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의 창조사역(창세기 1:2-31)
창세기 1:1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다. 즉 1:1은 1:2-31을 압축해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1:2 이하는 1:1에 대한 설명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문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본문이 다 그러하지만 특히 우리는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을 통해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성경을 대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자신을 나타내신 계시이기 때문이다.
천지 창조에 대한 기록을 말씀으로 주신 것은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도 내가 가진 궁금증이 다 해결되어야 이해했다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생각하고 거기에 자신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 하시니라(창 1:2)
쉬운성경을 보면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그 땅은 지금처럼 짜임새 있는 모습이 아니었고, 생물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어둠이 깊은 바다를 덮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하였다. 우선 여기서 ‘땅’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 가운데 궁창이 생기고 이 궁창을 하늘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땅이란 적어도 가시적인 우주 전체를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혼돈’이란 무질서나 혹은 어떤 잡동사니가 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틀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 혹은 쉬운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짜임새가 없는 모습’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공허’라는 말도 헛된 상태라는 말이 아니라 ‘틀에 채워져야 할 내용물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는 말씀은 아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틀과 그 틀에 들어가는 내용물을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말씀으로 만드실 것을 강조하고자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말은 빛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황이기 때문에 빛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물 속과 물 밖이 온통 캄캄한 상태라는 뜻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을 운행하신다. ‘하나님의 영’이란 궁극적으로 ‘성령님’을 일컫는 것이 사실이지만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부였기 때문에 여기서 더 깊은 해석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것을 ‘운행’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운행이란 이 말은 상당히 어려운 뜻인데 자동차 운전을 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미 새의 보호를 비유한 용어인데 성경학자들마다 어미 새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하늘을 선회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미 새가 날개로 새끼를 품는 것을 표현한 말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이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명령을 내리기 이전에 이미 온 우주 가운데 사람을 지으실 계획을 세우고 사람이 거주하기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치밀하게 작업을 진행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혼돈하고 공허한 땅에 하나님의 창조물로 채워진다. 이렇듯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우연히 순간적인 발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창조 사역을 도표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2:3-5)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처음 창조하신 것이 빛이었다. 단지 말씀만 하셨는데 그 결과로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 말씀대로 되었다! 하나님께 있어서 말씀이란 말과 실제 행동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의미이다. 말씀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그 말씀대로 반드시 실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말씀대로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이 어떤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구경하기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빛이 어떠한지를 보셨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빛이 의도하신 목적에 맞도록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빛을 통해 의도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라고 하는 말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빛이 존재하게 됨으로 이제껏 흑암의 상태에 있던 땅에 변화가 생겼다. 즉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심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성경은 이 빛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 혹은 이 빛이 어떻게 발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빛을 창조하심으로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선언만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셨다. 빛과 어둠은 각각의 영역을 차지하면서 서로 구별된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없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없는 상태가 된다. 빛과 어둠은 낮과 밤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중에서 어느 것도 불필요한 것이 없고,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빛과 어둠, 낮과 밤의 경계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오늘까지 변함없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자가 성도이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 낮과 밤의 한계를 정하셨기 때문에 첫째 날이 있게 되었다. 5절 후반에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날’을 시간상으로 24시간이냐 아니면 일정 한 어떤 시간인지 아니면 알지 못하는 짧은 시간이거나 어떤 긴 기간을 의미하느냐 하는 논쟁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낮과 밤의 한계를 정하셨고, 그것을 첫째 날이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빛이 창조됨으로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한계를 정하시며 이름을 붙이셨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세상이 말씀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존재도 거부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다 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되었기 때문에 그 상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환언하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과 취지에 맞게 되었을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기쁨이요 만족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족하시는 것은 자신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 것밖에 없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하나님의 취지와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상태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상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없애버릴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만드신 분이 폐기처분하시겠다면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창조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권세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창세기를 펼친 상태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오늘 나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그 뜻대로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의 세상은 죄로 오염되고 더러워져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이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다. 이제는 아들만이 하나님의 기쁨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다. 그것을 신약적 표현으로 하자면 바로 이런 말씀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아직 창세기에서는 사람의 범죄에 대해서 나오지 않지만 신약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어둠에 거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둠에 거하는 자들이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길은 그분의 말씀을 좇아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복종할 뿐이다. 빛을 창조하셔서 빛과 어둠을 낮과 밤으로 한계를 정하셔서 구별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따르도록 불러내시고 성령으로 인치시며 보증하신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이다. 하나님의 창조 선언, 십자가에 의한 구원의 약속 그것은 어떤 누구도 변개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절대적인 말씀에 굴복된 자가 그리스도인이며 그것을 은혜라고 한다.
창조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우리는 자기주장, 자기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다. 빛이 있으라고 선언하신 대로 이루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이 절대적인 말씀에 자신이 굴복되었다고 믿는가? 그러기에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이런 선포에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제 하나님께서 하늘을 만드셨는데 둘째 날이 된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 1:6-8)
하늘을 그냥 만드신 것이 아니라 물로 꽉 차 있는 세계를 위쪽의 물과 아래쪽의 물을 나눔으로써 그 중간에 공간이 생기게 하셨다. ‘궁창’이란 ‘공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공간 위의 물과 공간 아래의 물로 나누어 한계를 정하셨다. 언뜻 보면 6절에서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들기로 계획하시고 7절에서 만드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쉬운성경을 보면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물 한가운데 둥근 공간이 생겨 물을 둘로 나누어라.’ 하나님께서 둥근 공간을 만드시고, 그 공간 아래의 물과 공간 위의 물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처럼 6절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자체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7절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결과를 언급한다. 이로써 궁창과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누는 것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궁창을 ‘하늘’이라고 지칭하셨다. 이렇게 궁창을 만드시고 그 공간을 구분하여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심으로써 둘째 날이 끝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사실들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창세기 9:11,13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11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3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1,13)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에게 무지개 언약을 주신 것은 이 땅을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물로써 심판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의 죄 때문이었다(창 6:5-7). 둘째 날에 만드신 하늘 개념은 노아 홍수의 사건을 통해 그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노아 홍수 때 위에서 떨어진 것이 물이었다. 궁창 위의 물이 떨어졌다. 하늘이 구멍이 뚫리면서 하늘이 머금고 있던 물이 왕창 지상으로 떨어진 것이 바로 노아 홍수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허락만 하시면 항상 위에 있는 물이 이 땅으로 쏟아지는 구조로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을 노아에게 주셨는데 그 언약의 내용이 다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람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노아가 바친 희생 제물을 보고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 스스로 하셨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통해 우리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도무지 의롭게 살 수 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존재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 1:9-13)
셋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궁창 아래의 물, 즉 온 땅을 덮고 있는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심으로 뭍이 드러나게 하셨다. 그리고 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이름을 붙이셨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취지와 목적에 맞게 만들어졌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11절 이하에서 셋째 날에 창조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식물은 출애굽 당시 사람들 관점에서 두 가지 범주로 나누고 있다. 즉 씨 맺는 것과 열매 맺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는 식물 전체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채소’란 말도 오늘날 사람들이 심어 가꾸는 나물 종류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채소는 과일 나무와 달리 열매 안에 종자를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식물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풀과 채소, 나무가 하나님에 의해 ‘각기 종류대로’ 만들어졌다. 어떤 하나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차츰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 맞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이루신 것으로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기록으로 주신 이유는 땅을 누가 만드셨는가를 말씀하심으로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건져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설명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가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며 더 이상 이방 민족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천지 창조에 대한 기록을 주셨다. 땅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를 말씀하신다. 이런 점에서 모세는 누누이 이렇게 강조하였다.
14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4-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도 “땅은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의 주인은 여전히 나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신다. 땅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래서 레위기 25:55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5:55)
비록 그들이 애굽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고 있지만 땅 주인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품꾼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세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철저히 이 사실을 인식하고 깨달아야 했다. 땅을 만드신 분이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만큼 겸손해 지는 것이다. ‘이 땅은 내 땅이니까 내 마음대로 살아야지!’ 하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려고 할 때에 그들이 걷고 있는 땅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했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누신 창조주이심을 생각해야 했었다. 물이 없는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죽게 되었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궁창 위의 물이 한계를 넘어오지 못하게 막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되었던 것이다. 야곱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자그마치 7년이나 흉년이 들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 불러들이셨다. 비가 오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비가 오지 않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렇다면 물을 창조하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셔서 뭍으로 덮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광야에 비를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물을 풍족하게 먹도록 하실 수 없었겠는가?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고 또한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천지 창조의 사실들을 기록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를 원하셨다. 물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노아 때에 궁창 위의 물을 쏟아 내리심으로 심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가를 잘 보여 주셨다. 그리고 무지개 언약을 통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 때문에 애굽에서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마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가 창조에 대한 기록을 통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어떤 경로와 방법으로 만드셨는가? 혹은 진화론을 반박할 수 있는 구절이 어떤 것이 있는가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한계를 정하시어 그 한계를 유지시키고 계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시고 구속의 은혜를 알게 하시며 창조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죄의 권세에서 빼내시고 죄의 한계를 정하셔서 의에 거하게 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셨다.
궁창 위의 물을 막고 십자가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꾼이었다면 우리 역시 이 땅에 사는 노동자에 불과하다. 여기 이 세상에서 나의 땅은 없으며 나의 집도 없다. 세상에 내 소유의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만족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창 1:14-19)
넷째 날부터는 틀에 채워 넣는 창조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광명’이란 ‘빛을 발하는 물체’를 말하는데 해와 달을 하늘에 두신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와 달이 빛을 발하는 것이 별들에 비해 매우 크고 그 둘 중에 더 큰 것은 해였다. 그래서 두 광명을 큰 광명, 작은 광명으로 묘사했다.
‘주관’이라는 말은 ‘다스린다’, ‘지배한다’는 말인데 낮과 밤이 왜 해와 달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광명을 하늘의 궁창에 있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표현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14절에서 첫째 낮과 밤의 구별이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징조와 계절과 날과 연한이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셋째는 땅에 빛을 비추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면 땅에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를 만드신 것은 땅에 빛을 비추기 위하여 만드셨다. 이 땅에 낮과 밤, 그리고 계절이 존재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드셨다. 땅을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으로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낮과 밤이 계속 되는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으로 말이다. 낮은 낮 그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전달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며 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낮은 해의 다스림 아래에서 그 다음 낮에게 무엇을 전달한다. 밤은 달의 다스림 아래에서 그 다음 밤에게 무엇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언어가 없고 말하는 소리도 없고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온 땅에 두루 퍼지고 전해진다고 하였다. 그러면 전해지는 그것이 무엇인가? 시편 19:7 이하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7-10).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칭한다. 해의 주관 아래 낮이 낮에게 전하는 것, 달의 주관 아래 밤이 밤에게 전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드러내도록 지음 받은 것이 바로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세계는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뜻을 전하고 드러내는 그것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것만이 영원한 것이고 의로운 것이기에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의 말씀만 더욱 사모할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창 1:20-23)
다섯째 날에는 물에 사는 생물과 하늘의 새들을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다른 날들과 특이한 사항은 이제까지 없었던 하나님의 새로운 선언이 덧붙여져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라는 것이다. ‘생육’이란 말의 문자적 의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고, ‘번성’이란 말은 ‘많아지다’, ‘충만’이란 ‘가득 찬다’는 의미이다. 이 세 가지 말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실상은 ‘많다’는 하나의 공통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한 마디로 지으신 모든 생물의 활발한 종족 번식이다. 같은 말을 세 번이나 쓴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를 강조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땅에 충만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이 선언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 지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 복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여기지 않는다. 종족 번식이 그저 자연 법칙에 의해서, 생물학적 본능에 의해서,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기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왜 복이 되는가?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또한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신다.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셔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땅에 빛을 비추게 하시며 계절과 연한을 이루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이다. 결국 낮과 밤, 일자, 계절, 연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형태로 만드셔서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실을 통해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할 수 없다. 결국 번성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광명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의해 창조되고 그 말씀에 기초된 피조물의 본질이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의 능력과 은혜를 보여 주려고 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고 그 후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가장 큰 능력과 은혜는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이루셨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능력과 은혜는 없다. 이제 여섯째 날 동물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한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4-25)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록함에 있어서 날짜마다 반복되는 공식 같은 문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기록자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굉장히 치밀하고 계획적인 일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을 정리하자면 위의 도표와 같다.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26-31)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어떤 질서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질서는 본래 창조의 목적을 지향한 질서이다. 여기에 걸맞은 말을 성경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겉모양을 보시고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만드신 피조 세계의 본질에 대하여 창조의 계획과 목적, 의도대로 되어 짐과 그것에 대한 선함, 아름다움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모든 피조물이 말씀대로 위치해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는 말씀 외에 다른 것으로 결코 대치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선언하고 있다. 만약 이 창조 질서가 붕괴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구속사역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회복은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 관계 안에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대치하려고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강단에서 성경 한 줄 읽고 사람들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주는 명언들을 나열하며 위로하는 것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하는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여섯째 날에는 다른 날들과는 달리 정관사에 의해 “여섯째 그 날”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날의 사역이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 날에 대해서만 “심히 좋았더라”라고 나타내신다. 이러한 사실은 절정에 도달한 여섯째 날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즉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은 이 여섯째 날을 향하여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최종만족 상태는 마지막에 창조된 사람과 관련이 있다.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가 처음부터 부여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문제이다. 과연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를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해 왔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달 가능한 속성인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것으로 설명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신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면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이유를 본문은 “(그리하여)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과 ‘다스림’을 연결시키고 있음을 유의해서 볼 수 있다. 흔히들 문제를 삼는 ‘형상’과 ‘모양’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표현 양식만 다를 뿐 아무런 차이를 두고 있지 않아서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빙그레 웃었다’는 것이나 ‘미소를 지었다’는 것과 같이 표현을 달리하였을 뿐이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형상’과 ‘모양’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면 과연 일차독자에게 형상이란 어떤 의미가 있었겠는가? 당시에 형상이란 ‘신의 복사판’으로 이해하였다. 출애굽 당시에 메소포타미아나 애굽은 모두 왕을 신의 형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고대의 통치자들은 자기의 영토 곳곳에 자기 형상(신상)을 만들어 그의 권위를 나타내고 그 형상의 통치자가 자기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기억시켰다. 즉 형상을 통해 그 뒤에는 진정한 통치자가 있음을 나타내었다(참고 단 3:1-30). 뿐만 아니라 구약의 넓은 문맥에서 살펴보면, 시편 8편에서 다윗이 창세기의 사건을 이렇게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시 8:4-6)
5절의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심’이란 다윗 시대에 왕에 대해 적용되어 사용하는 표현이며 6절에서 ‘다스림’, ‘발 아래 두심’이란 사람을 왕의 위치에 두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보건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다스림’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은 창조된 세상에 하나님을 대신한 가시적 대표자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분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 사람의 본질이다. 즉 사람에게 하나님의 대리 통치권을 수행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은 왕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짜 왕이심을 나타내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형상에 대한 문제를 창세기만을 가지고 논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그렇다면 만약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미리 하늘에서 의논된 이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과연 하늘에서 의논된 것에 그리스도가 배제되어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창조의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에 그리스도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일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어지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기 위해서 인간의 실패를 그냥 두고 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인간의 실패를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다운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된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참 사람다운 사람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다는 것은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을 때의 그 모습에 국한되어 이해하여야 한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어떤 모습인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으로 인해서 성취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글 / 자유인_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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