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회차를 살아가는 법

인생 2회차를 살아가는 법

입력2025.02.10. 

 

[에세이]

[Gettyimage]

“이거 요즘 유행하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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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건 지지난주에 유행한 거지. 이미 유행 지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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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슬며시 내밀며 질문하는 내게 시큰둥하게 내뱉는 초등학교 5학년 둘째의 타박이 이젠 새롭지도 않다. SNS에 수없이 올라오는 다양한 챌린지를 보면서, 나도 제법 유행을 아는 엄마구나 싶어 자신 있게 물어보면, 둘째는 어김없이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 겨우 2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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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2주인데, 아직 인기 있는 것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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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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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단호하다. 아, 이놈의 SNS는 유행이 어찌 이리 빠르단 말인가. 둘째의 단호함에 마음이 조금 상한 채로 회사에 출근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동료들은 둘째가 외면했던 인기 있는 챌린지를 여전히 모르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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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2주나 지난 거예요. 지금은 유행하지 않아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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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에게 받았던 타박을 조금은 더 우아하고 교양 있게, 원래 알고 있던 것처럼 동료들에게 웃으며 이야기해 준다. 그러면 하나같이 모두 다 어쩌면 그렇게 다 아느냐고, 본인들도 잘 모르는 유행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칭찬해 준다. 이런 소소한 칭찬에도 MZ세대의 ‘인기 아이템’을 다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어찌나 어깨가 우쭐해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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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는 엄마는 아직 어린 자식들에게 기생해 ‘다양한 인기 아이템’을 탐닉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생 2회차를 살고 있는 기분이랄까. 흔히들 ‘인생 2회차’는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이미 모든 일을 다 겪은 듯 능숙한 모습을 보일 때 비유적으로 드는 말이지만, 요즘 나는 아이들과 대화하면서 ‘아, 이것이 2회차 인생이겠구나’ 싶다.

경계의 무한 확장

나름대로 만화와 웹툰이라는 콘텐츠 업계에서 오래 근무한바, 많은 작품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지금 인기를 끄는 작품들을 다 알기란 쉽지 않다. 특히 작품의 재미를 느끼려면 작품에서 공감이 되는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이제 나이를 많이 먹고 세상에 시달려서 그런지, 작품 속에서 더는 공감을, 재미를 찾지 못하고 있어서 우울하던 차였다. 그런데 아이들이 영유아기를 지나 사춘기로 접어드니 세상의 모든 콘텐츠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만세!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보는 책·웹툰·만화·애니메이션·SNS를 슬쩍슬쩍 보면서 인기가 있는지, 왜 재밌게 보는지 물어보는 일만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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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알아낸 요즘 핫한 작품들을 찾아서 열심히 들여다보면, 어떤 작품은 지금의 내가 봐도 재밌기도 하지만, 대부분 안타깝게도 아이들이 권해준 것만큼 재미가 있진 않다. 그래서 그냥 공부하는 기분으로 찾아서 꾸역꾸역 본다. 왜 이토록 이 작품이 인기가 있는지 머리를 열심히 굴리면서 말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분명 내가 만화를 열심히 읽던 시절에는 만화책과 만화잡지가 전부였는데, 요즘은 정말 다양한 플랫폼이 있다. 웹툰 플랫폼은 기본이고 유튜브에서만 공개하는 콘텐츠에 다양한 2차 창작물까지, 경계가 거의 무한으로 확장하고 있다. 중년의 콘텐츠 소비자로서 그저 정신이 아찔할 따름이다. 작가와 편집부가 만든 작품만 보던 시대에서, 요즘은 전문 작가인지, 아마추어 작가인지 그 경계조차 희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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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플랫폼 사용 빈도가 40대 이상 기성세대와는 현격히 다르다고 수많은 통계를 인용한 뉴스를 접하지만, 나에게 제일 피부로 와닿는 것은 초등학생, 중학생인 자식들의 콘텐츠 소비 행태다. 10대들과 가족이기에 아주 직설적으로 가깝게 매체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가끔 아이들이 이용하는 플랫폼 앱을 내려받아 보기도 하지만,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도저히 재미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같은 SNS를 이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적용되는 알고리즘이 다르다 보니, 나와 아이들이 보는 콘텐츠는 너무 다르다. 나와 아이들이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어이없는 질문이 생길 정도로,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소비하는 콘텐츠는 전혀 다르구나 하는 체감이 들 정도로 서로 미디어를 통한 경험은 멀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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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안 좋은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엔 과거의 영화가 재개봉하거나, 예전의 드라마를 OTT 서비스를 통해서 쉽게 볼 수 있다. 명작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쉽고 다양하게 세상 여기저기에서 돌출되는 것이다. 과거의 명작들을 짧고 강렬한 SNS 콘텐츠로 만들어서 올리는 경우도 아주 많다. 우리 아이들도 좋아하는 ‘5분 순삭’ 같은 유튜브 콘텐츠를 보고 있으면, 시공을 뛰어넘어 재창조된 예전의 명작들을 다양하게 만난다. 부모인 내가 명작이니 같이 보자고 하면 당연히 콧방귀를 끼고 말겠지만, 본인들이 신뢰하는 크리에이터들의 추천을 보고 나면, 아이들이 먼저 재개봉 영화를 같이 보자고 제의하기도 한다.

미화되는 과거, 언제나 쉽지 않은 현재

짧게는 10년 전, 길게는 20년 전의 영화들. 내 젊은 시절의 한순간이었을 오래전 영화들을 10대가 된 내 아이들과 같이 보고 있노라면, 실로 여러 가지 감정이 든다. 젊을 때 본 기억과 전혀 다른 내용일 때도 있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단관 개봉 시절’의 ‘옛날 극장’에 대한 추억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단연코, 젊었던 그 시절의 나에 대한 그리움이 제일 크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 앉아 흥미진진하게 옛날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생을 두 번 사는 ‘인생 2회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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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양육만으로도 허겁지겁 일상을 보냈더랬다. 내가 낳은 나의 분신들을 돌보는 일이 너무나도 감사한 순간이었음에도, ‘나’라는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아이들의 부모로서만 내 존재가 남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니, 아이들은 나의 분신이 아니라 ‘내가 아이들을 통해서 현재를 다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경한 느낌이 종종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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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이가 들면 미래보다는 과거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지금보다 젊던 그 시절, 많은 것에 도전하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젊음이라는 단어 하나를 이유로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던 시절. 싱그러움으로 가득했던 그 시간을 어찌 추억하지 않고 살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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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매우 편리하다. 슬픔과 고통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만 가고, 기쁨과 환희의 기억은 점차 미화되고 선명해진다. 어쩌면 아마도 그것이 현재를 견디고, 괴로움을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힘일 것이다. 이런 시간의 섭리를 거슬러 나는 지금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아이들 덕분에 현재를 다시 즐기며 살고 있으니, 예전의 경험을 새롭게 맛보는 지금이 어쩌면 내 인생의 2회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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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콘텐츠 업계에 종사하고 있어서, 아이들과 대화하는 데 나름의 의미가 있고, 그나마 대화를 자주 시도할 수 있는 것도 참 다행이다. 물론 두 아이 모두 사춘기인지라 조심스럽게 기분을 살피면서 물어봐야 한다. 자칫 눈치 없이, 내가 너무 궁금하다고 질문 폭탄을 퍼붓다 보면, 어느 순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눈빛을 발사하며, “아 짜증 나~”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문을 닫으며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머쓱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 덕분에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민감해지며, 너희들 덕분에 인생 2회차를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 고맙고 사랑스럽던 마음이 ‘저런 버릇없는 태도를 내가 가르친 적이 없는데!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인가??!!’ 하고 확 화가 치미는 부모의 마음으로 변하는 건 정말 순식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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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현재를 살아간다는 건, 여전히 언제나 쉽지 않다.

백수진
● 1975년 서울 출생
●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 現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재직
● 서울신문 ‘웹툰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연재(2022~2024) 등

백수진 웹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