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과 성령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의 조상이라고 선언하면서, 믿음을 유대인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선포하며(롬3:29~30)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감정을 한층 더 견고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연약한 신앙에 대한 감정은 오순절기에 예루살렘 성지순례 도중 사도들과 120문도들에게 나타난 성령강림을 사건을 목격하고, 소문으로만 듣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증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때 그들이 성령강림 사건을 목격하고 들은 사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고, 누구든지 믿음을 통하여 새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증언에 의해 조상의 전통에 따라 섬겨온 유대교를 뒤로하고 새 시대가 돌입한 것을 확신하며, 다가올 미래에 대한 벅찬 가슴에 앉고 다시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그들은 새로운 신앙에 대한 교사나 교과서도 없는 상황에서 삶의 터전에 휘말려 이전까지 섬겨왔던 유대인들의 비난과 박해를 받아가며 로마의 황제를 섬기지 않고 다른 왕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비난과 핍밥이 그들의 신앙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앙을 지도해줄 정해진 리더자도 없고 박해를 견디어낼 수 있도록 독려하며, 체계적인 교육을 강화하여 견고하고 거룩한 순교의 길을 가는데 힘이 되어주는 교사도 없었습니다. 바울과 같이 성령이 충만하고 교리적인 중심이 견고하게 서있으며, 지식을 뒷 받침하는 논리를 앞세워 교육하는 지도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단순히 사도들로 부터 들은 설교와 기적사건들에 대한 목격담, 짧은 시간 가르침에 의한 감동 받은 예수의 공생애 동안 행하시는 사역들에 관한 이야기등의 목격담들을 들으면서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거나(개별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님), 세상의 여파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옮겨온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목마른 로마인들에게 쓴 바울의 글은 갈증을 단숨에 해소하는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체계적인 바울의 글은, 율법의 의보다는 믿음 의로 말미암은 새로운 세상을 가슴에 품은 그리스도인들의 자부심은 그들의 신앙에 활기를 불어 넣은 서신이 된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된 서신에 충분히 감동했을 것이고, 히브리인이 아닌 이방인이나 혼혈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만족이 되는 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을 단순히 히브리인의 조상이며, 그의 자손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보냄을 받으신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게 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구별이 없어졌다는 주장이 조금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거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분상의 구별로서 히브리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아무에게도 우월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긍심을 갖게하는 선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르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이방인이었거나 혼혈인인 사람들과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교회로 함께 모이기는 했으나, 일부는 여전히 선민 히브리인들을 향하여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거나,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인 사상을 가지고 교회에 모였을 것입니다. 로마서는 이런 신분의 구별된 편견의 족쇄를 단숨에 풀어헤치고, 자유를 선포하는 메시지를 바울로부터 받아든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의 기쁨이 오늘 우리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그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때 그는 구별된 선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세상에서 구별된 독특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타락한 사람이었고, 이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의 원수로 세상을 살다가 동일하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조상의 원죄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죄가 있다는 지식이 가르쳐졌거나, 하나님에 관하여 별도로 교육되는 구별된 신앙이 있는 환경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종교적 지식이 그에게 교육되거나, 모든 종교 가운데 하나님이라는 신을 섬겨야 한다는 유일신이 계시다는 사상이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가르쳐 지지 않은 오늘 우리와 다를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과 관계없는 지극히 평범한 자연인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과 동등한 희망과 꿈을 가지고, 공통적인 걱정과 고난 속에서 세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이 되기 전에는 아브람이었고, 슈메르 문화의 중심지이고 열정적인 다신교 숭배지였던 갈대아 우르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에 관해서는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였고, 이 전설은 다신교 사회에서의 아브람의 삶의 환경에 관한 참고할 만한 많은 시사점들을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1:26에는 그의 아버지 데라는 70세에 세 아들(아브람, 나홀, 하란)을 낳았는데 하란은 갈데아 우르에서 데라보다 먼저 죽었고(창11:28),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옮겨오는 도중 하란에서 향년 205세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데라도 자식을 일찍 가지지 못한 고민을 앉고 살았는데 아브람도 역시 같은 고민을 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씨족 중심으로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었으며,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사람들은 부를 가지지 못한 다른 씨족 사람들을 정복하거나 연합하여 하인이나 노예, 노동과 봉사를 부담시키며 함께 살았습니다. 이때는 큰 부족만으로도 나라의 조직을 갖출수 있었지만 대부분 작은 부족들이 연합하여 계약을 맺고 한 나라를 이루어 연합된 공동체를 구성하는 조직으로 연합단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부족과 공동체인 연합된 나라를 형성하기 위해서 종교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우선 부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부족의 대표인 장이나 나라의 대표는 사람이지만 신적인 대리자의 역할을 통해 신격화되었고, 종교의 힘을 빌려 초법적인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태어난 개인단위의 사람들은 독립하고 한 부족을 이루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고, 이런 일은 사람이 자기의 열정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신의 선택이 있어야만 되는 것으로 믿는 시대였습니다.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유대인의 전설을 인용하는 것이 무리일수도 있으나, 그의 아버지가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다른 신을 섬겼다고 말하는 여호수아 24:2의 말에서도 볼 수 있는 것 처럼, 데라와 아브람은 여호와의 종교를 가지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유대인의 전설에 따라 갖가지 신 형상을 가진 우상을 조각하여 판매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종교에 관한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 지도자로서 전문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의 역할이란? 당시 부족국가이면서 부족을 형성하는 장이 초월적인 존재인 신을 내세워 부족을 통치하는 일종의 소단위 국가 형태를 이루는 재정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소단위 부족들은 작은 부족에서부터 대단위 부족으로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는 종교의 우월을 그 역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부족이 다른 부족과 연합하여 함께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가 별도록 큰 세력을 형성하여 독립된 부족으로서 대단위 부족이 되기도하는가 하면, 다른 부족과 연합하여 또다른 세력을 형성하여 규합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족이 탄생하는 것은 큰 연합 단채에서 한작은 단채가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나, 어떤 사람이 부족의 장인 자기 아버지에게 속해 있다가 자신의 세력이 어느 정도 형성하면서 독립을 하거나, 한 부족에 종이나 노예로 있던 사람이 세력을 규합하여 독립된 부족을 형성하여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재정일치 사회에서의 부족의 장은 대 내외적으로 자기 부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기들을 지명한 신에 의한 선택을 받는 것이 중요했었습니다. 만약 이런 신의 선택에 관한 합리적인 스토리 같은 종교적인 지명이 없이는 결코 부족을 형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족을 형성하고 독립된 부족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을 선택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사람들이 독립하여 부족을 세울때 자기의 수호자 신을 지명하게 되는데, 이때 종교지도자인 전문가로 소위 우상을 파는 사람에게 가서 자기의 수호신과 관계된 우상을 구입하든지 아니면 종교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반 사람에게는 흔한 일이 아니었으나, 우상을 파는 데라에게는 늘 상 있는 흔한 일이었으며,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를 통해 이런 일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부족의 흥망 성쇄는 신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일이었고, 그가 선택한 그 신이 자기에게 복이나 화를 주는 것은 단순히 자기가 선택한 우상을 경배하는 종교 행위의 결과와 관계가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에 관하여 아브람은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을 통해 종교에 관한 내막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아브람은 당시 부족의 형성과 종교의 역할에 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환경을 통해 자신도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부족을 형성하고 싶은 욕구가 마음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대부분 부족 족장의 아들들 가운데 부족의 유산을 이어받지 못한 아들들의 몫이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소위 말하자면부족내의 수가 많아지거나 경제적인 부가 월등하여 아버지의 역량이 비대해져 큰 세력을 형성할수록 아들들의 역할은 클 수 밖에 없고, 여러 아들들간의 세력 다툼과 후계자 문제로 인한 암투같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아버지 품안에서 확장해가고 자기 사람들을 증가해가서 결국은 독립의 수순을 밟게 되는데 아브람에게도 그런 부담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로서의 부족을 세워 족장이 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꿈은 아니었지만, 아브람과 같은 위치에 있는 족장의 아들들에게 있는 욕구였습니다. 그것은 아브람이 아버지 집을 떠났을 때 단독자로 떠난 것이 아니라 조카 롯과 그를 따르는 종들이 함께 한 것이 독립을 항상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준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대를 이을 후손이 없었습니다.
후손이 없는 것은 독립에 대한 꿈을 갖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후손은 독립후 자기의 세상을 물려받는 중요한 유산에대한 보증입니다.
그런데 후손이 없는 것은 독립 자체에 대한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람이 자기의 욕구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자신감을 잃어가고, 나이는 많아 희망이 사라지고 있을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제 때가 되었으니 독립하라”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때까지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는 통해서 자기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으로 신의 존재와 그리고 필요성에 관해서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며,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려면 자기의 부족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개인의 성공이 부족을 이루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버지의 종교를 벗어나 새로운 종교를 가진다는 생각은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이런 생각을 쉽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의 전설에서 볼수 있는 것과 같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아버지와 다른 종교를 가지는데 있어서 사회적인 비난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아브람과 데라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개인의 종교 선택에 관하여 열린 지식을 가진 진보적인 생각 때문이었는데, 전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데라가 우상을 파는 장사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로부터 독립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부족의 족장들이 주장하는 절대적인 신적권위를 신으로부터 주어져야 하는 사건으로서의 신의 지명이 필요했었는데, 아브람에게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은 또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음성으로부터 "지금 독립하라"는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 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12:1-3)
아브람은 이 음성을 듣고 조카 롯과 함께 아비집을 떠났고, 아버지 데라는 자신이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신의 지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아브람의 말을 불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립하려는 아브람을 위해 소수의 노예들을 붙여 독립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했을 것입니다. 만약 아브람이 세간의 다른 부족과 같은 상태에서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면, 그는 부족으로부터 이탈자라는 낙인을 받게 될 것이고, 결국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전쟁을 해야하는 비극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에서는 아버지와 다른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데라와 아브람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폭넓은 종교 지식이 그들에게 미칠 갈등을 제거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로 부터 환송을 받으며 나왔고, 믿음이 조상으로서 첫발을 세상에 디뎠습니다. 조카 롯이 그의 종들과 함께했고, 아버지로부터 많은 종들을 받아 부족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내는데 결함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버지와는 다른 종교를 가졌기 때문에 자기만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가능한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 자기의 땅을 찾아가는 방랑자가 되어, 가나안 땅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지금 그가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은 명실공히 한 부족의 족장이 되었습니다.
그를 이끄는 절대적인 신은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여호와였고, 자기를 후방에서 지켜주며 어디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교성이 넒고 많은 부족들로부터 인지도를 가진 아버지의 후광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이 세상에 한 부족으로서 소단위 국가를 형성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부족장이 되었고, 명실 공히 모든 부족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부족관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며, 부족과 부족이 계약을 할 수 있는 위치로서의 권위를 가졌고, 서로 상대등한 관계에서 족장으로서의 지위를 얻었지만, 마땅이 거처할 땅을 소유하지 못하여 떠돌아다니는 양치는 목자의 무리와 같았습니다. 이런 결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부족의 족장들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하여 신뢰할만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의 땅은 모두 임자가 있고, 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브람이 자기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하고,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큰 군대를 가지고 힘을 길러야 했으며, 자기의 부를 축적하여야 했습니다.
세상에 자기 모습을 드러낸 아브람은 세상 속에서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고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었고, 그가 아버지로부터 나와 세상을 향하여 지팡이를 땅에 집고 설때, 아버지 품 안에서 볼 수 없었던 경계하는 눈초리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눈초리들 가운데는 이제 갖 태어나, 판단력이 흐리고 조직이 정비 되지 않은 핏덩이와 같은 어린 부족을 삼키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맹수들과 같은 눈들이 많았습니다. 부족으로 분리된 아브람에게 이런 느낌은 소름끼치는 두려움이었고, 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집안에서 잘 훈련된 군사를 길러야 했으며, 살벌한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과 자기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 잠시라도 방심을 허용하지 않은 위협에 대비하는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 갖 세상에 얼굴을 내민 아브람은 아직 세상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견고하게 장막을 치고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망대를 짓고 경계를 설수 있는 마음대로 울타리를 세울 수 있는 땅이 없었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힘이 없고, 연약한 불쌍하기 이를대 없는 작은 무리들로 보였습니다. 설령 터전을 가지고 울타리는 가진 자기의 영역 안에 거할 지라도 그 수가 아브람과 비등할 만한 작은 부족들이 있으나, 자기는 성과 같은 견고한 터전을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브람보다는 더욱 강하게 보였지만, 아브람은 이에 견줄 수 없는 초라한 무리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을 지배하는 부족이나 부족들의 대표가 되는 나라와 협상을 해야 했고 그곳에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약속을 받아야 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할 경우 그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갸야 하는 방랑자의 무리에 속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부족들이 아브람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여러 부족들이 아브람과 같이 자기의 영역을 차지하지 못해서 떠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족들 가운데는 강한 부족에 의지하며 붙여있을 수도 있고 여러 부족들이 동맹을 맺고 세력을 형성하며 부족을 유지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의해 독립한 아브람은 아무와도 연합을 맺지 않고 홀연 단신으로 세상에 하나님을 섬기는 부족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도 어떤 부족과 연합을 하였거나 아니면 아버지 데라와 종교적인 관계를 통해서 주위 여러 부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아브람 단신으로 부족을 이끌고 세상을 떠도는 무리였다면 생기자마자 사자와 같은 부족들의 밥이 되고 말았을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런 상태로 아브람은 가나안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아브람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그의 마음에 결정적인 힘이 되는 말씀이 되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미약합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는 지금 당장 자기의 영역을 주장할 수 있는 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땅을 주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이 아버지 데라에게서 독립을 선언하고 나올 때와 같이 그를 붙잡아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하였고, 때 마침 만난 기근으로 인해 점점더 남방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그 땅을 고집하고 그곳에서 땅을 차지하고 살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고 가정한다면, 가나안 땅 세겜은 아브람을 공격하였을 것이고,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 땅에 부족을 형성하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자기만의 생각을 가진 오류 같은 이야기들을 전개하는 말들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 이야기들에서는 아브람이 믿음이 없어서 가나안 세겜 땅을 떠나 남방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결국은 사랑하는 아내 사래를 빼앗길 수도 있는 위기를 만나게 되는 영혼의 핍절한 상태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말들입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 진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의 꾸며내기 좋아하는 어리석은 이야기들을 지어내, 성도들의 귀를 즐겁고 만족시키려는 인스탄트같은 이야기들을 쏟아내지만 이런 얄팍한 진리에 대한 해석들이 사람의 마음을 마비시켜 참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만난 진리에 의한다면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람이 생명을 걸고 지켜 갈 수 있는 시기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그는 그 말씀에 자신을 몽땅 던져 넣을 만한 의식적인 지성의 상태가 아니었고 그럴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만약 지금 이 땅을 자기에게 준다고 하셨다고 가정하면 아브람은 당장 세겜과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아직 그는 세겜과 대적할만한 세력을 가진 상태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으 이런 생각을 너무 세속적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충분히 아브람이 이길 수도 있고 가능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막무가네 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기게 하실 수도 있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세겜과의 어떤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충분히 경고를 해서 세겜이 스스로 위축되게 하시거나 아니면 수많은 경고들을 보내셨다는 어떤 이유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람에게 ‘이 땅을 너에게 주겠다. 차지하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의 후손에게 줄 것이다.’ 라고 미래의 희망으로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을 굳게 의지하고 말씀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맹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불합리하게 사람을 이끌고 가시지 않습니다. 막상 세겜과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다음은 어떻게 감당할 것입니까?
그것은 가나안 지역의 모든 부족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브라함을 대적할 것이고, 아브라함이 세겜을 점령한 것으로 정당하게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까지는 애굽에서 사백 삼십년 동안 세력을 형성해야만 했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한 필요적인 세력을 지녀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아이 같은 아브람에게 전쟁을 해서 세상과 적이 되어 순식간에 사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자기 자손에게 준다는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기근이 있었으며, 그 기근 때문에 그곳을 피한 불신앙을 드러내 영혼의 어두움에 빠진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상황과 환경에 따라 자기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길을 걷고, 그 땅을 자기의 자손에게 준다는 말씀을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겨둔 것이 분명합니다.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람의 영혼을 사로잡는 거부할 수 없는 순종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실지로 두 번째 말씀이 모레 상수리나무에서의 말씀은 아브람에게 믿음을 심어주시는 희망과 내일의 설계를 보여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가는 행위에 대해서 결코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결과를 놓고 판단하기 쉽니다. 그 결과는 애굽에 내려가서 아내를 빼앗기는 불행한 상황에 이르게 된것만 크게 확대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간 아브람에게서 믿음이 없다고 말하려면 그 이전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전제하였다고 보는데, 과연 전제된 믿음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것을 창세기 12장 1~3절에서 언급한 가족을 떠나 독립하라고 한 말씀에 순종한 것을 말하는가?
과연 그의 순종이 믿음에서 나온 행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하시자 그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 말씀의 능력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하였는가?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세속주의적입니다. 행 불행,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꼭 이런 관점으로만 사건을 직시하려고 합니다. 좀더 포괄적으로 사건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사건의 의미하는 진지한 의미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아브람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즉시 순종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순종을 믿음에 의한 반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과 같이 다른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사람들에게 이해되는데 도움이 되는 가장 쉬운 글로 기록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은 성경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성경을 그렇게 쉽게 단순히 기록되어 있는 문자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역사와 상황 배경으로부터 나온 지식의 말씀입니다. 이 지식은 사람의 경험이고 이 경험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사도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할 때에는 그의 지성에서 믿음에 관한 분명한 진리를 인식하고 언급을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믿음은 아직 타락한 상태에 존재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믿음은 사람의 지성이나 이해 또는 지적인 동의에서 비롯된 것, 즉 사람이 복음에 대한 감각을 갖고 그 복음을 자기의 지성에서 판단하여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을 가지고 지각된 지식을 마음에 반영하여 인식하고 느낌으로 동의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믿음을 가지고 대부분의 전도자들이 이런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 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지만, 성도들은 믿음을 ‘복음에 대한 자기이해를 통해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받아들이고 옳게 여기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또 하나의 다른 믿음을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 의존의 믿음입니다. 절대 의존의 믿음은 자기의 지성에서 생성한 자기 지식에 의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지식으로 새겨지는 성령의 조명에 의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신학적인 담론들이 함께 이끌어 들어와야만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그 담론들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량을 차지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겠습니다. 위에서 두가지 믿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전자는 ‘자기 이해를 통한 긍정적인 지적인 동의’를 말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기 지식화로 인식된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는 능동적 지식에 의한 믿음이고 후자는 수동적 지식에 의한 믿음 이라고 의미하는 것고 옳은 표현입니다. 능동적 지식은 자기 지성으로 생성한 지식을 의미하고 수동적 지식이란 주어진 지식을 의미랍니다.
전자를 아브람의 믿음에 대입하여 보자, 아브람은 데라의 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전자의 뜻에 따라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에 나타나 말씀하신 것은 우상을 섬기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떠나 독립하여 대대로 믿어온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선조 할아버지의 종교를 회복한다든지 아니면 죄악 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만을 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유일신 신앙의 시조가 되라고 한 것이라는 지적인 동의에 의해 이해고 믿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에 대비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대입해 보면 아브라함은 본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생성할 수 없는 타락한 사람입니다. 그의 지성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주셨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을때 성령의 조명에 의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개입하시는 조명에 의한 결과라고 믿지 않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진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조명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동일한 조건에 두 사람에게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한 사람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섬기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결코 복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역사적 사실에 관한 사건으로는 동의하지만 회개의 반응도 없고 믿음을 가지지도 않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한 사람에게는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성령이 전혀 역사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믿음은 전자의 반응이 아니라 후자의 반응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반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지식화 해서 말씀에 따랐으나 아직 그가 구체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포괄적인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후자의 믿음을 아브람에게 대입해 보아도 전자와 마찬가지로 아직 아브람이 절대적인 신앙인으로서 유일신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아직 절대 의존의 믿음을 가진 신앙과 일치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단 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지 주관적인 상태에서 아브람으로부터 믿음을 볼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이 바라본 아브람의 믿음은 과연 어떤 의미로 보고 있었는가?
아브람에게 나타난 믿음이 무엇인가? 과연 아브람에게 있어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아브람 당시 종교에서 믿음을 언급한다는 것은 모순이다.1)
사회적 구성을 이루고 있는 부족국가체제인 아브람 당시 종교에 있어서, 믿음이라는 개념이 있었으며, 종교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었느냐? 라는 질문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을 하시자 아브람은 위의 전자의 말에 따라 자기의 이성의 판단에 따라 이 말씀을 따를까, 말까, 하는 지적인 판단을 가지고 옳다고 판단하여 동의하는 그런 신앙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절대적인 인간의 타락을 인식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신앙지식에 의해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한다는 거부할 수없는 지적인 동의가 그로 하여금 독립을 하게 하였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려는 믿음이 아브람으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지만, 그 정체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충분히 설명한 것처럼 아브람에게 있어서 드러난 믿음을 진리로 보고 경험하기 까지 우리는 아브람의 경험을 성경을 통해 가져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이 경험을 위해 모든 조건을 아브람의 당시 상황으로 우리를 대입해 보는 것입니다.
각자가 아브람이 되고 데라의 아들이 되어 아버지 부족 중에 있으면서 족장인 아버지 데라의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의 아들로서 독립을 꿈꾸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으나 뒤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독립에 때한 열망을 가진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지금 독립하라고 하셨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심으로 한 부족 안에 두 개의 신이 간섭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신인 우상과 전능한 하나님의 신 여호와가 아브람과 데라에게 각각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람도 기대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필연적으로 분리 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이른 아브람의 독립에서는 아브람의 지적인 동의라든가 아니면 구속사적인 구원을 필요로 하는 믿음이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종교라는 특수 상황이 부족을 형성하게 하는 필수 조건을 만족시킴으로 아브람은 행동하는 순종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것은 종교적인 신념이 아니라 당시 부족장들에게 부여되는 거부할 수 없는 종교의 강림인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아버지와의 이별, 분리입니다.
창세기 14장에는 부족의 족장들을 왕이라 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3개부족인 소돔, 고모라, 비스마와 다른 3개부족인 아드마, 스보임, 벨라왕이 각기 연합하여 싸움을 하였는데, 이때 등장한 각 왕들은 부족임에도 불구하고 왕이라고 칭합니다. 이때 연합군들을 상태로 아브라함이 집에서 훈련된 군인들 308명을 데리고 가서 싸웠고 전리품을 빼앗아 왔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람이 부족의 족장으로써 자기가 거느린 군인이 308명을 제외한 여자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포함하면 약 600~700여명 정도의 대가족을 이끄는 족장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까지 아브람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은 종교적인 이상으로 존재하시는 초월적인 대상인 신이시고, 당시 시대적인 개념에 의해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세상을 지배하는 신들의 영역확장이나 부족을 선택하여 자기의 영역을 넓히거나 사람이나 한 부족을 선택하여 인간 세상에 드러내 보인다는 통념에 의해 여호와 신으로부터 자신이 선택을 받았다고 믿고. 그로 인하여 신의 호의에 의해 자신은 부족을 이룰 수 있고, 신은 자신에게 일방적인 계약을 맺은 다음 그 약속을 성취 되어지도록 성실을 요구하신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 여호와의 신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창조로 설화 같은 다양한 전승된 이야기들이 전래 되어오고 있었지만 그런 지식들이 여호와의 종교와 밀접하다는 지식을 정리하여 자기의 신앙으로 체계를 정리된 학문적 지식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종교에 관하여 식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라와 같은 사람은 여호와의 신으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신에 대해서 일반적인 종교의 개념으로 알고 있었을 것으로만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종교는 곧 부족의 절대적인 힘이며 운명입니다.
종교를 드러내는 신은 절대적이고 그 신은 자기부족의 신입니다.
각 부족마다 종교에 의해 부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종교가 부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질서의 중심이었고, 규칙과 법은 부족신의 대리인인 족장으로부터 나옵니다.
족장은 신의 대리인이자 신으로 자처 되었고, 족장의 말이 곧 신의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종교를 가진 아브람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의 신은 아브람에게 직접 말씀을 하셨고, 아브람은 그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과 다른 부족의 족장들에게 나타난 신과 족장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실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즉 아브람을 제외한 다른 종교들에게서는 신의 현현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족장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였고, 자기의 뜻을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부족원들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족장의 의지는 곧 신의 의지였고, 족장의 말은 신의 말인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사회의 관념이었습니다.
아브람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셔서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내용에 있어서 다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음이고 이 복음은 아브람에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받아진 것입니다. 이 명령의 특징은 거부할 수 있는 그런 명령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판단해서 부정한다거나 불순종하는 그런 명령이아니라, 하나님께서말씀하시자 아브람은 육체의 감각으로 들었고, 그 들은 말씀이 자기의 지식화 되어버린 하나님의 지식의 말씀으로 성령께서 말씀을 아브람의 영혼에 조명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것과 같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인식을 말합니다.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을 때, 당시 사회적인 통념에 의한다면 아브람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말씀을 신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만약 오늘 이 시대에 어떤 신(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이 사람에게 나타나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마 아직 어린 청년이었다면 어디든 자기가 기거할 셋집을 하나 얻고 직장을 잡아 일하면서 독립을 시작하든지 사업을 하는 것이 독립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까요?
이런 독립을 신으로부터 주어진 독립이라면 이것이 일반인에게 있는 보편적일 일과 무엇이 다릅니까? 누구나 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면 부모를 떠나 독립을 하는 것을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특별히 명령하셔서 독립을 하라고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 되지 않으므로 굳이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시대 아브람에게는 다릅니다. 당시 사회적 통념에 의한 환경에서 신이 나타나 가족으로부터 독립하라고 하는 것은 재정일치 사회에서 신이 대리인을 세워 한 부족국가를 세워가시는 신의 간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문화 사상과 당시의 문화 사상은 다릅니다.
사람의 생각이 다른 환경에 하나님은 강림하셔서 사람에게 나타나시고, 선택하셨으며, 지시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곧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의 의지가 사람에게 나타났을 때, 사람은 오늘날 자칭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이 신앙과 불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사람에게 전도를 받아 자칭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에 출석하거나 혹은 사명을 받아 전도자나 선교사가 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신앙인으로서의 가치관을 묻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아브람을 보는 것은 명백히 진리를 접근하는 자세에 있어서 오류입니다. 기독교도 없었고, 종교를 전파하여 자기 집단을 확장해가는 그런 사회도 아니고, 자기종교를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전도를 통해서 자기의 세력을 확장해가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전도라는 개념 자체가 당시에는 통용되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에게서 신앙 인격이나,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의 회개된 인격을 살펴보려는 시도는 아브람을 통하여 믿음을 보려는 태도에서 진리를 접근하는 신학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인격에서 신적의지라는 말은 아버지 데라에게서 간접적으로 듣고 배우고 알게 된 종교적인 통념일 뿐이고, 이 통념에 따라 신의 말씀은 절대적이고, 인간이 어떤 의지로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말씀이라는 권위를 두는 사상이 사회 통념에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리를 깨달은 신학자와 같은 신앙을 논하는 당시 사회와 전혀 구별된 신앙인으로 볼 수 없습니다. 또한 그가 회개하거나 혹은 유일 신관을 가진 신학적인 사상으로 접근할 수 없으며, 아무런 거부를 할 수 없는, 종교적인 식견에 따라 자기가 아버지 데라에게 듣고 배운 바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아버지 데라가 아브람에게 종교적인 제의의 기술이나 혹은 종교의 의미를 가르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독자들은 부자지간의 관계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의미를 붙이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었다면 내용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큰 실수들을 저지르면서 불성실한 신학자의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일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그들의 부자지간의 종교에 관한 의미들을 말하지 않는가?
당시 사회는 재정일치의 부족사회를 구성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는 부족을 구성하는 절대적인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데라가 자기의 종교를 중심으로 부족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모든 행위와 제의적인 형식, 그리고 신과의 관계에 관한 실질적인 의식들을 아브람이 가장 가까이서 목격해 왔고, 그런 아버지의 행위들을 통해 자기 안에 종교적 의식들이 기억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이 독립한 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신과의 관계를 가질 때마다 절대적으로 순종해야하는 순종적인 자세를 갖추어진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자의적 판단으로 극복하고 이겨나갈 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다른 의미를 참고하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일방적인 신의 선택에 의한 관계가 설정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 자기의 의지를 힘입어 믿을까 말까하는 갈등하고 생각하고, 내가 좋은 것이라고 판단되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거절 할 수 있는 그런 의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과 그의 부족을 선택하고 그와 함께할 여호와신은 자기의 절대적인 의지로 아브람을 이끌고 가셔서 나라를 세우고, 민족을 강성하게하고, 백성들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며, 사람의 순종 여부에 따라 나라의 흥망 성쇄 여부를 결정하는 절대 왕으로서 아브람위에 머물러 계십니다. 여호와의 신이 아브람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뜻이지 아브람이 신을 찾아 택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지로 당시의 모든 부족들이나 나라들이 의지하는 종교의 대상인 신은 아브람이 만난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이었고, 그들의 신은 Herman Bavinck가 말한바와 같이 가상적 계시에 의존한 것입니다.1) 가상적 계시는 사람이 자의적으로나 혹은 비 경험적 사실을 사실화한 사고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통념화 되어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거나 현대의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다양한 신들이 존재한 당시의 시대에서 아브람을 재외한 모든 종교의 대상들인 신들은 실지로 존재하지 않은 가상적인 신들이었으며, 이런 신들은 인간의 영혼의 지성에서 만들어진 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족의 시조들로부터 전통적으로 후대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이렇게 받아들여진 신의 개념은 사회에 신으로 알려졌으며, 또 다른 사람들이 이미 알려진 신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자기들의 종교의 대상으로 절대화하고 자기가 선택한 신에 의해 절대적인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여, 신이라고 인정을 받고 있었으나 실상 이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든 신들은 사람들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주셨습니다. 백성들은 이 계명을 절대적으로 지키기로 약속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친수로 새기신 것입니다. 1계명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내게 두지 말라” 라고 하셨고, 이 말씀 가운데 다른 신이라 칭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기울어집니다.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의 지성은 타락한 속성을 발휘하여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왜곡하는 지를 신속하게 드러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재외 한 다른 신들의 정체를 인정하고 계신다는 의미로 1계명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결국 하나님을 재외한 다른 신들도 존재하지만 너희는 ‘그 신들을 내게 두지 말라’라는 의미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 제 2계명의 의미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신으로서 받들어 섬겨야하는 눈에 보이는 존재를 신의 형상화하여 숭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영혼의 지성의 산물입니다. 실지로 다른 신이라든가, 우상은 실재 존재하는 신들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으로 생성해낸 것이고, 이 지식은 최초 사람 아담이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하나님을 섬겼던 경험적 관념에 의해 신이나 혹은 신과 관계된 지식이나 언어에 함축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타락한 사람 영혼의 지성에서 육체의 오감으로나 혹은 지성의 작용에 의해 반영된 표상에 대하여 이미 있는 지식이 무지와 결함이 함께 조명하여 그대로 무지와 결함을 가진 지식을 생성하는 것처럼, 이미 있었던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이 지식에 함의되어 가상적인 신이나 신으로 여겨지는 지식을 표상으로 반영함으로 무지와 결함이 함의된 신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게 된다. 영혼의 지성은 이런 식으로 무수히 많은 다양한 신을 생성할 수 있고, 이렇게 새성된 신이 사람의 언어로 말하여짐으로 신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당시에 수많은 부족을 이끌고 있는 각 부족의 신들은 한결 같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만들어진 신이십니다. 이런 신이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마치 영혼이 없는 우상에게 마치 영혼이 있는 것으로 여겨주고 그에게 권위를 부여하여 그 권위를 빌어 자기의 권위를 행사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에게 나타난 신은 만신과 완전히 구별된 신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가 이전에 알았던 그런 신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신이 자기에게 말을 하고 약속을 하고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한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움직이는 곳마다 나타나는 하나님을 향한 구체적인 신뢰가 동시에 마음에 느껴져 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4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믿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 데라에게서 부터 독립할 때 다른 부족장들이 행한 것처럼 자기의 권위에서 종교를 상상해 내고 어떤 우상을 자기의 신으로 점지하여 섬기고 그 신의 대리인으로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당시 상황을 분석할 때, 기존의 부족장들이 가진 종교적 개념과, 아브라함이 가진 개념은 전혀 달랐다. 일반적으로 기존의 부족장들과 나라들이 가진 종교는 자의적 감정으로부터 신을 선택한 것인 반면, 아브라함은 초자연적으로 자기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아브람을 선택함으로 종교가 주어진 것으로 철저히 수동적입니다.
타락한 인류가운데 아브람에게 나타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아브람으로 하여금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며, 아브람이 가는 곳마다 위기에서 건지시며 함께하시는 역사를 드러내시고,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계시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아브람은 점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지만 지극히 일부분만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구제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상태로 베푸신 은혜아래 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일반 부족장들에게서는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일반 부족장들의 신들은 자기의 감정에서 지식으로 형성하여 만들어낸 신에 의해 자의적 감정으로부터 신적의지들을 내세워 부족단체를 이끌고 가지만, 아브라함에게는 가상이 아닌 실제 하나님의 음성이 육체의 감성으로 감각된 실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하는 신과의 교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기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신적의지에 사로잡힌 상태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른 부족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는 다신론적인 사상을 가지지 않았다고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부족의 족장들이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주관적 종교들에게서도 아브람이 경험한 하나님과의 실재적인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겜 땅에서 말씀하신 후손에게 약속한 땅에 대한 말씀에 대해서는 아브람에게 혼란스런 상태를 주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의 세겜땅은 가나안 부족가운데 한 신의 영역인데 그 땅을 후손에게 주신다는 약속을 전쟁을 하게한다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성경해석자들은 성경의 내용을 지극히 여자적인 의미에서 해석자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해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자세는 성경으로부터 결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것이고, 해석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배경인물과 당시의 시대적인 사상, 또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사상을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그래서 모레 상수리 나무아래인 가나안 땅 세겜은 가나안 여러부족 가운데 한 부족의 영역이며 이 지역을 관할하는 신의 영역인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역의 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아브람에게는 약속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 땅을 자기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후손에게 주겠다는 약속은 현실적이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아브라함이 아무런 노력을 한 것도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한 상태였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으며, 그를 이끌어 한민족을 만드시는 일을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여러번 말씀을 들었으며, 여행의 로정에서 다양한 역사들을 경험하였고, 애굽이나 아비멜렉에게서 자기의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기적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자기의 수호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으며, 자기에게 나타나 자기와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이어오면서 아브라함이 마음에 확신한 한 가지 사실은 자기에게 나타난 신이 자기를 통하여 한민족을 만들고 자기 부족을 흥황하게 하신다는 약속을 받아들이고, 실지로 그렇게 일을 해 가신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에 관한 기록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지극히 평범한 삶 보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역사하시는 일에 대해 더 관심이 있습니다. 지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한 일상의 삶은 대부분 인간의 타락상밖에 보일 수 없으나 하나님을 만나 드러내주는 계시적인 사건들에게서는 타락한 사람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하나님에 대하여, 이 두 지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는 본유 지식에 있었던 것인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하였고,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없고, 아브람도 마찬가지이며, 그는 우상을 섬기는 데라의 후손이었으니 하나님보다는 우상에 관한 지식이 더 많았고,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우상으로 이해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점진적으로 지식을 가졌습니다. 처음 만나자 마자 하나님에 관하여 포괄적인 지식을 가짐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최초에 들은 말씀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임하자마자 아브람은 신속하게 아버지 데라의 집을 떠나 방랑의 길을 나섰습니다. 성경을 이를 아브람이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에 기업을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이미 오래전부터 아버지 데라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게 하고 그리고 기회가 그에게 왔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회란?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하여 추구하는 바를 이루려는 결정적인 조건이 주어지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기회는 어떤 조건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독립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꾸준히 준비 해왔고 아버지 데라는 독립을 준비하고 있는 아브람의 행동을 알고 눈치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의 독립을 위한 갈망은 아버지 데라에게 함께 있을 수 없는 여러 가지의 조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의봇동생을 아내로 맞은 것이 계기가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브람은 한 형제간인 의붓동생 사래를 아내로 맞이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당시 사회의 통념으로 볼 때 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이는 흔히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며, 그럴 지라도 아버지 데라에게나 어머니에게 있어서 두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내심의 갈등등이 작용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사람이 되게 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나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아브람이 가진 어떤 이유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기본 조건이 충족 되어야 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 구성원이 형성되어진 부족 단체로서의 조건이 구비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록 아버지 품안에 있으나 아버지와 구별된 자기의 중심의 구별된 부족단위가 갖추어져 야 합니다. 둘째는 당시 재정일치 사회의 통념에 의해 필수적인 종교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아브람이 숭배하는 종교이고 아브람이 신의 대리인이 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자기가 받들 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직 이 조건을 충족할 만한 신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자기의 독립된 울타리를 가진 영역으로서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자기가 섬길 신을 선택하지 못하였고, 자기의 울타리를 가질 영역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셔서 나타나시고 명령하시기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에게 있어서 노력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독립을 위한 한가지 조건을 만족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신과의 만남과 명령을 받은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아브람을 택하여 그를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신과의 만남과 신으로부터의 명령을 받은 아브람은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사실들이 자기의 의지보다는 신의 절대적인 간섭이 함께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실에 아버지 데라에게 독립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을 것이고, 아브람의 이야기를 들은 데라는 아브람의 뜻에 동의하고 독립하도록 여러 몸종들과 그리고 당분간 생활 할 수 있는 아브람의 몫인 물질들을 제공함으로 힘을 보태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브람이 그토록 신속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으며, 게다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누구인지 자기가 우상의 더미 속에서 어떤 우상을 모셔와야 하는지 조차도 생각지 않고 가신들을 이끌고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은 자기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랐다고 보는 것입니다.
현대의 시각에서 아브라함의 당시 상황을 해석할 때, 기존의 부족장들이 가진 종교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초자연적인 사건에 의해 종교를 얻은 것입니다. 일반적인 부족장들의 종교는 자의적인 반면 아브라함은 수동적이라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드러난 수동적인 종교는 아브라함이 그것을 받기를 노력하거나 요구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다가오신 것으로 타락한 인류에게 베푸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들은 자기의 감정에서 솟아난 자의적으로 비롯되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영혼의 지성이 종교의 대상이 되는 신을 생성하여 형상화하고, 그를 신격화 할 수 있는 존재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게 하고는 그 지각된 지식을 사람의 마음에 뿌려 의지로 신을 경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지성이 특별한 자기의 종교를 지식으로 생성하여 조직화하고 그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지식을 생성하여 마음과 육체로 행동하게 하는 결과를 맺도록 함으로써 신은 조직되어집니다. 이렇게 조직되어진 신들은 사람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으로 지어진 신들로써 심지의 불교나 사머니즘, 기독교에서 왜곡된 모든 신들의 종교가 지성의 산물인 지식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을 재외한 모든 일반적인 부족장들이나 나라의 종교는 그들이 주장하는 신들이 자신들에게 어떤 말도 발한 적이 없고. 숨을 쉬거나 눈빛을 준 적이 없으며,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않지만 종교적 숭배의 대상인 신의 대리인이라 칭하는 부족의 장의 지성에서 모든 규례와 법도가 나오고 사람은 그것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 종교가 초월적으로 사람위에서 사람을 지배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에게는 가상이 아닌 실제 신의 음성이 아브람의 육체 감성에 감각되었으며, 분명하고 또렸한 음성을 통해 자기만 경험하는 신과의 교통을 가졌고, 초월적 존재의 말씀에 의해 자기의 의지를 주장할 수 없는 사로잡힌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종교적인 경험은 오직 아브람만 하였으나 이런 일들이 보편적으로 모든 부족장들의 종교에 있었다고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생각하고 있는 종교는 다양한 신들가운데 한신이 자기를 선택하고 자기에게 다가와서 명령하신 것으로 믿었고, 자기에게 드러난 종교적인 의미가 현대 신학에서 생각하는 유일 신관으로 말미암아 다른 부족의 신들은 모두 허위라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신관의 종교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족의 종교에서도 자기에게 일어난 신과의 교제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라고 받아들였을 것은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유일신관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기를 선택한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진 아주 일반적인 사고에서의 신뢰를 보여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아브라함이 어떤 노력을 한 것도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한 상태였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으며, 그를 이끌어 한민족을 만드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아브라함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휼륭한 신앙의 모습을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보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러 번 만나 말씀을 들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들을 경험하였고, 애굽이나 아비멜렉에게서 자기의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기적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자기를 만나주시고 이끌고 계시는 수호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점점 더 깊은 관계 속으로 이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자기에게 나타나 자기와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에 관한 많은 묵상을 통해 알려고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이어오면서 마음에 확신한 한 가지 사실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자기를 통하여 한민족을 만들고 자기부족을 흥황하게 하신다는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일을 해 가신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삶속에서 필연적인 평범한 삶 이상의 또 하나의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기로 말미암아 이루어가는 신 의지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신 의지는 철저히 자기의 평범한 삶이 아닌 또 다른 목표와 관계가 되어 있는 신 의지에 묶여 있다고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그래서 아브라함은 스스로 자신은 일반 다른 사람들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만나 자신으로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자기의 목적을 성취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포함시켜 하나님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도록 묶여진 삶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한 것은 실지로 아브라함에 꿈을 가지고 부족의 족장이 되려하는 마음이 있었을 지라도 자기의 의지대로 될 수 없는 그 일들을 자기에게 나타나 명하시고 언약을 주시고 자기로 하여금 순종하여 행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지를 꺾은 절대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게다가 후손에 관하여 분명히 자기를 중심으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번성케 하고, 후손에게 정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들은 족장인 아브라함을 더욱 자기의 귀에 들려온 신의 말씀에 사로잡히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아주 구체적이었고 필요 적절한 환경과 시기에 나타나 말씀하셔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더욱 확신을 더하여 그 언약과 말씀중심 사상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 말씀하신 독립 명령과 세겜에서 언약은 단순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한 두 마디 말씀을 주신 이상이 아닙니다. 실지로 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인 하여 더욱 힘들고 해결할 수 없는 다양한 환경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지만 그의 가는 길이 자기가 의도한 길이었고 이 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아주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과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버렸고, 이스마엘을 버리고 이삭을 모리아산에 바치는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행한 절대의존의 순종으로 말미암았으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말씀에 사로잡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에 매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고 있으나 가장 명료하게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믿음의 정체에 관하여 잘 설명하였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노라”(고전 2:4),
이 말씀은 믿음의 근원을 두 가지로 구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지혜에 있는 믿음이고 다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믿음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사람에게 나타난 믿음에 관한 모습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에 기록하고 있는 믿음은 대부분 은사의 의미로 기록하였고,2) 약 6개월 후쯤 마게도냐를 향하여 가는 길에서 기록한 로마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믿음을 들음에서 난다고 분명히 말하고, 바울시대인 신약시대는 아브람의 시대와 많은 사회적 환경이 다르게 보입니다. 아브람 시대에는 소수의 부족이 연합하여 국가를 이루는 형태이지만 바울 시대에는 국가의 형태가 부족 중심이 아니라 국가 중심의 대규모화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역할은 아브람 시대와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개인적인 인식활동이 부족의 족장에게 부여된 종교와는 전혀 다른 상태에 놓여 있었고 믿음의 새로운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이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에 관하여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노라”(고전 2:4),
바울은 믿음의 근원을 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지혜에 있는 믿음이고 다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사람에게 나타난 믿음에 관한 모습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에 기록하고 있는 믿음은 대부분 은사의 의미로 기록하였고,1) 약 6개월 후쯤 마게도냐를 향하여 가는 길에서 기록한 로마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믿음을 들음에서 나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장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을 다같이 아브람의 믿음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믿음의 역사를 열어가는 새 시대를 선포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주 요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부름을 받기 이전에는 이방인들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나 이방인이나 다름이 없는 아담의 한 후손이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그에게나타나셨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믿음이라는 기본적인 지식조차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충분히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약속을 주시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아브람에게서 실행시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지켜 보호해 주셨고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그에게 대를 이을 약속의 아들과 민족을 이루고 거할 땅을 약속하시며, 그 땅은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시며, 백세가 되어 이삭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 자기를 통해 일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확실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의 지적인 동의가 이해하는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아브람일 때 절대적인 순종을 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에 점차적으로 약속하시며 자기를 통해 한 부족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까지 많은 관계를 통한 약속과 대화를 하므로 아브람이 자기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쌓아간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이 드러나지만, 이 드러나는 믿음을 아브람이 주관적으로 내가 믿는다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지로 성경에서 볼때 아브람에게는 믿음이 전혀 지닌 상태가 아니었으나 믿음이 드러나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람에게는 믿음이 없었으나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취해온 믿음에 대해서
이제 전통적으로 교회가 취해온 믿음에 관하여 이야기 할 차례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의 것이 아니었고 실지로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진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는 자기의 삶을 충실히 살았고 야망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삶에서 아브라함이 알지 못한 한 가지가 밝게 드러나는데 그것이 믿음이었고, 결과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사상은 신자가 자기에게는 인식되지 않지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이른 신자의 모습에서 믿음이 객관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1]
이 믿음은 아브라함이 자기가 알지 못한 상태의 결과가 나타났으나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신자들에게 있어서 믿음도 복음에 사로잡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복음의 사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 안에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믿음을 가진 진정한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복음의 말씀에 사로 잡혀 거부할 수 없는 순종의 삶을 사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려면 거부할 수 없는 복음에 사로잡혀야 하는데 그것이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날에도 아주 많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심겨진 사람입니다. 이 말씀이 심겨짐으로 인해 그의 영혼에서 일어난 변화는 그동안 자기 지식에 의해 지각을 갖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인식이 가능한 지각을 갖게 되는 기적적인 사건에 의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본래 사람에게는 믿음이 없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안에서 믿음은 지적인 동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소위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동의를 의미합니다.
신앙은이와 같이 왜곡된 인간중심의 신앙을 조장하여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지식을 버리고 거부할 수 없는 복음에 사로 잡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렘 24:7 “내가 여호와인줄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렘 31:33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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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레미야 24:7“그들에게 세로운 마음과 새 영을 주실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실 것이라”, 렘33:31 “내가 여호와인줄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32:39~40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겔 11:19~20, 36:26~27 “또 새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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