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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평신도의 중요성

하나님아들 2014. 6. 2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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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의 중요성| 평신도사역을 위하여
 
 

1) 평신도 활동의 역사적 이해


일반적으로 교회론은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고, 평신도들은 중심에 있지 못하는 집단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사를 살펴보면, 평신도들이 제사장들이나 목회자들과 동등하게 하나님의 사역을 전개해 온 것을 보게 된다. 특별히 구약성서에서는 오늘날 목회자들에 해당하는 제사장들과 주로 평신도들이었던 선지자들 간에 변증법적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서광선 교수가 말했듯이 구약성서의 유명한 선지자들은 대부분 평신도였다. 예컨대, "선지자 아모스는 유대의 목자,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시민, 미가는 유대의 농민이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예루살렘 시민이고 에스겔은 제사장이었다."


물론 예수님 자신도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 아닌, 비천한 신분 출신의 평신도였다. 예수는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의 전통과 율법에 대한 갱신을 부르짖고 회개할 것을 외치셨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복음을 선포하셨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무리한 분리는 교회의 제도화에 따른 결과이지 본래 성서에는 없던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오늘과 같이 성직계급과 평신도와의 이원화된 현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교회에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엡4:11-12), 사도들, 선지자들, 목사들, 교사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목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해 감에 따라서 교회운영과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교회에는 감독들,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이 나타나 세분화된 목회직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목회직의 변천과정에서 교회에는 교권제도가 강화되어 성직자와 평신도를 두 계급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초대교회의 공동목회의 유산과 개념이 무산되었고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목회로부터 소외되어, 오히려 목회를 독점한 성직자들에 의존하여 피동적이고 무기력한 계층으로 전락되었다.


교회 역사에서 교직과 평신도의 구별은 3세기부터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교직이 한 계급으로 형성되어 신도의 종교생활을 지도하고, 신도들은 그 영적 지도자의 생활을 보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직자는 (1) 사도전승, (2) 교회의 구심점, (3) 은사의 전승, (4) 영지주의와 몬타누스 운동 등과 같은 이단 단속, (5) 교회의 질서유지, (6) 예배지도, (7) 교인의 영적훈련, (8) 교회일치, (9) 박해에 대비한 영적․제도적 지주 등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라틴 신학의 아버지인 터툴리안의 제자이자 아프리카의 유능한 감독 중의 하나였던 씨프리안(Cyprian, 200-258)은 유명한 교회주의와 교권주의의 근거가 되는 말을 남겼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감독은 교회 안에, 교회는 감독 안에 있다.


감독과 같이 하지 않는 자는 교회 안에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교권주의적 교회론은 물론 역사적 조건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불가피하게 요청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직자 중심의 교회론은 중세를 거쳐 오랫동안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교권주의의 영향으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양분화된 현상이 수세기 동안 지속해 오던 중 16세기 루터(M. Luther)의 종교개혁 운동에 의하여 새로운 교회의 이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회를 '성도의 교제'로서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로 정의하였다. 동시에 그는 '만인사제론'을 주장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 주교, 교황으로 봉헌되었으며, 실제로 '직무'의 차이를 제외하고서는 성직과 평신도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교회에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신자들은 신앙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만인사제직'의 동등한 자리를 설정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과 성서와 은총에 의한 구원론을 가지고 비성서적인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구별을 폐지할 것을 약속하였다. 성직자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분담받은 것이라는 종교개혁의 사상은 이와같이 성직자와 평신도의 존재론적인 구별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가들이 설교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기 때문에 그 기능을 집행하기 위한 전문적인 필요성에 따라, 안수를 통한 교역자의 계층을 다시 구성하게 되어, 다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실질적인 구분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종교개혁의 역사적 결과는 본래의 근본 정신에서 이탈하여, 평신도가 성직자와 더불어 하나님의 사역에 역동적인 주체자들로서 종사하는 것을 부정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후 이론적으로는 신자의 만인 제사장 직분이 강조되었고 평신도의 지위가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에서 종교 개혁이 강화된 이후에는 평신도들이 다시 이면으로 물러갔고, 비록 다양한 동기와 다양한 형태이긴 하지만 목사들이 교회를 대표하는 '직무'로서 다시금 기반을 잡게 되었다." 이론상으로는 교회의 전체 회중의 목회가 인정되지만, 실제로는 그 과업을 이행함에 있어서 목사가 떠맡은 강력한 권위에 의해 평신도는 이면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항상 목사편에서 계획적이며 의식적인 노력으로 된 것은 아니라 오히려 평신도들이 전문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목사에게 너무 기대를 함으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것은 국교회가 우세한 국가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실이었다.


비국교파 그리고 자유로운 교회 그룹들 특히 회중전체 그룹들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교회 안에 전체 회중의 목회 원리를 계속적으로 유지해 왔다. "모든 영미 회중적인 단체들(회중교, 침례교, 제자교, 유니테리안 등)은 항상 그들 교회의 모임에서 평신도들에게 동등한 특권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이론상의 경우라는 사실을 부언해 두어야 할 것이다. 많은 경우의 목회자들은 교단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평신도들에게는 적은 직책만이 부여되었을 뿐이다.


교회 역사에 평신도 활동이 활발한 적이 있었다. 영국에서의 웨슬리 부흥운동, 유럽대륙의 경건운동, 미국에서의 대각성운동은 평신도 지도의 실례이다. 모라비안 형제로 알려진 위대한 복음전도 단체는 평신도인 진젠돌프(Zinzendorf)의 지도하에서 시작되었다. 다른 평신도 운동은 YMCA, YWCA, 그리고 세계기독학생연맹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교회, 특히 카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평신도의 중요성과 그 위치를 재해석하려는 운동이 다시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독일과 유럽에서의 "복음주의적 아카데미" 운동은 평신도의 자각 운동이 되었으며, 평신도 신학형성에 중요한 영향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한국에서는 우원(友園) 이호빈 목사가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1946년에 '중앙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50년대 초 한국을 방문한 브루너(Emil Brunner)가 그에게로부터 평신도 신학과 초교파신학에 관하여 많은 것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갖고 돌아간 2년 후 평신도 신학을 체계화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중앙신학교의 설립과 건교 이념은 한국에서 평신도신학의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게 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물론 해방전에도 한국교회에 있어서 평신도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민경배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 평신도의 역사는 그 선교초기로부터 강력한 선교력과 참여의 의지로 전개되어 갔다. 초창기에는 민족구원을 항일애국의 에너지로 구형해갔고, 그것은 교회자체가 아직 미조직상태거나 유아기에 있었기 때문에 대거 평신도의 활동으로 개발될 수 있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교회와 함께 그 속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관계를 이루었고, 그것은 바람직한 역사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교회 자체의 무력감과 내분으로 인한 위기가 압도할 때 평신도운동은 신비적 침잠과 반교권적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름지기 교회가 빠질 위험에 대한 경고로 현존했지만.


한국교회사가 시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평신도운동이 역사 안에서 교회와 함께 그 선교의 폭을 망라하던 때가 가장 완전한 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교회가 미약해지거나 형식화할 때는 강력한 저항의 세력으로 현존하되 선교의 성육적 전개라는 차원 높은 경건으로 한다는 경고를 주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와 같이 해방 이전의 한국교회사를 살펴볼 때도, 비록 역사는 짧았지만, 한국의 평신도들은 하나님의 선교와 봉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적극적이었고 주체적이었고, 나아가서는 교회와의 변증법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 평신도신학의 새 기원을 마련한 카톨릭 신학자인 콩가르(Yves Congar)는 1957년에 Lay People in the Church를 저술하여 새로운 교회론을 전개하여 평신도의 신학적 위치를 재발견하였다. 그는 교회를 평신도 전원이 소속하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는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평신도는 인류와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리스도의 목회에 참여하여 영적인 봉사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평신도의 봉사를 제사장적 기능(예배, 성례전 참여), 예언자적 기능(교육), 그리고 왕권적 기능(청지기직)으로 해석하였다.


콩가르와 함께 개신교의 평신도 신학을 정립한 크래머(Hendrik Kraemer)는 1960년에 '만인사제직'의 사상에서 평신도신학의 지혜와 암시를 받아 A Theology of the Laity를 저술하여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발전시켰다. 그의 신학은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에서 출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이 세상과 전 인류가 하나님의 관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에서 볼 때, 교회는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며,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평신도신학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역이 교회뿐만이 아니라, 전세계를 포함한다는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되고 교회는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고난의 종'으로서 세계와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한편 미국학계에서도 평신도의 사명이 점차 고조되더니 1960년대 중반에 들어와 아이레스(Francis O. Ayres)의 「평신도의 사역」(The Ministry of the Laity, A Biblical Exposition)과 랍 몰톤의「동결된 자산인 하나님의 백성」(God's Frozen People)이 출판되었고 한국기독교서회에 의하여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신학적인 발전 뿐만 아니라 구미 각국에서는 평신도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각국에서 평신도 운동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평신도 신학서들의 번역과 함께 평신도운동이 태동하더니, 70년대에 들어와서는 매우 활발하게 되었다. 그 동안 평신도 운동에 대해서 냉담하던 보수주의 교회들도 점차로 지도자훈련, 제직수련회, 제직세미나, 평신도강좌 등을 통해서 평신도들의 잠재력을 일깨워 교회봉사는 물론이고 전도사업에 있어서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운동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2) 평신도의 의미


평신도란 하나의 직분으로서 헬라어의 ՋՁՏՒ(laos)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의 평신도라는 말의 "lay"는 또한 헬라어의 "ՋՁ՚ՊՏՒ"(laicos)에서 나온 말이다. 이 어원이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말로 여기에서 오늘날의 "평신도" 혹은 "평신도직"이 나왔다고 본다.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람들'(행5:35), '학문이 없는 범인'(행4:13), 그리고 '큰 무리'(행11:26)로 불려졌으나,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영적 친교 코이노니아를 함께 나누었다고 기록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 전체를 의미했고, 그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진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섬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아서 교회의 목적, 선교를 달성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평신도라는 개념은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 전체이며 하나님의 전 백성'이다. 평신도란 역사적으로 성직을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의 성직과 이원적 분리로 그 기능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강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도 성직의 기능을 수행하는 평신도로서 평신도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과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평신도의 개념은 기능에 관한 구별일 뿐이지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기독교 봉사의 본질적 성격에 관한 구별이 아니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목회'를 대행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종들'이며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는 자발적인 봉사자들이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이 다양한 봉사와 조직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 감당하여야 할 그리스도의 목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평신도들은 교회 자체를 위하여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계를 위해 섬김으로 현존하며, 평신도는 세상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죄를 하나님께 대변하는 목회를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와 인류의 실존적 삶을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평신도들은 그들의 다양한 직업을 통하여 세상 안에 그리고 세상 도처에 흩어져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교회를 가장 잘 대표하는 자들이다. 교회는 평신도를 통하여 세상 속에 직접 개입하여 연속적인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간의 실제적인 화합은 평신도를 통하여 구체화되고, 교회의 직접적인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다. 따라서 평신도와 목회자는 비록 기능상 구분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 역할에는 구분이 있을 수 없다.



3) 평신도를 위한 교육



(1) 현 교육의 문제점


① 그 동안 목회자는 교회강단에서 한결같이 신앙을 강조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지적 추구와 실천이 없는 감정적 분위기를 만들어 왔다. 이 결과로 교회마다 교회의 문을 굳게 닫고 세계와 사회의 문제를 '구조적인 죄악'으로 방치해 두었다. 교회 안에는 목회자의 권위와 교권중심주의로 오염되어 사회의 비도덕성과 비인간화의 문제에 무관심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 자체가 여기에 편승하여 비도덕성과 비인간화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②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은 목회자 중심인 '닫혀있는 교회'에서 목회자의 말을 앉아서 듣는 일에 만족하는 심리적 수동성과 타율성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그 결과 그들은 배움과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면서 배움이란 신앙과 무관한 세속적 영역으로 방치하여 왔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적 문맹'으로 교회와 사회생활과의 이중적 문화 사이에서 무기력한 기독교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③ 따라서 교회는 사회에 대해 '책임있는 공동체'로서의 책임을 상실하게 되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적 문화에 융합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이제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을 새로운 안목과 비젼을 가지고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다. 실제로, 한국교회에서 평신도교육은 그 교육의 신학적 토대와 교육구조의 연구 및 정립이 없이 다만 성서연구와 평신도신학 강좌 및 직장 선교 연구의 범주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평신도교육은 평신도들의 일상생활 현장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 성서 및 신학적 해답에 의하여 응답하게 하고, 동시에 그들의 새로운 변화와 함께 선교적 사명을 위해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는 과정과 연관되어야 한다. 최근 이러한 종류의 책--현장 경험과 성서를 연결시키는--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2) 열린 교육


이제까지의 교육이 교사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열린 교육을 강조하며 학습자 우선중심의 교육을 하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평신도를 위한 교육도 평신도들이 처한 특수한 시대적 상황, 교육 수준, 사회적 위치 그리고 개인적 신앙생활의 특성에 따라 발생하는 전반적인 문제들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서 일반교육(pedagogy, 패다고지)과 성인교육(angragogy, 안드라고지)의 차이를 많은 학자들이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후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드라고지는 첫째, 의존적인 교사 중심이라기보다 자기 지향적인 자율학습의 특징이 있다. 둘째, 강의 중심의 내용, 주제 중심, 내용 중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상황과 경험을 통하여 체험적 지식을 얻는다. 셋째, 분위기 창조를 중심으로 하여 개방적이며, 상호 신뢰적이며, 비형식적이며 학습자들의 참여와 존경이 상호 교환되는 학습과정이다. 페터슨은 이 교육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페다고지

안드라고지


학습자

의존적

상호의존적


목 적

지식을 얻는 일

문제해결


교 육


과 정

교사 중심적, 권위 지향적


교사가 요구를 결정


형식적

자기 지향적, 상호 존중


학생이 요구를 결정


비 형식적




평신도 교육은 이와 같은 특징으로 현재적 삶의 현장에서 교회를 대변하는 선교적 주체가 되도록 훈련하는 데 목적이 있다.



(3) 열린 교회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가 평신도들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소홀히 한 채 목회자 중심의 교회로 성장해 왔다. 이와 같은 교회를 닫힌 교회라 한다면, 열린 교회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동일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선교에 함께 동참하며 사회에 새로운 기독교적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신앙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열린 교회는 성직자 중심보다 하나님 중심적 교회이다. 교회가 신학적 개념으로 국한되어 있지 않고 항상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속된다. 그리고 이 교회는 우리 시대의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 정신의 상징적 표현이 되어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화해의 역사를 부단히 계승하고 있다. 교회의 중요한 관심은 주변 문화를 이해하고 동시에 지역 공동체에 두어야 한다.


둘째, 열린 교회의 목회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하는 사역이다. 그 동안 평신도들은 항상 목회자가 이끌어 주기를 기대하며 목회자의 모든 것이 자신들의 것보다 항상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영향으로 모든 평신도들의 생활이 목회자의 태도와 행위에 입각하여 자발적이며 자율적이 아닌 듣고 모방하는 것으로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열린 교회의 평신도는 목회자와 동일한 동역자가 되어 함께 봉사하며 동시에 목회를 비판할 수 있다. 따라서 평신도의 목회는 목회를 받는 대상이면서, 목회를 감시하며 비판하는 위치에 있으며, 또한 목회에 적극 참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셋째, 열린 교회는 평신도의 직업과 사회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평신도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교훈이나 훈련을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신앙이 사회생활과 상관이 없다는 확신으로 양육되어 왔기 때문에 교회에서 듣고 배운 모든 것이 그들의 실제적 생활과 직업과 무관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열린 교회는 세상의 사회생활이 속되고 악한 것이 아니라, 그 생활 속에서 수행하여야 할 봉사와 선교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도록 한다. 실제로 사회에서 평신도의 목회는 구체적인 직업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 평신도는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며 흩어져 있는 교회이다.


마지막으로, 열린 교회는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단지 선택받은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부름을 받았다. 지금까지 교회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지으려는 의도적인 생각 때문에 그 이웃과 단절되어 초연했었다. 그리고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인 돌봄과 애정이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배타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라는 인상을 주어 왔다. 열린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백하고 실천함에 의하여 세상 사람들과 화해하고 구원 받아가는 사람들로 인도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물질 문명과 퇴폐문화에 의한 도덕성 파괴로 오염되어 가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 생태계를 보존하는 오늘 시대의 사명에도 동참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오는 말: 평신도의 사명에 대한 제언



위에서 살펴본 평신도신학을 바탕으로 평신도의 사명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는 평신도의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요구하기 때문에, 모든 평신도가 함께 참여해야 할 평신도 목회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평신도 목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여 희생과 봉사로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선교적인 사역이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감당해야 할 일은 본질적으로 교회에서의 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교회 밖 세상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평신도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모이는 교회'로서의 사역과 세계 속에서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1) 모이는 교회로서의 목회


모이는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평신도의 응답의 사건으로서 평신도는 교회에서 제사장적 기능, 예언자적 기능, 그리고 왕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첫째, 평신도의 제사장적 기능은 공동예배와 성례전을 통하여 구현된다.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백성의 계시에 대한 응답하는 만남이다. 평신도는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라서, 말씀을 듣고, 교제를 나누고, 함께 떡을 떼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감격으로 표현하는 찬양과 기도에 참여한다. 평신도는 이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변화의 경험을 하게 되며, 세계와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의 참여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평신도의 선교적 의식과 증언을 실천하는 결단의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다.


둘째, 평신도의 예언적 기능은 목회자와의 분담된 지도력으로 다양한 선교기관에서 교육과 증언의 사명을 의미한다. 각 교회마다 전 교인을 신앙으로 지도하여 훈련해야 할 평신도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목회자와 함께 교회의 속회, 교회학교, 성가대 등을 담당하여 성서연구와 교리 및 신학적 이해를 도와주고 일을 분담하고 있다. 능력이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은 다른 평신도들에게 함께 참여하여 일할 수 있도록 자극하며 목회자가 할 수 없는 돌봄과 섬김으로 신앙적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셋째, 평신도의 왕권적 기능은 교회의 '청지기직'으로서 교회의 조직과 행정 및 관리에 적극 참여하는 일이다. 평신도는 교회의 다양한 행정조직에 자발적인 봉사로 참여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교회의 청지기직은 목회상담, 심방, 그리고 교회의 재산관리 등을 목회자와 협력하여 하는 일이다. 교회의 청지기직은 자발적인 참여와 봉사를 통해서 평신도 개인의 신앙성장과 변화뿐만 아니라 전 신앙공동체의 부흥과 함께 선교적 사명을 함께 공유하는 일이다.



(2)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목회


평신도가 세상 속으로 흩어진다는 것은 세계 속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첫째, 교회는 평신도의 선교적 자원을 동원하고 발굴하여야 한다. 동시에 교회가 평신도로 하여금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게 하며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잘 수행하도록 자극하고 격려할 때에 복음의 세계화가 달성될 수 있다.


둘째, 평신도의 흩어짐은 교회가 세상의 각 영역에 침투하는 사건이다. 평신도는 목회자가 직접 관계를 맺고 활동할 수 없는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며 그 현장의 복음의 증거자가 될 수 있다. 평신도는 그의 전문 직업을 통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독특한 '평신도 사도직'의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신도는 사회 구원을 성취하여야 할 또 다른 목회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평신도는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아, 동시에 세상에 부름을 받는 즉 모임의 차원과 흩어지는 양면적 신앙활동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되고 성장해 가는 것이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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