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내용!! 강해!!

[스크랩] 고린도전서 강해

하나님아들 2013. 4. 2. 23:19

고린도 전서 강해

1 Corinthians

 

 

 

 

Ⅰ. 서 문

 

 

1. 고린도의 상황

 

고린도(Korinthos)는 아가야(Achaea) 지역에 있는 그리스(grease) 주요 도시로서,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수스’(Peloponnesus) 지역을 연결하며 ‘에게해’(Aegean Sea)와 ‘아드리아 해’(Adriatic Sea) 사이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B.C4000년경부터 로마의 뭄미우스(Mummius, Lucius)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지역적으로 북부 그리스를 연결하고 도시의 중심부는 동서를 이어주는 전략적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B.C46년 가이우스 쥴리어스 카이사르(Caesar, Gaius Julius)에 의해 재건되어 로마의 관심 속에 급속히 성장하였다.

 

고린도는 두 큰 항구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고린도만 하단에 있는 ‘레키움’이며 그곳에서 이탈리아와 서방으로 무역하였다. 다른 하나는 조금 떨어진 켄그리아라 불리어지는 곳으로 ‘시누스 사로니쿠스’ 하단에 있다. 이곳에서는 아세아로 무역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고린도는 선로(船路)의 요충지가 되었고 급기야는 해양무역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고린도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야외극장, 운동경기장, 각종 지방 신전 등을 골고루 갖춘 경제, 문화, 종교 도시로 성장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급속적인 발전은 사치와 환락과 매춘이 성행하여 도시를 온갖 죄악으로 오염시켰다. 고린도의 타락상이 극에 달하여 ‘코린티안 죠마이(고린도인 처럼 행하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이 말이 시대적 상황을 지적하는 의도로 사용됨에 따라 ‘매춘 행위를 하다’라는 의미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함께 극한 우상숭배와 음란이 교회 안에까지 침투하였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도착했을 당시는(A.D 50년경) 5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었으며 부와 쾌락의 도시였고 아가야의 수도였다. 고린도의 가장 높은 곳에는 ‘아프로디테’ 라는 신전이 있었고 그곳에는 약 일만 여명의 창녀가 신전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그밖에 ‘세리비스’, ‘아시스’라는 신전도 있었다. 특히 ‘이스두무스’에서는 올림피아 다음가는 인기 있는 운동경기가 2년마다 열리는 경기장이 있었다.

 

 

 

2. 고린도 교회

 

아덴을 출발하여 고린도에 이른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유대인 부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고(행18:2),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하였으나 핍박을 받아 회당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회당 옆 유스도의 집에 거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회당장인 그리스보가 그의 가족과 함께 믿게 되었다(행18:7-8). 바울은 고린도에 약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다.

 

고린도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다(고전12:2). 또한 그들은 사회적으로 하류에 속한 사람들이다(고전1:26이하).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적잖았으며 상류계급과 부유층 신자들도 더러 있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 교회에는 아굴라가 전도자로 있게 되었다. 아굴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왔으며 웅변에 능했으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다(행18:24 이하, 고전3:5 이하).

 

세계적인 대도시이자 항구 도시이며 부유한 상업의 중심지고 아가야의 수도인 고린도는 우상 숭배와 부도덕으로 유명하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로서 국제적 무역이 성행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도시였지만 부도덕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고대의 어느 작가는 ‘고린도인’이라 불리 우는 것은 곧 간음자라 불리 우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였다.

 

3. 고린도 전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에게 여러 가지의 문제에 대한 질의서를 보낸 것에 대한 답으로 기록하였다(고전7:1). 또한 고린도 교회에 대한 아름답지 못한 소식에 대한 올바른 도리를 증거 할 목적으로 본서를 기록하였다.

 

1) 성적인 면에서 추한 사실을 고린도 교회가 용납한 일이다.

[예 : 자신의 계모와 동거한 사실(고전7:1)]

2) 창녀들과의 유희를 서슴지 않는 신도들이 있었다(6:12이하).

3) 결혼 생활이 일종의 죄라는 사상이 교회를 혼란하게 하였다.

4) 교인들의 분쟁을 세상법정에 의존하는 일이 있었다.

5) 우상의 제물에 대한 교훈

6) 교회내의 교제에 대한 불공평에 대한 교훈

7) 은사와 부활에 대한 진리를 증거 하였다.

8) 교회 내에 분파에 대한 교훈.

 

4. 저작 시기와 장소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을 하였을 때 후반기에 기록하였다(행16:8,19절). 저작 시기는 54년이나 55년으로 본다.

 

 

5. 고린도 전서의 특징

 

영적인 교훈과 판단을 강조하여 특히 교회 내의 여러 가지 질서와 교인들의 영적 자세에 대하여 가르치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강하고 직선적인 서간문으로 교리적이기 보다는 실제적인 서신으로 초대 교회 당시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어 초대 교회의 내면생활 및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학적 가치가 큰 본 서신은 현대의 타락상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며 현금 교회 문제의 대책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6. 교훈적인 내용

 

신학적인 측면보다는 실제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어버이가자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에베소에 있을 때 분쟁 중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본 서신을 통해 고린도 교회를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당부한다.

 

우리는 본서를 통해서 초신자들은 주위의 환경에 의해 곁길로 인도되기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술꾼들, 사기꾼, 부도덕, 간음 등 온갖 부도덕한 행위들이 고린도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러한 타락에 물든 이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도 부인하기에 이른다.

바울은 본서를 통해 이 교회의 문제점들을 신학적 관점과 실천적 관점에서 다룬다. 그는 교회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권고하며 사랑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보리라고 당부한다. 즉 그들이 비록 재능이 있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또한 육체적 순결과 행복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잘 자라고 발전하는 진취적 교회가 되도록 교회 신자들과 교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비전을 가졌는데 이 편지에서 바울은 사랑이란 진실로 너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삼는 것임을 논증하고 있다.

 

 

 

 

 

 

 

 

 

 

7. 내용분해

 

1장- 4장 분쟁에 대한 견책 ┓* ‘글로에’ 보고에 대한 견책

5장- 6장 성(性)에 대한 견책

7장 혼인

8장-10장 우상제물

11장 성찬 * 고린도 교회의 편지에 대한 답변

12장-14장 은사

15장 부활 ┃

16장 마지막 인사 ┛

 

 

구분

글로에 보고에 대한 견책

고린도 교회의 편지에 대한 답변

분해

분쟁

1 4

성(性) 문제

혼인

7

 

우상

제물

8 10

 

성찬

11

은사

12 14

 

부활

15

마지막 인사

 

16

음행

5

소송

6:1-8

성(性)

6:9-20

표제

공 동

개 인

공 중

비 행 성 도

불신성도

개관

저 자

쓴 곳

쓴 때

장 수

절 수

요 절

바 울

에베소

AD55년

16 장

437절

2장7-8절

 

 

 

 

 

 

 

 

 

 

 

 

Ⅱ. 본문강해

 

제1장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세지

 

 

 

역사적배경

 

당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르친 교리의 내용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2차 전도여행 차 ‘에베소’로 떠난 후에 예루살렘교회 전도 파송대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에 대하여 가르친 것이 바울의 ‘오직 믿음으로만’과 다른 것이었다. 궁금증과 의구심이 강한 고린도 교인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질문과 해명을 요구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은 유대인들의 예를 들면서 ‘우리 유대인들처럼 필요하다면 할례도 받아야 하고 때로는 절기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말의 신빙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도들이 발행한 ‘천거서(교사자격증)’를 내 보이게 되었다. 가뜩이나 스데반의 죽음과 다메섹 사건으로 인하여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는 터에 이방인에게까지 배척을 받게 되면서 고린도 교회는 파당이 생기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구심을 강하게 나타내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서라 할 수 있다.

 

 

 

내용분해

 

1- 3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

4- 9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

10-17 소문 (온전히 하나가 되라)

18-25 십자가의 도

26-31 참 사랑 (주 안에서 자랑하라)

1:1-3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

 

1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소스데네’ -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으로 유대인들이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송 사 했을 때 바울 대신에 그들에게 매를 맞은 사람으로 추정된다(행18:12-17).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 당시 사도의 자격은 ①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자 ② 예수님께 친히 가르침을 받은 자 ③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였다. 그러나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 사도의 사명을 부여받았지만 공적으로 인증할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었다. 이에 대한 바울의 해명이다.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의 이상에 속한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교회임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의 ‘고귀한 이상’과 ‘음행과 우상숭배의 허탄함’을 극명하게 대조해 주는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고린도 교인들과 그 이외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거룩하여지고’(ἡγωσμένοις,흐고스메노이) - 완료형 과거분사. 하나님의부르심을 입었고 그 결과 이루어진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 유지됨을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두 부류의 성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어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②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에 의지하며 닮아 가기를 힘쓰는 많은 사람들에게.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또한 우리들은 그분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자녀는 당연히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입게 된다. 그렇지만 모든 공급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 ‘좇아’(ἀπό...로부터). 하늘의 은혜와 평강이 예수 님 때문에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사실을 말해 준다.

‘은혜와 평강’ - ① ‘은혜’, 값으로 계산 불가한 것을 대가 없이 주시는 선물을 말한다. ② ‘평강’, 분쟁과 싸움이 없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축복이 있어서 풍요로운 영적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1:4-9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

 

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는 첫째 구원의 은혜가 있고 둘째는 각종 은사가 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Εὐχαριστώ τῷ θεῷ μου πάντε) -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바울은 계속적이며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둘째, 모든 영적인 축복들이 하나님의 선물이자 그분에게서만 유래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5-7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 양보다 질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전체란 의미보다는 가능성 있는 모든 측면에서이다.

‘기다림이라’ -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강하고도 진지하게 기다리며 경성한다는 의미이다.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말과 행실에 있어서 모범이 되었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특히 고린도 교인의 행실이 주님을 닮아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므로 빛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결국 이런 행실은 주님의 재림과 직결되어 있다.

 

 

8절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그리스도의 날' - ‘주님의 재림의 날’,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

‘책망할 것이 없는’ - ‘고소할 것이 없는’, ‘비난할 것이 없는’

 

 

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

주님과의 교제를 원하신다. 이는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시기를 원하신다.

★ 영적 교훈

1) 모든 은혜는 예수님 안에서만 하나님께서 주신다.

2) 우리의 신앙목표는 예수님 만나는 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인격이다.

3) 우리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1:10-17절 소문 (온전히 하나가 되라) [첫째문제: 교회의 분열]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온전히 합하라’ - 어떤 것을 올바로 회복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물을 수선하거나(마4:21) 신앙의 부족함을 채운다는 정신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살전 3:10). 본 절에서는 하나의 온전한 통일된 몸을 이루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염두에 두고 권고하시고 있다.

 

‘같은 말, 마음, 뜻’ -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말씀과 마음과 뜻에 따라 행하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조건 하나는 의미가 없다.

 

 

11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글로에의 집’ - 부인으로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부유한 집안사람일 것이다. 이 집의 노예들이 고린도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고린도의 사정을 바울에게 알려주었다.

 

12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분쟁의 내용]

(1) 바울파 - 이들은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서의 자유를 이유로 자신들의 방종의 생활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다.

(2) 아볼로파 - 행18:24에 간단하게 기록된 사람으로 유대인으로 성서에 정통한자이며, 웅변가이며,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이 파에 속한 자들은 기독교를 지적인 대상으로 여기며, 철학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즉 이들은 지적인 사람들이었다.

(3) 게바파 - 이들은 유대인 출신으로 계속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무리. 율법을 중히 여기다가 은총을 경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4)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 스스로 고린도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무리들이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도의 근본정신은 진리 안에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 자신은 예수님이 될 수 없으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세례도 마찬가지이다.

 

 

14절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洗禮)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그리스보’ - 회당장으로 고린도 지역에서 생활한 분이다. 바울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도 믿었다(행18:8).

‘가이오’ - 같은 이름이 행19:29; 20:4에 나타난다. 같은 인물로 믿어지나 확실치 않다. 아무튼 초대교회에기여한 공로가 크게인정되는 분이다.

 

위의 두 사람 이외에 세례를 주지 않음을 감사히 여겼다. 이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들로 인해서 교회의 분파가 더욱 심했던 것이다.

 

 

15절 “이는 아무도 너희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았으며 혹 세례를 주었다할지라도 소수의 무리이므로 이용당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16절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함이라”

스데바나’ - 모든 개종자 중에 최초로 개종한 사람이다. (행16:15)

 

 

17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을 세상에 보낸 목적은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세례는 복음을 받아들인 증표로 베푸는 의식의 일종일 뿐이다.

 

‘말의 지혜’ - 인간적인 말로 능수능란하게 복음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삶의 행실로 모범을 보이면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식도 아니요, 생각이나 감정도 아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행실 이 있을 때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 영적 교훈

1) 교회는 어떤 명목으로도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구원을 주신 분은 한분 그리스도)

2) 분열의 원인은 인간들의 이기적 욕망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1:18-25 십자가의 도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 주님께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신 진리의 길을 의미한다. 이 길은 영생의 길이며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 성도들이 걸어야할 필연적인 길이다. 이 십자가의 길은 멸망당하는 자들(구원 얻지 못한 자)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길이다. 희생과 헌신, 버림당함의 길이기 때문이다. 즉 천국 가는 길이요 영원한 길이기 때문이다. 마귀를 이기는 길이기도 하다.

 

 

19절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셨으니”

사29:14 말씀을 인용하셨다. 인간적인 지혜를 멸하신다는 의미이다.

20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시대의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뇨”

 

‘지혜 있는 자’ - 세상의 지혜가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 앞에 인간 적인 지혜는 사라진다.

‘선비’ - 가르치는 자.

‘세상의 변사’ - 말을 잘하는 자. 이상의 세상적인 것들은 하나님 앞에 미련 한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쫓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이다.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시키기를 기뻐하셨도다”

 

인간적인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전도의 미련한 방법’이란 인간들이 보기에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일지 모른다. 이는 사람의 인정과 생각을 넘어서 전혀 다른 길을 걷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생각 반대로 십자가의 길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본받는 삶으로 전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22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은 표적을 구함’ - 유대인의 사상이 메시야라며 위대한 기적을 동반하는 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사람들은 그를 부인하고 죽인 것이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함’ - 헬라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사고의 영역에 넣어, 생각하는 대상이나 사색의 대상으로 여겼다. 실존하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증거 한다’- 이것은 당시에 대중들에게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어찌 신이 죽을 수 있으며 인간이 될 수 있느냐라는 인식이 편만 하였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 - 당시 믿지 않고 헬라의 사상에 젖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4절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인간적인 논쟁의 결론이다.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비밀 즉 영적인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리스도는 능력이 된다. 또한 우리의 영원한 지혜가 되는 것이다.

 

 

25절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 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은 가장 지혜롭고 강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믿음으로 발견하고 깨달아야 한다. 이때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1:26-31 참 사랑 (주 안에서 자랑하라)

 

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육체를 따라’ - 세속적인 관점으로 분별한다는 의미

‘지혜있는 자’ - 헬라의 철학자들처럼 높은 교육을 받은 지적인 사람들

‘능한 자’ - 정치적 권력을 가진 자

‘문벌 좋은 자’ - 사회적으로 상류계급에 속한 자들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기준이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상류 계급에 속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러한 외적인 조건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27-2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보여주신다. 인간적인 기준은 아무 소용이 없다.

 

‘택하사’ - ‘뽑아내다’, ‘선택하다’ 의 부정과거 중간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혼자서 스스로 선택한 것을 의미한다.

‘없는 것들(τά μή ὄντα) - 사회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자들을 지칭하는 용 어로 이러한 자들까지도 선택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있는 것들’ -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는 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어리석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선택하신 사실은 외적인 조건들이 일시적이며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신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29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적인 외적 기준을 바탕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게 하시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함이다.

 

 

30절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너희는’ - 구원을 얻은 우리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ἀξ αύτού δέ ὑμείς)’ - ‘엨스(ἀξ)’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시는 궁극적인 동인(動因)이 되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표시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타락하여 버림당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성도가 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 갈 수 있다.

 

※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분인가?

(1) 지혜가 되신다. 최고의 지혜이다. 그는 지혜의 근본이시다.

(2) 의로움 -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인이 의인이 된다.

(3) 거룩함 - 타락한 인간이 거룩해지는 비결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

(4) 구속함 - 구속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31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결국 인간의 모든 영광과 자랑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 영적 교훈

1)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부르심 이전에 있는 하나님의 예정적 섭리에서 출발한다(출3: ; 사6:1-13; 렘1:4-5).

2)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와 지고, 의로와 지고, 거룩해지고, 온전한 구속을 받을 수 있다(롬3:24).

3)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구속을 얻었으므로 헛된 자랑이나 자만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렘9:23-24).

 

 

 

 

 

제2장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역사적 배경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A.D50-52년) 중에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한 후(행18:1)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때(행18:11)였다. 이때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나가 강론하며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권면하였는데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온 가족 그리고 수많은 고린도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었다.

한편으로는 아덴에서의 전도실패, 유대인들의 훼방과 대적, 고린도인들의 철학적 사변과 과 교만한 태도, 도덕적 타락을 보며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는데, 그 이유는 (1) 자신의 결심을 변개시켜 철학적 지혜와 사변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지 않을까? (2) 자신의 부족함으로 복음의 능력이 가리워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고 고백 한다(1절,3절).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본문을 이해하라.

 

 

 

내용분해

1- 5 하나님의 능력

6-16 하나님의 지혜

 

 

2:1-5 하나님의 능력(어리석은 전도)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 ‘내가 너희에게 나아갔을 때’, 행18:1-17의 제2차 전도여행 당시 고린도를 둘러 1년 반 동안 전도할 당시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 본문의 ‘증거’는 오래된 사본들에서는 ‘비밀’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 높임, 뛰어남, 탁월, 우월, 우위, 우수.

하나님의 증거(비밀)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이름다운(인간이 볼 때 남다르게 유식하고 탁월한 말과 지혜)것으로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십자가의 미련한 것으로 전하였다.

 

 

2절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왜냐하면(γάρ,가르)’ - 본 절이 앞 절의 이유가 됨을 말해 준다.

‘알지(εἰδέναι,에이데나이) - ‘경험을 통해 안다’는 뜻이 아니라 직관적이며 전 문적인 지식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인 ‘오이다(οἷδα)’의 부정사이다.

 

즉, 형제 여러분! 제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저는 유식한 말이나 세상의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영적인 비밀을 바울은 깨닫고 있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도를 정확히 알지 않고서는 구원의 길과 천국에 이르는 비결을 알 수 없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3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 -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다’ - ‘약함’은 바울의 육적인 약함(고후10:10)을, ‘두려 움’은 고린도의 음탕한 환경을, ‘떨림’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떨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사실 저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약하였고 두려워서 몹시 떨었습니다’ - 바울이 당시 몇 주간에 걸쳐 증거하며 가르치던 외양으로 나타난 모습이 인상적 이었다거나 타인을 압도할 수 있는 위엄을 나타내었다는 표현보다는, 오직 한 가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파견을 받은 사람 역시 자기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온 마음으로 지지하면서 증거 한 것을 표현한 말이다.

 

 

4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내 말과 전도함’ - 나의 말은 평상적인 언어로 하되 주님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힘을 쓰면서 전도함. ‘전도함’은 공적인 설교와 선포를 의미한다.

‘성령의 나타남’ - 근사한 언어나 웅변의 말이나 철학적인 언어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역사로 말을 한다. 이미 바울의 영적 경지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경험을 한 즉, 성화된 성도이다. 그러므로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생명의 역사로 말미암아 말과 행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바울이 ‘지혜의 권하는 말’ 로 하지 않은 이유는 자기의 전하는 설교를 듣고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의 신앙을 혹시라도 자기에게 잡아두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즉 설교자의 뛰어난 말재주, 특출하게 사람을 끄는 재치나 성격 등,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말씀을 전하는 그 사람의 개인적 특성은 오직 그가 전하고 있는 진리, 십자가의 도 안으로 흡수되어져야 마땅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이 역사 되며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고 믿고 마음으로 다짐하면서 전했다는 말이다.

 

 

5절 “너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믿음’ - ‘피스티스(πίστις)’는 정관사 ‘ἡ’와 함께 사용되어서 ‘믿는 행위’ 그 자체보다는 ‘너희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한 믿음의 본질을 말한다.

‘다만’ - ‘알라(ἀλλά)’는 앞 절과 대조하는 접속사이다. 우리의 믿음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나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믿음의 출처를 설명한다.

 

어느 한 개인의 인간적 지혜나 말로 인하여 사람들의 신앙이 단순한 인간적 믿음이라는 차원에 머무르게 되어서는 안 되며 그 믿는 이들의 신앙이 좀 더 깊은 관계(십자가의 도)에 접근하기까지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신비가 곧 그 십자가의 능력을 전파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 안에서 재현될 뿐 아니라 그들의 존재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 영적 교훈

1) 전도할 때 단순한 케리그마만 선포하기로 한 바울 (2:2)

2) 약하며, 두려워하며, 떠는 자세로 복음을 증거한 바울 (2:3)

3) 전도의 결과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였다(2:4-5).

 

 

 

2:6-16 하나님의 지혜

 

6절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온전한 자들’ -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된 성화된 성도들이다.

 

이는 요한 계시록 2장(7,11,17,26절)과 3장(5,12,21절)에서의 표현처럼 이긴자이며 이런 성도들에게 주시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것은 세상적인 것도 아니며 사라질 것도 아닌 영원한 지혜이다. 곧 하나님 중심으로 판단되는 지혜이다.

 

 

[지혜의 생성과 기원]

7절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 - 예수님을 가리킨다. 숨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의 영광’ - 성도들이 얻게 될 하늘의 영광을 의미한다. 이는 만세 전에 예정된 것이다.

 

 

[계시 없이 알 수 없는 지혜]

8절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이 세상의 관원’ - 유대인들 가운데 관원과 종교적인 지도자들을가리킨다. 무지의 결과로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만 것이다.

 

 

9절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본문은 구약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이사야 64장 4절 말씀에서 그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지혜를 알려준 성령]

10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시느니라”

 

주님을 알 수 있는 지혜는 인간적인 것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하다. 그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영적인 모든 것을 통달할 수 있다.

 

 

11절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 속에 있는 영과 하나님 속에 계시는 영과를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서 온 영’ -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의 역사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다. 결국 은혜도 성령님께서 날라주시므로 받게 되는 것이다.

 

 

[지혜를 분별하는 방법]

13절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인간적인 언어로 아니하고 성령의 가르치신 말씀으로 한다. 하나님의 일은 모두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 - 영에 속한 것은 영적인 능력으로라야 분별한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전혀 다르다(롬8:6-7;갈5:17).

 

 

[지혜를 받는 방법]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육에 속한 자’ - 죄성과 정욕에 지배를 받으며 사는 자이다.

15절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 - 연단을 마치고 영적 할례를 받은 성도들 즉 이긴자.

‘모든 것을 판단한다?- 영적으로 성장한 분이기에 선, 악을 정확히 별할 수 있다. 사람에 의해 판단 받지 않는다.

16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았다’ - 생명이 내주 합일된 경험을 가리킨다.

 

앞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를 밝힌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일 때문에 생긴 것이다.

 

★ 영적 교훈

1) 참된 지혜는 십자가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2:6-7).

2) 이 지혜는 인간 스스로 느낄 수 없고 오직 성령의 감화와 인도하심이 있을 때 할 수 있다(2:8-14).

3) 이 지혜를 얻은 결과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고, 신령한 생활을 하게 된다 (2:15-16).

 

 

 

 

 

 

 

 

 

 

 

 

 

 

 

 

 

 

 

제3장 하나님 성전인 성도들

 

내용분해

 

1- 9 육에 속한 자

10-15 공력과 상급

16-17 하나님의 성전

18-23 지혜와 미련함

 

 

 

3:1-9 육에 속한 자

 

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신령한 자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이긴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으로 어린아이들로 여기면서 말씀하시고 있다.

 

‘육신에 속한자’ - 광야 성도들로 아직 영적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죄성과 정욕에 지배를 받는 성도들이다. 이들을 가리켜 본문은 어린아이라고 한다.

 

2절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는 바울.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이 젖으로 양육함. 젖이란 영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즉 쉽게 소화할 수 있는 말씀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우리들이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며 그 말씀은 영적인 수준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3절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평가’ -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하였다. 그 증거는 교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와 분쟁은 육적인 행실들이다. 즉 우리의 행실여하에 따라 영과 육에 속한 자를 구별할 수 있다.

 

4절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 육에 속하여 생활함이 아니냐?

 

 

5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바울이나 아볼로는 하나님 앞에 단지 사역자일 뿐이다. 복음을 증거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믿게 한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6절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바울은 복음의 씨를 뿌린 자이며 아볼로는 돌봐준 사람이며 하나님은 생명과 자라게 하신 분이시다.

 

 

7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가장 근본적인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본문을 통하여 바울은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생각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8절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도구는 각자 일한 대로 상을 받게 되어있다.

 

 

9절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우리는’ - 복음을 증거한 하나님의 사자들.

‘너희는’ - 고린도 교인들.

‘하나님의 밭’ - 사람의 심령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집’ - 영적인 집을 짓는 사람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다음절과 연관이 있다.

 

★ 영적 교훈

1) 영적으로 어린 신앙인들은 젖을 먹을 뿐 밥을 먹을 수 없다(히5:11-14).

2) 영적으로 어린 신앙인들은 육신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함으로 자아와 배치되는 일에는 시기를 느끼고 그 결과는 분쟁으로 간다.

3) 영적으로 어린 신앙인들은 그들을 위하여 일하는 종들의 정확한 모습도 그들을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하나님의 능력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3:10-15 공력과 상급

 

10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신앙인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야 한다. 건축하는 법칙이나 건축주(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견고하게 세워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면에서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었다.

‘터’ - 예수 그리스도이다(11절). 우리 모두는 구원의 반석(터)되시는 예수님 위에 신앙인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각기 나름대로 믿음의 분량에 따라 신앙의 집을 짓고 있다.

 

 

1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우리 신앙의 집은 반드시 예수님께서 닦아 놓으신 터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이 터는 예수님 이외에 누구도 닦을 수 없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이요, 영적인 은혜를 가리켜 말한다.

 

12절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집을 짓는 재료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이다. 즉 시험하는 불에 타는 재료인가 아니면 불에 타지 않는 재료인가가 대단히 중요하다. 이상의 재료에 대한 해석은 무의미하다.

 

13절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공력은 불이 있을 때 나타난다. 이 불은 시험의 불을 의미한다(벧전4:12). 시험의 불이라 함은 시험받는 환경을 의미한다. 즉 시험이 올 때 죄를 범하지 않고 잘 믿음으로 인내하면 좋은 재료로 집을 짓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성서의 핵심진리 강해 “서론”과목 상급 받는 진리를 참고하면 잘 이해할 수 있다.

 

 

14절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 시험받는 환경 속에서 죄범하지 않고 선행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상’ - 하늘에서 받게 되는 상이다.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상이다(계22:12; 마16:27).

 

15절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공력이 불타면’ - 시험받는 환경 속에서 죄를 범하면 불타게 되는 이치이다.

‘해’ - 하늘의 상급이 없고 도리어 죄를 범했기에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한 고 통을 의미한다.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다’ - 비록 상급이 없다 할지라도 시험의 불을 통과하면서 구원은 받는다. 물론 이 땅에서 시험의 불을 잘 통과하면 상급이 많지만 죽은 다음에 해(불시험)를 당하면서 정결케 되어 구원은 받는다. 이 과정은 성서의 핵심진리 연구 “영계의 구조와 실상”에서 증거하는 영계의 중간영역 과정을 의미한다.

 

★ 영적 교훈

1) 각 영혼이 쌓는 신앙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2) 각 영혼이 행한 행위에는 상과벌이라는 결과가 주어진다.

3) 우리는 우리 영혼의 심판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3:16-17 하나님의 성전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이다. 즉 성령님의 거하실 자리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속에 완전히 좌정하신 분을 가리켜 이긴자라고 하며, 정결한 성도라 부른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신앙 목표이기도 하다.

 

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성전’ - 영계의 천국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 땅의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본문은 우리의 심령을 가리킨다. 즉 우리의 심령을 죄악으로 완전히 더럽히면 멸망(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 되기를 원하신다.

 

★ 영적 교훈

1) 우리의 마음의 하나님 성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요14:17,23; 고후6:16-18).

2) 거룩한 성전을 만드시고자 성령님이 와 계심(고전6:19-20).

3) 성령님을 불순종하면 끝내 멸망한다(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3:18-23 지혜와 미련함

 

18절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자기를 속이지 말라’ - 이 말씀의 의미는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뜻이다. 이 땅에서 지혜로운 척 하는 것이 실제로는 교만함이라는 죄악에 사로잡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기에 스스로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전8:2).

 

본문의 의도는 1장18절, 25절의 말씀을 의식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말하는 십자가의 도를 따라 생활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19절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세상지혜는 미련하다’ - 인간적인 지혜는 멸망당하고 말 것이며 사라지기에 미련한 것을 강조하였다. 세상에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이 자기의 궤계에 빠지게 하였다는 것이다(욥5:13인용).

‘궤휼’ - 야릇하고 간사스럽게 속임. 헬라어 ‘πανουργίᾳ(파누르기아)’는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 “어떤 일을 민첩하게 하는 것”을 말하지만, 주로 나쁜 뜻으로 사용되어 “못된 일이라면 어떻게 라도 해낼 태세를 갖춘 상태”를 의미한다.

 

 

20절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시94:11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세상지혜의 허무성을 말한다. 즉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에 평가의 기준이 있다.

 

 

21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 피조물에 속한 사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피조물 은 유한한 것이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 본문만을 가지고서는 이해되질 않는다. 우선 너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피조물 된 인간이 아니다. 다음 절인 22-23절의 말씀과 연관 지어서 해석해야 한다. 고로 너희는 생명이 우리의 영속에 내주 하신 성화 된 성도들이며 거룩한 성전을 우리의 영속에 이룩하신 분들을 일컫는 말이다(3:16참고). 즉 영속에 계시는 예수님의 것이 바로 만물임을 증거하고 있다.

 

 

22절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이 말씀도 앞 절의 말씀을 온전히 해석한 후에 이해될 수 있다. 바울, 아볼로, 게바, 세상, 생명(인간의 목숨)과 사망(죽음)도 모두가 예수님의 것이다. 본문의 너희도 예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된 성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 속에 계신 주님을 초점으로 생각해야 해석이 가능하다.

‘지금 것이나 장래 것’ - 현세나 내세(천국을 의미)

 

 

23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우리의 소유는 주님의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한 성도들이 바로 이긴자들이며 휴거 성도이다. 본문의 질서 속에서 신앙인의 삶의 법도가 나타난다. 영적인 질서이다.

 

★ 영적 교훈

1) 고린도교회분열의 원인을 자신들을 지혜 있는 자라고 판단한 교만 때문이다.

2) 자신을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것으로 판단하시고, 헛것이라고 말씀하신다.

3) 인간을 자랑해서 예수님의 귀하심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4) 오직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하여야 한다.

 

 

 

 

 

 

 

 

 

 

 

 

 

 

 

 

 

 

 

제4장 그리스도의 일꾼인 사도들의 사역

 

 

내용분해

1- 5 그리스도의 일꾼을 판단치 말라.

6-13 고린도 교인의 불손을 경계

14-21 개인적 권면

 

 

 

 

 

4:1-5 아무도 판단치 말라

 

1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스도의 일꾼’(ὑπηρέτας휘페레타스) - 배 아래서 노를 젖는 하급 노예를 ‘휘페레테스’라고 불렀다. 바울은 3:5절의 ‘디아코노이’(사역자들)를 ‘휘페레테스’로 비유하면서 신분적 지위가 아니라 소속 즉,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를 말하고 있다.

‘비밀을 맡은 자’ - ‘οἶκος’(오이코스-집)+‘νέμω’(네모-관리하다)=‘한 집안의 행정관리 및 재정을 맡아 관장하는 관리인’(청지기)이란 의미이다. 또는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아 알 수 없는 영적 진리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아 전하는 일을 맡았다는 점에서 ‘계시된 진리의 교사들(하나님의 비밀의 청지기)’이다.

 

[직역]

여러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며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청지기로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일정한 지도자를 지나치게 높이는 나머지 다른 지도자를 무시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앞장 아볼로와 자신을 ‘농부’나 ‘건축자’로 비유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저들은 모두가 ‘그리스도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말하면서 이에서 지나치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다(참고3:22-23).

 

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이니라’ - 충성으로 번역된 ‘피스토스’는 문자적으로 ‘신실성이 발견되는 것’을 뜻하며, ‘휴레테(수동태)’의 의미는 ‘충성되다’라는 인정이 개인이나 인간들의 판단에 있지 아니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직역을 하면 청지기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입니다. 즉 청지기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뿐이며 자신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신실할 뿐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3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주관적인 소욕을 따라 함부로 판단했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의 심판을 조금도 마음 쓰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심판대의 공정성과 위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어떠한가를 더 인식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 문제도 하나님께 평가받기를 원한다는 의미이다.

 

 

4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자책할 아무 것도’ - 양심에 꺼리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의로 워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님의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5절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주께서 오시기까지’ - 주님의 재림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의미한다. 그때까지 아무도 판단하거나 판단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숨겨진 모든 사실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상급과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고전3:8; 고후10:18).

 

★ 영적 교훈

1)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말한다.

2) 청지기들이 하는 주된 임무는 비밀을 전파하는 일이다.

3) 청지기들의 자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믿음직스럽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4) 청지기 역할을 잘못 감당한 자들은 모든 부정한 것들이 들추어져 심판으로 나아갈 것이고, 직분을 잘 감당한 자들에게는 칭찬이 주어질 것이다.

 

 

 

4:6-13 사도 바울이 받은 대우

 

6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 일’ - 3:5이하의 내용을 가리킨다. 즉 분쟁에 대한 교훈이다.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규범을 자신과 아볼로의 관계에 적용시켜 설명했다는 것이다. 즉 자신과 아볼로가 분쟁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으나 주님의 교훈을 실천하므로 잘 극복한 사실을 예로 들고 있다.

‘기록한 말씀’ - 본서 앞서 보낸 말씀들. (1:10,30,31; 3:16-21)

 

[직역]

형제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위하여 지금까지 분쟁에 대한 교훈을 아볼로와 나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아 한계를 넘지 말라는 교훈을 배워 남을 깔보고 주제넘게 자기편을 추켜올리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7절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바울은 세 가지 질문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교만을 지적하며 ‘왜 교만하지 말아야 하는가? 의 근본적 이유를 제시한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 무엇 때문에 너희들이 구별하여(당파를 지어) 싸우느냐? 즉 고린도 교인들이 모두 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분쟁으로 교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근신할 것을 요구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동일하게 입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특혜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최선을 다하여 증거 하였다. 그 복음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인데 곧 주님의 겸손과 온유하심과 하나 되게 하심을 강조한 말씀이었다.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 주님의 복음 정신과는 전혀 다른 교만과 파당을 맺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말씀이다.

 

[참고]

이 구절은 성 어거스틴이 자주 인용한 구절로서 529년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우리 중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스스로 공로가 될 만한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란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겸손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8절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 원전에는 ‘완료분사’와 ‘부정과거 동사’가 종말론 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완성될 그리스도 왕국을 바라보면서 긴장을 가지고 최악의 요소들과 싸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풍요와 배부름(영적 교만)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에 빠졌고 현재도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왕노릇 하였다’ - 고린도 교인들이 지니게 된 영적 지식(사도들의 가르침)이 머리로만 포만 상태에 있어서 이제는 사도들이 없이도 그들의 모든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스스로 교만해져서 바울의 권면도, 주님의 복음도 외면한 사실을 강조한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벌써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함께 우리도 한번 왕 노릇을 해 볼 것이 아닙니까?’

9절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 개선의 행렬 맨 뒤에 죽음을 당할 포로나 사형선고 받은 죄수를 의미한다. 즉 사도인 자신을 가장 작은 자로 세상에 두시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다.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 사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이기에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천사들에게도 천국에서 가장 높은 상급을 받을 분들인데 이 땅에서 천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직역]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사도들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처럼 여기시고, 그들 중에서도 맨 끝자리에 내세워 세상과 천사들과 뭇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신 것 같습니다.

 

 

10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그리스도의 연고로’ -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

[직역]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1:17,21; 3:1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자이고 여러분은 강자입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있는데 우리는 멸시만 받습니다(11-12절).

이 말은 역설적인 표현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하였으면서도(3:1-2) 서로를 판단하며 사도들 없이 왕 노릇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을 신랄하게 책망하는 내용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약은 곧 영적인 능력이 된다.

 

 

11절-13절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직역]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으며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욕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고 우리가 받는 박해를 참아 내고 비방을 받을 때는 좋은 말로 대답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인간의 찌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 고린도 교인들이 거만하게 굴고 왕 같이 여기며 교만해 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실제적인 모습을 증거한다. 결국 바울을 비롯한 온전한 성도들은 세상의 더러운 것(세상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과 만물의 찌끼(먹다 버린 찌꺼기)같이 되었다. 이는 바울 자신의 겸손한 사역으로 인한 역경을 표현하고 있다.

 

★ 영적 교훈

1) 교만한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인 바울 사도(4:6).

2) 사도들의 덕행을 본받지 못하고 분당을 통해 스스로 왕 노릇한 고린도 교인들(4:7-8).

3) 일한 것에 대해 올바른 육신적 대우를 받지 못한 사도 바울(4:9-10).

4) 부당한 대우를 받아 가면서도 빛을 실천하며 살아온 사도 바울(4:12-13).

 

 

4:14-21 개인적 권면

 

14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본문은 한층 더 온화하고 유화적인 태도로 논쟁을 정리한다. 사도 바울은 마음의 아픔을 무릎 쓰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책망을 하기는 하였으나 아픔을 준 그만큼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려는 그의 사랑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 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스승’(παιδαγωγούς) -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그의 아들을 가르치며 예의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돌아보는 노예들(파이다고구스)을 지칭하는 말이다. 몽학선생(갈3:24,학교를 데리고 가는 수행원)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① ‘가르친다’, ② ‘지도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을 대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아무리 많은 교사들(한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그의 아들을 가르치며 아들답게 예의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돌아보는 노예)일지라도 어찌 한 사람의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신앙생활을 지도해 줄 교사들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자신은 한 자식의 아버지 같이 헌신, 봉사, 희생으로, 즉 부모와 같은 책임감으로 양육했다는 것이다.

 

 

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교만함이 아니라 자신이 주님을 본받는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17절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디모데를 보냄’ - 바울의 제자 중 가장 경건 되고 신실한 사람이다. 바울은 그를 자신의 아들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행16:1; 딤전1:2; 딤후1:2)

 

바울은 비록 자기의 편지가 문제의 핵심을 잘 다루고 있고, 또 그 편지에는 자기의 마음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할지라도 편지에만 만족할 수 없어서 자기가 믿고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자기를 대신할 수 있도록 전권을 부여하여 보낸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권위보다는 자신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참된 자녀와 같다는 사실과 거기에는 물론 주께 대한 디모데의 충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내 세운다.

 

[디모데를 보낸 이유]

바울이 각처를 다니면서 어떻게 가르치고 또 실천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인의 생활 원칙을 디모데를 통하여 보여주기 위함이다.

 

 

18절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 졌으나”

 

‘어떤이들’ - 고린도에서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무리. 그들은 바울이 오 지 않을 것이란 속단으로 스스로 이긴 것으로 착각하여 자랑하고 교만하였다.

 

 

19절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말을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 이는 교만한 사람들의 행실을 알아보겠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업적과 행동은 그가 한 말의 값어치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20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앞 절의 결론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 가는 나라가 아니라 반드시 그 나라에 합당한 행실을 가지고 가는 나라이다.

 

 

21절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매’- 징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법대로 다스리고 쫓아낼 수 있음을 상기시 킨다.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준다.

‘사랑과 온유’ - 그리스도의 사랑적인 측면을 강조 하고 있다.

 

★ 영적 교훈

1) 죄를 지은 성도를 부끄럽게 하기보다 권면하여 돌아오게 하여야 한다.

2)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구원받고 양육 받아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한다.

3)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선을 행하는 능력이 지배하는 나라다.

4) 교역자가 사랑과 온유함으로 치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본문의 내용은 6장까지 이어지면서 크게 3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근친상간의 성 관계(5장), 이교도의 법정에의 소송(6:1-8), 부정한 행위에 대한 방종한 관념(6:9-20).

 

 

 

 

 

 

 

 

 

 

 

 

 

 

제5장 고린도 교회의 성적 부도덕

내용분해

 

1- 8 묵은 누룩

9-13 교회와 치리

 

사적 배경

 

고린도의 성적 문란이 점차 교회에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또한 희랍적 철학에서 성적 본능의 탐닉은 어떤 다른 신체적 욕망보다 그다지 나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특별히 영지주의(Gnosticism)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hedonism)의 영향은 이러한 성적 부도덕을 부채질했다. ‘영지주의는 물질계는 본질적으로 악하고 더럽고, 영적인 세계만이 선하다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주장함으로써 도덕 폐기론을 유발시켰으며 쾌락주의 역시 음란한 일을 방조 내지는 가속화시켰다. 실제로 헬라의 국가는 ‘공창(House of prostitution)’을 설립했으며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아이를 기를 나이가 지난 남녀간의 혼음을 광범위하게 허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은 너무도 부도덕하여 생활 구석구석에서 고질화된 상황이었다.

 

 

5:1-8 묵은 누룩

 

1절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아비의 아내’ - ‘여자’(γυναίκά,귀나이카)는 ‘계모’(μητρυία,메트뤼이아)와 거의 뜻을 같이 하므로 친어머니가 아니라 첩이나 의붓어머니로 본다.

‘취하였다’(ἒχειν,현재 부정사) - 음행 사건이 단 회 적이지 않고 지속적인 반복 행위임을 시사한다.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죄로 취급하는 추악한 행위.

 

2절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공동체가 마땅히 들고일어나서 이 문제에 손을 대고 또한 적절한 행동에 옮겼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야기만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이와 같은 일로 그들이 받은 선택과 거룩한 소명의 은총을 더럽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 깊이 괴로워했어야 마땅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친교에로 불러 주셨으니 자기들 손에 맡겨진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해서 공동체로부터 그와 같은 죄인을 마땅히 몰아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음행을 행한 자를 교회 안에서 물리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고 있음을 경고하신다.

 

 

3절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비록 몸은 떠나 있으나 영(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실제로 있었던 것과 같은 확실성과 권위로 하나님 편에서 그들을 향한 심판이 이미 선고되었다. 즉 그를 다스리는 방법을 이미 세워 놓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다.

 

 

4절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바울은 몸은 멀리 있지만 영으로 가서 이런 패륜 자를 재판하고 처벌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지혜나 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5절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사단에게 내어 줌’ - 아마도 육체의 고통을 허락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육 체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내어준바 되었다.

‘육체는 멸하고 영혼은 구원을 얻게 함’ - 비록 육체가 큰 어려움 가운데 있다가 죽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영계에 들어가서 연단을 마치고 구원을 얻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6절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의 자랑하는 것’ -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자랑함을 지적하고 있다.

‘적은 누룩’ - 죄악의 누룩 의미한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패륜을 그냥 놔두고 인간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도 바울은 자만과 자신감으로 완고해진 공동체에 그 죄인의 경우가 다만 하나의 예외에 불과했다는 변명을 일축해 버린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죄에 빠지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의 도덕적 관념이 그것에 의해 그만큼 약화되므로 각자가 그의 가장 약한 부분에서 쉽게 넘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누룩의 파급 효과와 그 위험을 예로 들면서 앞에서 언급한 악행이 어떻게 누룩과 같은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7절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너희는 누룩 없는 자’ - 과거의 누룩을 제거해야만 새로운 덩어리가 된다. 묵은 누룩을 제거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곧 보혈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으므로...’ - 유대인은 유월절 후, 8일 동안 지내는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남아 있는 묵은 누룩과 묵은 누룩으로 만들어진 모든 음식은 집안에서 깨끗이 치워 없애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가 당해야할 심판을 대신하시므로 누룩 없는 반죽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악과 음행이라는 누룩이 있어서는 안 된다.

 

 

8절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 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명절’ - 유월절 절기. 이 말씀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킴에 있어서 누룩이 없는 빵을 먹게 됨을 인용하면서 영적으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으로 누룩(괴악하고 악독한 죄악)이 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영적 자세로 생활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 영적 교훈

1) 교회는 공동체를 더럽히는 죄들을 통한히 여기며 물리쳐야 한다.

2) 교회치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목회자와 회중이 모여 예수님의 능력을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마18:15-20).

3) 교회는 적은 누룩이 작은 죄악이 온 덩이인 전체교회로 번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계2:1-17, 에베소 교회의 사자와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

4) 교회 내에서의 교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순전함과 진실함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5:9-13 교회와 치리

 

9-10절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 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세상의 음행자들’ -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세상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음행하는 자들. 이들을 사귀어야 전도할 수 있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직역]

‘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에서 음란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 음행이나 탐욕이나 약탈이나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교도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11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 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바울 사도의 글을 쓴 취지는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 음행하고 방탕한 사람에 대한 경고이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다른 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말씀으로, 그와 같은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 공동식사에 함께 참여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비록 성찬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모임에 있어서도 그들이 참여하는 것을 피하도록 해야 하며, 보통 친목인 모임에도 그들을 부르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치 못하게 자기 자신을 손상 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12절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 - 교회 밖에 있는 자들. 이들을 판단할 권한이 바울에게는 없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교중 사람들’ - 교인들을 지적하심. 이들을 심판해서 하나님의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여러분이 심판할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13절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외인들’ - 교회 밖의 사람들.

‘악한 사람들’ - 교인들 가운데 회개하지 아니하고 계속 죄를 범하면서 자 신을 합리화하며 다른 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가리킨다.

[직역]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 있는 그 악한 자를 쫓아내십시오.’

 

★ 영적 교훈

1)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들의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져 있다.

2) 성도들의 범죄는 교회가 다스려야 한다.

① 범죄한자를 부끄럽게 함으로 회개하도록 힘써야 한다.

② 예수님의 거룩한 공동체가 빛을 상실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3) 바울이 말한 범죄의 3가지 측면(롬13:12-14)

① 자신에게 짓는 죄 : 음란, 술취함(고전6:18)

② 타인에게 짓는 죄 : 탐욕, 후욕, 토색

③ 하나님께 짓는 죄 : 우상숭배

 

 

 

 

 

 

 

 

 

 

 

 

 

 

 

 

 

 

제6장 소송 및 성 문제에 관한 성도들의 자세

 

 

내용분해

 

1-8 소송에 대한 교훈

9-11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표준

12-20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역사적 배경

 

헬라인들은 서로가 소송을 하든지 아니면 배심의 의무로 인하여 많은 시간을 법정에서 보냈다. 법정은 그들에게 오락과 즐거움의 주요한 원천이었다. 이러한 법정의 관습은 ‘아테네’와 유사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배심원이 천명에서 육천명까지 이르렀고, 배심의 의무는 강제적이어서 이 의무를 태만히 하면 시민권을 상실하는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널리 퍼진 사회적 유행을 받아들이는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은 서로가 소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인 이스라엘은 다른 사람과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속 법정에 들어가는 관습을 즐기지 않았으며, 논쟁거리는 백성 중의 연장자들에 의해 처리되었다. 이것은 세상 법에 대한 하나님의 법의 우월성과 성도간의 문제는 법 이전에 신앙적 차원에서 해결해야할 것임을 교훈해 준다.

 

이런 배경 하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했던 비기독교적인 관습을 비난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더 이상 불의한 자들 앞에서 재판 받는 자기 비하의 어리석음과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을 범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6:1-8 : 소송에 대한 교훈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책망하려는 요점]

 

1절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불의한 자들’ - 하나님을 부인하는 재판장들(세상사람)을 의미한다.

 

[직역]

‘여러분 중의 하나가 다른 형제와 다툼이 생겼을 때 어찌하여 성도들 앞에서 해결 지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 재판관들(법정)에게 고소합니까?’ 즉 교회 안의 문제를 세상법정으로 가지고 들어가 심판 받는 행위에 대하여 권면하셨다.

 

 

2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세상을 판단할 것’ - ‘판단’(크리누신,κρινούσιν)= 크리노(미래 능동태,히브리 개념으로 ‘통치’)

현재 : 빛 된 삶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미래 :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게 됨을 의미한다.

 

[직역]

‘성도들(이긴자들)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세상이 여러분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될 터인데 여러분은 교회 안의 지극히 작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심판할 능력이 없단 말입니까?’

 

이 말의 근본 의미는 어디까지나 성도들 간의 다툼은 교회의 권면을 좇아 사랑과 화합의 정신에 입각해서 자체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벧전3:8-9)

 

 

3절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천사’ -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 또는 범죄 한 천사들(유1:6; 벧후2:4; 히2:14).

‘세상 일’ - ‘비오티카’(βιωικά, 일반생활 습관에서 발생하는 평범한 일)

 

[직역]

‘성도들(성화된 성도들)은 장차 세상과 타락한 천사들을 판단하여 무저갱에 넣는 일을 할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하물며’(이하의 의미를 함축한 말) 세상의 사소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 재판관의 권위에 굴복하겠느냐‘

 

천사를 판단할 권세를 우리에게 주었다. 이는 실제로 이긴자(성화된 성도)들을 향한 말씀이다. (마28:18)

 

 

4절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경히 여김을 받는 자’ - ‘카디제테’(χςθίζετε,직설법 수사의문문)- ‘믿음이 약한자’, ‘어리석은 자’, ‘경시 여기는 자’, ‘무시당하는 자’.

 

[직역]

‘그런데 이 세상 사건이 생겼을 때 여러분은 어찌하여 교회에서는 중요한 일을 심의하거나 결정을 할 때에 제일 믿음이 약한 자를 판결자로 세우는 법이 없듯이 믿음이 약한자 같이 취급하는 바깥사람들을 재판관(중재자)으로 앉히는 것입니까’

 

참고

(1) 송사에 대한 유대인의 사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문제를 결코 세상 법정에 알리는 법이 없이 장로들이 치리 하였다.

(2) 헬라인들의 사고 :

① 쌍방이 각각 1인의 중재인을 선택하고, 양쪽의 동의하에 제3의 중재인을 선정하 여 합의를 보았다.

② 여기서 해결이 안 되면 40인 회라는 모임에서 60세 이상이 된 공정 중재인을 선정하여 해결했다.

③ 여기서도 해결이 안 되면 배심원들에게 송치되었다.

(배심원은 30세 이상의 시민으로 구성)

- 50파운드 이하의 재판 (201명의 배심원으로 구성)

- 50파운드 이상의 재판 (401명의 배심원으로 구성)

* 배심원 6,000명이 동원된 사건도 있었다고 함.

 

 

5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부끄럽게 하다’ -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다’.

‘판단할 만한’(διαχρίναι,디아크리나이) - 판결, 경정(更正), 심판의 의미보다도 ‘중재’를 의미함.

 

[직역]

‘나는 여러분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형제들 사이에 생기는 분쟁 사건을 해결해 줄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바울이 이 말씀을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교인들 간에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판별해야 한다.

 

 

6절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직역]

‘실로 분쟁을 해결해 줄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에 형제가 형제를 고소하고 또 그것을 불신자 앞에 들고 나가는 것입니까?’

 

 

7절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허물이 있다’ - ‘헽테마’(ἥττημα,’패배’), 교회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 나가는 것은 도덕적인 패배를 의미한다.

‘불의를 당하는 것’ (ἀδικείσθε,아디케이스데) -부당함을 입는’, ‘불공평한 상태나 모욕을 당하는’의 뜻은 공평하고 평등한 해결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불공평을 감수하라는 것을 암시한 말이다.

 

서로 고소하므로 허물이 완연하다. 그럴 바에야 부당함을 당하고 남에게 속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것이 영적으로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8절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를 행하고, 속이다(빼앗다)’ - 능동태 동사. ‘방어적 소송’ 이상임을 시사한다. 소송을 제기한 자나 고발된 자나 이들은 모두 서로를 이해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형제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이교도와 같은 삶의 수준을 말한다.

‘형제’(ἀδελφός,아델포스) - 이 단어는 ‘양보와 희생으로 하나 된 공동체의 일원’을 뜻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주님의 정신을 무시하고 도리어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일을 형제끼리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6:9-11 :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표준

 

9절-10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불의한 자’ - ‘악을 행하는 자들의 특성’, ‘악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대적관계에 놓여진 자들’. ‘악을 행하는 집단’을 의미함이 아니다.

‘음란하는 자’ - 남창을 의미한다. (πορνεία, 포르네이아)

‘우상숭배 하는 자’ - 자기를 높이고 소중히 여기는 자.

‘간음하는 자’ - 결혼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성범죄.

‘도적’ - 전문적인 강도보다는 좀도둑.

‘탐람’ - 자기 욕심에 이끌려 이웃의 것을 탐하는 자.

‘후욕’ - 남을 비방하는 자.

‘토색’ - 완력뿐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남의 재산을 강탈하는 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죄악들을 말씀하신다. 즉 천국에 갈 수 없는 죄악을 설명하시고 있다. 믿음으로 가는 천국이지만 믿음의 결과 곧 행위의 온전함이 없이는 갈 수 없다. (마7:21, 약2:17)

 

[고린도교인 중 불의한 자가 회개한 결과]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 이 말씀은 너희 가운데 앞 절에 기록한 죄를 범한 자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들 가운데 주님의 보혈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정결해 졌고 의로워진 성도들이 있다. 이와 같이 정결한 신앙이 없이는 천국에 갈 수 없다.

 

[참고] 성도의 3분류

① 칭의(Justification) - 죄용서 받고 깨끗해짐.

② 득의(Senctification) - 원죄를 해결하고 의롭게 됨.

③ 영화(Gloryfication) - 부활체를 입음(몸의 구속)

 

★ 영적 교훈

1) 교인간의 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세상법정에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 덕이 있는 장로들을 통해 해결한다(6:5). 세상법정에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나가는 것은

① 성도 상호간의 불신을 드러내는 것이며

②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이며

③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의 거룩성을 실추시키는 행위이다.

2) 이해가 상충될 때는 차라리 손해 보는 길을 택하라 (6:7; 마5:38-42).

3)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 할자들이 있다 (6:9-10).

불의한 자들(회개의 중요성강조)

① 제1계명 : 우상숭배자들.

② 제7계명 : 간음하는 자들, 음란한 자들, 탐색하는 자들, 남색하는 자들.

③ 제8계명 : 후욕하는 자들 ;

④ 제10계명 : 탐욕하는 자들, 술 취하는 자들.

4)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더러움들로부터 자신을 씨고, 거룩해지고, 의로와진 사람들이다. 사람은 의지를 드리면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성화의 길로 이끌어 가신다. 성화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성령님이시다.

 

 

 

6:12-20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도덕]

 

1) 헬라 철학에는 크게 금욕주의와 쾌락주의가 존재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에는 두 사상 중에 쾌락주의가 만연했다. 즉 욕망을 마음껏 즐겨도 좋다. 특히 ‘음식’과 ‘성’은 마음껏 즐겨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교회에까지 들어왔는데, 고린도 교회에까지 미치게 된 사연은 고전 8:8,10:25의 말씀을 잘 못 적용하여 이 말씀을 빌미로 삼아 ‘식물을 먹는 것이 육체적 본능이듯이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도 육체의 본능’이라고 생각했다.

2) 또 다른 하나는, 우상 숭배와 함께 시작된 신전의 창녀들의 음행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앞 절까지 고소의 문제와 음행에 대한 문제를 교훈한 바울은 다시 음행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요시하고 있다.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자유의지이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성경 말씀에 입각한 의미에 따라 판단해 보지도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일이면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 - 어떤 행위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 이 말씀은 위절의 자유 의지와는 구별된다. 이는 영적인 자유 의지로 의미 연단을 마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 합일된 성도의 자유 의지로 주님의 의지에 합일된 성도이다.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않는다’ - 위절의 말씀과 차이를 보인다, 이는 영적인 자유 의지로 행했을 경우 어느 누구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바울의 교훈]

음식을 먹고 소화하는 몸의 기능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이나, 내적인 영적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성 문제도)이다.

 

 

13절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식물과 몸과의 관계를 비유로 설명하셨다. 서로 밀접한 관계이지만 서로 폐함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폐함을 입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 곧 주님을 위하는 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이다.

 

[성찰]

그 일이 자기에게 유익한 일인가?

그 일을 실행하여 헌신함으로써 다른 이에게 주는 영향은?

몸은 주를 위한 것(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가?

주님은 몸을 위하신다(주께서 몸을 구하셨다)는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살피면서 행해야 한다.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비록 썩을 몸이고 음란 등과 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몸이지만 주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부활시킬 것을 말씀하셨다.

 

 

15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지체’ - 신체의 한 부분.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성전이 되어야 한다. 그런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와 합하는 죄를 범할 수 있느냐?

* 창기와 행음 할 수 없는 까닭? (근거-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러므로 성 관계는 단순한 육체적 행위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창2:24;마9:5) 육체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의지적 합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창기와의 육체적 하나는 곧 의지를 가지고 죄와 타협했다는 뜻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라 불리 울 수 없다.

 

 

16절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합하는 자’ - 중간태. 아교로 붙이는 것처럼 밀착되어 있다는 의미한다. (창2:24)

‘합한다’(클로메노스)와 ‘한 몸’(헨 소마) - 그들이 성적 행위를 통하여 ‘하나의 신분’, ‘같은 범죄’, ‘동일한 멸망’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음행을 행하는 자는 창기와 같은 사람이 됨을 강조하시고 있다.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몸의 연합’에서 ‘영의 연합’으로 옮겨진다. 즉 창기와 합한 자는 창기와 한 몸이지만 주님과 합한 자는 영적으로 주님과 하나가 된 자라는 것이다.

 

이론 원리에 따라 주님과 합하는 자는 주님과 같은 한 영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서는 성서의 핵심진리 강해 가운데 생명의 내주합일 되는 경험을 자세히 참고하시면 이해하는데 유익할 것이다.

 

 

[음행과 여타 다른 죄와의 차이점]

18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음행을 피하라’(φεύγετε) - ‘푸고’(도망하다, 피신하다)의 복수 현재 명령형. 한순간의 도피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음행의 유혹에서 철저히 피신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음행 죄가 다른 죄보다 크고 회개하기가 대단히 어려움을 강조한 말씀으로 해석 될 수 있다.

 

 

[바울의 최종적 교훈]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전’ - ① 바깥 뜰(ιερόν) ② 내부 성소(ναὸς) 중에서 ‘내부 성소’를 말한다.

우리의 몸은 성막의 내부 성소와 같은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다.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산 것이 되었다’(ἠγοράσθητε,에고라스데테) - 일반적으로는 ‘값을 지불했다’는 뜻이나, 본 절에서는 수동태로서 ‘저희가 산바 되었다’ 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것이기에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는 우리의 몸이란 우리들이 몸으로 나타내는 행실을 의미한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온전한 행실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할 이유 3가지

①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 이 말은 구원받은 후 계속적으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사는 것을 의미한다.(요3:5-8;롬8:13-14)

② 값 주고 산 몸. 타락시키거나 함부로 사용할 권리가 없다는 뜻이다(엡1:7;벧전9:23). 칼빈은 고전1:29,렘9:23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한다.

③ 사람이 지음 받은 목적

 

★ 영적 교훈

1)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를 잘못 사용해서는 안 된다.

2) 음행을 피해야 할 이유는

① 자신의 몸을 사단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행위임으로(6:18)

② 우리의 몸은 성령님께서 천국을 만들어 가는 거룩한 성전임으로(6:19)

③ 예수님께서 보혈의 값을 치르시고 산 우리 몸은 예수님의 소유임으로(6:20; 롬 12:1-2), 몸까지 부활되어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6:14; 15:50-54).

 

 

 

 

 

 

 

 

 

 

 

 

 

 

 

 

 

 

 

제7장 혼인에 대한 바울의 권고

 

 

내용분해

1- 9 부부에게 주는 권고

10-16 믿지 않는 배우자의 문제

17-24 이혼에 대한 교훈

25-38 독신 생활의 권면

39-40 과부된 자의 결혼 문제

 

 

역사적 배경

 

7장부터 16장까지는 고린도 교인들이 편지로 질문했던 여러 가지 신앙적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 내용이다. 당시 고린도 교인의 구성을 보면, 노예가 약 70퍼센트였다. 그러므로 주인은 노예를 최대한 부려서 많은 소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반면, 노예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돈이 있는 소유주들은 더 가지려 애를 씀으로 빛 된 삶을 실천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고, 노예들은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일이므로 주인에게 밋 보이지 않으려고 하여 몸이 부서지도록 충성하므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문제에 장애가 되었다.

 

 

 

7:1-9 부부에게 주는 권고

 

아마도 결혼을 부정한 사람들은 바울파 내지는 그리스도파로 구별 되었을 것이고 결혼을 긍정한 사람들은 게바파(베드로는 결혼한 사람)로 나뉘었을 것이다.

 

1절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너희의 쓴 말’ - 고린도 교회의 질문이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 바울의 견해로서 독신을 강조하고 있다. 음행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2절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음행의 연고로’ - 결혼을 음행의 도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인들은 결혼하지 않고서 음행을 즐기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독신으로 살면서 음행을 하므로 죄를 범할 바에야 결혼을 해서 정당한 성 관계를 맺는 것도 옳은 일이라고 증거 하였다.

 

 

3절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결혼한 사람들에게 남편과 아내에 대한 도리를 다할 것을 강조 하였다. (엡5:22-25)

 

 

4절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부부간의 관계 - 피차 복종하며 지배하는 관계가 필요하다.

 

 

5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함께 방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는 음행의 기회를 허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는 부부간에 합의하에 떨어져 지내는 것이 좋다. 이는 영적 생활을 중요시하고 있는 말씀이다. 무절제한 관계는 영적으로 유익치 못하고 또한 부부간에 너무 떨어져 있음도 마귀에게 시험할 기회를 주기에 적당한 관계유지가 필요하다.

 

 

6절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바울의 입장은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 사항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즉 권고사항이다.

 

 

7절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자신과 같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 즉 독신생활의 영적 유익함을 강조한다. 위대한 성인들은 전부가 독신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만큼 세상에 얽매이는 줄이 적다.

 

그러나 결혼하는 것도 죄는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분은 결혼을 하고서도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있고(베드로의 경우) 독신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다. 문제는 어떤 영적 자세로 주님을 섬기느냐가 중요하다.

 

 

8절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혼인하지 아니한 자’ - ‘아가모이스’(ἀγάμοις)는 남성 복수로서 ‘과부’(χήραι ς)라는 말과 동격. 그러나 ‘아가모스’=관용적 특성상 남․녀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하며, 또는 ‘장가가지 아니한 사람(32절)’로도 사용되었다. 과부를 포함한 처녀와 총각에 대하여 권고하고 있다.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

 

 

9절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자기에게 주신 은사의 분량에 순종하는 것이 제일 낫다는 의미이다. 즉 정욕(정욕 가운데 성욕)을 이기지 못 한다면 죄를 범하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

 

★ 영적 교훈

1)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7:32-35; 7:8; 마19:10-12).

2) 음행을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해야 한다(7:2-9).

① 결혼한자들은 서로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7:3-4;엡6:22-23;히13:4).

② 하나님을 위한 기도의 필요성을 위해서는 절제할 필요가 있다(7:5).

 

 

 

7:10-16 믿지 않는 배우자의 문제

 

10절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혼인한 사람들에게 교훈하신다. 혼인한 여인들은 남편에게 갈리지 말라.

 

 

11절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합하라.

 

12절-14절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사람에 대한 교훈 : 결혼을 하되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시키는데 관심을 써야 한다. 그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자가 구원을 얻어 거룩해질 수 있다.

 

 

15절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시를 말씀하심 : 믿지 않는 사람이 갈라지기를 원할 때(신앙적인 면에 갈등이 생겼을 때) 갈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최대한 화평을 도모해야 한다.

 

 

16절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0-16절의 결론이다. 부부 중 한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경우, 그 배우자의 그리스도의 신앙과 빛 된 삶은 다른 어떤 결성체나 어떤 운동단체에 가입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깊은 영향을 결혼 생활에 가져오게 한다. 이미 믿음을 갖게 된 배우자가 이와 같이 고상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엄격한 결혼관을 가정으로 가지고 들어와 아직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 전한다면, 비신자인 배우자가 감화를 받아 스스로 신앙에 들어오게 될 수도 있다.

 

★ 영적 교훈

1) 남자나 여자나 이혼해서는 안 된다.

2) 불신자의 배우자가 원하지 않는 한 이혼해서는 안 된다.

3) 부부의 관계는 비신자 배우자와 자녀들의 구원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4) 배우자의 구원을 위하여 믿는 남편과 아내는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7:17-24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17절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눠주신 은총의 선물을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형평과 처지에 맞게 생활하라. 이혼에 대한 말씀을 더욱 확대해서 할례문제, 노예문제에까지 말씀하셨다.

 

 

18절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자’ - 유대인을 지칭함.

‘무할례자’ - 이방인을 지칭함.

 

우리가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흔적을 굳이 없애려하지 말아야 하고, 부름을 받았을 때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굳이 할례를 받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19절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외적인 조건의 할례와 무 할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20절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름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즉 자신의 처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충성할 것을 강조한다.

고린도 교회 내에는 바울 사도의 빛 된 가르침을 따라서 ‘노예’와 ‘소유주’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두 부류의 성도는 피차 자신의 신분을 지혜롭게 극복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에 장애가 많았을 것이다. 바울은 그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21절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차라리(όάλλον,말론) - 이 부사는 단순히 현실적인 노예 신분을 버리고 자유인이 되라는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신 있게’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종’의 신분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사용하라(χρήσαι,크레사이) - 부정과거 중간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이다.

 

고린도 교인들의 사회적 신분은 교회 내에서 서로 시기하고 무시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런 신분의 차이는 교회의 내적 분쟁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그 종의 신분을 염려하지 말고 종으로 충실하라’. 바울은 노예들에게 현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 중 어느 사람이 자유롭게 될 기회를 얻었을지라도 노예로 그대로 머물러 있으므로써 그 자신을 위해 더 큰 유익을 구하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한 것이다. 즉 노예일지라도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지향해야한다는 말씀이다.

 

 

22절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비록 ‘종의 신분’으로 부름을 받았다 할지라도 ‘주님께 속한 자유 자’이며, 또한 ‘자유 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의 신분이 되는 것’이다. 앞의 ‘자유 자’는 죄악에서 해방 받은 자유 자를 의미한다(요8:36) 즉 영적인 완전 자유를 의미하며, 이는 외적인 신분의 조건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다.(롬3:22, 10:12) 그리고 ‘종’은 사역 적 측면에서 말씀하심이다.

23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값으로 사심’ -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 것이다.

‘사람들의 종’ - 인간적인 입장에서의 종으로서의 생활하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종의 신분을 버리고 자유분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은 그대로 유지하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모든 일에 성실하게 생활할 것을 말씀하셨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노예들이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예들은 대개 집안에서나 상가에서나 시민들의 사업장에서나 숫자적으로 자유인 보다 더 많았다. 바울의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소유주’에게나 ‘자유자’들로부터 형제와 자매 대접을 받는 것이 노예들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까? 그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얻는 가장 고귀한 영적 가치를 위하여서는 순종과 자기희생을 아끼지 않으면서 충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24절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어떤 지위에 있든지 각각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라.

 

★ 영적 교훈

1) 우리 각자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엡4:11-13).

2)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관심사는 계명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하는 것이다(요14:15; 15:9-10; 요일5:3).

3) 우리를 값으로 사신 예수님 종의 일생을 살아야 한다(갈2:20; 민1:20-21).

 

 

 

7:25-38 독신 생활의 권면

 

역사적 배경

 

당시 고린도 교회의 몇몇 사람들은 모든 육체적 본능과 욕망을 완전히 억제할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결혼에 관한 두 가지 입장이 생겼다. 하나는 독신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 생활에서 부부 관계의 가장 깊은 행동을 완전히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바울에게 질문을 한 것이

① 성도들이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는가?(1절)

②처녀들이 반드시 결혼을 하여야 하는가?(25절) 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크게 네 가지로 언급한다.

첫째, 결혼에 관한 일반적 교훈(1-7절)과

둘째, 독신 생활과 이혼에 대한 내용(8-16절)

셋째,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무엇인가(17-24절)?

넷째, 처녀 결혼에 대한 문제와 과부의 재혼에 대한 문제(25-40절)들을 다루고 있다.

 

 

신학적 문제

 

그리스도인의 결혼

결혼의 기초 : 두 사람의 사랑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있다’(히19:3-9)

결혼의 형태 : 참된 단일혼(單一婚)이다. (창2:20-24)

결혼의 목적 :

1)생육하고 번성함.(하나님의 창조질서 완성,창1:28)

2)가정생활을 통한 빛과 소금의 사명 감당(불신 이웃을 빛으로 인도, 행10장:고넬료 가정)

 

25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처녀(παρθένων)- 이 단어는 ‘미혼 여성’을 가리키며, ‘성 경험이 없는 남성’(계14:4)을 의미하기도 한다.

 

처녀 결혼에 대하여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은 없으나 자신의 의견을 교환한다고 하였다.

26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임박한 환난’ - 박해 상태는 언제나 그 자체가 종말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하늘나라를 위해 동정 생활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또 지속하는 것에 대한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그러나 동정 생활은 명령에 의해 미리 결정 지워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우선 인정하고 들어간다. 아마도 바울 자신은 환난에 대하여, 자신의 생애 기간 중에 도래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비록 지금까지 1900여년이 지났으나 계속 주님은 임박한 환난을 강조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동정의 필요조건으로 ‘앞으로 겪는 재난을 생각한다면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 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한 사람은 가족 관계 때문에 임박한 환난을 극복하는 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27절-28절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와 헤어지려고 하지 말고, 아내가 없는 사람(기혼자)은 아내를 얻으려 하지 말고 그냥 지내는 것이 영적으로 대단히 유익하다. 그러나 남자가 결혼한다고 해서 죄를 짓는 다거나 처녀가 결혼한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혼한 사람들은 육신의 고난이 있을 것이다. 이는 결혼 후에 따르는 생활의 염려와 자녀의 문제로 인한 고난이 가중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이 말을 하고 있다.

 

 

29절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때가 단축하여 졌다’ - 주님의 초림으로 그때가 가까워졌다.

[단9장의 70이레의 비밀을 참고]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의 말을 명심해 줄 것을 강조하면서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라고 권면하고 있다.

 

 

30절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임박한 환난을 대비하는 구체적인 자세를 말씀하셨다. 바울은 앞 절에 이어서 말하기를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며 살라고 권면한다.

 

⑴ 가정생활에 대한 초연한 자세를 강조

⑵ 세상사에 대한 초월을 강조 (희로애락적 측면)

⑶ 경제생활에 대한 초연한 자세

⑷ 자신의 소유에 대한 자세

 

 

31절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 - 바울이 말한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라는 그의 말의 설명으로, 글귀의 의미는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래야 할 이유로,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32절-33절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결혼한 자들의 마음 자세를 지적하셨다. 즉 ‘저는 여러분이 근심 걱정을 모르고 살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나누이게 되기 때문이다.

 

 

34절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바울 사도는 본 장 29-32절까지에서 ‘아낀다’, ‘근심걱정’, ‘마음을 쓴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아 얼마나 간절하게 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시집간 사람은 ‘세상일에 마음 쓰는 것’이 더 현실 적이고, ‘동정’으로 살려는 사람은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는 것’이 더 현실적인 관심사이다. 그 결과는 ‘마음이 복잡해 진다’는 것과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35절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노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처녀 결혼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신 이유?

이치에 합하게 하여(남들이 보기에 좋은 생활 모습) 분요함이 없이(마음이 엇갈려 분주함이 없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함이다.

 

 

36절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본 말씀은 법률이나 관습에 따라 아버지나 보호자가 혼기에 있는 자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에게 한 말이다. 바울의 마음에는 결혼하지 않도록 하는 강한 바램이 있지만, 마치 노예의 신분을 급진적으로 전복시키고자 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의 법률이나 풍속에 저촉되지 않도록 조심하여 한 말이다. 처녀의 딸을 둔 아버지는 바울의 증거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결혼시켜도 죄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

 

 

37절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라”

 

부모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딸을 미혼으로 두기로 굳게 정해져 있고, 결혼시켜야할 부득이한 일도 없고, 아버지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때, 딸을 그대로 독신으로 두는 것도 잘하는 일이다.

 

 

38절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니라”

 

바울이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결론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본래의 ‘시집보내지 않는 것은 더 잘 하는 것’이다.

 

★ 영적 교훈

1) 결혼한 사람은 현재의 생활을 유지하라(7:27).

세상의 가치 없는 것에 마음을 쏟지 말아라(7:29-31).

2) 독신생활을 권하는 이유는

① 결혼한 자들에게는 육신의 고난이 따르기 때문이다(7:28)

② 예수님의 재림과 환난을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으로(마24:15-21).

③ 분심이 되어 하나님을 단 마음으로 섬길 수 없으므로(7:32-34), 독신생활은 영적 진보를 빠르게 한다. - 가타리나, 로사, 젬마갈가니, 알칸따라의 베드로

 

7:39-40 과부 된 자의 결혼 문제

 

39절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바울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갈리지 못하는 결혼의 성격’을 말하고 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이지만, 남편이 죽으면 자기가 원하는 남자와 결혼할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의 뜻 안에서 행하라’.

 

 

40절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그러나 바울의 견해는 그대로 혼자 있는 것이 더욱 복이 있는 자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교훈은 자신의 견해인 듯싶으나 실제로는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간접적으로 주님의 뜻임을 시사하고 있다.

영적 교훈

1)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리는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7:36-38).

2) 부부는 서로간 상대에 의해 속박을 받는다(권리와 의무의 문제-7:39).

3) 홀아비나 과부가 된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름답다. 재혼할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해야 된다. 부부간에 같은 종교를 믿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

4) 하나님의 뜻을 받아 하는 권면을 잘 들어야 한다(7:40).

 

 

 

 

 

 

 

제8장 우상 제물과 성도의 치유

 

 

 

내용분해

1- 6 우상 제물이란

7-13 그리스도인의 자유

 

 

 

역사적 배경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에서는 사람들의 모임이 주로 신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 필수적인 부분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만약에 누구라도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생계의 위협을 당했다. 이렇게 신전에 바쳐진 제물은 그 량이 엄청나므로 신전에서 다 소화시킬 수 없어서 시장에 내다 팔았고, 시장의 대부분의 고기가 우상 제물이었다.

 

고린도와 같은 도시에서는 이교의 생활권을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사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방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고린도 교회 내의 영지주의(Gnostic)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모든 것이 가하다’(6:12절)하였고, 우상을 무시하는 자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4절)라고 주장하였다. 과연 그들의 이러한 사고와 행동은 옳은 것인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부딪친 그와 같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본 장에서 답변하고 있다.

 

 

 

8:1-6 우상 제물이란

1절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우상제물’ - 이방 신전에 희생 제물로 드려졌다가 시장에 내 놓은 고기. 고린도 교회 내에서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근본주의자들과 먹어도 괜찮다는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의 또 하나의 질문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 고린도 교인들이 자랑하는 인간적인 지식을 말한다. 즉 지식대로 판단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 덕을 끼칠 줄 모르는 단순한 사랑의 위험성을 지적한 말이다.(호 6:3,6)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일부는 ‘우리는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음식의 봉헌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먹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진실과 의심스러운 요소가 이태도 안에 함께 섞여있다. ‘모든 것이 가하다’, ‘정결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깨끗하다’ 등등. 지식층 사람들이 이와 같은 개방적이고도 전위적인 구호를 외치기를 좋아한다.

 

 

2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지식은 무엇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거나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오에 쉽게 말려들게 된다. 스스로 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안 계신다’는 것과 ‘그러므로 우상은 실재하는 현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지식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그의 신앙으로부터 오는 기초적인 이해에 속한다. 그런 만큼 아무도 지식을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이 지식 같은 믿음을 가진 다른 이들을 공격할 수도 없다. 야고보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떤다(약2:19).’고 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안다함으로 마귀들의 믿음보다 나을게 없는 모습을 보였다.

 

 

3절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그러면 최고의 지식은 어떤 것인가?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4절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이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우선 우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 실체가 아니므로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이며, 실제적으로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면서도 10장 20절에서 “이방인에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여 우상의 배후에는 정신적인 것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상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상 그 자체는 허상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외는 아무 것도 없음을 밝히고 있다.

 

5-6절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대 종교에서는 영들에게 ‘하늘에’ 혹은 ‘땅 위에’ 권한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개념들에 자기 자신을 종속시키고 그들 실재에 전심하는 한, 그 다수의 신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명쾌하게 말한다. 이렇게 세상에는 수많은 신이 있고, 신으로 추앙받는 ‘주’(Kyrioi)가 있지만 실제로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에게서 나왔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우상도 그에 속한 것이며 사람도 그에 속한 것이다. 이런 믿음 가운데 있게 되는 지식이 바른 지식이다.

 

 

 

8:7-13 그리스도인의 자유

7절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이런 지식’ - 4~6절에 기록된 지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된 지 식이 있어서 우상도 어떤 인격적인 신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기에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면 미신적인 생각 때문에 혹시 무슨 벌을 받지나 않을까 또는 신자가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됨으로 양심이 더러워지지 않는가 하는 의심에 빠지기 쉽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우상이나 우상 제물이 마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그릇된 신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8절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세우지’(παραστήσει) - ‘가까이 나아가다’(행27:24), ‘드리다’(롬6:13).

 

그러나 식물은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거나 더럽히거나 영적으로 풍족하게 하지 못하게 함을 강조 한다. 또한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행위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 하는 영지주의적 고린도 교인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드러내 준다.

 

 

9절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약함’ - ‘아스데누신’(반산반의, 양심의 불안을 뜻함.)

‘자유’ - ‘엨수시아’는 권리(고전7:37), 권세(마7:29), 권능(마10:1), 권위(고전9:4)라고도 번역 된다. 즉 ‘권세’(권능, 권위)는 부주의로 변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게 되면 약한 사람에게 그들로 하여금 죄에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거치는 것’- ‘길게 떨어져 있는 둘’, ‘장애물’. ‘양심에 상처를 준다’는 것과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을 뜻한다.

‘그런즉’ - ‘다만’. 다만 우리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아직 약한 상태로 있었을 때(롬5:6), 우리에 대한 구원이 고려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듯이 다른 이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그 사람들을 나의 형제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각 사람이 다 나의 형제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유함으로 형제의 양심에 상처가 되게 하거나 죄를 짓도록 만든다면 진정 그리스도를 거스려 죄를 짓는 것과 같다.

 

 

10절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지식이 있는 네가’ - 바른 지식을 갖고 있는 믿음이 좋다는 성도가 믿음이 약한 자들, 즉 자신 스스로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거리낌이 없이 먹지만 믿음이 약한 신자가 그것을 보고 자신의 지식도 바로 세우지 못하고서 믿음이 좋은 신자를 핑계로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계속 양심에 거리낌을 받는다면 어찌 하겠는가?

‘우상의 집’ - 우상을 모신 사당.

 

 

11절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결국 강한자의 바른 지식은 약한자를 범죄케 하고 멸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데 그 약한자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고 위하여 죽으신 형제이다. 그런 형제를 당신으로 말미암아 죽일 수 있느냐? (롬14:15참고)

 

 

12절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 실제로 죄를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형제가 상처를 받고 시험에 걸리게 했으므로 죄를 지은 것이다.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 -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한 영혼을 멸망케 했기 때문이다.

 

 

13절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지금까지의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을 밝히고 있다. 즉 한 영혼을 위해서는 자신의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자세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신다. 여기서 지식과 사랑과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뚜렷한 명분보다는 영혼을 위한 사랑을 주님은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런 판단 기준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힘을 써야 한다. 전장에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들을 향한 권면으로 마친 후 본 장에서 스스로 모범이 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자신의 간증 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 영적 교훈

1) 무엇을 온전히 알고 있다는 지적교만은 끝내 파멸을 부른다. (이것보다 더 큰 무지는 없다)

2) 하나님의 아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이웃에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다(8:3; 눅10:25-37).

3) 진실한 신(神)은 하나님 한분이시오, 다른 모든 우상은 헛것이요, 우상숭배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요 사단을 따르는 것이다(8:4-6; 렘10:14-15; 고전10:20).

4)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 자매가 된 성도의 약한 양심을 상처 입히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다(8:11-12; 롬13:8-10; 갈5:13-15; 골3:12-14). 마을의 이웃사랑을 위한 덕을 실천하자(8:13).

 

 

 

 

제9장 재물에 대한 교훈

 

 

내용분해

1-14 바울 자신의 권리.

15-18 자기 권리를 포기함.

19-23 종으로서의 자세

24-27 상을 얻는 자.

 

 

9:1-14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 자신의 권리]

 

역사적 배경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초대교회 때에 겪고 있었던 갈등에 대하여 이해해야 한다. 흔히들 초대교회는 매우 이상적인 교회로 생각하여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기도 하지만, 실상은 당시에도 적잖은 갈등과 알력이 있었던 것 같다. 이 갈등과 알력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다.

 

고린도 교회 내에 4파가 있었는데, 그 중에 ‘게바파’(베드로 추종자들)에 의해서 바울은 사도직과 그에 상응하는 대우(사례)에 대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①예수님의 직제자도 아니고 ②예수님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고(행1:21-22) ③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실(행2:32,3:15,4:33)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도들이 일꾼으로 뽑아 세운 경건한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 사람(행7:58;8:1)으로만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베드로의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강연’ 분위기와 바울의 예수님에 대한 강연 분위기는 그 젖어드는 감동 자체가 달랐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바울에게 제시된 문제가 ① 사도권에 대한 비판 문제와 ② 바울이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비량 전도한다는 비난에 대한 바울의 해명서가 본문이다.

 

 

1절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 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 고린도 교인들이 주안에서 행한 나의 열매임을 말함.

① 바울이 주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말씀에 은혜 받고 교회를 창립한 일.

② 예수님을 통하여 받은 ‘케리그마’(교리-탄생,죽음,부활,승천)와 ‘디다케’(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전하고 들을 사실들.

③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섬김, 봉사, 희생 등 이러한 ‘나의 일’을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닙니까.

‘자유자’ - 신분의 자유자를 의미하나 영적으로 죄에서 자유한 사실을 가리 키기도 한다.

‘사도’ -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이다.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하심.

‘주를 보지 못했느냐’ - 주님을 만나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반론으로 자신도 주님을 만났음(행9:4-6,15;고후12:2)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강조함.

 

 

2절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인친 것’ - 곡물이나 물건에 공인을 찍어서 자기의 소유임을 확증할 때에 쓰던 인.

 

다른 사람들은 바울이 사도임을 부정할지 모르나 나는 너희를 위해 사도로 일해 왔고, 그것에 대한 인친, 즉 너희가 나를 교역자로 삼았고, 나는 그 교회를 이제까지 인도해 왔고, 현재 너희와 내가 성도와 교역자 관계란 사실이 마치 도장 찍어주고 증명해 준 것과 같이 현실이 증명하지 않느냐! 이 사실에 대하여 고린도 교인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3절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힐문’ - 비판함 (법정 용어로서 마치 ‘죄수를 심문하고 조사’ 하듯 따지고 묻는 행위)

‘발명할 것’ - 분명히 드러낼 것. ‘아포로기아’(발명하다)의 의미는 법정 용어로서 검사의 심문에 변호사가 죄인을 대신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답변해 준다는 의미로 사용될 때 쓰는 용어이다.

 

너희가 마치 나를 힐문(검사가 죄인을 호되게 심문하듯)하므로 내가 ‘발명할 것’(변호사가 죄인을 대신해서 말하듯) 조목조목 변호하여 ‘사도냐’, ‘아니냐’ 는 문제를 너희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4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먹고 마시는 권’ - ‘엑수시아’(권-무엇을 주장할 권리) 교인들을 통해서 받게 되는 대접을 가리킨다.

 

내가 지금까지 장막 짓는 일로 자급(自給)을 하면서 전도를 해왔지만, 여러분이 주는 음식, 음료를 마실 자격이 내겐들 어찌 없겠습니까.

 

 

5절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사도 베드로는 부인까지 데리고 다녀도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사도 바울은 혼자이면서도 희생의 봉사를 아끼지 않았으면서 춥고, 배고프고, 헐벗고, 굶주림을 수 없이 당해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소곳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나’ 라고 해서 게바와 같이 아내와 함께 다니면서 대우받을 권리가 없겠는가?

 

'다른 사도들' - 게바를 제외한 사도들

'주의 형제들' - 주님의 친척들 가운데 형제 격에 있는 자들

‘게바’ - 사도 베드로를 가리킨다. 당시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결혼한 분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 : 사도 베드로, 열심당 시몬 등)

6절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바나바도 자급 전도를 했다. 즉 바울과 바나바만 육체적 노동을 통하지 아니하고 먹을 권이 없겠느냐?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권리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했다(행18:3; 고전4:12; 살전4:11).

 

 

7절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자비량’ - 군사용어로서 ‘옾손’(ὀψον, 양식) + ‘오네오마이’(ᾠνὲομαι, 구입하다) = ‘옾소니오이스’(ὀψωνίοις), ‘스스로 구입한 일용할 양식’.

 

자기가 먹을 양식을 스스로 구입해 싸들고 다니면서 군대 생활을 하는 군인을 봤느냐! 군인, 농부, 목자의 3경우를 들어 보수를 받음이 마땅함을 지적하였다.

 

 

8절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 하느냐”

 

‘사람의 예대로(카타 안드로폰)’ -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습이나 생각에 따라 라는 의미.

내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습이나 생각에 따라 말하는 것입니까? 구약의 율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9절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신 25:4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써,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소가 먹고 일을 많이 해서 사람에게 많은 수확을 얻도록, ‘사람을 위한 것’ 임을 말한다.

 

‘내가 비록 소가 되어서 여러분을 위하여 타작을 해주는 것처럼 수고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나를 먹여야 합니다.’

10절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전혀’ - ‘판토스’(πάντως,‘확실히’)

 

밭 갈고 심는 자나, 곡식을 떨고 추수하는 자나 다 같이 자신의 응당한 보수를 받게 되어 있다. 바울이 비록 소가 되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타작을 해주는 것처럼 수고한다 할지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일꾼이나 사도들도 자신의 보수를 받는 것이 확실한 권리임을 율법을 들어 말씀하고 있다.

 

 

11절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신령한 것...육신의 것’- ‘타 프뉴마티카...타 사르키카’(‘영혼을 위한 것...육체 를 위한 것’)

‘나는 고린도교회 여러분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적으로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육신의 것을 받는다고 해서 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2절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 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장애’(앵코페) - 적군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설치물

 

바울은 혼자 다녀도 다소곳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부인까지 데리고 다녀도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편지의 내용이 바로 그 이야기이다.

 

‘내가 게바와 같이 한다 해도 여러분이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사도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것은 웬일입니까? 그러나 내가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것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필요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길에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지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주위에는 바울을 비방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었음으로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13절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복음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민 18:25-31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이 성전 제단에서 나는 것을 먹는다’ - 레위인들을 두고한 말.

‘제단을 모시는 자들이 제단과 함께 나누리라’ - 제사장을 두고 한 말.

 

★ 영적 교훈

1) 목회자가 행한 일은 그가 교회를 통해 맺어놓은 열매에 의해서 결정된다.(9:1; 고후1:14; 살전2:20)

2) 목회자는 교회를 통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고후11:8-9; 빌4:10-14)

3) 신령한 것을 공급받은 성도들은 목회자가 육적 삶에 구애됨이 없이 목회 할 수 있도록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마10:10; 고전9:7-14)

 

 

14절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자신의 견해가 옳음을 증거 함. (마10:10;눅10:7)

 

 

9:15-18 자신의 권리를 포기 함

 

15절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그러나 내가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해서 당신들에게 나에게 이런 대접을 해 달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차라리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헛된 오해를 낳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다. 혹 자신의 사역자들이 가진 권리를 말함으로 생기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내 자랑하는 것’ - 권리 포기를 바울은 자랑하였다. 이는 영적인 모범이기 때문이다.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부득불 할 일 - ‘어째도 해야 할 일’(사례를 하지 않아도, 사도라고 인정해주지 않아도)

‘자랑’ - ‘카우캐마’(χαύχημα, 자신 스스로가 취한 행동에 자기가 도덕적 가치를 두고 흐뭇해하는 마음)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다’란 내가 한 일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는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자신이 전도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임을 강조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없다. 오직 주님을 닮는 희생적인 삶만을 자랑한다고 하셨다.

 

 

17절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6절에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왜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되는가?’를 설명한다.

‘상’ - ‘미스도스’(μισθός, 보상)를 뜻한다.

‘임의로’ - ‘아콘’(ἄκων, 자발적인)

‘직분’ - ‘오이코노미안(οἰκονομίαν)’, 눅12:42~43;17:10에 ‘오이코노모스’(청지기)와 같은 뜻이다. 청지기는 종의 우두머리로서 스스로의 자유권이 없는 사람이다. 이조시대에는 이런 직분을 ‘집사’라고 불렀다.

 

내가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에 대한 보상이 있겠지만, 내 임의로 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스스로의 자유권이 없는 일’을 부여받은 것이다.

 

[구체적인 상급에 대한 언급]

마땅히 받게 되는 권리(값)를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것이 하늘에서 얻게 되는 상급이 되는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상을 얻는 일이다. 그러나 임의로 하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의 직분을 맡은 종이기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눅17:7~10).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오이코노모스,청지기)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

 

 

9:19-23 : 종으로서의 자세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고린도 교인들이여 나는 여러분들을 위하여 수고만 했을 뿐이지 나에게 있는 귄리를 하나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단지 복음을 19절-23절까지의 자세로 증거했다’고 고백한 내용이다.

 

 

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전도자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한 바울은 이제 자유인의 권리마저 주님의 복음 증거를 위해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20절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자세]

바울은 참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자들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유대인으로서의 모든 관습과 명예를 포기하였으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처럼 행동하여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였고(행16:3), 결례를 행하기도 하였다(행21:17~29). 그가 이렇게 행함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21절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방인에 대한 자세]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더 이상 그에게는 율법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매여 있는 자에게는 율법에 매여 있는 자처럼 처신했지만, 그와 같이 한 것은 동족인 유대인들이나 혹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롬9:3;갈2:7)

 

 

22절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약한자’ - ‘아스데네이스(ἀσθενἶς)’, 복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약한 양심의 소유자.(고전8:9;살전5:14)

[믿음이 약한 자들에 대한 자세]

바울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믿음이 강한 상태에 있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였으며 그들의 믿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했다는 것이다. (약한 자들에 대해서는 고전 8-10장에 기록되어 있다)

 

 

23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모든 것’ - 앞 구절에서 바울이 말한 모든 내용들.

 

바울은 여러 사람들과 여러 상황에 자신을 순응시켜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장애가 없게 했다. 그 이유는 복음을 통하여 남을 구원하고 동시에 자신도 복음에 참여함으로서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영적 교훈

1) 복음 전파자의 사역 동기

사명을 통해 청지기 직분에 부름 받음(9:17; 고전1:1; 갈1:1; 행16:12-18)

하나님의 부름 없는 수고는 ‘인간의 일’일 뿐이다.

2) 복음 전파자의 사역 자세

① 누릴 수 없는 권리를 다 누리지 않는 것(9:18)

② 자신의 자유를 낮추어 종이 되어 섬김(9:19; 막9:33-37)

3) 복음 전파자의 사역 목적

모든 사람을 구원하며 복음을 공유하는 일에 참여 시키는 것(9:20-23)

 

 

 

9:24-27 종(사역자)로서의 영적 자세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운동장’ - ‘스타디오(σταδίῳ)’, 약 200m 길이의 단위를 말하나 후에 의미가 ‘스타디움(경기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즉 운동장에서 200m 달리기를 하는 운동경기를 비유로 말씀하였다. 상 얻는 자는 오직 하나이다. 육상 경기에서 선수가 상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달려야 하는 것과 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빛된 삶으로 천국의 상을 얻겠다는 그 목표만을 향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 - ‘호 아고니조메노스(‘ὁ ἀγωνιζόμενος’-‘경쟁하다’, ‘격렬히 몸부림치다(ἀγωνίζομαι)’에서 파생된 말이다.

‘절제’ - 고대 그리스의 운동 경기자들은 통상 10개월 가량의 고된 훈련을 받으며 음식, 오락, 수면시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제한해야 했다.

 

세상 운동선수들이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모든 일을 절제하고 훈련하며 노력하면서 격렬히 몸부림치고 있는데, 우리들은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 경주한다면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절제하고 열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느냐?

 

 

26절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향방 없는’ - ‘목표 없는’, ‘불분명한’.

싸우기(πυχτεύω,퓌그튜오) - ‘권투시합’. ‘퓌그메’(πυγμή,주먹)+‘퓌크테스’(πύχ -της,권투선수)의 합성어이다.

‘허공을 치는 것’ - 권투 선수가 연습을 할 때, 상대방 없이 혼자서 연습하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영적인 싸움은 뜀뛰기 선수가 몇 미터라고 하는 목표 없이 달리기를 하거나, 권투 선수가 마치 상대가 없이 연습하는 것 같이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있고 싸울 나의 적(敵), 즉 상대가 있다. 바울은 늘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내 몸을 처’ - ‘처’[...아래(ὑπό)+눈(ὀψ)]의 합성어로서 ‘휘포피아죠’(ὑπωπιάζω-눈 아래 부위를 친다)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서 권투 선수들이 상대방의 얼굴 부위를 공격하는 광경을 묘사한 말이다. 바울은 이러한 권투 시합을 연상하면서 자신의 싸울 대상이 다름 아닌 자기 몸이라는 것이다.

‘복종’(δουλαγωγώ) - ‘종’, ‘노예’(δούος)+‘데려오다’, ‘끌고 오다’(ἄγω)의합성어. 전쟁에서 승리자가 패배자를 종으로 끌고 오는 것을 뜻하는 말한다.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 후 이제는 온전히 복종시켜 끌려오는 종 같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해야 했는가 하면 이 모든 싸움에 있어서 심판관(하나님)에게 불합격 판정을 받을까 봐서이다.

‘버림’ - ‘조사하다’, ‘시험하다’란 단어에서 파생된 말로서 ‘불합격자’란 뜻을 갖는다. 사역자로서의 겸손을 보여주고 있다. 영적 경주가 끝날 때까지 계속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해야 한다. 종합적인 교훈이다.

 

★ 영적 교훈

1) 그리스도인의 삶 : 하나님 나라를 향한 달음질(시39:12; 히11:13-14)

삶의 목표 : 썩지 않는 면류관을 받는 것(딤후4:7-8)

삶의 자세 : ① 목표를 바라보는 질주(빌3:12-14)

② 절제를 통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롬6:6;갈5:24;마16:24)

삶의 결과 : ① 상 받는 자-144,000명, 순교자, 통과성도(마13:24-30; 마8:11-12;21:43)

② 버림받는 자

 

 

 

 

 

 

 

 

제10장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

 

 

내용분해

 

1-13 우리의 경계(교훈)

14-22 주님의 잔과 귀신의 잔

23-33 남의 유익을 구하라

 

 

역사적 배경

 

출애굽 하여 광야생활을 하던 조상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그리고 지탱하심과 용서하심 속에서 놀라운 축복을 계속적으로 누렸다. 그러나 순간순간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의혹과 의심을 가지고 이의를 제기 하였으며, 그들의 우상숭배(출32:4)는 간음죄(민25:1)와 더불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출17:2)를 범했다.

 

당시 고린도의 환경적 여건을 보면 그곳에는 비너스 신전을 비롯한 10개의 큰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에서는 먼저 우상 제단에 예배를 드리는 행사가 있었고 2부는 축제가 벌어졌다. 이 때 여 사제와 음행 하는 일이 공공연히 이루어지면서 급기야 전 고린도 지역에 음행으로 물들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넘치게 된 우상제물(고기)이 온 장터에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무엇을 알려고 하는 지나친 열심으로 인하여 죄를 많이 지었는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이러한 모습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스라엘의 실패에 비교하면서 그들의 안일한 신앙생활을 경계하고 있다.

 

 

 

10:1-13 우리의 경계(교훈)

[이스라엘의 실패를 교훈으로 권면함]

 

1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우리 조상이 다 구름아래 있고’ - 출13:21,22; 14:19-24. 공간적으로 구름이 아래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한 구름기둥을 의미한다.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 홍해 바다를 가로질러 건너갔던 일을 말한다.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아래 인도를 받았다는 말씀이다.(왕상8:10-11)

 

 

2절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모세에게 속하여’ - 지팡이로 홍해 가르는 능력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바싹 기대고 의지하게 되었음을 뜻한다(모세의 인도함 받음). 성도들이 마음의 할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연합되는 것에 관한 예표이 기도하다(롬6:3-5).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았으며 홍해바다를 건너가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음을 지적하셨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경험을 한 백성이 일찍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갖는 첫 번째 특권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적인 행실이 제거되는 연단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세례라는 상징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3절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신령한 식물’ - 당시에는 만나를 가리키는 것이나 영적으로는 하늘의 은혜와 사랑과 도움을 의미한다. ‘만나’란 원어적 의미는 ‘뭔지 모르겠다(시편기자의 표현)’,‘권세 있는 자의 양식(시78:24-25)’이다.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령한 음료 마셨으니’ - 미완료시제.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계속해서 마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상징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 성령을 의미한다.

‘저희를 따르는’ - ‘따르는’(ἀκολουθούσης, 아콜루드세스) 과거 미 완료형. ‘계속적으로 뒤따랐다’는 뜻이다.

‘신령한 반석’ - ‘반석’(πέτρας,페트라-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암반, πέτρος,페트로스-움직일 수 있는 바윗덩어리)

 

모세가 기도하여 반석에서 물을 낼 때, 앞에 반석(페트라)을 쳐서 물을 먹은 날로부터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이 집채만 한 바위가 계속적으로 뒤따랐다는 것이다.(역사상 하늘로부터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는 백성이 없었다 - 둘째특권)

 

 

5절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멸망 받았느니라’ - ‘κατεστρώθησαν(카테스트로데산)’ 부정과거수동태. ‘씨를 뿌릴 때 바람에 흩날리듯 흩뿌려 표면을 뒤덮다’ 는 뜻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멸망 받았을 때 한곳에서 한꺼번에 죽인 것이 아니라 지역을 거쳐 가면서 조금씩 여기저기에서 죽였다는 것이다. 40년 동안 300만 명을 죽였고 1년-75만 명씩, 하루-200명씩을 계속 죽인 꼴이다. 멸망에 대한 비참함을 보여준다(민14:21-23).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세상과 조화를 시도한다는 그 시도가 바른 것이냐’라는 물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에서 나타난 일들을 도입하여 설명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특권이 무엇이며 왜 그들은 멸망 받았는가를 말씀하면서 ‘너희도 사제와 조화를 꾀하다가 끝내는 우상 숭배와 음란으로 멸망을 받겠구나!’ 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광야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 이와 같이 은혜를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멸망 받는 사람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게된 이유]

6절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거울(τύποι ἡμῷν)’ - ‘표상’(롬5:14), ‘식양’(행7:44), 본받아야할 ‘모범’(살전 1:7,살후3:9) 등의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흔적으로 새겨 놓으라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악을 증거한 것 같이(ἐπιθυμητάς κακῷν)’ - ‘ἐπιθυμέ’=ἐπι(...쪽으로)+ θυμος(혼영)의 합성어. 사람의 마음이 뭔가를 하고자 하여 한쪽으로 쏠려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추구한 방향이 얼마나 악하였는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민11:1-3)

 

이런 과거의 역사는 현재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된다. 악을 행치 말아야 한다.

 

 

7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 - 과거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우상숭배 하는 자가 되지 말라’ - 출32:1-6의 우상숭배(금송아지 사건)를 말씀하시며 ‘우상숭배 자가 되기를 멈춰라’는 뜻이다. 이미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우상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우상 신전의 예식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는 자들이 있었다(출32:25-29).

 

고린도 교인들 중의 일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것(출32:4) 같이 이교도들의 제사에 참여하여 우상숭배를 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경배한 후 불경스런 향연을 벌인 것처럼 신전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여함으로써 여사제들과의 음란 행위에 빠진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8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간음하지 말라’ - 민25:1-9의 사건을 가리킨다. 간음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신다.

구약시대 모압에서 바알브올을 섬기는 제사 행위는 처녀들과의 음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고린도에서는 비너스 신전 창녀들에 의해 행하여졌다. 따라서 우상숭배와 간음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9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 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시험하지 말자’에크페이라죠멘(ἐκπειράζωμεν= ἐκ+ πειραζω) - 하나님의 선하심, 능력, 지혜 등을 그릇된 동기에서 알아보려는 인간의 생각을 가리키는 동사이다.(마4:7; 행5:9;히3:9)

 

‘민21:4-9’의 사건을 말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악용하여 계속 죄를 졌다. 그러므로 주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0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민16장의 사건이다. 원망하는 죄에 대한 교훈이다.

‘원망하지 말자’ - 용납될 수 없는 불만을 토로하는 것(악감정을 품고 중얼거림, 민14:1-5,26-35;16:1-3,35,42-49).

‘멸망시키는 자, 올로드류투(ὀλοθρευτού)- ‘치명적인 파괴자’란 뜻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천사’를 가리킨다.

 

바울의 권면에 따라 우상숭배하지 못하도록 말리는 지도자들에게 노골적인 원망을 하는 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다.

 

11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말세를 만난’ - ‘세대들의 끝’이란 뜻으로써, 교회시대 전체를 말세로 보고 있다. 즉 교회시대는 대환난을 준비하는 시대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된다.

‘우리의 경계, 누데시안(ουθεσίαν) - 권고하다, 교정하다는 뜻으로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직역]

‘그들이 이런 일들을 당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고가 되었으며 그것이 기록에 남아서 이제 세상의 종말을 눈앞에 둔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6-11절의 결론]

구약성경은 이미 은총을 받은 선민의 배은망덕하고 사악한 행동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업적에 비추어 잘 대조해 놓고 있다. 그들은 탐욕스럽거나 육욕에 찼으며 우상숭배자가 되었고 음행에 빠졌다. 실제로 이 세 가지의 죄들은 모두 서로 얽혀있었다. 이교도들의 제사 의식은 여러 가지 감각과 관능적 기쁨으로 그들을 매혹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늘 그렇게 허영적이며, 술 마시고 법석대는 향연들을 야훼께 바치는 제식(祭式)에 도입시키려고 했다. 종종 그들은 실제로 야훼를 저버리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들을 받들었던 것처럼 그분을 받들고자 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 속에서 교회의 성장이나 목회의 발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이와 같은 경우에 빠지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선 줄로’ - ‘헤스타나이(ἑστάναι)’는 현재형. 신앙의 아무런 흠이 없이 온전하다는 뜻.

 

고린도 교인들에 관하여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그들의 자만심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우상숭배와 음행으로도 더럽혀질 수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미 구원을 이루기나 한 것처럼 자기 자신들에게 특권을 부여한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항상 희망을 가져야할 근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해야 할 이유 또한 존재한다. 받은 은총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즐거워하는 반면, 아차 하는 순간, 그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빠르게,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바을 사도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 아래와 같이 말한다.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주님 안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넘어지다(πέση, 페세) - 단번에 그리고 완전하게 은혜로부터 정죄와 심판에 떨어지는 것이다.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처지에 이를 것을 경고한다.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페이라스모스, πειρασμὸς) - 인간을 타락시키려는 사단의 악의적 유혹이다.

‘하나님은 미쁘사(피스토스 데 호 데오스, σιστός δέ ὁ θεός)- 하나님은 믿고 의지할 만큼 신실하시다.

‘허락지 아니하시고’ - 인간 능력 한계 이상은 시험하지 못하게 하신다.(요1:12; 2:6)

‘강하게 하시느니라(뒤나메이, δύναμαι) - 의지를 드리는 한에 있어서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12절 말씀과는 달리 시험이 올지라도 걱정하지 말고 담대한 자세로 영적 경주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감당 못할 시험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시험을 감당하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시다.

★ 영적 교훈

1) 하나님께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이스라엘 민족과 고린도 교인들과 우리들(10:1-5)

2) 특권을 활용하지 못하고 멸망 받은 이스라엘 민족과 고린도 교인들(10:6-11)

① 우상숭배 ② 간음 ③ 시험 ④ 원망

3) 자만심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10:12)

4)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주시는 하나님(10:13)

10:14-22 주님의 잔과 귀신의 잔

 

 

역사적 배경

 

고린도는 항구도시인 만큼 해상무역과 어업이 주 생업이 되었다. 따라서 형통과 평안을 구하는 제례가 성행했고 신전도 많았다. 제사의 진행은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장엄한 제사의식, 2부는 거대한 연회(파티- 희생 제물을 가지고 제물을 올린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진행), 3부로는 여사제의 특별한 간택(많은 남자들 중에 사제에 간택되면 그 날 그 사제의 남편 역할을 해야 함)하였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전파된 것이 기독교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독정신은

(1)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죄가 다 해결된다고 쉽게 생각하였고

(2) 죄는 용서받았고 또 성경에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으므로 이방인의 제사 장소에 가서 우상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죄로 생각지 않고

(3) 우상제물을 먹은 상태에서 또 교회로 들어와 성찬식(매주 마다)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예배 전에 이미 취해있는 성도들도 있게 되었다.

 

 

14절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우상숭배...피하라’ - ‘도망하라’, ‘멀리 달아나라’(강한명령동사).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우상숭배 하는 장소를 출입하거나 습관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일이 있었다. 그 행위를 멀리하라고 권면한다.

 

 

15절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판단하라’ - 법정용어. ‘확실하게 최종적 결정을 내려라’.

고린도 교인들을 지혜 있는 자로 간주하고, 강요가 아닌 스스로 판단하기를 권한다.

 

 

16절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축복의 잔’ -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여 드리는 ‘빠스카 만찬’은 여러 시간 지속되는 식사 예식인데, 그 동안에 잔은 네 번 돌려졌다.

① 첫째잔 - 애굽 땅에서 건져내심.

② 둘째잔 - 광야 길을 갈때 지켜주심.

③ 셋째잔 - 가나안 땅을 축복해 주셨음.

④ 넷째잔 - 미래를 축복해 달라. 그 중에 세 번째 잔을 말함.

 

성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우리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처럼,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도 우상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 참고

‘성찬예식’ -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였던 날을 기념하여 했던 성만찬을 예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건져주신 ‘행위’ 자체를 기념하고,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예수님’ 자체를 기념하는 예식이다.

 

 

17절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한 하나님(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떡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떡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이다.(엡5:23;골1:18)

 

 

18절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구약의 제사방법 가운데 일부를 예화로 들고 있다. 구약의 제사법 전에 보면 제물은 바친 자와 제사장이 나누어 먹었다.(레7:15; 8:31; 신12:18)

 

[화목제의 예]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기 위하여 화목제 희생제물을 가지고 오면 그 중에 희생 제물로 올려 드리는 부위(소-넓적다리, 양-가슴,콩팥)를 떼어 내고 남는 부분은 제사가 끝난 후 가족을 위해 제사를 드려 준 제사장을 초청해서 성전 앞마당 잔디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어 있다. 이때에 ‘희생제물을 올렸다’는 것은 제단에 참여한 자들이 희생제물을 먹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 흘리심에 참여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그와 함께 먹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화목제의 예로 보아 우상의 제단에 참여하는 자는 귀신과 하나가 됨을 밝히고 있다. 8:4-6절의 말씀과 같이 우상 제물을 먹는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우상 제물을 먹는 것과 우상에 참여하는 것(숭배)과는 큰 차이가 있다.

 

19절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바울 사도는 ‘우상’이든 ‘우상제물’ 이든 모두가 거짓임을 강조한다. 우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8:4절)이며 우상의 제물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20절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우상의 제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후에 역사 하는 귀신을 섬기는 것이 문제다.

 

‘귀신과 교제하는 자’ - ‘다이모니오이스’(δαιμονίοις)는 하급 영, 잡신을 의미하는 ‘다이몬’(δίμων)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것처럼 우상의 제단에서 나온 제물을 먹는 자들은 우상 배후에 있는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다. (신4:35,39; 32:17)

 

21절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그런데 어찌하여 이방 신전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번갈아 가며 우상제물과 성찬에 참여합니까? 주님을 믿은 성도들은 결코 귀신과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마6:24)

 

 

22절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노여워하시게’ - ‘질투하게 하다’ 사랑과 신뢰에 대한 배신을 당하여 유발되는 감정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분노의 표현이다. 주님을 버리고 마귀를 섬길 때 하나님의 강한 진노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적이므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강하시고 그 무엇도 그분을 굴복시킬 수 없다.

★ 영적 교훈

1) 성찬식 참여는 단순한 음식물 취식이 아닌 예수님과의 구속적 신비를 중심한 교제이다(10:16-17).

2) 우상제물 취식은 우상 배후에 있는 귀신과의 교제를 뜻한다(10:20).

3)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노여워 하시게 해서는 안 된다(신32:21).

 

 

 

10:23-33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덕을 세우다(οἰκοδομεί) - 빌딩을 세울 때 기초를 닦는다는 용어. 이 용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초를 닦아준다는 말로 바뀌어서 영어로 ‘덕’이라고 사용된다. 그러므로 ‘남을 유익하게 한다’ 함은 남의 신앙의 기초를 쌓아주는 행동이라는 말이다.

 

누구나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해서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자유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잘 못 해석하고 잘 못 전할 수 있는 위험을 제거하려 한다. 바울 자신은 모든 일에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남에게 신앙의 기초를 쌓는데 도움(덕)이 되도록 노력했다.

 

 

24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성도의 높은 생활 원칙을 말씀하시고 있다. 남의 유익을 구하며 사는 생활이 사랑이다.

 

 

25절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시장에서 파는 식물은 일반 식물을 지칭하기보다는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는 우상의 전에 바친 제물을 제사가 끝난 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 식물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서 성도의 삶에 대한 기본 원칙(27-28절) 중 하나를 말한다. 즉 시장에서 파는 음식은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사서 먹을 수 있다.

 

 

26절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땅과 거기 충만한 것’ - 땅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땅의 식물은 그것이 우상의 제물이 되었다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27절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불신자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그들이 대접하는 식물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다. 왜? 그 고기조차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고린도 지역은 신자보다는 불신자들이 훨씬 많았기에 그들과의 교제도 많았다.

 

 

28절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자신이 먹는 음식이 우상의 제물이었다는 것을 자신과 상대방이 알아 양심에 걸린다면 남에게도 덕이 안 되므로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왜 그런가? ‘알게 한 자’는 그 먹는 자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가부를 결정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연약한 신자의 믿음에 상처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29절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내가 말한 양심’ -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양심은 내 양심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덕을 끼쳐야 되는 내 양심을 말한다.

우상의 제물임을 알게 해준 사람 앞에서 그대로 우리의 자유를 사용하여 먹을 수 있지만, 그 자유 때문에 말한 사람은 회의에 빠지고 양심에 시험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 양심이 남의 양심 때문에 판단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30절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친구가 음식을 차려 주었고 내가 그 음식을 감사하게 받아먹었다면 그 감사한 것에 대해서 비방을 받을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믿음이 약한 사람에 의해 비방을 받기 때문에 서로의 양심을 따라 포기할 줄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리스도인의 제1 원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이 있나? 없나?를 생각하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32-33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제2 원리]

상대방에게 주님을 알게 하는데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되고 모든 일에 사람을 기쁘게 하고 유익을 구하므로 상대방이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다.

 

★ 영적 교훈

1) 그리스도인 생활의 첫째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골3:17;벧전4:17)

2) 그리스도인 생활의 둘째 원리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다.(롬14:7,8;15:1,2)

3) 이런 삶만이 신자를 성화의 길로 불신자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제11장 우상에 대한 경고

 

 

 

내용분해

1- 6 : 여자는 수건을 쓰라.

7-12 : 창조의 원리

13-16 : 자연적 질서

17-22 : 애찬의 분쟁

23-29 : 성찬의 질서

30-34 : 결론적 교훈

 

 

11:1-16 여자의 수건에 대하여

 

제사에 바쳐진 음식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그리스도인들과 이교적인 환경간의 접촉에 있어서 중요한 영역을 교훈한 후에 본문은 다시 공동체 내부 문제로 관심을 돌린다.

그 내부의 문제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었다.

① 공동체 모임에서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워야 하는 문제. 고린도 교회는 부녀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에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원래 유대인은 기도할 때에 남녀 간에 수건을 썼고 헬라인은 쓰지 아니했다. 그러나 바울은 여자들만 수건을 쓸 것을 명하고 있다.

② 올바른 성찬예식

③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의 질서적인 운영 등이다.

 

 

11:1-6 : 여자는 수건을 쓰라

 

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이 자신이 주님을 본받는 것 같이 주님을 본받으라고 하심. 교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영적자랑을 하고있다.

 

 

2절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유전’ -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가르침으로서 교회의 전통, 관습, 교훈, 교리를 포함한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칭찬거리를 말씀한다.

 

 

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그러나...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 본 절은 고린도교인들 모두가 바울이 전한 유전을 잘 지킨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졌다 할지라도 이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창조의 원리를 통해서 논증한다.

 

 

4절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자기보다 높은 권위자에 대한 순복을 상징한다. 남자에게는 그리스도 외에는 머리가 없으므로 그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그리스도 외에 어떤 보이는 권위자에의 순복을 표시하게 되므로 불가하다.

5절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아마도 고린도 교인 중 일부 여성들은 남자들과 같이 머리를 가리우지 않고 발언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와는 다르다. 여자에게는 남자라는 보이는 머리가 있으므로 그에 대한 순복의 표시로 수건을 써야 한다.

 

 

6절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순복을 하든지 아니면 머리에 수건을 쓰므로 복종하든지 하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아도 된다면 머리를 깎아 버려도 될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니 무엇으로든지 머리를 가리우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은총의 질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정신에 마음 문을 여는 것과 같다.

★ 영적 교훈

1) 타인이 본받을 것이 있는 성도가 되려고 애쓰며 살아야 한다(요13:34; 11:1).

2) 남․녀는 모두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동일하게 구원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질서에 순복하며 살아야 한다(엡5:22-33).

3)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서는 변론의 태도를 버리고 겸손히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11:7-12 창조의 원리

7절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남자에게로 돌려 남자가 머리를 가리우지 말아야할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습이 남자를 통해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 역시 남자에 대한 그녀의 관계를 통해서, 다시 말하면 여자가 여자다우므로 ‘남자의 영광’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남자의 품위에 한 몫 하게 되는 것이다.

 

 

8-9절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창조의 질서를 명확히 함.

 

 

10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천사들을 인하여’ - ‘천사들이 보고 있으니’란 의미.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우리를 살피고 있다.

 

[직역]

‘천사들이 보고 있으니 여자는 자기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는 표시로 머리를 가리워야 합니다‘.

 

 

11-12절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일방적인 창조의 질서를 빌미로 억압하고 여자를 무시하는 경향을 제거하기 위해서 말씀 하였다. 비록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는 그렇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 양성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양편은 서로 상대방에게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11:13-16 자연적 질서

 

13절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이론을 그치고 영적인 상식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

 

 

14-15절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남자의 긴 머리는 그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반면 여자의 긴 머리는 그녀를 영광되게 한다고 말씀하였다.

 

 

16절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 - 이상의 진리에 대하여 반대할 사항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나 우리에게는 이런 규례가 없다.

[직역]

‘이에 대해서 딴 소리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

 

 

 

11:17-35 성찬에 대하여(애찬의 문제)

 

복음서 이외의 유일한 기사이다. 연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헬라인들의 당시 공동식사인 ‘에바노스’의 관습과 성찬의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고 행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관습을 고쳐주고자 쓴 말씀이다.

 

[성경적 성만찬 이해]

1) 성만찬의 본질 -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는 의식.(마26:20-29; 막14:17-25; 눅22:14-30)

2) 바울의 성만찬 이해

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이며 계속되는 선포.(11:24,26) 그의 죽으심은 오늘 나를 위한 죽으심으로 체험됨.

②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한 모세의 옛 언약(호24:1-11)을 대신하는 새 언약(렘 31:31-34)으로 이해함.

③ 그리스도와의 계속되는 사귐의 확인임과 동시에 성도 서로간의 사귐으로 봄.

④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종말론적인 희망의 식탁이다.

 

초대교회 때의 성찬식 -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월절 성찬과 헬라인들의 만찬이 혼합된 형태로 성만찬(성찬+만찬)을 거행함.

 

유월절 성찬 -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기 전 10대재앙으로 구원하실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이 바로 유월절 전 날이다. 후에 그리스도의 보혈은총으로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였다.

 

헬라인의 만찬 - ‘에바노스’(εβανος)라고 하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축제이다. 당시 헬라를 제외한 나라는 야만민족으로 볼 정도로 헬라는 문명생활을 했다.

 

 

11:17-22절 : 주의 만찬을 먹을 때

 

성만찬의 규례

성만찬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월절 만찬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만찬은 모세가 세운 옛 언약(출24:1-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이 때 언약식의 준비 작업은 ①언약서 낭독 ②백성들의 준행 약속 ③언약의 피뿌림 ④70인 장로와 하나님 앞에서 공동식사를 함으로 이루어졌다. 왜 이 언약에서 동물의 피를 뿌렸는가? 그 이유는 제물의 목을 베어 피를 받고, 제물을 절반 쪼개어 놓았는데, 이유는 이 언약을 배반하는 자는 이처럼 죽임을 당하고 그의 몸을 조작 내겠다는 준엄한 약속의 상징이다. 이것이 언약식이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새 언약이다.(렘31:31-34)

 

예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러한 준엄한 언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이 깨어졌다.

 

마음의 언약

일차적으로는 성령님을 마음에 두시겠다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영적할례(그리스도의 할례)를 약속하고 있는 말씀이며, 그리고 ‘하나님을 알라’고 강제로 말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성령님이 오셔서 새롭게 맺어지는 언약을 체결한 날이 바로 유월절 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성찬의 규례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예수님의 우리 죄를 위해 찢기심과 피 뿌려 주심을 기념하고 기억하여 삶의 변화에 동기를 삼는 날이 성찬식을 한 날이다.

 

 

17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해로움’ - 영혼의 상처가 됨을 말한다.

 

애찬에 대한 잘 못된 내용을 지적하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의 애찬(에바노스)은 부자들에게는 배부른 날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먹지 못해 배고파서 시험 드는 날이 되었다.

 

 

18절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분쟁’ - 건물에 금이 가서 갈라진 상태를 말한다.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 애찬을 놓고 생겨난 균열을 의미한다.

고린도 교회라는 공동체가 하나이어야 하는데 둘로 금이 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만찬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자들은 만찬을 위해 푸짐하게 싸 가지고 와서 끼리끼리 모여 배부르게 먹고 취했던 반면 가난한 자들은 싸오지 못했으므로 나눔이 없으면 그날 굶어야 했다. 이런 일로 애찬으로 모일 때마다 분쟁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9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직역]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진실한 사람이 드러나려면 분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편당이 있음은 좋은 일이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통하여 참과 거짓이 가리어 질 수 있다.

 

 

20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주의 만찬’ 이라는 명칭은 만찬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성만찬의 행위가 그 일부를 이루고 있고 형제적인 공동체의 식사가 또 다른 일부를 형성하고 있었다(에바노스). 여기서 ‘主’(κυριαν)라고 사용된 것은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시고 성찬의 주인이 되심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성찬이 아니다.

 

 

21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각각 자기의 만찬’ - 교인들이 교회에 올 때 싸 가지고 온 음식이다.

 

그런데 당시 교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들도 있고, 부자도 있어서 음식을 싸오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결국은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과음하여 취한 이들도 있었다.

 

22절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서로 같이 모이기는 하되 자기들끼리만 따로 갈라져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 짓고 있던 파당들을 바울은 책망하고 있다. 먹을 장소가 없어서 교회에 나와 빈부의 차이를 드러내어 서로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느냐?

 

사랑을 베풀고 나눔의 자리가 되어야 할 교회가 음식으로 인하여 분쟁이 된다면 책망을 들어 당연함을 강조하고 있다.

 

 

11:23-29절 성찬의 질서

 

23-26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모든 고린도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것으로서 예식이 있을 때마다 낭송되었던 기도문을 상기시키고 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 유대교 의식의 본래적 의미에 따르면 이것은 식사 때의 축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즉 감사하는 그 자체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감사와 축복은 하나이며 같은 내용이었다.

‘떡을....떼어’ - 떡을 떼는 것은 그 식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도 역시 고린도인들이 자신들의 행동과 비교하여 볼 때 특히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그릇되게 행동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는 사도의 의도가 나타나있다.

성찬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둘로 나누인다.

(1) 화체설 - 카톨릭의 교리이다. 성찬이 곧 주님의 몸과 피로변한다는 설이다.

(2) 기념설 - 개신교의 교리이다. 실제 주님의 몸과 피가 아니라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 는데 의미가 있다.

 

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이 말씀은 성찬에 잘 못 참여하는 자의 두 가지 죄를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 즉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합당치 않게’ - 저울에 물건을 달 때에 한 쪽으로 기우는 것을 보면서 ‘아낙시우스’ 라고 말하면, 이는 ‘당신이 나에게 물건을 덜 얹어주었다’라는 뜻이다. 자신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회개와 감사함이 없이(11:28) 또는 형제를 위해 죽으심에 대한 형제적 사랑이 없이 무의미하게 먹고 마시는 자를 지칭하였다.

 

 

28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자기를 살피고’ - ‘너를 철저히 조사해 보라’. 즉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철저히 돌이켜 참회한 후에 참여하라는 말씀이다.

‘분변치 못하고’ -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가려내지 못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배나 얹어 가지고 가는 것과 같다.

 

 

29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찬에 잘못 참여하는 자의 이중적 죄를 지적한 말씀의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결국 성찬식에 와서 죄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오히려 죄를 갑절이나 지고 가는 격이 된다는 말이다.

 

‘주님의 고난은 누구를 위함인가’를 잘 알지 못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회개할 수도 없으며, 죄의 용서도 없기에 죄를 먹고 마시는 이치와 같다.

 

 

 

11:30-34 결론적 교훈

 

30절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찬에 불경하게 참여한 자들이 받게 되는 영적이고, 육적인 징계들을 나열하였다.

‘약한 자’ - ‘약해지고’,

‘병든 자’ - ‘병들고’,

‘잠자는 자’ - ‘죽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

 

 

31-32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자신을 충분히 살피고 성찬에 참여했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성찬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치 아니한 결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본질은 회개시켜 새롭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시다.(딤전1: 20;딤후2:25;딛2:12; 히12:6;고전11:32)

 

 

33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부유층에 대한 권면이다. 가난한 교우들이 오기 전에 먼저 좋은 음식을 먹고 배부르며 취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나누어 먹으라는 것이다.

 

 

34절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歸正)하리라”

 

‘판단 받는 모임’ - 성찬에 불순하게 참여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모임.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고 시장기를 면하고 오라. 성찬의 순수한 의미를 잘 살펴야 한다.

‘그 남은 것’ - 성찬에 관한 보다 세밀하고 부수적인 것들.

★ 영적 교훈

1) 성만찬의 진정하는 의미는 예수님의 피를 통한 구속의 확인이다(고전10:16).

2) 성만찬을 통해 가난한 형제들과의 나눔이 있어야 한다(11:21; 약2:5-6).

3) 성만찬은 철저한 자기성찰과 함께 참여하여야 한다(11:27-29).

4) 성만찬에 잘못 참여하면 하나님의 징계가 따른다(11:30-32).

 

 

 

 

 

 

 

 

 

 

 

 

 

 

 

 

(제12장-14장 성령의 은사)

제12장 여성의 지위와 성찬

 

내용분해

 

1- 3 은사의 원칙

4-11 하나의 성령 안에 은사의 다양함.

12-26 지체로 비유

27-31 은사의 교회적용

 

12장-14장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은사를 다루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 분쟁의 문제가 은사적인 차원에까지 파급이 되었기에 올바른 은사의 사용을 증거 한다.

 

 

 

12:1-3 은사의 표준

 

1절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신령한 것' -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리킨다.(땅에 속한 것들이 아님)

 

 

2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이방인' -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마귀의 자식으로 죄 가운데 사는 것을 가리킨다.

‘끌려갔느니라’(αγωπαμηνοι) - ‘ἄγω’(내가 인도한다)의 미완료 수동태 분사.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우상의 요구대로 비인격적인 숭배를 하였음을 뜻한다.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영' - 성령님.

‘예수님을 저주할 자’ - 마귀의 영을 받은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을 저주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아나데마 예에수우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할 수 없느니라’ -

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들어서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로 불렀다(신21:22-23).

② 본토의 유대인들은 개종한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저주하라’고 가르쳤다.

③ 많은 성도들이 엄청난 박해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였다(행26:9-12).

 

그러나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말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저주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신앙은 인간 고백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속에 우리에게 오신 성령의 후사(後事)다(눅5:5,8).

 

 

 

12:4-11 은사의 다양성과 일치성

 

4-6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 모든 은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출원됨을 확실히 밝힌 말씀이다.

‘직임’(διακονιέω) - 사랑을 바탕으로 섬기다.

‘역사는 여러 가지나’ - ‘역사’(ενεργέω’-에네르게오, 활동하게 하다) 즉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작용)을 의미한다.

 

은사는 다양하나 그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님은 한 분이시다.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은혜를 공급하시고 공동체를 섬기도록 하시며, 예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에너지-성령의 열매는 맺는)이 되신다.

 

 

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의 나타남' - 은사를 가리킨다.

‘유익하게 하심이라’ - ‘슴패로(συμφέρω)’는 ‘돕다’, ‘유익을 주다’, ‘유용하다’는 뜻이다. 성령의 임하심은 반드시 개인과 공동체에 이익(유익)을 끼친다.(은사를 주시는 목적)

 

 

8-10절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은사의 대표적인 것 9가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 각종 방언, 방언통역.

 

‘지혜의 말씀’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롭고 천상적인 구원의 도리와 하나님 중심의 선을 파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처신의 능력의 은사로 하나님 중심의 선을 추구하도록 한다(히5:12-14).

‘지식의 말씀’ - 복음의 사실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을 할 수 있는 지식적인 능력이다.

‘믿음’ - 영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이 되도록 해주는 능력이다(히11:2;17:20).

‘병 고치는 은사’ - 사람의 육체만이 아닌 영혼과 마음과 정신의 치료까지를 포함한 말이다.(마9:2;막5:34)

‘능력 행함을’ - 자연 법칙을 초월하여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행5:1;13:11).

‘영들 분별함을’ - 악한 영들을 분별하여 심판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투시의 능력-행5:1-10,행8:23,요일4:1).

‘예언함을’ - 미래의 일을 미리 예측하는 것과 현재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각종 방언을 말함을’ - ‘게네(γενη)’는 혈통, 민족, 종족을 의미하는 말로 인간의 각 종족의 언어들과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까지를 포함한다(행2:6-11; 고전14:2).

‘방언들 통역함을’ - 혼자서 기도할 때를 제외하고 교회의 덕을 위하여 방언은 통역되어져야 한다(고전14:5,13-14).

 

 

11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 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한 성령께서 성령 자신의 뜻을 따라 주신다.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 성령님은 각 성도의 체질에 맞도록 은사를 발생시키고자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다.

 

★ 영적 교훈

1) 성령님의 후사(後事) 없이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 없다(12:3).

2) 모든 은사의 출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12:4-6).

3) 성령님은 은사를 발생시키시고 분배하시고 열매 맺게 하신다(12:4-6,11).

4) 성령님의 은사는 개인과 공동체를 반드시 유익하게 하신다(12:7).

 

 

 

12:12-31 한 몸 안의 많은 지체

 

12-14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몸과 지체와의 관계를 한 성령, 한 세례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비유로 설명하였다.

 

 

15-21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각 지체로서의 역할과 연합된 관계를 말하고 있다. 지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데로 두신 것이다(18절).

 

 

22절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약하게 보이는 것이 더욱 요긴할 수 있다. 피차 상호보완의 관계이다.

 

 

23절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덜 귀히 여김 받는 것들이 더욱 귀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보기에 귀하게 보는 것은 땅에서 이미 높임을 받아 이 땅에서 이미 상을 받아 하늘에서는 받을 것이 없을 수도 있지만 보기에 덜 귀히 여김 받는 것은 이 땅에서는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더욱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24절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보여주시고 있다.

 

 

25절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몸 안의 각 지체는 서로 분쟁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돌보아 주도록 하셨다.

 

26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각 지체의 상호 관계성을 증명 한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서로 돌보아야 할 주님의 각 지체들이다.

 

 

27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비유하셨다.

 

 

28-30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앞 절의 비유를 교회의 각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다. 각기 맡은 은사에 충성해야 한다.

 

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더욱 큰 은사와 제일 좋은 길' - 13장의 ‘사랑에 관한 교훈’을 말한다. 이는 예수님의 생명이 영속에 내주합일 됨으로서 나타나는 생명의 능력을 말한다. 12장의 은사는 부분적 은사라면 이는 완전한 은사이다. 이긴자들에게 주시는 은사이다.

 

 

★ 영적 교훈

1) 사람 몸이 하나인 것처럼 교회도 유기체적인 통일성을 가진 하나다(12-13).

2) 지체의 다양성은 교회의 완전성에 필수요건이다(14-20).

3) 서로 다른 지체들은 서로 협력하여 한 몸을 이루려고 애써야한다(21-27).

4)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지체 간에는 질서가 있다(28-30).

 

 

 

 

 

 

 

 

 

 

 

 

 

 

제13장 성령의 은사

 

 

내용분해

1- 3 : 사랑의 절대 필요성

4- 7 : 사랑의 특성

8-13 : 사랑의 영속성

 

 

역사적 배경

 

고린도 교인들은 헬라 사상의 영향으로 영(靈)을 숭배하고 있었으며,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열광주의에 빠져 자칭 ‘영의 사람’이라고 내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은사들에 대해 각각 상대적 중요성을 둠으로써 혼란을 겪고 있었고 서로 자기가 받은 은사들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13:1-3 사랑의 절대 필요성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종류 :

① 에로스(ερως) - 남녀간의 사랑

② 필레오(φιλια) - 친구간의 사랑

③ 스토르게(στοργμ) - 혈육간(본능적) 사랑

④ 아가페(αγαπη) - 감사, 존경, 자비에서 흘러나오는 보상을 원치 않는 헌신적 사랑이다. 인간은 하늘로부터 입혀져야 가능하다.

사랑의 기원(출처) : 하나님(요일4:7-8)

사랑의 대상 : 하나님과 이웃(마22:34-40)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방법 :

환난→인내→연단→소망(예수님과 같이 되는)→사랑이 부음 바 됨.

사랑이 없으면 무익한 일들 :

①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② 예언하는 능력.

③ 산을 옮길만한 능력.

④ 모든 것을 주는 구제.

⑤ 몸을 불태우는 순교.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사람의 방언' - 12장에 기록된 은사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넓게 해석해서 다른 외국의 언어로도 해석이 된다.

'천사의 말' - 하늘의 언어로 선하고도 영적인 말을 의미한다. 즉 땅의 모든 언어와 하늘의 모든 언어를 말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의미이다.

'소리 나는 구리' - 구리로 만든 악기를 가리킨다.

'울리는 꽹과리' - 타악기를 지칭한다.

 

2절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하는 능' - 하나님의 은사로서 예언의 능력을 의미한다(고전12:10).

'무든 지식과 비밀' - 신비로운 지식과 하늘에 속한 영적인 지식을 전부 안다할지라도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 - 위대한 믿음으로 동반된 믿음을 가리킨다(마17:20, 막11:23).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언과 비밀과 지식을 알고 위대한 믿음으로 산을 옮길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서 뜻이 이루어지긴 해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상급이나 영적인 유익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3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게 있는 모든 것' - 자신의 모든 재산.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줌' - 순교의 제물로 자신을 바친다 해도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전도되고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난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에겐 영적인 유익이 없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하고서도 나중에는 버림을 당하는 경우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랑이 없는 관계이다(마7:21-23).

 

 

13:4-7 사랑의 특성

 

4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오래 참고' - 범죄한 사람에 대한 길이 참음.

'온유' - 부드럽고 인자하고 친절한 행동.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 남의 성공을 싫어하고 낮추는 성질을 보이지 않는 모습.

'교만하지 아니하며' -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

 

 

5절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함' - 오만 불손한 태도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자신만을 생각지 않음.

'성내지 아니하며' - 격정에 못 이겨 화를 냄.

'악한 것을 생각지 않음' - 악한 것을 헤아리지 않음.

6절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 - 이 말씀 뒤에 “도리어”의 단어를 넣으면 이해하기 쉽다. 즉 불의를 생각하거나 좋아하기 이전에 진리를 먼저 기뻐하고 생활하는 모습을 강조하였다.

 

 

7절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딤' - 긍정적인 영적 자세.

 

★ 영적 교훈

1) 사랑에 속한 것 :

① 오래 참는 것 ② 온유한 것 ③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④ 모든 것을 참는 것 ⑤ 모든 것을 믿는 것 ⑥ 모든 것을 바라며 ⑦ 모든 것을 견디는 것

2) 사랑이 아닌 것 :

① 투기하는 것 ② 자랑하는 것 ③ 무례히 행하는 것 ④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 ⑤ 성내는 것 ⑥ 약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 ⑦ 불의를 기뻐하는 것

 

 

 

13:8-13 사랑의 영속성

 

본문은 본 장의 결론 부분으로 사랑의 영원성과 지속성이 특별히 강조되었다. 즉 다른 은사들은 일시적인 것이며 불완전하여 하늘의 완전한 것이 올 때에는 사라지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영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수단으로 전락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모든 인간들의 수단이 헛된 것임을 밝혀주고 사랑의 참된 가치는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더욱 확연히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8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하였다. 예언, 방언, 지식은 그치고 유한하다. 즉 12장의 은사는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들이나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서는 모두가 소멸될 은사들이다. 하지만 사랑만은 천국에 들어가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임을 강조하였다(요10:22-29; 14:20).

 

 

9-10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것’ - ‘목표에 다다르면’, ‘최상의 것이 오게 되면’이란 뜻으로 생명의 내주합일을 의미한다(고전12:31;계3:20;요15:10).

 

부분적인 은사에 대한 완전한 은사(큰 은사)의 나타남을 말씀하신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영속에 나타나는 경험을 말하기도 하고 이 후에 천국에 들어갔을 때의 온전함을 말하기도 한다.

 

이긴자의 경지에서 받게 되는 사랑의 합일이라는 체험에 비추어 보면, 성령의 은사(방언, 예언, 지식 등)들은 한 파편에 불과하다.

 

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렸을 때’ - 성숙되지 않은 어린 시절을 의미하는 말로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광야 성도를 지칭한 말이다(고전3:1-2).

‘장성한 사람 - ‘영적인 장성’을 말한다. 즉 영적인 성장이 광야의 연단을 다 마치고 이긴 자의 경지에 들어간 상태이다(히5:13-14;벧후1:4).

 

 

12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을 당시의 상태. 연단 중에 있을 때의 불완전함을 가리킨다. 또는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의 희미함을 말한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연단을 마친 후의 영적 상태로 생명의 내주 합일된 경험을 말한다. 이때는 주님의 생명 곧 영이 이긴자의 영 안에 합일이 되기에 주님을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다. 서로 마주 보는 것과 같이 온전하게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이긴 자의 영 안에 역사 하시는 주님의 생명이 온전케 하기 때문이다.

[‘안다’의 2가지 의미]

‘기노스코’(γινώσκω) - 무엇인가 자신의 소유로 알게 된 것.

‘에피기노스코’(έπιγινώσκω) - 완전히 안다(하나님께서 아시는 것같이).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원으로 연결시켜 주는 고리로 영원하다.

‘소망 - 언제나 새롭게 열리는 미래의 영광에 대한 기대로 영원하다.

‘사랑 - 하나님을 자신 안에 완전히 담으려는 열망이요, 하나님과 하나 되어 느끼는 생명의 힘으로 영원한 것(요일4:8,16)이며,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근거이다. 서로 보완하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영적 교훈

1) 부분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어린 신앙인들

2) 어린아이의 일을 부지런히 버려야 장성한 신앙이 될 수 있다.

3)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알아 가려고 애써야 한다. 사랑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힘이다.

 

 

제14장 은사에 대한 말씀

 

 

내용분해

1-19 방언의 문제

20-25 방언과 예언의 영향

26-33 교회의 질서를 위하라

34-36 여자의 교회 안에서의 위치

37-40 결론

 

역사적 배경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들 중에서 특별히 방언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방언과는 다른 형태의 것이었다. 즉 오순절 때의 방언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언어가 통일된 상황이었다(행2:5-11).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난 방언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은사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재에는 큰 유익을 주지만(4절),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공중 예배를 매우 혼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2-6절), 방언은 마음의 결실을 맺지 못하므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도 큰 장애가 되었고(14절), 따라서 정작 필요한 다른 은사들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 교회를 무질서로 몰고 가게 되었다. 고린도 교회 내에 방언하는 성도들로부터 제기된 ‘최고의 은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후반부이다.

 

 

 

14:1-5 방언과 예언의 은사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두 가지 적극적인 자세 요구]

 

 

1절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첫째, ‘사랑을 따라 구하라’ - ‘구하다’는 어떤 사람이나 사냥감을 잡으려고 빨리 뒤쫓는다는 현재 명령형이다. 그 무엇을 잡기 위해 다급하게 뒤쫓아 가듯이 사랑을 추구해 가라는 것이다. 어떤 신령한 일이든지 반드시 사랑이 우선 되어야 한다.

둘째,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 ‘사모하라’는 열열한 마음.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 열열한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얻고 향유하기를 소원하라는 뜻이다.

 

‘특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특히’는 최상급이 아니고 비교급. 방언보다 예언이 더 났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가 특별히 예언을 강조한 이유는 12절에, 예언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예언을 하므로 방언의 의미를 깨닫게 됨으로 유익을 주는 ‘사랑’의 중요성을 말한다.

 

 

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사도들이 한 방언과는 달리 통역이 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언어였다(행2:5-13).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은 영의 기도로서 하나님께 하는 기도인데 육신적으로는 알아듣는 자가 없었다. 그 이유는 영으로 자신의 비밀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 성령이 아니라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방언을 하는 사람의 영. 하나님과 방언을 말하는 당사자의 영만이 아는 신비한 체험이었다.

 

 

3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며’ - 예언은 ① 장래 일을 알려주는 것과, ② 오늘 현실 사건 앞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여 전달해 주는 2가지가 있다.

‘덕을 세우며’ - ‘건물을 세운다’는 뜻. 교회 구성원들의 믿음과 그에 따른 삶을 향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권면하며’ - ‘...로부터 부르다’. 법적 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자를 옆에서 변호하여 돕는 것이다.

‘안위하는 것이요’ - ‘말로 위로하다’, ‘격려하다’, ‘용기를 주다’.

예언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계시를 올바로 알게 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거룩하고 의로운 삶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한다. 또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영적 유익을 얻고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다.

 

4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은사의 본질적 기능]

은사는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위해 주셨다(고전12:7-10). 그럼 어떤 유익일까(엡4:12)? 방언은 자신의 영혼에 유익하게 하고 예언은 교회 전체의 구성원을 유익하게 한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통역하지 아니하면’ - 방언을 통역한다면 메시지로 전달되기 때문에 예언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고로 잘 사용되면 공동체에 유익을 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 방언 하는 자에게 통역하는 은사가 없다면 방언은 의사소통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의 건덕에 무익하게 된다. 고로 방언의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유용성에 있어서 예언이 더 났다는 것이다.

 

★ 영적 교훈

1) 모든 은사 안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한다.

2) 방언 → 대상: 하나님 → 내용: 신비한 자신의 경험 → 결과: 자신 영혼에만 유익

3) 예언 → 대상: 사람 → 내용: 덕, 권면, 안위 → 결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

 

 

 

14:6-19 일만 마디의 방언

 

6절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방언 말함에 대한 교회의 무익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찾아가 ‘그들이 알아듣지 못할 방언만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일들을 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고 질문법을 사용하여 충고한다. 이는 교인들이 알아듣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7-8절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구체적 예화]

(1) 거문고 소리가 분명치 않으면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고,

(2) 나팔 소리가 후퇴를 알리는 소리인지 진격을 알리는 소리인지 분명치 못하면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듯이, 교회 안에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지 않으면 교회 전체에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9절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악기들이 자기 고유의 고리를 내는 것이 그 존재의 목적이라면 사람의 혀는 공동체에 유익한 메시지를 알아듣게 전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나 그 목적을 망각하면 듣는 자의 마음에 아무런 영향도주지 못하므로 전혀 쓸모가 없다.

 

 

10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가 없다.

 

 

11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소리‘(φωνης) - 포괄적인 의미의 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언어‘.

‘야만’(βάρβαρος) - ‘낮선’, ‘이해될 수 없는’의 뜻이며 헬라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사용되었다.

 

당시는 사람을 둘로 구분하였는데 헬라인과 야만인이다. 그러므로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면 말하는 사람에게 야만인(외국인)으로 여겨지게 된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의 위험성을 지적한 말이다.

 

 

12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신령한 것(πνευματων)- 영적 할례.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 완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아 살기를 간절히 구하는 자인즉(고전12:31; 14:9). 모든 은사(사랑의 은사 포함)를 사모하는 동기가 덕을 세울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3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방언만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라.

 

14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바울 사도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 방언의 은사가 통역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영(πνευμα) -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통하실 때 사용하시는 통로(원초적 능력).

‘마음’(νους) - 내성적 성향. 도덕적 상태. 양심,지성,의지를 통해서 도덕적 판단과 이지적 식별을 가능케 한다(깨달음이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함).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 방언을 통해 하나님과 영적 교통은 있을지라도 깨닫지 못할 때 마음에 맺히는 열매는 없다. 기도를 통한 은혜를 받은 다음 행실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 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바울의 희망사항이다. 영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전인격적으로 기도하며 열매를 맺기를 원하고 있다.

 

 

16절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그렇지 못 할 때의 경우’ - 만일 방언으로 축복(감사기도)할 때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보통교인들)가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여 당신이 드린 감사기도에 어찌 아멘 할 수 있겠는가?.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 - ‘데오테스(무식한)’는 ‘이해하지 못하는 자’란 뜻으로 초신자 또는 방언이나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지 못한 신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17절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ού μέν γάρ’(우 맨 가르) - ‘하였으나 .... 못하리라’. 방언으로 기도한 사람은 스스로 영적으로 덕을 세웠으나, 그 소리를 듣는 다른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아듣고 감사하면서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겠느냐?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방언을 더 말한다’ - 원어적 의미는 ‘방언이 다른 성도들 보다 더 많다’는 뜻이다. 고전12:10의 ‘각종 방언’에 해당하는 의미로써 바울 자신도 방언을 잘 말했음을 강조한다.

 

 

19절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의 방언 보다 더 낫다.

 

방언에 대한 결론 - 위의 말씀을 액면대로 보면 바울 자신이 방언을 부정하는 것과 같이 보이나 실제로 그렇지가 않다. 교회 내에서 방언이 교인들에게 미치는 덕(德)적인 차원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이해한 내용, 즉 인격적 관계에서 가르치는 다섯 마디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훨씬 교회에 유익하다.

 

★ 영적 교훈

1) 교회 공동체의 영적 성숙을 위하여 방언, 계시, 지식, 가르침이 조회를 이루어야 한다.

2) 방언하는 자는 반드시 통역되기를 간구해야 한다. 통역이 안 된 방언은 자신의 영적 감음을 황홀하게 할지 몰라도 자신의 마음에서나 공동체의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공동체의 모임에서는 방언보다도 남을 잘 가르칠 능력이 구비되어야 한다.

14:20-25 방언과 불신자

 

20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악(κακία) - 일반적인 악이 아니고, 자랑과 이기심을 추구하는 속성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이 말은 모두에게 유용한 것보다는 화려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는 의미이다. 즉 방언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과 인격을 자랑(과시)해 보려는 유치한 일을 삼가라는 것이다.

 

 

[방언과 예언의 사용 목적]

21-22절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 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다른 방언 하는 자와 다른 입으로 말할지라도 듣지 아니 한다’ - 사28:11-12을 인용한 말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앗수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언어로 가르치게 할 터인데 그렇게 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위하는 표적’ - ‘표적을 위한 것이다-앞,뒤 문장을 수식한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자신의 뜻대로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이 되지만 ‘예언’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하는 표적이 된다고 한 말이다.

 

사도 바울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올바른 것을 깨닫게 하는 예언에 비유했고 ‘앗수르 언어’를 방언에 비유한 것이다.

 

 

[교회에서 방언보다 예언을 해야 하는 이유(23-25절]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온 교인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면 불신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은혜 받지 못한 자, 불신자)이 보고 ‘교인들을 모두 미쳤다’고 오해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24절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러나 예언을 하게 되면 불신자들이 와서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지는 책망을 듣고 판단을 받으며 그 마음에 숨은 것이 드러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게 될 것이다.

 

25절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예언을 통하여 마음에 숨은 곳이 드러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 영적 교훈

1) 마음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은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14:20).

2) 은사를 주신 원래의 목적이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14:22-23).

3) 참된 은사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사랑을 회복시키고 교회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14:24-25).

 

 

 

14:26-33 질서 있는 예배

 

역사적 배경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기가 받은 은사를 기초로 그 예배에 참석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러한 상황에서는 서로 자신의 은사를 내세울 염려가 있으므로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모든 은사활동의 긍극적 목적을 밝힌 말이다. 즉 교회에 덕을 세우는 태도가 은사 활용에 있어서 기초가 됨을 보여준다. 교회 내에 각각 은사가 있다. 이 은사들은 모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사용이 되어져야 한다.

 

[참고 : 교회 내에서의 은사활용?]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예배에 참석하거나 교회의 다른 활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은사를 활용할 수 있다(롬12:6-8). 그러나 활용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는데 있어야 한다.

 

 

[방언사용 지침]

27-28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 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방언 하는 사람은 두 사람 정도로 하고 세 사람이 넘지 않도록 하라. 그들은 한 번에 말하지 말고 순서대로 말하고 한 사람은 통역을 하라.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말하지 말라. 그 대신 혼자서 하나님을 상대로 방언을 하라.

 

 

 

[예언사용 지침]

29절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 할 것이요”

‘분변할 것이요’ - ① 계시의 출처가 성령인가에 대한 영분별. ②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는가에 대한 분별.

 

교회 전체 앞에 실행될 때 그 내용이 인위적이거나 허구에 찬 것이면 그 피해는 상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로 세운다는 입장에서 예언의 진위를 분별해 보는 것은 필요하다(요일4:1).

30절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예언 도중에 계시가 내려오면 먼저 하던 자는 양보하고 잠잠 하라. 이는 듣는 모든 이에게 교회의 질서를 배우게 하고 권면을 받게 하려 함이다. 교회의 질서를 특히 강조하셨다.

 

 

31-32절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예언하는 자들은 다른 예언자들의 분변에 의해서(29절) 바르고 정확한지의 여부가 판명되므로 예언하는 자가 자기의 주관적인 견해를 배제하게 된다. 즉 예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심령을 스스로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33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어지러움’ - ‘심한 무질서’, ‘자기주장’, ‘혼란’, 심지어 ‘반란’, ‘폭동’을 의미한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지시한다.

 

즉 하나님의 피조 세계는 본질적으로 절대적인 질서와 평화가 있다. 이와 같이 ‘에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시행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며 평화를 이루는 길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즉 화평을 원하신다. 자신의 예언이 가장 옳다는 식의 교만을 버리게 하기 위함이다. 은사의 목적은 교회 안에서의 화평이다. 하나님께서는 질서 안에서 영광 받기 원하신다.

 

 

 

14:34-36 여자의 교회 안에서의 위치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교회 안에서의 여자의 위치를 설명하셨다. 잠잠해야 한다. 창3:16의 창조의 질서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전11:3 참고).

 

‘성도의 교회’ - 기독교 공동체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함과 같이’ - 성도들은 질서 정연한 행위 원칙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3:16;고전11:3;2:11-12의 원칙에 의한 질서를 말한다.

 

35절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여인들이 교회에 대하여 묻기를 원한다면 집에서 자신의 남편에게 물어야 한다. 여인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 여성에 대한 인격적 무시가 아니다. 성경 욜2:17;행2:17;고전11:5을 보면 여성의 은사활동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질서’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무엇을 배우려거든…남편에게 물을지니’ - 당시 고린도 교회의 여인들은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되 처신에 지혜롭지 못하여 단지 호기심에 사로잡힌 수다스러움이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의 활동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되(11:5), 공적인 모임에는 성급하게 나서지 말고 꼭 물어 볼일이 있으면 남편에게 개인적으로 물음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것임이라’ - 은사를 받은 여성이 교회의 덕을 끼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적절치 못하게 처신하는 모습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 여성들은 교회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시끄럽게 수다 떠는 일, 알고자 하는 호기심, 섬세하고 정서적인 사고로 인한 온갖 사소한 문제에 대한 질문과 의혹이 있었다. 또한 본능적(혈육간, 친구간, 이성간)사랑 등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했으므로 활동을 금지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이르렀던 것이다.

 

 

36절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현실적으로도 일부 목회자가 ‘자신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며 자신의 교회만이 구원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일이 있듯이, 당시 고린도 교회도 지적인 면에서나 영적인 측면에서 타 지역의 교회보다 월등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만 임한 것처럼 교만했으며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실을 책망하고 있다.

 

모든 교회의 질서에 대한 결론적 교훈이다. 이런 말씀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14:37-40 결 론

 

37절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자신이 선지자나 신령한자로 생각되거든 바울의 교훈이 주님의 명령인 줄을 알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8절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바울이 써 보낸 이 말(교훈)이 하나님의 교훈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들의 말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39-40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것도 굳이 막지는 마십시오. 다만 나는 여러분이 모든 일에 점잖게 또 질서 있게 처리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언과 방언을 하되 질서를 따라서 하기를 교훈 하였다.

 

★ 영적 교훈

1) 모든 예배는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있다.

2) 은사는 질서를 따라 교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활용되어야 한다.

3) 예수님과 생명의 합일을 통한 사랑이 중심을 이룬 은사활동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제15장 죽은 자에 대한 부활

 

 

내용분해

1-11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

12-1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20-28 부활의 순서

29-34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35-49 부활의 몸

50-58 부활은 어떻게 되는가?

 

 

 

15:1-11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

 

예수님의 부활을 영혼의 부활만으로 인정하는 헬라 사고의 영향을 받은 그릇된 신앙관과 부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대 사두개적 신앙의 영향을 받은 성도들의 부활관을 고쳐 주고자 쓴 서신이다.

 

[참고]

사두개인(Sdducces) : 이름의 유래는 솔로몬 치하의 대제사장 사독에게서 유래 된 듯하다(왕상39:2,35).

 

예수님 시대에 존재했던 유대주의의 한 종파로서 이 그룹들은 부유한 제사장족으로 이들을 추종하는 가족들, 귀족들로 구성(대부분 산헤드린 회원 자격을 구비)되었다. 이들은 변혁을 배격하고 현상 유지를 지지하면서 헬레니즘 문화에 동정적이었고 정치적 타협에 능란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승인한 장로의 유전을 배격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경전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성전 기득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그들의 재원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요2:13이하).

이들은 부활, 천사, 영이 없다고 주장(마22:23;막12:18;눅20:27;행23:8)하였으며 성전 제의에만 관심을 가졌다. 부활과 영생의 가르침이 그들의 주장과 맞지 않아서인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두개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내가 너희에게 ... 알게 하노니(γνωριξω,그노리죠) - ‘말로 알 린다’, ‘기억나게 한다’는 뜻과는 달리 전달하는 내용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는 동사이다. ‘상기 시킨다’는 뜻이다. ‘내가 너희에게 ... 상기 시킨다’, 부활의 확고한 진리를 증거 하였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은혜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 얻는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고 고린도 교인들이 이 복음을 영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복음 안에서 거하게 되었다.

이제 복음은 여러분의 영적 생활과 행동을 인도하는 지침이 된다고 전하여 왔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 그 복음의 능력을 다시금 너희에게 상기시키겠다는 말씀이다.

 

 

2절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나의 전한 그 말' -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으로 부활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 ‘ει-만약 ... 한다면’, ‘κατηχω-억누르다, 기억하다, 붙잡다’. 만약 전한 그 말(복음의 내용)을 굳게 붙잡고 ‘기억 한다면’ 이 된다.

‘구원을 얻으리라’ - 현재형. 현재 상태에서 체험하고 보증 받는 확실한 사실임을 말한다.

 

만약 전한 그 말(복음의 내용)을 굳게 붙잡고 기억한다면 현재 상태에서 체험되고 보증 받는 확실한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다. 구원을 체험하고 보증 받는 일에 계속 거할 수 있는 비결은 전한 그 말(복음의 내용)을 굳게 붙잡고 지키는 것이다.

 

 

3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내가 받은 것' - 초대교회 중심 메시지(케리그마)는 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② 장사지냄 ③ 사흘 만에 다시 사심이었다. 주님께서 나타나심으로 이와 같은 내용을 바울도 알게 되었고, 바울은 그 핵심적인 내용을 이방인에게 전한 것이다.

 

 

4-8절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케리그마의 내용]

①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②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③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

 

바울은 ‘케리그마’를 전할 때마다 ‘성경대로’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다시 사심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심(성경적인 예언 성취)임을 재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야관의 바른 정립을 강조한 말인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정치와 권력을 통해 세계 제패를 실현할 인물로써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에 대한 성경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이 매우 적을 거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낮고 비천한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사53:1-9). 이러한 사실로 인해 케리그마는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5백여 형제를 증거로 삼는 이유는 그 중에 태반이나 살아있기 때문이다.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 만약 사도 야고보였다면 특별히 중복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엔 메시야로 믿지 않았던(요7:5) 주의 형제 야고보가 성도와 함께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행1:14). 참고로 외경 ‘히브리인의 복음’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임을 언급하였다.

‘모든 사도에게와’ - 12사도 이외에도 사도로 부름 받은 사람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바나바와 실라 :행14:4,14;살전2:6)

 

사도 바울이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여러 증거를 제시하면서 강조한 이유는 앞으로 언급할 부활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과 그것이 충분한 증거가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9절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 로라”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사도의 권세를 받았으나 사도로 칭함 받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10절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이끌어 주신 배경을 분명히 알고 고백한 말이다. 그러기에 다른 사도들 보다 더욱 많이 수고하고 애를 썼다(롬1:14;고후11:23-33). 이런 수고도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한 것이다.

 

 

11절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내나' - 사도 바울.

'저희나' - 12사도들.

 

바울은 자신이나 다른 사도들이 가장 우선하여 전파한 복음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장사지냄과 부활이었다. 즉 그는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과 부활의 몸 입기를 사모하는 삶을 살도록 우선하여 전파했는데 고린도 교인들도 이 복음을 듣고 믿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 영적 교훈

1)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내시고, 3일 만에 부활 하셨음을 믿는 신앙이다(15:3-4).

2) 사도 바울의 겸손한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① 만삭되지 못한 자

② 지극히 작은 자

③ 사도라 칭함을 감당치 못한 자

3) 오늘 우리가 여기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15:12-1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인간의 영혼은 영원해도 육체는 죽음과 함께 완전히 분해되어 파멸한다는 고린 도의 일부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다.

 

 

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교사상 - ‘몸’은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사라지고 ‘영’만이 거룩하여 영원히 살아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미 전파하였다(4-9절).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믿을 수 있으나, ‘죽은 자(몸)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부활을 부인하므로 발생되는 일 - 첫째]

13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다시 살지…’ - 수동형.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음(롬6:4;8:11)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이다(롬10:9).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함은 곧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다.

 

 

[부활을 부인하므로 발생되는 일 - 둘째]

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부활이 없다는 가정 하에 일어날 두 가지 결과를 언급한다.

첫째, 사도들이 전파한 것이 헛것이 된다. 메시아 성,그의 죽음을 통한 속죄, 그의 나라마저도 부인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도 헛것이다. 이들의 믿음은 사도 바울이 전한 케리그마(진리의 핵심, 본질)를 근거로 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케리그마’의 부정은 곧 진리의 부정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부활을 부인하므로 발생되는 일 - 셋째]

15절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우리' - 바울을 비롯한 부활을 증거 하는 모든 이들.

'거짓증인' - 거짓된 사실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시지 않으신 것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으로 전파했음이 삽시간에 판명될 것이고, 그 복음을 믿는 자들은 모두 거짓 진리로 믿은 결과를 초래한다.

 

 

[부활을 부인하므로 나타나는 일 - 넷째]

16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만일....없었을 터이요’ -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결국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영생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태에 빠지는가?]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 - 주님께서 완성하신 속죄의 은총도 예비 되지 못했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결과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은 우리를 ‘의롭다’하실 증표로서 부활하신 것이다(롬4:25). 그런데 주님께서 다시 사신 사실이 없다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사람이 속죄 받지 못함은 물론 죽은 사람도 구원(부활)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일이 있어야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살전4:16).

 

 

18절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들' -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

‘망하였으리니’ - 구원을 잃고 하나님의 정죄 아래서 영원히 파멸하는 것.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금생' - 이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해 주님을 믿는 다면 우리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다만 이생뿐이면....더욱 불상한 자’ - ‘비천한’, ‘동정심이 가는’, ‘초라한’

이 세상에서 어느 무엇보다도 부활의 산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걸고 수많은 고난을 헤쳐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소망이 없이 단지 이 세상의 삶만이 전부라면 우리는 속아 산 것이며 가장 비천하고 초라하고 어리석은 삶을 산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 영적 교훈

1)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도 함께 부활하는 전인적(全人的)인 부활이다(눅24:36-43).

2)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 참신앙의 분기점이다(요일4:1-6).

3) 부활이 없다면 전파하는 내용도 헛되고, 믿음도 헛되고,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되고, 죄 가운데 계속 살고, 완전히 망한 인생이다.

 

 

 

15:20-28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부활의 순서)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 - 레23:9~14의 하나님의 헌물로 바치는 첫 이삭 단을 인용하였다.

 

추수의 첫 열매가 거룩하여 전체의 떡이 거룩하게 되는 것처럼, 첫 열매인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에게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모든 지체)이 그의 부활 때에 온전하게 부활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살전4:14).

 

21절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다’ -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면서 죄를 범했고 죄의 결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을 일컬어 “사망이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았다”고 한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다 -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한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아담의 죄의 속성을 닮게(유전)되어 있는 것처럼(롬5:12), 하나님께 순종하여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난 자들은 그의 영생의 속성을 닮아가게 된다. (롬5:17-21;요11:25-26)

 

 

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의 후손이 모두 죽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하나님의 후손은 예수님을 통해서 모두 삶(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23절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차례대로’ - 여격 단수. 부활이 장래 어떤 시점에서 유일회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부활의 순서 1]

(1)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 이때 구약 시대의 이긴자들께서 함께 부활 하셨다.(마27:52-53)

(2)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 - ‘강림(παρουσία)’ 은 ‘황제의 방문’ 이란 뜻으로 왕중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공중강림이나 지상재림을 다 포함한 말로, 공중 강림하실 때 휴거되는 교회시대 이긴자들 144,000명과 지상 재림하실 때 순교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는다는 것이다.

 

 

24절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부활의 순서 2]

(3) '그 후에는 나중이니' - 백보좌 심판 때 모두가 부활한다. 이때 신자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부활할 것이다(요5:25-29). 그 후에 신천지에 들어가기 전 모든 이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계20:11-15).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 -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권세와 불신적인 세상 권력을 총망라한 세력을 전체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그 악마적인 세력들은 철저한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25절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 메시야 왕국시대까지(천년왕국 시대까지)

‘왕 노릇하시리니’ - 시110:1, 예수님께서 부활한 때로부터 재림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때까지는 기간이 있으며, 이 기간은 그리스도께서 원수 곧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기간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26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맨 나중 멸망 받은 원수는 사망' - 어떤 ‘인격체로서 생명을 잃게 됨’을 말하기 보다는 어떤 효능, 즉 영향력을 잃어버릴 것을 예시한 말씀이다.(고전15:55-56;롬6:23, 7:23, 8:2, 계20:13-14)

이 사망은 사단이 가진 최고의 능력이다. 사망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고 죄의 권능이 구체화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게 된다(롬5:14). 이긴자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사망을 이긴분들이다(고전15:54,57). 백 보좌 심판 이후에 사망도 지옥에 던져 진다(계20:14).

 

 

27절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시8:6(신약의 인용- 히2:6; 마28:18).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 계시면서도 만물 안에 속하지 아니하신 분이시다.

 

 

28절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 - 백 보좌 심판의 때.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 - 하나님. 이때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만유를 창조하신 분으로 만물 안에 계시게 하려 함이다.

★ 영적 교훈

1)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다. (모든 성도의 부활을 암시한 말)

2) 부활에는 순서가 있다. (예수님→ 이긴자들→ 모든 성도들)

3)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다.

 

 

 

15:29-34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니골라 당을 좇아가는 초기의 영지주의자들이 교회 내에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사건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한낱 가시적으로 나타났던 환상과 같은 것 이었다고 말하였다. 또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얼마나 우리가 예수님의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본 장절은 이에 대한 답서이다.

 

 

29절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죽은 자들에 대한 세례' - ‘ὑπέρ τών νέκρων(휘페르 톤 네크론)’에서 전치사 ‘휘페르’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의 위에’ 장소적 개념으로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신에’ 대행적 개념으로 죽은자를 대신하여 받는 세례라는 뜻이다(후자가 정통 견해).

 

기독교의 전통으로 죽기 전에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죽은 직후 자녀들의 요청으로 죽은 자에게 베푸는 세례이다. ‘죽은 자의 세례’가 초대교회 당시에는 대단히 유행하다가 교회가 건립되면서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교리에서 찬반의 시비가 있으면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자동적으로 사라진 전승 중의 하나이다.

 

 

30절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내가 이 편지를 쓰는 이 시간에도 언제 목숨이 떨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들을 위해서 핍박을 받고 매를 맞고 조롱을 당하겠는가?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날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소망이 없는 비참한 삶을 살겠느냐? 는 것이다.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노라’ - 매일같이 죽음의 곁에서(직면해서) 살아간다는 뜻.(고후11:23-28)

 

바울은 자신의 육체적 욕구를 매일 십자가에 못 박고 사는 내적인 삶에 대한 표현으로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다. 이는 마태복음 16장 25절과 같이 나의 육체가 하는 대로 좇아 살면 끝내는 주님을 놓쳐버리게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육체적으로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비추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를 따져봐서 아무리 손해 보는 일이라 할지라도 끊어버리면 그것이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인데 바울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이 있기에 그는 날마다 죽을 각오를 가지고 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32절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내가 설령 에베소에서 머무는 기간 중에 맹수와 싸우는 위험을 당했을지라도 그것이 인간적인 동기로 당했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부활의 산 소망이 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이런 소망이 없다면 위험을 당할 이유도 없고 그저 매일 놀고,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33절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더럽게 하다’ - ‘못쓰게 하다’, ‘파멸시키다’

'악한 동무' - 부활의 소망이 없이 현세에 치중하고 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옛날 ‘메낸더’라고 하는 유명한 희곡작가가 쓴 ‘타이스’ 라는 희곡의 한 장면을 인용한 것인데 선한 일을 추구하는 사람을 악하게 꾀어 파멸로 이끌어간 ‘맨더스’ 같은 사람을 연상하면서 ‘속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일부 부활을 부인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악한 신앙이 신실하게 부활신앙을 믿고 쫓아가는 성도의 순수한 신앙을 더럽힌다(못쓰게 파멸시킨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속지 말라는 것이다.

 

 

34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바울은 꾀임에 속아서 순수한 부활 신앙이 못쓰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고 가르치고 있다.

 

'깨어…행하고‘εκ’+‘νηπω’' -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정신을 바싹 차리는 모습이다. 부활신앙이 옳은가? 그른가? 분명치 않고 흔들리는 신앙상태를 술 취한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서 정신을 바싹 차린 것으로 의미하고 있다.

'의를 행하고' - 의를 지속적으로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생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지만 믿어야 될 가장 중요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안다는 것이 껍데기 일뿐이기 때문에 실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사시다가 육체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고 죽은 후에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신앙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 영적 교훈

1) 부활에 부끄러움 없이 참여 하고자 매일 죽는 삶이 필요하다.

2) 그릇된 신앙관을 가진 소수가 공동체 전체를 물들이고 그릇되게 만든다.

3) 그리스도인은 계속되는 삶에서 죄와 싸우고 의를 지속적으로 행해야 한다.

 

 

 

15:35-49 부활의 몸

 

35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누가 - 고린도 교인들 중에 부활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일부 교인들, 또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어떻게 다시 살며’ - 부활의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질문.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 부활한 몸(체질)에 관한 질문.

 

바울은 부활과 부활의 체질에 대하여 다음의 예로 설명한다. 이 말씀에서의 포인트는 38절의 말씀이다.

 

 

36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당시 헬라 사람들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젖어 있어서 ‘영’이 이데아라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때에 육체는 흙에 지나지 않아서 원소가 분해되어 땅에 스며지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는 영・육이 함께 부활했다고 증거 하므로 이들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우리의 부활된 몸을 땅에 뿌리는 씨앗으로 비유하면서 설명하였다. 땅에 뿌린 씨앗이 죽지 않으면 살지 못함을 알듯이 우리의 부활도 현재 입고 있는 몸이 죽어야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37절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알갱이’ - 씨앗(벌거벗은 종자, 형체를 갖추지 않은 종자). 외형상 보리나 밀, 쌀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들이 땅에 뿌리는 씨앗은 장래에 싹이 되어 나올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다. 즉 뿌린 씨앗의 형체와 싹이 나온 후의 형체는 다르다(이 땅에 묻히는 육체는 값어치 없음을 표현한 말).

 

 

38절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처럼 우리들도 죽은 몸과 부활의 몸은 다르다. 식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형체를 주신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각기 싹이 난 후의 형체는 다르다. 모든 생물의 씨가 형체를 입도록 그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듯 부활의 형체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으로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된다.

 

 

39절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육체의 원소(DNA)를 함유하고 있는 ‘요소(씨)’는 사람의 요소나, 짐승의 요소나, 새의 요소나, 물고기의 요소나 그 자체로만 보면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요소(씨)가 심어져서 자라는 양태에 따라 사람의 육체가 되고, 짐승의 육체가 되며 또는 물고기의 육체가 되고, 새의 육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그 각 씨에 형체를 입혀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40절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하늘에 속한 형체’ - 해, 달, 별(화성, 금성, 목성, 토성 등등)을 지칭.

‘땅에 속한 형체’ - 사람, 짐승, 새, 물고기를 지칭.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 또한 영광도 다르다.

 

41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해, 달, 별을 비유로 천국에 부활의 몸을 입고 들어갔을 때 얻게 되는 영광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천국에서 얻게 되는 상급을 설명한다. 즉 우리의 육체가 땅에 쓰러질 때 나의 것 그대로 땅에 들어가지만 부활 때에는 예수님의 모습(마치 복제 인간이 되어 나오듯) 그대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의 모습(영광)대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 사람에게 입혀주시는 영광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42-44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앞의 진리를 바탕으로 부활에 대한 진리를 증거 한다.

 

'육의 몸' -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신령한 몸' - 썩지 아니할 몸,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신령한 몸.

‘욕된 것…영광스러운 것’ - 비열함, 사악함. 감정과 욕정으로 지배받는 비열하고 불명예스런 몸이 예수님과 같은 영광을 입고,

‘약한 것…강한 것’ - ‘힘없는’, ‘병약한’. 외적인 방해물과 내적인 병에 의해 허물어질 약한 육체가 어떤 세력에도 허물어지지 않는 강한 힘을 입는다.

 

 

45절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 아담은 산 영' - 인류의 조상 아담은 육체의 몸을 입고 살아 있는 영혼일 뿐이다.

'마지막 아담' -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몸을 입혀 주시는 영이시다.

 

 

46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체의 몸을 입은 자이다. 그 다음에 신령한 자이다.부활의 몸을 나중에 입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아담을 통해 산 영인 육체를 입은 자가 ‘예수님의 은총’을 통해 영적할례를 받고 부활하여 신령한 예수님처럼 될 것을 암시한 말이다.

 

 

47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첫 사람' - 아담을 지칭함.

'흙에 속한 자' - 죽을 육체를 가진 자이다.

'둘째 사람' -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늘에서 나심' - 영에 속한 분으로 하늘로서 오신 분이시다(창2:7; 빌2:6-8).

 

 

48절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흙에 속한 자'(들) - 아담이다. 흙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땅에 살다가 죽었다. 아담의 육체만 이어 받았을 뿐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다.

'하늘에 속한 자(들)' - 예수님이시다. 그 분은 흙에 속한 자와 같지 않고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이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영생하시는 분으로 지금도 살아 계신다. (부활체를 입은 성도들)

49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이처럼 우리도 누구의 형상을 입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장래가 결정이 된다. 결국 주님의 형상을 땅에서 회복하는 자들에게 하늘의 형체를 입혀 주신다. 그러면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의 행실을 본받아야 한다.

★ 영적 교훈

1)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15:38).

2)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이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이다.

3) 아담의 흙에 속한 모습에서 예수님의 하늘에 속한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힘쓰자.

 

 

 

15:50-58 부활은 어떻게 되는가?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 썩을 것' - 정욕 적인 것과 죄악 적인 것들을 통칭한 말이다.

'하나님 나라 … 썩지 아니할 것' - 천국의 기업과 부활의 몸을 말씀하신다.

 

 

51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마지막 나팔' - 휴거 사건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휴거되는 분들은 이때 부활체를 입겠지만 나머지 성도는 그 후에 부활체를 입게 된다.

‘순식간’ -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한의 시간.

‘홀연히’ - 눈 깜짝할 동안.

 

 

52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부활의 상태를 설명하심.

 

 

53절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입다’ - 속의 썩을 옷을 완전히 벗어버린 상태에서 썩지 않을 새 옷을 입는 것.

‘썩을 것’ - 죽는 것의 한 상태(늙는 상태).

‘죽을 것’ - 죄의 세력에 굴복 당하는 상태.

 

변화되는 모습을 말씀하신다. 죄의 세력에 굴복 당하지 않는 몸을 입는다.

 

 

54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 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25:8의,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리라”한 말씀을 인용한 말을 재해석하여 쓴 글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인 사망이 우리의 몸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변화하는 날 그 부활이라고 하는 승리의 세력에 의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끌려가 없어져 버리므로 죽음의 영원한 실패(죄를 짓게 하는 성질)는 더 이상 내 속에 존재하지 않음을 경험할 것이다.

 

 

55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어떻게 나를 죽이겠느냐 사망아 네가 어떻게 나를 독침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줄 수 있겠느냐”란 내용의 이 말씀은 호13:14의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여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를 인용한 말이다.

바울은 ‘사망’을 두 가지 ① 모든 것을 정복하는 힘(νίκος,니코스) ② 모든 것을 쏘는 힘(κεντρον,캔트론)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몸부림치는 것은 죽음에 정복(니코스)당하지 않으려는 것이 것이다. 질병, 사랑의 상처, 경제적 파탄 등은 독침(캔트론)인데 이것에 맞으면 쉽게 절망에 이르고 절망은 쉽게 생명을 포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이긴자들은 이와 같은 사망의 세력을 정복한 승리자이다(요5:24; 11:25-26).

 

 

56절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람이 죽음으로 가는 데는 순서가 있다는 말씀이다. ① 율법(양심)이 죄를 지적해 주고, ② 죄는 죽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문화(율법) 되어 이 땅에 오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후에는 우리의 양심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죄인임을 깨우쳐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 안(죄, 심판, 죽음)에 가두셨으므로 우리는 늘 죄 → 율법 → 회개라는 싸이클을 반복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죄인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망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죄이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 혹 율법이 죄를 조장하는 듯한 인상을 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는 기능을 지닌다. 그런데 인간은 죄성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즉 죄를 범치 말라고 주신 율법이 더욱 죄를 범하게 하는 역효과가 나타낸다. 이는 아담에게 유전된 죄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다(롬7:12).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죄를 이길 방법을 제시한다.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공급되어진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속죄의 은총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능히 죄악을 이길 수 있게 된다.(자세한 것은 성서의 핵심진리 연구 “속죄복음” 참조)

 

 

58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15장의 진리를 바탕으로 견고한 신앙 위에 흔들리지 않기를 당부 하신다.

★ 영적 교훈

1)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부활체로 사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다.

2)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죄와 사망의 세력을 이겨야 한다.

3) 흔들림 없는 충성심으로 일한 것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다.

 

 

 

 

 

 

 

 

 

 

 

 

 

 

제16장 바울의 문안 인사

 

 

내용분해

1- 4 : 예루살렘의 성도들에 대한 연보 문제

5- 9 : 고린도를 방문하려는 바울의 여정

10-18 : 디모데와 아볼로를 위시한 몇 가지 인사 문제

19-24 : 마지막 문안과 축도

 

 

 

16:1-4 성도를 위한 연보

 

1절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여러 가지의 교리의 문제를 다루던 바울은 이제 황급히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본서를 매듭지으려 한다. 그 첫 번 문제가 바로 연보에 대한 문제이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 아마도 3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이 문제에 대하여 권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편지로 연보의 방법을 가르쳤을 것으로 본다.

 

 

2절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연보의 방법은 매 주일 첫날에 한 주일동안 이익을 얻은 것의 얼마를 저축하였다가 연보하라. 이중에 십일조는 가장 바람직한 연보가 될 것이다(말3:8; 마23:23).

갑자기 급하게 연보하는 것은 좋지 않다.

 

3절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내가 이를 때에' -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면

'너희의 인정한 사람' - 고린도 교회의 대표

'편지를 주어' - 바울의 추천 편지일 가능성이 있다.

'너희의 은혜' - 고린도 교회의 연보이다.

 

 

4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면 함께 동행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6:5-9 바울의 여정

5절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여행할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그의 당초의 계획은 에베소에서 해상으로 고린도에 직행하고 거기서 마게도냐로 먼저 갔다가 다시 고린도에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향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후1:15-16). 그러나 바울은 당초의 계획을 바꾸었다. 결국 새로운 계획을 따라 마게도냐로 먼저 갔다가 거시서 고린도에 이르렀다(행20:1-2).

 

 

6절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에서 한 겨울을 지냈다. 여기서 3개월을 지내면서 로마서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행20:3).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 - 그는 일정한 장소에 머물 때에는 그곳에서 장막 깁는 일을 할 수 있지만 외지로 움직이고 있는 상태에서는 목적지에 가기까지는 필요한 비용(여비, 체재비, 선교비)이 있어야 하는데 그 비용을 고린도 교인들을 통하여 도움 얻기 바란다는 뜻이다.

 

 

7절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바울은 지나가는 길이지만 고린도 교인들을 임의로 만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의 허락하심에 따라 얼마동안 머물기를 원한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신앙관은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신 뜻을 잘 이해하고 따르는 모습임을 볼 수 있다.

 

 

8절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기를 원함.

 

 

9절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에베소를 떠나기 어려운 이유를 밝히고 있다.

‘공효’ - 공을 드린 보람

‘문’ - 기회, 통로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 - 전도에 많은 기회와 효율적인 성과를 가리킨다. 즉 ‘이런 기회에 에베소 교회에 머물러서 최대의 전도 효과를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

‘대적하는 자’ -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행19:23-41, 불신자들, 불신앙자들). 처음 개척하는 단계인지라 신앙의 문제를 제기하는 자들이 많으므로 그들 스스로 교회를 이끌어가지 못하는 상태이니 좀 머물러 있어야겠다는 말씀이다.

 

 

16:10-18 인사문제

 

10절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디모데는 바울의 사랑 받는 아들이요 동역자였다. 디모데는 고린도 성의 재무담당 에라스도와 함께 고린도에 가도록 되어있었다(행19:22). 그들은 고린도에 가기까지 마게도냐에 있는 몇몇 교회를 들러서 가게 되어 있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편지를 쓴 것이다. 해상로로 먼저 도착할 편지에 바울은 디모데의 나이가 연소하니 여러분이 순간순간을 살펴 분간하여 그가 마음으로 두려움이나 근심을 가지지 않도록 잘 협력하라는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1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디모데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알선해 주기를 부탁하고 있다.

‘멸시’ -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대하다’,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삼다’는 뜻으로 디모데의 연소함 때문에 당부하고 있다.

‘평안히 보내어 내게 오게 하라’ - 디모데의 임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가 떠날 때에는 어떠한 문제나 분쟁이 없이 모든 일이 원할하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말이다.

'형제들' - 아마도 함께 길을 떠난 에라스도나 디도를 가리킬 수 있다.

 

 

12절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아볼로' - 고전 1:12 참조, 이때 아볼로는 고린도에 있지 않고 바울과 같이 에베소에 있었다.

‘권하되’ - 간청하다, 호소하다, 초대하다.

'갈 뜻이 일절 없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높이려는 사람들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분명한 아볼로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기회가 있으면’ - ‘시간이 있으면’의 뜻. 아볼로파의 신앙사고가 고쳐지고 난 뒤 갈 수 있게 되는 시간을 뜻한다.

 

 

13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깨어' - 영적으로 죄성과 정욕에 지배받지 않은 모습

'믿음에' - 주님의 도우심과 속죄에 대한 믿음

'굳게 서서' - 확고한 믿음 위에 서기를 바람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 남자의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흔들림 없이 모든 일을 능히 정복하라

 

 

14절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모든 행실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3:4-7)

 

 

15절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아가야 지방의 첫 열매 스데바나' - 헌신적인 신자이다. 그의 가족은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전1:16).

 

 

16절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이 같은 자들' - 스데바나를 도와 함께 일하는 자들.

 

 

17절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브드나도' - 로마의 클레멘트의 편지를 가지고 간 브드나도와 동일인물이다.

 

 

18절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마음을 시원케 함' - 피차의 오해와 불신을 없애기를 원함.

 

 

 

 

16:19-22 문안과 축도

 

19절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아시아의 교회들' - 에베소를 수도로 하는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들이다. 에베소,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교회 등이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 고린도교회를 창립할 당시에 바울을 협조한 부부이다. 이들은 로마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글라우디오 황제(41-54년) 박해 때 로마에서 추방당해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이후 충실한 협조자가 되었다. 장막을 만드는 직업으로 평일에는 바울과 함께 일을 했으며 안식일에는 바울을 도와 복음을 증거 하였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바울을 동행하여 에베소로 갔다.(행18:18,26) 그 후 로마로 돌아가 로마에 머물다가 다시 에베소로 이주하였다(롬16:3).

'그 집에 있는 교회' - 당시는 가정 교회였음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가령 예루살렘의 마가의 집(행12:12), 빌립보의 루디아의 집(행16:40), 라오디게아의 눔바의 집(골4:15).

 

 

20절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형제' - 에베소 교회에 속하는 모든 교회이다.

'입맞춤의 인사' - 정중한 인사의 현이다. 동방과 유대인의 관습으로 내려온 것이다.

 

 

21절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다' - 바울 자신의 편지임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님의 심판이 곧 가까이 오게 되었으므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자체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14:21). 즉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저주 곧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23-24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마지막 축도이다.

 

 

 

 

 

 

 

출처 : 유나이티드신학연구소
글쓴이 : USmissi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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