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강해 6>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5:7-
8복의 말씀 중에서 오늘은 다섯 번째인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침착하게 살펴볼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좀 재미가 덜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팔복 설교를 시작할 때 재미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이해를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설교에서 재미를 느끼기보다는 진리를 듣는 기쁨을 추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에 붙잡혀 살아가기를 갈망하기를 바랍니다. 이 설교는 ①본문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을 먼저 한 다음에 ②긍휼이라고 하는 말의 일반적인 의미와 ③하나님과 긍휼에 대해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④우리가 긍휼을 실천하는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Ⅰ.본문 말씀을 성경 문맥 속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한 번 더 읽어 봅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마18장에 나오는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유의 말씀들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거나 용서를 받기 위해,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일관된 선포는 우리가 주님께 용서를 받거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은혜로, 값없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긍휼히 여겨야 하는 것은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긍휼히 여김을 받고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삶,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긍휼이나 용서는 긍휼히 여김을 받고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긍휼히 여김을 받고, 용서를 받은 자의 삶의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해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받을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김을 받았으니 긍휼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아 용서와 구원을 받은 사람의 마땅한 자질은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것임을 알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doing(행위)을 말하기 이전에 being(존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존재:being)가 되었기 때문에 행위(doing)가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8복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여덟 가지 자질들에 대한 말씀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자질이 부여되었고 그러므로 그렇게 살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었기 때문에 그런 자질들을 다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가득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8가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질들을 가짐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나타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주님의 요구를 우리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 못된 태도는 자신이 알곡이 아닌 쭉정이임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 양이 아닌 염소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그러나 아직] 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천국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주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처럼 절실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얄팍한 꾀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긍휼이 있는 성도가 되기를 절실히 사모하고 힘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Ⅱ.‘긍휼’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째 대지에서는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긍휼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현대인들이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교회 밖에서 긍휼이라는 단어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은 마치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특별한 용어처럼 이해되고 있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여러분은 긍휼 하면 얼른 그 단어의 의미가 마음에 와 닿거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용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할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가엽게 여겨 돌보아 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불쌍히 여겨서 돌보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긍휼이라는 말은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나 [동정], [연민] 등과 동의어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긴다, 동정한다, 연민을 느낀다 등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이해가 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라는 말이 여러분의 마음에 잘 와 닿지 않거든 불쌍히 여긴다, 동정한다, 연민을 느낀다 등의 말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긍휼에 대한 사전적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때 “가엽게 여겨 돌보아 줌”이라고 한다고 했다는 데에 주의를 집중하기 바랍니다. 긍휼은 어떤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감정과 그 감정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돌보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은 단순한 감정에 머물면 긍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감정을 따라 실천을 해야 진짜 긍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긍휼이 단순한 감정 이상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참된 긍휼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 선한 사마리아인 이 세 부류의 사람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실제적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들의 긍휼은 감정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관심뿐만 아니라 그를 돌보는 수고를 하였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긍휼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실제적인 돌봄,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도움의 손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복 된 사람임을 말씀해 줍니다.
Ⅲ.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①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②우리를 특별히 돌보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그저 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를 돌보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않으면 안 되는 좋지 않은 상황,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한 없이 불쌍해 보이는 어떤 모습을 갖고 있었다는 얘긴데, 그게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에 대해 가장 잘 밝혀 주고 있는 성경이 저는 사도 바울의 서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에베소서2장 4-5절을 함께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자극할만한 어떤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고 그 비참한 상황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비참한 상황을 바울은 엡2:1-3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우리가 처한 비참한 상황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첫째, 죄로 인하여 우리는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할 힘과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물리침을 받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비참한 것은 개선 가능성이 없을 때 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아질 수 있다면 소망이 있고, 그 소망이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죄에 빠진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의 운명을 개선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저주 가운데 있고,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이 확정된 것입니다. 죄 가운에 있는 인간은 사형판결을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둘째, 인간의 비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죄만으로도 영원한 형벌이 확정되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삶, 죄에 죄를 더하고, 그래서 진노에 진노를 더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는 사형판결을 받고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가 난동을 부리고, 살인을 저질러서 사면의 가능성까지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것과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난 것만도 비참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보다도 천만 배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만 골라서 행하면서 일생을 살므로 사면의 가능성이 완전 제로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면의 가능성조차 없다는 것,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용서조차 구할 수 없다는 것, 이보다 비참한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 처한 것에 대해 성경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진노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는 잡혀서 죽기 위해 태어난 짐승보다도 못한 형편입니다. 짐승은 죽음으로써 생과 함께 고통도 끝납니다. 그러나 죄인 된 인간은 죽음은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죽음 이전의 고통과 죽음 이후의 고통은 비교할 수도 없이 큽니다. 성경은 그곳을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지옥의 고통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이렇습니다. “불과 유황 속에서의 밤낮 쉼 없이 세세토록 고난을 받으리라”(계14:10~11). 1분 1초도 멈추지 않고 고통은 계속됩니다. 휴식 시간이 없습니다. 숨 돌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옥에 던져질 때에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세세토록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끝이 없습니다. 애원해도 소용없고, 빌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거나 그 형벌을 그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아담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비참한 지옥에 던져 버린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마음으로만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그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서 죽고, 도무지 자신의 운명을 개선할 힘도 능력도 없이, 마귀의 종 되어 진노에 진노를 더하며 살아가는 비참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성경은 이 하나님의 긍휼을 “불붙는 긍휼”이라고 말씀합니다(호11:8). 하나님께서는 지옥의 불꽃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고통 받는 영혼들을 바라볼 때 자신이 불로 태움을 받는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까지는 영광도, 안식도, 평화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아들로 하여금 인생들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저 마음으로만 긍휼히 여기시지 아니하고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는 참혹한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살리시는 긍휼 덕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긍휼을 아버지가 되어서 조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내 자식이 아파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면서 타는 듯한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내 자식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혼의 깊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조금 더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눈물로 호소하여도 듣지 못한 채 멸망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온갖 고통과 고난을 다 당하면서도, 온 몸과 마음과 삶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거의 죽다시피 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이킬 줄 모른 채 완고하고 완악하게 불신앙의 삶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참 가슴이 아파서 울고 또 울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의 불붙는 긍휼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또 이 땅의 경건한 부모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병든 자식, 방황하는 자식, 자꾸만 어둠의 길로만 가는 자식을 바라보면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을 기도실에서 자주 만납니다.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은 천만갈래로 찢어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나를 보시는 주님도 저러셨을 테고, 지금 내 모습을 보시는 주님도 저러실 텐데 하는 생각에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으며 울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을 떠나 저주의 길을 가고 있을 때 주님은 아파하셨습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흘리신 눈물이 자 강물보다 많고 대양의 물보다 많을 것입니다. 이 긍휼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 긍휼이 지금 이토록 믿음 없고, 넘어지기 잘하고 쓰러지기 잘 하는 우리들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자라고 성장하게 합니다. 오늘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끊임없이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Ⅳ.긍휼을 입은 사람으로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긍휼에 대해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복을 받은 자는 그 받은 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연쇄적인 긍휼의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온 땅과 만민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게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긍휼을 먼저 입었기 때문에 긍휼을 나타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긍휼을 베푸는 사람으로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받은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삶은 그들이 주님을 믿고 신뢰한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5-16).
이 말씀은 자신 같은 죄인이 긍휼을 입은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비열한 죄인도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시는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델로 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으로서 긍휼히 여기는 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긍휼의 빚, 사랑의 빚을 얹어주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면 이 세상 그 어떤 죄인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다면 나는 그 어떤 사람도 긍휼히 여기는 데에서 제외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비열한 죄인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의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돌이킴에 대한 소망을 잃지 맙시다. 그 어떤 사람도 긍휼히 여길 대상자 명단에서 빼지 맙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 애통하는 자가 되고, 그들이 주님께 돌이킬 때까지 온유함으로 섬기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영혼을 살리는 데 쓰기에 아끼지 않도록 합시다. 배고파하는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합시다. 억눌린 자 갇힌 자를 동정하여 그를 자유케 하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긍휼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날마다 주님의 긍휼을 묵상하면서 뜨거워지고, 긍휼히 여기는 자의 삶을 살면서 주님의 긍휼을 이해하고 느끼면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침이 없이 살아갑시다. 이런 긍휼의 삶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평안과 안식과 영광이 있는 천국으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주님의 영광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한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긍휼을 실천하라고 주신 자원들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많은 자원들이 있겠지만 시간 관계상 세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돈은 세 가지 용도로 쓰여져여 한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그 첫째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와 가정을 위해서 쓸 것입니다. 셋째는 이웃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긍휼의 실천을 위해 쓸 것입니다. 물론 나 쓰기에도 부족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위해 쓸 것을 아껴서 이웃을 위해, 긍휼의 실천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쓰는 것은 소비가 아니라 하나님께 심는 것(투자)입니다. 반드시 하늘의 보상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지식입니다. 어느 고등학교(ㅈ 고등학교)에는 “공부해서 남 주냐? ······”는 프랭카드가 걸려 있답니다. 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부해서 남 주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수련회 때 여러분도 들었을 것입니다. [돈 벌어서, 공부해서 남 주는 인생이 되자!]. 이 구호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시 이렇게 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예를 얻습니다.
셋째, 복음입니다. 물론 이 복음이 세 번째로 중요한 게 아니라 첫 번째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세 번째 말하는 것은 첫째 둘째는 안하면서 복음 전하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에 빠질까 우려해서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이 복음뿐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이들을 살리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영혼들을 지옥과 이생의 불행과 고통과 무가치한 삶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이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이 복음을 나눠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최대의 긍휼임을 아십시오.
이렇게 우리에게는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자원을 하나님이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이 자원들이 흘러나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도록 마음의 둑을 터놓으십시오. 거침없이 흘러가서 하나님의 살리는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행복으로 가는 길 ⑥
마5:1-12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 : 8
지난 주 우리는 행복으로 가는 길... 다섯번째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행복으로 가는 길... 여섯번째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신이 사람에게 행복을 주실 때, 바로 주시지 아니하고 천사에게 맡겨서 너희가 갖다 주어라 그랬습니다.
그 천사들이 너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좀 마음에 걸려서 질투가 생겨 가지고 행복을 숨겨두기로 했습니다.
저희들끼리 의논을 하고 “바다 깊은 곳에다 숨겨둘까?” 했더니
다른 천사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재주가 많아서 그거 다 찾아 낼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주 높은 산중 꼭대기에다 갖다 감춰놓을까?”그랬더니
사람들은 모험심이 많아서 거기까지 뒤져서 행복을 다 찾아 낼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천사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자기 머리만 믿고, 재주만 믿고 자랑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가슴에다 두면 못 찾을 거라고 했습니다.
정말 사람들은 자기 머리만 믿고 자랑하면서 가장 가까운 가슴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더라. 라는 얘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행복이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예화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만 깨닫고 살아도... 쉽게 행복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환경 속에 행복이 있는 줄로 착각하고,
보다 더 나은, 보다 더 좋은 환경만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진정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생각하는 일반적인 행복이 무엇인지 몇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행복입니다.
-이것은 물질 때문에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둘
째는 환경적인 행복입니다.
-이것은 환경이 좋을 때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셋째는 존재론적인 행복입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복이 가치 있는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덟 가지 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문에는 ‘복되다’라는 말의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라고 단어를 시용하고 있습니다.
원문을보면 3절~11절까지
10번을 매 절마다 첫 절이 복수형 ‘마카리오이’(μακάριοι)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복된 자들이여”
“마카리오이” 하고서... 복된 자들은 어떻다는 것을 설명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이런 사람은
‘복됩니다가 아니고.., 복된 사람은 이렇습니다’ 라고 설명을 합니다.
본문에 이 ‘마카리오이’라고 하는 단어가... 아홉 번 있습니다.
3절부터 11절까지....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은...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복에 대한 것입니다.
이 복 속에는 잘사는얘기, 부자로 사는얘기, 출세하는얘기, 소유나 정치, 경제 이런얘기가 전혀 없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속에는
세상적인 관점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물질적이거나 환경적인 복의 말씀은...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팔복의 말씀 속에는...
환경이나, 소유나, 지위에 대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율법적인 행위와도 관계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팔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복은... 영적인 것들입니다. 심령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가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요삼1:2
사랑하는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영혼이 먼저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도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영혼이 먼저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활 속에서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날 인간은 왜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영혼이 병들고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병들고 파괴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더러운 그릇에 아무리 좋은 것을 담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담은 것도 곧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영혼에 아무리 좋은 것을 담아보아야 더러워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청결이 먼저 이루어 져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되기 전에는... 세상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이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더러워진 심령을 깨끗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눈에는 예수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만을 부러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권세를 부러워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권세를 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권세도 일장춘몽인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난 4-50년 어간에 우리나라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역대 대통령들을 보세요
이승만전대통령, 박정희전대통령, 전두환전대통령, 노태우전대통령, 김영삼전대통령, 김대중전대통령
모두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한결같이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외쳤지만...
국민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행복하지 못하게 살았습니다.
권력도, 돈도, 권세도 좋지만...
부나비가 불속으로 뛰어 들듯이... 자기를 망치는 탐욕의 소산들입니다.
-재물이나 권세가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재물이나 권세가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복이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가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음이 청결한자가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진정한 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음이 청결한자가 복이 있다 고 말입니다.
1).그러므로 먼저 성경이 말하는“청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전에 보면 청결(淸潔)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 지저분한 것을 없애어 맑고 깨끗함.
청결의 반대말은 ↔ 불결입니다. 불결이란 더러운 것을 말합니다.
한자로는...맑을 청(淸)에 깨끗할 결(潔)자로서 그 뜻은... “맑고 깨끗함”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cleanness [klínnis] 로서... 정결하고 깨끗함을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로...oiJ kaqaroi; th'/ kardiva/
[호이] [카싸로이] [테-] [카ㄹ디아]
청결한의 원형인 kaqarov"[카싸로스]는... 깨끗한(clean) 순결한(pure)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더러움에서 깨끗케 하다” 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말이나 행위, 그리고 환경이나 삶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곧 내적 심성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말이나 행위가 거룩해보여도 마음과동기가 불순하면 이미 그 거룩함은 위선이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겉과 속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그리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언제나 중심을 보신다...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2) 더러운 심령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영적인 소경된 것입니다.
왜 소경이 되었습니까?
죄가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연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가 차를 타고 어디를 가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남편이 운전대에 않았습니다.
그런데 차가 더러워서 앞이 안 보입니다.
남편은 아내더러 윈도우를 닦으라고 합니다.
아내가 윈도우를 닦았습니다.
그런데도 앞이 잘 안보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소리칩니다. “잘좀 닥아”
그런데 아내는 깨끗이 잘 닦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화가 나서 차 박으로 나와서 한마디 합니다.
“유리창 한번 제대로 못닥느냐” 고 합니다.
그때에 아내가 남편의 얼굴을 보니 안경이 더러운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애기합니다.
“차가 더운 것이 아니라 당신 안경이 더러운거에요.”
남편이 안경을 벗어서 닥고 보니 정말 차가 깨끗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 죄가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앞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죄가 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1)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2) 거룩하고 의로운 것을 모릅니다.
(3) 불신이 가득 차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안경을 쓰고 살아갑니다.
=독수리는 산 짐승을 찾고, 까마귀는 썩고 부패한 고기를 찾습니다.
=돼지와 양이 먹는 음식 또한 다릅니다.
이처럼 마음이 청결한 자와, 세속적인 사람의 찾는 것이 같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며, 그 해결책을 찾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폭풍우나 산울림,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도 하나님이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말씀이 주어지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고, 결국은 찾는 자에게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느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더러워진 심령을 깨끗케 씻지 않고는 행복의 길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마음의 청결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창 6:5, 8:21에...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그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함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악하고 음란한 인생을 과연 누가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렘 13:23).
사람이 조각한 조각품에 생명을 넣을 수 없듯이... 악한 인간이 정결한 마음을 갖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 삼위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뵐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이요, 여기서부터 인간의 절망이 시작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살면서 하나님을 뵙는 동안에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겨 하나님을 뵐 수 없게 되자 행복이 다 사라졌습니다.
인간의 심령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된 연고로
하나님을 뵐 수 없게 되자... 급기야 무신론자가 되고 우상숭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17:9)라고 말씀하셨으며,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하늘에 있어도 그 빛이 온 누리에 비치는 것과 같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의 무소부재하신 속성으로 우리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뵙는 복을 누리려면... 무엇보다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외모를 아름답게 하고 청결하게 하는 데에는 신경을 쓰고 돈을 아끼지 아니하면서도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모가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혹은 의복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행위가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기만하기 위해 행위를 청결하게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온갖 나쁜 마음을 다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16: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는 말씀은 참으로 귀중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석탄을 아무리 씻어도 검은색입니다.... 검은 석탄이 색이 바뀌려면... 불속에 들어갔다 나와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는... 스스로는 씻어 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더러움은... 스스로 씻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고쳐 주셔야만 새롭게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도록...방법을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1)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고 더러운 우리의 심령을 청결케 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을 부패케 한 죄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씻을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수양이 나 선행도 다 쓸데없습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원숭이를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보다 더 무익합니다.
원숭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해 주고 훈련을 시킨다고 해서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마음이 청결해지려면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이러한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1:18)『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벧전1:18,19)『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러기에 J.X께서 이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실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기의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이같이 조롱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예수님을 향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희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을까요?
능력이 없고 권세가 없기 때문입니까? 천군천사가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 당장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로마군인과 대제사장 및 서기관, 장로들을 모두 없애고... 자신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 도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심판을 받아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정결케 할 수 없었던 부패된 마음을 예수님의 보혈로써 정결하게 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고 몸 찢으며 죽었다가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보다 나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늘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타락하고 병든 인간이 할 일은... 오직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이 길만이 인간이 새롭게 되는 길입니다. 이 길만이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이 길만이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버스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
뜻밖의 죽음 앞에서 억울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특별히 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 차번호를 잘못 봐서 차를 잘못 탄 사람
- 졸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 온 사람
- 떠나는 버스를 향해 손들고 뛰어가서 힘들게 겨우 탄 사람 ...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비슷한 경우로 큰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차번호를 잘못 봐서 차를 탄 잘못 탄 사람같이,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데도 바른 줄로 착각하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졸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온 사람같이
무감각한 채로 목적지도 잃어버리고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떠나는 버스를 향해 손들고 뛰어가서 힘들게 겨우 탔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같이
경쟁사회에서 아둥바둥 땀을 흘리며 눈앞의 것만을 쫓아가다가 결국 큰 불행을 당하고 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행복의 길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기에(요1:12-13)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마음을 부패케 한 죄를 모두 씻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일지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세상의 자랑으로 마음이 추해지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얻은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속에 젖도록 내버려 두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담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를 당했을 때를 대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책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풍성히 거하게 하면 됩니다.
성경은『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와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골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유혹과 세상의 탐욕과 온갖 약한 것이 다가올 때 이를 다스리고 내어 쫓는 능력이 말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시편시119:9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고 말했습니다.
청년기는 혈기방장(血氣方壯)하여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기 쉬운 때이지만 마음속에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충만하게 하면 말씀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삼가 하게 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은『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5:26,2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이 말씀이 물처럼... 우리의 심령을 씻어줍니다.
마치 샤워를 하면 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가 우리의 몸이 깨끗해지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씻어주므로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씀을 듣고 설혹 잊어버려도 좋으니... 말씀을 많이 들으십시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 영혼이 청결케 되는 것입니다.
가끔 성도님중에 제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이젠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잊기를 잘해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을 때는 은혜를 많이 받는데
집에 돌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 받은 말씀을 들려주려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한 말씀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는 것이 헛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러한 성도님에게
"그렇지 않습니다. 헛일이 아닙니다. 말씀은 잊어도 좋으니까 계속 교회에 나오십시오. 하나님 말씀은 물이라고 했습니다. 예배 때마다 참석하여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을 청결케하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2)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죄의 유혹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방탕함이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방탕한 유혹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라도... 성령으로 충만하면 이를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술에 인이 박혀서 술을 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나와도 술만은 못 끊겠습니다."
"나는 담배에 인이 박혀서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나와도 담배만은 못 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성도님이 있는데...
자기 힘으로 술과 담배를 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여, 내게 오시옵소서. 내게 충만하게 임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여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술이나, 담배 먹고 싶은 생각이 어느 틈에 없어지고 맙니다.
또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불같은 능력으로 추악한 생각을 태워버리고 마음의 생각을 새롭게 해 줍니다.
석탄은 아무리...화학약품으로 씻어도 희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 속에 넣으면 검은 색깔이 사라지고 찬란한 빛깔이 되어 활활 타오릅니다.
우리에게 울어도. 힘써도 변화 시키거나 없앨 수 없는... 석탄 같은 좋지 못한 습관이나 죄가 있을지라도
성령으로 충만함 받으면... 성령의 불길이 이 모든 것을 변화 시켜서 우리의 생활 속에 찬란하고 빛난 품성을 드러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면... 마음속에 신령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인품에 놀라운 품성을 심어주는데 이는 어느 누구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추하고 더러워진 마음이 청결함을 입게 되고 밝고 맑은 마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도록 주신 대책은... 세 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원적인 죄를 청결케하기 위해
=보배로운 피로 우리 죄를 청결케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으며,
=또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사는 동안 생각으로, 입술로, 행동으로 죄를 지을지라도
이를 청결케 하기 위해 물과 같이 씻어 청결케 하는 말씀을 주셨고,
=불과 같이 태워 청결케 하는 불 같은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써는...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청결케 하려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대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을 날마다 받으며
성령의 도우심을 날마다 구하여 죄와 유혹을 이기고 마음을 청결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4) 끝으로 마음이 청결케 된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느 곳 에서나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먼저 자연계에서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깊은 통찰력을 가진 시인,
사색과 명상의 오솔길을 걷는 철학자,
시험과 연구에 생애를 바치는 과학자들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말씀과 성령으로 청결한 마음을 얻는 체험을 하지 못하면
자연세계의 조화와 질서를 단지 "불가사의한 신비"하는 말로써 설명을 끝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말씀과 성령으로 마음이 청결하게 된 사람은
자연계의 경이한 현상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자연계에 눈을 돌리고 생물의 생태를 면밀히 관찰 할수록 상상을 초월하는 오묘한 조화와 질서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망원경이라도 측량할 수 없는 끝없는 우주의 심연과 셀 수 없는 별들,
그리고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지만 실재하는 전자와 원자핵, 양자 중성자로 불리우는 기막히게 미세한 원자들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증력과 솜씨를 느끼게 되어 감탄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작은 꽃잎의 한들거림, 가을바람에 지는 낙엽소리, 울며 날아가는 철새의 대열과 이름 모를 조그마한 벌레의 꿈틀거림 속에서도 우주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느끼며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무신론자인 소련의 우주 비행사의 불신의 눈으로는
광활한 우주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은 없다"하는 망령된 말을했지만.
하나님을 믿은 미국의 우주 비행사의 믿음의 눈에는 광대무변한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 이처럼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자연계에서도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로마서 1:20)라고 말했으며,
다윗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편19:1~4)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마음이 부패한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낡고 가치 없고... 잠오게 하는 책이라고... 말하면서... 던져 버립니다.
그러나 청결한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다정한 발걸음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를 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되므로
"아, 나는 오늘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즉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있고
지진이 나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예언서에 기록된 말씀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그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수 많은 종교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우상을 섬기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계시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그를 힘입어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구만리장천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 늘 계셨으므로... 그는 마음으로 늘 하나님을 느끼며 살았던 것입니다.
에녹은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에녹이 비상한 일을 이루어 놓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녀를 낳고 하는 평범한 생활을 했지만...
마음이 청결했기 때문에... 매일 하나님과 함께 살며 하나님을 뵙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곁에 있어도 영적으로는 접촉할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인생관이 다르고 철학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이상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은 곁에 앉아 있어도... 영적으로 거리감을 느낍니다.
그
러나 공간적으로 수 천리 떨어져 있어도... 긴밀하게 연합된 관계가 있습니다.
직장, 교육, 사업관계로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수만리 떨어져 있어도... 영으로는 늘 함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하늘보좌에 게시지만... 영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사도바울은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는 말을 했던것입니다.(고전 5:3).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시는 손길을 보며 살던 사람은... 천국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하나님의 영화로우신 모습을... 온전히 뵐 수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고 눈이 멀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니니아를 통하여 치료해 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장님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서 영광의 주님을 보고... 엎드려져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있는 동안에는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뵙듯 뵐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부활의 몸으로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그가 계신 그대로 뵙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거울로 보는것같이 희미하게 뵙지않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 영원히 주님을 뵙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3:12).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이 제일 큰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마다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좋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욥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주께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뵈옵나이다"(욥42:5)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믿음으로 시험을 극복하여 가는 가운데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주님을 볼 수 없으면 영적인 소경입니다.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영적인 귀머거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깨끗한 마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낼 수 있는 사명과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민족을 회개시키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서 주님의 황홀한 모습을 보았습니다.(마17:1-4)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6)
하나님은 영적이고 거룩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영적인 만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생의 새로운 비젼과 목표와 사명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본 자는 즉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 어떻게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악이 씻겨 졌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의 불태워졌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영혼은 새롭게 되었습니다. 청결한 심령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거룩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온전히 교통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따른다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기쁨과 희락과 행복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는 주 예수님과 성령의 은혜로서 영혼이 청결케 된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 받은 자들입니다.
그 복은 하나님을 보는 복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복입니다.
날마다 주 예수와 동행하시고, 말씀 안에 거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시므로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매 순간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시므로...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으며 사는
복된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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