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사의 역할 - 오정호목사
한국 교회에서 권사(勸士, exhorter)는 영성과 희생적인 봉사의 대명사로 통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권사에 대한 이미지를 기도 많이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교회 직분자로 인식한다
(장로 교회와 감리 교회는 권사의 기준이 다르다.
이 글은 여성도 리더십으로서 권사를 다룬다).
한 교회의 성장 이면사에는 권사의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을
한 두 줄로 다 담아내기가 어렵다. 그만큼 권사의 책무가 컸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대를 달리한다 해도, 한국 교회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여종들의 몫은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름 모를 수많은 여종들이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리라 확신한다.
이제 시대는 달라졌다.
변화에 따라 여교우들의 지도력에도 옷을 바꿔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질을 수호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자기 변신이다.
외부로부터 강제된 변화는 변질로 이어진다.
스스로 변화는 성숙으로 열매를 맺는다.
모든 지도력이 그러하듯 권사로 대변되는
여성도들의 올바른 리더십의 방향은 무엇인가?
R&D에 투자하라
여성 지도자로서 올바로 서기 위해 R&D(연구 및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
남을 이끌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 재교육이나 장로 재교육에 대한 소리는 높지만,
권사 재교육에 대한 소리는 드문 편이다.
일상적인 교회 생활을 통해 공급받는 영적 자양분을 섭취하는 기회는
모든 여성도들에게 열려 있다.
타인을 이끄는 자는 타인의 수준에 머무는 순간, 지도력을 상실하게 된다.
여성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려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자기 발전의 정규적인 기회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사용하지 않는 근육이 뻣뻣해지듯, 생각도 뭉쳐 있으면 경직되게 마련이다.
생각을 새롭게 하고 안목을 확대하기 위해 의도된
자기 발전의 프로그램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자아상을 항상 신선하고 창의적으로 유지하려면
치열한 자기 발전에 대한 열망이 필요하다.
지성과 영성의 조화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땀과 수고의 열매이다.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리더십의 이미지는 같을 수 없다.
유형무형으로 연구와 개발에 대한 청사진을 수립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시기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이나 관록으로 교우들을 이끌지 말고,
삶의 분별력과 통찰력으로 이끌어야 할 시대가 이미 왔다.
칭찬 받는 시어머니가 되자
지도자의 가정은 그 사람의 참모습을 말해 준다.
부분적이겠지만 ‘권사 시어머니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 싫다’는
뼈아픈 사연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유는 가정 사역의 적신호 때문이다.
가정에서 지도력은 하루 아침에 행사된 것이 아니기에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가정을 강하게 꾸리는 모습과 맞물린 권사의 모습은 산업화로 인한
가장 부재 시기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고부간에 인터넷을 통해 의사를 소통하는 지금은
일방적인 영향력 행사보다 쌍방적인 대화에 무게가 실린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대상을 이해하고 열린 마음의 대화가 기본이다.
‘믿습니다’ 스타일이 효험을 발휘할 때도 적지 않지만,
오히려 반작용을 불러오는 경우도 많다.
권사가 주님과 깊은 대화를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맛보듯, 세대가 다른
사람들을 기도하듯 품는다면 수평적인 교제의 원만함을 이룰 수 있다.
칭찬 받는 시어머니 권사는 지도력의 많은 부분을 보여줄 것이 분명하다.
덕이 있는 여론을 형성하라
권사라는 직분 자체가 여론 형성의 중심에 서게 된다. 교회는 말이 많은 곳이다.
사람이 많으니 생각도 많고, 생각이 많으니 말도 많은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말을 말로 다스리는 역할의 선봉에 권사가 서 있다.
실상 교회의 모든 여론 형성의 진원지는 권사의 ‘입’일 때가 많다.
여론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권사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다.
많은 권사의 남편들이 교회의 중요 멤버로 뛰고 있다는 사실과
베갯머리 송사를 이겨내는 남자가 드물다는 고래(古來)의 말을 생각할 때,
교회 여론은 권사의 성향과 호불호(好不好)에 달려 있다
축복된 여론을 확대 재생산하든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여론을
확대 재생산하든지 권사는 입술을 제어하는 지혜자가 돼야 한다.
교회의 여론 형성을 발전적으로 이끈 몫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권사가 많은 교회는 늘 생기가 넘쳐난다.
사도 바울은 어떤 여성들이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는” 사실에
주목하고 마음 아파했다.
이러한 여교우들을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 삶으로 인정받는 여성 지도자인
권사의 몫이 아니고 누구의 몫이겠는가! 말 많은 권사가 될 것인가?
덕이 많은 권사가 될 것인가? 선택의 몫 역시 권사들에게 달려 있다.
목회의 후원자로 서라
목회자가 힘들어 할 때 기도의 막강한 후원 부대는
영적인 천군만마를 얻음과 다름이 없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영적 지도자의 든든한 후원자들의 이름 중에
여성도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엘리야의 후원자 사르밧 과부, 엘리사의 후견인 수넴 여인,
사도 바울의 사역에 힘을 돋운 여러 여성도들의 이름이
서신서 뒷부분을 인상 깊게 채우고 있다.
모성애적 마음으로 목회자의 동반자로서 묵묵히 사역을 감당하는
권사의 모습은 목회자는 물론이고 교우들에게도 큰 감동을 준다.
주님께서 여성 지도자의 섬세하고 끈질긴 성품을 사용하셔서
흔들리는 목회자를 세우시고, 낙심한 목회자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신다.
권사들의 다른 별명이 ‘기도의 어머니’란 사실이
목회자의 동역자란 사실을 힘있게 증거하고 있다.
권사들의 팀워크를 통해 강력한 영적 진지가 구축되면 교회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
한국 교회의 권사 제도는 목회자와 교회에 힘을 실어주는
하나님의 사려 깊은 선물임에 분명하다.
말씀의 분별력을 소유하라
이단 사상이 난무하는 한국 교회의 형편이다.
기독 언론을 표방하는 신문이나 방송조차 못 믿을 세상이 되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그럴 듯하게 꾸미고 나오는 것은
동·서양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여교우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이단들의 시도를 최일선에서 분별하고
막아야 하는 위치가 권사들이다.
어떤 일이든지 목회자에게까지 보고돼 상황을 타개하기까지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제법 시간이 걸린다.
이때 분별력 있는 권사가 초동 진압 작전의 선봉에 서서 자신의 몫을
잘 감당하면 교회는 이단 사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초기 대응에 실패하고,
심지어 권사 자신이 포섭의 대상이 된 상황이라면, 예삿일이 아니다.
온 교회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영적으로나 인간 관계에서 큰 상처를 받는다.
꼭 이단의 문제뿐 아니라, 교우들의 삶에는 복병처럼 숨어 있는 일들이 많다.
축복된 일에는 교역자와 협력해 축하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사전 예방 사역이다.
일이 터진 후 치료는 예방 사역보다 몇 배의 인적 물적 요소가 투자돼야 한다.
어떤 일은 거의 회복 불능인 경우도 있다.
시대를 앞서 읽어냈던 에스더처럼 통찰력을 소유한 권사들은
교회의 영적 지킴이다.
얼마나 많은 위태로운 일들이 권사들의 분별력에 의해서
사전에 정리되었는지 모른다.
특수 부대 군인들이 탐지기로 묻혀 있는 지뢰를 찾아내듯,
권사들의 영적 레이더가 교회의 영적 풍향을 주도한다.
기독교 역사 2000년의 지혜를 담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가정 중심,
목회자 중심’의 검증된 생활 원리는 건강한 교회에 직·간접으로 축복이 되었다.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따뜻한 마음과 예리한 분별력으로
자신의 성숙함을 도모하고, 교회에 축복을 가져다 주는 권사라는 직분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존중받아 마땅하다.
빛과 소금/글· 오정호 대전 새로남교회 담임 목회자출처 : Joyful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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