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신학
<그리스도교 사상사>
교부시대, c.100-451
1. 그리스도교
팔리스타인(유대지역 : 예루살렘)에 정착- 확산→ 주변지역 -정착→지중해 동부 지역과 로마시(서방)-로마 교회의 세력 성장 →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그리스도교 지도권 다툼 : 후에 있을 동/서방 교회의 분열 전조 → *신학적인 논의의 중심지들이 생김
2. 신학적인 논의의 중심지 중 특별히 중요한 세 곳
: 앞의 두 곳은 그리스어권, 세 번째 지역은 라틴어권
1) 알렉산드리아(오늘날 이집트)
① 그리스도교 신학 교육의 중심지
② 독특한 스타일의 신학- 플라톤적인 전통
③ 그리스도론과 성서해석 : ‘알렉산드리아적’ 접근방식
→ 지역적 : 나일강- 교역, 운수 입지 조건
㉮ 다양한 철학, 종교적 조류들의 집결 중심지
㉯ 모든 종류의 지식 추구- 무비판적 수용
2) 안디옥
① 바울의 선교 여행시 거쳐간 지역
② 초대교회사의 여러 시점마다 의미 있는 역할 지역
③ (안디옥) 그리스도교 사상의 주요 중심지
④ ‘안디옥 학파’ - 알렉산드리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론과 성서해석에 있어서 특정한 신학적 스타일
⑤ ‘캅파도키아 교부들’ - 중요한 신학적 위치 : 삼위일체 교리
3) 북서부 아프리카 카르타고(오늘날의 알제리)
① 지중해의 주요 도시, 한때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로마와 자웅을 겨루었던 카르타고 터전
② 그리스도교가 확장되어 가던 시기에 로마의 식민지였다.
③ 주요 저술가 : 테르툴리아누스, 카르타고의 키트리아누스,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등
3. 교부시대의 개략
현재 그리스도교의 모든 주류들- 성공회, 동방 정교, 루터교, 개혁교, 로마 카톨릭 교 등- 은 교부시대를 그리스도교 교리 발전의 결정적인 지표로 삼고 있다. 이 만큼 교부시대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교부시대는 몇 가지 문제를 밝히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1) 1세기-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밝히는 것- 일련의 교리와 실제적인 문제
*이방인이 할례를 받을 것인가?
*구약성서를 어떻게 정확하게 해석할 것인가? 등의 문제
2) 2세기-변증론
이 시대의 특징은 국가에 의하여 박해를 받았던 것과 이것이 교회의 생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반대자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논리적으로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변증론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4세기 이후 - 신학 논쟁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으로 인하여 신학논쟁은 가능하게 되었고, 신학은 교회의 비밀 모임이라는 숨겨진 세계에서 나오게 되었고, 로마 제국을 통하여 공식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교리적 논쟁은 점점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중대사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이 시기에 교회 내에서 나오는 신학적 합의에 상당한 발전을 보았고, 전 기독교의 신속에 간직되게 되었다.
4. 중요한 신학적 발전들
1) 신약 정경의 범위 확립
2) 에큐메니칼 신조들의 확립
3)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
=> 325년경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의 성질”(homoousios)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5. 학파들
1) 알렉산드리아 학파 :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신성을 “성육신 되신 말씀”으로 해석. 이 학파의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성경 본문은 요1:24의 “말씀이 육신이 되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이다.
2) 안디옥 학파 : 그에 상응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였고, 그의 도덕적인 모범에 특별히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6. 논쟁들
1) 4세기의 아리우스 논쟁 : 아리우스(250-336)는 그리스도의 성서적 칭호가 아무리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존재해 있음을 지적한다고 해도 단지 의례적인 칭호라고 주장했다. 비록 그리스도가 피조된 것 중 가장 뛰어나도 결국 다른 피조된 것 중 하나일 뿐이다.
2) 아폴리나리우스의 논쟁 : 아폴리나리우스(310-390)는 아리우스의 논쟁을 맹렬히 비난했는데 그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인간으로서만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경우 인간의 영이 신적인 로고스로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성을 소유하지 못한 것이 된다.
7. 공의회
1) 니케아 공의회(325) :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소집된 최초의 “세계 교회 공의회”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가 아버지와 homoousios(“존재에 있어 하나” 또는 “동체”)임을 단언함으로써 아리우스 논쟁을 종결지었고,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정렬적으로 옹호함으로써 아리우스의 입장을 거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2) 칼케돈 공의회(451) : 니케아에서 결정된 것을 확인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인성을 넘어 그 후에 분출하게 되는 새로운 논쟁들에 대한 응답이었다.
8. 중요교리
1) 삼위일체의 교리
▶ 교리의 기본적인 특성 :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모두 신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부의 동등한 지위 - 니케아 공의회
* 성령의 신성 - 아타나시우스,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의 저술
▶ 삼위일체 이해의 두 가지 접근 방식
- 동방교회(그리스, 러시아 정교회의 입장, 터키지역 -현재)
: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의 그레고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 서방교회(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
2) 교회의 교리(서방교회)
▶ 도나투스주의자(아프리카의 토착 그리스도인)
- 교회는 성도의 거룩한 몸으로 죄인이 거할 장소가 없다.
- 303(디어클레티아누스)부터 313(콘스탄틴)때까지의 박해동안에 배교자들의 교회 복귀를반대
- 성례전의 효율성을 다루었던 최초의 논쟁
▶ 아우구스티누스
- 교회는 성도와 죄인들이 섞여있는 몸이다. (도나투스주의-반대)
- 사람에 의한 교회의 거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례전의 구별이 개인이 무가치함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없다.
3) 은총(은혜)의 교리(510년 ~ 10년 동안)
▶펠라기우스 :
- 자율종교, 인간의 노력
- 구원의 원천 : 인간 내면, 하나님의 의무사항
십계명, 그리스도의 삶=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사항
- 공적에 의한 구원
- 인간본성의 이해 : 자율적, 자아 충족적
-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제시에 대해서 인간 스스로 충족시켜야 함, 정당한 보상
- 카르타고 공의회(418) : 정죄당함, 중세, 종교 개혁기에 다시 논쟁됨
▶ 아우구스티누스
- 하나님의 은총
- 창3장 : 인간의 타락성에 근거, 죄의 본성은 인간의 내재적인 요서(원죄)
*모든 사람이 죄인-구원이 모두에게 필요함을 주장
*마약중독자의 이야기- 인간의 한계(하나님이 도움)
- 하나님의 선물
- 은총에 의한 구원
- 인간본성의 이해 : 타락, 무능력, 나약함
- 구원 : 하나님을 의존, 공로 없이 주어지는 선물, 예정된 사실
-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인정됨
9. 교부시대 중요 신학자들
이 름
시 기
사 역 지
주 요 사 항
이그나시우스
117년
시리아의 안디옥
-영지주의적 이단을 반대
폴리캅
약69년- 160년
서머나
-마르시온을 “사탄의 큰 아들”이라고 함
순교자 저스틴
약100년-165년
팔레스틴, 에베소, 로마
-로고스 기독론 개념을 발견
이레니우스
2세기말
서머나, 가울
-영지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
-전천년설 주장 -리욘지방의 감독
클레멘트
약150년 - 5년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로고스를 강조
-성경을 알레고리로 접근
터툴리안
약 160년 -220년
카르타고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기초작업을 함
오리겐
185년-254년
알렉산드리아, 케사레아
-성경의 알레고리 해석법의 우월성을 조리있게 설명
- 극도의 금욕주의자
이 름
시 기
사 역 지
주 요 사 항
키프리안
200년-258년
카르타고
-주교의 권위를 강조
-박해로 신앙이 흔들리는 자들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
아타나시우스
약 296년-373년
알렉산드리아
-삼위일체 정통교리의 가장 적극적인 수호자
바실
약 329년- 379년
가바도기아
-금욕적 삶
-아리안 주의를 반대함
나사의
그레고리
약330년-394년
가바도기아
-알레고리한 성경해석 -아리안주의를 반대
-삼위일체에서 본질과 위격의 구분을 최초로 강조
존 크리소스톰
약 374-407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설교에는 윤리적 적용을 강조
-수도원 생활을 더 흠모함
제롬
약 345 - 402
로마, 안디옥, 베들레헴
-금욕주의를 향하는 많은 로마 여성들을 격려
-그의 라틴어 번역본이 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공인된 성경이 됨
어거스틴
354-430년
아프리카 북부
-청년기에 마니교에 심취 -온건한 금욕주의를 추구
-최초의 기독교 역사철학을 저술
*중세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 후기, 근대...부분은 McGrath의 Christian Theology참조*
<그리스도교 신학>
Ⅰ. The Doctrine of God(신론)
1. Is God Male? (하나님은 남성인가?)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에 대해 남성언어로 사용
헬라어 theos - 남성명사
성서에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된 대부분의 유비들(아버지, 왕, 목자...) - 남성
▶ 이것은 하나님이 남성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속성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왜냐하면 성은 피조 질서의 속성이고, 피조 질서의 속성이 창조자 하나님 안에 있는 안성, 여성 같은 양극성에 직접 상응한다고는 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성이나 성적 특성이 중요한 문제라는 개념을 승인하기를 거부한다.
2. A Personal God(인격적 하나님)
세대에서 세대로 내려오면서, 신학자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 모두 한결같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하나님을 인격적 용어로 말해 왔다.
바울의 주요 구원론적 이미지의 하나인 ‘화해’는 분명 인간의 인격적 관계를 모델로 한 것이다.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사이의 관계가 신앙을 통해 변화되는 것이, 두 인격 사이의 화해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에 대한 난점이 나타남
난 점
완 화
1. 하나님이 한 인간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축소
폴 틸리히-‘위치선정의 어려움’을 이야기
어떤 구체적인 장소에 있다는 것을 암시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말하는 것은 유비적인 것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는 신의 능력과 의지
2.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일
세 인격들 - 한 인격
‘인격’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현저하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지적
God is three persons (삼위)
God is a person (인격)
․‘인격’의 정의
일상적 영어에서 “person"- 개별적 인간을 의미
--라틴어 persona(mask, 가면)에서 온 것이다./ 교재 person의 의미발전 참고
*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이 개념의 초기 발전은 Tertullian에서 시작
Tertullian
Bocethius(6세기 초반)
초기 그리스도인 저술가들
한 인격은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
인격은 합리적 본성의 개별적 실체
인격- 인간의 개별성의 표현이다.(말과 행동을 통해 보이는)
그러므로 인격적 하나님에 의해 표현되는 기본적 개념은 우리가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자로서의 하나님을 나타냄
‘비인격적 하나님’이란- 멀리 있고 초연해 있는 하나님, 우리를 다룬다 해도 인간의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을 일괄적으로 다루시는 하나님을 암시.
<참고>
♠ 대화적 인격주의
유대 저술가 Martin Buber 『I and Thou』
I - Thou
I - It
내 용
부버의 핵심 개념이며 인격적
두 능동적인 주체, 즉 두 ‘인격들’사이에 존재
인간의 인격적 관계가 ‘나와 너’의 관계의 본질적 특징을 예시한다고 제시
상호 능동적인 두 주체의 만남
비인격적 주체(능동적)와 객체(비능동적)의 관계
수동적 객체를 추구하고, 탐구하는 능동적 주체로 생각될 수 있다.
지 식
직접적이고 즉시 일어나고 특정한 내용이 없다.
간접적이고 객체를 통해 중재
특정한 내용을 갖는다.
물리적으로 잘 묘사할 수 있다.
konwing someone
- 내용이 없다. 표현될 수 없다.
knowing about something
-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인격적 상호 작용의 진정한 초점은 바로 ‘관계’
즉 진정한 내용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부버의 용어로, 그것은 “특정한 ‘내용’ 이 아니라 ”임재‘(Presence), 능력으로서의 임재이다.“
=> 이러한 접근의 신학적 의미는?
부버의 철학은 한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을 이해하고 검토하는데 어떠한 도움이 되는가?
1) 부버는 하나님의 하나의 개념이나 어떤 멋진 개념적 표현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
하나님은 “본래 It 이 될 수 없는 Thou이다”
2) 부버의 접근은 계시의 개념에 가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계시 - 하나님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지게시, 곧 임재 자체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게되지만, 하나님을 알게 되기도 한다.
3) 부버의 “대화적 인격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약점(객체로서의 하나님 개념)을 피해가고 있다.
* Emil Brunner 『Truth as Encounter』(만남으로서의 진리) -변증법적 학파의 저술가
- 하나님을 당신으로서. 능동적 주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
⇒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적 추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되어야 마땅하다.
3. 하나님은 고난 당할 수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고난 당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 세상의 고통 사이에는 접촉점이 즉각 확립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피조 세계의 고통에서 면제되어 있다고는 생각될 수 없다.
*왜 많은 저술가들이 ‘고난받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기를 싫어했을까?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에서 기원했지만, 오늘날의 터키. 이집트 같은 동부 지중해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또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같은 도시에 근거지를 확립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 문화와 그리스 사고 방식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에서 파생된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헬레니즘 환경에서 활동함에 따라. 그리스 사상을 받아들여 통합하였고 기본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적인 복음이 헬레니즘의 프리즘을 통해 굴절됨으로써 왜곡현상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특히 형이상학적 용어의 도입에 특히 관심이 집중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역동적인 셈족의 세계관에 정태적인 그리스 사고 방식이 보태진 것으로 간주했고, 그 결과 복음의 왜곡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전적인 견해 : 하나님의 무감각
완전한 것은 불변하고 자족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완전한 존재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 영향 받고 변화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완전은 매우 정태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만일 하나님이 완전하다면 어떠한 방향이든 변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완전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운동이거나 아니면 완전을 향해 가는 운동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 - “변화란 더 나쁜 쪽을 향하게 마련이다”라고 말했고 이러한 이유에서 신의 존재 개념에서 변화와 고통을 배제했다.
2) 필로 - 「변화하지 않는 하나님 <Quod deus immutabilia sit>」에서 하나님의 무감각성을 강력히 옹호, 하나님이 고통 당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한 성서 말씀들은 비유로 취급되어야 하고, 문자적으로 다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 하나님이 변화한다는 것을 혀용 하는 것은 신의 완전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3) 안셀름 -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상 자비가 넘치는 분이지만 신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 사랑과 자비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순수하게 비유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비가 넘치는 분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자비가 넘치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 토마스 아퀴나스 -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찰할 때 이 접근을 발전시킨다. 하나님이 우리의 슬픔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우리의 불행에 마음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
=>난점 발생 :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었다.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닌가? (‘속성의 교류’의 문제)
*고난 당하는 하나님
‘무감각한 하나님’이라는 개념의 발전에 저항을 일으킨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굴욕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인식. 루터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공유하는 방식을 말할 때 의도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
20c 후반 몰트만-『삽자가에 달린 하나님<The Crucified God, 1974>』은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해석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간주
→ 하나님은 고난 당하고 죽는 모든 사람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리하여 인간의 고난과 죽음을 공유한다. 그럼으로써 인간 역사의 이러한 측면을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편입된다.
Ⅱ. 신정론 : 악의 문제
1. 이레네우스 Irenaeus
이레네우스는 ‘인간은 성숙을 향해 성장하기 위한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창조되었다’고 본다. 하나님을 향한 성장의 가능성은, 선과 악의 경험과의 접촉점을 필요로 한다. 이 전통은 세상을 ‘영혼을 만드는 골짜기’(영국 시인 존 키츠의 말)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악과의 접촉을 영혼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선결 조건으로 간주한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출현한 존 힉크는 이 접근법을 영향력 있고 설득력 있게 변모시킨다. 힉크는 『악과 사랑의 하나님 (Evil and the God of Love)』에서, 인간이 불완전하게 창조되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인격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세계 안에 참여해야 하고 자유로이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개인으로 창조되었다. 선과 악을 진정으로 선택 할 수 없다면, ‘선을 택하라’는 성서의 명령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지식과 의미 있는 인간 발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선과 악이 이 세계 안에 필요하게 된다. 이 논증은 인간의 자유를 적잖게 강조한다. 그럼에도, 이 접근의 한 측면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다. 하나님의 과정 안에서 악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줌으로써 악에서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는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다.
2.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채택된 독특한 접근은 서방의 신학적 전통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4세기 무렵까지, 악과 고난의 존재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상당한 신학적 혼란을 일으켰다. 영지주의는 악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악이란, 물질의 근본적인 악한 본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구원의 모든 목적은 악한 물질적 세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고, 또 인간을 물질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영적 영역으로 옮기는 데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근본적 통찰은, 악이란 인간이 자유를 오용한 직접적 결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이나 악을 선택하는 자유를 주어 창조했다. 슬프게도 인간은 악을 선택했고, 그 결과 세상은 악에 의해 오염되었다. 드러나 이러한 접근은 문제를 진정으로 푼 것이 아니었다. 만일 선택할 악이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악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악이라면, 악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선택 사항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기원을 사탄의 유혹에 두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했다면, 사탄은 어디서 온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탄의 기원을 다른 모든 천사들처럼 본래 선하게 창조된, 타락한 천사라고 본다. 그러나 이 특별한 천사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최고의 권위를 갖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을 세계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비평가들은 질문한다. 선한 천사가 어떻게 그렇게 나쁘게 변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저 천사의 근원적 타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침묵으로 얼버무리는 것같이 보인다.
3. 칼바르트
기존의 악에 대한 접근에 아주 실망한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전능성의 개념은 언제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빛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원리에 근거하여, 바르트는 ’모든 문제에 대한 철저한 재 사고‘의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보다 그리스도론적 접근을 하여 불신앙, 죄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선험적인‘ 전능성의 개념을 거부했다. 하나님의 은총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은, 악에 의해 지배되는 듯이 보이는 세상에서 신자들에게 도덕과 소망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바르트는 악을 무성으로 묘사하는데, 이 ’무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에서 ’원하지 않은 것‘ 안에 그 근거를 갖고 있다. ’무성‘은 하나님의 의지와 모순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nothing 가 아니라, 무로 환원되도록 위협하고 그리하여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위협을 제기 하는 것이다. 바르트에게서 은총의 궁극적 승리는 ’무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그의 비평가들은 ’무성‘의 개념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고, 성서 이야기에 충실해야 할 아주 중요한 시점에서 자의적인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빠지고 말았다고 공격했다.
Ⅲ. 삼위 일체론
1. 삼위일체론의 역사적인 발전 : 그 원형
삼위일체론의 발전은 그리스도론의 발전과 근본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교회가 간하게 주장하면 할수록, 교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삼위일체에 대항 숙고하게 된 출발점은 바로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이다.
이레네우스는 구원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 과정은 성부와 성자. 성령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주장했다. 이레네우스는 ‘구원의 경륜’이라는 술어를 사용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 신학에 관한 독특한 어휘들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삼위일체 신학의 독특한 모형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창조된 질서와 전적으로 동떨어진 신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창조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음을 구원의 경륜은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복합적이다. 이를 분석해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합일’과 ‘구별’의 양면을 계시하고 있다. 본질을 구원의 경륜의 세 국면들을 합일시키는 것이며, 인격은 그 국면들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동방신학은 그 세 인격의 명확히 구별되는 개별성에 대하여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서방의 접근법은 두 가지 경향성을 가진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서방 접근법의 첫 번째 경향은 서방의 신학이, 특히 계시와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단일성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경향은 서방 신학이 세 인격들의 관계를 그들 상호간의 공동 협력의 측면에서 해석한다는 것이다.
2. 삼위 상호 내재성
헬라어 perichresis 는 라틴어 circumincession 나 영어 mutual interpenetration(상호 교통)의 형태로 흔히 발견되는데, 이 용어는 6세기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삼위일체의 세 인격들 상호간에 관계하는 방법을 나타낸다. perichresis의 개념은 세 인격들이 각자의 개체성을 유지하는 한편 각각의 인격이 다른 두 인격의 생명을 공유함을 의미한다.
3. 충당설(Appropration)
삼위양식설을 주장하는 이단자들은, 하나님은 구원의 경륜의 각각 다른 시점에서 다른 ‘존재의 양식’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어느 한 시점에서는 하나님이 성부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다른 시점에서는 성자로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충당설은 삼위일체의 사역이 일체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삼위일체의 모든 인격은 하나님의 모든 외적 행위에 연루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성령은 모두 창조 사역에 참여한 것이며, 따라서 창조사역을 다니 성부 한 분의 사역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의 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구원사의 중대한 순간에 삼위일체의 세 인격 모두가 함께 참여하였음을 주장했다.
삼위 상호 내재설과 충당설을 통하여, 하나님은 ‘존재의 공동체로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연합하며, 상호 교통함을 알 수 있다. 성부와 성자. 성령은 서로 고립되고 분리된 인격이 아니다. 오히려 성부와 성자. 성령은 하나님 안에서의 구별이며, 이 구별은 구원의 경륜 안에서, 그리고 구속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경험 안에서 더욱 명확하게 발견된다 1970년 발표된 칼 라너(Karl Rahner)의 논문 『삼위일체』에서 라너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본질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관해서 이 두 삼위일체는 두 종류의 다른 하나님들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은 동일한 하나님께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본질적‘혹은 ’내재적‘ 삼위일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된 조건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명확하게 설명하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경륜적‘삼위일체는 ’구원의 경륜’. 즉 역사 과정 그 자체 속에서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라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떠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Ⅳ. 성례전
1. 성례전 신학의 발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신비’와 세례와 성찬의 ‘성례전들’이 초기 단계에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성례전 신학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발전들은 3세기와4세기에 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에서 이르어졌으며, 테르툴리아누스,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발전들이 교회의 특정한 지역과 결부되어 있는 요인 중 하나는 이 지역의 교회가 발해를 포함하여 특히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북아프리카 교회는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신자들의 유대와 이 유대를 강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성례전들을 한 전략으로 발전시켰다.
* 테르툴리아누스의 성례전 시학의 발전의 공헌*
1) 헬라어 mysterion의 번역으로서 라틴어 sacramentum의 사용
2) ‘성례전’ sacrament이라는 말의 복수형 사용
3) 성례전과 군대의 맹약 사이의 유사성이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활용함.
성례전 신학은 도나투스논쟁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세상은 다른 실재들을 지시하는 많은 표징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연기는 불의 표징이며, 말들은 그것들이 지시하는 것들의 상징인 것이다. 그렇 지만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간격을 메꾸어 주는 ‘거룩한 상징들’이 또한 존재한다.
성례전 신학의 뒤이은 발전은 상징과 그것이 지시하는 실제가 서로 어떻게 관계하는가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도나투스 논쟁 : 성례전의 효력
이 논쟁의 중요 쟁점은 성례전들은 집전하는 교역자들의 개인적 자격이나 거룩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교리적으로 정통이지만 도덕적으로는 열등한 교역자들은 성례전들을 집전할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이들에 의해 접전된 성례전들은 효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가?
1)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주장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넘겨준 자들’(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에 로마 당국과 협력 함으로써 그 개인적 신뢰성을 훼손하거나 더럽힌 그리스도교 교역자)이 성례전을 집전해 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교역자들에 의해 집전된 세례. 서품, 성 찬은 효력이 없다고 했다. 정통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개인적 행위가 소명에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교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도나투 스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카톨릭 사제나 감독에 의해 세례나 서품을 받은 이들은 도나투스파에 속한 교역자들에 의해 재세례를 받거나 재서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박
교회는 거룩한 자들과 죄인들의 ‘혼합 공동체’라는 자신의 견해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그 의 이러한 입장은 성례전의 효력은 그것을 집전하는 개인의 공로가 아니라, 그것을 제정하 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성례전의효력은 그것을 집전하는 사람의 공로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는 ‘세례’와 ‘세례를 베풀 수 있는 권리’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 장한다. 세례는 이단자나 분파자에 의해 집전되었다 하더라도 효력을 가지고 있지만, 세례 를 베풀 수 있는 권리는 단지 교회 안에만 존재하며,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선택하고 그러한 권위를 부여한 교역자들에게 있다. 그리스도의 성례전을 집전 할 수 있는 권위는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들에게. 사도들과 그 계승자인 감독들에 의해 카톨릭 교회의 교역자들에 게 위임된 것이다.
<미글리오리 조직신학 입문>
Ⅰ. 신학의 과제
오늘날 신학을 하는 모든 이들은 자시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의 교회적인 상황을 자기 비판적으로 잘 인식해야만 한다.... 신앙과 실천은 결코 분리 될 수 없다.... 기독교 신학 혹은 그 문제에 관한 어떤 다른 신학도 특수한 신앙 공동체에서 나오며, 그것과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신학적인 물음은 믿음과 기도와 봉사의 공동체가 영위하는 일반적인 삶에 계속 된 참여를 요구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를 문화와 경험과 특수한 시대와 장소와의 상호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일이다.
신학의 여러 분야들 중에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능력과 현존을 삼위일체론적인 관계 속에서 일관되게 생각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개정된 삼위일체론적 신학과, 창조와 구속과 완성이 상호 관계하고 있다는 이해와, 그리고 실천에로의 지향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기독교 교리의 내용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구성 요소들이다.
1. 신학적인 물음을 묻는 방법
신학적인 방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는 어떤 특별한 신학이 투구되어지는 사회적인 상황이다. 데이비드 트레이시는 오늘날 신학의 다원주의는 신학이 교회와 학교와 사회의 어느 부분에 우선을 두느냐에 따라 부분적으로나마 이해되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트레이시의 분석의 도움으로 우리는 20세기에 세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방법론의 유형, 즉 신학적인 물음의 세 가지 다른 방법들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1) 신학함에 있어서 지배적인 하나의 방법론은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 혹은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다. → 교회에 중점을 둔 신학적 방법론
2) 두 번째로 매우 중요한 신학의 방법은 폴 틸리히의 ‘상관 방법’. 혹은 변증신학이다.→ 학교에 중점을 둔 신학 방법론
3) 신학의 세 번째 방법은 해방신학과 같은 ‘실천적 접근’이다.→ 사회에 중점을 둔 신학방 법론
이러한 신학 방법에서는 실천이 가장 우선이다. 바로 이러한 실천, 즉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자유와 정의를 위한 진정한 투쟁에서 신학의적절한 물음들이 제기된다. 실천이 바판적인 신학적 반성의 출발점이 될 때 그 결과로 우리는 성서를 새로운 방식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을 봉사하는 일에 진정으로 자선과 헌신을 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며, 그것에 대한 반성과, 비판적인 태도로서의 신학이 두 번째 단계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어질 Ep 신학은 기존의 사회와 교회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2. 신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해를 투구하며 물음을 가지는 신앙이다. 또한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보다 대담한 반성을 시도하는 것이다. 신학은 성서에서 증언 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기 위하여 이성적으로 수용되지 않는 전점들을 용납하는 것이다. 신학은 기도와 끊을 수 없는 물음이다.
Ⅱ. 계시의 의미
계시란 문자적으로 전에 감추어 있었던 것에 대하여 베일을 벗기거나 폭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에서의 계시는 전적으로 앎에 대한 여타의 경험과 유비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계시의 의미는 예수라는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성서적 전통 안에서 하나님은 계시의 사건 속에서 조차도 하나의 신비로 계속 남는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거룩한 사랑의 결정적인 계시이다.
계시는 양면적인 과정(객관적인 현상과 주관적인 경험)인 과정 둘 다 중요하며 함께 고려되어져야만 한다. 계시는 신앙인들에게 의하여 증언되고 해석되어진 특별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유롭고 은혜롭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계시는 인간의 능력을 파괴하거나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인간의 상상에 새로운 비젼과 인간 이성에 새로운 방향을 가져다 준다.
1. 미글리오리의 계시에 대한 다섯가지 요약들
1)계시는 하나님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2)계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과 결정적인 방법으로 교통하시는 특별한 사건과 특별한 사람들을 언급한다.
3)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의 개인적인 응답과 의무에 따른 실천을 요구한다.
4)하나님의 계시는 언제나 당황스러운 더 나아가 충격적인 사건이다.
5)계시는 하나님과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새로운 해석적인 초점이 된다.
2. 일반 계시와 특수 계시
기독교 신학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두 가지 통로로 곧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별해 왔다.
1) 일반 계시
- 일반계시는 자연과 인간의 도덕적 의식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우리는 성서의 창조된 질서와 인간의 양심 속에서 계시를 만날 수 있다.
- 하나님의 일반 계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의도된 것이며 모호하게 구원에 대해 이야 기 하고 있다.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알게 함으로 비기독교인 사이에 공통적인 바탕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독교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 일반 계시를 통해서 다른 종교적인 전통의 가르침을 존경하고 마음으로 문을 열도록 격려해야 한다.
- 일반 계시와 특수 계시의 양극단의 중간에는 일반 계시가 도덕과 종교를 위한 넓은 기초를 제공한다는 주장하는데 이들은 성서가 증언한 특수 계시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 제 1 바티칸 공의회 (1870)에서는 특수 계시에 의존함이 없이 인간의 이성 즉, 일반계시만으로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2) 특별 계시
-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룬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서의 증언이다.
- 특별 계시는 일부 사람에게 주어진 것으로 구원에 대한 충분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 기독교인들은 특수 계시를 결정적으로 중요시 한다.
- 단지 보편적으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상징적으로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
-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만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제공하며 그 외의 하나님을 아는 다른 모든 주장들은 거짓이라고 주장
3. 칼빈의 입장에서 본 계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자연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적인 신인식과 보편적으로 심어진 종교성을 말하는데 칼빈은 죄로 인하여 약해져서 불충분하고 혼란스럽고 모호하고 불명료해진 그러한 보편적 신인식을 생각한다.
칼빈은 자연세계 속에서 그리고 보편적인 도덕과 종교적인 인식 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점차적으로 부패하여 악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해 버렸다고 강조한다. 또한 모든 사람들을 책임지게 하는 보편적인 계시가 있지만 죄로 물든 인간의 습관은 이러한 일반적 지식을 우상숭배로 바꾸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모호하고 피상적인 종교성은 단순한 무관심으로 빠지거나 절망으로, 또는 우상 숭배로 빠지기 쉽다는 것을 우려했다.
4. 오늘날의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오늘날의 많은 신학자들은 개방적이고 존중하는 자세로 모든 종교들을 접근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다른 종교 전통 속에서의 하나님의 주도성과 인간의 신실한 응답 또한 인 정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비판가들은 특별 계시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것은 편협되고 교만한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회개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특별 계시에만 국한시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편견과 배타주의는 우리 종교의 특별성을 중요시하며 충실할 때 보다는 특별한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어떤 특성을 잃게 될 때에 생겨나는 문제들로 같이 보아야 한다.
=> 결론
일반계시와 특수 계시 사이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 불완전과 완전 사이의 관계 같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단순히 이분하여 판단하는 것을 피하여야 한다.
예수의 선교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기 계시는 우리 개인과 개인들간의 관계,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 가장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관계하는 우리의 방식들에 대한 변화를 요청한다.
5. 자기 표현으로서의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의 모든 것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지만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는 계시의 완성이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람을 통한 계시만이 사람인 우리에게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인격적인 계시만이 지고자 이신 하나님의 실재를 적절하게 드러낼 수 있다.
첫째, 인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인간은 정말 누구인가, 인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인간의 진정한 성격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지속적인 행동 양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 또한 특별한 행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성격과 의도는 자연과 역사의 모든 사건들 속에서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나사렛 예수라는 특별한 사건(복음서 안에서 정제되고 수난 이야기 속에서 절정을 이룬)일관된 행동양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둘째, 사람의 정체성은 그 자신의 일관된 행동 양식 속에서 드러나지만 그 정체성이 그 행동들 속에서 고갈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유로이 새롭고 놀라운 일들 가운데 인간의 행동에는 자발성과 임의성의 요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비슷하게 하나님의 행동을 성서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유를 존중한다. 하나님은 신실하지만 새롭고 놀라운 일들을 하며 자신을 드러내신다.
셋째, 사람의 지식은 약속을 믿고 그것에 응답하며 사는 끊임없는 초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성서의 묘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약속과 신앙에로의 요청으로 특징지어진다.
마지막으로 행위를 통한 인격적인 자기 현시에 대한 유비의 결정적인 요소는 사람들에게 일체감을 주는 이야기의 중요성이다. 이야기는 인물을 묘사하는 데에 적절한 하나의 수단이며 이야기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의도에 대한 성서의 증언에 있어서 기독교 공동체의 계속적이고 부속적인 증언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이야기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한 새로운 자유에로 우리들을 초대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활동을 담은 이야기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의 진정한 매체가 된다.
6. 계시, 성서, 교회--------삭제 가능(졸업고사 예상문제 3번과 같은 내용)
기독교 신학에서 계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을 말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다.
성서의 증언과 교회의 선포와 삶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과 하나님의 화해의 기쁜 소식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하기 위해 인간의 한계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증언을 통하여 일하신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되고, 기록되고, 선포되는 세 가지 형태를 주장하였으며 이 책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세 개의 동심원으로 보아 가장 안쪽의 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고 두 번째 원이 되는 예언자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하여서만이 첫 번째 원에 접근한다. 성서의 증언은 세 번째 원의 기초가 되는데 신앙 공동체의 끊임없는 선포와 삶에 의하여 구성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 가지 형태의 구조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을 살펴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하나님은 특정한 인간의 말과 행동 속에서 드러나신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일회적인 성육신 사건이며 이 사건에 대한 다른 증언들 또한 성육신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기쁜 소식을 전적으로 인간의 증언과 기억과 희망과 신앙공동체의 실천을 통하여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비추었던 하나님의 빛은 성서의 증언을 통해서 교회가 성서의 증언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며 성서적인 증언 속에 나타난 인간적인 면은 계시의 기독교적 이해에 있어서 장점이 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은 아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서 본래의 증언과 교회의 증언을 통하여 계시가 우리들에게 전해지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오직 성서로만’, ‘성서의 교회 전통’이 아니라 교회의 증언과 삶의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에 순종하기 위하여 성서의 증언을 자유로이 사용하는 하나님의 영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간접적인 계시로 우리들에게 드러내심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런데 계시의 모든 증언들 속에 결점과 왜곡된 것들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위하여 고용된다는 사실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계시의 빛은 책임 있는 해석과 비판적인 실천의 과정 속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에 의한 세상의 매체를 통하여 온다. 계시에 대한 인간의 모든 증언들은 모호하고 왜곡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계시의 수용을 하나의 변증법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구성원들과 함께 성서의 증언을 주의 깊고 신실하게 읽고 듣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할 수 없다.
성서와 교회의 선포와 삶에 의하여 우리에게 중재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계시에 대한 교리는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의 삶은 우리가 속한 특수 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선택한 가치들과 전하는 이야기들, 그 공동체가 가르치는 교리에 의하여 형성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 계시에 대한 신앙은 성서와 교회의 증언을 통하여 중재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신앙 안에서 응답하는 것이며 우리가 받아들이는 기쁜 소식에 대해서 책임 있는 증언을 하는 위험을 떠맡는 것이며 그 증언을 해석하고 지속하도록 하는 책임을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도록 한다고 해서 그 공동체는 증언된 계시를 통제 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계시는 성서의 증언과 성령의 능력에 의한 신앙공동체의 선포를 통하여 중재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유롭고 은혜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Ⅲ. 성서의 권위
성서의 권위에 대한 중요한 질문은 성서가 기독교인의 삶을 위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느냐가 아니라 성서는 어떠한 권위를 가졌는가? 이다.
성서의 진정한 권위는 신앙공동체의 삶 속에 존재한다. 기독교인은 성서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서 증언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성서의 권위를 올바르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을 돕는 하나님의 영에 의한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와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 안에서 작용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독특한 증언이다.
성서는 그 자체로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신앙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해방시키고 새롭게 하는 관계를 창조하는 기능을 할 때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1. 성서 해석의 원칙들
1) 성서는 문학비평과 역사비평의 도움으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성서의 고유한 증언은, 단지 경건한 소설이나 과거지사에 한정된 사실로 축소될 수 없다.
2) 성서는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미는 배항의 성서 이야 기 속에서 근본적으로 재정의 되어진다.
3) 성서는 맥락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하는데 우리의 해석적인 맥락은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위한 모든 피조물의 열망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Ⅳ. 삼위일체
1. 삼위일체의 성서적 뿌리
삼위일체에 대한 성서적 근거에 대하여 성경의 본문에서 찾는 것도 의미 있지만(예: 마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이보다 하나님의 계시와 행위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삼위일체적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임을 강조한다.
삼위일체는 성서적 증언과 일치하여 그 증언에 바탕을 둔 교회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상에 오심을 전하는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를 내포하고 잇다. 또한 사변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경세적 삼위일체( Economic Trinity)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 경세적 삼위일체
: 세상에서 하나님의 활동과 섭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삼위일체, 구원의 경륜 가운데 성부, 성자, 설령이 서로 구분된 행위자가 됨을 뜻하는 표현
* 내재적 삼위일체
: 세상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별로 고려치 않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나타나는 영원한 인격의 구분을 뜻하는 표현
2. 고전적 삼위일체
1) 종속론
① 하나님 이해
-“성부, 성자. 성령”은 신성의 서열을 기술하는 것
-성부: 위대한 하나님, 성자.성령: 피조물 혹은 열등한 신들
② 왜곡
- 복음의 내용에 상충
-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나 열등신이라면 어떻게 구원자가 될 수 있나?
2) 양태론
① 하나님 이해
-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은 하나님의 가면일 뿐이다.
- 예수의 사역과 성령의 역사 또한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낼 수 없다.
② 왜곡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알 수 있는가?
-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가?
3) 삼신론
① 하나님 이해
- “성부, 성자. 성령”은 세 분의 개별적이고 분리된 신이다.
② 왜곡
- 성서의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해 위배
3. 삼위일체론의 의미와 재진술
- 삼위일체의 언어를 신학과 교회에서 절대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표상들은 전통을 보완하는 것이어야 한다.
- 하나님의 표상들은 복음서를 통해 새롭게 재발견해야 한다.
- 문화와 역사에 의해 구정하기 말고,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사랑의 역사에 의해 규정되어 야 한다.
⇒ 미글리오리는 삼위일체 신앙의 표면적 원리 속에 빠지기보다는, 그것의 깊은 원리를 꿰 뚫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자유로이 내어주며, 상호 의존하며 삶을 나누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이다. 미글리오리 는 하나님이 자유 속에서 사랑하시고, 공동체에서 사시며, 피조물들이 공동체 안에서 살 기를 원하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나누어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공동 체를 형성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1)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한다는 것은?
- 하나님의 삶은 영원 전부터 관계 가운데 있는 인격적인 삶임을 인정하는 것
- 하나님이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심을 진술하는 것
- 하나님의 삶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임을 말하는 것
Ⅴ. 선한 창조
1. 창조 교리의 발전 (맥그래스의 「역사속의 신학」내용)
1) 세계기원에 대한 그리스의 이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고 하나 님은 선재하는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종의 건축가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세계 내의 악의 문제는 하나님에게 돌려지지 않고 그로부터 세계가 건축된 물질의 부족함에 돌려졌다. 2) 2-3세기 ; 풀라톤적 세계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창조 교리와 관련된 중심적인 문제는 이원론의 문제였다.
3) 4시기 말: 하나님이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모두를 창조한 창조자라고 주장했다.
2。창조 교리의 의미들
1)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의 명확한 구분
2) 창조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의미한다. - 피조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피조물을 맡아 관리한다.
3) 창조자 하나님의 교리는 창조의 선함을 암시한다. - 죄의 파괴적 힘은 하나님의 설계나 허락에 의해 세상 안에 현존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4)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3。 선한 창조
1) 기독교 신앙과 생태학적 위기
성경은 창조, 화해, 구속의 사역에 있어서 다른 피조물을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동반자로 기술하고 있다. 창1:31의 다스릴 위임은 자의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유 로운 은혜와 계약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곧 존 중과 사랑과 돌봄을 펼치라는 요구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셨다는 정복의 명령을 빙자 하여 자연을 착취하는 일을 더 이상 합리화하지 말아야 한다.
2) 창조론의 주제들
- 세계를 하나님이 피조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타자성 초월성 주권을 긍정함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외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 창조는 그 본성이 사랑인 하나님의 참된 본성을 적절하게 표현해준다. 하나님은 창조의 행위 가 운데 자신의 사랑과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자유롭게 드러내신다.
- 창조 행위는 하나님이 자기 비움, 자기 겸손, 자기 제한이다. 왜냐하면 창조를 통해 하 나님이외의 다른 존재가 생명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독립된 실존을 가지도록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4。 창조가 선하다는 의미
- 창조 가운데 일부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 피조물의 공존과 상호의존이다.
5。 패러다임 전환
인간중심의 사유에서 자연중심 , 우주중심으로의 사유.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주적으로 확장하여서 미물까지도 하나님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인간을 위한 관계에서 같이 조화를 이루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상호적 관계.
6。 창조를 통한 낮추심
창조의 연속성안에 있는 예수의 삶과 죽음가운데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을 지배와 종속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비어주시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의 사건아래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의 계속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일치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그리스도의 수육의 사건과 예수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는 삶의 원리는 하나님의 자기 내어줌과 희생의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계의 창조하심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희생 안에서 구원의 사역과 성령 안에서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이끌고 성도를 새롭게 됨과 완성으로 이끄시는 역사는 모두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역사인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이다
Ⅵ.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불가해성(예상 문제 5번 참조..)
Ⅶ.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1.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해석들
- 직립 발달을 한 인간은 ‘육체적으로 하나님과 닮았다’
- 가장 지배적인 서양의 해석은 그것은 ‘이성의 능력’으로 보아왔다.
- ‘땅의 지배’를 부여받은 인간에 대한 창세기의 언급에 중점을 둔다
- ‘인간의 자유’를 하나님이 형상의 의미로 강조해 왔다.
-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하는 인간의 삶을 묘사한다.-☆
2. 피조된 인간
-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유로이 말씀하시며, 하나님께 자유로이 응답하는 존재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그의 진정한 정체성을 상호간에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의 공존 속에서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위 해서 창조되었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나 조건이 아니라. 목적을 향한 운동, 즉 인간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삶의 완성을 향하여 끊임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3. 타락한 인간
-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자유롭고 은혜스럽게 이야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의 삶을 의미한다면 되는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 만약에 우리의 자유를 선물로 받아들이고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자유롭게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동료 피조물들을 다루는 죄는 지배와 예속, 자기 고양과 자기 파괴의 이중 형태를 취한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개방을 의미한다면, 죄는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된 인간의 운명을 부정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인간
-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재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포기한 죄에 의해서 거부된다면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확장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순순히 믿고 확신하는 것이다.
- ‘사랑’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되어지고 성령에 의해서 우리 가운데서 깨우쳐 주신, 다른 사람과 더불어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는 새로운 길인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재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다가올 나라에 대한 갈망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갈망이 절망과 교만의 죄에 의하여 부정되거나 왜곡되어진다면, ‘소망’은 우리가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여 하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자유인 것이다.
⇒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관계 속에 있는 새로운 인간의 자유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가능하게 된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인간이 되는 새로운 방법의 표현이다.
Ⅷ.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결정적인 근거와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 신학적인 성찰을 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신 구원에 중심점을 두는 한, 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하늘과 땅을 만드신 전능하신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같은 것이며, “성령”은 예수에게 권능을 주셨고 이 땅에서 사역을 계속하는 영으로서 기본적으로 정의되어진다.
1. 기독론의 문제들
1)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 즉 두 개의 본성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에 관한 문제이다: 이러한 고전적인 기독론의 공식은 많은 학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 있어서도 애매하고 추상적이며 신앙의 경험과는거리가 먼 개념이다.
2)진정한 예수를 발결한 목적으로 역사의식과 복음서에 대해 역사비평방법을 적용하면서 제기되는 문제이다: 최근 몇 십년동안에는 좀 더 지성적이고 세련된 ‘역사적 연구의물음’ 들이 시도되면서 , 많은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수의 전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에 관하여 완전히 회의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한다.
3)신약 성서 속에서 매우 다양한 예수상에 대한 인식에 문제이다
4)오늘날 기독론의 문제가 특수성의 걸림돌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다는 문제이다: 오늘날에와서 가부장적인 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신학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져 왔고 흑인 신학자들과 제3세계 신학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
2. 기독론의 원칙들
1)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지식이다.
2)예수 그리스도는 진공상태에서 올바르게 이해되어질수 없다.
3)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교리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4)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이해와 고백은 특별한 상황으로부터나오며, 특별한 요구와 열망을 반영한다.
5)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고백과 신조들보다 위대하며 그에 대한 우리의모 든 신학적인 성찰을 뛰어 넘는다.
3. 그리스도의인격에 관한 고전적인 이론들
1)예수는 완전한 인간이다: 예수는 참으로 완전한 인간이나, 그것은 새로운 인간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계의 친밀성과 죄인들과 억압받는 이들과의 결속은 고유한 것이며, 이웃과의교제와 섬김에 있어서도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였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보잘 것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켰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인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에서 새로운 인간의 규범이고 약속이라는 것이다.
2)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다: 고전적인 기독론은 어떠한 조건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신성을 주장하며, 신약성서의증언에 충실함으로 그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 하셨다”. 이것은 예수가 행하시고 고통받은 것이 또한 하나님이 행하시고고통받으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우리자신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동일하게 가진다. 바로 이 사람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구원을 위해서 고통 당하시고 활동하신다.
3)예수는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이다: 고전적인 기독론의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두 본성은 본질적으로 혼돈과 변화와 나눔과 분리 없이 한 품격 속에서 결합된다. 그러나 비판가들은 이 교리가 접착제로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나무처럼, 물건들이 인위적으로 결합하고있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고 비판해 왔다. 도날드 베일리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인격적인 통일성은 하나의 역설이지만 우리 자신의 기독교적인 경험의 유비에 의해 그 실제의 어떠한 것을 알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독교인의 존재의 중심에는 인간의 자유를 앞서가고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서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속에서 결합된다. 그것은 서로가 자신을 제한하며,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는 성령의 결합이다. 겸비의 행위는 하나님의 본성을 부정하거나 검소 시키지 않는다. 완벽한 서로의 사랑 속에서 인성가 신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분되면서 결합된다.
4.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하 고전적인 해석들
1)우주적인 투쟁, 혹은 승리자 그리스도 이론을 들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속죄의 사역은 하나님과 이 땅에 있는 악의 세력과의 극적인 투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이러한 세력들로부터 승리함으로서 포로들을 자유롭게 하신다.
2)안셀름주의, 또는 만족설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마치 영주와 봉신처럼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면서 불순종의 행위는 주인을 모욕시키는 것이며, 종들은 그에 대한 만족이 주어져야만 한다고 말하다.
3)진보설 혹은 도덕 영향설로 불린다. 이 속죄론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속죄론과는 달리 주간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영향설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놀람과 감사 속에서 응답할 수 없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인간과 화해하신다.
이상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신학의역사 속에서어느 하나가 절대적이라는 논란에 빠지게 된다면 수세기 동안 교회가 성찰해온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의 의미에 대한 풍부함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론들을 우리 시대에 맞게 다시 재해석되고 재요청되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세 가지 직책으로 요약해서 말하는데, 예언자로서 예수의 가르침과, 제사장으로서그의 희생적인 죽음과, 왕으로서의 그의주권을 행사하신다. 또한 칼바르트는 화해의 교리에서, ‘종으로서의 주님’, ‘주님으로서의 종’, ‘진정한 증언’이라고 말한다.
5. 해방의 기독론
1)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가나난 사람들과 가장 친밀하게 연대하신다.
2)사람들을 억압하는 죄와 자유롭게 하는 구원에는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이 모두 있 다.
3)기독론이 억압의 상황에서 자기 의식적으로 행해질 때, 신앙과 삶을 비인간화시키는 이데올로기를 구별하는 것은 사명적이고 급박한 것이다.
4)기록론은 기록교의 실천에 불가분적으로 연결된다: 예수의사역을 이해할 때 그가 처한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선포와 위허믓런 실천을 배제하고서는 올바르게 이해할수 없을 것이다.
6. 폭력과 십자가
예수의죽음을 이해하는 데에 우리가매우 어려워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그것이 폭력의 사건이며 우리는 우리의 삶가 우리 사회의일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폭력을 감추는 일에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즉, 우리의 폭력의세상에 영향을 준 죽음의 세 가지 면을 간략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1)그리스도는 폭력으로 물든 우리의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고, 강압적인 것과 죽음으로 이끄는 것에 기초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2)그리스도는 폭력의 희생자인 우리와 가장 친밀하게 결속하기 위해 그리고 폭력의 가해자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중재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3)그리스도는 폭력으로 물든 우리의 세상 속에서 새로운 인간을 위한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7.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성
종교의 다원성이 점차적으로 개방과 대화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계속해서 주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앙과 타종교의 신앙들을 관계시키는 방법들이 있다. 배타주의자, 발달주의자, 초월주의자, 대화적인 방법등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성은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그들이 현재 완전히 진리를 소유하고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기독론보다 위대하다. 앞으로의 하나님에 대한 계시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과 모순되지 않는 것을 확신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현재 기독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 또한 불안전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8. 결 론
미글리오리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마치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듯이 그의 인격과 사역 또한 분리되어 설명되어질수 없다. 그는 참으로 완전한 인간이면서 새로운 인간이였다. 또한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는 영원하신 하나님은 성령의 결합시키는 사랑속에서 아버지가 되시며 예수는 그의 아들이 된다. 이들은 서로 자신을 내어주는 겸비의 통일성이라는 사랑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은 그를 해방시키고 화해하는 사역으로 보아야 하겠다. 결국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화해하는 사역으로 이끄시는 새로운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Ⅸ. 새로운 공동체 : 예상문제 2번 참조 (미글리오리 새로운 공동체)
Ⅹ. 성령론
1. 성령론의 회복
그 동안 성령은 교회 역사에서 의식적으로 반대되어 왔다. 즉, 성령의 역사를 신비주의의 이단시함으로 인해 소외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성령에 대한 관심을 끌어들이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비인간화되고 관료주의화 된 것들에 대한 항거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는 성령은 보다 깊은 신앙,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우리 시대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위기들을 다루는 영적인 원천들에 대한 열망으로 보여질 수 있는 요건이 되었다.
세 번째는 역사적인 차별성과 냉담한 객관성 의식과 관계되어 있다.
네 번째는 최근에 사회와 정치 개혁운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허함과 기진함에 관련되어 있다.
다섯 번째는 에큐메니컬 교회의 발전에 관련되어 있다, 주로 동방 정교회들의 영향과 오순절 교회의 확산, 그리고 남미와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의 기독교 기초 공동체들의 출현등이다.
여섯 번째는 성서에서의 성령 경험의 중요성이 보다 나은 평가를 받고 있다.
2. 성령신학의 개괄
1) 기독교 신학에서 성령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어떠한 영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하는 영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연합시키는 사랑이며 다양성 속에 있는 공동체의 능력이며, 상호 사랑과 능력이다.
동방과 서방의 성령에 대한 논쟁 이에 대해 미글리오리는 두 가지의 문제점을 제시한다.
첫째는 동,서방에서 증언하는 성령의 발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한 모든 형태를 완전히 파악한 것이 아니다.
둘째는 발현 모델 외에 우리는 성령의 운동을 예수의 사역에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와 종말론적인 영광 속으로 이끌기 위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사역 속에서 성령의 활동을 이야기하는 ‘종말론적인 모델’이 필요하다.
2) 신약성서에서 묘사되는 성령의 역사
① 성령은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재표상(re-presentative)하게 한다. 성령은 신앙인들과 그리스도를 연합시키며, 지금 여기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② 성령은 새로운 삶의 창조를 한다. 성령은 우리가 중생 하도록 돕는 대행자이다. 변화의 능력이 있다.
③ 성령의 사역은 행방적이다. 성령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후3:17)
서방
동방
사역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삼위일체의 세 품격의 협동과 관련된다는 것에 동의
발현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온다
성령은 오로지 아버지로부터 온다
입장
-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역사와 분리된다면 교회는 다양한 성령 운동들에 대하여 책임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로 여기지 않는 자연 신학에 의해 상처받게 된다.
빌리오베크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근원으로서 아버지의 고유성을 애매하게 사며, 성육신한 말씀이 분명하게 선포되고 고백되어진 곳 이외의 다른 창조와 역사 속에서 성령의 활동을 확신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고 주장
④ 성령은 공동체적 사역이다. 아버지와 아들, 모든 것을 연합시키는 새로운 공동체 능력이 있다.
⑤ 성령의 사역과 그것이 일으키는 기대와 연관되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에 대한 능력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구속적이 사역과 완성과 모든 창조를 통해 정의와 평화의 수립에 대해서 희망과 기대와 약속을 일깨운다.
⑥ 성령의 은사가 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있다. 성령은 참된 은사는 공동체를 형성하며, 소수가 자기 자신을 극대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에 기여한다.
⑦ 성령의 여성 이미지(female imagery of the spirit)이다.
2001년 신학대학 시험문제
조직신학(출제: 이세형 교수)
1.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가 갖는 공동체성의 의미를 설명해 보시오.
2. 자신의 교회 다시 세우기론을 논하라.
3. 계시된 말씀, 씌여진 말씀, 그리고 선포된 말씀의 의미와 상관관계를 논하라.
4. 예수의 인격(신-인)을 음양의 사유방식으로 풀어보시오.
5. 욥이 당한 고난의 이야기를 보면서 욥의 친구들의 입장과 욥의 입장, 그리고 욥기 저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서로 상이한 입장으로 악의 경험에 접근하는지를 서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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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가 갖는 공동체성의 의미를 설명해 보시오.
미글리오리는 삼위 일체라는 교리를 ‘특별한 시대에 교회가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이미지와 개념들로 이러한 증언을 해석하고자 하는 언제나 불충분한 시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삼위일체의 교리가 하나의 신비스럽고 사색적인 교리가 아닌, 복음의 메시지에 적절하고 일치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라고 말하고 있다.
미글리오리는 삼위일체 신앙의 표면적 원리 속에 빠지기보다는, 그것의 깊은 원리를 꿰뚫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자유로이 내어주며, 상호 의존하며 삶을 나누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이다. 미글리오리는 하나님이 자유 속에서 사랑하시고, 공동체에서 사시며, 피조물들이 공동체 안에서 살기를 원하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나누어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번엔 이 삼위일체의 깊은 원리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미글리오리는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인격적 삶의 관계성 속에 있다라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아마도, 하나님이 다분히 인격적인 존재로 묘사되어 왔고, 그 인격적인 세 위격들이 서로 관계하며, 교제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책에서는 인격적인 관계의 전제임에 동시에 사랑의 사건의 필수 조건이 ‘타자성’이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결국 누군가와 관계를 맺거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스레 말하고있는 것 같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미글리오리는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임에도 불구하고 피조된 이 세상을 멀리서 관망하지 않으시고, 직접 찾아오셔서 개입하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도 나누시며 함께 사랑을 나누신다. 또한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이는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너무나 ‘사회적이고, 피조물들 사이의 포괄적인 공동체에 대한 근원이며 능력‘이라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삼위 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삶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다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가난한 자, 고통 당하는 자, 억눌린 자, 소외당한 자들과 늘 함께 하셨고, 그들의 고통, 외로움, 배고픔을 함께 나누셨다. 우리가 흔히 가질 수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 진정 그 고통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위로하신 것이다. 또한 그들을 헌신적인 사랑으로 보듬어 주신 것이다.
(맥그래이스 책 ‘삼위일체’부분과 미글리오리 책 ‘서문’, ‘삼위일체하나님’ 부분을 참조하세요)
2. 자신의 ‘교회 다시 세우기론’을 논하라.
(이 부분은 자기의 신학적 견해가 들어가는 것이기에 먼저 미글리오리의 새로운 공동체부분을 요약하고 다음으로 구미정 교수의 “교회다시살리기”의 책을 요약하도록 하겠다.)
새로운 공동체
교회는 결함이 있고 언제나 개혁되고 새로워져야 할 필요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부름 받은 해방된 피조물들이 모인 하나님의 새롭고 포괄적인 공동체의 진정한 시작인 것이다.
교회의 문제들...
1. 미국 문화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개인주의에 의한 자기중심적인 신앙심
2. 종교적인 믿음과 실천은 현대 문화에서 개인주의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화된 형태를 취한다.
3. 관료주의적 조직과의 야합이다. 현대관료주의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기계와의 교통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교회는 다른 모든 조직처럼 관료주의적인 압력들에 순응함으로서 교회의 진정한 정체성을 잃게 된다.
4. 교회가 표현한 신앙과 실제적인 실천 사이의 눈에 띌만큼 혼란스러운 불일치에서 발견된다. 교회의 신비는 교회가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고, 삶과 능력을 나누시고, 서로 주고받는 사랑 속에 사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교회의 이미지들
신약성서에서 에클레시아 즉, 교회는 예수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에 응답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신앙인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말한다. 에클레시아에서는 언제나 힘과 책임성이 함께 나눠지며,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관심이 있다. 에클레시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중심을 두고, 성령의 능력으로 봉사하도록 능력 받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새로운 공동체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교회은 다음의 네 가지의 이미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
1. 일련의 이미지들은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 특히 출애굽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묘사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이 이미지는 선택된 민족, 거룩한 나라, 새로운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아들과 딸, 남은자, 그리고 택함을 받은자와 같은 이미지들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특별한 임무를 위해 부름을 받아서 새로운 고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민족으로 설명된다.
2.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을 종으로서의 백성으로 설명한다. 이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부름을 받은 교회는 자기 중심적인 방법으로 능력을 행사하거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적인 섬김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백성은 동역자이며, 도와주는 자이며, 사도이며, 증인들이다. 이들에게는 공동체의 임무인 즉,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세상을 섬기는데서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섬김은 하나님에 대한 섬김으로 교회의 예배, 찬양, 기도등이 있고 세상에 대한 섬김으로 말과 행실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를 위한 하나님의 요청을 증언하는 형태를 취한다.
3.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은유에 초점을 맞춘다. 이 이미지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의 상호 의존성과, 전 공동체의 풍성함과 함양을 위한 다양한 은사들과, 몸의 각 지체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일반적인 의존성등을 전달한다.
4. 마지막 때의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즉, 성령의 은사들로 가득찬 성령의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활동을 그리고 있다. 성령에 의해서 능력받고 인도되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며, 새로운 인간에 대한 첫 표징이며, 영광스러운 새 시대의 첫 열매이다. 교회는 봉사하고 고난받지만, 또한 찬양하고 희망을 갖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성령과의 교제 속에서 새로운 삶과 기쁨의 내음을 미리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 표징이다.
현존하는 교회의 모델에 대한 비평
1. 구원의 기관의 모델이다. 이 견해는 교회를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구조들, 직책들, 과정들, 전통들 등의 면에서 정의한다. 제도적인 구조는 교회의 인간적인 면에 속한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제도주의적인 견해는, 특히 그것이 국가 권력과 손을 잡게 될 때에 이롭기보다는 훨씬 해로운 것이 된다. 그것은 교회의 목적을 희생적인 봉사라기 보다는, 제도적인 생존과 지배로서 보고자하는 유혹에 저항하지 않는다. 전형적으로 이러한 교회 내의 질서는 위계 질서가 되며 살아남고자 하는 정신이 봉사의 정신을 밀어낸다. 따라서 교회의 구조는 복음과 위험을 수반하는 봉사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에 의해 계속적으로 도전받고 전환되어야 한다.
2. 성령의 친밀한 공동체로서의 모델이다. 이 견해는 교회가 공식적인 조직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의 구성원들끼리 하나님의 소생시키는 영에 대한 공통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매우 친밀한 단체이다. 친밀한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델은 확실히 인간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에 대하여 말해준다. 현대 사회에서 외롭고 상처를 가진 이들이 찾는 자신들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는 그들의 육체와 영을 치료할수 있는 모델이 바로 “친밀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모델”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는 현재의 문화속에 있는 운동들을 통하여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에클레시아의 삶이 집단감수성 훈련회나 집단 감수성 훈련 구룹과 오늘날 대단히 인기가 있는 일종의 치유적인 종교 공동체 등과 구별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 또한 이 모델이 강조하는 거룩한 것에 대한 황홀경적인 체험이나 다른 사람과의 친밀함과 결속함에 대한 경험이 반드시 기독교 신앙의 경험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유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들은 공동체가져야 할 보다 넓은 사회적인 책임감을 무시한 채, 개인적인 성장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3. 구원의 성례전으로서의 교회로서의 모델이다. 제 2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로마 카톨릭에서 점차적으로 두드러진 성례전으로서의 교회의 모델은, 예배와 증언과 봉사에 있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 안에서 계속적으로 현존하는 표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모델은 우선적으로 교회 자체의 성례전적인 삶과 특히 성찬식의 참여에 주의를 끈다. 이 모델의 장점 중 하나는, 제도적이고 신비적인 모델들 속에서 분리하는 경향이 있는 교회의 삶의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면들을 결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델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우선적으로 교회의 예식 속에서 역사하는 것으로 생각함으로 신앙공동체의 사회적인 책임성에 대한 강조를 소홀히 여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성례전적인 공동체로서 교회는 교회가 선포하는 삶의 해방을 내적인 구조와 사회적인 실천 안에서 나타내어야만 한다.
4. 복음의 전령사로서의 모델이다. 이 모델은 개신교의 전통 속에서 기본이 되어온 교회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은 교회의 선교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민족들을 회개와 새로운 삶으로 부르는 확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제도적인 구조와 개인적인 요구의 만족에 대한 모든 문제들은 선포와 복음화라는 임무에 종속되어진다. 따라서 이 모델은 다른 모델들을 지배하거나 혹은 제외시킬 때 교회가 사람들과 말씀이 선포되어 지는 문화에 대하여 선심 쓰는 체하며,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만일 전령사로서의 교회가 지배의 제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가장 잘 섬길 수 있으며 또한 똑같이 중요하게 그들과 무엇을 주고 받을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들로부터 기꺼이 배워야 한다.
5. 종되신 주님의 종으로서의 교회이다. 이 모델은 ‘봉사의 모델’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모델은 기본적으로 교회는 생존과 확장의 목적을 가진 제도, 혹은 현대 사회에서 무시되고 비인간화되는 것을 느끼는 개인들의 인격적인 성장을 기르고자 하는 친밀한 공동체, 혹은 단순한 메시지의 전령사가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의 삶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종으로서의 공동체이다.
이 모델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복음화에 대한 관심과, 정의를 위한 투쟁 사이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델 또한 왜곡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섬김이 특별히 여성에게 있어서, 언제나 복종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보았하도록 능력을 부여받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치유와 우정을 맺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의미해 왔다고 주장한다.
미글리오리의 교회모델들에 대한 견해
아마도 교회를 적절하게 이해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어떠한 역사적인 형태, 혹은 어떤 특정한 교회론을 절대화하는 것일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출 때 그것은 에클레시아의 삶을 계속적으로 개척하고 새롭게 하는 하나의 필요한 능력과 화합하는 것이다. 교회론은 삼위일체의 교리와 더불어 보다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전될 필요성이 있다. 삼위일체적인 교회론은 성령의 계속되는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의 진술이 하나님은 한없고 다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사실로부터 기본적인 단서를 가질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며, 교회의 선교는 삼위일체적인 선교에 뿌리를 둔다. 그리고 교회는 존재하고 세워지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으로 섬기기 위해 세상 속으로 파송되는 공동체이다.
고전적인 교회론의 특징들
1. 교회의 통일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교회의 통일성은 우선적으로 조직이나 직책이나 교리나 프로그램 등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새로운 교제 속에 뿌리르르 둔 독특한 통일성이다. 교회의 통일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부분적이며 잠정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속에 기반을 둔 교회의 통일성은 다른 것과의 교제를 아낌없이 축하하는 것이다.
2. 교회의 거룩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거룩함은 ‘당신 보다 더 거룩하다’라는 식으로 열등하게 여겨지는 사람들로부터 분리하는 도덕적인 우위성의 태도를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참여함으로 거룩해진다. 하나님은 가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며 용납하시고 사랑하신다.
3. 교회의 보편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는 보편성의 의미를 모든 종류의사람을 포괄하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적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역설적으로 당파적이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당파적인 행위는 의도적으로 보편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은 하나님의 당파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분열심키고 파괴적인 당파의식이 된다.
4. 교회의 사도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도성이 어떠한 외적이고 기계적인 의미에서 사도권의 계승이라는 사슬 속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라는 기쁜 소식에 대한 증인이 되고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사도직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교회의 사도성은 교회의 삶이 모든 면에 있어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에 의해서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의복음에 교회가 순응하는 것이다. 사도 교회는 하나님과 가난 속에서 교회의 선교를 수행함으로 복음에 충실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신약시대 이후로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다는 것은, 교회론에 있어서 하나의 원칙이 되어 왔다. 그리스도는 주교가 있는 곳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성찬식에 계시며 그리스도는 복음이 선포되고 들려지는 곳에 계시며, 그리스도는 성령의 은사가 분명한 곳에 계신다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귀의 교회(복음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들려지는 곳)와 눈의 교회(신자들이 보고 경험하기 위하여 성례전이 실행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도움의 손을 펼치는 교회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 사이에 계시며, 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자유롭게 연대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자!
구미정 박사님의 “교회 다시 살리기”
john B. Cobb, Jr. 지음
서 론
21세기의 문턱에서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점차 쇠퇴하고 있으며 질적으로는 사회적 신뢰성을잃어 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21세기는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위한 문명전환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인간중심주의, 개인중심주의, 소유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생명중심주의, 우주중심주의, 존재중심주의로 패러다임을 전환시키지 않는 다면 21세기는 짐승화의 세계가 되고 인류문명은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러한 문명전환의 핵심이 되는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과 자연에 대한 생태학적 각성, 그리고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을 통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생명중심의 가치관과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생태계”를 향해 출애굽 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본 론
한국교회의 문제점
첫째로, 지난 30년간 동안 교회성장에만 몰두하여 개체교회 성장제일주의라는 자폐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 교회성장을 위한 반지성적 분위기와 비민주적인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교회를 인간과 세계의 총체적 해방을 위한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영적 구원을 위한 기관, 혹은 조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성을 잃게 된 것은 기복적이며 내세지향적인 신앙으로 인해 개인의 영혼 구원에 치중함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책임과 공동체적 의무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넷째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내세워,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강요할 뿐, 성서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정직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불신앙적 태도로 매도 하고, 반성적 사색과 지적인 정직성을 억누르는 경향이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젊은층과 고학력자를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도록 만드는 주요 원인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경배될 뿐, 우리도 이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모델로는 이해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로,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아직도 교회문턱에서 이성을 벗어 놓고 교회 안에 들어올 것을 요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과 같은 소비와 낭비의 시대에 한국교회가 예수를 믿는 것이 곧바로 예수처럼 자기를 비우고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길임을 온몸으로 살아 내지 않는다면, 인간의 영성과 주체성, 연대성을 파괴시키는 세속적 자본주의 문화와 근본주의 신학에 밀려, 점차 더욱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어 한국교회는 붕괴를 자초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신화적-문자적 신앙단계나 비분석적-관습적 신앙단계를 넘어 주체적이며 반성적인 신앙단계, 더 나아가 접속적 단계나 보편적 신앙단계로 질적인 성숙을 이룩함으로써 한국 사회 전반의 저주와 죽임의 역사를 극복하고 생명과 축복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에 크게 공헌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안고 있는 큰 문제점으로는 전에 언급했듯이 교회가 믿는 바에 따라 그 자체의 삶을 성찰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신앙이라는 것 자체도 애매하며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성교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본디 운동은 그 구성원들이 열정적으로 헌신할 때 번창하는 법이다. 기독교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그들 자신과 세계에 가장 우선되고 중요한 것으로 확신했을 때 번성했다. 또한 그 확신 역시 기독교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 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미적지근한 사람들이 되었다. 이 미적지근함은 우상숭배와도 같다.
지금의 세대는 공통의 확신을 잃어버린 세대이다. 그러나 17-8세기에는 적어도 공통의 확신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미지근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광신주의나 우상숭배라는 잘못을 더 범했던 것 같다. 19세기에 넘어오면서 17-8세기의 복음주의는 개인주의적이고 내향적으로 변모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미지근함이 찾아온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신앙의 신빙성에 대해 공격하였고 이 도전 앞에서 교회는 교회를 회개시키는데 참여시켰으나 그 결과는 회생이 아니라 쇠퇴로 나타나는 실정이 되었다. 이 참회분위기가 지배적인 동안은 외부인이 거의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된 것이다. 또한 반 유대주의의 문제점과 페니미즘에 대한 태도, 그리고 생태위기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기독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원인은 교회에만 있지 않고 교회와 신학에 모두 다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교회는 사고하는 기관이 없이 이런 기관을 대학에 넘겨주게 되었고, 사유를 학문적 훈련으로 변모시켰다. 신학은 대학의 규범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평신도나 목회자들은 신학을 형성하는 데 거의 참여할 수 없었다. 이렇게 교회가 신학을 포기함으로써 의식적인 기독교적 사유도 포기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 안에서 성찰모임을 결성할 비전조차 거의 꿈꾸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교회의 신학적 소명을 갱신하는 갱신 없이는 미지근한 상태를 지속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로 쇠퇴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교회 스스로가 할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성찰 과정을 시작할 때 전문가들이 우리 시대의 도전들에 응답하면서 행했던 작업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공통의 확신을 잃어버린 세대를 향한 해결방안으로는 미지근함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신학적 성찰이 교회에게 요청된다는 것이고 그로 인한 교회는 확실한 확신으로 그 열정을 회복할 때 다가오는 기독교의 도전들에 대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유럽중심주의의 종말이 찾아오고 민족주의의 종말과 경제지상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적 종말, 성적인 억압으로부터 종말, 가부장제의 종말이 앞으로 교회에 심각한 결과들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추론이라고 한다. 이런 시점에서 교회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존캅은 갱신과 변혁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제시한다.
갱신(Renewal)
개교회의 내적 생활에 집중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실해지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과제는 참 제자가 되어 우리 자신을 진실한 공동체로 세우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신앙의 상징을 살려내고, 그것에 의해 신앙을 형성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런 교회생활의 형태를 “갱신”이라 부른다. 교회는 민족주의와 관계되어지는 왜곡에서 벗어나 좀더 온전한 순수성을 회복하도록 촉구되어져야 하고, 합리주의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교회만의 독특한 비전을 재확인 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변혁
기독교를 좀 다르게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독교를 언제나 과거에 입각해서 살지만 현재의 문화적 환경으로부터 배우며 또한 그것에 의해 변화되는 그런가 하면 그 환경을 기독교화할 책임마저 떠맡고 있는 하나의 운동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과제는 교회의 본래적 생활 형태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나와 특수한 환경과의 민감한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 되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의 가르침에 내포된 불신과 억압의 요소들로 인해 교회를 등져온 사람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개혁의 모델을 “변혁”이라 부른다.
갱신주의와 변혁주의는 기성교회의 미지근함과 현재 추세에 대한 대안 이미지이다. 그들은 서로 다르다기 보다는 닮음꼴이다. 이 갱신과 변혁은 문화와의 열린 상호작용을 강조해야 한다. 광범위한 신학적 반성 없이는 갱신도 변혁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갱신의 길을 선택하든지 변혁의 길을 따르든지, 우리는 교회가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교회가 건강하게 생존하려면 사고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하여 그 인식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갱신이든 변혁이든 이야기하는 것 차제가 무익하다.
교회사에서 갱신과 변혁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우선순위에서 앞서는 것은 변혁이다. 무엇보다도 변혁은 갱신에는 빠져있던 필요한 요소들을 포괄한다. 사실 20세기에 도전하는 문제 속에서 그들은 회복이라는 주제로 성서에 입각한 갱신을 주장해왔으나 그 결과는 더욱더 한국교회를 침륜에 빠지게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말했던 하나님 나라의 기대(expectancy)에서처럼 미래지향적인 진정한 회복은 초대교회의 특징이 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와 용기를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져다줄 것이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변혁적 특징, 곧 미래를 향해 열린 진실한 개방성이야말로 경전 전체가 생성된 특수한 과정이다. 좀더 깊이 있게 연구하면 하나님이 끊임없는 그 형태가 변화되는 전통의 전달 과정 속에 계신 것을 알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때때로 이렇게 역동적인 변혁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이 그 당시에는 상당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변화하는 상황속에서 계속 확신을 심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현재 목표는 변혁해야 된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아마도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교회만이 다른 전통을 비판적으로 변용 하거나 타자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변혁은 문화에 이처럼 궁극적인 결정적 수준을 호소하지 않는다. 변혁은 성서에서 도무지 순수성이란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아예 순수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변혁은 그 진술이 대단히 상황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졌기에 항상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변증법적 사고).
교회의 필요는 형식적인 봉헌으로 충족될수 없다. 오직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비추어 세계 및 자신 자신에 대해 생각할 능력을 회복할 때라야 갱신이든 변혁이든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바실레이야(Basileia)로서의 구원
현재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약점은 아마도 “구원”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예수를 주님이요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는 하되,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인지 혹은 무엇을 향하여 구원받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금 미지근함에 빠지게 된다. 이제 담대하게 포괄적인 구원, 온 세계의 구원을 선포하자! 우리가 확신 있게 이 구원을 현실적으로 이루어 나간다면, 그 동안 너무 많이 잃어버렸던 바, 우리가 중요한 사명을 갖고 있다는 깨달음을 회복할 수 있다. 우리의 교회는 지금 그 일을 할수 있다는 집단 의식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비전을 함축할수 있는 예수의 바실레이야로서 구원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또한 교회들이 현재 구현하고자 하는 포괄성을 강조하는 비전이 될 것이다. 이 구원에는 생태학적 우주적 구원도 포함될 것이며 웨슬리가 해석한 대로 사랑이 충만한 상태인 성결의 개념도 거기 들어갈 것이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깨달을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구원사에 온전히 참여하는 자로서 경험할 수 있다. 이상의 목록에 구원의 구성 요소들이 완벽하게 들어 있지는 않다. 사실상 완벽한 목록이란 있을 수도 없다. 완벽성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비전의 일관성이다. 우리는 이 모든 요소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단일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수 있어야 한다. 공동의 목표를 향해 동시에 함께 일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결단을 내릴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다양한 과제들을 지원하고 그일의 현장이 되어주는 곳으로서 교회를 이해하는 감각이 되살아나야 한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목표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그들을 지지할 것이며 그들과 함께 일할 다시 말해 예수가 “하나님 나라”로서 선포했던 것을 우리가 우리 시대에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소망이라고 여길 때 생겨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가 하나님의 바실레이아로 불렀던 것과 우리의 구원의 비전을 동일시하려면,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목표를 향해 일하고 계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믿음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논의들을 일관된 비전 속으로 통합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손잡고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데는 고유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교회는 구성원들이 경험의 모든 부분, 특히 과학적으로 규명 할 수 없고 영적인 경험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덜 가부장적이고, 덜 위계적인 대신, 더욱 포괄적이며 신자들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주게 될 때, 그 교회는 바실레이아 안에서 사는 삶의 특징들을 일부나마 획득하도록 신자들을 도울 수 있고, 또한 동시에 그러한 바실레이아의 상징으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설교가 그러한 바실레이아를 선포할 뿐 아니라 청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그려보게 하고 어떻게 자신들의 삶이 그 비전에 따라 형성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도록 도울 때, 교회는 변혁의 상징이자 능동적인 원동력이 된다.
교회는 다른 종교에 대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고정관념에서 깨야 한다고 한다. 또한 우리의 비전에는 생물권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라고 다시 말해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바뀌고 우리는 단지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구원은 우주적, 생물적 구원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회개를 통한 일치
기성교회들이 미지근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 자신의 확신을 강화함으로써 악화되었을지도 모를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분열이라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진정한 화해의 성취 가능성은 현재 존재하는 일치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에 있다.
기성교회 안의 화해 또는 분열에 대해 변혁주의 자들은 기독교인들과 보다 광범위한 기독교적 일치를 이루려는 목표를 함께 나눈다. 이것은 새로운 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인데 우리들은 타종교에 관해 배타주의를 극복함으로서 공동체적 합일점을 찾을 수 있고 변혁주의자들은 예수가 세상의 구세주라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주장을 타종교 가운데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타종교에서 구원과의 기독교의 보편주의적 구원과 일치성을 찾음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구연하고 타종교로부터 새로운 기독교의 정체성을 찾고 이런 개방성으로 타종교와 대화를 통해 그들의 신조들을 바꿀 수 있는 기회도 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 신앙을 다시 다져야 한다. 신앙도 신학도 하나님에 관한 믿음을 우선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기독교적 이해와 개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면 그리스도 신앙은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내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져서 하나님 신앙에 활력이 넘칠 때에는 삶의 의미와 교회의 선교에 대해서도 강한 확신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해 혼란스러워하고 불확실해 하면 미지근함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하지 않고 논쟁만 회피하려고 드는 것은 애매함과 불확실성을 낳을 뿐이다. 신학과 더불어 고통스러운 씨름을 하지 않으면 기성교회의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 교회는 신빙성의 문제를 반드시 직시해야만 한다.
3. 계시된 말씀, 씌어진 말씀, 그리고 선포된 말씀의 의미와 상관관계를 논하라.
성서와 교회의 증언을 무시하게 될 때 기독교에 있어서 계시의 의미는 위협받을 것이다. 따라서 이 어느 하나도 무시되어서는 않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 형태의 말씀인 것이다. 그럼 위에서 말한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와 상관관계에 대해서 논하도록 하겠다.
먼저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되고, 기록되고, 선포되는 세 가지 형태이다. 계시는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을 말하고 이 계시를 위한 매체로서 성서와 교회의 선포가 있다. 물론 이것은 서로 독립적으로 구별되는 것 같으나 사실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 개의 동심원들처럼 서로서로 관계한다. 가장 안쪽의 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는 것이고 우리는 단지 두 번째 원이 되는 예언자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하여서만이 첫째 원에 접근한다. 성서의 증언은 세 번째 원의 기초가 되는데 신앙공동체의 끊임없는 선포와 삶에 의하여 구성된다.
위에서 말한 계시된 말씀과 씌어진 말씀과 선포된 말씀의 의미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다.
계시라는 의미는 문자적으로 전에 감추어 있었던 것에 대하여 베일을 벗기거나 폭로하는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계시의 의미는 예수라는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거룩한 사람의 결정적인 계시이다. 결국 계시된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안에 드러난 계시이며,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이다.
다음으로 씌여진 말씀은 계시가 이용하는 구체적인 매체로서 성서의 증언을 들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씌여진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되었고 또한 계속적으로 계시되어야 하는데 이 씌어진 계시 즉, 성서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는 계속적으로 전달되고 이 성서의 증언은 교회의 증언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물론 이 성서의 증언이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루터가 말했듯이 성서라는 요람안에 계시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성서의 증언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또한 성서가 모두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듯이 그 속에 결점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 성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비판적인 자세로 수용해야 하며 항상 절대적이라기 보다는 변증법적인 관점에서 계시를 받아들여야 하며 성서의 증언은 진공상태에서 해석될 수 없듯이 교회의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선포된 말씀을 들 수 있는데 성서의 증언한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는 교회의 교리나 신조, 사도신경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것은 교회의 실제적인 가르침과 동시에 신앙의 삶에 대한 상대적 권위를 가진다. 또한 성서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열쇠제공,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칼빈은 신경과 고백들은 계시의 독립적인 통로로서가 아니라, 성서의 가장 중요한 주석으로서 교회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계시와 성서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서로의 관계는 루터가 말하듯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누워있는 요람이고, 교회는 요람이 누워있는 탁아소인 것이다.
다음으로 상관관계를 논하자면 미글리오리의 입장에서는 위 세가지의 말씀이 삼위일체적인 상관관계로 나타난다. 먼저 계시된 말씀은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으로서 하나님이 특정한 인간의 말과 행동에 드러나시는데 이것이 성육신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모든 성서를 포함한 다른 증언들 또한 성육적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기쁜 소식의 전달은 교회의 선포와 신앙공동체의 삶을 통해 이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성육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글리오리는 이 계시된 말씀은 성서의 증언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전달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서 본래의 증언은, 교회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따라서 이 세 가지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주는 귀중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우리들은 항상 교회의 은혜를 받지만, 또한 성서의 증언한 하나님의 계시는 다시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가 계시를 가리고 왜곡시켜온 것에 대해 회개하도록 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멀리해서도 않되고 교회와 성서를 같은 수준으로 봐서도 않되고 오직 성서 안에서만 계시를 찾으려 해도 안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말씀은 어느 하나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 우열의 관계가 아니고 상위개념도 아니요 하나님의 진정한 자기 드러내심을 위해 서로 때려야 땔 수 없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관관계이며,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를 위한 독립적 관계도 아니요 상위관계도 아닌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관계이듯이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 성서나 교회의 선포는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모두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이 올바로 전하여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오직 성서로만’ 도 아니요 ‘성서와 교회 전통’만도 아닌 교회의 증언과 삶의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에 순종하기 위해 성서의 증언을 자유로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필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계시의 증언인 성서와 교회의 교리가 결점도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인정한다면 완벽하지 않는 성서와 교회 속에서도 충분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자신을 계시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의 이런 수용을 위해 성서의 증언을 주위 깊게 읽고 들어야 하며 또한 믿음과 기도와 선포와 성례전적 삶과 교회 예배의 상황에서만이 성서에 의해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또한 우리가 성서와 교회의 증언을 통해 중재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응답하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기쁜 소식에 대해서 책임 있는 증언을 하는 것이며, 그 증언을 해석하고 지속하도록 하도록 하는 책임을 다른 사람과 함께 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계시는 성서의 증언과 성령의 능력에 의한 신앙공동체의 선포를 통하여 중재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유롭고 은혜롭게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또한 이런 상호관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칼바르트의 입장에서 이 세 가지 말씀의 상관관계
---- 『말씀과 신학』 바르트학회 공역 , 칼바르트 논문집Ⅰ,대한 기독교서회 ----참조
일종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전일체이지만 질서를 가진 관계로서 연합된, 상위와 하위, 주권과 봉사, 명령과 복종, 지도력과 협력의 관계라고 말한 것처럼(칼바르트의 교회교의학, Ⅲ/2,341 ☞현대기독교교육책 참고)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파할 봉사자로서 나타나고 성서의 증언이나 교회의 선포 또한 이런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할 매개체인 것이다. 따라서 성서와 교회의 관계는 성서가 교회를 다스리지, 교회가 성서를 다스려서는 않된다. 그러나 성서는 도구로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적 증언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 시간에 이 상황 속에서 이 사람들에게 그것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시며 이리하여 그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시는 점에서, 성서 전체는 정당하게도 거룩한 책, 곧 거기에 비추어 교회가 언제나 측정되며 그것을 교회가 언제나 다시금 겸손하게 연구해야 하며 겸손하게 해석해야 할 캐논인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충성인 것이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바로 이 책에 복종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달려있다고 한다. 참으로 성서를 듣는 일과 성서 아래 자기를 두는 일과성서에 자기를 묶는 일은 교회의 구체적 생명의 법칙이고 이렇게 함으로서 교회는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게 될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칼빈의 입장에서의 세 가지 말씀의 상관관계는 다음과 같다.
------ 『칼빈주의』 헨리미터 지음, 개혁주의 신행협회 ------참조
칼빈에게 있어서 생활에는 성경이 중심이라고 추측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생활의 원리(Canon)로 삼는다.
◎ 칼빈의 입장에서 본 계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자연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적인 신인식과 보편적으로 심어진 종교성을 말하는데 칼빈은 죄로 인하여 약해져서 불충분하고 혼란스럽고 모호하고 불명료해진 그러한 보편적 신인식을 생각한다.
칼빈은 자연세계 속에서 그리고 보편적인 도덕과 종교적인 인식 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점차적으로 부패하여 악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해 버렸다고 강조한다. 또한 모든 사람들을 책임지게 하는 보편적인 계시가 있지만 죄로 물든 인간의 습관은 이러한 일반적 지식을 우상숭배로 바꾸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모호하고 피상적인 종교성은 단순한 무관심으로 빠지거나 절망으로, 또는 우상 숭배로 빠지기 쉽다는 것을 우려했다.
◎ 칼빈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자연과 성경
실재로 하나님이 자기에 대한 두 가지 계시, 곧 두 책을 주셨으니 하나는 자연에 관한 책이요, 다른 것은 성경이다. 그는 이 자연의 책을 읽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생각들을 생각해보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안다. 본래는 이 자연의 책 만 있었는데 인간의 죄 때문에 둘째 책인 성경 곧 특별계시가 필요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죄지은 인간이 자연의 우주를 볼 수 없게 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위해 하나님이 다른 책을 한권 주셨는데 이것이 곧 성경이다. 그 책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고 틀림없이 사람에게 만물에 대하여 계시하시고 또 사람의 어두어진 마음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밝히시므로 이 성경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자연과 같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파괴된 자연에서 가져오는 잘못된 인상을 고치는 일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성경의 안경을 쓰고 자연을 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가지 계시를 주셨으나 결국은 성경이 신자의 인생관 전체의 궁극적 기초가 된다. 성경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주와 사람과 또 역사를 바로 알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오직 한가지 뿐이니 곧 순종이라고 그는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사상이며 영감에 힘입었기에 모든 인간이 계시를 발견함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 바로 이 성경이 되며 우리는 이 성경에 대한 순종만 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 기자들의 배후에 있는 실수 없는 하나님을 믿기에 완전 영감으로 쓰여졌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의 증언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절대적 가치가 되는 것이다.
◎ 칼빈의 입장에서 본 성경과 교회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이 사회 생활의 모든 부분에 관계한다고 인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정부의 영역에도 그렇다고 해야 된다고 믿는다. 이에 의해서 인류를 지배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계시되어 우리에게 임하여 있다. 그러므로 본성으로 말미암은 이 자연적 인상의 전부는, 다 성경에 벌써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교정과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영원한 원리들은 교회와 국가를 위한 지침이 되는 규범인데 이 원리들이 저들의 공동 기초를 구성한다.
4.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음양의 사유방식으로 논술하라
창조적 과정의 시원적 기원인 그리스도는 또한 神이면서 인간이다. 우주적 중심에서 인간과 神의 분별은 사라진다. 인성과 신성의 연속성은 성육신이 갖는 진정한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는 陰陽의 관계와 같다. 陽이 陰 없이 존재할 수 없고, 陰이 陽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인성은 그리스도의 신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은 예수의 인성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神은 인간과, 인간은 神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둘은 상호 보충적인 관계에 놓인다. 그리스도는 인간이기 때문에 神이고, 神이기 때문에 인간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 인간과 神은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예수의 신성은 예수의 인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전제한다. 이는 陽이 陰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과 같다.
창조성의 기초인 그리스도는 또한 신성의 완전한 상징이다. 그는 인간에 알려지지 않는 영원한 주체로서 창조자의 완전한 상징이다. 그리스도는 주객의 분리를 넘어서며 이에 따른 인간의 실재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는 모든 범주를 넘어선다. 원초적 창조 에너지의 기원인 그리스도는 창조자인 神과 피조물인 인간의 중재자가 된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神을 완전히 볼 수 있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자신의 모습을 완전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완전한 상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神이 참 인간안에 활동하신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인간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의 상징이 된다. 인간은 神과 인간의 완전한 상징에 참여함으로서 神의 주체들이 된다.
그리스도는 神의 창조성과 인간의 그에 대한 응답에 대한 실재의 완전한 상징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陰에 대해 陽이며, 창조자의 陽에 대해 陰이다. 만물이 그 실존과 재생을 陽과 陰의 계속적인 상호 작용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궁극적 실재의 표준적인 규범이 되는 “이것도 저것도 모두”의 완전한 상징이 된다.
<참 고> 이정용 박사의 음과 양의 사유방식
- 서로 반대되는 양극성의 성질을 음, 양이라 하는데 이것들은 양극성이지만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통일되어있으며, 서구의 이원론적인 사유와 다른 것이다.
- 포괄성(inclusiveness): 음, 양은 포괄적인 성격을 가진다. 음은 음일 뿐 아니라 양이기도 하며, 양은 양일 뿐 아니라 음이기도 하다.
- 상대성(relativity): 음과 양은 각각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양은 음과의 관계 속에서 양으로 알려지고, 음은 양과의 관계 속에서 음으로 알려진다.
- 상보성(complementarity): 음양의 관계에서 반대되는 특성들의 조화가 가능한 것은 상보적 관계성이 있기 때문이다.
- “이것도 저것도 모두”의 사유 : 서구의 배타적인 양자 택일의 사유가 아니라 동양적인 정서의 포괄적인 사유인 것이다.
5. 욥이 당한 고난의 이야기를 보면서 욥의 친구들의 입장과 욥의 입장, 그리고 욥기 저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서로 상이한 입장으로 악의 경험에 접근하는지를 서술하라.
→ 헤롤드 S. 쿠슈너의 책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답안을 작성하세요..^^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
(Harold S. Kushner)
1. 어찌하여 올바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가?
좋은 사람들의 불행이라는 것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의롭고 공평하고 살만한 세상에 믿음을 두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착하심과 그분의 현존에 대해 필연적으로 질문을 제기한다. “어찌하여 올바른 사람이 고통 당하는가?” 이것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왜 슬픔과 고통이라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져야만하는지 이해하고자 던지는 질문이다.
모둔 세대에 걸쳐 이 세상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한가지 방법은 우리가 겪는 일들이 우리가 마땅히 겪어야 하는 일이며, 우리의 불행이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추측하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겪어 마땅한 일을 겪게 하시는 공정하신 판사이기 때문이라고 믿기 쉽다. 이러한 생각들은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깨끗하고 호감이 가는 생각이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한점이 따른다. 그러한 생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를 질책하게 만들며,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증오하게 만들고, 그들 스스로를 증오하게까지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못 된 것은 그러한 생각이 사실무근하다는 점이다.
이제 또 다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고통이 교육적일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좋은 이유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자 하는 신앙인들은 때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상상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끔 벌을 줘야만 하는 부모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벌을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가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익을 위해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을 해야만 할 때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이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한 점에 대해 아이를 야단치는 부모가 무엇 때문에 아이가 벌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책임감 있는 부모의 모델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려는 방법이라고 고통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과연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고통이라는 것을 우리가 겪어 마땅한 것이라는 말로, 혹은 우리의 잘못을 치유하는 것이라는 말로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고통에 대한 해석을 일종의 시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어 우리가 스스로 얼마나 강하고 믿음이 돈독한지 알게끔 해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개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 개념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특혜를 누리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지도 않고 왜 이런 시험을 주시는 지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본 비극의 원인들 모두는 최소한 한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들 고통의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라고 추측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을 원하시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접근법이 있을 수 도 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고통의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 외에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발생될 수도 있다.
성서 안의 욥기서를 보며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에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2. 욥이라는 사람의 이야기
욥은 누구였는가? 그리고 그의 이름을 품고 있는 이 책은 과연 무엇인가? 아주 오래 전에, 학자들은 잘 알려진 민담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종교적 감성을 강화하도록 전해진 도덕적 전설로서 신앙심 깊은 욥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라고 믿었다. 욥은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고 완벽한 사람이어서 욥기를 읽고 있으며 곧 실제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고통 받는 좋은 사람들에 대한 “옛날”이야기인 것이다. 세대에서 세대를 거져 많은 사람들은 욥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몇몇 이들은 이로 인해 위로를 받았을 것이며, 다른 이들은 욥의 예를 듣고 자신의 불신과 불만 불평들에 대해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익명의 욥기 작가는 그 사실에 대해 마음이 불편하였다.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고 다만 사탄의 내기에서 이기리라는 점을 증거하기 위해 그분의 가장 충직한 종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벌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맹종적인 순종에 기꺼워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항거하는 것을 죄라고 말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는 종교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는 이러한 구닥다리의 신심 길은 전설에 마음이 상한 나머지 그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 주인공의 위치를 바꾸어서 철학적 시고 고쳐썼다. 시속에서는 욥이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은 “나쁜 일은 옳은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생각인 전통 신학을 지지한다.
욥기의 29장과 30장을 차지하는 길고 긴 능변의 문장에서 욥은 그의 정직성을 맹세한다. 그는 하나님 당신이 잘못해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시라고 하나님께 요구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이해하기 너무 어렵다. 욥의 경우에 대해 언급하시거나 그의 죄를 나열하시거나 그의 고통에 대해 설명하시지 않으신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데 대해 네가 아는 게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 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 신앙이 언제 새끼를 낳는지 너는 아느냐? .... 네가 말에게 날랜 힘을 주었느냐?
이제 매우 달라진 욥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은 영문도 오르면서 지껄였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욥은 어떻게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가? 그는 우리가 정의를 기대할 수 없는 불공평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곳에 물론 하나님은 계시지만, 그분은 정의와 올바름의 한계에서 자유로우신 분인 것이다. 욥기 전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아마도 회오리 바람 속에서의 하나님 말씀중 뒷부분인 40장 9절에서 14절 까지의 말씀일 것입니다.
네 팔이 하나님의 팔만큼 힘이 있만 말이냐? 너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같단말이냐? 건방진 자가 보이거든 짓뭉개주어라. 거드럭 거리는 자가 보이거든 꺾어 버려라. 불의한 자는 짓밟아 버려라. 한꺼번에 땅속에 묻어버려라.... 땅굴속에 가두어 버려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알아주리라. 네가 자신의 힘으로 헤어 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만약 이 세상을 바르고 진실되게 유지하며, 사람들에게 부당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으로 생각된다면, 네가 나서서 그일을 해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실 때가 있는 것이다.
정직한 사람은 분명 삶에서의 불행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들이 당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일들이 그들에게 벌어진다. -실직, 질병,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으로 인한 부모의 고통등..- 그러나 그런 일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잘못에 대해 벌을 주시는 것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즉 불행이라는 것은 절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3. 아무 이유가 없을 때도 있다.
과연 모든 일게 언제나 이유가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무작위로, 아무 원인 없이 발생되는 것인가? 성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처음에 하나남께서 하늘과 따을 지어 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혼란위에 기적의 창조를, 체계를 잡으시고, 무작위성 만이 있던 곳에 규칙을 부과 하시는 그분의일을 시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둠으로부터 빛을 나누시고, 하늘로부터 따을 나누셨으며, 바다로부터 마른 땅을 나누셨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인 것이다. 무에서 유가 아니라 혼한에서 규칙을 만들어 내신 것이다.
이 세상은 대부분이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곳이며 하나님의 완전성과 수제 창조의 풍부한 증거를 보여준다. 그러나 혼란의 주머니는 여전히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주 상의 사건들은 확고한 자연법을 따른다. 그러나 간혹 어떤 일은 그 법칙에 거슬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신 그 법칙의 밖에서 일어난다. 날씨의 무작위 변화는 농작지대의 장마와 가뭄의 원인이 되고, 그리하여 그 해의 추수를 파괴하기도 한다. 취중 운전자는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여 4미터 전방에 있는 빨간색 포드는 건드리지 않고 초록색 셰브롤레와 부딛친다. 209편 비행기가 아닌 205편 비행기의 엔진만이 고장나서 무작위로 그곳에 모여 있던 가족들에게 비극의 고통을 준다. 그 안에는 어떠한 메시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들에게 고통이 주어진 데에는 별 이유가 없다. 이러한 사례는 하나님의 선택의 반영이 아니다. 지진과 사고, 살인과 도둑과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 그분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적 요소를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이 우리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념으로 견디고 위로 받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신다.)
4. 좋은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훌륭하고 정확하고 규칙적인 세상을 주셨다. 그러나 이러한 정확한 자연법칙들은 의학과 천문학을 가능하게도 하지만 문제를 자아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중력은 물건들이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지만 그 물건이 간혹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그들을 가치게도 한다.
자연법은 모둔 사람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그 법은 좋은 사람, 유익한 사람에게 예외를 두지 않는다. 총알에는 양심이 없다. 악성 종양이나 자제력을 잃은 자동차에도 양심은 없다. 그렇게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들도 병에 걸리고 다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위험으로부터 옳음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연법의 원칙을 방해하러 내려오시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남께서는 그런 일의 원인도 아니시며 그것을 막으실 수도 없다.
몇 천명의 죄 없는 희생자를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 지진이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제하거나 연기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라는 질문을 초월하도록 노력하는 것, 그리고 이제부터는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5. 우리를 인간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아담과 하와는 동물들이 삶의 열매, 즉 기본적인 삶의 힘과 본능이 되는 열매를 따먹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만 한다. 그들은 선과 악을 아는 세상에 들어서게 되고, 더더욱 고통스럽고 더욱 복잡한 세상, 어려운 도덕적 선택을 해야만 하는 곳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먹고 일하고 아이를 갖고 키우는 일은 동물들에게처럼 쉬운 일이 더 이상 아니다. 이러한 최초의 인간은 자각(금지된 열매를 먹고 그들은 옷을 걸쳐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하게 되었다. 그들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평생을 선택하며 살아가야만 하게 되었다. 바로 위와 같은 것이 “하나님의 상”안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유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어떤 선택은 좋은 것이고, 어떤 선택을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의미이며 그런 차이를 아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임무인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도덕적 자유란 우리가 이기적이거나 정직하지 않기로 결정하며 그렇게 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멈추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해치거나 혹은 타인까지도 해칠 자유를 포함하여 모든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시지 않으면서 우리의 일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그분 스스로에게 한계를 정해 놓으셨다. 그분께서는 이미 인간을 도덕적으로 자유롭게 창조하셨고, 그러한 진화의 시계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좋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그 한가지 이유는 우리가 서로를 해칠 자유가 주어져 있는 인간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간 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가지 않고는 그러한 우리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6. 자학을 멈추는 사람을 하나님은 돕는다.
살아가면서 상처 입은 어떤 사람에게 일어 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그가 스스로를 두 번째로 다시 창서 입힘으로써 손실을 두 배로 확대시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는 거부와 슬픔과 상처, 혹은 불운의 희생자일 분만 아니라 그는 이런 나쁜 일들이 자신에게 벌어지는 것이 스스로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느끼며,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 그리고 그를 도우려는 사람을 멀리 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느끼게 된다. 너무나 자주고통과 혼돈 속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며, 그리하여 죄의식과 분노와 질투와 외로움이 상황을 더둑 심각하게 만들도록 방치한다.
우리가 자진해서 죄의식을 느끼는 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이 세계가 이치에 맞게 돌아가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발생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모든 원인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믿음의 강한 필요성 때문이다. 두 번째 요소는 특히 나쁜 일의 경우, 그 일의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는 개념이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믿음이 모든 재난은 우리의 잘못이라는 믿음으로 옮겨가는 것은 꽤 짧은 시간에 형성되는 것 같다.
적절한 죄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나은 방향으로 성장시키는 일을 한다. 그러나 극심한 죄의식은, 즉 우리의 잘못이 전혀 아닌 일들에 대해 스스로를 탓하려는 경향은 우리의 자존심을 앗아가고, 아마도 우리의 성장과 활동의 능력까지도 앗아갈지 모른다. 우리의 자아는 너무나도 다치기 쉽다. 그 자아는 너무나도 쉽게 우리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한다. 종교의 목적은 우리가 정직하고 합리적인, 그러나 간혹 우리 삶에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였을 때 스스로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모든 탓을 돌린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아프게 하기 위한 것이고 벌어진 일에 대해 스스로를 벌하려는 행위이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화를 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벌어지는 일을 하나님의 의도라고 믿도록 교육받아 왔으며 일어나는 일들에 하나님께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왔으며, 혹은 최소한 그런 일을 막지 않은 것에 대해 그분께 책임을 돌려 왔다.
우리가 상처를 입었을 때 느끼는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달성 하 수만 있다면 그 목표는 상황자체에 화를 내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아니고, 우리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에게도 아니며, 그런 일을 발생시켰다고 생각되는 하나님께도 아니고 다만 상황자체에 말이다. 우리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그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며 우리를 도와주려는 그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뿐이다.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은 종교가 지닌 모든 위로의 요소들, 이런 어려운 대에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 요소들과 우리 사이에 벽을 쌓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상황자체에 화를 내는 것은 그것이 ‘석어 바지 일이며 불공형하고 우리가 그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며, 소리치고, 욕을 하고, 울고, 분노하는 것을, 상처받은 일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며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어렵지 않게 하는 일이다.
7.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다 해주실 수 없지만 중요한 어떤 일은 해주실 수 있다. (→전능하시지는 않지만 선하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자연현상을 바꾸도록 바라거나 치명적인 상황을 덜 치명적으로 만들어 달라거나 냉혹한 질병의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 부탁 할 수도 없다. 간혹 기적이 일어날 수는 있다. 악성 질병이 신기하게도 사라지고, 불치의 환자가 회복되는... 놀란 의사는 이런 것이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살아남은 기적이 발생할 때, 우리는 고개를 숙여 기적의 발생에 감사해야 하며, 우리의 기도나 나눔이나 혹은 자체가 기적을 일어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음에 우리가 기도할 때 이번에는 왜 우리 기도의 효과가 없느냐고 의아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가 우리에게 해주는 가장 첫 번째의 일은 우리와 같은 관심과 가치와 꿈과 고통을 지니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기쁨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리고 두려움과 슬픔은 더욱 나누어야 한다. 우리가 극심하게 외로움을 느끼고 운명의 손아귀에 의해 따돌림을 당한다고 느낄 때, 구석진 어두운 곳에 기어 들어가 스스로 불쌍하다는 느낌에 잠길 때, 우리는 우리가 공동체의 일부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우리 주변에 누군가 우리를 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며, 우리가 아직도 공동체의 삶이라는 강줄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때 종교는 우리가 하는 일을 구성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함께 하도록 촉진해 주고, 또 다른 사람이 우리의 삶 안에 들어 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문제가 없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모든 질병에서 면제받게 해달라고 주님께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용기, 견디기 어려운 것은 견딜 수 있게 하는 힘, 잃은 것보다는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대부분 그 응답을 받는다. 그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힘과 용기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 것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그들이 기도가 힘과 용기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믿고 싶다. 그들의 기도는 이전에는 그들에게 가능하지 않았던 숨겨진 믿음과 힘을 그들이 찾도록 돕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인내와 희망을 주신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아프거나 불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이러한 문제를 갖거나, 그 문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문제를 없애실 수는 없으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도 어려워하시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필요한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보다 안심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의사나 간호사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프거나 두려울 때에도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의 두려움과 고통을 혼자 직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확신 시켜 주신다. 우리가 힘과 용기의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기대하지 않던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외부 어딘가에서 부터 도우심이 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혼자가 아니며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 힘을 유지하게끔 우리의 편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8. 그렇다면 종교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 불행의 원인이 아니다. 일부의 불행은 운이 좋지 않아 생기고, 일부는 나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며, 또 일부는 우리가 인간이고 영원히 살수 없으며 융통성이 없는 자연법칙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결과인 것이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일은 우리 행동에 대한 벌도 아니고 하나님이 거대한 디자인의 일부도 아니다. 왜냐하면 비극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아니며, 비극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상처받았다거나 배신당했다고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고통을 이겨내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만큼이나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고통에 놀라졌으리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의 원인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 분께서 그런 일들을 예방하실 수 없다면, 하나님이 좋으신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인생의 비참함이 고통스럽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예외적이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보통 좋은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난다. 대부분의 질병은 고쳐질 수 있다. 대부분의 비행기들이 안전하게 떴다가 안전하게 착륙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밖에서 놀라고 아이들을 내보냈을 때 그들은 안전하게 돌아온다. 사고, 도둑, 수술 불가능한 종양 등은 삶을 부수는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주 드문 예외이다.
비극을 제공하지도 예방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도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심으로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뭐가 좋은가요? 누가 종교를 필요로 하지요? 만약 나쁜 일들이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일어난다면 말입니다.”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드디어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재난을 예방하지는 못하시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재난을 극복할 수 잇는 힘과 불굴의 인내를 주신다고 말이다. 이전에는 전혀 특별히 강인하지 못하던 사람이 역경에 직면했을 때 강인해 지는 경우, 이전에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이던 사람이 긴급한 상황에 직면하여 이타적이고 영웅적이 되는 경우에 그들 스스로도 이전에 없던 힘임을 자유롭게 인정하는 그런 능력을 어디에서부터 받게 되는지 나는 자문해본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우리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우리가 고통스러워 할 경우,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벽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악한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이 두렵기 때문에, 혹은 우리가 그분께로부터 돌아서면 우리를 해치실 것 같아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분은 모든 아름다움과 우리 주변의 규칙들을 창조하신 작가이시고, 필요시에 우리를 돕는 우리 안에 있는 힘과 희망, 그리고 용기의 자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자신과 이세상의 가장 좋은 부분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사랑은 완벽성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을 그의 모든 불완전성과 함께 수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사랑하고 수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더 발전되고 강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출처 개혁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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