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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정넘치는 부요한 교회(계 3:14-22)

하나님아들 2013. 3. 22. 12:09

열정넘치는 부요한 교회(계 3:14-22)

<최민수><노홍철>

박쥐 이야기

박쥐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주로 동굴 속에 살며 밤에만 움직이는 동물로서 초음파 레이더를 사용해 움직이고 먹이를 잡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오늘날 우리는 박쥐가 새 종류가 아닌 포유류 종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사실 생긴 것만 봐서는 새인지 짐승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날개가 달려 나는 것을 보면 새 같기도 하고, 새끼를 낳아서 젖 먹여 키우는 것을 보면 분명 포유류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의 박쥐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 잘 아시지요?

새와 짐승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새가 이기는 듯 보이니까 박쥐는 날개를 활짝 펴 보이며 “나는 새입니다.”했다가 이번에는 짐승들이 이기는 것 같으니까 날개를 감추고 “나는 쥐입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사실이 들통 나자 박쥐는 새 편에서도 미움을 받고 짐승 편에서도 따돌림을 받아 결국 동굴에 숨어 살며 밤에만 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 박쥐 이야기가 이솝우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국설화에도 아주 비슷한 내용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박쥐 이야기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데 그 모든 이야기의 공통점은 박쥐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거나 자기 이익을 따라 변신하는 기회주의자들을 풍자하는 짐승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 72km 지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유명한 의학교가 있는 곳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고대 세계전역을 통해 안질의 치료로 유명했습니다.

또 교통의 요충지로서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창하는 도시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금융중심지로 부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3개의 극장과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은 라디오게아 사람들이 세상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와 교인들 역시 넉넉하여 생활 걱정은 없었으나 주님으로부터 칭찬은 듣지 못하고 책망만 받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 현대 교회의 모습이요,

이 시대에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열심을 내는 데 방해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요소들이 신앙생활을 산만하게 만들어 열심을 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산소용접기를 아실 것입니다. 산소용접기는 쇠를 녹이고 절단하며 쇠와 쇠를 강하게 붙이기도 합니다.

그 산소용접기는 불꽃을 가장 가늘게 모아 집중할수록 높은 열을 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집중이 되지 않고 여기 저기 마음이 산만한 사람에게는 열심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마음을 주님께 모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 19절에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산만케하는 요소들을 회개하여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열심을 내는 신앙이 되려면,

 

 

1. 미온적인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계 3:15-16)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라오디게아의 북쪽에 ‘히에라폴리’ 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 섭씨 90도나 되는 ‘파묵칼레’ 라는 뜨거운 온천이 있습니다.

성지 순례시 그곳에 가보니 온천수의 석회분과 칼슘분이 바위를 흘러 덮어 마치 흰눈이 덮인 것 같기도 하고 목화꽃이 만발한 목화밭 같기도 하다고 합니다.

“파묵칼레”의 뜻은 목화성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뜨거운 온천물이 10Km 떨어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옵니다.

그러면 그 뜨거운 물이 식어 나중에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해진 상태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지근해진 물은 온천수에 들어있는 유황냄새가 더 심하게 나기 때문에 누구나 다 토하여 뱉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황을 이 온천수를 비유로 들며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즉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의 신앙이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신앙자세가 아주 미온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영적인 정체를 밝히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교회이긴 교회인데 회개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교양 삼아서 교회에 나오고, 심신을 쉬러 나오고, 위로 받으러 나옵니다.

편하게만 믿으려고 합니다.

전도에 대한 열정도 없고, 울며 기도하는 회개의 모습도 없고, 모이기는 모이는데 마치 극장처럼 의미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미온적인 신앙이 되면 주님께서 역겨워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토하여 내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자하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그래도 가져야 할 것은 가져야 하진 않겠냐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고민하고 낙담하는 많은 일들이 굳이 가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는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을 가지고 싶어서, 혹은 이루고 싶어서 생겨나는 고통인 것을 아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나는 비록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하나님 외에도 가져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양다리를 짚고 있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있으면서도 미온적으로 우상을 버리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촉구합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또 엘리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다른 신과 우상의 편, 마귀와 사단의 편에 설 것이냐를 분명히 선택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를 동시 가진다면 뱃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미온적인 신앙을 버리고 주님을 향한 뜨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의 뜨거움을 가지고 열심을 내어 주님을 섬겨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2. 내 부족함을 발견하라. 즉 자만심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신학생이 시험이 다가오자 공부는 하지 않고 기도만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지를 받아보자 아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답안지에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라고 큼직하게 써놓고 나와 버렸습니다.

 

교수가 채점을 하려고 답안지를 보니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교수님은 시험지에,

“하나님은 다 아시니 100점, 학생은 다 모르니 0점”이라고 썼답니다.

 

내가 나를 알고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만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자신들을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부자요,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부족하여 병이 들어 버린 교회였습니다.

곤고한 것 : 영속적인 시련

가련한 것 : 불쌍하고 비참한

가난한 것 : 거지로 몰락한

눈먼 것 : 맹인 소경

벌거벗은 것 : 옷을 입지 않은, 옷이 없는

 

이 모든 것들이 육체적인 것이겠습니까? 아니요. 신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풍요함이 넘쳤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행복해 보이고, 먹을 것도 잘 먹는 그런 풍요로운 삶이요.

하지만 그 신앙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끊임없이 그의 신앙을 떨어뜨리는 시련이 있고, 하나님 보시기에 불쌍하고 비참한 영적인 모습에 가진 영성이라고는 거지로 몰락했으면 영적인 안목은 소경수준이었습니다. 거기에다고 옷은 아무것도 입지를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모르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게 뭡니까? 자만심입니다.

 

자만심은 자기가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자만심에 빠진 사람은 자신은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멸시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입니다.

교회가 자만심에 빠져버리면, 교회를 크게 짓는 것이 목적입니다.

교인들의 숫자가 많으면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행사와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이 활발하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기준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내 기준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보시느냐입니다.

세상에서 선하게 평가를 받고 교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아도, 주님이 아니라 하면 아닌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처럼 착각에 빠져,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데 나 혼자 됐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데 나 혼자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잘못된 부분들이 영적으로 치료되어 건강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 이것은 곧 영적인 부요를 얻는 것입니다.

(계 3:18-19)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예수님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로 연단한 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금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육적으로 즐거워하는 그런 금이 있고, 영적으로 즐거워하는 그런 금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불로 연단한 금은 무엇입니까?

금이 나오기까지는 엄청난 불의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온갖 불순물을 불로 다 태우고, 결국에 남는 것이 금이라는 것이지요.

 

그 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음의 시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옛말에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겪는 고난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이 고난이 우리의 보약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요?

이 고난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시는 역사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낮아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히12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지금 고난당하고 계십니까?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받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징계당하고 계십니까?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또다른 음성입니다.

지금 시련당하고 계십니까? 깨달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과 나와의 기도의 교제를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련을 가진 자로 우뚝 선 자가 바로 부자란 것입니다.

 

우리는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온실속의 화초는 조건에 맞는 온도와 조건에 맞는 수분이 갖춰질 때에는 아름다운 모습을 갗추고 있지만,

그것을 보호하고 있었던 비닐이 벗겨지는 날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아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과 풍파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피어나는 들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부요함인 것입니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칭찬이 성도님들의 미래에 가득하길 원합니다.

 

4.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오늘날 시대를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또 오늘날 시대를 대화가 없는 시대라고 합니다.

 

저는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지식이 많으면 오히려 대화가 더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시대가 말하기는 좋아하지만 들어주기는 싫어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단체와 단체가 자기의 입장과 체면만을 내세우면 이야기하고, 요구합니다.

많이들 외치잖아요.

그런데 정작 상대의 이야기와 상대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이야말로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가 필요한 시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신앙인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귀막고 눈감고 오직 예수님께 원망과 불평과 요구만을 합니다.

자기는 귀를 꽉 막고 있으면서 하나님께선 자신에게 응답하지 않는다고 원망을 합니다. 자신의 눈은 질끈 감고 있으면서 하나님은 나에게 나타나시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말씀을 우리에게 응답하셔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나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시어 보여주시고자하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문 밖에 서서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왜요? 교제하시기 위해서도, 같이 먹고 마시기 위해서요. 같이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두드리고 계시는 모습에 영의 눈을 뜨고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셔요.

오늘 이 시간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라오디게아교회 가졌던 양다리를 걸치지 않길 원합니다.

세상에 한 발, 신앙에 한 발, 그렇게 하면 가랑이가 찢어지지요.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을 뱃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부족함을 끊이 없이 바라보고 채우는 신앙을 원하십니다.

세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가 낮아짐으로 하나님께 구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주는 시련을 연단된 금같이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시련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증거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저와 성도님들 되어서 우리의 신앙의 삶이 하나님과 같이 먹고 마시는 교제의 삶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출처 : 하나님의 종 바나바의 자료
글쓴이 : 끝장보는 신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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