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론!! 집사! 권사! 장로! 교역자!

[스크랩] 제직훈련교재

하나님아들 2014. 8. 10. 00:23

-제직훈련교재-

제목: 하나님의 일군(1)


본문: 엡3:1-13

찬송: 231, 377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식을 따라 능한 자나 돈이 많은 자나 존귀한 자를 불러 일꾼을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외모와는 전혀 무관하게 부르신다. 단지 보시는 것이 있다면 그가 얼마나 충성된가하는 것을 보신다. 


   충성되다는 것은 단지 열심만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충성된 자는 부르신 이를 위해서 부르신 이의 입장에서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역사가 되어진다. 


   그러한 예를 3가지로 들었다.  예) 군인, 경기자, 농부


   이제 오늘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군에 대해서 상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의 일꾼은 그 당연히 그 삯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


   (딤전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어느 기업체의 사장도 피고용인을 쓰면서 월급을 주지 않는 곳은 없다.  만일 그런다면 아무도 그곳에서는 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원하여도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일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우리의 상식보다 탁월하신 분이다.


   신명기 25장 4절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신25: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 이스라엘 하나님의 율법에 소에 대한 염려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자금 공급이 원활하게 되어야만 신이 나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아 이렇게 일을하기 위해서 시간을 쓰고 돈을 쓰면 내게 손해가 아닌가!”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 결코 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일군으로 부르신 분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서 이렇게 망했습니다.”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는 간증은 많이 듣게 된다.  이 일에 대해서는 수많은 증인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길 때에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염려는 불신앙의 산물이다.  오히려 그 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은 확실한 보스이고 확실한 스폰서이시다.  적어도 우리 삶을 책임지시지 아니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직 우리의 염려는 내가 주님의 뜻대로 그 의도대로 모든 일을 하고 있는가를 늘 살펴야 한다. 


   2. 하나님의 일꾼은 겸손해야 한다. 


   (엡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하시고 (엡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많이 이루었던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예) 희한한 능들, 회개의 역사, 죽은자를 살림.  그러나 결코 그 모든 업적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 봅시다.  7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그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자신은 다만 그 하나님의 능력의 일하심을 따라서 행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했다면 그것은 내게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그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8절에 자신을 가리켜서 무어라고 지칭하는가를 살펴보십시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고 선전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기독교계 신문이나 포스터를 보면 지금 당장에 하늘에서 불수레를 타고 내려온 사자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일군의 모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일군은 자신이 높아지고 드러날 것을 염려합니다.  언제나 주님을 높이고 성도를 높입니다.  자신은 겸손히 섬기는 종이 됩니다.  참된 하나님의 일군인가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도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려하는 가, 아니면 정말 겸손히 낮추는가 하는 여부를 따라서 알 수 있다.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은 첫번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두번째는 성도 앞에 겸손하다.


   3. 믿음으로 담대하게 일해야 한다. 


   (엡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엡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하나님의 일꾼은 또한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여러 환란가운데 처해질 때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먼저는 하나님 앞에 담대함이 있고, 두번째 상황에 대해서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은 생활의 정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에 있으며, 세상에 대한 것은 어떤 어려움도 환란도 감당하겠다는 용기이다.  그리고 그 용기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인정이 있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하는 이 일들을 기뻐하시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을 때 우리는 진정 담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다. 





















-제직훈련교재-

제목: 하나님의 일군(2)


본문: 빌3:1-16(주제구절1-3)

찬송: 311, 347


지난주에...


   # 일군은 하나님께서 삵을 주신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

     하고 나아가야 한다.

   #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겸손해야 한다.

   # 믿음으로 담대해야 한다.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담대해야 한다.)


이제 오늘 저녁에...


   세번째 하나님의 일군의 사역원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빌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일군은 어떤 특별한 환상속에 빠져선 않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종말과 동일한 멧세지와 안전을 연결해서 언급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이 가까와 올수록 특별한 교리를 들고나오고 주장하기 쉬운데 이것은 심히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같은 복음, 같은 보조를 맞추는 것이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많은 이단의 교주들의 공통점이 바로 특별한 무엇을 추구했고 이단에 빠진 성도들을 잘 살펴보면 무언가 특별한 무엇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많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특별한 무엇을 좋아합니다.


   예)  통일교 문선명 “6000년간 하나님의 한을 내가 풀겠다”

       전도관 박태선 “내가 이긴자다. 육체도 죽지 않는다.”

       영생교 조희성 “늙지 않고 회춘, 불사,.....”


   예)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기존교회에 만족하지 못하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무언가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성격도 이에 일조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일군은 기본 진리안에서 변치 않고 꾸준한 신앙과 봉사가 필요하다.  특별한 진리는 없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심고, 가꾸고, 열매맺는 자연의 원리를 따라서 모든 것을 하신다.  순리를 벗어난 어떤 특권의식이라든지 특별한 어떤 신드롬을 가지고 일을 해서는 않된다. 


   예) 어떤 갑작스러운 봉사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오히려 이름없이 한자리에서 꾸준히 봉사하는 것이 진정한 일군의 모습이다.  일군은 자리를 지켜야 한다.  (예. 기둥, 석가레, 못)


   두번째 하나님의 일군은 성령으로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영에 속한 것이므로 육신의 방법이나 힘으로는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육신의 힘으로 하는 봉사는 한계가 있고, 그 열매도 좋지 않다. 


   예) 교회일 실컷 하고나서 시험에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이유는 성령을 따라 봉사하지 아니하고, 육신을 의지하는 마음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육신을 따라서 봉사를 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부작용들이 있다.


   1). 인정을 바라게 되고, 보상심리가 작용한다.  예를 들어서 헌금을 많이 하면 모든 일이 잘되고 물질의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한다.  그리고 쉽게 일이 풀어지지 않으면 곧잘 시험에 들게 되는 것이다. 

   2). 경쟁을 하게 된다.(비교도 한다.)

   3). 교만이나 낙심에 빠진다.

   4). 지속적이지 못하다.

   5). 열매가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봉사하면....

   

   1) 인정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봉사 그 자체가 감사의 조건이 된다. 

     예) 중국교회 건축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데(건축헌금을 1인당 약 1,000원씩 드림/ 이들 1년치 월급) 한 집사의 기도가 이제 드리고 싶어도 더이상 드릴 것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간곡한 기도가 있었다. 

   2) 서로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먼저 인정, 존경,  Not 비교)

   3) 은혜와 믿음이 충만해  진다.

   4) 지속적이고 변함없이 봉사한다. 

   5) 선한 열매가 꾸준히 맺어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군은 성령충만을 받아야만 한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진정한 하나님의 일군이 될 수 있다.


   세번째 하나님의 일군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자랑해야 한다.  :


   자랑은 대부분의 경우에 이기적이고 과시적인 것이 되고 악한 결과를 낳게 된다. 


   예) 외팔이에게 나는 두 팔로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고 자랑한다면 이는 악한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일반적인 것뿐만 아니라 신앙을 빙자해서도 때로는 자랑의 악을 행할 때가 많다.  그것이 간증이라 할찌라도 때로는 듣는 자들의 심령을 상하게 할 때가 많다. 


   예) 목회자간의 교세자랑, 성도간의 물질축복자랑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일군은 아무것도 자랑치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이다.  나의 구원도 나의 봉사도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소유, 진정 영원한 보배는 오직 우리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이다.  세상의 것 육신의 모양은 하나도 가져갈 것이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일군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랑거리가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리 잘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하고 자랑할수록 서로에게 힘이되고 은혜가 넘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일 어떤이가 하나님의 일군을 자처하는데 자신이 어떤 특별한 능력을 받아서 특별한 일을 행하는 것처럼 하거나 자신이 한 일들을 내세운다면 이는 하나님의 진정한 일군이 아니요,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일군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무엇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든든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묵묵히 그리고 겸손히 주어진 일을 감당해 나아가되 오직 성령을 의지하고 성려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령님과 함께 봉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만 자랑하고 오직 그 분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군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높여주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며,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직훈련교재-

제목: 하나님의 일군(3)


본문: 벧전4:10-11

찬송: 351, 372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는 지난 세주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주에 상고한 내용만 잠시 언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 특권의식이나 특별한 환상속에 빠져선 안된다. 이는 이단의 특성이다. 

   #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서 봉사하고 육신을 따라서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로만 자랑해야 한다. 


이제 오늘 저녁에 상고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일꾼은 청지기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지기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근동지방의 사회형태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저들은 주로 유목과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보니 때로는 아주 많은 분량의 재산을 소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관리해 줄 사람을 두게 됩니다.  다른 곳에서 데려오기도 하고, 지금까지 자신의 일을 보아왔던 종들 중에서 아주 신임할만한 사람을 택해서 모든 재산의 관리를 위임하게 됩니다.  이 때 주인은 자신의 도장과 모든 문서를 청지기의 손에 맡깁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거의 주인의 권한대행입니다.


   그러므로 이 청지기는 일반 하인이나 종과는 다릅니다.  일반 종은 그저 시키는대로 일을 하고 삯을 받는 것에 그치지만 청지기는 모든 재산을 운영해서 주인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해야할 책임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즉 주인을 대리해서 주인의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자신의 아이디어에 따라서 창조적으로 해나갑니다.  일이 이렇게 막중하므로 청지기는 아무나 선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수십년간 일을 맡아서 하되 정말로 충직하고 신임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모든 소유를 맡았던 늙은 종(청지기)에게 자신의 아들 이삭을 위해서 아내를 간택할 것을 부탁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청지기는 그 아들 이삭에게도 역시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나이가 어린 주인의 자녀에게는 오히려 엄한 선생이나 관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충직한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청지기라는 것이 이와같아야 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모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너희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같이 각양 은사를 받은대로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바로 이 청지기와도 같습니다.  모든 일의 원리와 목표는 제시되어 있으나 모든 운영은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해서 자신의 역량껏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지기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청지기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나 자신도 주인의 소유중에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청지기는...


   1. 주인의 유익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칙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유익은 결국 자신의 유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자신의 유익을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인의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 뛰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자신의 영광이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2. 주인의 방법과 주인의 원칙을 항상 잊어서는 않됩니다.  냉수 한그릇 주는 것까지 주인의 방법이 있습니다.  교회의 일도 역시 주인되신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풍성입니다.  다툼과 시비와 욕심의 방법은 주인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명성을 더럽힐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가다가 하고자 하는 열심은 있는데 주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알지못해서 오히려 주인에게 누를 끼치는 교회들, 혹은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거나 그저 무시하고 자신의 방법을 따라서 일한데서 오는 부작용입니다.


   3. 모든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하여도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음을 잊어선 않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군에게 내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기억합시다.  궁극적으로 청지기는 그 자신역시 주인의 소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세상이 말하는 축복의 개념은 어디에도 없음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세상이 말하는 축복에 대해서 한번도 그것이 과연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4. 반드시 결산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결산할 것입니다.  무엇을 결산하나요?  모든 것입니다.  나의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결산할 것입니다.  불법으로 사용한 것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요, 적절하게 사용한 것에는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산은 우리가 청지기 사무를 계속 할 수 있는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주인의 것을 제멋대로 유용했던 불의한 청지기가 그 직무을 빼앗기는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결산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결산의 모습은 두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먼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기간을 통해서 결산이 이루어집니다.  예) 주의 종의 길에서 파계, 혹은 교회 직분자의 길에서 물러감.  이는 엄청난 축복의 상실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결산은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이루어 집니다. 그 날 충성한 사람에게 때로는 열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청지기의 직분은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하나님의 인정과 신임을 얻어서 하나님의 일을 맡았다는 것은 세상의 대통령의 직분은 수행하는 것보다 10배이상 존귀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일군에 되었다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마시고 영광스럽고 복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청지기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 주님나라 임할 때에 생명과 영광과 칭찬과 상급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멸시받는 부자와 존경받는 부자의 차이 / 청지기정신


   부자 노인에게는 있고 구두쇠 노인에게 없는 것은 바로 청지기 정신이었습니다.  청지기정신은 이렇게 인생을 부요하고 복되게 해준다.






-제직훈련교재-

제목: 하나님의 일군(4)


본문: 행20:17-38

찬송: 375, 376


   우리는 지난 3주간에 걸쳐서... 하나님의 일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는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역시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도는 먼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사명으로 볼 때 분명 그 분의 일군입니다.  그러므로 정작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는 진실하고 부지런한 일군이 되려고 애쓸 것입니다.  진정한 일군은 일을 의무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명이요, 보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 진정한 기쁨을 느낍니다. 


   계속해서 일군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요,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언제나 저는 일군에 대해서 오늘까지만 하고 다음에는 다른 말씀을 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준비하려고 기도하다보면 언제나 일군에 대한 말씀이 떠오르고 부딧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오늘 선교교회에 모인 우리들은 아주 귀하게 사용하시려는 뜻이 계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어떻게 사역을 했으며 남아 있는 일군들에게 부탁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진정한 일군은 겸손과 눈물로 인내하는 일군이다(17-19).  /  “(행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행20: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겸손은 그리스도를 높임으로 되어지는 것이요, 눈물은 사랑과 진실의 표증이다.  바울이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사역을 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가슴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일군은 겸손하고 진실해야 한다. 


   또한 그의 이러한 자세는 모든 방해꾼들의 시험을 참을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는 교회의 일을 하면서 당하는 모든 훼방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그 일을 부딧쳐서 해결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므로 해서 교회 안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시험이 되고 이상한 알력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문제의 해결은 그 때로부터 일을 쉬어버리는 경우이다.  조급한 대응과 일의 포기 이 둘다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는 일군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실한 일군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품성은 오래 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까지 오래 참으며 묵묵히 모든 문제를 품고서 기도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섬기는 섬김의 일을 중단하지 말고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나가야 한다.  그 때에 로마서5:3-4의 말씀대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인내를 이루게 된다.  그 인내는 연단한 믿음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고 연단된 믿음을 따라 모든 약속된 소망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2. 진정한 일군은 유익한 것은 꺼림이 없이 전하고 가르치는 자이다(20-21). / “(행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행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


   하나님의 일군 특별히 교역자는 그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저들의 비위를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는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가 아니다.  오직 반드시 유익하게 할 것은 가감하지 않고 꺼림 없이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유익한 것을 가르치지 못하면 무익한 것이 마음에 들어오게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일군이 아니요, 하나님의 일을 망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군의 자세를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군들이 진리의 말씀을 꺼림 없이 전하고 경책한다고 해서 그것을 싫어하거나 비판해서는 않된다.  그것은 일군으로 하여금 바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뿐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미워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선지자는 벙어리 개라고 하였다.


   3. 전도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22-27). /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줄 아노라 (행20: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행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


   바울은 자신이 결박과 환란을 당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복음은 생명이고 구원이기에 그리한 것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심령이 성령에 의해서 매인바 되었다.  그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자신은 깨끗하다고 한 것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멸망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핏값을 자신의 손에서 물으실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파숫군의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복음은 구원의 생명과 멸망의 피에 대해서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4. 스스로 삼갈 줄 알아야 한다(28).  /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연약과 죄의 성품을 지니고 있기에 스스로 삼가지 않으면 금방 게을러지기 쉽고 연약해지고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은 늘 경성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목동이 깨어있지 못하면 양떼는 이리떼에 다 물려가는 것이다.   최소한 양떼를 위하여 삼갈 줄 알아야 한다.  예) 군 시절 / 너무 바빠서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열심을 내지 못했을 때 주님의 전에서 나를 인해서가 아니요, 저들의 영혼을 위해서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간구하면 새 힘이 솟았던 것을 기억한다.  특별히 일군이 삼가는 것은 자신만을 위하지 않고 양떼를 생각하면 더욱 삼갈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마치 자녀를 생각하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일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다. 


   5. 자기를 좇게 해선 않된다. /(행20: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행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행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

       

   하나님의 일군인가 자기를 위한 일군인가? 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좇게 하는가 아니면 겸손히 주님만 드러내고 주님을 좇게 하는가하는 것으로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거짓일군은 자신을 드러내지만 참된 일군은 보내신자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셨다. 


   물론 이것의 구분이 아주 미묘하여 잘 분간이 않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별의 원리는 너무도 간단하다.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자신의 공로나 능력을 개입시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군이 아니다.  우리도 주님의 일을 하면서 묘하게 자신이 어떻게 했고 자신으로 말미암에 오늘날 어떻게 되었고... 하는 등등의 말들을 한다.  이는 참된 하나님의 일군이 아니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을 드러내는 자에게는 사단이 틈타고 시험을 일으키는 것이다.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은 오직 100% 주님의 영광만을 구하고 그 이름을 높이는 자이다.  세례요한의 고백대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는 사람이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이다. 


   6.  모든 일들을 주님께 부탁할 줄 아는 사람이다. / “(행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주님만이 저들의 목자가 되시며 저들을 지키실 것을 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주님께 부탁할 줄 아는 사람이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이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이 세웠던 교회의 성도들을 기도로 주님께 아뢰고 부탁을 했다.  목자장되시는 주님께서 친히 저들을 인도하고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일군이 참된 일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군은 모든 일을 행할 때에 최종적인 결정을 하나님께 둘줄 알며,  자신이 심고 물을 주지만 모든 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알고 있다.  교회의 모든 일들을 하면서 그것을 내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내가 일은 하나 그 일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일을 열매맺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고 교회는 많은 열매와 함께 든든히 서게 되는 것이다.


   7. 물질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군이다(33-35). / “(행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행20: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20: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행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행20: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


   바울은 성도의 물질을 탐하지 아니하였을 뿐아니라 오히려 동행들의 쓸것을 친히 일해서 공급하였다.  그가 만일 원했다면 성도들의 전재산을 다 헌납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복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물질에 초연했을 뿐아니라 스스로 주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군은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자신의 쓸것과 하나님의 일에 사용할 것을 충당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오늘날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들, 병을 고친다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란 눈뜨고 못봐줄만큼 세상적이고 물질을 탐하는 모습을 볼 때 바울의 모습은 참으로 진실한 일군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발람을 기억해야 한다.  물질을 탐하게 되면 결국은 사탄이 틈타게 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대적하는 자가 되고 불행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을 좇았던 많은 일군들이 모두 떠나갔는데 대부분이 물질을 사랑해서 떠나갔다.  세상을 사랑해서 떠나갔던 데마, 돈을 위해서 스승을 팔은 가룟유다등을 통해서 우리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물질은 오직 선한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요, 공유하는 것이요.  성실한 손으로 일을 하여 주님의 선한 사업에 사용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관리하는 사람이 진실한 주의 일군이다. 


   이 모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의 모습 7가지를 살펴보았다.  바라건대 오늘 모인 선교교회 모든 성도들께서는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되어서 마지막 때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직훈련교재-

제목 / 하나님의 일군(5)

성경 / 딤전 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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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직의 직임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들


   1. 가정의 문제 


   가정의 단위는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그러므로 가정을 떠나서 주님의 교회의 제직으로서 온전한 섬김의 봉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것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1) 부부 윤리의 문제 / 먼저 가정이 깨끗해야 한다.  특별히 성경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된다고 언급했다.  당시의 일부다처가 유행하던 시절에 일부일처를 이야기 한것은 사회의 통념을 넘어선 원초적인 거룩을 요구하신 것이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이다.  간음을 행하는 가운데는 결코 거룩한 봉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하는 일에는 반드시 음란한 사단이 역사하는 것이다.  저는 교회의 직분자중에서 그러한 범죄를 지금 현재 그것도 교인 상호간에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의 일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정조를 서로 지키며 사랑하는 것이 직분자의 우선적인 자격이다.


     2) 자녀의 문제이다. /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해야 한다.  특별히 자녀를 양육하되 신앙 안에서 양육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노력이 부모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서 세상의 것을 위해서는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많이 드리지만 영적인 문제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성경책하나도 손수 사주는 정성으 보이지 않는다. 


     예) 자녀의 성경공부, 신앙교육을 위해서 교역자에게 과외를 받게하는 집사님을 알고 있다.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 중심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받으신줄로 믿는다. 


     3) 봉사의 문제 / 봉사를 하자니 가정이 위태롭고, 가정에 충실하자니 봉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제직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것은 온 가정이 믿는 믿음의 가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봉사하기를 원하는 성도는 반드시 가정의 복음화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가정이 온전히 복음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때도 있다.  여기서 차선책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것은 신앙생활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합의하에 봉사를 하는 것이다. 


   예) 철야기도, 새벽기도, 주일의 온전한 봉사, 거액의 작정헌금등등... 


   그러나 믿지 않는 가족 중에 완강하게 봉사의 일을 반대할 경우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되 서로 이해가 될 때까지 적극적인 봉사는 유보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나의 협의되지 않은 봉사로 인해서 정말로 중요한 가정의 구원이 어렵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를 원칙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적극적인 믿음으로 봉사를 견지해나가도 결국에는 가정의 구원과 축복을 이루어내는 믿음의 간증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봉사를 유보하든지 적극적인 봉사를 하든지 하는 것은 각자가 기도하면서 혹은 말씀의 깨달음 가운데 성령의 감동을 받은대로 할 것이다.  둘 다 긍적적인 예와 부정적인 예가 있다.


   예) 부정적인 경우 / 할머니의 헌신에 손녀가 상처를 받는 경우,

       긍정적인 경우 / 어머니의 헌신에 아들이 목사가 된 경우

                       (이숙녀전도사, 김국도,김선도,김홍도,.. 목사). 


   중요한 것은 믿음의 헌신을 우선으로 할 때에는 반드시 인간적인 마음을 풀어주어야 한다.  감절의 정성을 가족에게 쏟아 부어야 한다.  자녀들이 원할 때 “야 오늘 교회에서 하루 종일 봉사해서 죽겠는데 니가 좀 해라.” 하는 식의 모습을 바람직스럽지 못하고 우리의 헌신과 봉사에 사단이 틈을 타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우리의 봉사로서 교회가 살고 내 영혼이 살고 가정이 복음화되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2. 교회 이전의 문제(이는 특별히 급변하는 한국교회의 문제이다.) /


   멀리 이사했을 경우는 불가피하나 같은 지역 안에서 교회를 이전하는 것은 이전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대부분 어떤 객관적인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요 인간적인 갈등과 신앙적 불순종(교만)에서 야기 된다.  이 요인에는 교파, 교회, 목회자 간의 비윤리와 치리의 부재, 그리고 성도의 세속화 등을 들수 있다. 그러므로 아주 멀리 이사했을 경우 외에 교회를 옮길 경우의 폐해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도 자신의 신앙이 자라지 못한다. 예)나무

     2) 진정한 목자가 없는 불쌍한 영혼이 된다. 예)가출 습관

     3)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못하는 󰡔자기의(義)󰡕로 충만한 교인이 되어 교회를 어지럽히게 된다. 잠18:1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진단을 해주신다.  “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좆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4) 교회간의 혹은 교역자에 관한 말을 악하게 함으로서 비난하고 이간질을 시키므로 결국은 마귀가 가지고 노는 놀이기구가 된다.  사람은 항상 자기변호를 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왜 교회를 옮겼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어도 별 이유 없이 교회를 옮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나온 교회와 목회자를 헐뜯게 되어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


     1) 처음 교회선택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2) 일단 선택했으면 겸손히 받들어 섬기되 특히 담임목사와의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예방해야 한다.   그 비결은 무조건 순종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자신이 교회의 중진이기 때문에 늘 간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서 바로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이단적인 가르침은 예외로 해야한다.

     3)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사를 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사유로 인해서 이사를 하더라도 교회를 중심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별히 안수 집사 이상의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 


   한 교회를 평생 섬기는 것은 복중에 복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교회에 그리고 그 아들이 또 한 교회에서 일을 한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그 자손이 복을 받고 번성하는 가문을 보면 바로 이와같은 한 교회를 꾸준히 섬기는 가정임을 볼 수 있다.  이들도 살펴 보면 다 옮길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소속한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과 애착이 그로 하여금 한 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무 시덥지 않은 이유를 가지고서 교회를 자꾸 옮기는 것은 결국 그 영향을 자손이 받게 되고 결코 복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제직 특별히 안수집사 이상은 결코 교회를 옮겨선 안된다.   그러므로 만일 나는 어떤 일이 있을 때 교회를 얼마든지 옮길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아예 영구임직은 받지 않는 편이 좋다.  교역자는 어디서나 교역을 할 수 있지만 장로는 그렇지 못하다.  안수 받은 바로 그 교회의 장로인것이다.  그 교회와 함께 잔뼈가 굵어진.., 신앙의 연륜이 쌓여진, 그리고 교회의 기둥과 같아서 모든 교회의 짐을 지고 갈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직임을 받은 사람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이리 저리 이사를 다니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예) 좀더 나은 집을 사기 위해서 이사를 하고 교회를 옮긴다면...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교회의 중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직은 그것이 먹고 사는 문제라 하더라도 지속적인 교회를 섬김을 위하여 육신의 직업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우선 순위이다.


   3. 일꾼간의 갈등 /


   서로 섬기고 겸손치 못함으로인해 오는 것이니 더욱 자신을 쳐 복종시키도록 애를 쓰라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나님께서 상대방을 세우시고 사용하심을 중심으로 인정하라” “성격의 차이는 서로 다툴 문제가 아니요,서로 보완할 수 있음을 인식하라”   예) 장로 기수차이에 따라서 발언권 차이....  또한 이는 목회자로부터 혹은 성도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온다. 그리고 드러나게 하는 파격적인 찬조금도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니 지혜롭게 할 일이다.


   4. 교역자와의 갈등 /


   원초적으로 교만에서 온다.  󰡔자기의󰡕가 문제이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분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말씀하시며 저를 통해 일하시고, 저를 통해 나를 지도하시며, 지금 이시간 내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불신앙이 불순종을 낳고 반복되는 불순종은 교만한 신앙인격을 낳는다. 


   교역자와의 갈등원인을 분석해 보면...


     1)  편애한다고 느낌, 치우친 인사처리라고 생각됨. / 그러나 교역자는 더욱 더 신중하게 그 일을 처리한다.  한 사람의 인사처리가 혹시 잘못될 경우 일파만파를 일으킬 것을 생각하고 오히려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까지도 유보할 때가 있는 것이다.


     2)  목회자의 인간적인 환경(학벌,나이, 재능, 교회규모등)에 따라서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학벌은 말씀을 잘 분변하여 가르칠 만큼만 되면 될 것이요, 나이는 교단에서 설정한대로 예수님 나이인 30세 이상만 되면 당연히 성직자로서 직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규모 역시 섭리적인 신앙을 가지면 될 것을 세속적이고 물량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목회자를 판단한다.   이것은 외모로 판단하는 것으로 악한 것이다.


     3)  내가 생각하는 목회자 상과 다를 때 .. .예)심방, 기도, 헌금, 행정, 등등... / 그러나 이러한 자기의 생각이나 자신의 경험만으로 목회자를 판단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갑갑한 노릇이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주신 달란트가 다 다르고 쓰시고자 하는 방향이 다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목회방침과 다르면 애시당초 다른 교회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묵묵히 겸손하게 순종하든지 하면 된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자꾸만 갈구는 사람이 있다. 이는 미련한 곰과도 같다.  모든 성도가 교역자를 따라야 하고 여러 일꾼이 목회자를 따라야지 어찌 교역자가 모든 사람의 방법과 비위를 다 맞출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역자를 내 방법대로 만들려는 사람은 교회 전체를 내 방식대로 만들려는 교만한 사람임을 잊어선 안된다.


     4)  목회자의 육신적 약점, 허물(갈 4:12-20) / 바울을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는데 바울의 안질을 위해서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했다.  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을 비방하는 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과 일반이다.


     5)  책망 / 대부분의 경우 교역자의 책망을 받고서 그것이 합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원수가 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목회학상 요즘 목회자는 책망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잘 못되면 내버려 둔다.  왜냐하면 그것을 건드렸다가는 자신이 화를 입기 때문이다.  진주를 던져도 개가 그것을 밟고 준 사람을 물어뜯는 것과 일반이다.  그러나 책망은 사랑의 표지이고 우리가 자녀를 책망할 줄 안다면 당연히 교역자의 책망도 감사히 받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순종하고 거스리는 그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무런 유익과 축복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자를 사자로 인정치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이상 무엇을 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의 종에 어긋나고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의 저주요, 사탄의 함정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 교역자가 정상적일 때를 전제로 한다.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의 경외하는 가운데 그 세우신 종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통계적으로 부흥하는 교회는 모든 제직이 일심하여 목회자의 방향과 행정에 순종하는 교회이다.  그리고 갈라지고 넘어지는 교회는 언제나 거스리는 고약스런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경우이다.  거스리는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방주된 교회의 사공으로 교역자를 세우셨다.   모든 승무원은 선장의 판단과 지시에 따라야 한다.   안그러면 배는 파선되어 버린다.  건축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우리 교회를 향하신 설계도를 보고 읽는 현장 소장이 바로 목회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지시에 잘 따를 때 우리는 아주 튼튼한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 교회에 대한 제직의 의무


   1. 모든 집회 참석의 의무 / 모든 예배의 참석은 이는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권리임을 감안할 때 당연히 직분자가 모델이 되어야 한다.  교역자는 가르치는 자는 되지만 진정으로 변화를 줄 수 있는 모델은 되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의 제직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모든 면에 직분자는 모델이 되어야 한다.  예배시간을 지키는 것부터하여, 예배를 준비하는 성실함과 예배를 드리는 경건한 자세(복장, 열정,자세등등....)


   2. 기도의 의무 / 자신 뿐 아니라 교회 전체와 교역자와 형제를 위해서... 그리고 영적인 싸움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유능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리고 기도 없이 일하면 인간의 생각이 앞서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일군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다. 


   예)선교지에서 느낀 것은 선교를 위해서는 당장에는 돈이 필요하지만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봉사의 의무 / 대, 소간의 교회 행사(예배를 포함)를 섬겨야 한다. 이것은 자치기관의 행사가 될 수도 있고 교육기관의 행사가 될 수도 있다.  몸과 물질로 이 일들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예) 여전도회의 일, 유년주일학교의 일등등


   4. 교제의 의무 / 기존 회원과 새로운 회원과의 다리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불화한 성도간의 화목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가 되었든지 비난하거나 분리하는 것은 마귀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다(마 5:9).  그러므로 일구이언이나 험담이나 상처를 주는 말, 세속적인 말등... 부덕을 끼치는 말을 삼가할 줄 알아야 한다. 


   5. 헌금의 의무 / 이제까지는 잘 아멘을 하다가 헌금문제만 나오면 아멘을 잘 못하는 이유는 내가 물질의 노예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헌금에 대해서 강조하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오히려 목회자를 “돈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몰아 부친다.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돈이 하나님 위치에 와있기 때문에 그렇다.  더 이상의 어떤 이유도 없다.


   우리는 헌금을 신앙에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  물질을 아주 중요한 것이요 그 사람의 신앙의 척도로 이야기 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누가 얼마나 더많이 헌금을 했느냐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주님께서 명하시고 원하시는 정상적인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고 하셨다.  주님께서 돈을 중히 여기셔서 그랬겠는가?  아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의 문턱에서... 부자인 고로 근심하며 돌아가 영생을 얻지 못했고,  아나니아 삽비라는 물질에 거짓하여 저주를 받았다.  아간은 물질적인 욕심으로 온 가족이 몰살을 당했고 사울왕의 결정적인 실패는 아말렉의 물질에 대한 탐욕이었다.  그리고 에덴에서 아담의 타락은 바로 물질에 대한 범죄였다.  그러나 진정 하늘의 가치관을 소유한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다.  세리장 삭개오가 그랬고 초대교회의 물질 공동체는 바로 이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물질은 무엇인가? 썩어 없어질 물질이 그토록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물질로 된 육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육신이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육신적 쾌락을 위해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물질이다.  그러므로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내가 육신에 매인자인가 아니면 주님께 매인자인가 하는 것을 결정해 주는 아주 중요한 척도이다. 


   우리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리고 신앙을 부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외적인 증거가 언어 외에는 물질이다.  그리고 우리의 말 역시 물질로 증거될 때만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서 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사실 입술로만 하나님의 섬기는 것이지 결코 진실된 신앙은 아니다.


   그리고 이 물질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척도는 바로 십일조이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  특별히 이것은 구별의 의미요, 제한의 의미이다.  제한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기억하게 한다는 것과 일치한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신약에 있어서도 지켜야 할 것들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율법에 속한 것이 아니요 창조의 원리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한하시고 구별하사 하나님의 소유로 하신 것이 있는데 바로 주일성수와 십일조이다.


   헌금은 하나님의 물질 주심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요, 감사 의 표현 방식이다. / 물론 다른 감사를 물질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헌금의 기본 정신은 물질 주심에 대한 감사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그 근본 원칙이 있다.  바로 "내가 누리고 사는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입니다."하는 신앙의 고백이 바로 헌금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금을 하지 않거나 인색한 것은... 바로  "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벌어서 얻은 것입니다." 하는 불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므로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는 고백을 하는 사람의 마땅한 바인 것이다.   헌금 그것은 신앙의 일부분이 아니라 기본적인 신앙의 고백인 것임을 생각할 때 해도 좋고 안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헌금제도를 제정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요 이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특별히 십일조는. . /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의 방법이다. " 네게 있는 모든 것을 과연 내가 준 것으로 인정하느냐? " 하는 여부를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십일조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의 율법이 아니다.  단지 신앙고백을 위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이러한 인격적인 신앙이 있으면 할 수 있으나 이 신앙이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액수인 것이다.  소득의 십분의 일,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액수인 것이다.  하나의 영적인 도전이다.


   십일조의 기원은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기 2:16,17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에 대한 금령은 바로 이와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유로 개방하여 임의로 행하게 하셨으나 그 중에 하나를 제한하심으로 이 동산을 주신 하나님, 이동산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 제한이 없이 세월이 흐른다면 결국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요,  제한이 없다는 것은 최대의 저주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바로 이 모든 풍성한 것을 누림에 있어서 최우선 기억해야 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요,  바로 그것이 선이요, 기억하지 않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제한하신 것을 내가 깨뜨린다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덴에서 한 물질을 범한 것은 단지 물질로서의 의미가 아니요, 하나님을 거부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그 결과는 " 정녕 죽으리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을 기억함이 없다면 당연히 그 영혼과 육체는 죽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제정하신 데는  바로 이와같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 " 네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느냐?  그러면 네게 있는 것 10개중에 하나를 내게 가지고 오라 그러면 너의 고백이 인정될 것이다. " ,  " 그러나 네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든 것은 너 자신의 것이라는 고백일 뿐이니라 " 하는 것이다.   1/10,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드릴 수 있고, 인정치 않는 사람은 결코 드릴 수 없는 액수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이와같은 신앙의 영적 시금석이 된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십일조는 말라기에 기록된 말씀처럼 하나님의 것이요, 이것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도적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제 십일조가 힘든 것은 그것을 종교적인 율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정하신 고백적 의미에서 생각할 때 결코 이것은 힘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요, 즐거운 것이요, 이같이 고백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예)창14:17-20 /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를 드림. 

     창28:20-22 /  야곱의 십일조 서원과 그 배경.

     레27:30-33, 민18:21-32, 신12:5-18, 14:22-29 등 /  하나님의 창조시 세우신 선악의 기준과 믿음의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의 구체적 고백이 모세 때 이스라엘 백성이 조직적으로 나라를 이루면서 입법화 되었다.

     말3:7-12 /  십일조에 불이행에 관한 저주와 이행에 관한 축 복이 약속되어 있다.

     마23:24, 눅11:42 /  주님께서 직접 십일조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다. " 이것(주신 목적)도 버리지 말고, 저것(십일조의 외형)도 행하여야 할 찌니라! "  그러므로 반드시 분명한 십일조를 드리되 진실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모든 헌금의 기본이며, 또한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이어야 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가장 첫것으로 드리되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한다.  


   예) 창4장 아벨의 제물 "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 " 사실은 " 양의 첫새끼 중 가장 기름진 것( THE FATEST ONE! ) "을 의미한다.  가인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와같은 신앙의 고백이 없기 때문이다. "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당연히 타 헌금외에 구별하여 최우선적으로 자장 좋은 것을 구별하되 1/10이상해야 한다.) "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도록 드리는 참 예물이 되는 것이다.  명심하도록하자.


        토의 주제 / 본교회에만 드려야하는가?

                        모든 수입의 십일조인가?  

                        잘 계산이 안될 경우는 어떻게 하는가?

                        다른 선한 일에 사용하면...


   6. 주일 성수 / 십일조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면 주일 성수는 나의 생명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 되심을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이다.  이것은 안식일의 근본 취지와 그 의미에 대해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 아담의 첫날은 바로 주일이었다.  이것을 창조의 선언이요, 하나님을 기억하고 인정하는 것이요, 완성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 때 모든 날이 주의 날이 될 수 있다.


   7. 전도의 의무 / 전도는 목회자도 하지만 사실은 평신도들이 더욱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전도는 평신도들의 신앙간증 속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것이다. 


   예) 초대교회 때 스데반의 순교이후 박해가 일어나서 사도 외에는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서 흩어졌고, 흩어진 사람들이(이들은 평신도들이다.) 그리스도를 전해서 교회가 설립이 되었던 것이다. 


   평신도는 일반인을 접하기 쉽고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접근이 용이하다. 그리고 동질감을 느끼는 가운데 복음이 제시되면 믿음을 가지기가 더욱 쉬운 것이다. 


   예) 양이 양을 낳는다. 목자는 양을 잘 먹이면 된다. 목자가 양을 낳을 수는 없다.


   예) 대부분의 전도대장들은 평신도이다.  주안장로교회, 김성철(?)집사는 작년에 만명을 작정하고 8,000명을 전도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올해도 10,000명을 전도대상자로 정해놓고 기도한다고 한다.  이 분은 주일에 교회에 나올 때 혼자서 나오면 부끄러워서 견딜수 없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평신도의 열정이 교회를 부흥시키고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전도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을 할 뿐이요, 그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여 열매를 맺게하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편하게 위축되지 않고 전도할 수 있다

출처 : 대명교회(大名*大明*大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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