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치유!!! 신유!!!

[스크랩] 전인치유의 영적원리

하나님아들 2015. 11. 25. 16:25
 

          전인 치유의 영적 원리(요10:8-10)   


Ⅰ.서론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풀리지 않는 고리들이 있습니다. 이유 없는 분노와 혈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고립되고 있는 보약 다 해 먹어도 몸은 병들고 지치고 그토록 절약하며 노력해도 여전히 가난하며 내가 원하는 것 보다 원치 않는 것이 나의 삶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들보다 더 새벽기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하며 신앙으로 살아보려고 해도 여전히 나의 삶을 조여오는 고통의 문제는 그 뿌리가 무엇일까요?

  전인치유란 우리의 전인(영, 혼, 육)을 치유한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사역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인치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할뿐더러 알고 있어도 어렴풋한 개념만 알고 있어서 치유에 방해가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치유는 깨달아 아는 것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인데 영적 원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치유는 잘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Ⅱ.왜 전인치유를 받아야 하는가?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대로 풍성하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보다 먼저 온 절도와 강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절도는 훔쳐가는 세력을 말하며 강도는 빼앗아 가는 세력을 말합니다. 절도는 정체가 드러나면 도망가지만 강도는 정체가 드러나면 위협하며 달려듭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정체가 드러나면 도망가는 세력과 달려드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세력과 싸우기 전에 먼저 왜 전인치유를 받아야 하는지 분명한 이유를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1.우리 안에 있는 두 가지 소유권 때문에 전인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질병과 저주를 다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문제는 다 해결 되었으며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사탄의 권세는 머리가 깨졌기 때문에 더 이상 신자 안에는 귀신의 세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는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소유권의 문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소유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법적 소유권이며 또 하나는 실제적 소유권입니다. 법적 소유권이란 어떤 물건에 대하여 법적으로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문서와 같은 증거를 말합니다. 실제적 소유권이란 현재 그 물건을 사용하고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몇 년전 우리 동네에 어떤 사람이 집을 사고 등기 이전을 한 후 수리를 하려고 세 들어 있는 사람에게 집을 비워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은 오히려 큰 소리를 치면서 한 번 더 그런 요구를 할 경우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조직 폭력배 였습니다. 할 수 없이 집 주인은 꼼짝도 못하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집 주인은 분명히 등기장을 가지고 있는 법적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은 조직 폭력배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영적 현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사실을 믿고 거듭날 때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당하게 악한 영들을 쫓아내고 살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것은 악한 영들이 우리 안에 실제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질병과 가난과 많은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보다 먼저 왔다(요10: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은 예수님 보다 먼저 와서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자기들이 주인이라고 실제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 때에 이미 가나안땅의 법적 주인이 되었으며(창12:7) 여호수아 때에도 다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수1:3-4)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법적으로 허락된 가나안 땅은 그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누리지 못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 430년 동안 종살이 할 때 가나안 땅은 일곱 족속들이 실제적인 소유를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법적 소유권을 회복하려고 했을 때 일곱 족속들은 완강하게 반발하며 도전해 왔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수6장) 아이 성이 함락되며(수8장) 아모리 다섯 왕이 초토화 되면서(수10장) 많은 지역의 실제적 소유권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남은 땅을 모두 각 지파에게 분배해 주었지만 이제 각 지파는 자신이 분배 받은 땅에 대한 실제적 소유권을 회복해야 할 과제가 남은 것입니다. 그 실제적 소유권을 회복하기 위한 싸움을 기록한 책이 사사기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있는 두 가지 소유권 때문에 우리는 전인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2.우리 내면에 남아 있는 문제 때문에 전인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일곱 세력과 가나안 주변의 이방세력과의 삼각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셨다(삿2:11-15)고 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신전에서 음행을 제사의식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가나안 토속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은 가나안 일곱 족속과 동맹을 맺고 화친한 모습을 말합니다. 그들이 일곱 족속과 화친할 때 사방 모든 대적들이 쳐들어와서 고통을 주었습니다. 실제적으로 고통을 준 대상은 가나안 일곱 족속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왕(삿3:8-11), 모압 왕(삿3:12-30), 불레셋 왕(3:31), 미디안 족속(삿6-7장)등 대부분 가나안의 주변 세력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가나안이 나의 내면세계라면 에돔이나 모압이나 암몬 같은 주변세력은 가족들이나 가까이에서 영향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즉 나의 내면세계에 있는 어둠의 세력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타협하면 주변 세력을 통해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차지할 땅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지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에돔, 모압, 암몬 사람의 땅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주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돔, 모압, 암몬은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결국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남편이나 자녀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둠의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 있는 어둠의 세력을 추방하지 못하고 타협하고 수용할 때 남편이나 자녀나 물질등을 통해 고통의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와 같은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는 유명한 얍복 강의 기도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곳이 있는데 하나님은 왜 야곱을 얍복강으로 인도하셨을까요? 얍복이라는 뜻은 "텅 비운다"는 뜻입니다. 얍복강으로 야곱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네가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려거든 텅 비우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고민 끝에 하나 하나 떠나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축들, 종들, 처자식들을 순서대로 떠나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을 비우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32:24)" 홀로 남은 야곱은 밤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였는데 결국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환도 뼈를 치매 환도 뼈가 위골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변하여 보았으나(창32:30)"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밤새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환도 뼈가 위골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기지 못한 야곱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많은 경우에 야곱의 끈질긴 기도가 하나님과의 승리를 가져왔고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어냈으며 그래서 우리도 야곱처럼 환도 뼈가 부러지도록 기도해서 기도의 승리자가 되자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올바른 기도를 했다면 부러진 환도 뼈도 치유돼야 정상이 아닐까요? 야곱이 환도 뼈가 부러진 것은 기도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기도를 잘못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지 못한 야곱의 모습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야곱의 고집(egoism)이며 살아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심이나 자아를 끝까지 고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환도 뼈를 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집스런 자아를 향한 하나님의 채찍입니다. 그러면 부러진 환도 뼈는 무엇일까요? 환도 뼈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합니다. 다양하다는 말은 정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환도 뼈는 어떤 정해진 부위의 신체적 기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관이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버리지 못하는 고집(야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열심히 기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어냈다는 해석은 자칫하면 공로주의 사상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이미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고 하심으로서 이미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선포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전체 배경을 보면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은 야곱의 노력(기도)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끝까지 자기를 비우지 못하는 강팍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은 그를 환도 뼈를 쳐서라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신 것입니다. 육신을 쳐서 영을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것을 버리고 신령한 것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것을 잃고 영의 것을 얻는다면 육신의 것이 망하는 것이 은혜이며 육신의 것을 얻고 영의 것을 잃는다면 육신의 것이 잘 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환도 뼈가 부러지도록 고집한 실제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 내용은 창32:11절의 기도 내용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야곱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텅 비운 상태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시는데 야곱의 관심은 형 에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야곱을 통해 아브라함의 축복을 약속하셨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지시하셨다면 분명 야곱을 죽게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여전히 에서를 해결해야 얍복을 건너겠다고 고집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곱이 환도 뼈가 부러지도록 기도해서 에서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에서가 바뀌었다면 이 큰 사건을 성경은 과연 침묵했을까요? 성경을 아무리 봐도 에서가 바뀌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질문에 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응답을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과 야곱이 밤새도록 씨름한 내용은 서로 다른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바뀌기를 원하셨고 야곱은 에서가 바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에서는 이미 하나님이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실 때 바뀌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야곱이 에서에 대한 두려움(창32:11)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는 외부적인 주변세력(에서)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 때문에 환도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야곱의 영혼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에서를 야곱에게 보내신 것은 야곱 속에 있는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얍복으로 인도하신 메시지는 "네가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려거든 네 안에 있는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고 텅 비우고 들어가라"는 것이었는데 야곱은 두렴움의 정체가 에서의 문제라고 고집하며 밤새도록 씨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곱처럼 환도 뼈가 부러지는 어리석은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자녀를 위해, 물질 문제를 위해.... 여러 가지 주변적인  문제를 가지고 철야하고 금식하며 작정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변에 어떤 기도의 제목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력을 통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주된 원인이 내 속에 영적인 문제 즉, 내 안에 존재하는 일곱 족속을 해결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땅(에돔, 모압, 암몬)을 빼앗기 위해 정작 하나님이 얻기를 원하시는 가나안에는 관심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신앙은 병들고 낙심하고 마음은 지치고 자포자기하는 모습이 바로 부러진 환도 뼈가 아닐까요? 야곱은 환도 뼈가 부러지고 나서 이스라엘로 바뀌었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은 환도 뼈가 부러지고도 여전히 야곱을 붙잡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 대상은 바로 나 자신 속에 있는 어둠의 세력을 잡아야 합니다.


  3.효과적인 영적 전쟁을 하기위해 전인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역대상 11장이하에 보면 다윗이 가나안의 족속들을 모두 토벌 했을 때 주변의 에돔이나 모압이나 암몬과 같은 나라들이 굴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자신 속에 있는 어둠의 세력을 제거하면 남편이나 아이들이나 물질이나 나에게 고통을 주던 주변의 세력은 굴복한다는 영적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인치유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세력들 때문이며 그 세력들을 몰아내고 실제적인 소유권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악한 세력들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자기들의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힘을 쓸만한 근거들이 무엇인지 진단하고 찾아서 처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조직 폭력배와 같은 악한 영들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인치유란 그리스도께서 나를 온전히 다스리시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내 안에 있는 일곱 족속과 같은 악한 영들이 힘을 쓸만한 근거들을 제거하고 악한 영들을 몰아내는 준비작업과 같은 것입니다.


Ⅲ.전인치유와 인간이해


  1.치유의 주체자는 누구인가?

  더 깊은 치유를 위해 우리는 먼저 인간의 본성과 마음의 구조를 깊이 이해하고 치유의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비유는 네 가지 땅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네 종류의 땅은 인간의 네 가지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비유에 나오는 땅의 종류는 네 가지이지만 크게 나누면 열매 맺지 못하는 땅과 열매 맺는 땅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되어 열매를 맺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땅은 아무리 토질이 좋아도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땅의 토질이 비옥할수록 잡초는 더 무성하게 올라옵니다.

  인간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땅과 같아서 스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기준에서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일수록 내면 깊은 곳에는 강한 고집과 교만이 있습니다.

  고집은 자기주의(egoism)이며 교만이다. 고집은 다른 말로하면 자기 집착이며 우상이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땅을 저주 하셨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창3:17)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8)” 인간의 마음이 타락하여 저주를 받을 때 땅도 함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땅이 곧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땅의 성분과 동일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땅은 인간에게 필요한 곡식과 과일을 잘 주지 않습니다. 곡식과 과일은 거름주고 김 매 주고 열심히 가꿔도 가뭄과 질병에 시달리며 잘 자라지 못합니다. 그런데 잡초는 아무리 뽑아내고 제거해도 계속해서 올라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콩밭에 김을 매면서 잡초를 바구니에 담아서 모두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그 밭에 잡초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것들은 그렇게 연습하고 훈련해도 잘 안 되는데 마귀가 좋아하는 악한 생각, 악한 말, 악한 행동들은 절제하고 금지해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올라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매 맺는 원인이 땅에 있지 않고 관리자에게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선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공로주의 사상이며 이방종교의 사상입니다. 땅은 관리자에 의해서만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관리자이신 성령님에 의해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말 그대로 성령에 의해서 맺혀진 열매입니다.

  우리의 초점은 마음을 수련해서 얼마나 착한 마음을 만드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을 관리자이신 성령님께 맡기고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토박한 땅이라도 주인의 손길에 의해 거름 주고 물을 주어 가꾸면 열매를 맺지만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도 내버려두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땅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자라게 되어있습니다. 열매를 거두는 문제는 관리의 문제이지 토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길가와 같은 땅은 물을 주고 갈아엎고 심으면 됩니다. 돌밭은 돌을 제거하고 거름 주고 심으면 됩니다. 가시덤불은 뽑아내고 갈아엎고 심으면 됩니다. 이것은 땅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하는 것입니다. 땅은 농부의 의도대로 맡기고 순종하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에 길가와 같이 사람들에게 밟혀 굳어진 것은 무엇이며 바윗덩어리 같이 내면 깊이 응어리진 것은 무엇이며 가시덤불과 같이 나의 삶을 짓누르는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길가와 같은 땅은 살아오면서 윗사람들로부터 많이 짓밟혀 상처받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마음이 굳어져서 다른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신뢰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집과 자기 방식대로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새들(사단)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은 태아기 때 받은 상처나 또는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열악한 환경에서 받는 상처 즉,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깊은 응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잘 하려고 노력도 하지만 뿌리가 없어 쉽게 말라죽는 식물처럼 신앙이 오래가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며 쉽게 낙심하며 좌절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은 현재 많은 문제 속에 휘말려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너무 세상적인 일에 빠져 있거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영적 기운이 막힌 것입니다. 여러 가지 중독증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일에 관심을 쓸 여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내 속에 열매 맺지 못하도록 하는 이런 문제들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농부 되시는 성령님께 맡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내적치유는 내 속에 이런 문제들을 찾아서 성령님과 함께 제거하는 작업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의 의지를 사용하십니다.


  2.완전치유는 가능한가?

  종종 사역자 중에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치유가 깨끗이 되었다.” “한 번만 더 오면 된다.”는 식의 표현을 해서 내담자들을 실망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내담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좋지만 진리를 바로 알려주지 못하면 결국 더 큰 상처를 받고 실망하게 됩니다.

  사역자가 해야 할 일은 내담자들을 깨끗이 치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스스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내담자 자신이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살아있는 한 완전한 치유는 불가능합니다. 귀신들은 죽은 사람의 몸에는 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붙어삽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실 때 “....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3:14)”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흙은 사람의 육체를 말한다고 합니다. 뱀은 흙을 먹지 않으며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뱀은 사단을 말하며 흙은 인간의 육체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흙이 육체라는 해석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인간의 육체를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흙은 인간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흙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인간의 마음(혼)을 도둑질합니다. 사단의 공격 목표는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마음(인격)입니다. 왜곡된 지식으로 진리의 지식을 훔쳐가고 상처를 주어 선한 감정을 훔쳐가며 죄와 나쁜 습관과 중독을 통해 선한 의지를 빼앗아 갑니다. 결국 사단은 우리의 육체 안에 들어와 우리의 혼(마음)을 먹고 삽니다.

  초상집에서 너무 슬피 울면 안 된다고 합니다. 슬피 울 때 죽은 사람에게서 나온 귀신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증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매우 믿을만한 이야기입니다. 심리적으로 사람이 슬피 울거나 기뻐 웃을 때에는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죽은 사람의 육체 속에 있던 귀신이 배회하다가 슬피 우는 사람의 무방비 상태에 있는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상집에는 어린아이나 임신부나 마음이 예민한 사람은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뱀(사단)이 우리의 마음(흙)을 종신토록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귀신을 완전히 제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암세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암세포를 이기는 강한 저항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한 것도 악한 영들이 우리 안에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악한 영들이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를 밟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보혈의 능력으로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전과 인간의 구조이해


  1.성전의 구조와 인간의 구조

  인간은 학자에 따라 영혼 과 육으로 구분하는 2분설과 영, 혼, 육으로 구분하는 3분설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성경적으로 3분설이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6:19절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전의 설계도를 이해하면 우리의 몸의 구조를 더 세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의 구조로 창조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실패하시자 하나님은 다시 인간을 향해 찾아오시기 시작했는데 가장 원시적인 성전은 돌로 쌓은 번제단입니다.(창4장) 번제단은 돌과 불(나무)과 제물(양)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광야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는 성막의 모형을 갖추었고 솔로몬 시대에는 성전의 모형을 갖추었습니다. 결국 이 성전의 설계도는 하나님이 최초부터 거하기 원하셨던 인간의 설계도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모양은 크게 나누면 외소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모형이 밖에서 보면 외소와 성소만 보이지만 성소 안에 들어가 보면 성소와 지성소가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의 구조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을 2분설로 주장합니다. 그러나 내면에 깊이 들어가 보면 인간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 영(지성소)과 혼(성소)으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 깊이가 있는 분들은 3분설을 주장합니다.


    1)외소와 육체

  외소에서는 번제를 드려 죄를 태우고 물두멍에서 손을 씻는 정결 작업을 합니다. 성전의 구조에서 외소는 우리 인간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성소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하는 문제는 우리의 육체가 정결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를 죽여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서 하나님은 대속의 원리로 어린양을 대신 죽게 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의 육체의 죄를 해결 하도록 하셨습니다. 율법에서 속죄의 제사는 대부분 육신으로 지은 죄를 처리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범한 죄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 제사를 통한 대속의 방법은 장차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로 보여주는 사건일 뿐 완전한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태우고 보혈로 씻어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심으로 우리의 육체적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버림받은 몸이 구원받은 몸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며 영적 신분이 바뀌는 것입니다.


    2)성소와 혼(인격)

  그러나 그것으로 지성소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소에서 어떤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성소는 우리의 기관 중에 혼에 해당하며 혼은 마음 또는 인격이라고도 합니다. 성소는 떡 상과 등대와 분향 단이 있으며 우리의 인격도 지, 정, 의로 구분이 됩니다.


    3)지성소와 영

  지성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그룹과 속죄소와 언약궤가 있는데 하나님은 속죄소 위 그룹사이(출25:22) 공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의 영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공간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룹은 날개를 펴고 있는 천사 모양으로 법궤 윗부분의 양쪽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으로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룹의 발은 법궤의 뚜껑에 붙어 있는데 그룹의 발이 붙어 있는 법궤의 뚜껑은 속죄소라고 합니다. 속죄소는 정금으로 만든 법궤의 뚜껑에 해당하는 기구이며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법궤는 언약궤, 증거 궤, 여호와의 궤, 하나님의 궤 등으로 부며 성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증거궤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 돌 판이 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는 나중에 없어지고 십계명 돌 판만 남아있게 됩니다. 우리의 영은 병들거나 약해지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에서는 “산다(창2:7)” 또는 “죽는다(겔18:4)”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생명력을 회복한 상태이고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생명력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의미는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미국의 애드리언 로저스 목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에서 “아담은 범죄 한 즉시 영적으로 죽었고 그의 혼이 점진적으로 죽었으며 궁극적으로 그의 몸까지도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 영은 즉시 의로워지고 혼은 점진적으로 성화되며 몸 역시 궁극적으로 영화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영혼이 육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말하지만 우리의 영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명력을 회복한 상태는 지성소를 회복한 상태 즉, 하나님의 말씀(언약궤)이 회복된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속죄소)로 덮여있으며 성령의 보호(그룹)를 받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때때로 기적의 체험(만나 항아리)과 전통적 귄위(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필요하지만 그런 것들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영원히 영적 생명력을 지켜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돌판)과 보혈(속죄소)과 성령(그룹)뿐입니다.

  영의 치유란 우리 안에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고 보혈로 덮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우리의 영은 산 영이 되며 치유된 것입니다.

  성전의 구조는 외소와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하여 생각 할 수 없듯이 우리의 영과 혼과 육체도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영과 혼과 육체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치유도 함께 일어나야 합니다.


  2.성소의 구조와 인격(혼)의 구조

    1)떡 상과 지성

  성소의 첫 번째 기구인 떡상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개의 떡을 진열해 놓는 상이며 매 안식일마다 새로운 떡으로 갈아 줘야합니다. 떡을 갈아주려면 먼저 묵은 떡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묵은 떡을 내려놓지 않으면 새 떡을 올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떡은 말씀에 해당합니다. 우리의 인격 중에 말씀을 갈아줘야 하는 부분은 지식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적인 진리는 변함이 없지만 많은 부분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더 완전한 모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또한 말씀에는 선포된 객관적인 말씀(로고스)이 있고 선포된 말씀이 내 인격과 삶에 적용되는 말씀(레마)이 있습니다. 로고스는 언제나 변함이 없지만 레마는 날마다 새롭게 바꿔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갈아줘야 할 새로운 떡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님을 통한 새로운 진리의 지식으로 갈아 줘야합니다. 그런데 새 지식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하는 묵은 떡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상(~ism), 이념 또는 ~주의라고 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데 절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객관적인 상태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같은 내용도 시대의 변화나 환경의 여건에 따라 변하는 지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내 안에 들어와서 사상 화 될 때 그 지식은 묵은 떡이 되어 다른 새 떡(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공격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입니다. 바울이 배설물처럼 버린 것도 그의 지식이 아니라 율법과 헬라철학이 자기 안에서 사상 화 된 그 사상을 버린 것입니다. 어떤 지식이 내 안에서 사상 화 되면 그 때부터 그 지식은 다른 사람을 정죄 하고 죽이기 시작합니다.

  율법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율법주의는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공산화는 아름다우며 성경 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사상화 된 공산주의는 부자들을 다 끌어다 죽였습니다. 민주화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민주주의는 지도자들을 거부하고 죽였습니다.

  한국의 교회가 중심을 잃고 권위가 땅에 떨어진 이유는 민주주의의 영향 때문입니다. 원래 성경에서 영적 지도자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이기 때문에 아무도 영적 지도자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모세를 비난하던 미리암은 문둥병의 저주를 받았고 아론은 호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서 유럽의 교회들은 무너졌고 한국 교회는 혼란에 빠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묵은 떡을 내려놓지 않는한 한국 교회의 미래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눅22:31-32에서 예수님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 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고 하셨습니다. 청구한다는 말은 자기의 것을 돌려 달라고 요청한다는 뜻입니다.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하나님께 청구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말을 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을 때 인류는 그 죄 값으로 마귀에게 팔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죄 값을 갚으시고 우리를 건저 내신 것을 대속의 원리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여전히 우리를 밀 까부르듯 흔들어서 자기의 완전한 소유를 만들기 위해 청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이 청구한 것은 "너희(열두제자)"인데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은 "너(베드로)"입니다. 왜 예수님은 열 두 제자 모두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베드로만을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운영하시는 영적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한 사람만을 붙드시고 나머지 열 한 제자는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네 형제를 굳게하라") 하나님의 교회는 많은 지도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계시록 1:20절에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했으며 계2:1에서 "오른손에 일곱 별(사자)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교회)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붙드신 것이 아니라 사자(목회자)를 붙드시고 교회는 그 사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교회의 사역자에 대해서 예수님의 절대 권위를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목회자들을 교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민주주의 사상에 물든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교인들이 주인이라는 사단의 지식에 속은 것입니다.

  사상 화 된 지식은 엄밀히 말하면 우상숭배입니다. 율법은 선하고 아름다우나 율법 주의가 되면 율법이 곧 하나님이 되어서 진리를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신앙은 경건해야 하지만 경건주의가 되면 믿음이 약한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경건주의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된 경건운동이 사상 화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할 정도로 영적 오만에 빠졌으며 예수님까지도 판단하고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이라도 사상 화 된 지식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한국 교회가 보수주의냐? 자유주의냐? 복음주의냐? 하는 신학적 논쟁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제는 모든 주의를 내려놓고 오직 성경의 진리 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상 화 된 지식은 어떤 지식이든지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때문에 복음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 묵은 떡을 내려놓지 않으면 어리석은 논쟁은 계속되며 사단은 박수를 칠 것입니다. 사단은 지금까지 신학적 논쟁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해 왔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이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지식은 우리 인격의 사령부와 같은 곳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혼을 가장 먼저 공격하며 그 중에서 지식부분을 가장 먼저 공격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마귀는 가장 먼저 하와의 지식 체계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진리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4-5)"는 말로 진리를 왜곡시켰습니다. 왜곡된 지식을 받아들였을 때 하와의 마음에는 곧바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고("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움")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자 의지적 행동으로 옮겨("그 실과를 따먹고")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가장 먼저 지식을 왜곡시키거나 변질시켜 우리의 사상을 공격합니다.


    2)등대와 감정

  성소의 두 번째 기구인 등대는 우리 인격의 정(감정)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등대의 불을 밝히기 위해서 제사장들이 날마다 점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똥을 제가하는 일과 기름을 보충하는 일입니다. 불똥을 제거한 후 특별히 제조된 순결한 기름으로 항상 떨어지지 않게 채워서 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우리 감정에도 불똥과 같이 제거하지 않으면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가 있으며 날마다 채워줘야 꺼지지 않는 순결한 기름이 있습니다. 그 불똥은 상처를 말하며 순결한 기름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말합니다. 상처는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고 성령의 불을 밝히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감정에 수 많은 상처들을 만들기 위해 인간관계속에서 많은 오해와 갈등들을 일으킵니다. 등대를 밝히려면 불똥을 제거하듯이 우리 감정의 찌꺼기인 상처를 깨끗이 제거해야 합니다.


    3)분향단과 의지

  성소의 세 번째 기구인 분향 단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향을 피우는 곳입니다. 분향 단은 우리 인격의 의(의지)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이 향이 성도의 기도라고 했고(5:8), 성도의 기도와 합한다(8:3)고 했으며,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8:4)고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선한 의지를 강화시키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분향 단은 우리의 의지에 해당되는 기구입니다.

  우리 의지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선한 일을 도모하고 경건을 훈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하는 중요한 기관이 의지입니다. 바울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롬6:13-14)”라고 말씀했습니다. 의지는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로 사용할 것인지 의의 병기로 사용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기관입니다.

  하와는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뱀의 말을 선택했고 선악과를 따먹는 일에 의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것이 죄이며 불행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반복적인 죄를 짓게 하고 중독증에 빠지게 하여 의지를 병들게 합니다. 중독증에 빠지게 되면 의지가 약화되어 죄가 그 사람을 주관하여 원치 않는 죄도 습관적으로 반복하게 됩니다. 우리 의지는 죄로 인해 약해지고 병들게 됩니다. 마귀는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죄를 짓게 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미 우리 의지는 병들었고 약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지로 지은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회개하고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통해 우리 의지를 강화하며 경건훈련을 통해 선한 의지로 바꿔줘야 합니다.


  이처럼 마귀는 왜곡된 사상으로 지식을 병들게 하며 상처를 주어 감정을 병들게 하고 죄를 짓게 해서 의지를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치유는 우리의 인격 전반에 걸쳐서 이루어져야지 어느 한 부분만 치유되면 결국은 다시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3.사단의 공격목표

  사단의 최대 공격 목표는 우리의 혼(인격)입니다. 사단은 먼저 우리의 혼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육체를 병들게 하며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를 차단합니다.

  지성은 인격의 사령부와 같아서 사단은 우리의 지식체계를 가장 먼저 공격하는데 우리의 지식에 여러 가지 왜곡된 지식들을 입력시켜서 잘못된 가치관을 형성합니다.(창3:4)

  특히 최근 TV나 인터넷을 통해 왜곡된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어린이 프로그램들은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도깨비나 마술사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무의식중에 어린 아이들의 지식 속에 도깨비 사상을 심어주는 사단의 공격입니다. 이러한 도깨비 사상은 한탕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작가들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점점 더 비 윤리적이고 반 사회적인 내용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방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죄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 지고 성경에서 음란죄로 정죄하고 있는 것들을 사랑이란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과거에는 부끄러워서 말도 못하던 일들이 지금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지식을 수용할 때 우리 안에는 잘못된 사상이 형성되며 잘못된 감정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잘못된 감정은 죄의 욕구를 일으키게 되고 결국 잘못된 의지로 발전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잘못된 지식을 받아들였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감정이 일어났으며 그 감정은 곧 바로 금단의 열매를 따 먹는 의지적 행동을 유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죄의 근본은 잘못된 지식에서 출발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왜곡되어 있는 지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에 대한 지식이 왜곡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담대하게 어기며 오히려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죄를 짓게 됩니다. 영성에 대한 잘못된 지식은 잘못된 사역을 통해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며 성에 대한 왜곡된 지식은 오히려 음란영의 활동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감정을 공격할 때에는 잘못된 지식을 통해 잘못된 감정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상처를 받게 하여 잘못된 생각을 정당화 시켜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상처받은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사람을 미워해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생각으로 미움의 죄를 합리화시키게 됩니다. 상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갖게 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처가 많이 쌓일 때 점점 더 감정은 병들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능력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발전되면 히스테리와 우울증 등 각종 발작 증세로 발전하게 되고 결국에는 사단이 완전히 지배하게 됩니다.

  의지를 공격할 때는 반복적인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나쁜 습관을 갖게 합니다. 죄를 많이 지으면 의지가 약해져서 더 많은 죄를 짓게 되고 결국 자신을 포기하게 되면 죄만 짓게 됩니다. 우리의 영, 혼, 육이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도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치유는 세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전인치유의 원리


  치유를 받으려면 먼저 치유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치유는 진단 - 제거 - 회복의 3단계를 걸쳐서 일어납니다.


  1.왜곡된 지식의 치유

  먼저 우리의 왜곡된 지식을 치유받기 위해 우리 속에 사상화 되고 절대화 된 지식(묵은 떡)이 무엇인지 진단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식을 내려놓는 다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서 생각을 전환시켜 주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진리 외에 어떤 것도 절대 지식은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유달리 여러 교파로 갈라진 것은 바로 사상 화 된 묵은 떡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병자를 치유하실 때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경험주의라는 묵은 떡을 사용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지식이나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이미 묵은 떡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세 교회는 이 묵은 떡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말하는 자를 무참하게 처형했습니다. 영성 사역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묵은 떡이 경험주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때 그 때의 방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어떤 방법에도 얽매어 있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세월이 지나면 이미 묵은 떡이 되어 성령님의 사역에 방해물이 됩니다.

  자기의 경험과 지식이 틀림없다는 생각은 결국 다른 새 떡을 거부하게 하는 묵은 떡(egoism=자기주의)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열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새로운 떡으로 갈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상을 내려놓으면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조명하여 주시는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히 지식 부분이 치유되지 않으면 감정이나 의지를 치유해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 지식에서 절대 용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토설해도 용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기로 생각이 바뀐다면 대부분의 감정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하기만 해도 용서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꾼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채워줘야 합니다. 떡 상의 떡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갈아준 것처럼 매 주일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는 작업은 우리 지식 치유에 중요한 과정입니다.


  2.상한 감정의 치유

  감정의 치유를 위해서는 우선 자기 속에 상처가 무엇인지 찾아 발견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상처란 상한 감정을 말하며 다른 말로는 용서하지 못한 감정을 말합니다. 용서는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처받은 감정을 제거해야 하는데 상처받은 감정은 진리의 말씀으로 지식이 치유된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용서를 선포함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지만 깊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기 때문에 토설이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토설은 마음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 토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시62:8에서 다윗은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을 토하는 기도가 토설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마음속에 토설해야할 것들을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와 허물을 토설해야 합니다.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음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게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1-5)”라고 고백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속에 있는 죄와 허물을 토설치 아니할 때의 괴로움을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죄와 허물을 토해낼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의지적으로 행한 잘못이며 허물은 부지중에 행한 잘못입니다. 죄와 허물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며 삶의 과정에서 나온 찌꺼기이기 때문에 날마다 털어내고 토해내야 합니다.


  둘째는 마음의 상처와 근심을 토해내야 합니다.

  시102편 설명 부분에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102편에서 다윗은 마음의 상처와 근심으로 뼈가 냉과리같이 탔으며 살이 뼈에 붙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앓았던 화병은 상처와 근심을 오래도록 품고 있어서 생기는 병입니다. 이러한 상처와 근심을 토해내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으면 불면증 신경통 소화 불량 등 여러 가지 질병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셋째는 마음의 원통함을 토해내야 합니다.

  시142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숨어있을 때 지은 기도 시입니다. 다윗은 특별히 잘못하거나 죽을 만한 죄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골리앗의 손에서 구원했으며 사울의 충신이었으나 사울의 시기 때문에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칭찬과 보상을 받아 마땅한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 이보다 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원통한 일을 당하면서도 살길을 알았습니다. 그 원통함을 하나님께 토해낸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 하는 도다.(시142:2)”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삼무엘상1장에 보면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브닌나에게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성경은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삼상1:6)”고 했습니다. 브닌나는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이었지만 한나를 공격하는 대적이었습니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삼상1:7)” 브닌나의 공격 때문에 한나는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나에게 살길이 열렸습니다. 한나가 그 마음의 원통함을 토해냈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삼상1:10)” 얼마나 심하게 통곡하며 마음을 토해냈는지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술에 취한 줄 알고 포도주를 끊으라고 권면했습니다.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자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보지 마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은 심정을 통한 것이 토설기도입니다. 그런데 1:18절에 보니까 한나가 “....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브닌나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한나의 마음의 원통한 감정이 토설을 통해 다 빠져 나갔기 때문에 마음이 치유되고 회복된 것입니다.

  토설기도는 죄와 허물, 상처와 근심, 억울함과 원통함을 토해냄으로서 마음이 치유되고 평강이 회복됩니다.

 

  토설기도의 대표적인 사람은 다윗으로서 그의 시편을 보면 많은 부분에서 죄와 허물을 토하는 기도를 했으며 마음의 속상함이나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토하는 토설기도를 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억울한 일을 그렇게 많이 당하고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힘은 그의 토설기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토설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청소하는 것과 같은 기도입니다. 죄와 상처와 원통함을 털어내는 마음의 대청소가 토설기도입니다. 상담자들이 내담자의 과거의 상처를 이야기 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토설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끄집어내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등대에는 불똥을 제거하고 순결한 기름을 채우듯이 우리의 감정 부분에는 상처를 제거하고 찬양과 성령기름부음으로 채워줘야 합니다. 찬양은 우리의 감정을 풍성하게 하고 감정을 치유하는 도구이며 성령기름부음은 우리 감정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간을 채워주는 보약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는 찬양과 통성기도를 뜨겁게 하는 교회만 다녀도 많은 치유가 일어납니다.


  3.병든 의지의 치유

  병든 의지를 통해 들어오는 것은 죄입니다. 의지의 치유를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기도를 통해 선한 의지로 채워야 합니다. 기도는 선한 의지를 강화하는 도구입니다. 분향 단에 끊임없이 향을 피우듯이 쉬지 않는 기도(살전5:17)를 통해서 우리의 선한 의지를 강화하고 선행을 도모해야 합니다. 선한 의지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훈련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13에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함으로 우리의 의지를 선한 도구로 드리기를 권면했습니다. 디모데 전서 4:7에서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연습을 통해서 삶의 습관을 바꾸면 우리의 의지가 치유되고 의지적인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한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의 경건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잘못된 습관이나 중독적인 일들을 이겨낼 수 있을 때까지 훈련을 통해 우리의 의지를 강화시켜야 합니다.


.전인치유와 축사의 원리

  축사는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말하며 축귀라고도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역자들만 축사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미 주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귀신을 추방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마10:1에서는 열두제자에게 이 능력을 주셨으며 눅10:1-20에서는 70인의 제자에게 이 능력을 주셨으며 막16:17-18에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축사의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우리가 명령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축사하실 때처럼 무조건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또 나간다 해도 원리를 알지 못하면 오히려 다시 들어와서 괴롭히기 때문에 충분한 이해와 원리를 알고 축사에 임해야 합니다.


  1.음식쓰레기와 쥐의 원리

  미국의 챨스 크레프트 박사는 음식쓰레기와 쥐의 원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 영적 존재와 그 존재가 활동하는 근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은 우리 안에 합법적인 근거를 가지고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악한 영만 쫓아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는 음식 쓰레기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죄와 상처이며 또한 왜곡된 지식과 사상들입니다. 그것을 근거로 활동하는 쥐와 같은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악한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을 쫓아내는 것보다 악한 영들이 먹고 활동하는 음식쓰레기를 깨끗이 치우면 악한 영들은 도망가며 남아있어도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60-70년대에 많은 부흥운동을 일으키며 많은 축사사역을 했던 목사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귀신을 쫓아내면 교회는 부흥되지만 본인은 반드시 재발한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신학교를 갖 졸업한 전도사였기 때문에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 후 어촌에 있는 작은 교회로 부임해서 단독목회를 하던 중 귀신들린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매일 저녁 다니며 일주일간을 기도했더니 귀신이 떠나가고 온전하여져서 신앙생활을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그 사람은 또다시 술을 먹기 시작하면서 귀신의 발작증세를 일으켰습니다. 그 뒤로 그 목사님의 말씀대로 그 사건으로 인해 교회는 많이 부흥 되었지만 그 사람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서천으로 부임하여 목회 하던 중 한 자매가 귀신이 들려 심한 발작증세를 보였습니다. 상태가 심각하여 사택으로 데리고 와서 40일 작정기도를 선포하고 매일 저녁 전 교인이 모여서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악랄한 귀신이 들렸는지 틈만 나면 밖으로 뛰쳐나갔으며 서재에 책장은 다 뒤집어 놓았고 유리도 발로 차서 깨뜨리고 방충망도 다 찢어버렸습니다. 밥을 먹다말고 숫가락을 집어던지기 일쑤였고 음료수를 마시던 컵을 집어던져 깨뜨리기가 일쑤였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하루에 불과 한 두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떠들고 욕하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40여일을 사택에 있는 동안 식구들은 신경이 곤두섰으며 잠도 깊이 잘 수 없었습니다. 수일간 기도하는 동안에 한 가지 지혜가 떠올랐는데 그의 말을 분석하면 귀신의 종류가 나오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루는 앉아서 그의 말을 분석해 보았더니 한 마디도 연결된 말이 없고 모두가 다른 말이었습니다. 분석을 해보니 열 다섯 가지 정도의 정체를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 제목을 가지고 한 가지씩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날 저녁부터 말의 내용이 4가지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40여일이 거의 마쳐갈 때 그의 남편이 정신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바람에 작정기도는 무산되고 교회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 일로 인해 치유 센타를 찾게 되었는데 나는 치유 센타에 와서 음식 쓰레기와 쥐의 원리를 들을 때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축사하던 방법은 한국 교회가 그동안 전통적으로 해오던 방법이었고 결국 한국 교회는 음식 쓰레기는 치울 생각도(있는 줄도 몰랐다는 말이 더 정직할겁니다.) 안하고 쥐를 몰아내는 일에만 열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몰아내기도 힘들 뿐아니라 몰아내도 6개월 만에 다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쥐를 잡는 일(축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음식 쓰레기를 치우는 일입니다.


  2.두 가지 감정의 통로

  음식 쓰레기를 치우려면 먼저 우리 안에 두 가지 감정의 통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있습니다. 좋은 감정은 추억이라고 말하며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 좋은 형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데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쁜 감정은 상처라고 말하며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 나쁜 형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데 영적으로 보면 악한 영이 보낸 것입니다. 좋은 감정은 삶에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더 풍성하게 해야 하지만 나쁜 감정은 뽑아내지 않으면 삶에 나쁜 영향을 주어 범죄 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합니다.


  3.죄와 상처의 관계

  창세기 4장의 가인은 동생 아벨에 대한 나쁜 감정 때문에 살인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뽑아내야 할 것은 나쁜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감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죄를 함께 처리해야 합니다.     죄와 상처는 들어오는 통로가 다르기 때문에 처리하는 방법도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죄는 내가 남에게 잘못할 때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며 이것은 죄를 토설(회개)하므로 용서받고 죄로 인해 들어온 근심과 걱정까지 토설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는 남이 나에게 잘못할 때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해도 안 됩니다. 상처는 마음에 감정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감정을 푸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상한 감정과 원통함을 토설을 통해 밖으로 풀어내야 합니다. 토설을 통해 감정을 풀고 상대방을 용서해 주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상처는 꼭 남이 잘못해서 들어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상대방이 아무 잘못이 없어도 스스로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5살 난 아들이 칼을 달라고 할 때 아버지는 칼을 주지 않습니다. 아들은 계속 달라고 떼를 씁니다. 아버지는 안 된다며 고집 쓰는 아들을 야단칩니다. 이런 경우에 아버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들의 안전을 위해 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입장에서는 상처가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잘못 했느냐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상한 감정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상한 감정 때문에 올바른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잘못된 감정이 계속 나를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토설 하다보면 본인이 잘못 한 것까지도 옳은 것으로 정당화 시켜주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잘못된 것도 옳은 것으로 생각할 뿐이지 그 감정을 토설하고 나면 비로소 자신이 잘못된 감정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한 감정을 토설 할 때는 누가 옳고 그른가를 판단해 주는 일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어떤 감정이 상처로 들어와서 쓴 뿌리가 되어 있는지를 찾아내어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빛과 어두움의 원리

  이렇게 음식 쓰레기를 치우고 나면 우리 안에 성령의 빛이 임합니다. 악한 영들은 어둠의 세력이기 때문에 빛이 임할 때 도망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늘을 만들어주는 음식 쓰레기와 같은 것들이 있을 때 숨어서 버티게 됩니다. 악한 영은 단번에 깨끗이 몰아낼 수도 없으며 또 그렇게 해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천천히 조금씩 몰아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악한 영들은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커지는 만큼 쫓겨 가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은 어둠 그 자체입니다. 어둠은 빛이 들어올 때 사라집니다. 죄와 상처와 잘못된 지식들은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 악한 영들이 숨을 곳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음식 쓰레기만 제대로 치워지면 악한 영들은 저절로 축사가 됩니다.


  어떤 자매는 여러 번 치유를 받았으나 집에 가면 다시 반복되는 분노 때문에 회의가 왔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방망이질만 하면서 살아야 하나?' 생각하다가 마지막으로 치유 받고 안 되면 포기하겠다는 심정으로 처음 온 사람처럼 등록금을 내고 들어왔습니다. 3시간 정도 계속해서 지식치유에 중점을 두고 치유한 다음에 기름부음을 했는데 악한 영이 저절로 드러나면서 '아이, 더러워서 못살겠네. 나 이제 갈꺼야.'라고 했습니다. 나는 '왜 벌써가냐? 더 놀다가.' 했더니 '에이 치사해서 못살겠다. 난 이제 갈꺼야.'라고 했습니다. 나는 머리에 손을 얹고 '성령의 빛이 들어간다. 더러운 귀신아 떠나가라.' 했더니 조용히 떠나갔습니다. 우리 안에 쓰레기가 치워지고 성령의 빛이 임하면 어둠은 떠나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3:29-30에서 하나님은 "그러나 그 땅이 황무하게 되어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1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에는 일곱 족속이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단번에 내쫓아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관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천천히 이스라엘이 번성할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내 쫓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일곱 족속은 땅을 관리하며 살지만 악한 짐승들은 땅을 관리하지도 않고 노략하기 때문에 악한 짐승들 보다 일곱 족속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리를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내담자는 믿음이 형편 없으면서 자기 속에 귀신들을 모두 내 쫓아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영들을 무리하게 내쫓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본인이 자신을 관리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사역자의 능력으로 몰아내는 것은 다시 공격했을 때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43에서도 같은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된 상태는 치유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를 유지할 믿음의 능력이 없을 때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중 형편이 더 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축사가 위험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암을 치료받고 재발 한 사람이 치유가 안 되며 귀신 들렸다가 고침 받은 사람이 재발 했을 때 치유가 안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원리 때문입니다. 귀신들은 살아있는 육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을 경우 그 집(몸)에서 쫓겨나서 다른 집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우리 몸을 서서히 괴롭히면서 오래오래 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동안 붙어살던 귀신들은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데리고 들어온 더 악한 귀신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공격하기 때문에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무리하게 악한 영들을 몰아내는 것은 영적인 무지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이 임하면 자동으로 물러갑니다. 악한 영들은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믿음을 통해 스스로 도망가게 되어있습니다. 사역자가 무리하게 악한 영을 축사하는 것은 어쩌면 성령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문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1달 동안 치료할 계획을 하고 있는데 간호원이 안타까워서 일주일 만에 끝내려고 몸부림 친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많은 사역자들이 전문의 되시는 성령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연민의 감정에 빠져서 간호사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치유 사역에서 지나친 동정심은 오히려 사탄의 속임수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문제 앞에서 냉정하게 성령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에는 세 가지 영역의 분명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영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영역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과정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영역입니다.(창세기-레위기)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싸울 수 있도록 사역자를 붙여주시고 또 사역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출애굽을 기준으로 보면 모세를 앞세우고 싸우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앞세우시고 실제로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두 번째 영역은 사역자(목회자)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입니다.  홍해를 건너서 광야 40년을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땅을 분배해 주는 것은 사역자가 도와주는 영역입니다.(민수기-여호수아) 사역자는 내담자를 위해 대신 싸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대신 싸워주고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싸우는 법을 알려주고 기도해 주고 도와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싸워야 할 것인지 그리고 싸워서 얻어야 할 땅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영적 전쟁의 범위와 방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내담자가 스스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만 처리해 줘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모두 점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만을 해결해 주고 여호수아는 죽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영역은 자신이 싸워야 하는 영역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실제적인 싸움을 싸우며 분배된 땅을 차지하는 일은 각자 개인이 해결해야 할 영역입니다.(사사기) 이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사사기는 바로 개인이 직접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싸웠어야 했는데 그들은 우상을 섬기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삿21:25)” 행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는 고난이 많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절실한 필요성을 깨닫고 그분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사사기에서 백성들이 사사의 지도를 받으며 하나님을 섬길 때는 평안 했으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할 때에는 고난이 왔습니다.

  우리 개인을 죄 가운데서 선택하시고 끌어내시는 과정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리고 광야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도록 도와주고 가나안의 축복을 조금 맛보게 하는 것은 사역자가 도와줄 영역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을 확장해서 스스로를 강하게 하고 가나안에 있는 일곱 족속들을 몰아내는 작업은 각자가 감당해야 할 믿음의 영역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경계선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사역자들은 개인의 영역을 침해하여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까지 개입함으로 개인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우기 보다는 사역자에게 매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사역자에게 매달립니다. 그러면 사역자들은 땀을 흘리며 축사를 합니다. 그 사람은 일시적인 평안을 얻기는 하지만 삶의 현장으로 돌아갔을 때 또 다시 더 악한 세력에게 잡힙니다. 그래서 힘들면 또다시 능력 있는 사역자를 찾아서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갑니다. 치유 센타에서도 축사를 잘 한다는 사역자는 서로 만나고 싶어 합니다. 또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귀신들이 많이 드러나고 도망가는 것을 경험한 사역자는 스스로 자만심에 빠집니다. 모두가 속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냉철해야 합니다. 분명한 경계를 알지 못하고 싸우는 것은 오합지졸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사역자가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내담자에게 넘어서는 안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30%만을 치유하시기 원하시는데 사역자가 욕심을 가지고 50%를 치유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20% 침해한 것이 됩니다. 만약 내담자가 그 20%를 감당할 믿음이 없다면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가게 됩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에게 찾아온 내담자를 깨끗이 치유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심은 영혼을 사랑하는 거룩한 욕심으로 포장되어 그것이 마치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방법인줄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냉정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도 냉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욕심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 되며 그것은 결국 교만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님이 모든 것을 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인데도 실제로는 성령님을 제쳐두고 자기가 다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역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치유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무리한 축사는 오히려 더 나쁜 상황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능력이 약한 목사의 변명이 아닙니다. 사역자의 임무는 내담자 본인이 스스로 싸워서 믿음의 영역을 넓혀가며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올바른 사역이지 깨끗이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이 치유하겠다는 욕심부터가 이미 인간의 계획이며 의지입니다. 이것까지 내려놓고 성령님이 하시는 만큼만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사역자들이 가져야 할 겸손입니다.


Ⅶ.전인치유와 용서의 원리


  1.용서하고 용서받는 원리

  상처와 죄를 처리하려면 용서의 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상처와 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6:14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라고 말씀했습니다. '용서하면'에 해당되는 것은 상처를 말하며 '용서하시려니와'에 해당되는 것은 우리가 용서 받아야 되는 죄를 말합니다.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18: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상처)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죄)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상처)  하늘에서도 풀리리라(죄)"

  결국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상처를 해결하면 하나님께 회개하는 죄에 대해서 해결해 주시겠다는 원리입니다.


  2.먼저 용서해야 하는 이유

  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먼저 용서해 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먼저 용서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비밀은 마태복음 18:21-35의 용서의 원리를 말씀하신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하나를 만나서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하다가 조금만 참아달라는 동관의 말을 무시하고 빨리 갚으라고 옥에 가뒀고 이 말을 들은 임금이 그를 다시 불러서 일만 달란트를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붙였다는 내용입니다. 그이야기 끝에 주님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셨지만 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형제의 잘못을 탕감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주님은 먼저 일백 데나리온을 해결해 주고 오면 일만 달란트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을 비교하면 60만대 1입니다. 일만 달란트가 6억이라면 일백 데나리온은 1천원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주님께 용서받은 우리의 죄를 의미하며 일백 데나리온은 우리가 용서해 줘야 할 상처를 의미합니다. 즉 주님이 우리에게 6억의 죄를 탕감해 주셨지만 우리는 천 원짜리 상처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6억의 죄가 아니라 천 원짜리 상처입니다. 그 종이 6억의 죄를 탕감 받고 하늘을 날을 듯이 큰 기쁨을 가지고 나갔지만 결국 천 원짜리 상처를 만났을 때 그 기쁨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천 원짜리 상처는 엄청난 분노로 끓어올라 동관을 옥에 넣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천 원짜리 상처를 결사적으로 뽑아내야 하는 이유는 그 적은 상처가 6억을 탕감 받은 큰 기쁨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의 죄를 6억(일만 달란트)으로, 우리의 상처를 천원(일백 데나리온)의 비율로 말씀하셨을까요? 과연 우리의 상처에 비해 그렇게 많은 죄를 짓는다는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번 상처를 받으면 일평생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형평성의 원칙에 의하면 한번 받은 상처에 대해 한번 미워하고 끝내야합니다. 그러나  한 번 받은 상처에 대해 한번만 미워하고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두고두고 미워하기 때문에 6억의 죄로 불어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천원의 상처를 받은 것도 억울한데 6억의 죄(미움)를 지어서 더 억울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더 억울한 것은 6억의 죄를 탕감 받아도 천원의 상처 때문에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의 원리만 제대로 알고 우리 안에 천 원짜리 상처만 철저히 처리한다면 우리가 지은 6억의 죄는 전혀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천 원짜리 상처를 처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6억의 죄만 회개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회개를 했어도 자유함이 없고 여전히 억눌린 상태로 기쁨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는 것보다 상처를 토설 하고 용서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3.용서의 범위

  우리는 어디까지 용서해 줘야 할까요? 계속해서 마18장에는 용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형제의 죄를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490번의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490명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490번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사건으로 그 사람 전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내용으로 설교를 하면 쉽게 “아멘”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용서하며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느 날 아내와 아이의 대화 속에서 일흔 번 씩 일곱 번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꼈습니다. 어느 날 아이는 무엇인가 잘못했고 엄마의 책망에 잘못했다며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냉냉한 한 마디가 들려왔습니다. “너 용서해 달라는 말이 벌써 몇 번째냐?” 내가 알기로는 아무리 많아도 열 번 이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이를 용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지난번에 아버지를 용서했는데 집에 가니까 또 분노가 올라와요. 왜 그렇죠?"라고 질문합니다. 그것은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다른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족들은 가까이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많은 감정의 상처들이 쌓여 있습니다. 기억에 남아있는 상처 뿐 아니라 기억 속에서 잊혀진 상처와 심지어 태아기 상처까지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치유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가며 계속 치유 받아야 할 대상이 바로 가족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Ⅷ.전인치유와 토설의 원리

 

  1.분리와 결합의 법칙

  토설이란 감정적으로 묶여있는 고리를 끊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분리와 결합의 법칙에 의해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몸에서 분리된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담에게 보내시며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담은 자신에게서 분리된 분신이 다시 한 몸이 될 때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감탄합니다. 하나님은 남편에게서 아내를 분리시키시고 다시 결합시키시는 분리와 결합의 법칙에 의해서 만드셨습니다. 분리와 결합의 법칙은 우리의 삶에 더 큰 기쁨을 증가 시기키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가족들도 계속 함께 사는 것보다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더 기쁜 것은 바로 그 원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해서도 분리와 결합의 법칙을 적용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창2:24)" 즉 남자는 부모와 혈통으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네 부모를 공경하라(5계명)"고 말씀하심으로 부모와 하나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구원에 대한 계획을 창세전부터 계획하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즉시 구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심으로 일단 격리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한 번 어그러진 관계는 분리와 결합의 법칙에 의해서 일단 분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분리된 우리가 재림하실 때 회복될 그 기쁨은 가장 큰 기쁨이기에 주님은 재림의 날을 잔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1-51에서 예수님은 분리와 결합의 법칙을 실천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살 될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습니다. 절기를 마치고 부모는 집으로 돌아갔고 예수님은 성전에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실수 하신 것이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를 끊기 위해 계획적으로 행동하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고 말 했을 때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신 것이 분명함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대답한 말씀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에 대해 자신의 아버지 관계가 끝났음을 선언한 내용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이 나에게 해야 할 아버지의 역할은 끝났으며 이제부터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을 버리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관계로 시작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간섭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섬겨야 할 위치로 관계전환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의지는 51절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과의 감정적 관계, 혈통적 관계를 정리하고 아들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서 섬기셨던 것입니다. 보다 나은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면 먼저 얽혀 있는 감정적, 혈연적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감정적 고리를 끊고 다시 연합할 때 이루어집니다.

 

  한국인의 정서에 가장 어려운 점이 바로 인간관계를 끊는 작업입니다. 한국인은 혈연중심의 문화이기 때문에 혈연관계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죽은 조상들 까지도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계속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합니다. 성경은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한국의 남편과 아내들은 부모를 떠나지 못합니다. 남편은 본가의 가문을 끌고 들어오며 아내는 친정의 가문을 끌고 들어와서 두 가문이 섞여 삽니다. 부부싸움은 주로 가문의 싸움이 됩니다. 결혼한 아들에게도 계속 전화를 해서 모정의 관계를 강화해 가므로 아내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친정에서도 계속 딸의 신혼생활을 간섭하며 사위를 압박합니다. 살다가 힘들면 남편과 아내는 각자 자기 친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양가 어머니들의 감정 개입에 따라서 가정이 찢어지기도 하고 살더라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합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분리의 법칙을 거역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입니다. 어떤 남편은 결혼하고 10년이 넘어도 자기는 어머니가 해준 김치라야 밥을 먹는다며 김치를 실어나릅니다. 그 아내는 아예 김치를 담글 생각을 안 합니다. 김치를 담가도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솜씨를 인정해 주는 아들이 자랑스러운 듯이 계속 김치를 만들어 보내줍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서로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상처는 용서하지 못한 마음의 감정이기 때문에 토설을 하는 목적은 감정으로 용서하기 위해 그 감정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받은 사건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면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잊고 살도록 망각이라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망각을 방어기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건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잊혀지며 고통이 줄어들게 됩니다. "세월이 약이다"는 말은 바로 세월의 흐름 속에 사건을 잊게 되고 망각을 통해 고통이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기억은 잊혀지지만 그 사건에 대한 감정은 그대로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될 때 영향을 주게 됩니다. 특히 어렸을 때는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많은 상처들을 받게 됩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유교 문화의 특징은 억압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억압된 상처는 분노와 혈기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도 모르는 분노와 혈기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문화는 나이나 촌수나 계급에 의해서 옳고 그름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들은 옳은 말을 해도 말대답하는 버릇없는 불효자식으로 간주되고 아버지는 바람을 피우고 첩을 얻어놓고 살아도 큰소리치며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남편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도 인정해 주고 아내가 남편과 똑같이 하면 나쁜 사람으로 몰아 부치는 차별의식 속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자기도 알지 못하는 특유의 행동양식으로 나타나서 삶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상한 감정이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감정적으로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처를 토설해서 묶여 있는 감정을 분리시켜야 합니다. 감정의 고리를 끊어야 사랑의 관계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2.분리되지 않은 감정이 삶에 미치는 영향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은 교육에 의해서 고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듣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에서 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면 하게 됩니다. 친구와 싸우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에서 화가 나면 싸움을 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감정이 통제를 합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음식을 먹을 때 쩝쩝거리며 먹거나 음식을 밝히는 사람에 대해서 나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쩝쩝거리며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보면 맛있게 먹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교양이 없다거나 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사람을 평가 했습니다. 서울에 어떤 교회에서 봉사할 때 그 교회에서는 매주일 점심을 먹었는데 그 때마다 어떤 집사들이 음식을 싸가지고 가는 것을 보면서 너무 추해 보이고 덕스럽지 못하게 보여서 "내가 목회를 하면 이런 추잡한 행동을 뿌리 뽑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수 년 후 단독목회를 나갔는데 일년에 몇 차례 교회에서 식사를 전교인이 나누었는데 그 때 유난히 남는 음식 처리에 신경을 썼습니다. 현재 있는 교회에 와서도 보니 서울이나 시골이나 남는 음식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똑같았습니다. 행사 때 떡을 하면 사람들이 떡을 잘 먹지 않아서 한말을 해도 넉넉할 것 같은데 꼭 3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나는 설득을 하다가 지쳐서 포기하고 그들이 어떻게 하는가?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한말씩 세 박스에 담겨진 떡을 한 박스는 풀어서 그날 점심상에 올려놓고 한 박스는 그날 결석한 사람들 중에 보낼만한 사람에게 싸서 보내고 나머지 한 박스는 끝까지 남겨 두었다가 설거지 한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고 갔습니다.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말은 모자라니 서 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결론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한 욕심이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포기하고 "그래,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 설거지 하지 누가 남아서 설거지 하겠나"라고 생각을 돌리고 그 다음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는 나의 생각이 정당하고 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들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보다 유별나게 그것이 신경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것이 나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뿌리를 찾아보았습니다. 내가 어릴 때 한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어릴 때는 가난해서 먹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과자는 구경도 할 수 없었고 군인들이 지나가며 던져주는 건빵 외에는 과자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대부분 학교 다니면서 먹는 간식이라고는 겨울에는 옥수수나 콩을 숯불에 볶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었고 가을에는 길가에 열려있는 머루나 다래를 따먹으며 학교를 다녔으며 여름에는 딸기나 오디를 따먹으며 다녔고 봄에는 시금치나 찔레를 꺾어 먹으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동네 노총각이 장가를 가면서 전통혼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결혼이나 초상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 집에 모여서 먹거리를 해결했는데 그날도 그 집 마당에서 뛰어 놀고 있을 때 우리 아버지가 아이들을 모두 부르시더니 테이블 위에 과자와 마른 오징어 등 먹거리를 수북이 쌓아놓고 신호와 동시에 먼저 집어 가는 사람이 임자라고 설명을 한 뒤 "요이땅!"하고 신호를 했는데 그 많던 먹거리는 순식간에 없어지고 나는 겨우 오징어 다리 하나를 건졌습니다. 그런데 사촌 중에서 나와 나이가 같은 M은 양손에 가득 잡고 주머니에 넣은 후 먹기 시작 했습니다. 나는 좀 나눠 달라고 했지만 고개를 썰래썰래 흔들면서 혼자 먹었습니다. 약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군침만 삼켰는데 그 사촌이 유별나게 쩝쩝거리며 먹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때 나는 무척 약이 올랐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상처가 되어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었고 그 감정이 쩝쩝거리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상처받은 감정은 그것이 자신의 기준이 되어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죄 하는 무서운 흉기로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은 반드시 뿌리가 있습니다.


  3.건강한 감정과 병든 감정의 반응

  치유를 받으면 전혀 감정에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치유를 받아도 여전히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감정에서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과민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잔잔한 호숫가에 조약돌을 던졌을 때와 바윗돌을 던졌을 때 일어나는 파장은 다릅니다. 조약돌을 던졌을 때는 작게, 바윗돌을 던졌을 때는 크게 일어나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조약돌을 던졌는데 바윗돌을 던졌을 때처럼 큰 파장이 일어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치유 받아도 그 사건에 해당되는 만큼의 파장은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실제적 사건보다 크게 감정적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남은 음식을 싸가기 위해 일부러 음식을 많이 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은 아닙니다. 그것도 아마 그들에게 음식에 대한 어떤 상처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 한 가지 행동을 가지고 그의 인격을 평가할 만큼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상처가 있으니까 그 한 가지 행동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음식을 싸 가지고 간 그 행동은 조약돌을 던진 만큼의 충격인데 비해 내 속에서는 바윗돌을 던진 만큼의 감정적 파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상처들을 찾아서 감정적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많은 왜곡된 판단 기준이 설정되어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상처받은 감정에서 나온 그릇된 판단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에 대인관계에서 충돌이 생기고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상처를 제거하고 감정을 풀고 용서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로 하는 용서는 지식이나 의지에서 나오게 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용서한다고 말해도 여전히 감정적 처리가 되지 않아서 삶에는 변화가 없게 됩니다. 상처는 감정으로 받기 때문에 반드시 감정으로 처리가 돼야 치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감정에서 용서가 되지 않을 때는 많은 육체적 질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빠져 나오려고 하는 감정과 억누르는 이성이 합리적으로 제 3의 방법을 선택하여 표출하는 방법이 질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우리 속에 있는 상처를 악한 영들이 잡고 여러 가지 그릇된 행동들을 부추길 뿐 아니라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챨스 크레프트 박사의 말대로 악한 영들은 우리 속에 죄와 상처를 먹고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 속에 있는 죄와 상처를 처리하지 않으면 삶에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Ⅸ.전인치유와 토설의 방법


  토설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상담 대화 법

  서양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은 상담 대화법입니다. 내담자의 상처받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면 많은 상처가 치유됩니다. 특히 우울증세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서양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오기 때문에 이 방법을 많이 사용하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억압된 상처들은 쉽게 빠져 나오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도의 상담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깊이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또한 전문 심리학자들에게 상담을 받으려면 많은 돈도 필요하기 때문에 서민들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2.음악 명상법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음악을 통해 깊은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감정을 끌어올려 치유하는 방법입니다.

 

  3.욕 치료법

  우리나라에 욕 치료법을 처음 시도한 분은 정태기 박사입니다. 상처를 준 특정 대상을 가상의 대상으로 정해 놓고 욕을 통해 감정을 풀어내도록 유도하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는 개인 치유에 효과적이며 특히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평소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스스로를 억누르며 살아온 사람에게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적용할 때에는 오히려 욕을 정당화 시켜주는 격이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4.빈 의자 요법

  환자 앞에 빈 의자를 놓고 실제 인물이 앉아 있는 것으로 상상하도록 하고 상처를 말하게 하는 방법이며 정신치료법 중의 하나입니다.


  5.방망이로 매트치기

  특정 대상을 매트 위에 상상으로 올려놓고 방망이로 때리게 하여 나쁜 감정을 뽑아내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도 신문지 찢기, 방석 쥐어뜯기 등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그 어떤 방법도 절대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질병도 한방에서 치료하는 방법과 양약으로 치료하는 방법이나 민간요법으로 치료하는 방법이 각각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환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방법론에 얽매어서 죽어 가는 환자를 방치해 둔다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내적 치유도 마챤가지입니다. 토설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방망이로 매트를 치는 것은 하나의 방법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상한 감정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각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역사하시며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몇 년 전 근처의 기도원에서 목요일 정기집회에 강사로 초빙되어 간 일이 있는데 내적치유 강의를 하고 방석을 하나씩 주면서 토설을 시켰습니다. 어떤 사람은 데굴데굴 굴면서 방석을 쥐어뜯었고 어떤 사람은 입으로 물어뜯기도 하였습니다. 방석을 비틀고 때리는 사람, 땅 바닥에 메어치는 사람, 끌어안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우는 사람, 집어 던지는 사람 기도원은 온통 아수라장 이었습니다. 30분 이상을 토설기도를 시켰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후련해 하며 기도원을 내려갔고 나에 대한 인기도는 만점이었습니다. 나는 그 때 사람들 속에 맺힌 한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을 했습니다.


  6.토설 할 때 욕하는 이유

  어떤 사람은 토설할 때 욕하는 것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고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를 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12:34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상처, 죄, 원한)이 나오는 통로입니다. 마음에 상처가 많은 사람은 그 입으로 상처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상처는 기분 나쁘게 들어온 감정이기 때문에 기분 좋게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토설할 때 욕을 하는 것은 나쁜 감정을 자연스럽게 뽑아내기 위해 언어에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재래식 화장실을 퍼낸 일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쌓였던 화장실은 건드리면 온 동네가 다 알 정도로 심한 냄새를 풍깁니다. 우리 안에 오래 동안 쌓였던 나쁜 감정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때는 더 심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윗의 토설기도를 이해하면 우리가 하는 욕은 아무 것도 아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3:7 -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

  시10:15 -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시12:3 -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이다."  

  시68:21 - "그 원수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그러나 억지로 욕을 할 필요는 없으며 욕을 한다고 감정이 다 빠져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상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빠져 나오도록 혀에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7.감정토설과 저주의 차이

  토설과 저주의 차이는 누구 앞에서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똑같은 내용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면 토설이고 사람 앞에서 하면 저주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는 사람 앞에서 저주하고 하나님 앞에서 토설한 자는 사람 앞에서 용서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토설하고 사람 앞에서 용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토설한 내용이 그 사람에게 그대로 임하게 될까봐 염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로운 아버지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아버지는 아들의 감정을 풀어주는데 관심이 있지 복수하는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또 아들도 감정이 다 풀어지면 복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게 됩니다.

 

  하루는 작은 딸아이가 신경질을 부리며 화가 난 상태로 들어왔습니다. 나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현주야 왜그래?"하고 부드럽게 물었는데 현주는 "에이씨, 난 잘못도 안 했는데 혼내쟎아!"하며 울먹거렸습니다. 나는 곧바로 수화기를 잡으며 일부러 화난 척하고 큰 소리로 "야! 거기 전화번호 몇번이냐?"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며 또 그 학원 선생이 우리교회 집사였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터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현주에게 해 줘야 할 부분은 그가 선생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나쁜 감정을 뽑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전화 번호를 물어보았는데 현주는 수화기를 누르고 나를 위로하는 듯이 부드러운 어조로 "아빠! 괜챦아."하며 얼굴이 풀어졌습니다. 그리고 곧 편안한 모습으로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원 선생에 대한 감정이 다 풀어진 것입니다. 나도 역시 학원 선생이 현주를 야단 친 것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토설 한 대로 갚아준다면 아마도 훨씬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는 대부분 가족이나 친척들과 같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토설한 내용을 그대로 갚아버린다면 그 고통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내의 다리가 부러지라고 토설했다고 가정하고 하나님이 그 내용대로 응답해 버린다면 나는 다시 다리 부러진 아내의 고통을 담당하게 되며 더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믿고 토설한 내용을 가지고 다시 그 자녀에게 고통을 주는 그런 미련한 일은 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토설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토설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번은 상담하면서 어떤 여인에게 "당신이 토설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렇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그냥 홧김에 해본 말이라는 것입니다. 정답은 홧김에 말 해보고 싶을 뿐입니다. 다만 마음의 감정에서 말하고 싶을 뿐이지 실제 상황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심정을 아시기 때문에 그 감정을 풀어주시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혹시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한다 해도 하나님은 대책 없이 그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인격적이십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상담자는 내담자들이 상담한 내용을 비밀에 부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토설하는 내용들을 그대로 갚아주실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격성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토설한 것은 하나님이 받아 처리하시지만 저주 한 것은 사단이 잡고 역사합니다. 가끔씩 자신이 저주 한 것이 그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마치 자신의 말에 권세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저주한 말을 잡고 하나님께 참소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5장에 보면 라헬이 베냐민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죽는 사건이 나옵니다. 35장에서 벧엘에 올라간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게 될까요? 그것은 야곱의 저주 때문입니다.

  창세기 31장에서 드라빔을 도적질 했다는 라반의 추궁에 대하여 야곱은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31:32)”라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무의식중에 저주를 합니다. 그런데 35장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야곱은 가족들에게 이방신상을 버리라고 명령했고 가족들은 모든 신상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35:4)”

  야곱의 저주대로 라헬이 가지고 있던 드라빔이 발견되자 죽음의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잠언 26:2에는 “까닭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까닭은 저주가 임할 수 밖에 없는 행동을 말합니다.

  야곱은 뉘게서 찾든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했고 라헬이 감추어 두었을 때는 저주가 임하지 않았지만 야곱의 눈에 발견 되자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무의식중에라도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때 저주를 걸어서 맹세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랬다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칠꺼야.” “네가 만약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내 손톱에 장을 지지겠다.”는 등의 맹세는 까닭이 없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그런 까닭이 생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무의식중에 말한 저주를 잡고 있다가 까닭이 생기면 응징해 버리기 때문에 사람에게 대하여 저주 하거나 맹세하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4-37)”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내용을 토설 하더라도 처리해 주시지만 사단은 우리가 무의식중에 말한 저주라도 그것을 잡고 기다렸다가 까닭이 생기면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토설하고 용서해야지 저주를 해서는 안됩니다.


.치유 받아야 할 상처의 정의


  1.상처의 정의

  그렇다면 상처란 무엇일까요? 상처는 표현하지 못한 기분 나쁜 감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 상처가 없다고 말합니다. 상처를 이해하려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성의 활동과 감정의 활동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성과 감정은 우리 인격 안에 존재하는 요소이지만 서로 다른 채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부모에게 잘못하여 매를 맞을 때 이성에서는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맞는 거야 그러니까 참아야해."라고 자신을 합리화 시킵니다. 그러나 이성에서 아무리 합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해도 역시 매 맞을 때는 기분이 나쁩니다. 감정에서는 나름대로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잘못 했다고 모두가 맞아야 하는가? 나도 이미 잘못한 사실을 알고 다음부터 조심하려고 하는데 꼭 그렇게 때려야 하는가? 그리고 당신(부모)은 어린 시절에 실수하지 않았는가? 말로해도 얼마든지 알아듣고 고칠 수 있는데 꼭 그렇게 비인격적으로 때려야 하는가?"등등의 여러 가지 감정적 반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적 반응을 표현하게 되면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더 큰 압박을 가하여 더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기분 나쁜 감정을 억누르게 되는데 그 때 억누른 감정을 상처라고 말합니다.

 

  유교사상으로 억압된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특히 마음의 감정을 표현하면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더 심하게 스스로를 억압하면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우리의 신앙에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도 하나님께 점쟎고 예의바른 기도만 할 뿐 다윗처럼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발하거나 감정에서 하고 싶은 대로 토설 하지 못합니다. 설교에서도 주로 성도들을 억압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제직회에서도 젊은 사람이 발언한 것은 버릇없는 사람처럼 취급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참아야 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참아야 되고 교회가면 목사님이 참으라고 합니다. 잘 참는 사람은 신앙이 좋고 참지 못해 말하는 사람은 신앙이 안 좋은 사람으로 인식 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앞에 와서까지 참아야 하니 살 수가 없습니다.

  고된 시집살이를 하는 여인이 친정에 가서 밤새가며 친정어머니에게 힘든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밤새 들어주고 그래도 새끼들 때문에 어떻게 하겠느냐며 격려해 주면 또 다시 시집으로 들어가서 친정어머니의 격려를 되새기며 삽니다. 그런데 친정어머니가 매몰차게 나무라기나 하고 그런 친정어머니조차 없는 사람은 너무나 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 속에서 살다보면 많은 상처를 받고도 모두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생각되어 상처인줄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상처인줄 모른다고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유교 문화의 사상을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와서까지 참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중에서 다윗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행13:22)"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다윗이 훌륭한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교사상의 개념에서 다윗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그는 강간, 살인죄를 지은 파렴치한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왕의 위치에서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 통회 자복한 것 때문에 다윗을 훌륭하다고 평가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회개한 것 하나만 가지고 하나님이 그를 마음에 합 하다고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시에는 많은 내용들이 자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내용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들을 보복해 주실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 앞에 와서 욕하고 저주하는 다윗을 마음에 합 하다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유교 사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면 좀더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용서할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며 가능하면 경건한 표현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원수들을 욕한 것에 대해서 설교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말한 원수들이란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압살롬도 그중의 하나였고 사울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그 동안 다윗을 훌륭하다고 말해 온 것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마음에 합 하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권위를 거역할 수 없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윗을 훌륭하다고 받아들여 왔습니다. 마음에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모습은 바로 유교 사상에서 말하는 어른 공경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합 하다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잠깐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이 마음 아픈 상처를 부모 앞에 와서 다 이야기하더라도 형제간에는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형제들 간에 싸우면서 부모에게 잘하는 것은 부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들이 속상한 이야기를 할 때 다 들어주고 위로해 줍니다. 그 위로를 듣고 자녀는 또 새 힘을 얻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매 맞고 들어와서 부모님에게 이르면 지혜로운 부모님은 등을 어루만지면서 "그놈의 자식 내가 가만두지 않을테야."하며 때린 사람을 욕을 하면 그 아이의 감정은 풀어지고 맙니다. 하나님도 마챤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 아픈 상처를 다 하나님 앞에 토해내고 형제간에는 서로 화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와서 토설기도 하는 사람들에게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합하게 살았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와서 마음껏 토설 하고 사람들 앞에 가서는 모두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인격적인 아버지로 절대 신뢰한 것을 의미합니다.


  2.상처를 받기 쉬운 요인들

  우리의 상처는 상처를 받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더 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인들을 이해하고 대처하면 상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상처를 받게 되는 대표적인 첫 번째 요인은 사상적 요인입니다.  우리나라의 약자를 괴롭히는 대표적인 사상은 장유유서 사상과 남존여비 사상과 아들 선호사상입니다.

  장유유서는 옳고 그름이 촌수와 나이에 의해서 판가름 납니다.

  남존여비는 특히 여인들의 가슴을 수 천년동안 멍들게 한 사상입니다.

  아들선호 사상은 딸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며 자기 존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게 하는 사상입니다. 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든 삶에 불이익을 당하며 상처받게 하는 아주 나쁜 사상입니다.

  두 번째 요인은 전통과 관습의 요인입니다. 가부장적 중심의 전통은 항상 약자에게 상처를 줍니다. 가장 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머지 식구들은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요인은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옳아도 상처를 받게 되며 반대로 다른 사람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네 번재 요인은 연령적 세대 차이에서 오는 상처가 있습니다. 어릴 때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상처를 잘 받습니다. 자기 기준으로 보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른들은 잘못했다고 책망을 합니다.

  다섯 번째 요인은 성격적 결함 때문에 상처를 잘 받습니다. 일반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은 남에게 상처를 잘 주며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결론:  주님은 우리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쁜 감정을 숨기면 치유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자신의 나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과거의 사건이나 사람을 용서하려면 상처와 원통함에 대한 충분한 토설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감정을 토설하고 용서한 후에 죄를 토설하며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 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받으면 인격적인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출처 : 김목사 치유카페
글쓴이 : 로고스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