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강해 3>
애통하는 자의 복
-마5:4-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보는 TV 프로그램이 개그 콘서트나 웃찾사와 같은 개그 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그런 프로그램에 나온 개그맨이 새로운 유행을 주도해 가고, 온 나라의 청소년들이 그 흉내를 냅니다. 이렇게 세상은 웃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8복은 세상의 가치관관 정면으로 배치되는 복을 말씀합니다. 세상은 부요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을 하지만 성경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 세상은 기뻐할 일이 많은 사람을 복 되다 하는데, 성경은 애통할 일이 많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난은 말 할 수 없는 부요로 채워지며, 애통은 또 말 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집니다.
자, 오늘은 말 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지게 하는 애통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깊이 새기는 마음으로 읽어봅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에서 보면 애통은 위로를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통은 위로가 약속되어 있는, 보장되어 있는 애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밑도 끝도 없는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이 다하면 기쁨의 바닥에 내려설 수 있습니다. 슬픔이 깊으면 기쁨의 반석 위에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습니다. 그러므로 슬픔에 대해 설교한다고 너무 어두운 얼굴을 하지 맙시다. 슬픔에 대해서 설교할 때 정말 슬퍼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목을 놓아 울만큼 슬퍼합시다. 우리 눈이 눈물을 쏟아내는 폭포가 되고, 우리의 얼굴에 눈물의 강이 흐르도록 슬퍼합시다. 그런 후에 있을 위로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에게 하늘의 위로를 가져오는 애통은 도대체 어떤 애통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슬퍼하는 자가 되어야 주님으로부터 하늘의 위로와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까?
Ⅰ.죄 사함의 은총을 얻기 위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심령의 가난한 자의 복에서 잠시 언급을 했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한 없이 가난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죄로 얼룩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보면 자신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눈 앞에 안 계신다고 생각을 하니까 자신이 선하고 의로운 것 같이 느껴지지,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시면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부르짖은 것처럼(눅5:8),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라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바울이 엎드러지고(행9:4), 사도 요한이 죽은 자 같이 된 것처럼(계1:17) 우리도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울며 굴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큰 복인 것입니다. 이 과정이 없는 사람은 죄 사함의 기쁨이나 구원의 기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은 곧 죄로 인해 애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가 무엇이기에 우리는 그런 애통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현대의 교회는 죄에 대해서 말할 때에 대개 두 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원죄에 대해 말하면서 조상 탓하듯 죄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나의 책임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음으로써 회개의 촉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를 대수롭지 않은 실수, 있을 수 있는 실수로 가볍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마치 복음을 말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죄에 대해 간결하지만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첫째, 죄의 정체는 하나님께 대한 敵意입니다. 우리가 원죄로 인하여 우리 안에 죄가 내재하는데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 강한 적의로 내재합니다. 즉 하나님을 원수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마치 악한 자가 원수의 아들을 데려다가 아버지를 원수로 인식을 시켜서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겨누게 하는 것처럼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복된 것들을 공급받는 은총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적의를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에게까지 적의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용서와 심판,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와 말씀, 신자들과 신자들이 하는 모든 행위 등에 대해서도 적의를 품고 대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은 그렇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과거에 주님께로 돌이키기 이전에는 그랬을 것입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유 없는 적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유 없이 미워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착한 일 하는 것도 위선과 가식과 전도를 위한 목적을 가지고 쇼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금도 저처럼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그 적의가 다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없습니까? 없다면 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합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에 즐거이 순종을 못합니까? 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열정을 불태우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적의가 여러분의 신앙의 삶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적의와 적으로 인해 범죄한 것에 대한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죄의 활동의 특성은 대담함과 광기와 맹렬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으면서 자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막연한 반감이 죄의 유혹을 만나면 급속도로 팽창을 해서 두려움을 이기고 대담하게 죄를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거듭 짓게 되면 양심이 마비가 되면서 죄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까지 코웃음을 치는 단계로 나아가 강퍅해집니다. 죄의식 자체가 희미해져버립니다. 그래서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는 광기화가 됩니다. 게임이나 도박은 처음에는 재미로 하지만 나중에는 미쳐서 하게 됩니다. 성적 타락도 처음에서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을 하지만 후에는 광기로 바뀌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폭력도 거듭해 가면 광기가 되어 살인을 불러옵니다. 탐욕도 자라서 광기가 되어 도적질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심령을 살펴보면 이 광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 광기를 억제하지 못하여 또 범죄를 하게 됩니다. 이 광기를 보고서 우리가 어찌 애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죄의 실상을 보면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옵니다. 그 죄에 내가 얼마나 깊이 젖어 있는지를 알게 되면 내 심령 안에서 통곡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아십시오. 죄를 묵상하십시오. 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괜한 정죄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참된 회개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죄 사함의 기쁨과 구원의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죄의 확신이 없이는 사죄의 확신, 구원의 확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Ⅱ.성화를 위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첫 번째 애통이 구원 받기 이전의 애통이라면 성화의 과정에서의 애통은 구원 받은 이후의 애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고, 한 번 용서받으면 영원히 용서받기 때문에 신자가 죄를 지어도 애통할 필요가 없고, 그저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여 용서 하옵소서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신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아이들이 “앗, 나의 실수!”라고 익살스럽게 말하는 것처럼 회개했을 때 여러분은 용서를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용서를 확신할 수 없는 데도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 그대로 생각일 뿐입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는 용서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죄는 죄를 깨닫고 진심어린 고백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습관화되고 인격화되어 내재하는 죄를 죽인다는 것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경험을 해 봐서 알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죄에 빠지고, 고백하고 또 죄에 빠지는 일을 반복해 보았을 것입니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처럼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죄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사람이 더 죄로 인해 애통해 합니다. 사도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고백은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진정의 고백이 성화를 촉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싸움을 그리스도께 의탁하고, 보혈의 은혜를 의지함으로 그가 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이는 것은 죄에 대한 분명하고 깊은 인식과 이 죄로 인한 많은 애통,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 그리고 죄를 이기기 위한 열렬한 기도의 생활, 끊임없는 말씀 생활을 통한 영적 생활의 훈련을 통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죄를 죽이는 과정은 심령의 애통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애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에 자주 빠지고, 넘어지는 자신을 보며 애통해 하고 있습니까? 거룩하신 주님을 담고자 하는 몸부림의 애통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복 된 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거룩함에 가까워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애통이 없다면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기쁨은 거짓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짜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여러분의 기쁨은 슬픔이 되고, 여러분의 행복은 불행이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시는 꿀물은 쓴 물이 되고 여러분이 즐기는 쾌락은 치욕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를 위해 애통하십시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돼지가 씻었다가 도로 더러운 웅덩이에 돌아가고,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핥아먹는 것처럼 살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살다가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오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본받아 거룩하게 살다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하려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인격과 삶을 본받아 살므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을 나타내게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에 상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그의 피로 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되지 못한 삶에 대해 애통하십시오. 늘 죄에 넘어지고 쓰러지는 자신을 책하며 애통하십시오. 주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애통과 함께 몸부림을 치십시오. 주님이 그러한 우리들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가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나타내시고, 그리고 은밀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게 하시다가 우리를 천국에 이끌어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주셔서 위로하실 것입니다.
Ⅲ.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구원받고 죄를 떠나서 거룩하게 사는 삶을 추구하며 살다보면 이 세상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지만 저들은 모르고, 나는 진노와 저주에서 벗어났지만 저들은 아직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고, 나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왔지만 저들은 아직도 거기에 매인 채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로 인하여 안타까움과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혼들을 위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고, 찾아가게 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이끌고자 하게 됩니다. 이 애통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세상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애통입니다. 이 이 애통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애통이며, 이 애통을 가진 자는 주님의 위로와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보면 세상 속에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고, 독재와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질병과 인생의 불행과 아픔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아파하게 되고 울게 됩니다. 이 애통 또한 우리가 세상 속에서 우리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한 애통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애통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웃음을 잊고 사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주님이 기뻐하셨다는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주님이 파안대소하며 웃으셨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웃으셨더라도 잠깐 미소를 짓는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신 주님이 슬퍼하셨다, 우셨다, 아파하셨다는 말씀은 너무 자주 나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가신 주님은 하염 없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11:33, 35). 타락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시며 주님은 눈물을 강수처럼 흘리며 우셨습니다(눅19:41-46).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눅22:44, 히5:7).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눈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진한 피를 쏟으셨습니다(눅23:34).
이렇게 주님의 생애는 아픔의 생애, 고통의 생애,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은 바로 그 주님의 마음을 알기에 그 애통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뒤로 한 채 한 걸음 한 걸음을 눈물로 적시며 살아갔습니다. 기쁨의 카페에 앉아 있기보다는 죄인들과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위해 탄식하는 기도의 밀실에 있기를 구하였습니다. 잔치 집에 찾아가 배불리 먹고 즐기기보다는 소외되고, 버림 받고, 아무에게도 돌봄을 받지 못하는 이들 곁에서 마음 아파하며 눈물로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이 애통이 필요합니다. 이 애통을 가진 자가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이 애통으로 산 자가 영원한 희락을 얻게 됩니다. 천국의 위로와 상급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즐기라고 말합니다. 웃을 일이 없어도 자꾸 웃으라고 말합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화 있을진저 너희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6:25)라고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웃을 일도 없는데 웃다가 애통을 만나지 말고, 애통해야할 이유를 알고 애통하다가 주님의 위로와 축복을 만나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이 위로를 주시고 기쁨을 주시기까지는 애통하는 자로 주님 앞에 있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 ③
마5:1-12
지난주에 우리는 행복으로 가는 길... 두 번째 말씀으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행복으로 가는 길... 세 번째로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고 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
온유(溫柔)에 대해서 말하기를...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움.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한자로 보면...
온(溫)자는 따뜻할 “온”자요.
유(柔)자는... 부드러울 “유”자입니다.
그 뜻은... 온화(溫和)하고 유순함...을 말합니다.
이 온유는...
온순, 유순, 얌전함, 친절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온유의 일반적 개념은...
마음이 착한 사람, 마음가짐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온유한 사람은... 남을 편안하게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관용이 있어... 남을 용서하고 허물이 있어도 감싸줍니다.
세상에는 이런 온유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밝아질 수 있고... 그래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온유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1)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온유를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스" 인데...
이 말의 뜻은
잘 길 들여진 동물에 적용되는 낱말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삐가 이끄는 대로 잘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란...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기고 순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온유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본받아야겠습니다.
첫째 = 노아는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노아에게
"세상에 사람의 죄악이 관영하므로 내가 사람 지은 것을 한탄하노라.
이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고자 하니 너는 방주를 지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노아는 곧 가족들과 함께 방주 짓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노아는 한편으로 방주를 지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므로 회개하고 방주 짓는 일에 협력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노아가 방주 짓는 일에 100년을 소모했어도 심판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에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기 시작한지... 120년이 지나... 드디어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방주가 완성되자...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과 각종 짐승들을 방주 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으므로 열어놓았습니다.
노아의 식구들이 보이지 않으므로 동네 사람들이 노아를 찾다가 방주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다 방주 안에 기거하면서... 어서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날씨가 청명한데 방주 안에 있으면서 홍수가 다가온다고 말하는 노아를 보고 사람들은 어이없어 했습니다.
모두 노아를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래도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니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했습니다.
방주의 문을 열어놓은 채 노아가 방주 안에 기거한지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기 위해 일주일의 유예기간을 더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도 노아 식구 외에는 방주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뒤... 드디어...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힌 뒤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매
얼마 있지 않아 들과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방주가 있는 곳으로 갔으나
이미 방주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아무리 문을 열려고 해도 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매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습니다.
강퍅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불순종한 사람들은 홍수에 엄몰되어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짓고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은...
...무사했으며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 모세도 참으로 온유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수기 12:3)고
말씀하셨습니다.
땅 위에 모세만큼 온유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온유를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애굽을 출발하여 가나안을 향해 행진해 나아갈 때
그들 앞에 제일 먼저 다가온 문제는 홍해였습니다.
마음이 변한 바로왕의 명령으로 애굽군대가 그들을 추격해 오고 있었는데
그들의 앞길을 창일한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진퇴유곡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심히 강퍅하게 되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불기둥,
구름기둥을 따라왔기 때문에 비록 홍해가 앞 길을 가로막아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을 갈라지게 하라』(출애굽기 14:16)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하자 홍해가 갈라지고 길이 생겨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서 무사히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그들 뒤에 따라오던 애굽 군대는 물이 합해지는 바람에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르 광야에 들어가서
사흘 길을 갔으나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라에 도착하여 연못을 발견했지만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가는 길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생겼다고 해서 불평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도하니 한 나무를 지적해주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지니 물이 달라져서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신 광야에 이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며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때에도 모세는 묵묵히 기도만 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40년 동안 내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이때에도 모세는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모세가 그대로 하자 반석에서 물이 나와 백성들이 모두 갈증을 해소 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길이 험하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무수한 사람들이 불 뱀에게 물려 죽어갔습니다.
이때에도 모세는 기도만 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쳐다보게 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쳐다본 자는 모두 살아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변경 지대인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12지파의 족장을 가나안 땅에 보내어 그 땅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정탐을 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이 그 땅을 악평 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강퍅해져 통곡을 하며 하나님의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강퍅한 사람은... 의심과 불평이 많으며
조그마한 어려움이 다가와도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이유가 없습니다.
어려움이 다가와도 하나님께 따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할 뿐입니다.
이러한 온유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기업을 상급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29)
예수님의 온유함의 절정은 최후의 만찬을 가진 다음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언하시기 위해 온 인류의 죄가 모두 담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으로서는 몸서리쳐지는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이러한 온유를 배우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앞에서 참으로 온유한 자는
그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길들임을 받아서 온전한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됩니다.
인간관계에서는 비교적 온유한 자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강퍅한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되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입니다.
노아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이삭처럼,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 온유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땅을 기업으로 얻고...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착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착하면 손해봐야하고 져야하고 참아야 하니까...
=착해서는 성공할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악해야 성공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37편에 말씀하십니다.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땅에 거하여 정녕히 먹으리로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10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온유한자는 땅에서 잘된다는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사필귀정)
그러므로 어떠한 형편에 놓이던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성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환경 앞에 놓이던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 앞에... 강퍅하지 않고... 온유한 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성경에 등장하는 온유한 사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욥과 욥의 아내를... 비교해 보세요
나)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해 보세요
다)요셉과 형제들을... 비교해 보세요
요셉은 불평불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했습니까?
아니요...땅에서 더 잘되었습니다.
이들은 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이러한 자세를 “온유”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온유한자” 란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경이나, 어떠한 말씀을 주시던지
불평과 원망없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자세를
“온유”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사울을... 비교해 보세요
사울은 온유하지 못하므로 땅에서 안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온유함으로 땅에서 잘됩니다.
자~ 다윗의 온유함을 보세요. 다윗의 온유함이 언제 나타납니까?
다윗이 간음과 살인죄를 지었을 때에...
선지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와... 다윗의 죄를 지적합니다.
만일 이런 죄를 헤롯왕에게 지적했다면...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자가 사람이냐고 죄를 지적했던 세례요한을...
헤롯은 목을 잘라 죽여 버렸습니다.
마음이 강팍한 사람은... 자기의 죄를 지적받았을 때, 상대방을 해칩니다.
그러나 마음이 부드러웠던 다윗은...
자기의 은밀한 죄를 지적한 나단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눈에서 흘렀던 회개의 눈물은...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 날 울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침상의 요가 눈물에 젖기까지 눈물로 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지적했을때,
부드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버리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피난길의 시므이의 저주 앞에서도 참습니다.
온유함이란... 하나님 앞에 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온유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사람은... 땅에서도 하나님이 복을 받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 앞에 강퍅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 앞에 온유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도 온유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목양하는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자기 영혼을 인도하는 목자 앞에서... 부드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역대하 20:20절에 말씀합니다.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찌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3) 온유해야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갈 5:22-23에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가 있습니다.
첫번째 사랑이고,
둘 째 희락이고,
셋 째 화평이고,
넷 째 오래참음이며,
다섯째 자비요,
여섯째 양선이고,
일곱째 충성이고,
여덟째 온유이고,
아홉째 절제입니다.
이 아홉가지 은사는...
어느 하나 중요치 않은 은사가 없습니다.
다 중요한 은사들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여덟 가지 은사에...온유가 빠지고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온유 없는 사랑실천이 불가능합니다.
온유 없는 희락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온유 없이 화평은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온유 없이 어찌 오래 참을 수가 있겠습니까?
온유함이 없이 자비를 베풀 수 없습니다.
온유 없이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온유 없이 충성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유 없이 절제도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화평을 이루고... 세상에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다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언제나 논리나 이성 싸움이 앞섭니다.
=그러다가 세월만 다 보냅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논리나 이성싸움보다는... 먼저 사랑과 선을 행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강퍅한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고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화평을 이루어 갑니다.
성숙하냐 안하냐, 은혜 받았냐 안받았냐, 성령충만하냐 안하냐...
이것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성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씀했습니다.
분낼 만한 일이 있어도 참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참고,
나를 중상 모략하는 사람이 있어도 참고,
반항하거나 원수 갚을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참고 견디는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눅22장 51절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최고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나서 내려오셨을 때에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주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을 보고 베드로가 칼을 빼서 그 사람을 칼로 내리쳐서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 귀를 다시 붙여주시면서...
베드로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까지 참으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붙잡아야 할 말씀이 이 말씀인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붙잡으신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를 가장 복된 생애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상대방이 악하게 대적해 온다고 하더라도
“이것까지 참아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삽시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이웃과 주차 문제로 싸움이 났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믿지 않는 사람이 윗옷을 벗어 던지고 거칠게 욕을 하며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때에 어떤 안수 집사님이 나섰습니다.
“아니 이게 우리가 교회 다니니까 우습게보고 있어” 하면서 그를 주먹으로 쳤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옳다 잘되었다 하면서 교회 문 앞에 드러누웠습니다.
그리고는 외칩니다...“교회가 나를 팼다...예수쟁이들이 나를 팼다.”
이제 교회가 큰일이 났습니다. 전도길이 꽉 막혀 버렸습니다.
결국에 목사님이 가서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사과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금식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전교인이 다가서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예배가 끝난 후에 전교인을 대동하고 그분 집 앞에 갔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무릎은 꿇고 “진심으로 잘못했노라” 고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깜짝 놀라했습니다.
전교인이 다 와서 무릎 꿇고 사과를 할 줄 몰랐습니다.
드디어 그분이 나와서 사과를 받아들이고 자기도 잘못 했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도 그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온유함이 얻어낸 열매입니다.
4)구원 받은 우리는 온유하신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온유의 완전한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마 11: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어야 되고... 온유하신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최종 목표는 예수님 닮는 것입니다.
(찬송가 = 예수 닮기 원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 온유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원래 성격이 난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중에...
성품들이 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베드로 =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요 한 = 우뢰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사랑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 성품이 변화가 됩니다.
이 예수님의 은혜를 크게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초대교회의 7집사 중에 스데반을 보세요.
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며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을 때에...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벌떡 일어나 스데반을 맞아주셨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온유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고난 이후였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나니 그의 얼굴이 광채가 났습니다.
매 맞아 죽어가면서도 온유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가 잇습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겸손한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습이 몇 가지 있습니다.
1)자신의 삶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2)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3)주님의 도우심을 항상 구하는 것입니다.
4)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겸손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면...
그의 삶속에 성령님이 항상 동행해 주시며 그를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잡으신 만왕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양처럼 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성령의 인도를 따르며 사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1)다른 사람에게 전도하여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로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해야 할 일입니다.
2)J.X의 형상을 닮아 날이 갈수록
J.X에게로 가까이 가는 성화, 이것은 우리가 평생 이루어야 할 과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라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 닮은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를 의지하여
구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이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므로 이미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는...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는 그러므로 온유하게 살수가 잇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게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온유하게 살수가 있습니다...
믿습니까? 믿으십시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멘!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온유함으로 인하여
구원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지금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자신들이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살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자신들이 지금의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병들고 망하고 가난하고 지옥 가는 일들이 죄 때문에 생겨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 사로 잡혀 살면서도 남의 탓만 하고 사는 것이 어리석은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거기에 얽매여서 죽지 못해 비참하게 인생을 한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그런 그들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반드시 살길이 열리는데...이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들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깝습니까?
어떤 죄인괴수라도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주님의 보혈이 죄를 사 한다” 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데...
이 희생의 비밀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어찌 없을 수가 있습니까?
은혜 받지 못한 사람,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를 바라볼 때에 어찌 불쌍한 마음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바라볼 때에,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을 바라볼 때에
마음에 안타까움이 없다면...
어찌 주님의 마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일찍이 예루살렘 거민들을 구원하시려고 선지자를 보냈는데
그들을 돌로 쳐서 죽이고
심지어 마지막 구세주이신 예수님까지도 거부할 때
아무리 “회개하라”고 외쳐도 회개하지 않을 때...
우리 주님은 너무도 안타까워서 그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이 온유한자의 모습입니다.
온유한 자의 마음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역한 자를 바라볼 때...
주님의 심정으로 민망히 여길 뿐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영혼을 끌어안고 기도하고 권면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아니하고
심판과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바리새적인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삼으심도...
세상을 심판하라고, 정죄하고, 판단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라고 선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고 성령 받은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온유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미 복 받은 자들입니다.
복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받은바 복을 나누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받은바 복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복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온유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온유하신 하나님을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온유한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땅을 차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잘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온유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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