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50장에 나타난 족장시대의 역사성 이해
1. 족장시대 역사성이해
창세기 12장 이후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 보면, 이 당시의 특징은 부권사회였으며,
일부 다처제의 사회였다. 그리고 문화사적인 특징은 '청동기 시대 후반'으로 주전 2300년경
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족장'(부족의 대표)이라고 하는데, 창세기는 단순히 족장으로 나오는 남자이야기(Patriarchs)만이 아니고 사라, 리브가, 라헬, 레아 등 여자이야기(Matriarchs)도 등장한다. 그래서 창12-50 까지를 '신앙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
1) 족장시대의 생활관습 이해
(1)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는 의식
이는 그 당시에 자식이 없으면 양자를 삼는 것은 극히 흔한 풍습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양자가 아닌 친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계시다.
(2) 자식 없는 아내
자식을 얻지 못한 아내가 자기의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자식을 얻으려 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유명한 주제이다. 누지(Nuzi) 문서 가운데, 만약 여자가 남편에게 자식을 낳아준다면 다른 아내를 얻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에 그녀는 여자노예를 씨받이(concubine)로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한 혼인계약이 있다. 그러나 누지의 조항은 창세기의 이야기와 달리, 아내보다 남편에게 유리하게 작성되어 있다.(창16:2 참고) 창세기의 기록과 평행한다고 주장되는 누지 계약에 따르면 첩이 자식을 낳은 후에 본 부인이 출산하게 되면 모든 상속재산이 본 부인이 낳은 자식에게 돌아가게 되는 데 반해, 창29-30에서는 여종의 자식이 상속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만일 누지형의 계약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면 사라가 "여자노예의 자식이… 나의 아들 이삭의 상속권을 가로챌까" 걱정할(창21:10)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누지 서판의 내용은 특별한 유형의 혼인계약이지 표준적인 법적 기준은 아니다. 혼인계약의 부대 조건-예컨대, 남편이 다른 부인을 얻을 자유의 제한,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남편이 다른 부인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아내의 양보, 아내와 첩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 각자의 상속권의 지분에 관한 규정 등-은 각각의 혼인마다 다를 수 있다. 누지의 기록들은 다양해서 창세기 이야기의 일반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은 해 주지만, 누지 문서의 그 어느것도 아브라함 이야기나 야곱 이야기의 경우와 정확한 평행을 이루는 것은 없으며, 혼인계약에서 그런 유형의 것이 누지 문화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족장 이야기와 누지 문서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 유사성은, 그 이야기가 오직 2000년대에 기원을 가졌다고 해야만 설명되는 관습이 족장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3) 족장들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임.
족장들이 외국의 왕에게 자신의 실제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기술되는 장면이 창세기에 세 번 나온다. 이 모티프가 후리인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족장 이야기가 기록화되던 시기에는 이미 낯선 풍습이 되어 있었다는 해석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스파이저(E. A. Speiser)였다. 이 관습이 행해지던 곳에서 남자는 결혼하면서 아내를 누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었을 것이며 이는 그 여자의 지위와 안전을 보장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스파이저의 관찰에 따르면, 현재 기록된 형태의 창세기에서 설화의 화자는 이러한 "누이로서의 아내" 관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그런 까닭에 다만 단순한기만책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설화에서 기만으로 나타나는 것(즉, 사라/리브가가 아브라함/이삭의 누이라는 사실)은, 스파이저에 의하면, 원래는 진실이었으나 "누이로서의 아내" 관습에 대한 지식이 그 이야기의 문자기록단계에 와서 사라져버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지 텍스트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한 여자를 누이로 받아들인 남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주선해 줄 의무를 지게되는 것을 보여준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아내로 취하면서 동시에 누이로 받아들인 경우의 분명한 예는 별로 없다. 그러므로, 누지 문화에 독특한 것으로 인정되는 이 어떤 관습에 창세기의 "누이로서의 아내" 이야기를 연관짓는 것은 지극히 빈약한 가설이다. 창세기 모티프에 대해 다른 가능한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신과 영웅들이 자기 누이와 결혼한 것을 말해주는 수많은 근동의 전설들, "누이"라는 말을 애칭으로 사용하는 경우 등등.
(4) 라반이 야곱을 "양자로 들임"
야곱-라반 설화를 해석하면서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까지는 이 설화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지의 풍속법을 통하여 쉽게 설명된다." 몇몇 해석자들이 야곱과 라반 사이의 관계와 밀접히 대응하는 것으로 보는 누지 텍스트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아르센니의 아들 나쉬위의 양자얻음에 관한 문서: 그는 푸히센니의 아들 울루를 양자로 들인다. 나쉬위가 살아 있는 동안 울루는 [그에게] 음식과 의복을 제공한다. 나쉬위가 죽으면 울루는 상속자가 된다. 만약 나쉬위가 친자를 얻게 되면 [상속]은 울루와 그가 공평하게 나누어갖게 되겠지만 나쉬위의 신(神)은 그의 친자만이 취할 것이다. 그러나 나쉬위가 친자를 얻지 못하면 울루가 나쉬위의 신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나쉬위는 딸 누후야를 울루의 아내로 준다. 만약 울루가 다른 아내를 취하면 그는 나쉬위의 토지와 가옥을 잃을 것이다. 누구라도 이 계약을 깨뜨리면 1 미나의 은과 1 미나의 금을 내어야 한다.
위에 인용한 내용과 야곱-라반 설화 사이에 있다고 믿어지는 상호관련은 다음과 같다. (1) 야곱이 하란에 도착한 때에 라반의 아들이 있었다는 언급이 없으므로 라반은 라쉬위가 울루를 입양한 것 같이 야곱를 자신의 양자로 들이려 했을 것이다. (2) 창31:43의 라반이 노해서 하는 말은 야곱이 그에게 (입양된) 아들임을 알게 하는데, 여기에서 레아와 라헬이 여전히 그에게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3) 야곱이 자신의 딸들 이외의 다른 아내를 얻어서는 안된다는 라반의 주장(창31:50)은 위에 인용한 계약에 나오는 바와 거의 일치한다. (4) 라헬이 "집안의 신(드라빔)"을 훔친 사건(창 31:19, 30-35)은, 위의 계약에서 신을 소유할 권리에 대한 언급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때, 유일하게 근거를 갖는 것은 세번째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와 같은 특징을 갖는 근동의 혼인계약이 시기적으로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이 창세기 기사가 2000년대의 배후 전승을 갖는다는 주장의 근거로서는 무용한
것이다.
야곱이 라반에 의해 양자로 받아들여졌다고 가정할 직접적 근거는 전혀 없다. 설화 내에서도 양자들임의 규정은 없다. 이 이야기 초반부에 라반의 아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을 그에게 아들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침묵의 과대평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그 자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야곱이 레아와 라헬을 신부로 맞기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은(신부에 대한 대가로 널리 행해진 관습인 노동력의 제공-여기서는 각 한 명의 신부에 대해 7년), 그가 야곱의 양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만약 그런 경우였다면 신부를 얻는 데 대한 대가의 지불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야곱은 라반을 자신의 장인(창 31:4-13 참조)이자 고용인이 아닌 그 어떤 관계로 대접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일관되게 이삭을 자신의 아버지로, 가나안을 자신의 고향으로(창 30:25, 31:18, 30:25) 여긴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표시했을 때 라반은 양부(養父)에 대해 이행할 야곱의 의무를 내세워 그를 만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창 30:25-28). 이에 상반되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라반이 노하여 한 창 31:43의 말은 단지 불만에 찬 사람이 내뱉은 말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라헬이 집안의 신을 훔친 것은 누지 텍스트에 의해 설명되는 바, 재산이 그 사람의 친자가 아닌 사람에게 돌아가려면 그는 반드시 그 집안의 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논의가 있다. 이 해석은, 야곱이 라반에게 양자 들었을 때는 라반에게 친자가 없었는데 그 아들이 출생하여 주상속자의 위치를 잃게 되었으리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라헬의 도둑질은, (논리의 전개상), 야곱이 양자 들던 때의 계약조항을 무효화하고, 야곱에게 상속재산의 대부분과, 라반의 사후 가부장(家父長:paterfamilias)의 지위를 확보해 주려고 의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집안의 신과 같은 상징적인 물건의 소유만으로 상속재산을 확보하게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잠재적 상속자가 생존해 있는 부친을 그와 같은 물건을 훔침으로써 협박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야곱 이야기에서 그 어떤 부분에도, 야곱이나 라헬 또는 그의 가족 중 누군가가 라반의 재산에 눈독을 들였다는 내용이 없다. 라헬의 행동에 대한 보다 간단한 설명은, 요세푸스의 언급에서 보이는 그와 유사한 사정(분명 1500년 가량 후대의 일이었을), 즉, "이 나라의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의 풍습이 있는데 자기 집에, 모시는 물건을 두고, 먼 여행을 떠날 때는 가지고 다닌다."고 한 것과 연관짓는 것일 것이다.
2) 족장들의 생활 양식
다음과 같은 존 브라이트의 발언은 60년대의 일반적인 견해를 대표하는 것이다. 족장들은 천막생활을 하는 반(半)-유목민으로서, 양떼를 위한 목초지(牧草地)를 찾아 철따라 팔레스틴과 그 주변지역을 오르내리며 때에 따라서는 멀리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까지 가기도 하는 유랑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베두인은 아니었다. ... 다른 한 편으로 그들은 (롯을 제외하면) 도시에 정착하지 않았으며 농경을 배제하지도 않았는데 아마 일부 한정된 정도로 농경을 했을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족장들은 낙타-유목민이라기보다는 나귀-유목민으로 묘사할 수 있으며, 유랑을 정착지와 그 주변지역으로 한정한 것이었다.
브라이트는 말하기를, 이러한 묘사가 족장들이 2000년대 초기의 문화적, 정치적 정황에 완전히 부합됨을 나타내 준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반유목적 목축을, 이집트의 시누헤(Sinuhe) 이야기, 마리 텍스트, 베니-하산 분묘의 벽화 등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반유목적 생활방식은, 정착, 농경 생활양식으로의 발전과정의 한 단계로서 보편적, 자연적으로 선행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가정이다. 히브리 조상들을 유목민으로 묘사하게 되면 창세기 이야기는 분명히 우리가 기대하는 바대로, 이 민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최근에 이주해 와서 아직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창세기의 족장 사화를 주의깊게 점검해보면, 초기 히브리인들의 생활이 유목적이라는 개념에서 어긋나는 특징들이 드러난다. 그들의 생활양태는 정착인들의 그것과 비교되면서, 유목적인 이스마엘 족과는 대조된다. 아브라함 주위의 사회구성은 유목집단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혈연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가 더 낮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유목적 생활인 이동방목(겨울초지에서 여름초지로의 계절적 이동)을 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족장 사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주는 계절에 따라 초지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 다른 원인에서 기인한 것이다.
2. 창12-50에 기록된 말씀들, 기록을 어떻게 이해할까?
1) 기본적인 이해
"Saga"(史話)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자가 있다. "Saga"(史話)는 전설과도, 역사와도 다른 의미로 쓰이는 말로 그 중간적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지역, 공동체의 삶과 이야기를 구전으로 전승시킬 때 그러한 이야기를 Saga(史話)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볼 때 그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공동체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공동체의 공동원에 의해서 구전되고 전해 내려온 것이라는 것이다.(oral tradition)
오늘날 성경은 각각의 saga를 하나의 이야기처럼 묶어서 편집해 놓았다.(아브라함 사화+이삭사화+야곱사화) 즉 독립된 각각의 사화를 이어지도록 편집해 놓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사화를 살펴본다. 단순히 조상들의 이야기로서만이 아닌 그들이 반유목민적 삶으로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겪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반유목민적 삶은 정착하는 삶보다 더 위험하다. 그래서 그런 나그네적 삶을 고아와 과부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목민적인 삶은 동족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동족으로부터의 추방이라고 하는 것은 끔찍한 형벌로서 누구든지 그를 죽여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사화를 보면,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하란으로 간 것은 두 지역 모두 강을 끼고 있었는데, 그 도시들은 달신(月神)을 섬기고 있었다. (추측으로 데라는 월신의 형상을 제작하는 기술공이었던 것으로 추정) 우르는 누가 보아도 번영을 이룰 수 있는 땅이었다. 데라는 사라를 며느리로 데려왔는데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함에 (남들은 다 번영하는데 자기만 번영하지 않음) 그래서 데라는 하란으로 가고자 하였다. 우르에서 하란으로 가는 길은 안전한 길(대로)이었다. 그런데 후에 아브라함이 갔던 길은, 즉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미스테리이다. 그의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로 갈 수 있는데 해안으로 가는 길과 왕의 대로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가 '세겜'으로 갔다고 하는 것은 그 중간의 길로 험한 이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모르고 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굉장히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창11:27-) 광야에서 목적지 없이 배회한다는 것은 목숨을 잃을 수 도 있기 때문이다.
2) 내용구조(창12-50)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로서 후손약속, 땅 약속을 하고 있다. 그런데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조건이 너무 미약하다. 즉 사라의 불임과 아브라함의 믿음 없음이 그것이다. 아브라함이 땅에 대한 약속을 하나님께 받은 곳은 '세겜'땅에서 였다.
야곱의 이야기는 동심원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야곱, 애서의 이야기는 인종적이다. 왜 차자인 야곱이 이스라엘 부족의 장이 되었는가? 를 설명하고 있다. (야곱과 애서의 인종적 계보를 설명하고 있음) 현재 이스라엘 국가의 기원이 야곱.(spiritual father)
야곱의 씨름기사를 살펴보면 씨름의 대상은 어떤 사람(a man)이었다. 그들이 씨름을 한곳은 얍복강이었는데, 이 씨름의 이야기를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해 보면 (1) 종교학적으로 보면 강이라는 것은 국경을 의미하는 경우로 그리하여 강을 기준으로 각각의 신이 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강 사이를 두고 어떤 수호신을 상정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다. (2) 심리학적인 이해로 이때는 야곱이 형 애서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있을 때라는 야곱의 힘든 시기로 두 진영(애서의 진영)을 보여줌으로 그 위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야곱이 애서에게 선물을 보내는데 그 선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같은 내용으로 애서에게 바쳤다. 야곱은 애서가 하나님처럼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가 야곱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aetiological(원인론적)으로 12개 지파의 구성근거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야곱의 자손이 12지파의 근거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
화이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바뀌는 이유와 벧엘이라는 지리적 장소 등도 주목할만하며, 야곱은 강력한 부족을 이루는 족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디나의 추행"이라는 추행사건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않고 세겜에서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삭에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그들의 조상의 이야기에 있어서 아브라함 때에는 이삭은 소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야곱의 이야기에서는 노인으로 등장한다. 왜 이삭의 내용이 중간에 비었을까? 이는 성경은 말하고 싶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예를들면 창22:3-4절을 보면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준비하는 내용은 자세히 다루면서 가는 여정-3일길-은 소개하고 있지 않은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요셉의 이야기는 왜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애굽에서 살게 되었을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서 살지 않게 된 이유를 요셉의 이야기에서 설명하고 있다(요셉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요셉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도 신앙적인가르침을 준다).
요셉의 이야기는 Narrative 의 형식을 가진 "Novella" 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요셉의 이야기는 소설화시킨 장르임). 요셉은 늘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보디발의 아내의 이야기이다. 보디발의 아내는 둘 만 있음을 말하면서 유혹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계심을 늘 기억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유혹을 이긴 것이다. 요셉의 주제는 상급과 상승이다. 이 요셉의 이야기는 후대의 이스라엘인들에게 긍지를 주는 이야기로 요셉의 지혜가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애굽은 "지혜전승의 왕국"이었는데 그런데 그런 애굽을 요셉(이스라엘인)이 먹여 살린다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그 어떤 지혜자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런 이스라엘인이 애굽을 다스린다고 하는 긍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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