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346

고대교회 신조들의 해석

고대교회 신조들의 해석 서 론 여기서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325)와 니케아-콘스탄니노플 신조(381)를 다룬다. 사도신경은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주로 서방교회와 개신교회에서 사용한다. 반면 나머지 두 신조는 동방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이단들을 대처하는 상황에서 작성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정통성 시비의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정통 삼위일체론에 대한 현재적인 해석의 전형이라 생각되어 오늘 세계교회가 지향하는 에큐메니칼 해석에 해당한다. A. 사도신경 1. 한국교회가 사용해온 본문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

중세의 삼위일체 (12세기-14세기)

중세의 삼위일체 (12세기-14세기) 서 론 “삼위일체, 즉, 성부, 성자, 성령의 단일성은 다른 어떤 주제보다 오류를 범할 때 더 위험하고, 탐구하기는 더 고역스럽지만, 어떤 것을 발견할 때는 유익이 더 크다” 중세의 페트루수 롬바르두스(1095-1164)가 그의 책 『명제집』 서두에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이것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아퀴나스의 스승인 대 알베르투스(1200-1280) 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삼위일체 인식에 있기 때문에 이 인식의 오류는 신앙과 신학의 모든 목적을 파괴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도 이렇게 말했다. “삼위일체를 아는 것은 전 인생의 열매이고 목적이다. 주님은 우리의 ..

요아킴의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과 종말론

요아킴의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과 종말론 서 론 요아킴(1132-1202) 의 삼위일체는 중세 신학자들이 주로 애용하던 본질의 단일성과 같은 내재적 삼위일체가 아니라 역사와 종말을 연관시켜서 삼위일체를 풀어 가는 것이다. 6-12세기까지 중세의 신학 속에는 종말론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요아킴과 그를 따른 개혁파 프란시스칸들은 순교자 유스티누스와 이레네오스와 같은 고대 초기 교부들의 묵시 전통과 천년왕국 전통을 이어받아 그 바통을 16세기 과격파 종교개혁자들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삼위일체를 종말과 역사로 관련 지은 것은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종말론은 교회개혁과 직결되기에 중세교회에 위협적인 요소로 판단되어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Ⅰ. 그의 생애 요아킴은..

루터의 삼위일체

루터의 삼위일체 서 론 삼위일체론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고대교회의 논쟁을 통해 교회가 확정되었고 그 후에는 그저 고대 교회의 논의를 답습하는 선에 그치다가 20세기 들어와서야 삼위일체론이 다시 한번 신학논의의 중심에 등장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확실히 20세기에 와서 ‘삼위일체 르네상스’라고 부를 만큼 삼위일체를 둘러싼 논의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에 삼위일체론이 경시되거나 무시된 것은 아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삼위일체를 경시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이 문제를 크게 다룬 것은 아니지만 경시하지도 않았다. 여기서는 루터의 삼위일체론의 특징과 강조점은 무엇이었는지 보려고 한다. Ⅰ. 루..

칼빈의 삼위일체

칼빈의 삼위일체 서 론 20세기를 ‘삼위일체 르네상스’라고 말하는 것은, 한때 삼위일체가 중요한 신학적 주제였으나 그 후 오랫동안 삼위일체에 대한 관심이 없었거나 부족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도 “삼위일체를 이미 정리된 교리로 생각하여, 니케아 신조에서 표현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들 속에서 체계화된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내용을 재고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단연 칼빈이었다. 많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칼빈의 교리는 주로 세르베투스와 같은 이단들에 대한 반박을 위한 것이었고, 새롭다고 할 만한 특별한 것을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을 답습하여..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의 삼위일체론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의 삼위일체론 서 론 종교개혁 이후 교회는 각각 자기 교파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정통주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보통 1559년부터 1622년까지를 ‘정통의 시대’라고 부른다. 삼위일체론은 정통주의 시대에 이르러 전반적으로 무관심과 퇴조의 기미를 보였다. 개신교회이든 로마 카톨릭교회이든,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이미 정리된 교리로 생각하고 분파와 회의론자에 대항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고 옹호하는 수준에 만족했다. 여기서는 루터교회 정통주의 교의학과 개혁교회 정통주의 교의학을 검토하려 한다. Ⅰ. 루터교회의 삼위일체론 1. 삼위일체론의 위치 하인리히 슈미트는 루터교회 교의학에서 프롤레고메나, 하나님, 인간, 구원의 근원, 은총의 수단과 교회, 종말이라는 여섯 가지 주제..

이신론의 삼위일체

이신론의 삼위일체 Ⅰ. 모더니즘, 이신론 그리고 삼위일체론 이신론이란 이성으로 신을 생각한다는 이론이다. 지금까지 성서의 계시를 바탕으로 신을 생각했다면 17세기 말과 18세기 초기, 소위 ‘이성의 시대’에 나타난 일련의 영국 사상가들은 “하나님의 창조자 되심은 유지하나 이 피조 세계에 계속 개입하는 것과 임재하는 것은 부인하는 하나님 이해”를 주장했다. 르네상스를 통하여 나타난 새로운 문화적 흐름,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 십자군 전쟁, 교황 체제의 쇠퇴 등으로 인해 중세가 무너지면서 아울러 서구 세계의 새로운 사유체계로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근대성이고, 이 근대성에 근거하여 새롭게 형성된 시대 전반에 대한 포괄적 명칭이 모더니즘이다. 근대성이 18세기 이후 인간 삶의..

조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피니의 삼위일체론

조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피니의 삼위일체론 Ⅰ. 들어가는 말 에드워즈는 1730년 이신론에 대항하기 위해 『삼위일체론』을 저술했다. 당시 계몽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이신론은 인간 이성과 어울리는 보편적인 자연 종교를 주장하며 기독교의 신비를 거부했다. 자연히 삼위일체론도 신학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에드워즈는 이런 이신론적 정서에 대항하여 삼위일체론을 합리적으로 변증하기 위해 『삼위일체론』을 저술했다. 찰스 피니는 부흥 운동에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또 후반에 이르러 신자의 성화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삼위일체론을 다루었다. Ⅱ.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론 1.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합리적 추론 에드워즈는 전통 신학의 입장을 따라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신비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헤겔의 삼위일체론

헤겔의 삼위일체론 Ⅰ. 들어가는 말 19세기는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시대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전반적으로 삼위일체론을 거부하거나 무시했다. 예를 들어, 종교의 본질을 감정으로 본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론이 인간의 의식과 상관없는 형이상학적 사색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 “초월적 존재들 안에 영원한 구별은 인간의 의식에서 생겨날 수 없는 것이기에, 종교적 의식에 관한 설명이 될 수 없다” 기독교의 본질을 윤리로 본 알브레히트 리츨은 삼위일체론이 윤리적 실존과 상관없기 때문에 별로 논의의 가치가 없다고 보았다. 19세기에 삼위일체론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사람은 오히려 철학자 헤겔이었다. 헤겔은 독일 연방에 정치적 혁명이 불가능한 것을 보고 대신 철학적 혁명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독일 관념론이..

슐라이어마허의 인간학적 삼위일체론

슐라이어마허의 인간학적 삼위일체론 - 『신앙론』- 을 중심으로 Ⅰ. 들어가는 말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현대신학에 크고 혁명적인 기여들을 한 신학자이다. 그럼에도 그는 각종 오해와 더불어 가장 강하고 폭넓은 비판에 직면했는데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것이 가장 크다. 삼위일체와 관련된 슐라이마허의 접근에 대한 비판들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비판은 그의 교의학적 체계의 완성인 신앙론에서 확인되는 삼위일체에 관한 언급들의 내용과 그 언급들이 보여주는 그 전체 저작 안에서의 위치를 고려할 때,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의 의의를 과소평가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비판은 슐라이어마허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은 사벨리우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