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제3장 천지의 창조된 내력(창 2:4-4:26) - 5.죄에 대한 선고(3:16-24)

하나님아들 2015. 3. 11. 16:01

5. 죄에 대한 선고(창세기 3:16-24)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6-19)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저주만 내리시지 않았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상에 자비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셨다(창 3:15). 그러기에 죄에 대한 선고가 구체적으로 여자와 남자에게 주어지지만 그 속에는 저주만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도 발견할 수 있다.
여자에 대한 말씀에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28에서 자녀를 낳는 것은 복으로 선언되었지만 타락한 후에 이 복은 저주로 뒤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여자가 자녀를 낳는 것 자체가 저주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제 그것에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이 저주의 내용이다. 사람의 범죄 이전에는 고통이란 말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복만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제 타락과 함께 인류에겐 고통이란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임신하는 고통’을 단순히 해산의 고통만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더 나아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양육의 모든 과정까지를 포함한 고통이요 수고이다.
여자에게 주어진 저주의 내용 가운데서 또 한 가지는 남편과의 관계의 변화이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너무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에 여자의 창조를 시작으로 해서 3:16의 말씀도 남자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 한글개역성경에서는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번역하였는데 개정성경에서는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쉬운성경에서는 “너는 네 남편을 지배하려 할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였다.
여기서 ‘사모’(개역한글)라는 말과 ‘원하고’(개역개정)라는 말은 창세기 4:7의 ‘소원’이라는 단어와 동의어이다. 그래서 풀이하자면 ‘너는 남편을 (다스리려는) 소원이 있으나 (그 결과로) 남편이 너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서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은 창세기 1:28에서 범죄하기 이전의 다스림과는 대비되는 의미로 군림하고 지배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남자가 가지는 특권이나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왜 저주의 말이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을 때 역할의 차이와 질서의 문제는 분명히 있었지만 그들은 능력에 있어서나 인격적으로 동등한 존재였고 한 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동역자였다. 그러나 범죄의 결과 이들의 균형 관계가 깨어졌다. 이들은 사랑과 동역의 관계가 아니고 어느 한 쪽이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관계가 되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의 관계요 저주의 상태에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부의 관계가 창조 본래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베소서 5:18-33에 성령 충만의 결과를 설명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마치 예수께서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한 것으로, 여자는 남자를 마치 성도가 예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같이 해야 됨을 선언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를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깨닫고 십자가의 주님을 드러내는 존재로 살게 된다.
3:17-19의 남자에 대한 저주에서 그것은 단순히 남자가 여자의 말을 들었다는 것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사탄의 말을 따른 것이 문제가 된다. 이제부터 모든 사람은 수고하여 땀을 흘려야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운명이 되었다. 그리고는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땅에 묻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가 무효가 되고 원점으로 되돌려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후손을 밟아 완전한 승리를 이루게 되었을 때 회복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것은 이름을 붙여준 자에게 예속되고 그 책임은 이름을 붙여준 자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남자에 대한 저주가 단순히 남자에게서 끝나지 않고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저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라고 선언하셨다. 이는 아담이 갖는 독특한 위치 때문이다. 피조물의 입장에서 아담을 보면 아담은 하나님을 대신한 통치자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아담을 보신다면 아담은 모든 피조물의 대표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아담의 범죄는 피조물의 대표로서의 범죄로, 아담의 타락은 단순한 한 개인 아담이 아니라 전 피조물의 타락이고 결국 모든 피조물이 죄의 영향력 속에서 저주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는 삶의 환경 전체가 저주의 상태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속은 단순히 사람의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단순히 한 사람이 고난과 죽음, 부활을 한 사건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이루어 내신 사역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의도는 인간의 구원이 아니다. 하나님의 최종 목표는 2:1-3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안식을 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0-24)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저주와 형벌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이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쉬운성경에서는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었습니다. 이는 그녀가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아담은 저주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은혜의 약속을 깨달았고 아내를 보면서 ‘살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담은 모든 희망이 여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하와를 생명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하와’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음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이다. 이 말씀에서도 우리는 가죽옷을 자꾸 ‘피’와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가죽옷을 지으려면 짐승을 잡아야 하고 짐승을 잡으려면 피를 흘려야 된다는 식이다. 그래서 결국 아벨의 제사가 피의 제사임을 강조하기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본문과 연결을 시킨다. 물론 그런 유추도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히 9:22).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를 드러내시는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피의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출애굽 이후 레위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가죽옷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 입히셨다’는 동사가 강조되어 있다 : 친히 만드셨다! 친히 입히셨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덮개(7절-우리 성경에는 ‘치마’로 번역되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덮개이다. 즉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생들의 수치를 덮어 주신 것이다. 이제 사람은 선악체계에 있는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에 관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 편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모든 피조물들은 그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위해 존재하고 동원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하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에덴에 다시 들어가는 것을 막으신다. 그룹들이란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천사들을 말하고(출 25:20, 사 37:16, 겔 10:19), 불 칼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죽음을 상징한다(사 66:16).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을 무조건 하나님의 저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생명나무 실과를 통해 죄인인 상태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막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생명 실과는 생명 되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만이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흙으로 돌아갈 인간은 본래 지어진 속성에 맞도록 근본 된 토지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거기서 여호와의 계속되는 활동을 바라보고 고대해야 한다. 약속의 계통에 참여될 자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셨으나 그 동편에 길을 두셨다는 것은 언젠가 그 길이 열리고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셨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죄인 편에서 마음대로 들어가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쪽에서 열고 죄인들을 불러주실 때에 가능하다<글 / 자유인_김영대>.

출처 : 자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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