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 존 맥아더
추천의 말
영혼의 생수(生水)를 흠뻑 마십시다
1. 서론
1. 예배에 대한 정의
2. 참된 예배의 모습
3. 구별된 예배
2. 예배의 중요성
예배는 성경 전체의 강조점이다
1. 구약의 성구(聖句)들
2. 신약의 성구(聖句)들
예배가 운명을 결정한다
1.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
당신은 올바른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가?
메이슨 조합(Masonry)은 형제단인가 사교(邪敎)단체인가?
2.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예배는 주일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드리는 것이다
영원 세계와 구속사가 예배로 설명된다
1. 창조 이전의 역사
2. 타락 이전의 역사
3. 타락 이후의 역사
4. 현재의 역사
5. 미래의 역사
예수께서 예배드릴 것을 명하셨다
3. 예배의 근거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응답 / 시편 22편 22-27절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는 이유 / 출애굽기 20장 22-26절
이사야의 예언으로 말미암은 계시 / 이사야서 66장 22-23절
회심한 죄인들의 반응 / 고린도전서 14장 23-25절
기독교의 예배는 단순히 기독교화된 유대교 의식인가?
4. 예배의 대상
영으로서의 하나님(하나님의 본성)
1. 하나님의 영성(靈性)
”새롭고 산 길”(히 10:20)이란 무엇인가?
이방 종교들은 하나님이 한정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외적인 상징과 내적인 실체
2. 하나님의 거룩성
사람들이하나님의거룩하심을접하게 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하나님의 본질적 관계)
1.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인 표현
당신의 교회는 하나님께초점을
맞추는가, 아니면 사람에게 맞추는가?
2.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예배
예배에 대한 예언적 묘사
5. 예배의 처소
옛 언약의 상징
새 언약의 실체
1. 성전인 성도 개개인의 몸
2. 성전인 성도들의 회집(會集)
당신의 불은 꺼져가고 있지 않은가?
6. 예배의 특성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의 편중
1. 사마리아인의 예배(진리없이 신령으로만 드림)
2. 유대인들의 예배(신령없이 진리만으로 드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1. 신령(영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당신은 교회생활이 지루한가?
2.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왜 강해 설교가 중요한가?
7. 예배의 결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
그리스도인들이 정결케 됨
교회가 유익을 얻게 됨
잃은 자들이 복음을 받게 됨
8. 예배를 위한 준비
예배에로의 부름
점검해야 될 사항
1. 진심
2. 확신
3. 겸손
4. 정결
9. 예배의 장애물
회개치 않은 죄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함
헌신, 곧 희생을 꺼려함
우리는 ”오 !”를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추천의 말
성도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기를...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교회인 Grace Community Church의 담임 목사로, 순회 설교자로, 라디오 성경 교사로, 저술가로 주님을 섬기는 John MacArthur목사님의 성경 연구 안내서(Study Notes)는 주석서로, 개인 성경 연구서로, 그룹 성경 공부용으로, 그리고 설교 자료로 크게 사용되고 있는 귀한 책입니다. 그리고 1969년, 한 성도가 맥아더 목사님의 주일 설교를 듣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조그맣게 시작한 설교 테이프 보급이,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하여 1986년에는 600만 개의 설교테이프를 보급할 정도로, 그의 성경 강해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자 하는 분들, 교회학교 교사, 성경 연구 지도자,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2월(1980년) 그의 초청으로 그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와, 그가 관계하고 있는 학교(Master College)에서 며칠 동안 특별 집회의 강사로 말씀을 전파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성도와 학생들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제게 큰 감동을 주었는데, 그것은 평소 그들이 받아온 성경 교육의 우수성을 입증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같이 우리에게도 이 한 권의 책이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합니다.
5대째 목회자 집안인 맥아더 목사님과는 고등학교(Bob Johnes Academy)동창입니다. 그의 성경 연구 안내서 한국어 발간이 제 가까이에서 사역의 짐을 나눠 지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주님을 바르게 섬기려는 성도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김장환
Billy Kim (극동방송사 . 아세아방송사 사장)
서문
참된 예배에 대한 분명한 초점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참된 예배의 정신이 자주 도외시되고 있는 이날 이 시점에서, 우리는 참된 예배의 성격에 대해 주의깊게 연구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본서에서 저자 죤 맥아더 목사님은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다루고 있으며, 철두철미하고도 체계적인 신구약 성경의 일맥 상통하는 접근 방법으로 당신이 참된 예배의 정신을 십분 이해하기에 부족함없이 도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우리 모두에게 참된 예배에 대한 분명한 초점을 제시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범사에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나의 고향 교회인 Grace Community Church의 담임 목사이신 John MacArthur 박사님의 Study Notes가 한국어로 발행된 기쁨을 그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고일선
영혼의 생수(生水)를 흠뻑 마십시다
죤 맥아더(John Machrrhur)목사님은 독특한 강해 설교와 구절 강해식 성경 연구로 목회하고 있는 분으로서 현대 목회의 기수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담임하고 있는 Grace Community Church의 성도들에게 매주 말씀을 가르치며, 세계 200여 방송국에서 라디오 성경 강해 프로그램인 「Grace to you」와 오디오 및 비데오 테이프, 그리고 활발한 신앙 서적집필 활동을 통해 세계의 영어사용자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무장이 가장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의 일각에서 강해 설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외치며 실천하는 목회 전선의 전우들이 있음을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력이지만 그 분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책이 없을까 하고 발행인인 김 용호 목사님과 함께 찾던 중, 저희 생각에 우리나라의 강단설교 성향과 비슷하면서도, 독특한 방법으로 성경에 접근, 말씀을 말씀으로 강해하는 죤 맥아더 목사님의 성경 연구 안내서를 발행했으면 하고 바랬는데, 마침 그 무렵 평소 가까이 지내는 Grace Community Church의 부목사이며, 그 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는 Master College의 부학장인 Bob Provost박사님과, 그 교회 문서 선교 책임자 Monrore Brewer목사님을 만나게 되어 서로 의논 끝에 발행하게 됐습니다.
이 책은 개인적 성경 연구 안내서와 자료서, 그리고 설교 자료로서의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충분히 자습할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으며, 목회자에게는 설교자료의 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이 책을 잘 사용하기 위해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할 것입니다.
푸른 초장의 싱싱한 꼴을 드리기 위해 예민한 표현 감각으로 원고를 정리해 준 채 수범전도사님과 한국 교회를 섬기는 마음으로 늘 좋은 신앙 서적을 발행하는 발행인 - 김 용호목사님과 동역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영혼의 생수(生水)를 흠뻑 마십시다.
합정동의 새벽을 깨우면서
송 용 필(John Song)
* 이 책의 원서인 「True Worship」은 녹음 테이프를 풀어 만든 책이어서 반복된 곳과 주제가 겹치는 부분이 많았으므로, 독자의 편의를 위해 설교 내용은 손상됨이 없이 제목별로 재편집, 번역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1. 서론
요한복음 4장 20-24절이 예배에 대한 연구의 중심 본문이 될 것이다. 예배에 관련하여 연구해 나감에 있어서 가끔 우리는 이 구절로 다시 돌아와 이 구절을 더 깊게 고찰할 것이다. 나는 요한복음 4장 20-24절이 신약성경에서 예배라는 주제를 다룬 가장 중요한 성구(聖句)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의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주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간의 대화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니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0-24).
본문에서 ”예배”란 단어가 아홉 번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신문의 교회 집회 광고난(미국에서는 주말 신문의 교회 난에 집회 광고가 나감 - 역자 주)을 통해 그 주일에 어느 교회에서 누가 특송(찬양)을 하는가만을 훑어 보며, 자신들의 기호에 합당한 교회, 또는 ”축복”을 해주는 교회를 찾아 나선다. 자, 만일 당신이 음악으로부터 얻을 수있는 무엇을 찾아 교회에 나간다면, 또는 설교에서 무엇을 받으려고,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음악이나 설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당신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는 자극일 뿐이다. 당신이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데,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뤄지는 것이지 받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분께로부터 무엇을 받으러 나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찬양을 드리면 그분의 은혜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셨으므로 드리는 것에 축복이 있다. 이와 같이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갈 때에 당신은 예배를 드리는가? 예배를 드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예배를 드릴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당신이 옷을 입을 때나 교회로 가는 차 안에서 당신의 마음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는가? 지금까지 당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는가? 만일 없다면, 나는 이 예배 연구에서 당신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당신이 앞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목적하는 것은 우선 당신이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하고, 둘째로는 당신이 정당하게 정의된 개념에 따라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며, 세째로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제 그렇게 하겠느냐고 당신에게 촉구를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는 처신을 하는 것이 된다. 나는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든지 그렇지 않든지의 대안 밖에는 없는 구석으로 당신을 몰고 가서, 당신이 이제까지 영위해 온 종교생활의 실상을 파악하게 할 것이다.
1. 예배에 대한 정의
예배란 과연 무엇인가? 잘 알려질 정의(定義)는 ”예배는 자기보다 높은 존재에게 돌리는 존경심”이다. 그것은 ”더 높은 존재에게 경의(敬意), 존경, 숭배, 존중, 찬양, 찬사, 또는 영광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예배”란 단어는 우상이나 물질적인 것들이나 참 하나님께 돌려진 존경심을 언급하는 데에 다같이 구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 단어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단어는 자기보다 높은 존재에게 드려진 경의(敬意)를 나타낼 뿐이다.
신약성경(헬라어)에서 ”예배”란 말을 표기할 때 ”...을 향하여 입맞추다, 손에 입맞추다, 절하여 숙이다, 엎드리다” 등을 의미하는 「프로스큐네오」(proskuneo)를 자주 사용한다. 예배의 개념은 상전 앞에서 존경과 경의, 경배, 숭앙의 뜻으로 엎드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이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하며 존경과 숭앙의 뜻으로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의 절대적 속성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
그렇다면 예배는 본질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일에 함께 모이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우리는 설교자나 성가대에 앉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모인 것이다. 설교와 성가는 다만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켜 주는 자극일 뿐이다.
따라서, 당신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예컨대 ”축복”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면 그것은 동기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면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에 맞추어져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려는 타는 듯한 열망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과 마음의 태도와 우리의 소유를 드리는 것까지 포함한다.
2. 참된 예배의 모습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의 예배의 개념에 대한 실례를 들어 보겠다.
성막에서의 향의 향기
출애굽기 30장 34-38절은 예배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막에서 어떻게 예배가 드려져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지시를 하신다. 그 지시된 것들 중의 많은 것은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교육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30장 34-38절에 묘사된 그런 교육 수단으로 사용된 것들 중의 한 가지가 예배에 있어서 놀라운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즉, 독특하게 구별되어 다른 어떤 요소로도 영향받지 않게)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출 30:34-36).
실제로 향긋한 냄새가 나는 이 향은 성막 안에서만 사용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해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37-38절은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말한다. 당신은 성경에 향의 제조법이 제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아마도 그 향은 가장 좋은 향기를 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그 향을 만들면 목숨을 잃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향이 하나님의 코로 올라갔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로만 올라가는 독특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배란 개인의 마음에서부터 바로 하나님의 코로 올라가는 독특하고도 성별(聖別)된 거룩한 행위임을 보여 주는 훌륭한 예배의 모습이다.
마리아의 향유의 향기
성막에서 향의 향기가 하나님의 코로 올라갈 때 그것은 예배를 의미했다. 요한복음 12장에 또하나의 향기로운 예물이 예배로서 드려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의 형태로 살아계신 하나님,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 그것이 드려졌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1-3).
마리아는 더럽고 먼지가 묻어 있는 예수의 발을 씻기 위해 그녀의 영광인 머리털(고전 11:15 참조)을 사용했다. 또 마리아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약 1년간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의 값비싼 향유를 사용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이다. 예배는 곧 자기를 낮추는 것이며, 드림에 있어서 아낌이 없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달랐다. 마르다는 늘 봉사했었고, 마리아는 항상 예수의 발 밑에 앉아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전에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마르다의 섬기는 것보다 좋다고 말씀하셨다(눅 10:38-42 참조). 그러나, 유다는 마리아가 향유를 갖고서 한 일을 보고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했다. 6절은 유다가 정말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 돈은 다만 자기를 위해서 필요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저를 가만두어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7-8절)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구제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형제에게 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마르다의 계열에 속해 있다. 즉, 항상 바쁘다. 우리의 교회들은 모든 프로그램과 활동들로 조화롭게 체계가 잡혀 있다. 또 우리는 아주 신중을 기하여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 심지어 너무 신중하여 하나님께 드리는데에도, 1년 치의 수입을 다 쏟아 붓고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기기는커녕 아주 신중하게 주팔 알을 튕기려고 한다.
마리아의 행동은 참된 예배의 행위였다. 그녀가 드린 향유에서 향기가 올라갈 때, 그것은 예배하는 마음의 실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구제나 종교적행사보다 낫다. 물론 구제나 종교적 행사도 좋은 것이고 필요하지만 예배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3. 구별된 예배
나는 봉사와 예배를 서로 비교하는 것이 참된 예배가 정말로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봉사는 성부(聖父)께로부터 나와서 성자(聖子)를 통하여 성령(聖靈)의 능력으로써 영적인 은사의 형태로 각 개인에게 내려온 것이다. 반면에 예배는 우리에게서 성령(聖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자(聖子)를 통하여 성부(聖父)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봉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로 내려온 것인 반면에, 예배는 우리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사와 예배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르다처럼 너무 봉사 지향적이지만, 충분한 만큼의 예배 지향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예수의 발 밑에 앉아 예수께 예배드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라.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나의 신앙 생활에서 예배가 으뜸이 되고 있는가? 나는 성실하게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 나의 전심(全心)을 담은 예배를 드리는가? 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는 갈급한 열망으로 불붙어 있어서, 예배를 드리려고 모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 속으로서둘러서 들어가는가?”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찾으신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다음에 언급되는 내용들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예배의 실체를 규명해 나가도록 하자.
2. 예배의 중요성
요한복음 4장 23절은 아버지(성부)께서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 때문에 예배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예배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며, 또한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救贖) 계획의 목표로 삼으신다.
예배는 성경 전체의 강조점이다
예배가 중요한 첫번째 이유는 성경이 아주 빈번하게 예배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에 관한 주제를 수백 번 강조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개의 성구(聖句)들을 선택하였다.
1. 구약의 성구(聖句)들
제 1계명의 강조점(출 20장)
하나님께서 계명과 성문법과 규례와 율법과 율례 등의 형태로 어떤 기준들과 원칙과 방법 등을 세우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께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분이 주신 제 1계명을 주의해서 보라.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2-6).
제 1계명의 강조점은 하나님을,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으뜸가는 책무이다(출 34:14/마 22:37 참조).
성막의 건립(출 25장)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셔서 그들이 광야 생활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그 백성이 당신께 예배드리는 것에 그들의 삶의 목적을 두기를 원하셔서 예배 처소를 세우셨으니, 그것이 곧 성막이다. 하나님께서 이 예배 처소를 얼마나 중시하셨는지를 알려면, 하나님께서 전체 우주의 창조를 설명하시는 데에는 성경의 총 31절만을 할애하셨지만, 성막의 일부분이 될 기구들의 중수와 칫수들을 설명하시는데에는 성경의 일곱 장(총 243절)을 할애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성막 그 자체는 별로 아름답지는 않지만 성소의 제일 안쪽인 지성소(至聖所)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언약궤 위는 시은좌(施恩座)로서,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서 피를 뿌리는 곳이었다. 이 시은좌가 바로 하나님의 「쉐키나」(Shekinah)의 영광이 거하시는(장막을 치는 : tabernacled) 곳이다. 출애굽기 25장 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예배의 중심지로 성막을 그들에게 주셨다.
성막 주위에 진을 침(민 1:52-2: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생활 동안에 그들이 어떻게진을 쳐야 하는지를 정해 주신 것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이스라엘 자손이 행진을 멈추고 진을 칠 때마다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그 다음에는 레위 지파이고, 그 밖으로 열 두 지파들이 주위에 진을 쳤다. 제사장들은 예배를 담당했고, 레위인들은 성막에서 수종드는 일을 맡았다. 여기서도 예배에 최우선권이 주어진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사장이 되기 위한 연령 제한에서도 이것이 나타난다. 남자의 나이 20세가 되어서야 군에 복무할 수 있었다(민 1:3). 레위인 남자는 2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막에서 봉사할 수 있었다(민 8:24). 그러나, 그가 제사장이 될 수 있으려면 30세가 되어야 했다(민 4:3). 왜 제사장은 30세가 되어야 그 직을 맡을 수 있었는가'? 왜냐하면 예배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예배에 가장 큰 책임이 따르기에 가장 높은 정도의 영적인 성숙도가 요구되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병사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이 있었고, 성막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또다른 정도의 기준이 있었지만,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최고의 수준이 요구되었다.
스랍들의 경우(사 6:1-2)
이사야는 이사야서 6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네 날개는 예배와 관계되었고, 두 날개만이 봉사에 관계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스랍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쳐다볼 수 없어서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로 인하여 자기들의 발을 가리었으며, 나머지 두 날개로는 봉사하고 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도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시편 기자의 권고(시 95:6-7)
시편 95편 6-7절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권하는 많은 시편들 중의 하나이다(시 5:7/29:2/45:11/66:4/86:9/96:9/99:5, 9/132:7/138:2 참조)
2. 신약의 성구(聖句)들
로마서 12장 1-2절
바울은 로마서의 처음 열 한 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과 그분의 구속(救贖) 목적, 세상에 대한 계획, 죄인을 향하신 자비 등에 대하여 말하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앞의 열 한 장의 모든 진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받으시는 : acceptable)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리스도인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유익에 관해 진술하는 1-11장의 내용을 기술한 다음에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너희에게서 무엇인가 원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그것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이다. ”기뻐하시는”(받으시는)이란 단어는 제사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드려야 한다. 이 단어는 2절 끝 부분에서도 언급된다.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원하신다. 그것은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런데 그 몸이란 단지 물질적인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육체만을 가리킬 경우에는 그것이 영적인 예배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절에서 말하는 ”몸”이란 전인격(全人格), 참 자아(自我)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에 대하여 그분은 우리 사신을 영적인 예배의 행위로 당신께 드리기를 요구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이 기뻐하시는(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5절
베드로전서 1장은 구속(救贖)의 은혜의 놀라움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절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관해서, 18절은 우리의 신생(新生)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2장의 2-3절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갓난 아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2장 5절은 구원받은 자들로서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벽돌과 시멘트 반죽을 가지고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산 돌인 자신의 백성들로 이뤄진 집에 거하신다. 또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영적인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되고 영적인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의 기초 위에서 드려진다.
우리는 왜 예배가 중요한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성경전체가 예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배가 운명을 결정한다
예배는 삶에서 부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삶의 핵심이다. 당신도 아는바와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영생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간다. 그럴진대 예배는 바로 삶의 핵심인 것이다. 영원한 세계는 그 사람의 예배의 성격에 따라서 결정된다.
예배는 두 가지로만 드려질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이다. 성경은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종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예배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곧,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이다.
1.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
거짓 신(神)들에 대한 예배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신(神)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나무랄 수없지 않은가?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예배에 성실하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들의 예배를 받아 주실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에게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신(神)에게의 예배를 묵과하지 않으신다(출 34:14/사 48:11 참조).
세상은 거짓 신들에게 예배한다. 로마서 1장을 보라. 21절 상반절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며”라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거나 그분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와 존귀와 찬사를 드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거절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도 없으므로 저희를 ”더러움”(롬 1:24)과 ”부끄러운 욕심”(롬 1:26)에 내어버려 두셨고, 궁극적으로는 심판을 당하도록 버려 두셨다(롬 1:32). 사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거절했을 때, 그들은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형상”(롬 1:23)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우상에게로 돌아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예배를 드린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을 거절할 때,그들은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 신(神)들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이 거짓 신(神)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세상의 물질적 신들
세상(世上)의 물질적 신(神)의 한 가지 예(例)는 부(富)의 신이다. 이것은 욥기 31장 24-28절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 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달리 말하면, 내가 내 소유(재물)를 예배하거나 내가 몸담은 작은 세상을 예배하거나 내 손에 입맞추고 돌아다닌다면 하나님을 부인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으며, 물질적인 세상의 신(神)들에게 예배하고 있다.
- 천상(天上)의 초자연적인 신들
신명기 4장 14-19절이 이런 예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모세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내린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로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형태나 모습이나 형상을)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격하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의자에 앉아 있는 수염이 난 노인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상이란 우상을 만드는 망치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잘못된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잘못된 형태로 만들어 버린다.
망치와 끌을 잡고 나무에서 신(神)을 만들어 내는 우상 숭배자는 그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신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형상으로 격하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지 않는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첫번째 종류의 예배는 거짓 신(神)에 대한 예배이며, 이것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정죄되고 있다 나는 이사야서 2장 6-10절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여기서는 이사야가 그의 백성들 중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즉, 그들이 이방인들과 이방 신(神)들이 그들의 사고와 예배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천한 자(문자적으로는, 일반 백성들)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했는데, 그들은 심지어 태양까지도예배하였다(겔 8:16). 이방인들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어느 것에게나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모든 종교는 거짓 신(神)들에게 예배한다. 모든 유물론자들과 비종교적인 무신론자들과, 종교에의 눈을 닫지 않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 역시 비록 대상이 자신일지라도 자기가 고안해 낸 어떤 물질적인 신(神)들을 예배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파멸로 이끌어 간다.
참 하나님께 그릇된 형태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거짓 신(神)들에게 드려진 예배도 받지 않으시지만, 참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라 해도 잘못된 방법으로 드려지면 받지 않으신다. 그것은 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관하여 아주 자세하게 그 방법과 양식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 하나님에 대해 그릇된 형태로 드려진 예배의 실례는 출애굽기 32장에서 발견된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 있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백성들은 아론의 지도하에 그들의 모든 금붙이들을 모아 녹여서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그것을 예배하기로 했다. 그들이 다른 신(神)에게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었다. 금송아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던 바의 표현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와서 그들의 소행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하여 계명이 기록되어 있던 두 개의 돌판을 던져서 깨뜨려 버렸다(19절).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진노를 발하셔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10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므로(14절) 삼천 명만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28절).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드려진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이나 물질적인 표현으로나 우상 등, 어느 것으로든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종종 사람들이 ”나는 나의 소견에 좋을 대로 하나님을 섬깁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에 대해 당신이 내린 정의(定義)가 성경과 맞지 않는다면, 당신의 그 정의를 참 하나님과 동일시 여긴다 해도 당신의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세번째 경우의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자.
참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예배하는 것
하나님을 어떤 우상이나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도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예배의 행위에 있어서도 어떤 개인의 생각으로 격하시켜 드리는 것 또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제 자기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람들의 몇몇 사례(事例)를 성경에서 찾아봄으로써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겠다.
- 나답과 아비후(레 10:1-2)
대제사장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맡은 나답과 아비후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레위기 10장 1절은 그들이 제사장직에 임직되던 중요한 그 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 날은 그들이 백성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하게 된, 사실상의 직무 첫날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향으로 채워져서 그 향기가 하나님의 코로 올라갈 때 그것은 예배를 상징한다)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아마도 레위기 10장 9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하시는 엄중한 경고는 나답과 아비후가 분명히 술에 취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같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는 취한 채 성막 안에 들어가서 어리석은 짓을 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또한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의 조항과 맞지 않는 일들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로 삼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나름의 사고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되고, 성경에 규정된 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 사울(삼상 13:8-14)
사무엘상 13장에 보면 사울 왕은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예배를 드렸다. 8-9절에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 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신은 ”그게 뭐가 그리 나쁜 일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나쁜 일이다. 제사장 이외에는 아무라도 제단에서 섬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사울은 자신의 권세와 신임성을 백성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제사장의 직무를 범한 것이다. 10-14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의 예배만을 받으신다. 사울이 자기 방식대로 드린예배 때문에 다시는 사울의 계통에서 왕위(王位)에 오른 자가 없었다.
- 웃사(삼하 6:1-9)
웃사는 언약궤의 운반을 맡은 고핫 자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고핫 자손들은 어릴 때부터 언약궤를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가만을 배우면서 자라났다. 민수기 4장 15절에 보면 언약궤는 손으로 만져져서는 결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언약궤의 옆면에는 큰 고리들이 달려 있어서 고핫 자손들이 거기에다 막대기를 꿰어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언약궤가 항상 운반되어야 하는 방법이었고, 웃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웃사는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방법으로 언약궤를 운반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웃사는 무례하게도 언약궤를 수레에 실었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실수였다. 하나님은 그 의도가 아무리 좋더라도 인간의 자기 나름대로의 즉흥적인 방법으로 섬겨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언약궤가 수레로 운반되고 있을 때(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일어난 일을 6-7절이 설명해 준다.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 한 것같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당신도 알 수 있듯이 웃사는 할 바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가 살아오는 동안에 결코 언약궤를 만지지 말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참 하나님을 인간 자신의 방법대로 섬겨서는 안 된다.
-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참 하나님을 하나님의 계명과 기준대로가 아니라, 자기들 나름의 체계대로, 사기들이 고안해 낸 대로 섬겼다.
a. 마태복음 15장 1-9절 :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즉 전통적인 씻는 규례대로)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1-3절).
당신도 알다시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유전(tradition)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이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예배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체계를 고안해 냈다.
4-6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유전(전통)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례를 보여 주신다 그 다음으로 7-9절에서는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이 사람들의 유전(전통)으로 대치된 많은 교회들에서 자행되어지고 있는 모든 거룩한 속임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께는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 예배드려야지 상상(想像)이나 관습이나 종교 의식(儀式)으로 드려서는 안된다.
b. 마태복음 23장 23-28절 :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바리새인들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고발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거짓 신(神)들에게 예배해서도 안 되고, 참 하나님을 잘못된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거나, 참 하나님을 자신의 방법대로 섬겨서도 안 된다. 예배는 성경의 규정대로 드려야 한다. 이제 네번째로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는 예배는 다음과 같다.
참 하나님께 잘못된 태도로 드리는 예배
우리가 모든 거짓 신(神)들과 참 하나님에 대한 모든 형상(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과, 자기 방식대로의 모든 예배의 형식들을 치워 버린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의 태도가 옳지 않다면 그 예배는 열납되지(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열납될 수 없는 예배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 중에서는 거의 아무도 거짓 신(神)들에게나, 또는 참 하나님에 대한 어떤 형상에게 예배드리지는 않는다. 또 우리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들의 방식을 고안해 내지도 않는다. 우리는 성경대로 예배를 드리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올바른 태도로 예배에 임하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를 제시해 주는 몇몇 성구(聖句)들을 제시하겠다.
- 말라기 1장 6-14절, 3장 13-15절, 4장 1-6절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을 고발한다. 이 충격적인 예언에서 말라기는 그들이 범한 악한 죄 일곱 가지를 지적한다. 그러한 죄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그들이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잘못된 태도로 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예배활동에 참석할 뿐이지,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말라기의 고발(1:6-7)을 들어보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또는 제단)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그들이 무슨 일을 자행하고 있었는지 아는가? 그들은 예배를 경멸히 여겼다. 예배는 그들에게 있어서 의식(儀式)이었고, 판에 박힌 일이었으며, 습관일 뿐이었다. 이 예배에는 그들의 마음이 담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최하의 것을 드렸다. 그러나, 그들을 정죄하기에 앞서, 나는 당신에게 어떤 잘못된 태도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예배를 경멸하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러면 그들의 소행은 무엇이었던가? 8절은 그들이 눈이 먼 것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고 말해 준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에게는 눈먼 것이 쓸모가 없어서 그것을 제물로 드리려고 가져온 것이다. 눈이 먼 짐승은 먹을 것을 찾는 데 많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여하튼 결국에는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백성들은 그것들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치워버리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눈이 멀게 된 것은 어떤 질병 때문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또한 병든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는 단지 자신들에게 쓸모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 뿐이다.
계속해서 8-9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너희가 ...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다시 말하면, ”너희가 이같이 하나님을 대우했으니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떻게 대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을 대우한 것보다 더 낫게 너희를 대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그런 다음 10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다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으니, 물질적인 방법으로 드리는 것,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드리는 것,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11절은 계속하여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 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깨끗한 제물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어린 양한 마리를 희생 제물로 드리려면 그 양은 떼 중에서 가장 좋은 양으로서 흠과 점이 없는 것이라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12-14절을 살펴보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산은 더러웠고 그 위의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가 제사장들을 먼저 고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제사장들이 그 죄를 짓는 데 앞장을 섰었다. 그러나, 그 죄는 백성들에게로 침투해 내려갔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계층이 부패하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상(제단)을 더러운 것으로 여겼다. 중요한 것은 13절에 ”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에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배드리는 모든 것이 그들 목의 큰 통증과 같았다. 아마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 또 거기 가서 예배드려야 한다니 ... 좋다. 어차피 쓸모없는 것들이니까 저 눈먼 양이나 절름발이 양을 이번 기회에 치워버리자.” 그들은 형식과 형태는 갖추었지만, 마음이 거기에 담겨 있지 않았다. 거기에 실체가 없었다.
3장에서 그들의 정도는 더 심해진다. 13-14절에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악한 말을 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예배드리는 것이 유익이 없으므로 여호와를 섬기는 데 돈을 충분히 들이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는 예배를 드린 결과가 4장 1절과 3절에 기록되어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당신은 올바른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가?
앞의 말라기의 예(例)는 하나님의 백성이 참 하나님께 종교적 격식을 갖추어서는 드리나, 잘못된 태도로 예배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예배에는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
이제 당신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라. 당신을 ”글쎄요, 나는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격하시키지도 않았고, 예배에 대해서 내 자신의 방법을 만들어 낸 일도 없고, 거짓 신(神)들을 섬기는 어리석은 일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그분의 표준대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해 보겠다. 당신이 예배를 드릴 때 당신의 전심(全心)을 기울이는가? 헌금할 순서가 되었을 때 당신은 당신에게 있는 것에서 최선을 다하여 드리는가? 당신이 하나님께 서원을 드릴 때 당신은 하나님의 아낌없는 풍성하심에 따라 서원을 드리는가? 당신의 마음은 존경심과 경외심으로 충만해 있는가? 당신의 마음 자세가 옳지 못하다면 당신의 예배는 무의미한, 열납될 수 없는 예배인 것이다.
- 아모스 5장 21-27절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즉, 내가 너희 예배를 견디지 못하겠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찐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21-22절)고 말씀하셨다. 이제 여기서는 좋을 짐승들도 드려졌다.
그들이 겉으로는 올바르게 예배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23-2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잘 아노니, 한편으로는 내게 나아와 희생 제사를 드리나 곧바로 돌이켜서 거짓 신(神)들을 섬겼다. 너희는 너무나 세상의 체계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빠져 있고, 연루되어 있어서 너희 예배는 의식적(儀式的)인 것이므로 받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호세아 6장 4-7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 이사야 1장 11-20절
또 다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서에 나타난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유다를 고발하시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라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1절).
다시 말하면, ”나는 이제 그런 제물들을 받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2-20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은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들은 거역하여 구원에로의 초대를 거절했다.
이 본문의 중심 내용은, 이러한 예배에 대한 기사(記事)가 말라기서나 아모스서나 호세아서나 이사야서에 있든지 간에, 모두 참 하나님께 올바른 일을 올바른 방법(종교적 격식을 갖춤)으로 해드렸지만 그릇된 태도로 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 마가복음 7장 6절
이 성구(聖句)는 우리가 앞의 마태복음 15장에서 살펴본 것과 비슷하지만, 이 성구(聖句)가 예배자의 태도에 대해서 잘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이 성구(聖句)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것이 열납되지 않는 예배인 것이다.
메이슨 조합(Masonry)은 형제단인가 사교(邪敎)단체인가?
요즈음 「Masonic Lodge」또는 「the Masons」라고 알려진 모임이 1717년에 시작되었다(우리 나라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으나 미국에서는 왕성함-역자 주). 그들은 자신들이 종교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분명히 하나의 종교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예배의 전형적인 예(例)이다.
이 단체의 정기 간행물인 「The Iowa Quarterly Bulletin」의 1917년 4월호 54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매이슨 조합(Masonry)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게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고유한 관계와 또한 사람들 상호 간의 형제로서의 관계, 인간 영혼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다.”
그들이 인정하기를 꺼린다고 해도 그들은 분명히 종교 단체이다. 그들 간에 ”서구 세계가 낳은 가장 유명한 지도자”로 불리우는 알버트 파이크(Albcrt Pike)는 「윤리와 교리」(Morals and Dogmas) 23페이지(이 단체가 만든 「허텔 성경」 9페이지에도 나온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이슨 조합은 모든 훌륭한 개혁자들을 존중한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율법을 준 모세나, 공자, 조로아스터, 나사렛 예수, 마호멧, 그 외 여러 성현(聖賢)들을 우리의 도덕적 스승과 개혁자들로 생각한다. 또 우리는 우리 단체 내의 모든 형제들에게 그들 개개인의 신조(信條)로 이들 성현(聖賢)들을 신(神)으로 모시는 것까지 허용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진리들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교를 달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우리는 모슬렘 교도들에게 하나님은 한 분뿐이며, 마호멧이 하나님의 선지자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또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가 이미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는데, 이것을 믿지 않으므로 그들은 이단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또 우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사렛 예수란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이며, 예수의 역사란 옛날의 전설이 비현실적으로 다시 재현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다.
메이슨 조합은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속해 있으며, 어떤 한 종교에서가 아니라 모든 종교들에게서 우리의 위대한 진리들을 발견한다. 모든 메이슨 형제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며, 선(善)과 지혜와 예지와 공의와 인애에 있어서 무한하시며, 그분은 창조주이시며, 섭리하시는 분이시며,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매개로 창조하시고 움직이시며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가에 대해서는 그런 것들에 대하여 탐구하고 연구하는 종교나 교회들이 언급하도록 맡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며, 어떻게 그분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개인 개인이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이 단체에는 비밀스런 단어가 있는데, 누가 이 단체의 일원이 되었다면 그는 이 단어를 결코 입 밖에 낼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아주 신성시되는 이 말은 이 단체의 입교자가 소정의 훈련(Master Manson Degree)을 마치고 5개 조항(발 끝에서 발 끝, 무릎과 무릎, 가슴과 가슴, 볼과 볼, 입에서 귀)의 교제의 위치에 이르게 되면 그에게 전수되어진다. 그의 귀에 속삭여 전수되는 단어는 「마하보네」(MAH-HA-BONE)라는 것이다. 이 사람이 듣게 되는 이 신성한 단어는 결코 타인에게 말해지거나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되며, 항상 비밀을 지켜야 한다.
입교자가 정식 회원이 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Ryl Arch Degree)에 이르면 그 입회식에서 그에게만 전수되는 비밀스런 이름이 하나 더 있다. 그들에 의해 새로 발견되었다는 참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것은 「야불온」(Jah-Bul-On)이다. 이것이 그들이 신봉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야”(Jh)는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의 성호(聖號)인 「야웨」(Jahweh) 또는 「여호와」(Jehoh)를 나타내며, ”불”(Bull)은 앗수르의 신(神)으로서 구약성경 전체에서 「바알」로 나오는 신(神)이며, ”온”(On)은 애굽의 태양신(太陽神)에 대한 명칭이다.
알버트 파이크는 「윤리와 교리」 854페이지 이하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이성(理性) 위에 선 확신을 가져야 하며, 개인의 내면에 영성(靈性)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육체가 썩어 없어지더라도 계속 존재하여 모든 영원의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을 지향해 나가 하나님, 즉신(神)의 임재의 빛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분명해지는 영혼이다”라고 말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메이슨 조합은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속임수일 뿐이다. 메이슨 성경 34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되어 있다.
”모임을 가질 때 위대한 우주의 건축자되시는 분께 마땅히 예배를 드려야 하며, 또한 우리들이 만들어야 할 작품에 그분의 축복을 빌어야 한다. 또한 모임을 마칠 때는 평화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 설명되고 있지 않은 건축자에게 반드시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든지 간에 당신 나름대로 생각하는 절대자이다.
알버트 파이크는 또 메이슨 조합의 제단에서 ”모든 히브리인들과 모슬렘 교도들과 브라만, 공자, 조로아스터를 따르는 사람들이 형제로 모여서 유일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Short Talk Bulletin」(36권, 8장, 7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임의 대표로서 기도하는 자는 나사렛 목수의 이름이나 여호와의 이름이나 알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위대한 설계자 또는 우주의 위대한 건축자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이러한 명칭 아래서 모든 종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신(神)을 발견할 수있다. 특정 신(神)을 지목하지 않는 것이 신(神)을 부인하는 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기도를 드릴 때 각 개인은 모든 신(神)들을 포함하고 있는 「위대한 건축자」라는 이름 속에서 자신의 신의 이름을 들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제 당신도 이 종교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메이슨 조합은 사단의 거짓 종교이다. 그들은 ”아니다. 우리는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잘못된 형태로 만들었으며, 잘못된 방법과 태도로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다. 불행히도 이들과 유사한 예배는 수만 가지가 있다. 그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당신이 거짓 신들에게 예배한다든지, 참 하나님께 당신 자신이 생각해 낸 방법으로 예배한다든지, 참 하나님께 옳은 방법으로, 그러나 그릇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예배한다면, 그것은 열납되지 않으며 또한 당신의 운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을 받으실 수 없다.
이러한 그릇된 예배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첫번째 종류의 예배이고, 이제 두번째 종류의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2.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참된 예배자들의 모습
시편 24편 3-6절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자에 대하여 의미 깊은 정의(定義)를 내리고 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즉,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자들은 ”손이 깨끗한 자”(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 정결하게, 깨끗하게 된 자)와 ”마음이 청결한 자”(즉, 마음의 동기와 소원이 올바른 자), 또한 진실하게 하나님을 구하는 자이다.
참된 예배자들의 산출
- 구원의 목적은 참된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야말로 구원에 대한 모든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실제적인 열쇠이다. 그것은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참된 예배자들을 산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말로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참되고,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당신의 예배를 검토하는 것은 당신의 구원을 검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성구(聖句) 몇 개를 제시하겠다.
a. 요한복음 4장 23절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기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라는 부분을 주의해서 보라. 그 부분은 그리스도인, 즉 성도와 신자(信者)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성도, 신자(信者), 하나님의 자녀, 또한 무슨 말이든지 우리의 신분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묘사하는 말로 불리울수 있으면 또한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참된 예배자들)로도 불리울 수 있다.
또한 아버지께서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릴 자를 찾는다고 하시는 23절을 주의해서 보라. 당신은 아버지(성부)께서 아들(성자)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아는가?,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이유를 요한복음 4장 23하반절에서 볼 수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가 구속함을 받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다만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는 것만을 원하셨다면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속하기 시작하셨는데, 그것은 예배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실존(實存)과도 동일한 것이며 신자(信者)가 된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이다.
b. 사도행전 18장 7절, 13절 : ”거기서(아덴)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worshiped)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7절).
”하나님을 공경(예배 / 저자인 죤 맥아더는 이 번역을 취한다-역자 주)하는”이라는 부분은 신자(信者)에 대한 다른 식의 표현일 뿐이다. 신자(信者)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다. 13절에서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예배)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그의 선교 활동 중에 행한 일은 사람들에게 예배하라고 권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곧 구원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는 근본 의도는 사람들을 지옥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축복의 영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전도의 근본 의도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에 대한 모욕이며, 그분이 주인이신 세상에서의 반역적인 행위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전도의 핵심 정신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에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자기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가 마땅히 드려야 하는 만큼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불행한 그리스도인이다.
c. 사도행전 24장 14절 : 바울이 벨릭스에게 자기의 인생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道-기독교 신앙에 대한 다른 표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예배하고) ....”
바울은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전도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벨릭스 앞에서 증언의 일부로서 밝히고 있다.
- 복음서의 증거
복음서의 기록들은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는, 즉시 예배(경배)로써 응답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즉,존귀와 경의와 영광과 경외와 찬미와 찬양을 하나님되신 분께 돌리게 되는 것이다.
a. . 마태복음 2장 11절 :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worshiped).”
동방 박사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첫번째로 한 일은 엎드려 경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모습에 대한 최초의 응답이 되기 때문이다.
b. 마태복음 8장 1-2절 :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worshiped)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당신도 알 수 있듯이 이 문둥병자는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았기 때문에 절하면서 예수께 나아간 것이다.
c. 마태복음 9장 18절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worsbiped)”
d. 마태복음 14장 33절 : 제자들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셔서 바다를 잔잔케하신 것을 눈으로 본 후에, 33절은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worsdiped)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누가 언제 어디서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깨닫고 난 후의 즉각적이고도 자발적인 응답은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e. 마태복음 15장 25절 : ”여자(가나안 여인)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worshiped)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f. 마태복음 28장 8-9절 :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worshiped).”
g. 마태복음 28장 16-17절 :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worshiped)”
h. 요한복음 9장 31절 :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어떤 사람을 고치셨다. 바리새인들이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예수에 대하여 묻자, 그는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하나님을 예배하며 : a worshiper of God-흠정역)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
흥미롭게도 이 사람은 모든 세상 사람들을 두 가지의 부류로 대별하여 말하고 있다. 한 부류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사람은 죄인들이고, 들으시는 사람은 예배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사람은, 죄인들과 예배자들을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인”과 ”예배자”로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경우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택하여 불러 내셨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배드리게 하기 위하며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사실상, 성막과 성전과 제사장 등도 백성들로 하여금 삶의 중심을 예배에 맞추게 하기 위한 제도였다.
신명기 26장 5-11절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이제 막 들어가려 하는 이스라엘민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구약에서의 구속(救贖)이라 하면 그것은 출애굽 사건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5-9절은 이스라엘의 구속(救贖)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10-11절에서 그러한 구속(救贖)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 즉 예배를 드리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나온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예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이와 같이 예배(10절)는 구속(救贖)함을 받았다는 사실(5-9절)에서 나오며 그 결과는 기쁨, 즐거움(11절)인 것이다.
- 바울의 진술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말한다. 이것이 예배에 대한 진술이다. 또 바울이 예배에 대하여 진술한 이유가 계속해서 4-7절에 나온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당신이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예배는 구속(救贖)함을 받은 결과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우리는 일 주일에 한 번 또는 두세 번의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체 방향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영적 예배를 드리기 의해 부르심을 받았다.
참된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갖추어야 하는 자세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히브리서 12장 28절을 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즉, 영원한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지니.”
「섬길지니」에서 ”섬기다”(serve)라는 말은 헬라어 동사인 「라트류오」(latreuo)l로서, ”예배하다”(worship)로 번역되어야 한다. 히브리서10장 2절에서 「라트류오」의 명사형은 흠정역에서 ”예배드리는 자”(wor-shiper)로 번역되어 있다(개역 한글성경에는 ”섬기는 자”로 번역됨-역자 주). 그렇다면 28절의 의미는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고 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되었은즉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를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응답하자”가 되는 것이다.
바울의 표현식으로 말하면, 아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마땅한) 예배니라”(롬 12:1)일 것이다.
히브리서 12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28절 하반절에서부터 29절을 주의해서 보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예배할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구원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를 드리고 예배의 충만한 삶을 살게되는 것은 영적인 예배의 행위로, 자기의 몸을 기꺼이 드리는, 즉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마음의 열매로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경건과 두려움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경건은 적극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존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두려움은 소극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29절의 ”소멸하시는 불”(심판하시고 징계하시고 벌하시는 분)로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
만일 우리가 구속하심을 입었다면 우리는 참된 예배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예배자들로서 하나님에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우리가 비록 참된 예배자가 되었지만, 우리 속에 있는 죄 때문에 마땅히 항상 드려야 하는 만큼의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그러나 항상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이 열납하지 않으시는 예배를 드린다면,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를 드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만일 당신의 생활에 어떤 곤란한 문제들이 생겨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먼저 검토해 보라. ”내가 참된 마음과 진실한 정신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감사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징계하고 계신 것이다.
참된 예배자들의 인격적 특성
우리가 일상의 생활에서 참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다른 신자(信者)들을 합당하게 대함
로마서 14장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하지 말고 또한 우리가 누리는 자유 때문에 연약한 자를 망하게 하지 말라고 한다. 또 18절에서 바울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란 다른 신자(信者)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
로마서 15장 16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을 한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그가 전도하여 얻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하나님께 드려진, 열납하시는 제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인 것이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거룩하고 기뻐하시는 예배로서 하나님께 드려질 수있다.
- 필요를 따라 물질을 바침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바울에게 보내 준 물질(돈)에 대해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일이 사랑의 행위로써 되어진 것이었기에 바울은 그들이 보낸 것에 대해 매우 기뻐하였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 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바울에게 보내 준 헌금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당신이 성도들과 교회의 일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지하기 위하여 재물을 드리는 것이다.
이상의 받으실 만한 예배의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우리는 믿는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드리고 있는가? 여러 가지 필요를 따라 우리의 물질을 바치고 있는가? 이런 일들은 모두 나누어 주는 것이다.
예배는 함께 나누는 것이다. 당신의 사랑을 나누고, 복음을 나누고, 당신의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당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고, 또 당신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하나님을 높이고 존귀와 영광을 그분께 돌리는 것이다. 나눈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 곧 성도들과 잃어버린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당신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
-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삶
에베소서 5장 8-10절에서 바울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말한다.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즉, 개인적인 경건)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삶이다.
- 의의 열매로 충만한 삶
빌립보서 1장 11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여기서 또 다시 의와 거룩과 착함과 경건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임을 알 수 있다.
- 경건하고 단정하게 삶
디모데전서 2장 3절에서 바울은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것”이란 2절 끝 부분의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건함과 단정함은 의로움, 선함, 진실함, 거룩함과 함께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특성이다.
지금까지 예배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임을 보여 주는 성구(聖句) 세 개와, 예배가 개인의 경건 생활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성구(聖句) 세 개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예배란 개인적인 의(義)로 표출되며, 더 나아가 형제를 사랑하고,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가진 재물을 필요에 따라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생활인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림
히브리서 13장 15절은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감사하는-흠정역 / 저자인 죤 맥아더는 이것을 취한다) 입술의 열매니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절정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모일 때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다.
이제 16절을 보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여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그분께 감사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에서는 예배가 선(善)을 행하며 서로 나눠주는 생활임을 망각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히브리서 13장 15-16절이야말로 예배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예배는 주일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드리는 것이다
당신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예배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곳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위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다른 곳에서는 예배드릴 마음이 생기지 않아 반드시 교회 건물에 나와야 하고, 또 예배 분위기를 돋구는 성가대의 찬양을 들어야만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당신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출퇴근 시간의 혼잡한 도로 위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당신의 마음이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 오는 그것이 예배드리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이것이 왜 히브리서 13장 15-16절이 우리에게 함께 모여서 ”그 이름을 증거하는(감사하는)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를 항상 드리라”고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눠 주기”를 또한 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주일날에 드리는 어떤 것도 예배가 될 수 없다. 예배는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참된 예배자들이 공예배에 모이는 목적
우리의 생활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하지만, 또한 우리는 일 주일에 한 번 드리는 공예배에도 참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일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로 하여금 나머지 여섯 날 동안에 예배를 드리는 생활이 되도록 격려해 주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0장에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22절, 25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24절은, 우리는 모여서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나가 나눠 주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공예배)를 드리려고 모여서 나눠 주는 의로운 삶을 살도록 격려를 받게 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먹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의인들의 모임인 성도들의 교제에 참여해야 한다. 거기서 우리가 사랑과 선행을 격려받기 때문이다. 그러한 격려가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러한 영향을 받고서 우리는 ”선을 행하고 나눠 주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다시 예배(공예배)를 드리러 모이게 되면, 항상 경건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찬양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러한 예배의 궤도(삶으로서의 예배)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 궤도 내로 들어와야 한다. 어떻게 진입할 수 있는가? 죄를 고백하고 지금 당장에 시작하라. 사람들은 흔히 ”나는 신앙 생활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고, 일관성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들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근본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갖고 있다. 두가지 문제란 그들이 일 주일의 엿새 동안을 예배하는 삶으로 살지 못하든가, 아니면 일 주일에 한 번 드리는 공예배를 드리지 않든가이다.
우리는 둘 다 필요하다. 당신에게 편리할 때만 교회에 나간다면 당신은 결코 일관성있게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공예배를 통해 사랑과 선행에 대하여 진실하고도 꾸준한 격려를 받아서 생활에까지 그 영향이 미칠 때에야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무사안일주의와 무관심하고 경박한 사회에 살고 있어서 꾸준하고도 진실한 격려를 받고 있지 않으면서도, 왜 우리의 행위에 일관성이 없는지를 이상하게 여긴다. 우리는 매일의 생활을 예배드리는 삶으로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모임에도 참석해야 한다.
예배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예배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운명이 예배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배의 세번째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영원 세계와 구속사가 예배로 설명된다
예배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배가 영원 세계와 구속사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1. 창조 이전의 역사
영원 전, 만물과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었는가? 그것은 성 삼위(聖三位) 하나님과 천사들이었다. 천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느헤미야 9장 6절은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예배)하나이다”라고 한다. 영원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 즉 예배이다(욥 38:4-7 참조).
2. 타락 이전의 역사
그 후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 그들은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하와가 사단을 섬기기로(worship), 아담은 하와를 섬기기로(worship) 했을 때, 죄가 그런 아름다운 장소에 침투해 들어왔다. 그들이 하나님 섬기기를(worship) 그만두자 그들은 곧 타락하게 된 것이다(창 3:1-13).
3. 타락 이후의 역사
가인과 아벨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의 때에 이르러 사람들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방법이 나뉘게 되었다. 아벨은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를 드렸고(4:4), 가인은 하나님께서 열납치 않으시는 예배를 드렸다(4:5).
족장 시대
족장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예배를 드렸을 때는 축복을 받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열납치 않으시는 예배를 드렸을 때는 징계를 받았다.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 광야 생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인도되어 나왔지만, 시내 광야에서 한 세대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방랑 생활을 했다. 그 세대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던 것이다(민 14:22-23), 모세도 하나님께 합당하게 예배드리지 못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20:7-12).
- 약속의 땅에서의 생활
드디어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예배를 드릴 때 축복을 받게 되었다(느 9:3/ 대상 23:20-25). 그러나, 그들이 바르게 예배드리지 못했을 때(행 7:42-43)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셔서 산지사방으로 흩으셨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그분은 예루살렘의 예배 처소로 올라가사 채찍으로 그 성전을 깨끗케 하셨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께서 그 부패한 예배자들을 그렇게 채찍으로 다루신 후,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참된 예배자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문제는 바로 예배인 것이다. 예배가 바로 구속사의 주제인 것이다.
4. 현재의 역사
오순절 사건 이후 교회가 생겨났는데, 교회란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빌립보서 3장 3절이 성경에서 예배에 대하여 가장 잘 언급된 부분인데, 여기서 예배의 정의(定義)는 교회의 정의(定義)와도 통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예배 -흠정역 / 저자의 입장)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독특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지는데, 교회란 육체적인 할례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육체에 신뢰를 두지 않고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5. 미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심으로써 역사가 그 절정에 이르게 될 때, 예배도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예배는 천국과 영원 세계의 주제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4장 10-11절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예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요한계시록 5장 14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예배)하더라.”
요한계시록 11장 15-17절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예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요한계시록 14장 6-7절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예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5장 4절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예배)하리이다.”
요한계시록 19장 4절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예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요한계시록 19장 10절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가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예배)하라.”
요한계시록 22장 8-9절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예배)하려고 엎드렸으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예배)하라 하더라.”
참되시고, 살아 계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영원세계와 구속사의 주제인 것이다.
성경도 우리를 불러 예배하게 하며, 우리의 운명때문에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고, 지옥에 떨어진 경우에나 예배가 필요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가 중요한 것이며 네번째로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예배드릴 것을 명하셨다
마태복음 4장 10절에서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예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사단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만물(萬物)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당신은 삶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당신은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당신이 주일날 교회에 나가서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가 지루하고 힘들다면, 성가대가 찬양을 잘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분위기가 나빠서도 아니며 당신의 정신이 흐트러져서도 아니다. 당신이 예배를 드리려고 해도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일 주일의 나머지 엿새 동안에 당신이 예배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배는 일 주일에 한 번 드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삶 자체가 예배여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일 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리러 모일 때에, 교회에서 참된 찬양과 마음의 예배가 터져 나와야 한다. 개인적으로 일 주일간 즐겁게 드려지는 예배의 삶이 있을 때, 그러한 개인의 예배는 기쁨으로 모인 사람들의 회중 속에서 더 풍부해지고 고양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배는 더욱더 영광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3. 예배의 근거
구원의 목적은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속(救贖)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예배하는 자들로 삼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4장 15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예배로 귀결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을 요한복음 4장 23절과 연결시켜 보면,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참된 예배자들(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시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근거 또는 기초는 구원이다.
이런 사실을 입증해 주는 성구(聖句)들을 살펴보자.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응답 / 시편 22편 22-27절
시편 22편 1-21절은 분명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에 대한 예언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많은 사실들이 십자가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1절(마 27:46), 6-8절과 12-13절(마 27:22-25, 39-44), 15절(요 19:28), 16상반절과 17하반절(눅 23:35), 18절(요 19:23-24)등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러한 고난을 당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그런 일들을 당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22절에서 시작된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22-24절).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은 찬양이다.
25절은 계속하여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같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즉,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영생을 의미함)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25-27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편 22편은 구속(救贖)의 목적이 예배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예배의 근거 또는 기초는 구원이라는 진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실증된다.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는 이유 / 출애굽기 20장 22-26절
출애굽기 19장 7-8절을 살펴보자.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이 구절이 역사상에서 가장 자원하는 순종의 마음을 보여 주는 훌륭한 예(例)인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잠시도 믿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결코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그들 자신의 의로움을 근거로 해서 그분께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20장 1-17절에서 십계명을 주시고는 22-26절에서는 은혜의 규정을 마련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너는 층계로 내 단을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라.”
"본문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도 그들이 근본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갈수도, 나갈 권리도 없음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근거(기초)로서 제단과 그 위에 드려져야 하는 번제를 언급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번제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이 사실일진대, 그리스도의 본원적(本源的)인 희생 제사가 하나님과의 본원적(本源的)인 교제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실 수 있게된 근거인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고, 죄 문제가 해결되어,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며, 우리는 성부(聖父)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으로 말미암은 계시 / 이사야서 66장 22-23절
이사야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구속사 전체를 개요하고 있다. 이사야서의 전반부(1-장)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그 다음 부분에서는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66장 22-23절에서는 천년 왕국을 지나 영원한 나라까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예배)하리라.”
52장과 53장에서 이사야는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메시야의 고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런 다음 66장에서 그 이유를 말하는데, 그 이유는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진실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영원한 예배자들의 세대를 일으키시기 위함이다.
회심한 죄인들의 반응 / 고린도전서 14장 23-25절
고린도전서 14장 23-25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즉,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당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의 마음 문을 열고 싶다면 방언을 말하지 말라. 그를 견책하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라. 일단 그가 판단을받고 마음에 심판을 받아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는 거기에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예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25절). 나는 이 구절에서 바울이 그 사람이 회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예배이다. 따라서 구원이 예배의 근거이며 기초인 것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단순히 기독교화된 유대교 의식인가?
만약 예수께서 오늘날의 기독교의 모습을 보신다면 현재 행해지는 ”기독교의 예배”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실지 궁금하다. 「예배」(Worship)라는 책의 저자인 깁스(A. P. Gibb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의 소위 공예배의 대부분은 기독교화된 유대교의 한 변형일 뿐이며, 어떤 경우에는 경박하게 가장한 이방 종교의 한 형태이다 ... 유대교에는 구별된 제사장 계급이 있어서 그들만이 이스라엘의 예배를 집례할 수 있다. 기독교에는 예배를 드리는 데 성직자라고 불리우는 인간이 세운 제사장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이 제사장이라고 하는 신약의 분명한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유대교의 그러한 제사장들은 독특한 의복을 입었으며, 그들은 오늘날의 성직자들처럼 이 세상의 현세의 성전이나 건물을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오늘날의 기독교는 구별된 「예배 처소」를 강조하여 그 건물을 ... 「하나님의 집」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제단이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화려한 건물 내에 제단을 세워 놓고, 그 앞에서 촛불을 켜놓고 분향하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여기는 성체(聖體) 빵을 진열해 놓고 있다 ! 이런 변형된 유대교는 모든 사실들이 신약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위배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기독교에서는 특별히 교육을 받고 임명받은 기독교의 사제들을 세워서 「성례를 집행하려면」 반드시 이런 성직자들이 있어야 한다. 이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성소」라는 일반 출입이 제한된 단에서 피 없는 제단 앞에서 촛불과 십자가와 향 연기가 나는 향로를 들고 일반 성도들을 위하여 「예배를 드린다」.
정성드려 잘 준비된 의식과 판에 박힌 기도와 청중들의 화답 등으로 예배는 일사천리로 기계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예배는 의심할 바 없이 심미학(審美學)에 호소하는, 인간이 마음대로 고안한 천재적인 수법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아버지(성부)께서 구속하심을 입은 자기 자녀들에게서 찾으시는 예배라고 천명하신 영적인 예배를 비극적이고도 유감스러운 모습으로 대체시켜 놓은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이러한 모습을 예수께서 오셔서 보신다면, 조잡하고 초라하며 우아하지도 못하고 천박하고 그저 그런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뿐만 아니라 주님 당시의 유대교의 예배와 비슷한 모든 의식적인 예배를 정죄하시리라 믿는다. 예수께서는 이런 형태의 예배를 정죄하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요 4:23) 사람들의 참된 예배만을 받으실 것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중심 본문인 요한복음 4장의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요한복음 4장 3절에서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고 한다. 그러나 4절은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셔야 했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어떤 여인을 만나야 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을 참된 예배자로 삼으려고 하셨기에, 예수를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정상적인 노정을 벗어나게 하여 사마리아를 거쳐 가도록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다음엔 갈릴리로 가셔서 한 유대인을 만나셨다.
하나님께서 주선하셔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만나는 기사(記事)는 5절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아니함이러라(문자적으로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같은 그릇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5-15절).
이 여인의 이러한 대답이 예수께서 여기서 비유를 사용하셨듯이, 비유를 써서 답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깊은 뜻을 모르고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문자적으로 물을 달라고 답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여인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물질적인 물 이상의 어떤 것임을 알고 있는 것같다. 도대체 어떤 물이 영생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계속하여 16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생수를 줄 수 없게 만드는 바로 그 문제의 핵심을 찌르셨다. 어떻게 예수께서 이 문제를 꺼내셨는가를 보라.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6-18절).
그녀가 무엇을 보고 예수께서 선지자이신 줄 알게 되었는가?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그 여인은 예수께서 초자연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15절에서 예수께 대답하는 것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물질적인 물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듯하지만, 나는 그녀가 예수께서 영적인 것들을 말씀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로는 알고 있었기에 예수를 선지자로 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2) 예수께서 문제의 바로 정곡을 찌르시고 그녀의 죄를 들춰 내셨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하나님만이 드러내실 수 있는 은밀한 일을 알고 계시므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에게서 영적인 실체들을 말씀하시며, 죄를 다루시고,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일들을 통찰하시는 분을 보았던 것이다.
그 여인이 자기와 말씀하고 있는 분이 분명히 선지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20절은 그녀의 그러한 삶에 대한 첫번째 반응이다.
”이제 깨닫고 보니 내 인생을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이제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 그러나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심 산으로 올라가라고 말하고 당신들의 말은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서 예배하라고 합니다. 제가 어디로 가서 예배를 드려야겠습니까?”
따라서, 21-24절에서 예수께서 ”여자여, 잠시 내 말을 들으라 이 산으로 올라오거나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것 없다. 예배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네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 놀라운 요한복음 4장 20-24절의 참된 예배에 대한 배경이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아마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은 자책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양심은 찔림을 받았고 영혼도 찔림을 받아 깨우침을 받았으며, 따라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몰랐다. 당시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예배는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드려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모르는 것은 어디로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 놀라운 방안을 제시하심으로 대답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4장 20-24절을 살펴보면서 예배의 대상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4. 예배의 대상
나는 오늘날 교회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예배를 거의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참된 예배에 중심을 두고 있지 않다. 지난 시대의 토저(A. W. Tower)는 ”복음주의 교회에 있어서 예배는 잃어버린 보석과 같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토저 당시에 그러했다면 우리의 시대에서는 더욱더 악화된 상황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대상은 누구인가? 예수께서는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21 하반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23 하반절), 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24 상반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바로 아버지(성부)이다. 또한 24 상반절은 그분이 누구신가를 말해 주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한다. 이 구절은 예배의 대상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성부)이시며 또한 영(Spirit)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래적 속성인 영으로서의 하나님과 또한 하나님의 본질적인 관계를 말해 주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 두 가진 요소가 참된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아주 기본적이다. 이제 이러한 요소들을 하나씩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영으로서의 하나님(하나님의 본성)
1. 하나님의 영성(靈性)
요한복음 4장 23상반절 (”하나님은 영이시니”)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프뉴마 호 데오스」(pneuma ho theos/ Spirit, the God)로 표현하고 있다. 영(Spirit)과 하나님은 동등시되고, 일체가 되신다. 하나님은 그 영광스러운 영(성령)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 바꿀 수 없다
나는 이사야 40장 18-26절의 예(例)가 영이신 하나님의 본성(本性)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18절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本性)을 잘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게 된다면, 그 형상은 어떤 모양을 하게 될 것인가”라는 뜻이다.
19-24절은 다음과 같다.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같도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권세있는 사람도 하나님과 비교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25-26절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이 구절의 요점은 이것이다. 당신의 마음의 눈이나 또는 신학적인 용어나 성경의 용어로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할 때에도 그분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한정될 수 없다
예레미야 23장 23-2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지역에 한정되는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지역이나 시간에 한정될 수 없다. 예배에 있어서 이 사실이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시간에만 그 곳에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예배 처소로 나갈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언제 어디에나 계신다.
-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요한복음 4장 20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어디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혼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21절에서 그녀에게 대답해 주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에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1절의 진리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예수께서는 ”여자여, 너는 이제 곧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 될 것이다. 이 교제로 말미암아 너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가 아니라, 바로 너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일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가 오나니 어쨌든 그 산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예루살렘이 중요하지 않다)”라고 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내가 이제 곧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구속(救贖) 사역을 이루려고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옳든지 그릇되든지 간에 옛 언약에 관계된 것들은 모두 폐하여 질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말씀 후에 23 상반절에서 예수께서는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예수께서는 ”내가 지금 전환점에 서 있는데 한 손에는 옛 언약을, 다른 한 손에는 새 언약을 붙들고 있다. 이 땅에 옛 언약이 지나가고 새 언약이 임할 때가 오나니 벌써 임했다(주님께서 벌써 임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예배를 드릴 특별한 처소도, 예루살렘도 필요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하여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A. D. 70년에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리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으로서의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져야 하며, 또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나 계시는 분으로서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 그 어떤 장소에 한정되어 질 수는 없다.
”새롭고 산 길”(히 10:20)이란 무엇인가?
나는 예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의 여인과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서 유대의 모든 예배 의식 제도, 즉 옛 언약이 끝날 것을 예언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21, 23절).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일어난 놀라운 사건에서 극적으로 입증되는데, 그 사건이란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찢어져서 지성소가 드러나게 된 사건이다(마 27:51). 이 사건은 모든 의식 제도가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로 돌아가심으로 유대의 제사 제도가 끝났고, 새로운 예배가 우리에게 제시되었다고 가르친다. 10장 4절에서는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희생 제사를 드리는 모든 제사 제도로는 죄를 없이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11-12절에는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한다. 주님이 앉으셨다는 말은 그분의 사역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14-22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희생 제사 제도가 종결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죽은 동물로 말미암은 옛 길, 즉 의식적 희생 제사의 옛 길이 아니라)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으로 우리가 예배하는 자들이 되어진 것이다. 제사 제도의 옛 길은 지나갔고, 그리스도께서 새롭고 산 길이 되어 주신다.
이와 같이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이지,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 같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한정되어 있는 대상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다.
- 성막과 성전
어쩌면 당신은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이 있었는데, 어떻게 영으로서의 하나님께 어디서나 예배가 드려져야 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성전은 백성들로 하여금 생활 자체가 예배라는 사실을 자극해 주기 위한 하나님의 거주하심에 대한 상징일 뿐이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성전의 전체적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성전은 상징이지 실체는 아니었다. 당신은 또 ”하나님의 임재의 「쉐키나」(Shekinah) 영광이 지성소의 언약궤 위, 곧 시은좌 꼭대기에 있는 그룹의 날개 사이에 거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성막이나 성전에만 한정적으로 거주하시고, 다른 곳에는 계시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다. 「쉐키나」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일 뿐이다. 잘 알지 못했던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이 성전에만 계신다고 말했을 뿐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어떤 장소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여러 번 하나님께서는 족장들을 특별한 장소에서 만나주셨고, 족장들은 만난 장소에서 제단을 쌓곤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이유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시간에 계셨다는 것이 동시에 다른 곳에는 그분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막과 성전은 그들의 생활이 예배의 삶이 되도록 자극해 줄 뿐이었다.
이와 같이, 문제는 어디서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가 아니다. 또한 언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하는 것도 아니다(골 2:16-17 / 갈 4:9-10).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인 방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성전과 성막과 성소와 지성소는 모두 상징이었다. 사실 모든 제사제도는 상징적인 것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상징들 속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한 상징들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발판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상징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체를 이해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에 대한 성경의 실례(實例)들을 들어 보겠다.
a. 사도행전 7장 46-50절 : 7장에서 스데반은 위대한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다. 46절에서 그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솔로몬이 하나님께 화려한 성전을 지어 드렸다는 사실이 우리가 집을 갖게 되면 그 집 안에 한정되듯이 하나님께서 그 성전 안에 한정하여 거주하시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48-50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다만 무지한 유대인들만이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계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총명한 유대인은 성전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한 상징적 수단으로 그들 중에 있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일찍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명기 6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부여받았다. 즉,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4절)라는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그들의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항상 그것을 일러 주라고 말씀하셨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7절).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영원히 살아계신, 한 분이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어야 했다. 성전은 다만 그것을 깨우쳐 주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제사 제도도 그들의 마음을 자각하여 그들의 마음을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 주는 수단일 뿐이다. 이러한 상징적인 것들은 그들에게 하나님께 예배의 삶을 살아드리게끔 하는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다만 수단이었을 뿐이다.
b. 사도행전 17장 24-25절 : 바울은 아덴의 철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시간과 공간과 무한한 영원 세계에 걸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무엇에 한정되거나 제한을 받을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한다.
이방 종교들은 하나님이 한정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수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산의 신”(왕상 20:23)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렇게 불렀다는 사실은 그들 자신의 우상 숭배적인 입장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神)들은 골짜기의 신(神)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神)들을 위하여 골짜기에 관목 숲을 조성해 놓고는 그 신(神)들이 그 숲에만 한정되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장소에만 한정되었다고 하는 이방 종교의 입장이 하나님이 그리심 산에만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마리아인들의 혼동된 예배관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영이시므로 그분의 영적으로 충만한 임재 가운데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외적인 상징과 내적인 실체
예레미야서 7장 21-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하라고 하셨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21-22절).
다시 말하면, ”그런 제사들을 집어치워라.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실체의 상징일 뿐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23절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되어진다.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제사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들은 다만 상징일 뿐이며, 하나님의 인재하심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일깨워 주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옛 언약의 것들이었다. 새 언약은 의식적(儀式的)인 상징들과 성전의 상징을 폐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성령)이 내주(內住)하시는 신자(信者)들이 새 성전이 되었으며, 또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성령)이 참되게 예배하도록 자극해 주기때문이다. 이상 더 외적인 상징에 의하여 자극을 받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이제 예배는 내적 실체로 드리게 된 것이다.
새 언약의 백성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성령)을 모시고 있으며, 또한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산(living) 성전을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이 성막의 주위에 진을 치고 살았을 때에 예배를 드리도록 일깨워 주는 외적인 수단들이 이제는 모든 성도들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내적인 역사로 대치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산 영(living Spirit)으로서 어느 곳에서나 언제든지 모든 사람들에게서 예배를 받으실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이 예배를 드리는 삶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말로 옳게 말한 것이다. 예배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선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Spirit)으로 봉사(예배 - 흠정역, 저자의 입장)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고 말한다.
이제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그분의 본성(本性)에 대하여 정의(定義)를 내려야 한다.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성경에 제시된 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본성(本性)을 가장 잘 요약한, 그분의 속성이 거룩성이라고 생각한다.
2. 하나님의 거룩성
실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우리는 거룩하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그분의 비류(比類) 없으심” 또는 ”인간들과는 구별되심”으로 정의(定義)를 내릴 수 있다. 그분은 흠이 없으시며, 실수하지 않으시며, 전적으로 의로운 분이시며,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다.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악의(惡意)로 하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을 거룩하신분으로 여기지 않는 예배들을 많이 드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배들은 아주 빗나간 예배이다.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부르고, 아름다운 감흥과 생각을 많이 표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뜻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위 이런 아름다운 것들은 감정을 돋구는 정서적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거룩하게 예배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깨닫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생기게 된다.
거룩한 두려움의 반응
- 시편 96편 2-9절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며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2-8절).
이러한 모든 예배와 찬양의 말 뒤에 9절에서 중요한 선언이 나온다. 이것이 예배를 드리는 태도이며 예배의 모습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두려워함이 없이는 그분의 거룩성을 결코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심을 깨닫게 되면, 그 다음에는 당신이 가장 거룩하지 못하고 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거룩하지 못한 피조물에 대하여 공의의 행동을 취하실 권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심과 자신의 추함을 발견하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이 예배의 올바른 정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의 지극히 추한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거룩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에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이 구약적인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다음의 성구(聖句)들을 살펴보라.
- 히브리서 12장 28-29절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예배할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 이사야 6장 1-8절
이사야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성전에 올라갔다. 웃시야 왕은 왕위(王位)에 오른지 52년만에 죽었고, 북 이스라엘 왕국은 백성들의 죄때문에 포로로 잡혀 갈 즈음이었다. 이사야는 그의 백성의 몰락을 보면서 백성들의 문제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예배를 드리러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간 것이다.
1절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높이 들려 위엄있게 앉아 계시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좌하기 위해 스랍들이 모셔 서 있는 환상을 보았다. 스랍들은 여섯 날개 중에서 두 날개만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고, 나머지 네 날개로는 예배를 드리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2절). 3절에서 스랍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서로 화답하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친다.
이사야가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이같은 거룩하심을 목격했는데,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는 그분 앞에 서지 못한다. 따라서 5절에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
그는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거기에 압도되어 버렸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자신의 죄뿐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는 입술이 깨끗했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비교해 볼 때 자기에게서 어떠한 선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왜 이러한 엄격한 비교를 하게 되었는가?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우리는 이러한 환상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서서 실제로 하나님을 뵙게 되어 그분의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모습을 대하게 된다면, 위의 교훈이 참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우리가 지극히 추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당신이 상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예배를 드려 본 일이 없다면, 이제까지 실제로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갈 때에는 상하고 회개하는 심령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정당한 응답인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이렇게 두려움을 일으키므로 이사야도 두려워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추한 죄인들에 대하여 응징하실 모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시고는 그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가면서 아주 경솔한 일들을 자행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 우리의 사고(思考)에 있어서 하나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수준 정도로, 또는 막역한 사이로 여겨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분이시라는 사실과 그분이 죄에 대해서는 아주 극심한 의분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와 고백과 성령의 정결케 하심을 받지 못한 생활 그대로를 가지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간다면 그분의 거룩하신 응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로 말미암아 매 순간마다 호흡을 하며 살아 가고 있다. 그분에게는 우리의 생명을 취하실 모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참된 예배자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 - 겸비하고, 상한 심령 - 을 보였다. 이사야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가 회개와 고백을 하고 있을 때, 한 천사가 제단의 숯불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죄를 깨끗케 해 주었다(6-7절).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장소로 이사야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셨다(8절).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과 참된 예배자 사이에는 죄를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교제와 친교와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의 정신이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뵈옵고, 또 자기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 참된 예배의 정신인 것이다.
- 디모데후서 2장 22절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 되는 것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가 유익한 삶을 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면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2:21)고 말한 다음, 22절에서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권한다.
이 마지막 구절이 참된 예배에 대하여 놀라운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는데, 즉 「예배」란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름”을 뜻한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계획이나 생각에 의해서 정결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때 겪게 되는 고백과 회개로 말미암아 정결케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접하게 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든지 하나님과 만나게 되면 두려워하며 떨었다.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떨면서 자기들의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설 때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례(事例)들을 살펴보자.
- 아브라함 / 창세기 18장 27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설 때 자기는 겨우 ”티끌”과 같을 뿐임을 고백했다.
- 욥 / 의인인 욥이 엄청난 고난의 길을 통과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주의 주권자이시며 거룩하신 여호와이심을 깨닫고는 ”그러므로 내가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말했다.
- 마노아 /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使者)를 목격하고는 자기의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라고 말했다.
- 하박국 / 하박국이 여호와의 음성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
-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 / 학개가 회복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고했을 때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였다”(학 1:12)
- 에스라 / 에스라서 9장에서 에스라는 참된 예배의 정신인 상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6절)라고 말한 다음에, ”주에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15절)라고 고백하였다.
참된 예배자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간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자기의 생명을 취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말미암아 구속(救贖)함을 입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우리의 죄를 징벌할 권리를 갖고 계신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고 말한다.
신약에서도 사람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고는 그들 역시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 제자들 / 마가복음 4장 41절에서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것을 본 후에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배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이 배 밖의 폭풍보다 더 두려웠었다는 것으로 발견된다. 왜냐하면 거기서 행해진 능력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 거라사 사람들 / 예수께서 어떤 사람에게서 군대 귀신을 돼지 떼에게로 쫓아내시자 돼지 떼들은 호수로 치달아 몰사했다. 이 때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달려나와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서) 떠나 가시기를 구했다(눅 8:37).
- 베드로 /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베드로에게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억지로였기는 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했다. 그 결과 고기가 아주 많아 잡혀서 그물이 찢어지자, 8절에서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다. 베드로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실체를 접했을 때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의 죄성(罪性)뿐이었다.
- 바리새인들 / 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예수를 아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과 행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예수의 능력을 보고 지혜를 들었을 때는 크게 당황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셨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즉각적으로 그들 마음의 죄악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참된 예배의 삶은 죄를 발견하고 항상 그것을 고백하는 상한 심령의 뉘우치는 삶이다. 일 주일간 내내 죄짓는 생활을 하다가 주일날 하루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계시기에 마땅히 그분께 영적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면 마땅히 우리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예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부정함을 징계하실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의 반응을 보이게 된다. 두려운 반응과 더불어 감사의 반응이 생기므로 여기서 적절한 균형이 유지된다.
감사의 반응
아마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감사의 삶을 살도록 해 주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징벌을 시행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우리가 행한 죄대로 갚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긍휼하심마저도 우리에게 문제를 야기시켰다(우리 측 잘못 때문에). 로마서 2장 4절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셨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고도 벌받음이 없이 넘어가는 데에 아주 익숙해져서 계속하여 죄를 짓고만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용서하심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을 남용하고 있다.
- 연장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하심대로 처결하고자 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죽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거역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2:17).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만 금하셨는데, 만일 그들이 그것을 어기면 그들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역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그들을 살려 주셨다.
처음에는 어떤 죄라도 범한다면 그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모세의 언약 시대에는 35가지 죄들만이 사형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죄를 범한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다. 예(例)를 들면, 다윗도 이전 같으면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사 다윗을 용서해 주셨다. 물론 죄에 대한 후속 조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죽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예(例)는 간음죄이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결혼 생활 중에 간음을 행하면 그 벌은 사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목숨을 살려두는 대신 이혼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비하심을 보이셨지만, 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개의치 않으신다는 뜻은 아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다는 사실이 우리가 생활 중에 범죄하고서도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갈 수 있다거나, 또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남용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 중의 죄에 대해 의분으로 처결하실 날이 이를지도 오른다. 그렇게 하려고 하신다면 그분에게는 그렇게 하실 권한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긍휼하심에 너무 젖어 있어서 그분이 죄에 대해 공의롭게 처결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불공평하게 행하신다고 여길 정도까지 되어 버렸다.
- 예증(例證)된 하나님의 공의
어떤 사람이 젊은 나이에 죽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일을 허락하신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세상 살아갈 때에 문제가 생기고 생활이 어려워져도 역시 그러한 말들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들을 허락하셨는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죄인인데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닥치는 것을 허락치 않으셨는가”이다. 우리는 문제를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대머리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곰을 두 마리씩이나 보내 그 아이들 42명을 모두 찢어 죽이도록 하신다는 말인가?(왕하 2:23-24) 또 나답과 아비후가 술이 좀 취해서 성전의 향로를 들고 어리석은 짓을 하며 돌아다녔다고 해서 임직식 바로 그 날에 그들을 죽이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레 10:1-2),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수레에서 떨어지려 하는 언약궤를 붙들려고 손을 좀 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이신다는 말인가?(삼하 6:6-7),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약간 교만했다고 52년간 충직했던 왕에게 문둥병을 내리신다는 말인가?(왕하 15:1-5),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벌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냥 넘기시는가?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셨는가?(행 5:1-10),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이 드리겠다고 말한 전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것 때문에 그들은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죽었는가가 아니라, 당신 역시 하나님께 무엇을 약속하고도 드리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있는가가 문제이다. 또 어떤 사람이 간음하였는데 왜 그 사람만 죽어야 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째서 간음을 행한 모든 사람들이 죽지 않는가가 문제이다. 즉,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다는 것이 문제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실 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일깨워 주고, 또 죄에 대한 심판을 그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한 예증(例證)으로 행하시는 것이다(고전 10:5-12).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 전체를 살펴보고 하나님에서 거룩치 못한 것들에 대해 거룩한 방식(공의)을 행하신 경우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모든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불공평하실 수가 있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거룩성이 그처럼 침해를 당하셨는데도 어떻게 그러한 자비를 보이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죄된 생활 가운데 성찬에 참여했다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닌가?”(고전 11:27-32)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많이 범죄한 생활을 하면서 성찬에 참여했는데도 어떻게 우리는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대답은 오직 주님의 자비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롯의 아내를 소금 기둥으로 변하게 하셨는가?”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비슷한 세상적 습관을 행하고 육체의 일을 그렇게도 간절히 추구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는 왜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리시지 않는가?”가 문제이다. 당신은 또 ”왜 하나님께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거역했다는 이유만으로 땅으로 입을 벌려 그들을 삼키게 하셨는가?”(민 16:23-33)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우리도 역시 거역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땅 속으로 삼켜 버리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성의 측면에서 사건들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때문에 거룩하심을 값싸게 넘겨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누가복음 13장 1-5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희생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들어갔던 어떤 갈릴리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빌라도의 군대가 성전에 들어와서 갈릴리 사람들을 다 죽이고 희생 제물의 피에다 그들이 죽인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섞어 버렸다.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고 대답하셨다.
이제는 분명히 드러났듯이, ”왜 이 갈릴리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가?” 또는 ”왜 망대가 무너져 열 여덟 사람이 깔려 죽었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실상 문제가 되는 것을 보여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도 똑바로 생활하지 않으면 너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임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 12장 28-29절에 모두 요약되어 있다. 이 구절은 ”우리가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예배할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우리는 고백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그분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한 응분의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이 불결한 채로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20세기의 기독교에 몸 담고 있는 우리는 예배의 핵심인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해서는 다소 망각하고 살아 왔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영원하시고 영화로우시며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영(Spirit)으로서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아갈 때,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에 비추어 보아, 뉘우침과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죄인의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아름다운 찬송의 가사를 많이 지은 페버(F. W. Faber)는 다음과 같은 찬송시를 썼다.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은 너무나 놀랍도소이다당신의 위엄은 얼마나 빛나는지요
타오르는 빛 가운데 있는 당신의 시은소는 너무나 아름답도소이다
영원하신 주님이여, 당신의 연수(年數)는 무궁하시나이다
주께 굴복하는 천사들이 종일 주를 찬송하나이다
당신의 모습은 너무나 놀랍고 아름다우시나이다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거룩함은 측량할 수 없나이다.
내가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나이다
간절한 소망과 회개의 눈물로 주께 예배하나이다
내가 또 주를 사랑하니 당신은 전능자심이니이다
주께서는 몸소 낮아지사 나같은 비천한 심령을 사랑하셨나이다
아비와 어미의 사랑보다 크고 자비로우시니
당신은 이 죄인을 용납하심이니이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하나님의 본질적 관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같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때 우리는 곧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아버지로 생각한다. 이 표현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광대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영원하신 영(spirit)으로서의 하나님께 예배할 뿐만 아니라, 절친하고 사랑하는 개인적인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은 옳지만, 요한복음 4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말씀하고 강조하시는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인 표현
하나님께서는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으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삼위(三位)로 계시나 한 분이시다(즉, 삼위일체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아버지로 표현된 하나님은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聖三位)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자세히 살펴보라. 여기서 하나님은 아들(성자)의 아버지(성부)로 제시되고 있다. 성자란 물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온 인류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가 아니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칭호(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떠나서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아버지”란 말을 사용하신 의미
신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 언급될 때마다 그 아버지는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마다, 십자가상에서 죄가 그분과 하나님 사이를 단절시켜 놓았을 때(마 27:46)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경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당신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을 때 무슨 뜻으로 그 말을 사용하셨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아들이 자기 아버지께 복종하듯이 예수께서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아버지에게서 아들이 나왔듯이 그러한 계보를 강조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예수께서 아들이 자기 아버지와 꼭 닮듯이 자신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아들(성자)이시고, 하나님은 아버지(성부)시라면, 그 두 분은 본질적으로 일체가 되는 분이신 것이다(또한 동등한 분이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표현의 핵심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성부)와 같으시며, 그 본성에 있어서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결코 받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실 때는 자신이 그 신성(神性)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몇 가지 성구(聖句)를 제시하겠다.
- 요한복음 5장 17-18절
예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는 이유로 핍박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성삼위(聖三位) 가운데 제 1위(位)이신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시면서 ”우리가 함께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8절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었는가를 보여 준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유대인들이 공격한 바는 옳았다. 바로 그것이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하셨던 내용이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로 부르실 때마다, 그분은 하나님과 자신이 그 본질과 본성에 있어서 동등하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 요한복음 10장 29-33절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 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기를 그 본질 - 신성(神性) - 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챘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 요한복음 17장 1-5절
예수께서 자신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성부(聖父)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누렸던 그 충만한 영화를 주실 것을 구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며,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에는 예수 자신의 신성(神性)을 말씀하시는 것이다(11, 21-25절 참조).
- 마태복음 11장 27절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 놀라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다시 아버지와 아들이 그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계신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 14장 6-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아버지와 아들(성부와 성자)은 일체이시다.
이제 요한복음 4장의 중심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여기서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 예수께서 염두에 두시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 자신의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확연하고도 직선적으로 예수 자신의 신성(神性), 즉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함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자세하게 언급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영원하시고 살아 계신 영으로서 무소부재하신, 그러나 그들 자신들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께서 성부(聖父) 하나님과 본질상 같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인식하지 않고는 영이신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은 이와 다른 말로 정의(定義)되어 예배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면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주장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는 말에 대한 사도들의 이해
신약의 모든 서신들에서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예배되어지고 동일시되고 있다.
- 에베소서 1장 3절
바울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훌륭한 말들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된다(3-14절은 한 문장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바울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었는지를 당신도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 에베소서 1장 17절
이것은 바울의 위대한 기도로,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한다.
- 고린도후서 1장 3절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고 말한다.
- 빌립보서 2장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로마서 15장 6절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하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인정하는 것이다.
- 베드로전서 1장 3절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
- 요한이서 3절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이런 모든 성구(聖句)의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하나님은 아무나 자기가 원하는 곳에다 자신이 원하는 어떤 형태로든지 끼워 넣으면 들어가는 것 같은, 그러한 떠돌아 다니는 영(spirit)은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광대하시고 영존하신 분으로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알고서, 그분께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 예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유리(遊離)되어서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당신의 교회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가, 아니면 사람에게 맞추는가?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1928년에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성직자 총회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간에 하나님께가 아니라 인간에게로 눈을 돌리는 종교로 전락해 가고 있다.”
이 얼마나 정당한 지적인가 !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아주 소비지향적이며 실용주의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 중심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요구, 문제, 계획, 방법, 노력, 주장, 저서, 교회, 조직 등에 관해서 이야기는 하지만, 그런 모든 이야기들을 하는 중에 우리는 흔히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2.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예배
성자(聖子)에 대한 예배
요한복음 5장 23절이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것에 대해 논리적인 결론을 내려 주고 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또는 「예배」)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우리는 아버지(성부)께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성자)에게도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 성삼위(聖三位)의 일체(一體)됨에 의해 설명됨
언젠가 어떤 사람이 내게 찾아와 ”나는 아버지 하나님 이외의 어떤 다른 분에게라도 기도하는 것이 신성(神性)을 모독하는 죄라고 배워 왔는데 그게 사실입니까?”라고 질문했다 나는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조금 알아 가지고 몇몇 구절들만을 예로 들면서 자기만이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자라고 사칭하는 것 같군요”라고 일러 주었다. 우리가 성자(聖子)께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성부(聖子)께도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아들의 이름으로가 아니면 성부(聖父) 하나님께로 나갈 수도 없다. 우리가 성부(聖父)께 기도한다면 또한 성자(聖子)께도 기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성부(聖父)와 성자(聖子)는 한 분이신 것이다. 우리가 성부(聖父)를 공경한다면 성자(聖子)도 역시 공경하는 것이 되며, 우리가 성부(聖父)께 간구를 드리면 또한 성자(聖子)께도 간구하는 것이 된다. 또 성부(聖父)께 찬양을 드리는 것은 곧 성자(聖子)께도 찬양을 드리는 것이 된다.
성부(聖父)와 성자(聖子)는 일체이시며, 두 위(位) 사이를 완전히 절연(絶緣) 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도외시한 예배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부(聖父)께 나가듯이 성자(聖子)께도 나가서 기도와 찬양을 드릴 모든 권리가 있다. 우리는 성자(聖子)께도 예배를 드리도록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다.
- 초대 교회에서 입증됨
교회가 생긴 바로 그 때부터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주님(Lord)으로 알고 있었다. 성도들은 세례(침례)를 받을 때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였으며(롬 6:3-4 / 갈 3:26-27), 그리스도인들은 집회시에도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께 기도를 드렸고(엡 3;10-12/ 딤후 1:2) 모든 무릎이 그분 앞에 꿇게 될 소망의 그 날에는 예수께서 주님으로 경배를 받으실 것이며(롬 14:8-12 / 빌 2:9-11) 도움이 필요할 때도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께 기도가 드려졌다(히 4:14-16 / 요일 5:4-15). 모든 예배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기준선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사실이다.
- 사도 도마의 고백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도마는 그분을 뵈온 후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도마는 예배에 대해 바른 관점을 가졌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성자)과 하나이시며 같은 분이심을 알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성부(聖父)와 성자는(聖子) 다같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모일 때 성부(聖父)와 성자(聖子)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는 어떠한가?
성령(聖靈)에 대한 예배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성령께 예배를 드리라고 지적하는 곳은 없다. 그러나, 모든 예배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드려지게 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롬 8:15 / 갈 4:6).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임재하심 가운데서 예배드리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성령께서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이 사실을 결코 부인해서는 안 된다.
나는 또 성령(聖靈)께서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동등하시므로 그분(성령)도 또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사실을덧붙이고 싶다. 성경은 성령께 예배하라고 명시적(明示的)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그분께도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 많은 성경 구절들에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성령)이라고 불리우고 있으며(마 3:16 / 12:28 / 롬 8:9, 14/ 15:19 / 고전 2:11, 14 / 3:16 / 6:11 / 7:40 / 12:3 / 고후 3:3 / 엡 4:30 / 요일 4:2), 또한 ”그리스도의 영”으로도 불리우고 있다(롬 8:9 / 벧전 1:11). 성령께서는 성부(聖父) 하나님과 성자(聖子), 하나님에게서 발출(發出)하시므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따라서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더불어 성령께 예배드리기를 주저하지 말자.
그러나, 성삼위(聖三位)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지만, 교회 시대는 성령의 독특한 사역기라는 면에서는 성령은 우리를 부르셔서 성자께 예배케 하고, 성자는 우리를 부르셔서 성부에 예배드리게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4장 20-24절에서는 누가 예배의 대상인가? 예배의 대상은 영이신 하나님이신데, 떠돌아다니는 불확실한 영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다. 누구의 아버지이신가? 온 인류의 아버지이신가? 아니다.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성부(聖父)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데로 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배에 대한 예언적 묘사
성자(聖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묘사하는 놀라운 장면이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서 펼쳐지고 있다. 사도 요한은 장래 일에 대한 환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계 13:8 / 요 1:29 참조)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것이 바로 예배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대환란의 기간동안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쓰시던, 이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특사들이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넘치는 찬양을 드리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경우에 합당하고,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聖靈) 안에서 성자(聖子)로 말미암아 성부(聖父)께 나아갈 모든 이유와 권리와 명령가지도 받은 것이며, 이것이 삼위일체되신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인 것이다. 독자들 개인 개인의 경우는 내가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영(성령)이 내 인생에서 역사하신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분은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셨으며,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능력도 주셨고, 이와 같은(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능력도 불어 넣어 주신다. 그래서 나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께 뿐만 아니라 성령(聖靈)께도 영광을 돌림으로 응답치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애매하게 하나님(상부)께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과 또 자기 나름으로는 ”예수께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성자(聖子)께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 대해 심한 우려를 하게 된다. 또 너무 성령께만 항상 초점을 맞추는 예배도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은 온전히 성삼위(聖三位)의 일체(一體)되심 안에서 예배를 받으신다. 즉, 찬송을 받으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예배를 받으신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배의 중요성과 예배의 근거(우리의 구속)와 예배의 대상(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네번째로 예배의 처소에 대해 살펴보자.
5. 예배의 처소
분명히 구약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과 성막과 어떤 특정한 지리적 장소에서만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요한복음 4장 20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근본적으로는 이 여인이 예수께 자기가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원하시는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21절에서 ”여자여 내 말을 들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대답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얼마 안 있어서 두 곳 다 없어지게 될 것이므로 두 곳 다 예배의 처소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 언약의 상징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가 이제는 더이상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에서 드려지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성막이나 성전 또는 의식(儀式)이나 제사 제도의 의미를 부인하시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상징이나 예표나 모형적인 모든 것들을 부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징들이 폐해지고,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성전이나 제사나 제사장들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가 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신자(信者) 개인 개인이 산 성전(living temple)과 산 제사장(living priest)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단회적(單回的)이고 완전하고 최종적이며 영원한 제사로 드려질 것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제사는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상징적인 것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다만 상징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성막이나 성전에 한정되어 계시거나, 또 우리가 그런 곳에 제한하여 둘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성막이나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도록 마음에 자극을 주는 수단으로서, 그것들은 상징들일 뿐이다. 그러나, 새 언약에 있어서 그 상징들은 실체로 대치됨으로써 외적(外的)인 것에서 내적(內的)인 것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근본적으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의 처소로 알려진 모든 장소들이 이제 얼마 안 있어서 폐하여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당신도 아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운명하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나뉘어져 누구든지 지성소로 곧장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A. 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사마리아 성전은 B. C. 125년에 이미 파괴되었다. 따라서, 모든 상징적인 제도들은 그 마지막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이제 성전도 없고 눈에 보이는 상징적인 건물도 없으니 하나님을 어디서 예배해야 되느냐고 질문할 것이다.
새 언약의 실체
1. 성전인 성도 개개인의 몸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성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께서 거하시는 산(living) 성전이다. 당신이 ”내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까?”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은 말이다. 당신은 해변이나, 산이나, 시골이나, 당신의 거실에서, 또는 당신이 운전할 때나, 나무 그늘에서 쉴 때나, 혹은 숲속을 거닐 때나, 현관에 앉아서 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때나, 아침에 아름다운 꽃들의 향기를 맡을 때에도 하나님께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어디로 가서 어느 환경에 처해 있든지 간에, 당신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생기게 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옳은 말이다. 당신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교회당에 나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차원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2. 성전인 성도들의 회집(會集)
오늘날에도 독특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과 만나시는 장소인 예배처소로서의 성전이 있다. 이제 이 특별한 건물에 대해서 살펴되자.
에베소서 2장 19-22절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아주 생생한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인다. 또 그들을 분리된, 개인적인 성전(성도 개개인이 성전이라는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집합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번째로, 바울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동일한 시민”(동료시민 : fellow citizens)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fellow citizens)이요”(19 상반절).
그런 다음,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권속”(19 하반절)이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한 가족인 것이다. 다만 우리가 동일한 시민으로서, 또는 보통의 가족처럼 혈연적으로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20-22절은 우리가 ”한 건물로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즉, 우리가 연결되어 한 건물을 이룬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하나님께는 특별한 건물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가시적(可視的)인, 구속받은 성도들의 산(living) 회집(모임)인 것이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는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개개인이 성전일 뿐만 아니라, 집합적(성도들의 모임)으로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의 거대한 성전인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5절
베드로는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말한다. 우리는 ”산 돌”(living stones)이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모임에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예배 처소를 이루게 되는데, 그분은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을 나타낼 수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6장 16절
바울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모일 때에 우리 중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 9, 16-17절
9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말한 다음에, 16-17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우리가 왜 모여야 하는가? 놀랍고도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가 산(living)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돌로 지어진 성전이아니라 살아 있는 몸으로 지어진 성전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혼자 은밀하게 하나님께 예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입은 백성들이 회집(會集)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히 10:24)해야 한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집합적인 회집(會集)이 필요하다. 이로 말미암아 산 돌이 하나 하나 쌓여져 하나님의 거처를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실제로는 지리(장소)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예배를 위한 특별한 건물이나 장소가 필요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구속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모여야 한다. 우리에겐 특별한 제사장이나 제사가 필요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살아있는 제사장들이며,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가 드려졌으므로 우리는 중보자 없이 우리 스스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산 성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주간의 첫날에 예배를 드릴 것을 제정하셨을 때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예배에 충실케 하기 위함에서였다.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충실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일에 드리는 공예배인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또 성도들의 회집(會集)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히 10:25)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당신이 하나님의 구속(救贖)하심을 입은 백성들 중에서 받는 격려와 증거와, 당신이 혼자 있을 때는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성령)이 이루시는 독특하고도 기이한 역사들이 바로 당신이 응답해야 될 내용들인 것이다. 당신은 매 주일마다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입은 백성들이 함께 모이는 예배 처소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을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 밖에 두는 것이 된다.
당신의 불은 꺼져가고 있지 않은가?
어느 목회자가 교회에 살 나오지 않는 사람을 심방했다. 심방을 간 날이 마침 추운 겨울 날이어서 두 사람은 벽난로 가에 앉아서 불을 쬐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교회 출석이 불규칙한 그 사람에게 목회자는 ”지난 주일에 형제님을 뵐 수가 없더군요. 시간이 나고 마음이 내킬 때만 교회에 나오시는 것 같은데, 정말 교회 출석이 뜸하시더군요. 형제님이 매주 교회에 나오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 사람이 자기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목회자는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라고 말하고는, 벽난로 옆에 있는 집게를 집어서 난로 안의 모든 화목들을 따로 따로 완전히 흩어 놓아 화목들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도록 했다. 잠시 후에 불꽃이 일고 있던 화목들의 불길이 모두 사라지고 불이 꺼져갔다.
”형제님, 지금 바로 이와 같은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교회의 모임에서) 떨어져 나가면 당신의 불도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집(모임)에 함께 참여하여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예배를 드린다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하다. 나는 내 생애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특별한 시간(주일날의 공예배)을 갖는 것을 한 번도 건너뛴 적이 없다. 당신도 그래야 한다. 공예배에 성실히 참석하라.
6. 예배의 특성
기독교의 예배는 예배자가 자신의 소견에 좋을 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이방 신(神)에 대한 예배는 예배자의 필요에 따라, 예배자의 마음에 흡족함을 주면 그것이 바로 예배의 정형(定型)이 된다. 이렇게 예배의 표준이 대부분 예배자들 개인의 심정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말씀의 원칙을 따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자신이 받으시는 예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이런 특성에 준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의 편중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란 ”영(마음)과 진리로”라는 말이다.
1. 사마리아인의 예배(진리없이 신령으로만 드림)
요한복음 4장 22절에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가 ?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셨지만, 그들은 예배하고 있는 대상을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구약성경의 첫번째 다섯 권인 모세오경만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말씀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에는 한계가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어떤 부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구원에 대한 모든 계시를 충분히 알고 있지는 못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이 예배를 드리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예배를 드리는 대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예배에서 요구되는 합당한 지식이 없이 열성적인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였던 것이다. 그들의 예배는 적극적으로, 열성적으로, 감동적으로 성실하게 드렸지만, 예배의 내용은 옳지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신령(마음)으로는 예배를 드렸지만, 진리로는 드리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은 B. C. 125년에 파괴되었지만, 20세기의 오늘날에도 사마리아인들의 예배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사마리아인들은 약 사백 명 정도일 뿐이지만, 그들의 성일(聖日)에 그리심 산에 가보게 되면 그들이 바로 모세 시대에 행해지던 율법대로 정확하게 짐승들의 각을 뜨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여전히 모세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러한 삶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열정적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올바른 지식 혹은 내용이 그들의 예배에서 결여되었다.
2. 유대인들의 예배(신령없이 진리만으로 드림)
요한복음 4장 22절에서 예수께서는 ”... 우리(유대인)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39권의 구약성경 전부를 받아 들이고, 구원에 대한 모든 계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신령함)이 부족했다. 마태복음 6장 1-8절을 읽어 보면 그들이 냉담하고 율법적이며 외식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외양(外樣)은 갖추었으나 거기에 마음을 담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 있었던 유대인들도 좀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예루살렘의 종교에는 생명력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진리는 소유했으나 마음은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의 예배는 진리를 따라 드려졌지만 마음은 거기에 없었던 것이고, 그리심 산의 예배는 마음(신령)으로는 드리나 진리를 따라 드려졌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예배의 극단적인 모습에 대한 두 가지 사례(事例)가 있는데, 하나는 그리심 산의 예배, 즉 열광적인 이단이고 다른 하나는 풀 한 포기 날 수 없는 생명력 없는 메마른 정통주의가 있다. 유대인들은 정확한 지식과 예배에 대한 자료가 있었으나 마음은 예배에서 멀었었고,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마음은 있었지만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참된 예배가 되려면 마음(신령)과 진리(진정)를 겸비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만 있고 다른 하나가 없으면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다. 성실하고 열심이 있는 적극적인 예배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예배도 진리 위에 기초한 것이라야 한다. 또 진리를 따라 드리는 예배도 긴요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예배가 뜨거운 마음으로 갈급해 하는, 감격스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부족한 것이다. 때때로 열이 없는 빛이나 빛이 없는 열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참된 예배는 이 둘의 균형이 모색되어야 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말씀하셨고, 또 24절에서는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예배에 있어서의 이 두 가지 요소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신령(영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의미
신령으로(in spirit)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영혼, 곧 내적(內的) 인격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예배는 어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올바른 말과 행동으로, 합당한 의복을 입고, 합당한 형식과 예배 행위로, 또 그러한 성가나 분위기를 갖추어서 드린다는, 그러한 문제가 아니다. 내적(內的)인 것, 곧 영혼의 문제,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 로마서 1장 9절
”내 심령으로(with my spirit) 섬기는 [라트류오(latreuo) : 예배하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바울은 자기의 심령(心靈)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
- 시편 103편 1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다윗은 여 기서 자기의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하고 있다.
- 시편 103편 1절
다윗은 회개하러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외부적인 제사에는 관심이 없으신데, 그 이유는 그런 제사들은 다만 하나님이 진실로 원하시는 것, 즉 ”마음”에 대한 상징일 뿐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또 다윗이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이 구절은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주위 환경과 또 자기의 힘의 부족때문에,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 주사 그 찬양이 쏟아져나오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다. 이것이 신령으로 예배드린다는 말의의미인 것이다.
방법
그러면 어떻게 신령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도 찬양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서, 어떻게든 입이 열리기만 하면 그 찬양이 쏟아져 나오게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의 마음이 냉담해지거나 지치고 무관심해지는 상태를 막을 수 있는가? 신령으로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몇 가자 원칙을 제시해 보겠다.
- 성령의 내주하심
우리가 우리의 영혼(spirit)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성령께서 마음에 들어오셔서 신령한 예배를 드리게 되도록 자극해 주셔야 한다. 고린도전서 2장 11절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한다. 따라서, 성령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셔서, 당신의 마음을 자극해 주시고, 동기를 부여해 주시며, 또한 당신의 마음을 정결케 해 주시고, 당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지 않으시면 예배란 드려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성령)이 활력을 주어 드리게 된 예배가 아닌 것은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 이것이 기본적인 것이며 기준선인 것이다.
예배를 드리려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일단 구원을 받게 되면, 당신의 마음 속에는 성령께서 거하셔서, 당신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해주시며, 자극해 주시고, 앞으로 나가게 해 주시며, 교훈해 주시고, 정결케 해 주셔서 당신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 예배는 내주하시는 성령과 함께 시작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역사해 주시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할 수도 없고, 주권자로서의 그리스도께 예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의 영(성령)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함
예배란 하나님의 진리로 새롭게 된 마음의 분출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깊이 고찰하는 것은 예배가 터져나오는 데 있어 방아쇠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깊이 고찰하거나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묵상”(meditation)이란 말로도 옮길 수 있다. 참된 예배는 묵상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묵상이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당신의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당신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없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특별히 우리가 우리의 주의를 산만케 하는 이 혼란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송이나 신문 등을 통하여 너무 많은 것에 접촉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어수선해지고, 또 우리도 그런 곳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효과적인 예배를 드리는 열쇠는 당신의 온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데, 즉 묵상에 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묵상함
묵상을 한다는 것은 어떤 지식이나 정보에 대해서 하는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주제에 대하여 묵상을 하려면 생각할 분명한 주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이다. 가장 고상하고 정결하며 참되고 경이롭고 복된 묵상이란 발견한 사실에 대한 묵상임을 말해 주고 싶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위대한 진리를 발견했을 때는 그 진리가 당신의 사고(思考)의 잔정의 전체적이고도 집중적인 목표가 될 때까지 깊게 묵상하라. 그렇게 묵상하면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는 묵상에서, 묵상은 발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발견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발견”이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얻는다. 불행하게도, 근본적으로 우리는 기도란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가 교제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기도란 하나님의 놀라우신 임재를 의식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생활인 것이다.
당신은 교회생활이 지루한가?
당신의 교회 생활이 지루하다면 그것은 목회자의 설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해 주고 싶다. 설교가 특별하게 들어볼 가치가 없더라도 거기에 나오는 하나님에 관한 어떠한 진리라도 포착하여 그것을 묵상하면 그 시간이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시간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흥미를 잃고 냉담한 상태에 처해 있다면 설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목사님의 설교에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게서 일어나도록 해 주는 어떤 것이 들어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나간다면 당신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주일이 돌아올 즈음에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일어나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기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일 주일 내내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한 것을 묵상하는 중에 보냈다면 분명히 예배를 사모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께 대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진리들을 묵상하면, 예배는 분명 기쁨의 예배가 될 것이다.
스펄젼(C. H. Spurge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예배 처소에 그렇게 자주 나가는데도 그들의 생활이 거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기도의 밀실(密室)에 들어가는 일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밀을 좋아하지만 그것을 빻지 않으며, 그들의 곡식 밭에 곡식이 익었으나 추수하러 밭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또한 나무에 열매들이 달려 있지만 그것을 따려 하지 않고, 그들의 발 아래 생수가 솟아나고 있지만 그것을 마시기 위해 엎드리려 하지 않는다.”
예배는 앉아만 있어도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심기웠다. 그러나 뿌리가 얼마나 깊이 박히고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될지는 주로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들을 발견하고 묵상하는 과정에 달린 것이다. 묵상을 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다른 것들과는 절연시키고 한 곳에 집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묵상을 하는 것은 훈련이다. 묵상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스스로 훈련을 해야 한다. 나는, 인도(India)에서 많은 군중들이 모이는 곳에 앉아서 한 번에 며칠씩이나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자기의 배꼽을 쳐다볼 수 있도록 수련을 쌓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흐트러짐 없이 하나님에 대해 묵상을 할 수없는지가 의아스럽다.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내주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둘째로는 우리의 사고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하며, 세째로 우리는 발견하고 그것을 묵상해야 하는데, 그것은 기도와 성경 연구로 시간을 보낼 때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발견하지 못하면 묵상할 것이 없게 되고 묵상하지 못하면 예배도 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또는 어떤 사람에게서 배워서 발견한 진리들로 충만하여 그것을 묵상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고 교회에 나가면 당신의 입이 열리자마자 찬송이 넘쳐 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신령으로 예배하는 데 있어서 네번째 원칙은 다음과 같다.
- 나뉘지 않은 마음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여러 번 책망하신다(사 29:13 / 렘 3:10/ 겔 33:31). 사실 예수께서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그와 같은 이유로 정죄하셨다. 마태복음 15장 7-9절에서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
a. 시편 86편 5-11절 :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경배(예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나이다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사(寄事)와 위대하심을 찬양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드리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예배는 두 가지 면에 있어서 부족했는데,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또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었다. 11절을 보라.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다윗은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발견한 것이 없었다. 때때로 발견이라는 것이 이전에는 몰랐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발견이란 이전에 알고 있었으나 잊어 버렸던 것을 발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이전에도 알았었고 기억도 나지만 지금과 같이 명확하게는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던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여 묵상하는 것이 어렵고, 또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당신의 생활에 다가 오셔서 당신으로 하여금 찬양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되면, 모든 것을 멈추고 성령께 가르쳐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성령께서는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교사이신 것이다(요일 2:27 / 요 16:13).
두번째로 11하반절에서 다윗은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한다”는 표현은 예배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예배를 드리기 원했으나 자신의 마음을 하나로 정리해야 했다. 일심이 되는 것의 반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뉜 마음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의 첫번째 문제점은 묵상할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로는 그의 마음이 산만하게 나뉘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마음이 나뉘어 본 경험이 있다. 때때로 우리는 차분하게 앉아 ”이제 기도하면서 주님과 함께 시간을 좀 보내야겠다”라고 말하지만,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모든 잡념들이 밀려들기 시작하거나, 아니면 정말로 위대한 발견들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아이들이 요란하게 문을 열며 들이닥친다.
오늘날 우리도 집중하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다윗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일국의 왕이었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을 것이다. 그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뿐 아니라 사생활에 있어서도 잘 되어가지 않는 일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다윗이 근본적으로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당신께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나뉘지 않은 마음을 주사 주의 옳은 교훈을 따르게 하소서. 하나님께 대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싶고 또 잡념들이 없이 그 진리들을 묵상하고자 하나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예배에 집중시키고자 할 때 중요한 방해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당신이 드리는 예배가 당신 자신에 의해 방해를 받는 것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당신도 체험했겠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당면한 소욕을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발견하고 기도하며 또는 묵상하거나 예배를 드릴시간 조차도 없는 것이다. 또 우리는 우리의 계획들과 활동들과 우리의 필요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흐트러지지 않은 마음을 갖기란여간 어렵지가 않다.
자기 자신이 예배에 있어서 항상 방해물이 된다. 우리가 자신을 모두 부인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몰두하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게을러서 이런 최소한의 노력조차도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너무나 안일한 생활에 빠져 있어서 스펄젼이 말한 대로 물을 퍼 올리려고 깊게 파 내려가지도 않으며 곡식을 추수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의 짧은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값진 경험 중의 하나는 스티븐 케르낙(Stephen Charnock)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을 읽은 것이었다. 그 책은 하나님에 대한 케르낙의 모든 사상들을 담고 있는데, 넓고 깊은 통찰력으로 인하여 그것을 소화하는데는 평생이 걸릴 것이다. 그 책 한부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 것을 가장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조롱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보다 우리가 만족을 느껴야 한다고 믿을 때는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도 하나님을 더 낮게 취급하는 것이 되며, 그분의 모든 영광이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유보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와 이익과 축복 등을 하나님보다도 더 비중을 두는 것이 예배의 방해물인 것이다.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예배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회집(會集)에 함께 모일 때, 우리의 삶이 기도와 연구와 진리에 대한 발견과 그것들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에 우러나는 찬양으로 가득 차게끔 하자.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입이 열릴 때마다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될 것이며, 우리의 속 심령(spirit)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b. 시편 108편 1-3절 :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다른 말로 하면, 찬양의 음악은 집중되고 나뉘어지지 않은 마음, 즉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진 마음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c. 시편 112편 7-8절 : 시편 112편은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로 시작하여 찬양의 시(詩)로 계속된다. 이 시편 기자의 마음은 어떻게 하여 찬송을 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는가? 그것은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기”(7절) 때문이며, 또 ”그 마음이 견고했기”(8절) 때문이다. 그렇다면 찬양은 하나님의 기사(寄事)에 마음이 고정되고, 굳게 세워지고, 마음의 초점이 맞추어질 때, 그러한 마음의 경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d. 시편 57편 7-11절 :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이와 같이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예배를 드리려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셔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하고 묵상하는 생활을 해야 하며, 또 나뉘지 않고 고정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다섯번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열려진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
시편 139편 23-24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은 여기서 그 자신도 자기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시인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생활 가운데서 회개해야 할 것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 대하여 열려진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이여, 탐조등을 켜시고 우리 마음의 구석구석에 있는 것을 찾아내 드러내어 주소서”라고 말하며 나가야 한다. 당신이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워지고, 또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 무감각해질 때는 당신의 생활에서 당신이 모르고 그냥 지나쳤지만 그분만은 알고 계신 어떤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을 살피시고 그것들을 당신에게 밝히 알려 주시도록 그분께 기도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상하고 뉘우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그것들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성경에서 예배에 대하여 말할 때는 또한 깨끗케 함과 정결케 함과 고백하는 것과 회개하는 것 등에 관해서도 말한다. 왜냐하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란 죄 문제를 깨끗이 해결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러운 그대로 괜찮다고 자위하며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활활 타오르는 숯불을 우리 입술에 대셔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도록 해야 한다(사 6:6-7).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시고, 우리의 마음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하며, 그것을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묵상하고, 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모든 방해물들을 하나님께서 오셔서 드러내 밝혀 주시도록 의뢰할 때, 그것이 바로 신령으로(in spirit)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수년 전에 스티븐 케르낙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마음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며 그것은 하나의 연극 무대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그 인물이 아니면서 역할만 하는, 즉 외식인 것이다. 참으로 우리의 예배가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말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신실성이 없다면 우리가 그분께 예배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하게 예배드릴 수는 있어도, 신실치 못하게 예배드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신령으로 예배를 드리려면 우리의 속 심령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묶어 드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예배이다.
이제 예배의 특성의(균형을 이루는) 두 번째 요소를 살펴보기로 하자.
2.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모든 예배는 진리에 대한 응답으로 드려지게 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진행되는 어떤 감정적인 의식(儀式)이 아니며, 또한 감정의 유발을 목적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예배란 진리 위에 기초된 응답인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께 아주 중요한 질문을 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 드린 기도의 내용 가운데서 나타난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또, 시편 119편에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142절).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160절).
이제 우리가 ”진리로”(개역 한글성경은 ”진정으로”로 번역됨 -
역자 주) 예배를 드려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드리려면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야만 하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보여 주시는 곳은 바로 그분의 말씀인 것이다.
로마서 1장 18-19, 25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 속에 보이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먼저 사람의 양심과 모든 피조 세계를 통해, 다시 말하면 일반 계시를 통해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짓누르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던”(25절)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피조 세계와 사람의 양심을 통해 나타내 보이시고, 또 하나님의 말씀(성경)의 매 페이지를 통해 분명히 나타내 보이셨다. 우리가 진리로 예배를 드리려면 성경에 정의(定義)된 하나님의 모습대로 그분께 예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피조 세계와 양심에 나타난 하나님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다. 따라서, 그분의 계시를 떠나서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시편 47편 7절
모든 예배는 진리에 기초해야 한다. 이 사실이 시편 47편 7절에 나타나는데, 여기서 시편 기자는 ”지혜의 시로 찬양할찌어다”라고 말한다. 예배란 단순히 손을 합장하고 앞 뒤로 흔들면서 아무 의미도 내용도 없는 황홀한 경험을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리 흐뭇한 감정이라도 그것이 예배가 될 수는 없다. 예배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로 향하는 찬양의 표현인데, 그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예배드리는 대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 자신은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는 참된 예배가 드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 단체의 간판을 걸어 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진리 이해가 결여되어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고, 아예 예배드릴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신령과 더불어 진리를 좇아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4장 2절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는 성경을 속일 목적으로 오용하지 않을 것이며 또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거짓으로 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리를 드러내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서려는 것뿐이다”라는 것이다. 예배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왜 강해 설교가 중요한가?
사람들은 종종 내게 다음과 같이 질문해 온다. ”당신이 그렇게 장시간 설교를 하는데, 그 가운데서 당신은 어느 짬에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또 청중들은 언제 예배드릴 시간을 갖습니까?”
사실, 나는 강해 설교를 주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알지도 못한 채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매 주마다 조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 하나님께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많은 예화들을 청중에게 들려 줌으로써 그들을 감동시키고, 또 그들의 결단을 유도하는 멋진(?) 설교를 할 수는 있다.
또 나도 관심을 끌만큼 재미있고 열정적인 설교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한다면 사람들은 ”죤 맥아더 목사님은 진짜 설교를 할 줄 아는 분이셔!”라고 말하겠지만, 그들은 예배를 드리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가르친 말씀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보여 주신 대로 하나님께 응답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내게는 더 큰 도전이다.
나는 젊은 목사일지라도 목회 사역을 하면서 강해 설교를 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다는 것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응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를 좇아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데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강해 설교를 고집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42절
초대 교회에서는 함께 모일 때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 가르침대로 행하는 데 ”전혀 힘썼다”라고 한다. 그러면 사도들의 가르침이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사도들의 글과 가르침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에 대한 그분 자신의 계시였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좇아 예배를 드렸던 진리의 실체였던 것이다.
디모데전서 4장 13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을 읽고 해석해 주고 또 그것을 적용하라”는 것이다. 디모데는 성경 안에서 살면서 건전한 교훈, 즉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6-17절
초대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16-17절의 이런 모든 사항을 기록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우리를 주장할 때에 바른 찬양이 나오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합당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23절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 서서 그곳 사람들이 예배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그들을 일깨우고 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인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들은 예배의 대상을 모르고 예배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예배의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내부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 찬양과 기도와 노래와 봉헌과 생활의 형태로 나오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에 기초한 것들이어야 한다. 교회가 계속하여 이런 수준을 지켜 나가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냉랭하고 생명이 없는 경향에 빠지기 쉽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적이고 열광적인 감정주의로 전락하기 쉬운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경향의 균형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극단적인 형태의 신비주의에서뿐 아니라, 의식과 형식과 순서가 어리석고 의미없는 활동이 되어 버린 냉랭한 정통주의에서도 참된 예배는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께 예배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예배란 하늘로부터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진리를 발견하여 묵상하고, 하나님께초점을 맞추며, 나뉘지 않은 마음을 갖게 될 때, 또 하나님께 대하여 열린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바로 그 결과로 예배가 흘러 넘쳐 나오게 되는 것이다. 즉,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자연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7. 예배의 결과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나면 하나의 종교 의식을 행했다는 것으로, 또는 개인의 마음의 컬컬함을 해소했다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렸을 때는 거기에 합당한 열매가 맺게되는 것이다. 참된 예배는 먼저 하나님께 의미있는 일로 드러나며, 다음은 그리스도인 자신들에게 의미가 있으며, 교회에 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
시편 50편 23절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예배할 때 그분은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이다. 레위기 10장 3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별되사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신다. 또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분은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우리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우리가 그분이 요구하시는 대로 예배를 드릴 때 그분은 영화롭게 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정결케 됨
시편 24편 3-4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정결하며”라고 말한다. 참되게 예배하는 교회는 순결한 교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호와의 존전(存前)에 나아갈 때에 거기에는 죄를 깨달음과 그런 죄를 다시 짓지 않겠다는 결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결케 되고 깨끗케 되고자 하는 불붙는 듯한 열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게 되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에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의 죄를 더 깨닫고 그 죄책에 압도되어 다윗과 같이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시 139:23-24).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성찬식이 중요한 이유는 성찬상이 정기적으로 우리의 죄의 실상을 대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가 그렇게 자주 성찬식을 행했던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가 유익을 얻게 됨
사도행전 2장 47절에서는 초대 교회가 참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로부터만이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또 그 구절의 하반절에서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라고 한다.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 전체를 복음으로 충만하게 하였으며(행 5:28), 또 온 세계를 뒤바꾸어 놓았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사람들이었으며, 능력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예배하는 교회는 건설적이며 유익을 끼치는 교회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바르게 살아 가고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모일 때에 우리는 세워지고 힘을 공급받으며, 또 변화를 받게 된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참된 예배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예배를 드린 후에도 당신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당신은예배를 드렸던 것이 아니다. 변화를 받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갈 수가 없고, 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예배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순종하게 만들지 못하면, 당신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간에,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올 때 하나님께 대한 더 큰 순종의 마음을 갖고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예배가 아닌 것이다. 또 거룩한 기대감에서 시작하여 거룩한 기대감으로 끝나지 않으면, 그것 또한 예배가 아니다.
잃은 자들이 복음을 받게 됨
아마도 예배하는 공동체의 심오한 증거(testimony)가 다른 어떤 단순한 설교보다 더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3-25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근본적으로 ”너희가 예배를 규모있게 드리고 합당한 방식대로 드리게 되면 너희 중에 나오는 불신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자들은 잃은 영혼들에게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우리 교회에서 곧장 내려가다 보면 유대교 회당이 있는데, 파산지경에 이른 결혼 생활의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하려 했던 어떤 유대 여인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여인이 회당세를 내지 못했던 관계로 회당의 랍비들은 상담해 주려 하지 않았다. 마침 그 날은 주일 아침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회당문을 나서자 교회로 가는 많은 사람들의 대열에 휩쓸려 그냥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수 주일 후에 나는 그녀에게 세례(침례)를 베풀 정도까지 되었는데, 그녀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그 주일 아침에 하신 목사님의 설교를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그 설교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조차도 생각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릴 때 회중 가운데 충만한 기쁨과 평안과 사랑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전에는 이런 광경을 전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사람들을 본 결과로 그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정결케 되며, 교회가 유익을 받고, 잃은 자들은 복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시점에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것이다.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며, 또 내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사실이며,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예배는 언제 어디서나 드릴 수 있지만 특별히 구원받은 백성들의 회집(會集)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 또 예배의 특성은 신령과 진리(진정)의 요소가 완전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 또 진리를 좇아 예배드린다는 사실에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등은 이제는 모두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진실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예배를 준비하는 것입니까?”
8. 예배를 위한 준비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갈 때에 중요한 것은 성가대가 과연 연습을 제대로 했는가, 설교자가 설교 준비를 착실히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준비가 잘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히브리서 10장 22절이 예배의 준비 문제에 대하여 가장 잘 요약해 주고 있는 성구(聖句)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배에로의 부름
"...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것이 예배에로의 부름이다. 누구에게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 이제 예배를 드릴 시간이 되었으니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서 다음 네 가지 사항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점검해야 될 사항
1. 진심
"... 참 마음과 ...”
당신은 정말 진심(眞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가? 진실로, 당신의 마음은 집중되고 통일된 상태인가? 당신은 전심(全心)으로 예배를 드리는가?
2. 확신
"... 온전한 믿음으로 ...”
히브리서를 받는 대상인 당시의 히브리인들은 여전히 옛 언약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이 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그들은 옛 언약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아야 했다. 이제는 더이상의 의식(儀式)이나 제사나 상징이나 모형이나 예표등은 없다. 옛 언약은 지나갔고 새롭고 더 나은 언약이 임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나는 더이상 행위나 의식(儀式)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음으로써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간다”라고 기꺼이 말했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확신이다.
따라서 당신은 진심(眞心)으로 예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 계시된 이 진리가 구원의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그 진리를 좇아 예배를 드려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행위나 공로나 의(義)나 어떤 의식(儀式)에 집착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간단하지만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야만 한다.
3. 겸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이 온통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치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또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깨끗케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뿌림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주님께서 피를 뿌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해주셨다는 사실이 없었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겸손한 마음과, 우리는 전혀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자기의 진심(眞心)과 확신과 겸손에 대해 점검한 후 다음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4. 정결
"...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우리의 마음을 씻어 주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씻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생활에서의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씻김을 받았지만, 우리의 발에는 항상 세상의 먼지가 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에 앞서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자문(自問)해 봄으로써 당신 스스로를 준비하라.
"참 마음을 가졌는가? 나의 마음은 통일되었는가? 나의 전심(全心)을 하나님께 쏟고 있는가? 나는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나는 발견과 묵상을 통하여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이제 나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는 것이 되었는가 ? 나는 믿음으로만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단순하지만 오로지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가? 나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모든 사역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가? 또 나는 내 생활상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정결한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나는 당신이 주일 아침에 특별히 시간을 내어 히브리서 10장 22절을 펼치고, 이러한 사항들을 점검한다면 내가 아는 어떤 것보다도 당신 자신의 예배드릴 마음을 더 잘 준비시켜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당신은 참 마음을 가졌는가? 당신은 새 언약의 진리를 확신하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에 의하여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생활상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여 정결함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이제 이렇게 준비되어 있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9. 예배의 장애물
어떤 이들은 수 년씩이나 교회에 출석했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본 일이 전혀 없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자기 옆에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깨달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개인의 경건생활과 기도생활에서조차도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 만일 당신이 이런 경우라면 당신이 드리는 예배는 아마 다음과 같은 것들 때문에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회개치 않은 죄
당신의 생활 가운데 죄가 있다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죄를 고백해야 한다. 사무엘하 12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범하고, 밧세바의 남편을 죽이고, 또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는 것을 본 후의 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20절은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예배)하였더라”고 기록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예배이다.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윗은 비참한 상황에 처하였다. 갓 태어난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께 경배(예배)하였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신이 받아야 할 마땅한 보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징계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회개의 예배란 징계를 받고 있는 중에서라도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며 죄를 고백하면서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고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쏟으면서 죄 문제를 놓고 씨름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국면에 처한 자가 있다. 어쩌면 당신은 당신이 당하고 있는 징계의 아픔들에 대해 화를 내었을 수도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먼저 넘어야 할 장애물은 당신의 죄의 문제인 것이다.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함
성경은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 즉 자녀들과 재산과 가축이 모두 죽거나 무너지거나 빼앗기거나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예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0-21)라는,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말을 했다고 기록한다. 이것이 바로 환경을 받아들이면서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인생에 허락하신 환경들 중의 어떤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전혀 예배를 드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환경들이 사람을 강퍅하게 했고, 따라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런 환경들을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당신은 결코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죠지 뮬러(George Mueller)는 받아들임의 자세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에게 죽는 날이 찾아왔다.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 외에는 사람의 칭찬과 비판에 대하여 죽는 날, 바로 그 날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날이 죠지 뮬러가 살기 시작한 새 날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겠는가? 욥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했다(욥 23:10).
받아들임의 예배는 생활 형편, 직업, 경력, 배우자, 자녀 등 당신의 환경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또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저에게서일어난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자녀들과 직업을 잃고, 또 제가 병들어 고통 중에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중에서도 당신께 예배하나이다”라고 기꺼이 아뢰는 것이다. 강퍅함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활에 허락하신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세와 죄가, 당신으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헌신, 곧 희생을 꺼려함
창세기 22장에서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다고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2절). 4-5절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예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의 생명을 기꺼이 취하면서도 그것을 예배로 이해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희생이 얼마나 크든지 간에 자기 자신을 예배드리는 일에 바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서 명하셨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몇몇 장애물들을 극복하기까지는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자유롭지가 못하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죄 문제를 다루기를 회피하기 때문에,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환경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또 어떤 이들은 즐거이 헌신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오 !”를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토저(A. W. Tozer)는 ”우리는 「오 !」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엄위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심령이 무릎을 꿇고 거기서 말할 수 없는 기이하고도 두려운 일들을 들으며 마음은 녹아내리고 혀마저 굳어버려 보고 들은 것조차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 장엄한 순간에 예배자는 ”오 !”라고만 외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이런 ”오 !”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진정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교회란! 예배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 제사와 영적 예배 (0) | 2024.12.15 |
---|---|
올바른 예배 (0) | 2024.12.15 |
예배자의 마음 기르기 (0) | 2024.12.14 |
교인의 예배의식 7가지 (0) | 2024.12.14 |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의 역사적 배경 (0) | 2024.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