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교회론과 종말론

하나님아들 2014. 4. 10. 15:24

 

 

 

 

 

교회론과 종말론


제 1 강


서론, 도서소개, 교회의 목적과 현대적 의의


1. 교회론과 종말론을 다루는 목적


    교회론과 종말론은 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분과(Locus)이다. 이 둘은 따로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지만 한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론과 종말론은 밀접한 상호관련을 맺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조직신학의 많은 체계에서 교회론과 종말론은 밀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경우에는 종말론 바로 앞에서 교회론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벌코프와 같은 정통주의자를 비롯, 판넨베르크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도 교회론과 종말론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의 성취”라는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론이라고 하는 성도의 선택은 그 앞부분에 다루어지고 있다. 푈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종말론적 의미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론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2) 선교적 교회론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약속과 분리되어서 이루어질 수 없다. 엡 1장 22절에서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자의 충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교회가 가진 현재의 불충분한 모습과 비교해볼 때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곧 종말론적 완성의 선취로서 종말론적 현실을 이 땅에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완성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고, 때와 장소는 하나님께 달려있지만, 하나님의 종말론적 현실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나간다.


참고서적 : 노만 페린 『예수의 가르치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G. 래드 『하나님의 나라』


    따라서 본 교과는 교회론과 종말론을 각 분과로 다룰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는 전반적인 기조 위에서 이 양자의 구성을 쌓아올리도록 할 것이다.


2. 본 수업을 진행해 나감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방법론

1) 신학의 목적은 결국 학문적 방법론의 제공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추구한다.


  1. 말씀에 입각한 책임적 신학

  2. 자기가 몸담고 있는 전통의 성찰

  3. Know How와 Know Where의 정확한 지식의 소유 필요

2) 조직신학은 이론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방법론적으로 성서신학 - 교리사적 전통 - 조직신학 - 실천신학으로 연결되는 연결고리를 제공해준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조직신학의 가치는 울타리의 제공에 있다. 어떤 인식기반 위에서 건물을 올리는가에 따라서 그 길이 달라진다. 조직신학은 기초작업이다.


3) 따라서 교회론과 종말론을 다룸에 있어서도 자신의 신학적 관점위에서 건물을 올려야 할 방법론적 모색이 필요하다.


I. 교회론


1. 교회론이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는 이유


  1) 교회의 저성장의 문제 - 현시대 한국 교회의 문제. 국민소득 1만 달러가 넘어가면 교회성장에 한계가 온다는 속설. “교회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2) 한국 교회의 관료화 현상 - 유교혼합주의,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3) 교회의 도덕적 위기 - 성속의 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데에서 나오는 문제. 신학의 부재에서 오는 복음의 왜곡의 문제

  4) 세계의 흐름에 교회는 어떠한 대답을 제시해줄 수 있는가 - 에큐메니칼적 흐름, 생명의 영이신 성령에 관련된 문제

  5) 기타 : 상당수의 이단은 교회론적 문제를 안고 있다.


2. 교회에 대한 현대적 질문들


1) 드러난 교회와 숨어있는 교회의 개념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 - 교회는 제도적

      교회안에 있는 선택된 무리에 한정되는가라는 질문

      - 틸리히(P. Tillich), 스힐레베잌스(E. Schillebeeckx), 죌레(D. Sölle)

    대답의 추구 : 잠재적 교회는 현시적 교회의 토대위에 서 있으며, 현시적 교회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구원의 복음이 있는 곳에 교회는 존재한다.

2)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유래 : 성 어거스틴의 사상 속에 있던 개념을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 강조

   장점 : 1. 제도적 교회의 활동을 신성화시키는 것을 방지

          2. 교회의 제도적 부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용기를 갖도록 도움을 준다.

   단점 : 1. 그 구별의 근원이 성서적인 것이라기보다 플라톤적이다.

          2. 신약성서 속의 교회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역사적 실체였다.

          3. 보이지 않는 교회란 세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3)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 사건인가 제도인가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건물이 아니다.(김명용)

       제도로서의 교회 개념의 강조 : 전통적으로 카톨릭 교회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의 강조 : 호켄다이크(J.C. Hoekendijk - 교회는 고정된

         장소가 없고 나그네로 존재한다) 큉(H. Küng - 교회는 제도가 아니고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는 성령의 피조물)

       그러나, 교회는 성령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제도성을 갖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회는 성령의 사건인 동시에 제도이다.”

  4) 교회와 국가

    교회와 세상적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

    전통적 견해 - 루터의 이중왕국과 개혁교회의 그리스도의 통치

  대답의 추구 : 두 나라는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으로써 서로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더라도

    다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다. 양자는 상호배제적이 아니라 서로를

    포함한다.

  5) 기타 문제들 : 푈만의 제기에 따라 교회의 민주화, 교회와 교회들, 교회와 직무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지만, 해당 부분에서 다루도록 한다.   


2. 교회의 정의


  1. 교회란 무엇인가 - 성도들의 공동체.

        루터 : 교회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곧 성도들의 모임으로 지칭.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 교회는 그 속에서 복음이 순수하게 설교되며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성도의 사귐.


  2. 교회의 정의에 대한 고찰


   1). 성서적 정의

     구약성서 : 카할 להק, (부르다), 에다 הדע (지정된 장소에 모인다) 구약에서의 교회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공동체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회중의 한 가운데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를 통하여 거룩하여진다.

     신약성서 : 에클레시아 εκκλησια, 쉬나고게 συναγωγη. 쉬나고게라는 말은 “오다” 또는 “함께 모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가지며, 유대인들의 종교적 회합, 또는 그들이 공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건물을 지칭했다. 이에 반해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약의 교회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70인경에서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하는데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용어는 기본적으로 “모임”, “집회”라는 말로 사용되곤 하였다.(신 9:10, 왕상 8:65)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혹은 “그리스도의”라는 말과 결합되어서 사용되곤 했는데 그 종합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다.

  “스스로 모였거나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모여진 하나님의 백성”

즉 그리스도인의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됨으로써 하나님 자신에 의해 형성된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의 의미는

  1. 어떤 장소에 모인 일단의 신자들, 곧 지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 (행 5: 11. 11: 26, 고전 11: 18, 14: 19, 28, 35)

  2. 어떤 경우에는 어떤 개인의 집에서 모인 가정교회를 지칭

  3. 일단의 교회들, 그리고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에 있는 교회들을 지칭

  4. 그리스도를 외적으로 고백하며, 임명된 직원들의 지도를 받아 예배를 위해 조직된 자들로 구성된, 전세계에 걸쳐 형성되어 있는 전체로서의 몸을 지칭(고전 10: 32, 11:22, 12:28) 특히 에베소서에서는 영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엡4:11~16)을 강조하고 있다.

  5. 이 단어의 가장 포괄적 의미로서 천상과 지상에 있는 모든 신자들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몸을 가리킨다. 이 몸 안에서 신자들은 구주이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이러한 용례는 특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강조하고 있다.(엡 1:22, 3:10, 21; 5:23-25, 27, 32; 골 1: 18, 24)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Church, Kirche)의 의미 : 이 말은 직접적으로 에클레시아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주께 속했다”라는 의미를 가진 “퀴리아케”에서 유래. 즉 교회라는 말은 주님께 속한 택함받은 성도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기타 신약성서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표현들 : 신약성서는 비유적 표현으로 교회를

1. 그리스도의 몸(엡 1: 23, 골 1:18)

2. 성령의 전, 하나님의 전(고전 3: 16, 벧전 2: 5)

3. 위에 있는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갈 4: 26, 히 12:22, 계 21:2)

4. 진리와 기둥의 터(딤전 3: 15)

라고 설명


성경적인 교회론의 의미를 요약해 본다면

① 교회의 기원과 생존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교회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르시고 모으신다.

② 교회는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백성 중에서 불러모아졌다.

③ 신약성서에서 교회는 이미 도래했지만,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결부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은사를 가지고 살며, 영광 중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④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교회는 미래를 가지고 있고,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와 영원한 연합의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영과 말씀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신다.

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성령을 통한 교제이며 여기에서부터 성도들 상호간의 교제가 비롯된다.

⑥ 교회 안에서의 모든 직무와 봉사는 교회의 구축과 성장을 위하고,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⑦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는 교회의 소명, 즉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세상과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증거하는데 사용된다.


  2) 교회론의 발전과정

   1. 종교개혁 시대 이전

    1) 초대교회 :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이 말의 밑바탕에는 초대교회는 모범적, 이상적 교회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 때의 모습은 관료화, 제도화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떡을 떼며, 교재하며, 재산을 나누고, 말씀선포와 더불어 구제에 힘썼던 교회이다. 여기에는 말씀과 성례전, 구제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모습은 초대교회 역시 역동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교부시대 :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은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소유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즉 성도의 무리로 생각했다. 2세기 후반 이후 이단들이 등장함에 따라 보편교회의 특징정리 필요성 대두. 따라서 교회의 외적인 표지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집중.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단종파들과 싸우면서 교회의 감독제도를 강조하기 시작 (키프리안 :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감독들이 감독단이라고 하는 하나의 단을 구성하면서 이것이 교회의 통일을 이루는 모체가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의 통일은 감독들의 통일에 기초를 두었으며, 감독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교회의 교제에 참여할 수 없었다.(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 교회의 직제를 감독, 장로, 집사, 세가지로 분류하면서 교회의 최고직책에 있는 사람들, 즉 감독들은 사도권을 승계한 사람이라고 주장)

어거스틴 : 교회를 택함받은 자들의 단체, 즉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참된 사랑이라는 성품을 갖춘 성도의 무리(communio sanctorum)으로 생각. 그러나 동시에 키프리안적인 교회관의 특징을 받아들였으며, 참된 교회는 보편교회로서, 사도적 권위가 감독에 의해 계승됨을 확인. 그는 교회를 계급제도로 형성된 구원의 기관이라고 이해했다. 교회는 거룩한 은총의 보고이며, 성례를 통해 이 은총을 나누어주지만 현실에 있어서 이 교회 안에는 선한 회원들과 악한 회원들이 섞여 있다.

    3) 중세시대 : 교황권이 절대에 이르면서, 부패가 출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이며, 로마의 감독 교회가 곧 지상왕국이라는 사상의 발전과 병행하여 이루어졌다. 점차적으로 세속권력화.

    2. 종교개혁기 : 인간들이 만들어간 제도에 파묻혀 교회의 원래적 의미를 상실한데 대해 종교개혁이 취한 운동은 말씀에 기반을 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이 가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푈만을 따라서)

      1. 교회와 국가, 교회의 권위와 세속의 권위는 구분되어야 한다.

         양자는 혼합될 수 없다.

      2. 참 교회의 표지에는 두가지가 있을 뿐이다. 곧 복음의 순수한 선포와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 교회의 전통이나 지배체제적 구조나 사도계승등은 교회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교회의 표지가 될 수 없다.

      3. 본래 교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조직체나 기구가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적 사귐, 혹은 교통이다. 이 사귐은 제도적 기관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정신적인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적 교회는 “성도들과 참으로 신앙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제도교회 내지 교직기구로서의 교회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제도교회 안에 있으며 제도교회에 의하여 형성된다.

     4. 교황은 물론 공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교황과 공회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삶에 대한 궁극적 판단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들의 궁극적 판단자이다. 5. 교회는 베드로로부터 시작하는 사도계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교직기구 내지 법적 제도가 아니라 “성도의 사귐” 내지 성도의 공동체이다. 6. 교회의 질서와 조직은 인간적인 법에 속한 것이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신적인 법에 속하지 않는다. 7. 교직은 봉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직자의 영적 직분은 지배체제에 있지 않고 봉사에 있다. 교직자는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이다. 8. 주교와 사제 사이에는 하등의 계급적 구별이 없으며 주교직은 단 하나의 교회가 가진 직제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교회는 교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법적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황을 포함한 모든 교직자들과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평등한 지체들이다. 교회안에 있는 사람은 지위여하를 떠나서 동등한 지체이고 머리는 단 하나이다. 교황이나 주교가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다. 모든 지체의 직분은 섬김에 있다. 단 한분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

    3. 개신교 정통주의(크벤슈테트) :

       1. 대표적 교회 혹은 교사들의 모임(ecclesia repraesentativa s. coetus doctorum)교직자들, 교사들, 신학자들로 대변되는 교회)

       2. 모든 자들 (ecclesia synthetica) 가르치는 자들과 듣는 자들, 교직자와 평신도의 종합체로서의 교회) 이것은 다시 다음과 같은 세부항목으로 나누어진다.

         1) 보이지 않는 교회, 참으로 신앙하고 거룩한 자들의 친교, 본래적인 의미의 교회(ecclesia invisibilis s. coetus vere credentium et sanctorum)

         그 아래에 다음과 같은 세부사항이 있다.

            1. 전투하는 교회, 세상적 삶 속의 교회(ecclesia militans)

              -  보편적 혹은 세계의 교회,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 있는

                   교회(ecclesia universalis)

              - 부분적 교회,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교회,

                   지역교회(ecclesia particularis)

            2. 승리하는 교회, 영원한 생명 속에 있는 교회(ecclesia triumphans)

          2) 보이는 교회, 부름받은 자들의 친교(ecclesia visibilis s. coetus vocatorum), 여기에는 위선자들과 악인들도 섞여 있다.

   여기에서 전투하는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질서들, 혹은 신분들이 있는데 이는 상이한 방법으로 교회에 봉사한다.

              a) ordo ecclesiasticus(교회적 신분, 신학자들)

              b) ordo politicus(정치적 신분)

              c) ordo oeconomicus(경영적 신분)


     4. 계몽주의 이후의 시기

경건주의는 부분적으로 교회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참된 교회는 교회속의 작은 교회로서 회중적이고 소종파적 특징을 띤다. 경건주의가 취한 교회비판적 노선은 계몽주의에서 강화되었다. 계몽주의는 교회신앙을 이성적 신앙에 이르기 위해 뛰어넘어야 할 전단계로 파악했다.

    계몽주의에 의하면 교회의 신앙은 이성의 신앙으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 참 신앙은 교리에 묶인 교회의 신앙이 아니라, 자율성을 지닌 인가의 신앙이다. 교회의 타율적 권위를 추방하고 자율성을 가진 인간의 이성이 신앙이다. 교회의 타율적 권위를 추방하고 자율적인 인간의 이성과 양심이 권위를 가져야 한다. 땅위에 있는 교회는 기독교 종교를 보호하고 장려해 나가기 위해서 사람들이 세운 결사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의 단체처럼 국가의 권위 아래 있으며, 교회의 지역주의와 국가교회 제도가 타당성을 갖게 된다.

계몽주의가 가진 합리주의는 위와 같은 사고하에 신앙의 일에 무관심한 반응을 보임과 함께, 교회를 위하여 열성을 내는 일을 비판하면서 교회를 인간 사회와 같은 단체로 이해.

슐라이어마허 : 교회는 본질적으로 기독교 공동체 곧 동일한 정신으로 고무된 신자들의 단체. - 유형교회와 무형교회와 같은 구분을 말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찾음 : 하나님의 성령이 신자들의 회중에 침투해 들어올 수록 교회는 분열이 적어질 것이며, 신자들은 자신들의 중요성을 잊게 될 것. 교회는 “거듭 태어난 개인들이 질서있는 상호간의 활동과 협동을 위하여 모임으로써” 형성된다.

계몽주의 시기에는 한편으로 제도적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신약성서의 공동체가 성령을 받은 예수의 신봉자들의 모임에 불과했으며, 단지 카리스마를 지닌 질서를 지니고 있었을 뿐이라는 입장도 있었다.

리츨(A. Ritchl) - 교회는 정신적, 윤리적 종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활동이 지속되는 장소, 법적 질서와 권위를 가진 기관이 아니다. 법적 질서와 권위를 가진 교회의 형성은 교회의 참모습에 어긋나며, 가시적 교회의 뒤에는 불가시적 교회,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계몽주의가 가진 이와같은 사고는 신정통주의에서도 계승된다.

바르트(K. Barth) - 바르멘 신학선언에서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현재적으로 활동하는 형제들의 공동체”(Gemeinde von Brüdern)로 이해하면서 교회의 제도주의와 전통주의를 반대하고 교회의 영적, 카리스마적 성격과 사건의 성격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있는”(ist)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매일 새롭게 일어난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교회의 정의는 어떻게 내려야 할 것인가

1. 우선 방법론적으로 성서적 전통, 교회사적 전통, 현대의 질문을 종합적으로 적용. 창조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

2. 교회사적 전통을 통해 살펴본 대답 : 우리는 교회는 제도인가 사건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사건인 동시에 제도라고 하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3. 명칭을 중심으로 볼 때의 교회의 정의


   1)  교회론을 정의하는 명칭들

     1. 에클레시아 : 위에서 살펴본 명칭.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예루살렘에 모인 백성들은 종말론적 공동체의 삶을 영위하며(행 2: 42~47), 부활의 빛 속에서 예수의 사건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인식한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선택하신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로 이해하며,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하나님에 의해 뽑힌 사람들(마 24: 24, 31, 막 13:20, 27)이며, 거룩한 자들(행 9:13)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에클레시아” 혹은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교회라는 말 Church, Kirche는 비잔틴의 민속어 kyriake에서 유래하며 “주님께 속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님께 속한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카할”은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공동체를 뜻한다. 역대기에서 카할은 “유대교 제의 공동체의 모임”을 의미하며, 문학서에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 공동체”를 뜻한다.

이렇게 볼 때

① “교회”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계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부여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예수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고 그들은 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② 교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불리움을 받아 나온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는 일에 힘써야 하며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성도들이 모이지 않으면 그들의 신앙은 사적, 개인적인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③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의 공동체인 동시에 이 세상안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동시에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말할 수 있고 그를 보여줄 수 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의 구별과 세상안으로의 파송의 긴장관계에 있다. 교회는 세상안에 실존하는 동시에 하나님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안에서 세상의 풍조와 삶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법을 따른다.

④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체가 된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불리움을 받은 공동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주님은 인간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교회의 시작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다. 교회는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결사가 아니며, 개인의 결단보다 하나님의 결단과 하나님의 부르심이 개인보다 앞선다.

따라서 교회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Huber를 인용하여 김균진 80)

1. 단순한 제도적 기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사귐(communio sanctorum)

2.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세우신 것(Siftung Gottes),

즉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con-vocatio Dei)인 동시에 신도들의 모임(congregatio fidelium)이며, 오직 하나님의 기관(institutio Dei)인 동시에 믿는 사람들의 모임(communicatio sanctorum)

⑤ 에클레시아는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었다. 즉 교회는 단순히 기독교를 자기의 종교로 가진 “종교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묵시사상가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 혹은 공동체이다. 즉 종말에 올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것을 앞당겨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⑥ 에클레시아는 모여있는 공동체를 뜻하는 동시에 모임의 사건 혹은 과정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에 지어져서 변화하지 않고 존속하는 기관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며 다시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과정에 있다. 교회의 존재는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속에 있는 존재이다.

⑦ 에베소서에 등장하는 에클레시아의 개념은 에클레시아의 총체적 개념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교회, 즉 에클레시아는 각 개교회로 나타남에 있어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에클레시아인 동시에 다른 교회들과 함께 한 교회를 형성한다. 그것은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유기체적 관계 속에서 하나의 몸을 형성한다.


     2) 하나님의 백성

히 4:9, 11: 25, 벧전 2:10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개념

백성(라오스)라는 말로 표상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땅과 하늘과 모든 민족의 주가 되신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소유이며, 그의 종이요 아들이요 신부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혈통이 아니라 계약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계약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실하심과 자비를 통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의미는

① 하나님의 백성, 즉 새 이스라엘은 자연적 혈통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성된다. 즉, 인종적 차별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지역적 분리는 철폐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새가족이다.

②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인이 교회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교회는 경건한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사회적 단체나 결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부르심으로써 형성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따라서 교회는 개인화될 수 없다. 개인들의 합의하에 교회가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교회사 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부르심이 먼저 있고, 개인의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결단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③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부르심에 응답한 개인들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이러한 사람들 없이도 설 수 있는 초월적 실체가 아니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실체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귐이다. 교회는 결코 성도들 위에 군림할 수 없다.(큉)

④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과 연속성을 가지며 이스라엘 신앙 속에 숨어 있는 메시아적 희망과 기다림을 계승한다. 구약 성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희망과 기다림 속에서 역사를 살아가며, 그들은 환상의 세계속에 살지 않고 역사의 세계속에서 구체적인 조건들과 문제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현실적 존재이며, 그것은 모든 제약들과 문제들 가운데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그것은 탈역사적, 역사회피적 시각을 갖지 않고 역사의 모든 상황들과 제약들과 문제들을 직시하고 이것들을 면화시키고자 노력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미래지향적이다. “교회의 존재규정은 공간성에 있지 않고 미래지향성에 있다.” 빌 3: 20, 히 13: 14

⑤ 교회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인 사람들(simul iustus et peccator)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죄악에 빠질 수도 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선택된 사람들의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할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이다.

⑥ 교회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예언자, 제사장, 왕의 세 직분을 수행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예언자적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 즉 구원의 복음을 선호하야 하며, 회개를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교회는 섬김과 자기희생으로 섬김의 백성들이 되어야 한다.

⑦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죄인들의 교회, 박해받는 교회여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종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

⑧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단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하여 땅 위의 모든 민족들과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이었으며, 그 존재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의 구원에 있다.


3)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 백성” 개념이 교회의 시간적 차원을 강조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은 교회의 공간적 차원을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공간성을 나타낸다. 이 개념은 주로 사도바울에 의해 사용된다.(고전12: 27, 엡 1:23, 4:!2, 16, 5:30  골 1: 18, 24)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교회는 지교회인 동시에 세계교회를 의미한다. 고전 10:16~17, 12: 12~21에서 말하는 교회는 고린도지방의 한 특정 교회, 즉 지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데, 지교회 역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 반면에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교회는 세계교회를 의미한다. 이것은 세계교회를 의미한다.

②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통일성은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의미한다.

③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은 교회가 삶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 12:26

④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의 한 몸과 통일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들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롬 12: 4~6

⑤ 모든 교인들과 교회들의 평등을 의미한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섬김을 위한 기능을 갖는다. 교회 안에는 계급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권주의적 오해는 극복되며, 교회 안에서 이 사회와 세상의 모든 차이는 무시된다. 교회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장벽을 넘어서며 모든 교인들은 자유로운 신앙의 결단을 통하여 한 몸에 속한 지체가 되며 한 몸을 이룬다. 교회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는 “가장 작은 사람들”을 자기의 형제로서 자기와 동일시하며, 모든 교인은 “가장 작은 형제들”을 섬겨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는 이상적 사회의 선취이다.

⑥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된 관계를 의미한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의 삶의 현실 속에 그리스도의 삶의 현실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삶은 교회의 삶으로 내화되어야 한다. - 본회퍼 : 공동체로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nde existierend) 고전 6: 15.

⑦ 그리스도는 교회안에 계실 뿐 아니라 교회로서 실존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 형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분열하고 추한 모습을 보이면, 그리스도께서도 지상에서 추한 실존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바르트 :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이다.(Jesus Christus ist Gemeinde) 또한 교회는 사회 속에 있으면서 사회에 동화될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사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뿐 아니라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삶과 존재를 통하여 앞당겨 일으키셨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이다”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현실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이 되어야 하고, 이 사회와 세계안에 세워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안에 실존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한다.

⑧ 교회의 배타적 소속성과 구분성을 내포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말은 머리가 몸에 속하듯이 몸이 머리에 속함을 말한다. 교회는 일종의 종교적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었고 그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주님으로 갖는다. 즉 다른 주를 갖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 교회에 대한 모든 진술은 사실상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진술은 교회에 대한 진술을 의미한다.

⑨ 신체적인 실존,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포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주적 형태를 가지며, 모든 피조물을 포괄한다.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성장은 단순히 양의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모든 피조물 속에 세우는데 있다.


4) 성령의 전

교회는 단순한 인간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는 곳이다. 즉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으로 현존하신다. 그리스도는 성령 가운데에서, 성령을 통하여, 성령과 함께 교회 안에 현존한다. 성령론적 교회론의 특징은 제도교회 내지 교직기구로서의 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교회를 성령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사귐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이 영적 현존은 예수와 함께 시작한다.

신약성서는 교회를 성령이 그 속에 거하는 “성령의 전” 혹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영을 통하여 그의 영과 함께 지은 것이다.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의 의미

① 교회는 이스라엘 역사를 계승한다는 것을 의미. 이스라엘 민족이 손으로 만든 예루살렘 성전이 교회를 통하여 폐기되는 동시에 성취된다.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으로 거듭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가 되며, 그것은 유대인이란 특정 민족과 인종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인종을 포괄한다. 메시야의 미래에 대한 구약성서의 약속은 이제 교회로 옮겨진다.

② 예수의 삶은 성령과 함께 성령 가운데에서 시작하며, 성령 가운데에서 끝난다. 그리고 성령은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한 예수의 삶을 통하여 그의 구체적 내용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 아들의 영이고, 주의 영이다. 그리고 이 성령의 전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였던 일을 계속하는 곳이어야 한다. 예수 안에서 활동하는 성령은 “부활의 능력”이며 “새 창조의 능력”이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삶의 힘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창조의 능력을 가진 성령의 전인 교회는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한다.

③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다. 교회를 성령의 전으로 생각할 때 교회를 사도계승을 통하여 성직자들에게 전유된 기관으로 보는 교권주의적 입장은 거부된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로부터, 그들과 함께 교회를 짓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자기를 주님께 맡겨야 하며 성령의 전을 건축하는 일에 봉사해야 한다.

④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는 은사 공동체이다. 성도들은 자신의 은사에 따라 각자가 행하는 봉사를 통해 삶을 영위한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각자의 은사에 따른 봉사를 통하여 유지되고 그의 삶을 영위한다.

  - 교회는 특정한 사람들이 위에 있고 다른 사람들이 아래에 있으며 명령과 복종의 관계에 있는 집단이 아니라 각자가 그 분량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공동체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서로를 섬겨야 한다.

  - 교회의 통일성과 질서는 성직자, 장로, 권사, 집사, 평신도의 계급체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받은 은사에 따라 교회를 섬김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은사 공동체의 질서는 모든 교인들이 각자의 차이와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면서 자기의 은사에 따라 사랑과 헌신과 겸손 가운데에서 교회와 이웃,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섬기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 통일성과 질서는 명령과 복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그의 다양성 속에서 서로 섬기고 자기를 헌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통일성과 질서는 명령과 복종에 있지 않고, 섬김에 있으며, 섬김 속에서 각자의 다양성이 인정된다.

⑤ 교회는 성령의 전이지만, 성령은 교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은 교회안에 있고 교회를 통하여 활동하지만 교회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존속하신다.

  - 성령은 교회에 대하 자유롭다. 성령이 언제 활동하는가의 문제는 성령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교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교회는 언제나 성령의 오심과 활동을 기다리며 그것을 간구할 수 밖에 없다.(When)

  - 성령은 그의 전인 교회에 대해 자유롭다. 그러므로 성령의 활동영역은 성령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교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Where)

  - 성령이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는 교회가 결정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성령은 그 자신이 원하는 길과 방법으로 활동한다. 성령은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활동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결정이나 법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 때움에 일어난다. 교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은 교회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활동과 가능성에 대해 언제나 개방적이어야 한다.

⑧ 성령께서 행하시는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 벨커의 하나님의 영, 몰트만의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

⑨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는 성령안에서 행하시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


4.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한스 큉 :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전조이다.”

1)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회를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에 의해 불리워져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갈 종말론적 선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를 역사적 교회와 완전히 일치시키려는 로마 카톨릭 교회론과 종말론을 비판하면서도, 지나치게 교회를 세상화, 사회화하여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분리시키려는 경향을 비판해야 한다. 역사적, 경험적 교회는 완전히 순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전인 교회에서 선취되어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이같은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요, 전조이다. 즉 교회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종말론적 완성의 도상에 있는 교회이다.

2)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지어 정의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은 시각을 제공해준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즉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제도, 조직체와 직접적으로 일치시켜서는 안된다. 교회는 제도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에 중점을 둔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은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개념보다 더 넓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개념을 동시에 강조한다. 교회의 삶은 모여있는 공동체만의 삶이 아니라 흩어져서 살아가는 삶 전체를 포괄한다. 그리고 이 전체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도록 지향해야 한다. 동시에 교회의 지향점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목적이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교회의 목적을 다루면서 상세히 논하기로 한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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