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보혈(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 이 말을 거역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보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최근 들어 영성 사역하시는 분들이 보혈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실제적인 능력을 체험하고 보혈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한국 교회의 미래에 새로운 소망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건이라 생각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Ⅰ.보혈의 가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를 구속한 보혈은 은,금의 가치에 비교할 수 없이 귀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귀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아담의 범죄로 사탄의 권세아래 팔린 인류를 그 죄 값을 대신 갚으시고 구원 하실만큼 대단한 가치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구속”이라는 말의 뜻은 “값을 지불하고 샀다.”는 뜻이다. 죄값으로 사단에게 팔린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다. 그러므로 보혈은 우리를 사단의 권세 아래서 구속하신 영수증이다. 우리는 그 보혈의 능력 때문에 사탄의 권세아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힘없이 살아가고 있을까? 그것은 보혈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Ⅱ.보혈의 용도
그렇다면 그 보혈은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 아무리 귀한 물건을 선물 받아도 용도를 모르거나 방법을 모르면 사용할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혈은 단순히 우리 죄를 사해 주신 것을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혈은 믿는 것 이상으로 실제적인 삶에서 사용되어질 때 능력으로 나타남을 말씀하고 있다.
구약의 어린양의 사건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성경에서는 보혈을 사용하는 몇 가지 경우를 말씀하고 있다.
1.재앙을 막을 때 사용된다.(출12:28)
애굽에 내린 열 번째 재앙인 맏아들 죽는 재앙은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졌느냐? 발라지지 않았느냐?가 기준이 되었다. 애굽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피를 바른 사람은 살았고 이스라엘인들 중에서도 피를 바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어린양의 피는 재앙을 막아내는 약속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죽음의 세력이 들어갈 수 없었던 것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재앙을 막아주는 능력이 된다. 지금도 우리가 믿음으로 피를 바르면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신뢰도가 아니라 순종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불안하고 염려가 되었을지라도 피를 바른 사람의 집은 무사했고 아무리 확신에 차 있어도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에는 죽음의 재앙이 임했다.
2.죄를 속할 때 사용된다.(레4:1-35, 17:11)
구약성경에서 죄를 속할 때 어린양의 피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피가 없이는 절대로 죄를 속할 수 없었다. 지금도 우리의 죄를 속하는 것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벧전 1:2에서도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3.부정한 것을 거룩하게 할 때 사용된다.(레8:30)
"모세가 관유와 단위의 피를 취하여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려서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을 거룩하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정이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염된 것을 말한다. 성경에는 부지중에 라는 말이 나오는데 잘못을 했어도 고의로 지은 것은 죄이지만 고의성이 없이 실수로 범한 것이나 자기도 모르게 행한 것은 부정한 것이 된다.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영향으로 부정한 상태로 타락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갓 태어난 어린 아이 일지라도 보혈이 필요한 것이다.
4.사탄을 대적할 때 사용된다.(계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악한 영들은 예수보혈을 가장 무서워한다. 영적 사역을 하며 귀신을 쫒아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예수보혈이다. 한 자매에게 귀신이 드러나 마구 욕을 하며 달려들었다. 나는 그 귀신에게 "너희들은 무엇을 가장 무서워하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그것도 모르냐? 예수피야 예수피."라고 했다. 나는 "야, 예수피가 2000년 전에 골고다에서 다 말라붙었는데 뭐가 무섭냐?"하며 유도질문을 했더니 "너희들은 몰라, 그런데 너희들이 장난으로 예수피라고 말해도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라고 했다. 예수보혈은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다.
Ⅲ.짐승의 피
이렇게 귀한 보혈은 사용하려면 먼저 해로운 것을 금지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수 많은 곳에서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고 금지하고 있다. 짐승의 피를 금지한 최초의 명령은 창세기 9:4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최초에 만드신 지구는 궁창위에도 물층이 있어서 햇볕으로 인한 자외선이 차단 되었으며 보일러와 같은 역할을 하여 지구 전체를 보온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에 최적의 온도와 환경을 유지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채식만 했어도 인간의 수명이 천년을 가까이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노아 홍수로 인해 궁창위의 물층이 아래로 쏟아져 내림으로 태양의 자외선이 직접 사람의 피부에 영향을 주었고 열을 전달해 주는 물층이 없어짐으로 북극과 남극에는 기온이 급강하 하여 대형 어름산이 형성 되면서 물을 끌어당겼기 때문에 땅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지구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하신 말씀처럼 지역에 따라 온도와 기후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환경의 파괴와 기후의 변화는 인간의 삶에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창9:4절에서 노아에게 축복하시면서 육식을 허락하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수명은 120년으로 줄었다. 이 때 하나님은 육식을 허락하시면서도 짐승의 피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창9:4)"
피의 금지 명령은 율법 이전의 원시 복음에서 뿐아니라 율법에서도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다.(레3:17“기름과 피를 먹지말라”, 레7:26 "무슨 피든지...먹지 말라" 레17:10-14에서 "어떤 피든지...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라고 말씀했다. 이것은 피는 생명을 대속하는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레17:15-16에서는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이나 스스로 죽은 것까지도 먹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은 피를 빼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기를 먹게 되면 고기에 축적된 피를 먹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에서 뿐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피를 금지하고 있다. 행15장은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 전도를 하다가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선동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갈등하는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고 사도들이 모여서 의논한 끝에 이방인에게는 할례나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고 네 가지를 금지시키고 있다. 특히 28절에서 "성령과 우리는"이라고 했는데 현대인의 성경에는 "성령님의 뜻이며 우리의 결정입니다."라고 해석되어 있다. 사도들은 "이 요긴한 것들 외에 다른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하면서 네 가지 금지사항을 요긴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보신탕이나 순대, 선지국, 순대국, 사슴피, 노루피, 올가미로 잡은 산짐승 등등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런 의식 없이 이런 음식을 먹고 있다.
사도행전10장에서 피장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유대인들이 먹지 않는 율법에서 금한 짐승들이 커다란 보자기에 들어있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잡아 먹으라 하였고 베드로가 거절하자 "내가 거룩하게 한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근거로 어떤 짐승이든지 먹어도 좋다고 해석다. 그러나 환상이라는 것은 하나의 형상 언어이기 때문에 보여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아무 짐승이나 먹어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통해 구원하시기를 원하는구나 였다. 행10: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또한 그 환상을 액면 그대로 해석해서 아무 짐승이나 먹어도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피를 먹어도 된다는 이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먹으라고 하실 때 이미 피를 빼라는 의미가 전제 되어있다. 베드로에게 들려주신 음성은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으라(10:13)"였다. 이미 죽어있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짐승이며 잡아먹으라는 표현 속에는 피를 흘리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요즘 개들은 목메어 죽이지 않기 때문에 괜챦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피와 목메어 죽인 것이라고 못박아 놓고 있다. 묘한 것은 개는 어떤 방법으로 죽이든지 피를 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개고기는 피를 빼고 잡으면 맛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피를 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은 피를 빼지 않고 죽인 짐승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문제는 보신탕이 아니라 비록 양이나 소의 고기일지라도 피를 빼지 않은 것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9장에서도 "무릇 산 동물을 먹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죽은 동물은 피가 몸속에 굳어있기 때문에 먹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딤전4:3-5의 말씀으로 음식을 가리지 말고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그러나 이 말씀은 보신탕이나 아무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시에 금욕주의자들은 육체를 부정한 것이라 주장하며 결혼이나 음식까지도 거부하는 극단적 금욕주의자들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이단 사상을 경계하면서 정상적인 결혼생활과 식생활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식물"이라는 단어를 다른 성경에서는 "음식"이라고 번역했으며 영어성경이나 헬라어 원전에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음식을 말한다. 어떤 음식은 구약시대에는 금지했지만 신약시대에는 허락된 것이 있는 반면에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동일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은 디모데 전서 4장에서 말하는 음식의 항목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피를 음식으로 주신 일이 없다.
비슷한 말씀이 로마서 14장 23절에 나옵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 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많은 경우에 이 구절을 따라서 믿음으로 먹으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이 무엇인가? 이방인들의 믿음은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중심이 되어 느끼는 감정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 되어야 하며 그 말씀을 받으들이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성경에 금지된 피를 먹는 그 믿음은 이방종교인들이 믿는 믿음의 개념이며 자기 감정적 확신에 불과하며 그것은 곧 믿음이 아니라 불신이 된다.(창3장에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죽지 않을 것을 믿고 따 먹었다. 그러나 죽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사단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상의 제물이나 목메어 죽인 것이나 피를 믿음으로 먹는다면 음행도 믿음으로 해도 괜찮다는 말이 성립된다.
고전 8장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는데 문제는 그것이 우상을 제물을 먹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사도행전 15장의 문제로 인해 가장 골치 아팠던 사람이 바울이다. 그러한 바울이 사도들을 무시하고 우상의 제물이나 피를 먹어도 된다고 주장했을까? 바울의 생각 속에는 우상의 제물이나 피를 음식으로 생각하는 개념조차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율법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은 율법 문제를 다루다가 내린 결론이다.
또 어떤 사람은 보신탕 안 먹어서 거룩해지면 영국 사람은 다 거룩한가? 라고 질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의 거룩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
흙탕물에 안 들어간다고 깨끗한 것은 아니다. 씻어야 깨끗해진다. 그러나 씻고도 또 흙탕물에 들어간다면 또 더러워진다. 짐승의 피를 금하는 것은 흙탕물에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다. 예수 보혈로 거룩하게 된 성도가 짐승의 피를 먹게 되면 방금 목욕한 아이가 흙탕물에 뛰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건강에 좋기 때문에 보신탕을 먹는다고 한다. 음식이 우리 몸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음식을 잘 먹는다고 반드시 건강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요즘은 너무 먹어서 오는 질병이 더 많다. 건강의 문제는 음식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이며 영적인 문제이다.
성경에서는 왜 거룩의 문제를 다룰 때마다 음식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몸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그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없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 알지 못하느냐?(고전6:15)"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전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 15장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금지한 우상의 제물, 피, 목메어 죽인 것, 음행, 중에 세 가지는 먹는 것이며 한 가지는 행위에 관한 것이다. 왜 많은 죄의 항목들 가운데 음행을 지적하고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고전6:18의 말씀에 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결국 음행은 우리 몸 안에 죄를 짓는 것, 즉 성전을 직접적으로 더럽히는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 외에 우리 몸을 직접적으로 더럽히는 것이 바로 음식이다. 음식은 우리 몸에 들어가면 살과 피가 되어 몸 속으로 흡수된다.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인 몸이 피와 살 속에 부정한 짐승의 피를 투여해서 더럽히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뿐아니라 신약에서도 음식의 문제는 여러 곳에서 거론되고 있다. 고전 8장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제사 음식에 대한 권면도 많은 경우에 먹어도 괜찮다는 뜻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싶은 핵심은 음식 문제로 아무 것도 아닌 우상에 얽매어서 오히려 우상을 인정해주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고 고백하고 있다.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난 K권사는 예수님께 신앙생활 잘 하면서 짐승의 피를 먹으면 어떻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나는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나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처음 예수를 영접한 자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기도하고 보신탕을 먹으면 어떤가요?"라고 묻게 했더니 예수님이 X표 했다고 대답했다. 물론 환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치더라도 주님의 의도는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는 싸인이다. 어떤 이유로도 짐승의 피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행위이며 복음을 거역하는 범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Ⅳ.그리스도의 보혈
그렇다면 왜 성경은 이토록 짐승의 피를 금지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보혈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생명되는 피채 먹지말라" 한 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존중히 여기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짐승의 생명은 사람에게 붙여주신 소모품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산천의 짐승을 다 잡아서 대속해도 아까와 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치유하시기 위해 2천 마리의 돼지 떼를 순식간에 바다에 몰아넣으신 분이다.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생명되는 피채 먹지 말라고 강조하고 계실까? 짐승의 피는 짐승의 생명이며 짐승의 생명은 죽은 생명이며 짐승의 죽은 생명이 우리 몸속에 들어오게 될 때 거룩한 성전 된 몸이 죽은 생명으로 영향을 받아 부정하게 된다. 똑같은 원리로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생명이며 예수님의 생명은 산 생명이다. 성경에서 짐승의 생명인 피를 금지한 것은 예수의 생명인 보혈을 먹어야 살 인류가 짐승의 죽은 생명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6:53-57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54)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6)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57)"
예수님의 말씀은 상징이 아니라 영적 실재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6:60)"라고 말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믿기 어려워한다.
마26:27-28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다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선언하셨다. 제자들이 잔을 받기 전까지는 포도주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선언하심으로서 예수님의 피가 된 것이다. 누가복음 22:19에서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으로 인해 지금도 사역자들이 성찬식 때 선언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 때문에 성찬식을 기념설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행하여"이다. 포도주 자체가 예수님의 피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포도주를 가지고 "나의 피"라고 선언하신 것을 행하여 기념하라는 것이다. 성찬예식을 통해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을 기념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포도주를 가지고 예수님의 피라고 선언할 때 똑같이 예수님의 피가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지 않고 성찬식에 임한다면 배병위원과 배잔 위원이 "예수님의 살입니다" "예수님의 피 입니다"라고 말하며 분배하는 행위는 장난에 불과하며 하나님을 우롱하는 거짓말이 된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그 때 예수님은 통에 물을 채우도록 명하셨고 그 물을 떠다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다. 하인들이 물을 떠다 연회장에게 주었을 때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예수님은 명령적인 언어나 동작을 취하지 않으셨으나 물은 포도주로 변했다. 이 사실은 누구나 쉽게 믿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 26:27에서 예수님은 포도주를 가지고 "나의 피 언약의 피니라"고 선언하신 사건에 대해서는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피로 변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선언하신 말씀은 상징일까? 복음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이며 사건이다. 악한 영들이 보이지 않으나 실제로 활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적인 실제이다. 보혈은 상징으로 임한 것이 아니라 영적 실제로 임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마신 것은 예수 보혈이다.
믿음은 단순한 감정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보혈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영향을 끼친다. 출12:21-28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어린양의 피 사건은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조금 의심했을지라도 피를 칠한 사람은 살았고 아무리 감정적 확신이 있어도 피를 칠하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예수님은 보혈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고 마시라고 하셨다. 마시는 자에게 생명과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보혈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것은 보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며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Ⅴ.보혈의 기능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적용될 때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몇 가지 기능이 있다.
A.대속의 기능
최초로 짐승이 피를 흘린 역사는 창세기 3:21절에서 인간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가죽옷을 만드시는 과정에서 있었다. 창세기 4장에서는 아벨의 제단에 피의 제사가 드려졌으며 그 이후로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유지한 사람들은 모두가 피의 제사를 드렸다. 구약에서 드려진 피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것을 예표로 보여주신 사건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대속의 제사는 완성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 문제는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해결 된다.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더 이상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구원은 완성된다.
B.생명의 기능
구약성경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피가 생명이니 먹지 말라는 내용이다. 이 말씀은 창세기 9장에서 노아에게 짐승의 고기를 먹을 것을 허락하시면서 최초로 금지하셨고 율법에서는 특히 강조했으며 신약에서도 이방인에게 복음이 넘어가면서 율법 문제로 시기가 생겼을 때 피를 금지시킴으로 피를 먹는 것은 복음에 반대되는 행위임을 말씀하고 있다.
왜 성경은 이렇게 강력하게 짐승의 피를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기능 때문이다. 구약 성경은 계속해서 피를 먹지 말라고 강조할 때마다 "피는 생명이니"라고 강조했다. 결국 짐승의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짐승의 생명은 죽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16:4-7에는 짐승의 피를 마시게 하는 재앙이 나온다. 이것은 짐승의 생명인 피를 마시게 함으로서 그 생명이 고통으로 죽게 하는 재앙임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오시am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강조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고 강조했지만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먹으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피에 생명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C.보호의 기능
그리스도의 보혈은 보호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다. 유월절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은 사건이다. 이것은 장차 그리스도의 보혈이 성도들의 삶을 악한 영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을 할 것을 예표로 보여주신 사건이다. 믿음으로 보혈을 사용하면 여러분의 삶에서 재물이나 건강이나 자녀들이나 여러 가지를 보호 받을 수 있다. 물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경우를 말한다. 아무렇게나 살면서 보혈만 사용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미신 신앙이 될 수 있다.
구약은 예표이며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하지만 그리스도는 실체이기 때문에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이 그분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면 된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계속 부정적이었고(요6:42, 52,60), 결국은 떠나갔다.(요6:66)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던 그들이 왜 떠나갔을까? 피의 문제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떤가?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짐승의 피를 먹는가? 피에 감추인 비밀을 모르기 때문이다. 믿어야 할 피와 사용해야 할 피를 모르기 때문이다. 대속의 기능과 생명의 기능과 보호의 기능을 모르기 때문이다.
보혈은 단순하게 믿는 차원을 넘어서 사용하라고 성경은 많은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마26:27-28, 요6:53-38, 고전10:16, 히9:22, 히12:24, 벧전1:2, 요일5:6, 계7:14)
Ⅵ.보혈의 사용법
보혈의 사용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고전10:4에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고전 10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마시면서 생명을 유지한 반석의 샘물 사건을 말하면서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약에 나타난 반석 사건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 반석사건은 출17장과 민20장에 두 번 나오는데 두 번 모두 다투었다는 뜻으로 므리바 물이라고 불렀다. 반석에서 물이 났다는 것과 므리바 물이라고 부른 것과 모세가 지팡이로 쳤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물을 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는 다르다.
출17:6 -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백성 앞에서 반석을 대하여 서라고 하신 후 하나님은 반석 위에서 모세를 대하여 서시겠다고 하시면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셨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에 맞아주시겠다는 말씀이다.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쳤지만 모세의 지팡이에 맞은 것은 반석위에 서신 하나님이다. 백성들은 반석에서 샘물이 났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맞으시고 그 몸이 깨져서 물이 나왔으며 그 물로 백성들이 살 수 있었다. 바로 그 반석 위에서 모세의 지팡이에 맞으신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죽으신 고난의 그리스도였다. 첫 번째 반석 사건은 바로 고난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시며 흘리신 보혈이 인류를 살리실 것을 하나님은 반석사건을 통해서 예표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은 고린도 전서 10장에서 그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그 죄를 덮고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반석 사건인 민수기20장의 내용은 약간 다르다. 민20: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물을 내서 백성을 살리라는 말씀은 같지만 물을 내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다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처음과 같이 지팡이를 들고 반석 앞에 서서 '물을 내라'라고 명령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반석이 물을 내어 백성을 살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하면서 반석을 두 번 쳤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20:12)"고 말씀하심으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모세가 친 반석이 단순한 바위에 불과 했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노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반석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며 그 영적 의미를 몰랐던 모세를 책망하신 것이다. 모세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했던 그 반석은 곧 부활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 의미를 몰라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침으로서 부활의 그리스도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를 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실수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부활의 그리스도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지 말고 명령만 하면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든지 명령하면 생수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따르는 반석(고전10:4)"이라고 말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인 보혈을 주시려고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은 온 우주 안에 가득히 흐르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적용만 하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그대로 임재 하신다. 고난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몸을 깨뜨려 보혈을 흘리심으로 그 보혈의 은총을 믿는 자에게 거듭나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지만 부활의 그리스도는 거듭난 성도들이 계속해서 영적 생수를 공급받아 광야 같은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따라다니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보혈로 거듭났다 할지라도 부활의 그리스도의 보혈을 사용하지 않으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영적 싸움에 실패하게 된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싸움의 문제이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보혈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보거나 냄새를 맡거나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도마주의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활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육체 안에 영과 혼이 거할 뿐이지 결합된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으면 영과 혼이 떠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이란 다른 말로하면 영혼과 육의 분리를 말한다. 하나님의 분리와 결합의 법칙에 의해서 다시 분리된 영혼을 육체와 결합시키는 사건이 오는데 그 현상을 부활이라고 한다. 부활은 영과 혼과 육이 완전히 결합되는 상태를 말한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예언하시고 17장에서 변화 산으로 올라가신다. 변화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다. 수 많은 선지자나 위인들 중에서 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을까?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모세는 죽었으나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출34:6)" 성경에 많은 위인들이 그 무덤이 오늘까지 있다는 기록과는 반대로 모세는 무덤을 아는 자가 없다고 기록함으로서 모세의 시체가 영적 베일에 가려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모세는 죽음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엘리야는 산채로 불 병거를 타고 승천한 사람이다. 이 두 사람과의 만남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완전한 몸으로 승천하실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활체는 완전한 영이며 완전한 몸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육체적 활동과 영적 활동에 장애를 받지 않는다. 밀폐된 공간에 나타나기도 하시며(요20:19), 구운 생선을 잡수시기도 하시며(눅24:42-43), 갑자기 사라지기(눅24:31)도 하셨다. 부활체는 모든 육체적 활동에도 제한 받지 않으면서 또한 영으로서의 활동에도 제한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먹지 않는다고 배고프거나 죽지 않으며 그렇다고 못 먹는 것도 아니다. 눈에 보일 수도 있으며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육체는 살을 찢어야 피를 흘리지만 부활체는 살을 찢지 않아도 피를 흘릴 수 있다. 육체는 피를 많이 흘리면 죽지만 부활체는 아무리 피를 흘려도 죽지 않는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온 인류가 구하는 피를 다 주셔도 모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육체로 죽으신 십자가의 보혈은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은 얼마든지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보혈은 눈에 보이기도 하며 보이지 않기도 한다. 냄새가 나기도 하며 전혀 냄새가 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보혈이 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임하는 사실을 말씀에 의지하여 믿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만 믿는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것들은 감춰두셨다. 천국도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온 인류가 함께 믿을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사용하는 방법도 완전한 자유이다. 성찬식을 통해 실제적으로 행할 수도 있고 그냥 말로 명령하거나 청구하거나 어떤 형식으로든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식수를 떠서 해도 되고 손을 모아서 받아 마셔도 된다. 부활의 그리스도의 보혈은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뿌리면 뿌려지고 바르면 발라지고 덮으면 덮어지며 부으면 부어진다. 사람에게 하면 사람에게, 짐승에게 사용하면 짐승에게, 건물이나 장소에 사용하면 장소에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사람은 보혈을 짐승이나 채소밭에 뿌린다는 말에 대하여 너무 가치 없이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민수기 20:8에서 "그들과 짐승에게도 마시울지니라"고 말씀하셨다. 거룩한 백성이 마시는 보혈은 거룩한 백성에게 소속된 짐승도 먹을 자격이 있다. 거룩한 백성은 사용하는 물건도 거룩해야 하며 먹는 음식도 거룩해야 한다. 모든 음식에 보혈을 뿌리는 것은 우리 몸을 보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히9:22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거의는 모두가 아니다. 피로써 정결케 되지 않는 물건도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우상의 제물이나 피가 들어간 음식이 아닐까? 그러나 대부분의 물건은 정결케 된다.
어떤 사람은 보혈을 너무 자주 사용하는 것은 보혈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우리가 왜 보혈을 자주 사용해야 하는지 이해하려면 죄와 부정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죄는 의지적인 행동이고 부정은 부지중에 일어난 행동이다. 부정은 허물이라고도 하며(상처도 허물) 부지중에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한 사건마다 피를 사용해야 한다.
예수보혈을 자주 사용해야 하는 것은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횟수의 문제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순간순간 부정한 생각, 말, 행동, 사건 등에 접촉되기 때문에 날마다 시시로 예수피를 뿌려 우리의 몸을 정결케 해야 한다. 특히 우리 속에 순간순간 돌아가는 부정한 생각들은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으로 통제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순간마다 보혈이 필요하다.
VII.보혈의 능력
보혈은 막연한 개념이 아니다. 실제적 사건이다. 믿음으로 사용하는 자에게는 말하는 대로 능력으로 나타난다. (나의 간증 = 짐승의 피를 금한 결과, 우리 교회 = 병원 입원 감소 경상비 증가, 경조비 감소)
사도행전 15:29절에 보면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는 말씀이 있다. 저는 성경이 복음인 것을 믿는다. 성경은 진리이다. 그대로 믿고 순종하면 실제적인 능력으로 나타난다. 잘 되기를 원하시면 짐승의 피를 스스로 삼가고 예수 보혈을 사용해야 한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며 의미이나 신약은 구약이 현실로 나타난 사실이며 사건이다. 구약은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하지만 신약은 의미를 찾을 필요 없이 사실로 받아들여야 산다. 구약의 모세는 보혈의 의미를 몰라서 망했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사실을 의미로 해석해서 망한다. 나는 여러분이 믿음으로 사용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사상에 빠져서 이 복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주 만물에 비하면 점 하나에 불과하다. 성경의 진리는 무궁무진한데 우리는 사상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때문에 나의 사상으로 비쳐진 성경 외에는 알지 못하며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주님의 기름부으심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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