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강해 2>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5:3-
지난주에 저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돈, 건강, 성공 등등]의 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의 1~2%에 불과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1~2%의 복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98%의 복을 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98%의 복 중에서 주님께서 첫 번째로 꼽고 있는 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한 번 더 읽어봅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 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두 기록을 두고 학자들은 주님은 [가난한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이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곁들여 [심령이 가난한 자]로 기록하였다고 봅니다. 일리가 있는 견해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 중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등식은 사실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조금 소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 겸손하지 않고, 다 깨끗하고 다 정결하지 않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잘 기울이고, 전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 해서 다 천국을 사모하고 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물질에 대해 더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도 많고, 돈이 신분의 상승과 삶의 가치와 행복을 가져올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도 더 강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투지에 불타서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바쁘고, 적은 돈에도 시험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심령이 가난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가난입니다. 그럼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Ⅰ.영적 가난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물질적 풍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세상 자체가 물질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이 가치 있게 여겨지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 속에 살아도 그런 물질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들은 그런 물질적인 것으로는 심령의 깊은 만족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아서 돈을 벌어보지만 돈을 소유함과 함께 근심과 염려에 빠지고, 오히려 돈 때문에 인간성이 파괴되고 양심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면서 돈을 가치로 여기며 사는 삶에 환멸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가진 돈을 기부하거나 포기하고 스스로 가난하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이나 성공, 인기 등등을 추구합니다. 그런 것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취해도 마음의 평안이나 만족이 오지 않을 때 사람들은 실망을 합니다. 이렇게 실망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한 방향이고, 아예 그런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런 것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 속에 살면서 사람의 사랑을 구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을 믿고 사랑하고 살아가다가 많이 실망하고 많이 상처를 받습니다. 이럴 때 반응 역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산을 찾거나 애완동물을 기르는 데에 마음을 쏟거나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사랑을 쏟는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종교를 찾는 것도 같은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을 증오하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사람에게 아픔을 당한 사람은 부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심을 갖고 있습니다. 여자에게 실연을 당한 사람은 종종 자기가 사랑했던 여성과 같은 직업을 가졌다거나 외모가 비슷한 여자, 심지어는 옷을 입는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증오심을 품기까지 합니다. 그런 증오가 종종 끔찍한 범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부정적인 반응과 달리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을 믿고 살기보다는 사람은 그저 사랑하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인간애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 돈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 속에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는 사람이나 건강이나 성공, 인기 등등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순수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 또는 사람에 대한 사랑에 집착하지 않고 초월적인 인간애를 가진 사람, 이런 사람들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천국에 가까운 사람이기는 하지만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아닙니다. 천국 문 앞에 가까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천국 안에 들어서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천국문 안에 들어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천국 문 안에 들어서는 것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 아들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는 는 예수님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계명을 말씀합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것은 제가 어릴 적부터 다 지켰나이다.” 여기까지 말한 이 청년의 상태는 마음이 가난한 상태가 아닙니다. 마음이 부자인 상태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천국과 거리가 아주 먼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그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9:21, 막10:21, 눅18:22). 여기서 주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라 하신 것과 그리고 나서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는 먼저 마음이 가난해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 자동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돈을 초월하는 것 등은 마음이 가난해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은 내 마음의 부를 가져오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마음에 진실하게 자신의 주님으로 믿은 사람, 예수님을 돈이나 세상의 인기나 권력, 사람의 사랑보다 소중히 여기고 보화로 여기고 복으로 여기는 그 믿음,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크게 보고 믿으며, 그를 즐거이 따르고 사랑하는 사람, 이 사람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고,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난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천국에 이미 입성하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Ⅱ.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 의와 죄의 문제를 반드시 다루게 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악한 자가 아닌 선한 사람이 가는 곳이고 죄인이 아닌 의인이 가는 곳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악인과 죄인이 가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냐? 죄가 무엇이고 의가 무엇이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과연 선하나 악하냐? 내가 죄인이냐 의인이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선과 악, 죄와 의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며 살게 됩니다. 선을 행하면 기분이 좋고, 악을 행하면 아무래도 마음이 괴롭습니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을 것 같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악을 행하다가도 하지 말아야지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안에는 선도 있고 동시에 악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만 행할 수도 없고 악만 행할 수도 없습니다. 완전하게 선한 사람도 없고 완전하게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다 고만고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 사람은 선에 대한 갈망이 강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려고 무척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선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갈라집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아, 나는 참 선하구나. 난 선하게 살고 있어. 난 대단해. 난 복 받을 거야. 나 같은 사람이 천국의 주인공이야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부류의 사람은 첫째 부류의 사람과 동일한 수준의 선한 삶을 살고도 아, 나는 못됐어.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다니, 나는 참으로 무능하고 약하구나. 나는 선하지 못해. 나는 참 악하고 비열해. 어쩌면 내가 이렇게 악하고 비열할 수 있지? 도대체 왜 그런 거지? 어떻게 하면 내가 선할 수 있지? 라고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진짜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누가 천국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둘 다 선하기는 하지만 앞 사람은 천국과 아주 멀고, 뒷사람은 아주 천국과 가깝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을 행한 양은 똑 같은데 누구는 천국에서 멀고 누구는 천국에서 가깝습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에 만족을 하므로 더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선을 즐기며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천국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그는 아주 높은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한껏 높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는 사람 앞에서 마음이 교만하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마음이 교만합니다. 그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자기가 행한 선을 자기의 부로 누리는 부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천국에서 먼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이 선을 행하려고 했지만 진정한 선에 이르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열 가지 중에서 아홉 가지의 선을 행했을지라도 행하지 못한 한 가지 악에 대해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런 악으로 인해 자신이 아주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사실 앞에서 자신이 선하지 못하며, 선에 이를 수 없는 무능과 부패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을 부로 누리는 마음이 부자인 사람과 달리, 자신이 이를 수 없는 선에 대한 부담감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천국에 가까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두 부류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 반응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그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 복음을 들으면 두 사람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자신이 선을 행한 사람이며, 그래서 자신을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선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부패 무능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비록 그가 선한 삶을 추구하며 어느 정도 선한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왔다 할지라도 자신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그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의 복음의 선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천국에 속한 사람이요,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천국을 누리는 것은 선을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죄 사함과 구원을 경험할 때에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자신이 행한 선이라고 하는 공로를 자랑삼지 말고, 자신이 진정한 선에 이를 수 없는 악함을 가진 부패 무능한 존재임을 깨달으십시오. 내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십시오. 그 죄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을 무서운 것임을 아십시오. 그리고 그런 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하여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고 구원을 누리므로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Ⅲ.부자나 권력자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부자나 권력자들에 의해 경제적으로나 인권적인 면에서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북한 정권에 의해 고통 받고 있는 북측 주민들과 같은 경우는 최악의 경우이고,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의 빈국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중동지역의 회교에 의해서 탄압받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고, 비록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등에 의해 소외되고 고통 받고 있는 이들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사회나 제도, 독재자나 부자 등에게 억압받고 고통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라거나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 어떤 특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가깝기는 하지만 천국을 저절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난으로 인하여 겸손함과 구원의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야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부자나 권력자들이나 제도와 사회 구조적 모순에 의해 업압과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이로 인하여 겸손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요청하지 않으면 그들 역시 천국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론 이것입니다. 영적 가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갈망 외에 다른 것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이나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구원을 갈망하고 요청하는 사람이 천국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자신이 비록 선을 행하고자 하나 선을 행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패 무능을 절감하며,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받는 길은 십자가의 주님을 믿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서 주 예수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천국의 주인공이요, 독재자나 부자, 사회 구조적 모순과 제도에 의해 억압과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이들만이 천국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을 미덕으로 여기지는 마십시오. 마음의 겸손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갈망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고자 하는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만이 진정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얻을 사람이요 천국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의 가난은 복입니다. 육신적 물질적 가난이 복이 아니라 영적 가난이 복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만큼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 복된 자입니다. 고통과 아픔을 통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에 소망을 두는 사람이 복된 자입니다. 천국은 이런 자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심령의 가난이라고 하는 복은 모든 복으로 통하는 통로가 되는 복입니다. 마음의 가난이 없는 사람은 그 어떤 하나님 나라의 복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할렐루야!
행복으로 가는 길 ②
마5:1-12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이 땅에 진정한 행복은 이루어 질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진정한 행복을 얻기를 원한다면
먼저 행복을 주실수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때부터 그 심령에 행복이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그 가정에 행복이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그 공동체에 행복이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그 민족이나 국가에 행복이 시작됩니다. 믿습니까?
지난주에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즉 자신이 연약한 존재,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간절히 찾듯이
-병자가 의사를 찾듯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행복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겸손히 구세주 예수님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마음에 행복이 임합니다.
그때부터 당신의 마음에...행복이 임합니다.
그때부터 당신의 가정에...행복이 임합니다.
그때부터 당신의 직장에...행복이 임합니다.
그때부터 당신의 사람의 현장에...행복이 임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곳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곳에 아무리 좋은 사회적 조건이 있다할지라도...
예수님이 안 계신 곳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곳에는 행복이 임하게 됩니다.
행복이 만들어 지게 됩니다. 행복이 샘솟게 됩니다.
그 행복의 주인이시며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는 예수께서
“행복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2번째 말씀하십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2)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먼저 '애통하는 자'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애통'이라는 말은 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운다'는 말은...
그냥 눈물을 흘리는 그런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눈물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가... 약 9가지 정도 나오는데,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애통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펜데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가장 큰 슬픔을 표현할 때에 쓰여 지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눈물과 더불어 터져 나오는 그런 격심한 비통을 뜻합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이 그렇게 애통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야곱은 요셉을 극진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짐승에 찢기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아들들로부터 듣게 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하여 미디안 사람의 손에 팔아먹고 난 후,
이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짐승에게 찢기어 죽었다'고 야곱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만,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정말로 죽은 줄 알고는
옷을 갈기갈기 찢고, 허리에 굵은 베를 두르고,
땅을 치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음부에 내려가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통곡했다고 합니다.
이런 통곡을 표현할 때 '펜데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애통을 통해서
'애통'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대로 여기서 말하는 '애통'이라는 것은...
심장이 터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는 것이요,
창자가 끓어지는 듯하고, 뼈를 깎는 듯한 슬픔을 말합니다.
예로부터 ‘소문만복래’라고 하였습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웃어야 복 받은 집이라고 생각할 텐데...
그런데 성경은 우는 자가 복인 있다는 것 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이 '애통'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참으로 안 그래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인데,
그래서 좀 웃으면서 여유 있게 살아가고 싶은데.., 울면서 복 받으라고 하니 이해가 안갑니다.
웃으면서 살면 좋겠는데, 지금 예수님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고 있습니다.
울어도 보통 우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찢고, 아파하면서 막 울어야 복을 받는다고 하니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과 연관지어
'우는자가 복이있다는' 말씀을 생각하면 그 의미가 쉽게 이해가 됩니다.
즉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도저히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는
'주님, 나는 이제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주님 밖에 없사오니
주님이시여 내 심령에 오셔서 나를 다스려주옵소서' 라고 호소하는 것
바로 이런 자세가
'심령이 가난한자의 자세'라고 했고...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인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알고는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부르는데... 어떻게 불러야겠습니까?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나님, 저는요 예수님이 필요해요' 히히 이래야 되겠습니까?
그럴수는 없는 일이지요..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얼마나 뻔뻔스럽겠습니까?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심령의 가난함을 느낄 때에는
자연적으로 어떤 결과가 따라 오느냐 하면
'애통하는 마음'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말은 '나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라고 하면서도
애통함의 자세가 없다면 그 심령은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심령이 가난하면... 그 다음에 분명히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 저는 예수님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 없으면 망합니다.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를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라는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며, 아파하며, 울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껏 주님의 뜻대로 따르지 않고
내 맘대로, 내 고집대로 행동하며 온갖 죄를 다 지은 데 대한 잘못을
주님 앞에 고하면서
'주님, 이제는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주님, 제 마음에 오셔서 제 인생의 키를 운전해주십시오'
라고... 눈물 흘리면서...
결단하고 각오하는... 그런 애통의 자세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 때문에 애통해 하며 삽니까?
-세상은 참으로 울지 말아야 할 것을 위해서 울고,
-진정 울어야 할 것을 위하여 울지 않는... 모습들이 허다합니다.
억울해서는 울고, 분해서는 우는데...
죄 때문에는 울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경우가 허다했음을 보여줍니다.
삼하 13장 2절을 보면...
'암논'이라는 사람이... 애통하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그것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보면서... 애통해 한 것을 말합니다.
즉 정복해서는 안 될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애타는 정욕'으로 아파하는 모습을 거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욕심과 좌절로 인한... 눈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눈물을 흘린 결과... 나중에는 거짓을 꾸며 강제로 다말을 겁탈하고
이 일로 인하여 암논은... 압살롬에게 살해를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욕심과 좌절 때문에... 운 결과가... 이렇게 무섭게 나타났습니다.
삼상15장 24절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애통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애통은 위장된 애통입니다.
진정한 애통이 아니라 건성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건성으로 애통했던 사울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울보다 더 큰 죄를 범한 다윗은...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죄 때문에 애통해 했다는 것입니다.
시 51편에 보면...
다윗이 자신의 죄 때문에 '진정한 애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에 애통하면서 지은 시 입니다.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해... 마음을 아파하며 울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침상을 적실만큼 울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내게서 주의 성신을 거두어 가시지 마옵소서" 라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확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후에 다윗은 성군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여러 번 애통하였습니다.
죄를 깨닫고 애통하고, 넘어지면 또 애통했습니다.
처음의 애통은 갈릴리 바다에서 만선을 경험하고 애통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렇게 애통할 때 주님은
'아니다. 나는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후, 그는 닭소리를 듣고 또 다시 애통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고 물고기 잡으러 떠났던 그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심을 듣고는...
심령에 애통하고는...
그 후로 주님 가신 길을 따라... 순교하였던 것을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런 사람입니다.
사6장 5절을 보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라고 애통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를 의의 선지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참으로 애통해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죄 때문에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애통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애통을 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복되게 하신다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위로받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여기 "위로받다"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칼레오'로서,
이 말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숨을 헉헉거리며 달릴 때,
누군가가 옆에 가서 함께 달려주며, 물병도 주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것처럼
성령께서 곁에 오셔서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시고, 힘을 주시면서 기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요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가면 너희에게 보혜사를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단어인 '보혜사'라는 말이 바로 '파라클레토스'로서
여기서 사용된 '위로한다'는 '파라칼레오'라는 말과 같은 어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파라클레토스,
즉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을까요?
이는 힘없고 연약한 제자들,
이제 주님이 떠나시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믿음에서 승리하도록 돕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위로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순간마다 내 속에 있는 죄성을 아파하며 탄식할수록
위로의 성령님께서 곁에 오셔서 격려해주시고 붙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염려 마라, 괜찮아.
이제 너는 용서받을 수 있어.
이제 너는 소망이 있어.
이제 너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어.’
그렇게 위로하시면서 세상에서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도록 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34편 18절에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고
고백했습니다.
성령의 위로를 경험한 후의 고백입니다.
또 시편 51편 17절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마소서" 했습니다.
이 시 또한... 이미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위로가 어떻게 오는 가를 알기 때문에 깨어지고,
상처난 심령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심과
어루만지심을 바라면서 죄를 자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다윗이 이렇게 애통할 때... 하나님은 그를 위로하시고
그를 역사의 무대 위에 우뚝 세워...
당대의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범죄 후에 침상이 젖도록 울었기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맨 정신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극심한 애통의 과정을 통과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더욱 은혜가 넘친다" 라고 말입니다.
즉 깊이 애통할수록... 하나님의 위로가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여기며...
애통했던 바울을... 하나님은 어떻게 위로하셨습니까?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가장 위대하게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도... 그러한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부인하였던 자신의 죄를 가슴을 찢듯이 애통하였습니다.
시대의 영웅호걸들은 다 잊혀졌는데도
미천한 어부였던 베드로는 오늘에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복음성가 ===
사랑하는주님 내게 다가와 이밤이 다 가기전에
네가 나를 버리리라 하실때 왜그리 섭섭하던지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배반하지는 않겠다 했던
믿음없는 나의 헛된 맹세 주님마음 울렸었네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부인하고 돌아서서 한없이 울었네
내가 주를 잃고 방황했듯 주도 나를 잃고 슬퍼했네
하지만 나의 눈물보다 주님의 눈물 더 뜨거웠네
멀리서 들리는 닭 울음소리 나의 영혼 잠깨웠네
잊어버렸던 지난 슬픈고백 왜그리 부끄러운지
이세상 어디 숨을곳 있나 닭울음소리 들릴때마다
사랑하는 나의 주님 모습 스치고 또 스쳐가네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부인하고 돌아서서 한없이 울었네
주님 오실 기약 어찌잊고 맡긴사명 모두 잊었던가
지금도 새벽닭 울때면 참회의 눈물로 회개하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
다윗,
엘리야,
느헤미야,
예레미야,
베드로,
바울사도는 죄 때문에 애통해 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영혼을 위하여 애통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애통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영혼을 위하여 애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데로 살지 못하여 애통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의 위로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무엇 때문에...슬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아파하며 애통합니까?
=하나님의 뜻데로 살지 못하여 애통합니까?
이러한 애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복이 임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죄인된 나 때문에 애통해 하시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한 고통속에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애통하며
울부 짖었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모두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또한 이웃의 영혼을 생각하며 애통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러면 성령님이 곁에 오셔서 위로해 주실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가 있지만,
그것은 잠깐입니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입니다.
=부모의 위로도 잠깐이고,
=친구의 위로도 잠깐이고,
=아내와 남편의 위로도 잠깐입니다.
=돈과 재물과 괘락의 위로와 기쁨도 잠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애통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땅을 떠났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눈물이 흐릅니다.
형제 중에 누군가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도 눈물이 흐릅니다.
만일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갈 때,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곱게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가...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객지 생활을 위해 부모의 품을 떠나는 자식이...
부모님을 그리워하면서 울고,
또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이 안쓰러워서 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TV를 보다가도 눈물이 납니다.
이산가족 찾기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눈물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눈물은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눈물이나 애통은... 그저 감정에 의한 일시적인 슬픔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애통할 것은... 죄 문제입니다.
왜냐면 죄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애통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죄 문제 때문에 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눈에... 회개의 눈물이 마른 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많은 위로의 축복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라는 이 말씀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먼저는 내 자신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합시다.
=세상에서 괴롭고, 아프고, 힘든 나의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내어놓으면서 웁시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의 잘못됨과 어리석음과 죄를 위하여 애통합시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내 나라와 내 민족의 죄악을 위하여 애통합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 속에 살고 있는 세계의 민족들을 바라보며 애통합시다.
그럴 때 내가 위로를 받고,
내 가정이 위로를 받고 , 내 나라가 위로를 받고,
세계가 나의 애통의 기도를 인하여... 주님의 위로의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만민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애통의 중보기도가 롯과 그 가족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의 애통의 중보기도가 인류를 살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애통의 기도가 가정과 이웃과 민족과 열방을 구원할것입니다.
함께 행복의 길로 가게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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