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김 정훈 (광신대학, 신약학)
서론
우리는 바울 서신(the Pauline Corpus)에서 한 중요한 은유(隱喩)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옷 입음”이라고 하는 은유이다. 이 은유는 바울의 주요 서신들 즉 살전 5:8(ἐνδυσάμενοι), 갈 3:27(ἐνδύσασθε), 고전 15:49(ἐφορέσαμεν), 53(ἐνδύσασθαι[x2]), 54(ἐνδυσάμενοι[x2]), 고후 5:2(ἐπενδύσασθαι), 3(ἐνδυσάμενοι), 4(ἐπενδύσασθαι), 롬 13:12(ἐνδυσώμεθα), 골 3:9-10(ἀπεκδυσάμενοι/ἐνδυσάμενοι), 12(ἐνδύσασθε), 그리고 엡 4:22-24(ἀποθέσθαι/ἐνδύσασθαι), 6:11(ἐνδύσασθε), 14(ἐνδυσάμενοι)에 나타난다. 이 구절들 중 살전 5:8, 롬 13:12, 그리고 엡 6:11, 14은 믿는 자의 영적 무장에 대해서 언급한다. 따라서 다른 구절들과는 다른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구절들 즉 갈 3:27, 롬 13:14, 골 3:9-10, 그리고 엡 4:22-24은 믿는 자의 정체성의 변화에, 그리고 고전 15:49-54와 고후 5:1-4은 믿는 자의 존재 양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본 논문은 신자의 영적 무장을 언급하는 본문들보다는 바로 이 본문들에 나타나는 “옷 입음” 은유의 의미를 살펴 보고자 한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본문들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갈 3:27, 롬 13:14, 골 3:9-10, 그리고 엡 4:22-24에서 “옷 입음” 은유는 아담-그리스도의 모형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본성에 일어나는 세례적 변화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우기 이 본문들은 문맥에 따라 여러 다양한 신학적 요소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옷 입음” 은유는 이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고전 15:49-54과 고후 5:1-4에서는 “옷 입음” 은유가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변화 즉 영광스런 부활체로의 변화를 묘사한다. 이 두 고린도서 본문들 배후에는 아담-그리스도의 유비가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과 같은 관찰은 “옷 입음” 은유가 바울 신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 은유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안에 있는 세례적 변화와, 그의 실제적 삶 안에 있는 윤리적 변화와, 그의 존재 양식 안에 있는 부활의 변화를 언급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체에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바울 서신의 “옷 입음” 은유는 지금까지 종합적으로 연구된 일이 없다. 이 은유에 대한 언급은 단지 주석류, 사전류, 단편적인 아티클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책들 속에 요약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특별히 E. Peterson은 그의 소논문 “Theologie des Kleides”에서 인간과 옷의 관계의 신학적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그는 아담과 이브의 본래 상태와 타락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과 옷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Peterson은 성경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즉 아담과 이브는 본래 하나님의 영광(즉 거룩한 의와 무죄성과 불멸성)으로 옷 입히움을 받았으나 타락으로 인해 이것을 상실하였으며 이것은 세례시에 믿는 자들에 의해 회복된다. 이러한 가설 위에서 Peterson은 믿는 자들이 세례에서 아담의 원상태로 회복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갈 3:27은 믿는 자들이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함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는 바울의 “옷 입음” 신학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그는 상실한 영광의 옷의 궁극적 회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믿는 자의 부활 문제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필자는 Peterson의 견해에 근본적으로 동의하면서 바울 서신의 “옷 입음” 구절들을 보다 철저히 연구함으로써 그의 요지(要旨)를 논증하고자 한다.
Peterson의 가치있는 주장이 널리 주목을 받지 못했던 데 반해, P.W. Van der Horst의 소논문 “Observation on a Pauline Expression”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별 지지를 받지는 못했을지라도 보다 자주 언급되었다. Van der Horst는 바울의 “옷 입음” 은유의 기원이 신비종교나 영지주의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자료들로부터 나오는 그 어떤 병행구도 (1) 기독교 이전일 수 없고 (2)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언급하는 바울의 “벗고 입음” 은유와 동일시 될 수 없고 (3) 인간을 “벗고 입음”의 목적어로 취하지 않는다. 두 번째 포인트는 가치 있는 통찰로 보인다. 그러나 첫 번째 포인트는 완전한 타당성을 갖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후기의 자료들도 이른 시대의 아이디어들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포인트와 관련하여 우리는 바울의 “옷 입음” 동사들이 항상 인간을 그것들의 목적어로 취하고 있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Pyrrho(c. 360-270 B.C.)와 개의 고사(古事)에 주목하면서 Van der Horst는 이 고사가 세례를 묘사하고 있는 골로새서의 “옷 벗음과 옷 입음” 은유의 근원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골로새서의 해당 구절에 대한 그의 이해 자체는 정확했던 것 같다. 그러나 Pyrrho의 일화가 그 기원이라고 하는 주장은 거의 설득력이 없다. Pyrrho의 “인간을 벗는다”고 하는 말은 인간의 옛 성품이 다른 한 인격체와의 연합을 통해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인간의 약함에 의해 야기된 모순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Pyrrho의 말 속에는 세례적 요소나 “옷 입음”의 개념이 보이지 않는다.
M. Thompson의 Clothed with Christ는, 이 타이틀에 의거해 볼 때, 바울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는 은유의 의미를 추적하는 일에 집중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단행본에서 Thompson은 소위 예수 전승이 롬 12:1-15:13에 보이는 바울의 윤리관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롬 13:14)고 하는 개념에 불과 두세 쪽을 할당할 뿐이며 심지어 거기에서도 그는 이 개념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Thompson은 롬 13:11-14을 종말론적, 세례론적 관점은 물론 기독론적 관점으로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 견해 자체는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는 이 구절에 대한 기독론적 이해가 무엇인지를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한다. 단지 롬 13:11-14과 갈 3:27과 골 3:10(cf. 엡 4:24)이 상호 관련성이 있음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로마서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는 은유가 세례 및 아담-그리스도 대조와 연관 관계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상의 자료들이 간혹 매우 가치 있는 통찰들을 제공해 준다 할지라도 그것들로부터 바울의 “옷 입음” 은유의 의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이 은유를 보다 깊고 자세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음을 암시한다. 이미 언명한 대로 우리는 바울 서신의 여섯 개 구절들(i.e. 갈 3:27, 롬 13:14, 골 3:9-10, 엡 4:22-24, 고전 15:49-54, 고후 5:1-4)에 초점을 맞추고 바울의 “옷 입음” 은유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제1부에서 우리는 “옷 입음” 은유의 종교사적 배경을 조사할 것이다. 이 은유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그것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 “옷 입음” 비유가 수많은 의미심장한 개념들과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모든 개념들을 위해 단 하나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이 은유는 다양한 많은 자료들로부터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유가 많은 다른 고대 문서들 안에서 어떻게 사용 되었는지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구약에서 “옷 입음” 이미지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살필 것이다. 우리는 특히 창 3:21에 보이는 아담의 옷 입음에 대한 이야기,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수많은 구절들과 겔 42:13-14; 44:19; 슥 3:3-5에 보이는 제사장의 옷 입음에 대한 이야기들, 삿 6:34; 대상 12:18; 대하 24:20에 보이는 하나님의 옷 입음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시 102:26; 사 51:6(cf. 히 1:11-12)에 보이는 우주론적 옷 입음 이야기들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여러 후기 유대주의 문서에서 사용된 “옷 입음” 은유의 의미를 조사할 것이다. 우리는 특히 1&2 Enoch, The Books of Adam and Eve, Philo 그리고 랍비 문헌에서 “옷 입음” 은유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 볼 것이다. 우리는 Joseph and Aseneth라고 하는 문서도 살펴볼 것이다. 이 문서는 다양한 “옷 입음” 은유를 사용하여 Aseneth가 유대주의에로 개종하는 것을 묘사한다. 우리는 또한 The Acts of Thomas의 한 작은 부분인 The Hymn of the Pearl에 보이는 여러 다양한 “옷 입음” 이미지들의 의미를 고찰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신비종교에서 “옷 입음” 은유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조사할 것이다. 특별히 Lucius Apuleius의 Metamorphoses(IX)는 어느 정도 신비종교의 정체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은 주인공이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옷 입음”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넷째로, 우리는 로마인들의 복장인 Toga Virilis에 대해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원시교회의 세례 예식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이상의 모든 고대 문헌들에 대한 연구는 바울의 “옷 입음” 은유의 의미를 밝히는데 중요한 통찰들을 제공할 것이다. 고대 문헌들을 다룸에 있어 구약 성경을 제외한 모든 문헌들의 늦은 연대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Van der Horst가 주장하듯이 이 점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될 것 같다. 왜냐하면 늦은 연대의 문서라도 이른 연대의 전승들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부에서는 우리가 바울 서신의 “옷 입음” 구절들로 돌아가서 그 의미를 살펴보는 일에 집중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갈 3:27과 롬 13:14을 한 단위로 묶고,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골 3:9-10과 엡 4:22-24을 또 한 단위로 묶고, 그리고 부활체로 옷 입는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고전 15:49-54과 고후 5:1-4를 또 다른 한 단위로 묶을 것이다. 사실 처음 두 범주들은 한 인격체를 옷 입는다고 하는 점에서 동일한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의 뉘앙스가 각기 다른 만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제1부
종교사적 배경 속의 “옷 입음” 은유
1. 구약의 “옷입음” 구절들
“옷입음” 은유의 종교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구약의 “옷 입음” 구절들이다. 구약은 “아담의 옷,” “제사장의 옷,” “하나님의 옷,” 그리고 “우주론적인 옷”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1.1. 아담의 옷
“아담의 옷”과 관련하여 필자는 창 3:21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말씀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말씀은 창세기 처음 부분과 관련지어 읽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인간이 어떤 존재로 지음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가 타락하게 되었을 때 어떤 행위를 했는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창 1:26-27). 그는 하나님의 생기로 부음을 받았다(창 2:7). 이러한 상태에서 그는 자기의 벌거벗은 상태에 대해 수치를 느끼지 못하였다(창 2:25). 그러나 그는 타락 후에 자신의 벌거벗음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고 하나님께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무 잎으로 임시방편의 옷을 만들어 입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적절한 옷이 못되었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타락에 대해 응분의 조치를 취하셨으며 마지막에는 그를 위해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
이와 같이 “창조-타락-옷 입히움”이 일련의 연속된 사건임을 생각할 때 그리고 “옷 입히움”이 일종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수습 행위임을 생각할 때 “창조”는 간접적으로 “옷 입히움”이 어떤 의미인지를 시사해 준다. “창조”와 관련하여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하는 기사에 주목한다(창 1:26-27).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그 속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하는 기사(창 2:7)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었다고 하는 것은 흙으로 된 인간에게 신성한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중심적 국면은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피조된 인간을 היח שׁפנ(a living being)라고 했을 때 이는 그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기를 간직하고 있는 육체적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생기가 최초의 인간 커플(couple) 안에 거하고 있었을 때,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의 존재의 전형을 이루고 있었을 때, 그들의 나체 상태는 그들에게 수치감을 주지 못하였다(창 2:25).
그러므로 아담의 옷 입히움(창 3:21)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아담의 본래적 생명이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가죽”이라는 단어 또한 우리의 해석을 강화시켜 준다. 왜냐하면 가죽은 어떤 생물(a living being)의 희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죽 옷을 입는다는 것은 희생된 생물의 생명으로 옷 입는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창 2:7은 또 다른 측면에서 창 3:21의 “옷 입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담이 가죽 옷으로 입히운 것은 그가 그의 최초의 왕적 신분을 회복하게 됨의 신호(信號)일 수 있다. 왜냐하면 흙으로 빚어진 사람이 거룩한 생명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왕적 신분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개념과 연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는 흙에서 나온 자가 왕이 되었다고 하는 구약의 개념에 의해 지지를 받을 수 있다(삼상 2:6-8, 왕상 16:2, 시 113:7). 사실 창세기 1:26-28장에 보면 “형상-지배권” 도식(圖式)이 명백히 나타난다. 즉 인간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생물들과 땅에 대한 인간의 왕적 신분에 의해 특징지워지고 있다.
창 3:7-11도 창 3:21의 “옷 입히움” 개념의 의미를 밝히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창 3:7은 타락 후 아담과 그의 아내가 자신들의 나신(裸身)에 대해 수치를 느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육체적 나체 상태가 그들이 느낀 수치의 원인의 전부였을까?”고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들의 수치감은 근본적으로 영적 이유에서 온 것이었던 것 같다. G. Anderson은 “‘눈이 열렸다’고 하는 말은 인간의 육체에 찾아 온 변화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그의 내적 변화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창 3:5와 3:7 간의 구조적 유사성은 벌거벗음에 대한 아담의 인식이 그의 선악 지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창 3:22은 타락한 인간이 선악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cf. 2:9, 17).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선과 악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 지식은 인간으로 자신의 타락한 육체의 실상을 보게 하였다. 그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생명의 광채를 발산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을 것이다. 그의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그로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의 몸을 떠난 사실을 지각할 수 있게 하였으며 결과 수치감을 갖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한 아담의 옷 입히움은(창 3:21) 그가 아담의 타락과 수치의 나체(裸體)를 덮어 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영광의 생명에로 회복됨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될 수 있다면, 창세기 본문들은 그 자체 영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타락 전 옷 입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타락하기 전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과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타락 후 그는 이러한 요소들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창 3:21의 하나님의 “옷 입히심”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곧 거룩한 생명과 부끄러움이 없는 영광과 자연에 대한 왕적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고자 하는 사인(sign)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최초의 인간 커플(couple)이 타락 전에 거룩한 특질들로 옷 입혀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담 기독론”이 배후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울의 “옷 입음” 구절들(갈 3:27; 롬 3:14; 골 3:10; 엡 4:24; 고전 15:49-54; 고후 5:1-4)은 창세기의 구절들, 특히 창 3:21과 깊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1.2. 제사장의 옷
“제사장의 옷”의 기원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구별된 옷, 즉 “거룩한 옷”을 입고 자신을 섬기게 하라고 명령하신 데 있다. 우리는 제사장의 옷의 (1) 품목들 및 성격, (2) 입고 벗는 의식, (3) 은유적 사용 등에 주목한다. 출 28, 29, 39, 레 8, 16 등은 제사장의 옷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아론의 옷은 흉패(a breastpeice)가 붙은 에봇(an ephod) - 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the Urim and the Thummim)이 들어 있다 - 과 푸른 색의 겉 옷(a blue robe)과 긴 베옷(a linen-woven tunic)과 베로 짠 고의(linen undergarments)와 거룩한 관띠를 두른 세마포 두건(a linen turban with the holy crown thereupon)과 베로 짠 허리띠(a linen sash)로 구성되어 있다(출 28:4, 39-40; 29:5-6, 8-9; 39:1-31; 레 8:7-9; 16:4). 이러한 품목들로 구성된 제사장의 옷은 영화와 아름다움으로 특징지어지는 거룩한 옷이다(출 28:2, 40; 39:41; 40:13; 레 16:32). 이 옷을 입을 때 제사장은 그것의 거룩함과 연합된 존재가 된다. 이는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연합함을 뜻한다. 특히 우림과 둠밈은 רוֹא(“빛”)과 םꚘ(“완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사장이 이것들이 들어있는 흉패가 붙은 에봇을 입는다는 것은 그가 빛과 완전의 사람이 됨을 뜻한다. 요약하면, 제사장이 제사장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가 신적인 사람이 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그가 영화와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거룩한 자가 됨을 의미한다.
한편 제사장의 옷은 항상 적절한 의식을 거친 후에 입을 수 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기 위해 먼저 몸을 물로 씻고 제사장 옷을 입어야 한다(출 29:4-9; 40:1-15). 이는 제사장의 옷의 거룩함 때문이다. 물로 몸을 씻고 제사장의 옷을 입고 제사장직에 서임(敍任)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특별히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이 된다. 그들이 거룩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일반 백성들 이상의 사람들이 됨을 의미한다.
아론이 속죄일에 속죄제와 번제를 위해 성역(즉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도(레 16:3-4) 그는 먼저 몸을 물로 씻고 제사장 옷을 입어야 한다. 이는 거룩한 제사장의 옷을 입기 전에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론이 제물을 드리기 위해 성역에서 제사장 옷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게 됨을 의미한다. 또 제사장은 성역으로부터 나올 때(레 16:23-24; 겔 42:13-14; 44:19) 그리고 진(camp) 밖으로 나갈 때(레 6:10-11) 입고있던 제사장의 옷을 계속해서 입을 수 없다. 다시 말하여 보다 더 거룩한 장소에서 보다 덜 거룩한 장소로 이동할 때 전자의 장소에서 입었던 옷을 후자의 장소에서도 계속 입어서는 안된다. 이는 제사장이 거룩한 옷을 입고 성역에서 혹은 이스라엘 진 안에서 거룩한 의식을 수행할 때 그가 자기의 옷과 처한 장소의 거룩함에 일치되어 성역 밖의 사람들 혹은 진 밖의 사람들보다 더 거룩한 자가 됨을 의미한다.
한편 슥 3:3-5에서는 제사장의 옷이 은유적으로 사용된다. 스가랴는 환상 중에 천사들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는 것을 본다.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임을 생각 할 때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운 죄가 제하여지고 새롭게 될 것을 은유적으로 묘사함이다.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과 새 옷의 이러한 윤리적 의미는 “한 인격체를 입는다”고 하는 바울 서신의 구절들 중 특히 의로운 행위를 강조하는 구절들과 메아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1.3. 하나님의 옷
“하나님의 옷” 개념이 삿 6:34, 대상 12:18, 그리고 대하 24:20에서 발견된다. 이 세 본문은 공통적으로 여호와의 신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사람을 입는다고 하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히브리어 텍스트들로부터 삿 6:34은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을 입었다”로, 대상 12:18은 “여호와의 신이 삼십인의 두목 아마새를 입었다”로, 그리고 대하 24:20은 “여호와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입었다”로 번역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입는다”는 개념을 위한 히브리어 동사 שׁבל를 Qal형으로 쓰고 있다고 하는 점에 의해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칠십인경도 이 동사를 위해 세 본문 모두에서 ἐνδύω의 제1 부정과거형인 ἐνέδυσε를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우리의 세 본문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명백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옷을 입는 주체는하나님의 영이며, 둘째, 옷은 특정한 인간이며, 셋째, 하나님의 의도는 그 특정한 인간으로 전쟁에서 신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고자 함이다. 하나님의 영은 특정한 인간을 옷을 입듯 입으심으로 그로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시며 자신의 능력이 곧 그의 능력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인간 적들을 대항하여 싸우실 때 그는 특정인을 자신의 무기로 취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특정인을 자신과 동일시하실 때 하나님은 그의 실제 소유자가 되시며 이때 그는 하나님과 같은(God-like) 존재가 된다. 만일 하나님이 특정인을 입는다고 하는 표현 대신 특정인이 하나님을 입는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한다 해도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 대신 전자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 특정인이 수행하고 있는 전쟁이 인간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주도하는 하나님의 전쟁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아무튼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을 묘사하고 있는 위 텍스트들은 바울 서신의 “그리스도를 입는다,” “새 사람을 입는다”고 하는 표현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1.4. 우주론적인 옷
우리는 시 102:26에서 “우주론적인 옷”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cf. 사 51:6; 히 1:11-12): “They[the earth and the heavens] will all wear out like a garment. Thou changest them like raiment, and they pass away”(RSV). 이 본문은 종말론적인 우주관을 내포하고 있다. 종말에 현재의 우주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 사실을 묘사하기 위해 시인은 낡은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하는 은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옷이 낡아지듯 우주도 낡아질 것이다. 낡은 옷이 새 옷에 의해 대치되듯 우주도 새 우주에 의해 대치될 것이다. 이는 현재의 우주가 소멸되고 전혀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것을 뜻한다기보다는 우주의 존재 양식에 종말론적 변화가 일어날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주의 종말론적 변화와 함께 새롭게 나타날 우주는 물질적 차원을 능가하는 고차원적 우주가 될 것이다. 이 구약 본문은 바울 서신의 “옷 입음” 구절들이 갖는 종말론적 요소와 메아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유대주의 문헌 속의 “옷입음” 표현들
우리는 많은 유대주의 문서들이 “옷 입음”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바울 서신의 “옷 입음” 은유들 가운데 반영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울은 자기의 독자들이 유대주의 사상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을 때 어떻게 복음을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2.1. 1&2 Enoch
1 Enoch 14:20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은 영광”(the Great Glory)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그의 옷은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나고 눈보다도 더 희다고 진술한다. 저자는 옷과 착용자와의 관계의 다양한 국면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옷은 항상 착용자와 행동을 같이 하므로 거의 착용자의 일부가 될 뿐 아니라 그의 외모를 지배한다. 저자에게 있어 하나님의 큰 영광은 이러한 기능을 하는 옷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옷이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난다고 하는 진술은 영광을 종종 빛으로 묘사하는 유대주의 사상의 반영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옷이 눈보다 더 희다고 하는 진술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흰 세마포 옷(cf. 레 16:4)에 그 배경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대제사장의 흰 세마포 옷이 “거룩한 옷”으로 불리울 때(cf. 레 16:4, 32), 하나님의 옷이 희다고 하는 진술은 그의 거룩함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1 Enoch 62:15-16은 여호와의 백성들의 사후의 영혼의 운명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그들이 “영광의 옷” 즉 “생명의 옷”을 입을 것이라고 진술한다. 이 옷은 낡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영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15절의 “의로운 택자(擇者)들이 땅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진술은 부활 즉 지상적 상태를 벗어나 천상적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을 묘사하는 내용으로 보인다(cf. 1 Enoch 62:13, 15b-16). 다시 말하여 15절은 의로운 자들이 지상 생활 이후에 받을 천상적 몸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이 천상적 몸을 “영광의 옷”으로 묘사할 때(15b절), 그는 의로운 자들의 부활의 몸이 “영광”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와 비슷한 실재(cf. 1 Enoch 14:20), 곧 영광스런 몸이 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옷이 착용자의 몸을 감싸는 것처럼 영광이 의로운 자들의 부활의 몸을 감싸게 될 것이다. “생명의 옷”이라고 하는 표현은 이 영광의 몸이 불멸성에 의해 특징지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옷이 착용자의 외모를 지배하듯, 생명이 의로운 자들의 미래의 몸을 지배할 것이다.
2 Enoch 22:8-10에서 에녹은 환상 중 칠층천 하나님의 존전(尊前)에서 경험했던 자신의 존재의 변화를 “옷 벗음과 옷 입음”의 은유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천사를 명하여 에녹의 세상의 옷을 벗기고 자신의 영광의 옷을 입히라고 하였다. 이는 지상적 육체를 제하여 버리고 천상적 육체를 주심을 의미한다. 이는 에녹이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은 후에 자신이 천사의 모습과 같이 된 것을 발견했다고 하는 고백에서 확인될 수 있다(2 Enoch 22:10).
이상의 “옷 입음” 텍스트들에 내포된 생각들은 특히 고전 15:49-54과 고후 5:1-4에 나타나는 “옷 입음” 은유들과, 즉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영광과 생명의 부활체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상과 비슷하다.
2.2. The Books of Adam and Eve
The Books of Adam and Eve에도 “옷 입음” 표현이 나타난다. 헬라어 텍스트로는 Apocalypse of Moses(이후 ApoM으로 표기함)가 유명하며 라틴 텍스트로는 Vita Adae et Evae(이후 Vita로 표기함)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두 텍스트가 유래하고 있는 원 텍스트는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ApoM와 Vita는 모두 A.D. 1세기 말엽에서 A.D. 400년 사이에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특히 창 3:7에 대한 하가다적 해석(a haggadic interpretation)인 ApoM 20-21에 주의를 기울인다. ApoM 20:1-5에서 이브는 이렇게 진술한다:
And at that very moment my eyes were opened and I knew that I was naked of the righteousness with which I had been clothed. And I wept saying, ‘Why have you done this to me, that I have been estranged from my glory with which I was clothed?’... And I took its[the fig tree's] leaves and made for myself skirts.
이 진술은 분명히 아담이 타락 전에 의와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상을 견지한다. “The righteousness with which I had been clothed”와 “My glory with which I was clothed”라고 하는 내용들은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하다. 즉 아담과 그의 아내는 타락 전에 의와 영광으로 옷 입혀져 있었다. 그들은 의와 영광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내적 본질을 소유하고 있었다. ApoM의 저자는 의와 영광을 상호 의존적인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의가 있는 곳에 영광이 있고 영광이 있는 곳에 의가 있다. 의가 유지되는 한 영광은 지속된다. 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얻게 되는 윤리적 완전을 의미하고(cf. ApoM 23:3) 영광은 아담과 이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개념과 연관된다. 하나님이 천사적 존재들에게 아담과 이브에게 경배하라고 명했던 것은 이들 속에 있는 이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었다(cf. Vita 13-14).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거의 하나님과 같은 위치로 끌어 올려주는 신적인 요소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지존성의 반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나타나는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을 때 그들은 타 피조물들에 대하여 왕적인 지배권을 가질 수 있었다(cf. ApoM 14:2).
아무튼 최초의 인간 커플(couple)이 타락 전에 의와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하는 생각은 창 3:21의 옷 입음 개념이 함의(含意)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며, 타락 전 상태에로의 인간의 회복을 “옷 입음” 개념으로 묘사하는 바울 서신의 관련 텍스트들(갈 3:27; 롬 13:14; 골 3:9-10; 엡 4:22-24)과도 조화를 이룬다.
2.3. Philo
Ca. 20 B.C.-ca. A.D. 50의 인물인 Philo는 무수히 많은 그의 저작 속에서 “옷 입음” 이미지를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그는 그의 신론, 인간론, 윤리학을 체계화하고자 할 때 그리고 제사장복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할 때 “옷 입음” 은유를 사용한다.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인간의 옷” 개념과 “제사장의 옷” 개념이다.
Philo는 모든 인간이 사악(vice) 아니면 덕성(virtue)에 의해 옷 입혀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가죽 옷으로 입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육과 영을 신체의 피부, 즉 몸으로 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 안에 거주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cf. Philo, Som i. 147). 여기서 우리는 건물개념과 “옷 입음” 개념이 혼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혼합이 고후 5:2에도 보인다. 그러나 Philo와 바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Philo의 영혼의 육체내 거주 사상은 희랍의 이원론적 인간관의 반영으로 보이나 바울의 영과 육의 구별은 창세기의 처음 장들에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의 반영으로 보인다. 바울의 인간관은 영을 귀히 여기고 육을 천시 여기는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제사장의 옷에 대한 Philo의 생각은 구약의 텍스트들, 예를 들어 출 29, 레 6, 16에 대한 그의 해석 가운데 표현되어 있다. Philo는 제사장의 옷을 두 종류, 즉 무늬를 넣은 겉옷과 세마포 옷으로 나눈다(som i. 216; Mut Nom 43f). 전자는 색깔이 있는 긴 겉옷과 에봇을 가리키고 후자는 세마포로 만든 흰 옷을 가리킨다. Philo는 제사장이 이 거룩한 옷들을 입고 직무를 수행할 때 그는 모든 사람들 곧 모든 개인들과 모든 왕들보다 뛰어난 존재가 된다고 믿는다(cf. Vita Mos ii. 131). Philo에게 있어 제사장이 흰 세마포 옷을 입는 것은 그가 자신을 힘과 썩지 않음과 광휘를 입는 것을 뜻한다. 그가 색깔 있는 겉옷을 입는 것은 우주 곧 우주의 정신(νούς)인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뜻한다. 제사장은 이 겉옷을 입을 때 소우주(microcosm)가 되며 이는 그가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을 뜻한다.
2.4. 랍비 문헌
랍비 문헌에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옷입음” 개념들이 나타난다. 랍비 문헌은 중간기 문헌과 많은 유사점이 있다. 이 유사점은 두 문헌 체계 간에 어느 정도 공통요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그것은 중간기 유대주의 신학의 모티프들(motifs)이 후에 랍비 신학에서 발전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별히 “옷 입음”과 관련된 아담 모티프들이 랍비 문서들 안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랍비 문서들 안에서의 “옷 입음” 은유는 주로 창 3:21에 대한 하가다적 해석과 관련된 아담의 옷과 상관이 있다. 창 3:21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랍비 문서들은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한 범주의 문서들은 창 3:21을 인간의 타락 전 상태에 대한 진술로 보고(e.g. Gen. Rab. 20:12; cf. 18:6), 또 다른 범주는 이 본문을 인간의 타락 후 상태에 대한 진술로 본다(e.g. Pirqe R. El. 14:20; Tg. Yer. Gen 3:21). 전자는 창 3:21의 רוֹע(“가죽”)를 마치 רוֹא(“빛”)로 기록된 것처럼 해석하며 후자는 רוֹע로 읽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이 두 범주 모두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입장은 아담이 타락 전에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타락 전 “입음”설을 주장하는 Genesis Rabbah 20:12은 하나님이 타락 전에 아담과 그의 아내를 “빛의 옷”으로 입히셨다는 입장을 취한다. 바꾸어 말하여 그들은 최초에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범죄함으로 이 광채 나는 옷을 상실하였다. b. B. Bat. 58a 역시 비슷한 입장을 보여 준다: “아담의 뒤꿈치는 너무도 빛이 나서 오직 Shekinah만이 그것을 능가할 수 있다.” Anderson은 이 문구가 “아담의 옷은 신격의 의상과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창 3:21에 대한 타락 후 “입음”설을 견지하는 문건들도 동일하게 아담이 타락 전에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상을 견지한다. 예를 들어 Pirqe R. El. 14:20; Tg. Yer. Gen 3:7, 21은 아담이 최초에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는 설화를 내포하고 있다. 'Abot R. Nat. ii. 42, 116은 “아담이 광채나는 옷을 입고 있었으나 범죄 후에 그것을 상실하였다”고 진술한다. L. Ginzberg는 수많은 미드라쉼(midrashim)에 대한 연구를 근거로 아담은 그의 죄로 인해 소위 하나님의 형상, 즉 신적(神的) 광채를 상실하였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인간의 회복을 “옷 입음”으로 표현할 때 그는 랍비 문서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아담의 타락 전 “입음”설 - 즉 타락 전에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하는 - 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독자들이 이러한 생각에 낯설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목적을 따라 서신서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옷 입음” 은유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 같다.
2.5. Joseph and Aseneth
창 41:45, 50-52, 46:20에 대한 미드라쉬적(midrashic) 해설(解說)이라고 할 수 있는 Joseph and Aseneth(이하 JA)에도 의미심장한 “옷 입음” 표현들이 나타난다. 이 문서는 B.C. 1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JA는 여주인공 Aseneth가 이방 여인으로서 요셉과 결혼하기 위해 유대주의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겪는 정체성의 변화를 네 종류의 옷으로 상징화한다. Aseneth는 요셉을 만나기 전에 우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JA 3:6). 이는 이방 종교 안에서 그녀가 영적으로 죽은 것을 의미한다(cf. JA 8:9). 그녀는 요셉을 만난 후 유대주의로 개종하기 위해(그래서 그와 결혼하기 위해) 검은 튜닉(tunic)을 입고 참회한다(JA 10:8-15). 이는 그녀가 자신의 이방 종교적 정체성을 장사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의 참회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고, 그녀는 천사의 지시를 따라 새 베옷으로 갈아입는다(JA 14:12). 이 새 베옷은 그녀가 유대주의로 개종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을 상징한다. 달리 말하여 그것은 그녀가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을 상징한다. 마침내 그녀는 요셉을 자기의 남편으로 맞기 위해 결혼예복을 입는다(JA 15:10). 이는 그녀가 결혼을 통해 요셉과 연합함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 즉 영광으로 가득한 실현된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요약하면, 그녀가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죽음에서 생명으로”라고 하는 생각은 바울의 “옷 벗음과 옷 입음” 은유에 나타나는(골 3:9-10; 엡 4:22-24; cf. 갈 3:27; 롬 13:14) 옛 사람으로부터 새 사람에로의 변화라고 하는 개념과 유사하다.
2.6. The Hymn of the Pearl
The Hymn of the Pearl(이하 HPrl)에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옷 입음” 표현들이 나타난다. 이 문서는 The Hymn of the Soul이라고도 불리우며, A.D. 200-225년경 Edessa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외경적 문서인 도마행전(Acts of Thomas) 가운데 나타난다. 많은 학자들은 HPrl이 도마행전에 포함되기 전에 이미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문서로 보며 연대는 페르시아의 파씨안(Parthian) 왕조시대(247 B.C.-A.D. 224)의 어느 때일 것으로 본다. HPrl은 전체로서 하나의 상징적 서사시이며 무수히 많은 표상들로 구성돼 있다. 많은 표상들 중 특히 “옷”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옷”은 작품 전체를 통해 일관성 있게 나오며 시(詩)의 매 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서를 “The Hymn of the Garments”라고 불러도 부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HPrl에서 “옷”은 주인공의 정체성의 변화를 상징화한다. 주인공인 동방 왕국의 왕자는 부왕의 뜻을 따라 무서운 용이 지키고 있는 “진주”를 구해 오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간다. 이때 그는 왕자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는다(v. 9; cf. vv. 23, 29) 이는 그가 하늘의 왕적 자아(自我) 곧 하나님의 형상과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애굽에 내려간 왕자는 애굽인에 의해 발견되지 않으려고 입고 있는 옷을 벗고 애굽 스타일의 옷으로 갈아입는다(v. 29). 이는 그가 이질적인 세상적 자아(自我)와 결합된 것을 뜻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애굽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이는 일종의 타협행위였다. 왕자는 결국 “애굽의 음식의 무거움”(v. 35)으로 인해 잠이 들고 만다. 그는 자기가 부왕에게서 받은 임무조차 잊고 만다. 그러나 부왕은 편지를 보내 “애굽”에 취해 있는 왕자를 일깨워 준다. 이에 왕자는 자기의 임무를 다시 한번 깨닫고 애굽의 더러운 옷을 벗어버린다. 이는 그가 세상적 자아(自我)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냄을 뜻한다. 그는 마침내 용으로부터 진주을 탈취하여 왕국으로 돌아간다. 이는 악마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르는 삶을 성취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의 왕국으로 돌아간 왕자는 전에 벗어 놓았던 왕자복을 다시 입는다(vv. 75-78). 이는 그가 천상의 본래적 자아, 곧 하나님의 형상과 다시 하나가 된 것을 뜻한다.
요약하면, HPrl의 사중적(四重的) “옷”의 표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세상에서 살고 있는 아담의 후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됨으로 진주와 같은 삶을 살 때 마침내 완성된 천국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아담-그리스도 모형론이 그 배후에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바울 서신의 “옷 입음” 본문들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3. 신비종교 속의 “옷입음” 표현들
신비종교(mystery religions)란 일반적으로 1세기에서 3세기 동안 그리이스와 아시아에서 흥왕했던 다양한 밀의(密儀) 종파들을 가리킨다. 신비종교의 제의들은 종종 의미심장하게 옷을 갈아입는 의식을 포함하였다. 신비종교의 “옷 입음” 은유는 Lucius Apuleius의 Metamorphoses XI(이하 Metam XI)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는 A.D. 2세기 희랍 세계 내에서의 Apuleius의 종교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 Lucius가 귀의하고 있는 이시스 신비종교(Isiac mysteries)는 고대시대에 발생하여 A.D. 1세기 그리이스-로마 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다.
Metam XI에 나타나는 중요한 “옷 입음”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Lucius는 달신 Isis를 숭배하는 제의행렬에 참가하여 당나귀 인간에서 참 인간으로 변신하게 되었을 때 그는 흰 베옷으로 자기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웠다(XI.13-15). 이는 그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회복됨으로 영광된 생명을 얻게 된 것을 상징한다(cf. XI.2-4). 그가 당나귀 인간으로 있었을 때 그것은 죽은 것과 같은 상태였다. 행렬의식이 끝난 후 Lucius는 비밀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몸을 씻고 새 베옷으로 갈아입었다(XI.23). 이는 그가 여러 신들 특히 이시스(Isis)와 연합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을 상징한다. 이시스(Isis)와의 연합은 그가 우주를 다스리는 그녀와 거의 비슷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Lucius는 비밀의식을 통해 이시스(Isis)와의 합일을 체험한 후 열두 겹의 찬란한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서서 축하를 받았다. 이는 그가 이시스(Isis)를 비롯해 많은 신들과 연합함으로써 얻게 된 신성의 본질과 생명의 광휘를 상징한다.
초대교회에는 신비종교적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고자 한 자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바울은 아마도 그들에게 친숙한 언어인 “옷 입음” 개념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함으로써 그들을 교정해 주고자했던 것 같다. 바울 서신의 “옷 입음” 은유 - 특히 “인격체를 옷 입는다”고 하는 - 는 신비종교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나 외형상 유사한 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4. 로마인의 복장: Toga Virilis
로마인들은 그들의 신분 또는 역할, 성(性), 나이 등에 따라 토가(toga)라고 불리우는 다른 종류의 옷들을 입었다. 어릴 때 로마 귀족의 남녀 자녀들은 Toga Praetexta를 입었다. 여아(女兒)의 경우에는 결혼할 때까지 이 옷을 입었으며 결혼 후에는 Stolta라고 불리우는 옷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아(男兒)의 경우 16세가 되면 가정에서 특별한 의식을 행한 후 Toga Praetexta를 벗고 Toga Virilis로 갈아입었다. 이는 그가 성년이 된 것, 다른 말로 하여 노예선생의 엄격한 지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때로부터 그는 가족회의에서 아버지의 곁에 앉게 되었다. 또한 Toga Virilis는 그가 사회적으로 완전한 로마의 시민이 된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자격을 갖춘 로마의 시민으로서 제국 내의 어떤 공직에도 나갈 수가 있었다. Toga Virilis의 상징성은 바울 서신의 “인격체로 옷 입는다”고 하는 은유들 중 특히 갈 3:26-29의 “그리스도로 옷 입음” 은유와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5. 초대교회의 세례의 실천 가운데 나타나는 “옷 입음”
초대교회에서의 세례의 실천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바울 서신의 “옷 입음” 은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The Gospel of Thomas, Logion 37은 A.D. 2세기 초반의 문서로 아마도 초대교회 세례에 관한 언급 중 가장 이른 문서일 것이다. 이 문서는 1 세기 당시의 세례가 수세자가 옷을 벗은 후 나체의 상태에서 세례를 받고 나중에 다시 옷을 입는 순서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또한 이 문서는 세례를 받기 전에 벗어 놓은 옷은 옛 본성을 상징하고 수세 후 다시 입은 옷은 새 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암시한다. 특히 “살아 계신 이의 아들”을 본다고 하는 개념이 수세자가 그 아들과 연합함을 의미할 때, 이 문서의 저자는 그와 연합함으로 수치심이 없는 상태로 회복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자는 창 2:25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2세기 말엽의 로마에서의 세례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이는 Hippolytus, Apostolic Tradition, Column 21이나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후반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The Gospel of Philip, 101과 같은 문서, 그리고 후기의 Jerome, Epistle to Fabiola 19와 같은 문서들도 The Gospel of Thomas, Logion 37이 암시해 주는 것과 유사한 초대교회의 세례의 모습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전자의 문서들이 암시해 주는 세례의 의미도 후자의 그것과 비슷하다. C.F.D. Moule은 초대교회의 세례가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해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고 있는 옷을 벗음 - 믿음의 공적 선언 - 신조 낭독 - 물 속으로 들어감 - 물에서 나와 새 옷을 입음. 이 과정에서 특히 옷을 벗는 것은 옛 사람의 본질을 내어버림을 상징하였으며 세례 후 새 옷을 입는 것은 새 사람의 본질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하였다. 바울 서신의 “옷입음” 은유는 이 초대교회의 세례적 옷 입음 개념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2부
바울 서신 속의 “옷 입음” 은유
1. 인격체를 입음(1) - “그리스도”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는 은유는 갈 3:27과 롬 13:14에 나타난다. 이 두 본문이 동일한 은유를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각기 다른 문맥에 속해 있으므로 한 구절씩 따로 고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1. 갈 3:27의 “그리스도로 옷 입음”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갈라디아 교회는(cf. 갈 4:8; 5:2-10; 6:12-13) 가만히 들어온(cf. 갈 1:6-9) 유대주의적 “거짓 형제들”(갈 2:4)로 인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율법의 준수를 강조할 뿐 아니라 사람이 의롭게 되며 생명과 하늘의 기업을 받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므로 교회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cf. 갈 2:16, 21; 3:6-9, 14-18, 24-29). 바울은 이들에 대항하여 믿는 자들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기업을 상속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갈 3:7, 18, 29). 바로 이 이슈를 위해 바울은 갈 3:27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음”과 동일시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후자의 의미를 밝혀내면 전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Βαπτίσθήναι εἰς Χριστν은 직역하면 “그리스도에게로 세례됨”(to be baptized into Christ)이다. 이는 세례의식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다. 세례 의식이 성취하는 영적 실재는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고 이 연합은 수세자로 하나님의 자녀 곧 그의 상속자가 되게 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는 은유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로 세례됨이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고 할 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은 이 연합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갈 2:19-20에 언급된 것과 같은 죽음과 생명의 연합 같은 것을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울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진수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L.E. Keck은 의미심장하게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는다(baptism 'into Christ')고 하는 것은 세례 의식을 통해 연합체적 인격이며 새 아담인 그리스도께 참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로 옷 입음” 은유는 그리스도의 영과의 세례적 연합을 가리킬 뿐 아니라(cf. 갈 3:1-5, 14; 4:6) 그의 의로우심과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세례적으로 연합하는 것을 가리킨다(cf. 갈 3:24-26: 3:16, 26, 29: 4:1-7). 하나님의 참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
또한 갈 3:27-28이 6:15과 관련됨을 생각할 때 3:27에서의 “그리스도”는 “새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갈 6:15이 강조하는 바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곧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형성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 때 그리스도는 아담적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이해에 비추어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는 것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갈 3:26-27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갈 3:28-29의 연합체적 개념들 -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그리스도께 속한 자” - 은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론적으로 하나됨을 뜻하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갈 3:19, 23의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의 도래 개념과 갈 4:2, 4-5의 “때의 참” 개념이 갈 3:27의 “그리스도로 옷 입음” 은유와 분리될 수 없을 때 이는 이 은유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갈 3:27의 “옷 입음” 은유가 어떻게 아브라함에서 그리스도에 이르는 언약적 족보에 가입할 수 있느냐(cf. 갈 3:29)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을 때 이는 이 은유가 구원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1.2. 롬 13:14의 “그리스도로 옷 입음”
로마서의 주요 수신자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다(롬 1:5-6, 13; 11:13, 28-31; 15:15-16). 그러나 그중 일부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인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아마도 A.D. 49년 Claudius 황제에 의해 추방당했다가 로마로 되돌아 온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로마 교회 내에서 이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은 약간의 갈등이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롬 11:17-32; 14:1-23). 그러나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인종적 분규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롬 12:5; cf. 갈 3:28; 골 3:11,15). 더구나 박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서로 갈등한다는 것은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과 정반대 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도리어 자신들이 종말론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했다(롬 13:12). 바울에게 있어서 빛의 갑옷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바른 행실을 나타낼 수 있는 영적 무장을 갖추는 일로 이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옷 입을 때 성취될 수 있는 일이었다(롬 13:14).
롬 13:14b의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은 롬 6:12의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는 말씀의 축약형태라고 할 수 있다. 또 롬 13:11-14과 6:12-13은 모두 윤리적 권면을 위해 군사적 개념을 사용한다. 특히 롬 13:12의 ὅπλα τού φωτς 는 6:13의 ὅπλα ἀδικας 또는 ὅπλα δικαιοσνης와 메아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롬 13:14의 “옷입음” 비유가 6:12-13과 연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롬 6:12-13이 세례적 본문인 롬 6:1-11에 뛰따라 나오는 결론적 언급임을 생각할 때 롬 13:14의 “옷 입음” 비유는 “세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는 표현이 그리스도와 세례적으로 연합됨,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에 연합됨을 나타내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한편, 롬 6:1-10이, 믿는 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한-많은”(one-many)의 구조속으로(cf. 롬 5:12-21) 들어갈 수 있느냐를 암시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음을 생각할 때 세례를 통해 수세자가 연합하는 그리스도는 아담의 대안적(代案的) 인물 즉 “새 아담”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옷 입음”(롬 13:14)은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에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롬 13장의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 롬 12장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 라고 하는 공동체적 개념 뒤에 나오는 것을 볼 때, 또 롬 13:11-14이 롬 12:1에서부터 시작한 단락의 결론부임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로 옷 입음”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론적으로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음”은 이 은유가 속한 문맥을 살펴볼 때 종말론적인 요소와 윤리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수 있다.
2. 인격체를 입음(2) - “새 사람”
바울 서신에서 “새 사람으로 옷 입는다”고 하는 은유는 골 3:9-10과 엡 4:22-24에서 발견된다.이 두 본문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이 두 본문은 각기 다른 문맥에 속해 있으므로 이 두 구절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1. 골 3:9-10의 “새 사람으로 옷 입음”
많은 학자들은 언어, 문체, 그리고 주로 신학을 들어 골로새서를 바울 이후의 문서라고 주장하면서 “제2 바울서신”(deutro-Pauline)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하팍스 레고메나(hapax legomena)는 많든 적든 모든 바울 서신들에 나타나며, 어휘의 차이는 소위 “골로새 이단”에 대한 적극적 논증의 결과인 것 같다. 문체의 차이도 바울의 저작권을 부인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저자가 문체를 바꾸는 일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골로새서에 바울 신학의 주요 개념들이 나타나지 않는 점을 강조하여 이 서신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모든 서신에서 모든 개념을 반드시 다 써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도 많은 학자들이 바울의 저작권을 인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골로새 이단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서신 자체의 암시로 볼 때 그들은 인간의 철학을 강조하고(cf. 골 2:8) 유대주의적 경향과(cf. 골 2:11, 16; 3:11) 이방종교적 색채를(cf. 2:18) 나타냈던 것 같다. 그들의 가르침은 유대주의적 사상과 헬라적 사상을 혼합한 일종의 혼합주의였다.
골로새 이단은 특히 그리스도의 인격을 평가절하 하였다(골 1f:15-19). 바울은 이에 대항하여 천사들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그리스도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거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골 1:19; 2:9).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의 창조 사역의 중보자이시다(골 1:15-16). 바로 이 사상은 골 3:10의 “새 사람으로 옷 입음”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계속 새로워지는 존재로서 언급되기 때문이다.
“새 사람으로 옷 입는다”고 하는 은유는 배후에 기독교 세례가 서있을 가능성이 높다. 골 3장 8절의 ἀποτθημι, 9절의 ἀπεκδυσμενοι, 10절의 ἐνδυσμενοι는 초대교회에서 이미 세례와 관련된 용어로 통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골 3:8-11은 세례의 본질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에 연합으로 설명하는 골 2:11-12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후자의 본문은 ἀπέκδυσις뿐 아니라 βαπτισμός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골 3:10의 “새 사람으로 옷입음” 은유가 그리스도와의 세례적 연합, 즉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결론 짓는다.
하지만 이것이 “새 사람으로 옷 입음”의 의미 전체는 아니다. 우리는 골 3:9-10에서 믿는 자들이 옛 사람을 벗고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새 사람을 입는다고 하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형상” 개념은 창 1:26-27의 “하나님의 형상”을 염두에 둔 표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이라고 하는 개념은 골 3:5-17의 권고들이 골 3:1-4의 기독론적 진술로부터 나오고 있는 점에 유의할 때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그러므로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따라”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모델을 따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새 사람”이 직접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는 뜻은 아니다. 만일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 자신을 따라 새롭게 된다는 이상한 개념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이 “새 사람”이 믿는 자가 입어야 할 어떤 실재(reality)이며 이 실재는 그리스도의 모델을 따라 계속 새롭게 되어져야 하는 것일 때, 그것은 “새로운 인간성” 혹은 “새로운 본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과 같은 관찰을 통해 우리는 골 3:9-10의 “옛 사람을 벗고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새 사람을 입는다”고 하는 은유가 아담-기독론적 언명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은유가 옛 아담의 부패한 본성을 벗고 새 아담인 그리스도의 본성을 입으라는 뜻을 함의한다고 결론 짓는다. 믿는 자들은 아담적 그리스도와의 세례적 연합을 통해 새로운 인간성을 입어야 한다.
또한 골 3:9-10이 보다 더 큰 문맥 즉 골 3:1-17 안에 포함되는 것과 골 3:5-11의 내용이 골 3:12-14의 내용과 짝을 이루고 있는 것과, 골 3:15-17이 골 3:5-14에 대한 결론적 진술인 것을 생각할 때, 골 3:11 이하의 구절들이 “새 사람으로 옷 입음” 은유에 대해 추가적 설명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골 3:11의 τὰ πντα καὶ ἐν πάσιν Χριστς와 골 3:15의 ἐν ἑνὶ σματι가 믿는 자들의 공동체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을 때, 이는 골 3:10의 “새 사람으로 옷 입음” 은유가 교회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즉 이 은유는 믿는 자들이 교회론적 실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골 3:1-4의 신자들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고 하는 사상과 그리스도가 오실 때 신자들이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하는 사상은 “새 사람을 입음”이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하는 것을 암시해 주며, 골 3:9, 12의 부패한 본성과 그 행위를 제거하라고 하는 권면과 그리스도인다운 덕성들로 옷 입으라고 하는 권면은 골 3:10의 “새 사람으로 옷 입으라”고 하는 은유가 윤리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2.2. 엡 4:22-24의 “새 사람으로 옷 입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에베소서를 골로새서 처럼 “제2 바울서신”으로 취급한다. 그들은 에베소서의 신학, 언어과 문체, 초기 범교회적(catholic) 특징들, 그리고 신약의 다른 책들과의 관계 문제 등을 들어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골로새서와 에베소서가 동일 저자에 의한 기록이 아니라면 어떻게 두 책이 모두 두기고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을까? 만일 바울을 모방하는 어떤 사람이 에베소서를 기록하고 있다면,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글을 쓰면서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사적으로 한 말을 그대로 베끼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두기고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유사점들은 이 두 서신이 서로 다른 정황 - 그러나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닌 - 속에서 한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을 강조할 때(엡 4:21), 이는 거짓 가르침(엡 4:14)에 대한 반작용인 것처럼 보인다. 엡 4:22-24의 세 헬라어 부정사는 엡 4:21의 ἐδιδάχθητε에 대해 주석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엡 4:22-24에서 옛 사람을 벗을 것과 심령으로 새롭게 될 것과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일찌기 “인격체를 입는다”고 하는 구절들(갈 3:26-29, 롬 13:11-14, 골 3:9-10)이 기독교 세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엡 4:22-24이 동일한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 점과 특별히 이 본문이 골 3:9-10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엡 4:22-24의 배후에도 기독교 세례가 서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엡 4:5은 “한 세례”를 언급하고 있고 엡 5:25-27은 세례를 암시하는 언어, 즉 “물로 씻는다”고 하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엡 4:22-24의 “옛 사람을 벗음과 새 사람을 입음” 개념은 옷을 벗고 입는 것으로 특징을 이루는 1세기 교회의 세례적 실천 행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결론 짓는다. 이러한 결론과 함께 필자는 엡 4:24의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는 명령은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성취된 것을 실현하라고 하는 권면이라고 본다. 믿는 자들은 항상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의 본성이 되게 하여야 한다.
엡 4:22-24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수식하는 각각의 말들은 그들이 누구를 표상하는지 암시해 준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이라고 하는 말은 “옛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옛 본성을 의인화한 용어임을 알려 준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이라고 하는 재창조 개념은 “새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새롭게 된 우리의 새 본성을 의인화한 용어인 것을 알려 준다. 따라서 필자는 엡 4:22-24의 “벗음과 입음” 은유는 아담-그리스도 모티프(motif)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옛 사람을 입는다”고 하는 은유의 뜻은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새로운 본성 혹은 인간성을 입는다고 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아담적 그리스도와의 세례적 연합을 통해 얻은 새로운 본성을 반복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옷이 착용자의 외모를 지배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로운 본성이 그들의 모습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
또한 Eph 4:24의 “새 사람”이 엡 2:15의 교회론적 개념인 “한 새 사람”과 병행을 이루고 엡 4:25의 상호적(相互的) 지체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될 때, “새 사람을 입는다”고 하는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공동체에로의 연합을 의미한다. 또한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옛 사람” 개념(엡 4:22)이나 “심령이 새롭게 됨”의 개념(엡 4:23), 그리고 새 사람의 특징으로서의 “의와 거룩함”의 개념들(엡 4:24)은 “새 사람을 입는다”고 하는 은유가 윤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얻은 새 인간성을 실제적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3. 부활체를 입음
바울 서신에서 부활체를 입는다고 하는 개념은 고전 15:49-54과 고후 5:1-4에 나타난다. 이 두 본문은 자매 구절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서로 비슷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두 본문은 “옷 입음” 은유를 사용하여 현재의 존재양식에서 미래의 존재 양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본문은 표현 방식이나 용어 사용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차이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구절을 한 본문씩 따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3.1. 고전 15:49-54의 부활체를 입음 개념
고린도 교회에는 극단적인 실현된 종말관을 가진 신령주의자들(“spirituals”)이 있었다. 그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자신들이 이미 “부활”을 성취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자신들의 모습이 물질적인 몸을 제외하고는 현재의 모습과 동일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영향을 미칠 때, 바울은 교인들에게 바른 부활관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는 거의 의도적으로 미래 시재의 묵시적 언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의 현재 상태의 불완전성과 상호 책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부활체를 입는다고 하는 표현은 현재의 물질적 몸이 미래의 영적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하는 논증과 함께 나온다. 즉 바울은 몸의 변화에 대한 논증을 한 후에 믿는 자들이 장차 부활체를 입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바울은 몸의 변화의 확실성을 논증하기 위해 아담-그리스도의 대조 개념을 사용한다. 바울은 고전 15:49에서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장차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러한 상반 개념들은 고전 15:49이 소위 아담-기독론에 의해 조종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은 아담의 형상을 가리키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해는 고전 15:45-48절의 상반 개념들 - 즉 “첫 사람 아담”/“마지막 아담”; “첫 사람”/“둘째 사람”; “흙에 속한 자”/“하늘에 속한 자” - 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고전 15:49의 동사 φορω는 고전 15:53-54의 ενδω와 치환 가능한 용어이다. 따라서 고전 15:49의 뜻은 믿는 자들이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벗고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것이라는 것이다.
고전 15:50-52은 고전 15:53-54에 나타나고 있는 “옷 입음” 개념이 현재의 육신적인 몸, 썩을 몸이 영적인 몸, 썩지않을 몸으로 변화할 것을 뜻함을 암시한다. 바울은 고전 15:50에서 부활의 몸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특히 고전 15:51-52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죽어있는 자는 “부활”에 의해, 살아있는 자는 “변형”에 의해 새로운 몸을 갖게 될 것을 암시한다. 바울이 고전 15:53-54a에서 썩을 몸, 필사의 몸이 썩지 않을 몸, 불사의 몸을 입을 것을 말할 때 그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영광스런 몸, 즉 영원한 생명이 지배하는 몸으로 변화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전 15:54b에서 부활을 생명이 사망을 삼킬 것이라는 말로 묘사한다.
이상과 같은 관찰을 통해 우리는 고전 15장의 “옷 입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이 이미지는 타락한 아담적 육체성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현재의 몸은 제2의 아담적(i,.e.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체성에 의해 지배를 받는 부활체에 의해 대치될 것을 암시한다. (2) 이 이미지는 현재의 썩을 몸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 위해 썩지 않을 부활체로 변화될 것을 묘사한다. (3) 이 이미지는 썩음과 필사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현재의 몸이 썩지 않음과 불사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몸으로 변화될 것을 묘사한다. (4) 이 이미지는 죽음에 예속된 현재의 몸이 생명의 지배를 받는 몸으로 변형될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고전 15장의 “옷 입음” 개념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믿는 자들이 아담-기독론적인 변화, 즉 새 아담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을 의미한다.
3.2. 고후 5:1-4의 부활체를 입음 개념
고린도 후서는 고린도 전서를 쓴 후 얼마 되지 않아서 - 그 다음 해 쯤 -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후 2:12-13; 7:5; 8:1-5; 9:2). 바울이 고린도 후서에서 다시 “부활”을 언급한 것을 보면 그는 이 이슈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고후 5:1-4은 죽음과 생명을 중심 테마로 삼고 있는 단위 본문인 고후 5:1-10에 속한다. 이 본문은 다시 보다 넓은 단위인 고후 4:7-5:21에 속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미래의 존재 양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세 쌍의 상반 개념을 사용한다: 땅의 장막/하늘의 집(고후 5:1), 벗음(혹은 벌거벗음)/덧입음(고후 5:2-4b), 그리고 필사성/생명(고후 5:4c).
바울은 고후 5:1-2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파루시아(parousia) 때에 땅의 장막 대신 하늘의 처소를 입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건물 개념이 1 세기에 종종 인간의 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던 사실을 생각할 때 이는 현재의 땅의 몸이 미래의 하늘의 몸에 의해 대치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바울의 언설에서 건물 개념 “입음” 개념과 혼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혼합이 생소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은 아마도 건물과 옷이 모두 인간을 수용한다고 하는 점을 - 비록 수용 방식은 달라도 -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튼 바울의 언명은 믿는 자의 땅의 몸이 무너진 후에는 하늘의 몸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늘의 처소로 옷 입는다고 하는 은유의 의미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이 은유 배후에 아담 모티프가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땅의 몸”(= 장막 집)과 “하늘의 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처소)은 고전 15:47-49의 “흙에 속한 자”(= 아담)와 “하늘에 속한 자”(그리스도)와 매우 유사하다. 사실 고후 5:1-4에 나오는 벌거벗음, 죽음, 생명, 옷 입음 등의 개념들은 창세기 처음 장(章)들에 나타나는 개념들이다. 이는 우리의 본문에 아담 모티프가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의 장막이 무너지고 하늘의 처소로 옷 입는다고 하는 개념은 타락한 아담을 모델로 하는 현재의 죽을 몸이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는 미래의 영원한 몸에 의해 대치될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 짓는다.
그럼 언제 믿는 자들의 땅의 몸이 하늘의 몸으로 변화될 것인가? 고후 5:1의 땅의 장막이 무너진다(καταλυθῇ)는 말은 분명히 현재의 몸이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죽음 즉시 하늘의 몸을 갖게 된다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이다. 바울은 결코 죽음은 자동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불러온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언제 땅의 몸이 하늘의 몸으로 변화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언제 파루시아가 오느냐에 달려있다. 아담적 몸이 그리스도적 몸으로 변화되는 것은 파루시아 때일 것이다.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키운 바 되는 것은 세상 끝 날의 일이 될 것이다(고후 15:4c). 고후 15:4c의 평행구인 고전 15:54은 의심의 여지 없이 파루시아 때의 부활의 변화를 마음에 생각하고 있다.
바울은 파루시아 전에 죽은 자들의 중간 상태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고후 5:8). 부활의 변화를 열망하는 바울에게 있어서 이는 부자연스런 일이 아니다. 바울의 뜻은 믿는 자들이 죽어 중간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몸에 생명이 이미 역사하고 있다고 믿는 바울에게 있어서(고후 4:10-11, 16) 그리스도인들이 중간 상태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바울은 고후 5:3-4ab에서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을 벌거벗은 몸이 하늘의 몸에 의해 덧입혀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3절의 “벌거 벗음”(γυμνός)은 4절의 “옷 벗음”(ἐκδύσασθαι) 개념과 동일한 뜻을 나타낸다. Γυμνός는 단순히 고대 유대인들에게 흔히 있었던 나체에 대한 공포심을 반영하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는다. E.E. Ellis가 지적하는 대로 이 단어는 의와 영광을 상실한 타락 후의 아담의 몸과 같은 몸의 (최후의 날의) 상태를 가리킨다. “덧입음”(ἐπενδύσασθαι) 개념은 현재 입고 있는 옷 위에 다른 옷을 더 입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바울은 이 개념을 통해 육체적 존재의 지속성을 강조하며 동시에 현재의 육체가 새로운 육체로 변화될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부활체의 육체성에 대한 강조는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1세기 당시의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반격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관찰을 통해 볼 때 부활체를 입는다고 하는 것은 아담적인 몸이 변화하여 그리스도적인 몸이 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고후 5:4c에서 땅의 몸이 하늘의 몸으로 덧입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진술한다. 그때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키워질 것이다. 부활체를 입는다고 하는 것은 생명에 의해 지배되는 완전한 몸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과 생명은 창세기의 아담과 관련된 개념들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생명의 완전 제압 개념은 아담 모티프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
우리는 지면관계상 제1부에서 다룬 배경 문헌들이 바울 서신의 “옷 입음” 구절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논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대문헌들의 “옷 입음” 표현들이 바울의 “옷 입음” 은유들과 많은 유사성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사성은 바울의 근원이 고대 문헌들이라기보다는 바울이 얼마나 고대문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지 암시해 주는 것 같다. 그는 그의 독자들이 기독교 밖의 사상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며 때로 그들을 교정해 주기 위해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기독교 밖의 개념들도 자기의 목적을 따라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옷 입음” 은유 본유적 암시들에 대해서도 고대문헌들과 바울의 본문들을 다룰 때에 적절하게 언급하지 못하였다. “옷 입음” 은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들은 다음과 같은 옷의 기능들과 관련될 것이다. (i) 옷은 착용자의 외관을 지배할 뿐 아니라 착용자의 개성을 드러낸다. (ii) 옷은 착용자와 밀착돼 있어 양자가 거의 동일시된다. 착용자가 있는 곳에 옷이 있고 옷이 있는 곳에 착용자가 있다. (iii) 그럼에도 옷은 역설적으로 착용자로부터 독립된다. 옷은 옷이고 착용자는 착용자이다. 옷이 착용자가 될 수 없고 착용자가 옷이 될 수 없다. (iv) 옷은 또 다른 옷에 의해 갈아 입혀질 수 있다. 낡은 옷은 새 옷에 의해, 더러운 옷은 깨끗한 옷에 의해 갈아 입혀진다. (v) 옷은 또한 다른 옷에 의해 덧입혀질 수 있다. (vi) 옷은 또한 착용자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물론 옷은 입는 자가 선택하는 것이지만 일단 입으면 착용자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vii) 무엇보다도 옷은 착용자의 몸을 덮어 준다. (viii) 옷은 착용자의 신분을 나타낸다(특히 1세기의 그리이스-로마 세계에서).
물론 이상과 같은 옷 입음의 의미들이 항상 다 바울 서신의 모든 “옷 입음” 구절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들을 염두에 두는 것은 바울의 “옷 입음” 은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제시한 대부분의 항목들이 “그리스도로 옷 입음” 혹은 “새 사람으로 옷 입음” 은유와 관련지어질 수 있고, 특히 “갈아입음”과 “덧입음”의 암시들은 “부활체를 입는다”고 하는 은유와 연관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의 “옷 입음” 구절들 배후에 그 어느 한 본문도 예외없이 아담-기독론적 신학사상이 서있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인격체”를 입는다고 하는 네 개의 “옷 입음” 구절들은(갈 3:27; 롬 13:14; 골 3:9-10; 엡 4:22-24)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곧 생명의 영광을 세례에서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새 아담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에 연합함으로 왕적인 신분과 의와 거룩함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부활체”를 입는다고 하는 두개의 구절은(고전 15:49-54; 고후 5:1-4) 그 회복된 생명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파루시아(parousia) 때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때 믿는 자들은 부활의 생명에 의해 완전한 지배를 받게되므로 아담이 창조시에 가졌던 최초의 영광 이상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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