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

하나님아들 2024. 12. 14. 21:42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

마태복음 24:3-15(김경중 목사; 2014년 12월 7일)

 

<서론>

 

최근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서 아프리카에서 들려오는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것입니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20여 년 전(1995년) 더스틴 호프만의 주연 “아웃 브레이크”라는 영화에서인데, 올해 다시 서 아프리카에서 창궐하고 있습니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두려운 것은 아직은 예방약인 백신이 없다는 것이고, 치료약도 아직 개발되지 않았는데, 문제는 이 에볼라 바이러스가 치명적인 사망률과 또 스스로 새로운 복제를 해서 혹 백신을 만들어낸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앞으로도 언제 어느 때에 어떤 질병이 인류를 위협할지는 아무도 모르고, 혹 질병이 발병을 해도 그 치료약을 개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환경 문제에서 오는 기후의 온난화, 그리고 자연재해는 언제나 우리에게 공포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환경 문제에서 오는 재앙은 소리없이 우리에게 다가와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입니다. 환경 재앙은 질병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질병들을 통한 위기들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 즉 자연과 공생 공영해야 하는 인간이 지나친 이기심으로 자연 위에 군립하는 것이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있었던 일본의 후쿠시마 현의 쓰나미, 그리고 그 이전에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지진에 의한 쓰나미는 하루 아침에 수십만 명의 인명을 흔적도 없이 쓸어가 버렸습니다. 중국, 아이티, 칠레, 뉴질랜드 등에서 발생하는 지진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또한 전쟁은 이 땅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거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북한의 경우 독재자 김정은은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마치 미친 개처럼 숙청을 통해 자기에 대한 불만 세력을 죽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민족이 민족을” 이라고 했는데, 이런 일들이 처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여러 가지 전쟁의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서 심지어 초강대국인 미국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아프리카 북부 지역에서의 지역분쟁, 중근동에서 소위 IS라 불리는 이슬람세력의 무차별적인 살인테러 행위들은 전 세계를 분노에 떨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근동 일대의 민주화의 바람들은 앞으로 긍정적으로만 흐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친미정권이었던 이집트나,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와 같은 나라들이 무너지면 그 다음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은 이스라엘과의 동맹이 깨어지고, 동맹이 깨어지는 순간부터 다시 끊임없는 분쟁이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 벌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가가 하락하거나 폭등하는 것도 경제적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성경은 종말의 징조 중에 이러한 자연 재해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쟁의 소문과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부터 두려움 속에 있으면서, 자연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성경에서 주는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 소식들은 성경적 종말론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에 오늘은 말씀의 제목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적 그리스도의 출현(마 24:4-5; 막 13:5-6; 눅 21:8; 계 6:1-2).

 

적 그리스도의 출현은 메시아 기대 사상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메시아 기대 사상의 유래는 유대가 멸망하고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극도의 절망적인 순간에 만일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메시야를 기대하는 사상은 모든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메시야를 기대하는 사상이 있는데, 미륵사상이 그것입니다. 불교의 미륵사상은 고토중래를 위해 중생들을 구제할 자가 온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 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반역의 앞장을 선 사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불교의 메시야 사상인 미륵사상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미혹은 항상 대두되고 그렇게 오는 자는 메시아가 아니라 적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1) 그래서 주님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4-5).

그리스 신화에 있는 판도라 상자 이야기에 보면 인간의 불행이 인간의 호기심에서 비롯되고 있고, 미혹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보면 인간의 불행은 뱀의 유혹에서 비롯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분별력을 잃게 되어 그것이 미혹임에도 불구하고 그 미혹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미혹에 왜 인간은 노출되어 미혹에 빠지게 될까요? 성경을 근거로 하면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성적 판단을 하는 것에 마비가 생겨 미혹을 받고, 그리고 거기에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 미혹을 받는 것입니다. 육적인 것을 추구하고 치우치는 것 때문에 그것이 분명히 멸망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모습에서 예수님은 종말의 징조로서 주목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 4절과 5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가복음 13장 5절과 6절, 그리고 누가복음 21장 8절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태나 마가나 누가나 요한이 예수님 생전에 지근거리에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종말론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미혹은 언제든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미혹의 진실 유무를 분별하는 것이고, 미혹으로 판단될 때는 과감히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2) 주님은 미혹의 내용을 두 가지로 묘사했습니다(눅 21:8).

미혹의 내용은 두 가지이지요. 누가복음 21장 8절에 보면 하나는 메시아에 대한 것이고, 다른 것은 때가 가까웠다는 불안감을 주는 것이다.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웠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먼저 미혹의 내용은 이 시대를 구원할 자가 있는데, 시대를 구원할 그 분을 미혹하는 자들은 자기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분명히 구원자로 오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분별하는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내용은 때에 대한 것입니다. 그 때는 재림의 주님이 심판의 주님이라는 것이고, 주님이 심판을 하시기 위해 오시기 때문에 때가 임박함은 우리를 불안감에 빠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적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히브리서 9장 28절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다시 오실 주님은 죄와 상관없이 기다리는 자들 때문에 오시는 것이지, 인류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림의 목적은 죄사함 받은 자들을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의 심판은 우리의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간섭하거나 주목하거나 고소해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길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2. 전쟁과 전쟁의 소문(막 24:6-8; 막 13:7-8; 눅 21:8; 계 6:3-4).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고, 역사는 전쟁에서 이긴 승자들의 기술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 바가 없지만 특별히 우리나라가 속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자그마치 931회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4천년이라고 한다면 4-5년에 한번 꼴로 이 땅에 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면 문제는 수많은 인명이 살상이 된다는 것이고, 전쟁과 상관이 없는 아까운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고 우리 스스로 말하지만 한 번의 전쟁을 치를 때마다 부녀자들이 납치가 되거나 강간을 당하는 경우는 다반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 합니다. 그러므로 원치 아니하게 이 민족의 피가 한 민족 사이에 섞이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혼혈 민족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전쟁은 많은 경제적 가치를 상실하게 합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전쟁은 빼앗은 영토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노예 확보를 위해서 다시 전쟁을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쟁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의 소식이 고대로부터 있어왔던 것인데, 오늘날에도 또 벌어졌다고 보는 것은 오늘 설교와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전쟁이 성경적 종말론과 어떤 관련성을 갖느냐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본문 6절에서 8절에, 마가는 13장 7절과 8절에 누가는 21장 9절과 10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주님은 종말의 징조로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있다고 했습니다(6-7).

인간은 누구나 평안을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누가복음 2장 14절에서 “세상의 평화”를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애는 사람들에게서 평화를 깨트리는 요소들을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질병이 한 사람의 평화를 깨트릴 때에 질병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가난이 한 가정의 평화를 깨트릴 때에 “부유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가난한 자로 하여금 부유케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심도 하나님과 인류의 깨어진 평화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침내 주님이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이야기도 평화였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이루신 평화를 인간들은 자기의 경제적 이익에 의해 깨트린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종말이 오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이기주의가 전쟁을 불러왔고, 종말은 이 이기심이 극치를 이루다 보니 전쟁을 통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전쟁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경제적 이익에 따라 찬성도 하고 반대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전쟁이 이해관계에 얽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라크 전쟁도 처음에는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이 반대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 아래서 이 나라들이 석유를 통한 경제적 이익을 챙겼는데, 만약 전쟁을 통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면 그 이익이 사라질 것을 보았기 때문에 반대를 했던 것이고, 그런데 전쟁이 계속되면서 반대하던 나라들이 찬성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전후 복구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시 미국은 이란과의 전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론 전쟁의 발단은 이란의 핵문제인데, 그것은 명분이고, 실제로는 중동의 석유에 대한 패권을 잃지 않으려는 미국의 속셈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계속되면 될수록 주님은 그 시대를 종말이 임박해 오고 있는 시대라고 예고를 한 것입니다. 문제는 종말이 오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은 또 미혹을 받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복음적 영성에서는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성령 충만한 삶은 종말보다 더 선행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2) 이 세상에 평화를 깨는 전쟁이 적 그리스도의 출현에 명분을 제공합니다(15).

다니엘 9장을 읽어보면 다니엘이 예레미아의 서책을 읽는 중에 예루살렘이 70년 동안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됩니다. 다니엘은 그 원인이 자기 조상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날 교회에서 유행하는 다니엘의 21일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하는 중에 다니엘에게 크나큰 깨달음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70년 황폐케 됨은 앞으로 이루어질 종말 드라마의 한 토막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70 이레이고, 그 70이레 중에 한 이레에 대한 것이 종말론을 풀어나가는 귀한 열쇠가 되는데, 그 한 이레에 대해 다니엘 9장 27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이레 언약”이라는 언약에 대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한 이레 언약은 평화의 언약이라는 것이고, 그 평화의 언약이 한 이레 절반에 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평화가 깨어지는 명분이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성경은 요한 계시록 11장 7절에서 적 그리스도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두 증인을 죽임으로 평화의 무드를 깨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대해 마태복음 24장 15절은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한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한 이레 절반, 즉 평화의 무드가 일어나고 난 후에 그 전반기가 끝나는 시점에 벌어지는 사건이거든요. 마가복음 13장 14절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1장 20절에는 같은 사건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로 알라”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는 현상은 평화를 깨트리는 요인이 전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 때문에 적 그리스도가 전면에 드러나는 명분이 생기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쟁에 지치고 전쟁의 불안에 떨게 되는데, 적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그러한 마음을 알고 이를 교묘히 이용을 하게 됩니다. 다니엘 9장 27절에 보면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라고 했는데, 여기서 날개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의 여론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들의 전쟁을 싫어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인간에게 전쟁의 폐해와 불안감이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일시에 해결할 자로 평화의 사도로 등장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전쟁과 전쟁의 소문은 이 세상에 평화를 깨트리고 사람들을 불안에 빠트리게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러한 평화를 깨트리는 자들을 꺾고 한 순간 에 세상을 하나가 되게 하는 세력을 고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적 그리스도이고, 적 그리스도의 출현은 전쟁을 등에 없고 평화의 사도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램과 같은 빈틈없는 세상을 만들어 통제하고자 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짐승표를 강압적으로 찍는 명분을 주게 되고,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강한 탄압이 있게 되겠지요.

 

3. 환경을 통해오는 징조(마 24:7; 막 13:8; 눅 21:11; 계 6:5-6).

 

성경은 종말의 징조의 하나로 환경적 변화를 예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7절에는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13장 8절에, 누가는 21장 1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들은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것이었는데, 분명한 것은 이러한 성경적 사실이 계시록 8장 7절에서 12절에는 환경과 관련된 재앙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바닷물 삼분의 일이 피가 되는(계 8:8)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그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징조는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일들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러한 원인이 바로 환경의 파괴로 인한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는 매우 더운 봄철을 맞았는데, 3월의 기후가 지난 80년래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우연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파괴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1) 경제적 문제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기근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6장 5절과 6절은 바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평행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루 품삯에 쌀 한되 밖에 사지 못하는 식량의 위기는 우리를 매우 어렵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환경 문제와 어우러져 나타나는 징조이지요. 앞으로 환경의 문제는 이 땅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듣는 소리는 기후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기후의 변화는 농업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것이 됩니다.

 

2) 질병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사 복음서와 평행구를 이루는 성경에서 누가복음은 21장 11절에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라고 했습니다. 즉 온역을 통한 무서운 재앙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은 왜 질병을 이 세상에 보냈는가?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질병이 사용되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질병은 악을 행하고 그를 잊으므로 주어진 저주라고 했습니다. 21절 이하에서는 염병이 들고, 폐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과 미침병과 소경이 되는 병, 등이 임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질병들은 모두 하나님께 범죄한 자들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질병이다.

 

3) 질병은 불신자나 짐승표 받은 자를 심판하는 도구이다.

요한 계시록 16장은 일곱 대접의 재앙이 임할 때, 첫째가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더라” 라고 했습니다. 즉 짐승표 받은 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에게 치료할 수 없는 질병에 걸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표를 찍는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한 것이고, 믿는 자들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이지요. 짐승표를 찍는 시기는 한 이레 언약을 체결하면서이고, 전 삼 년 반 기간 동안에는 짐승표를 권장하는 시기이고, 강제로 찍는 시기는 한 이레 언약의 절반이 지났을 때에 언약을 파하면서이지요.

 

4. 인간의 짐승화 시대가 될 것입니다(마 24:9-13; 막 13:9-13; 눅21:12-19; 계 6:7-8).

 

인간의 짐승화는 인간이 짐승으로 변한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 이하의 짓을 하는 일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사람이 지켜야할 것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종말적 징조에서는 인간이 이러한 것들을 상실하는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24장 9절부터 12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나.(9)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10)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11)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 지리라.(11)”

마가복음 13장 9절부터 12절 중에 12절은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누가 21장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 믿음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게 될 것입니다(10).

사람이 사람을 믿고 살아야 하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를 믿을 수가 없어 서로 배신하고, 서로 증오하고, 특별히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들의 바른 분별력을 잃게 하는 그런 시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받는 자들이 될 것이다. 문제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배신하고, 서로 증오하고, 특별히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들의 바른 분별력을 잃게 하는 그런 시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받는 자들이 될 것이다.

 

2) 불법이 성함으로 사랑이 식어진 시기가 될 것입니다(10).

세상이 소위 변화하면 할수록 그 만큼 세상을 복잡해지게 되어 있고, 그에 맞는 각종 법들이 만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불법은 법을 어기는 자들이 많아진다는 것인데, 법 아래 있다면 그것은 맞는 이야기이지요. 언제나 세상은 법이 성하면 은혜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 법이 자리 잡을 여유 공간은 없는 것인데, 신앙의 타락은 마치 법을 지키는 것이 참된 신앙으로 자리 잡는 그런 시대가 온다면 문제이지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지요. 특히 율법적인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결론>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들을 때에 우리는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주님은 그렇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종말론적 신앙을 더 굳세게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말의 신앙에 대해 요한 계시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 1절에는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계시록인데 여기서 천사를 복음 안에서 이해는 율법의 영이고 부정적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영은 복음 안에서 부정적인 영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가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천사의 영은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을 돕는 영이라는 것이고,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 종말은 천사를 통해서 알려졌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 계시며 일하시는 성령의 시대에는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종말의 신앙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영은 “아니요” 할 수 있는 영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성령의 영분별을 위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1장 3절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율법적으로 들려옵니다.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교회가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함을 가르치는데 2장 7절, 2장 11절, 2장 17절, 2장 29절, 3장 6절, 3장 13절, 3장 22절에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고 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모두 촉구하신 것은 성령이 하시는 소리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주님께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사도행전 1장 7절과 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7)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뿐만 아니라 복음적 신앙에서 주님의 재림은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은 그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심판은 구원받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율법적 영성의 설교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심판에 초점을 맞추어 종말론을 이야기할 때마다 불안하게 만듭니다. 오늘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요한일서 2장 27절의 말씀은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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