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로마서 12장 2절에 사용된 ‘분별하라’는 말씀은 100% 순도 높은 금을 만들기 위하여 제련과정을 통하여 불순물을 골라내는 과정에서 온 단어입니다.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인간의 정욕이나 세상적인 흐름에 따르려는 유혹, 또는 신앙이란 이름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는 오류에서 순수하고 바른 하나님의 뜻만을 제대로 찾아 따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주시는 다른 잘못된 것과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세상살이가 힘들고 바쁜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순종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꼭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큰 고난과 어려움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107편 10-11절에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거나 따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곤고와 사슬에 매임을 받는 저주와 고통이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43편 10절에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라고 한 고백처럼 우리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전제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2절 상반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분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이 세대’란, 세속화된 삶의 방식, 또는 이 세상의 풍조를 가리킵니다. 세속적인 삶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삶의 방식과 맞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이 세상 풍속을 좇는 것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따르는 것을 같은 부류로 분류합니다. 이 세상의 풍습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풍습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속화된 삶의 방식과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살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도 본받으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죄악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모든 면에서 항상 대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육체가 원하는 것과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은 곧 육체가 원하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결과는 성령님의 뜻을 거슬러 악을 행하게 될 뿐입니다.
데마는 한 때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의 마음속에 세상이 들어왔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안일함을 동경하자 그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지루하고 따분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사명을 저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살아가면, 마치 기차가 레일에서 탈선하여 넘어지듯이 믿음의 길에서 이탈해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대를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만족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영혼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맙니다. 세상 즐거움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면 점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고 드디어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민족들과 섞여서 살아가는 동안 그 땅의 풍습과 유행에 오염되지 않을까 염려하셨습니다. 신명기 18:9에서 말씀하기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사는 삶과는 다른 것입니다.
둘째, 마음을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본문은 2절 하반 절에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성으로 유혹에 끌리는 기질이 남아 있습니다. 욕심에 사로 잡혀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헐고 때 묻고 더러운 옷을 벗어던져 버리듯이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새 창조의 은총을 입어야만 "보라, 우리가 새것이 되었도다."하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이르기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생각에서 나오고 우리의 생각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깨끗하려면 먼저 마음이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마음은 더러운데 말과 행동을 깨끗한 척 꾸미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러나 위선은 오래가지 않아서 그 거짓됨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으신 눈으로 우리의 폐부를 살피시며, 우리의 숨은 생각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마음에 악이 남아 있다면 아무리 많이 기도할지라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 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신 대로, 죄 용서를 받아 우리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일로 범죄하고 나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을 때 즉시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간구하기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정하게 변화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해도 작심삼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은 지속적으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듯을 분별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때 묻은 마음을 정결한 새 마음으로 변화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준
오늘의 성경 2절 하반 절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본질적인 기준 3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 선해야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본질이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성과 윤리성이 결여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선이 아닌 것은 다 악이요 죄입니다. 목적이 설령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그 방법이 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윤리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고넬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경은 이 고넬료가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란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많은 구제를 했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의 삶이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모범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또 다른 인물이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정기적인 기도생활을 했던 사람이고 교회 지도자로써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이렇게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지고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그 속에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요소들이 있거든 일단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옳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던 남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 성도는 하루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며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현재 아내와 이혼하고 교회의 다른 자매와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내에게 받은 상처와 불평불만, 그리고 다른 여성에 대한 동경 등을 성령의 권능으로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성령을 통해 이런 열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도리어 이런 열망을 키워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자신의 열망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열망이 하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며 찾아온 것입니다.
이런 경우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반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계시는 대부분 윤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윤리적인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야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일 수 있는 두 번째의 요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어야 함을 못 박고 있습니다. 2절 하반 절을 다시 봅시다.“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세요.
여기 ‘기뻐하시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문에는 ‘euaresto"’<유아레스토스>라는 단어로 ‘완전히 일치한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뜻이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뜻이 일치한다는 것은 코드가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코드가 맞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게 네게 무엇을 줄꼬?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물어 봅니다. 그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합니다. 부나 귀나 재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요구를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왕상 3:10절입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주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RSV 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It pleased the Lord that Solomon had asked this.” 직역하면 ‘솔로몬이 말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를 다 주십니다. 솔로몬의 간구가 주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이 되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들이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여 그 분을 기쁘게 할 때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짓, 하나님이 못 마땅히 여기는 일을 다 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는 일에 하나님이 근심하고 계시고 안타까워하시는데 어찌 그게 내게 복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 여기면 주저할 것 없이 포기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좋아하거나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라 하여 하나님이 기뻐한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기뻐하고 좋아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좋은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듣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에게는 욕먹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이 하나님의 뜻에 기준은 하나님께서 기뻐 하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소서5:10을 말씀하기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와 같은 약속을 굳게 믿습니다. 그런데 85세가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하니까 하갈을 첩으로 취하여 아들을 낳아 하나님의 뜻에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첩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본처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얻지 않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은 온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온전하신’ 이란 뜻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실수가 없는 상태’ 혹은 ‘완벽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뜻은 수없는 실수가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뜻은 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말할 때 “온전하신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마 5:48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온전하신데 우리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됩니다.
욥기에 욥이 무지막지한 재난과 환난이 당합니다. 그때 그것이 이해가 되었겠습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결국은 나중에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욥기 42장 5~6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재난을 당할 때는 그 이유를 몰랐으나 재난을 당한 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보지 못해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은 온전하십니다. 실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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