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의 9왕조
1왕조:여로보암-나답(여로보암의 아들)
2왕조:바아사(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엘라(바아사의 아들)
3왕조:시므리(세라의 아들)
4왕조:오므리(엘라의 군대장관,베냐민사람 베게의 아들)-아합(오므리의 아들)-
아하시야(아합의 첫아들)-여호람(아합의 둘째아들,요람)
5왕조:예후(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여호아하스(예후의 아들)-
요아스(여호아하스의 아들)-여로보암2세(요아스의 아들)-스가랴(여로보암2세의 아들)
6왕조:살룸(야베스의 아들)
7왕조:므나헴(가디의 아들)-브가히야(므나헴의 아들)
8왕조:베가(르말랴의 아들)
9왕조:호세아(엘라의 아들)
북왕국의 왕조들
① 931-909 여로보암 왕조(22년간)
⑤ 841-752년 예후왕조(89년간)
◆ 남북 왕조사 분열 왕국의 역사는 히브리 성서 열왕기서의 나머지 부분(열왕기상 12:21∼열왕기하 25장)에 주로 나온다. 남유다 왕조의 20명의 왕들과 북이스라엘 왕조의 19명의 왕들, 총 39명의 왕(다윗과 솔로몬을 합치면 이스라엘의 왕은 총 41명이 된다.)에 관한 동시대의 역사를 교차적으로 쓰고 있다. 개별적인 왕들에 대한 보도는 일정한 표현과 형식들로 표준화하여 작성되어 있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공시적 연대기를 사용하고 있다. 공시적 연대기란, 왕의 통치 기간 옆에 기록되는 연대가 '~왕 ~년' 또는 '~세에 왕이 된 ~' 등의 방식으로 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열왕기상 15:9, 25, 33 등). 이러한 역사 서술 방법은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이 역사를 서술하는 방법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그들의 연대기와 비교하며 읽을 경우 이스라엘의 분열 왕국 시대의 연대기를 확정짓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남북의 통치 햇수 계산법은 서로 달라, 사실적인 연대 구분이 매우 어렵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봄, 니산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고, 또 왕이 죽었을 때 그가 사망한 해를 그의 마지막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정상적으로 같은 해 새 왕이 즉위하면서 같은 해의 남은 기간을 첫 번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반대로, 남유다에서는 아시리아의 계산법을 따라 가을, 티슈리 월을 새해로 지켰으며, 새로운 계승자가 왕위에 올랐던 그 해의 나머지 기간을 햇수로 셈하지 않고, 그 왕이 만 1년을 다스리게 되는 해부터 계산에 넣었다. 둘째, 왕들의 행적과 진술(陳述)에 대한 평가는 왕의 치적이 얼마나 크고 중요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수행되었던 예배를 허용하였느냐, 아니냐에 따라 철저히 내려졌다.
이러한 신명기 사가의 신학은 기원전 7세기 남유다의 16대 요시야 왕에 의해 확정된 것으로써 모든 역사를 그러한 시각에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내려진 결과였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신명기 사가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기록에 불과 140여 절밖에 할애하지 않았으며, 이는 솔로몬의 40년 통치에만 162절을 할애한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그 밖에 남유다의 왕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3대 히스기야와 16대 요시야 왕만은 무조건 인정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왕의 기록에 대한 결어(結語) 공식은 사용된 자료의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유다 왕들에게는 '유다 왕의 실록'이, 이스라엘 왕들에게는 '이스라엘 왕의 실록'이 그것이다. 동일한 원칙에서 '솔로몬의 실록'도 언급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음은 매우 유감스럽다.
▶1. 북이스라엘의 역사(왕상12장~22장, 왕하1장~17장) 세겜과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이스라엘은 유다에 비해 영토가 넓고 비옥했으며 군사력에 있어 남유다를 훨씬 능가했다. 다만 옛 지파 동맹의 중심에 위치하였으나 가나안 원주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동질성이 크게 결여되어 있었으며, 지리적 여건도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세의 영향을 받기 쉬웠을 뿐만 아니라 왕조의 정당성과 이념의 부재 등으로 말미암아 국내 정세는 불안정하였다.
기원전 925년 솔로몬 사후 등극한 여로보암 왕으로부터 721년 아시리아로부터 멸망당할 때 마지막 왕인 19대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약 209년을 유지해 온 북이스라엘 왕조는 모두 19명의 왕을 낳았다. 4대 오므리 왕조와 5대 예후 왕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통치 기간이 짧았다. 19명의 왕 가운데 8명이나 암살되는 등 비교적 불안정한 파란의 역사를 겪었다. 구약 히브리 성서는 대부분 이들 왕들을 나쁘게 평가하고 있다.
●1대 여로보암(22년재위)과 ●2대 나답 왕(2년재위) 북왕국 이스라엘은 초대 왕 여로보암이 이끄는 에브라임의 노동자 집단의 반란으로 세워졌다. 이 반란은 솔로몬의 억압적인 정책과 시정 방침에 불만을 품은 자들의 소행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이 사건은 지파 동맹 시대부터 내려오던 남북 간의 구(舊) 동맹 관계가 깨지고, 사울 시대로부터 잔존해 있던 지파 간의 갈등이 재현된 것이었다. 솔로몬이 죽자, 쿠데타가 사전에 발각되어 이집트로 피신해 있던 여로보암 1세가 돌아와 민심을 장악하고 세겜을 수도로 정하여(열왕기상 12:25)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였다. 그는 즉각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상을 세우고 제의를 시행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성전 제의를 대치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열왕기상 12:27~30). 그는 사제 계급인 레위인들을 몰아내고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을 임명하여 세웠으며, 절기의 날짜(달력)를 임의로 바꾸어 버렸다(열왕기상 12:31~33). 이러한 종교적 개혁 조치는 남유다로 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과 함께 종교적 합법성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유다와의 관계는, 영토의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를 수비하는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1대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 2대 나답이 바아사의 모반으로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2대 바아사 왕조는 20년간 모두 3차례나 일어난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세습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폭력적인 권력다툼과 내정의 불안정이 이어졌다. 남유다의 왕 3대 아사가 통치하던 때 북이스라엘의 ●3대 바아사(2년재위)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자, 아사 왕은 다마스쿠스의 아람 왕 벤하닷에게 원군을 요청하자 벤하닷은 갈릴리 북부 지역을 정복하였다(열왕기상 15:16~22). 바아사 왕의 아들 4대 알라가 혁명으로 시해됨. 3대 시므리 왕조는 ●4대 엘라 왕(2년재위)을 모반하고 군대장관인 ●5대 시므리(7일재위)가 디르사에서 7일간 치리함.
●4대 오므리 왕조(⑥오므리 왕조-⑦아합-⑧아하시야-⑨여호람) 정국이 불안정한 틈을 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6대 오므리(12년재위)는 4년간에 걸친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군주 국가를 만들어 나갔다(열왕기상 16:21~23). 그는 사마리아에 화려한 상아궁을 건설하고 천도하였다(열왕기상 16:24, 22:39). 페니키아, 다마스쿠스 및 유다와 군사 동맹을 맺고 왕성한 무역 활동을 개시하였다. 또, 모압을 정복하고 봉신국으로 삼았다(cf. 열왕기하 3:4). 오므리는 외국에서 볼 때도 '오므리 왕국'으로 표기될 정도로 그 위세를 떨쳤다.1)
오므리 왕조는 북이스라엘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물질적으로 상당한 번영을 누렸으며, ●6대 오므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7대 아합 왕(22년재위)에 의해 완공된 수도 2) 사마리아에 상아궁을 짓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으며(열왕기상 22:39), 고고학 발굴 결과가 밝혀 주는 대로 탁월한 기술과 화려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어 당대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 또, 하솔과 므깃도의 마병장과 수로용 터널은 바로 이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돈 사람의 왕 옛 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열왕기상 16:31),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백성을 죽이는 죄를 범하였다(열왕기상 21:1~16). 그리고 아합 왕은 바알 신3)을 섬겼다. 기원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기원전 858~824년)에게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파견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국제적 지위도 크게 격상되었다. 국가의 부흥과 번영을 가져온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성서는 그를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4대 오므리 왕가의 종교 정책은 이때에 활동한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열왕기상 17장∼19장). 무엇보다도 길르앗 출신의 예언자 엘리야는 종교적으로 어두운 억압의 시기에 이스라엘의 신앙과 종교를 새롭게 일으킨 예언자였다.
므깃도의 마병장에서 발굴된 구유와 말을 묶어 두던 돌
아합의 후계자인 ●8대 아하시야(2년재위)는 남유다의 왕 5대 여호람에게 자기의 딸 아달랴를 아내로 줌으로써 남북 관계를 우호적으로 이끌어 갔다. 두 나라 사이에는 군사 지원을 요청할 수 있을 만큼 관계가 개선되었다. 사실상 북이스라엘이 오므리 왕조가 쌓아 둔 힘을 이용하여 남북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고 이를 행사한 것이었다(열왕기하 8:16~24). 북이스라엘에서는 오므리 왕조에 대한 반감이 계속 고조되고 있었다. 이 저항 운동은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가 이끌었다. 그는 국가 정책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면서 '선지자 집단'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열왕기하 2:3). 그들은 열렬한 애국자들로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여전히 옛 질서와 민중들에 뿌리를 박고, 야훼의 언약과 율법에 비추어 왕과 왕권을 자유롭게 비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오므리 왕조를 몰락으로 몰고 간 인물들이었다.
각주 1) 1868년 요르단 왕국의 디반(Dhiban)에서 발견된 모압 왕 메사의 비문(Moabite Stone 또는 the Stele of Mesha)에 따르면, "오므리는 마데바의 모든 땅을 점령하였으며, 이스라엘은 그 안에서 오므리의 통치 기간과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통치 시대인 40년간에 걸쳐 거기 머물렀으나, 그모스는 나의 기간에 거기에 거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메사는 오랜 기간 이스라엘의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모압을 해방시킨 군주로 등장한다. 높이 70㎝의 이 비문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2) 살만에셀이 부조되어 있는 모놀리스 비문(Monolith Inscription)에 따르면,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여러 왕들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살만에셀에게 대항하여 그의 진군을 오론테스 강변의 성읍 카르카르 근방에서 저지하였다. '이스라엘의 아합'도 연합국의 일부로 파병하였다. "나는 그의 왕의 관저를 카르카르에서 부숴 버리고 허물었으며 불을 질렀다. 다마스쿠스의 하다데제르의 1200대의 전차, 1200명의 기병들, 20,000명의 보병들, ······ 이스라엘의 아합의 2000대의 전차들, 1000명의 보병들, ······ 그는 이러한 12명의 왕들의 도움을 이용하였다."(Ancient Near Eastern Text 278~279)
3) 셈어로 바알은 '주인' 또는 '소유주'라는 뜻이다. 고대 서부 셈족에게 잘 알려진 농경 신이다. 기원전 3000년경에 고대 근동 텍스트에 나오기 시작하나, 바알의 현저한 역할이 잘 알려진 것은 기원전 약 1250년경 우가릿 문학에서이다. 바알은 다곤의 아들과 동일시되고 있으나, 가나안 만신의 우두머리인 엘(El)의 아들로 잘 알려져 있다. 우가릿 텍스트에 나오는 바알의 배우자이자 누이인 아낫(Anat)은 히브리 성서가 말하는 아세라 또는 아세롯과 연결된다(열왕기상 16:33). 고대 근동에서 바알은 태풍의 신, 구름과 천둥과 비의 신으로 등장한다. 건조한 기후 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알은 농경 신, 즉 비를 주는 풍요 다산의 신이었다. 히브리 성서는 유목민의 신 야훼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토착민들이 섬기던 바알 신을 따르자 이에 맞서 싸우는 여러 기사들을 싣고 있다(민수기 25장, 사사기 6장, 열왕기상 18장, 호세아서 2장. cf. 시편 29편, 68:4).
· ● 예후 왕조 약 40년간 유지해 오던 오므리 왕조는 극심한 타락과 호화스러운 생활로 인하여 백성들과 점차 멀어져 갔으며, 민중들의 불만은 계속 커져 나갔다. 급기야 길르앗 출신의 선지자 엘리사는 그의 제자를 보내 길르앗 라못에 사는 여호사밧의 아들 ●10대 예후(28년재위)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열왕기하 9:1~3). 예후는 곧 군대의 장군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북이스라엘의 왕 ●9대 요람(여호람)(12년재위)과 남유다의 왕 6대 아하시야를 처형하고(열왕기하 9:14~29), 또 아합의 왕비인 이세벨과 아합 가문의 모든 남은 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열왕기하 9:30~10:11). 예후 왕조의 피의 숙청은 오므리 왕조의 정책에 의거하고 있던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를 한꺼번에 파괴시키고 말았다. 이세벨의 처형으로 두로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8대 아하시아(2년재위)의 처형은 남유다와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이러한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 와해로 북이스라엘은 물질적인 번영의 주요 원천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이스라엘에게 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제무대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아시리아의 세력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은 아람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굴욕적인 경험과 아람의 그늘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예후는 혁명을 감행해 놓고도 국가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만한 능력이 없었으며, 효과적인 조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인14대 스가랴는 15대살롬에게 암살당하고, 이후 다섯 왕들 가운데 4명이 암살당하는 등 북이스라엘 왕조의 말기는 매우 불안정하였으며, 이로써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되던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성서는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예후 왕조가 바알 숭배를 근절하기 위해 사마리아의 바알 제단에 모든 사제들을 불러 모은 후, 신전을 부수고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열왕기하 10:18~27). "이렇게 하여 예후는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로부터 쓸어 버렸다."(열왕기하 10:28). 10대 예후는 외형적으로 혁명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종교 개혁을 통하여 고대의 신앙을 회복하였으나, 피 흘림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호세아서 1:4). 이 시기에 활동하였던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는 그의 착취와 불의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야훼의 심판을 선언하였다. 특히, 아모스는 소수에게 편중된 부와 권력 구조를 비판하였으며, 경제적 착취를 날카롭게 고발하였다. ●11대 여호아하스(B.C815~B.C802)(왕하 13:1~9/17년재위)는 예후 왕의 아들, 아람 왕 하사엘에게 패배. 유다 17대왕도 여호아하스(요시야 왕), ●12대 요아스,여호아스(B.C802~B.C786)(왕하 13:10~25/16년재위)는 여호아하스 왕의 아들, 엘리사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내 아버지여’하고 울었고 엘리사가 화살을 쏘게 하고 땅을 치라 하니 세 번 치매 아람을 세 번만 치게 하리라고 함. 아람 왕 하사엘이 죽고, 아들 벤하닷(Ben-Hadad)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함. 자기의 장자를 이스라엘의 창건자 여로보암의 이름을 땀. 유다 8대왕도 요하스(아하시야 왕의 아들),
●북이스라엘의 몰락과 멸망 기원전 752년 예후 왕조가 붕괴된 이후 국제 정세는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해지기 시작하였다.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무기를 동원하여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기원전 743년, 그는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였으며, 북시리아의 아르파드 왕국과 하맛 왕국을 정복하고 동부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그는 이집트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반(反)아시리아 연합군을 진압하기 위해 시리아 -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였다.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은 ●13대 여로보암 2세(41년재위), 남유다에는 10대 웃시야(아사랴) 같은 유능한 왕이 있어 새로운 부흥을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12대 요아스의 아들인 13대 여로보암 2세는 41년간을 통치하면서 북쪽 다마스쿠스와 동부 아람족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국경을 넓혀 나갔다(열왕기하 14:23). 18세의 젊은 나이에 유다의 왕에 올라 20년간을 통치한 10대 웃시야 왕은 예루살렘을 개수(改修)하고 군대를 재편하는 동시에, 새로운 무기를 수입하여 에돔 및 서북 아라비아 부족들을 공격하여 교역로를 열어 놓았다(역대지하 26:6~9, 11~15). 이 기간 남북 관계도 매우 원만하였으며, 솔로몬 시대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사회 내부의 부패로 이어져 망국병으로 번져 나갔다. 이 시대 북이스라엘 사회의 두드러진 빈부의 격차는 부패의 표상이었다. 부자들의 탐욕은 부정적인 관행을 낳았으며, 권력을 이용한 재산의 강탈과 토지의 몰수는 가난한 자들이 생활고(生活苦)에서조차 구제받을 길을 차단해 버렸다(아모스서 2:6f., 5:10~12, 8:4~6). 사회적 부패는 종교적 부패와 보조를 같이하였다. 대부분의 성소에는 예배자들로 붐볐지만(아모스서 4:4f., 5:21~24), 순수한 형태의 야훼 신앙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가나안의 토착 신 바알과의 혼합주의는 야훼의 신앙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혼합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드고아 목동 출신의 아모스와 사랑했던 아내의 배반을 경험한 호세아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기원전 746년 ●13대 여로보암 2세(41년재위)가 죽은 후, 그의 아들 ●14대 스가랴(6달재위)는 단지 6개월의 통치 후에 야베스의 아들 ●15대 살룸(1달재위)에게 암살당하였고, 살룸도 한 달 뒤에 가디의 아들 ●16대 므나헴(10년재위)에 의해 살해되었다.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17대 브가히야(2년재위)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군관이었던 ●18대 베가(20년재위)가 일어나 그를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하였다. 나라 전체는 내란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북이스라엘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예언자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 것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호세아서 9:11~17, 13:9~13).
드디어 북이스라엘은 ●19대 호세아 왕(재위9년) 때에 유프라테스 강 서편 지역과 지중해 연안을 공격하기 시작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의 공격을 받았고, 3년 동안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수도 사마리아는 기원전 721년에 함락되고 말았다(열왕기하 17:1~6). 아시리아의 속주 체제에 편입된 이 지역은 아시리아의 총독이 다스렸다. 더구나 귀족들은 아시리아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며, 이 지역에는 아시리아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통혼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과 종교적 전통은 말살되어 갔다. 솔로몬의 억압 정치로부터 벗어나려고 독립하였던 북이스라엘은 군주들의 계속되는 억압과 권력 남용으로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히브리 성서는, 멸망의 원인은 북이스라엘이 야훼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고 타 민족의 신을 섬겨 야훼의 눈에 벗어났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열왕기하 17:7~18). 이제 열망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2의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호세아서 2:14~15).
▶분열시대의 활동한 선지자들 유다지방(요엘.미가.이사야.예레미야.하박국)/ 이스라엘지방(엘리야.엘리사,아모스,호세아)/ 앗수르지방(요나)/ 에돔지방(오바댜) ▶북이스라엘:앗수르(살만에셀5세)에 먼저 멸망함: B.C.721년)/ 남유다:바벨론(느부갓네살)에 멸망:B.C.586년)
.............................................................................................................................................................................................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1세(B.C.922~901)~19대 호세아 왕(B.C732~724)까지였다. 수도 사마리아는 앗수르 왕 처음 사마리아를 포위한 임금인 살만에셀5세는 사르곤2세의 친형이고 디글랏빌레셀의 장남이다. 사마리아가 3년을 버티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왕이 교체된 것이다. 형을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은 사르곤2세는 계속 전쟁을 벌리고 마침내 바빌론과의 전쟁에 승리해 아시시아제국을 이룩한다. 수도 니느웨대신 신수도를 만드는 토목공사(기원전 712~707년) 5년만에 사르곤의 도시‘를 완성한 2년뒤 수메르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함. 그의 아들 산헤립이 뒤를 이음. 사르곤2세가 북이스라엘을 B.C.721년에 멸망시킴.
남유다는 르호보암(B.C.922~915)~20대 시드기야 왕(B.C.597~587)까지였다. 수도 예루살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B.C.586년에 멸망당했다.
(왕하17:1~18)...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년을 치리하며...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 ... 조공을 드리더니 저가 애굽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대로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죽자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 올라와서 그 온 땅에 두루 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삼년을 에워쌌더라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 아세라상을 또 여호와께서 저희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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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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