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알기(골1:9-12)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새로운 일을 시도하거나 예기치 못한 사태를 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나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갓 믿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드러난 일반적인 뜻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것이나 성도가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확실한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문제와 연관이 될 때는 매우 까다로워지고 모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계속해서 가득히 채워져야(9절) 합니다. 그 뜻을 모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10절).
1.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계속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나타내신 그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밝히신 뜻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일상생활에서 행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가 나타내신 뜻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이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한 백성들로 인해서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탄식합니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호8 : 12)
눅 23:34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말씀입니다.
우선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동했습니다. 저들은 성경 말씀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오셨고, 지금 성경에 예언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야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백성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저들은 얼마 전만 해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의 말에 현혹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님에게 십자가에 달릴 만한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예수님은 여느 죄인들과 분명히 다른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임을 몰랐기에 지금 메시야를 죽이는 일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의 공통점은 한 마디로 무지입니다. 영적인 무지가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몰라서 하는 일이니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무지하면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한국교회에 좋지 않는 풍조가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입니다. 그냥 덮어놓고 믿으려 하는 경향이 팽배해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무지가 한국교회에 먹구름처럼 드리우고 있습니다.
호 4: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무지 가운데 빠져있기 때문에 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고 점점 영적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 들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호 6:3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합니다.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기도해 가야합니다. “주여 알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기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는 것'이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 도덕적, 종교적 지식에 관해서 사용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의미는 추상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사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 배우자를 도서관에서 백과사전을 가지고 알았던 사람이 있습니까? 결혼해서 살다가 보면 배우자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로부터 시작한 경험적 지식을 뜻합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말리실 때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을 내 욕심대로 가보니 이것이 안 되구나!"라고 하나씩 배워 가는 것입니다. 오래 기도하고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만 급히 설치고 결정하는 일에는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 분과 더 깊은 교제로 나아가십시오.
(2)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채우게 하시고"라고 간구합니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차곡차곡 채우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넘치도록 채우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석구석에까지 경험적으로, 인격적으로 스며들기를 구합니다. 모든 생활과 감정 속에 하나님의 뜻이 스며들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생각과 감정과 삶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계획과 뜻 속에 하나님의 뜻이 스며들기를 간구합니다.
여기에 '채운다'라는 동사나 '충만'이란 명사는 골로새 이단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충만이란 지배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로 충만하면 술기운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를 어지럽히던 이단들은 에바브라의 설교에 발견할 수 없던 축복과 진리를 충만히 제공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넌지시 성도들이 관심할 바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에 지배받습니까? 세상 소리에 지배를 받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지배를 받아야 신앙인이 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와 총명은 모두 신령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채워질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 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분별력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을 가지는 데서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지식인 것입니다. 이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이해와 확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지식을 가져야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4)’ 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머16: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로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이 알게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알고 깨닫게 하시도록 지혜와 총명을 주셨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지혜를 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하나님은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지혜로 다양한 문제들에 적용함에 있어 명쾌하게 분석하고 판단하며 적용할 수 있는 총명을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2. 주께 합당하게 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되기를 원하는 이유는 주님께 합당히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과 주께 합당히 행하는 삶은 서로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 복음을 안다 하면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지 않는 자는 실제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는 아는데 육신이 연약해서 ...”라고 하며 행하지 않고 핑계하고 변명함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서도 ‘너희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면서 제일 먼저 말씀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 행함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점점 믿음의 실천을 더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 많이 하나님을 위해 행동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 많이 이웃을 위해 행동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약 2:2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 사도는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함이 있어야만 그 믿음은 온전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야고보 사도가 이 말씀을 했을까요? 신앙생활을 할수록 믿음과 행함이 분리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더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그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새로운 신지식을 받고, 그분의 신지식에 근거하여 우리는 주님께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주께 합당한 삶의 기준>
주님께 합당히 행함은 어떻게 행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주님께 합당히 행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합당히 행하는 기준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될 때에 주께 합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제자들은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26:10-13)
예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고 좋게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합리적이고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이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되지 못할 때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칠 만큼 잘 지키려고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되지 못 함으로 예수님께 책망을 듣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합당하다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오직 하나의 동기만 자리 잡게 합시다.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삽시다(고후 5:8-9).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는 미지근한 것이 통할 수 없습니다. 적당히 반신반의하면서 따라갈 수 없습니다. 날 위해서 온 마음을 쏟으신 주님께 합당한 사람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2)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10절에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천국의 시민으로 마땅한 삶을 살아야 하고, 마땅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삶의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에, 합당한 삶과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선한 행실이란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일에는 좋은 결과를 거두어야 합니다. 결과가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의 결과를 잘 만들려고 애쓰는 그곳에 주님께 합당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씨 뿌림의 비유에서는 천국복음을 받은 자 중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는 자가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싹이 나기도 전에 새가 먹어버린 자도 있고, 뿌리가 없어 말라 죽어버린 자도 있고, 가시 기운에 막혀 결실하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가시밭에서 자라기는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니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은 자라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3. 신앙인격이 성숙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10절에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라가라는 명령형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기도인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18절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 가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 가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같은 의미라고 보겠으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넓은 경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격과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부부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를 아는 것이 자라가야 합니다. 불행한 가정은 부부가 서로를 알아가는 일에 자라가지 못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알아가는 세계가 자라갈 때에 이성의 신비로움을 경험하며 가정의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세계가 더욱 크게 자라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행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세계가 자라가는 성도는 주께 합당하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숙의 기준>
그리고 그 자람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오늘 본문에서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11, 12절에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케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1) 기쁨으로 시련을 참고이기는 신앙
하나님의 영광의 힘에서 나오는 능력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기쁨으로 참고 견디면서 인내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 신앙이 서숙한 자의 모습입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 중에도 기쁨으로 인내하는 성도가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내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힘에서 나오는 모든 능력으로’ 인내함을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권능을 부여받음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을 때 외적이고 내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그 능력이 모세에게 부여될 때 모세는 홍해를 가르고, 바위를 쳐 샘물이 나게 하고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베드로와 바울에게 부여될 때 사람들을 변화시켰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사람을 살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외적능력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으로 부터 나오는 그 능력은 성도들에게 감정과 의지를 다스리는 내적인 능력으로도 나타납니다. 바울이 말씀하신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 은 하나님의 능력이 내적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견딤과 참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터 나타나는 견딤과 오래 참음은 억지가 아닌 기쁨이기에 역설적인 것입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향하여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면서 순교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내적능력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외적능력과 함께 내적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위대성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능력을 부여받아 능력 있는 성도로 모든 일에 견디며 오래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겪게 되는 시련은 크게 위협과 유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기도 하며,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신의 힘으로 이 마귀와 대적하여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기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힘, 곧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심에 힘입어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고전 10: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어떤 시련과 고난과 핍박이라도 주님 주시는 기쁨으로 견디고 오래 참아 이기는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시련과 고난과 핍박을 견디고 오래 참아 이기지 못하는 신앙은 자라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2)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신앙
바울은 모든 축복의 근원이요, 원천이신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믿기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신 그 사랑을 깨닫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거나 흔들리게 될 때에 원망하게 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잘못 되어지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리고 지적으로 반역하게 되며 그 결과로 시비하는 것입니다. 원망이 사랑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처럼 시비는 언제나 신앙의 부족을 나타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하라’(빌2:14)고 했습니다.
바울은 감사하되 특히 꼭 감사해야할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1:12)
성도의 소망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요, 후사로 천국에서 기업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롬8:17). 그러기 위해서 고난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나의 고난으로 인해 기업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살게 하시고,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적인 조건으로 볼 때에 감사할 조건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감사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었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초라해도 하나님 나라의 분깃을 얻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감사는 모든 세속적 감사보다 앞에 있고 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갈수 없는 자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자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예수를 믿도록 하셔서 용서받게 하시고, 사랑스런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게 하셔서 천국의 몫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성도가 되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계획!경륜!섭리!의도!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거룩한 삶 (0) | 2014.11.02 |
---|---|
[스크랩] 하나님의 뜻의 분류 (0) | 2014.11.02 |
[스크랩]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0) | 2014.11.02 |
[스크랩]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 (0) | 2014.11.02 |
[스크랩] 하나님의 뜻을 알기 (0) | 2014.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