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치유!!! 신유!!!

[스크랩] 정태기교수의 치유 상담 목회

하나님아들 2013. 7. 30. 23:04
정태기교수의 치유 상담 목회

치유 목회 연구원 설립이유

해마다 가을이면 우리 집 앞 상수리나무는 수 천 개의 상수리 열매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은 '인간' 나무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삶의 열매가 너무 적거나 아예 없는 것을 봅니다.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여러 종류의 상처를 발견하고 놀랍니다.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받은 상처와, 성인 생활과정에서 얻은 상처가 삶의 성장을 차단하고, 부부관계나 부모자녀관계를 어렵게 만들며, 영적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 나의 부부, 나의 가정, 나의 목회에서 풍성한 열매가 열리기를 원하십니다. 크리스찬 치유목회연구원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 자신이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가를 알게 하며, 내 이웃과의 만남을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드립니다. 목회자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며 가정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크리스찬 치유목회 연구원은 설립되었습니다.

I. 치유가 필요한 현대인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 병든 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 인간관계, 정치, 사회, 교육 그리고 자연 생태계의 측면에서 볼 때 건강한 삶을 누리기가 불가능하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경쟁을 요구한다. 학교 공부에서부터 직장과 사회 전반에 걸쳐 경쟁에 뒤지는 자는 살아 남을 수 없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살아야 한다. 경쟁의 목표는 성공과 재물이다. 성공과 재물을 얻는 도구로 인간은 이용되고 있다.
한 마디로 현대인은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 건강에 중요한 요소는 안정이다. 왜냐하면 건강을 위해서는 휴식이 필수인데, 휴식하는데 필수 요소는 심리적인 안정이기 때문이다.
마슬로(Maslow)에 의하면 안정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성장이 멈추고 성장이 멈추는 것은 결국 병들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특별한 훈련과 수련이 없는 현대인은 대부분 병들 수밖에 없고 이것이 바로 현대사회의 현실이다.

인간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세 가지 영양소가 있다. 첫 번째는 음식물에서 얻는 영양소이고, 두 번째는 가족 식구와 이웃들과의 만남에서 얻는 사랑의 영양소이며, 세 번째는 창조주와의 만남에서 오는 신비의 영양소이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은 음식물에서의 영양소는 비교적 잘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현재 자연 생태계의 오염으로 음식물의 영양소까지도 걱정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환경 공해 문제가 해결되면 음식물의 영양소는 해결된다고 하자. 핵가족으로의 분열과 대중 매체의 홍수로 현대인은 누구하고도 진지한 만남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경쟁사회에서 탈진된 가장이 집에 들어오면 우선 텔레비wus에 눈이 가도록 되어 있다. 아내도 자녀들도 T,V.라는 엄청난 위력 앞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언제 이들이 얼굴과 눈을 마주치는 진지한 만남을 누릴 수 있는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 가정에서 이럴진데 밖에서는 더욱 불가능하다.
사랑의 영양소는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수 없이 많은 만남을 지속 할 때 우리 마음속에 강력한 생명의 힘으로 터전을 잡게 된다. 잠깐 스쳐 가는 대화로는 건강한 인간 형성은 어렵다.
사랑의 영양소가 결핍되면 인간은 정신적으로 약해지면서 성격은 병들고 만다. 사랑의 영
양 부족으로 성격이 병든 사람들에 의해 거의 모든 사회 문제는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사랑 영양 결핍증 환자들은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 한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기
에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을 포악하게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환자다. 이런 환자들로 현대 사회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런 환자들이 교회
에 모인다. 또한 이런 사람들에 의해 교회 문제도 일어난다.

2. 치유 목회의 중요성
복음서는 말씀 선포, 가르침, 치유가 예수님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구원 사업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치유 사역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치유 행위는 구원 사업의 핵심이었던 하나님 나라 전파와 밀접한 관계
를 지니고 있었다. 세례 요한이 제자를 보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낸 자인가를 알고자 했을 때 "너희가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말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복음 11:4-5)"고 대답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낸 이유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고,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주님은 병든 자를 치유하셨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에게 치유 사역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다. 목회자는 병든 인간과 깨어진 인간 관계를 치유하고, 자연을 치유하며, 병 들어가는 사회를 치유하는 일에 동참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는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아는 것이다. 병든 현대인을 목회하는 목자는 자신의 양들이 어떤 병에 걸려 있고, 그 병이 어느 정도 심각한가를 알아야 한다. 목자는 양들의 영적, 정신적 병을 진단하고 치유해 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목자가 이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양들은 사랑과 신비의 영양 결핍으로 병을 앓게되면 무조건 목회자에게 의존하도록 되어 있다. 치유하러 오는 양을 무지해서 또는 게을러서 회피한다면, 그 목자는 21세기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목자가 자신들의 병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양들이 안다면 그 양들은 목자를 몰아내든 가, 자신들이 나가든 가 둘 중 하나를 택할 것이다. 현대 목회자는 치유에 대해 알든 모르든 병든 양들을 만나야 되고 치유에 임할 수 밖에 없다.
21세기 현대인들을 목회하는 목자들은 현대인들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상처 입은 환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환자는 신음을 하도록 되어 있다. 환자의 신음이 교회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에 대해 기초적인 상식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파고 들어가 보면 병든 환자의 신음이 그 원인이다. 교인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킬 때 그것을 환자의 신음 소리로 듣는 목자는 무엇이 그를 그렇게 아프게 하는 지를 분석, 진단할 것이고, 원인을 알면 거기에 맞는 처방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목자는 문제의 교인과 정신적인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이런 싸움은 목자가 이기든 교인이 이기든 끝난 후엔 서로가 상처를 입도록 되어있다. 싸움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해서 자신의 영적 정신적 신체적 건강에 손상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하는 일에도 퇴보를 가져다준다.
불안과 긴장이 소용돌이치는 사회 속에서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신경증 환자가 되어있는 교인들, 교회에서 사람들과 깊은 만남을 가질 수 없기에 사랑이 메말라 가는 현대 교인들, 그리고 대 도시 과학 문명 속에서 신비감을 상실한 현대 교인들을 목회자는 알고 있어야 하며, 이들을 치유하기 위한 목회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오늘 한국인들의 마음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상처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맺혀진 응어리와 지금 현재 살아가면서 맺혀지는 응어리를 풀어주지 않은 채 성공적인 목회가 가능할까? 한 마디로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미스러운 사건들의 뿌리는 바로 교인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응어리 때문이다. 이 응어리를 상담과 설교를 통해서 풀어내지 않으면 목회의 궁극 목적인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청중의 영적, 정신적, 신체적 삶과 대인관계를 방해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속의 상처에는 상관없이 복음의 진리만 전하면 된다는 식의 설교중심 목회가 오늘의 교회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회에 참석하는 청중의 심리를 보면 자기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바라고 있다. 자기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해답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 자기들의 문제에 대해 심리학적인 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으로부터의 해답을 기대한다. 이런 면에서 유능한 상담 설교자는 말씀과 인간의 삶을 잘 요리해서 청중에게 대접하는 설교자여야 한다. 상담 설교라고 해서 말씀을 소홀히 하고, 인간 마음의 진단과 처방에만 치중한다면 좋은 설교가 될 수 없다.
한 마디로 설교자는 상담을 통해서 청중의 소리를 듣고 청중은 설교를 통해 자기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 주는 설교자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명의 역사가 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치유 설교에서는 설교자와 청중이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 받는데, 이 대화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치유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설교자와 청중은 함께 소생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초월의 경험]

최근 미국의 학계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전 인구의 20퍼센테이지에 해당하는 사람들, 즉 다섯명 가운데 한명 정도가 신비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한다. 여기에서 신비한 경험이란 현대 과학이나 이성의 기능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장소에 갔을 때 그 장소가 언젠가 자기가 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강한 느낌을 갖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몸은 가서 본 적이 없는데 그곳이 여러 번 가 보았던 것처럼 마음에 익는다. 이것은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눈에 익은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또 다른 초월의 경험은 우리가 들어서 잘 알고 있는 ESP(초감각 기능)이다. ESP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두루 사용하는 시청각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 교통기능이다. 우리 한국인들에 대한 조사는 아직 없어서 모르겠으나 미국인의 경우 전 인구의 58퍼센테이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런 경혐을 한 적이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외에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을 느끼고 감지하는 능력도 볼 수 있다. 윌리암 제임스는 신비의 경험이 가지는 특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신비의 경험을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신비의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특성은 신비의 경험으로 인해 지적 능력이 강화되고 자기를 감싸고 있는 우주를 더 깊이 느끼게 되며 분별력, 즉 통찰력이 증가되는 것을 느낀다.? 신비의 경험은 오래 동안 지속하지 않고 수분간의 짧은 기간동안 체험되는데, 자발적이기보다는 다른 어떤 힘에 의해 자신이 끌려가는 느낌을 갖는 경향이 있다.

신비의 경험이란 바로 종교적인 경험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은 어린시절의 가족관계와 어린시절의 신앙 생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신비의 체험을 한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상당히 많은 수가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경제적으로도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이 많다. 또 가정적으로도 건전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신비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위의 연구는 신비의 체험자들이 교육과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풍부한 생활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건강하고 낙관적이며 자신의 삶에 확신을 지닌 사람들에게서 많고 이들은 보통 인종 편견 의식도 적은 사람들이었다.
위와 같은 연구 보고서의 결과는 신비경험자들이 현실과 유리되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된 사람들 가운데 많다는 지금까지의 견해를 뒤바꾸어 놓는 것이다.

신비의 경험, 즉 초월의 경험을 깊이 연구한 학자 Greeley는 정신 건강과 신비의 경험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이성과 감각만을 통해서 사물을 깨닫고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어왔던 사람에게 신비의 경험은 전혀 새로운 세계를 계시해 주게 된다. 사실 수세기 동안 지식을 얻는 주요 수단은 감각과 이성의 통로였다. 또 그렇게 믿어 왔다. 다시 말해서 모든 물리적인 사물은 질서 정연한 순서에 의해 작용한다는 과학적 사고 방식이 지식의 세계를 지배하면서.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감각과 이성의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만을 기본지식으로 믿었다. 그러나 최근의 초월심리 현상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기금까지의 과학적 지식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도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과학적 지식을 더 알면 알수록 과학적인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실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원리 이외 또 다른 원리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현대 과학자들은 점점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성과 감각을 통해 지식을 얻어야 한다는 과학적 이해가 지배할 당시 기독교 신학까지도 이에 동조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물질세계 전반에 임재하고 계신다고 믿었고, 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 신학은 대두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많은 신학, 행동주의 심리학자, 또 사회과학자들은 전통적이고 물리적인 과학 사고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구약 성서를 보면 초능력의 현상들이 수 없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물리적 수단을 넘어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사실 성서의 기자들은 희랍인들이 이해한 것과 같은 과학의 세계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신약의 복음서만 보더라도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이야기들과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 등 수많은 초능력의 사건들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일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중세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성과 감각으로 증명되는 것을 지식으로 믿는 증명 철학임으로 이성과 감각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수단을 통해서 얻는 지식은 가능할 수 없었다. 이러한 철학 사상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에 받아들여 중세기 교회를 지배하는 신학의 바탕을 수립하게 된다.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사상이 데스카르테스에 의해 더 강화되면서 교회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한 체험을 포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신학 사상이 오늘의 신학 배경을 이루고 있기에 아직도 초월적인 경험에 대한 깊은 연구가 신학 세계에서 활발할 수 없다.

현대 기독교에서 초월의 능력이나 초월의 경험을 보는 눈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어떤 성서 비평학자들은 초능력의 사건 즉 예언, 치유, 기적, 꿈, 환상 등을 부정한다. 두 번째로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우리 인간의 오관을 통해서만 중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성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신화적인 요소를 배재하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 나타나는 태도는 모든 기적적인 사건은 신약 시대에 한해서만 가능했고 일단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낸 이상 또 다른 초능력적인 사건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런 기적의 사건을 이루시는 분이시지만 더 이상은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네 번째 견해는 주로 보수 신앙인들에 의해 주장되는데 초월의 사건은 하나님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사탄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 밖에서 일어난 기적이나 초월의 사건은 사탄에 의한 것이어서 해를 끼친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초능력, 초월의 경험은 인간이 지닌 자연적인 요소의 발로이다. 그런데 이런 기능은 현대인이 이성과 감성의 세계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점차로 잊혀져 버렸던 것이다. 결론으로 필자는 초능력, 초월의 경험, 또는 신비의 경험들이 우리 신앙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더 풍성한 세계관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문제는 신비의 세계, 기적의 경험, 초월의 세계에만 집착해서 이성과 감성의 세계에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초월의 경험을 무시하고 이성과 감성의 사고에만 치중하는 것도 건전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성과 절정의 경험

나이 열 아홉 되던 해는 나의 일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시기였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데다 아버지마저 이미 세상을 뜨신지 오래였다. 고등학교는 겨우 졸업했지만 더 이상 서울로 나가 공부한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처지였다. 더 앞으로 성장하고 싶은데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방은 캄캄절벽이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던가!
아직 새파란 젊은이었던 나는 마치 팔십 노인 같은 마음으로 매일 고향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해변의 백사장과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를 벗삼아 거니노라면 내가 자연 속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착각을 한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불타듯 이글거리며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이라도 하나님의 어떤 음성이 들려올 것만 같은 강렬한 느낌 속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 바닷가에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뜨거운 체험을 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모습은 볼 수 없었고 음성도 들을 수 없었지만 그 자리에 나와 함께 하시고 그 순간 나를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초저녁 달이 떠오를 때까지 열 아홉 살의 소년은 뜨거운 가슴을 부여안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또 울었다. 그때 바닷가에서 나와 함께 계셨고 나를 부르셨던 하나님은 나를 한번도 떠나지 않으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역사하고 계심을 의심치 않는다. 자라온 삶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고향 바닷가에서만 나와 함께 하셨던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순간 순간마다 천사들을 보내시어 나를 지키시고 보살펴 주셨음을 생각하고 감사한다. 내 나이 16세인 나를 결혼시켜 고향 섬에 정착시키려는 부모님의 유혹에서 건져주신 일, 국민학교 교사가 인생 최대의 꿈이었던 나의 삶을 지금의 삶으로 바꾸어 주신 일, 나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의사의 길을 택하려 했던 나를 주님의 제자요, 영혼의 치유 의사로 돌려주신 일 등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나의 삶 속에서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나의 삶의 바둑판을 나에게 맡기시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놓으셨음을 실감한다.

크리스찬치유목회 연구원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사랑하는 동역자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수련을 쌓고 있는 동지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목자로서 양을 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임재를 체험했다. 이사야는 제사장으로서 국가적인 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았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 오신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 그리고 주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이 거룩한 만남을 위해 우리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현대 사회가 가르치는 지식에 사로잡혀서 주님과 만날 수 있는 눈과 귀가 어두워 있다.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금도 부르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만나고 싶으셔서 이 순간 우리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주님의 노크 소리를 들어야 한다. 어떤 시인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매일 매시간 매순간마다
나는 하나님을 본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에서
길거리에서
하나님의 싸인한 편지들을 발견한다

하나님,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삶 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나의 자아와 주위 환경과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주위세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솟구치면서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진다.
두 번째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무한히 넓은 관점에서 나의 삶을 바라본다.
세 번째로 신성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거룩한 실재 앞에 조용히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린다.
네 번째로 기쁨, 사랑, 축복, 평화, 감사, 자유의 감정들이 마음에 차고 넘친다.
다섯 번째로 태도나 행동이 긍정적으로 변한다. 다른 사람에게 깊은 신뢰와 친밀감을 느낀다. 습관적인 방어심리가 사라진다.


시들지 않는 노인상

1. 외로운노인
일흔이 다 된 노벨 수상 시인 에무제니오 몬탈레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여섯 살 때 우리는 집짓기를 갖고 놀았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우리는 패쌈을 하고 놀았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우리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아이들을 가졌고,
서른 다섯이 되었을 때 우리는 히틀러와 뭇솔리니를 만나야 했다.
그리고 또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잿더미 속에서 C-레리손을 구걸해야 했고,
쉰 살이 되었을 때 곧 잘 살 수가 있었다.
육십이 되었을 때는 담석증을 앓아야 했고,
그리고 칠십이 된 이제
우리는 우리를 더 이상 우리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케세페도, 카를로도, 그리고 나의 아내도
이미 세상을 뜨고 없으니…

이 시인은 노년의 외로움을 시로 말하고 있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노인의 가장 큰 문제는 외로움이다. 탑골 공원 벤치에 하루 종일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노인을 본다. 그 노인의 삶을 되돌아보면 아름다운 청춘이 있었으리라. 뜨거운 사랑도 있었으리라.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흥분된 마음으로 발걸음을 빨리 했던 행복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노인의 모습은 과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외로운 패장이라고나 해야 할까! 필자는 그 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뼛속 깊이 파고드는 외로움을 느꼈다.

외로움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주위에 없을 때 마음속에 쌓이는 살얼음이다. 외로움이란 사람들 속에서 내가 따돌림당할 때 내 마음 한 부분을 도려내는 아픔이다. 외로움이란 내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이 나를 떠나 버릴 때 내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다. 외로움이란 꼭 엄동설한의 한겨울 같아서 외로움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얼어붙는다. 마음이 얼면 얼마 안가 몸도 얼면서 육신의 기능이 마비된다. 수많은 죽음의 원인을 캐어 보면 결국 마음이 얼어붙어 작동하지 않는 데 깊이 뿌리 박고 있다. 얼어붙은 마음의 뿌리는 외로움이다.
한 사람만 그 마음의 외로움을 알아준다면 어떤 사람도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살 심리의 원칙이다.

우리 주위의 노인들을 만나 보자. 부한 자나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그들은 외로움의 옷을 두껍게 입고 있다. 노인을 쓸모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요즘 사회에서 노인은 외롭고, 핵가족 시대에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는 노인은 허허 벌판에 내던져진 고아다.
6남매를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느라 허리가 굽은 어느 노부부는 칠십 진갑날 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6남매가 건넛방에서 싸움판을 벌인 것이다. 싸움의 동기는 어느 자식도 부모는 모시지 않으려 하면서, 부모의 유산에만 욕심을 부리는 것이었다. 70평생을 자식들만을 위해 헌신해 온 노부부는 가슴이 아파오는 외로움을 앓으며, 그 밤을 서로 붙들고 울기만 했다. 일평생을 사랑해 온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은 외로움의 병을 몇 일 앓다가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셨고, 그 후 일주일이 채 안된 어느 날 새벽 할아버지까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병원에서의 진단은 두 분 다 심장마비였다. 그러나 필자는 동사(冬死)로 진단한다. 그렇게 사랑했던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은 외로움 때문에 두 분의 마음속엔 외로움의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시간이 가면서 마음이 얼어붙고, 이와 함께 몸도 얼어붙어 결국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농촌 노인들의 사망률이 도시보다 2.5배라는 통계가 나왔다. 날마다 노동하고 좋은 공기 마시면서 사는데, 왜 사망률이 그렇게 높은가? 자식들 모두 도시로 떠나 버리고 단 둘이, 아니면 홀로 남은 노인들은 결국 외로움의 혹한에 시달려야 한다. 자연의 겨울은 계절 따라 오지만 인간의 마음속에 외로움의 겨울은 오뉴월 삼복더위에도 찾아온다. 사람은 음식만으로는 못 산다. 음식으로부터 얻는 영양분과 함께 인간과의 만남에서 얻는 사랑의 영양분도 똑같이 섭취해야 한다. 음식물의 영양섭취가 너무 부족하면 영양실조로 결국은 죽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 외의 다른 사람, 특별히 식구들이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사랑의 영양분을 전혀 섭취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정신 기능 상실과 함께 결국은 육체의 기능 마비로 죽음에 이른다.

2. 행복을 창조하는 노인
위에서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노인이라고 해서 꼭 그렇게 비참한 처지를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많은 노인들이 위에서 말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상태를 잘 이용하여 성숙한 노년을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그렇다면 이들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인가? 아니면 늙어 가는 과정 자체가 이들에게 어떠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노년기에 중년기 때보다 오히려 지식과 기술을 훌륭하게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년기를 비교적 편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노인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융이나 에릭슨에 의하면, 인생의 후반기는 하향길이 아니라 새로운 인격의 통합을 이루는 절정의 시기이다. 융에 있어서 노년은 자기 자신의 내적 세계를 발견하는 기회이다. 이 내적 세계가 지금까지 자기가 오랫동안 예속되어 있던 외적 세계를 가치 있는 세계로 완성시키는 것이다.
또한 무의식 속에 방치해 두었던 가능성을 깨닫는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돌아봄으로써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위치에서는 시기가 노년기인 것이다.
심리학적 입장에서 보면, 노년의 아픔이 크기는 하지만, 아픔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시기가 바로 노년기이다.

그러므로 지혜롭기만 하다면 노년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인의 기쁨은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일이 습관화된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노년에는 젊었을 때와 똑같은 힘이나 업적을 수행하여 만족할 만한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 이 시기에는 젊은 시절과는 다른 만족 추구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노년이 되기 전에 미리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은퇴한 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된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으므로 각자가 자기 처지에 맞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익을 위하지 않고 자기 취미를 위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극적인 노인들은 스스로 만든 새로운 일에다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다. 일은 너무 지나치지 않고 거기에서 만족을 느낄 정도면 이상적이다. 이럴 때 자기의 역할과 존엄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은 건강하다.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즐기는 동안 온몸의 세포가 왕성하게 활동하여 혈액순환을 돕는다.
이런 상태에서는 정신도 따라서 건강해진다. 일의 종류는 그것이 의무이거나 봉사이거나 간에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 준다면 어떤 것이든 좋다.
필자는 때때로 멀리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는 재미교포 노인 한 분을 생각한다. 80세를 넘은 이 노인은 매일 새벽 자루를 어깨에 메고 시가지와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길에 버려진 깡통을 줍는다. 노인은 이것을 모아 팔아 수천 불의 장학금을 한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보내고 있다. 그 분은 그 일로 자신의 삶을 즐길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는 앞으로의 새로운 계획도 많이 갖고 있다. 그 분에게서는 낡은 정신을 볼 수가 없고, 아직도 싱싱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노인이란 상대적인 말이다. 그러므로 이 분도 나이로 보면 늙었으나 정신적으로 늙지 아니한 것이다.

3. 노인들의 친구되어 주기
1) 사랑의 영양분
현대화,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노인들은 비교적 행복했다. 그 시대의 노인들에겐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다. 자식들이 옆에 있었고, 언제나 품에 안을 수 있는 손자들이 있었다. 집만 나서면 마음이 통하는 이웃들이 있었다. 가난한 것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만남에서 오는 사랑의 영양 부족은 느끼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어려운 시대를 살아 올 수 있는 정신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양분이 만남에서 오는 사랑의 영양소이기 때문이다.
현대 노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든, 아니면 식구들이나 주위 이웃들의 노력으로 인간과의 만남에서 오는 사랑의 영양을 섭취하는 길이다.
인간관계는 누구에게나 중요하지만 특히 노인에게는 절실하게 요구되는 항목이다.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데서 인간은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 반면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간관계가 상실되면 슬픔과 좌절, 또는 분노가 일어나게 되고, 이러한 정서가 지속되면 쇠약해지고 늙어가게 된다.
노인에게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정이나 교회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 노인들끼리의 모임도 좋고, 노인과 중년, 젊은이들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신앙적인 모임이나 오락, 대화의 모임도 좋다. 노인은 특별히 젊은이와 동화되기를 좋아한다. 젊은이들이 노인을 이해하고 대화에 응해 줄 수 있다면 노인에게 또 다른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 되고, 젊은이 또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2) 노인과 이야기하기
노인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거의 추억에서 힘을 얻고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인내를 가지고 그들의 추억이나 아픔을 들어주는 것이 그들을 돕는 길이다. 그 때문에 노인들이 생에 활력을 느끼게 되면 상담자 자신의 생마저 역동성을 갖게 된다. 즉, 노인을 돕는 일은 노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돕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런 진실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추억을 이야기하는 일은 누구나 즐기는 현상이지만 특히 노인에게 있어서 추억의 회상은 중요한 자산이요, 정신활동이다. 목회자나 상담자는 노인들이 이야기하는 추억의 회상에 진지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삶에 통합시키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추억의 회상은 오락과 치료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추억을 회상하는 일은 노인들에게 여러 면으로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 추억의 회상이 오락이나 치료적으로 표현될 때 일상적인 생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창의력의 가능성을 불러일으켜 노인의 생을 재생시키는 수도 있다. 노인들에게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방법으로는 자서전적 이야기나 신앙행로를 이야기하는 방법들이 있다.

3) 노인과 의미 있는 역할
노인을 노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역할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일은 노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의무감을 갖게 해서 시들어 가는 에너지를 다시 소생시키게 한다. 노년의 즐거움은 어디엔가, 누구에겐가 자기를 줄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일을 통해서 자신의 역할과 의미를 찾고, 말할 상대를 얻을 수 있다면 영적, 지적, 신체적 건강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보봐르 여사는 “늙는다는 것이 인생의 가장 안타깝고 슬픈 일이 되지 않기 위한 단 한 가지 방법은 인생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목적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노년기의 사람도 자기가 집착할 수 있는 일에 머리를 계속 사용할 수만 있다면 뇌 세포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 살아서 활동한다고 한다. 노인들에게 의미 있는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노인은 내일의 나 자신의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노년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하지만, 노인은 절대로 무시되거나 홀대를 받아서는 안될 우리 사회의 중요한 선생이고 자원이다. 노인 상담을 위해서는 상담자가 노인의 감정, 사고, 행동들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주어서 노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성장을 위해 일어서도록 해야 한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위기 19: 32).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언 16: 31

죄 책 감

1.현대목회의 방향전환
오늘 우리는 산업과학의 발달로 옛날엔 상상할 수 없었던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인간생활은 어제보다 더 풍부해지고 더 편리해지고 있다. 그런데 물질이 풍부해지고 생활이 윤택해지는 반면 인간의 마음은 더욱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물질문명과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국민이 스웨덴 국민인데 자살율이 세계 최고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질 문명의 혜택 가운데서 인간의 정신과 영은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고 있고 상상하기 힘든 상처로 시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2천년 전에는 양을 푸른 초장과 마실 물이 있는 시냇가로 인도하고 야수로부터 보호만 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양치는 방법은 첨단 과학적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그래서 양들이 병들어 죽지 않고 건강해서 생산량도 2천년 전에 비해 몇 배나 더 많다. 현대목회는 현대인의 영과 마음을 진단하고 병든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2. 죄책감과 용서
여기 한 여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여인은 한때 남편과 두 아이를 버리고 가출해서 춤바람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수개월 후에 다시 가정에 돌아와 남편의 권유에 따라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첫날 목사님의 설교에 충격을 받는다. 설교 요지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 여인의 마음은 세상에 자기 같은 큰 죄인이 없을 것 같은 생각으로 고통을 겪기 시작한다. 그 다음 예배에서도 목사님은 죄짓지 말라는 강경한 표현에 이 여인이 더욱 갈등을 느끼게 된다.

이 여인은 어느 날 자기가 어쩌다가 이런 큰 죄인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다가 자기를 타락으로 몰고 간 남자의 유혹적인 말 한마디가 생각났다. 그 남자의 유혹이 자기 자신의 미끈하게 잘 생긴 다리 칭찬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다리를 저주하기 시작한다.
어린아이가 집에서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부모로부터 벌을 받은 후에야 안심하듯이 인간이 죄책감을 느낄 때도 거기에 상응한 벌을 받고자 하는 이상한 심리가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 있다.
이 여인이 자신을 엄청난 죄악의 소굴로 빠뜨린 첫 원인을 자신의 다리가 제공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다리에게 전가하는 듯한 미숙한 분노가 다리에게 쏟아진다.
그런데 자신의 다리를 저주하면서 두들기기를 십 여일 동안 했을 때, 어느 날 새벽 이 여인은 하반신이 마비가 되어 있었다. 그 날부터 이 여인은 병원과 한의원 치료를 두 달 이상 계속 받았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이 여인이 하는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치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어느 목사님은 이 여인이 자신의 다리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심한 죄책감으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가 왔다고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데 그것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용서함을 받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목사님은 먼저 이 여인에게 사랑의 하나님과 용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인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을 다 털어놓고 고백하며 회개하게 했고, 목사님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용서와 사죄의 기도를 한다. 물론 이 치유작업은 3주일 동안 연속으로 행해진 일이었다. 목사님은 그 여인으로 하여금 여인의 삶에서 흐트러진 모든 관계를 정리하도록 도와주었다. 놀라웁게도 3주일이 지난 어느 날부터 여인의 다리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걷게 되어 지금은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


3. 인간 삶의 전체를 통찰하는 안목
여기에서 이 여인의 병의 뿌리는 죄책감이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진다. 병의 근원이 죄라고 할 때, 이 죄를 용서함 받도록 중재하고 기도해 줄 수 있는 특별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목회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경우의 환자가 극소수일 것이라고 단정할지 모른다.
미국 의학 연구팀의 연구 보고에 따르면 신체적인 문제로 의사를 찾는 환자들 가운데 50-75%가 신체적 문제와 함께 영적 이상 증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팀의 한 의사는 자기를 찾아온 환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의사의 도움보다는 목사의 도움을 훨씬 더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서 환자들이 말하는 신체증상을 자세히 들어보면 환자 자신의 삶 전체를 도와 줄 수 있는 어떤 사람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심리학자이자 치료자이기도 했던 C.G.Jung이 죽기 2년 전 영국 BBC방송국에 나가 고백한 바에 의하면, 비록 그가 치료한 환자들이 중년층 이상의 사람들이었거나 정신적인 환자였다고 해도 Jung 자신이 치료한 환자들 치고 영적인 장애가 병의 근원이 아닌 환자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환자의 영적인 장애를 바르게 도와 줄 때 회복 안 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인간의 영적인 차원과 정신적 신체적 차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목회자는 인간의 병과 치유에 대해서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치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한 마디로 치유는 거의 모든 교회에서 경시되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 인간은 병에 시달리게 되는가? 어떤 환경에서 병은 활기를 띄게 되는 것인가? 인간의 삶이 상처를 입고 인간의 삶이 파괴될 때 병은 뿌리를 내리게 되고, 싹 트게 된다. 그래서 한 사람이 병을 앓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체적 조건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병들 수가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병들 수 있는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활력이 없어지면 병들게 된다. 인간은 그의 가치관에 있어서도 병들 수가 있는데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이다. 가족도, 교회도, 도시도, 국가도 모두가 병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의 병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 제도가 병들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발생할 증상일 수가 있는가 하면, 한 나라의 병은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환경이 오염될 때 파생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모든 창조세계는 치유 받고 구원받기를 바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병이란 깨어지고, 상처받고, 분열되어진 상태를 나타내는 언어이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창조질서의 기능에 이상이 왔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도 혈관 파열, 골절, 장 파열 같은 상호유대 관계의 파열을 병으로 보고 있고 인격 분열도 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병적 현상은 사회 유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두 동강난 조국, 분열된 사회, 인종분규, 지방싸움은 모두가 깨어지고 분열된 상태의 병명이다.
성서에는 언제나 죄를 설명하는데 분열의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떠나는 것,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는 것, 또 세상이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것 등이 좋은 예이다.

다시 말해서 병이란 어디에서 일어나든지 상처와 분열과 유대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살아 있는 생명체에 나타나는 위와 같은 현상을 질병이라 하는데, 다만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분열과 파괴라는 현상이라면 치유하는 데 있어서도 서로를 함께 묶어주는 전인치유의 처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나타나는 질병 자체가 나 자신의 부조화를 일깨워 주는 신호로 작용할 때 나의 질병은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가 있다. 여러 가지 요소가 연합상호작용을 통해서 유지되어지는 내가 생명체계 어느 한 요소 이상으로 질병이 나타나고 있음을 자각한다면 이것은 치유의 중요한 핵심점일 수 있다.

치유의 목표는 전인건강이요, 전인건강이 추구하는 목표는 구원이다. 그래서 건강과 구원은 하나님에게 치유의 뿌리를 두고 있는 전인건강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치유는 대부분 육신의 치유였지만 이런 육체적 치유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표현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치유와 구원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치유가 하나님의 구원행위로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복음서는 예수의 치유행위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말씀선포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치유행위 자체가 구원행위임을 의미하고 있다.

위와 같은 구원의 절정이자 치유의 극치를 나타내는 행위가 바로 십자가상의 예수였다. 십자가는 파괴와 죽음의 세력이 판을 치고 있던 사탄의 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십자가상의 예수의 죽음은 이 세계를 치유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고, 이 역사적 치유는 바로 이 세계를 구속시키는 구원의 행위였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치유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십자가상의 치유는 승리와 영과의 신호가 아니라 겸손과 고통의 신호였는데, 이것은 우리의 고통과 질병과 사람 가운데서 온전한 승리를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치유였다.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이 죽음의 상황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전인치유- 전인건강- 전인 구원의 상징이다. 부활은 패배- 병을 넘어서는 승리의 사건이다. 여기에서 십자가상의 수난을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이 사망의 마지막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임을 알려주고 있다. 영원한 생명은 죽음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하나님의 품 안에서 전인적인 삶을 서서히 살아가면서 성장해 가는 삶이다.

치유목회란 한 인간의 육신적인 질병 자체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질병은 그 사람의 삶 전체의 균형이 어디에선가 파괴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가 있다면 그는 그의 삶을 여러 가지로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지해가고 있다. 그의 육신 자체도 수천 가지 요소들이 서로 밀접한 유대관계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고, 대외적인 삶 자체도 가족, 동료, 사회, 국가, 자연과의 여러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목회자가 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한다는 것은 그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일인데, 이것은 바로 인간 구원행위 그 자체이다. 이런 치유이자 구원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환자를 관찰하기보다는 그가 살고 있는 그리고 관계를 맺고 있는 삶 전체를 통찰할 수 있을 때 전인구원- 전인건강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폴 투르니에는 인간에게는 영적인 세계와 육신적 세계가 있는데, 의학은 육신적 세계만 치유한다고 보고 이런 치유는 부분적인 치유라고 단정하고 있다.


위기상담과 목회

1, 미래의 꿈을 앉고 사는 인간
인간은 누구나 꿈과 소망을 가지고 산다. 갓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는 서로의 사랑과 충성의 서약이 죽는 날까지 변치 않기를 바라고, 공부하는 학생은 자신의 앞날에 펼쳐질 찬란한 미래를 내다보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동네 구멍가게 주인도 하늘 끝까지 닿을 수많은 꿈들을 안고 있다. 개척교회를 세우는 목사님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언젠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예배 드리는 그 날을 소망하면서 교회를 시작한다.

2, 좌절의 아픔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약속이 깨어지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산산조각나 버리는 뼈아픈 경험을 할 때도 생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심한 충격과 함께 마음의 아픔을 겪는다.
인생이란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 사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망의 빛이 꺼져 갈 때 절망이 싹트게 되고, 소망의 빛이 완전히 꺼져 버리면 지옥을 맛보게 된다.
인생을 사노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고난의 순간을 수없이 경험하게 된다. 이런 고난의 광풍에 잘 적응하면 살아 남지만 적응에 실패하면 파멸될 수밖에 없다. 고난의 광풍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어둡고 그 민족의 미래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3, 고통은 인간을 성장시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겪지 않고 성장한 인격자나 고난을 모르는 역사의 발전은 결코 상상할 수가 없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인생들과 역사에서 부활의 꽃을 피우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고난을 통해서 부활의 승리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순간을 건전하게 처리하는 자만이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퇴보적이고 방어적인 성격만을 형성하게 된다. 고통의 위기를 언제나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고, 고통의 경험을 성장과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즉, 고통의 경험이 인격을 발전시킬 수도 있고 저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고통이 주는 교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용하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득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하고 아끼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누구나 애통한 마음을 느낀다. 이때 애통하는 마음이 건전하게 처리되면 생은 더 깊은 심오한 성장을 가져 올 수 있으나, 이 마음이 병적으로 진행된다면 실망과 좌절과 퇴보의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위기에 직면할 때, 우리의 신앙과 가치관은 위기를 처리하는 무기가 된다. 한 인간이 고난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그로 하여금 고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면 그에게 성장의 계기까지도 마련해 주는 것이다.

4, 위기상담의 접근
위기상담이란 인생의 거센 파도를 만나 조난을 당한 사람들이 소망을 잃고 아파할 때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상담이다. 아무리 조난자들의 상처가 깊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고 세상을 향해 다시 일어서게 하는 상담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기능 할 수 있도록 돕는 상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자연의 파도는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인생의 파도는 육안만으로는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생의 파도는 영적인 눈을 통해서 조난자의 내면의 아픔을 꿰뚫어 볼 때에만 드러나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난의 위기를 만나면 정상의 궤도를 벗어난 사고와 행동양식을 봅니다. 이런 태도는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갈등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부딪치기 시작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동선 폭이 넓게 확대된다. 내적으로 위기를 느끼는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속담에, ‘남대문에서 뺨 맞고 동대문에서 화풀이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현상은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어려운 위기에 처한 사람은 정신기능에 이상이 오기 쉬운데, 그때는 충동적이면서도 신경질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때, 분노의 감정을 혼자서 조용히 처리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태도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멍들게 하고 서서히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렇듯 한 사람에게 불어닥친 파도는 주위 사람들에게 파급되는데, 특히 교회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위기의 여파가 여러 방면에서 세차게 불어닥치는 곳이다. 분노와 좌절과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그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5, 위기상담과 목회
목회자는 고난을 당한 신도를 찾아가서 도와야 할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가족에게 생명이 위급하다는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았을 때, 또는 가까운 친척이 죽거나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교인들은 자기들이 제일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 도움 받기를 원한다.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다.
또 위기의 심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분쟁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교회 분쟁을 깊이 연구해 온 맥스웨인 교수는, 교회 갈등이나 분쟁의 원인을 찾으려면, 분쟁의 주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는 문제 그 자체보다는 분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위기상황과 그로 인해 생기는 위기심리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즉, 교회의 분쟁이나 갈등을 해결하려면 먼저 그들이 위기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해 준 다음에 교회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안정된 마음의 소유자는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이 문제가 교회와 사회에 미칠 영향까지를 고려하는 이성을 갖추고 있으나, 반면에 자신이나 가정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은 문제를 신중하고 건전하게 대처하기가 어렵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교회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갈등의 문제는 교인들의 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얼마나 위기로부터 받은 교인들의 상처를 잘 치유해 주느냐에 따라서 문제를 해결 할 수도 있고 더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이 겪고 있는 위기를 등한시할 경우, 교인들의 상처는 점점 심해지고 결국엔 치유가 불가능해진다. 교회에 어떤 말썽의 소지가 있는 문제가 발생하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그 문제를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경향이 있다. 이들 중에도 물론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잘 처리하고 건전하게 대처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은 흔치 않다.

K씨는 성실한 교인이며 모범적인 가장이었다. 그의 신실한 교회 생활은 목회자들과 많은 교인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55세쯤 되었을 때에 직장에서 물러나야 되는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 전혀 예기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평생을 몸바쳐 온 직장을 그만둔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에게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내에 대한 불평이 잦아지고 아이들에게 잔소리가 심해졌다. 그 결과 가족들과의 관계가 서먹해지고 온 집안에 긴장과 불안이 가득했다. 이 파도는 그의 가정을 넘어서 교회로 자연스럽게 넘쳐들었다. 그전 같으면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 갈 수 있는 일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500여 명의 신도들 가운데서 K씨에게 동조하는 그룹이 형성되었고, 교회는 2년이 넘도록 치열한 싸움 속에 휘말렸다. 재미있는 사실은, K씨에게 동조해서 싸움을 주도했던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거의가 적게든 크게든 인생의 파도를 만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때 목회자가 K씨의 위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사태를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위기가 K씨 자신에게도 새로운 영적인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K씨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면 건전한 측면에서 교회 전체에 미칠 영향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조그마한 물구멍 하나를 막지 못했기 때문에, 주먹으로 막을 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고 목회자와 전 교인이 함께 위기의 홍수에 휘말리고 말았던 것이다.

롤로 메이는, “한 사람이 고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물이 가득히 담겨 있는 큰 저수지에 비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저수지의 둑이 무너져 많은 물이 범람한다면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지만, 이 물을 수력발전용으로 이용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줄 수 있게 된다. 이 얘기는 K씨뿐만 아니라 인생의 광풍노도와 같은 위기를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함께 적용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위기와 교인들의 위기를 정확히 꿰뚫어볼 줄 아는 통찰력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위기의 파도는 교인들에게만 불어오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 자신도 쉴새 없이 위기를 겪으며 살아간다. 목회자 자신의 위기가 원인이 되어서 교회문제가 심각해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목회자가 자신의 위기를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모를 때 쉽게 위기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려들게 되는 경우를 목회자 위기 연구가인 하트는 지적하고 있다.
목회자의 고독한 인간관계나 설교, 심방, 상담, 행정에 대한 과중한 부담과 24시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목회자의 생활은 언제든 위기의 광풍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

1, 삶을 괴롭히는 마음의 상처
나이 서른 다섯 살인 김 집사는 오랫동안 열등감과 좌절감에 시달려 왔습니다. 필자가 김 집사를 만났을 때 그는 자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외가의 도움으로 좋은 직장을 세 곳이나 들어갔었지만 한 달을 못 채우고 나와야 했습니다. 이유는 직장 상사와의 싸움 때문이었습니다. 직장 상사의 가벼운 꾸중에도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김 집사를 용납해 줄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의 과격한 분노는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건강한 사람과 병적인 사람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면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화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병적인 사람은 자신의 화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병적인 사람은 화가 일단 발동하면 화에 끌려 다니면서 시달림을 받습니다. 누구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이 김 집사는 병적인 사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미움의 원인과 치유
무엇이 김 집사로 하여금 그렇게 발작적으로 화를 내게 하고 그로 인해 죽음까지 생각하게 하는가? 그 원인은 김 집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성적통지표를 받아오는 날이면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아야 했고 저녁을 굶어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구타와 욕설은 어린 아들의 성적을 더욱 떨어뜨렸고 이를 본 아버지는 미친 듯이 아들을 괴롭혔습니다. 초등학교 3년 반 동안 아버지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른 다섯의 나이로 접어들었는데도 김 집사를 떠나지 않고 괴롭혔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는 김집사에게 몇 가지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첫째, 어른들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깊이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는 극심한 열등감에 사로 잡히게 했습니다.

필자가 내적 치유 그룹에서 김 집사에게 시도했던 방법은 먼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맺힌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일이었습니다. 상당히 긴 시간이었지만 김집사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감정을 상당히 밖으로 내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어린시절로 돌아가 아버지로부터 고통 당하고 있는 자신과 예수님이 함께 만나도록 도왔습니다. 그 다음 김집사로 하여금 돌아가신 아버지를 상상 속에서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도록 했습니다. 물론 김집사가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십 오명의 형제 자매들이 함께 아파하고 울면서 기도하고 찬양했던 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김집사는 자신의 아픔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변화의 삶이 싹을 트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라 설교한 바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확신이 없는 자는 불안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불안은 만병의 근원임을 내다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절망을 느낄 때 위의 소화 활동을 돕는 염산과 펩신을 분비시키지 못 한다고 합니다. 염산과 펩신의 적당한 활동은 위 속의 음식물들을 부패되지 않게 하는 작용을 하는데, 절망과 불안이 있는 사람의 위에서는 이러한 활동이 둔화된다고 합니다. 이럴 때 위에 있는 내용물이 부패를 일으키게 되어 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반면 누군가에 대한 미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위장은 붉게 변한다고 합니다. 절망의 감정일 때 염산과 펩신이 잘 나오지 않는 반면, 미움의 감정이 일어나게 되면 염산과 펩신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위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때 위 속의 염산을 빼어내서 여러 겹 쌓은 천 위에 떨어뜨리면 순식간에 구멍을 뚫어버릴 정도로 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위에 관계된 질병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화해와 용서
필자가 켄터키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상담공부 할 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부부가 이혼을 하면서 하나 있는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헤어졌습니다. 아이는 6살 때 부터 양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불행히도 양부모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에게 매를 때리고 심지어는 가두어 놓고 하루 이틀씩이나 팽개쳐 둔 채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는 양부모에게 학대를 받는 날이면 자기를 버리고 떠난 부모가 더욱 더 원망스러워 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는 그 집을 뛰쳐나왔고 12살부터는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습니다. 자신을 버린 친부모를 찾아 복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가슴 깊이 사무친 원한은 드디어 아이가 청년이 되었을 때 위병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급기야는 위를 절단하게 되었고 수술결과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퇴원을 한 후 8개월 만에 청년은 다시 위 통증으로 입원하게 됩니다. 그나마 남은 위가 만신창이가 되어 남은 위의 절반마저 다시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청년의 수술을 앞두고 몇 명의 의사들이 의논한 결과 또 한번의 수술로 이 청년의 위병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청년의 위병은 이제 수술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정신과적 치료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에 원목실에서 치료를 담당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통한 치유의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상담한 결과 이 청년의 병은 자신을 져버린 부모에 대한 원한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완치를 위해서는 이 청년이 친부모에게 가지고 있는 분노를 없애야 했습니다. 병원에서 수소문 끝에 찾고 보니 아버지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와 아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져는데 처음 며칠간은 이 아들이 어머니를 쳐다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울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냉랭하게 어머니를 대하던 아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약간씩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용서하면서 화해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지난 후 이 청년의 위는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위 벽을 손상시키던 강한 산성의 소화액이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위는 스스로 치유의 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일 또 한번의 절단 수술을 했다면 음식물을 소화시킬 위가 없어서 얼마 살지 못했겠지만, 어머니와의 화해를 통해 내적치유가 이루어진 이 청년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만남이 한 청년에게 삶의 의미를 준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 보았고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적치유의 보약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보약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셨고 지금도 치유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깨어진 마음을 하나로


내적치유

1, 5년 6개월 공부가 헛수고가 될 위기!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한국의 상담분야에서도 신앙적 치유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 끝에 목회 상담을 전공으로 정했고 그때 전공 지도교수는 발톤(Clarence Barton)이라는 좀 까다롭지만 유명한 조 교수였습니다. 상담학 교수를 시작한지 5년 6개월째 되던 날, 그 노교수는 나를 불렀습니다.“태기! 너를 사랑해서 하는 얘기니까 잘 들어. 내가 너를 5년 6개월 동안 지켜보았는데. 너는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목회상담을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지지 못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머리를 쓰는 이론 학문으로 바꿔보도록 해!”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6년이란 세월동안 어떻게 한 공부인데 그 공부를 그만두고 전공을 바꾸라니…‘눈앞이 노래졌다’는 말이 그토록 실감될 수 없었습니다. 염치를 차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나는 교수님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애원했습니다.“교수님, 한 학기만 도와주세요. 한 학기만 도와주시면 제가 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드리겠습니다.”얼마나 애처롭게 교수님의 손을 잡고 사정을 했던지, 교수님은‘O. K’하면서‘6개월간의 말미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날 날짜까지도 기억합니다. 1월 8일… 그리곤 봄 학기가 끝나는 6월 2일 오후 2시 30분에 교수님과의 약속을 수첩에 기입했습니다. 나는 제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죽기살기로 최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이윽고 시간은 흘러 한 학기를 치는 6월 2일이 돌아왔습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2시30분에 목조 건물에 위치한 교수님의 연구실로 찾아갔습니다. 교수님은 문 어귀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내 손을 이끌어 의자로 앉힌 다음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한참이나 나를 보시던 교수님은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법정에서 언도를 기다리는 피고인의 심정이었다 할까요? 어렵사리 입을 여신 교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지난번과 다를 바 없는‘사형언도’의 소리였습니다.“태기, 내가 너를 사랑해서 하는 얘기야 잘 들어, 내가 만 6년을 널 주시해 보았지만, 너에게는 인간의 마음을 치유할 자격이 보이지 않아. 영혼을 치유할 자격이 없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론적인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고,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느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왜 내가 상담자의 자격이 없다고 그러는 것일까?”그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텐데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오히려 오기로 변해 버렸습니다. 나는“O. K”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서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연구실을 나왔는데, 교수실의 문을 얼마나 쎄게 닫았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벼락치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2층의 모든 연구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와 구경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 학교와는 끝장이란 생각을 하고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태도로 2층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정말 이제 와서 상담을 포기해야 한다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버텨온 세월인데…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가지고 간신히 난간을 손으로 틀어잡고 한발 한발 내려왔습니다. 그때 등뒤에서 나를 만지는 어떤 손길이 있었습니다. 힘없이 뒤를 돌아다보니, 나에게 상담을 그만 두라던 그 노교수님 이었습니다.

2, 속과 겉이 다른 마음
그 교수님은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뜻하지 않았던 말을 나에게 던졌습니다.“태기, 이제서야 목회상담을 공부할 수 있는 싹이 조금 보이는 것 같아!”이 양반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기술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언제는 상담할 자격이 없다고 하더니 금방 돌변해서 이제는 또‘싹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때까지도 그 노교수가 왜 이러한 행동을 보였는지, 왜 상담할 자격이 없다고 했으며, 또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서 이제는‘싹이 보인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교수님은 나의 손을 이끌고 다시 연구실로 데려 갔습니다.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나에게 그러한 행동을 하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너 한국에 가서 목회하고 싶다 그랬지? 그런데 거기서 신앙의 치유를 가르치는 설교해야 할 네 마음이 나는 전혀 마음에 들지를 않았어! 나는 6년 동안 너의 마음을 지켜보았어! 나는 38년동안 이곳에서 세계적 지도자와 영적 지도자를 길러낸 사람이야! 나는 네 마음을 알아, 너는 매 주일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지만 네 속마음은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했고, 심지어 주먹까지 오락가락 했다는 것을 나는 알아!”사실 그랬습니다. 얼마나 고된 훈련을 시키는지. 너무나도 고달펐습니다. 그 노교수가 미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나는 만날 때마다 속으로는 주먹질을 해대면서도, 그 속마음을 숨기고 얼굴은 항상“헤∼”하고 웃는 표정을 짓고 있더라는 것입니다.“마음이 두 개인 놈이 인간의 영을 치유하는 공부를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은 지식에 의해 변화되는 존재가 아니야! 너 나에게 지식 배우러 왔어? 나는 지식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야, 지식 가지고는 인간의 인격이 변하지 않아!”참으로 가슴을 치는 말씀이었습니다.

3, 마음이 청결한자는...하나가 된다.
나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뒤 교수님은 여름방학 동안에 할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장 8절을 주제로 소 논문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짧은 구절 하나가 어찌 논문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마냥 의아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최선을 다해야 하는 나로서는 도서관에 가서 이에 해당하는 문헌을 모조리 찾아보았습니다. 방대한 양의 참고서를 앞에 도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공부한 나는 교수님이 이 글을 쓰게 하신 의도를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람어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아람어의 정확한 뜻은‘마음이 하나인 사람은 복이 있어서 저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마음이 하나인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 안에 그가 있기에 그가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되는 것, 그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둘로 갈라지면 능력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마음이 네 개로 갈라지면 다시 1/4로 약화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10개로 갈라지면, 1/10. 30개면 1/30로… 그렇게 갈라지고 갈라지다가 결국 그 마음의 모든 기능을 잃어버린 경우, 우리는 그것을 정신 분열증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그때서야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임상목회, 그리고 상담이라는 것은 결국 깨어진 마음,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치유목회란 하나님 앞에 분열된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과 한 마음으로 연합하는 일을 돕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끗한 마음은 하나의 마음이요, 하나의 동일 된 마음은 비어있는 마음입니다. 내 욕심과 내 의지가 주인이 되기를 포기하는 마음이요, 새로운 내 의지가 주인이 되기를 포기하는 마음이요, 새로운 주인이 들어와서 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기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해 문을 열어놓고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치유목회 상담이란 마음을 청소해 주는 일입니다. 욕심과 미움과 상처로 얼룩지고 분열되어 있는 마음을 사랑의 기쁨으로 깨끗하게 씻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청소되어진 마음 한 가운데서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일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지는 순간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현상을 내 안에 그가 잇고 그 안에 내가 있는 연합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치유 목회상담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위기

1. 들어가는 말
가족이라는 집단이 함께 살아가는 데는 좋은 일도 있겠지만 어려운 일도 만나도록 되어 있다. 한 마디로 어느 가족이든지 여러 종류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어떤 가족은 위기에 무난히 극복하고 위기 이전보다 더욱 건전하게 성숙하는가 하면 어떤 가족은 위기에 휘말려 퇴보하는 경우를 본다. 쉬운 예로 요즘 명퇴 또는 실직 된 가정은 모두가 위기라는 태풍을 만나고 있다. 어떤 가정은 이와 같은 위기를 통해 더욱 결속이 되고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가 하면, 어떤 가정은 부부싸움이 계속 되다가 끝내는 이혼으로 치닫는 예를 본다.
필자는 이 글에서 가족에게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 무엇이며, 위기라는 태풍을 만났을 때 식구들의 심리는 어떻게 진전되고, 이런 가족 위기 극복 방법은 무엇인가를 간단하게 기술해 보려고 한다.

2. 가족 위기 요인
1) 내적 요인
독감이 유행할 때 감기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며칠 앓다가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독감 바이러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위기도 마찬가지이다. 가장의 실직이라는 위기를 만난 가족이 수없이 많은데 어떤 가족은 가족 분열증상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떤 가족은 한동안 고통을 겪다가 일어서는 경우도 있고, 어떤 가족은 다른 어떤 일을 찾아 나서고 있다. 질병에서도 저항력이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듯이, 위기에도 저항력이 강한 가족이 있고 위기 저항력이 약한 가족이 있다. 무엇이 가족의 위기를 강하게 하거나 약하게 하는 것일까?
가족간의 만남의 기회가 많은 가족은 위기 저항력이 강하다. 반대로 가족간에 서로 만나는 기회가 약하거나 없는 가족은 위기 저항력이 약하다. 위기 저항력이 약하다는 것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력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섭취해야 하는 영양소가 있다. 신체적 건강을 위해서는 음식물로부터의 영양소가 필요하지만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는 가족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사랑의 영양소가 필요하다. 사람은 음식물을 어느 기간 동안 섭취 못해도 죽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사랑의 영양소를 섭취 못해도 병들어 죽는다. 사랑의 영양소는 정신건강의 필수 요소이자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는 기본 요소이다. 가족 서로가 깊은 만남을 통해서 전달되는 사랑의 영양소를 충분히 저장하고 있지 못한 가족은 조그마한 위기 앞에서도 심한 타격을 받는다. 사소한 위기조차도 이겨낼 수 있는 저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족 식구들의 서로 밀접한 만남을 통해서 사랑의 영양분을 충분히 저장하고 있는 가족은 어떤 위기 앞에서도 쓰러지는 법이 없다. 위기를 견디어낼 수 있는 충분한 저항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걱정되는 것은 대부분의 현대 한국 가족이 위기 저항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유는 가족간의 깊은 만남이 약하기 때문이다.
한국 가족처럼 자식 사랑하는 사람들도 드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도 요즈음 우리 주위 가정을 둘러보면 가족들끼리 얼굴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가족을 보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인간 서로간에 사랑의 영양분이 가장 쉽게 전달되는 방법은 서로가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을 마주보며 마음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 식구들끼리 이런 깊은 만남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가?
우선 부모는 일이 바쁘고, 아이들은 학교 공부와 과외공부에 정신이 없다. 오랜만에 식구들끼리 주말에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온 식구들은 TV라는 위력 앞에서 중요한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의식주는 문제가 없어 신체적으로는 옛날에 비해 월등히 좋아졌는데도 정신력은 옛날에 비해 훨씬 약해져 버린 것은 바로 가정에서 식구들끼리의 만남이 멀어져버린 것이다. 식구들간에 깊은 만남의 대화가 없는 이상 가족에게 밀려오는 어려움을 극복하기란 어렵다.

2) 외적 요인
한 가족에게 위기의 태풍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어닥칠 수 있다. IMF로 말미암아 가장이 실직을 하면 곧 경제적으로 위기가 온다. 한 달에 필요한 만큼의 재정이 공급되지 않으면 사람은 생계 유지의 위기 의식을 느낀다. 어떤 가족은 가장이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부도를 냈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빚 독촉을 받는다. 이런 경우 온 식구가 위기 태풍에 휘말리게 된다. 어떤 가족은 식구 중의 한 명이 중대한 병으로 입원했을 경우 위기를 느끼고, 또 어떤 가족은 식구 중의 한 명이 가출했을 때도 가족 전체가 위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외에도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를 한 사람을 식구로 두고 있을 때 온 가족들은 위기의 여파에 시달리는가 하면 예기치 않은 사고가 가족 식구들에게 발생했을 때도 가족은 위기를 느끼도록 되어 있다.

3. 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심리현상
가족에게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먼저 나타나는 심리현상은 이성기능의 약화이다. 이성의 기능은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로 말미암아 이성의 기능이 약화되면 대화의 기능도 함께 약화되어 대인관계에 이상이 나타나고,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
위기 처음에 오는 충격이 지속되는 동안은 사리를 분별한 후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적인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특별히 가족간의 깊은 만남에서 오는 사랑의 영양소가 부족한 사람은 충격상태에서 나타나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 만일 남편이 충격상태에 있다면 집안 식구들은 모두가 한 사람의 충동적인 행동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충격 상태에 있는 가족에게 위험한 유혹이 올 수 있는데 그것은 죽음에의 매력이다. 앞길이 꽉 막혀 버린 것 같은 위기 속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자살의 선택이다.
다음으로 충격 상태가 지나면 갈등과 고통의 심리에 접어들게 된다. 이때 위기 당사자는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밖으로 들어내 발산한다. 어떤 사람은 울음으로, 어떤 사람은 한숨으로, 어떤 사람은 아우성으로, 어떤 사람은 불평불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이때 가장 이상적인 위기 대처방법은 기도로, 찬송으로, 상담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다. 가족 식구들간에 깊은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가족 누군가 위기에 처해도 식구들과 대화로 감정을 다 풀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가족 식구들간에 사랑의 대화관계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불만스런 감정을 가장 가까운 가족 식구들에게 표출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 감정으로 인해 온 가족이 위기의 태풍에 휘말리고 만다.

4. 가족 위기 극복방법
먼저 가족이 위기에 처해 있든지 아니면 아무 문제가 없든지 간에 어느 가족이든 먼저 시도해야 할 일은 가족 식구들간의 심도 있는 만남을 갖는 것이다.
직장 일이 아무리 바쁘고 아이들 공부가 아무리 중요해도 온 가족이 함께 얼굴을 맞대고 눈을 마주 보며 마음을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가족간의 심도 있는 대화는 위기 극복의 필수조건이다. 가족들간의 만남을 무시하고 제3의 방법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가족이 나에게 사랑의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기만 하면 나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상담과정에서 자살을 결심한 명퇴자가 식구들의 정성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명퇴를 하게 되면 일단은 명퇴자 자신이 제일 큰 위기의 충격을 받게 된다. 아내와 아들딸이 받는 위기는 아빠보다는 덜하다. 이때 위기를 느끼는 식구들이 아빠 생일날 아빠를 조용한 음식점으로 불러내 생일 선물을 건넨다. 그런데 그 생일 선물이 아빠의 좋은 점과 고마운 점을 아빠 나이 숫자만큼 쓴 종이 두루마리였다. 먼저 아내가 준 선물을 읽고 얼굴이 상기가 된 아빠는 두 번째 딸이 건네준 선물을 읽을 때는 눈물을 흘렸고, 마지막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의 생일 선물을 채 다 읽지도 못하고 식탁을 치면서 통곡을 터트렸다. 울다가 눈물을 닦은 아빠는 가족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빠는 이제 포장마차라도 할 수 있다.”
위기를 다 극복한 후 아빠는 가족의 생일 선물을 읽기 전까지는 자살을 자기의 최후 수단으로 결심하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가족 위기 극복의 묘약은 가족 식구들끼리 주고받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식구들끼리 모여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의 시간에서 온다. 사랑을 주고받는 대화는 나의 주장을 가족에게 강요할 때는 이루어질 수 없다. 가족들의 아픔과 기쁨, 화남과 무서움의 감정을 내가 알아준다고 하는 말을 건낼 때 사랑의 대화는 가능해진다. 엄마의 행동에 딸이 화가 나 있을 때 엄마가 “너 엄마 때문에 화난 것 엄마가 다 알아.”라고 말할 때 딸은 엄마로부터 소나기 같은 사랑의 영양분을 받는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조시대 천냥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액수였다. 그러니까 이 속담은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위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 가운데 어느 누가 위기를 직접 당했을 경우 나머지 식구들이 그의 아픔을 이해해 주는 천냥 값어치의 말을 몇 마디만 던wu 준다면 그는 위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위기에서 벗어나면 나머지 가족들도 위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
다음으로 가족 전체 아니면 가족 어느 한 식구에게 위기가 올 경우 가족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누구나 먼저 충격을 경험하게 되고 충격은 위기 당사자의 이성 기능을 흐리게 하고 분별 능력을 약화시키며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한다는 것이다. 충격 상태가 지나면 위기 당사자는 어린아이처럼 짜증과 분노의 감정을 표출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 경우 식구들은 위기 당사자로부터 억울한 마음의 상처를 입을 가능이 있다는 것도 미리 예측하고 있어야 한다. 이때 가족은 위기 당사자를 일시적인 환자로 이해하고 넓은 아량으로 보살펴 주어야 한다.
가장 좋은 위기 극복 방법은 가족이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친구, 그리고 상담자를 만나 위기 당사자의 감정 또는 가족 전체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정서적으로 나누고 도움을 받는 것이다.




꿈과 하나님의 음성(1)

1, 링컨과 꿈
아브라함 링컨은 저격 당하기 10일 전에 자신이 총을 맞아 죽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링컨은 꿈속에서 어떤 여인이 슬프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울음소리는 백악관의 지하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울음소리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던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보좌관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서 누군가의 관을 향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링컨이 옆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물었다. "저것은 누구의 관인가?" "대통령 각하께서 저격을 당해 돌아가셨습니다." 순간 그는 충격을 받았다. '대통령이 죽다니, 대통령이 바로 나 아닌가!' 이튿날 아침 그는 아내에게 어젯밤 꿈 얘기를 해주었다. 그의 아내는 꿈이 불길하다면서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링컨은 이 꿈을 꾼 지 10일 만에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이 꿈 이야기는 백악관 문서 보관소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2, 나의 태몽
나는 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태몽은 신비하기 그지없다. 나의 어머니도 나를 가졌을 째 태몽을 꾸셨다. 어머니는 큰 건물을 보았다고 했다. 건물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내가 그들에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더란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고향의 섬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어머니가 그렇게 큰 건물이나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태몽을 꾸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어머니는 이 태몽 이야기를 자주 얘기하셨다. 내가 안양중앙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 나는 어느 수요일 밤 설교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우리 집에 다니러 와 계셨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여 내 설교를 들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교회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내 손을 덥석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것이 니 태몽이여. 태몽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여." 본인의 이름 석 자도 못 쓰셨던 어머니가 태중에서 부터 이미 내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아셨던 것이다. 어떻게 먼 훗날 뱃속의 아이가 살아갈 모습을 미리 볼 수 있었던 것일까?

3, 의미를 담고 있는 꿈
우리는 신통한 꿈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렇다고 모든 꿈이 다 신통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꿈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 개꿈이라느니 꿈은 반대라느니 하면서 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초대 교인들은 대부분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고 이해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꿈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교회 이후 희랍철학 사상이 세계를 풍미했다. 희랍철학은 이성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점차적으로도 교회도 희랍 사상에 침투되었다. 신자들 가운데도 희랍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증가했다. 따라서 꿈의 중요성이 서야 할 자리도 점차 줄어들었다. 현대로 들어오면서 잃어버린 영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꿈에 대한 성경적 해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신앙 상담이나 목회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모든 인간은 계속적으로 꿈을 꾼다. 그리고 자신이 꾸는 꿈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의 해석에 큰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면 꿈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사례1
고양이를 싫어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 고양이가 네 발로 그녀의 한쪽 다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꿈을 꾸었다. 떼어버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고양이는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처는 입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친구가 나타나자 고양이가 달아나 버렸다. 이 여인은 지금 남편의 문제로 심각한 괴로움에 빠져 있다. 그래서 그녀는 한시 바삐 이 괴로움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한다. 이것이 여인의 현실적 상황이다. 이 경우, 고양이는 여인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는 남편을 상징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여인의 한쪽 다리를 물고 있는 고양이는 상처를 입히지 않고 달라붙어 있다가 떨어져 나갔다. 현실 상황에서 여인은 지금 남편 문제로 시달리고 있으며,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꿈을 보면 결국 고양이가 떨어져 나가고 만다. 꿈이 여인에게 머지않아 괴로운 상황에서 풀려나갈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누가 꿈을 통하여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일까? 여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 곧 영이 내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 전달 통로가 꿈이다. 그렇다고 꿈속에서 한국인에게는 한국말로, 일본인에게는 일본말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니다. 꿈에서 사용하는 말은 한 나라의 특정 언어가 아니라 국제 언어이다. 국제 언어란 바로 상징을 의미한다.

사례2
어떤 사람이 꿈에 호랑이를 만났는데 처음에는 무서워하다가 나중에는 그 호랑이를 통해 위험에서 구출되었다. 이 경우, 꿈을 꾼 사람은 누군가 두려운 사람을 만나고 있거나 곤란한 사건에 부딪쳐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꿈은 시간이 지나면 이 불길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그를 위험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호랑이는 두려운 사람이나 사건을 나타내 주는 상징이다. 그러므로 꿈속에서 나타나는 사람이나 사물이 실제의 생활에서는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사례3
어떤 사람이 지하실에 수백 마리의 어미 쥐와 새끼 쥐들이 들끓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는 그 쥐들을 하수구에 깨끗이 쓸어 넣고는 꿈에서 깨었다. 이 사람은 지금 많은 문제들로 시달림을 받고 있다. 쥐들은 이 사람이 시달리고 있는 문제를 나타낸다. 이 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쥐를 보고 놀란 나머지 도망가지 않고 하수구에 몽땅 쓸어 넣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지만 이 문제들을 무난히 해결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그의 영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즉, '결국 너는 문제를 잘 해결할 것이니 크게 염려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례4
바빌로니아 왕아 꿈을 꾸었다. 직접 그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내가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머릿속에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굉장히 큰 나무 하나가 세상 복판에 서 있는데 너무도 우람해서 키가 하늘까지 닿았다. 잎사귀들은 싱싱했고, 열매는 세상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이 열려 있었다. 들짐승들이 그 그늘 밑으로 찾아들었고, 공중의 새들이 그 나뭇가지에 깃 들었으며, 온 세상 사람들이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고 지냈다. 내가 자리에 누워서 이런 것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하늘에서 감독원 하나가 내려오더니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이 나무를 찍어라, 가지는 잘라 내고, 잎은 흩뜨리고, 과일은 따 버려라. 짐승들로 하여금 그 밑을 떠나게 하고 새들로 가지를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등걸과 뿌리만은 뽑지 말아라. 쇠사슬, 놋 사슬로 묶어 풀밭에 내버려두어라.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을 몸에 적시고 짐승들과 어울려 풀이나 뜯게 내버려두어라. 사람은 정신을 잃고 짐승처럼 생활하면서 일곱 해를 지내야 하리라. 이것은 감독원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포고이다. 거룩한 이들의 명령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인간 왕국을 다스리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란 것을 살아 이는 자들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좋게 보시고 그런 사람들을 높은 자리에 앉히시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신다.'

왕은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이때 그곳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다니엘이 이것을 정확하게 해석해 주었다. "꿈은 우선 느부갓네살 왕이 그 나무처럼 위대하고 세력이 크게 되리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왕은 스스로를 그 세력의 주권자로 생각했습니다. 신적인 특권과 신의 역할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알고 방자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내리치실 것입니다. 그 꿈은 왕의 오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오니 왕이 만일 그 경고를 마음에 두지 않으신다면 미쳐버리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렇게 꿈을 해석하면서 왕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의 삶을 변화시키라고 간했다. "그리하면 길이 태평성대를 누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다니엘의 충고를 무시해 버렸다. 그래서 왕은 7년 동안이나 미쳐서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 이 이야기는 무의식의 성격을 아주 훌륭히 보여주는 실례이다.
요셉과 다니엘은 꿈속의 상징을 잘 해석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도왔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러한 능력을 갖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영이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영이 어두우면 꿈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신이 산란하거나 영이 어두워지면 꿈이 말하는 바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기 쉽다. 또한 모든 꿈이 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건강한 영을 소유한 이들의 꿈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숨어 있다.

가족화해

1, 이웃은 하나님의 선물
우리 주위에는 많은 이웃들이 있다. 이웃은 멀리 사는 피붙이보다도 실제적으로 가깝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보다 쉽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생긴 것 같다. 이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이웃과 정답게 사는 일이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다. 살다 보면 이웃이 때론 달갑지 않게 여겨질 때도 있고, 차라리 어디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싫든 좋든 우리는 이웃들과 부벼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웅다웅하며 사는 것에 지친다고 해도 무인도에 떨어져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 때문에 형무소에서도 중죄인을 독방에 격리해 두는 것이다. 공산주의 초기에, 구 소련 치하의 어느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곳에서는 죄수들을 일체의 빛이 차단된 감방에 집어넣고 외부인과의 접촉도 단절시켜 버렸다. 20일이 지나자 대부분의 죄수들이 미쳐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일 고문을 받으며 취조를 받던 죄수들은 오히려 멀쩡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절대 조건이 생물학적인 식량이 아니라는 단적인 예를 보여 준다. 홀트 아동복지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국 전쟁 당시 홀트씨가 만난 대다수의 아이들은 병이 들어 있었다. 그는 고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은 병원에 입원을 시카고, 가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데리고 살았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병원에 입원한 대다수의 아이들이 사망한 데 반해 그가 데리고 산 아이들은 오히려 건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집에 남은 아이들에게 그가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그들을 껴안아 주는 일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살갗으로 전해진 사랑이 죽음으로부터 아이들의 생명을 건진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곧 생명이다.

사랑이 생명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생명의 사건을 일키도록 우리에게 이웃을 주셨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바로 집안 식구들이다. 식구들과의 만남이 흔들리면 세상 모든 관계도 흔들리게 된다. 어떤 사회문제라도 그 원인을 따져 보면 그 배후에는 문제 가정이 있다. 그러므로 가정이 흔들리면 올바른 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 세계적인 대국인 미국이 지금 조금씩 기울어져 가고 있다. 원인은 미국의 가정들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마약국이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2, 최우선이 가족사랑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다. 자기 가족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믿음도 제대로 지켜 나가지 못한다. 우리가 이 세상과 이웃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내 가족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 사랑이 이웃사랑의 기반인 때문이다. 미국 신학교 졸업시험 때 있었다. 시험문제로 한 신문기사가 주어졌다. 어느 목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목사는 부임할 때 60명이던 교인을 4년 뒤에 300명으로 부흥시킨 목사였다. 그런데 취임 4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내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기고 가출해 버리고 없었다. "당신은 교회와 함께 사십시오. 나는 떠납니다." 이 시험문제의 출제 의도는, 그 목사가 비록 교회에서는 성공적으로 목회를 했을지라도 본질적으로 목회에 실패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 목사는 가장 귀중한 이웃인 아내에 대한 목회에 실패했던 것이다. 교인들이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겠으나 목사는 교회보다도 먼저 자신의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도 사랑할 수 없는 목사가 어찌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가족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가정이야말로 세상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3, 가정천국에서 자란 일꾼
하나님의 목적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동역자를 구하신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천국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야 한다. 인류 역사를 움직여 온 대다수는 가정에서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사람들이었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주변의 부부 관계나 자식 관계를 살펴보면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나름대로 부부 행복 정도를 진단하는 방법을 상상해 본다. 잠을 자고 있을 때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보면 부부의 정을 알 수 있다. 따뜻한 느낌이 들면 일단 안심해도 좋으나 냉랭한 느낌이 들면 위험신호로 여겨야 한다. 그런데 요즘 부부들의 잠자리에 손을 넣어보면 절반 이상은 손에 하얀 서리가 끼일 정도라고 한다. 몸은 지척에 있어도 마음은 구만리쯤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식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대부분은 부모가 죽어서 땅에 묻힌 후에야 겨우 눈물을 보이는 정도이다.

4, 나의 어머니
나 또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불효 막급한 자식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에야 나는 그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향하여 깊은 원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결혼하고 미국에 들어가서까지도 지속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몸이 약했다. 몸이 약한 나는 운동회에서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했다. 5명이 달리면 5등, 6명이 달리면 6등을 했다. 6년 동안 이런 식으로 운동회에서 꼴찌만 했다. 아니 딱 한 번 5등을 해 본 기억이 있다. 6명이 달리기를 하다가 한 아이가 넘어지는 바람에 5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 꼴찌를 하는 모습을 부모님께 들키지 않아도 되었다.

부모님이 한 번도 운동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4학년 때였던가, 하필이면 추석 다음날에 운동회가 열렸다. 생전 운동회에 구경을 오지 않던 어머니가 그 날 따라 하얀 모시 한복을 차려 입고 구경을 오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달리기에서 꼴찌하는 모습을 보아 버렸다. 어머니는 성격이 활달하고 욕심이 많은 분이었다. 무엇이든 뒤쳐지는 것은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이 꼴등하는 꼴을 어찌 볼 수 있었겠는가! 어둑어둑할 무렵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대문을 막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그때까지 마루에 장승처럼 앉아 계시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서면서 나를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꼴등하는 새끼는 내 새끼가 아니니까 나가서 죽어 벼려!" 그렇지 않아도 하루 종일 꼴등만 해서 기가 죽을 대로 죽어 있던 내 가슴에 어머니의 말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나는 정말로 죽어버리려고 한밤중까지 아무도 없는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결국 죽지는 못했지만. 5학년 때 다시 운동회 날이 돌아왔다. 운동회 날이 가까워 오자 가슴이 한없이 떨려 왔다. 나는 한 달 내내 운동회 연습을 하면서 고민했다. 매일 양잿물을 쳐다보면서 자살을 생각했다. 막상 운동회 경주가 시작되자 불안으로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날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여파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후로 히스테리 신경증을 심하게 앓았다. 히스테리 신경증이 발작을 하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온갖 화풀이를 해댔다. 중학교 시절엔 더욱 유난스레 어머니를 괴롭혔다. "내 몸이 이렇게 약해진 것은 다 어머니 때문이야. 어머니가 그때 그렇게 야단치지만 않았어도 나는 아마 운동을 좋아했을 거야. 그리고 운동을 좋아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몸이 약해지지도 않았을 거구." 나는 모든 탓을 어머니에게 돌렸다. 이 같은 나의 앙탈에도 어머니는 묵묵히 듣기만 하셨다. 오히려 내가 건강치 못한 것이 정말로 당신의 탓인 양 내 눈치를 보기에 바쁘셨다. 그래서 내 얼굴이 조금이라도 일그러진다 싶으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시곤 했다. 지금도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의 이 끔찍한 불효는 결혼을 하고 유학을 떠나서까지도 계속되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 중에 교수가 모두 편안한 자세로 눕거나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서 독방에 홀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그런 다음 자기 식구들 가운데서 꼭 얘기하고 싶은 사람을 상상의 독방에 모시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두 말 없이 어머니를 모셨다. 교수는 음악을 틀어 주면서 상상 속에서 만난 화자와 얘기를 나누어 보라고 했다. 나는 그때 평소와 똑같이 어머니에게 원망을 쏟아 놓았다. "어머니가 나에게 꼴찌를 했다고 야단치지만 않았어도 내 몸이 건강했을 거예요. 몸이 건강했더라면 미국에 와서도 이렇게 고생을 안 했겠지요." 그러자 지금껏 한 번도 말씀이 없으셨던 어머니가 상상의 독방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태기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지?" 그 순간 어머니가 나를 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는 장면이 보였다. "내가 너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에 네가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는 것을 보는 순간 내 마음에서 불이 나더라. 태기야, 내가 너를 그 날 심하게 야단친 것은 너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란다." "미안하구나 얘야."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 어머니! 나는 교실 바닥에 그대로 엎드려서 피를 토하듯 통곡해 버렸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 기숙사에 돌아와서 나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님, 이 불효자식을 부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동봉하는 이 돈은 제가 여름방학 때 벌어서 부쳐 드리는 것이니 꼭 옷을 해 입으세요." 어머니는 그 돈으로 옷을 해 입으시고 나서 하는 나라로 떠나셨다. 먼 이국 땅에 있는 이 못난 아들의 얼굴이 그리워 어찌 떠나셨을까. 어머니는 말년에 내 잘난 편지를 부둥켜안고 저녁마다 이불 속에서 우셨다고 한다(밖에서 울면 형님이 나무라니까). 그리고 노상 "태기야, 용서라니, 용서가 뭐냐"고 되 뇌이셨다고 한다. 나는 그 편지에 귀국하면서 어머니와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자면서 용서를 빌겠다고 썼었다.

그러나 한 번도 용서를 빌지 못한 채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사랑하는 우리 어매, 이 세상 어디 가도 보고 싶은 우리 어매 불러도 불러도 배고픈 어매 이름 울어도 울어도 목마른 어매 음성 우리에게 어매는 너무나 부요했고 자신에게 어매는 너무나 가난한 자 어매 가신 지 어언 19년 해마다 어매날은 돌아오지만 어매 없는 세상은 쓸쓸한 광야 허허 벌판 한가운데 서서 목이 터져라 어매를 부르면 창공은 어느덧 어매 젖가슴 어매 품 안에서 주님을 만났네. 작년 어버이날에 쓴 내 마음의 고백이다. 답변이 없습니다.

교통편
1. 항 공 편: 속초행 10:10출발(40분 소요) 공항에서
켄싱톤호텔 셔틀버스 승차
2. 고속버스: 강남, 동서울 터미널(매30분마다 출발)
3. 승용차편
1) 서울→영동고속도로→강릉→ 38휴게소→
설악동입구(7번국도)→ 호텔
2) 서울→영동고속도로→하진부→진고개→
소금강→주문진→설악동 입구→호텔
4. 관광버스
한신교회(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앞)→ 영동고속도로→ 호텔

*참고사항
1) 5월 11일(목)이 사월초파일인 관계로 도로사정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주시면 저렴한 교통비로
당일 11시까지 도착할 수 있습니다.
세미나 신청하실 때 교통편을 말씀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항공편으로 오실 경우에는 미리 예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승용차로 가시는 분은 전날이나 당일 5시(서울)에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4) 켄싱톤 호텔 연락처 : 0392-636-7131-5


오제은 교수

새로운 밀레니움 시대를 위한 신학적 패러디임과 목회상담학의 비젼

오늘날을 가리켜 "위기의 시대"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신학과 교회, 그리고 인간의 실존은 "정체성의 위기"와 "관계성의 위기"라는 이중적 딜레마(Dilemma)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위기는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으며, 그 근본적 원인은 커뮤니케이션(Commuication)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관계성의 위기와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온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을 충족시켜주며, 진정한 대화와 만남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이 시대에 필요한 신학적 패러다임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고, 치유가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들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마음 깊은 곳에 다가가려면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웃의 고통소리를 들으려면 또한, 먼저 내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하며, 나와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상호 연관적이며, 또한 동시적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의 소리와 내 자신의 내면의 소리,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깊이 듣는 일"(Deep Listening)로부터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치유(Healing)가 시작됩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치유적 조건으로서의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과 목회상담학의 비전의 그 첫 번째 조건은 "영성적"(Spiritual)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성적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자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영성의 중요한 두 가지 차원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리 비참하고 절망적인 고통의 현장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시각과 비전을 가지고 바라보게 하며 그 가능성과 치유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하나님의 시각적 영성"이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넓으신 긍휼, 그리고 그 자비로우심의 영성적 차원인 "하나님의 심정적 영성"입니다.

새로운 밀레니움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한 사람의 치유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자연과 환경, 그리고 온 우주와의 관계까지도 포괄하는 개인적이고 분석적인 치유관점이 아닌, 종합적이고 전인적이며 생태학적인 관점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고난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와 이해는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이며, 그 사람의 고난을 치유하는 일은 또한 그 사람 자신의 고난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전 인류의 세 가족 중에 한 가족이 역기능 가족이라고 합니다. 그 어떤 높은 학문도, 아무리 잘 짜여진 프로그램도, 그 대상자들의 가족 전체의 치유를 돕는 도구가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족의 위기는 곧 목회의 위기임과 동시에 목회자의 위기의 핵심적 원인입니다. 한 사람을 그 개인으로써만 분리적으로 이해해서는 그 사람을 올바로 이해할 수도 없고, 도울 수도 없으며, 오직 그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족 체계이론"(Family System Theory)의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세상의 가시적이고 물량적인 가치에 동일한 기준을 둔 성공을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성공과 동일시하는 왜곡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여부는 목회자 자신과 성도들의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그 결과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의 진정한 의미 있는 성공론으로의 의식적 전환이 요청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과 목회상담학의 비전을 가지고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목회적 적용대안을 제시한다면, 첫째로 영성 중심적인 목회적 적용, 둘째로 전인적인 생태학적인 목회, 셋째로 고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목회적 적용으로써, 교회는 성도들의 아픔과 상처, 그 한을 풀어주고 치유해주는 치유 에이전트(Healing Agent)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의 목회는 치유목회가 되어야하고, 이 치유목회가 그 해답을 주리라고 확신합니다. 넷째로 가족 중심적인 목회적 적용으로써, 교회는 가족을 흩어지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을 뭉치게 하는 일을 해야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목회상담중심의 적용으로써 미래의 가장 이상적인 목회의 형태는 목회상담중심 목회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목회의 성공여부는 그 목회적 전문성(Pastoral Professionalism)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목회상담을 중심으로 한 "가족 중심목회"와 목회적 전문성을 지닌 목회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방식인 "협력목회"(Team Ministry)형태가 가장 적합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밀레니움시대의 한국교회의 앞날을 위한 치유목회연구원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섭리를 보게됩니다. 치유목회 연구원이 감당해야 할 그 중심적인 역할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본다면, 첫째는, 목회자들의 목회사역을 위한 협력에이전트로써 각 지역의 개 교회에 대한 실제적이고 전문적인 목회협력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원함과 동시에 목회에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와 참신한 아이디어와 함께 자료들을 제공하는 일이며, 둘째로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목회상담과 전문교육기관으로써 가족중심상담, 영성훈련, 내적치유, 임상교육(C.P.E)등을 통해 새 시대가 필요로 하는 목회상담전문가들을 양성하며 목회상담센터(Pastoral Counseling Center)를 운영하도록 지원함으로써, 한국사회와 교회, 그리고 가정을 살리는 사역입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찬 치유목회연구원은 목회자들을 위한 전문적인 멘토링(Mentoring)센터로써, 목회자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마음을 털어놓고 상담하며, 함께 기도하고 동역하는 사역입니다.

반쪽의 둘이 만나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 만나는 것이다.

두개의 반쪽이 만나서 완전한 하나를 만든다는 생각은 잘못된 환상이다. 사실상 반쪽(2분의 1)x반쪽(2분의 1) = 4분의1쪽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오히려 반쪽보다 더 못한 것으로, 보다 완전해지기 위해 결혼한 두 사람이 불완전했던 이전보다 더욱 불완전한 상태로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결혼이 실패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불완전한 자신을 보다 완전케 하기 위해서, 혹은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서 결혼을 선택하지만 거의 대부분 자기와 닮은 사람과 만나게 되기 때문에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그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불완전한 것을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구하는 구애 과정에서는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려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상대방의 관심과 사랑을 얻어 내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받기 위해 주는 사랑의 행위는 가짜 사랑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번 상대방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환상에 속아넘어간다. 가짜 사랑의 형태를 통해 완전한 하나를 만들게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곧 사랑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그야말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결혼이 성사되면 자기의 원래 범주로 돌아온다. 두 사람이 결혼 전에 속했던 근원적인 가족체계 사이의 권력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 자기한테 익숙한 범주에서 편한함을 느끼기 때문에, 각자의 근원적인 가족체계에 대한 우월성을 얻기 위해 투쟁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속해있던 원래가족의 생활방식만을 올바른 것으로 느끼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주도권 다툼을 시작하고 서로간의 차이는 무시해버린다. 권력투쟁이 강화됨에 따라 두 사람은 각자 상대방을 자기완성에 이용하지 못한 것에 대해 절망한다. 결혼생활이 진행되어가면서 두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그들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더 나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이런 믿음에서 아이들의 역기능이 시작된다. 불완전한 두 사람이 하나의 완전한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좋은 관계란 상대방 없이도 각자 살아갈 줄 아는 두 명의 완전한 사람을 전제로 한다. 두 개의 불완전한 반쪽이 모이면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함정과 올가미에 빠져서 서로를 얽어매기 십상이다. 그래서 각자 상대방이 달라지기를(완전해지기를) 원하는 함정에 빠지고, 그 함정에서 누구도 자유롭게 빠져 나올 수 없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두 사람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나 점점 더 고통스런 미궁으로 빠져들게 된다. 부부상담을 하면서 이런 함정을 무수히 보게 된다. 서로 상대방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경우에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하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처럼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배워왔다. 특히 여성들은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 일생을 바쳐야 하는 것이 운명인 것처럼 배워왔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인양 포장되어온 이러한 관계는 실제로 상호의존적 중독관계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런 부부의 경우 사실상 이혼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들이 서로 공생관계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함정에 갇힌 사람의 상징을 보트에 탄 두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다. 보트에 탄 두 사람은 한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다른 한사람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계는 둘 중 한사람이 성장하거나 변화하게 될 때 위험에 처하게 된다.

건강한 관계는 결핍감으로 맺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각자는 다소 완전한 전체가 되어 가는 과정(홀로 서기)에 있다. 두 사람은 서로 결합하여 성장한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성장할 수 있는 단단한 공간을 제공한다. 이들은 서로에 대해 통제, 비판, 비난, 판단을 포기하기 때문에 성장한다. 결혼이라는 관계는 가정의 기초이자 건축이다. 좋은 결혼이란 각자가 자신한테 자긍심을 갖는 형태를 말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무조건적인 자아수용은 전체성에 이르는 왕도이다. 자기완성이나 자기가치의 인정 없이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자기완성의 과정에 있으면, 그런 사람은 상대방의 자기완성을 도울 수 있다. 개별화되고 독립적으로 된다는 것은 상대를 사랑할 필요를 못 느끼거나 돌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인식, 느낌, 개념, 환상에 책임질 줄 알며, 자기 인생과 행복이 자기한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더욱이 상대방이 자신의 반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부부관계가 건강하고 기능적이어야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 건강한 관계란 성숙한 것, 즉 동등하고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것이다. 부부관계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각각 자신의 악기를 자신만의 독특한 기술을 사용하여 연주하지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부는 각자 완전하며 통일된 존재이다. 또 각자는 독립적이며 실천적이다. 그들은 자녀를 갖는 일을 일생에서 가장 책임감 있는 결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자녀를 돌보는 일에 온 힘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두 몸이 하나가 되어 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 깊은 곳을 서로 나눌 수 없다면 세상살이는 참으로 외롭고, 재미없고,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의 깊은 속내와 고통스러운 기억들과 비밀 얘기까지도 아무런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다면 살아가는 일이 정말 재미있고 신날 것이며, 참으로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결국 부부란 불완전한 둘이 만나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 만나는 것이다.
고통이 있음을 알아주는 일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지만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고 있는 지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헤어날 수 없을 때, 그리고 고통스럽지 않은 것처럼 어떻게든 애써 부인하려 하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울 때, "고통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고통은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고통 을 당하고 있는 사람 또한 "내가 고통 당하고 있어요. 날 좀 도와줘요"라고 부르짖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의사가 병을 진단하는 것과도 같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면서 "여기를 누르면 아픕니까?"라고 묻는 것처럼, "예,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고통입니다"라고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은 또한 우리가 그것을 다룰 때에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루어주기를 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두려움과 미움, 염려, 그리고 분노 등은 마치 엄마가 아이를 조심스럽고 사랑스럽게 팔에 안아주듯이 따뜻하게 부등켜안아 주어야만할 대상들 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참으로 신비스런 장치를 우리 안에 만드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 아픔을 느끼게 함으로써 미리 경보장치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신 일이다. 몸의 어떤 일부가 아파하는 것은 바로 "나를 좀 알아주세요, 관심을 더 기울여서 돌봐주세요"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약에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게 된다면 나중엔 더욱 큰 고통을 당하게 될게 뻔하다. 그러므로 그 고통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신체적인 것에서 연루되었는지, 아니면 물질적인 것인지, 혹은 심리적인 것인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상처, 혹은 고통은 어떻게든 그 존재가 인식되어 져야만 하고, 그 실체의 모습이 되도록 명백히 드러나야만 한다. 나의 고통이 바로 나의 영성수련의 주제이며, 또한 동시에 우리의 명상과 기도의 대상이 된다. 나의 고통이 곧 "나" 자신인 것이다.

"고통이여! 나는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당신을 잘 돌보아 드리겠습니다."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어떻게든 도망치려 발버둥치지만 사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일부터 중단해야만 한다. 용기를 가지고 가장 부드럽고 따뜻하게 고통을 대면하여 제대로 인식하며, 알아주고,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된다. 우리의 고통은 그것이 과연 어떤 것으로부터 원인이 된 것인지, 우울 때문인지, 병 때문인지, 인간 관계로부터 오는 상처인지, 또는 두려움 때문인지 그 원인이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고통의 원인은 그것을 알고자 하는 이의 "의도가 얼마만큼 강한 것이냐"에 따라 알려지게 되어 있다. 왜 고통스러운지 그 원인을 알 수만 있다면 치유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의 원인 그 자체가 곧 고통을 벗어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있어요

하버드 대학교의 로렌스 콜버그(Lawrence Kohlberg)라는 심리학자는 "아이들의 도덕적 성장과 의식작용"연구에 그의 일생을 바친 결과, 태어나서 7살까지 아이들은 "도덕이전의 상태"라고 결론지었다. 즉, 태어나서 일곱 살까지의 아이들에게 나쁘다는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은 모욕적이며 그 들의 자존심에 손상이 간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나쁘다"고 부르는 것, 아이의 신체 부위를 때리는 것과 그 들이 나쁘다는 이유로 벌을 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수치심을 유발시킨다. 수치심에 기반을 둔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결함이 있다고 여긴다. 사람들을 비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 것이 바로 수치심이다. 부모로부터 자신에 대해 수치스럽게 느끼도록 하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부모의 목소리를 자신의 내부에 투사시킨다. 이 말은 원래 부모가 아이에게 던졌던 수치심을 심어 주는 대화를 아이가 자신의 내부에서 계속해서 듣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돌보았던 방식으로 자신을 돌보게 된다. 우리가 어렸을 때 성장에 꼭 필요한 욕구(사랑받음, 쓰다듬고 어루만짐, 보살핌)가 얼마나 거부, 억압되었는가? 가족체계 속의 나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어릿광대나 마스코트로서 가족들의 긴장을 해소시키고 화합하는 역할이었는가, 아니면 영웅처럼 온 가족의 자존심을 세워 주기 위한 것이었나, 부모의 원만치 못한 부부관계의 대체물인 부모의 대리 배우자의 역할이었는가, 아니면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던 잊혀진 아이, 가족의 희생양? 아니면 문제아로서 결국 온 가족이 나 때문에 하나로 뭉치게 되었는가? 이 역할은 나 스스로가 원했던 것이 아니고, 나의 가족체계가 이 역할을 하도록 나에게 배정해 준 것이다. 과연 나는 그 역할에 얼마나 순종적이었나? 결론적으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이야기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또한 나를 수치스럽게 느끼게 한 어떤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나에 대한 이 모든 부정적 영향들에 대해 No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또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어떤 긍정적인 멧세지(Message)와 이미지와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또한 무엇에 대해서, 혹은 누구에 대해서, 과연 얼마만큼 의존적인가? 아니면 얼마만큼 독립적이며, 홀로 서 있는가? 부모가 강압적이고 권위적일수록 그런 가족 내에는 절대로 말해서는 안되는 비밀들과 규칙들이 많다. 이러한 것들이 정체성(Identity)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의존적인 사람이 되게 한다. 자신의 독특성을 포기한 채 가족체계가 원하는 역할을 감당했으면 한 만큼 그 사람은 의존적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에 부모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육체적, 신체적 체벌이나, 성적 차별과 학대, 혹은 정신적, 감정적 학대를 경험하였거나, 위와 같은 학대를 직접 목격한 경우에는 그 만큼 의존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학대를 당한 피해자는 학대를 가한 가학자에게 복종적이며 의존적이 된다. 학대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의존적이 된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매 맞는 것을 보고자란 딸이라면, 성장하면서 아버지보다 더욱 무서운 폭력자에게 더욱 순종적이고 의존적이 될 것이며, 아들이라면, 다른 여자를 순종적이게 하기 위해 자신이 아버지보다도 더욱 폭력적이 되려고 할 것이다. 종종 피해자는 후에 가해자가 된다. 성폭력 가해자의 80%가 과거에 자신 스스로가 그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학대를 가하는 자는 거의 틀림없이 자신 스스로가 한때 심각한 피해자였다. 나의 가족이 과연 얼마나 기능적인지, 역기능 가족이었는가를 진단해보려면, 첫째로, 나의 부모가 나를 임신하고 출생하여 생후 약 7살까지 얼마만큼 나를 위해 준비되었으며, 특히 나의 어머니의 눈(In Mother's Eye)을 통해 나는 어떤 어머니의 감정상태를 경험하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로는, 나의 부모님의 부부사이가 어떤 관계인가? 부부사이가 나쁘면 나쁠수록 나에게 끼친 영향은 역기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부모가 강압적이고, 완고하며, 권위주의적일수록, 나의 가족은 역기능적이라 할 수 있다. 넷째로, 부모에게, 그리고 외부적인 것들에 의존적이면 의존적이었을수록 자신의 내면의 욕구대로가 아닌 거짓된 자아(역할 Mask), 즉 내면아이(Inner Child), 성인아이(Adult Child)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우리는 내 자신이 얼마나 외로우며, 상처받고 있고, 화나 있고, 슬픈 지를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모든 문제는 혼자만의 개별적인 것이 아니며 가족전체가 그 문제의 원인이다.

상한감정의 치유

상처를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나의 성장과정 중에, 그 가족체계 속에서 나의 선택이나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졌던 역할, 그 패턴(Pattern)이 내면화되어진 상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치유의 시작이다. 그 상처의 부분, 손상된 상태는 수치심이 내면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상처의 자리가 곧 치유되어야할 자리이다. 이렇듯 상처의 자리를 인식(Recognition) 하는 것, 즉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깨닫게 된 그 자체로도 다시는 똑같은 패턴(Pattern)을 반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미 50%의 치유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가족치료의 시작과 그 목표는 내면화되어진 상태를 표출(Externalization)시키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그 사건이 나에게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존재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일어났던 사건 그 자체보다도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해석하여 나 스스로 내면화 시킨 나의 시각이다. 즉 "내가 그 일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사건을 사건 자체로 객관화(Obejectification) 하였는가? 아니면 나의 존재 자체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나는 더 이상 깨끗하지 않다"라든가 "내가 문제야" "나는 나쁘다"등)으로 느끼고 있는가? 어떠한 상처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하고 소중하며 특별한 존재임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변화로도 인간의 존재론적인 변화를 가능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될 하나님 나라의 왕자들이며 공주들이다. 이러한 우리의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과 명명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하나님의 시각"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 또한 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문제 그 자체만 바라보아서는 아무런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 이면에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과 창조적인 변화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제의 뒷면에는 "하나님의 사용법"이 적혀 있다. 한 발자욱만 띄어 눈을 돌려 그 뒷면을 보면 놀라운 차원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문제는 혼자만의 개별적인 것이 아니며 가족전체가 그 문제의 원인이다. 즉 "개인 중심적 인간이해"가 아닌 "가족 중심적 인간이해"로의 사고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설령 한 개인이 아무리 상당한 변화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만들어 낸 본산지인 공장과도 같은 그 가족의 구조적, 체계적인 변화 없이는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 그 가족체계 속에 돌아가면 다시 원 상태로 되기 쉽다(원위치).

치유는 새로운 가족적 관계를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누군가에 의해 받아들여짐에 따라 나도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의 상처, 내면아이를 끌어안게 될 때만이 진정한 치유가 가능하다. 바로 이 상처의 부분, 혹은 내면아이는 내가 받아 온 유해한 교육에 의해 무시하고 등한시했던 부분(Shadow)이다. 내가 사랑해주지 않았던 그 부분을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손상된 인격의 조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며 비로소 인격의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나의 상처와 허물과 약점이 무시당하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치유의 경험은 참으로 놀라운 영성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경험은 나 스스로가 자신의 상처와 문제를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변함없으신 사랑"을 체험케 한다. 바로 이때, 상담가는 하나님의 치유가 역사 하도록 통로의 역할을 한 "하나님의 치유의 에이전트"이며, 내담자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적 이미지를 발견하며 감격해 한다. 이 순간, 아무리 그의 상처가 깊고, 처절했던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유의 영이 그의 깊게 패인 상처를 수술하여 낫게 할 뿐 아니라, 감사와 기쁨과 깊은 평안을 가져다준다.

또한 강같이 흐르는 담대함과 용기가 생겨나며 저 내면 깊은 곳에서 속삭이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너를 붙들어 주겠다. 다시는 너의 상처가 너를 괴롭히지 못하리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리라." 결국 하나님의 치유의 Agent로서의 우리의 치유상담사역인 "조건 없이 받아 들여줌"을 통해 내담자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새로운 가족적 관계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치유가 이루어지게 된다. 즉 내담자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그의 어떤 경험과도 상관없이 태초의 하나님의 형상의 이미지로 보게 하는 것이 곧 궁극적인 의미의 치유이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그 사람을 가졌는가?"는 평화주의자이며, 영성가이고, 시인이셨던 고 함석헌 선생님께서 남기신 시들 중에서 내가 지금까지 애송하는 시의 제목이다. 지금까지도 마음 깊은 곳에 잔잔히 와 닿는 다음의 한 싯귀는 나의 인생과 인간관계의 지표가 되었다.

탓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말해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사람이 한 세상을 얼마나 가치 있게 살았는가 라는 인생의 진정한 성공여부는 내가 과연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나의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나간 나의 삶을 돌이켜 볼 때 과연 나를 가장 가슴아프게 했던 일들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나를 괴롭게하고, 슬프게하며, 분노하게 하였는가? 또한, 나를 가슴 설레이게하고, 감격하게 만든 일 들은 어떤 것들이었는가? 무엇이 나에게 인생의 의미를 가져다주었는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살아있다는 감사를 하게 하였는가?

내가 사람들을 대할 때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그 사람의 배경이나, 학식이나, 재물이나, 외모나, 건강이 아니고, 다만 단 한가지, 그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들, 그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부럽고 존경스러운 사람은 자신도 죽어 가는 상황에서조차 서로 구명대를 사양할 그런 사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비젼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이며, 현실 불가능한 일일까? 지금까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과연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 중에 몇 사람이나 나를 생각할 때 진정 고마워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가게 될 때 "저 사람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감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나는 떠올릴 수 있을까? 과연 지금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으며, 그런 만남을 갖고 있는가? 내가 죽은 후에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 것이며,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게 될까? 나는 이러한 물음들이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진지하게 꼭 물어봐야 할 매우 가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순간들은 우리의 마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물음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이유 자체를 묻는 질문이 된다. 온 세상 나를 버려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도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사람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냥 들어주는 일

사람들은 이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나눌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호소한다. 어쩌면 우리의 문제의 핵심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운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듣는 것" 이다. "그냥 들어주는 일"이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관심을 가져주는 일"이다. 특별히,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보여주는 따뜻한 관심이다.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말이 들려지고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인 것이다. 그 사람 자신이 받아들여진다는 것,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들려지고 있다는 것, 또한 자신이 다른 사람에 의해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 대부분의 경우에는 세심하고 주의 깊게 받아들여진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어지는 일"보다도 훨씬 중요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우리들 대부분이 자기 자신의 진정한 가치와 사랑의 위력을 과소평가 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할 때 "참 안됐군요. 그 말을 들으니 저도 마음이 아파요"라고 단순히 건네는 말 한마디의 위력이 사실 얼마나 대단한 것인 가를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서야 내 자신은 깨닫게 되었다.

내가 상담했던 어떤 분은 그 분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하려고 할 때, 가장 방해가 되고 많이 듣게 되는 말은 자신들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서 말하는 사람이 말하려는 것도 다 말하지 못한 채 오히려 상대방의 얘기만 듣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불평했다. 결국 그 사람이 하고싶은 말은 들려지지도 못하고, 오히려 나누지 못한 실망만이 더욱 그 사람의 고통을 배가 시키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말수가 적어지고 사람 만나는 것을 회피하게 되었으며 마음이 점점 얼어 붙게되었다. 들음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연결시킬 수 있다. 듣는 사람은 또한 말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말하는 것을 잘 듣고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 듣는 것의 초점은 말하는 그 사람 자신이다. 잘 들어주면 상대방은 자신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많은 경우의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에게 일어난 고통 그 자체보다도 그 고통을 누군가와 나누지 못했다는 데 있다. 즉, 누군가에 의해 들려지는 경험을 갖지 못했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놀랍게 자신의 고통이 격감되어졌다고 고백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과 아픔을 못 오게 할 수는 없을지는 모르나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이 더욱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단지 들어주기만 했는데도 눈물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종종 대하게 된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티슈를 건네주는 일조차도 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이 터져 나오는 중요한 순간을 방해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된 후로는 그저 듣는 것에만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울고 싶을 만큼 다 울고 난 뒤에, 그 사람은 거기에 그와 함께 있었던 나를 발견한다. 매우 쉽게 느껴질지도 모를 이 일을 배우는 것이 나에겐 쉽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배워온 대부분의 지식들과는 반대적인 것이었다. 한때 나는 그냥 듣기만 하는 사람들은 말하는데 자신이 없거나 대답할 말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따뜻한 사랑으로 침묵하며 그냥 들어주는 일은 청산유수의 말보다도 훨씬 치유하는 힘이 있을 뿐 만 아니라 서로를 깊이 연결시켜준다.
"마음을 나누며, 가슴 깊이 들음"
Deep Listening, Compassionate Listening

듣는 사람의 "마음에 와 닿지 못한다면" 무슨 말을 하던 간에 그 말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만약에 듣는 사람이 "당신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아요"라고 고백할 수 없는 말이라면 아무리 큰 소리로 울부짖어 봤자 공허한 메아리가 되 버릴 것이며, 청산유수로 뽑아낸 들, 천사의 말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상담했던 사람들로부터 가장 흔히 듣게 되는 얘기는 의사소통의 문제이다. "내 자신은 그 점을 의식하지도 못했다"라든지 혹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또는 "그 사람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준다" "내 가슴속을 확 열어 보여줄 수만 있다면..." "답답하다"는 등의 사람들간에 의사소통의 문제로 말미암아 마음의 벽이 생기게 되고 그래서 마음과 마음 깊은 곳을 연결할 수 없게 된 바로 거기에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 있다.

오늘날 모든 인간관계(하나님과 자연과의 관계를 포함하여)의 문제의 공통적이며 근본적인 원인에는 바로 이 "마음을 전달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들음의 능력"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픈 고통의 경험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그 고통을 깊이 들어주기만 한다면, 그래서 함께 나눌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은 오히려 전혀 다른 의미로 승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어떤 말은 듣기에는 매우 그럴듯한데도, 혹은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도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때론 골 깊은 상처를 내는 것이며,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씨앗이 될 수도 있는가? 그런가하면 어떤 말은 어눌하기 짝이 없는 듯 한데도, 단 몇 마디 말로 천냥 빛도 갚을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단지 곁에서 함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아픈 상처를 치유케 하는 힘이 있는 것일까? 과연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바라고 노력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까? 그 차이는 우리가 얼마만큼이나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지 않고는 마음에 가 닿을 수도 없다. 온 정신과 마음을 다 집중해서 상대방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훈련만이 올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시작이 된다. 또한 말하는 사람이 말로 다 표현 할 수도 없는 무수한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려면 먼저 내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한다.

오fot동안 많은 상담가들과 심리학자들에게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고민거리가 되었던 과제 중 하나는 과연 어떤 상담기법이 가장 효과적인 것 인가였다. 오랜 임상경험을 통해 그들이 얻은 대답 중 하나는 "내담자중심"(Client-Centered)의 상담 방법으로써, 가장 효과적인 상담이란 그 상담이 얼마만큼 상담자 중심이 아닌 내담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따라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만일 어떤 상담가가 상담하러온 내담자를 대할 때에, 자신의 경험이나 아이디어, 어떤 신념이나 선입관을 가지고서 이미 계획되고 준비된 어떤 교육이나 의식화 혹은 학습을 통해 상담의 효과, 즉 상대방의 변화(상담자 중심의)만을 꾀하려고만 한다면, 이러한 "상담자중심"의 상담으로써는 내담자의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지기 매우 어렵다고 본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이 사용하신 대화 방법은 사실 "내담자 중심" 혹은 "사람중심" (Person-Centered)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떤 특별한 대화 기술이나 심리학적 기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그 분이 만나시는 "사람"위주의 방법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 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실 때, 그 분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로 뜨거웠다. 즉, "사랑과 긍휼의 가슴으로 상대방위주로 깊이 들으심"이 예수님의 치유상담 사역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 분에게는 언제나 변함없으신 한 가지 원칙이 있으셨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어떤 상태의 사람이든(세리이든, 창녀이든, 살인강도이든) 간에 누구든지 똑같은 사람으로,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하늘 나라의 왕자요, 공주로 대하셨다는 것이다. 그 분에게 다가오는 이들의 죄와 깊은 상처와 첩첩이 쌓인 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대하실 때마다 뜨거운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자신이 대신 죽어서라도 그들을 구하리라는 절절한 심정으로 대하셨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고귀한 존재로써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살아가기만을 바라시는 오직 그 한가지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분께 나아오는 자마다 고침과 나음이 가능했다. 치유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언제나 치유의 대상인 것이다. 내가 치유된 만큼만 남을 도와 줄 수 있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내뱉는 말과 행동과 모든 관계는 모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뿐이다. 우리가 만일 상대방의 마음의 소리를 듣도록 훈련함으로써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아직 말하지 못한 그 무수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게되고, 그리고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자신을 통채로 내어주시려고 이미 작정하신 예수님처럼, "나는 이 사람과 어떤 아픔이라도 함께 나누리라" 작정하며 예수님의 심장으로 대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치유가 이루어질 것이다.
Compassionate listening brings about healing.

나의 패러다임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온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내 마음은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시각"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신은 출생 후부터 세살 사이에 우리들의 보호자들의 시선(감정의 전달)에 따라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며, 태어난 뒤부터 자기 이미지는 최초로 나를 돌보아 주는 사람의 눈에 의해 형성된다.

나 자신을 내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나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 가와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가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계속 느끼려면 보호자의 시선에서 우리의 특별함과 소중함이 확신되어져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깊고 심오한 가치를 지니고 태어난 것임에 틀림없으며, 우리들 각자가 소중하고 독특하고 특별하며 순수하다. 그러나 어린아이였을 때의 우리는 미성숙한 채로 보호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아직 가공되지 않은 10조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운명은 일찍부터 보호자들에 의해 많은 부분 결정되어 버린다. 나 자신에 관한 나의 우선적인 믿음은 나를 대하는 어머니의 감정과 욕망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나의 정의는 사실상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삶은 우리 부모에 의해 처음부터 형성된다. 가족은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부모의 눈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곳이다.

분석심리학자들과 심리치료사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우리 부모가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에 우리를 어떻게 대하였는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 주었는가에 따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재가치인 자존감과 인간관계 형성방식을,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을 느끼고, 주고받는 방법을 가장 결정적으로 학습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가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는 우리 자신의 "출생 이야기"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흔히 어렸을 때 부모님이나 주위 친척들로부터 듣게 되는 자신에 얽힌 출생이야기를 크게 나누어보면 첫째는, 부모님에 의해서 진정으로 준비했고 간절히 원해서 출생된 경우와, 둘째는 전혀 바라지 않았거나 어쩔 수 없어서 낳게 된 경우가 있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출생자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자신이 "원치 않는 아이"(Unwanted Child)였음을 알게 된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자긍심을 갖기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내가 상담했던 한 여성은 늘 스스로에 대해 심한 컴플렉스와 완벽주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게다가 어떤 남성이 자신에게 구애를 하고 사랑을 고백해와도 그 남성을 전혀 신뢰할 수도 없고, 또한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호소했다. 이 여성은 자기 자신을 소중하고 독특하며 특별한 존재로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를 자학하고, 무가치하게 여기고 있었을 뿐 만 아니라, 남들 앞에서는 이러한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거짓된 자아(완벽주의)로 자신을 위장하게 되었고,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남들과 구분되게 아주 특별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분노를 터트렸으며, 남들에게 잘 보이고, 칭찬 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지만, 언제나 공허했고, 외로웠으며, 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힌다고 호소했다. 그녀의 불행은 그녀의 어머니가 아들 낳기를 몹시 기대했으나 아이가 딸이라는 것에 너무 실망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아이를 떼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불행하게 자신을 출산하였다는 (원치 않았던 아이였던 자신에 관한 출생) 이야기를 아주 어렸을 적부터 듣고 자란 것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이미 버림받은 그녀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이 여성으로 하여금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여성은 지금까지 진정한 사랑을 위해 새로운 남자를 찾아 헤매었지만 사람만 바뀌었을 뿐 언제나 그 결과가 똑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도 없기 까닭이다. "나 스스로가 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이미 "우리의 부모가 나를 임신할 당시에 어떠한 경우로 어떻게 나를 위해 준비하였는가"와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나의 부모는 얼마만큼 나를 위해 존재하였으며, 준비되었었는가?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출생하였을 때 나의 부모로부터 얼마만큼 환영을 받았는가? 아니면 오히려 내가 가족을 위해 부모의 감정, 욕구 해소의 대치물로써, 부모들이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무의식적인 문제들을 떠맡았는가? 그러므로 사전 계획도 없는 아이를 갖게 되거나, 거의 강간과도 같은 상태로 임신하게 된 경우나, 알콜에 취한 상태로 임신하여 아이를 출생하는 일은 매우 심각하고 중대한 범죄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그들의 부모로부터 아름다운 출생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가족의 위기와 치유목회

이 강좌에서는 오늘날의 위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의 위기와 목회의 위기를 상호 관련지어서, 과연 가정의 위기가 우리 삶의 질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 직접적인 영향은 무엇인지, 또한 기독교와 교회는 어떤 역활을 하였는지 고찰해봄과 동시에 그 가능성과 치유목회방법으로써 "가족목회"(Family Ministry)에 대하여 고찰해 봄으로써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가정의 위기적 상황에 대해 가족 중심적인 목회형태와 목회상담의 구체적인 비젼과 그 대안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 대하여 특별히 목회 상담학은 어떠한 통찰력과 공헌을 할수 있는지, 그 비젼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족의 위기와 그 원인과 영향에 대하여 고찰함에 있어서는, 나 개인과 가정과 사회, 교회,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이며, 서로 상호연관되어진 순환적이고 역동적인 관계 속에 있다는 "상호관계성"(Interconnectedness)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한사람의 치유를 위해서는 가족들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자연과 환경, 그리고 온 우주와의 관계까지도 포괄하는 "전인적이고 생태학적인 치유관점"이 요청됩니다.

가족체계이론(Family System Theory):
1950년이후 북미를 중심으로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 한 사람을 그 개인으로서만 분리적으로 이해해서는 그 사람을 올바로 이해할 수도 없고, 도울 수도 없으며, 오직 그 가족과의 관계속에서만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족체계이론"(Family System Theory)의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가족중심적 인간이해"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 개인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의 가족전체를 "환자"로써 이해합니다.

"가족중심적"관점으로의 전환:
새로운 밀레니움시대가 요구하는 신학적 패러다임과 목회상담학적인 비젼은 "가족중심적"(Family Centered)인 관점을 요구합니다. 전 인류의 3가족 중 1가족이 이혼하거나 별거, 혹은 편부모 가정등의 역기능가족입니다. 계속되고 있는 개인적,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이슈들의 근본적원인에는 대부분 가족문제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새 시대의 목회는 철저한 가족중심적 목회여야만 이 사회가 요구하는 올바른 목회가 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먼저 자신의 가족을 중심적으로 튼튼히 서야만 성도들의 가족을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가정이 흔들려서는 그 어떠한 목회도, 프로그램도, 그 진정한 의미를 잃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성도들 간의 관계를 한 형제, 자매로 여기며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이루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의 위기는 곧 목회의 위기임과 동시에 목회자의 위기의 핵심적 원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목회는 가족중심적이어야만 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전문가이며, 또한 이 시대는 가족중심적인 목회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룹토의를 위한 질문들:
1) 목회의 위기, 그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목회자와 교회, 그리고 성도 들 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2) 가정의 위기, 그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목회자의 가정을 연관지어셔)
3) 위의 두 가지 위기들을 극복할 수 있는 "가족 중심적인 목회"의 대안과 비젼은 무엇입니까?

가족체계와 내적치유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치유하지 못하실 상처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의 상처를 치유하며 낫게 하리라"(렘 30:17)고 약속하신다. 우리의 상처가 아무리 처절하고 뼈아픈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치유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치유자가 되려면, 먼저 목회자나 상담가 자신이 어렸을 때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을 통해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발견하고, 그것을 부둥켜안는 내적 치유의 경험이 필수적인 것이며, 그 때서야 비로소 성도들이나 내담자들의 진정한 치유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회자나 상담가의 내적 치유의 경험과 그 깊이만큼 그 사역의 대상자인 성도들과 내담자들의 치유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진정한 내적 치유경험이 나의 가족중심목회와 상담의 우선 이다. 또한 가족중심목회와 상담은 성도 한 사람, 내담자 한 사람을 대할 때, 그의 가족체계와 그 구체적인 관계가 보여져야만 가능하다. 그 가족 속에서의 그 사람이 그려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바로 그 때서야, 그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아픔과 상처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될 때만이, 그 사람을 살릴 수 있고, 그리고 그 사람을 살리는 목회는 곧, 그 가족을 살리는 가족목회가 될 것이다.

종교심리학자들과 목회상담가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우리 부모가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에 우리를 어떻게 대하였는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 주었는가에 따라 자신의 존재가치와 인간관계 형성 방식을,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을 느끼고, 주고받는 방법을 가장 결정적으로 학습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부모님의 이미지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서로 깊이 연관되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형성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인이 되어서 하나님과의 내적, 외적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지만, 어린아이 시절에 부모를 통해서 깊이 각인 되어진 하나님의 이미지 중에서 그 제한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한 내적 치유가 없이는, 온전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질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가족체계 속에서 내가 어떻게 형성되어졌는지, 그 중에서도 특별히 나의 존재가치가 어떻게 학습되어졌는지, 또한 이것이 나의 하나님의 이미지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명확히 알기까지는, 나는 아직 진정한 나를 모르는 상태라는 것이다. 상처의 발견(사건)과 인식(Recognition)은 가장 중요한 내적 치유의 시작을 의미한다. 나의 성장과정 중에, 그 가족체계 속에서 나의 선택이나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졌던 역할, 그 Pattern이 내면화 되어진 상태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상처의 부분, 손상된 상태는 곧 수치심이 내면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상처의 자리가 곧 치유되어야할 자리이다. 즉,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과의 차이가 난 바로 그것이 상처의 자리요, 치유의 자리이다.

이렇듯 상처의 자리를 인식(Recognition) 하는 것, 즉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깨닫게 된 그 자체로도 다시는 똑같은 패턴(Pattern)을 반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미 50%의 치유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치유란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옛 기억으로 돌아가 그 상처의 자리("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시각으로 부모나, 보호자나, 나의 어린 시절에 나에게 중요했던 사람들이 나에게 수치심을 주어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든 기억들")를 성령님께 넘겨 드림으로써,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 과거의 상처와 수치심의 멧세지(이것이 나의 삶의 전인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은혜의 장애물이요, 사역의 걸림돌이었다)가 다시는 나의 내부에서 들려지지 않고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내적 치유의 시작과 목표는 내면화되어진 상태를 표출(Externalization)시키는데 있다. 이 때 특히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나에게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존재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어났던 사건 그 자체보다도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해석하여 나 스스로 내면화 시킨 나의 시각이다. 즉 "내가 그 일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사건을 사건 자체로 객관화(Obejectification) 하였는가? 아니면 나의 존재 자체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나는 더 이상 깨끗하지 않다", 혹은 "내가 문제야" "나는 나쁘다"등)으로 느끼고 있는가? 어떠한 상처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하고 소중하며 특별한 존재임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변화로도 인간의 존재론적인 변화를 가능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왕자들이며, 공주들이다. 이러한 우리의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과 명명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하나님의 시각"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

또한 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문제 그 자체만 바라보아서는 아무런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 이면에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과 창조적인 변화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제의 뒷면에는 "하나님의 사용법"이 적혀 있다. 한 발자욱만 띄어 눈을 돌려 그 뒷면을 보면 놀라운 차원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문제는 혼자만의 개별적인 것이 아니며 가족전체가 그 문제의 원인이며, 가족 구성원인 개인에게 나타난 증상은 그 가족전체의 결과로써, 가족이 환자이다. 이러한 "개인 중심적 인간이해"가 아닌 "가족 중심적 인간이해"로의 사고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매우 중요하다. 설령 한 개인이 아무리 상당한 변화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만들어 낸 본산지인 공장과도 같은 그 가족의 구조적, 체계적인 변화 없이는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 그 가족체계 속에 돌아가면 다시 원 상태로 되기 쉽다(원위치). 그러므로, 치유는 새로운 가족적 관계를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가족에 의해서 상처를 받았으면 가족에 의해서 치유될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받아들여짐에 따라 나도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의 상처, 내 속의 내면아이를 끌어안게 될 때만이 진정한 치유가 가능하다. 바로 이 상처의 부분, 혹은 내면아이는 내가 받아 온 유해한 교육에 의해 무시하고 등한시했던 부분(Shadow)이다. 내가 사랑해주지 않았던 그 부분을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손상된 인격의 조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며 비로소 인격의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나의 상처와 허물과 약점이 무시당하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치유의 경험은 참으로 놀라운 영성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경험은 나 스스로가 자신의 상처와 문제를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변함없으신 사랑"을 체험케 한다. 바로 이때, 상담가는 하나님의 치유가 역사하도록 통로의 역할을 한 "하나님의 치유의 에이전트(Agent)"이며, 내담자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적 이미지를 발견하며 감격해 한다. 이 순간, 아무리 그의 상처가 깊고, 처절했던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유의 영이 그의 깊게 패인 상처를 수술하여 낫게 할 뿐 아니라, 감사와 기쁨과 깊은 평안을 가져다 준다. 또한 강같이 흐르는 담대함과 용기가 생겨나며 저 내면 깊은 곳에서 속삭이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너를 붙들어 주겠다. 다시는 너의 상처가 너를 괴롭히지 못하리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리라." 결국 하나님의 치유의 Agent로서의 우리의 치유상담사역인 "조건 없이 받아 들여줌"을 통해 내담자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새로운 가족적 관계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치유가 이루어지게 된다. 즉 내담자 스스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그의 어떤 경험과도 상관없이 태초의 하나님의 형상의 이미지로 보게 하는 것이 곧 궁극적인 의미의 치유이다. 우리 모두가 이제는 더 이상 치유되지 않은 자신의 과거의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서 하나님께나 가족들에게나 성도들에게 그 상처를 전달시키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성령의 자유케 하시는 내적 치유를 통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며 이 민족을 살리는 치유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한다.


성경적 부부 행복의 회복
김의식 교수 (본원 교수, 호신대 교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적인 기관(Divine Institution)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과 교회이다. 교회는 신약시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이 땅에 보내 주심으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지만 가정은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에덴 동산에서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하신 것이다. 교회는 가정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가정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적 모체가 되는 축복의 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우리의 가정들이 갖가지 이유들 때문에 깨어져 가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때로는 가계에 흐르는 죄의 유전 때문일 수도 있고(출20:5), 자라난 환경 속에서 받은 상처 때문일 수도 있고, 실망되고 불만스러운 결혼 생활 때문일 수도 있고, 요즘처럼 IMF 시대를 맞아 경제적인 요인 때문에 불화를 겪는 경우도 있고, 자녀들의 문제나 시가나 처가 등 주위 친척들과의 갈등 때문일 수도 있고, 갖가지 주위의 시험과 유혹 때문에 가정이 불행에 빠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래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느 작가는 결혼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20대에는 행복의 꿈에 부풀어서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에 대해 실망을 느끼며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못해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되니까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고
60대에는 서로 안 됐다 생각되어 가엾어서 살고
70대에는 지금까지 참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워서 산다.
과연 우리의 부부 생활은 어떠한가?
지금까지 우리는 불행했던 부부의 행복을 회복하기 위해 정신(심리) 치료나 가족 치료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가정의 문제 해결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 기울여 왔다. 물론 이러한 치유의 과정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 가정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성경적 부부 관계의 회복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 부부 관계의 회복이 없이는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기 때문이다(마7:24-27).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부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성경에서 부부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하시는 곳은 에베소서 5장, 골로새서 3장, 베드로전서 3장이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찾아보면 같은 말씀을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권면하신다.

I.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엡5:22, 골3:18. 벧전3:1)
주님께서는 아내들에게 권면하실 때 다른 무엇보다도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명령하신다. 그것은 아내들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고 또한 아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 내조 잘 해라, 자녀를 잘 기르라, 시부모님 잘 모셔라, 집안 살림 잘 해라, 몸 단장 잘 하라는 말씀보다도 이 말씀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이 안 되는가?
첫째, 많은 아내들이 남편이 이해되지 않거나 존경스럽지 못해서 순종이 안 된다고 말한다.
둘째, 유교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너무 굴욕적인 맹종을 강요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복 종이란 단어 자체에 거부감부터 느낀다.
셋째, 심리학자 융(Carl Jung)에 의하면 여자의 무의식 속에 있는 애니무스(Animus)라는 남 성성 때문이다.
넷째, 심리적으로 볼 때 여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자존심이 순종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다섯째, 궁극적으로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남편에게 복종이 안 되는 것이다(엡5:21).
그러나 성경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고 권면한다. 여기서 ‘복종하라’(휘포타세스테)란 단어는 남편을 사랑함으로써 기쁨으로 섬기는 의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령 충만한 성숙한 아내는 주님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도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벧전3:5-6).
남편에게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1) 온유하고 안정된 마음(벧전3:3-4)
(2) 따스한 사랑의 말(약3:2-12)
(3) 몸으로 섬김(요13:15, 17)
(4) 만족스런 성생활(고전7:3-5)
(5) 말씀의 은혜 나눔(골3:16-17)
(6) 남편을 위한 기도와 돌봄(고전7:14)

아내의 남편을 향한 이러한 헌신적 사랑의 섬김은 어떠한 남편이라도 기필코 변화시키고 가정을 행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II. 아내를 사랑하는 삶(엡5:25, 골3:19, 벧전3:7)
남편들의 경우는 여러 가지 사회 생활을 통해 복종에 익숙해져 있으나 사랑이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 것을 명령하신다. 남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는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건강 관리 잘하라, 밖의 활동 잘하라, 밖의 사람들에게 잘하라는 말씀보다도 가정에서 아내를 먼저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할 것을 권면한다(딤전3:5, 12).

그런데 왜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가?
첫째, 많은 남편들이 아내가 사랑스런 행동을 하지 않아서 사랑이 안 된다고 말한다.
둘째, 유교의 문화 속에서 너무 어머니의 사랑을 받다 보니까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오히려 사랑받고 인정받길 원하는 의존성이 강하다.
셋째, 심리학자 융(Carl Jung)에 의하며 남자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원형 (Archetype)이 ‘위대한 왕’이기 때문에 군림하려고만 한다.
넷째, 심리적으로 볼 때 남자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이기심이 사랑을 가로막는 원인이 된다.
다섯째, 궁극적으로 남편들이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고 말씀한다. 여기서 ‘사랑하라’(아가파테)란 단어는 아내에 대해서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듯이(롬5:8)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풀 것인가?
(1) 지금까지의 고생에 대한 감사(살전5:18)
(2) 세심한 관심과 마음의 배려(벧전3:7)
(3) 사랑이 담긴 카드나 선물(잠 18:16)
(4) 아내나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딤전5:8):
Marriage Meeting, Family Time
(5) 영적으로 아내를 격려하고 인도함(딤전3:5, 12):
부부 기도회, 가정 예배
(6) 아내를 위한 기도와 돌봄(고전7:14)

남편의 아내를 향한 뜨거운 사랑의 감동은 어떠한 아내라도 언젠가는 변화시키고 온 가정이 주님 앞에 굳게 서는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III. 부부 회복의 길
우리 부부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성경에 증거된 이 복종과 사랑의 말씀을 내가 먼저 실천하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만 요구하는 데 있다. 그래서 흔히 예수 믿는 가정에 이런 부부 싸움이 일어난다. 남편이 큰소리를 치면서 “원 세상에 당신처럼 신경질적이고 재미없는 여자가 어디 있어? 나나 되니까 참고 사는 거지”하며 공격한다. 그러면 아내도 지지 않고 소리치길 “흥, 당신같이 자기 주장만 옳다는 멋없는 남자도 세상에 드물걸요? 내가 어쩔 수 없으니까 죽어지내지” 한다. 그러자 남편이 성경을 인용하면서 소리치기를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도대체 교회에 가서 뭘 배웠어?” 그 때 아내도 한다는 말이 “아니, 그러면 당신 성경책은 그 다음은 찢어졌어요? 그 다음에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잖아요?”소리친다. 이처럼 부부간에 복종과 사랑의 싸움은 일생토록 끝이 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성경 어느 곳에도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하라거나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을 요구하라고 가르친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주께 복종하듯 복종하면 되고,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저런 사람을 나에게 허락하셨는가?”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저 사람을 인도해 주셨구나!”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상대방을 들어 사용하신 사실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7:14) 하신 말씀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변화가 상대방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부족한 종도 결혼 후 오랜 세월동안 부부 갈등의 세월을 보냈다. 장로, 권사 가정에서 자라난 자신과 불신 가정에서 자라난 아내 사이에 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신혼 초부터 가정 예배를 드리자고 해 놓고 아내를 변화시키기 위한 말씀들을 뽑아서 밤마다 가정 부흥회(?)를 하였다. 뒤늦게 의도를 알아차린 아내의 마음은 닫혀만 가고 급기야 어느 날 밤에는 “우리 이제부터는 각자 성경 읽고 기도하고 잡시다.”할 정도로 반발하였다. 그래도 아내가 더 깨어져야 한다고 더욱 강도 높은 말씀으로 내리쳤다.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을 보낼 때 아내의 마음의 상처는 얼마나 깊어만 갔겠는가? 그런데 미국 유학을 떠나 어려운 이민 목회를 하면서 광야의 연단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목회가 힘들던지 새벽마다 제단 앞에 엎드려 눈물로 간구하게 되었다. 때로는 너무 고통스러워 엎드려 기도할 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눈물만 흘리다가 일어설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언젠가 제단 앞에 엎드려 눈물 흘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음성이 들려왔다. “문제는 아내나 교인이 아니라 바로 너 때문이다!” 그 순간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통회 자복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면서 나 자신의 삶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 시작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 자신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아내도, 교인들도 변화되는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가정도 새로운 행복을 되찾고, 교회도 놀랍게 부흥될 수 있었다.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릴 때마다 지금도 은혜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는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할 때이다. 말씀에 비추어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삶을 돌이켜야 할 때이다. 내가 먼저 변화되는 삶을 통해 상대방도 변화된다. 그리하여 성경적 부부 관계의 회복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분명히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상담자로서의 부모
김형준교수

한 덩이의 찰흙

한 덩이의 고무찰흙을 들고 한가하게 모양을 빚었다.
내 손가락이 가만히 눌러주면 찰흙은 움직이며
내 뜻을 따라주었다.

며칠이 지나 다시 왔을 때에는 찰흙이 굳어져 있었다.
내가 남긴 모양은 그대로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모양을 바꿀수 없다

이제 나는 살아있는 찰흙을 손에 들고
매일 매일 부드럽게 그것을 빚는다.
그리고 나의 힘과 예술로 그 모양을 이루어간다.
어린 자녀의 부드럽고 순종적인 마음을

수년이 지나 내가 다시 와 보았을 때
그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어릴적 모습(impress)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이제 그 모양을 바꿀 수 없었다.

작자미상(Betty N. Chase의 ‘인격적인 사랑, 효과적인 훈육’ 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녀는 소망, 믿음,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선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알 수 있다면, 자녀를 통해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위를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자녀에 대해서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커다란 과제를 맡기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다. 즉 부모인 우리를 통해서 무한히 잘못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귀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밭과 같은 자녀를 어떻게 기르고 가꿀 것인지 걱정이 아니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귀한 선물을 어떻게 아름답고 귀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도 부모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바로 그 자녀에게서 병든 부분을 발견했을 때에는 매우 당황하게 된다. 자녀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성장과 행동으로 부모들을 근심시킬 때에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을 도와야 할지 걱정부터 앞서게 된다. 짧은 지면이지만 우리의 자녀들에게서 문제행동과 생각을 발견할 때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해보자.

위의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녀상담은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우리의 자녀는 계속 성장과 성숙의 과정속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매 시기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그 원리가 동일하거나 비슷하기도 하지만….
둘째는 매 순간 순간이 자녀를 만들어가는 위기라는 것이다. 즉 위험한 기회가 된다는 것이 다. 문제는 부모 자신이 위기의식을 못 느낀다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 자녀에게는 결 정적인 시기였다는 것을 결과로 보게될 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자녀들에게 문제가 보일 때 두려워하거나 걱정하기 이전에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숙해 간다는 사실 을 먼저 생각하면 훨씬 더 여유있게 자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셋째로 자녀는 우리 부모의 마음과 행동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녀가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모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는 구조가 많 은 경우 부모에게 있기 때문에 부모자신이 자녀를 상담한다는 것이 어려울 경우가 많다 는 것이다. 즉 부모 스스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기가 어렵게 된다.

자녀상담에 대해 첫번째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자녀와 평소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부모가 자기의 입장에서 자녀를 대하면 관계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자녀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를 맞추어서 대하게 될 때 자녀의 문제는 반 이상 부모들에 의해서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자녀들과 평소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몇가지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1) 사랑의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자녀들마다 자신들이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받고 싶어한다. 그런데 자녀들의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다. 자녀에 따라서 부모가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잦은 피부의 접촉을 사랑으로 느끼기도 한다. 필자의 상담경험을 통해서 볼 때 많은 자녀들이 부모가 자신들을 만져줄 때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가 자녀들의 한 일에 대해서 인정해줄 때 사랑을 느낀다고 생각한 반면, 부모가 항상 자신과 함께 있어주고, 자기의 일을 같이 더불어서 해줄 때 사랑을 느꼈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같은 자녀라도 각각 다른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자녀들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열려질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언제든지 잘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자녀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는 기억을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녀들의 가슴에 정서적인 터치(touch)가 이루어졌을 때이다. 월터 버드(Walter Byrd)가 지은 아동상담(Counseling and Children)에 보면 자녀들의 마음이 열려있을 때는 다음과 같은 경우라고 했다. a) 유머의 시간들 b) 자녀가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 c)자녀가 신체적으로 좋지 않을 때 d)정서적인 고통을 겪을 때, 즉 상실이나 소외 혹은 실망한 때 e)자녀에게 의미있는 강인한 경험을 했을 때라고 말하였다. 실제로 내 아내는 잘 먹지않는 복숭아 통조림을 자주 사곤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어릴적에 아팠을 때 아버지가 사다주었는데, 지금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울 때마다 사게 된다는 것이다.

3) 자존감을 세워주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존감이란 날 때부터 경험하는 수많은 것중에 자신에 관한 기억의 다발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서는 자녀로 하여금 남다른 용납과 수용 그리고 일체감을 가족안에서 갖게 하는 소속감, 자신이 가족에서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는 가치관, 그리고 어떤 일에 성취감을 가질 수 있도록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서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자존감이 건강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자녀는 자신이 겪는 많은 일을 건설적으로 처리해가게 된다.
이러한 것은 자녀가 바람직하게 성장하게 하는 예비상담이요 교육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이나 관계속에 자라는 자녀는 건강한 자녀가 되는 것이고 많은 경우 어떤 일이라도 부모와의 관계속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두번째로 자녀 주변의 환경을 진단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특히 나이가 어린 자녀일수록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환경이란 자녀 주변의 환경인 학교, 교우관계, 재정문제, 학습문제등 평소에 별로 관심두지 못했던 부분까지라도 점검하며 확인하는 것이 중요해서 문제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자녀상담을 위해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세번째로 생각해야 할 경우는 자녀의 문제행동을 발견하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평소에 위에서 말한 관계를 자녀와 맺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되지 않는 경우나 부모가 자녀와의 관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이 경우 평소의 관계와 태도로 행동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때에는 전문가와 상의해서 그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조건 전문가에게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녀의 문제행동을 관찰하고 메모해서 상담하는 것이다. 먼저 문제행동과 생각이 무엇인가를 파악한 다음에 문제 행동의 빈도, 6하원칙에 의한 관찰(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 누가 등), 문제 행동 전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간접적인 원인, 문제행동후의 자녀의 태도, 그리고 자녀의 친구관계등을 잘 관찰하여서 전문가와 상담을 한다면 효과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부모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칠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부모의 평소의 삶의 태도가 무척 중요하게 느껴진다. 재미있는 현상은 자녀문제를 가지고 시작한 상담이 부모상담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경우이다. 그리고 부모의 변화가 자녀의 치유를 위한 기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안의 치유
이금만 교수(본원교수, 한신대교수)

「마치 누군가 쫓아오는 것처럼 불안합니다」「심장이 울렁울렁거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습니다」「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습니다」불안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말입니다. 불안은 무엇일까요? 불안은 특별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인간의 기본적인 반응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때에 불안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먹이를 노리는 굶주린 맹수의 눈초리를 눈치챈 토끼는 극도의 불안을 보입니다. 그래서 토끼는 줄행랑을 치게 되지요.

1. 일반불안과 병적 불안
사람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위험이나 고통이 예상되는 상황이나 특별한 노력이 요구되는 때에는 긴장이 되고 불쾌해집니다. 불안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정상적으로 누구나 느끼는 일반불안이고 다른 하나는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느끼는 불안이나 정도가 지나친 불안과 같은 병적 불안입니다. 일반불안은 정도의 차이는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는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경우로 예를 들자면 금방이라도 물 것처럼 심하게 짖어대며 달려드는 개 앞에서는 누구나 불안을 느끼게 되지요. 운전을 하고 가는데 앞차가 차선을 오락가락하면서 운전을 하면 역시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중요한 시험을 앞둔 전날에는 불안합니다. 이렇게 불안은 그럴만한 경우에는 누구나 느끼는 것이고 이런 일반불안은 그런 상황 이외에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적 불안은 다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불안을 느끼고 이런 불안이 반복되며 그렇게 불안해야 할 상황이 아닌데도 지나치게 불안해 합니다. 불안하다고 호소하는 정신장애를 불안장애라고 하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광범위한 영역에서 불안만을 호소하는 범불안장애, 마치 심장마비처럼 가슴이 아프면서 금장이라도 죽거나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공포를 경험하는‘공황장애’특정한 대상에 대해서만 불안을 느끼는‘개별 공포장애’대인관계나 많은 사람 혹은 낯선 곳에서만 불안을 느끼는‘사회공포’등이 있습니다.

또한 생각이나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는‘강박장애’심각한 재난이나 사고를 겪고 난 후 생기는 외상후‘자극장애’급성의 스트레스 후에 불안을 느끼는‘급성스트레스반응’등도 이 범주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2. 불안의 증상 및 그 원인
불안을 느낄 때 나타나는 증상과 이를 줄이거나 없앨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긴장과 불안을 느낄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신경질적인 반응과 함께 신체적인 증상이 나타납니다. 화가 났거나 흥분했을 때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심장박동이 강하고 빨라지며, 손바닥에 땀이 나고 소변을 자주 보게되며 소화기의 기능이 떨어져 소화가 잘 안되고 배가 더부룩해지거나 가스가 차는 것 같고 배변 습관의 변화가 오기도 합니다. 또한 불면증이 나타나고 두통이 자주 생기기도 합니다. 행동에도 변화가 생겨 말소리가 빨라지거나 커지기도 하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을 냅니다. 평소가 달리 중요한 일이나 물건을 잊어버려 기억력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의심합니다. 또한 증상이 반복되면 신체적인 큰 병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도 하지요. 물론 불안을 유발시키는 질환에는 여러 종류의 불안장애 뿐 아니라 다양한 신체질환도 있어 갑상선기능의 이상, 부갑상선기능의 이상, 심혈관계의 질환, 저혈당 및 약물이나 알콜의 금단으로 인한 증상 등이 불안을 야기시키는 대표적인 질환들입니다. 그러나 불안이 반복되거나 상황에 맞지 않게 지나친 경우가 아니라면 그것은 일반불안입니다. 대개 불안과 긴장감은 정상적인 반응의 한가지일 뿐 어떤 심각한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자신이 너무 긴장된 상태에 있지 않나 돌이켜 보고 왜 긴장하고 있는지 이유를 차분히 따져 보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긴장과 불안을 느낄 때 어떤 감정과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는지 알아야하지요. 불안의 이유와 증상이 나름대로 정리가 되었다면 그 이유를 해결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하며 만일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가능하다면 자신의 문제를 친한 친구나 친지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또한 불안과 긴장으로 인한 신체증상은 각종 이완방법, 명상, 요가 등 긴장해소의 방법을 습득하므로서 많은 부분이 경감됩니다. 그러나 단기간의 효과를 위해서 음주를 한다든가, 약물을 복용하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의 불안한 감정이나 신체적 증상이 당신을 지나친다면 상담가나 의사를 찾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시 한번 불안의 원인 및 증상을 살펴보지요.
⑴불안증 원인 및 증상 : 불안은 자율 신경계의 활동증가로 인해서 여러 가지 증상이 야기 됩니다.
첫째, 근육계통의 긴장이나 경련으로 인해서 피로가 오고 근육통이 심해집니다. 안절부절못 하고 한숨이 많아지죠.
둘째, 가슴이 두근거리고 답답하며 식은땀이 흐르고 손발이 차거나 저리고 어지럼증이 동반 됩니다. 오줌이 자주 마렵고요. 그래서 흔히 내 신체에 이상한 병이 생긴 게 아닌가하 고 여러 병원을 전전합니다.
셋째, 지나친 근심이나 걱정이 많아서 자신감을 잃고 결정을 신속하게 하지 못합니다. 교통 사고 기사만 봐도「오늘 내가 교통사고 당하는 것은 아닌가?」이렇게 해서 병적 불안 에 빠진 사람들은‘예기불안’이 많아집니다.
넷째, 조심성이 지나쳐서 괜히 살피게 되고 또 참을성도 없고 조급하고 짜증이 나고 불면증 악몽에 시달립니다. 이래서 불안이 장기화되면 막연한 이런 증상들이 점점 악화돼서 나중에는 소화가 안되거나 설사, 변비, 두통 등의 증상을 유발합니다. 불안의 원인에 대해서는 유전이 된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불안해질 소인은 타고나는 걸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첫째, 불안은 물론 나이에 따라서 여러 가지 원인이 달라집니다. 가령 어릴 적에는 어두운 곳이나 혼자 있는 것 혹은 동물을 무서워하게 되죠. 그러나 자라면 차츰 이것은 적어 지면서 사춘기에 오면 이젠 이성이나 건강, 자위행위에 대한 불안을 갖게 됩니다.
둘째, 신체적인 요인은 월경 직전이나 폐경기 때로는 갑상선에 이상이 있을 때 불안해지기 때문에 신중한 감별진단을 요합니다. 신체적인 과로나, 만성질환, 뇌신경질환도 물론 불 안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심리적으로는 어릴 적에 혼난 경험이 있던 사람들은 그의 경험이 잠재 의식화되어서 그와 비슷한 성황에 놓이게 되면 불안해집니다. 가령 전쟁에 혼난 사람들은 비행기 소 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불안해지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넷째, 가정환경이 다소 완고하고 무서운 보무 혹은 반대로 과보호 부모 하에서 자란 사람이 이런 불안에 걸릴 요인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는 다소 미숙하고 의존적인 성 격이 많습니다. 대체로 불안은 그 요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환자는 가 령 시험 때문에 혹은 사업실패 때문에 불안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럴 경우 그럭저럭 견디는데 왜 굳이 이 환자에게만 불안이 심해지느냐의 문제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통상 병적 불안을 불안장애라고 부릅니다.

3. 불안의 치유
불안은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하면 상당히 오래갑니다. 물론 사회생활에 곤란을 느끼거나 지장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자들은 그럭저럭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는 있습니다. 때로는 불가능해서 입원을 해야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안하면 환자들은 과음을 하는 경향이 있거나 혹은 약물을 남용하지만 장기간 복용함으로써 습관성 중독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성격이 굉장히 충동적으로 되어서 자포자기하거나 혹은 사고를 일으킬 위험도 많아집니다. 또 불안이 치료되지 않고 오래가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직업상 혹은 가정생활에 지장이 오기 때문에 이차적인 우울증으로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불안의 치료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안이 꼭 병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했을 때 불안해지는 것은 그 일을 잘하기 위한 생리적인 준비라고 보시면 됩니다.

혹은「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은 어떨까?」「이것이 정말 나만의 문제일까?」가령 시험 때 불안해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잇지요. 따라서 이것이 곧 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상적이라는 사실부터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안하면「그 상황이 과연 나만의 문제일까?」합리적인 판단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불안하다고 당장 당황하거나 놀랄 필요 없이 이것은 자율신경계를 오히려 더 자극해서 불안을 악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조용히 하고 불안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물론 불안의 원인을 찾는데는 정신 분석적인 길고도 힘든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가령「내가 왜 이런 상황에서 불안할까?」하고 생각해 보면 대개 그 원인을 나름대로 짐작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자기 심경을 솔직히 털어놓고 자기 불안상태를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순서입니다. 여하튼 혼자 끙끙거리고 앓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불안하면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합니다. 누가 봐도 불안이 완연하게 초조해서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그것은 참 좋습니다. 어쨌든 안정하려고 억지로 앉아 있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불안이라는 것은 사람을 긴장하고 초조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럴 때는 오히려 적당한 운동이 좋습니다. 산책을 한다거나 혹은 가벼운 맨손체조라도 하는 것이 근육이 이완을 하면서 불안을 이기는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은 불안하면 술이나 약물을 복용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이 일시적인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래 사용하면 항상 습관성 또 충동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따르기 십상입니다. 따라서 신경안정제의 처방은 전문의의 진단과 전문의의 지도하에 복용하는 것이 원칙이 되겠습니다. 전문의는 신경안정제의 약리작용이나 또 작용기전 혹은 환자의 상태가 불면증이 있거나 또는 흥분 상태등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신경안정제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우선 약물은 일시적인 증상완화에 그치는 것이지 근본적인 치료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대개 급성증상에만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요. 대개 불안이 심각한 사람들은 처음 2개월에서 3개월은 약효가 있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내성, 습관성이 생겨서 약효가 떨어지게 되죠. 그러니까 약이 양을 증량하게 되어서 결국은 이차적인 약물 습관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만들기도 합니다. 해서 항상 전문의의 치료 감독 하에 약물을 복용하되 이것만으로는 안되고 항상 전문의와의 상담이나 정신치료를 겸해야 되겠습니다. ⑷ 급성불안 발작 및 공황장애: 극심한 불안증이 발작적으로 오는 상태를 공황장애라고 합니다. 이것은 금방 숨이라도 넘어가고 막 죽을 것 같은 심한 불안상태입니다. 이러한 발작은 아무 이유 없이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벼락처럼 나타나는 것이 특정입니다. 이러한 공황장애 증상은 불안보다는 그 증상의 정도나 강도에서 훨씬 심각하고 충격적인 것이 따릅니다.

4. 급성불안 증상
첫째, 호흡이 가빠지고 막 숨이 막힐 듯이 아주 갑갑한 상태입니다. 둘째,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는 통증이나 압박감을 나타냅니다. 갑자기 어지럽고 휘청거리면서 졸도한 것 같은 느낌도 동반합니다. 또 손발이나 온 몸이 떨리고 저리고 또 식은땀이 흐르는 등 온 몸에 땀이 비오듯합니다. 막 질식할 것처럼 말도 못하고 손만 내젓는 경우도 있습니다. 속이 불편하고 메슥거리는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혀 세상을 이상하게 느끼고 어딘가 바뀌어 진 듯한 이런 비현실감도 동반됩니다. 화끈한 열감이나 또는 반대로 차가운 느낌을 느낄 수도 있고 환자들에게는 막 죽을 것 같다는 표현이 적당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심장병이 아닐까?」「이게 심장마비 아닌가?」하고 굉장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제력을 잃을 것 같은 공포에 몸을 떨기도 합니다.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면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도 상당히 놀라고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러한 급성발작은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몇 분이 지나고 나면 다소 가라앉는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제2의 발작으로 인해서 극도의 정신과민에 빠집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작은 불안증세에도 다시 그러한 공황발작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예기 불안에 떨게 되는 것이 이러한 공황발작 증상이 특징입니다.

5. 급성불안 경과와 발병단계
이 병은 대체로 20대 혹은 30대에서 발병하며 전체 인구의 약10%안팎이 이 병을 한때는 앓습니다. 이러한 급성발작이 만성적으로 반복되는 사람도 전체 인구의 약 1%정도는 되는 것으로 알져 있습니다. 특히 남자인 경우 맨 주먹으로 성공한 사람들, 이제 출세 가도를 달리며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이러한 금성공황 발작을 경험함으로써 상당히 충격을 받고 절망적으로 빠져 들 수도 있습니다. 이 병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치면 진행이 됩니다.
첫째, 가벼운 불안 증상이 예비단계로서 어느 기간 오고가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공황발작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하면 가슴이 뛰면서 질식할 것 같고 곧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쌓이게 되죠. 그래서 가던 차에서 내려서 응급실을 찾게 되고 응급실에 이러한 사람이 찾아오면 금방 죽을 것 같은 심장병을 맞는 이러한 법석을 떨게 됩니다. 그러 나 검사상 별 이상은 없습니다.
셋째, 이러한 발작을 한번 경험하면 자기에게「혹시 심장병이 있는 것은 아닌가?」「갑자기 죽을병이 걸린 게 아닌가?」하는 건강 염려 단계에 들어가고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여 러 병원 심장 전문의를 이곳저곳 찾아다닙니다.
넷째, 그 다음의 경우는 일단 한번 발작이 되면 이러한 상황을 회피하게 됩니다. 대체로 사 람이 붐비는 백화점이나 혹은 극장 또 터널 승강기등 만약의 경우자기가 빠져나가기 힘든 상황을 회피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비행기를 못 탄다던가 또는 장거리 버스를 못타는 등 이런 사회생활에 많은 제약이 따르게 됩니다. 혼자 외 출도 물론 못하고 장거리 출장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래서 혼자 못 있고 안심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지 그래도 지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심각한 우울증 단계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리고 직장생활도 어려워지고 가족관계도 이 정도 되면 많은 갈등과 곤란을 경험합니다. 대개 병적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중 30-50%가 결국은 우울적 단계로 발전되는 것이 이 공황장애의 전반적인 진행단계가 되겠습니다.

6, 급성불안 원인과 그 치료
급성불안은 정상인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불안증이 있다거나 혹은 공장 공포증 같은 질환에서 흔히 병발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사회 심리적이 원인보다는 최근에는 생물학적인 원인을 더 중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치료는 우선 정확한 진단에서 출발합니다. 급성불안은 심장병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심장병은 이 병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고 심장은 더 튼튼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갑상선 기능과의 감별진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성장환경이나 성격적인 측면도 고려해야되고 다른 정신질환과의 감별 진단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신과 전문의의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치료는 최근에 개발된 약물치료가 주류를 이룹니다. 급성 발작은 수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응급실에 환자가 도착할 때는 대체로 급성기는 지난 후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극심한 공포에 떨고 있고 아직도 증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대개 응급실에서는 발륨을 정맥 주사하게 되고 이것은 신통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둘째, 발작이 지난 후에도 환자들은 다음에 발작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예기 불안에 떨게 됩니다. 그래서 발작을 치료하거나 혹은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최근에 개발된 알프라졸람 혹은 이미프라민 등의 약물을 병용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한 두 번 발작이 있으면 물론 병원 진찰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환자가 명심할 일은 합성발작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이것이 죽을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또 수분만 지나면 이 급성발작은 경과하게 되고 다시 평온한 기분으로 돌아가는 것도 사실인데도 환자들은 마치 그 수분동안이 평생 가는 것처럼 그렇게 견디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환자는 진정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황하거나 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 점점 증상이 악화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체로 이럴 경우에 의사들은 비상약을 처방하게 됩니다.

그래서 발작이 오면 비상약을 먹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되겠습니다.
끝으로 이 급성불안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의 예방교육이 중요하고 또 인지적인 행동요법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고 큰 정신과 병원에서 이런 치료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또 자기 최면을 통해서 근육의 긴장이라든가 초조한 기분을 이완시키는 요법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7, 시험불안 치료
정서적으로 가장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청소년기에 또 하나 적응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시험불안입니다. 같은 스트레스를 받아도 개인에 따라 그 해결방법이 다르듯이 시험불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학생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실력은 아주 우수한데 시험성적은 좋지 않은 경우가 있고 반대로 항상 여유 있게 지내며 별로 시험준비를 하지 않는데도 유독 성적이 잘 나오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능력을 가진 경우라면 시험불안의 차이일 것입니다. 시험상황에서는 과제 수행욕구와 불안욕구의 두 가지 종류의 욕구가 일어납니다. 전자는 과제수행을 촉진시키는 반응을 일으키지만 후자는 과제수행을 촉진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방해하기도 합니다. 시험불안은 시험 보는 상황을 어렵고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며 자시자신은 그 상황을 이겨낼 능력이 없는 것으로 여기며 자기자신은 그 상황을 이겨낼 능력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때 일어납니다. 부정적인 결과만 연상하며 실패할 경우 남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다라서 그러한 상황을 자꾸 피하고 싶어합니다.
또 이러한 시험불안은 걱정의 감정을 불러 일으켜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위장장애나 기억력 장애 등의 증상을 유발시키며 심하면 공황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험불안이 높은 경우 문제에 주어진 단서를 찾아내는 능력이 감소하고 기억한 것을 다시 상기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험불안이 높은 그룹이 대학입학 수학능력고사 성적이 낮다는 연구결과가 보고되었습니다.

'수학에 대한 공포'는 시험불안의 한 형태인데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더 큽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남녀간의 성별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학습과정과 여학생들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부정적인 생각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시험불안을 이기는데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정신치료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문제해결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반추하는 경향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여러 가지 행동치료를 통해 불안을 낮추거나 학습습관을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가족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시험 불안형성에는 가족, 특히 부모와의 관계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 학생들은 시험볼 때 부모의 기대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을 많이 느끼고 있으므로 가족들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8, 나가는 말 : 불안과 신앙의 치유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을 품은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요일 4:17-18) 만군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전지전능하시며, 선하시며,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신뢰할 때,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신뢰와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 분이 주시는 평안을 맛보지 못하면 근본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나라를 구하면 그 외의 모든 것은 채워 주신다는 약속을 믿으면, 불안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문제에 맞서 예수님은 자신을 지탱해 주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마4:4) .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문제에 맞서 예수님은 힘을 주실 하나님께만 신뢰를 두십니다. (마4:7)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진정 가난해지기로 결단을 내릴 때 재물과 소유에 얽힌 불안을 극복하고 아무 것도 손에 들지 않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마 5:3)

임마누엘(히브리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신앙으로 나아갈 때 그 분의 위로가 상실과 죽음, 고통에 대한 불안을 극복시켜 줍니다.(마 5:4)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부드러움으로 우리는 파괴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그리고 그 결과로 일어나는 파괴행동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마5:5) 옳지 않은 일을 갈망할 때 우리는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를 때 만족을 얻습니다.(마5:6)남을 용서할 때 내 안에 있는 용서의 은총이 나에게도 부어져 불안에서 벗어납니다.(마 5:7)질투와 정욕, 야망과 이기심, 소유욕을 버릴 때 불안을 치유 받습니다.(마5:8) 주님의 평화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갈등과 분쟁, 파괴에서도 일치와 자유를 느끼게 되고, 그에 따른 불안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마5:9)

예수님과 함께 고난 당하기를 원할 때, 그분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그것과 관련된 불안을 천천히 없애주십니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마주설 수 있는 힘이 생기가 좀 더 평화 가운데 그것과 대결해 갈 수 있습니다.(마 5:10)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심으로 그들을 남겨두고 가시는데 불안을 이겼습니다.(요 17:5-11)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서 하나님 없이는 허무와 무기력함 태산같은 불안을 이길 수 없음을 경험하십니다.(눅 22:39-46)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나님께 청하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빌4:6-7)
"한량없이 풍요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채워 주십니다. (빌 4:19)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청하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심을 굳게 믿습니다(요일5:14).
「우리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7).「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맙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알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마6:31-34).
「하나님 저를 지켜 주소서. 주님은 나의 방패, 나의 행복이십니다. 내 옆에 당신 계시면 흔들릴 것 없습니다. 기쁘고 즐거워 걱정 없습니다」(시62).「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주시는 분 오직 하나님이시라네」(시131).

감정과 사랑의 차이
조원욱 교수(영성상담연구소장)

인간에게 주어진 생은 짧다. 또한 사람마다 특성이 다르고 생각이 같지 않으며, 의식을 지배하는 무의식 창고가 개개인의 내면 세계에 있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의식하는 기관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숱한 감정의 표출이 생겨난다. 어떤 마음(편안, 불안 등)이냐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며 그런 상황을 사진 박듯 그려내는 것이 자화상이다. 자화상은 우리의 생명이 존재하는 한 일초도 쉬지 않고 그려지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인격)이 만들어진다. 흔히 타인을 보면서 쉽게 하는 말이 있다. "저 사람 참신한 인격자 같다." 또는 "저런 자도 인간이냐?" "짐승보다 못한 인간" 등 하나같이 보여지는 겉모습으로 우리들은 인간의 전부를 평가, 판단하며 더러는 자기경험대로 보고 태초에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인격조차도 매도해 버린다.

한때는 사랑했던 가까운 사람, 절친했던 사람 사이에 이러한 문제가 때때로 일고 있어 마음 아프게 한다. 여기서 자기 인격이 짓밟힘을 당한 쪽은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삶의 욕구나 생에 대한 애착도 상실하여 자포자기, 우울증, 정신질환, 급기야는 소중한 목숨조차도 버리는 슬픈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을 바라봄에 있어서 보여진 겉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저 사람 속에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 "깜짝 놀랐다" "다시 봐야겠다." "대단하다" 등등 자기 주관적인 판단에서 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눈빛만 보아도 무엇을 말하고 또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내 감정 즉 마음이 평안할 때 말하는 것일 뿐 내가 화나고 상대방이 내 마음을 볼라준다고 느껴지는 순간부터 사랑은커녕 원수처럼 보여서 꼴도 보기 싫은 지경이 되고, 고통을 아무리 외쳐도 내 귀엔 들리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이 세상에 참된 사랑으로 가족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강도 만나 쓰러진 이름 모를 이웃에게 선뜻 다가가서 값비싼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줄 사람은 누구이며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있는 것 다 내어주므로 그의 아픔을 치료해줄 사마리아인의 자격이 과연 우리들에게 있을까? 참 사랑이란 끊임없는 관심이다. 관심은 곧 불안을 평온으로 덮어주는 추운 날 외투와 같아서 어떠한 어려움이나 고칠 수 없는 질환까지도 다스릴 수 있게 한다. 이런 것들이 머리로는 쉽게 이해되지만 실천하기란 무척 어렵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감정의 희비가 무쌍하여 불같은 감정을 억제할 통제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가령 내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이 심한 통증을 동반한 증상을 가졌다 해보자. 기분 좋을 때는 빨리 완쾌되기를 기도하고 약도 구해주고 영양분이 많은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며 극진히 섬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내 마음에 좀 안 들거나 기분이 상한 말이라도 몇 마디 한다면 일분도 안되어 자신의 변해 있을 모습을 볼 것이다. 일그러진 표정과 분노의 눈, 독기 찬 혀와 증오로 뒤덮여진 감정이 이글거리는 것을… 이러한 악마처럼 돌변한 내 모습이 상대에게 심각한 자극이 되어 병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그때 나의 들뜬 감정(분노, 증오, 억울함, 원망, 미움 등) 은 상대방의 좋았던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도록 철저히 축대를 높이 쌓아 올리고 "어쩌면 저럴 수가 있느냐" "더 이상 못 참겠다." "나는 할만큼 했다." "억울하다" "너무 한다" "괴롭다" 등등을 외치며 온갖 자기 변명거리로 상대방의 입을 막아버린다.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도록 짓눌러 숨통을 조이면서도 "나는 할만큼 했노라" "최선을 다 했는데 상대가 기대치를 세워놓고 나를 괴롭혔을 따름이다" 라고 자기를 합리화한다. 마음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던 일이 잘 안되면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고 상대가 잘못하여 그렇다고 원망한다. 내 속에 쌓인 감정의 응어리, 쓴 뿌리가 뽑아져 내 자신이 천사의 마음을 가졌을 때에는 자기 기분(감정)에 좌우되는 친절이 아닌 무조건적 사랑으로 행하게 된다.

오래 참음(편한 마음으로 이해해줌)으로 상대방이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들의 숙원이자 신앙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내면에 뿌리 박힌 쓴 뿌리를 제거할 수 있을 때 퍼주어도 다시 채워지는 샘물처럼, 우리들 가슴속에는 사랑하므로 참을 수 있는 기쁨이 솟아날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내적 치유를 받아서 외부에서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마음, 건강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상대방이 결점 투성이고 못나 보일지라도 사랑으로 푸근히 안아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주는 파랑새가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정태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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