대한 개인적 심판(2:3-5)

   4. 영적인 심판 -선지자들에게서 계시를 박탈함(3:6-7)

   5. 사회-경제적  심판-그 땅의 풍요함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심(6:13-16)

   그 외에도 “남은 백성”들에 대한 희망과 구원을 선포하는 몇 개의 메시지가 있다. 이것들은 앗수르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단계적인 구원(2:12-13; 5:2-9)뿐만 아니라, 시간 설정이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미래에 반드시 그 국가를 회복시킨다는 약속을 비추어준다.


   주요 주제

   미가서의 신학은 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야웨는 미가가 자기 백성에 대한 이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모두 다 하나님의 길을 떠나서 죄를 저지르므로써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 이러한 죄들은 제의적인 것들(1:5-7)과 사회적인 것들(2:1-2)이었다. 이스라엘의 공공 지도자들(3:1-3)과 종교 지도자들(2:6-11[선지자들]; 3:11[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길을 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안위의 마음을 갖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확신은 미가가 자주 지적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태도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안전하다고 가르치므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않았다. 판 더르 바우데(Van der Woude)는 미가가 미가서 3:11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적인 선지자들의 말들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과의 언약을 깨뜨린 이 백성에 대한 소송을 집행하신다. 그는 이 백성에 대항해서 싸우는 전사로서 자신을 계시하신다(1:3-4).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자기를 사랑하고 공의롭게 행하기를 희망하신다.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요청하신다.

   아마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또한 오늘날 가장 확실하게 잘 알려져 있는 본문은 6:6-8일 것이다. 유대교의 전통에서는 이 본문이 율법의 요약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모든 제의적인 종교에 대한 논박이라고 해석하고자 하지만 대위스(Dawes 1988)는 이것이 단지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외적 종교에 대한 건전치 못한 강조를 교정하고자 하는 것임을 잘 지적하였다(또한 암 5:21-27; 호 6:6; 사 1:10-17을 보라).

   죄에 대한 심판이 이 책의 중심적인 어조이기는 하지만 소망에 대한 내용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2:12-13과 같은 앞 부분에서도 야웨는 심판의 구원에 대해서 위로의 어조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마지막 묘사(7:18-20)는 그가 은혜가 풍성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을 지키시는데 있어서 신실하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에게 주신 약속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성취되어질 것이다(5:1-2).


   심판

   이 선지서는 역사에 들어오는 위대한 왕에 대한 장엄한 환상으로 시작된다. 여호와가 인간의 활동 무대로 들어올 때, 인간의 환경은 뿌리 채 흔들린다. 그의 오심과 관련된 현상은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질 만큼 압도적이다(1:4). 신의 현현에 대한 이 같은 묘사는 경외감과 경이감을 유발시킨다. 폰 라드는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 “인간의 모든 허영을 먼지 속에 던져 버리는 심판을 위해… 여호와가 등장하는 그때조차도, 선지자는 그의 자기 현현과 그것이 수반한 현상들을 기쁨의 눈으로 응시한다”.

   미가는 과거에 그들을 사랑한(6:4,5 ; 7:14,15) 그 하나님이 자신의 왕국을 확립하기 위해 그의 언약 백성을 쫓아내어 버리고자 오시고 있음을 예고하였다. 이 예고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해 왔던 청중들에게 충격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신하였고, 열방의 문화적 관습들(희생, 제의적 매춘, 점, 마술)을 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반문화의 모범이 되는 대신, 그들은 열방의 관습들로 문화를 변용시켰다. 그들은 안전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군사적 발전과 동맹과 요새를 의지하였다(5:11).

   사회는 대체로 실용주의 정신에 의해 지배되었다. 선지자는 그들이 서로서로에 대해 관심이 부족한 것도 질책하였다(2:1,2,8 ; 3:1-4,9-11 ; 6:10-12 ; 7:2-4). 정의에 대한 그들의 무감각은 무질서를 초래하였고, 심지어 가족 제도에 대한 심한 멸을 야기시키기도 했다(7:5,6). 지도자들은 언약과 약속들을 등한시하였고,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에도 무관심하였다(2:9). 종교 지도자들 역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개인의 소득을 위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역하였던 것이다(3:6,7,11).

   미가는 이스라엘(사마리아)과 유다(예루살렘)가 사로잡혀 옮길 것을 선포하였다. 사마리아는 오므리와 아합의 정책들, 정치, 경제, 종교, 모든 면에서 북왕국의 열방 의존(6:16)을 대표하였다. 이스라엘의 조직들은 사마리아를 위한 여호와의 날이(722 B.C.) 붕괴될 것이었다. 그 백성들이 그토록 열심히 일구었던 모든 것은 종말을 맞이해야 했다(1:6,7 ; 6:13-15).

   예루살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루살렘 역시 이방 종교와 문화 변용을 생활 양식으로 채택하였다. 도시의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삶은 매우 깊이 병들어 있었다(1:9).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 젖어 하나님이나 이웃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으며, 이런 현상은 국가 전체에 만연하였다(2:1-4). 비록 미가의 동시대인들에게는 신성한 상징들을 소유한 시온이 멸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을지라도, 시온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3:12). 시온은 하나님 왕국과 다윗 왕조,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축복된 관계를 표상하였다. 지도자들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꼈고, 오직 평화와 번영만을 생각하였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리라 이미 약속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여호와가 그의 백성에게 등을 돌릴 수 있겠는가?

   미가는 이런 질문들이 지닌 고뇌를 몸소 체험하였다. 그는 사로잡힌 자처럼 애곡하며 맨발로 다니면서 포로가 되는 공포를 실감하였다(1:8). 선지자는 또 소망과 기도에 전념하였다.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소망이 있었다 :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7:7).

   그는 동시대인들과 달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결책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고독함을 느꼈고 절망 가운데 부르짖었다(7:1, 2).

   하나님은 삶의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정죄하였다(1:16 ; 2:3 ; 6:13). 그의 오심은(1:3-5)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심판에서(1:6 ; 3:12 ; 4:10,11 ; 6:16) 그의 왕국이 보다 완전히 시작됨을 표시했다. 이것은 하나의 예언적인 역설이다! 그러나 미가의 환상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심판을 너머 세상의 모든 나라들로 확장된다(7:13,16,17). 심판의 날은 모든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으로, 이 땅에 그의 왕국을 확립하고자 그가 심판 가운데 등장하는 날이다.


   정화와 소망

   미가는 포로생활로부터 구속받을 것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제시하였다(4:10). 그는 다가올 여호와의 심판을 대비하도록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를 불렀다. 그러나 그의 증언은 직접적인 역사적 상황을 너머 모든 시대의 경건한 자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메시아 왕국을 위해 준비하도록 요청한다.

   미가는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열방의 거짓된 길과(4:5) 반대되는 여호와의 길로 끝까지 행할 것을 단언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이 길이 바로 그 옛 길임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정의와 사랑에서 표현되는 바와 같은(6:6-8) 충성스러운 헌신을 기대함을 밝혔다. 정의(mispat)는 인간과 관계할 때,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상대하는 성실성을 뜻한다. 정의는 사회적 지위, 이전의 관계, 소문, 외양,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등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정의는 사랑(hesed)의 한 표현으로 그 특징은 불변성, 배려, 차별 혹은 죄를 전가하지 않는 것, 수많은 죄와 허물을 덮을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는 것 등이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그의 자녀들을 정의와 사랑으로 다루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오직 용서하고, 공정하고, 사람들에게 의심스러운 점을 유리하게 해석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마음만을 기대한다. 그 나라의 모든 시민이 마땅히 따라야 할(4:2) 하나님 왕국의 법은 정의와 사랑의 겸손과 관계한다. 하나님의 길은 항상 현실정책에 반대된다.

   미가의 기도는(7:14-20) 하나님의 왕권의 공의로운 확립을 구하는 모든 남은 자 세대를 위한 모델로 역할한다. 이 새 질서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며 일하는 자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미가와 함께 기도할 것이다(7:18-20).


   회복

   미가는 미래를 말할 때 하나님이 관련된 새 시대에 대해 증언하였다(4:1, 6, 7; 5:10; 7:7-15). 새 시대는 하나님의 왕국과 메시아가 나타나는 시대이다. 미가의 예언은 하나님의 왕국과 그의 메시아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통치를 소망하게 한다. 새 시대의 선지자 미가는 또 포로에서 만물의 변형에 이르기까지 회복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도 증언하였다. 회복은 포로기의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새롭게 베푸는 것과 더불어 시작된다(2:12,13 ; 4:6,7). 게다가 유대인들의 회복은 이방인들의 회복과 관련되며(7:12,13), 구속은 창조와 관련된다.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의 통치는 그의 자녀들에게 축복과 보호를 가져온다. 그 위대한 왕은 “버림 받은 자들”을 취하여 그의 왕국의 시민들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4:7-8).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들은 그의 축복을 받고 안전하게 살며, 전원생활을 비유로 표현된 그의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향유할 것이다.

   하나님은 또 그들을 위하여 간섭하실 것도 약속하고 있다 :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2:13). 유다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그는 정의롭고 공의롭게 그의 왕국을 건설할 것이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 중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4:2b-3).

   하나님이 그의 백성 한가운데서 통치하고, 목자와 같이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할 때, 그 결과는 다름 아닌 평화일 것이다. 하나님의 왕권은 온 땅에서 찬양되며 그의 백성은 그의 축복과 보호를 받을 것이다.

   왕국은 열두 지파 모두의 남은 자들(2:12 ; 4:6,7 ; 5:7,8 ; 7:18)과 하나님께 복종하는 모든 이방인들에게(4:1-4) 베풀어질 것이다. 비록 왕국의 진보가 느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메시아 왕국

   회복은 또 다윗 자손 메시아 아래서 왕국의 재건설로 이루어진다. 그는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그의 도구이다. 미가는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되 그것의 인간적 개념이나 기대를 변형시켰다. 예루살렘이 권력의 타락과 부도덕과 외국의 영향과 우상 숭배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는 메시아의 통치와 예루살렘을 분리하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다윗 왕조와 베들레헴을 연결하였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5:2).

   다윗 자손 메시아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진실로 성취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확립하고, 왕국의 자녀들을 구속하며, 그들에게 준 약속과 축복과 언약의 완전한 향유를 회복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그들의 압제작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위해 싸우도록 위대한 왕이 파송한 거룩한 전사이다.

   남은 자들도 그들 역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확립하기 때문에 메시아의 통치를 앞당기는 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5:7-8).

   미가는 메시아의 통치에 복종하는 이방인들도 그 왕국에 포함시켜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가 영광스러운 메시아 시대를 공유할 것을 예고하였다. 메시아 공동체는 메시아의 요구에 복종하는 자들에게 축복(“이슬”)의 수단이 될 것이나, 하나님의 왕국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주(“사자 같고”)를 가져올 것이다. “이슬”과 “사자” 비유는 왕의 은총에 생기를 주는 이슬의 속성에 비유하고, 그의 진노를 “사자”의 울부짖음에 비유한 잠언으로(잠 19:12) 설명될 수 있다.

   메시아 왕국에 대한 환상은 앗시리아가 주목할 만한 세력이었던 기원전 8세기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앗시리아에 대한 메시아의 승리의 약속은(5:5,6) 그가 이 땅의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세력들을 정복함을 의미한다(계 19:1-24의 “바벨론”과 유사 ; 참고, 단 2:44 ; 7:26-27 ; 고전 15:25-26). 그의 왕국은 우주적인 평화의 통치일 것이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5:4).

   메시아 왕국은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부도덕과 우상 숭배와 권력 놀음과 부패를 깨끗이 제거할(5:10-15) 영원한 왕국이 될 것이다. 그 왕국은 하나님과 그의 메시아와 하나님의 백성의 소유가 될 것이다. 그들은 보호와 축복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영원히 향유할 것이다. 그 보호와 축복은 이미 남은 자와 그의 창조물을 돌보는 거룩한 전사의 선하심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구속과 창조는 바로 그의 사랑의 대상들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미가는 자기 당대의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심판과 소망의 신탁들을 전하기는 했지만 직면한 역사적 위기를 초월하는 표현들을 사용하였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독자들을 보다 먼 미래로 인도하였다.

   신약의 저자들은 이 점을 인식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을 언급하면서 미가서 4:2를 인용했다(마 2:5를 보라). 미가서의 문맥 속에서는 이 신탁은 미래의 다윗과 같은 통치자를 고대하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베들레헴이란 탄생장소의 중요성이다.

   미가서 4:1-5는 하나님의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과 세상의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모이는 것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는 평화만이 있고 전쟁이 없을 것이다. 이 신탁은 “말일에”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구속사가 펼쳐지는 가운데 이 예언은 말일에 그 궁극적인 성취가 이루어지기 전에 그 중 몇 가지는 예변적으로 성취되어진 듯하다. 왈트케(Waltke)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마지막에 가장 절정에 있는 이상 속에서 미가는 시온산이 열방의 제의적․도덕적 중심으로 영원히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의 신탁들 속에서는 그는 이것이 어떤 단계들을  거쳐서  그렇게 성취되어질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이 예언의 성취의 첫 번째 단계는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과 제2 성전의 건설이다. 그 다음의 보다 중요한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로부터 내려오심으로써 땅의 모형이 사라질 때 실현된다. 세 번째이자 절정의 단계는 땅의 왕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으로 자신들의 영광을 가져올 때 새 하늘과 새 땅 속에서 완성되어진다(계 21:1,10,22-27).    




나훔서


   “위로”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의 선지자 나훔은 주전 7세기에 앗시리아를 향해 강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책의 어조는 거치며, 구체적인 시기에 한 구체적인 나라를 향한 그 메시지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이 생각이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공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의 심미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며, 또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고 해도 이 책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굉장한 중요성을 갖고 있다.



                     역사적 배경


저작권

   이 책의 표제는 저자의 이름이 나훔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그가 엘고스 사람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엘고스란 고장이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고한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네 가지의 가설이 해석의 역사속에서 제시되어졌다: (1) 동양의 중세 전통에 따르면 나훔은 포로로 잡혀간 북왕국 가문의 후손이었다. (2) 어떤 이들(고대의 제롬과 보다 최근의 판 더르 바우데[van der Woude])은 엘고스가 엘-카우제(El-Kauzeh)라고 불리는 갈릴리의 한 장소 출신이라고 생각한다. (3) 북왕국의 다른 한 장소도 역시 제시되어졌다. 이 장소는 갈릴리 해의 북부 연안에 있는 가버나움이다. 가버나움의 어원은 “나훔의 도시”(Nahum's city)일 가능성이 있다. (4) 또 하나의 제시된 장소는 유다의 한 장소이다. 위(僞)-에피파니우스(Pseudo-Epiphanius)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해리슨(R. K. Harrison OTI, 26)에까지 이어지는 한 전승에 따르면, 엘고스는 현대의 베이트 이브린(Beit Jibrin)인 베게발(Begebar) 주변의 한 지역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러한 네 개의 장소는 앗시리아, 이전 북왕국의 지역, 유다를 포함한 모든 가능성들을 다 포괄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보다 더 깊은 논의를 하는 것은 순전한 추론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시대

   나훔은 역사적 상황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따라서 그 메시지가 현대의 독자에게 의미가 통하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책의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의 예언은 주전 7세기를 그 시기로 하고 있다. 이 연대는 주전 664년의 테베의 멸망에 대한 언급(3:8)과 이 선지서의 초점인 612년의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에 의해서 확정된다. 만약 이 책의 예언적인 성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나훔은 최소한 이 도시가 멸망하기 몇 년 전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보다 더 엄밀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어떤 학자들(Maier, 35-36)은 테베에 대한 언급이 너무나도 생생하기 때문에 그의 예언은 그 예언이 성취된 연대보다는 테베의 멸망 연대 쪽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주장은 이 선지자가 가진 시적인 능력을 볼 때는 빈약하다. 나훔이 비유적 표현들을 탁월하게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아마 아주 고대의 사건도 “생생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이보다 가능성이 있는 주장은 나훔이 앗시리아 제국이 상당히 약화되기 전(이 약화 과정은 주전 630년을 전후해서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에 이 책을 썼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입장은 앗시리아가 “강장하고” 중다하다고 말하고 있는 나훔서 1:12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 유연성을 가져야 하기는 하지만 이 책의 연대로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주전 652년(내전이 일어난 시기[아래를 보라])부터 바벨론이 앗시리아의 지배력을 흔들어 쓰러뜨리기 위한 긴 전쟁을 시작한 626년 사이에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이 선지서의 초점은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시기의 앗시리아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8세기 후반과 7세기의 초엽은 앗시리아가 주도권을 쥐고 팽창하던 시기였다.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Ⅲ, 745-727년),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Ⅴ, 726-722), 사르곤 2세(Sargon Ⅱ, 721-705년), 산헤립(704-681년), 에살핫돈(Esarhaddon, 680-669년) 등의 능력있는 지도자들하에서 앗시리아 제국은 제국의 지배력을 그 선례가 없을 정도로 제고시켰다. 앗시리아의 힘과 문화는 앗수르바니팔(Asshurbanipal, 668-627[?]년)의 초기에 정점에 이르렀다. 비록 그의 아버지 에살핫돈이 이집트를 침공하기는 했지만 앗시리아가 제국의 역사에서 정점에 이른 것은 앗수르바니팔이 이집트의 고대의 수도인 테베를 점령했을 때라고 보는 것이 아마 옳은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들은 652년이라는 이른 시기부터 찾아왔다. 바벨론은 오랜 기간동안 앗시리아의 정치적 속국이었지만 언제나 문제거리였었다. 에살핫돈은 스스로 보기에 바빌로니아의 문제와 자신의 사후에 자신의 후손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갈등의 잠재성을 해결할 수 있는 위험한 갈등의 잠재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계책을 생각해냈다. 고대 근동의 역사는 형제들이 권좌를 놓고 서로 싸우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에살핫돈은 자신이 죽으면 한 아들(앗수르바니팔)은 바벨론의 왕좌를 차지하고, 다른 아들인 샤마쉬-슘-우킨(Šamaš-šum-ukin)은 앗시리아의 왕좌를 차지하도록 지시했다. 물론 샤마쉬-슘-우킨은 바벨론이 앗시리아의 아래에 있는 것처럼 앗수르바니팔의 아래에 있었다. 하여튼 이러한 조치는 십 년이 넘도록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652년에 샤마쉬-슘-우킨은 갈대아인들을 이끌고 자기 형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앗수르바니팔이 이 전쟁을 이기기는 했지만 그 대가는 큰 것이었다. 앗시리아의 힘은 기울고, 멸망을 향한 길고 느린 나선형 추락이 시작되었다.

   앗시리아의 마지막 몇 년과 그의 죽음 직후의 몇 년에 대해서는 문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기록(Wiseman)을 통해서 우리는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라는 이름을 가진 갈대아 지도자가 자기 백성을 선동해서 앗시리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며, 오랜 기간 동안을 서로 밀고 당기고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전쟁은 612년에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과 더불어 절정에 이르렀다.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바빌로니아 및 후대의 기록들은 어느 정도 모호한 부분들을 갖고 있기는 하다(Zawadzki). 그러나 실제로 이 성을 멸망시킨 것은 메대인들(the Medes)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자신들의 기록 속에서 이 성, 그리고 특히 이 위대한 도성의 성전들에 대한 약탈행위들이 자신들과 상관없는 것인양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메대인들은 이 성을 영원히 소유하는데 관심이 없었거나 아니면 그럴 능력이 없었으며, 따라서 이 성은 결국 그들의 동맹인 바빌로이아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문학적인 분석


문체

   나훔의 시적인 문체는 상당히 뛰어나다. 그 아름다움은 그 거친 메시지와 아주 대조적이다. 감독 로우스(Lowth)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그러나 소선지자들 중에서 그 대담성, 정열, 장엄함에 있어서 나훔서에 견줄만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예언은 아주 정제되고 아름다운 시로 되어있다. 그 시작부분은 단순히 찬연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장엄하기도 하다.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준비 및 그 멸망과 황폐화에 대한 묘사는 아주 생생한 색체로 표현되어 있으며, 최고도로 대담하고 찬란하다(234).


비유적인 표현들이나 짜임새 있는 평행법들을 통해서 나훔은 자신이 탁월한 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장르

   이 책의 처음에 나오는 표제는 독자들이 이 선지서 소에서 만나게 될 문헌의 종류와 관련해서 세 가지 용어를 쓰고 있는데, 그것들은 각각 “책”(book, 한글판 개역성경은 “글”이라고 번역함 - 역자 주), “이상”(vision, 한글판 개역성경은 “묵시”라고 번역함 - 역자 주), “신탁”(orscle - 한글판 개역성경은 “경고”라고 번역함 - 역자 주) 등이다.

   “책”(세페르, רפס)은 나훔의 예언이 다른 것들과 다소 상이함을 시사해 준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설교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선지자들은 그들이 말한 바들을 나중에 모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훔은 책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여러 가지 시적 기교들 - 예를 들어 나훔서 1장에 나오는 불완전한 형태의 알파벳 시(Longmaㅜ 1993) 등 - 은 귀보다는 눈에 호소하고 있다. 이 선지서가 기록 문헌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또한 왜 나훔서가 설교들의 모음집처럼 보이는 다른 선지서들(미가서)과는 달리 그렇게 잘 구성된 구조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혀준다(다음 항목을 보라).

   이 책은 또한 “이상”(하존, ןוזח)을 담고있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전부가 이상은 아니지만 이상을 담고 있는 두 개의 주목할 만한 문단(2:3-10; 3:2-3)이 들어있다(Horst and Sister).

   그러나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장르 표시는 바로 “신탁”(맛사, אשׂמ)이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짐”(burden)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해석가들은 “신탁”이 맞는 번역이라고 파악한다(Naude'). 하지만 “신탁”이라는 번역 역시 너무 막연한 번역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이 선지자가 이방나리에 대해서 강한 어조로 말할 때 주로 사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맛사는 “전쟁의 신탁”(war oracle) 혹은 “이방나라에 대한 적대적인 신탁”(oracle against a foreign nation) 등을 의미하는 고대의 용어인 것으로 보인다.


구조

            표제(1:1)

       Ⅰ. 용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시(1:2-8)

       Ⅱ. 용사이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치리하시고 구원하신다(1:9-2:2)

       Ⅲ.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이상(2:3-10)

       Ⅳ. 사자에 비유해서 하는 조롱(2:11-13)

       Ⅴ. 니느웨에 대한 저주의 신탁(3:1-3)

       Ⅵ. 마술사-창녀에 비유해서 하는 조롱(3:4-7)

       Ⅶ. 테베와 니느웨의 역사를 비유해서 하는 조롱(3:8-10)

       Ⅷ. 니느웨에 대한 계속적인 모욕(3:11-15c)

       Ⅸ. 메뚜기에 비유해서 하는 조롱(3:15d-17)

       Ⅹ. 결론으로서의 장송곡(3:18-19)


   이 책을 주의 깊게 분석해 보면 그 짜임새 있는 구조가 드러난다. 이 책은 선지자의 이름, 도시의 이름, 그의 주제에 대해서 말해주는 상당히 전형적인 표제로 시작된다: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이 책의 예언은 시편의 많은 시들(예를 들어, 시편 24편과 98편)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 용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장엄한 승리의 찬양시(1:2-8)로 시작된다. 이 찬양시는 역사적인 면에서 구체적이지가 않으며, 사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자이자 자기 백성의 수호자로서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다음 부분(1:9-2:2)은 이 두 가지 측면의 내용을 담은 승리의 노래로부터 흘러나온다. 선지서들 중에서는 독특하게 나훔서는 유다에 대한 구원의 신탁(1:12,13,15; 2:2)을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신탁과 함께 엮는다(1:9-11,14; 2:1). 이 부분의 극적인 긴장은 구원과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고의적으로 늦춤으로써 고양된다. 유다는 1:15까지느 s명시되어지지 않으며, 니느웨는 이 부분에서는 아예 언급되어 있지가 않다.

   이 선지서는 이 책에서 발견되어지는 한 개 혹은 두 개의 이상으로 계속 이어진다(2:3-10). 이것은 사건에 대한 이상인데, 마치 나훔이 니느웨의 마지막 멸망의 장면에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되어있다. 강력하고 억압적인 이 도시의 멸망에 대한 생각을 염두에 둔 채 나훔은 니느웨에 대한 조롱을 한다. 나훔서 2:11-3:7은 일종의 구심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Schulz). 2:11-13과 3:4-7은 은유법을 사용한 조롱으로서 같은 구조를 갖고있다(2:13과 3:5에 결론으로 나오는 심판에 대한 표현을 보라). 첫 번째의 조롱은 앗시리아를 죽임당하는 사자라고 놀리고, 두 번째 조롱에서는 앗시리아를 마술사-창녀로 놀린다. 그 가운데 부분에 나훔은 전쟁의 신탁과 더불어 사건에 대한 이상을 집어넣는다(3:1-3). 이러한 양식의 기원은 장례식의 애가이다. 따라서 사실상 나훔은 니느웨가 “즉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까지는 조롱들이 계속 이어진다. 첫째, 나훔은 니느웨를 테베와 같이 비교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사를 활용한 조롱”(a historical taunt)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소 나서 이 선지서는 조약의 저주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짧은 조롱들로 계속 이어지며(3:12-13), 니느웨의 멸망을 풍자적으로 애도하는 장송곡으로 끝을 맺는다(3:18-19). 수사의문문으로 끝을 맺는 또 하나의 유일한 책은 요나서인데, 이 책은 니느웨의 구원에 대한 선지서이다. 이러한 의도적인 대비는 일부러 부각되어지도록 의도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Glasson).


                     신학적인 메시지


목적과 메시지

    이 책의 목적은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 선지서에서 현저하게 발견되는 것처럼, 열국에 대한 심판 선언과 비슷하다. 그러나 예언의 대상이 니느웨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오랫동안 앗수르 지배하에서 고통을 받아온 유다에 대한 위로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메세지는 앗수르 통치 시대가 여호와의 손에서 종말을 고하게 됨을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사례일 뿐만 아니라,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실행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주권이 그 메시지 내용의 핵심이다. 그는 니느웨의 멸망을 선언 하셨으며, 반드시 그대로 성취하실 것이다.

   나훔서 1:7-8은 나훔서의 중심적인 메시지를 요약해 준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은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한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며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나훔서에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용사로 나타나 있다. 주전 7세기에 처음 이 책을 읽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선지서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앗시리아의 그늘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오랜 적과 대결을 하려고 하신다. 앗시리아, 그리고 특히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주었다.

   하나님은 이 예언의 약속을 성취하셨으며, 니느웨는 주전612년에 메대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을 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로 가득찬 반항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내를 계속 시험했다. 그 결과 그들은 바벨론이 팔레스타인으로 눈길을 돌림에 따라 자신들이 심각한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되었다. 586년에 위대한 왕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정복했다.


앗수르와 구약

    구약 성서에서 앗수르는 가장 악하게 묘사된다(심지어 블레셋보다도 악명이 높을 정도였다). 바벨론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했지만, 그들은 잔인하고 흉악한 면에 있어서 앗수르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앗수르인들의 야만적인 군사 정책과 행위는 거의 2백년 이상 고대 근동 지역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이 앗수르인들은 자신들의 철옹성 같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을 개발함으로써 피정복지의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했다. 그들이 빚어낸 공포는 고대 근동 사회에 유명했다.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보복이 뒤따랐다. 앗수르인들은 반역자들을 군중들 앞에서 처형했다.

    이러한 악한 통치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은 군사적 반역을 도모하려는 자들을 억제하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 반역보다는 차라리 굴욕적인 복종이 나았다. 그 대적이나 죄수들은 공공연히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피부를 벗기는 고문, 산채로 태워서 죽이거나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고, 얼굴의 일부를 자르는 경우도 있으며, 기타 상상할 수 없는 다른 흉악한 일을 자행했다. 비록 이러한 형벌이 범죄자들에게로 제한되었지만, 우리는 니느웨에게 선포된 파멸이 그 주변 나라들에 의해 전혀 동정을 얻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훔은 앗수르의 걷잡을 수 없었던 잔인성에 대하여 앗수르 스스로에게 책임이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선언한 것이다. 나훔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수호하고 그분의 주권을 선포한다.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역사의 순서에 따라 각 나라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이다. 말씀의 선포는 사건 이전에 이루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역사에 있어서의 “자연적”인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솜씨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이스라엘 신학에 있어서는 후자의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의 분노는 질투와 열심의 두 면을 지닌다(도표 39 참고). 그의 백성을 위한 질투심으로 여호와는 니느웨에 분노하고, 열심히 그에게 피난처를 구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방어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이 땅에 있는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데 빈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왕권을 반대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과 권능으로 오실 때(신의 현현, 도표 38 참고), 그는 피조물의 모든 권능을 마음대로 사용할 것이다(1:2,3- ; 참고, 출 34:6,7).

    하나님이 그의 통치를 확립하려고 할 때, 자연이 전율한다 ; 심판을 통해 그는 우주적인 대변동을 야기시킨다(1:4-6).

    만약 피조물이 마르고, 쇠하고, 진동하고, 녹고, 솟아오른다면, 어떻게 인간이 그의 오심을 대비할 수 있겠는가?(계 6:17)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1:6-8) 인간들은 그의 주권에 복종하며, 그들의 권력과 왕국과 군사 전략들이 한갓 유치한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가 모든 저항을 진압할 때, 어떤 악도 그의 위엄이 주는 두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v.15). 그 후에 그는 그의 자녀들에게 안식을 줄 것이다(v.15; 욜 2:19,26-27 ; 3:17 ; 계 7:16 ; 21:4).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백성은 태풍의 눈 속에 있다.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고 평화의 메시지로 그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에게서 피난처를 얻는다(1:15- 2:2). 그의 자녀들을 위한 열심히 그는 분노하며, 그들을 보호하고 그의 승리의 영광을 그들과 나눌 것을 약속한다. 나훔은 하나님의 열심의 두 국면을 제시한다 : 파멸과 구원 ; 진노와 자비 ; 복수와 선함. 그는 그의 적들을 파멸하고, 그들에게 그의 분노를 나타내며, 그들에게 원수를 갚을 것이나, 그를 기다리는 자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보이며, 그의 선함을 나타낼 것이다(1:15). 하나님의 진노가 큰 만큼, 그의 자비는 더욱 부드럽다(v.7). 그는 그의 완전한 선을 기다리는 자들을 보호한다(7-8).

    선지자 나훔은 역사 안에 보여진 하나나님의 권능과 정의에 매우 중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주권적인 왕이다. 심지어 세계 최강의 세력도 - 나훔과 관련하여는 앗시리아 - 그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악테미이어가 격렬하는 것 처럼, 경건한 자들은 그의 왕국이 임하기를 항상 기도해야 한다: “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고, 하나님의 적들이 패배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또 우리는 그 다가올 왕국의 권능 안에 이미 살고 있는 자로서 행하고 일해야 한다.”


                    신약으로의 접근


   많은 학자들은 나훔서가 오늘날의 교회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선지서는 너무 구체적이고 유혈낭자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전반적이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으로 나훔서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나훔서의 영속적인 의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원수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위대한 찬송인 1:2-8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약에서의 용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신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고대하고 있는데, 그리스도 역시 신약에서 용사로 빈번하게 묘사되었다(Longman 1982; 1985a ,b: Longman and Reid 1995).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의 대상은 구약과 다르다. 구약에서 야웨는 이스라엘의 육신적인 원수들(가나안 족속, 블레셋 족속, 앗시리아인 등)에 대항해서 싸우시며, 또한 불순종한 이스라엘과도 싸우신다(애 2:6). 반면에 바울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 승천은 사탄 및 그의 군대에 대한 전쟁의 절정인 것으로 되어있다(골 2:14,15; 엡 4:7-11). 전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묘사와 사탄과 그리스도 사이의 전쟁은 계시록에서 이 주제가 그 절정에 이르는 때를 내다보고 있다(예를 들어, 계 19:11-21을 보라). 예수께서 사탄 및 그의 귀신들 및 인간 군대에 대해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마지막 전쟁을 수행하심으로써 악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니느웨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나훔서의 영속적인 중요성은 신약에서의 그리스도의 전투에서도 역시 찾아볼 수 있다.        




하박국서


   이 선지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이 이름은 오직 이 책의 표제들과 그의 이름을 담고 있는 시(詩)속에만 나온다(1;1; 3:1). 이 이름은 “껴안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에서 파생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이름이 정원의 식물을 의미하는 아카드어 단어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많은 학자들은 하박국이 제의 선지자(a cult prophet)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책은 성전과 관련되어 있는 문학양식인 애가(lament)라는 장르를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3장의 시에 나오는 음악 용어들 역시 이 책이 예배에 사용된 것을 시사해 준다. 레위 지파 음악가들은 예언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대상 25:1-6). 신현(神現)에 대한 서술(3장)은 제의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러나 “제의 선지자”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명료하지가 않다. 선지자들과 성전의 정확한 관계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은 구약학에서 가장 논쟁이 된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만약 “제의(祭儀) 선지자”라는 용어가 성전의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성전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선지자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제의 관계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하박국이 이러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만한 자료가 충분하지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는 성경에 언급된 다른 선자자들의 경우에도 모호하다. 어떤 선지자들은 제사장을 겸임하기도 했다(예를 들어, 에스겔과 스가랴).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 직분 때문에 선지자가 된 것은 아니다. 선지자란 직분은 전수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이 “제의 선지자”란 용어가 성전을 배경으로 해서 일관된 사역을 하는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용어는 하박국 및 다른 많은 선지자들에게 적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차일즈(Childs, 452)는 비록 하박국서의 상당부분이 제의적인 배경 속에서 기원했을 수 있지만 이 책의 자서전적인 요소들(2:1; 3:2,16-19)은 이 책의 현재 모습에 제의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선지자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왜 이 선자자에 대해 여러 가지 다양한 전설들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벨과 용(Bel and the Dragon, 다니엘서의 외경적인 첨가 부분)의 한 사본은 하박국이 레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성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전승이다. 어떤 랍비 문헌들은 그가 술람미 여인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열왕기하 4:16에 “껴안다”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그가 이사야서 21:6에 언급되어 있는 파수꾼과 동일인물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2:1에서 이 선지자가 이러한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전승들은 이 선지자에 대해서 아무런 사실적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탈무드(Makkot 23b)는 한 랍비의 다음과 같은 말을 담고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육백십삼 개의 계명을 주었으며, 다윗은 그것들을 열 개로 줄였고, 이사야는 두 개로 줄였지만 하박국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는 한 가지 계명으로 줄였다.”


역사적 배경


   하박국서는 갈대아 사람들이 일어난 시대(1:6), 즉 주전 7세기 후반이나 주전 6세기 초에 쓰여졌다. 앗시리아는 주전 625년을 전후해서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바벨론의 권좌를 차지하던 때와 거의 일치한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아버지가 죽은 후에 갈그미스 전투(the battle of Carchemish)를 전후한 사건들의 와중에서 바벨론의 왕이 되었다(604년). 그리고 나서 바벨론 군대는 한 때 위대했던 앗시리아 제국의 도시의 남은 자들을 무찌르고 난 후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나라들로 주의를 돌렸다. 598년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의 왕가 및 지도층의 시민들과 더불어 유다 왕 여호야긴을 사로잡아갔다(왕하 24:8-17; 대하 36:9-10). 갈대아인들의 발흥에 대한 언급(1:6)은 625년에서 604년의 연대를 시사해주는 반면에 바빌로니아 군대가 거둔 수많은 정복에 대한 언급(2:5,8-10)은 다소 후대의 연대를 시사해 준다. 하박국은 어쩌면 예레미야, 스바냐, 나훔, 그리고 요엘의 동시대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이 책의 내적인 증거는 저작 연대에 대한 확고한 시기를 제시해 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비평학계는 이러한 자료에 언제나 만족하지는 않았다. 학자들은 이 책의 연대로 주전 7세기 초부터 2세기 초까지의 연대들을 제시했다. 죄켄(Jöcken 1977)은 이에 대해서 심도있게 조사를 했다.4) 저작연대의 문제는 1:4와 1:13에 언급되어 있는 악인의 정체의 문제와 주로 연결되어 있다. 1:4에서는 악인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거주민들 중 악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가.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들이 갈대아인들에 의해서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인 앗시리아인들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악한 앗시리아인들이 유다 내부의 부패를 나타내는데 적합한 표현인 “율법의 해이”라는 문구로 묘사되어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1:13에서의 악인은 갈대아인들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들은 이 책의 보다 이전의 판본이 정말 3장의 시로 끝이 났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이 시는 독립된 표제(3:1)를 통해서 도입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시가 현재처럼 이 책의 결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1948년 쿰란 동굴 1번에서 발견된 주석은 2장으로 끝이 나며, 이 시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점은 쿰란 분파가 1-2장의 본문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더욱 유용하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3장에 대한 주석은 쓰지 않았음을 반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시는 70인경의 모든 완전한 사본들 속에는 다 포함되어 있으며, 주후 2세기 초의 와디 무라바아트 두루마라(the Wadi Murabbaꡑat scroll)속에서도 발견된다(Brownlee 1959, 92).


문학적인 분석


문학 형식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두 편의 탄식에는( 1;2-4, 12-170여호와의 공의에 대한 선지자의 의문이 제기되어 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 신탁으로 응답한다(vv. 5-11:2:1-4).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 사이의 대화를 이어 다섯 가지 “화”(vv. 6-20)로 된 조롱이 나온다. 그 대화와 조롱 사이의 관계는 독자다 스스로 이해해야 할 부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불명료성과 간결한 시적 문체로 인해 독자들은 선지자가 하나님에게 하는 말과,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하는 말과, 바벨론에 대한 선지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게 된다.

    제 삼 장은 그 나름의 도입부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3:1)와 음악적 기보법(“시기오놋에 맞춘: v 1: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v. 19)-를 지닌 별개의 것이다. 이 장은 여러 장르(찬송, 탄식, 감사)로 되어있다.


구조

   우리는 하박국서를 다음과 같이 개관할 수 있다:

      표제(1:1)

    Ⅰ. 최초의 대화(1:2-11)

        A. 선지자의 불평(1:2-4)

        B. 하나님의 응답(1:4-11)

    Ⅱ. 두 번째 대화(1:12-2:5)

        A. 선지다의 불평(1:12-17)

        B. 하나님의 응답(2:1-5)

    Ⅲ. 압제자들에 대한 저주의 신탁(2:6-20)

        A. 노략자가 노략될 것임(2:6-8)

        B. 정복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9-9-11)

        C. 건축자가 헛됨(2:12-14)

        D. 수치가 없는 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15-18)

        E. 우상숭배자들이 잠잠할 것임(2:19-20)

    Ⅳ. 하박국의 순종의 시(3:1-19)

        A. 기도(3:2)

        B. 용사이신 하나님의 등장(3:3-15)

        C. 믿음으로 사는 선지자(3:16-19)


   이 책의 첫 부분(1:2-2:5)은 하나님과 선지자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1:2-4와 1:12-17에서 선지자는 애가의 양식을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불평들을 늘어 놓는데, 이 애가 양식은 시편의 애가시들(시 6; 12; 28; 31; 55; 60; 85편)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시편에서는 보통 이러한 애가시들은 하나님께서 그 시편 기자의 불평을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고 보호하시며, 그의 혹은 이스라엘의 적들을 심판하실 것을 확약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연결되어진다(시 6:8-10[MT 6-9]; 28:6-9; 31:22-23[MT 23-24]; 55:22-23[MT 23-24]; 60:8-10[MT 10-12]; 85:8-13[MT 9-14]).

   하박국은 우선 유다에 횡행하고 있는 악과 불의와 폭력에 대해서 불평했다(1:2-4). 이 선지자는 “왜 악이 번성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이 선지자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멸망과 사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진군하는 갈대아인들을 들어 세우심으로써 유다의 악을 심판하실 것이다(1:5-11). 이것은 위로가 아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선지자의 질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위해서 유다의 악보다 더 악한 악을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다. 그리고 보다 악한 이들은 더욱 번성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 선지자의 두 번째 불평을 도입한다(1:12-17).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참아 보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이 자신들보다 의로운 자들은 집어삼키도록 허락하실 수 있는가(13절)? 그들은 계속해서 번성하고 그들의 그물을 채우며, 계속해서 사치롭게 살 것인가(16-17)?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지를 보려고 파수꾼처럼 인내하며 기다린다(2:1).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가 성취될 때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이 선지자가 자신이 계시하는 바를 기록할 것을 명령하신다(2:2-3).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들을 벌하실 것이다. 바벨론의 오만은 그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2:4-5).

바름과 잘못됨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들을 평가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진실로 의로운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들을 지키실 것이라는 신실한 믿음 속에서 산다(2:4b).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창 15:6)처럼 이 선지자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갈대아인들 역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은 이후의 다섯 개의 저주의 신탁들을 통해서 확약되었다(2:6-20). 악이 항상 번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질 것이며(14절),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 것이다(20절). 비록 모든 일들이 점점 악화되어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통치하시며, 자신을 지키실 것이다.

   자신이 본 이상에 대한 이 선지자의 반응은 하나의 찬양시, 즉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병거를 타고 나타나심을 묘사하소 있는 승리의 노래이다. 그가 오실 때 천지가 떨 것이다(3:3-7). 하나님은 창조 때처럼 혼돈의 물들을 다스리심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는 출애굽 때처럼 열방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무기를 가지고 오실 것이다(3:8-15).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들로부터 확신을 얻으며, “우리를 치러 오는 나라에 임할 환난의 날을 인내로 기다리는”(3:16) 중에 믿었다(“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 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라는 한글판 개역 성경은 오류이다 - 역자 주).

   3장의 시는 고어체(古語體)적인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들은 이 선지자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나열하면서 의도적으로 고어체적인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시가 현존하지 않는 보다 방대한 고대의 서사시의 단편(斷片)들로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Patterson 1987).


신학적인 메시지


목적과 메시지  

    앗수르 제국은 거의 1세기 이상 세력을 유지했으나, 630년에 붕괴의 징조가 짙게 나타났으며, 세계 정치 세력의 재편성이 요구되었다. 하박국 선지자가 직면한 한 가지 문제점은 하나님의 몽둥이인 앗수르가 무대에서 사라져가고 있으나, 유다는 하나님과 그 언약에 불순종한 명백한 범죄에 대한 처벌이 없이 남아 있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였다. 이러한 암울한 사실에 대한 하박국의 불평은 바벨론이 유다를 심판할 수단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대답을  가져온다. 이 부분의 계시는 이 책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중심 주제를 소개한다.

    이 책의 목적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공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다. 호신론-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방법에 대한 옹호-부분에 등장하는 질문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찌 바벨론과 같은 사악한 국가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박국은 유다 백성들이 형벌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일 하나님이 바벨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이기게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승인하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여러 면에서 하박국에서는 욥기에서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욥은 의인의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의 공의에 관한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하박국은 사악한 국가가 번영할 때 하나님의 공의 관심을 보였다.

   하박국은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다. 이 나라는 내적인 부패로 썩어 있었으며, 새롭게 부각하는 바벨론의 세력이 곧 성전과 도성을 멸망시킬 운명이었다. 그러나 선지자가 볼 때에는 이러한 이중의 악이 횡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활동하시지 않고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인다.

   많은 학자들은 악의 번성과 의로운 자의 고난에 대한 하박국의 불평들을 욥기와 비교했다. 욥처럼 이 선지자도 아무리 현상이 반대로 된 것처럼 보이고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 보여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온 땅의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함을 배웠다(3:16-19). 하박국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2:4). 재난에 직면해서 이 선지자는 자신의 구원자이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법을 배웠다.

    욥기에서와 같은 하박국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대답 속에서 발견된다. 욥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직면함으로써 대답을 얻는다, 신현현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믿을 수 있게 해 주면서,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유한성이 인생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하박국에서는 3장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이 똑같은 구실을 한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어떤 면에서 해답이 즉각 주어지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욥기와는 달리, 하나님은 하박국에서 몇 가지 대답을 주셨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하박국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사용하심에 대한 하박국의 질문에 대하여 두 가지 대답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사태를 합당한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그 대답의 첫 부분은 2:4-5 사이에 주어졌는데, 거기에서는 개인적인 책임이 강조되었다. 비록 세계가 혼미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불투명해 보일지라도 의인에게는 정직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은 어렵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련 많은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의인의 정직과 믿음은 횃불처럼 빛난다는 것이다.

그 대답의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다. 2:6-20까지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심판하실 것이나 그 시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벨론을 사용하시는 것이 곧 그들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기까지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정책

    하박국의 신학은 열방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정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박국이나 구약의 다른 책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방을 다루시는 것을 선악의 행동을 측정하는 저울의 비유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 나라에 있어서 각각의 세대는 좋은 쪽의 추를 더 무겁게 하거나 아니면 악한 쪽의 추를 더 무겁게 하는 것이다. 악한 추 밑에는 종소리가 울리는 버튼이 있다. 악한 쪽의 추가 선한 쪽의 무게를 능가할 때에, 그것은 버튼을 누르게 되는데, 그것은 곧 심판의 때가 되었음을 신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구약에서의 여러 가지 사실을 설명해 주는데, 한 도시나 백성들이 너무 악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창 18:20-21; 15:16; 레 18:25; 욘 1:2).

    그러나 종종 하나님이 예고하신 심판이라도 즉시 회개함으로 인하여 연기되어 결국 선한 추의 무게가 더해지게 되고 버튼을 눌렀던 그 접시가 다시 올라간다(욘 3:10; 왕하 22:19-20). 그러므로 국가가 위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악한 행동을 계속할 때이다. 이것은 렘18:7-10과 같은 내용의 메시지인데, 거기에서 우리는 여러 세대가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취급되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교훈

    이러한 기본적인 구조 외에 이 예언서의 본문으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더 발견해낼 수 있다. 첫째는 선행은 악한 행동보다. 더 많은 무게로 취급된다는 사실이다. 신5:9-10은 이러한 교훈과 연결되어 있는데, 악한 세대의 결과는 삼 사대까지 그 영향을 미치지만, 의로운 세대는 수천 대까지 그 효력을 미친다고 했다. 둘째, 한번 무거워진 추는 그 동안 쌓인 그 사악함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만 원상태로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출32:34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예배한 이후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 하나님은 그 당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주장하시기를, 심판의 때가 오면 그들은 그 죄를 포함하여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될 것임을 밝혔다. 이 비유를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긍휼은 저울의 선한 추를 누르고 있는 손가락과 같아서, 그 벨이 울리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의 ‘무게’가 그 접시로부터 제거된 것은 아니다. 장차 하나님이 누르고 계셨던 손가락을 떼고 형벌이 다시 요청될 때에, 그들은 그 죄악으로 인하여 반드시 형벌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구약 성경에서 쉽게 발견되며, 신약에도 역시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드러나 있는 것인데, “많이 받는 자에게서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눅 12:28)는 교훈이다. 저울 비유로 보면, 계시는 접시 밑에 있는 버튼을 접시에 가깝게 올려 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을 계시로 받는 특혜를 입은 이스라엘이 그러한 특혜를 입지 못한 자들의 죄보다 작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심판이 확정되기 전에 하나님은 이방 백성들의 죄악보다도 선택된 백성들의 죄악을 참지 못하신다.

    이 마지막 원리는 하박국이 직면한 딜레마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 비록 바벨론 백성들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악했지만, 이스라엘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던 백성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율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경고를 받아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때가 이르렀을 때,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기억해야 할 점은 이러한 계획은 일반적으로 열국들에게 적용되는 교훈이다. 여기에서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교리를 거론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원리들은 국가들에 대한 것이지 각 개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열방을 다루는 방법이 구약시대 이후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박국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하게 해 주며 멸망을 자초할 위기에 처한 오늘날 세계에도 역시 하나님은 통치하고 계신다는 교훈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날마다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내적인 사역에 대해 일일이 알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분의 목적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안심하고 믿는다.     


심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유와 공의로움

    하박국은 예언적 불평 양식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공정치 못하다고 비난하였다(1;2-4). 하나님이 어떻게 유다 나라가 계속하여 그의 언약을 파기하도록 허용할 수 있을까? 우상 숭배와 부도덕과 타락이 너무도 팽배하여 하나님의 왕국은 “마비 상태”가 되었다(v.4). 악인들이 숫자적으로 의인들을 능가하였다. 시대가 지나치게 가혹하여 의인은 저주받은 자로 악인은 성공한 자로 간주되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증가하는 방종을 유려하여 그가 그의 공의의 도구로 바벨론을 일으킬 것을 계시하였다. 유다의 폭력은 바벨론의 더 큰 폭력과 마주쳐야 했다. “독(毒)”은 “독”으로 푸는 격이었다(도표 40 참고).

    그러나 하박국은 이 대답에 조금도 만족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님은 악한 민족보다 의로운 민족을 멸망시키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까? 바벨론은 하나님의 목적은 달성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운 왕국에 혼란과 무질서를 야기시킨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 이것은 남아 있는 의로운 자들을 염려하여 말했던 선지자를 놀라게 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은 무자비한 바벨론인들로 하여금 그의 기업을 유린하게 할만큼 무정할 것인가?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은( 1;12-170 이중적이다. 첫째, 그는 유다가 정의와 공의를 곡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의 기초를 파괴하는 것으로 유다를 비난하였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대답을 탄식하며, 그의 자유에 의해 모든 공의가 땅에서 근절되고 결국 완전한 무정부상태가 닥치게 될지도 모를 것을 두려워하였다(v.17). 하박국의 문제는 궁지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곤경을 벗어날 길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파수꾼처럼 서서 지켜보았다. 그는 바벨론인들을 망보면서 하나님의 새 말씀을 기다렸다(2:1).


믿음으로 사는 삶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결국에는 그의 의로운 왕국이 확립될 것을 계시하였다. 이 계시는 후 세대들을 위한 증언으로 기록되어야 했다(2:2). 그것은 그들의 위로를 위한 것으로 그들로 하여금 심판이 지체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상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믿음 가운데 인내해야만 한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롬 1:17; 3:21-29; 갈 3:11)는 이 친숙한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시대가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에 관계없이 인내하도록 그들을 격려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요한의 묵시의 메시지이기도 하다(계 2:10, 19; 26:22 ; 7, 12-14).

    경건한 자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영광스러운 왕국의 완전한 확립이 있다.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들로 확증된다. 하나님은 침략자들과 압제자들과 사악한 자들과 호전적인 자들과 우상 숭배자들로부터 그의 백성을 완전히 구속할 것을 약속하였다(2:6 -20; 참고, 사 5:8-23; 마 23:13-32 눅 6:24-26; 계 9:12; 11: 14; 18:10, 16, 19).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왕국을 열 것을 약속하였다(2:14).

    그는 약한 자들을 심판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그의 거룩한 성전에 계신” 대심판자로 온 천하에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V. 20). 이런 약속들은 지연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동시에 바울이 하나님의 심판을 조소하는 자들에게 적용한 억을 숙고해야 한다(1:; 참고, 행 13:41). 히브리서 저자 역시 우리가 하박국 2:3, 4의 정신으로 인내해야 할 것을 격려한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7-38). 


하나님의 공의의 최후 승리

    하박국서는 의인들에게 역경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도전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왕국이 확립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인내할 것을 권고한다. 하박국은 -대화와 조롱하는 노래와 찬양을 통해-수많은 세대에 걸쳐 경건한 자들에게 구속자에 대한 보다 깊은 믿음을 가질 것을 하나님과 대화하고, 고난의 때에 그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확인해 보고, 소망을 더욱 하나님께 두고, 그를 찬양하도록 격려하였다.

    의식문 형식의 마지막 장은 노래로 불리워질(vv. 1, 19) 선지자의 기도(3:1-19)를 담고 있다, 예배 때의 정규적인 사용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서로 하나님의 과거 행위를 묵상하고 하박국이 증언하였던 영광스럽고 승리에 찬 하나님의 왕국을 소망하도록 격려한다(참고, 엡 5:19, 20; 골 3:16). 예언적 지혜 발전에 끼친 하박국의 공헌은 환상을 가지고 삶으로 어떻게 인내할 수 있는가에 대해 그가 영감 어린 조언을 한 점에 있다(도표41 참고).

기도의 초점은 하나님이 거룩한 전사임을 계시하는 데 있다(3:2-12). 하박국은 경건한 자들이 그의 심판의 날을 기다리면서 조용히 그의 과거 행위들을 생각해 보도록 격려하였다. 출애굽 대에 일어났던 일은 그 크고 무서운 날에 대한 하나의 예조이다. 경건한 자들은 그날을 염려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참고 기다리며 기뻐해야 한다(3:16-19).

    하박국의 찬송은 우리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과 승리의 속성을 찬양한다. “승리의 병거”(3:8; 직. “구원의 병거,” yesu a)는 그의 것이며 , 그의 “메시아” 공동체(NIV와 개역. “기름 받은 자 ”, v. 13: 시 28:8)을 구원하시는 일(yesua, v.13, 2번)은 그의 것이다. 그는 그들의 구세주(3:18 ; 문자적으로 “나의 구원의 하나님,” yis I)이다. 하박국은 우리에게 여호와가 그의 공의를 확립할 때, 그의 구원을 기대하며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그때 모든 땅은 그의 영광으로 충만할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하박국 이후 수백년 후에 다시 악과 불의가 전에 자구 그랬던 것처럼 흥왕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전은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상징되는 성전이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마 27:41-43).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지 않으셨으며, 다시 한 번 악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으며(마 27:43; 히 10:35a),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그를 변호하셨다(롬 1:4).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으며, 악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었다.

   바울은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믿음의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것을 초대교회에 주지시켰다. 바울은 의가 믿음으로부터 말미암는다 - 처음부터 마지막 때까지 아브라함, 욥, 하박국 및 모든 자들에게 있어서 - 는 것을 주장(롬 1:17)하면서 하박국서를 인용하고 있다(2:4). 비록 우리가 악의 시대(갈 1:4) 속에서 살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갈 3:11). 믿음은 ꡒ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 11:1). 옛 사람들은 주변의 모든 상황이 다 믿음은 보상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히 11:2-40). 우리 역시 동일한 신앙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왜냐하면 용사이신 하나님이 장차 오셔서 자기 이름을 수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계 19:11-16).     



스바냐서



   스바냐는 아주 상세한 족보와 함께 소개된 유일한 선지자이다. 그의 조상은 히스기야란 이름을 가진 4대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1). 비록 이 히스기야가 동일한 이름을 가진 그 유명한 왕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바로 이 점이 이러한 장황한 족보가 사용된 이유라는 것을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다.5) 그가 왕족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궁정에 들어 갈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것 같으며, 이러한 자신의 지위로 인해 그는 유다의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1:8,11-13; 3:3-4).

   표제는 스바냐가 요시야 시대에 사역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스바냐는 아마 하박국 및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 선지자는 아마 므낫세와 아몬 치세하의 우상숭배 및 앗시리아 압제의 시대에 성장했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스바냐서의 해석과 관련된 두 가지 문제가 이 책의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는 것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 스바냐의 사역은 주전 621년의 율법책의 발견과 관련된 요시야의 개혁 이전인가, 이후인가? (2) 이 선지자는 임박한 침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어느 이방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스바냐가 사역한 시대

   이 책은 율법책의 발견과 관련된 개혁 조치들(왕하 22-23장)에 대해서 아무런 뚜렷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이 점과 더불어 대중적인 종교의 남용 및 저열한 상태에 대한 이 책의 내용(1:4-6,8-9,12; 3:1-3,7)은 대부분의 주석가들로 하여금 스바냐의 사역이 주전 621년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알의 남아 있는 것”(1:4)이란 언급은 바알 신앙이 이미 압제를 당하고 있었으며, 개혁 조치들이 이미 취해지고 있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일 수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요시야의 개혁이 621년 이전에는 취해지지 않았었다는 것 자체가 확실하지 않다. 열왕기는 개혁이 성전에서의 율법책의 발견과 더불어 중심집단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에 먼저 취해지고 나서 주변 지파들의 지경으로 이행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개혁을 연대기적인 순서로 기술하고 있다.

   그 결과 열왕기 속에서의 요시야 18년(주전 621년-왕하 22:3//대하 34:8) 이후의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는 많은 사항들이 사실은 요시야가 12년, 즉 그가 20세에 이르러서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상태가 된 해인 그의 치세 제 12년(주전 627년-대하 34:2-7)에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 왕의 공식적인 개혁 활동들과 부자 및 일반 민중 가운데서의 죄악 사이를 구분해 줄 필요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경우 이 책에 공공연히 비난받은 죄들을 가지고 스바냐가 요시야의 개혁 이전에 활동했는지 이전에 활동했는지를 결정하는 확정적 증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개혁이 대중적인 종교의 외향적 성격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이것이 모든 사업적․종교적 죄악들을 다 제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이 최종적인 분석에 따를 경우 스바냐의 보다 정확한 배경을 파악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침략자는 누구인가?

   이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져다 줄 이방 나라의 임박한 침략을 예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4,10-13; 2:1; 3:1-4). 학자들은 이 선지자가 예견한 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들을 갖고 있다.

   1. 많은 학자들(예를 들어 Smith, 123)은 예견된 적이 앗시리아라고 주장한다. 유다는 7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앗시리아의 위성 국가였으며, 북 왕국이 겪었던 앗시리아에 의한 병합 및 그에 병행된 시민들의 유배는 유다에게도 항상 위협거리였다. 그러나 앗수르바니팔의 통치 중엽(주전 669-627년)에 앗시리아는 급속히 쇠퇴했다. 그리고 627년 무렵에는 앗시리아의 힘은 분쇄되었으며, 앗시리아는 유다에게 별로 위협거리가 못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대상으로 니느웨(2:13-15)가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이 꼭 앗시리아가 여전히 유다에게 위협거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Kapelrud, 122와 비교하라). 오히려 이와 반대는 이 선지자는 앗시리아의 세력이 이미 줄어든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15). 비록 스바냐의 사역이 요시야의 개혁 이전에 이루어진 것을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앗시리아가 유다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2. 스키티아인들(the Scythians)은 러시아의 남부 스텝 지방, 즉 주로 북해의 북쪽 지역에 거주하던 유목민 집단이었다. 헤로도투스(Herodotus, 1:105)는 스키티아인들이 프삼메티쿠스 1세(Psammetichus I, 주전 664-610년)의 치세 때 아스글론(Ashkelon)이란 블레셋의 도시와 이집트에 침략을 감행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침략은 633년에서 61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Yamauchi, 84). 학자들은 이 침략이 이방의 공격에 대한 스바냐의 예상과 북방으로부터 오는 적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렘 4-6,8-9장)의 배경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해 왔다. 많은 학자들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는데, 이제는 점점 더 많은 증거들이 이 스키티아인들의 침략이 실제로 있었던 것에 대해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하지만 헤로도투스가 스키티아인들의 침략에 대해서 기록한 것은 간략하며, 해변가의 국제적인 간선도로(바닷길, Via Maris)를 따라 위치한 장소들에 국한되어서 유다에게 주는 직접적인 영향은 거의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스키티아인들과 관련된 독특한 형태의 화살촉은 주전 6,7세기의 사마리아, 라기스,암만(Amman)에서 상당수 발견되었다(Yamauchi, 87). 이 화살촉들은 스키티아인들의 침략군이 실제로 이 지역에 왔었음을 말해 줄 수도 있고, 혹은 나중의 바빌로니아인들의 침략 때에 스키티아인 용병 부대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말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 무기 무역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군사 기술이 폭넓게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스키티아인들에게서 나온 기술이 꼭 그들 가운데서만 사용된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3. 스바냐는 주변 국가들(2:4-12),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앗시리아(2:13-15) 자체에 영향을 미칠 “여호와의 날”의 재앙에 대해서 예견하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거주민들의 국외추방을 예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그들 중의 남은 자들의 생존과 그들의 모임도 더불어 예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3:10-20). 이러한 넓은 범위의 재난은 스키티아인들에 의한 침략을 넘어서는 것 같다. 그리고 만약 앗시리아가 그 재난의 대상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그 위협은 앗시리아 자체에서 나온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스바냐가 예견하고 있는 위험의 원천으로 유일하게 남은 후보는 바벨론이다. 열왕기의 저자는 바벨론의 미래의 침입이 이미 요시야의 시대에 예상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왕하 22:15-20). 그러나 바벨론은 요시아의 사망(주전 609년) 당시에는 겨우 힘을 회복하기 시작하는 상태였으며, 바빌로니아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에 침략을 시작한 것은 겨우 갈그미스 전투(604년) 이후 였다. 그러므로 선지자적인 통찰력이나 선지자의 예지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이 책을 요시아 시대의 것(1:1)으로 보는 입장을 거부하거나6) 바벨론 포로 시대와 회복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부분들이 본문에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문학적인 분석


문학 형식

    스바냐는 이스라엘의 풍부한 문학적 유산에 기여한다. 책은 주로 시로 되어 있으며, 모든 피조물과(1:2,3) 유다에(1:4-9) 대한 극적인 심판 신탁으로 시작된다.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을 전쟁과 신의 현현과 심판 상징으로 생생하게 전개시킨다(1:14-18). 그는 우주적인 메시지와(1:2,3 ; 2:4-15 ; 3:6-8) 유다에 대한 특수한 심판을(1:4-6 ; 3:1-4) 결합한다. 문체는 직접적이며, 대구, 재담, 반복, 운, 은유 등 시적인 기교들을 포함한다. 예언말의 형식들은 예언 유산의 독창적인 사용이나 혹은 그것을 약간 확대 설명하였음을 보여준다. 스바냐는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구조

   우리는 스바냐서를 다음과 같이 개관할 수 있다:

      표제(1:1)

   Ⅰ. 유다에 대한 신탁(1:2-2:3)

       A. 우주적인 심판(1:2-3)

       B. 여호와의 희생제사(1:4-9)

       C. 예루살렘의 심판(1:10-13)

       D. 여호와의 날(1:14-2:3)

   Ⅱ. 열방들에 대한 신탁(2:4-3:8)

       A. 블레셋(2:4-7)

       B. 모압과 암몬(2:8-11)

       C. 구스(2:12)

       D. 앗시리아(2:13-15)

       E. 예루살렘(3:1-7)

       F. 우주적인 심판(3:8)

   Ⅲ. 구원의 신탁(3:9-20)

       A. 온 세상의 경배(3:9-10)

       B. 유다의 축복과 회복(3:11-20)


   전통적인 비평학계는 원래의 진정한 이 선지자의 말들을 후대의 삽입부분이나 해설을 위한 첨가부분으로부터 구분해내는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후대의 부분들을 구분해내는데 사용된 기준들은 개별적인 학자마다 다르므로 그러한 방법의 결과들은 일관성이 없었다. 3:14-20에 들어 있는 구원의 신탁은 보통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간주되어졌다. 또 어떤 학자들은 2:7-9a,10-11,15; 3:1-4등이나 기타 작은 부분들을 잘라내었다. 랑고르(Langohr 1976)는 이러한 연구의 역사를 개관하고, 이러한 접근방법의 최근의 예를 제공해 주었다. 이처럼 일부 본문들을 후대의 것으로 분리해내는 중요한 이유들로는 3:4-20에 포로기 이후 시대의 시각이 들어있다는 점, 에스겔서나 이사야서의 뒷 부분과 비슷한 언어와 개념들이 나온다는 점, 그리고 묵시문헌과 비슷한 종말론적인 기대가 등장한다는 점 등이다(Childs, 458). 차일즈(Childs, 461)는 이러한 이차적인 삽입부분들이 정경화 과정의 본보기들이며, 이 과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후 세대들이 스바냐의 말들을 자신들의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서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접근방법들은 이 책의 논리적이고 질서정연한 사상적 흐름에 주목하였으며, 스바냐서가 주도면밀하게 구성된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선지자는 보편적인 심판(1:2-3; 3:8)을 선언했으며, 그것이 유다(1:4-2:3; 3:1-7)와 열방들(2:4-15)에 미치는 결과들을 상술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보편적인 축복과 그것이 유다 및 열방들에 미치는 결과들을 선포하였다(3:9-20). 볼(Ball 1987)은 이 책이 2:1-7을 수사(修辭)적으로 확장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통일된 책이라고 보았으며, 이 책이 짜임새가 있음을 강조했다. 하우스(House 1988)는 일인칭으로 된 하나님의 연설과 3인칭으로 된 선지자의 연설이 교대로 등장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으며, 이 책을 예언적인 희곡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장과 막으로 나누었다. 비록 그의 최종적인 분석에 있어서 확신을 주지 못했지만 하우스는 이 책에 문학적 접근방법을 적용함으로써 많은 흥미로운 수사학적 특징들을 부각시켜 주었다.

   많은 학자들은 스바냐서의 구조가 다른 선지자들에게 발견되어지는 구조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강 이야기해서 이사야서, 에스겔서, 70인경의 예레미아서, 그리고 스바냐서는 모두 (1) 유다의 직접적인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일련의 신탁들로 시작하며, (2) 그 다음에 대한 신탁으로 이어지며, (3) 미래의 종말론적인 축복에 대한 신탁들로 끝을 맺는다.


신학적인 메시지


   심판이라는 주제와 은혜와 자비라는 주제가 이 팩의 주제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주로 여호와의 날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들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주로 남은 자와 회복이라는 모티브를 통해서 기술되었다.


목적과 메시지

    스바냐서의 목적은 백성들의 악함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함으로써 그들(유다)을 돌이키기 위한 것이다. 그들을 형벌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더불어 그들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선언되었다. 스바냐의 메시지는 여호와의 날에 초점이 있는데, 그는 그것이 아주 임박했다고 경고한다. 유다에 대한 그의 고발에는 부패한 관원들과 하나님에 대한 지속적인 반역 행위를 지적하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이것은 스바냐서가 영적, 종교적인 범주의 예언임을 말해준다).

    유다의 대한 심판은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심판의 형태가 어떠할 지에 대하여 스바냐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함락된다든지,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든지, 바벨론이 침공할 것이라든지 하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보편적인 신앙이 이 책의 특징인데, 그것은 그 당시의 청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체험하고 있는 정치적 대 혼란이 먼 훗날까지, 또는 보다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임을 말해준다. 2:1-3에 나타난 교훈은 그 땅에 사는 겸손한 자들에게 전해진 메시지로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구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긍휼 속에 남은 전체 백성들이 임할 심판으로부터 구출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3:9-20에 반영된 회복의 선언은 앞의 고발 부분과 마찬가지로 그 성격상 가장 영적, 종교적 특성을 띠고 있다. 정결하게 된 남은 백성들은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요 구원자가 될 것이다(3:15). “다시 모은다”는 3:20의 언급은 유일하게 ‘포로’ 경험을 암시해 주는 부분이다.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은 선지서들에 자주 나오는 주제이다. ‘여호와의 날’ 이라는 표현은 현재의 세계가 장차 하나님의 계획(새로운 질서)에 의해 대치되는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선지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선지 문학에 나타난 대부분의 예언들이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상황으로의 이동을 묘사한다. 선지자들의 예언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그 새로운 상태가 하나님의 순간적인 거대한 개입에 의해 성취될 것이 아니라(마지막 단계에서는 그러한 급격한 현상이 일어났지만) 그 마지막 결과를 향하여 치달아 가는 위험성을 가지는 그들의 범죄를 다루는 과정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이다.

    스바냐는 아모스서(암 5:18-20; 8:3-13)와 이사야서(사 2:6-22)에 이미 사용된 비슷한 개념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명예를 지키시고, 열방들(2:4-15)이나 이스라엘(1:14-2:3)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는 날이다. 피조계는 무너지고, 우주는 동요하며 원시의 암흑으로 돌아간다(1:2-3,15-18; 3:6-8). 즉 우주는 그 생명이 없고 형체가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다(1:3). 야웨는 악과 대항해서 거룩한 전쟁을 치르는 이 위대한 날에 전사로서 오신다(1:14-16). 그의 임재는 불과 같은 신현 현상(theophany)에 의해 신호된다. 스바냐에게 있어서는 이 위대한 날은 역사 속에서 기대되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이러한 역사적 행위는 또한 죄가 이 땅으로부터 제하여지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그림자였다(1:3).

    스바냐는 가장 광범위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여호와의 날에 대한 예언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 개념을 기초하여 중세기 찬송 Dies Irae("진노의 날“)가 생겨났다. 여호와의 날(yom Yahweh)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사에 여호와의 개입을 의미한다. 그의 오심(신의 현현)은 전사, 재판관, 위대한 왕의 개념적 상징으로 묘사된다.

    둘째,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피조물에 이르게 한다(1:2,3). 그것은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에 비교될 수 있으나 그것보다 더욱 광범위하다.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과 동물과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에 임할 때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존대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홍수 심판과 또 다른 점은 그것이 불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3:8 ; 참고, 벧후 3:10).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는 모든 것에 대해 표현될 것이고, 그로써 그는 그의 영원한 왕국을 확립할 것이다(1:15; 참고, 1:18; 계 16:1).

    셋째, 여호와의 날은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이다. 비록 여호와의 심판 행위들이 구속사 전체에 걸쳐 일어날지라도, 각각의 행위는 악과 타락과 죄를 행하는 모든 자들을 완전히 철저하게 심판하고 이 땅에서 멸절할 최후 심판의(1:3) 그림자가 된 것이다.

    넷째, 여호와의 날에 모든 피조물은 기꺼이든 그렇지 않든, 그의 주권에 복종해야 한다. “잠잠하라”는 외침은 여호와가 심판자임을 인정하고 그의 심판을 예비하는 삶을 살도록 권하는 선지자의 권면이다 :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1:7; 참고, 합 2:20). 역사상의 여호와의 날은 최후 심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언제나 가깝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1:14).

    다섯째, 여호와의 날은 부자와 권세가들을 차별 대우하지 않는다. 종교적인 사람들도 역시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자들과 겸손한 자들을 구별한다. 한편으로,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 인간은 사회를 지탱하고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모든 구조로부터 완전히 유기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생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자신들을 의탁하고 그와 그의 왕국을 찾는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둔 모든 사람들이다(2:3 ; 참고, 11:3:9).  여호와의 날은 의로운 자들과 악한 자들 사이를 공식적으로 구별한다 ; 즉 그들은 그의 왕국을 소유할 자들과 그렇지 못할 자들이다. 그것은 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삶을 정결케 함으로써 스스로를 준비하는 정화(카타르시스)의 과정이다(3:12,13).

    여섯째, 여호와의 날은 경건한 자들의 신원과 영화와 완전한 구속의 날을 의미한다(3:14-20). 그 왕국이 그들의 것이며, 하나님의 왕권의 임재를 향유하는 것이 그들의 것이다(3:15,17).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약속의 성취를 충만히 누릴 것이다 :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3:13)

   

구원의 날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운 기대와 병행해서 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라는 주제가 또한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3:12-13). 남은 자 모티브는 성경의 많은 책들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어느 한 집단이 보통 죄에 대한 심판 때문에 일어나는 어떤 재앙을 겪을 때 그 재앙을 통해서 살아남아 존속하는 인류 혹은 하나님의 백성의 핵이 되는 자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라고 불려진다(Dillard 1988을 보라).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의 존속은 하나님의 약속을 새롭게 상속받는 이 정화되고 거룩한 남은 자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살아남을 수 있을 가능성을 열어놓았다(2:3). 스바냐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이 나라를 정화시켜서 죄가 없는 남은 자들이 나타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3:13). 그리고 이 남은 자들이 열방들 가운데서부터 다시 모여서 본토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2:7; 3:19-20).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지금 당장 주어진 심판에 의해서 좌절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남은 자들 속에서 실현되어지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1:12-13; 2:10,15).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은 보호를 받을 것이다(3:12).


우주적인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는 중동의 한 자락의 땅에 대해서만 주권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시며, 자신의 거룩성과 그들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신다(2:4-15). 그가 이 땅을 창조했으므로 그의 심판은 그 전체에 걸쳐 내려진다(1:2-3). 우주를 통치하시는 그는 항상 모든 열방에 대해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계신다(창 12:3; 22:18). 자신의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 열방들을 소집하시는 그 분(스 3:8)은 또한 그들이 자신의 은혜를 받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모으신다(9절). 모든 이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신약으로서의 접근


   기독교 독자들은 스바냐서에 나오는 많은 비유적 표현들과 모티프들이 신약에서도 역시 사용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스바냐는 임박한 역사적인 재난과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했다. 여호와의 날에 있었던 바벨론에 의한 정복 및 유배는 말세에 전 우주적 규모로 이루어질 거대하고 끔찍한 그 날의 전조였다. 바울은 여호와의 날, 그리스도의 날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으며(롬2:16; 고전 1:8; 빌 1:6,10; 2:16; 딤후 4:8).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나타나셔서 최종적으로 자신을 옹호하실 날을 고대하고 있다. 요한은 용사이신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오시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계 19:11-6). 스바냐는 하나님 자신이 드릴 끔찍한 희생제사(1:7)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요한은 여호와의 날을 기술하면서 같은 이미지를 사용했다(계 19:17-18; 참고, 겔 39:18-20).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냐는 모든 열방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할 날을 고대했다(3:9-10).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교회(갈 3:8-9,14,26-29)가 볼 때에는 이것은 이미 현재에 실현된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역시 이 세상이 진정한 왕의 다스리심을 인정할 때가 올 것임을 알고 소망하면서 살고 있다(빌 2:9-11).      

   



학개서

  

   우리는 이 선지서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제외하고는 선지자 학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가 스가랴와 같은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선포했다는 점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스가랴서에 대한 장의 655페이지에 있는 연대표를 보라. 그가 단순히 “선지자”라고만 언급되고,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제시되어 있는 않다는 사실은 그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스 5:1; 6:4). 스가랴는 소위 소선지서들 중에서 가장 긴 책들 중의 하나로서 보다 많은 주목을 받은 반면에 학개서는 구약에서 가장 짧은 책들 중의 하나이다.

   학개란 이름은 “축제, 절기”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점은 그가 이스라엘의 절기들 중의 하나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라틴어 이름인 페스투스(Festus)나 헬라어 이름인 힐러리(Hilary)의 경우와 비교해 보라. 학기(창 46:16; 민 26:15)나 학깃(삼하 3:4)도 비슷한 종류의 이름들이다. 또한 삽브대(Shabbethai, 스 10:15,“안식일에 태어남”이란 뜻을 갖고 있는 듯)와 같은 이름을 고려해 보라.

   제롬의 학개서 주석에 따르면, 이 선지자는 또한 동시대인의 스가랴와 마찬가지로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이 전승은 증명될 수는 없다. 70인경과 페쉬타 역본(the Peshitta)의 일부 시편의 표제들은 여러 개의 시편을 그의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배경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주전 539년 - 대하 36:23; 스 1:2-4)가 선포된 이후에 우리는 바벨론의 유대인들이 대거 귀환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포로 및 유형(流刑)의 생활로부터 “귀환”하기를 원치 않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스라엘 포로들은 예레미야의 충고를 따라서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었으며,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했으며(렘 29:5-6), 바벨론의 번영과 함께 번영했다(7절).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로 이제 거의 오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 포로시기 중에 태어난 세대는 오직 바벨론만을 고향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중 대부분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자신들이 포로 생활중에 쌓아 올린 재정적인 안정과 위안을 선택했다.

   귀환을 하기로 결정한 포로들은 거의 오만 명 정도였다(스 2:64; 느 7:66). 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에 직면했다. (1) 땅은 경작되어지지 않았으며, 조상들의 집은 수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해야 할 일들은 아주 많았다. (2) 그 땅에 남아 있던 하층민 유대인들(렘 52:15-16)은 그들이 버리고 간 소유들을 취했다(겔 11:3,15). 귀환자들과 그 땅에 남아 있었던 자들간의 권리의 문제들을 조정하는 것을 포함해서 복잡한 법적 절차들이 야기되었다. 귀환자들과 남은 자들 사이에 긴장이 발생했는데, 이 긴장은 한 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다(느 5:6-8). (3) 예루살렘 및 성전 재건 역시 이웃 민족들 및 그 지역을 담당하던 페르시아 관료들로부터 외적인 반대에 직면했다(스 4:1-5; 5:3-5). 성전 뜰의 제단을 복구하고, 성전을 위한 기초를 놓은 후에는 별로 일이 진척되어지지 못했다(스 3:2-10). (4) 성전 건설은 시작하면서부터 낙심되는 말들을 들었으며, 원래의 성전을 본 적이 있던 사람들이 첫째의 성전의 광휘와 비교해서 듣기 좋지 못한 말들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스 3:12-13; 학 2:3; 슥 4:10).

   이러저러한 난점들을 고려해  볼 때 귀환자들이 성전 재건에 별로 우선권을 두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자신들의 집들을 재건하고 농경지를 복구하는데 쏟아부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학 1:3-11). 세월이 흘러 마침내 주전 520년에 하나님께서는 학개와 스가랴란 선지자를 세우셨는데, 이들은 백성들이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고 성전을 건설할 것을 촉구했다. 백성들은 이 두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에 순종해서 516년에 성전을 완성시켰다(스 6:15).

   비록 에스겔의 예언들이 이 짧은 책보다는 많은 수의 연대들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학개서는 모든 선지서들중에서 연대에 대한 언급들의 밀도에 있어서는 가장 높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신탁들은 각각 그 선포된 연대를 언급하고 있다(학 1:1; 2:1,10,20; 참고, 1:15). 이 모든 연대는 다리우스 1세(Darius I, 주전 522-486년) 제 2 년의 사 개월이 채 안되는 기간에 포함되어 있다. 고레스는 530년에 전장에서 죽었으며, 캄비세스(Cambyses, 530-522년)가 그의 뒤를 이었다. 캄비세스는 보좌에 오르면서 왕국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곤고히 하고 잠재적인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자기 형제 바르디야(Bardiya)를 암살했다. 캄비세스는 자살을 한 것으로 보이며, 왕의 측근 중에 있던 다리우스가 일어나서 왕위를 계승했다. 다리우스가 왕위에 등극할 때 페르시아 제국의 각처에서 반란들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반란은 바르디야라고 자처하는 한 인물이 주도한 것이었다. 다리우스는 이 522년 9월말에 이 거짓 바르디야를 분쇄했다. 다리우스가 제국의 다른 곳들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언제 진정시켰는가 하는 것은 확실하지가 않다. 많은 학자들은 학개와 스가랴가 말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다리우스 치세 초기의 페르시아 제국에서의 이러한 소요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해 왔다(예를 들어 학 2:6-7; 슥 1:11-15; 2:7-9). 이방나라들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고 다윗 왕조를 회복하겠다는 희망들을 자극시킨 것은 바로 이 페르시아 제국에서의 정국의 불안정 때문일지도 모른다(학 2:20-23). 재건 공동체는 이사야가 선포한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소망들과 함께 살았다(예를 들어 40:9-10; 41:11-16; 43:1-7; 44:1-5,21-23). 고레스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자로 예정되어 있었다(사 44:28-45:1-4,13).

   이 책에 알려진 그의 네 달 동안의 대중 사역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학개의 운명에 대해서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 만약 일부 학자들이 2:3에서 추론하는 것처럼 그가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예루살렘 시민들 중의 한 명이라면 그가 사역을 할 당시에는 이미 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성전재건이 시작되고 그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이 다한 후에 그는 곧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문학적인 분석


문학 형식

    책은 기원전 520년 8월 29일에서 12월 18일 사이에 주어진 네 편의 신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체는 시적 산문체이다. 메시지는 단도직입적인 권면과 교훈과 격려로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미래 행위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다. 예언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1)어구와(“너희는[자기의 소위를]살펴볼지니라,” 1:5, 7;2:15, 18:“내가…진동시킬 것이요,” 2:6,21) 수신인들에 대한 반복(1:12,14 ; 2:2-4), (2)수사적 장치(1:4,5,9 ; 2:11-13), 교차 대구(1:4,9,10 ; 2:23), 재담(hareb, “황무”, 1:4,9 ; hareb, “한재”, 1:11). 선지자 자신에 대한 3인칭 지칭은 수사적 기교거나 혹은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의 편집 활동을 지적하는 것일 수 있다. 학개는 메신저 공식(“나 여호와가 이르노라[말하노라],” 2:4,7,9,14,23)을 독창적으로 사용하였다.

    서언-“…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1:1 ; 참고, 2:20)-은 신탁을 해석하는 틀을 이룬다. 이 틀은 예언 제도와 (학개)다윗 왕조와(스룹바벨)성전과 제사장직(여호수아)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개요

    (1) 첫 번째 메시지 : 언약의 회복을 촉구하는 학개

       ① 성전 재건축을 촉구함(1:1-11)

       ② 남은 백성들의 반응(1:12-15)

    (2) 두 번째 메시지: 회복에 대한 약속(2:1-9)

    (3) 세 번째 메시지: ‘거룩’을 촉구함(2:10-19)

    (4) 네 번째 메시지: 스룹바벨-다윗 자손의 종이요 ‘홀’(2:20-23)


구조와 조직

    학개의 네 가지 메시지는 각각 다리우스 왕이 페르시아를 다스리던 둘째 해의 정확한 날자와 달을 명기하고 있다. 이것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서 사용되었던 관습이다(렘 1:2-3; 겔 1:1).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포로기의 선지자들은 유다나 이스라엘 왕의 통치를 기준으로 하여 자기들의 예언 시기를 기록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바벨론 포로기를 기준으로 했다. 그 기간은 포로됨의 저주 기간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언약의 시계”의 구실을 했다(렘 52:31; 겔 20:1)

    포로기 이후의 선지자인 학개와 스가랴는 페르시아 통치 시대의 그들의 예언 연대를 정확하게 기록했는데,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앞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하여 고레스 왕과 페르시아의 중요성을 예견했기 때문이다(사 45:1-13). 더욱이 학개나 스가랴는-에스겔의 성전 환상에 비추어 본다면(40-48)-성전의 재건축을 오랫동안 고대했던 메시아 시대의 모퉁이 돌과 같은 중요한 것임을 인식했다. 따라서 각 예언에 명기된 정확한 연대는 다윗 왕에 의해 통합된 왕권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겔 37:15-28).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계속적인 강조-즉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든가 기타 이와 비슷한 표현들-가 무려 29번이나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메시지의 비중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시간적인 급박성을 강조해 주는 구실을 한다.

    학개서의 언어와 주제들을 살펴보면, 그것은 교차법적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단어순서 및 아이디어를 의도적으로 거꾸로 한 기교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메시지는 모두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1:2; 2:11)는 구절로 시작하여 현재의 흉작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저주와 경고의 구절로 결론짓고 있다. 두 번째와 네 번째 메시지는 모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로 끝난다(2:9, 23). 그리고 피조물의 대 변혁이 있을 것을 약속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과 회복을 예언한다.

    학개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당한 문학적 기법을 담고 있다.

      . 다양한 어휘법의 시용(9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음’을 표현한다)

      . 교차법을 사용하여 표현을 강조하고 있음(1:4, 9, 10; 2:23)

      . 언어 유희를 보임

      . 명령법을 계속 사용함(즉 1:5, 7; 2:15, 18에서 “....생각해 보라”)

      . 네 번이 메시지 중 세 번 모두 수사학적인 질문을 사용하고 있음(1:4; 2:3, 19)


신학적인 메시지


목적과 메시지

    학개는 외로운 사역을 행한 선지자였다.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이미 칠 십 년 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된 성전 재건을 격려하는 일이었다. 이 선지자의 네 번에 걸친 메시지는 그러한 임무를 성취하기 위한 내용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언약의 유산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 그리고 그 특권과 약속 등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전했다.

   학개서는 다리우스 1세 제 2년이라는 연대가 주어진 네 개의 신탁으로 구성되어 있다(Hystaspes). 천문 현상에 대한 관찰사항들을 담고 있는 고고학적 기록들은 우리가 이 고대의 연대들을 우리의 연대 계산법으로 상당히 정확하게 환산할 수 있도록 해준다.

   대부분의 다른 선지서들은 선지자들의 설교들과 신탁들을 집대성해 놓은 것이다. 반면에 학개서는 직접적으로 설파된 신탁들이 산문으로 된 네러티브 틀(1:1,3,12,15; 2:1,10,20)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마치 학개의 말들과 그 말들이 천중에게 끼친 효과가 대한 보고서인양 보인다(Verhoef, 9). 네러티브 틀 속에서 학개는 삼인칭으로 언급 되어있는 것에 근거해서 많은 학자들은 그가 이 책의 저자가 아니라 어떤 편집자가 그의 말들을 이러한 네러티브의 틀 속에 집어넣었다고 결론 내렸다. 루돌프(Rudolph)는 이 편집자의 정체가 성전 재건과 관련해서 학개의 역할을 스가랴의 역할보다 높이 드러내고자 한 학개의 친구나 제자라고 주장했다. 아크로이드(Ackroyd)와 보이켄(Beuken)은 이 편집자가 한 두 해 후에 살았었으며, 역대기 기자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학개서와 역대기간의 유사성은 학개 및 스가랴서가 먼저 존재해서 역대기의 편찬자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학개 자신이 이 책의 저자이며, 자신의 기록의 객관성과 역사성을 재고하기 위해서나 혹은 자신의 신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삼인칭 네러티브로 된 틀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신탁(1:1-11; 주전 520년 8월 29일) 은 간략한 논쟁과 더불어 심판의 말씀을 담고 있다. 이 신탁은 그 달의 첫째날(고대의 역법에 따르면)에 전달되었는데, 신년 축제를 자내기 위해 모인 대중들에게 선포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민 28:11; 10:10; 시 81:3[MT 4]; 스 3:5). 성전의 폐허가 있는 장소에 백성들과 그 지도자들이 모인 이 기회가 이 선지자가 취임 신탁을 하기에는 완벽한 배경을 제공해 준 듯하다. 성전에 대한 공사를 연기한 것을 합리화하기는 상당히 쉬웠을 것이다(1:2). 귀환자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고, 곡물을 경작하는 등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흉작, 물가 상승, 가뭄 등의 일을 겪었다. 그들의 노력은 헛된 듯이 보였다. 학개는 이러한 헛수고가 그들이 성전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기분이 좋지 않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계신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이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대신에 “이 백성”이라고 부르신다(1;2). 흉작(신 28:38-40), 식량의 부족(48절), 가뭄(23-24절), 헛된 수고(20절) 등은 다 언약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 저주였다. 보통 선지자들의 말에 이스라엘은 무관심, 조롱, 적대감 등으로 반응을 했지만 여기에서는 그와는 달리 이 선지자가 말한 것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열정적으로 반응한다(1:12-15). 일은 이십삼 일 후에 시작되었다(1:15; 520년 9월 21일).

   학개의 두 번째 신탁(2:1-9; 520년 10월 17일)은 성전에 대한 작업이 시작된 지 한달이 채 못 되어 주어졌다. 일곱번째 달은 바로 티쉬리 월(Tishri, 또한 에타민 월〔Ethamin〕이라고도 불림)인데, 이 달에는 장막절이 15일부터 7일동안 치러졌다(레 23:33-43; 민 29:12-39; 신 16:13-15; 겔 45:24). 그러므로 이 달 21일이라는 것은 이 절기의 마지막 날을 가르키는 말일 것이다(Verhoef 1988, 263). "이 전(殿)“ 이라는 언급(2:3) 역시 이 신탁이 사람들이 성전의 경내에 모였을 때 주어진 것임을 증명해준다. 솔로몬의 성전이 장막절에 봉헌(대하 7:8-10; 왕상 8:2)되어졌으므로 바로 이 장막절에 이전 성전(2:3)과의 비교를 언급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 일꾼들이 일을 시작한지 삼 주 밖에 안 지났기 때문에 두번째 성전이 첫번째 성전보다 훨씬 더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 첫번째 성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그 당시 일흔 살 정도 되었을 것이다. 선지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주고, 이 두 번째 성전의 영광이 첫 번째 성전의 영광보다 뛰어날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다(2:6-9).

   학개의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신탁(2:10-19,20-23)은 같은 날(주전 520년 12월 18일)에 주어졌는데, 이 날은 성전에 대한 작업이 시작된지 세 달째 되는 날이었다(1:15). 세 번째 신탁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 토라에 대한 질문(2:10-14; 슥 7:1-3의 말씀들을 보라.): 야웨와 이 선지자간의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다. (2) 격려의 메시지(2:15-19). 이 법률적인 질문에 대한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거룩한 것이 전염성은 가진 것이 아니라 - 단지 성전을 짓는 것이 이 백성을 거룩하게 하지는 않는다 - 바로 제의적인 부정 혹은 더러움이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전도 이 백성의 부정함에 의해 더럽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이 하나님의 인정과 포용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성전이 어떤 마술적인 부적은 아니다. 아마도 일이 시작된 이래 세 달 동안 이 백성은 약간 낙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를 축복하실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12월은 농산물이 자라는 기간인데, 선지자는 이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시간에 성전을 짓는다고 해서 소산물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풍년을 맞게 될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참고, 1:5-11).

   학개의 네 번째 신탁(2:20-23)은 유다의 총독이자 여호야긴의 계통을 따르는 다윗의 자손인 스룹바벨에게 주어졌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전에 여호와긴을 빼어서 버릴 인장 반지라고 말씀하셨다(렘 22:24-25). 학개서에서 하나님은 동일한 상징을 사용하시긴 하시지만 그것을 뒤집어서 이번에는 여호와긴의 한 후손이 하나님의 손에 들리워진 인장 반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록 학개가 스가랴 및 동시대인들은 당대에 이방 나라들의 통치가 무너지고 다윗의 통치가 회복될 것을 기대했겠지만 스룹바벨은 그러한 다윗 계보의 왕이 아니었으며, 단지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흔드실 그 종말의 날을 가리키는 자였다(2:6-7, 21).


성전

    모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실 장솔르 택할 것을 말했다(신 14:23-25; 16:2, 11) 실로는 열두 지파 시대에 회막이 머무름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이 머무는 중간적 성격의 장소였다(수 18:1). 궁극적으로 다윗은 예루살렘 근처의 아라우나 타작 마당을 구입함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영원한 장소를 획득했는데,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설할 계획이었다(삼하 24:18-25; 대상 21:18-30).

    나단은  다윗의 성전 건축 특권을 부정했지만 (삼하 7:1-17)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재료를 모았으며, 그 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대상 22:1-16). 다윗이 아들 솔로몬은 실질적으로 성전 건축을 위한 청사진을 설계하고 건축을 위한 과업을 수행했다( 왕상 5-6).

    성전 건축은 칠 년이 걸렸다(왕상 6:37-38). 성전 낙성식에서 솔로몬이 헌당의 기도를 드릴 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구름의 형상으로 그 성전에 임하셨다(왕상 8장, 953년경).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상징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관계를 생생하게 목격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 그것이 유대인 사회에 눈에 보이게 실재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언약에 즉각 순종하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 행위를 하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했다.

    예레미야 시대에(627년-582년) 성전은 하나의 물신숭배나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과 같은 정도로 전락되었다.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어느 정도의 교제만 있어도 보호와 안보의 울타리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했다. 예레미야는 분개하여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저주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파괴될 것을 예언했다(렘 7-10; 특히 7:1-11). 후에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을 떠나는 환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성전 분향소에서 저지른 각종 음행과 가증스러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유다를 싫어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591년: 겔 8,10). 예레미야가 선포한 최종 멸망은 587년(B. C)에 성취되었는데, 이 때 느부갓네살 왕과 바벨론 군대가 성전을 약탈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했다(왕하 25:8-17).

    성전을 재건축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 이스라엘에 돌아오게 하는 학개의 메시지는 예레미야의 예언과 모순되지 않는다. 학개는 성전을 건축하는 데 있어서 맹목적인 신앙을 갖는 대신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할 것을 백성들에게 촉구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을 통한 경외와 겸손, 그리고 거짓 없는 행동이 성전 건축에 수반되어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두 번째 성전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언약적 임재를 다시 보여 주며, 히브리 백성들이 열국 가운데 하나님의 선민임을 다시 확인 시켜 주었다.


성령

    공동체가 선지자의 도전에 반응한 태도는 참신한 것이었다. 합리주의와 자기 정당화와 자기 방식을 주장하는 태도는 사라졌다. 대신, 그들은 행동으로 그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하나님의 영이 지도자들과 남은 자들의 마음에 역사 하였음이 분명하다(1:14).

    성령의 임재는 이스라엘에서의 하나님의 왕국의 계속성을 확증하였다. 모세와 장로들을 지도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진 선지자들을 파송한 하나님의 영이 “모든 남은 자” 가운데 있었다(1:14; 참고, 민 11:16,17,25). 지도자들과 남은 자들의 경건한 반응은 백성의 영적 변화와(1:14) 성령의 역사를 증언해 준다. 성령은 그들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며, 축복을 보증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회복 속에서 창조 세계가 완성되기를 갈구하는 마음을 심어 주는 일에 분명히 역사하였다. 종말론적인 성령이 보편화되는(democratization) 시대가 실현되었다(1:13; 2:4,5; 참고, 슥 4:6).

    선지자는 포로 후기 세대에게 새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창조, 아브라함, 모세, 다윗 언약의 갱신-이 성취될 것을 확실히 밝혔다. 성령과 메시아 시대에 대한 소망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책임 또한 그들의 것이었다, 학개는 새 공동체가 성취와 하나님의 왕국의 임재를 어느 정도 경험할 것을 소망하며 왕국의 멍에를 스스로 짊어지도록 권면함으로써, 언약적 순종과 약속 성취의 상호관계를 명료히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축복과 보호의 혜택을 누리는 반면에, 그 세대는 그것의 최종적, 대단원적 완성-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메시아 시대, 하나님의 왕국-을 앞당길 책임도 지니고 있었다. “새 시대”의 현존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미래 성취사이의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축복을 경험하는 한편 그것의 완성을 기다리고 앞당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그들이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까지 그것을 위해 일 하도록 격려하였다: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노라…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2:4, 5). 회복은 이미 상징으로 현존하기 때문에, 학개는 포로 후기 공동체가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도록 권고하였다.


표징과 실재

    학개는 더 나아가 포로 후기의 성전은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임을 논증하였다. 그는 먼저 노년 세대에게 솔로몬 성전의 이전 영광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2:3).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현재 상징과 그들의 역경(대적, 가난, 등)을 너머 성전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 영광을 볼 것을 호소했다. 학개는 “보배”-열국의 풍성한 전리품-가 영광스런 왕국에 기부될 것을 예언하였다(2:7).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위에 그의 주권을 확립하리란 그의 약속을 확증하였다. 학개는 그것을 바로의 군대를 물리친 하나님의 승리와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2:22; 참고, 출 15:1, 4, 19, 21: 계 15: 3-4)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보물을 탈취한 것과(“만국의 보배”(NIV "the desired of all nations"), 2:7 : 참고, 출12:325, 36) 그의 백성 가운데 있는 그의 나라(2:22: 참고, 출 15:18:계 15:3)를 추억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는 것으로 말하였다(2:6, 7, 21, 22). 만국의 진동은 거룩한 전사가 모든 피조물 위에 그의 주권을 확립할 여호와의 날에 대한 비유적 표현을 시사한다. 출애굽 세대가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하였고, 전리품을 가지고 이집트를 떠났으며, 바로를 물리친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였던 것처럼( 2;22: 출 15:1, 4, 19, 21), 하나님은 구원과 승리와 영광의 약속이 있는 또 다른 출애굽을 말씀하였다.  하나님은 이사야서에 약속된 대로(사 60:5-13). 그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이미 페르시아의 보물들을 사용하였다. (스 6:8), 그러나 때가 이르면 모든 나라가 그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바지 할 것이다(참고, 계 21: 24-26).


다윗 왕조

    하나님은 다윗에게 준 그의 언약을 확증하였다. 그는 모든 적대 세력을 제거하고(2:22), 전쟁 시대를 종식시키며(참고, 사 14;16, 17;  욜 3:1-16; 슥 14:1-15; 계 19:11-16), 다윗에게 준 약속을 새롭게 하고, 그의 왕국을 확립할 것이다. 그는 예레미야를 통해 스룹바벨의 조상을  저주하였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너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렘 22:24, 3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저주를 철회하고 다윗 왕조의 미래에 대한 표징으로 스룹바벨에게서 다윗에게 준 그의 언약을 새롭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저주와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일에 자유하신 하나님은 다윗 왕조가 여호야긴과 스룹바벨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마 1:11-12) 지속될 것을 보장하였다.

    학개의 세대로 보면, 스룹바벨은 그의 백성의 완전한 구속과 메시아 왕국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서명이 되었다(2:23: 참고 슥 4:6-10). 하나님의 왕국과 메시아 왕국의 목표는 동일하다 : 평화와 하나님의 백성의 축복 받음에서 증명되는 하나님의 임재( 2:9, 19; 참고, 민 6:26; 시 72; 사 2:2-4; 11:1- 9; 32:1-8, 15-20).


신약으로의 접근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성소나 제단을 승인하실 때 보통 불이 나타났는데, 이 불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랍비들이 “셰키나 영광”(the Shekhinah glory)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불과 구름 기둥이었다(출 40:34-38; 삿 6:21; 왕상 8:10-11; 18:38; 대상 21:26; 대하 5:13-14; 7:1-3). “영광”이라는 단어는 또한 부와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것을 수도 있었다. 이사야의 기대가 소망(사 66장)을 따라 귀환 공동체는 열방의 부가 예루살렘으로 흘러드는 때를 고대했다. 학개는 2:3,7-9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이 모호함을 활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Wolf 1976).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이 이 두 번째 성전의 건설과 제의를 승인(스 1:6-7; 6:7-10; 7:15-18)해 주기는 했지만 이것은 이방의 부가 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오리라는 선지자의 말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성(겔 43:1-7)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에스겔의 말(겔 43:1-7)에도 불구하고 불과 구름기둥이 이 두 번째 성전에 나타났다는 것에 대한 암시나 주장은 전혀 없다. 또한 비록 유다의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서 어느 정도의 자율을 누리기는 했지만 이방의 통치가 분쇄된 것은 아니었다(2:22).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방의 여러 주민들을 계속해서 섬겨야만 했다.

    고레스의 조서와 성전의 재건, 그리고 다윗 계보의 스룹바벨이 치리를 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왔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 올 일들에 대한 임시적인 단계일 뿐이었다.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tabernacled) 우리가 그 영광을 보게 될 때”(요 1:14) 비로소 가식적인 하나님의 임재가 제 2 성전에 나타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시기 때문이다. 열방의 부는 이방의 현자들(마 2:1-12)의 선물을 통해서, 그리고 공히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살아있는 돌들로 만들어진 새 성전( 고전 3:16-17; 벧전 2:4-10)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온다. 새로운 왕국 ―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초월하며 또 그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왕국 ― 이 다윗의 다른 자손을 통해 임하게 되며, 그는 지금도 다스리시며, 모든 만물을 그 발에 두시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역시 모든 만물의 종국, 즉 모든 것들이 새로워지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휘황찬란한 도성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며, 모든 눈물이 닦여질 바로 그 때를 향한 하나의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계 21장).

    스룹바벨이 선택받은 것은 단지 다윗 계보의 통치가 시작된 것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우주의 천재지변을 미리 형상화하고 있다(2:6-7,21-22). 히브리서 저자는 이 종말적인 시대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히 12:26-29; 참고, 출 19:18; 마 27:51).

  



스가랴서


    스가랴서는 소선지서 중에서 가장 긴 책이다. 이 책은 또한 아마 가장 어려운 책일 것이다. 제롬(Jerome)은 이 책을 히브리 성경에서 “가장 모호한” 책이라고 불렀으며, 이후의 학자들 역시 이 견해를 자주 인용하고 또 대체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책이 가진 난점들 때문에 이 책의 여러 부분의 연대 및 저작권 그리고 개별적인 문단들의 해석과 관련해서 수많은 견해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또한 기독교 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다. 스가랴서 9-14장은 그리스도의 수난 기사(the Passion narratives)에 사용된 구약의 구절들을 가장 많이 담고있다(Lamarche, 8-9). 또한 에스겔서를 제외한 다른 어떤 책보다도 바로 이 책이 계시록의 저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스가랴’(Zechariah)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이며, 이것은 포로기 이후의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메시지의 핵심이다. 스가랴서는 흔한 이름이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에는 이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이 스물 한명 이상이어서(힐튼은 대략 32명이 된다고 말한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예를 들어, 베레갸의 아들 스가랴는 이사야 8:2에 나오는 예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 선지자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1:1), 그는 보다 간단하게 잇도의 아들 스가랴라고 알려져 있는 인물과 동일한 인물인 듯하다(스 5:1; 6:14; 느 12:16). 여기에 “아들”이란 말은 단순히 ‘어느 후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스가랴는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제사장 가문들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가 성전과 관계된 일들을 잘 알고 있고, 또한 거기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잘 설명해 준다(예를 들어 1:16; 3-4장; 6:9-15; 8:9,20-23; 14:16-21). 느헤미야에 의하면, 스가랴의 조부 잇도는 스룹바벨이나 여호수아와 함게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이다(12:4). 다른 곳에서 느헤미야는 스가랴를 제사장 집안인 잇도 가족의 우두머리로 기록한다(12:16) 이것은 스가랴가 레위 족속임을 말해 주며, 또한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사역했음을 보여준다.


역사적 배경


    스가랴서는 바벨론 유배로부터 돌아온 귀환자들의 첫 세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밤의 이상들(night visions)은 다리우스 2년(주전 520/519년)의 것으로 되어있다. 비록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539년에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주었지만 귀환자들은 자신들이 외적인 반대(스 3:8-4:5,24; 5:1-6:22)와 여러 가지 인간적․현실적 난관들(학 1:5-11; 2:15-19; 슥 8:9-13)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작업은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란 두 선지자를 세우셔서 백성들이 성전의 완성에 몰두하도록 박차를 가하시기 전까지는 계속 미루어져 있었다(스 5:1-2).     

    그러나 그들의 활동에 따라 성전에 대한 작업은 곧 재개되어졌으며, 516년에 마침내 공사가 완공되어졌다(스 6:13-15). 학개와 스가랴가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동일한 청중에게 말씀을 선포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선포내용이 공통적인 주제들을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참고, 학 1:5-11; 2:15-19와 슥 8:9-13; 학 2:20-23과 슥 4:6-10). 학개와 스가랴는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띤 포로기 이후의 선지자들이다. 스가랴는 학개보다 젊었으며, 그의 사역은 학개의 사역이 시작된 지 2개월 후에 시작되었다. 학개가 성전 건축을 위해 백성들에게 촉구한 반면, 스가랴는 그 집단에게 회개와 영적인 갱신을 계속 촉구했다. 그의 임무는 성전 건축이 마무리되었을 때 백성들에게 합당한 예배를 드릴 것과 성전 봉사를 위한 준비를 시켜주는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스가랴서의 처음 여덟 장은 회복 공동체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들로 채워져 있다. 밤의 이상들은 열방들에 대한 보복의 문제(1:7-21[MT 2:4]; 6:1-8), 예루살렘의 안보의 문제(2:1-12[MT 5-17]), 성전의 건설과 완성의 문제, 정화된 것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는 남은 자들 속에 여전히 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의 문제(3:1-10; 5:1-11) 등에 대한 의문들을 재기하고 있다. 디아스포라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파견된 대표단이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정들을 기념하기 위해 치러지고 있는 금식들을 계속해서 준수해야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해 이 성에 도착한다(7-8장). 이 장들은 회복시기 초기의 이 공동체의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여섯 장은 긴급한 관심사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대신에 이 장들은 주로 보다 먼 미래에 관련된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상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비평학자들은 9-14장이 다른 시기의 다른 저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의견의 일치에 도달했다.


학개 및 스가랴와 관련된 연대들

구절

디리우스력상의

연대

내용

 

연대(년/월/일)

 

 

학1:1

2/6/1

520년 8월 29일

성전이 지어져야 함

학 1:15

2/6/24

520년 9월 21일

성전 공사의 재개

학 2:1

2/7/21

520년 10월 17일

성전의 영광

슥1:1

2/8/-

520년 10월 11일

스가랴의 권위

학 2:10,20

2/9/24

520년 12월 18일

미래에 대한 축복

 

 

 

스가랴 - 하나님의 인

슥 1:7

2/11/24

519년 2월 15일

첫 번째 밤의 이상

슥 7:1

4/9/4

518년 12월 7일

금식의 포고

스 6:15

6/12/3

515년 3월 12일

성전의 완성

    학개의 경우와 같이, 스가랴 예언의 배경은 다리우스 1세의 통치 기간에 일어난 일들이다(B. C. 521-486년). 비록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약속했던 언약 회복의 구체적인 증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렘 30-33; 겔 36-39). 이기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점차 좀먹기 시작했고, 이 시기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암울하고 비관적이었다. 히브리 포로 중 일부만 귀환했으며, 성벽을 폐허 상태였고, 하나님의 성전은 돌무더기 속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가뭄과 한발이 그 땅을 강타하고 있었다. 유다는 여전히 페르시아의 조공국가였으며, 주변 국가들은 끊임없이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괴롭히며, 그 황량한 상황을 개선해 보려고 노력하던 그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이러한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은 두 명의 선지자들을 일으켜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의 재건축 사업과 영적 예루살렘 갱신의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하셨다. 학개는 히브리 공동체로 하여금 성전 재건축을 시작하도록 교훈하며 격려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 그는B. C. 520년에 겨우 4개월 동안 예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말씀을 듣고 성전 재건의 일을 시작했다(학1:12-15).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갱신을 부르짖음으로써 학개의 메시지를 보완했다(1:3-6; 7:8-14). 그의 사역은 학개가 예언을 시작한 2개월 후에 시작되었고, 그의 마지막 예언 사역은 518년이었다. 그래서 스가랴의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적어도 2년이상 계속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에스라 5:2에 학개와 스가랴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백성들을 계속 지원하고 격려하여 마침내 성전이 건축되었고, 515년 유월절 축제와 함께 낙성 예배를 성대히 드리게 했다(스 6:13-22).


저작권 문제


    스가랴의 저작 연대와 그 역사는 이 책의 편집의 문학적 통일성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느냐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보수적 성경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스가랴의 문학적 통일성을 주장해 왔으나, 비판적인 일부 학자들은 이 책을 두 개 내지 세 개의 문학적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문체, 어휘, 주제, 장르(즉 묵시 문학적) 등의 뚜렷한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양 진영 모두 1-8장이 520-518(B. C.)사이에 되어진 스가랴 선자자의 것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스가랴 사역의 연대 기록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의 통치 기간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521-486). 스가랴에는 3 가지의 연대 기록형식이 나타나는데, 그가 말씀을 선포한 특정한 날짜는 다음과 같다.


   1:2-6             제2년 8월                     =520년 10월/11월

   1:7-6:8           제2년, 11월,24일                =519년 2월 15일

   7-8               제4년, 9월, 4일                =518년 12월 7일

    스가랴가 말씀을 선포한 시기와 그것이 실질적으로 편집된 시기 사이에 다소 시간이 지체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1-8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 건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 부분은 성전 재 건축과 헌당식이 있기 전에 편집되었을 것이다(B. C. 520-515년경. 스 6:13-22).

    나머지 부분(9장 이하)에 대하여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베레가의 아들인 스가랴의 생의 말년에 기록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9-14장의 예언을 하게 된 동기가 크세륵세스의 주도하에 전개된 페르시아 군대의 그리스 정벌 실패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 두 부분 사이의 문체, 주제, 어휘 사용, 그리고 그 신학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두 부분 사이의 차이점은 그의 연령 변화 이외에도 묵시 문학이 갖는 독특한 성격, 그리고 후기 페르시아 제국이 가졌던 역사적, 정치적 상황의 변화 등이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두 부분의 상이점이 있음을 보수주의 학자들도 인정했다. 스가랴의 마지막 초고는 대략 B. C. 520년에서470년 사이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9-11장을 “제 2 스가랴”, 그리고 12-14장을 “제 3 스가랴”로 부르며, 이 부분의 저자들은 4세기부터 2세기 사이에 예루살렘에 거주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무명의 예언이 12라는 거룩한 숫자를 채우기 위해 말라기와 더불어 스가랴 1-8의 뒷 부분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스가랴는 마가비 시대(B. C 160년경)까지는 지금과 가틍ㄴ 문학 형태를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복수 저작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이 책의 전. 후반부 사이에 존재하는바 문체, 분위기, 신학 그리고 역사적 상황의 다른 점 등을 포함하고 있다. 가장 현저한 차이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9:13에 나타난 그리스에 대한 언급인데, 이것은 헬라시대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12-14장이 현저할 정도로 묵시 문학적 특징을 갖는 점이다.

    학개의 예언과 같이 스가랴의 메시지는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으며, 특히 포로기 이후의 예루살렘과 그 주변 백성들에게 선포된 말씀이었다.  히브리 역사 중 포로기 이후의 초기에 그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영적 무기력, 절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관 등이 스가랴의 권면과 예언의 동기를 이루고 있다. 


    저작목적과 메세지

    스가랴의 메시지는 책망과 교훈, 그리고 격려의 선포로서, 환난의 시대를 향한 작은 말씀집이었다. 첫째로, 이 선지자는 포로기 이후의 사회를 책망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조상들의 악한 행위와 길을 계속 본받았기 때문이다(1:3-5). 이 백성들은 이전 세대와 동일한 언약을 범하는 행위를 계속 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곧 이전 세대로 하여금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7:8-14).

    백성들의 죄와 반역에 대하여 스가랴가 제시한 해결책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었다(1:3-5). 영적 갱신만이 성전에서의 참 예배와 섬김을 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성전은 학개의 교훈대로 건축 중에 있었다. 여호와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만이 오래 기다리던 축복과 번영, 그리고 메시야 시대의 ‘의’를 가져올 것이다(6:9-15; 8:1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선을 행하시려는 계획”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사회가 언약 조항에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달려있다. 특히 그들의 통치 행위가 있어서 그랬다(7:8-12; 8:14-17). 후기 유대의 묵시 문학이 여호와의 날에 이스라엘이 회복되리라는 미래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스가랴의 메시지는 현재의 사회 정의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 열국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려 오기 전에, 이스라엘은 먼저 정의를 행하고, 고아와 과부, 외국인들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풀어 하나님의 호위를 얻어야했다(7:9-10; 14:16-21).

    스가랴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을 “위로”하고 “견고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의 자기의 임무라고 진술했다(1:13; 8:9). 그의 격려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그가 본 여러 환상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상기시키며, 또 계속해서 열방들의 운명을 통제하시어 궁극적으로 택함을 받은 시온의 유익을 도모하신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특히2:6-13).

    여호수아가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스룹바벨이 총독으로 임명된 사건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정하신 지도권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동시에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다시 점화시키며, 성전을 건축하고 백성들을 개혁하려는 일련의 노력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확신 시켜주는 구실을 한다(4:6참조).

    마지막으로, 스가랴가 반복하여 “이전 선지자들의 말”을 언급한 것은 스가랴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인정 하셨음을 나타내며, 히브리 공동체가 이전 선지자들의 계시를 잘못 해석하지 않았음을 그들에게 확신 시켜 준다(1:4 7:7, 12). 현재 고통이 계속 되고 있으나 백성들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계획이 계속 유효함을 확인 시켜준다. 그들의 희망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문학적인 분석


    문학 형식

    스가랴서는 ‘12 선지서 중 가장 불명료하고 긴 책“이다. 그러나 그것의 복잡성은 그 메시지의 중요성에 비례한다. 볼드윈은 그것을 :다채로운 유리창에 명랑과 빛의 상징적 표현들을 더한 예술가”에 의해 쓰여진 모자이크라고 말한다. 책은 대부분 산문적이며, 약간의 시 부분을 포함한다(9-10장), 책은 권고 신탁들(1:2-6; 10:1-2), 환상들(1:7- 6:8), 상징적 표현들(6:9-15), 예언적인 심판 신탁들(9:1-8; 12:2-8), 의식문(9:9, 10), 구원 신탁들(VV. 11-13; 13:1-6, 7-9), 조롱 노래(11:1-3), 사건들(VV. 4-17), 묵시로 되어 있다. 환상과 상징과 종말론적인 비유 표현은 스가랴서를 예언-묵시 문학으로 분류시킨다.

    첫 여덟 장은 날짜 표기 공식(1:1, 7:7:1), 공통 주제(성전과 도성의 재건), 메신저 공식으로 통일되어 있다, 9-14장에서는 날짜가 표기되지 않았고,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지며, 메신저 공식이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인해, 몇몇 학자들은 성전보다 다윗 왕조의 회복과 하나님의 나라에 더 많은 나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어떤 다른 선지자(제2의 스가랴)가 그것을 썼을 것으로 추리한다. 그러나 스가랴서에 대한 이분 혹은 심지어 삼분설을 지지하는 데는 구조보다도 오히려 통계가 사용되어 온 것이었다. 9-14장 이해를 위해 볼드윈이 제시한 새로운 접근법을 라마슈의 작업에 기초하였는데, 그는 분명한 다양성과 돌연적인 변화들을 교차 대조 형식에 근거한 문학적 단위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라마르슈의 논증은 구저적 이해로서는 매우 독창적이지만, 아직 학자들을 납득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차일즈는 1-8장과 9-14장 사이의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두 부분간의 관계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에 의하면, 두 번째 부분은 1-8장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신학적 양식을 확대하고 발전시키며 뚜렷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선지서는 포로로부터의 귀환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구속의 경험은 아직 미래에 놓여 있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스가랴서는 이사야, 예례미야, 에스겔의 회복 예언들에 대한 신학적 반성으로, 왕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확대하고 적용한다. 스가랴서가(특히 9- 14장) 복음서의 수난 담설을 설명하는 데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에 속하며, 요한계시록의 풍부한 비유적 표현들의 원천이 되고 있음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다양성 가운데 스가랴서는 우리로 하여금 (1)새 예루살렘(2:5 ; 9:8 ; 14:11) ; (2)성취의 장엄함(1:17: 4:10; 8:6, 15:9:12): (3)악의 재거와 열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15-21; 6:1-8,9 ;12:1-9:14:1-5): (4)하나님의 긍휼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참여(2:11:8:7, 8, 22:10:9, 10:14:16): (5)회복의 영의 죄 씻음과 성별과 권능 부여(4:6:5:4:12:10:13:3) ; (6)겸손하고 영화로운 메시아 모습(3:8:4:6:9:9)에 대한 환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구조

  Ⅰ. 스가랴의 권위에 대한 주장(1:1-6)

   Ⅱ. 밤의 이상들(1:7-6:8)

      A. 장수와 그의 군대(1:7-17)

      B. 네 뿔과 네 공장(工匠)(1:18-21[MT 2;1-4])

      C. 척량 줄을 가진 사람(2:1-13[MT 2:5-17])

      D. 더러운 옷을 입은 제사장(3:1-10)

      E. 촛대와 감람나무들(4:1-14)

      F. 날아다니는 두루마리(5:1-4)

      G. 악(惡)이 담긴 바구니(5:5-11)

      H. 네 병거(6:1-8)

   Ⅲ. 대제사자의 면류관(6:9-15)

   Ⅳ. 금식에 대한 질문(7:1-8:23)

    ①공의와 자비: 금식(7)

    ②예루살렘의 회복(8)

   Ⅴ. 이스라엘의 적들과 미래의 시온의 왕과 목자에 대한 두 개의 이상(9-11장; 12-14장)

    ① 첫 번째 선포(9-11)

       (가)메시아-왕과 그의 통치

       (나)이스라엘의 구속(10)

       (다)메시아-왕이 거부당함(11)

    ② 두 번째 선포(12-14)

       (가)이스라엘의 대적이 파괴됨(12:1-9)

       (나)이스라엘이 정결케 됨(12:10-13:6)

       (다)목자와 양떼들(13:7-9)

       (라)여호와의 날(14)


   스가랴서 1-8장

    많은 선지서들은 각 선지자가 부름받은 것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선지자들 이전의 모세(출 3장)가 그러하고, 기타 선지자들도 부름 받는 장면의 이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사 6장; 렘 1장; 겔 1-2장; 참고, 삿 6장; 왕상 22장). 이러한 소명기사들은 해당 선지자가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근거들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비록 스가랴서는 소명기사로 시작되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가랴는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권능과 권위를 가지고 말했던 모세의 후계자들과 같은 선상에 서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선지자는 자신의 말들이 자기 앞에 존재했던 선지자들의 말들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백성이 자신의 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했다(1:4-6). 회복 공동체는 과거를 살펴보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저질렀던 것과 같은 실수들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했다.

    스가랴의 여덟 개의 밤의 이상들은 다소 느슨하게 교차대구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상 1과 8(1:7-17; 6:1-8)은 여러 색깔의 말들과 이방나라들의 운명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두 쌍의 이상들 - 이상 2와 3(1:18-21[MT 2:1-4]; 2:1-12[MT 2:5-17]). 그리고 6과 7(5:1-4,5-11) - 은 덜 분명하다. 양자는 회복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장애들, 즉 이방나라들로부터의 반대(이상 2와 3)와 언약 공동체 내의 죄(이상 6과 7)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두 쌍의 이상들은 하나님의 심판(1:21[MT 2:4]; 5:4)과 포로됨(2:6[MT 2:10]; 5:10-11)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가운데의 한 쌍의 이상(4와 5[3:1-10; 4:1-14])은 성전 주변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회복 공동체의 행정 지도자들에 관심을 두고있다(여호수아, 스룹바벨). 이 환상들은 여호와의 일곱 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3:9; 4:10). 총체적으로 볼 때 이 환상들은 일반적인 이방 세계(이상 1번과 8번)로부터 예루살렘(2,3,6,7번 이상)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전 주변(4,5번 이상)으로 나아가는 구심적 구조를 갖고 있다.

    첫 번째의 밤의 이상(1:7-17)은 실현되지 못한 종말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날을 경험했으며, 거룩한 하나님의 분노를 배웠다. 그러나 이방나라들은 “평안하여 정온한” 것으로 보였다(1:11). 여기에서 여호와의 군대의 대장의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치시고, 자기 백성을 수호하실 것을 간구한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셨다는 확신과 위로의 말씀을 듣는다. 이사야서 40:2를 어느 정도 연상시키는 말씀 속에서 열방들은 이스라엘을 벌하라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중에 지나친 열심을 보였다는 고발을 당한다. 열방들은 여호와의 날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시온은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밤의 환상(1:8-21[MT 2:1-4])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네 뿔과 네 공장(工匠)의 정체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네 뿔을 다니엘서의 사중의 형상이나 네 짐승(단 2,7장)과 연결시켰다. 또 어떤 이들은 사(四)라는 숫자가 “하늘의 사방 바람”과 비슷한 용도로 사방을 의미한다고 보았다(2:[MT 2:10]; 6:5). 그 세부적인 내용이 아무리 난해하다 할지라도 이 밤의 이상의 요점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다 분쇄될 것이라는 것이다.

   벽이 없는 성은 침공을 당하기 쉽다. 그래서 고대의 정복자들은 성들을 무력화시키고자 할 때는 그 벽들을 무너뜨렸다. 포로생할에서 귀환한 자들은 자신들이 적의 공격에 열려 있으며, 또한 수가 적다는 사실을 염려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세 번째의 밤의 이상(2:1-13[MT 5-17])에서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성, 번영으로 넘쳐흐르는 도성을 둘러싼 불의 벽이심을 보았다. 이 상징은 전 도시가 불기둥, 즉 셰키나 영광(the Shekinah glory - 여호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기둥 - 역자 주)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임재는 성전 내의 지성소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전 도성이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다. 이 주제는 스가랴서 14;20-21에 다시 나타나며, 계 21:3,22-27에서도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악의 화신이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경우가 몇 번 있다(욥 1-2장; 왕상 22:21-23). 네 번째의 밤의 이상에서 스가랴는 재판 장면을 목격한다. 하나님의 천사가 재판장으로 앉아 있고, 참소하는 자(“사단”은 “고발하는 자”를 의미 - 한글판 개역 성경은 “대적하는 자”로 번역하고 있음 - 역자 주)가 대제사장의 잘못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 대제사장은 더러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 이상이 언제 주어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많은 논란이 되었다. 본문 상의 여러 가지 특징들은 속죄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본문은 대제사장이 여호와의 존전 앞에 서 있는 때에 대한 것인데,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이것은 그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와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본문은 또한 대제사장의 복장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이 점 역시 특히 속죄일을 초점으로 한 것이다(fp 16:4). 그리고 또한 본문은 이 땅의 죄를 거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 점 역시 이 날 드려지는 제사의 목적이었다(3:9).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제사장의 의복 착의 의식이나 기타 다른 제의들이 그 배경이라고 제시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 이상은 또한 나중에 신약에서 더욱 발전되어질 주제들과 아주 많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스가랴 복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이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을 정결케 하시고, 그 대제사장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닌 의(義)를 거저 주심(3:4)으로써 참소하는 자가 고발할 수 있는 토대 자체를 없애버리신다. 수백년 후에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했다(롬 8:31-33). 제사장이 하는 일들이 죄를 제거할 수는 없다(히 10:1-4,11-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죄악들을 단 하루만에 제하실 수가 있다(3:9). 스가랴 당대의 역사적인 사건들의 맥락 속에서는 대제사장은 나라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하나님에 의해 정결케 됨을 입었다는 것은 그의 당대의 귀환자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성전을 지을 수 있게 되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의 이상(4:1-14)에서 선지자는 하나의 받침 위에 일곱 개의 촛대가 있으며, 또 그 각각의 촛대는 다시 일곱 개의 가지를 갖고 있는 촛대, 즉 마흔아홉 개의 불꽃을 피울 수 있는 촛대를 보았다. 이 촛대를 위한 기름은 그 배후에 있는 감람나무와 열매들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나무들로부터 나오는 기름은 관(管)들을 통해서 촛대로 직접 옮겨졌다. 원래 제사장들은 성전의 등대를 하루에 두 번씩, 즉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 돌아보며, 심지를 돋우고, 등잔에 기름을 채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있는 등대는 사람의 관리가 필요없는 촛대였다. 따라서 이 이상의 요점은 명백하다. 성전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4:6),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끝까지 돌보실 것이다(4:9). 비록 어떤 이들이 자신들이 짓고 있는 성전이 실망스러운 것(학 2:2-3; 스 3:12-13)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기뻐하셨다(4;10). 4:10의 NIV번역은 이러한 요점을 다소 모호하게 만든다. 이 구절은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온 땅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들은 스룹바벨의 손 안에 있는 척량줄을 보고 기뻐하느니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스릅바벨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들이었다(4:12-14). 요한은 나중에 이 상징을 수정해서 다른 목적에 활용했다(계 11:4).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이상(5:1-11)은 한 연극 속의 두 막과 마찬가지이다. 날아 다니는 두루마리는 십계명을 요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 네 개의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죄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에 의해서 대표되어지고 있으며(5:4; 출 20:7), 마지막 여섯 개의 계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죄로서 도둑질하는 것에 의해서 대표되어지고 있다(5:4; 출 20:15). 포로생활은 이스라엘을 정화시키고, 정화된 백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율법(두루마리)은 회복 공동체 속에서 아직 심판 받아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찾아내었다. 또 선지자는 죄를 상징하는 한 인물을 담고 있는 한 에바를 보았다. 이 죄는 바벨론, 즉 심판의 장소로 옮겨질 것이었다(시날 땅, 5:11). 2번과 3번 이상에서는 회복 공동체의 목표가 실행되는 것에 대한 장애가 외적인 반대로부터 왔었다. 그러나 6번과 7번 이상에서는 장애들이 공동체 내부로부터 나온다.

    여덟 번째 이상(6:1-8)은 첫 번째 환상(1:7-17)에서 사용된 여러 색깔의 말들의 이미지를 다시 사용한다. 그 상세한 내용들 중 난해한 것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 이상의 요점은 명료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몸소 열방들을 벌하심으로써 원수를 갚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의 나머지 부분들은 이상이라기보다는 기록들이나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6:9-15에서는 일부 사로잡힌 자들이 아직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성전에 바치는 헌물들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하는데, 그 금은 대제사장을 위한 면류관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면류관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스룹바벨과 같은 왕가의 인물의 머리에 씌워지는 것이 보다 더 그럴 듯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성경 번역본들은 여호수아(6:11) 대신에 스룹바벨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 어떠한 고대의 사본도 이러한 본문의 수정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 비록 “순”(branch)(6:12)이라는 표현이 다윗 계보의 사람과 연결(사 4:2; 렘 23:5; 33:15)되어있기는 하지만 이미 스가랴서 3:8에서 여호수아가 이 칭호와 연결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학자들은 이 본문 속에서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이 메시야 속에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포로시대 동안 예루살렘 멸망을 전후한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네 번의 금식이 준수되어져 왔다. 이제 포로시대가 끝이 나고 성전이 완성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계속해서 이 성의 멸망을 기념하는 금식을 행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것 때문에 제사장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대표단이 예루살렘으로 왔던 것이다(7:1-3; 참고, 학 2:11; 말 2:7). 스가랴는 위선적인 금식과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이 없이 율법적인 사항들에 집착하는 경건적 태도에 대해 몇 개의 설교를 하는 기회로 이 자문단의 일을 활용했다(7:4-8:23). 비록 포로기 이후 시대의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분하는데 집착(스 9-10: 느 13:23-30)해 있었지만 스가랴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돌과 같은 토대 위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날을 예언했다(8:20-23; 14:16-21).


    스가랴서 9-14장

    최근의 어떤 학자들은 스가랴서 9-14장의 통일성,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장들과 그 이전의 장들 사이의 통일성 혹은 근접성에 대해서 강조를 했다(Bic 1962; Lamarche 1961; Jones 1964; Baldwin 1972). 라마르쉬(Lamarche)는 9-14장 전부가 심판을 통한 이스라엘 및 열방들의 심판 및 구원(9:1-8; 9:11-10:1; 10:3b-11:3; 12:1-9; 14:1-15). 메시아적 왕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는 여호와의 날(9:9-10; 11:4-17; 12:10-13:1; 13:7-9), 그리고 우상숭배의 억제(10:2-3a; 13:2-6) 등의 반복적인 주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한 단일한 전자에 의해서 작성된 복잡한 교차대구법(chiasmus)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이 이 책의 두 부분 사이의 저자가 다르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간에 이 책은 분명히 하나의 문학적인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주석가는 이 두 부분이 각자의 해석에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스라엘의 예언적인 소망 속에서 포로의 귀환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 중 많은 것들을 성취시켰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속에서 회복 공동체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것이 1-8장의 대체적인 관심사이다. 귀환은 새로운 출애굽이고, 새로운 구원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최종적인 구원은 아니었다.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이 의미하는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장차의 보다 완전한 구원은 여전히 앞에 놓여져 있었다. 이 완전한 구원이 주로 9-14장의 관심사이다. 비록 포로생활로부터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예언적인 소망들의 많은 주제들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문학적인 구조” 항목을 보라) 귀환은 하나님께서 가져다주실 궁극적인 시작 단계이자 예비적인 단계일 뿐이다.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은 장차 다가올 보다 큰 구원의 상징이자 예시였다.

  

신학적인 메시지

    책임의 세대

    스갸라의 예언은 학개의 예언을 보충한다. 그도 역시 성전의 완곡과 영적생활의 회복에 관심을 가졌다. 학개는 새 시대가 동 터 오는 사실과 관련하여 백성의 책임감을 강조하였다. 스가랴는 포로 후기 공동체가 그들의 조상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1:1-6), 약속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점에서 그를 신뢰하도록 축구하였다. 학개와 마찬가지로 그도 성전과 다윗 왕조의 미래에 큰 중요성을 부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백성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임재에 처점을 맞추었고, 이 점에서 그의 관심은 에스겔이 가졌던 관심에 더 가꺼웠다. 그러므로 한슨은 이렇게 말한다 : “스가랴는 에스겔이 예언한, 여호와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기 위해 시온으로 돌아올 역사상의 그 시점에서 자신의 민적을 보고 있다. 스가랴는 축복과 저주를 지닌 언약적 삶에 대한 신학적 시각을 제공한다. 그는 백성들에게 포로에 대한 예언이 실재가 되었었음을 기억할 것을 훈계하였다(1:6:7:7-14). 하나님의 심판이 다시 임하 것을 두려워하며, 스가랴는 새 세대가 과거를 성찰하도록 권고 하였다. 그들은 사로잡히고 소외당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던 그 선조들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1:5, 6:7 :14). 과거가 주는 교훈들은 포로 이전 선지자들이 회개를 부르짖었으나 헛수고였으며(1:4:7:6, 7), 그들의 조상들이 바르게 응하지 못하였고(1:4:7:11, 12), 그들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으며(1:2: 7:12),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와 그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호소를 듣기를 멈추었고(7:130, 그가 그들에게 저주를 내린 사실들을 설명한다.


    회복의 현재 실재

    스가랴는 과거를 너머 현재의 상황과 기회를 숙고하기에 이른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에 관한 예언 말씀이 그들 자신의 세대에서 어떻게 성취되어지고 있는지를 보게 하였다. 그 성취가 멀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예언 신탁들의 점진적인 성취에 대한 시각을 제공하는 환상들로(1:7, 6:8) 새 공동체를 격려하였다. 여덟 가지 환상은 구조적으로 네 개의 평행 환상으로 조직될 수 있다 :


     A. 정온한 열국에 대한 환상, 1:7-17

       B. 열국의 심판에 대한 환상, 1:18-21

         C. 시온에 대한 환상, 2:1-13

           D. 새 시대에 대한 환상 : 용서와 평화, 3:1-10

           D'. 새 시대에 대한 환상 : 메시아의 사역, 4:1-14

         C'. 악의 제거에 대한 환상, 5:1-4

       B'. 바벨론 심판에 대한 환상, 5:5-11

     A'. 정온한 성령에 대한 환상, 6:1-8


    이 여덟 가지 밤 환상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묘사한다. 천사 중개자의 해석을 통해 선지자는 그가 보는 것을 설명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본 것과 같이, 그 환상들은 위로의 목적으로 주어졌다. 다시말해,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이 열심히 구속의 모든 면을 이루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구속은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복수와, 정결하고 거룩한 그의 백성들의 신원과 영화와, 그 결과 이루어지는 그의 거룩한 통치의 영광스러운 확립으로 되어 있다(1:13-15).

    이 밤의 환상들은 서로서로 마주 놓여 잇는-첫번째 것과 마지막 것, 두 번째 것과 일곱 번째 것, 세 번째 것과 여섯 번째 것, 네 번째 것과 다섯 번째 것-일련의 채식 유리창으로 볼 수 있다. 중심에 놓인 환상들은(네 번째와 다섯 번째) 대비의 정점과 초점을 이룬다. 회복의 모든 면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소망에 뿌리를 두고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는 회복의 목표가 된다(도표 45 참고)

    주변의 환상들은 정온한 열국과 염려로 가득 찬 하나님의 백성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경건한 자들은 그의 영이 회복의 과정에 계속 관여하고 있는 사실에서(A-A` 환상) 격려를 받는다. 하나님이 열국을 심판함으로 그들은 더 이상 남은 자들을 압제하고, 괴롭히고,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B-B`환상). 그가 너무도 장대하게 시온을 회복하고, 또 그 주민은 너무 많아 도성의 성곽이 그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C-C`환상). 게다가 새 예루살렘 시온은 위대한 왕이 그의 백성을 축복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그 한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성곽이 필요 없을 것이다. 언약 갱신의 재확인 환상들이 정점을 이룬다(D-D`). 언약이란 말이 나오지는 않을지라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상징적인 죄사함은 모세 언약의 갱신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대제사장과 스룹바벨의 상호관련은 제사장직과 다윗 왕조 간의 협력에 관한 구약성경의 이상을 드러낸다. 둘 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4:14)로 부릴낟. 네 번째 환상을 설명하는 신탁은 회복의 시대를 가져오는데 있어 제사장직과 성전과 메시아 왕의 위치를 부연 설명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3:8,10).

   므노라 환상은 하나님 앞에 있는 백성들의 대표자들로서 제사장과 다윗 자손 메시아의 특별한 위치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그의 언약과 대속과 용서와 회복의 유효성을 상징한다. 그는 마치 스룹바벨이 다윗 왕조와 메시아 시대의 연속성에 대한 하나님의 표징인 것처럼,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표징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경건한 남은 자들에게 언약과, 성령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아 사역을 감당하는(참고, 4:6) 그의 신정 공무원들의 연속성과 유효성을 보증한다.

   이 환상들은 예언 말씀에 비추어 포로 후기 공동체를 해석하는 틀을 제공한다. 백성들은 죄로 오염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땅을 회복해 줌과 더불어 언약 갱신과 축복의 시대를 열고 있었다. 포로 후기는 회복의 현존(“now")을 표하였다(8:11,15; 9:8).

    성전의 재건과 여호수아의 제사장직과 스룹바벨의 지도는 더 큰 발전의 전조가 된다. 그들은 회복의 표징들로서 비록 작을지는 몰라도 멸시될 수는 없는 것들이다 :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4:10). 이 목적을 위해 선지자는 축복이 분명히 그들에게 임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도록 그들을 격려하였따(8:15).


    회복의 시대 : 약속들의 성취

    스가랴는 백성, 땅, 축복, 보호, 평화, 영적인 변형(용서, 죄사함, 성결), 열국의 포함, 피조물을 새롭게 함에 있어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약속들을 확증하였다. 축복과 보호에 있어 여호와의 임재는 이루어질 변형에 대한 소망뿐 아니라 회복의 현재 보증이다. 우리는 앞에서 포로 후기 선지자들이 성취가 표징으로 이미 그들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얼마나 강조 하였는지 보았다. 약속들의 초점은 성전 사람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돌아오심이다(1:16). 그의 임재는 하나님의 도성과 관련된 이름들이 상징하는 언약적 관계를 보증한다 :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8:3). 하나님이 단언하였던 바와 같이, 그의 임재는 포로 후기 공동체 속에서 경험되었다 :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8:15). 하나님은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고, 그들에게 그의 선하심을 기뻐할 이유를 줄 것을 약속하였다.

    하나님은 임재하여 그의 백성을 축복하고(8:12-14), 보호하며, 그들을 지킨다(vv.12-14 ; 9:8). 그들은 그의 귀한 백성이기 때문에, 혹 역경에 처할지라도, 그는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함께한다(9:8-16 ; 14:3-7,9).

하나님은 왕이며, 그의 백성은 이 땅에서 그의 왕국을 구성한다. 그는 그들에게 포로 후기 선지자가 선포하였던 평화를 준다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3:10). 또 다윗과의 언약에서 예기된 대로, 그의 평화는 모든 민족에게 확대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의 도구로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질서를 확립한다. 그의 나라가 완전히 확립될 때, 그의 백성은 영원히 안정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14:11).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시온에서 피난처를 찾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숫자상으로도 증가할 것이다(3:10 ; 8:20-23). 하나님의 도성 시온은 여기서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와 같이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그의 축복과 보호를 의미한다(참고, 시 46). 여호와는 그가 그의 백성을 위해 열심임을 천명하는데, 그의 열심은 백성들에게 땅과 성읍들을 회복시켜 주는 데서(1:17), 그의 백성의 기쁨과 번영에서(8:4-6), 그의 자녀들이 수치대신 존귀함을 누리는 데서(9:16-17)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스스로를 해함이 없이는 아무도 그의 백성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10:4-12). 따라서, 성곽이 없는 시온의 환상은 구속받은 자들의 엄청난 숫자와 하나님의 보호를 동시에 말해준다(2:1-13).

    여호와는 그의 백성과 열국에서 나온 경건한 자들에게 그가 그의 자녀들의 회복을 열심히 이루어 나갈 것을 보장한다(1:14 ; 8:2). 그들은 “언약의 피”로 죄 씻음과 용서함을 받은(9:11 ; 참고, 마 26:28 ; 슥 13:1) 사람들로 구성된 새 공동체를 이룬다. 그 혜택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으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를 경배하는 데 열심을 다하는 자녀들을 기뻐한다. 그들은 언약의 특권을 온전히 누리는 자리에 들어갈 것이다(8:20-23 ; 14:20-21).

    땅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는 비와 풍작을 허락함으로 그 땅에 복을 내릴 것이다(10:1). 새 창조의 환상에서 선지자는 빛과 생수로 상징된 하나님의 왕권으로 인해 자연과 구속받은 자들이 상호협력하게 되리란 소망을 확언한다(14:6-11). 그는 그의 왕권을 “천하”에 확립할 것이다(14:9).

    하나님의 통치의 혜택은 모든 언약의 약속들을 확증한다. 스가랴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성취를 진전시키는 일에 신실하심을 확신시키기 위해 약속과 언약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그 일에 관여할 것 또한 기대한다. 스가랴 시대의 관여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성전과 관련되었다(8:9,10). 그 관여는 또 이 땅의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도 관련되었다. 사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즉 언약 파기자들)은 종말론적인 왕국에 설자리가 전혀 없다(13:2). 언약 수행자들은 정의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따라 살므로 하나님의 왕국을 확립한다(8:16-22 ; 참고, 7:9). 하나님은 그의 왕국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 비례하여 그들을 축복할 것을 약속한다.

    비록 진행이 느릴지라도 회복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새 시대의 보증은 에스 카톤의 현재 표징들-죄악 제거, 스룹바벨, 여호수아, 성전-속에 있다. 회복의 확실성은 하나님의 신실성과 공의로움의 바로 그 성품으로 보증된다(8:7,8). 성령은 하나님의 전체 계획이 실행되기까지 쉬지 않고 역사할 것이다(6:8 ; 참고, 4:6,7).


    겸손하고 영화로운 메시아

    그 환상들에서 스가랴는 대제사장과 다윗 자손 순 사이의 화목한 관계를 묘사하였다. 순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조장하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가져올 것이다. 그는 겸손한 동시에 영화롭게 보인다. 그는 그의 입성에서 겸손하다. 선지자는 위대한 왕의 오심을 알리면서 성육신의 신비를 말하였다(9:9).

    선지자는 또 이 메시아가 침을 당한 (smitten) 목자로 고난받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11:7-14 ; 13:7-9). 그러나 이 겸손한 메시아는 그의 백성에게 고난으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가져다 주고, 하나님의 정화와 은혜의 수단이 되며, 그의 찔림을 애곡하는 모든 자들에게 회복의 영인 성령의 선물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할 만큼 능한 자이다(12:10-13:1 ; 참고 계 1:7).

    그는 “온 세상의 주” 하나님을 섬기고(4:14)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다스리는(8:20-23) 제사장-왕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분명할 것이다 :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12:8). 결국 메시아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확립할 것이다. 그는 성도들을 신원하고 불신 국가들을 심판할 것이다 :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14:4,5). 그 영화로운 날에 인류의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변형시키고(14:6-8). 새 공동체를 축복하여 이 변형된 거룩한 세상을 누리게 할 것이다(14:20-21).



신약으로의 접근


    이 선지서를 읽는 기독교인 독자들은 나귀를 타고 의와 구원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시는 겸손한 모습을 가진 메시야적 왕에 의해서 완전한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금방 포착할 것이다(9:9; 마 21:5). 그는 목자의 모습을 한 왕이기는 하지만, 또한 매를 맞은 목자였다(13:7; 마 26:31). 그는 창에 찔리고, 배반을 당했다(11:12-13; 12:10; 마 26:15; 27:9-10; 요 19:34,37). 그러나 열방들을 무찌르고(12:8-9), 사람들 속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실 분은 바로 이 왕이시다(14:3-9).  

   



말라기서



   말라기서는 십이 소선지서의 영 두 번째 책이며, 세 부분으로 구성된 히브리 정경의 두 번째 부분(느비임, םיאיבנ)의 마지막 책이다. 헬라어 역본의 전통을 따르는 영어 번역본들에서는 말라기서는 구약 정겨의 마지막 책이다. 십이 소선지서들 중에서 이 책이 마지막에 위치하게 된 이유는 말라기가 마지막으로 활동한 선지자이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의도적으로 배열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이 선지자 엘리야의 도래를 고대하면서 구약을 매듭짓고 있는 반면에, 신약시대의 최초의 목소리들 중의 하나가 예수가 엘리야와 연결시킨 세례 요한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역사적 배경


저자

   첫 번째 절은 단순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이 구절은 선지서의 표제의 양식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그 간결함 때문에 문제들이 야기되었다. 다른 표제들과는 달리 이 구절은 이 선지자의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는 “선지자”라고 불려지지 않았으며, 기타 다른 칭호로 불려지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선지서들의 표제들이 한 두 가지 이상의 정보를 제공해 주기는 하지만 이 선지자를 그냥 말라기라고 부른 것과 같은 예가 전에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말라기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냥 “나의 사자”(my messenger)라고 번역될 수 있는 보통명사이며, 이 사자는 3:1에 나오는 “사자”와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7) 그러나 3:1의 사자는 미래에 도래할 자(Childs IOTS, 493)이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와 동일한 인물일 수가 없다.

   말라기가 사실상 익명의 책이란 견해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동기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스가랴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밤의 이상들 뒤에는 “경고”(맛사, אשּׂמ; 참고, 9:1과 12:1)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두 개의 본문이 있다. 이 두 본문은 역사적인 인물 스가랴의시대를 초월하는 미래적인 예언을 담고 있는데, 미래적인 예언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은 이 두 본문을 이 선지서의 뒤에 그냥 덧붙여진 익명의 선지 문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라기서 또한 “경고”란 단어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책은 십이 소선지서에 완성감과 종결성을 주기 위해 따로 나뉘어져 열두번 째의 책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초자연적인 계시와 미래적인 예언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예를 들어 Baldwin, 221을 보라).

   말라기서의 표제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말라기란 단어가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진 바도 없고 우리에게 거의 알려진 바도 없는 어떤 선지자의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다.8) 그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이 생략형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데(왕하 18:2의 ‘아비’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참고, 대하 29:1의 아비야). 이 경우 그 의미는 “야(웨)께서 나의 사자이시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나(야웨)의 사자”라는 의미가 더 가능성이 있다.


연대 및 역사적 배경

   약간의 예외를 제외한 학자들은 말라기가 “페르시아 시대의 사람”이라는 글레이지어-맥도날드(Glazier-McDonald 1987, 14)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압도적이다. 성전은 재건된 상태이며,9) 이미 그 성전에 대한 환멸이 들어서 있다. 또한 1;8에서 사용된 “총독”(폐하, החפ)란 단어는 페르시아 시대의 전문용어이다.

   비록 우리가 이 책이 페르시아 시대의 것이라고 지목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 정확한 연대를 추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전에 대한 환멸이 이미 생겨난 것으로 볼 때 성전이 완공된 후 몇 십 년이 흘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이 책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이 말라기가 그들보다 선대의 사람일 거라는 가정이 통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책이 주전 475년에서 450년 사이에 쓰여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특히 어두운 시기였다. 포로기 직후의 시기(주전 539년에 고레스의 조서로 시작된 시기)는 아주 낙관적인 시기였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재건 사업이 시작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상징인 성전이 재건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여전히 머물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번영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낙심과 더불어 도덕적인 타락이 수반되었다. 카이저(Kaiser)는 말라기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들이 느헤미야가 직면한 윤리적 문제들과 밀접함을 지적하였다. 그는 다음의 다섯 가지 점을 나열했다(Kaiser 1984, 16):

   1. 잡혼(말 2:11-15; 참고, 느 13:23-27)

   2. 십일조를 준수하지 않음(말 3:8-10; 참고, 느 13:10-14

   3. 안식일을 준수하는 일에 관심이 없음(말 2:8-9; 4:4; 참고, 느 15:22)

   4. 부패한 제사장들(말 1:6-2:9; 참고, 느 13:7-9)

   5. 사회적인 문제들(말 3:5; 참고, 느 5:1-13)


                      문학적인 분석


장르 및 구조

   표제(1:1)는 이 책이 예언이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장르 표지들(‘경고“와 ”여호와의 말씀“)을 사용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들은 저자가 제의적이고 사회적인 악들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심판의 날에 신실한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러한 장르 표지들을 지지해 주고 있다.

   말라기의 예언의 독특한 모습은 이 책을 주의깊게 읽을 때 드러난다. 많은 학자들(Clendenen은 드문 예외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일련의 논쟁들을 핵심에 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자신의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의 속성을 묘사하시고, 자기 백성의 잘못된 행위들을 꾸짖으시며, 자신이 어떻게 그들을 심판할 것인지를 묘사하신다.

   표제에 이어 말라기는 여섯 번 이 백성과 논쟁한다.

   1. 첫 번째 논쟁(1:2-5)은 통상적인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대한 진리를 자기 백성에게 주장하심으로써 말씀을 시작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에 대해 이 백성은 하나님께 되묻는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은 에서의 후손인 에돔 사람들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써 그 질문에 응답하신다. 에돔은 특히 이스라엘에게 상가신 적(오바댜서를 보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멸망은 가장 환영할 일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로 환영되어졌다.


   다섯 개의 보다 긴 논쟁들 역시 비슷한 양식을 따르고 있다.

   2.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보여준 모멸에 대한 논쟁(1:6-2:9)

      a. 서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만한 아버지이자 주인이다.

      b. 질문: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c. 대답: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렸다”.

   3.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긴 것에 대한 논쟁(2:10-16)

      a. 서론: 하나님은 만물의 아버지이자 창조주이시다.

      b. 질문: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c. 대답: “어려서 취한 아내”와 이혼함으로써.

   4.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논쟁(2:17-3:5)

      a. 서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말들로 인해 지치심.

      b. 질문: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c. 대답: 하나님께서 악을 조장하시거나 무시하셨다고 비난함으로써.

   5. 회개에 대한 논쟁(3:6-12)

      a. 서론: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시나 너희는 변개한다.

      b. 질문: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c. 대답: 십일조를 하나님으로부터 훔쳐가지 않음으로써.

   6. 하나님에 대한 완악한 말들에 대한 논쟁(3:13-4:3[MT 3:13-21])

      a. 서론: 하나님께서 이 백성의 완악한 말들을 꾸짖는다.

      b. 질문: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c. 대답: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

   이러한 분석 이후에 세 절이 남는데, 이 세 절은 일종의 부록들이다.

(1) 4:4[MT 3:23]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에 대한 촉구이다. (2) 4:5-6[MT 3:24-25]은 장차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 선지자가 도래할 것을 선포하고 있다. 마지막 책(헬라어-영어 역본들의 경우)인 말라기서는 바로 이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대체적으로 이 책의 통일성은 한 가지 중요한 예외, 즉 부록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도전을 받지 않았다. 스미스(R.L.Smith 1984, 340-41)는 이 구절들이 앞 부분과 형식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두 가지 점에서 내용이 차이가 난다고 주장했다. 첫째, 사자는 3:1과 다른 이름 및 기능을 갖고 있다. 둘째, 장차 올 여호와의 날은 부록에서는 앞 부분과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러나 면밀한 검토를 해보면 양자를 조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도 아주 쉽게 그렇게 할 수 있다. 양자의 경우에 부록은 앞에서 개략적으로 소개된 개념들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Clendenen 1987, 17n, 26). 말라기서 전체의 통일성에 위배될 만한 심각한 난점은 전혀 없다.


문체

   말라기서의 문체의 가장 두드러지고 창의적인 측면은 바로 그 논쟁이란 양식이다(위에서 논의함).  말라기서가 과연 산문이나 운문이냐 하는 문제는 논쟁의 핵심이다(W. Kaiser와 B. Glazier-MacDonald를 비교하가). 가장 흔하게 사용되어지는 히브리 성경(BHS)은 이 책을 시 형태로 배열해 놓은 반면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어지는 영어 역본(NIV)은 이 책을 산문으로 배역해 놓고 있다. 이런 논의가 발생한 것 자체가 성경 히브리어에서 무엇이 운문이냐 하는 것을 정의하기가 힘들다는 사실과 드불어 이 두 가지 양식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증거 해준다(“서론”의 “문학적인 분석”란을 보라).

   아주 이른 시기의 학자들은 구약시대의 말엽에 가서 히브리어 문체가 질이 떨어진 것을 말라기서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De Wette, Duhm - Torrey 18998, 14-15에서 인용됨). 그러나 이것은 옳지 못하다. 말라기서는 그 양식에 있어서 창의적이며, 메시지가 분명하며, 그 논리가 설득력이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주요 주제

   말라기가 이스라엘에게 준 메시지의 핵심에는 언약이 들어있다. 레위 지파와의 언약(2:8),10) 조상들과의 언약, 결혼 언약 등의 세 가지 언약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2:10-16). 말라기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언약에 근거하고 있으며(1:2-5), 하나님의 심판은 이러한 언약관계들을 위반하는 것에 기초한다고 선포한다. 레위 언약은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맡은 책임들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언급된 것이 확실하다.

   피쉬베인(Fishbane 1983)은 제사장들이 범한 죄들을 비판하기 위해 민수기서 6:22-27의 제사장의 축복에 나오는 표현이 제사장들을 향한 논박 속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통찰력 있게 잘 묘사하였다. 조상들이 맺은 언약이 족장들의 언약을 말하는 것인지, 시내산 언약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어떤 것이 됐든 간에 이것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다는 비난에 힘을 더해준다. 말라기서는 이스라엘인들이 결혼 언약을 깨뜨린 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우상들을 숭배하는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기 위해 자신들의 동족 여인들과 이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 역시 말라기가 사역하던 시절의 이스라엘인들의 태도를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증거들(1:2-5)을 여전히 보이고 계시면서도 정작 이스라엘이 자기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말을 하고 있다. 바벨론 유수가 보여준 바와 같이 언약의 파괴는 추방이라는 심판을 가져왔는데, 말라기는 위에서 지적한 논쟁적인 문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에 경고를 하고 있다. 피셔(Fisch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섯 개의 논쟁은 그 각자가 하나님에 대해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점들을 가르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는 각 논쟁의 서론을 분석하고 나서, 하나님 및 그 분이 그의 백성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주장들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1:2).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자 주인이시다(1:6).

   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자 창조자이시다(2;10).

   4.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2;17).

   5.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3:6).

   6. 하나님은 정직하시다(3:13).

   그러나 말라기는 단지 이스라엘이 그 과거의 죄 때문에 현재 회개해야 한다는 점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찬 이상을 제시해 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말라기는 환멸에 찬 시대에 사역을 했다. 이전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기가 영광과 권능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제시했다(포로기 이후 시대의 세대에 대한 이사야서 40장 이하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Klein 1987, 29-30을 보라). 그러나 이제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이방의 지배하에서 살고있었다.

   그래서 다른 여러 가지들 중에서 말라기는 보다 영광스러운 어떤 것에 대한 이러한 미래의 소망에 다시 불을 붙이고자 했다. 이제 한 날, 즉 하나님께서 인간사의 일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율법들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승리를 가져오시고, 율법들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가져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3:1-5; 4:1-6).


결혼과 이혼

   말라기의 결혼 제도에 대한 고결한 가르침은 구약 지혜 문학의 핵심을 반영하고 있다. 즉, 어려서 취한 아내를 동반자로 이해하며(2:14) 또한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공동의 책임을 가르치고 있다(2:15). 이것은 잠언 5:18; 10:1; 15:20; 31:26과 상통한다.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 축복된 거룩한 언약이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거룩한 교제 및 가정 제도를 설립하는 존귀한 결합이다(창 2:24; 겔 16:8; 호 2:19). 말라기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언약을 지키는 것과 배우자에 대한 언약을 지키는 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구약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언약 관계의 가족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2:1-3; 31:32; 에스겔 16:6-34; 호세아 2:1-19 등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세 율법에서 이혼 조항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일반적으로 제도화된 것이었다(창 3:1-19), 특정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생긴 것이었다(마 19:8). 이혼은 결혼한 상대와 맺은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러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생생한 어휘를 선택했는데, 2:14에서 “짝”이라는 표현으로 독특한 구약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는 “연합한다”라는 히브리 어원과 연관되어 있는데, 무엇을 건축하기 위하여 두 조작의 나무를 하나로 겹쳐 못질하는 상황을 가리킨다(출 26:6).

   말라기 선지자는 이혼을 한 후에 외국인과 결혼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했다. 그들은 히브리 종교를 오염시키는 결과는 낳았다(민25:1-9: 왕상 11: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쉽게 이혼하는 것을 말라리가 책망한 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도와 바울 사도의 한층 엄격한 교훈을 예상하게 헸다( 마 5:31-32: 19:1-10: 막 10:1-10: 롬 7:1-3: 고전 7:10-16, 39).

선지자 엘리야

   말라기 두 번째 부록(4:5-6)은 언약의 사자(3:1)를 엘리야 같은 인물과 연결짓는다. 엘리야는 몇 가지 이유로 인해서 선지 직분의 선구자로서 그 원형, 또는 모델로 생각된다. 첫째, 그는 종교적 정통성, 도덕적 정결성, 그리고 사회적 정의 등의 문제를 가지고 종교 지도자 및 정치적 지도자들을 담대하게 대항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직면하여 회개를 외치는 설교를 했다. 셋째,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다는 증거와 메시지는 초자연적인 이적이 증거 해 주었다. 넷째, 그는 진실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는데, 그의 사역은 이스라엘 사회의 기존 조직과 전통적인 제도권에서 벗어난 외침이었다.

   하나님이 진노와 메시야 시대가 시작되는 시간을 선포하는 선구자로서의 엘리야의 역할은 그 선지자에 대한 후기 유대 전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서락 48:10-11; 마17:3, 10; 27:47, 49; 요 1:21). 변화산에서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예수님에게 나타난 사실은 그의 선지 사역에 있어서의 종말론적 차원을 잘 반영해준다. 나사렛 예수는 말라기 예언 활동이 세레 요한의 활동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마11:7-15). 그리고 신약 성경의 기록은 엘리야와 같은 비전통적 생활과 사역을 한 세례 요한을 말하고 있다(마3:1-12; 눅1:14-17). 초대교회 역시 “선구자”에 대한 말라기 예언이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도래에 의해 메시야 적인 하늘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세례 요한의 선포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인식했다(막 1:2-8; 눅 1:16-17; 마 1:1-6).             


여호와는 아버지이며 왕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신학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편의만을 추구하게 하였고 그의 자녀로서 그를 합당하게 경배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선지자와 논쟁하였다 :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2:10). 말라기는 여호와는 위대한 왕이라고 답하였다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느냐”(1:6). 말라기는 그를 “만군의 여호와”로 지칭하였다 ; 다시 말하면 여호와는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를 통솔하는 거룩한 전사-왕이다. 선지자는 더 나아가 여호와의 왕국이 예루살렘과 성전과 제사장직을 너머 온세계로 확대되기 때문에 여호와에 대한 경배는 결코 성전에만 국한 되어질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사실상, 하나님은 성전의 의례들로 고통당하기보다 그의 왕국 어디서든지 참된 그의 자녀들로부터 진정한 경배를 받고자 할 것이다(1:11).

   말라기의 말은 예언 말씀의 성취를 가리킨다.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더불어 이방인 개종자들이 이미 여호와를 경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이 예언은 포로 후기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에 이르기까지 성취의 역동적인 진전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카이저의 말에 동의한다 : “만약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개종이 이미 첫 열매의 신호가 되었다면, 이 구절들에서 예기되는 완전한 추수는 아직 이루어져야 할 미래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일종의 전조로서 우리를 말라기 시대에 시작된 것에부터 메시아 시대로 이끈다.” 그의 백성이 이 예언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든지 그들은 그가 위대한 왕이며 또 항상 위대한 왕일 것을 알아야만 한다 :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1:14).


여호와는 그의 사랑에 있어 공의롭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한 공동체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선지자들에 의해 약속된 것으로 기대하였다. 성전 건축과 더불어 완전한 회복이 성취되지 않았고, 다윗 자손 스룹바벨이 죽었을 때, 기대의 불꽃도 꺼져 버렸다. 새 공동체는 선을 행하거나 회복을 기다리는 일에 인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작은 왕국을 조각해내는 일에 만족하였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시험하였다. 자득 자의하는 가운데,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된 승리와 영광과 번영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승리하지도 못하고 영광과 번영을 누리지도 못하자, 그들은 왜 아직 그들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지 또 왜 아직도 에돔인들이 존속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말라기는 그들의 근본 문제를 밝혀 냄으로써 그들의 의문에 답하였다 : 그들은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제한하였었고, 정의에 대한 인간적 지각을 만족하게 여겼던 것이다.


여호와는 세굴라를 사랑한다

    토론 언명을 통해 선지자는 먼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중심부에 있는 의문들을 공공연히 표현한 다음에 그 의문들에 답하였다. 첫 번째와 마지막째 질문은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는 것들이었다. 첫 질문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였는지를 물었다(1:2). 말라기는 그들에게 야곱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을 되새겨 보도록 하였다. 하나님과 야곱 사이의 역사적 유대는 소망의 기반이 된다. 야곱의 모든 자손들은 과거와 미래에서 약속들을 지켜 나가는 하나님의 신실성 안에서 소망을 정의해야 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과거에 그들의 조상 야곱에게 그의 사랑을 보여 주셨음과 미래에 에돔(열방)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멸당할 것을 설명하였다 :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1:5 ; 참고, 암 9:12 ; 옵 19).

    그러나 말라기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을 한정하였다. 현재의 언약적 특권들은 야곱의 자손에게 속할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않고 홀로 살기를 원하거나 불평하기를 택한다면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오히려 약속들의 성취는 세굴라의 것이다. 세굴라(“특별한 소유,” 3:17 ; 참고, 출 19:5 ; 신 7:6 ; 14:2 ; 26:18 ; 시 135:4)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인내하고, 반문화를 형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말 3:16 ; 참고 벧전 2:4-12).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인내하며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로만 국한된다 :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 4:2).

    하나님은 그의 신실한 종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그는 다만 그들로부터 그에게 합당한 경배를 받고자 하는 것뿐이다. 수세기 전에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를 섬기는 특권을 부여하였을 때, 그들에게 주어진 그들의 책임을(민 25:10-13) 끝까지 신실하게 수행했어야 했다. 그는 그들이 그에게 합당한 경배를 돌리고, 그와 동행하며, 그의 백성을 가르쳐 그를 따르게 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높이는 일을 신실하게 감당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들과 언약을 맺었었다(2:5-7). 그러나 그들은 분별력의 부족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완전한 무시와 물질적인 관심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만을 보였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또 하나님의 백성을 무분별과 이기심으로 타락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경건의 타락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심한 심판을 받았다(2:8,9).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위대한 왕에게 충성하며 헌실할 것을 호소하였다. 신실성은 구체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 (1)물질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함(1:6-14 ; 3:6-8) ; (2)결혼관계를 신실하게 지킴(2:10-16) ; (3)사회적 책임을 수행함(3:5) ; (4)여호와께 헌신함(3:16). 하나님은 남은 자들에게 주목하여 그들의 이름과 행위를 “기념책”에 기록하였다(3:16 ; 참고, 출 32:32 ; 시 69:28 ; 겔 13:9). 그들의 세대는 그들을 잊어버릴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말라기는 신실한 자들이 유혹과 불신실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지킬 것을 촉구하였다 :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2:15,16).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을 구성하는 경건한 자손이 얻어지기 때문에 결혼의 신실성을 지켜야만 했다(2:15).

    하나님의 또 그의 신실한 종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필요를 정규적으로 채워줄 것을 기대하였다(느 13:10-12). 이것은 율법에 십일조 형식으로 규정되어 있었다(레 27:30 ; 민 18:21).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그의 저주를 받았다(말 3:9). 그 저주는 오직 하나님만이 축복으로 바꿀 수 있었다(느 13:10-12). 그는 그의 충성스러운 종들이 그를 신뢰하고, 제자도의 대가에 무관하게, 관대하기를 기대하였다.

    세굴라는 교만한 자들과 종교적인 자들과 대조된다. 교만한 자들은 그들의 능력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시험한다. 종교적인 자들은 악한 자들을 축복하고(3:15) 그들의 번영을 부러워하며 경건의 보상이 있는지를 의심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혹은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무시한 채, 경제적 사회적 이득을 위해 이혼하고 결혼한다. 그들은 야곱의 유업을 받은 자들임을 주장하나 하나님 편에서 볼진대, 그들은 이미 버림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들은, 비록 그들이 이방인 신자들이라 하더라도(1:11), 새 공동체에 소속된다.



여호와는 축복과 심판에 있어 거룩한 전사이다

   말라기는 심판에 관한 예언 신탁들을 그대로 이루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확증하였다. 하나님이 약속과 축복들을 실현시키지 않았고 아직 악의 통치도 종결 짓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체는 약속의 유효성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신실성과 정의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신원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사랑을 어떻게 과시하였는지를 물었다. 그들이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게시냐?”(2:17)고 물었을 때, 사실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전사-왕이 그들을 위해 신원하심을 새롭게 증명해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호와가 그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모든 자들을 축복하고 악한 자들을 저주할 것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말라기는 응보의 원리를 내세워 그들의 냉소주의에 답하였다. 이 원리를 확증함에 있어, 그는 왕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나 들어갈 권리를 가지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적용하였다. 다시 말하면, 말라기의 대답은 많은 사람들을 축복의 시대에서 제외하였는데, 이 는 그들의 계명을 무시하고 다가올 왕국의 빛과 소망 가운데 살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 임한다(3:5, 18;4:1, 3, 6). 그리고 그 심판 날에 앞서 하나님의 종 엘리야(세례 요한, 말 3:1; 마 11:10 ; 막 1: 2 눅 1:76 : 참고, 말 4:5)와 언약의 사자(메시아, 3:1)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오는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정켤케 하고 그들과의 언약을 확증하기 위함이다(3:2-4). 오직 정결케 된 자들만이 오는 심판을 견딜 수 있으며 구속의 날을 위한 표를 받는다(3:16; 4:2). 그러나 끝까지 신실성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모두 내어쫓기고 말 것이다(3:5; 참고, 시 1:5-6 ; 계 21: 8;22 :15).

   “기념책”에는 세굴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세굴라는 남은 자 혹은 어거스틴이 말한 바 “불가시적인 교회”를 구성한다. 세굴라는 겸손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며 그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그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말라기의 시대에 이것은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계시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였다(4:4).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것은 아버지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 참고, 3:17 ; 시 2:7 ; 사 42:1)고 말씀하신 그의 메시아에게 먼저 자신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라기의 메시지 근저에는 윤리와 종말론이 서로 섞여 있는 왕국에 대한 종말론적 시각이 깔려 있다. 왕국에 대한 환상은 응당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하는 자들의 것이다. 그들은 정화와 구원의 과정(즉 구속사)이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의인들은 승리하며,  그들의 상급을 받고, 영광과(“의로운 해,” 4:2 ; 참고, 눅 1:78,79), 치료와(4:2 ; 참고, 사 45:8 ; 46:13 ; 53:5 ; 렘 30:17 ; 호 14:4), 자유를(말 4:3) 누릴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은 멸망할 것이다(3:18 ; 4:1,3 ; 참고, 시 1:6). 말라기는 신실성 (윤리)이 없이는 소망(종말론)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없이는 신실성이 있을 수 없음을 가르친다. 선지자의 그 신 중심적이며 종말론적인 윤리는 우리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또 확증된다. 그들 역시 소망을 제시하나, 왕국의 문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메시아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의로운 왕국을 구하는 자들에게만 열린 것으로 제한하였다(마 5:3-12, 17-20 ; 6:18 ; 눅 18:29-30 ; 갈 5:16-26 ; 계 21:7,8 ; 22:14,15).


                     신약으로의 접근


   마가복음은 말라기서 3:1과 이사야서 40:3을 인용문으로 시작된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막 1:2)


   말라기서의 소위 부록 부분은 이 사자가 엘리야라고 밝히고 있다. 엘리야는 승리와 심판의 날에 하나님에 앞서 등장한다. 신약에서 이 길을 예비하는 사자는 바로 세례 요한인데, 그는 말라기서 3:1-5에 묘사된 것과 같은 임박한 멸망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선행하며, 또 예수님의 지상 사역으로의 길을 연다. 그리고 말라기에서 예고된 이러한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엘리야가 요한이라고 밝히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마 11:7-15; 또한 눅 7:18-35를 보라). 블롬버그(Blomberg 1987, 104에 나오는 상세한 논의를 보라)는 여기에 고도의 기독론이 들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넌지시 자신을 말라기서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강림하실 여호와와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말라기서의 종말론적인 희망들은 복음서들에서 성취된다.

 

첨부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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