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1
1. 한국 보수주의 신학의 방향1
2. 보수주의 종말론에 대하여(전천년설의 문제점)6
성경적 종말론7
I. 종말론 논쟁7
1-1. 일관된 종말론8
1-2. 실현된 종말론8
1-3. 실존적 종말론9
1-4. 세대론적 종말론9
II. 구약의 종말론10
2-1. 래드의 종말론10
2-2. 후크마의 종말론12
2-3. 이사야의 종말 사상13
2-4. 하바국의 종말 사상17
2-5. 요엘의 종말 사상18
III. 신약의 종말론19
3-1. 세례요한의 종말 사상20
3-2. 예수의 종말 사상21
3-2-1.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차이24
3-2-2. 예수그리스도의 종말론의 종합적 진술24
3-2-3. 후크마의 예수님의 종말론25
IV. 마태의 종말사상40
4-1. 마태의 개인적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40
4-2. 마태의 역사의식44
4-2-1. 마태복음 1장에 나타난 역사의식44
4-2-2 마태의 미래적 종말 사상46
4-3.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 사이의 긴장(마 13장)50
4-4. 재림을 알리는 시대의 징조들(마 24장)51
4-4-1. 시대 징조들의 특징51
4-4-2. 징조의 세 가지 종류52
① 하나님의 은총을 반영하는 징조53
② 하나님께 반역하는 징조들54
③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들(마 24:6-8)57
4-4-3 징조 구분의 중요성58
V. 바울의 종말 사상58
5-1. 현존상태61
5-2. 중간상태62
5-3. 미래상태62
5-4. 미래상태의 “방아쇠 장치”(triggering mechanism)64
5-5. 환란전 휴거를 바울이 믿었는가?64
5-6. 영원상태 전에 천년왕국이 있을 것을 바울이 믿었는가?65
5-7. 묵시적 이원론에 관계된 용어들67
5-7-1. 양자됨67
5-7-2. 첫 열매68
5-7-3. 보증자69
5-7-4. 인(印)69
5-7-5. 육체의 부활사건70
VI. 사도요한의 종말 사상72
6-1. 요한복음72
6-2. 요한계시록75
부록80
1. 예수의 천국 비유80
2. 예수의 감람산 강화(마 24-25장, 막 13장, 눅 21:3-36, 17:22-37)83
3. 야고보의 종말론84
서 론
종말을 알기 위해서는 시작, 즉 창세기를 알아야 한다.
1. 한국 보수주의 신학의 방향
1-1. 복음주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역동적(Dynamic)이기 때문에 신학도 역동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을 할 때 명사형으로 이해하지 말고 동사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 생명, 구원 등등에 대해서도 동사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보기) 교회----명사형은 건물을 가리키나 동사형은 공동체를 가리킨다.
1-2. 삶이 무엇이냐?(조신․고 1조 1항)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지혜라 한다. 삶의 지혜는 경건의 능력을 가리킨다고 칼빈은 말했다.
지혜에 근거한 경건의 능력있는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경건의 능력이 있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성경안에서 복음을 접하여 복음을 파악하고 이해할 때 가능하다.
1-3. 그렇다면 경건의 능력있는 삶을 가능케 하는 성경은 무엇인가?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살전 2:13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였고 히 4:12에서는 성경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벧전 1:23에서도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씀은 변화와 개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 롬 1:16에서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하면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신자들로 하여금 경건의 능력있는 삶을 가능케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역동적인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자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1-4, 그렇다면 신자들로 하여금 역동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이 복음(말씀)은 누가 주셨는가?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살아 계신 생령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무한, 불변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과거에도 역사하셨고, 현재에도 역사하고 계시며, 미래에도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시되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즉 섭리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실 때는 주로 말씀으로 섭리하시고 도한 여러 방편, 즉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여러 방편에 대해서 알게 될 때 일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삼위의 하나님은 인격적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삼위의 하나님은 그 안에서 섬김, 사귐, 나눔을 충만히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격적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섬김, 사귐, 나눔이 그 안에 충만히 있다는 것이다.
성자는 중보자를 가리키며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그리고 성자는 양자의 영, 진리의 영을 가리킨다.
1-5.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이다.
1-5-1. 피조된 인격체
피조되었다는 의미==인간은 의존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피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격체라는 의미==인간은 책임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존적이되 책임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은혜와 열심은 정비례하고 믿음과 열심히 정비례한다. 믿음이 크면 열심도 크고 은혜가 크면 열심도 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학과 신앙은 열정적이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능동적인 신앙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은혜 100%+인간의 책임 100%이다.
1-5-2. 영․육 통일체
영과 육은 우리 몸에서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과 육을 모두 관리를 잘 하여야 한다. 예) 음식과 노동을 통한 관리가 필요
교회의 세속화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내 신앙(영혼)만 지키고자 하는 것이 세속화이다. 즉 교회 안에서는 열심히 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세속화이다. 어째서 이것이 세속화인가? 그것은 세사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교회는 교회에만 관심을 갖고 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이나 관여를 하지 말라 한다. 교회가 이러한 세상의 주장을 수용하여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고 교회 안에서만 열심을 내었기 때문에 이것이 곧 세속화이다.
그러므로 영과 육의 통일성을 무시하는 즉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성도가 세속에 빠지게 할 수 있다.
1-5-3.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은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이다(이것을 후크마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은 의, 지식, 거룩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고 자연을 보호하는 열심을 통해서 나타난다. 즉 하나님과는 사랑을 이웃과는 섬김을 자연에 대해서는 청지기적 직분을 감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 때 가능한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삶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노동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인간 존엄성의 첫 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담을 흘리지 않고 게으른 생활을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삶의 첫 걸음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노동을 통해서 땀을 흘릴 때 그 가치가 나타난다. 사도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람은 trouble maker이다. 그러나 노동을 하는 사람은 peace maker이다.
1-6. 인간이 왜 가치와 존귀성을 상실하였는가? 그것은 죄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의 기능은 무엇인가?
죄로 인하여 인간은 극단적으로 두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교만과 자만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때 자신을 합리화하여 교만에 빠지던지 아니면 죄를 지은 후에 죄 책감에 빠져 자신을 학대)자학)하게 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현상을 보이는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교만한 인간은 쾌락주의에 바지고 자학하는 인간은 금욕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려 죄를 지은 인간은 결국에 가서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멸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므로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다. 말씀은 변화시키고 개혁시키는 능력이 있는데 이러한 능력이 있는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성화되지 않는 삶이며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삿 21:25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였는데 인간은 자기 멋대로 즉 자기 소견대로 살다가 망하게 됨을 알 수있다.
인간의 마음 속에 말씀이 있으면 인간은 자유를 누린다. 인간은 죄 때문에 자유를 상실하고 육체의 노예가 되고 마귀의 노예로 살게 하여 인간을 방종하게 한다.
1-7. 죄에 대한 해결책
죄가 사망을 주므로 죄를 없애면 된다. 사망을 없애는 방법은 생명을 주면 되는 것이다. 생명을 부면 사망은 사라지게 된다. 생명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여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인간이 말씀 안에 있다는 증거는 자유한 삶을 누릴 때 나타난다. 즉 복음이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 자유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이를 벗어난 것은 방종이다. 질서 안에서의 자유만이 자유이다.
인간이 복음이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 마귀의 의도를 알게 되어 인간을 죄와 사망의 노예로 만드는 마귀를 이길 수 있게 한다. 3:17-19에서 하바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라고 하면서 비록 나에게 아무것도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만 즐거워한다고 고백을 한다.
그리고 빌 4:13에서는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면서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삶을 말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롬 8:31-39에서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라고 하면서 주님을 통하여 넉넉히 이기는 삶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 안에 거하는 신자의 삶의 모습이다.
1-8. 만족한 삶을 유지하는 방법
성경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가능하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역은 무엇인가.?
1) 믿음을 심어 준다.---이것은 개인적인 측면이다.
2)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운다---교회적인 공동체
그러므로 복음 안에 거하는 자는 믿음이 자라고 견고하고 믿음이 역사하고 믿음이 활동적이어야 한다. 믿음은 일을 한다. 믿음은 우리를 거룩 , 즉 성화시킨다. 성황의 목표는 우리 몸의 영화(롬 8:29-30)이다. 그리고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는 동사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역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인 것이다.
믿음의 사역은 개인적이 아니라 교회를 통한 공동체적인 사역이다. 믿음이 사역은 섬김과 사귐이 있어야 한다. J.Calvin은 거룩을 과부와 고아와 같은 이웃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9.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은 어떻게 보장되어 있는가?(구원론)
1) 예수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통해서 보장된다.
2) 성령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통해서 보장된다.
예수(성령)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다루는 것이 종말론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을 잘 알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삶이 보장된다.
종말론은 끝이 아니라 꽃을 피우는 즐거움의 신학이다.
이러한 것들을 누리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종말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2. 보수주의 종말론에 대하여(전천년설의 문제점)
박 형용박사의 종말론(내세론)은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2-1. 종말론이 Dynamic하지 않다.
최 권능 목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현세보다 내세에 더욱 큰 소망과 관심을 유발시킨다. 천당은 죽음 이후의 샅이다. 천국의 역동적인 것이 무시된다. 역동적인 종말론이 없으면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 즉 죽음 이후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 사회 윤리가 사라지고 교회가 세속화된다.
(ex : 교회와 정부(정권)가 타협을 한다. 이것은 박 형용박사의 내세론의 악한 열매의 모습이다)
2-2. 개인의 구원에만 큰 관심을 갖게 한다.
사회적 윤리와 역동성의 상실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리고 성령론에도 문제점이 있다. 내세 지향적인 성령론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성령의 역동성을 약화시킨다. 오순절에 역사하신 성령께서 지금도 역사하시고 앞으로도 역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론에 대한 이해를 함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이해가 중요하다.
지금도 성령께서 역사하신다---종말론적 관심
성령의 역사는 이미 끝났다----구원론적 관심
성경적 종말론에 대하여
종말론은 최후의 일들에 대한 체계적 연구로서 조직신학의 갓돌(capstone)이다. 이는 조직신학의 각 영역마다 아직 대답되지 아니한 문제에 대하여 종말론이 그 대답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신론의 경우--하나님이 그가 하시는 일에서 최종적으로 어떻게 온전하게 영광을 받으시게 되며 어떻게 하나님의 경륜이 충만하게 실현되는가?(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인간론의 경우--죄의 파괴적 영향이 어떻게 온전히 극복되는가?
기독론의 경우--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완전한 승리를 누리게 되며 그가 영광을 누리게 되는가?
구원론의 경우--성령의 사역이 어떻게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구속과 영화를 마무리 하는가?
교회론의 경우--교회의 최후의 영화(apotheosis)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종말론이 대답을 주는 것이다.
특별히 많은 현대 신약 학자들의 주장하는 것을 보면, 신약신학은 종말론 그 자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전체적으로는 적어도 구원론과 윤리와 관련하여 종말론적으로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
종말론을 다루는 성경적 자료는 전통적으로 두 부류가 잇다. 하나는 죽음, 영혼의 중간상태, 몸의 부활, 최후의 심판, 그리고 개인의 최종적 영원한 운명(천국과 지옥)을 다루는 개인 종말론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신천신지를 다루는 우주적 종말이 있다. 그런데 신자들의 영화와 불신자들이 유기로 귀결되는 개인 종말은 하나님의 영원한 우주적 절망과 완성으로 귀결되는 바 미래 종말의 한 국면인 것이 사실이다.
I. 종말론 논쟁
19세기와 20세기 초엽의 고전적 자유주의(대표:아돌프 폰 하르낙)는 복음서들의 종말론이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 속하지 아니하고, 1세기 초대교회의 열정적 분위기의 산물이라 보고 전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들이 주장에 의하면 예수는 본래 도덕 교사로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무한한 가치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윤리를 가르쳤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 견해는 철저하게 배제되고 예수와 신약의 종말론에 대한 각양의 대안적 연구들이 제시되었다.
1-1. 일관된 종말론
바이스가 예수의 신국선포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있어서 종말론적 요소는 껍데기가 아니라 핵심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슈바이쳐가 신국의 신비와 역사적 탐구에서 바이스의 주장을 확대하여 예수는 19세기의 사람이 아니라 1세기 사람이었고 그 시대의 유대주의 묵시가 예수의 메시지에 본질적 요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그의 허왕된 묵시적 꿈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그의 삶을 헛되게 내버린 망상적 광신자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생전에 임할 것으로 생각하고 가르쳤으며 자신을 메시야로 믿었다.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말론적 동기를 일관되게 철저히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의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종말론적이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마지막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이전에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 10장에 진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 재림이나 “메시야적” 고통이 그가 예언했던 대로(마 10:23) 일어나지 아니하자 예수는 그가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첫번째 재림의 지연). 그래서 그는 새 시대를 위한 대속물로서 자기 홀로 메시야적 불행을 짊어지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상에서 자기의 오류를 새롭게 깨닫고서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한(마 27:46) 망상에 전적으로 사로잡힌 사람으로 죽었다. 그는 하나님이 전혀 의도하지 아니한 어떤 일을 위해 헛되게 노력한 나머지 자기의 무덤을 판 사람이었다.
이 견해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종말론적 내용은 비록 그것이 예수에게는 중심적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홀스트롬이 잘 지적한 대로 슈바이쳐의 종말론은 자유주의 기독론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형식상으로는 종말론을 주창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은 종말론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윤리는 리츨의 경우보다 훨씬 참된 기독교에서 더 멀어진 인본주의 도덕에 머문다.
1-2. 실현된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은 캠브리지 학자인 도드(C.H. Dodd)와 주로 연관이 있다. 슈바이쳐의 일관된 종말론을 강렬하게 반대하여 도드는 왕국의 비유와 사도적 선포와 발전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실상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이 왕국의 도래를 가능케 한 것이다 도드에 따르면 예수는 크게 미래에 관심이 없었다. “미래 종말론”은 예수가 곧 바로 재림하지 아니하자 유대 묵시문학에 근거하여 후대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재구성한 결과로 신약에 도입된 것이다. 예수는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기보다는 자기가 살던 시대와 장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종말론은 시간적 관점에서 마지막 일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역사의 끝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영원히 현재적인 것”을 중요시 한다. 묵시적 언어는 바로 이러한 진리에 대한 옛 표현이다. 성경 주해자는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 동일한 진리에 대한 세 가지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을 비판하는 자들 가운데는 예레미아스와 쿨만이 있다. 특히 쿨만은 그의 그리스도와 시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결정적 승리를 이룬 D-day와 그 다음에 따르는 V-day라는 유명한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종말론을 소개하였다. 이렇게 하여 쿨만은 신약 종말론의 “이미”(the "already")와 “아직”(the "not yet")을 놓치지 아니했다.
1-3. 실존적 종말론
불트만은 그의 신약신학에서 실존주의적 종말론 사상을 주장한다. 인격적 중대한 결정의 순간이 바로 “종말론적”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종말(에스카톤, ʾεσχατον)은 개인적 인간 존재에게 진정한 존재를 위해 결단할 기회가 주어지는 시간(카이로스, καιρός)이라고 불트만은 주장하는 것이다. 도드의 주장과는 다르지만 종말은 역사적 예수의 사역에서 그때 “이미” 실현되었다. 불트만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 도래를 선포한 유대묵시적 예언자에 지나지 아니했으나 그의 케리그마의 신화적 요소를 제거할 경우 지금 여기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그의 케리그마의 선포에서 종말이 이미 실현되었던 것이다.
“종말론적 메시지에 대한 필수적인 요소는 그 메시지를 통하여 일하며 결단을 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그 메시지가 포함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개념이지 세상 종말이 임박해 있다는 신앙이 아니다”라도 불트만은 주장하였다.
1-4. 세대론적 종말론
슈바이쳐, 도드, 그리고 불트만과 같은 비판적 학자들에 의하여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황무지를 세대주의 종말론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이때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성경적 신앙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느날 진실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말론이면 어느 것이나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까닭에 1909년과 1917년판 스코필드 관주성경에 의해 주로 주장되기 시작한 환란전 전천년설이 범람하게 되었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이 유대 백성들에게 나타난 후, 계시의 순서상 일어나야 하는 다음 일은 다윗 왕국의 건설이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신 바로는, 아직 계시되지 아니했지만, 왕국과 왕이 거절 당하는 일과 장기간의 신비한 형태의 왕국과 십자가에 대한 전세계적 선포와 교회를 불러 모으는 일등이 나타났다.” 이스라엘의 미래적 축복들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과 현세대의 교회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세대주의자들은 주장했다. 구약은 지금의 세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했다. 이 세대는 예언자 시대에서 볼 때 “대 삽입”(grand parenthesis)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미래적 축복에 대한 모든 구약의 예언들은 이 “대 삽입 교회 시대”에 뒤이어 나타나고 교회의 환란전 휴거와 유대인과 세상에게 다같이 임하게 될 다니엘이 말한 바 “일흔번째 주”의 대환란과 천년동안 철장으로 열국을 다스릴 그리스도의 재림이 선행되는 유대적인 천년왕국에서 성취될 것이 분명하다. 그의 천년통치 후에 그는 그의 남은 모든 적대 세력을 파멸시키고 대백보좌 심판시에 재판장이 되시며 하나님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그이 나라를 아버지께 넘기실 것이다.
II. 구약의 종말론
예수는 그의 공적 사역을 시작함에 있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막 1:15)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그가 사용함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하여 아무데서도 결코 정의하지 아니했다. 아마도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아 용어와 그것의 내용에 적어도 친숙했기 때문인 듯하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사용되어 있지 아니하지만 하나님이 자주 왕으로 호칭되고 있는 사실에 그 개념이 나타나 있음에 확실하다(예, 이스라엘의 왕으로 호칭된 경우--출 15:18, 민 23:21, 신 33:5, 시 84:3, 사 43:15, 온 세상의 왕으로 호칭된 경우--왕하 19:15, 시 29:10, 47:2, 96:10, 97:1-4, 145:11-13, 사 6:5, 렘 10:7, 46:18, 단 4:34-35).
2-1. 래드의 종말론
레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구약의 개념을 다섯가지로 요약하였다.
1) 역동적 희망. 2) 종말론적 희망, 3) 지상적 희망, 4) 역사적으로 정향된 희망, 5) 윤리적 희망.
첫째로, 역동적(Dynamic) 희망은 이스라엘이 기대한 하나님의 “왕국”이란 주로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되었고 그이 통치가 행사되고 사람들의 세계와 세상 자체에 미치는 그 통치의 영역(시 145:11,13)은 부차적이었음을 뜻한다.
둘째로, 종말론적 희망(Eschatological)은 이스라엘이 점점 더 하나님을 멀리하여 물러가고 경건한 자들이 “왕국”을 창출하는 방편으로 역사를 보지 아니함에 따라서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역사의 마지막에 그이 남은 자를 속량하고 불경건한 자와 사악한 자를 심판함으로 역사를 영광스럽게 완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직접 대 격변을 통해 개입하실 것을 점점 더 강렬하게 말한 것을 뜻한다.
셋째로, 지상적 희망(Earthly)이란 구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미래적 희망이 비록 종말론적이지만 항상 땅을 “인간 존재의 섭리적 장(場)”으로 전제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사 11:9, 35:2, 65:17, 66:22).
넷째로, 역사적으로 정향된 희망(Historically orientated)이란 예언자들은 비록 복합적이지만 하나의 단순한(single) 희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희망은 가까운 역사적 미래와 궁극적 종말론적 미래를 동시적으로 보았으며 연대기적 순서와 관계없이 가까운 미래를 궁극적 미래의 관점에서 보았던 것이다(예, 주의 날에 대한 선지자들의 관념).
다섯째로, 윤리적 희망(Ethical)이란 하나님의 미래 왕국에 대한 약속이 하나님께 충성스런 자들만을 위해 희망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변함없는 윤리적 요구가 이스라엘에게 다르며 그들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만이 기다린다.
레드의 왕국 개념에 우리는 메시야적 희망을 덧붙이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의 메시야적 희망과 관련하여 게할더스 보스는 다섯가지 필수적인 측면들이 있음을 주목한다.
1) 사람들에게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고 있는 바 사람에 대한 통치의 부과이다(창 49:10, 민 24:17-19, 눅 17:20).
2) 메시야가 “위대한 최후의 왕”이 되리라는 사상에 반영되어 있는 바 종말론적 요소이다. 이 왕은 현 세상 질서의 마지막에 나타나 미래 세계를 연다. 그런 점에서 메시야는 종말론적 역사의 중심점에 서 있다(시 2:8-12, 사 9:2-7, 단 2:44, 7:13-14, 말 3:2-3, 4:1-5).
3) 메시야적 희망에 담겨 있는 초자연적 요소이다. 메시야는 현 세게 질서와는 본질상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 질서를 창조한다(사 11:1-9, 32:15, 65:17-25).
4) 구원론적 요소이다. 주님은 메시야를 통하여 영적 전투적 구원을 성취하시며, 자기 백성을 심판에서 구출하여 다가올 새 세계의 축복된 상태로 인도한다(사 9:4-5, 11:1-16, 미 5:4-5, 슥 9:9-10)
5) 메시야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차지하고 있는 종교적 위치와 관련이 있다. 그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권리가 있고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2. 후크마의 종말론
후크마는 구약의 종말론적 전망이 구체적으로 성취된 일곱가지의 특별계시적 개념들에 주목함으로써 종말론적 전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오실 구속주에 대한 기대---그는 먼저 “여자의 씨”(창 3:15)로, 그 다음에 “아브라함의 씨”(창 22:18)로, 그 다음에는 유다지파의 후손(창 49:10)으로, 그리고 특별히 다윗의 자손(삼하 7:12-13)으로 계시되었으며 아주 분명하게는 아니지만 독특하고 최종적인 방법으로 선지자(신 18:15) 제사장(시 110:4), 왕(슥 9:9), 하나님의 고난의 종(사 42:1-4, 49:5-7, 52:13-53:12), 그리고 이자(단 7:13-14)의 직분을 행하실 것으로 기대되었다.
2)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에게만 아니라 전세계에 온전히 미치게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단 2:44-45).
3) 새 언약의 체결--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와 우상숭배를 용서할 것으로 기대되었다(렘 31:31-34).
4) 적대적 열국들의 포로상태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이 기대되었다(사 11:11, 렘 23:3, 겔 36:24-28).
5)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이 기대되었다(욜 2:28-32).
6) 주위 날의 임박이 기대되었다. 그날이 믿지 않는 이방들에게는 심판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이 될 것이다(욜 1:15, 사 13, 암 5:18-20, 습 1:7, 말 4:5).
7) 신천신지의 창조가 기대되었다(사 11:6-9, 32:15, 66:22).
다가올 주의 날과 관련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욥 19:25-27, 시 73:24-25, 사 26:19, 단 12:2, 참조. 마 22:29, 32, 히 11:10, 13:16,19)과 뒤따르는 심판(시 50:4-6, 전 12:14, 말 3:2-5)을 또한 보았다.
이 모든 종말론적 일들이 구약 성도들을 위하여 역사의 지평선에 흐릿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이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일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도 온전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선지자 자신들까지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는 상고 하느니라”그러나 베드로가 계속하여 진술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상고하였어도 겨우 이 정도만 그들에게 계시되었는데 그나마도 “이 섬긴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다가오는 세대의 성도들)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다(벧전 1:10-12).
몰트만은 성경의 종말론을 논하면서 종말론은 “마지막 부분에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는 종말론이며, 소망이며, 앞을 바라다보며, 앞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현재를 혁신하고 변혁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적이란 단순히 기독교의 한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매개체이며 관건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안에 모든 것들이 놓여 있다.... 따라서 종말론은 단순히 기독 교리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종말론적 개관이야말로 모든 기독교 선포의 특징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특성이고 전체 교회를 특징지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다.
2-3. 이사야의 종말 사상
이사야는 기원전 740-720 사이에 웃시야 왕 때에 유대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이사야의 종말론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2대 사건을 알아야 한다.
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는 사건이고(B.C. 721),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자 남 왕국 유대의 히스기야 왕은 위기의식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희년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 두 번째의 사건이다(기원전 702년, 사 37:30)
희년은 하나님게서 제정하신 것으로서 이 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면에서 자유와 평 등을 선포하는 것이다. 남쪽 유대는 히스기야의 이러한 희년 선포를 통하여 반바알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잇야의 종말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던 때에 남 왕국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로서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웃시야로서 웃시야의 선조 중에는 여호람(왕하 8:18; 대하 22:18,20)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은 아하시야이다. 여호람의 죄로 말미암아 아하시야는 단지 1년 동안만 통치를 하게 되고 그 뒤를 이어 요아스가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아달랴라는 자가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쫒아내고 요아스를 도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며 통치를 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러나 대제사장 요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바알을 숭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요아스를 비방하자 요아스는 스가랴를 돌로 쳐죽였다.
요아스의 뒤를 이어 아마샤가 왕이 되고(왕하 25장) 그 뒤를 이어 웃시야가 왕이 되었다. 웃시야 시대에 앗수르가 군사 경제적으로 약해지자 이틈을 타서 웃시야가 군사 경제를 정비하여 유대가 흥황하게 군사 경제적으로 흥황하게 되었다(대하 26). 그리하여 웃시야가 교만하여지고 이를 본 하나님게서 그를 문둥이가 되게 하셨고 대신해서 요담을 왕이 되게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알 종교는 여호와의 통치권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여호와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 바알 종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바알 종교를 가진 유대의 특징을 이사야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2)--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여호와를 머릴하고 물러남
(사2:7-8)--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금은보화 마필 병거가 많다---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우상을 섬기고 군사력을 증대하였다.
(사3:14)--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권력층이 부ㅜ패하면서 가난한자를 핍박하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권력층의 부패상을 보여 주고 있다.
(사5:8-12)--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여호와의 통치권을 멀리 하면서 부동산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는 레위기 23:10에서 땅은 여호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어는 한 개인이 독점하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의 부패한 자들이 여화의 땅을 자기의 것인양 많은 당을 독접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여호와의 것을 취하는 죄로서 거기에 나타나는 현상은 남자들은 향락을 추구하게 되고 여자들은 사치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사야 시대에 나타난 종말론적 현상의 특징은 그리하여 여호와의 주권을 멀리하고 여호와의 주권과 통치를 부인하고 부동산 투기에 전력투구를 하여 남자는 향락을 추구하게 되고 여자는 사치를 하게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이 종말론적 현상이다.
딤후 3:1-5에 나타난 종말론적 특징은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통이 따른다고하고 있다. 그런데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하난이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부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는등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행위를 일삼는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사라지고 인간적인 탐욕을 추구하여 강포하고 항상 악을 행하다. 이는 아담 때부터 지은 죄가 증폭됨을 의미하며 언약을 파기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고통 중에 있을 대 그들을 방치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종말론적인 vision을 제시하신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 vision은 다음과 같다.
(사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남은 백성(언약백성)을 통하여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이러한 남은 자에 대하여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사회적이고 구족적인 죄)를 사하신다. 즉 세상의 교회가 약하고 악이 승한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게서는 어약을 이루어가신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임마누엘(메시야)의 징표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이러한 종말론적 vision은 메시야게서 오신다는 것이다. 즉 구ㅜ언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시야께서는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시는가?
사 53장---오실 고난의 종---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가?
(사6:1-3)--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죄(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죄)에서 구원하신다.
(사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65:18)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사65: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사65: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사65:22)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사65: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사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사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66: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새 하늘과 새 땅 창조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이사야에 나타난 종말론족인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로 태어 나시고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 그리흐도를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천신지가 이루어진다는 것으로서 이사야는 바알숭배와 향락과 사치가 있는 것을 보면서 에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에언하고 그를 통하여 죄가 사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신천신지가 이루어짐을 보았다.
2-4. 하바국의 종말 사상
하바국은 기원전 610-600에 활동하던 선지자이다. 이 시기는 유대의 멸망(B.C.586)이 가까운 시기이며 여호야김 시대로사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의 선지자이다.
유대왕 요시야가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게 되고(왕하 23:29-30) 유대 왕들이 부패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신흥국인 바벨론을 세우셔서 유대를 응징하시고자 하셨다. 이때 유대는 애굽왕의 마음을 움직이고 자시의 향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백성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징수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게 되었다(왕하 23:31-35)
이렇게 시대가 악할 때에 하바국은 합 1-2 장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이 시대를 djejg게 하여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
합 2:3-4에는 하바국의 종말론적 사상이 나타나는데 그 특징은 고통으로 나타난다. 그 고통은 사회적, 경제적, 영적 고통으로 총체적인 고통을 가리킨다.
합2:3-4에서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가 10:34,37-38에서 인용을 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고통을 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히브리서에서 합을 이용한 것을 살펴보면 합의 종말론적인 사상을 알게 된다.
합에서의 “정녕 응하리라”는 의미는 정한 때에 하나님의 묵시가 응하리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잠시 잠깐 후면~오실이가 오시리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때가 차면 종말에 오실이가 오시리라는 의미이다.
때가 차되 오실이를 믿지 않는 자는 더욱 강포해지고 때가 차서 믿는 자는 오직 믿음으로 살게 된다.
벧후 3:9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신다고 하였다. 즉 성도는 고통 중에 있을 지라도 인내하여 오실이를 기다리라는 것이 하바국의 종말론 사상으로서 이는 기독론적이고 구원론적이다.
2-5. 요엘의 종말 사상
요엘은 주전 830-800 사이의 요아스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로 추측된다. 요아스는 자신을 돕던 여호야다가 죽자 희년을 지키지 않고 바알을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욜 1:10,20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큰 쟁아이 임함을 알게 한다.
욜 2:28-32은 요엘의 종말 사상을 나타낸다. 28절에서에서 “그 후에”라는 말은 23절의 “전에”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이며, “전에”라는 말은 “전과 같은 것”, 혹은 “처음에“라는 의미도 가능하다.
땅이 헐덕거릴 때 먼저 비를 주신다. 그리고 신(성령)을 주신다.
2:23의 비는 이른 비를 가리킨다. 여기서 이른 비는 히브리어로 הרומ로서 이는 “이른 비” 또는 “교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적당하게”란 단어는 הקדצל인데 이는 “의를 위하여”, “ 의(義)에”로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적당한 비를 주신다”는 “의의 교사를 보내 주신다”라는 의미로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 절의 의미는 “내가 의의 교사를 먼저 보내어 모든 사람ㅇ게 은혜를 골고루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욜 2:28의 “그 후에”는 행 2:17에서 베드로가 “말세에”로 번역하여 인용하고 있으며 “만민에게”는 “”모든 육체에게“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29는 신분, 지위, 인종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을 알게한다.
2:31은 천지개벽이 일어남을 알게 한다.
2:32의 “여호와의 이름”을 행 2:21에서 “주예수의 이름”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엘의 종말론적 사상은 에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성령의 우주적인 부어주심과 초림과 재림 사이에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어 사실상 구원 사역이 끝날까지 활발하게 계속된다는 것이 요엘의 종말론적 사상이다.
III. 신약의 종말론
눅 1:16-17(말3:1; 4:5-6)은 신학의 종말론의 시작을 보여준다. 신약의 종말론은 세례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관하여 엘리사벳과 마리아에게 전해 준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눅 1:16-17)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신약의 계시가 보류된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다. 즉 말라기 3:1과 4:5-6의 예언들이 성취되므로 바로 그 계시와 연결되어 신약의 계시가 시작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가랴가 세례요한에 대하여 예언한 것(눅 1:16-사 4:3의 성취)도 그 내용으로 보아 세례요한은 말라기가 예언했던 바 주께서 자기의 오심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키려 자기 앞에 보내고자 한 주(예수)의 “엘리야 같은 선구자”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예수님 자신이 마 11:14과 17:11-13에 증거하였다.
마리아(눅 1:54-55)와 사가랴(눅 1:68-75)는 다같이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의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편, 시므온(눅 2:29-32)과 안나(눅 2:38)는 나중에 아기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 그리고 “예루살렘의 구속”으로 표현하였다. 시므온은 또한 아기 예수의 사역이 비극적인 면도 포함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눅 2:34-35).
이를 통해서 볼 때 예스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성취됨을 보야주면서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알게한다.
3-1. 세례요한의 종말 사상
--講義--
세례 요한은 회개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여 설명한다. 즉 회개한 곳에 하나님 나락 임한다고하여 회개를 통한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면서 이미 시작된 종말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심판한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나타내어 심판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강조하였다.
요한은 회개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심판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동일시하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 차이를 인식하지(언급하지) 않은채 종말론을 설명하였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종말론의 특징이다.
--冊--
예수의 선구자로서 요한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것을 요구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고 말하였다. 이 기본 메시지를 그는 보충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0-12)
여기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함은 역사속에서 확정적으로 결정적인 때가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과 “불로 세례를 주며 태우리라”는 말은 예수님에게 구원과 심판의 권세가 있음을 요한이 시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고자 하며, 그의 나라가 은혜와 심판으로 역사 속에 뚫고 들어오려는 것이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구원과 심판의 권세가 있음을 시사하면서 그의 구원과 심판 사이에 아무런 시간적 간격을 언급하지 아니한 것은 구약 선지자들의 정향된 단순한(single) 희망의 고전적 실례이다. 구원과 심판에 대한 연대기적 연속성이나 시간적 간격에 관심이 없었던 까닭에, 나중에 요한은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마 11:3)하고 물었던 것이다. 이렇게 물은 것은 요한이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의심한 까닭이 아니라, 메시야가 오시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불로 심판하리라고 그가 선포한 것을 당장 예수가 행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이기에 느껴지는 그의 예언자적 성급함 때문이었다.
3-2. 예수의 종말 사상
예수는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그의 선구자인 요한보다 더욱 분명하게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였다-이 말슴은 세례 요한의 말을 확증해 준다. 이를 두고 누가는 “오늘날 이 글(사 61:1-2)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표현하였다. 나중에 예수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헬라어로 중간태 동사 비아제타이(βιάζεται)가 사용됨) 침노하는 자(헬라어, 비아스타이(βιασταί)가 사용됨)는 빼앗느니라”(마 11:12, 눅 16:16).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능력있게 활동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서 복음을 듣는자는 능동적으로 지금 현재 반응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임재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 “침노하는 자” 가운데 몇몇, 곧 바리새인들에게 선언하기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눅 11:20)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할 것인가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묻자 예수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고 하였다. 예수는 또한 자기를 대적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 손이 닿는 곳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고 선언하였다. 끝으로, 최후의 유월절 만찬상에서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긴다”(눅 22:29). 분명컨대, 예수의 경우 하나님의 나라 또는 “통치”가 그 자신의 인격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오심을 통하여 지금(현재적으로) 이 땅에서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온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시작된 종말)
그렇지만 또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미래의 어떤 것으로(as something future) 말씀하였다. 즉, 그의 권능이 충분하게 나타나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미치게 되는 때 그가 영광 중에 오심(파루시아-παρουσία-)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는 저기의 제자들에게 “당시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마 6:10) 하고 기도하라 가르치고 나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그는 또한 이렇게 확언하였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12).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그는 그의 감람산 강화(Olivet discourse)에서 자기의 미래 재림과 나라를 이같이 묘사하였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 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1-34).
끝으로, 최후의 유월절 식사 때에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9). 이로 보건대., 예수의 경우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최종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미래에야 가능케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미”와 “아직”간의 이같은 긴장 관계에서 우리는 “묵시적 이원론”(apocalyptic dualism), 즉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나 다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오고 있다는 신약의 파라다임을 보게 된다. 구약 성경이 연대적으로 분명하게 구별되지 아니하고 비록 복합적이지만 단순한 단위(a single though complex unit)로 묶어서 표현했던 것을, 예수가 이제 구별지어 분명하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은혜 가운데서 임하고 그 다음 나중에 미래의 대격변의 권능과 큰 영광 가운데서 그것이 역사 속으로 임하게 될 것이라 하셨다.
후크마는 그의 개혁주의 종말론에서 신약의 종말론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세 문장으로 요약한다.
1. 우리는 신약에서 구약에 예언된 종말론적 사건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2. 우리는 신약에서 구약의 기자들이 하나의 운동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 것이 두 단계 즉 현재의 메시야 시대와 미래 시대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3. 이 두 종말론적 단계간의 관계란 현세대의 축복들이 미래의 더 큰 축복들의 보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신약에서 발견한다.
이같은 신약의 종말론의 “묵시적 이원론”을 예수의 천국 비유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3-2-1.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차이
요한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 사이의 시간적 차이를 모른다.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임할 하나님 나라 사이의 시간적 간격과 연속성이 있다고 하면서 관계성을 알고 있다-묵시적 이원론(apocalyptic dualism)-.
예수님은 마 13장에 소개되어 있는 7개의 비유들이 천국의 어떤 “비밀”을 계시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3:11). 이 비밀이 무엇인었는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13:17에서 설명하고 계시며 13:34-35에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마 11장에서 세례 요한의 질문은 예수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야가 아니므로 한 질문이다. 세례 요한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는 능력으로 심판하는 나라였다. 그러마 예수님이 도래케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마 11:5의 모습이다. 즉 은혜로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이점을 생각하면서 13:11은 세례 요한이 생가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긍휼로 용서하는, 은혜의 하나님 나라를 알리겠다는 것이다.
3-2-2. 예수그리스도의 종말론의 종합적 진술
예수님의 오심으로 종말이 시작되었고(갈 4:4) 임마누엘이 성취되었으며(마 1:23), 성전이 건설되었다(요 1:14) 예수님의 순종의 삶을 통해서 율법이 성취되고 이로써 구원의 근원이 이루어졌다(히 5:8).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었고(히 1:6) 그의 부활은 칭의4:25), 사망에 대한 승리(고전 15:55,57), 우리 몸의 부활의 소망이 되었다(고전 15:52).
이로 보건데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들은 총체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이다.
신앙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재림하실 예수를 기다리는 가운데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심니으로써 이 땅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순종하는 삶을 통해 개혁운동을 하여야 한다. 재림의 날까지는 사단의 남아 있는 세력으로 인하여 고난과 악이 있으나 성령과 복음과 믿음이 승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해 나간다.
3-2-3. 후크마의 예수님의 종말론
1.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중심점이라는 사실은 이 중심점 사건으로 “과거의 모든 것이 성취되어질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결정되어 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인데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이기셨으며 다시 한 번 세상을 그와 화목케 하셨다(고후 5:19).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단번에 만인을 위해 사망과(고전 15:21-22), 사단과(요 12:31), 그리고 모든 악한 권세들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다. 이것은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시대가 장차 있게 될 더욱 평화로운 시대로 연결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약의 신자들은 한편으로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크고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발생했다고 생각한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일련의 매우 중요한 종말론적 사건들이 장차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은 묵시론적 종말론이 특징이다.
2. 새로운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들이 마지막 날들, 마지막 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성경적 증거를 주목하기로 하자.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에 관해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시다 하시니”(눅 7:28)라고하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요한은,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지금 소개하시는 새로운 시대의 왕국이 아니 ㄴ구 시대에 속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의 왕국에 성도가 된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경 저자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세대로 인도해 들이셨다는 사실에 그렇게 많은 비중을 두는 저자는 없다. 골 1:13에서 바울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조의 옛 세대의 권세로부터 구속되었음을(참고 갈 1: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암시하고 있다. 엡 2:5-6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하면서 미듬으로 우리가 새로운 세대에 살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롬 12:2에서 그는 구체적으로 그의 형제들에게 권고하기를 “너희는 이 세대(세대, 헬라어 아이온)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도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육체”와 “영혼”과의 대조는 인간 존재의 두 양상 사이의심리학적 대조라기 보다는 두 가지의 세력 영역 혹은 두가지의 세대(아이온), 즉 옛 것과 새 것에 속하는 삶의 형태 사이의 대조이다. 바울의 저서들 중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대조에 대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옛 사람이란 인간이 죄에 속박되어 있는 옛 세대 혹은 시대에 속한 사람을 말하며, 빈면에 새 사람은 인간이 죄의 속박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에 속한 새 시대, 새 세대를 가리키고 있다. 신약시대의 신자는 죄의 옛 세대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새로운 세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기 때문에 새 세대는 정말로 이미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3. 역사의 모든 것은 목표를 향해 움직여가고 있다-새 히늘과 새 땅을 향하여
비록 그리스도께서 새 세대를 지작시키셨지만 그 세댕의 최종적 결정체는 아직도 미래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역사를 신에 의해 예정된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가 어떤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히브리 예언자들의 독특한 공헌이다. 칼 뢰이스(Karl Lowith)의 말에 의하면 “그러나 최후의 목표를 향한 현세의 지평선은 하나의 종말론적 미래이며 그미래는 단지 기대와 소망에 의해서만 위를 위해 존재한다. 어떤 초월적인 목적의 긍극적 의미는 기대되어지는 미래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기대는 히브리 예언자들 속에 강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헬라 찰학자들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히브리 예언자들 뿐 만 아니라 신약의 저자들도 역사를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에는 반드시 그의 재림이 뒤다르게 된다. 이미 건설된 하나님의 왕국은 아직도 그것은 절절상태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비록 많은 구약 예언들이 루어졌지만 아직도 많은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역사가 이 마지막 경정점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역사의 이러한 정점에는 시약시대의 신자들이 아는 바 대로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부활, 심판의 날, 새 땅과 새 하늘과 같은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역사의 극치점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이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 으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을 우주적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하늘과 땅”이란 표현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성경의 표현방법이므로 구속의 목표는 다름 아닌 오늘날 과학자들이 우주라고 부르는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죄에 빠짐으로 그 잣긴 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나머지 모든 것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참고, 창 3:17-18, 롬 8:19-23), 죄로부터의 구속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헤르만 리더보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구속은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드라마와 그리고 우주적 투쟁의 중요성을 갖고 있는 데 이러한 것들 속에서 인간은 그의 죄와 버려진 상태 속에 속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이 속에서 하늘과 땅, 천사들과 마귀들 등이 연관되어져 있으며, 이런 하나님의 드라마와 우주적 투쟁의 목표는 창조된 우주 전체를 하나님의 지배와 통제 아래로 되돌아 오게하려는 것이다.”
구속의 이러한 우주적 차원을 엡 1:9-10과 골 1:19-20과 같은 성경구절들이 보여주고 있다. 엡 1:9-10을 보면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골 1:19-20은 우주적 차원의 구속 속에서 그리스도는 구속 뿐만 아니라 창조의 주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구절이다(참고, 16절.(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리스도는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해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그러므로 전(全) 창조사역에 깊이 관여하고 계신분으로서 구속사역에 동참하고 계신다. 피조물이 “썩어짐에 종노릇 한 데서”(롬 8:21) 완전히 해방됨이 하나님의 구속 목적들을 만족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이런 목적들에 비추어 보기 위해서, 우리들은 역사를 마침내 본연의상태로 복원되고 영광스럽게 될 우주의 목표를 향해서 움직여 나아가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역사가 목표 지향적인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적인 역사해석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이 말이 모든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역사의 목표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우리가 항상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안다는 것은 종종 극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윌들이 신문기사에 큰 표제를 읽거나, 뉴스를 듣거나, 뉴스 잡지를 읽을 때, 우리느 반드시 하나님이 항상 역사를 지배하고 있으며 역사는 점진적으로 그것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여사해석의 중요한 특징들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세계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런 역사의 해석이 함축하는 바를 얼마간 살펴 보기로 하자.
1) 현 세대의 특징적인 활동은 선교사역들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왕국을 새로이 시작하셨다면, 또한 그가 우리에게 진실로 위대한 선교 지상명령을 주셨다며(마 28:19-20), 교회가 할 위대한 사역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 때야 끝이 오리라”(마 24:4)고 말씀하셨다. 벧후 3:9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아직 재림치 않으시는 이유는 오직 인간에 대해서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고려해 볼 때 한 가지 사실로 귀착되는 데, 즉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이 시대의 특징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2)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 속에 살고 있다.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위치는 마지막 날들 속에 살고 있으나 마지막 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는 새 세대 속에 살고 있지만 최종적 세대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다가올 세대의 능력들”을 향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죄와 고난과 죽음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성령의 첫 열매를 갖고 있지만, 그는 그의 최종적 구속을 기다리면서 내면적으로는 탄식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긴장은 현 세대에 독특한 맛을 부여하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시대의 신자들이 감히 알지 못했던 축복들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구약시대의 신자들보다 하나님의 구속적 계획에 관해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우리의세상 여정에 마지막 끝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낸바 되지 않았다(요 3:2). 비록 신약시대 신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손에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반면에 그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 완성을 소유하지 못하고 따라서 매일 그들의 죄들을 고백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쟁취하셨기에 우리 주변의 세상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의 승리의 증거들을 찾을 수 있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최종적 결정이 아직도 일어나지 아니했으므로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승리를 반영하고 있지 않은 듯한 많은 일들이 계속 존재할 것이다. 최후의 심판 날까지 역사는 이러한 모호성에 의해 계속될 것이다.
3) 역사 속에는 두 줄기의 발전이 있다.
방금 기술된 “이미” 와 “아직“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의 초림 이래로 세계 역사 속에서, 한님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과 나란히 병행하여 악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을 우리가동시에 볼 수 있음을 의미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라지의 비유(마 13 : 24-30, 36, 43)에서 예수님께서, 사단의 자식을 상징하는 가라지가 알곡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단의 왕국이 최후심판의 날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하는 한 함께 공존하며 자라날 것이다.
①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한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을 구약 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①마태복음에 기록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출생 ②예수님의 삶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관한 수많은 자세한 기록들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사건들로 여겨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베들레헴에서의 출생(마 2:5-6, 미 5:2), 애굽으로의 피난(마 2:14-15, 호 11:1), 백성들에 의해 배척을 받으심(요 1:11, 사 53:3), 예루살렘의 입성(마 21:4-5, 슥 9:9), 은 30냥애 팔리심(마 26:15, 슥 11:12), 십자가에서 찔리심(요 19:34, 슥 12:110),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는 일(마 15:24. 시 22:18), 뼈를 꺾지 않음(요 19:33, 시 34:20), 부자의 묘지에 장사됨(마 27:57-60, 사 53:9), 그의 주활하심(행 2:24-32, 시 16:10), 그리고 승천하심(행 1:9, 시 68:18).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단번(hapax)에와 오직 한 번(ephapax)와 같은 단어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벧전 3:18에서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같은 사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ephapax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히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같은 내용을 전달하고자 함으로써 사용된 또 다른 다어는 히 10:12에서 나타나는 (한 영원한)이다.“(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이사야에 인용된 여러 개의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최종적 사건임을 배우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바가 그리스도의 사역안에서 결정적으로 발생되었고 완성되었음도 알게 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구속자가 오신 것이다.
이 점에 관해 다른 몇몇 증거들을 살펴보자.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선포하시기를 예수님의 오심 속에서 왕국(하늘 나라)가 가가이 왔다고 하였다(마 3:2, 막 1:15).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영으로 자기가 악마와 귀신들을 내어쫓는 일이 하나님 왕국이 그들 위에 임하였다는 증거라고 하였다(마 12:28). 윌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의 왕국이 오고 있다는 것이 구약의 종말론적 기대의 한 측면이었다면, 우리는 이 예언이 역시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 안에 약속된 왕국이 왔고, 이 왕국은 장차 미래에 최종적 완성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들이 이미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 점은 특별히 베드로가 오순절에 행한 설교속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말하기를 “(행2:15)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행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말세에“(마지막 날들)란 어구는 히브리어 아하레이 헨의먼역으로 그 문자적 의미는 ”...후에“이다. 베드로가 이와 같은 용어를 인용하여 방금 일어났던 오순절 사건에 적용하고 있는 데 그가 근본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바는 ”우리는 이제 마지막 날들 속에 속해있다“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바울에게도 발견되는 데 그의 초기 서신들 중의한 곳에서(갈 4:4) 바울은 역설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때가 차매” 세사에 오셨다고 한다. “충만”“ 가득함”이라는 헬라어는 성취 혹은 완성시키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이 차매 나타나셨다는 뜻은 역사의 위대한 중심점이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약의 예언이 이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비록 이상과 말들이 시간의 끝 순간에 역사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점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말들이 의도하는 중심사상은, 구약의 관점에서 바라다 볼 때 신약시대는 “성취의 때”라는 것이다. 수년 후에 쓰여진 서신인 고전에서도 바울은 이 점에 관해 더욱 분명한 논조로 진술하고 있다. “(고전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여기에서도 역시 “성취”의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있다.
히브리서 저자도 자기들의 피가 아닌 피로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던 구약의 대제사장들을 그리스도와 비교함으로써 새 세대와 엣 세대 사시의 갈등과 긴장에 관해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히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행하였던 역할이 잠정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것을 종말론적 성취 및 최종점으로 보고 있다.
요한 서신들은 일반적으로 신약의 글들 중에서 가장 늦게 스여진 문서들로 간주 된다. 이 서신들 속에서도 윌는 신약 시대가 종말론적 성취의 한 단면으로 반영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그러나 “말세에” 혹은 “마지막 날들에”라는 표현들 대신에 요한 사도는 “마지막 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요일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이상과 같은 종류의 표현들은 신약시대의 신자들이 세상 끝에, 말세에, 마지막 때에 살고있는 자기 자신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들이다. 또한 그들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왕국이 세어짐 속에서 발샹하였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 점은 일반적으로 “실현된 종말론”의선구자 도드의 입장과 어느 정도 연관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많은 종말론적 사건들이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또한 신약 성경이 현재적 종말론과 아울러 미래적 종말론에 관하여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실현된”종말론이란 용어를 즐겨쓸 것이다. “시작된 종말론”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종말론적 역사 발생이 이미 이루어진 동시에 미래에 종말론적 완성 단계로 발전되어갈 것이라는 측면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작된 종말론”이란 종말은 이미 시작하였으나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② 신약성경을 살펴 볼 때 우리는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묘사했던 내용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두 단계로 인식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현재적 메시야의 시대와 미래의 도래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신약의 신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새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이 새 시대가 장차 올 또 다른 시대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신약의 저자들은 우리가 지금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동시에 두 세대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두 세대란 현재의 세대와 장차 다가올 세대를 말한다. 장차 올 세대를 묘사하기 위하여 세 가지 유형의 표현법을 발견하게 된다. “저 세상(눅 20:35), ”내세“(눅 18:30), ”오는 세상“(마 12:32).
에를 들자면, 히브리서 저자는 자기 시대에 어떤 이들은 “내세의 능력들”(히 6:5)을 맛보았다는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엡 2:7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라고하면서 “오는 여러 세대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세대와는 다른 미래의 세대가 장차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면면히 재확인 되어 왔는데 성경은 이러한 두 세대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이 있다. 눅 20:34-35에는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두개인들에 대해 답변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라 했다. 두 세대가 함께 연결되어 기록된 또다른 구절은 마 12:32이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현재의 때와 장차 올 때 세대가 대조적으로 묘사된 또다른 구절을 읽어보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이상에 열거한 여러 개의 구절로부터 우리는 신약의 저자들이, 현재의 세대를 뒤따라 올 장차의 세대를 바라다 보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우리는 “마지막 날들에” 혹은 “마지막 때에”라는 신약의 표현들을 통해 두 세대가 한데 아울려 나타나고 있는 아주 흥미로운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앗듯이 베드로는 오순절에 행한 그의 설교에서,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시기가 “말세”에 속해 있음을 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금 “말세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수로서 표현된 “말세”라는 표현구는 현 세대를 지칭하지 않으며, 항상 장차 올 세대를 가리키고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단수로 사용된, “말세”는 인류의 대심판의 날이나 부활의 날을 가리키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다. 동일한 장 40, 44, 54절에서 비슷한 표현이 발견된다. 요 11:24에 마르다가 자기의 오라비 나사로에 대해 말한 기록이 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12:48에서 예수님은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제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 “말세에” 살고 있는 것이며 “마지막 날”은 장차 올 것이다.
또다른 흥미있는 일은 synteleia(end, 혹은 completion)라는 헬라어 명사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 단어가 세대라는 목수형 명사와 함께 쓰여진 경우가 한 번 있는 데 이 경우 synteleia는 현재의 세대를 의미하게 된다. “세상 끝에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나타내셨느니라”(히 9:26). 그러나 synteleia가 aion(세대)의 단수형과 함께 쓰여질 경우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장차 미래에 있게 될 최종적 절정 상태를 지칭하고 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예수님께서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마 13:39, 참고 40,49)라고 하셨다. 뚜한 제자들이 장래에 관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 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했다.
그러므로 신약의 종말론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오심을 뒤돌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날들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신약의 종말론은 동시에 장차 일어나게 될 초히종적 상태를 바라다 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도 확증하고 있다. 마지막 날은 지금 오고 있는 중이며 최종적 상태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사실상 우리는 신약 성도들이 갖고 있는 종말론 기대를 다음과 같이 도표로 그려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창조 초림 재림
'요한 계시록!!! 마라나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무천년 왕국설 주장하는 학자들의 성경 이론의 근거.hwp (0) | 2017.07.18 |
---|---|
[스크랩] 전천년 왕국설 주장하는 학자들의 성경 이론의 근거.hwp (0) | 2017.07.18 |
[스크랩] 요한계시록 강해 1-52과 (0) | 2017.05.30 |
[스크랩] 그림으로 본 요한계시록 (0) | 2017.05.30 |
[스크랩] 개혁주의 종말론 (0) | 2017.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