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제3장 천지의 창조된 내력(창 2:4-4:26) - 1.사람과 에덴동산(2:4-17)

하나님아들 2015. 3. 11. 15:58

제3장 천지의 창조된 내력(창 2:4-4:26)

 

 

창세기에 나타나는 열 개의 톨레도트 가운데 첫 번째 것이다.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신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고, 2장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강조하기 위해 순서에 관계없이 논리적인 기록을 펼쳐 나가고 있다. 1장은 권위를 가지도록 창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고 있고, 2장은 권위 아래에 복종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거주할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신다. 3장에서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에덴에서 추방당하는 것이 진술되며 원복음이 주어진다. 여기에 두 계열이 밝혀진다. 4장에서는 이 첫 단계로 가인과 아벨이 형제간임에도 불구하고 원수같이 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가인의 모습은 라멕으로 이어지고, 아벨은 셋으로 대신 된다. 요컨대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상태로 서로 원수같이 적대시하며 거룩하지 못한 계열이 득세한다. 그렇지만 거룩한 계열도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 사람과 에덴동산(창세기 2:4-17)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 2:4-6)

 

과거 한글개역성경에서 대략, 사적 등의 표현으로 번역되었던 말인데 한글개정성경에서는 ‘내력’이라고 번역하였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톨레도트’라는 말인데 창세기 안에서 ‘계보’(창 5:1), ‘족보’(창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7:2)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창세기는 10개의 ‘톨레도트’를 중심으로 하여 전체 내용을 구성하고 있으며, 각 톨레도트를 시작할 때마다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앞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내용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2:4이하의 본문은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상반된 내용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신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고, 2장은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강조하기 위해 순서에 관계없이 논리적인 기록을 펼쳐나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으로 하늘과 땅을 지으셨으나 아직은 첫 사람이 거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삶의 터전을 마련하신다. 그것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아무튼 본문은 에덴동산을 지으시기 전의 상황을 언급하기를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다는 것과 밭에 채소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표현으로 되었으나 실제로는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 즉 식물 전체가 아직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의 손에 의해 경작되어야 하는 식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단순히 비가 오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비가 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자연현상으로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출애굽 할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즉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든 자연현상의 배후에는 신의 힘이 작용한다고 믿거나 아니면 자연물 그 자체가 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의 신이 비를 내린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점에서 애굽에서 온갖 신들을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이 말씀을 기록하여 비를 내리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여호와’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고 있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전능하신 창조주를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명칭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구원자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비를 내리셔서 모든 식물들을 자라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애굽의 신들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7-17)

애굽의 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분 여호와 하나님 그분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흙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그러자 생령이 되었다. 여기서 ‘생기’란 ‘생명의 호흡’이라는 말이다. 생명의 호흡을 하나님께서 코에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다, 즉 코로 숨 쉬게 하셨다는 사실을 회화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또 ‘생령’이라는 말도 흔히 성령과 연관을 시키거나 아니면 영적인 의미로 파악하려고 하는데 여기에 그런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1:20,21,24에서 ‘생물’이라는 말과 1:30에서 쓰인 ‘생명’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쉬운성경에서는 ‘생명체’라고 번역하였다). 즉 생령이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그 모든 것들을 사람이 누리게 하셨다. 사람이 맨 마지막에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이 첫째 날에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의 창조에 사람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오늘날 우리는 우길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맨 마지막 날에 창조되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을 누리면 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께서 지으셨기에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아는 피조물로 살아가야 되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말씀 안에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심한 불만이 선악과에 대한 문제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으리라는 예상을 하셨을 텐데 왜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까지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는가? 아니 더 나아가서 애초부터 선악과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는데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방치하셨는가 하는 등등의 여러 가지 의문점으로 시작해서 결국 하나님께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죄성이라고 지적한다.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 선악과를 먹는 아담을 제재하지 못하였다는 데 대하여 불만이 생기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죄악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 누리게 되는 편안함과 행복, 그것이 계속 이어졌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는 이기주의가 바로 우리의 죄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에 가만히 두셨는가? 우리가 가지는 이런 일반적인 의문으로 출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의도와 논리를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 질서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에 두셔서 거기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도록 복을 주셨다. 이 본문을 보고 우리가 동방 어디에 에덴동산이 있었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기서 ‘창설하다’는 표현은 ‘심는다’는 뜻이다. 에덴이라는 지역에 하나님께서 동산을 심으셨다. 그리고 그 동산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며 번성하도록 지음 받았다. 그것을 강과 보석의 표현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강’이란 생명의 근원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고, 각종 보석을 언급함으로 귀하고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동산에서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복을 누리기에 충분한 곳이며 최적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을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생명의 나라에 대한 세상적 표현의 극치이다. 에덴동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하는 가나안 땅이 생명의 근원지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참고 사 51:3).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베풀고자 하시는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관점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또한 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공존해 있다는 것은 사람이란 생명의 존재로 살아갈 수도 있고 선악을 아는 존재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란 죽을 수도 있고 영생을 얻을 수도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사람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을 두 단계로 만드셨다. 즉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여기서 ‘흙’이라는 표현도 아주 미세한 먼지 혹은 티끌, 미립자 같은 것을 말한다. 다른 생물체들과는 달리 사람을 두 단계로 만드셨다는 것은 만약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어떤 일이 발생된다면 사람의 이 단계도 거꾸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어떤 일이 발생될 가능성이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한하고 계신 것에 근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제한하신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는 아담이 임의로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큼은 하나님께서 제한하고 계셨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주신 동산이니만큼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제한되어지는 곳이라는 의미다. 선악과 자체가 먹으면 죽는 효능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나무를 제한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상태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악과가 사람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제한하고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으로 주신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를 먹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누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늘 확인하여야 되었다.
결국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피조물답게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피조물답게 산다는 것은 선악을 아는 것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며 그것과 반대되는 현상이 바로 죽음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죽음이란 단순히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의 상태로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죽음의 상태가 될 수도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목숨이 끊어진다는 것은 본질적인 죽음 아래 있는 현상이며 또한 증거이다.
사람이 선악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선악을 아는 토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곧 자기중심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생각하게 된다. 즉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사람이 피조물답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 에덴동산이 없으니 우리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와 상관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천지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신 ‘사람 됨’, ‘피조물다운 사람’이라는 의미는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고수하고 계시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실패한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셨다. 완전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말씀하신 취지와 목적을 이루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선악과는 율법이며 생명나무는 예수님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여전히 생명나무의 요소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요소에 둘러싸인 채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3:10에 보니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은 다 아담 안에서 태어나서 이미 선악과의 지배를 받고서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면서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가운데서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입었다. 십자가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피조물다운 사람이다. 흙(먼지, 티끌)으로 지음 받은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생명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http://blog.daum.net/revealer 글  /  자유인_김영대>.

출처 : 자유인
글쓴이 : 자유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