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내용!! 강해!!

[스크랩] <팔복강해 5>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하나님아들 2014. 1. 1. 16:21

행복으로 가는 길 ⑤

2007. 5. 27(주일오전)

마5:1-12

지난 주 우리는 행복으로 가는 길... 네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행복으로 가는 길... 다섯 번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먼저 성경이 말하는“긍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긍휼( 矜恤 )의 사전적인 정의는... “가엾게 여겨 돌보아 줌” 입니다.

한자로 긍(矜) 휼(恤)... 불쌍히여길 긍(矜)

구휼할 휼(恤)로서...가엾게 여겨서 돕는 것

(흉년이 심할 때에 왕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구휼미를 내림)

“긍휼”이란? “자비”와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긍휼” “자비”보다 “더 큰 자비”입니다.

자비를 영어로 “mercy” 라고 하는데...그 뜻은...“인정”, 혹은 “용서” 를 의미 합니다.

그래서 자비를 베풀다 라고 할 때 영어로는 “merciful-머시풀” 이라고 합니다.

넘치는, 많은... 이라는 의미의 “ful-풀” 이 함께 접합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표현...“자비를 많이 베풀다” 라고 할 때... 바로 이것이 “긍휼” 입니다.

한마디로 “긍휼”은... 불쌍히 여기거나 가엾이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 “긍휼”은... 왕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재판관이 죄인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긍휼”은...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긍휼”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된 인간에게 베푸시는 마음이... 곧 “긍휼” 입니다.

특히 “긍휼이란” 비참한 상태에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일을 말합니다.

구약에 “긍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명사중 가장 많이 씌어져 있는 말은...

[히] !ymij}-[라하밈]인데,

이는 주로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형이 동생에 대하여 가지는 혈육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다윗이 반역한 아들을 향하여...

“내 아들 압살롬아” 라고 울부짖는 마음)

[히] !ymij} - [라하밈] 이라는 단어는

시 103:13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사 13:18에 [태의 열매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49:15에 [여인이 어찌…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않겠느냐]라는 말씀에 쓰여지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간절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七十人譯 헬라어 구약성경)에서

긍휼을 [엘레오스 e]leo"(eleos)]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불쌍히 여김, 연민, 동정심...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이 “긍휼”이란...

자기보다 못하거나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 연민의 정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긍휼은... 우리가 상상을 초월한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하고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타락하고 범죄한 인류를 향해 펼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실수로 인한 죄나 잘못은 용서받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용서받은 후에도 동일한 죄와 잘못을 계속해서 저지른다면 용서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일한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완전히 외면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으므로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으니,

그들이 선택한 이방신에게 가서 구원을 구하라고 하시면서... 냉정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다”(삿 10: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근심한다는 말은 '참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난과 아픔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셨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긍휼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경곳곳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고 말씀합니다.

이같이 범죄한 인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롬 6:2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인간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인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오래 참으심과 자비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때로는 권면으로, 때로는 설득으로, 때로는 징계하심으로... 그들을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해서

우리의 죄를 그냥 묵과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고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는... 크신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절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시되 가장 치욕스런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진노와 긍휼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과... 사랑에 대한 긍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에게 크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최초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 했습니다.

범죄한 그들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양을 잡아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의 제사들을 보십시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를 하면...

그들은 그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가지고 성전에 나가서...

그 비둘기를 잡아... 제단에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죄가 용서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그러기에 죄를 지은 그들은 예외 없이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짐승에게 죄를 전가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 긍휼의 절정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희생으로 인하여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인간들의 죄악의 실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살수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타락하였으며, 우상에 빠졌으며...

그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롬5: 6. 8. 10)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2). 우리는 긍휼을 입은 사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긍휼을 받은 자들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오늘 이 자리에...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래 어떤 존재들이었습니까? 엡2:1-3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과거에 우리는 허물과 죄가 가득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사단과 함께 죄를 지으며 소망 없이 살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멸망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엡2:4-5에 보면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범죄와, 타락과, 하나님을 향한 거역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범죄하엿음에도 불구하고...거역하고 배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대하여 대적했음에도 불구하고...계속하여 오래 참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

이 불쌍히 여기심....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 긍휼은... 이스라엘의 약함, 비참함, 범죄함을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긍휼은... 이스라엘의 약함, 비참함, 범죄함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과거 우리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입고, 마시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은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죄악된 세상에서 죄를 지으며 사단과 짝하며 살았습니다,.

=

그때에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보내사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죄인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물든 인생들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마 18:33)

마14:14절에서 예수님은

그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사 병든 자를 고쳐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불쌍히 여기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펄랑클라' 라는 말인데 이는 심장이라는 말입니다.

즉 주님이 불쌍히 여기사라는 말은... 그의 아픔을 나의 가슴 속 깊이로 느끼는 아픔을 말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마음으로 병든 자들의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시고 다가가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이것이 긍휼입니다.

막3장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실 때...

손이 비틀어진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셨습니다.

막10:46절에도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칠 때, 그를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십니다.

마20:30절에도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칠 때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져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마15장 21절에도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있는 가나안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 고쳐주옵소서.' 할 때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사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눅4장에도 보면... 열병으로 다 죽어가는 베드로의 장모를...

주께서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셨습니다.

막1장에도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기를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할 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얹어 안수할 때 문둥병이 떠나갔습니다.

J시대에 문등병자는 가족들과 함께 살지도 못하고

마을 바깥에 골짜기나 굴속에서만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 문둥병자들은 사람취급도 못 받았습니다.

길을 갈 때도 부정하다, 부정하다 말을 외치고 다녀야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했습니다... 부모.., 형제.., 가족들조차도 그들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만져주셨습니다.

문둥병은 영적으로 죄를 상징합니다. 죄로 인하여 얼룩진 영혼을 누가 상대해 줍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죄인 된 인간을 만나주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오래 전에 충청도 어느 마을에서

유명한 부흥강사 한 분이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안수기도를 하게 됐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에 안수기도를 하는데 줄을 쫙 서 가지고 한 분, 한 분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는데

한참 안수하는데 한 분이 밀짚모자를 쓰고 와서 안수기도를 해 달래요.

그래서, 이 부흥강사 목사님이 밀짚모자를 벗으라고 그러니까... 그냥 해 달랍니다.

자꾸 모자 벗으라고 했더니... 자꾸 그냥 해 달라고 하드래요.

이 부흥강사님이 기분이 나빠 갖고 모자를 벗으라고. 그랬더니

목사님, 제발 그냥 기도해 주세요. 할 때에...

그냥 모자를 확 잡아 재낀 후에 보니까... 문둥병자였대요.

이 부흥강사님이 앞이 캄캄하더래요. 이걸 안수를 해야 될 것인가 말아야 될 것인가.

그런데...이 분이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애따 모르겠다. 눈을 딱 감고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눈을 떠보니까... 희한한 일이 벌어졌어요....

방금전|까지 그렇게 안수기도 받으려고 줄을 그냥 끝이 없도록 서있었는데... 한 사람도 없더래요.

몇 년이 지난후... 그 옆 동네 집회를 하는데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어서 설교를 하면서... 내가 이 옆 동네에 왔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했더니

저 끝에서 중간쯤에 있는 어떤 분이 막 일어나서 손을 흔들면서 '목사님,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 그러더래요.

사람이 병들면... 부모 형제도 옮길까봐 도망갑니다...

피합니다.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문둥병자도 고쳐주시고, 중풍병자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사람도 고쳐주시고,

하열병으로 고통 받는 여인도 고쳐주시고, 눈먼 소경도 피하지 아니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과 제사장, 레위인등...멀쩡한 사람들은... 그들을 내어 쫒았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매몰차게 그들을 다 동네에서 내어 쫒았습니다.

여러분, 건강하십니까?

건강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 꺾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병들었다고 비웃지 마십시요. 나도 언제 병들지 모릅니다. 몸 하나 건강하다고 자랑할 거 못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불구자 되고 병원신세 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겉은 멀쩡한 것 같아도 속은 다 멍들고 병들어 있습니다.

오늘뿐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몸은 건강해도 마음이 병들고 정신이 병들고 생각이 병들었습니다. 모두가 다 병들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몸살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1장 4절로 6절에 말씀하십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성한 곳이 없이... 모두 병들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주님께 고침받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귀찮아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모두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병든 인간이 고침 받는 길은... 오직 주 예수 앞에 나가는 길 뿐입니다.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내 병을 고쳐주옵소서”

라고 부르짖어 간구할 때 주님은 응답하시고 치료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의 값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악이 너무 중다할 뿐만 아니라 인간은 값을 치를 만한 힘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친히 그 아들을 나무에 달아 죄 값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을 입었습니다.

과거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등지고 사단과 짝하여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도전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속아서 얼마나 많은 수모와 농락을 당하였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어떻습니까?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사탄의 종도 저주의 대상도 아닙니다.

주님의 대속의 은혜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다시금 모든 축복과 권리를 되찾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며 내가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다가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를 하나밖에 안 계신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늘아래 이보다 더 큰 긍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3).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얼마전에 홀아버지와 함께 살던 초등학교 6학년 어린아이가 30여일간 죽은 아버지와 한 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지내다 집주인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30여일 동안 이웃 사람들이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무어라 말할 수가 있을까요?

요즘 사람들을 보노라면...동정도, 인정도, 용서도 없는 듯합니다.

모두가 흑과백의 논리 싸움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돌을 집어 들고 상대를 때릴 태세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작살이 날판입니다.

남이 죽던지 말든지, 병이 들던지 말든지, 망하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날은 무관심과 비정함이 팽배한 시대입니다.

긍휼이 없는 시대입니다.

불쌍히 여기지 않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왜 우리가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앉아있는 것도 주님의 긍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만약 주의 긍휼이 없었다고 해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죽음의 권세로부터 우리가 구원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긍휼 때문이요 마귀의 종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뀔 수 있었던 것도 오직 주님의 긍휼 때문이 아니었던가요.

우리가 어떻게 해서 주님께로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까?

주님의 긍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긍휼이 있기 때문이요

주님 앞에 나와서 담대히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 또한 주님의 긍휼하심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무서운 심판과 시퍼런 칼날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가 감히 그 앞으로 가겠어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아무도 이 긍휼을 피할 수 없고 또 긍휼을 입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너무나 큰 긍휼을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긍휼을 입었기에... 마땅히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노라하면서 긍휼을 베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실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적이고 큰 은혜인가를 우리가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더욱 긍휼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둘째 세상은 긍휼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가야 하는 중요한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숱한 불행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를 잠시 둘러보십시오.

어디서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절규로 가득 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의 신음 소리와 통곡소리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실의에 빠져 절망하는 자들의 아픔과 고통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슴에 안고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북동포를 위한 기도입니다.

얼마 전에 북한을 탈출해서 공안원의 추격을 피해 도망가다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 붙잡힌 젊은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잡히자마자 했다는 말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를 이곳의 감옥에 쳐 넣어도 좋으니 북한으로만은 돌아가지 않게 해 달라.'

그들이 얼마나 북한사회에서 심한 학대와 고난을 받았으면 오히려 감옥행을 자청했겠습니까?

지금도 토굴 속에서 나뭇가지에 비닐 한 장만 쳐 놓고 눈비를 피해가면서, 감시의 눈을 피해가면서, 인신매매단의 착취와 협박을 가까스로 피해 다니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탈북자들이 많습니다.

(복한의 실상은 우리가 지난번 선교사님을 통하여 들어서 알고 잇지 않습니까?)

비단 북한사람들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많은 불행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돈이 없어서, 춥고 배가 고파서, 쉴 곳이 없어서, 의지할 데가 없어서, 치료받지 못해서 고통 받는 이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엊그제 신문기사...치료비가 없어서 병원에 안가고 집에서 자기가 꿰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잘못된 이 세상의 불행이 치유되고... 해결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탁월한 정치력이나...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긍휼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도움의 손길을 펼 때...

그 순간부터 그들의 불행은 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와 여러분에게 그토록 크신 긍휼을 베푸셨을까요?

우리에게 세상에 나가서 긍휼을 베풀라고 우리에게 크신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긍휼한 삶을 통해서

이 세상의 불행들이 치유되고... 이웃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긍휼은 사랑입니다.

긍휼은... 병든 이 세대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이 땅에는... 죽음과 고난과 슬픈 일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불행은 그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확대되어 이곳저곳으로...

메아리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불행을 해결하려는 인간들의 피나는 노력은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더 많은 불행을 만들어냅니다.

...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교만으로 인하여 해결은커녕...

점점 더 인간의 삶은 고통스러워질 뿐입니다.

고난과 슬픔이 끝났는가 싶으면 또 다른 재난이 닥치고,

한 고비를 넘었는가 싶자 또 다른 고비가 나타나고,

시련을 이겼는가 싶으면 또 다른 시련이 닥쳐오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 속에서

모든 인간들은 너나없이 사람의 지치고 병들어 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오늘 이러한 인간의 불행과 아픔과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셔야만 이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맛본 자들이 많아져야 이세상은 비로서 복된 세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맛 본 사람들이

이 땅의 불행을 딛고 승리했다는 기록은 얼마나 많습니까?

사는 것이 괴로워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누군가의 따뜻한 한 마디 위로해 줄 때...

사는 것이 괴로워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누군가가 사랑이 담긴 도움의 손길을 펼칠 때

그 긍휼의 마음...그 긍휼의 손길로 인하여

상처받은 영혼, 병든 영혼, 무기력한 영혼, 지친영혼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긍휼의 은총을 받아서 일어났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주님께 받은 긍휼을 베풀어... 이웃을 일어나도록 도웁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긍휼의 베풀어야 합니다.

셋째 긍휼은 정의보다 높은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한 목소리로 같이 읽으십시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바로 긍휼에 있다는 말입니다.

긍휼만이 심판을 초월하여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어놓을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것은 심판입니다.

한 번 선고가 내려지면 죄는 정죄를 받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시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죄 값을 깨끗이 청산하기 전까지는...

그 죄로부터 아무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심판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긍휼입니다.

아무리 사형에 해당하는 흉악무도한 죄를 지은 자라도,

이미 사형언도를 받아 처형될 날만을 기다리는 자라 할지라도

거기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방법이 있습니다.

사면권을 가진 자가... 긍휼을 베풀어... 그 사형의 족쇄를 풀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의 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죽음으로 죄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법은 다만 인간에게 선고를 내리고 정죄하고 잡아 가두고 목숨을 빼앗을 뿐입니다.

그러나 긍휼은 정죄를 이기고 심판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을 약속해줍니다. 이것이 긍휼의 위대함입니다.

긍휼은... 모든 저주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Mercy triumphs over judgement!)

긍휼을 이길 수 있는 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긍휼이야말로... 법을 초월하는... 최고의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긍휼에는 사람을 온갖 심판으로부터 건지고...

다시 살리는... 놀라운 힘이 존재합니다.

넷째 긍휼을 베풀어야 자신도 긍휼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긍휼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 조원의 빚을 지고 파산하게 됩니다.

원금은 고사하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를 갚을 길이 막막해 집니다.

도저히 갚으려야 갚을 길이 없습니다.

돈이 될만한 것은 뭐든지 다 팔아 충당해보려고 하지만

빈 독에 물 붓는 것처럼 터무니없이 부족하기만 할 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돈을 갚으라는 독촉이 빗발치듯 날아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궁리를 하다못해 채권자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면서

어느정도 기한을 주면 열심히 돈을 벌어서 갚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겨우 허락을 받아 기한이 연장되기는 했어도 그 기간 내에 해결할 능력이 이 사람에게는 전무했던 것입니다.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이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달프고 괴롭기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색이 다된 얼굴을 하고 빚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채무자를 바라보던 채권자의 마음에 측은한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아! 내가 보니 저 사람 암만 노력해도 빚을 갚을 수가 없겠는데...

저러다가 지쳐 쓰러지는 것이나 아닐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저 사람 사정을 뻔히 알면서 너무 심하게 구는 거 아닌가.

오히려 깨끗이 탕감해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만약 내가 그렇게 해준다면 기뻐서 어쩔줄 몰라 하겠지.

좋다 기왕 받지 못할 거라면 아예 기분좋게 모든 빚을 다 탕감해주자.'

채무자를 긍휼히 여기는...

채권자의 마음이 얼마나 따듯하고 도량이 넓은 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굳히자... 곧 실천으로 옮깁니다....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불러 중대한 선언을 발표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빚은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한푼도 갚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부로 다 탕감해 주었으니 그 빚으로부터 자유를 누리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찾아 와서

'여러분의 빚진 모든 것을 탕감해 주었다.' 고 한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천하를 얻은 것처럼 날아갈듯이 기쁘고 신나지 않겠어요.

그런데 보세요....

이 사람이 나가다 보니 언젠가 자기에게 돈 백 만원을 빌려간 사람이 지나갑니다.

수 조의 빚을 탕감 받았으면 감사해서라도..., 긍휼을 입은 것에 대한... 기쁜 마음에서라도

백 만원 정도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탕감해 주어야 마땅할 텐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멱살을 잡고... 당장 빌려간 돈을 갚으라면서... 감옥에다가 가두어 버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먼저 탕감해 준 채권자의 마음에 괘씸한 생각이 듭니다.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긍휼을 입었는지를 잊어버리고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그를 다시 불러서 엄하게 꾸짖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긍휼을 베풀어 당신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으면 마땅히 당신 동업자도 긍휼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긍휼 때문에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하지 않은가?

그만한 긍휼도 베풀지 못하겠다면 내 빚을 다 갚기 전에 옥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이것이 마18장에 나와 있는 유명한 '용서'에 대한 주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무자비한 자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가를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긍휼 없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으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었고... 모든 빚을 다 탕감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탕감보다... 더 큰 긍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긍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고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행동한다면... 그결과는 긍휼 없는 심판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남으로부터 동정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시오."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 얼마나 사람들에게 못되게 했는지...

아무런 동정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무자비하게 굴었던지 그 사람이 잘못되자... 모두가 손가락질하면서

'그거 쌤통이다. 좀 더 망하지 않구.' 하면서...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을 봅니다.

L.A 폭동시에 멀쩡한 집....평상시에 흑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던 집사님댁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지 않고 살면... 언젠가는 우리도 이웃들로부터 무자비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럴진대... 하나님 앞에서 긍휼 없는 심판을 받아보세요.

여러분 긍휼 없는 심판처럼 두려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더라도 긍휼을 숨겨놓으셨기에

그 심판 중에서도 망하지 아니하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긍휼 없는 심판을 내리신다면

이 땅에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고통을 주셨을지라도

그 고통 가운데 긍휼을 남겨 놓으셨기에...

오늘 우리가 절망하지 아니하고 그 긍휼을 믿고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는 줄 믿습니다.

4)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긍휼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사람들을 대할 때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을 긍휼로 채우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배고파 굶주리며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오병이어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측은히 여기셔서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무한하신 긍휼을 받았습니다.

그 주님의 긍휼을 받은 우리는 이제 긍휼을 베풀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긍휼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긍휼을 베푼 것 같이 너희도 가서 긍휼을 베풀어라” 고 말입니다.

주님의 이 음성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내게 긍휼을 베푸심 같이 긍휼을 베푸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디를 가나...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어디서 무엇을 하든... 긍휼의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주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웃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여겨야 합니다.

긍휼을 베풀며 살기 위해서는... 남이 당하는 고통을 내 고통으로 여길 줄 알아야 됩니다.

감정이입(empathy)이 잘 되는 사람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많은 은혜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귀한 은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천국시민의 대헌장을 말씀하시면서... 긍휼을 강조하시지 않았습니까.

본문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긍휼은... 우리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불행을 못 본척하고 무관심하게 대한다면...

그 사람은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긍휼을 받은 사람이라면...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생각하고,

=남의불행을 내불행으로 생각하면서 그불행을 어떻게하든지 덜어주기 위해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원래 두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함께' 라는 말과 '감정'이라는 말입니다... 즉 '함께 느낀다' 라는 뜻입니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이 “긍휼”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불행을 알아주고 이해해 주고 덮어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고통은 한결 가벼워지고 위로가 될 것입니다.

오 헨리의 작품가운데 <강도와 신경통> 라는 유명한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하루는 외딴 집에 강도가 들어옵니다.

주인을 향해서 총을 내밀며 '손들엇!' 하고 명령을 하자 깜짝 놀라 손을 번쩍 듭니다.

그러자 강도가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똑바로 들지 못해!' '아 예 예..' 하면서 들었던 손을 더 높이 치켜듭니다.

'왼 손은 왜 안 들어!' '아 예, 신경통이 좀 있어서요.'

'아 그런가, 신경통이라 그랬지! 그거 아주 골치아픈 병이야. 나도 그 신경통 때문에 고생이 심한데.'

신경통 이야기가 나오자... 신경통에 대한 대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때부터 강도가 무엇 때문에

이 집에 들어왔는지를 망각하고 신세타령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 강도 짓을 하는 것도 다 신경통 치료를 위해서 하는 거라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언제부터 아팠소?'

'대체 무슨 약을 쓰시오?' '어느 병원을 다니시오?' '의사는 누구시오?'

이렇게 신경통에 관한 대화를 하다가 밤을 새게 됩니다.

날이 훤히 밝아지니까

이 강도가 손을 흔들며 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날씨 추워지는데 몸조심 하슈!' 그러드랍니다.

우리가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생각하고 살아갈 때...

그들이 경험한 불행, 비애, 배척, 수치를 느끼게 될 것이며

비로소 그들을 긍휼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3)행동으로 긍휼을 실천해야 합니다.

긍휼은 '참으로 안됐다.' '불쌍하다.'는 정도의 느낌이나 감정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불행을 같이 짊어지고 해결해주려는 적극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얼마든지 위로하고 동정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들을 돕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단지 말잔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제로 긍휼히 여기는 자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긍휼의 삶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본적이 없기 때문이며 그불행을 볼수있는 현장으로 찾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듣는 것과 실제 상황은 천양지차로 다를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형편없는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방문하고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니...' '아니 이럴 수가 아직도 이런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 하며 놀라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보면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불행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료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깊은 관심을 보이시고 직접 찾아오셔서 긍휼을 베푸사 건져주십니다.

긍휼은 불행당한 자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라도 찾아가 행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불행에 관한 소식이 그칠 줄 모르고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인류는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의... 주 원인은... 인간들에게 긍휼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더욱 살벌한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긍휼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통과 불행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우리가 먼저 긍휼함을 받은 자로서...

항상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가 긍휼을 베풀 때에...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그 마음에 하늘의 복이 임합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그 마음에 평안과 위로, 그리고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케 됩니다.

=한 번이라도 자선을 행해 본 사람은 이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얻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우리의 생존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속에서 죄와허물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죽음의 심판 날에 주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고...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자비가... 하늘의 자비와 연결되며...

우리의 작은 긍휼이... 하늘의 크나큰 긍휼을 불러온다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아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긍휼을 받은 우리에게.. 타인의 아픔을 생각할 것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시다.

이것이 우리가 주께 받은 긍휼에 보답하는 길이요... 더 큰 긍휼이 계속해서 임할 수 있게 하는 비결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진정 이 말씀처럼... 긍휼이 여기면 나도 주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덧입게 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어느 중년 부인이 그렇게 좋던 건강이 갑자기 무기력해지면서 근심에 근심이 쌓이면서 극도로 쇄 하여졌습니다.

그는 자녀를 다 짝지어 출가시키고 분가시킨 분입니다.

그런데 작은 사소한일로 맡아들하고 다툰뒤로,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서 신경성 질환으로 건강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 부인은 아들이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주변에서 "엄마가 먼저 아들을 용서하라"고 아무리 권면해도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괘씸한 녀석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아들에 대한 섭섭함과 씁씁함을 풀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병은 더욱 깊어져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충언을 듣고, 병석에서 어머니가 먼저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한 사람은 어머니인데 전화를 받은 아들이 먼저 잘못했다고, 어머니께서 먼저 전화를 할 줄을 몰랐는데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전화기를 붙잡고 통곡하며 잘못을 비는 것입니다.

아들은 그 밤에 즉시로 어머니께로 달려왔고, 아들의 방문을 받은 어머니의 병세는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긍휼을 베풀면 영혼이 건강해집니다...

긍휼을 베풀면 마음속의 근심과 염려가 사라집니다.

(빌2:27) 우리가 질병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실 때 병들어 죽게된 지경에서 살아나고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해 주시는 축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이란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달려가고...,

용서하고 베푸는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영혼을 강건케하는 능력입니다....

긍휼은 근심을 면케하는 치료의 특효약입니다.

긍휼은 복수가 아닙니다.... 긍휼은 증오가 아닙니다.

긍휼과 자비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 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 거절당하고 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에서 이 집에 낫 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낫을 빌려주라." 그랬습니다.

아들은 이때에 항의를 합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빌려주어야 합니까?."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혜를 베풀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라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라고 했습니다.

긍휼과 관대함은... 타인에게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남이 나 자신을 이해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는 사람, 먼저 상대를 이해하려는 자세입니다.

긍휼은 복수가 아닙니다.

증오가 아닙니다.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축복의 부메랑입니다.

긍휼은 인생의 삶속에서 아름답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메아리입니다.

긍휼과 사랑은 인생의 장미꽃이요, 삶의 향기입니다.

긍휼하심을 베푸는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복 받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내 삶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하나님께 받은바 된 것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많이 받은 자는 많이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받은바가 없다고 여기는 자는 베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라는 사람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가 어느 겨울에 말을 타고 가는데 벌판에 웬 사람이 서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입니다.

말에서 내려서 "무얼 도와 드릴까요?" 그랬더니 "제가 추워요."

그래서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혀줍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벌벌 떠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까 문둥병 환자예요.

프랜시스는 그 사람이 문둥병 환자인걸 알면서도 자기 몸의 체온으로 그 사람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그를 꼭 끌어 앉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 이제 따뜻합니다." 하더니

품에 안겼던 그분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오는데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

주님을 만나 뵌 것입니다. 프랜시스는 너무 감격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한 후, 그 많은 유산과 명예, 직위, 이 모든 것들을 다 뒤로하고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장 먼저 실천하는...유명한 성자 프랜시스가 된 것입니다.

긍휼은 동정이 아닙니다.

긍휼은 측은함이 아닙니다.

긍휼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불붙는 듯합니다.

긍휼속에는 냉냉함이 없습니다...

무한히 끝없이 용서하시는 풍성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할 것은...

긍휼이란 단순히 죄의 책임을 면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이 있는데 그저 덮어주는 맹목적인 용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보다 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이요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긍휼이란?

지옥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시켜주시는 J.X의 십자가의 피흘리시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입니다.

죽어 가는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이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예배보다 십일조와 예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자는 불행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약 2:13)

긍휼히 여기는 삶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와 선교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합니다.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애통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 감격하며... 죽어가는 영혼을 향해서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눈이 사랑스럽습니다.

불신자, 구원받아야 될 사람을 보면... 외면하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귀가 사랑스럽습니다. 도와달라는 소리를 들으면 찾아가서 도와줍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어떠한 이야기를 들어도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다 소화하고, 이해합니다.

자기를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손과 발이 아름답습니다.

항상 도울 수 있는 만반 전도와 선교의 현장으로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다윗....그가 긍휼을 베푸니... 자신도 긍휼을 입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로부터 긍휼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있는 삶의 처소에서... 긍휼을 베푸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베푼 긍휼이

언젠가 자신에게 풍성한 축복의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다시한번 들어 보십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강해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5:6-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네 번째 복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서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을 것입니다. 복은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찾아오는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때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추구할 때 찾아오는 결과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의를 추구하며 살 때 배부를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라는 열매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복이라고 하는 결과보다는 그 복을 가져올 삶, 우리들이 추구하여할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봅시다.

오늘 설교의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원천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Ⅰ.“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 사람을 말씀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의’는 세상 사람들이 말씀하는 소위 도덕적인 의는 아닙니다. 착하게 사느냐의 문제, 어떤 법이나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거나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는 의(국가를 위해 싸우거나 노동자들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사람들을 세상은 의사 또는 열사 등으로 부릅니다), 정치적 억압과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싸우는 식의 의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무가치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 못지않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구조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싸울 필요가 있을 때에, 세상의 불의와 싸울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 꼭 선봉에 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장서서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의로운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어떤 자인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또는 더 깊은 관계에 대한 갈망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의롭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의롭고 존귀한 자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인간은 그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경외하고 사랑합니다. 이것이 최초의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시험과 유혹으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반역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버렸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적의(敵意)를 품고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진노(震怒)하십니다. 사람은 자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은 복 대신 저주와 심판과 사망과 형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에덴동산 어딘가에 숨어버린 아담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죄인들을 찾아오십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늘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셨습니다. 싫어해도 보내고, 핍박해도 보내고, 죽여도 보냈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아들까지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십니다. 전도자들을 보내시고, 복음의 일꾼들을 보내십니다. 선교사들을 세계에 보내십니다.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저 북극과 남극에도 보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학교로, 직장으로, 거리로, 집집으로 보내십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내미시는 사랑의 손길이요 구원의 손길입니다.

이 주님의 손길은 수없이 외면을 당했습니다. 주님이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손을 뿌리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손을 잘라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얼마나 외면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매주 또는 매일 주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러나 거의 매번 거절을 당합니다. 제가 목청을 높여 설교하는 시간은 주님의 가슴이 되어 여러분을 향하여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손을 잡고 사망에서 빠져나옵니다. 불신앙과 불의한 삶에서 빠져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졸고 듣지 아니하며 귀를 막고 거절을 합니다. 안타까워서 설교 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몸부림을 치지만 그런 저를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주님을 부인하며 원망하고 있을 때에

나에게 오셔서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셨네.

거절할 수 없어, 외면할 수 없어 주님의 그 손을 잡았었네.

주님의 사랑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갈망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을 구하기 위해 애통하며 회개하고, 자복하고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배부를 것입니다. 즉 칭의의 은총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십시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찾아오사 사랑의 손길을 내미신 주님의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내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함께 살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져주신 주님을 내 영혼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고,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 주님의 흘리신 보혈로 나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기를 구하며 회개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입혀주시는 의로 옷 입고, 주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배부르고 모든 갈증을 해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둘째,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성화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과 칭의를 받은 자는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비록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 죄의 습성이 남아 있고, 죄의 오염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 사도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으나 마치 큰 벽처럼 막아서는 장애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해 바울은 [~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 20, 21)고 고백합니다. 그 죄는 인격을 오염시켜 버렸고, 오염된 인격은 선을 행하기보다 죄를 행하는 일에 더 익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하면 이 죄로 오염된 인격, 자아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 의지를 꺾어 놓습니다. 그래서 결국 실패하고 또 실패합니다. 바울은 결국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정말 뼈저리게 경험을 하였고, 그 경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정말 저는 주님 뜻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죄는 다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울었습니다. 흰 머리카락을 염색하면 잠시 까만 머리로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흰 머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또 회개를 해도 다시 또 죄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주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내가 이렇게 밖에는 주님을 섬길 수 없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비열한 죄인이란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이런 죄인이 변화를 받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울고 또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정말 저는 곤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죄로 철저히 오염된 사람이었습니다. 칼빈 선생이 말한 대로 나는 전적으로 부패했고,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이 아니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 내 힘과 방법으로는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비열한 죄인,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그래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죄인, 주님께 매달려서 살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께 매달려 살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고 섬기고자 힘쓸 때에 주님은 저를 변화시켜 주셨고, 주님을 조금씩 닮아가게 하셨습니다. 나는 힘이 없지만 주님의 능력이 나를 붙드시고, 나는 나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지만 주님의 성령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시고, 나는 나를 새롭게 할 힘이 없지만 주님의 성령이 말씀으로 나를 감화하고 감동하여 주님의 생각과 뜻에 젖어들게 하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흘렀고, 이전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렇게 새로운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큰 복입니다. 내게는 주님의 은혜로 거룩함을 덧입은 것이 복이고, 성결함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이 복이고, 주님을 조금이나마 닮게 된 것이 복이고, 주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게 된 것이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입니다(행26:29). 저도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이 자신이 죄로 오염된 인격을 가진 것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으로 인해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신을 직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씻김 받기를 구하고, 주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새로워지기를 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매달려 살므로 주님의 은혜를 입어 주님을 닮는 것을 갈망하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갈망이 너무 커서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거룩함을 입기를 힘쓰고, 부르짖고 몸부림치는 기도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이기고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가기를 갈망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변화되고 새로워져서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복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셋째,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기를 갈망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찌 죄와의 싸움뿐이겠습니까? 죄와의 싸움만 하고 산다면 이것은 반쪽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랬습니다. 개인적인 영적 삶으로는 죄와 싸우면서, 공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자 했습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살펴보십시오.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 모든 뛰어난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의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그 나라 그 의를 구하기 위해서 배고프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나라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품고 계신 뜻,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알고 그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서 갖고 계신 뜻, 꿈, 비전,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우리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착한 행실을 갖는 것과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아가는 것은 이 두 가지를 통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열망과 열정을 갖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주님은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전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전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바로 주님이 찾으시는 그 일꾼이 되어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가 진정 복 있는 자입니다. 그는 우리 주님의 날에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닫혀져 있습니다. 그들은 귀를 막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전하려고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듣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할 선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 거룩하게 사는 것과 세상을 향하여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선이 그들의 시선을 끕니다. 그들의 차가운 마음을 녹입니다. 그들의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이 우리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그런데 이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면 자연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주는 기적의 떡을 먹고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 다 줘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에 목마른 사람, 이 일을 더 잘하고 더 많이 하기를 열망하는 삶,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세계는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화 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를 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Ⅱ.“주리고 목마른”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의 의미를 저는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절실한 궁핍의식(need)입니다. 절실하다는 것은 간절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실한 것이 아닙니다. 성화되어도 되고 성화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위해 일을 하게 되면 하고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간절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성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 절실한 궁핍의식입니다.

이런 궁핍의식이 심해지면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역사 속에서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루터는 구원 받기 이전 구원에 대한 갈망으로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따라 고행을 하고 또 하면서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어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상고하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에서 복음의 빛을 보고 구원을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람이 루터와 같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이 구원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갈등과 방황이 없이 구원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갈등과 방황은 큰 축복입니다.

바울은 성화의 갈망이 깊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 내재하는 죄의 세력을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그 갈망 때문에 복음의 능력을 구하였고, 결국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갈6:14).

성화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아파하고 우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재하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통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네, 바로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 때문에, 고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복음을 들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증상이 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고통이 있습니까? 성화되지 못한 자신의 약함 때문에 아파하는 고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심 때문에 고통을 감수합니까? 그런 것이 없다면 기도하십시오. 그 갈망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둘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일시적인, 감정적인 궁핍의식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의지적인 궁핍의식입니다. 시42:1에 보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슴의 갈급함은 물을 찾기 위해 온 들과 산을 헤매는 그런 갈급합니다. 몇 걸음 찾아다니다가 포기하는 그런 갈급함이 아니라 물을 찾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최후에 쓰러져 죽어가면서까지 물을 찾기 위해 땅을 파는 그런 갈급함입니다. 이런 갈급함이 있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고, 반드시 성화를 이루어가며, 반드시 주님의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쓰임을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섬기면서 일시적으로는 은혜를 받지만 그 은혜를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일시적으로 성화를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이내 포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일시적 열심히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으려다가 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려다가 마는 사람입니다. 복을 잡았다가 놓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속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고 권면합니다. 저도 더욱 많이 힘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번 시작한 것을 멈추지 말고 계속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또 일어서도, 또 도전하고, 또 몸부림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진정 복된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마5:6). 정말 할 말이 많은 그런 주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친히 여러분에게 설교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구원받지 못한 자는 구원을 갈망하십시오. 반드시 주님의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화를 갈망하십시오. 성화를 위해 몸부림치는 자는 신령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자 하는 갈망 속에서 헌신하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사 위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붙들려 쓰임 받는 당신을

 

 

 

 

주님과 주의 형제들과 모든 이들이 복이 있다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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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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