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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집사의 직무

하나님아들 2013. 10. 1. 16:23

집사의 직무

 


 



C. Bouwman

trans. by Seok-Jun Yun



수년 전에, 나는 피터 큐닉(Peter Keunig)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부분적으로 몇몇 음악적인 화란 방언(musical Dutch dialect)에 관한 책이었다: 그 책의 제목은 “Kinderen in Verstand en Boosheid” 이다. 이 피터 큐닉은 수많은 짧은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을 통해 세기 전환의 어간에 북홀랜드 지방의 단순한 시골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나타내고 있다. 수많은 짧은 이야기들 중에 하나는 집사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 집사에 관한 한 이야기는, 집사직이란 것이 절대적 가난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자금의 원천을 엄격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과부들, 노인들, 그리고 병자들은 주당 2페니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이 적은 금액은 겨우 필수품들을 사는 데 사용될 정도였다; 그런 가난한 사람들은 계란 같은 사치품은 거의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 내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은, 집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단지 기아(starvation)를 막을 정도로만 나누어 주었으며,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은 집사에게 가야만 한다는 것은 가장 치욕적인 일이라는 것이었다.

 

피터 큐닉이 말한(혹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가 어쨌든지 간에, 그것은 내가 확실성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실제로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각박한 마지막 결론으로서의 집사에 대한 이 개념이나, 집사에게 접근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개념은 확실히 대중적인 것이다. 실제로, 심지어 오늘날에도 광범위한 개혁주의 세계 안에서는 집사직에 대해 제한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들이 존재한다. 이는 집사직이 보편적으로 돈을 분배하는 것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며, 집사들이 그들의 배분에 있어서 관용적이지 않고, 집사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실제로 곤혹스런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집사의 직무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통상적인 이해가 아니었다. 귀도 드 브레(Guido deBres)는 1561년의 그의 벨직 신앙고백서에서 집사의 사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도움과 위로를 받는다”. 1618-19년의 도르트 신조에서도 25조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집사의 독특한 직무는 근면하게 구호품과 다른 자선의 기부금을 수집하고, ... 성실하고 근면하게 이를 가난한 사람과 같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 대상에는 단지 회중에 속한 사람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되며, 그들의 필요가 요구하는 것을 따라 주어져야 한다; 고통받는 자들을 심방(visit)하고 위로하기 위해, 그 자선들이 잘못 사용되지 않도록 실제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이 두 문서 모두에서 집사의 직무는 위로를 제공하는 것에 절정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재정적 지원은 확실히 그들의 사역과 관련된 것이지만, 선조들은 집사들이 테이블 위에 빵이 놓여 있는 것을 확실케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했던 것이다.

 

한편에서 피터 큐닉이 그리고 있는 그림과 다른 한편에서 벨직 신앙고백서와 도르트 신조가 그리고 있는 그림 사이에는 현격한 불일치가 있다. 교회 역사에서 신앙고백과 현실은 확실히 서로 협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왜 신앙고백이 집사의 그 사역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성경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집사의 직무에 대한 토론을 조금 더 자극해 보기 위해, 우리는 호주 자유 개혁교회(Free Reformed Churches of Australia)가 1985년 총회에서 받아들여 찬송책(Book of Praise, 개혁교회에서의 찬송책은 우리나라처럼 찬송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찬송 뒤에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과 예전 등이 함께 묶어져 있다-역자주) 개정판(1984)에 실은 많은 예전적 양식들을 떠올려 보자. 이 결정은 교회들이 집사 안수를 위한 양식을 채용함에 있어 이전에 사용되었던 양식과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창기의 양식은 집사의 직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집사는 “첫째로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자선품과 물건들을 모으고 관리한다...그들의 직무의 두 번째 부분은 배분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 ‘위로의 말’을 동반한다”

 

1985년에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양식에서는 돈의 실제적인 수집과 배분은 “교회 안에 있는 자비의 봉사의 선한 진전”을 살피고 책임지는 것에 비해 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양식에 따르자면, “그리스도의 회중들 중 누구도 질병이나 외로움, 가난 등의 압력으로 인해 불안한 가운데 살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 바로 집사의 책임이다.

 

이는 “새” 양식은 “옛” 양식에 있었던 실제적 기능에 강조가 있지 않다...로 요약될 수 있겠다.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로 인한 결과는 우리의 집사들이 이 직분의 실제적인 직무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더 연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직무는 우선적으로 금전적 운영과 관련된 것인가? 회중들이 매주 보게 되는 집사-헌금주머니를 들고 교회당을 통과해 걸어가는 형제들-가 이 직무의 실제적 전부를 보여주는 것인가?



성경적 자료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그 결과로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핵심적인 사상이다. 예수님께서는 계명들 중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 받으셨을 때, 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사랑이 첫 번째 계명이요, 그러나 두 번째 계명은 이 첫 번째 계명과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고 하셨다.



모세오경에서

이 사랑에 대한 계명은 신약성경에서 새로 베풀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오래 전 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을 축어적으로 반복한 것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

 

옛 이스라엘이 사랑을 보여야 했던 방법 역시 하나님에 의해 지시된 것이었다. 부자들에게 사랑의 방편을 보여주신 것이 그 한 예이다; 어쨌건 하나님께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그를 위해 레드 카펫을 깔아주는 등의 일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증명하려는 것은 그의 부요함 중 얼마를 자신에게 굴러들어오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자기 백성을 가르치신 것은 부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신명기 15장 7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비슷한 내용으로 이러한 말씀도 제시되어 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레19:9). 타인에 대한 사랑은 어떤 사람이 보다 덜 특권을 가진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풍요를 나누어 주도록 명령된 것이었다. 이러한 타인에 대한 자기 비움의 사랑이 이스라엘의 수많은 축제들에 특별히 나타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한 경우에 이스라엘은 나그네와 고아, 과부가 이스라엘 가족들과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만 했다(cf. 신14:26f;16:11,14)

 

왜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러한 사랑을 보여야만 했는가?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러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들 역시 자기 비움의 사랑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시 사랑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속하시고, 자기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 나라를 구속받은 종들의 나라로 삼으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다. 주님(LORD), 야웨,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의 정체성은 이스라엘 사람들 각자에게는 바로의 종들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유익이었다. 실로 애굽에서 미래도 없고, 안전도 없었던 사람들이 은혜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받았으며, 거기에서 각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소유의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를 상속하게 된 것이다.

 

약속의 땅이 허락된 풍성함과 함께 주어진 애굽으로부터의 이 실제적인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오게 될 출애굽을 통한 사탄의 힘으로부터의 거대한 구속과 죄의 용서가 뒤따르는 부요함의 한 그림이었다. 말씀 안에서 이 무가치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이 가난뱅이에서 부자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애굽의 찌꺼기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행하셨다는 것은, 이 종이 왕이 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또한 서로에게도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풍성하게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풍성하게 주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축제들은 특별히 출애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그 때에 이스라엘 안에 있던 가난한 자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기억되도록 되어 있었다.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가지셨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할 수 있어야만 했다.



복음서에서

이러한, 구약 성도들 간에 있었던 자기 비움의 사랑(self emptying love)은 신약에서도 계속된다. 사실 사랑의 예는 하나님 자신보다 더 잘 주어진 것은 없다. 그분께서는 가치 없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셨다. 영원 전부터 신격의 삼위들은 서로 천상의 영광을 누리셨으나(cf. 요17:5), 자기 비움의 사랑으로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유일하고도 극진히 사랑하시는 아들을 천상의 성소에서 내쳐 땅에서 살게 하셨고, 무가치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다. 아들은 기꺼이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내려가셔서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보속으로 내놓으셨다. 여기에 너무도 심원하게 보여진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은 십자가를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신 것이다(요일4:9). 그의 삶은 자기희생의 삶이요, 그것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의 유익을 위한 헌신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의 사랑이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가장 강렬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에는 타인들에 대한 그의 헌신의 셀 수 없는 많은 예들이 존재한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먹이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죽은 자를 일으키셨고, 빈궁한 자들에게 위로를 주셨으며, 죄인들을 용서하셨다. 비록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매우 유형적이고 실제적인 용어로 오기는 했지만, 항상 그 절정은 비탄한 자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주시는 것에 있어 부족하지 않으시다; 가난한 자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케 될 것이며, 병든 자는 완전히 고침받게 될 것이고, 죄인들은 완전히 용서함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그의 사랑의 사역을 “주의 은혜의 해(acceptable year of the Lord)”(cf. 눅4:18ft)가 도래했다는 것을 명백히 하신 것으로 이해하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주의 은혜의 해”란 이스라엘이 매 50년마다 기념해야 했던(레25장) 희년에 대한 언급이다. 희년에 모든 빚은 탕감되어야만 했고, 빚 청산 등의 이유로 인해 지난 50년 내에 팔려갔던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기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희년이란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들이 새 자유를 받게 되는 해였다; 그들은 아무런 부채 없이 자신의 땅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이스라엘에서 그 해는 커다란 축제와 기쁨이 있도록 계획되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해 그들에게 베풀어진 그 자비로 인한 것이다. 그 해를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복음 4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 속으로 오심과 연관지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비우셨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기쁨과 축제가 있게된 것이었다. 그는 위로를 주기 위해 오시는 분이시다.

 

이 자기 희생적 사랑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세대에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모범이 되신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0장에서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6절). 그래서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본문에서 이렇게 선포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위의 사람들을 섬김으로 사랑하신 것처럼 제자들 역시 그러해야 했던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예를 단지 열 두 제자들만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내려놓으심으로 전 교회에 봉사하셨듯이 전 초대교회는 섬김에 부지런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신자들이 다음과 같이 행했다는 말씀을 읽는다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2:44f). 남음이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남음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이 식탁에서 공급받도록 했다. 이러한 성도들의 성찬의 결과는 몸된 신자들이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46,7절-역자주)으로 나타났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간에 보기를 원하시는 내용과 관련된 사랑이 보여지고 있다; 여기에는 기쁨이 있다. 이 기쁨은 갈보리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사탄으로부터의 구속에 뿌리박은 것이다. 여기에는 서로간의 돌봄과 서로간의 나눔(sharing: 공유)가 있다. 이를 통해 모든 창조물이 받은 구원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여기에서 행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주 오래 전에 모세를 통해 주셨던 가르침을 현실 속에서 구현한 것이다(cf. 신15:7f;14:28f;16:11ff;레25).

 

그러나 초대교회에 있었던 그러한 아름다운 상황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서로를 돌보는 활동에 관한 호의적인 보고(행2:46) 후에, 우리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는 구절을 읽는다. 제자들의 작은 그룹은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4)에서 보듯이 곧 팽창하게 되었다.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 역시 여기에 동참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해가능한 이야기지만, 수의 증가는 자발적인 돌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은 많이 받았고, 다른 사람은 적게 받았다. 그러한 발전은 다음으로 조직화라는 방편을 유발시켰다. 결과적으로 사도들은 돌봄과 배분의 과정에서 중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4장의 말미에서 비록 모든 것이 공동으로 진행되었지만, 땅을 판 값을 직접 가난한 자들에게 전달하지 않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32절ff)는 것을 읽게 된다. 그리고 이는 명백히 잘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35절에서 “각 사람의 필요한 대로 배분이 되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해갔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5:14). 증가하는 성장세의 축복은 자체의 문제를 가져왔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6:1). 성장은 사도들이 더 이상 필요를 돌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많은 헬라출신 과부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매일의 분배에서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회중의 기쁨은 투덜거림으로 대치되었다. 분배의 사역이 사도들에게 단지 너무 많은 일이었다는 점은 사도행전 6:2,3으로 볼 때 명백하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그래서 식물의 배분을 관리하기 위해 일곱 명의 사람이 임명되게 된 것이다. 이 일곱이 “식탁봉사”를 해야했던 사람들이고, 이들이 받은 구속을 충분하게 즐거워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확실케 하는 자들이었다.



서신서에서

이는 회중을 돌보는 사역이 갑작스레 이 일곱의 사람에게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회중들은 스스로가 처음부터 서로를 돌보는 자로서의 책임을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구약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집사의 지명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는 사도들의 다양한 서신들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집사에게만 쓴 것이 아니다)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6:10).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도 바울은 쓰고 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3:12). 그리고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서로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말씀하고 있다(빌2:4). 또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의 수신자들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을 거절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가진 것을 나누라고 명령하고 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13:16).

 

그래서 요한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3:17)라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이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또는 문자적으로 읽으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집사로서 서로 봉사하라”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가 임직되었지만, 이 회중의 직무는 전체 성도에게 남아 있었고, 따라서 각 성도들의 개인적인 직무는 서로에게 손과 발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회중의 구성원들이란 반드시 성도의 교제여야만 했고, 반드시 서로를 위해 집사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유약한 회중이 참으로 아무도 방치되지 않기 위한 성도의 교제로서의 기능을 행하는 것을 돌보는 것이 바로 이 일곱의 책임이었다. 그래서 일곱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관리(management)와 조직(organisation)이었다. 집사를 안수하기 위한 형식은 다음과 같다: “집사의 책임은...교회의 자비의 봉사의 선한 진전을 살피는 일이다”(찬송책, 631). 집사는 교회의 자비의 팔(church's arm of charity)라기보다 오히려 교회의 팔의 기능이 잘 수행되도록 돌보는 책임을 가진 사람이다.



다시 사도행전에서

 

그러므로 이 일곱의 그룹이 가졌던 직무는 “식탁봉사”에만 제한되지는 않았다. 즉, 성도의 교제가 실행되는 것을 관리하거나 돌보는 일들이 이들에게 주어졌다. 예를 들자면 스데반에게는 설교하는 일도 주어졌다(cf.행6:8,10과 7장). 빌립은 전도자로 언급되었다; 그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다(행8장). 이 집사들은 식탁을 봉사하는 일을 넘어서고 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은 복음을 전달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돌본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적 자선의 행위가 아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받은 구속으로 인해 즐거워했다. 이 구속이란 그들이 사단에 매여 있던 것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상징이다. 이 구원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총체적인 기쁨-어떠한 본성의 필요에 의해서도 꺾이지 않는 기쁨-이 있게 되었다. 구약시대의 분배가 그런 정도라면, 신약시대에의 적용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선물들이 주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관련이 없이도 기쁨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집사들은 단순히 돈을 주고 거기를 떠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집사들은 우선적으로 복음과 함께 오는 자들이어야 한다. 복음 안에서의 기쁨이 가능케 되기 위하여 재정적인 구제가 함께 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집사들을 위한 원리가 있다: 그들이 심방시에, 그들은 복음을 가지고 와서 그 복음의 빛으로 그들이 심방한 집에 있을 특별한 필요들에 비취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심방한 집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에 놀라지 않아야 한다. 성경으로 여는 그러한 행위들은 장로의 직무에만 속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집사가 필요로 하는 자격의 목록 중에 집사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딤전3:9)고 규정하고 있는 이유이다.



성도를 자극함(MOTIVATE THE SAINTS)

 

위에서 설명한 성경적 자료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그리스도의 회중들 중 누구도 질병과 외로움, 그리고 가난의 압박 하에 안락하지 못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구주에 의해 획득된 구속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

 

우리의 주제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회중의 어떠한 구성원들도 안락하지 못한 삶을 살지 않게 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성경의 인용부들은 이 책임이 궁극적으로 회중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그의 독자들이 “서로 짐을 지라”고 가르치고 있고,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각 은사(gift : 선물)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하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회중은 죄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실에서의 결과는, 어떤 이들의 필요들은 간과되고, 다른 이들은 무시되고, 반면에 다른 어떤 이들의 필요는 지원으로 넘쳐난다. 따라서 여기에 집사의 특별한 직무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필요가 적절하게 만나지는 방식으로 성도의 교제가 기능할 수 있도록 돌보는 자들이다. 우리는 집사들이 최초로 임직된 때가 예루살렘 교회 회중들이 큰 규모가 되었기 때문에 성도의 교제가 더 이상 적절하게 기능할 수 없게 되었을 때였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잘 기억해야 한다(행6장). 그리고 집사들이 임직되었을 때에, 겨우 이 일곱 명이 최소 2만 명의 전체 회중들 중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순수하게 자신들의 힘으로만 먹인 것이 아니다. 돌봄(caring)이 전체 몸에 대한 직무로 남아 있었다. 그러한 연고로 집사의 직무의 대부분이 조직하는 일(organisational)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 집사들은 회중들이 성도의 교제에 있어 활발하게 되도록 자극하고 조성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교회 직분자들의 은사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은 또한 집사들에게도 그러하다: 그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문자적으로는 ‘집사직’)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장비시키는(to equip)”(12절,역자사역) 자들이다.

 

집사가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회중의 필요란 무엇인가? 혹은 더 적절하게 질문한다면, 회중들이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성도 개개인들 사이에서의 필요란 무엇인가? 다양한 회중의 구성원들이 서로 짊어져야 할 짐들이란 무엇인가?

 

이 “필요”란 반드시 단지 재정적인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쉽게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재정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별로 없는 진보된 복지 상태를 가진 사회이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사회 속에는 셀 수 없는 필요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이해가능한 일이다. 성도들 속에서도 역시, 재정적인 문제 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세탁물을 처리할 수 없는 병든 어머니도 있고, 외롭고 장애가 있어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회중 속에 있는 이러한 다양한 요구들이 가능한한 성도의 교제에 의해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주 예수님의 예는 이런 점에서도 교훈적이다; 그는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고, 병자들을 치유하셨으며, 귀신들린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그리고 약점이 있는 자들을 회복시키셨으며 죄인들을 용서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재정적 필요를 넘어 하나님의 자녀들로부터 기쁨을 빼앗는 여러 필요들과 맞닥뜨리셨다. 그리고 그의 응답은 이 필요들을 자애롭게 만나 각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는 것이었다. 그것이 각 사람들이 짊어지고 따라야 할 회중을 위한 예들이었다. 이후 사도행전 6장에 나타나는 예루살렘 교회 회중의 특별한 필요가 물질적인 것이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어떤 과부들이 스스로 먹을 것을 벌 수 없었고, 따라서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재정적인 용어로서만 사용하는 “궁핍하다(needy)”라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필요들이 변화될 수 있었고, 그래서 도움의 본질은 변화되어야만 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구속의 선물로부터 흘러넘치는 기쁨에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을 막는 어떠한 장애물이라도 제거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회중의 직무이다. 만약 그 기쁨을 막는 것이 배고픔이라면 음식물이 공급되어야만 한다. 만약 그 기쁨을 가리우는 것이 안식처의 결여라면 안식처가 제공되어야만 한다. 만약 그 기쁨을 풀죽게 하는 것이 외로움이나 질병, 근심이라면, 이것들이 주의 몸이 해결해야 할 필요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가 고아와 과부들, 병자와 수감자들(마25:31ff)을 돌보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는 이유이다(약1:27).

 

그러나 만약 회중의 구성원들이 서로에게서 발견되는 필요-이들 필요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건 간에-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면, 확실히 그 다음으로는 집사들이 단지 물질적인 것보다도 더 많은 필요를 돌보는 장면이 따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직무는 성도의 교제가 될 수 있도록 회중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조들은 벨직 신앙고백서에 그토록 정확하게 이를 체계화했다: 집사의 사역을 통해 “가난한 자들과 모든 고통당하는 자들(all the afflicted)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도움과 위로를 받게 된다.” 임직 예식에서도 이는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회중 가운데 어떠한 사람도  질병이나 외로움, 가난 등의 억압 하에서 안락하지 못하게 살아서는 안된다”(찬송책 631p). 가난이 이 셋 중 끝에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하지만 어떻게 집사가 회중들 사이에 있는 그 다양한 필요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일들이 모두 집사들이 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히려 회중들 사이에 있으나 회중들에 의해 충족되지 않는 필요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필요들이 충족될 수 있도록 구성원들을 자극하고 조직하는 것이 바로 집사들을 위한 일이다. 왜냐하면 집사들이 교회의 자비의 팔(church's arm of charity)인 것이 아니라, 그는 이 자비의 팔이 잘 기능하도록 살피는 책임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집사가 회중을 조직하고 자극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 직분을 가진 형제들이 무리들 속의 다양한 구성원들과 밀접하고도 따뜻한 접촉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는 집사들이 다양한 가정들과 가족들을 정규적으로 심방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한 심방의 주목적은 그 집에 가능한 필요가 무엇일지를 질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주목적은 회중 안에 있는 각각의 구성원들이 실제로 그들 주위에 존재하는 필요들을 발견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지, 그리고 각각의 사람들이 이러한 필요들에 답할 수 있는 무언가를 행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러하다: 성도의 교제 속에서 당신은 당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보여주셨던 사랑과 돌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따라서 이러한 심방들은 또한 심방을 받은 가족들의 주의를 다른 지역의 필요에 돌리는데에 사용될 수 있다. 그 심방을 받은 가족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자신의 재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독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집사들은 심방을 잘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장래의 필요들을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회중 안에 있는 가능한 재능과 자원들을 잘 개발할 수도 있어야 한다.

 

덧붙여서 정규적인 집사의 심방이 가지는 이 중요한 목적 외에, 심방한 집에 어떤 필요가 있는지-그것들이 재정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간에-를 알려고 하는 두 번째 목적도 존재한다. 이러한 필요들은 성도의 교제에 의해 채워질 수 없는 것들로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속 안에 있는 기쁨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In the event that there is an unmet need which the deacons can themselves meet with a cheque, they are to provide that cheque. 하지만 많은 경우 그러한 필요는 단순하게 한 번의 예상치 못한 지출에서 기인한 재정적인 곤란이 아니다. 재정적인 압박은 자주 분별없는 소비와 부주의한 회계(혹은 둘 다)로부터 기인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수표를 쓰는 것은 분명 대답이 아닌 것이다. 그 때 요구되는 것은 재정관리에 대한충고와 가르침이다. 집사들은 스스로가 이러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시간과 재능을 갖춘 사람일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의 권리 중에는 재정관리나 가르침에 재능을 가진 회중들 중의 어떤 구성원에게 봉사토록 하거나 심지어는 그 자산 전문가와 관련된 형제나 자매에게 지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 필요는 때로 외로움일 수도 있다(나이든 사람들이나 과부들에게서 특별히 더 나타날 수 있는 현상). 그러한 상황에 수표는 전혀 적절치 않다. 오히려 관심과 심방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집사들 스스로가 매주 그들을 심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외로운 사람들을 보살펴 줄 시간과 재능을 가진 자매(혹은 형제)들을 자극하고 조직화하는 것이 그들을 위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집사들은 어머니가 병들어서 설거지나 수선을 할 수 없는 가정을 만나기도 한다.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탁이나 수선일을 맡아줄 수 없다면 가능한 자매를 붙여주는 것은 집사의 일이다.

 

또는 실직한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여기에는 재정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더 큰 필요는 실직이 그 가정에 가져다주는 계속되는 긴장일 것이다. 매일매일 바닥을 서성이고 있는 불안한 남편으로 인해 아내는 충분히 제정신이 아니도록 몰려갈 수가 있다. 게다가 직장을 구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의 자존감을 좀먹기 때문에 그 사람은 부적응과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만약 집사가 풀타임 직업을 소개해 줄 수 없다면, 그들이 임시적인 도움이라도 필요한 장소를 찾게 해 주어야 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수가 없다면, 집사는 심지어 그 고용주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것도 필요할지 모른다. 가능한 예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여기에 집사들이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집사가 회중에 있는 누구도 “질병과 외로움, 가난함 등으로 인한 압박으로 인해 불안하지 않게” 살수 있도록 성도의 교제가 잘 기능하는지를 적합하게 살피는 것이 가능한지 의아하게 여기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것이다.

 

실로, 집사들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도록 회중들을 북돋울 수 있겠는가? 진실로 집사들은 해야 할 많은 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집사의 수를 늘려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사의 사역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약 지체로서의 회중들이 살아있는 성도의 교제로 활동하고 있다면, 쉽게 그리고 즐겁게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을 서로 보일 수 있는 기회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집사들의 압박도 경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회중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헌신적으로 서로를 섬기는 일을 더 이상 않게 될 때 집사의 사역은 어려워질 것이다. 참으로 헌신적인 봉사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을 때 집사는 해야 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죽은 믿음이 되는 것이다.



집사의 직무는 교회 밖에도 해당하는가?

우리는 성도의 교제가 되기 위한 회중의 책임이라는 구조 안에서 집사가 직무를 가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 다른 질문이 남아 있다: 집사의 직무는 회중이라는 사면 벽의 경계 안에 제한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기 위해 나는 여러분의 주의를 다음의 성경적 자료에게로 돌리고 싶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그 당에 살고 있는 이방이들에게도 호의적이어야 했다. 레위기 19장은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34절)고 말씀한다. 이스라엘의 돌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네가 애굽 땅에서 이방인이었다”는 말씀 때문에, 이스라엘인 동료들을 넘어서서 이방인을 포함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들은 스스로가 땅에서 소수가 된다는 것, 둘째 클래스의 시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그들 스스로가 애굽에서 다루어졌던 것 처럼이 아니라, 그들이 애굽인인 것처럼 그들을 다루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선을 행해야하는 동기는 더 깊은 차원에서 남아 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전혀 매력적이거나 호감이 가는 나라가 아니었다(cf. 겔16장). 이스라엘은 위신이나 부, 명예와 아름다움을 가지지 못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이스라엘에게 두시고, 이 종의 나라를 구원하셨으며,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자녀가 되었다. 무가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과 선의 복된 수납자가 된 만큼이나 이스라엘은 주위에 있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증명해야했다. 타인을 섬기는 것, 타인의 짐을 지는 것, 타인을 위해 가능한 즐거운 삶을 만들어 주는 것은 이스라엘 중 신실한 자들에게만 지시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주위의 모든 자들의 필요를 경감시키는 길로 나아가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축제를 베풀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즐거워할 때에 그 땅에서 이방인들을 포함시키도록 그 백성들에게 가르치셨다(cf. 신14:28f). 그래서 예수님 역시도, 비록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나그네들, 심지어는 이교도들에게도 치료의 힘을 가지고 복음을 확장시키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는 게네사렛 지방으로 가셨으며 거기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깨끗케 하셨다(막5:11ff). 그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길로 통과해 가시면서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다(막7:24ff). 그는 백부장의 종을 치료해주셨고(막8:55ff), 사마리아인 여자에게 말씀하셨으며(요4:7ff), 비유를 통해 사마리아인의 예를 매우 칭찬하셨다(눅10:25ff).

 

사도들은 구약율법과 그리스도의 결과적 실제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갈6:10)고 가르쳤다. 덧붙여 바울은 이 선을 “특별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바울은 그의 기도에서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3:12)라고 하고 있다.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42주일에서 요약하고 고백한 것은 꽤 정확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여덟번째) 계명에서 요구하고 계신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고 해도 좋을 경우에는 나의 이웃의 유익을 증진시키며...어려운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이웃의 정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예시되어 있다.

 

어떻게 우리는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하는가? 공동체 내에 있는 불신자에게 베푸는 우리의 자비의 사역은 재해를 당했을 때 금전적 지원을 주는 정도로 한계지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만약 회중들 내에 제공되는 원조가 재정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회중들 밖에 선을 행하는 것 역시 재정적인 것을 넘어서야 되는 것이다. 실로 내 이웃의 선을 증진시킨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거나 하려하는 어느 곳에서건, 그 속성이 무엇에 관한 것이건, 그가 필요로 하는 언제이건 내 이웃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세상에서 참된 필요는 그러한 재정적인 것보다는 외로움과 우울증, 걱정 등이다. 만약에 참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파먹어 들어가는 것이 외로움과 우울증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말씀 안에서 그들과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요함을 나누어 주라. 그것이 우리와 같이 무가치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신 우리 주님의 예를 따르는 것이다. 저들 역시 우리와 같이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이다.

 

그러나 만약 회중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에 활동적이라면, 집사들은 이 받은 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격려하거나 자극할 필요는 없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사회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러한 도움을 주어야 할 책임은 집사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선을 행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장 선한 것을 받은 사람들의 책임으로서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But there are occasions where a degree of organisation is required in helping those outside, in the same way as a measure of organisation can be needed in helping those within the congregation. It would seem proper that this organising falls within the perimeters of the deacons’ work. 더 나아가 만약 회중 안에서의 집사의 직무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살수 있도록 성도들이 받은 바 풍성함으로부터 나눠줄 수 있도록 살피는 것이라고 한다면, 확실히 동일하게 성도들이 외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또한 자신들의 재물을 나누고 있는지, 그래서 그 사회에 그리스도께서 이들 성도들에게 보여주셨던 그 사랑을 크게 나타내고 있는지 살펴야만 한다.

 

옛 선조들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했다. 도르트 신경 교회질서 25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집사에게 있어 독특한 직무는 성실히 구호품을 모으는 것과 자비의 다른 사역들을 행하는 것이며...그리고 성실하고 근면하게 가난한 자들에게 그것을 나누는 일이다. 이것은 회중에 속한 자들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들(strangers)에게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심방하는 일과 고통을 위로하는 일...”1) 비록 25조에 있는 “이방인들”이라는 용어를 일차적으로는 다른 회중으로부터 온 신자들로 보아야 하지만, 과거 그 당시의 집사들은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고 따라서 모든 이들로부터 자선의 물품들을 모았고, 심지어는 정부로부터도 재정지원을 받았다.2) 비록 정부로부터의 그러한 지원은 확실히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지만, 회중의 구성원들을 넘어서는 돌봄의 개념은 아니었다. 호주 자유 개혁교회의 1996년 총회에서 가다듬어진 집사 임직서 양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회중들을 독려한다...”

 

또한, 어떤 종류의 지원이 교회 밖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져야만 하는가? 도르트 총회는 배분을 위한 구제금을 모으는 것을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가 자비의 사역을 필요한 돈의 배분에만 국한시켜서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총회가 자비의 사역을 재정적인 것 너머까지 확장하여 보고 있다는 사실은 곤란한 자들을 심방하고 위로할 것에 대한 총회의 조문을 볼 때 명백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주위에 있는 사회의 가난한 자들은 확실히 재정상의 문제 이상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일상적으로 우리의 사회 내에 있는 수많은 필요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과 수단들을 두루 찾도록 집사에 의해 격려받게 하자.

명확히 하기 위해 한번 더 덧붙이자면,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그러한 수고는 하나님의 말씀의 열림과 연결되어 일어난다. 왜냐하면 말씀이야말로 가장 깊은 필요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들 주위에 있는 사회 속의 약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가? 과거에는 다양한 공동체들 속에서 병원을 설립하는 교회들이 있었다. 당연히 이 병원들은 단지 건강을 위한 기관들은 아니었다; 이 병원들은 사회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예로부터 배운 동정심을 쉽게 나타낼 수 있는 장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또한 복음의 확장을 위한 중추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사회 속에서는 이제 그러한 병원의 건립을 필요로 하는 곳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에이즈 환자를 돕는 것에 대한 심한 공포로 가득차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도록 허락된 사랑과 동정심을 그러한 환자들에게 확실한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낙태를 궁리하고 있는 불행한 임산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세상 속에는 부서진 가정으로 인한 상처를 가지고 뛰쳐 나온 거리의 아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롭게 보여 주신 그 선을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가?

분명히, 도시의 거리와 골목길로, 고속도로와 울타리로, 가난한 자와 장애인들과 장님과 절름발이에게로 나아가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나는 앞서 내가 말한 것을 반복하려 한다: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것이 집사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일들은 회중에게 속해 있다. 하지만 집사들은 확실하게 자극하고, 격려하고 심지어 그 길을 지도할 수 있는 자들이다.



결론

집사의 직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막대한 선에 대한 감사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회중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치없는 죄인들을 위해 자기 희생적 사랑으로 자신을 비우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러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된, 특별히 믿음의 가정의 사람들에게 요구된 자기 부인(self denial)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에 있어 서로,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많아지고 풍성해질” 때 집사의 직무는 어렵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될 때에야 이 필요들은 충족되게 되는 것이다.
 
 
 



각 주

1) 강조는 저자의 것. 번역은 the Acts of Synod Orangeville of the Canadian Reformed Churches 1968. (Return)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2) cf Jansen, Korte Verklaring van de Kerkenordening, pg 116f. (Return)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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